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4. 조선 문화유산 (3) 세계문화유산 - 창덕궁 본문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에 다녀왔습니다.
창덕궁 전경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 법궁인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궁궐 중 처음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 역대 왕들이 1867년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약 270여년 동안 창덕궁을 더 많이 사용하여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며, 낙선재 권역은 광복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가족(순정황후(순종 두 번째 황후),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고종의 딸))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후원은 1406년(태종 6) 창덕궁 북쪽에 처음 조성되었고 1463년(세조 9) 확장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대부터 순조 대까지 옥류천, 규장각, 주합루, 애련지, 의두합, 연경당 등이 추가로 조성되면서 창덕궁은 정치의 공간과 더불어 휴식과 생활의 공간이 조화를 이루었다.
창덕궁은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창덕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돈화문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돈화’는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라는 뜻이다.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처음 지어졌는데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지었는데, 규모는 2층 누각형 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돈화문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하였고, 신하들은 보통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진선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면 나오는 창덕궁의 중문(中門)으로, 문의 명칭인 '진선(進善)’은 ‘선한 말을 올린다’는 의미와 ‘훌륭한 사람을 천거한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숙장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통과하여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면, 진선문 맞은편에 나오는 중문(中門)이 숙장문이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에는 직사각형 마당이 있고, 마당을 빙 둘러 호위청·상서원 등의 행각을 비롯하여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있다. 숙장문을 통과하면 내전으로 갈 수 있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그때부터 사용된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선원전
선원전(璿源殿)은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656년(효종 7)에 경덕궁(慶德宮, 현 경희궁)의 경화당을 옮겨 지은 춘휘전(春暉殿)을 숙종 대부터 선원전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1921년에 후원 깊숙한 곳에 새 선원전을 건립하고 어진을 옮겨가면서 이곳을 구 선원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선원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양지당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 서쪽, 임금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왕실 사당인 선원전(璿源殿) 가까이에 있는 전각이다. 양지당(養志堂)은 선원전에 제사를 지내거나 참배하러 갈 때 임금이 머물렀던 어재실(御齋室)이며, 어진(御眞)이나 어서(御書)를 담은 궤를 보관하던 장소였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동궐도>를 보면 선원전 동남쪽에 양지당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진설청과 제관이 머무르던 재실이 선원전에 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지당 남쪽에는 만복문·영의사·억석루 등이 있다.
인정문
인정문(仁政門)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인정문은 왕의 장례(국장)가 있을 때 다음 왕의 즉위식을 치렀던 곳으로 이곳에서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인정문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인정전
인정전(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궁중 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인정’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이 창건될 때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에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다음 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인정전
인정전은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지어졌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이 없어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내부 바닥은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마루는 전등, 커튼, 유리창문 등과 함께 1908년(융희 2)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은 다른 궁궐의 정전과 같이 박석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으며 조정에는 품계석을 놓았다. 인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외행각 일부는 1991년 이후에 복원하였다.
선정문
선정전 입구
선정전(宣政殿)의 ‘선정’은 ‘정교(政敎)를 선양(宣揚)한다’ 즉,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이다. 이곳에서 조정 회의, 업무 보고,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이곳은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朝啓廳)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지금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임진왜란을 거쳐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 인경궁의 편전인 광정전(光政殿)을 옮겨 지었는데,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선정전 전경
선정전은 편전의 용도 외에 경로잔치인 양로연과 왕비의 하례식, 혼전(魂殿, 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선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희정당 입구
희정당 입구
희정당(熙政堂)의 ‘희정’은 ‘화락한 정치’라는 뜻으로, 원래는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침전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편전으로 기능이 바뀐 건물이다. 창건 당시 이름은 숭문당(崇文堂)이었으나 1496년(연산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원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혼전으로 사용되면서,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희정당
희정당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에는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그러나 1917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옮겨다 복원하였는데, 이때 내부를 쪽매널 마루(여러 가지 색깔이나 무늿결이 있는 널조각을 붙여 깐 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몄다. 희정당 앞쪽은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의 형태로 되어있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는 구조로 바뀌었다. 희정당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희정당 내부
대조전
대조전(大造殿)의 ‘대조’는 ‘큰 공업을 이룬다’라는 뜻으로, 창덕궁의 정식 침전이자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전각 중 유일하게 용마루가 없는 건물로,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었다. 현재의 대조전은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희정당처럼 내부를 마루와 유리창 등 서양식으로 꾸몄다.
