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조선(16) - 조선의 과학자들 본문
600년전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섰던 조선 천문학
조선 천재 천문학자 김담 탄생 600주년…한양 기준의 독자적 역법 구축
내일 고등과학원서 기념 학술회의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 내년은 조선 세종 시대의 천재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무송헌(撫松軒) 김담 선생(1416∼1464)이 태어난 지 600년이 되는 해다.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는 이미 600년 전에 우리 천문학의 깊이와 정교함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천문학자다.
김담은 19세에 집현전 학사가 된 뒤 문신 겸 천문학자인 이순지와 함께 당시 국립천문대에 해당하는 '간의대'에서 천체를 관측하고 독자적인 역법(曆法)을 확립했다.
우리 민족 최초의 자주적 천문학 체계를 수립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김담은 19살 때 형 김증과 함께 문과에 급제해 형제가 같이 집현전 정자(正字·정9품)에 임명됐다. 집현전 학사 중 형제가 나란히 선발된 유일한 경우였다.
김담의 총명함은 곧 세종의 눈에 띄었고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한 그는 이순지와 함께 문과 급제자로는 예외적으로 과학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담은 천문학 외에도 세법, 측량, 제방 축조 등 수학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 크게 활약했다.
세계 과학사가 중에는 "14세기가 원의 곽수경, 16세기가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였다면 15세기는 세종의 시대였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세종은 1434년(세종 16년) 간의대(지금의 천문대)를 설치하고 이순지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순지 모친상을 당해 자리를 비웠을 때 김담이 이를 대신 맡는데 이때 출중한 능력을 여실히 드러내 이후로도 이순지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김담은 이순지와 함께 '칠정산(七政算) 내편'과 '칠정산 외편'을 비롯한 많은 천문역서를 교정·편찬했는데 이 칠정산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만든 최초의 역법이었다.
이전까지는 통상 중국의 역서를 수입해다 그대로 쓰는 데 그쳤지만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대통력에 기반하면서도 베이징이 아닌 한양을 기준으로 제작됐다. 당시 전 세계에서 독자적인 지방시를 시행한 유수의 나라들에 조선이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 결과 당시 김담 등은 한양의 일출·일몰 시각과 밤낮의 길이를 구했고, 한양의 동짓날 낮의 길이가 위도가 높은 베이징에 비해 14분 이상 길다는 것도 밝혀냈다.
또 이미 당시 1년의 길이가 365.2425일(실제 365.2422일), 한 달의 길이가 29.530593일라는 것까지 정교하게 계산해냈다.
심지어 세종 29년(1447년) 8월에는 그달 그믐에 있었던 일식과 보름에 있었던 월식을 예측하고 관측한 뒤 예측치와 관측치의 차이를 기록해 놓기도 했다.
'칠정'은 태양과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가리키며, 칠정산은 이를 이용해 날짜와 절기 등을 계산하는 법이란 뜻이다.
칠정산 편찬 과정에 사용된 정밀한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와 간의 등을 당시 세종과 조선학자들이 직접 제작했고, 이를 이용해 한양의 경·위도와 동·하지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다.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는 "김담 등이 확립한 천문학은 한양을 기준으로 태양과 오행성을 계산할 수 있는 독자적인 체계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정확성이 동시대 다른 천문 연구보다 앞선다는 점에서 세계적 수준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김담이 체계화한 우리나라 천문학적 지식은 150년가량이 지난 뒤 또 한번 빛을 발했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에서 가장 최근에 관측된 초신성에 대한 인류의 가장 정교하고 풍부한 관측 데이터가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은하에서 가장 최근에 관측된 초신성은 1604년에 관측됐다. 400년째 우리 은하에서는 초신성을 구경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1604년의 초신성은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 관측돼 '케플러 초신성'이라고도 불리지만, 케플러의 관측 데이터보다 더 상세하고 풍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는 초신성의 밝기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담겨 있어 이 초신성이 어떤 유형인지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고등과학원은 한국천문학회 부설 소남천문학사연구소 및 한국과학사학회와 함께 24일 서울 동대문구 고등과학원에서 김담 탄생 60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김담의 후손이기도 한 김제완 서울대 명예교수(물리학)는 '케플러와 조선의 1604년 초신성 관측 비교'란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다음 달 10일에는 과천국립과학관이 '천문학자 김담의 밤'이란 주제로 김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강연회를 연다. 내년 10월에는 과학문화진흥원이 주최하는 '김담 탄생 600주년 천문학 국제학술대회'가 김담의 고향인 영주의 동양대에서 개최된다.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의 초신성 관측 데이터는 케플러의 데이터가 담지 않은 정보를 제공해 이 초신성이 어떤 유형인지 밝혀낼 수 있게 해준다"며 "또 이는 초신성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데이터"라고 말했다.(1)
sisyphe@yna.co.kr
[주간조선] 혜성의 꼬리 방향까지 기록한 조선시대의 천문학자들
“조선왕조실록과 중국 실록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왕이 그것을 열람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중국 황제는 자신의 기록을 보고 고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천재지변 현상이 왕의 허물이라고 생각하는 옛날에는 일상적인 일이었죠. 우리나라 실록에는 관측 기록들이 고쳐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에도, 중국에도 천문 기록이야 남아 있지만 우리만큼 상세하고 정확하지 않습니다.”
