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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조선(17) - 조선 고고학(1) 본문

남국/조선

조선(17) - 조선 고고학(1)

대야발 2024. 9. 4. 18:52

 

 

 

 

해자 바닥에 수북이 왜병 만행 ‘몸서리’

 

1731년(영조 7년) 어느 날.

동래성 수축을 위해 공사를 벌이던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은 경악했다.

땅을 파다가 임진왜란 때 묻힌 것이 뻔한 백골들이 다수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포환(砲丸)과 화살촉들이 백골 사이에 띠를 이뤘다. 이에 숙연해진 정언섭은 백골들을 수습한 뒤 비문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전(祭田)을 설치했다.

정언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향교에 넘겨 해마다 유생들에게 그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여지집성·輿地集成’ 기록에서)

 

도랑에 묻힌 415년 전의 역사

2005년 발굴된 동래읍성 해자의 모습과 출토유물들. 1592년 4월15일 벌어진 동래성 전투의 참화를 보여준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그로부터 꼭 274년 뒤인 2005년 4월 어느 날.

당시 경남문화재연구원 정의도 학예실장(현 한국문물연구원장)은 부산 지하철 3호선 수안동 전철역사 예정지를 지나다가 급히 차를 세웠다. 이곳은 3호선 역사 예정지로 확정되었을 때 사전지표조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유구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시내 중심가이고, 이미 현대적인 건물과 도로가 조성되어 있으니 지표조사는 사실 불가능했지요. 다만 이곳이 동래읍성과 불과 50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공사를 벌일 때는 전문가의 입회조사가 필수적이라는 의견을 냈어요.”

하지만 시공사 측이 별일 있겠느냐면서 공사를 시작했던 것인데, 그 모습을 정 실장이 본 것이었다. 당장 입회조사에 들어갔다.

“트렌치를 넣어보니 석축이 노출되는 거예요. 그 때만 해도 전기 동래읍성의 성벽 선(線)이라 생각했어요.”(김성진 경남문화재연구원)

갈수록 수상한 기운이 감지되는 유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벽으로 여겨졌던 석축의 반대편 쪽에도 또 하나의 석축이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물이 흘러간 흔적이 보이고….”(안성현 당시 조사팀장)

또 하나, 양쪽 두 개의 석축을 연결해주는 목제 가교(폭 110㎝×길이 500㎝)도 확인되었다.

“아! 이것은 처음엔 생각도 못했던 유구. 바로 해자(垓子)일 수밖에 없는 유구였습니다.”

해자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城)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 혹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도랑이다. 발굴단이 해자의 가능성을 머릿속에서 지웠던 것은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사순절도(東萊府使殉節圖·보물 392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1760년 변박(卞璞)이 그렸다는 이 순절도에는 해자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고고학 발굴은 그동안 확실하다고 여겨졌던 기록을 수정하고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그때부터 깜짝 놀랄 유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무말뚝이 해자 바닥에 쫙 깔려있고, 그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유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인골이 여기저기서 걸려나오고, 찰갑(札甲·철판을 이어만든 갑옷)과 첨주(첨胄·투구의 일종), 환도(環刀)와 깍지(궁수의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가락지), 창, 화살촉 등 정신없이 나왔습니다.”(안성현)

2005년 7월~2008년 1월까지 출토된 유물은 대단했다. 인골이 쏟아졌다. 그리고 완형 및 말린 형태의 찰갑이 각 1점씩, 첨주(투구의 일종) 1점, 화살촉 116점, 환도 16점, 도자(刀子) 21점, 장군전(將軍箭·총통에서 발사된 화살을 통칭) 5점 이상, 깍지 1점, 창 2점, 장검 같은 무기 1점 등등…. 하지만 발굴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인골이었다.

 

진혼제를 올린 사연

“출토인골들은 하지골이나 상지골~슬관절이나 주관절이 연결됐다던가, 두개골과 경추가 함께 확인됐다던가 하는 것은 인대와 근육이 붙어있는 단계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것, 즉 죽은 뒤에 해자로 유기된 것입니다.”(안성현)

특히 북서쪽에서 확인된 두개골의 경우는 20~40대 성인남자의 것으로 보였는데, 머리 뒤쪽에 구멍이 뚫려 있는 채였다.