대조전에서 추존 문조(효명세자)가 태어났고, 성종, 인조, 효종, 효현황후 김씨(헌종 첫 번째 왕비), 철종,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특히 대조전 부속 건물인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대조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성정각
성정각(誠正閣) 일원은 창덕궁의 동궁, 즉 왕세자의 교육 공간이다. ‘성정’은 ‘성심껏 마음을 바르게 하다’라는 뜻으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숙종 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성정각은 왕세자의 교육 공간이지만 기록에 의하면 여러 왕이 독서하던 곳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곳에는 성정각과 그 뒤로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관물헌(觀物軒)이 있다. 관물헌은 대한제국 2대 순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성정각 옆, 현재는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에는 왕세자의 생활공간인 중희당(重熙堂)이 있었으나, 지금은 중희당의 부속 건물인 칠분서(七分序)와 삼삼와(三三窩), 승화루(承華樓) 등만 낙선재 뒤로 남아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궐내각사 내에 있던 내의원이 성정각 일대로 옮겨졌다.
낙선재
낙선재 일원은 조선 24대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1847년(헌종 13)에 창경궁 낙선당 터에 낙선재를 지었고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석복’ : 복을 내려줌)과 수강재(壽康齋, ‘수강’ : 오래 살고 건강함)를 지었다. 낙선재의 ‘낙선’은 ‘선을 즐긴다’라는 뜻으로,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하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황후 김씨(순조의 왕비)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낙선재
낙선재 일원은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고, 낙선재 뒤로는 후원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이다.
특히 이곳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순정황후 윤씨와 의민황태자비(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등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가족이 생활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는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복헌
부용지
부용지(芙蓉池) 일원은 창덕궁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이다. 300평(약 1000㎡)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부용정(芙蓉亭)은 부용지 남쪽에 있는 정자로, ‘부용’은 ‘연꽃’을 의미한다. 원래는 1707년(숙종 33) 택수재(澤水齋)라는 이름의 건물을 지었는데, 1793년(정조 17)에 건물을 고쳐 짓고 이름을 부용정으로 바꾸었다. 부용정은 지붕 위에서 봤을 때 열 십(十)자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부용정은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부용지 북쪽으로는 1776년(정조 즉위)에 지은 주합루(宙合樓)가 있다. 주합루의 ‘주합’은 ‘천지 우주와 통한다’라는 뜻으로, 2층 규모로 지어졌는데 1층은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이고, 2층은 주합루이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은 물과 물고기, 즉 왕과 신하의 관계를 뜻하며 지은 이름이다. 주합루로 들어가기 위해 왕은 어수문으로 출입하지만, 신하들은 어수문 옆 협문으로 출입하였다. 주합루는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부용지 동쪽으로는 왕이 직접 참관하여 과거시험을 행하였던 영화당(暎花堂)이 있다. 영화당의 ‘영화’는 ‘꽃과 어우러진다’라는 뜻으로, 현재 영화당에는 영조가 직접 쓴 현판이 걸려있다.
애련지
애련지(愛蓮池) 권역은 창덕궁 후원의 두 번째 정원으로, 애련지의 ‘애련’은 ‘연꽃을 사랑한다’라는 뜻이다. 1692년(숙종 18) 숙종은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애련정(愛蓮亭)이라 불렀고,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관람지
관람지(觀纜池) 일원은 창덕궁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일원에는 네모나거나 반달 그리고 둥글고 작은 연못들이 5개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렀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존덕정(尊德亭, ‘존덕’ : 덕을 높임),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관람’ : 닻줄을 바라봄), 서쪽 언덕 위에 있는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 ‘폄우’ :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함),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승재’ : 빼어난 경치)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이 있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이곳에 있는 정자 중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애련지 일원에서 관람지 일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수령이 400여 년 된 뽕나무가 있다. 뽕나무의 잎은 달걀 모양의 원형 또는 타원형이고, 뽕나무의 열매를 오디라고 부른다. 창덕궁의 뽕나무는 높이 12m에 가슴 높이 줄기 둘레는 239.5㎝로 뽕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큰 나무일 뿐만 아니라 창덕궁 내에 있는 뽕나무 중 가장 크다. 이 뽕나무는 2006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옥류천
옥류천(玉流川)은 ‘옥같이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라는 뜻으로,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逍遙巖)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다. 『궁궐지(宮闕志)』에 의하면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 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이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시로 기록되어 있다.
옥류천 주변으로는 소요정(逍遙亭, ‘소요’ : 구속 없이 천천히 노님), 태극정(太極亭, ‘태극’ : 태초의 혼돈한 원기), 농산정(籠山亭, ‘농산’ : 산으로 둘러싸임), 취한정(翠寒亭, ‘취한’ : 푸르고 서늘함), 청의정(淸漪亭, ‘청의’ : 물이 맑음)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경관이 조성되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 형태로, 현재 궁궐에 있는 유일한 초가지붕 정자이다.
※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https://royal.khs.go.kr/ROYAL/contents/R802000000.do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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