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2. 조선의 강역 (6) 이순신 장군의 신화가 시작된 환상의 섬 녹둔도 본문

이름과 달리 녹둔도는 섬이 아니라 서울의 6분의 1 크기에 이르는 거대한 저습지였다. 우리의 국운이 다하던 구한말 러시아에 편입된 이래 지금은 그 흔적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다. 녹둔도는 조선시대에는 변두리와 오랑캐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유라시아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동시에 중국으로선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할 교두보이기도 하다. 이런 현대사적 의의 이전에도 한-러 국경지역은 선사시대 이래 유라시아와 한반도의 고대를 잇는 거점이기도 했다.
■ 이순신 장군의 신화가 시작된 환상의 섬 녹둔도[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2021. 4. 16. 03:01

《남북 경제 협력 문제가 나올 때마다 유라시아로 이어지는 철도에 대한 관심이 함께 커지곤 한다.
그 중요한 길목인 러시아 연해주와 북한 사이의 17km 남짓한 국경을 넘어가면 바로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과 싸웠던 녹둔도가 있다. 단편적으로만 전해지던 녹둔도의 실체가 최근 발굴로 그 실상이 밝혀지고 있다.》
이름과 달리 녹둔도는 섬이 아니라 서울의 6분의 1 크기에 이르는 거대한 저습지였다. 우리의 국운이 다하던 구한말 러시아에 편입된 이래 지금은 그 흔적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다. 녹둔도는 조선시대에는 변두리와 오랑캐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유라시아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동시에 중국으로선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할 교두보이기도 하다. 이런 현대사적 의의 이전에도 한-러 국경지역은 선사시대 이래 유라시아와 한반도의 고대를 잇는 거점이기도 했다.
역사에서 사라진 녹둔도
녹둔도는 세종대에 6진 4군을 설치하면서 두만강 유역의 둔전으로 우리 역사에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사슴을 뜻하는 여진어에서 유래했는데, 지금도 녹둔도 일대에는 마치 노루의 엉덩이같이 비쭉 솟아오른 수슬로바라는 야산이 남아있다. 저습지와 마른 땅을 반복하던 이 지역을 함경도 주민들이 왕래하며 꽤 거대한 둔전을 일구어 살았다.
그러던 중 이순신 장군이 근무하던 1587년에 현지의 여진족과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들의 농사를 보호하기 위해 목책을 비운 사이에 여진족이 침략하여 크게 패했고 이후 반격을 가해 일정한 전과를 올렸다. 비록 전체 전투로 본다면 패배이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어서 ‘백의종군’으로 강등되었지만 그의 능력을 조정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순신 장군은 정읍현감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령받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녹둔도 전투는 이순신 장군의 신화가 시작된 곳이지만, 녹둔도 자체는 구한말에 다시 역사에 등장하기 전까지 인적이 끊긴 것은 물론이고 기록도 사라진다.

수백 년간 우리 역사의 일부분이었지만 정작 그 위치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 의아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두만강 하구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나는 녹둔도에서 멀지 않은 곳인 발해성터 크라스키노를 발굴한 적이 있다. 이때에도 조금만 땅을 파도 솟아오르는 지하수 때문에 큰 고생을 할 정도였다.
기후가 한랭건조한 시점이 되면 이 지역은 논을 만들기에 아주 좋은 지형이 되지만 조금만 물이 차오르면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진창이 되고 강물의 흐름도 바뀌어 지형이 쉽게 변한다. 여기에 국운이 풍전등화였던 구한말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겹쳐 녹둔도는 러시아의 관할이 되었다.
수류봉 산성과 고려인 마을 발견
세종대 6진을 설치할 때 녹둔도에는 토성을 쌓고 목책을 둘렀는데 그 길이가 약 360m(1247척)에 불과했다. 서울 6분의 1 크기의 넓은 소택지인 녹둔도에서 이 정도의 작은 성터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조선왕조실록 성종편에는 녹둔도의 마을이 ‘진흙이 없어 풀이나 지푸라기를 모래에 섞어서 집을 지어 바람이 불면 사라져 버린다’고 되어 있으니 우리의 기대와 달리 녹둔도 일대에서 그 유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더욱이 이 지역은 한국 중국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걸린 첨예한 국경지역으로 외국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는 곳이니 의욕만 앞세우다간 분쟁만 일으킬 여지도 많다.