안상현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삼국시대 초기부터 2000년 넘게 보관돼 있던 우리 조상의 혜성 관측 기록을 모아 정리한 책, ‘우리 혜성 이야기’(사이언스북스)를 냈다. 안 선임연구원은 지난 2월 20일 서울 광화문 주간조선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나 우리 천문 관측의 역사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체계적이고 우수하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20세기 초 우리나라에 근대 천문학을 전해 준 칼 루퍼스라는 인물은 ‘고대 한국의 천문학’이라는 책을 통해, 관측 자료들이 매우 구체적이고 규칙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했어요. 실제로 2000년 사료를 죽 살펴보다 보면 지금 보아도 놀라운 기록들이 많아요.”
안 선임연구원이 서울대에서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전공 분야는 천체물리학 쪽이었다. 그러나 2001년 사자자리 별똥소나기를 계기로, 영국 유학을 다녀오면서 우리나라의 고서를 읽으며 역사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천문학계에서 어떤 발견이 있었는지 연구하는 것은 ‘천문학사’입니다. 천문학적 아이디어에서 만들어진 유물을 연구하는 것은 ‘고고천문학’인데요, 첨성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일본, 미국 별자리가 다 다르잖아요. 그것을 연구하는 건 ‘민속천문학’ 분야입니다. ‘역사천문학’은 과거의 관측 자료를 현대의 천문 과학 입장에서 분석하는 것입니다.”
‘우리 혜성 이야기’에는 역사천문학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우리나라 혜성 관측 역사가 죽 펼쳐져 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은 하늘을 관측하는 관원과 관청을 따로 둘 정도로 천문에 관심이 많았다. 삼국통일 전 신라에는 사천대(司天臺)라는 관청이 있어 천문박사들이 관측 업무를 맡았고, 백제에는 일관(日官), 고구려에는 일자(日者) 등의 직책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서운관(書雲觀)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관상감(觀象監)을 세워 꾸준히 천문을 관측했다. 특히 혜성이나 별똥 같은 현상은 자연현상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관찰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고려 초기의 150년 정도 기록이 유실됐다는 것입니다.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것이 936년이었는데, 1100년에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상당히 많은 자료가 불타 없어졌어요. 이 중에는 고려 서운관의 자료뿐 아니라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며 들고 왔던 신라시대의 관측 자료들도 포함돼 있었지요.” 안상현 연구원은 “1054년에 폭발한 게성운 초신성을 관측한 자료도 있었을 텐데 유실돼 아쉽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에는 혜성이 관측됐을 때 ‘성변측후단자’를 작성했다. 영조 35년인 1759년 음력 3월 6일 조선 하늘에 혜성이 발견됐다. 당시 환갑이 넘어 집에서 쉬고 있던 천문학자 안국빈도 왕의 부름을 받고 입궁해 혜성을 관측했는데, 이들은 혜성의 좌표, 위치, 변화, 색깔, 꼬리 등을 규정에 따라 일일이 글로 적었다. 안상현 연구원은 “그때 나타났던 혜성이 유명한 핼리 혜성”이라고 설명했다. “핼리는 174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758년 말에 혜성이 나타날 것이라 예측했죠. 조금 늦어져 1759년에 실제로 관측이 됐는데, 저는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성변측후단자’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그 당시 핼리 혜성이 관측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천문 관측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핼리 혜성이 관측됐을 당시 영조의 가장 큰 관심사는 혜성의 ‘꼬리가 어느 방향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안 연구원은 “혜성 꼬리 방향이 나타나는 지방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꼬리가 서남쪽을 향했다는 보고를 듣고 영조는 ‘내가 부덕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한다”고 말했다. 특히 영조 46년(1770년)의 승정원일기를 보면 천문 관측의 이유를 밝혀 “나는 측후(관측)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저 하늘에 정성을 다하여 저 하늘이 굽어살피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안 연구원은 “우리 조상의 관측 방식은 과학적이었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과학적이지만은 않았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조상의 관측 기록을 다시 살펴보면 현재 천문학의 발전에도 도움을 줄 만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100년, 200년 주기로 도는 혜성의 경우에는 지금 나타난다 하더라도 옛 기록을 분석해 그 주기를 밝힐 수 있고, 서구에서는 관측됐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묘연하던 관측 사실들을 우리 자료를 통해 밝힐 수 있습니다.” 안상현 연구원은 “아직도 남아 있는 자료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천문학 분야는 그렇지 않아도 얕은 우리나라 천문학 인프라 중에서도 유독 연구 인력, 자원 등이 부족한 편이다. “역사천문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인문학과 과학의 융합 학문입니다. 천체물리를 모르면 자료를 현대 천문학 이론으로 분석할 수 없고, 한문을 읽을 줄 모르면 자료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역사천문학자라고 해봤자 전국에 20~30명 남짓인데, 그나마도 천문학을 주 전공으로 하는 사람은 5~10명에 불과할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할 일이 더 많기도 하다. 최근에는 온종일 666년에 출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학 연구서를 번역하는 데 매달리고 있다고 한다.
안상현 연구원은 “왜 옛날 혜성 관측 자료를 연구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천문학의 역사를 다시금 되짚었다. “망원경이 발명된 것은 400년 된 일입니다. 워낙 먼 거리의 별들을 관측하다 보니 빛을 관측해서 어떤 원소로 이뤄졌는지 분석하는 분광학이 필수적인데, 분광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 겨우 150년 됩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의 천문 관측 역사는 2000년입니다.” 안 연구원은 “이번에 분석한 혜성 자료는 물론 앞으로 재해석될 수많은 자료가 우리 천문학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2)
국내 最古 천문도 따로 있다?
