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조선고고학 (5) 광화문과 광화문 월대 복원 본문
1990년부터 시작한 '경복궁 복원'은 2045년까지 진행합니다.
고종 때 중건 당시 전각(500동) 가운데 1990년까지 남아 있던 건물은 36개동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광화문-흥례문-근정전-침전(강녕전·교태전 등)-후원(건청궁) 등으로 이어지는 중심축과 태원전(임금 초상화를 모신 곳), 동궁(자선당·비현각 등), 함화당 및 집경당 등 보수·복원이 마무리되었습니다.
1990년 첫 삽을 뜬 ‘경복궁 복원’은 2045년까지 장장 55년의 기간을 두고 진행하는 사업이다. 중건 당시의 전각(500동) 가운데 1990년까지 남아있던 건물은 36개 동에 불과했다. 1차 복원계획이 끝난 2010년까지 총 125동(기존 36개동 포함)에 달했다. 문화재청은 2차 복원 기간(2011~2045년)에 80개동을 더 복원할 계획이다. 총 205개동인데, 그래봐야 중건 당시(500동)의 41% 정도에 불과하다.|문화재청 제공
2006년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정도 반시계 방향으로 어긋나 있었던 광화문의 제 자리를 찾아주는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2006년 광화문 철거 공사 시작. 경복궁 복원공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광화문 철거공사가 시작됐다. 이 공사를 통해 광화문은 남쪽으로 14.5m 가량 내려왔다. 연합뉴스
2007년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정도 반시계 방향으로 어긋나 있었던 광화문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공사가 시작됐다. 이를 위해 1968년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던 광화문을 해체했는데, 그 참에 광화문과 월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이 때 경복궁 중건당시의 월대 유구가 학인됐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광화문 본래 자리로 추정되는 곳 아스팔트를 70cm 가량 걷어내자 고종 때 중건한 ‘1867년 광화문’ 터가 드러나고 다시 70cm를 걷어내자 태조 때 창건한 ‘1395년 광화문’ 터가 발견됐습니다.
1968년 광화문
1927년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헐어 없애려다 마지못해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현재 민속박물관 정문자리)으로 옮겨놓은 원래의 광화문 건물은 한국전쟁(1951년) 중 폭격으로 소실됐습니다. 1968년 광화문은 안으로 들여세운 총독부 정문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총독부 건물을 승계한 중앙청 건물과 함께 옛 남산의 신궁자리를 향하게 된 것입니다.
1968년 광화문 앞 도로. 한국일보 자료사진
1867년 광화문
광화문 발굴팀은 남쪽으로 11.2m, 서쪽으로 13. 떨어진 곳의 도로 아래 70cm 지점에서 동서 34.8m, 남북 10.2m(총14.7m) 크기의 ‘1867년 광화문’ 기단부를 찾아냈습니다. 일제가 흩뜨리고 ‘1968년 광화문’을 지으면서 일부를 파먹었지만 홍예문 자리가 분명했으며 정문의 위엄을 위해 돋운 월대와 임금이 다니던 어도를 일부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867년 광화문’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작업 가운데 일부. 그해 5월17일 공사를 시작해 9월18일 기둥을 세우고 10월11일 대들보를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공사기간이 농번기와 겹치는 것은 서울이 도시화하면서 노임노동자가 형성됐음을 반영하고, 비교적 짧은 다섯 달만에 완공한 것은 민간 목재상의 출현, 조립식 가공기술 발달, 기술자의 직능분화 등의 결과라고 김동욱 교수(경기대)는 분석한다. 당시 총감독은 스물네살 김수연. 전문가 기술자인 그는 근정전 설계도 감독했다.
1890년경 광화문과 월대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395년 광화문
‘1968년 광화문’이 파먹어 어차피 훼손된 ‘1867년 광화문’ 기단부 북쪽 면을 절개해 흙을 걷어내며 아래로 파들어가자 70cm 바로 아래서 태조 이성계 때 축조한 원래 광화문 곧 ‘1395년 광화문’ 기단부 층이 드러났습니다.
이와 함께 1867년 광화문 문설주 자리 아래를 파보니 1395년 광화문 문설주가 1곳만 일부 파손되고 나머지 5곳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1395년에 지어져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까지 200여년 동안 무수한 발길에 반들반들 닳은 흔적이 뚜렷했습니다. 발굴팀은 1867년 태조 때와 고종 때의 광화문 터가 70cm 높이의 차이가 있을 뿐 완전히 일치한다고 추정했습니다.