“모두 무언가에 머리를 찔렸거나 베임을 당해 죽은 게지요. 발굴단은 고고학자로서 일생일대의 발굴이라는 좋은 기분보다는 선조들이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숙연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정의도)

발굴단은 곧 임진왜란 때 비명에 간 이들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를 지냈다. 아마도 274년 전 동래부사 정언섭도 같은 심정이었을 터. 하지만 발굴은 어렴풋한 1차 자료만을 제공할 뿐. 당시 발굴자들은 지금까지도 “20~40대 남녀의 인골은 확인되지만 어린아이의 것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단정. 고인골 전문가 김재현 동아대 교수에게 인골들은 400여년 간 맺힌 한을 풀어내듯 임진왜란의 참화를 생생하게 증언해주었다. 기자에게 따끈따끈한 분석자료를 건네준 김재현 교수의 목소리는 상기됐다.

“분석결과 인골이 최소 81개체로 확인됐는데요. 최대 114개체까지 보입니다. 대단합니다. 인골들은 모두 해자의 바닥에서 집중적으로 검출됩니다. 이것은 모두 같은 시기에 해자에 방치됐다는 얘기죠. 또한 두개골을 비롯한 상지골들이 흩어져 있지만 인위적으로 해체된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3차에 걸쳐 검출한 인골을 분류하면 남성이 59개체, 여성이 21개체에 이른다. 성별은 1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남양주 호평의 조선시대 민묘에서 확인된 인골 14개체 가운데 10개체가 40대이고요.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60년대 평균수명이 52.4세, 1970년대 평균수명이 남자 59.6세, 여자 67세인 것과 동래 희생자들을 비교해보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남녀노소가 모두 희생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살 유아와 20대 여인이 들려준 왜인의 만행

전쟁이라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인골을 친구처럼 여기는 김재현 교수마저 경악시킨 것이 있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피살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과, 그리고 바로 발굴단이 없다고 단언했던 어린아이 유골의 확인이다. 일단 유아인골을 보자.

“예. 이 어린이는 두개골의 발달상황으로 보면 소아(小兒) 단계도 아니고, 만 5세 미만의 유아(幼兒) 같아요.”

이 유아의 두개골에는 전두골의 우측에 총이나 활로 맞은 사창(射創) 혹은 칼·창 등으로 찔린 자창(刺創)의 흔적이 보인다.

“일본군의 조총에 맞은 흔적입니다. 조총의 총알이 부정형인데, 상처도 원형이 아니라 부정형의 둘쭉날쭉한 형태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상흔의 깨진 정도와 경사각도를 보면 이 유아는 전쟁통에 왜군이 쏜 조총에 비껴 맞았거나, 유탄에 의해 희생되었을 겁니다.”

기자는 태어난 지 5살도 안된 어린아이의 죽음과, 그 죽음을 지켜보며 절규했을 엄마, 그리고 일본군에 의해 해자로 던져지는 그 비극적인 상황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아니 그 엄마도 어린아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겠지.

두개골에서 확인된 상흔을 나눠보면 칼로 베인 절창(切創·모두 4개체로 남성 3개체와 여성 1개체), 총과 활에 의한 사창 또는 자창(2개체), 둔기에 의한 두개골 함몰(2개체) 등이다.

그런데 20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을 분석하던 김재현 교수는 눈을 의심했다.

“아 글쎄, 이 힘없는 여성의 머리를 두 번이나 칼로 벤 겁니다. 인골을 보면 알겠지만 이른바 전두골은 무자비한 단번의 칼놀림으로 예리하게 잘려있잖아요. 그런 상황인데도 두정골도 칼로 베고….”

그러니까 왜병은 이 여성을 두번이나 무참하게 칼로 벤 것이다. 더욱 눈을 의심하게 만든 것은 상흔의 부위를 보고나서이다.