- 업데이트 2009년 9월 25일 02시 07분
“현존 최고 국보 228호보다 시기 앞선 듯”
핼리혜성 관측 일지 ‘성변등록’도 공개
15일 오후 연세대 학술정보원(옛 중앙도서관) 내 전시실. 옛 천문도와 천문학, 수학 관련 고문서 40여 점이 13일부터 전시 중이다. 다음 달 28일까지 계속되는 ‘한국 과학의 전통과 연세’를 주제로 한 전시회다.
전시작 중 조선시대의 필사본 천문도 한 점이 눈길을 끈다. ‘건상열차분야지도(乾象列次分野之圖·가로 74cm, 세로 140cm)’. 이 천문도의 별자리 그림은 국내 최고(最古) 천문도인 국보 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각석’은 돌에 새겼다는 뜻)을 닮았다. 이름도 맨 앞 글자만 다를 뿐이다. ‘乾’도 하늘이란 뜻이니 의미는 같다.
‘국보 228호의 필사본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유물을 소개한 글이 눈에 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제작을 위해 시작(試作)한 것으로 추측되는 자료다.” 이 추정이 맞다면 국보 228호보다 제작 시기가 앞서는 국보급 천문도인 셈이다.
그 근거는 뭘까. 발문에 적힌 이 유물의 제작 시기는 ‘홍무(洪武) 28년’으로 1395년(태조 4년)이다. 국보 228호의 제작 시기는 1395년 음력 12월로 제작 연도가 같다.
‘한국천문학사’를 펴낸 나일성 연세대 명예교수는 국보와 같은 계통의 천문도이면서 구성이 다르고 국보 제작을 주도한 권근(1352∼1409)의 이름만 발문에 적혀 있는 점에 주목했다. 국보에는 권근 등 제작에 참여한 학자 12명의 이름과 관직이 적혀 있다.
이 유물은 또 국보와 달리 별자리 그림 바깥 둘레에 주천도수(周天度數·하늘의 둘레를 나타낸 눈금)가 없다. 국보 천문도는 18세기까지 절대적 권위를 누렸기 때문에 국보 이후 제작된 같은 계통의 목판본, 필사본 천문도는 구성과 별자리 그림이 국보와 똑같은 데 비해 이 천문도는 국보와 달라 후대 유물로 보기 어렵다는 게 나 교수의 설명. 나 교수는 “권근의 이름만 적혀 있는 것으로 볼 때 천문도를 돌에 새기기 전 실수를 줄이기 위해 만든 여러 시안 가운데 한 점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필사본 천문도(가로 83.5cm, 세로 139cm) 한 점도 주목된다. 이 천문도는 국보 228호 계통의 천문도지만 별자리 그림의 방위가 국보에 비해 시계 방향으로 90도 틀어져 있고 별자리 그림을 28구역으로 나눈 ‘28수(宿)’의 구획을 나타내는 방사선, 적도와 황도, 주천도수가 없다.
나 교수는 이 천문도가 고려 13세기 말∼14세기 초에 제작된, 국보의 모본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후대의 필사본이라면 국보와 천문도의 구성이 다를 리 없고 별자리 그림 이외의 구성 요소가 이처럼 간략할 수 없다는 것.
국보 228호는 고구려의 천문지식을 기초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 교수는 “‘고려사’에, 탁월한 천문학자 오윤부(?∼1305)가 ‘일찍이 스스로 천문을 그려 바쳤더니 일자(日者·날의 길흉을 점치는 사람)가 다 취하여 이를 본받았다’고 적혀 있다”며 “천문도의 아이디어가 조선시대에 갑자기 나타났을 리 없는 만큼 고려시대에 제작된 다양한 종류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작 중 조선시대에 천문, 지리학 등의 사무를 맡았던 관청인 관상감의 핼리혜성 관측 기록이 적힌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22호 성변등록(星變騰錄)도 흥미롭다.
이 유물은 1759년 3월 5일 출현한 핼리혜성이 3월 29일 소멸할 때까지의 변화상을 빠짐없이 관측 기록한 것이다. 날짜별로 혜성의 이동 경로, 혜성의 꼬리 길이, 모양, 색깔까지 자세히 기록했고 3월 27일 혜성이 보이지 않는데도 혜성이 소멸한 것으로 추측할 뿐 관측을 계속해 29일 소멸을 확정했다.
김영원 연세대 학술정보원 국학연구실장은 “당시 핼리혜성은 전 세계에서 관측돼 기록으로 남았지만 ‘성변등록’처럼 상세한 기록은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3)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천문·풍수·기상·사주 관장… 케플러보다 4일 먼저 초신성 폭발 발견[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잡과에 합격한 65명 구성
‘조선 자연과학’ 전문가들
천문학, 천문과 기상 연구
지리학, 무덤 등 풍수지리
명과학, 사주팔자 명리학
1604년 10월13일 실록
‘초신성 발견’ 상세 기록
세종이 인정했던 이순지
‘제가역상집’은 당대 최고
관상감(觀象監)은 지금의 기상청, 천문관측소 같은 곳으로 천문, 풍수지리, 달력, 기상관측, 시간측정, 사주팔자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관상감의 원래 명칭은 서운관(書雲觀)이었는데, 세조 대에 이르러 관상감으로 개칭되었다. 연산군 시절에는 잠시 사역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중종 때 다시 관상감으로 환원되었다.