1395년 창건 당시 놏았던 광화문 기초석
1800년 깃든 ‘타임캡슐’
타임캡슐은 1395년 기단부 아래에도 있었습니다. 잡돌과 사질토를 시루떡처럼 여섯켜로 쌓은 지층이 드러났고 또 그 아래에는 10cm 굵기의 80~140cm 말뚝을 30~50cm 간격으로 촘촘히 박은 뻘흙층이 드러났습니다.
1395년 광화문 기단은 뻘흙 자리를 메우고 세웠다는 얘기입니다. 본래 경복궁 자리는 북악산 양쪽 계곡에서 발원해 청계천과 합류하는 개천의 중간 지점 선상지로, 퇴적토가 쌓이고 습지처럼 축축한 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습지를 판축해 튼튼한 터로 활용하는 것은 2세기 때의 백제 몽촌토성, 부여외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전통기법입니다. 뻘흙에 촘촘히 박은 나무기둥이 빨대가 되어 습기를 위쪽 시루떡 흙층으로 뽑아올리면 뻘흙층이 단단히 굳어 완벽한 기초구실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광화문 터는 1800년의 시간을 머금은 타임캡슐인 셈입니다.
2004년 광화문 전경. 왕태석 기자
2010년 8월 15일 복원된 광화문
2018년 4월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바라본 광화문 광장. 신상순 선임기자
경복궁은 1395년 건축되었고, 월대구역에선 임금과 백성이 함께하는 행사가 열렸으며,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방화, 파괴를 한 이후 1867년 고종이 조선전기의 모습으로 중건을 완료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됐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훼철되기 전의 광화문 앞 거리의 모습. 왼쪽은 1890년대의 사진이고, 오른쪽은 훼철 직전인 1923년 이전의 사진이다.
1906~07년 무렵 헤르만산더가 찍은 사진. 월대가 본래 모습에 가깝다.
1920년대 사진. 전차가 보인다는 것은 월대가 완전히 파괴됐음을 말해준다.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 신희권교수 월대 설명 유튜브 영상캡쳐
전차(트램)의 원할한 진행을 위해서라면 급회전을 막기 위해 오히려 월대를 그냥 두었어야 옳은데, 일제는 고의적으로 월대를 파괴하고 우리 문화유산 증거의 인멸을 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의 만행
월대 하부 구조
삼성가가 지켜낸 월대 서수상
어도지 계단
그래서, 2023년 10월15일 드디어 광화문 월대는 100년만에 제대로 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광화문 월대 및 현판 복원 기념식을 앞둔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월대 복원 공사 현장에서 관계자들이 마지막 정리 작업을 하고 있다. 월대는 궁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된 넓은 기단 형식의 대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왕과 백성이 소통하는 장소로 쓰인 곳이다. 광화문 월대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 전차 철로 설치 등으로 훼손된 뒤 도로로 사용돼왔으며, 문화재청은 2006년부터 복원 공사를 진행해왔다. 2023.10.15/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광화문 월대
<참고자료>
경복궁 북쪽 건청궁·향원정 11월 개방 (daum.net) 세계일보. 2024. 10. 29.
되찾은 조선 법궁의 '얼굴'…광화문 월대·현판 원형 복원(종합) (daum.net) 뉴스1. 2023. 10. 15
[설왕설래] 광화문 월대 (daum.net) 2023. 10. 16.
광화문 월대,여민동락의 상징,오늘 가슴 벅찬 공개 (daum.net)헤럴드경제. 2023. 10. 15.
광화문 월대가 뭐지?...문화재청 발굴조사 현장 한시적 공개 (daum.net) 2023. 3. 6.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월대가 무엇이기에 광화문 앞을 파헤치고 도로 선형까지 바꿀까 - 경향신문 (khan.co.kr) 2022.09.20
150년 전 경복궁 화장실 발견.. "현대 정화 시설과 비슷" (daum.net)2021. 07. 08.
광화문 해치 100년 만에 제자리 찾지만.. (daum.net)2018.04.13.
옮기고 뜯고 또 고치고… 광화문, 130년의 변천사 (hankookilbo.com)2018.04.11
광화문 월대 복원되고 해태상은 제자리 찾는다 - 경향신문 (khan.co.kr)2018.04.10
광화문 땅밑 ‘1800년’이 살아 있다 (hani.co.kr)한겨레 2007.11.30
광화문 창건 터 보존 논란|동아일보 (donga.com)2007-11-21
광화문 ‘19세기식 복원’ 고민되네 - 경향신문 (khan.co.kr)2007년 11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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