“칼로 벤 상흔의 위치가 이상했습니다. 보통 전쟁통에 백병전을 벌일 때 칼을 휘두르면 얼굴의 양쪽 옆을 베기 마련입니다. 각도상으로…. 그런데 이 여인의 상흔을 보면 왜병이 왼쪽에 서서, 꿇어 앉아 있거나 고개를 숙인 여인을 내리친 것이 아닐까요.”

분석하던 김 교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혹 이것은 처형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병들이 아무 죄없는 여성을 꿇어 앉혀놓고 이렇듯 두번이나 칼로 내리쳐서 처형한 것이 아닌가.”

기자는 일제시대 때 일본군이 칼로 사람을 베기 직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고 몸서리친 적이 있다. 이렇듯 일본의 만행은 시공을 초월하여 반복된 것이다. 비단 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두개골 분석에서도 뒤에서 혹은 앞에서 칼로 벤 흔적이 남아있다.

“이뿐이 아닙니다. 칼로 베인 것 같기는 한데 그 창구(創口)의 단면이 반듯하지 않은 인골들이 있어요. 이것은 칼이 아니라 다른 무기로 베였다는 소립니다. 또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이 남녀 1개체씩 확인됐어요.”

그렇다면 모두 조선인들의 인골뿐인가. 적병들의 인골은 없는 것일까.

“인골은 우리가 살펴봤던 비참한 전투상황을 증언해줄 뿐 아니라 당대 한·일 양국 사람들의 형질이라든가, 영양상태를 알 수 있는데 분석결과 아주 재미있는 데이터를 얻었습니다.”

왜인들은 없었다

우선 당대 동래사람들의 영양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치아를 확인할 수 있는 두개골과 하악골 32개체 가운데 에나멜 질감형성(Enamel hypoplasia)이 26개체에서 확인됐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에나멜 질감형성은 영양실조에 의해 나타나는 선인데, 치아발육부진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동래인들의 키는 컸다. 남성인골 19개체의 평균신장은 163.6㎝, 여성 5개체의 평균신장은 153.4㎝였다. 이는 당대 일본 에도(江戶)시대 왜인의 평균 키(남성 155.09~156.49㎝, 여성 143.03~144.77㎝)보다 무려 8~10㎝ 컸다.

“영양상태는 좋지 않은데, 신체조건은 일본인들을 압도했다는 얘기예요. 남양주 호평에서 확인된 인골들의 평균키는 남성 161.2㎝, 여성 148.7㎝인데 이 역시 에도인들보다는 큰 것이죠. 당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열도 사람들보다 컸다는 얘기이고, 제한된 통계지만 동래인들은 더 컸다는 소립니다.”

형질인류학적인 분석에서도 차이가 났다. 동래인들의 두개장폭지수(頭蓋長幅指數), 즉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지수를 비교한 결과를 보자.

동래인의 두개장폭지수는 남성과 여성이 이른바 중두(Medium cranial·남성)와 단두(Short cranial·여성)인데 반해 에도인들은 장두(Long cranial·남성)와 중두(여성)에 자리잡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 분석된 동래읍성 해자 인골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일 뿐이고 왜인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어째서일까.

“저들의 시신도 있었겠지요. 다만 동래성 전투 이후 성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니까, 저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했을 거고, 조선인들은 모두 해자에 투기되었으며, 그 해자는 메워졌겠지.”(조유전 관장)(1)

 

 

 

 

조총 공세 속절없이 함락 왜병들 살육에 ‘아비규환’

“조선을 정벌할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라.”

1592년 1월,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위한 총동원령을 내린다. 왜병의 총병력은 30만명이었다.