이곳의 관리들은 모두 잡과(雜科)에 합격한 사람들인데, 명실공히 자연과학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 관상감에서 연구하는 학문은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 등이었다.
천문학은 말 그대로 천문과 기상을 연구하고, 지리학은 어느 곳에 집을 지으면 좋은가, 무덤은 어디에 쓰면 좋은가 등을 알아보는 풍수지리를 말하는 것이고, 명과학은 앞날의 운세를 알아보는 사주팔자학 같은 명리학을 말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명과학은 고려 때부터 시각을 잃은 맹인들이 전문으로 해왔다. 이 외에도 과거 시험이나 임금의 행차와 같이 국가 대사의 일정을 잡을 때, 예조에서 기안해서 올리면 관상감에서 좋은 날짜를 정해서 시행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관상감의 관원은 65명이다. 정1품 영사는 영의정이 겸하고, 그 아래 제조 2명이 겸직으로 있고 정3품의 정 아래로 부정, 첨정, 판관, 주부, 천문학 교수, 지리학 교수, 직장, 봉사, 부봉사, 천문학 훈도, 지리학 훈도, 명과학 훈도, 참봉 등의 관직과 다수의 임시직이 있었다.
조선 천문학의 수준은?
현대인들의 생각으론 조선 시대에 천문학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별을 보고 점이나 치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천문학은 결코 서양에 뒤지지 않았다. 요하네스 케플러가 독일의 유명한 천문학자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케플러 초신성’이라는 용어는 좀 생소할 것이다. 케플러 초신성은 1604년 10월 17일에 관측한 초신성 폭발 현상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케플러가 초신성을 관찰하기 4일 전인 10월 13일에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먼저 이를 발견한 내용이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밤 1경(更)에 객성(客星)이 미수(尾宿) 10도의 위치에 있었는데, 북극성과는 1백 10도의 위치였다. 형체는 세성(歲星)보다 작고 황적색(黃赤色)이었으며 동요하였다.’(선조 37년 9월 21일)
이 내용을 쉽게 풀어 놓자면, 17시에서 19시 사이에 떠돌이별(객성)이 전갈자리(미수) 10도의 위치에 있었는데, 북극성과는 110도의 위치에 있었으며, 크기는 목성(세성)보다 작고 빛깔은 황갈색이었으며, 움직이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 당시 음력 9월 21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13일이니, 케플러가 초신성을 발견한 시간보다 4일 앞서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초신성을 발견한 셈이다.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조선 천문학자들은 별을 보고 점을 치는 따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객성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후에도 이듬해 3월 15일까지 무려 6개월 동안 50여 차례에 걸쳐 관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이한 천문현상 때문에 당시 선조는 몹시 불안해했다. 객성의 출현은 나라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징조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현상과 관련하여 홍문관에서는 천재지변이 생긴 만큼 임금은 몸과 마음을 삼가야 한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이때 관측된 초신성은 결국 폭발했는데, 초신성이 폭발한 이유는 태양을 제외한 대개의 별은 쌍둥이 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별이 함께 돌다가 결국 서로 부딪쳐 폭발하는 것이다.
천문학 대가 이순지와 ‘제가역상집’
관상감 소관인 조선의 천문학을 거론하자면 이순지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이순지(李純之)는 지사간 이맹상의 아들이며,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자는 성보(誠甫), 본관은 양성(陽城)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천문학에 관심이 깊던 세종은 명석한 문인들을 따로 뽑아 산학(수학)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도 그중 하나였다. 이순지는 이 무렵에 이미 역산(曆算, 천체 수학)에 정통한 상태였다.
세종이 그 명성을 듣고 이순지를 불러 물었다. “지도상으로 우리나라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아느냐?” “본국은 북극에서 38도 강(强)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순지를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중국에서 온 산학자(수학자)가 천문학 책을 바치자, 그에게 세종이 물었다.
“우리나라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대는 잘 알겠군.” “고려(당시 중국에서는 조선을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북극에서 38도 강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그 소리에 세종은 이순지를 의심했던 것을 크게 반성하고, 역산에 관한 한 이순지의 말을 모두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의 역산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자, 세종은 그에게 고래의 역법을 상고하여 사실과 맞지 않는 부분을 수정하는 작업을 시켰다. 이후로 그는 3년 동안 역법 교정에 전념하였고, 이 기간 역산의 대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의 역산 능력을 높이 평가한 세종은 그를 서운관에 예속시켜 간의대 업무를 보게 했다. 간의대는 천문을 관측하여 별의 운행과 변화를 기록하고 그 원리를 파악하는 곳으로 요즘의 천문관측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장영실, 이천 등과 머리를 맞대고 간의(簡儀), 규표(圭表), 앙부일구(仰釜日晷), 보루각(報漏閣), 흠경각(欽敬閣) 등을 제작했다.
세종은 정4품 벼슬에 있던 그를 1443년에는 동부승지로 전격 발탁했다. 동부승지는 공조를 맡은 비서관인데, 이순지를 이 직책에 배치한 것은 과학, 특히 천문학 분야의 업무를 세종이 직접 챙기겠다는 의미였다.
