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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력사 (18)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앞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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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력사 (18)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앞섰다"

대야발 2025. 3. 1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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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년 전에 나타난 고조선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5500년 전)과 이집트문명(5100년 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형성된 고대 문명이었다.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잃어버렸던 고조선문명의 기원과 탄생, 사회경제적 토대와 문화적 특성, 고대국가 건국과 발전·해체를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학술원 회원인 원로 사회사학자 신용하(81) 서울대 명예교수가 '고조선문명의 사회사'(지식산업사)를 펴냈다. 신 교수가 2000년대 들어 집중적으로 탐구해 온 고조선 연구 3부작의 마지막 저서다. 그는 고조선을 국가와 민족의 관점에서 각각 조명한 '고조선 국가형성의 사회사'(2010년), '한국민족의 기원과 형성 연구'(2017년)를 출간한 바 있다.

 

 

■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앞섰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고조선문명의 사회사' 펴내
이선민 선임기자 2018.08.08. 03:01

 

 

 

 

 

신용하 교수는“그동안 잊혔던 고조선 문명을 다시 찾아서 인류 문명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정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신용하 교수에 따르면 고조선문명은 기원전 30세기 무렵 대동강 유역과 요동 지역에서 형성됐다. 빙하기가 끝난 약 1만2000년 전 북위 40도선 이하의 고(古)한반도에서 농경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단립벼 쌀과 콩의 재배에 성공했다.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의 결과로 남한강·금강 유역에 살던 무리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점차 농경이 가능해진 북방으로 이주했다. 요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호랑이가 토템인 예족(濊族)이 됐고, 요하 서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곰이 토템인 맥족(族)이 됐다.

 

 

5000년 전 계속되는 기상이변을 만난 요서 지역의 맥족이 동남쪽으로 이동하여 대동강 유역에서 한족(韓族)과 재결합하면서 청동기문화를 토대로 하는 고조선이 세워졌다.

 

고조선은 1000년 뒤 요동으로 수도를 옮겨 예족을 흡수했고, 동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한반도·만주·연해주에 걸치는 고대연방국가를 건설했다는 것이 신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한민족으로 이어지는 한·예·맥족이 고조선의 중심을 이루고, 읍루·흉노·돌궐·몽골 등 정복·병합된 유목민족이 주변에 포진했다"고 말했다.

 

 

고조선은 야생마를 길들여 독특한 기마문화를 발전시켰고 태양과 조상신[단군]을 숭배하는 공동 신앙이 발달했다. 또 한·예·맥족의 부족언어를 통합하여 고조선어(語)가 탄생했는데 이는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됐다. 따라서 서양문명의 시초인 메소포타미아문명·이집트문명에 대응하는 동양문명의 출발점은 황하문명(3700년 전)이 아니라 고조선문명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 교수의 주장은 얼핏 보면 재야 사학자들의 지론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의 문헌사료, 고고학 발굴자료, 사회학·인류학 이론서, 동서양의 연구성과를 폭넓게 활용해 학문적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난다. 그는 "장기 지속되는 고대사회와 고대문명을 분석하는 데 매우 유용한 프랑스 아날학파의 연구방법론을 적용했다"고 말했다.

 

 

이 책의 야심적인 여러 주장 가운데 현실적으로 가장 논란이 될 내용은 통념과는 반대로 고조선문명이 고(古)중국문명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부분이다. 최근 중국이 황하문명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요하문명(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맥족이었고, 고중국 동해안에 정착한 고조선 이주민이 황하문명의 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신용하 교수는 "홍산문화는 기본적으로 곰 토템이었고, 황하문명을 이룩한 상(商)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고조선이 있던 요녕에서 건너왔음을 중국의 석학 부사년(傅斯年)도 인정했다"고 말했다.(1)

 

 

 

 

신석기 혁명으로 농업 시작되자 古한반도에 태양숭배 밝족 형성

 

한강·대동강 뻗어 나간 ‘한족’ 풍요기원 햇빛살무늬토기 사용 우리에겐 ‘빗살무늬’로 알려져

 

요동 반도로 이동한 ‘예족’은 호랑이 토템 삼고 철광석 활용

 

요서 평야지대 정착했던 ‘맥족’ 玉器 쓰며 제의문화 발전시켜

 