마침내 4월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 여 명은 700척의 전함에 분승,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강토를 피로 물들인 치욕의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① 즉시 길을 비키라는 왜군의 회유에 맞서 “싸워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假道難)”는 내용을 쓴 목패를 던지는 송상현 부사. ②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 ③ 왜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는 모습. ④ 송상현 부사의 순절 직전 모습. 조복을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올린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⑤ 동래부민 김상과 아낙 2명이 왜병에게 기와를 던지며 싸우고 있다. ⑥ 적이 떠난 뒤 죽은 김상과 아낙 둘, 그리고 왜병 3명. ⑦ 송상현의 애첩 김섬이 자리를 피하다 잡혔지만 사흘 동안 왜병을 꾸짖고 욕하다가 역시 살해됐다. | ‘동래부사순절도’는 동래성 전투의 모습을 시간대별로 묘사하고 있다. 점선원안은 동래성 해자 발굴지점. (자료:육군사관학교 평가실 권소영 제공)

 

“죽어도 길은 비킬 수 없다”

부산 첨사(僉使) 정발(鄭潑)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던 중이었다가 급보를 받고 돌아와 성을 지켰다. 14일 새벽부터 벌어진 난전 끝에 정발은 전사하고, 부산진은 함락 당한다. 왜군의 다음 목표는 동래성이었다.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宋象賢·1551~1592년). 임란 1년 전 동래부사로 부임한 송상현은 성곽을 수리하고 성 외곽에 커다란 나무들을 빽빽하게 심어 성책을 삼는 등 왜의 위협에 대처했다.

왜군의 침략 소식이 전해지자 제승방략(制勝方略)에 따라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좌병사 이각 등이 동래성으로 모여들었다. 고을사람들도 속속 동원되었다. 제승방략은 적의 침입이 있을 때 수령이 각각의 병력을 동원, 자신의 진을 떠나 배정된 지역으로 가서 적군의 침략에 대처하는 체제. 하지만 이 체제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병력이 집중된 방어지역이 무너지면 속절없이 후방까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4일 오전 10시쯤, 부산진을 함락시킨 왜군이 동래성에 이르렀다. 왜군은 선발대 100명을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라고 항복을 종용한다. 송상현 부사는 일축한다.

“(네 놈들과)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

이 와중에 비겁자가 있었으니 경상좌병사 이각이었다. 부산 함락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성을 빠져나간다. 그러면서 군색한 핑계.

“(송)부사는 이 성을 지키시오. 나는 외부에서 협공하고 지원할 것입니다.”

송상현이 “함께 싸우자”고 간청했으나, 이각은 성문을 빠져 나갔다. 부산 해안 방어를 맡고 있던 경상좌수사 박홍(朴泓)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동래성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황으로 빠져든 것이다. 송상현 역시 “일단 물러나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받지만 단칼에 일축한다.

“성주가 자기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조선군의 투구와 무기류.

 

15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된다. 궁시(弓矢) 위주의 방어로는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鳥銃)의 화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2005년부터 동래읍성 해자 발굴을 지휘했던 정의도 당시 경남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현 한국문물연구원장)의 해석.

“출토 무기를 보면 화살촉이 절대다수(116점)에 달합니다. 물론 총통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장군전(將軍箭)도 5점 이상은 되지만 조선군의 기본 병기는 활과 화살이었던 겁니다.”

송상현 부사는 부산성이 왜군의 맹렬한 조총 공격에 녹아난 것을 알고는, 통나무 방패로 방어책을 세웠지만 별무신통이었다.

‘무기요람(武器要覽)’에 나오는 “숲에서 나는 새도 모두 떨어뜨릴 수 있으니 그래서 이름을 조총(鳥銃)이라 했다(卽飛鳥之在林 階可射落 因是得名)”는 구절을 보라. 조선인이 느꼈던 조총의 위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총신이 1m가량인 조총은 유효사거리 100~200m, 명중거리 50m였고, 분당 사격 4발에 이르렀다.

“오죽했으면 선조가 ‘조총은 천하의 신기(鳥銃者 天下之神器也)”라고 감탄했을까. 조선에도 총통 같은 무기가 있었지만 조총병이 3열을 이루며 차례로 돌며 사격하는, 그래서 비를 뿌리듯 사격할 수 있는 조총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게지.”(조유전 토지박물관장)

동래성을 겹겹이 에워싼 왜군의 총공세가 이어지고, 동래성은 뚫리기 시작한다.

