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 (24) 제4공화국 : 박정희정부(1972년 10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본문
대한민국 (24) 제4공화국 : 박정희정부(1972년 10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대야발 2025. 6. 19. 15:26

1973년 도쿄 치요다구 소재 그랜드 팔레스 호텔 가장 위층인 2212호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본 정치인과 약속을 위해 나서던 김대중을 한국인 괴한 5명이 납치했다. 이 호텔은 일왕궁 옆 도쿄의 한복판에 위치했다. 이 곳에서 납치가 이뤄진 것이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유신 선포로 망명을 결심하고 일본에서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를 위협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장한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중정이 나서서 그를 납치하고 죽이려했다.
■ "도와달라, 살인자다"…김대중 납치사건 일본경찰 수사기록 공개
日경찰 "비밀 해제된게 아니라 국회 답변 및 추가 조사 토대 공개 부분 늘려"

1973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발생한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에 관한 일본 경찰 수사 기록이 추가로 공개됐다.
이 자료에는 납치범으로 주일 한국대사관 1등서기관이 특정된 경위와 김 전 대통령의 진술 등이 담겨 있다.
아사히신문은 올해로 사건 발생 50년을 맞아 정보공개 청구로 일본 경찰 관련 자료를 입수해 25일 공개했다.
'김대중 씨 납치사건 관계(수사상황)'라는 제목이 달린 13쪽 분량의 이 문서는 일본 경찰청 외사과가 김 대통령 취임 직전인 1998년 2월 2일 자로 작성했다.
'비(秘)(무기한)·사용 후 폐기'라는 도장이 찍힌 이 문서에는 납치 실행범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파견 요원인 김동운 주일 한국대사관 1등서기관의 특정 경위가 담겨 있다.
1973년 8월 8일 야당 지도자로서 반유신 활동을 전개하던 김 전 대통령은 도쿄의 그랜드팰리스호텔 22층 방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납치당했다가 닷새 뒤인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 인근에서 풀려났다.
문서에 따르면 납치 사건을 목격한 이 호텔 투숙객은 경찰에 "호텔 3층에서 위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를 두 명이 탔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1명의 남성이 '도와달라, 살인자'라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진술했다.
또 경찰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는 "5명의 일행 중 김동운이 있다"는 취지의 증언도 했다.
현장에 범인이 남긴 배낭에 대한 수사 결과도 기재돼 있다.
배낭 판매처를 등산용품 제조판매회사로 특정해 수사한 결과 사건 이틀 전 2명의 남자에게 배낭 3개를 판매한 것으로 확인됐다. 점원은 경찰이 제시한 사진을 보고 "구매자 2명 가운데 한 명이 김동운을 닮았다"고 증언했다.

일본 경찰이 김 전 대통령이 납치된 뒤 끌려간 곳에 대한 수사 상황도 실려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일본 경찰에 보낸 진술에서 "고속도로에서 길을 물어본 뒤 한 시간 달려 '안의 집'에 가자고 했다. 다다미방으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일본 경찰은 이 진술을 토대로 끌려간 곳으로 추정되는 간사이 지역 아지트와 관련해 "안씨 성과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아파트 등을 수사했지만 특정하지는 못했다"고 적었다.
'김동운에 대한 출두 요청 현황'이라고 적힌 문서에서는 사건 발생 다음 달인 1973년 9월 일본 경찰청이 외무성에 김 서기관을 직접 조사하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한국 측에서 응하지 않겠다고 회답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일본 경찰청은 이번 정보 공개와 관련해 비밀에서 해제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국회 답변과 그 이후 조사 결과 등을 토대로 공개 부분을 늘렸다"고 설명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는 2007년 10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해 실행됐으며 사건 발생 이후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진상을 은폐하려 했다는 최종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1)
■ '자승자박' 박정희정권 옭아맨 김대중 납치사건[그해 오늘]
국내 정치는 물론 국제적 입지도 축소
1973년 8월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백주대낮인 오후 1시에 재야 정치인 김대중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정)에 납치됐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던 야권 정치인을 향한, 명백한 대한민국 정부의 테러였다.