이 시절에 세종은 이순지에게 천문학에 관한 새로운 서적을 편찬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종래의 천문역서가 가진 문제점을 보완하고 중복된 부분을 삭제하여 긴요한 사항들만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445년(세종 27년) 3월 30일, 드디어 이순지가 세종의 명령을 실천에 옮겼으니, 바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의 편찬이 이뤄진 것이다. 4권 4책으로 이뤄진 이 책의 제1권은 천문, 제2권은 역법(曆法), 제3권은 의상(儀象), 제4권은 구루(晷漏, 해시계와 물시계)를 다루고 있다.
일월(日月)과 오성(五星·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움직임에 관한 책인 ‘칠정산 내외편’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천문역서인 ‘제가역상집’은 이순지와 세종의 천문학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역작이다.
천문학의 요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역산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더라도 한눈에 알 수 있게 만든 점이 이 책의 강점인데, 이는 실용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던 세종의 면모와 고금의 천문역서에 통달했던 이순지의 지식 체계가 일궈낸 조선 천문학의 쾌거였다.
작가
■ 용어설명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세종이 서운관(書雲觀)의 제도와 기구를 정비하고 역법(曆法)을 정리하여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게 하고 나서, 다시 이순지에게 명하여 고금의 천문·역법·의상(儀象)·구루(晷漏)에 관한 개요를 편찬하도록 한 것이다. 제1권에 천문, 제2권에 역법, 제3권에 의상, 제4권에 구루를 다루고 있는데, 각 권에선 여러 항에 해당하는 중국의 문헌을 적절히 인용, 기술했다.(4)
[고광본 기자의 생생 과학사]세종시절 과학업적은 장영실만의 공일까?
세종 자신은 과학기술 기획·설계자로
장영실공 크지만 관노출신이라 부각
당시 기라성 같은 과학인 대거 포진
세종대왕 시절 우리나라의 과학 수준은 세계적이었다. 일본에서 지난 1983년 발간된 ‘과학사기술사사전(科學史技術史事典)’ 연표에는 세계적인 과학기술 업적이 정리돼 있다. 조선의 과학기술은 ‘석빙고→세종실록지리지→농사직설→신찬팔도지리지·향약채취월령→향약집성방·혼천의→대간의대·자격루·갑인자→앙부일구→측우기·수표→칠정산 내외편→훈민정음 28자→철제화포→의방유취·제가역상법’ 등 스물한 가지에 달한다. 천체관측 등 과학기술 최강국이던 명나라는 4개, 일본은 1개에 불과했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일어나던 유럽과 수학 등 과학문명이 뛰어났던 아라비아는 둘을 합쳐 스무 가지가 올라 있다. 물론 연표 숫자로만 과학기술력을 따질 수 없지만 당시 과학 올림픽이 있었다면 조선이 1위를 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당시 달성한 과학기술 업적은 주로 장영실만의 공일까.
장영실은 세종의 명을 받고 중국 북경에서 물시계(자격루)와 천체관측기구(혼천의) 등을 탐문한 뒤 더 뛰어나면서도 독창적인 자격루와 혼천의 등을 개발했다. 자격루는 3개의 항아리를 거친 물의 힘으로 구슬을 구르게 해 12간지 인형이 종을 치고 징과 북을 울리는 최첨단 물시계였다. 세종이 잠든 여주 영릉에 전시된 해시계(앙부일구), 혼천의, 지구와 별의 관계로 시간을 알 수 있는 일성정시의 등 당시 과학기술 문명에서 그는 주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원나라 말 귀화한 기술자 아버지와 관기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노비 출신으로 대호군까지 올랐다가 갑자기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극적인 요소로 인해 당시의 대표 과학자로 이미지가 굳어진 측면도 있다. 실제 장영실과 함께 이천과 이순지 등 뛰어난 과학기술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는 공학(이천·장영실·박자청 등), 천문역산학(이순지·정인지·정초·정흠지·김단·김돈·김빈 등), 의학(노중례·황자후 등), 지리학(정척·변계량·맹사성·권진·윤회·신장 등) 등 출중한 과학기술인이 대거 포진했다. 이 중 무인출신인 이천은 공조참판으로 금속활자 개량에 나서 당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인 갑인자(甲寅字)까지 개발하고 혼천의와 간의대(천문대), 앙부일구(해시계) 개발, 저울 개량, 도성 건축술, 전함과 화포 개량, 악기 개발까지 참여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과학철학자인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당시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이천·정인지를 꼽는다.
세종 자신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선정하는 국립과천과학관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는 과학기술인이다. 그는 찬란한 과학기술 문명의 기획·설계자였고 과학기술인들을 아울러 시너지를 낸 지도자였다.