“총성이 울리고 그 검광은 백일을 무색하게 했으며, 적군이 성중에 들어와 사람으로 메우다시피했다.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 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임진동래유사’)

송상현 부사도 위기에 처했다. 왜적 가운데는 통신사로 조선을 드나들던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이가 있었다. 통신사 시절 송상현의 후대(厚待)를 받은 경험이 있는 평조익이 급히 나서 송상현에게 “빨리 피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송상현이 꿈쩍도 하지 않자 평조익은 부사의 옷을 잡아당겨 성벽의 빈터를 가리켰다.

하지만 송상현 부사는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4번 절하며 담담하게 죽을 준비를 했다. 그런 뒤 태연히 붓을 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외로운 성에는 달무리가 지고 다른 군진에는 기척도 없군요.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정은 가볍습니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양산군수 조영규도 송상현 부사와 함께 죽었고, 송부사의 겸인(겸人·집사) 신여로, 비장(裨將) 송봉수·김희수, 향리(鄕吏) 송백 등 송부사의 핵심 측근들도 모두 살해됐다. 동래향교 노개방과 유생 문덕겸·양조한 등도 함께 순절했다. 왜장도 송상현 부사의 순절에 감동해서 장례를 돕고 제사를 지냈으며, 심지어는 송상현을 죽인 자를 끌어다 죽였다고 한다.

“갑오년(1594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송상현의) 집안사람으로 하여금 시체를 거두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경내에서 벗어날 때까지 호위해주었다. 적진에 남겨진 유민들이 울며 송상현의 시신을 전송했다.”(‘선조수정실록’)

 

소름끼치는 살육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죄 없는 백성들의 넋이다. 이들은 조국을 위해 칼과 낫, 곡괭이, 심지어는 맨손으로 적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힘 없는 여성과 어린아이까지 속절없이 적병의 창칼에 스러졌다. 기록에 나오는 사례만 보자.

동래읍성에서 나타난 유일한 왜병의 무기(국지창).

 

‘임진유문(壬辰遺聞)’에 따르면 동래부민 김상(金祥)은 동네 아낙 두 사람이 깨 준 기와로 적병을 내리쳤다. 적이 떠난 뒤 김상의 어머니가 보니 김상과 두 아낙이, 적병 세 사람과 함께 죽어 있었다.

또 한 사람 비극의 주인공은 송상현 부사의 애첩인 김섬(金蟾)이다.

“송상현의 애첩 김섬은 함흥의 기녀였다. 송상현이 순절할 즈음에 적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사흘 동안이나 적을 꾸짖고 욕하다가 죽음을 당했다.적도 이를 의롭게 여겨 관구를 갖추어 송상현의 곁에 장사를 지냈다.”(‘임진유문’)

이밖에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왜군 자료에 따르면 동래성 전투로 왜군은 참수 3000여명, 포로 5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서정일기·西征日記)’)

또 당시 일본에서 예수회 선교사로 활동했던 루이스 프로이스(Lois Frois)는 조선군 전사자가 약 5000명이라고 했다. 이는 물론 민간인 희생자를 포함한 수치일 것이다.

“반나절 만에 끝난 전투인데, 이런 참담한 수의 조선인이 몰살당했다는 얘기잖아요. 정말 소름끼치는 살육현장이었을 겁니다.”(조관장)

좁은 성 내에서 아비규환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조정로가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성에 갔는데, 성 안이 온통 시체로 덮여있어 유골을 수습하지 못했다.”(‘충렬사지·조공유사기(趙公遺事記)에서’)

임진왜란 후 17년 뒤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의 글.