우리에겐 너무나 궁금한 녹둔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 것은 러시아 학자들이었다. 2016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학회에서 러시아 지인들은 고대하던 이 지역의 발굴 성과를 소개했다. ‘수류봉(水流峰) 산성’이라 불리는 둘레가 2.5km인 성터였다. 이 유적은 공교롭게도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으로 양분돼 하나의 유적이 중국과 러시아에서 동시에 문화유적으로 등록된 유일한 사례이다.
이 지역은 녹둔도의 평원과 멀리 동해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이다. 실제로 1937년 일본 관동군과 소련군이 벌인 하산전투(일명 장고봉전투)의 전장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 학자들은 조사가 어려운 저지대 대신에 당시 군사적 요충지인 수류봉을 조사하였고 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유물들과 함께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도 발견했다.
물론 ‘대왕’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조선만의 풍습은 아니지만 정황상 세종 때 설치한 6진과 관련한 큰 군사적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러시아 학계의 1차 결론이었다. 물론 아직 발굴이 극히 일부만 되었으니 함부로 결론을 내긴 어렵다. 현재로서는 수류봉 성터는 조선시대 두만강 건너편으로의 진출 과정을 실증적으로 밝혀줄 첫 번째 증거인 셈이니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유라시아로의 진출을 증명하는 최초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사실 이 일대에는 수류봉 산성만이 아니라 조선인의 마을터가 군데군데 남아있다. 그뿐이 아니다. 이 지역에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이어 옥저와 고구려를 거쳐 발해에 이르는 유적들이 남아있다. 단기간에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 중기 녹둔도는 규모가 작았고 임시로 살던 성격이 강했다. 그 대신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유라시아와 한국을 이어온 두만강 유역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韓-유라시아의 가교
녹둔도에 관심을 보이는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다. 한국과 러시아의 국경 때문에 태평양으로 가는 관문이 막혀 버린 중국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21세기 정치적인 요충지이다. 바로 녹둔도는 17km로 이어지는 한국과 유라시아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남북 경제 협력이 거론될 때마다 유라시아 철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결국 한국과 러시아가 두만강 하구의 짧은 17km를 두고 국경을 접하기에 가능하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한국과 유라시아의 연결이 바로 이 녹둔도를 통해 이어진다.
녹둔도에서 북방의 여진족을 막던 이순신 장군은 곧바로 남해에서 왜적에 대비해야 했다. 대륙과 해양세력의 중간에서 존재를 지켜왔던 우리 역사의 상징적인 모습이다. 녹둔도의 의미는 단순한 잃어버린 영토를 넘어 우리에겐 유라시아로의 관문이다. 녹둔도가 갖고 있는 진정한 우리 시대의 의미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1)
■녹둔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승전 기념비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0일 을축 두 번째 기사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가뒀다는 보고. 이순신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1587년이었으니 당시 이순신의 나이 마흔셋. 당시 이순신의 직책은 조산만호(造山萬戶)였습니다. 동시에 국토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라는 섬의 농경지인 둔전(屯田)을 관리하는 임무까지 맡았죠. 지금으로 치면 최전방 육군부대 중대장쯤일 겁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 기록은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순신이란 지휘관의 존재를 국가가 처음으로 '인지'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입니다. 중앙정부에 이름이 알려졌다는 사실이 갖는 무게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지만, 당시 이순신은 이름 없는 하급 무관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렇다면 '패장' 이순신에게는 어떤 처분이 내려졌을까. 정확하게 6일 뒤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 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 첫 번째 기사
잡아 올까요? 하고 물었더니 임금은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면서 곤장 몇 대 때리고 관직을 박탈한 뒤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기록 또한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임금이 녹둔도 전투를 패배로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패전으로 규정했다면 이후에 이순신의 운명이 어찌 됐을까요. 게다가 5년 뒤에 조선을 불바다로 몰아넣은 참혹한 왜란을 생각하면 소름마저 돋습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이라지만….