신동원 전북대 한국과학기술문명학연구소장은 “세종은 스스로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수많은 과학 인재를 키우며 과학기술 리더십을 발휘했고 과학문명의 꽃을 피웠다”고 분석했다. 전상운 전 성신여대 총장은 ‘15세기 과학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세종 임금’이라는 논문에서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든 언어학자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자연과학·산업기술을 발전시킨 조선시대 대표적인 과학자”라고 밝혔다.(5)
/고광본선임기자 kbgo@sedaily.com
장영실의 첨단 물시계 ‘자격루’ 복원
물시계+시보장치 ‘집채만한 크기’
고궁박물관 28일부터 일반인 공개
- 수정 2007-11-21 21:01 등록 2007-11-21 21:01
조선시대 세종 때(1434년) 장영실이 주관해서 만든 첨단 시계인 자격루가 복원됐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소재구)은 21일 오전 박물관 지하 1층 전시실에서 남문현 교수가 이끄는 건국대 산학협력단에 맡겨 완성한 자격루 복원품을 공개했다. 복원품은 중종 31년(1536)에 개량해 1895년까지 사용하다가 훼손된 채 덕수궁에 보관 중인 자격루(국보 제229호)를 본보기로 했다.
가로 6m, 세로 2m, 높이 6m로 집채만 한 자격루는 크게 물시계와 시보장치 등 두 부분으로 돼 있다. 물시계는 물을 일정하게 흘려보내는 물항아리 셋과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시간 흐름을 눈금 잣대로 표시하는 물통 기둥으로 구성돼 있다. 시보장치는 눈금 잣대가 밀어 떨어뜨린 작은 쇠구슬이 스위치가 돼 1경부터 5경까지 숫자대로 북을 울리고 징을 때려 시간을 알리도록 돼 있다. 이렇게 자격루에서 발생한 시보는 운종가(종로)의 보신각으로 전해져 인정(28회 타종)과 파루(33회 〃)로 변환돼 백성의 일과를 관리하는 구실을 했다.
<세종실록>에는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잘못 알리게 되면 중벌을 면치 못함을 염려하여 (세종이) 장영실에게 명해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길 시보(時報) 인형을 나무로 만들었으니, 이에 시각을 스스로 알림으로써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 복원품은 일본인 학자의 잘못으로 2단으로 배치됐던 물항아리를 원래의 3단으로 바로잡았다.
남문현 교수는 “자격루는 동아시아 기술(물시계)과 아라비아 기술(시보장치)이 서울에서 만나 완성된 첨단 시계”라면서 “복원 작업은 기획에서 완성까지 24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복원품은 국립고궁박물관이 재개관하는 28일 이후 관람할 수 있다.(6)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중·이슬람양식에 전통 접목한 ‘간의대’… 세종이후 매일 밤 천문 관측[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천체 운행 측정한 ‘혼천의’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
지구본 모양의 우주본 ‘혼상’
당시 최고의 과학 결정체
해그림자로 시간 아는 해시계
앙부일구는 절기도 알게 해줘
측우기는 강우량 측정장비
현대적 계측기와도 비슷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
간의대와 각종 천문 관측기구들
관상감 관원들은 조선 천문 과학의 유산들을 남겼는데, 우선 간의대를 꼽을 수 있다.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된 석축 간의대는 높이 6.3m, 길이 9.1m, 넓이 6.6㎡의 천문관측대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간의대와 주변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관상감)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간의대에 설치된 혼천의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계로 중국 고대 우주관 중 하나인 혼천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써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또 간의대에 설치되었던 혼상은 일종의 우주본으로 지구본처럼 둥글게 되어 있으며, 둥글게 만든 씨줄과 날줄을 종이로 감싼 모양이다. 어설프게 보이는 이 천문관측기는 당시로는 최고의 과학적 결정체였다.
이 외에도 간의대에 방위와 절기, 시각을 측정하는 도구인 규표와 태양시와 별의 시간을 측정하는 일성정시의가 설치되어 있었다.
각종 시계와 측우기, 활자
천문학의 발전은 시계의 발명을 가져왔다. 당시의 시계는 해시계와 물시계로 대표되는데, 해시계는 앙부일구·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 등이 있었으며, 물시계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해시계를 일구(日咎)라고 한 것은 해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솥을 받쳐놓은 듯한(仰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이것은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곗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기 때문이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해의 움직임뿐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지구 구형설이나 지동설에 따른 것이 아니라 혼천설에 따른 것이었다.
해시계는 이처럼 조선의 시계 문화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기능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해시계는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과 절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었기에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물시계였다.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명종 시계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했고, 세종은 경복궁에 흠경각을 지어 옥루를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시계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시계·물시계와 더불어 천문학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뜻깊은 발명품은 측우기였다.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 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와 유사하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또 강우량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조선의 ‘위대한 손’ 장영실과 세종의 과학 혁명
조선 천문 과학을 논하자면 장영실을 빼놓곤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세종의 과학 정책을 현실화시킨 ‘위대한 손’이었기 때문이다.
장영실에 대해 ‘세종실록’은 그의 아버지가 원나라 소항주(蘇杭州) 사람이며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동래현의 관노 신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영실의 성씨를 감안할 때,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사람이긴 했지만 몽골인이 아닌 한족이었고, 장영실이 관노였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어머니는 관비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장영실은 몽골 지배 시절의 한족 아버지와 고려 동래현에 예속된 관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는 뜻이다.