도쿄 치요다구 소재 그랜드 팔레스 호텔 가장 위층인 2212호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본 정치인과 약속을 위해 나서던 김대중을 한국인 괴한 5명이 납치했다. 이 호텔은 일왕궁 옆 도쿄의 한복판에 위치했다. 이 곳에서 납치가 이뤄진 것이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유신 선포로 망명을 결심하고 일본에서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를 위협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장한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중정이 나서서 그를 납치하고 죽이려했다.
납치된 김대중은 공작선 용금호에 태워져 먼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간과한 게 있었다. 김대중의 위치를 미국 CIA가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한해협에 있던 김대중을 미상의 비행기가 찾아냈고 납치 129시간 만에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풀려났다.
워낙 국제적 지탄을 받은 사안이고 이해관계가 엇갈려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다. 용금호를 찾아낸 비행기의 국적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 모두 부인하고 있다.
무엇보다 납치를 지시한 상부가 어디인지조차 엇갈린다.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는 물론이고 중정 부장이었던 이후락도 명확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 이후락은 박정희의 지시를 암시했다가 추후 말을 바꿨다. 다만 중정이 깊숙하게 관여했던 것은 확실하다.
살인 미수에 그친 납치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안팎에서 지탄의 대상이 됐다. 대학을 중심으로 유신반대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고 종교인들도 개헌 청원에 나서는 등 반발이 거세졌다.
국제적 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당장 일본부터 주권 침해를 당했다는 여론이 거세지며 한일관계가 악화했다. 북한도 남북 대화 중단을 선언했고 미국 역시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에 가담한 김기완 전 주일대사는 훗날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하는 성김의 부친이다.
김대중은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후에 “박 대통령이 지금 하고 있는 정치, 이래가지고는 절대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강력히 가지고 있다”면서도 “박 대통령을 포함해서 어떤 개인에 대해서도 내가 개인적인 원한이라던가 어떤 복수심은 영원히 갖지 않겠다”고 밝혔다.(2)
■ [단독] 'DJ 납치' 녹취 입수…"암살 음모 있다" 사전 경고
MBC 뉴스 신수아 (영상취재: 이지호/영상편집: 배윤섭)
1973년 8월13일, 일본에서 중앙 정보부 요원들 에게 납치돼 수장될 위기에 처했던 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 왔습니다.
내일이면 만 47년이 되는데요, 그런데 당시 김대중 역시 납치 시도가 있을 거라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사료가 처음 공개 됐습니다.
누군가가 편지를 보내서 테러 정황을 비밀스레 경고해 준건데, 신수아 기자가 당시 편지와 녹취를 단독 입수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발표로 해외 망명을 시작하게 된 야당 지도자 김대중.
미국에 머물고 있던 1973년 5월 5일 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편지였습니다.
거기엔 "최근 정확한 소식에 의하면 선생님을 암살하려는 테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제보자는 그러면서 "이를 폭로하고 여론을 환기시켜 그들이 손을 대지 못하도록 대처하라"고 조언합니다.
열흘 뒤 이희호 여사가 인편으로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도 중앙정보부의 위협을 조심하라는 우려가 담겨있었습니다.
두 달 뒤인 1973년 7월 6일, 뉴욕에서 열린 반유신 투쟁단체 미국본부 창립행사에서 김대중은 이런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저는 이번에 일본 가는데 일본 가면 또 여기보다도 훨씬 더 험악한 분위기입니다.
47년 만에 처음 공개된 육성에는, 해외 반유신 운동 확산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비장함이 녹아 있습니다.
"들리는 바에는 박 정권에서 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무슨 수를 쓰기 위해서 일본에 무슨 일을 하고 있단 얘기도 듣고 있고… 저도 여러 가지 조심은 해서 가지만 그렇다 해서 제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제가 잠시동안 다녀오겠습니다.”
건너간 지 한 달이 지난 73년 8월 8일, 우려는 현실이 됐습니다.
[김대중/1993년 일본 NHK 인터뷰]
"오른쪽 팔목, 왼쪽 발목에 각기 한 30~40kg 물체가 달려있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물에 나를 던지나 보다 했는데…"
미국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김대중은 납치 129시간 만인 1973년 8월 13일,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훗날 2007년이 되어서야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납치 테러를 주도했다는 사실이 공식 확인됐습니다.
납치 직전,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낸 얼굴 없는 제보자가 누구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정보기관 관계자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장신기/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박사]
"상당히 극소수 사람들만 알고 있던 비밀공작인데 그것이 새나갔단 얘긴즉슨 이걸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일종의 내부 고발자가 있었다'라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김대중은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갔던 정적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격으로 숨진 1974년 8월 15일 일기에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육영수 여사의 서거는 참으로 충격적"이라며 "테러는 민주주의의 적"으로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민주주의는 평화적 원칙으로 해결되어야 한다."(3)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31225165909318
(2) https://v.daum.net/v/20220808000316310
(3) https://imnews.imbc.com/replay/2020/nwdesk/article/5872160_32524.html
<참고자료>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8C%80%EC%A4%91_%EB%82%A9%EC%B9%98_%EC%82%AC%EA%B1%B4
https://namu.wiki/w/%EA%B9%80%EB%8C%80%EC%A4%91%20%EB%82%A9%EC%B9%98%20%EC%82%AC%EA%B1%B4
https://v.daum.net/v/20250428183017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