3부족이 결합해 ‘고조선’ 건국 인류 최초 독립 문명 탄생 원천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⑤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지식카페>‘밝음’ 숭배한 밝족 후예가 ‘한강·대동강·요하문명’ 꽃피웠다

문화일보 2019-08-07 10:08

 

 

고(古)한반도 중부 남한강·금강 유역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은 식량공급을 일거에 증가시켰으나, 인구증가도 뒤따랐으므로 식료부족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농업경작의 새로운 방법과 기술을 간직한 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선 이남의 농업경작이 가능한 크고 작은 모든 강변과 해안으로 이동을 감행했다.

 

 

농업경작은 ‘햇빛’의 은혜에 직결되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공통으로 ‘태양(해)숭배’ 사상을 갖게 됐다. 그들은 ‘밝음’(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고,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정해 애경했다. 후에 그들의 후예들은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 후대의 고대중국인의 차음표기로는 발인(發人), 백족(白族)이라고 호칭했다.



주목할 것은 약 1만2000년 전∼9000년 전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농업경작·사냥·어로·식료채집을 하고, ‘태양’ 하늘숭배, 천손의식, ‘밝음’ 애호 사상, ‘새’ 토템을 공통으로 형성해 오래 교류하며 생활하는 동안에 사람과 문화에 ‘공동 유형’을 형성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들을 ‘밝’족이라고 통칭하면서도 학술용어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 그들의 문화를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 문화유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밝족)’은 성립 후 처음 단계에서 크게 3갈래로 분화·발전했다. 첫째는 지구기후 온난화 이후에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강변과 해안에 그대로 계속 남아 정착해서 ‘고대’를 맞은 신석기인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밝’족이라고 호칭했으나, 후에 ‘밝’대족 기원의 다른 부족들과의 구별을 위해 그들이 ‘남한강’을 거쳐서 ‘한’강 유역 등에서 유래했다는 특징이 파악돼 ‘한’족이라는 호칭도 갖게 됐다.

 

 

이때의 ‘한’은 ‘큰’ ‘하나’ ‘하늘’의 뜻을 가진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의 고유어라고 해석된다. 즉 그들은 ‘밝’족 또는 ‘한’족으로 호칭되다가 ‘밝’대족의 분화 진전에 따라 ‘한’족으로 점차 호칭이 확정돼간 것이다.



‘한’족 신석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세계 최선진 신석기 농업혁명의 성취와 그에 인과관계를 가진 모든 문화항목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태양’ 숭배, 태양이 있는 푸른 하늘 숭배, 천손의식, ‘새’ 토템 등이었다.

 

현재도 충북 옥천에 세계 유일의 태양을 잉태한 신석기시대 여성상이 남아 있다. 햇빛살(태양광선)이 토템 ‘새’에 집중해 비쳐서 잉태해 ‘알’에서 천손 영웅이 탄생했다는 유형의 ‘난생설화’도 밝족·한족의 설화다.



한족은 약 1만2000년 전부터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문암리 유적 제10층), 약 1만 년 전부터는 햇빛살 무늬를 그린 뾰족밑 토기가 출토돼 나오기 시작한다. 이 무늬를 일본 학자들이 머리 빗는 ‘빗살무늬(櫛目紋)’ 토기라고 이름했는데 잘못된 호칭이다.

 

 

머리 빗는 ‘빗살’을 그린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을 풍요롭게 해 주는 ‘햇빛살’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래가 뾰족한 독특한 형태의 ‘한’족 토기 명칭은 ‘빗살무늬(줄목문)’ 토기가 아니라 ‘햇빛살무늬(태양광선)’ 토기, ‘빛살(광선)’ 토기로 호칭돼야 할 것이다.

 

‘한’족은 ‘밝’족을 본터에서 계승해 하늘을 나는 ‘새(鳥)’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필자가 2013년 고조선문명 세미나에서 처음 발표한 “밝족과 한족의 토템은 ‘새’다”라는 명제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쉬운 것이다.

 

 

사회학·인류학적으로 토템 장대(totem pole)인 한족의 ‘솟대’ 꼭지에 세우는 ‘새’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고대문헌들이 이 ‘새’를 써놓지 않고 ‘蘇塗’(소도)라는 귀신 제사하는 곳으로 써 놓았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뿐이다.



