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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학술원 회원인 원로 사회사학자 신용하(81) 서울대 명예교수가 '고조선문명의 사회사'(지식산업사)를 펴냈다. 신 교수가 2000년대 들어 집중적으로 탐구해 온 고조선 연구 3부작의 마지막 저서다. 그는 고조선을 국가와 민족의 관점에서 각각 조명한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2010년),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 연구'(2017년)를 출간한 바 있다. ■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앞섰다"신용하 서울대 명예교..

일본강점기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중국의 동북 3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발해, 고려 등의 터전이었고, 항일독립운동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곳곳에는 한민족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근 만주 일대에서는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만주에서 펼쳐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복속하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자칫 웅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가 증발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 [한민족의 시원, 만주] 대한민국 청년에게 고함 (1) 한민족의 광활한 뿌리, 고려에서 맥 끊겨법륜 스님, 정리/박종찬기자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10-01-1..

정인보(1893년(고종 30)~미상)는 해방 이후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등을 저술한 학자.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정경시(鄭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 · 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 · 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정인보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안확(1886년(고종 23)~1946년)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 신천지 편집인 등을 역임하였고, 『조선문학사』 등을 저술하며 국어학, 국문학, 아악 등을 연구한 국학자 · 독립운동가. 호는 자산(自山). 운문생(雲門生)이란 필명과 팔대수(八大搜)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우대마을(서울 성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 지역, 곧 인왕산과 가까운 지역)의 안씨(安氏)집안 태생으로 중인 출신이다. 1895년 서울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교육받고, 1896년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개최할 때 그 모임에 참여하여 연설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소학교를 마친 뒤 당시 유행하던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며 사상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특히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西遊見聞)』과..

신경준(1712년(숙종 38)~1781년(정조 5))은 조선 후기에, 정언, 장령, 현감, 종부시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운해훈민정음』 등을 저술한 문신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말주(末舟)의 10대손인 진사 내(淶)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의홍(儀鴻)의 딸이다. 33세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33세부터 43세까지 고향에서 은거하며 저술에 몰두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운해훈민정음(韻解訓民正音)』(세칭 훈민정음운해)을 꼽을 수 있다. 43세 되던 1754년(영조 30) 비로소 향시에 합격했는데 당시의 시험관은 홍양호(洪良浩)였다. 그 해 여름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상경 후 홍양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과거합..

유형원은 조선후기 『반계수록』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이다. 1622년(광해군 14)에 태어나 1673년(현종 14)에 사망했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32세 이후 전라도 부안에 은거하다가 사망했다. 이때 체험한 농촌생활을 토대로 경세제민의 정책론인 『반계수록』을 저술했다. 이 책은 100년 뒤 영조의 칭찬을 받고 간행되었다. 그의 개혁 의지와 사상은 당시 재야 지식인의 이상론이 되었고, 그의 학문은 실학을 학문으로 자리잡게 하는 단초가 되었다. 그외 다방면의 저작이 있었다고 하나 목록만 전해진다. 서울 출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9세손이다. 현령 유위(柳湋)의 증손자이고, 할아버지는 정..

한백겸(1552년(명종 7)~1615년(광해군 7))은 조선 후기에, 호조참의, 강원도안무사, 파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정선군수 한승원(韓承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천군수(文川郡守)한여필(韓汝弼)이고, 아버지는 판관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鄭逑)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선릉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재직중 병으로 사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자살..
안정복은 조선후기 「치통도」·「동사강목」·「천학문답」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12년(숙종 38)에 태어나 1791년(정조 15)에 사망했다. 어려운 초년을 보내며 독학으로 유교 경전과 병서·불교·노자·소설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독서했고 역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35세에 이익의 문인이 되면서 학문이 더욱 깊어졌고 실학적 경세론을 펴기도 했다. 1772년에 세자익위사 관원으로 세손의 교육을 맡은 인연으로 정조 집권 후 지방관으로 나가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기는 기회도 가졌다. 천주교가 사회문제가 되자 철저히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조선 후기에,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서인 『동사강목』을 저술하였으며,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천주교 배척에 앞장선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

한치윤은 조선후기 『해동역사』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65년(영조 41)에 태어나 1814년(순조 14)에 사망했다. 1789년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남인으로 출세하기 어려웠기에 문과에 응시하지 않았다. 1799년 서장관으로 파견된 한치응을 수행하여 북경에 다녀왔다. 말년에 한국사 서술에 몰두하여 70여 권에 이르는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김정희, 홍명주, 심영석 등과 교유하였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여 색다른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대연(大淵), 호는 옥유당(玉蕤堂).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헌납(獻納) 한덕량(韓德良)이고, 아버지는 통덕랑 한원도(韓元道)이며, 어..
고조선은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존재했고 BC 7세기엔 춘추 5패나 전국 7웅 같은 국가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 보다 독립적인 고대 국가를 형성해 연나라와 경쟁했고 BC 3세기 말에는 진(秦)과 국경을 맞대며 화평을 유지했다. BC 2세기 흉노와 한나라의 각축 속에서 번영했으며 멸망 후에는 남으로는 고구려와 신라, 북으로는 선비오환에 의해 지속적으로 부활되고 계승돼 왔다. 고조선의 후예들은 4C 모용씨 이후 중국 지배를 본격화하는 특성이 나타나면서 중국 대륙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의 중국 비(非)한족 왕조는 이들이 건설했다. 그러나 중국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의 고유성을 상실했다. 고조선의 고유성은 주로 고구려·거란(요)·금·고려·청 등에 의해 유지됐다. ⑨ 고조선의 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