“4월15일 청명에 집집마다 곡소리가 일어나 ~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동래)성이 함락된 날이라 했다. 송상현 부사를 좇아 모인 성안 백성들은 피바다로 변하고 쌓인 시체 밑에 투신하여 천 명 중 한 두 명이 생명을 보전할 정도였고, 조손·부모·부부·자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족을 제사지내며 통곡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내(이안눌)가 눈물을 흘리자 늙은 아전은 ‘곡해줄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적의 칼날에 온 가족이 죽어 곡해 줄 사람조차 남지 못한 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이안눌의 ‘맹하유감사(孟夏有感祠)에서’)

이 동래성 전투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이들은 동래성의 비극에 자극받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갔다. 1760년 변박(卞璞)이 개모(改模)한 ‘동래부사순절도(보물 392호)’는 1592년 4월15일의 끔찍한 전투 장면을 묘사해놓고 있다. 하지만 그림은 송상현 부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부분의 일이다. 왜군이 자행한 수많은 백성들의 무자비한 죽음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고고학 자료이다. 동래부사 정언섭은 1731년 동래성을 수축하다가 1592년 4월15일 살해된 이들의 인골을 확인했는데, 그 숫자는 최소 12명이었다. 당시 정언섭이 건립한 ‘임진망전유해지총(壬辰亡戰遺骸之塚)’ 비문을 보자.

“전후에 발굴된 유골 수는 대개 열둘이지만 이는 특별히 그 형체와 해골이 완연한 것이고, 그 잔해의 조각조각이 떨어져 부스러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남겨진 왜병의 국지창

다시 그로부터 280년 가까이 흐른 2005~2008년 사이 이번에는 지하철 건설을 위한 공사장에서 다시금 410여 년 전의 참극의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이다.

“얼마나 억울했기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동래사람들의 넋이 자꾸 되살아나는 걸까요?”(조관장)

그렇다. 이번에는 무자비한 칼놀림 두 방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죽었을, 그래서 눈도 감지 못했을 20대 여성과, 그리고 왜병의 총탄에 뒷머리를 명중해 하염없는 피를 흘리며 죽어갔을 5세 미만 유아가 1592년 동래성의 참상을 증언해주고 있다.

또 하나, 그렇다면 가해자인 왜군의 흔적은 정녕 없는 것일까.

왜군은 동래성 전투의 승자. 그렇기에 전투 중에 당한 왜군 사상자와 무기를 여유롭게 수습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전투 중에 죽였든, 참수 혹은 처형을 했든 조선인의 시신과 무기들은 해자에 투기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해자를 메웠을 것이다.

왜군의 시신과 무기가 발견되기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단 하나. 당시 발굴자였던 정의도는 해자에서 발견된 전체 길이 54㎝ 정도 되는 철제 무기가 바로 일본계 무기인 국지창(菊池槍)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무기가 정식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것은 이 국지창이 처음입니다.”

발굴을 통해 고고학 자료로 출토된 왜군의 유물이 처음이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단다.

이번 발굴은 ‘동래부사순절도’가 묘사한 동래성 전투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동시에, 그림이 빠뜨린, 그래서 뭇 백성들의 넋이 잇달아 증거하는 역사적 진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왜군의 침략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왜군의 유물까지. 이것이 바로 이재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장 같은 이가 누누이 강조해온 바로 ‘전쟁고고학의 성과’이다.(2)

 

 

 

 

'조선의 상징' 사직단 복원 첫발..전사청 권역 발굴

YTN2015. 11. 20. 23:36

 

tv.kakao.com/v/v4047ckc33ZABqkcq6vvqdB@my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자 종묘와 함께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사직단을 복원하기 위한 첫 번째 사업인 전사청 권역 발굴이 마무리됐습니다.

문화재청은 울산문화재연구원이 지난 4월부터 전사청 권역을 조사한 결과 전사청을 비롯한 건물 5동과 주변 담장 터를 확인하고, 다량의 기와와 수막새, 분청사기, 청화백자를 출토했다고 밝혔습니다.

올해 발굴이 이뤄진 전사청은 제례를 준비하고 총괄한 시설로 제물을 준비하던 재생정, 제사용품을 보관하는 창고인 제기고, 사직단을 관리하는 관원의 거처인 수복방, 절구를 두고 곡물을 찧던 저구가의 유구가 함께 나왔습니다.