한민족은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가라·탐라 모두 ‘새’ 토템이었으며, 모자에도 두 귀 위에 새털 깃을 세우고, 왕관에도 새털 깃 도안을 했으며, 죽으면 무덤에도 새털 깃을 넣었다. 지금도 한국 대통령의 상징 도안은 ‘봉황새’다.

 

 

‘한’족은 ‘밝’족과 마찬가지로 10진법과 자(尺度)를 사용했으며, 천문지식과 기하학적 도안을 크게 발전시켰다. 햇빛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특히 기하학적 도안이 크게 발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족은 죽으면 상층은 ‘고인돌’ 무덤을 썼다. 고인돌은 ‘한’족의 무덤양식이었다.

 

 
 
 

① 천손 사상을 상징하는 옥천 안터 1호 선돌 ② 한강 유역 암사동 뾰족밑 햇빛살무늬 토기 ③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제21호묘 출토 거북 모양 옥기 ④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 청동기 ⑤ 신락하층문화 유적의 석탄정제품 ⑥ 충북 단양 소재 현대에 복원된 솟대 끝의 새


 



둘째 갈래는, 지구 기후 온난화로 동토(凍土)가 녹아 북위 40도선 이북도 농경이 가능하게 되자, 고한반도 ‘밝’족의 일부가 북위 40도선 이북의 요동지역에 이동·정착해 형성된 ‘예(濊)’족이다.

 

이들은 자기들을 개척지의 큰 강 ‘요하’의 ‘東(동,쇠)’쪽으로 이동한 ‘밝’족의 일부라고 자부해 ‘쇠’(東)족이라고 차별화해서 호칭했다. 후대에 고대 중국지식인들은 ‘쇠’를 ‘濊’ ‘예’ ‘예’ ‘穢’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후에 남방음으로 변음돼 ‘예’(Ye)로 발음하게 됐다.

‘濊’족은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또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요하 동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요동반도·태자하·목단강·제2북류 송화강·두만강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분산해서 정착한 신석기인들이었다. ‘예’족은 요하 이동지역에서 고한반도와 동일 기초의 문화를 가지면서도 요하 이동 새 정착지에서 독자적 신석기문화를 창조해 생활했다.

 

심양 부근의 신석기 ‘신락(新樂)문화’는 현재 발굴된 ‘예’족의 대표적 신석기문화 유적이라고 판단된다. ‘후한서’ 예전에서 “(예족은)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범(虎)을 신(神)으로 여겨 제사 지낸다”고 했다.

 

‘예’족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맹수의 왕인 ‘범’을 주토템으로, ‘새’를 부토템으로 정해 외경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예족은 부근에 풍부한 무순광산의 노천 철광과 노천 석탄광이 있으므로, 7200년 전의 신락문화 유적에서는 이미 석탄정제품과 적철광석 덩이가 출토됐다.

셋째 갈래는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밝족) 일부가, 북위 약 40도 이북의 과거 동토였던 지역이 인간거주와 농경 가능지역이 되자,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서북방이동을 감행해 지금의 요서 대릉하 및 시라무렌강 사이 평야지역·내몽고자치구 동부지역 일대에 정착한 ‘貊(박)’족이다.

 

그들은 새 환경에 적응해 토템을 ‘곰(熊)’으로 정하고, 고한반도에서 가져온 ‘새’는 부토템으로 했다. ‘후한서’에서도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다”라고 했다. 이들은 자기들을 ‘밝’대족의 일부로서 서북방 이동을 감행했다고 ‘북밝족’으로 자부했는데, 후대에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한자로 ‘북발’(北發) 또는 단음으로 ‘貊’(박, 백, 맥)족이라 이름을 붙이고 ‘박’ ‘백’이라고 발음하다가 후에 남방 발음으로 변음돼 ‘맥’이라고 읽게 됐다.



종래 일부 고대사학자가 ‘貊’(맥)을 ‘곰’과(科)의 짐승의 표기로 해석하고, 또 시베리아 또는 중앙아시아 또는 바이칼호 부근 북방 부족 ‘예’ ‘맥’족이 빈 공간의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왔다고 해석한 것은 지구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기의 낡은 가설이다. 그러한 북방은 동토가 돼 당시 부족과 문명의 기원 형성지가 될 수 없었다.

