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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17) - 조선 고고학(3)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서 '시전'터 발굴 본문

남국/조선

조선(17) - 조선 고고학(3)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서 '시전'터 발굴

대야발 2024. 11. 5. 12:22

 

 

 

 

 

2003년 12월말 문화운동가 황평우씨가 종로구 청진동에서 건설사(르메이에르건설)가 주상복합건물 사업시행을 위해 낡은 기존 건물들을 철거하고 있는 현장에서 건물 기초석인 장대석(長臺石·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은 돌)을 발견하고 문화재청에 ‘문화재를 발견했다’고 신고하여, 한국건축문화연구소(명지대 부설)가 본격 발굴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울=연합뉴스) 서울 도심 종로 한복판인 '서울 종로 청진2-3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바닥을 드러낸 조선시대 시전행랑(아래쪽). 조사 결과 시전행랑 뒤 피맛길에서 청진동으로 통하는 쪽에서는 이문(里門)이라는 조선시대 문터가 드러나기도 했다. 오른쪽 사람의 왼쪽에 노출된 초석 4개가 이문의 흔적이다. 2010.6.20 < < 문화부 기사참조 > > < < 한울문화재연구원 제공 > >

출처; https://v.daum.net/v/20100620073111008 2010. 6. 20.

 

 

 

 

“맨 처음 여론은 재개발에 따라 피맛골의 훼손 여부에 초점이 맞춰졌어요. 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 관영시장이었던 시전(市厘)의 존재 여부에 더욱 신경을 썼습니다.”(김홍식 명지대 교수)

 

발굴 결과는 놀라웠다. 조선 초기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600년간의 서울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6개의 문화층이 정연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조선 건국~15세기 중반(6문화층),

 

임진왜란 전후(15세기 후반~16세기·5문화층),

 

17~18세기(4문화층),

 

18세기 후반~개항 이전(3문화층),

 

개항~일제강점기(2문화층),

 

해방이후~현대(1문화층)까지….”

 

 

우선 시전의 행랑(行廊)이 정연하게 노출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시기인 5문화층에서는 30㎝의 소토층(燒土層·불에 탄 흔적)이 쭉 깔려있었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 종로 시전을 비롯한 한양 전역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이후 한참 복구되지 않았음을 증언해준다.

 

 

“특히 종로1가 25~26번지 사이에서는 4칸짜리 장옥(長屋)이 확인됐는데요. 전란으로 불에 탔고, 피란갔던 집주인이 돌아오지 못했음을 알려주고 있어요.”(장진희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연구원)

 

 

불에 폭삭 주저앉은 탄화 마루 밑에는 가공 중이었던 형석(螢石)이 한 무더기가 나왔고, 일본식 게다와 같은 나막신도 노출됐다.

 

“형석은 갓끈 같은 것에 장식할 수 있게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완성품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출토된 나막신 형태는 삼국시대까지 유행했고, 조선시대부터는 고무신 형식의 나막신을 신었다는 게 정설이었는데요. 이 발굴로 조선시대 초기 서민들도 게다 형식의 나막신을 신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장진희 연구원)

 

 


무엇보다 재미있는 사실은 조선 정부가 시전 행랑을 만든 뒤, 이를 일반에 분양했다는 것이다.

 

“발굴된 시전 행랑 구조를 보면 한결같이 ‘방-마루-방-창고’, 즉 2칸 40평 정도의 규모로 조성됐습니다. 그러니까 40평 단위로 일반분양했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 나란히 있던 두 행랑의 벽을 뚫어 연결시킨 흔적도 보이는데, 이는 시전을 운영하면서 돈을 번 사람이 옆의 행랑까지 사서 가게를 넓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김홍식 교수)

 

 

 

청진동에는 우산과 생선, 자기 등을 판매한 시전행랑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폭삭 주저앉은 그대로 확인된 조선시대 시장인 시전(市厘)의 행랑(行廊). 조선정부는 시전을 개설하면서 방-마루-방-창고를 하나의 단위(40평 정도)로 끊어 일반분양한 것으로 보인다. 장사가 잘 되는 이는 바로 옆 가게를 사서 확장한 흔적도 엿볼 수 있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제공>