이순신은 조선을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은 혹시 남아 있는 게 없을까?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이란 화첩입니다.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묘사한 그림 여덟 폭을 글과 함께 모아 묶은 책이죠.
이 책에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그림이 바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묘사한 겁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의 기록이 보여주듯, 임금은 녹둔도 전투를 패전으로 규정하지 않았죠. 더구나 두 차례 왜란을 거치면서 이순신은 국가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공식 추앙됩니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지고 남을 수 있었던 것이죠. 정부 주도로 그림이 그려졌다는 사실은 다시 말하면 후대에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가 '승전' 또는 그에 필적하는 업적으로 평가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수책거적(守柵拒敵),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아냈다는 뜻입니다. 그림 옆에 간략한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선조 정해년에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맡겼다. 가을이 와서 수확할 때가 되자 주변 오랑캐의 여러 족장과 내륙 깊은 곳의 물지개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추도에 군사를 숨겼다. 수비군이 얼마 되지 않아 약하고 농민들이 들판에 퍼져 일하자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먼저 기병으로 포위하고 목책을 따라 노략질을 했다. 이때 목책 안의 군사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머릿수가 얼마 되지 않아 곧 버티기 어려워졌다. 족장 마니응개가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목책 안에서 화살을 쏴 거꾸러뜨리니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이순신이 목책을 열고 쫓아가 잡혀간 농민들을 구해 돌아왔다."
이 빛나는 승전을 기념하는 비석이 1762년(영조 38년)에 이순신 장군이 근무하던 곳에 세워집니다. 처음엔 주민들이 기념탑을 세우고 가까운 봉우리를 승전봉(勝戰峰)이라 불렀는데, 이순신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 1716~1770)이란 분이 관북절도사로 부임해 탑을 없애고 그 자리에 비를 세웠다고 하죠. 현재의 함경북도 나선시 조산리입니다. 북한 쪽 기록을 보면, 지금 남아 있는 비석은 1882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 박래겸(朴來謙, 1780~?)이 북평사(北評事)로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체험한 일들을 적은 《북막일기 北幕日記》에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를 직접 가서 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성문 밖에는 이충무공의 승전비가 있었다. 대개 충무공이 조산만호로서 일찍이 여기서 번호(蕃胡)를 깨뜨렸으므로 그 후손인 이관상(李觀祥)이 북병사로서 비를 세웠고 판서 조명정(趙明鼎)이 음기(陰記)를 지었다.
햐. 그 시절에 한양에서 북쪽으로 가장 먼 두만강 하구 끝까지 가서 이순신 장군의 승전비를 본 감회를 이렇게 짧게 쓰고 말았다니요. 물론 비석을 본 사람이 어디 박래겸뿐일 리는 없겠지만, 그나마도 직접 봤다는 기록은 정말 찾기가 어렵습니다. 워낙 변방 중의 변방이었으니까요. 어쨌든 귀중한 기록인 건 분명합니다.

혹시나 해서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을 찾아보니 넉 점이 남아 있더군요. 왼쪽 사진은 조산리 석성 터에서 바라본 승전대(勝戰臺)입니다. 멀리 낮고 평평한 언덕이 보이죠. 기록에 남아 있는 승전봉(勝戰峯)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입니다. 오른쪽은 비석을 모신 건물입니다.