 

‘맥’족은 원래 고한반도에서 ‘밝’족 일부가 서북방으로 이동해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 정착해서 형성됐으며, ‘맥’족이 그곳에서 만든 신석기문화가 홍산문화(紅山文化)이고, 그 가장 발전된 중심이 우하량(牛河梁) 유적이다. 우하량 유적 제1지점에는 제단과 신(神)을 모시는 신성한 묘당(廟堂)이 있고, 그 묘당에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곰의 조각상, 새의 날개 등이 부서진 상태로 출토됐다.

 

이 부족은 ‘여신’을 숭배하고 ‘곰’을 주토템과 ‘새’를 부토템으로 한 부족이었음이 증명됐다. 우하량 유적 제2지점에는 여신을 위해 제사하는 제단 다음에 족장급의 무덤들이 있는데, ‘족장’을 나타내는 맨 앞의 중앙 대묘의 유골은 여성이었다. 이 곰 토템 부족의 족장은 여성이었다.



 
 

 

홍산문화의 족장급 무덤들에서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당시 세계 최선진의 찬란한 옥기(玉器)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일부 고고학자는 홍산문화의 찬란한 옥문화와 제의문화를 놓고 ‘요하문명’이라는 개념과 학설을 정립해, 심양 요령성 박물관에서 장기 전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중국문명의 시작은 황하문명에서가 아니고 그보다 1000여 년 앞서 ‘요하문명’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면서, 홍산문화의 창조자는 하(夏)를 건국한 황제(黃帝, 軒轅)의 ‘황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홍산문화와 우하량 출토유물은 그들이 고한반도의 ‘밝’족과 동일한 ‘북밝’족이며 ‘맥’족임을 출토유물이 매우 명료하게 증명하고 있다.

 

신성한 묘당에서 여신상과 함께 맥족의 토템인 ‘곰’ 상과 ‘밝’족 및 ‘한’족의 토템인 ‘새’ 상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중국 문헌 역사 25왕조사의 어디에도 ‘황제족’이라는 족속은 아예 없었다. ‘곰’ 토템과 ‘새’ 부토템을 가진 것은 貊(맥, 박)족뿐인데, 그들은 고한반도 계통이며, 고조선에 통합된 부족의 일부였다.

고중국은 명나라 초기 이전까지는 이 홍산문화 지역에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다. 역대 고중국학자들은 그들이 모두 東夷(동이) 또는 北狄(북적)이어서 자기들의 조상이 아니라고 한결같이 강조, 주장하고 배척해 왔다.

 

홍산문화는 고한반도 밝족 계열인 맥족(貊族)의 신석기시대 문화이며, 후에 고조선문명의 선행요소의 일부로 고조선문명에 통합된 신석기문화다.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것은 약 5000년 전에 앞에서 고찰한 ①‘한’족의 한강문화와 ②대동강문화 ③ ‘맥’족의 요하 이서 홍산문화(일부 중국학자의 ‘요하문명’)와 ④ ‘예’족의 요하 이동 신락문화 등 크게 4대 신석기문화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지양·승화·발전돼서 탄생한 것이다.

 

‘고조선문명’을 큰 강과 연관해 표현하면, 신석기시대 ‘한강문화’ ‘대동강문화’ ‘요하문화’(중국 고고학자들의 ‘요하문명’)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해 탄생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3대강(한강·대동강·요하) 문화가 밝족과 그 후예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돼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결정적 계기는 약 5000년 전에 고한반도에서 ‘한’ ‘맥’ ‘예’ 3부족이 결합해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국한 대변혁에 의거한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과 사회과학원은 맥족의 요서 지방 ‘홍산문화’ 하나를 갖고서도 ‘요하문명’론을 정립하고 있는데, 그보다 선진한 고한반도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 그리고 요동의 예족문화와 요서의 맥족 홍산문화(요하문명)를 모두 통합해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고조선문명’을 인류 최초 독립문명의 하나로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2)

 

 

 

 

원로 사회학자 신용하(73·사진) 한양대 석좌교수가 최근 고조선(古朝鮮)의 기원을 다룬 연구서 '고조선 국가 형성의 사회사'(지식산업사)를 펴냈다. 독립협회, 신채호·박은식의 사회사상 등 민족운동사와 독도 영유권 연구에 앞장섰던 신 교수가 2002년 서울대를 정년 퇴임한 후 전념해 온 고조선 연구의 첫 결실이다.