동래의 관노 신분인 장영실을 궁궐로 불러올린 사람은 태종이었고, 그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본 사람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관노 신분이었던 장영실을 종3품 대호군의 벼슬까지 주면서 능력 발휘를 독려했다.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장영실이 일궈낸 과학적 쾌거를 열거하자면 대표적으로 혼천의, 혼상,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간의대, 갑인자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장영실 혼자 이 일을 해낸 것은 아니었다. 주로 정초와 정인지, 세종 등이 이론과 원리를 설명하고 이순지·김담 등이 수학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천이 현장을 지휘했다. 하지만 실제 이 기계들을 제작한 기술자는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이 세계 과학사에 빛나는 업적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뛰어난 지도력과 안목 덕분이었다. 학문은 물론이고 기술적인 측면에도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세종은 측우기의 제작에 왕세자를 직접 참여시키는 열성을 보였는가 하면,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학자와 기술자를 등용하기도 했다. 장영실은 세종의 그와 같은 실용적 가치관에 힘입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조선은 과학 혁명을 이룰 수 있었으며 15세기 문예부흥을 구가할 수 있었다.
작가
■ 용어설명 - 혼천설(渾天說)
중국 고대에 형성된 우주 개념 중 하나다. 고대 중국에서는 우주의 원리에 대해 개천설과 혼천설이 대립했는데, 개천설(蓋天說)에서는 우주의 모양에 대해 하늘이 땅 위를 덮고 있는 형태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혼천설에서는 땅은 둥글고 하늘은 주변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형태라고 주장한다. 또 개천설에서는 하늘의 중심을 북극으로 설정하고 북극을 중심으로 하늘이 회전하며, 하늘과 땅은 평면이라고 주장한다. 혼천설은 하늘과 땅을 곡면으로 설정하고 천체의 모양을 달걀 모양이라고 주장하며 개천설의 한계를 극복한다.(7)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난 과학자 있었다?!
[한겨레] 최근 주말 저녁에 드라마 '대왕 세종'이 방영 중이다. 흔히 세종대왕을 한글을 창제한 왕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정도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당시 장영실과 같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에 따르면 장영실이 노비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최고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이순지와 이천'을 꼽았다. 이 중 이천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과학기술자다.
특이하게도 이천은 원래 학자가 아닌 '무인' 출신이다. 그는 고려말 1376년에 태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시절에 무과 급제해 10대 후반에 무인의 길에 들어섰다. 무인이던 그가 태종, 정종 때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과학기술자로 나서게 됐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종 때의 기록은 잘 남아 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등극하던 해에 이천은 공조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왕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사 그릇인 제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이천이 만든 제기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했다. 이 제기를 눈여겨본 세종은 곧바로 이천을 불렀다.
세종은 이천이 쇠를 다루는 천재적인 기술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기존의 활자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쇠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이천이었지만 활자 제작 기술은 처음이었고, 전혀 알지 못했다. 이에 이천은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며 새 활자 개발을 위해 온갖 연구를 거듭했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주자소를 세우고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했다. 하지만,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친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활자를 고정하는 밀랍이 녹으면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활자 개량에 나선지 2년 만인 1420년 새로운 활자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졌다. 이천은 밀랍 대신 녹지 않는 대나무를 끼워 넣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개발해 인쇄할 때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더 완벽해진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냈다.
당시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 장수가 4장이던 활자 기술을 갑인자는 하루에 40장을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갑인자는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높아졌다.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뒀다.
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천문의기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과학기술자도 바로 이천이다. 그는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정인지와 정초가 설계하면 이를 최종적으로 만드는 일을 이천이 담당해 훌륭한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학계에서 평가받는데, 이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다. 천문 관측 기기 제작에 대한 이천의 업적은 금속활자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밑바탕이 된 도량형의 표준화도 그가 이룩한 중요 성과다. 그는 저울을 개량해 전국 관청에 나눠줬다. 이 저울은 전국 관청에서 세금을 부과할 때 등 다양하게 사용돼 저울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줄였다.
이천은 도성을 쌓는 건축술, 군선이나 화포 개량 같은 군사 분야, 하물며 악기 제조에까지 그의 기술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하고자 선체가 크면서도 빨리 달릴 수 있는 쾌속선을, 물에 잠기는 부분이 썩지 않도록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인 갑조법을 개발했다. 평안도 절제사로 지내면서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또한, 박연과 더불어 금, 솔, 대쟁, 아쟁, 생, 우회 등 많은 악기를 만들고, 무희와 악공들의 관복을 제도화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렇게 이천은 수많은 발명품 뒤에서 뛰어난 기술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종 1년인 1451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인이면서 놀라운 기술력을 지녔던 천재적인 과학기술자 이천, 그는 '갑옷 입은 과학기술자'였다.(8)
(글 : 박응서 과학칼럼니스트)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조선의 시간을 만든 장영실 업적 재조명
KBS1 ‘장영실쇼’는 14일 오후 8시 ‘장영실, 조선의 시간을 만들다’편을 방송한다.
조선의 과학기술이 꽃피운 세종시대,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를 비롯해 해시계인 앙부일구, 종합천문대인 간의까지 발명품이 쏟아진다. 세계의 과학사를 정리한 ‘과학사기술사전’에는 15세기 중국의 업적이 4개인데 조선은 무려 29개나 될 정도다. 이러한 시대를 이끈 세종은 특히 조선만의 달력과 시간을 갖기 위해 각종 천문관측기기 제작에 몰두한다. 이 프로젝트에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참여하는데 당대 최고의 기계공학자 장영실도 그 하나였다.