 

 

 

시전 행랑을 조성하기 전까지 종로 일대는 ‘뻘층’이었다. 한양에 도성을 건설할 때 하천은 지금의 종로에서부터 청계천, 을지로까지 꼬불꼬불 질펀하게 흘렀다. 만약 이 뻘층의 위까지만 도성을 건설하면 도성의 계획인구를 담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종로를 설정하고, 청계천을 중심으로 상업지구를 만들었다. 개천(청계천)을 최대한 남쪽으로 끌어내고, 적당한 거리를 두어 종로를 개설했다. 종로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통치기관인 궁궐이 배치되고, 남쪽으로는 개천을 중심으로 한 주거지와 상가를 두었다.

 

 

태종 14년(1414년)에는 종루~숭례문까지, 종묘 앞~동대문까지 길 양편에 시전 행랑을 지었으며, 종로 네거리에는 육의전(六矣廛·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아 국가 수요품을 조달한 여섯 종류의 큰 상점)을 설치했다.

 

 

이 일대엔 이미 민가가 1486채나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기와집이 126채나 되었다. 조선정부는 계획적인 행랑건설을 위해 이 민가들을 모두 철거했으며, 철거민들에게는 보상비를 지급했다.』(1)

 

 

청진 시전행랑 19번지 항공사진(사진=서울역사박물관)

출처; https://v.daum.net/v/20120712092512448 이데일리2012. 7. 12.

 

 

 


현재 ‘조선의 부활’을 알린 이 발굴 현장은 으리으리한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섰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2번 출구로 나와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인근 교보문고까지 대로변을 따라 걷다보면 줄지어진 대형 건물에 이질적인 구조물이 눈에 띈다.

 

 

 

 

D타워의 한옥구조물, 그랑서울에 유리 바닥 아래 청진동 시전 터, 르메이에르 건물에 붙어있는 피맛골 나무현판 등이다. 최신식 건물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이런 구조물은 문화재 보전과 청진동 옛 피맛골 거리를 녹여놨기 때문이다.

 

 

 

우선 D타워와 그랑서울이 들어선 곳에는 유리 덮개가 깔린 곳 아래 과거 청진동 시장 터가 남아있다. 건물을 짓기 전 터파기 공사 중 매장됐던 이 터가 발견됐다. 이를 훼손시키지 않고 보존하면서도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랑서울은 쌍둥이 빌딩 형태로 지어졌는데 건물 입구 측에 넓게 유리 바닥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곳 아래에는 조선시대 청진동 시전 행랑의 터를 볼 수가 있다. D타워에도 이 같은 터를 보존해 놨다. D타워 대로변쪽에는 한옥과 같은 구조물을 세워놨다. 이 아래에 청진동 시전 터를 유리 바닥 아래로 확인할 수 있다.

 

 

 

 

 

해당 건물들은 단순히 과거의 터를 보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종로구 르메이에르 빌딩에는 과거 청진동 피맛골 처럼 건물 한켠에 골목과 같은 장소를 마련해뒀다. 그랑서울도 청진상점가를 조성하고 이곳에 식객촌을 조성하기도 했다.』(2)

 

 

 

 

 

 

<주> 

 

 

(1)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7)‘조선의 부활’ 알린 청진동 - 경향신문 (khan.co.kr)2008.12.26

 

 

 

(2) https://v.daum.net/v/20141125170306783 2014. 11. 25.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2104241100029632021. 4. 24.

 

 

 

https://v.daum.net/v/202011302301141682020. 11. 30.

 

 

 

https://v.daum.net/v/201810090034294202018. 10. 9.

 

 

 

https://v.daum.net/v/20120712092512448 이데일리2012. 7. 12.

 

 

 

https://v.daum.net/v/20100620073111008 2010. 6. 20.

 

 

 

https://v.daum.net/v/202108011315142652021.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