 

사회학자가 왜 고조선 연구서를 냈을까. 신 교수는 "민족 분단의 원인을 사회학을 통해 밝히려다 보니 민족운동사를 공부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한국 민족의 기원과 형성 과정에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 "고조선 건국 주도 세력은 한강서 농사짓던 韓부족"

김기철 기자, 2010.08.25. 03:04

 
 

 

 

 

'고조선 연구서' 펴낸 원로 사회학자 신용하 교수
"곰 숭배하던 맥부족과 동맹 만주의 예부족 끌어안아…
농경생활 가장 먼저 시작 '뾰족밑 빗살무늬토기' 발명"

 

 

'고조선은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韓)부족이 만주지역의 예(濊)부족·맥(貊)부족과 연합해서 세운 국가로 '한'부족은 대대로 고조선의 제왕을 배출하면서 국가 형성을 주도했다.'

 

신용하 교수는 "한부족이 곰을 숭배하는 맥부족과 혼인동맹을 맺고, 예부족을 후국(侯國)족으로 포용함으로써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그간 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주도 세력을 '예맥' 1부족설(이병도), '예'부족과 '맥'부족의 2부족설(김상기) 등으로 제시해왔다. 신 교수는 여기에 '한'부족을 추가했을 뿐 아니라 고조선 건국에 가장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부족으로 자리매김했다.

 

신 교수는 한강 유역에서 기원해 농경생활을 가장 먼저 시작한 부족을 '한'부족으로 파악한다. '한'은 매우 오래된 한부족 언어로 '큰'이란 뜻이며, 중국 고문헌은 이를 '韓' '寒' '桓' '汗' 등으로 음역(音譯)하여 표기했다. 신 교수는 "한강 유역에서는 BC 1만년쯤부터 단립(短粒)벼를 선택해서 전기 신석기시대(BC 1만년~BC 6000년)에 이미 농경생활이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농경생활의 도구인 '뾰족밑 빗살무늬토기'도 '한'부족이 발명해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뾰족밑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된 곳은 남쪽으론 남해안과 낙동강 유역에서 북으로는 청천강까지, 동으로는 강원도 양양 오산리까지 퍼져 있는데, 그 중앙 지점이 한강 유역이다. 신 교수는 한강에서 발굴된 '뾰족밑 빗살무늬토기'는 늦게 잡아도 BC 6500년~BC 5000년경에 사용됐다며 BC 5000년으로 추정하는 기존 학계보다 1500년 정도 올려 잡는다. 신 교수는 '한'부족은 태양을 숭배했고, 천손(天孫) 의식을 가졌으며, 남성 군장(君長)의 지휘를 받는 부계(父系) 부족공동체 사회였으며, 왕을 '한' '가한'이라고 부르는 기원을 만든 부족이었다고 설명한다.

 

신용하 교수의 '한부족 고조선 주도설'은 고고학 발굴 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신 교수가 '한'부족 농경문화 기원의 근거로 제시한 충북 청원 소로리 볍씨는 고고학계에서도 연대(年代)와 발굴 의미를 둘러싸고 견해가 충돌한다. 신 교수는 "고조선 연구는 기자조선을 내세운 중국의 전근대사학과 '단군조선'을 신화로 취급한 일제 어용사학자들에 의해 너무 훼손돼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면서 "패러다임 변환에는 사회학적 상상력과 객관적 과학주의적 접근이 유용하다"고 말했다.(3)

 

 

 

https://youtu.be/XVbaDwy-NZU

 

 

 

 

 

 

<자료출처>

 

(1) "고조선문명이 중국 황하문명보다 앞섰다" (chosun.com)2018.08.08.

 

 

(2) <지식카페>‘밝음’ 숭배한 밝족 후예가 ‘한강·대동강·요하문명’ 꽃피웠다 :: 문화일보 munhwa

 

 

(3) "고조선 건국 주도 세력은 한강서 농사짓던 韓부족" (chosun.com) 201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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