 

사직단은 사직대제가 폐지된 뒤 1922년 공원으로 바뀌었고 1941년에는 수영장이 만들어져 건물터가 훼손됐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지하 2m 지점에서 고증자료와 상당 부분 일치하는 유구가 확인됐습니다.

이번 발굴조사는 2027년까지 진행되는 사직단 복원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재청은 164억8천만 원을 들여 건물 13동을 복원하고 3동을 보수할 계획입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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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투현장 부산 다대진성의 해자 발견

부산박물관, 주택신축 공사현장에서 발견해 정밀발굴조사
동래읍성 해자처럼 전투 관련 유물 출토 가능성

기자김영동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16-07-26 15:50
조선시대 수군진성으로 임진왜란 전투 현장이었던 다대진성 터에서 성곽 방어시설인 해자가 처음 발견됐다. 사진은 이번에 발견된 다대진성 해자의 바깥벽 모습. 부산시 제공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부산 다대진성 터에서 해자가 처음 발견됐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도랑처럼 만든 방어시설을 말한다.

부산박물관은 지난달 27일 부산 사하구 다대동의 주택신축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진성 ‘다대진성’의 해자를 처음 발견했다고 26일 밝혔다. 다대진성 동북쪽 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해자에선 채움 돌과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됐다.

부산박물관은 다대진성이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처럼 치열한 전적지였던 점으로 미뤄, 해자에서 또다른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정밀 발굴조사하기로 했다. 동래읍성 터에선 2005년 4월 부산도시철도 건설 과정에서 해자가 발견돼, 왜란 당시 전투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골 등 유물이 대거 출토된 바 있다.

다대진성은 1490년(성종 21년) 부산 해안과 낙동강 방어를 위해 돌로 쌓은 둘레 541.8m, 높이 3.9m 규모의 수군진성으로, 병선 9척과 수군 700여명이 주둔했다고 한다. 1592년 음력 4월14일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한 뒤 다대진성을 공격했다. 다대진 첨사 윤흥신 장군은 수적 열세에도 잘 싸워 왜군의 1차 포위 공격을 물리쳤다. 일부 병사가 퇴각을 권유했지만, 장군은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왜군은 이튿날 대군을 이끌고 다대진성을 다시 포위 공격했고, 결국 성은 함락됐다. 윤흥신 장군은 남은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왜군에게 뛰어들어 분투하다 전사했다.

다대진성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 동래읍성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지만, 변방의 진성이라는 이유로 사서에 그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윤흥신 장군 등은 1757년(영조 33년)에야 그 공을 인정받았고, 1765년(영조 41년) 그 충절을 기리는 윤공단(부산시기념물 제9호)이 세워졌다.

다대진성은 1894년 폐성된 뒤 관련 기관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않았고, 현재 성터에는 주택 등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부산도시철도 1호선 연장선인 다대선 공사구간도 성터 북서쪽 일부를 관통하고 있다. 부산 사하구는 지난 2월부터 다대진성 흔적을 찾는 기초조사 용역을 진행 중이다.

사하구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다대진성 복원은 현실적으로 힘들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성벽과 해자의 보전관리가 최우선이다. 이후 성터 근처에 역사박물관 등을 세워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11)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주>

 

 

(1)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2) 동래읍성 上 - 경향신문 (khan.co.kr)

 

 

 

(2)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23) 동래읍성 下 - 경향신문 (khan.co.kr)

 

 

 

(3) 임진왜란 전투현장 부산 다대진성의 해자 발견 (hani.co.kr)2019-10-19

 

 

 

(4) '조선의 상징' 사직단 복원 첫발..전사청 권역 발굴2015.11.20

 

 

 

 

<참고자료>

 

 

 

 

조선왕실 상징적 공간 '전주부성지', 전북도 기념물 지정 (daum.net) 2023. 11. 3. 

 

 

 

 

 

[함안24시] 함안군, 조선시대 자기 유적 발굴…道 문화재 지정 추진 (daum.net)2023.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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