비석의 앞면에는 승전대(勝戰臺) 세 글자가 적혀 있고, 뒷면에는 비석을 세운 내력 등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새겨져 있죠. 이렇게 비석 뒷면에 새긴 글을 음기(陰記)라고 하는데, 이 글은 위에 인용한 《북막일기》의 기록대로 당시 함경도 관찰사 조명정(趙明鼎)이 지었습니다. 비석 글씨와 원문과 해석은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https://portal.nrich.g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대목만 뽑아서 보겠습니다.
경흥(慶與) 녹보파호비(鹿堡破胡碑)
오호라, 이곳은 고 충무(忠武) 이공(李公) 순신(舜臣)이 변방 오랑캐를 물리친 곳이다. 만력(萬曆) 정해년(선조 20, 1587년)에 공께서 조산 만호 겸 녹보둔전관(造山萬戶兼鹿堡屯田官)으로 부임해왔다. 변방 오랑캐가 둔전(屯田)의 곡식이 익은 것을 보고 무리를 이끌고 와서 목책(木柵)을 에워싸고 병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공이 진(鎭)에 올라 북쪽으로 3리쯤에 있는 높은 봉우리에서 방어하며 적이 다니는 길목에 기병(奇兵)을 나누어 매복시켰다. 날이 저물어 적들이 돌아가는 것을 맞이하여 포를 쏘고 북을 치며 공격하니 죽고 다친 자가 매우 많으니, 적이 크게 두려워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후인이 그 봉우리를 승전대(勝戰臺)라고 이름하였다.
공의 충성(忠誠)은 해와 달을 꿰뚫으며 공렬(功烈)은 이정(彛鼎)에 새길 만하니, 작은 한 조각의 대(臺)는 공의 중요함을 나타내는 데는 부족하나 공이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섬멸한 것은 소관(小官)부터 시작해서 조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공이 마침내 불세출의 공훈을 수립한 것은 실로 그 발단이 여기에 있는지라 사라져 없어지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의 5대손 관상(觀祥)이 이제 관북절도사(關北節度使)가 되어 천리 길을 편지를 보내 나에게 음기(陰記)를 써 줄 것을 요구하니, 오호라, 옛적에 이른바 물길은 차마 없어지게 놓아둘 수 없고 땅은 차마 황폐해지게 놓아둘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 가의대부(嘉義大夫)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조명정(趙明鼎)이 기술하다. 임오년(영조 38, 1762년) 월 일에 세우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저는 그게 제일 궁금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면 최근 사진이라고 소개하는 것들이 더러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도 중요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다면 혹시 북한 매체가 직접 찍은 사진이나 영상은 없을까. KBS 영상 자료실을 샅샅이 뒤져봤더니 딱 하나가 나오더군요. 북한 조선중앙TV가 찍은 2015년 영상. 지금껏 본격적으로 소개된 일이 없는 이순신 승전비의 가장 최근 모습을 만나보실까요?
지난해 12월, 서울시가 북한, 러시아와 함께 '나선-녹둔도' 지역에서 이순신 장군 유적 발굴 조사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조사 지역은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러시아 연해주 하산군과 북한 함경북도 나선 특별시 일대입니다.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옛 녹둔도에서 의미 있는 발굴 성과가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2)
충무공 이순신이 활약한 '녹둔도 전투'(1587년)의 무대를 측량한 근대 지도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해군사관학교는 20202년 4월 26일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녹둔도(鹿屯島)' 실측 근대지도를 공개했다.
'녹둔도'는 이순신이 1586년부터 2년간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겸 녹둔도 둔전관(屯田官)으로 근무하면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고 '녹둔도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던 역사적 장소다. 현재는 러시아 측 영토에 해당된다.
■ 충무공 활약했던 '녹둔도' 실측 근대지도 첫 공개
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2020. 4. 26. 10:34
박준형 해사박물관장 입수.."유적 발굴에 도움 기대"

충무공 이순신이 활약한 '녹둔도 전투'(1587년)의 무대를 측량한 근대 지도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해군사관학교는 26일 두만강 하구에 위치한 '녹둔도(鹿屯島)' 실측 근대지도를 공개했다.
'녹둔도'는 이순신이 1586년부터 2년간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 겸 녹둔도 둔전관(屯田官)으로 근무하면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아내고 '녹둔도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던 역사적 장소다. 현재는 러시아 측 영토에 해당된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 연구를 위해 평소 일본이 제작한 근대 한반도 지도를 수집해온 박준형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이 지난 3월 초 일본에서 입수해 충무공 이순신 탄신 제475주년을 앞두고 공개했다.
지도의 명칭은 '일로국경부근지도'(日露國境附近之圖)로, 1911년 9월 일제가 실측해 그린 것이다.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가로 79.5㎝에 세로 122.5㎝의 크기로 반투명 투사지에 채색되어 있다.
오른쪽 하단에 방위표와 '2만분의 1' 축척이 표기돼 있으며, 그 아래에는 범례가 표로 정리돼 있다. 또 1911년 9월에 실측됐음을 나타내는 일시도 표기됐다.
지도는 일반 지형도와 달리 군사적 목적에 의해 제작된 특수지도로, 조선총독부가 1926년 제작한 '5만분의 1' 축척 지도보다 15년이나 빠르고 축척도 '2만분의 1'이어서 해당 지역의 상세한 파악이 가능하다고 해사 측은 평가했다.
박 관장은 "러시아와 접경 지역인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 지역은 일제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면서 "당시 한반도에 주둔했던 일제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도에 '성장'(城場)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녹둔도 토성(土城)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며 "향후 연구를 통해 녹둔도에서 충무공 관련 유적 발굴에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이사인 백종오 교수는 지도에 대해 "지도는 이순신이 활약했던 녹둔도 전투의 주 무대였던 녹둔도 토성의 위치를 고증하는데 매우 유용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평가했다고 해사는 전했다.
해사는 앞으로 학술대회 등을 통해 녹둔도 전투 관련 연구를 발전시키면서 충무공 관련 연구에 지도를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3)
<자료출처>
(1) 이순신 장군의 신화가 시작된 환상의 섬 녹둔도[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2) 녹둔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승전 기념비
(3) 충무공 활약했던 '녹둔도' 실측 근대지도 첫 공개. 연합뉴스 2020.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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