14일 방송되는 KBS1 ‘장영실쇼’는 조선의 과학 기술이 꽃피웠던 세종시대 과학자 장영실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KBS 제공 |
1422년의 일식은 예정된 시간보다 15분 차이가 났다. 중국의 달력인 수시력을 가져다 써서 제대로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일식이 일어나는 날에는 임금이 하늘에 의식을 치러야 했기에 정확한 시간 계산이 필요했다. 세종은 중국의 기준이 아닌 조선 실정에 맞는 역법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이 거대한 천문역법 사업에는 장영실을 비롯해 이순지, 이천, 김담 등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참여한다. 그렇게 나온 것이 독자적인 역법서인 ‘칠정산내외편’이다.
방송에는 천문학자 이명현, 하늘과 역사 속 천문을 연구하는 안상현 박사, 과학강사 장풍 등이 함께한다.(9)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봉화가 낳은 조선 천재 학자 '괴담 배상열'은 누구?
'서계쇄록' 등 본격적인 산서(算書) 저술
21일 봉화군청소년센터 대강당서 학술대회
[봉화=뉴시스] 김진호 기자 = 한국국학진흥원은 오는 21일 경북 봉화군 청소년센터 대강당에서 '괴담 배상열'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다고 20일 밝혔다.
'괴담 배상열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봉화가 낳은 천재 학자 괴담 배상열의 천문과 지리, 역학과 산학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가 이뤄질 전망이다.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 1759~1789)은 봉화에서 태어났다.
15세 전후에 독학으로 깨우쳐 천문과 지리, 역학과 산학에 뛰어났고, 23세 때 대산 이상정 문하에서 배운 뒤로는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30세 나이로 요절했지만 '도학육도(道學六圖)', '서계쇄록(書計鎖錄)', '사서의의(四書疑義)', '성리찬요(性理纂要)', '사서찬요(四書纂要)', '계몽도해(啓蒙圖解)', '심경품목(心經稟目)', '을수제요(乙數提要)'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특히 그는 16세에 천문을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 선기옥형)'를 만든 이후 21세와 27세에 다시 제작하고 수정하는 등 천문 분야에서 놀라운 천재적 역량을 발휘했다.
흥해배씨 녹동리사 괴담종택 기탁 '서계쇄록' 하편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8세 때 편찬한 '서계쇄록' 하편은 수론(數論)에서 시작해 각종 산법(算法)에 이르기까지 두루 아우른 본격적인 산서(算書)로 배상열의 수리 사상이 전면적으로 드러나 있다.
앞선 시기에 나온 최석정의 '구수략(九數略)'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구체적인 산법과 운용 측면에서 형이상학적 색채를 철저히 탈피하였다는 점에서 18세기 말 조선 지식인들의 변화된 수리 사상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번 학술대회는 관련 분야 전문 연구자 5명이 참석해 괴담 배상열 생애와 교유관계는 물론 성리학과 역학, 천문 및 수리 사상에 대해 총체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박권수 충북대 교수는 배상열의 생애와 교유관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그의 상수학적 우주론 연구를 전체적으로 소개한다.
이영호 성균관대 교수는 배상열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완성한 '도학육도'를 통해 그의 생애 후반기 학문의 주축이었던 주자학적 사유를 고찰한다.
흥해배씨 녹동리사 괴담종택 기탁 '서계쇄록' 하편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엄연석 한림대 태동고전연구소장은 배상열의 역학과 성리학을 아우르는 도상학이 조선 후기 역학과 성리학에서 지니는 특징과 지위를 규명한다.
김상혁 한국천문연구원 박사는 조선의 혼천의 제작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피고, 그 가운데 적도환(赤道環)에 28수 별자리를 그려 넣은 배상열 혼천의만이 지닌 특징을 밝힌다.
강민정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은 18세기 초 최석정의 '구수략'과 비교 분석해 '서계쇄록'의 수리 사상이 지닌 특징을 살펴본다.
정종섭 한국국학진흥원장은 "봉화가 배출한 괴담 배상열 선생은 천문과학 분야에서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적 역량을 발휘했을 뿐만아니라 성리학에도 깊은 이해를 보이며 특출한 학문적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고 말했다.(10)
☞공감언론 뉴시스 kjh9326@newsis.com
[뉴스속 인물]조선 천문학자 ‘남병철’…달에 새긴 첫 한국인 이름
조선 후기 최고 수준의 천문학자
남병철 혼천의 170여년 만에 복원
이름 없는 달 뒷면 충돌구(크레이터)에 처음으로 한국인 이름이 붙었다. 주인공은 조선 시대 천문학자 남병철 선생이다.
19일 경희대 우주탐사학과 진호 교수 연구팀은 ‘남병철 충돌구(Nam Byeong-Cheol Crater)’란 명칭이 14일 국제천문연맹(IAU)의 최종 심사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이름이 붙은 충돌구는 1659개로 늘었다. 앞서 연구팀은 국제협력 연구 중에 달 뒷면에 특이한 자기장을 띠는 이름 없는 충돌구를 발견하고, IAU에 남병철 선생의 이름을 신청했다.
남병철은 조선 후기 문신이며 천문학자, 수학자다. 본관은 의령이다. 1817년(순조 17년) 서울 안국동에서 태어났고, 1837년(현종 3년) 21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기에 중용돼 예조판서를 비롯한 요직을 지냈고, 철종의 총애를 받았다. 1859년(철종 10년) 홍문관 대제학과 관상감을 통솔하는 관상감제조를 겸직했다. 관상감은 천문학·지리학 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그와 3살 터울인 동생 남병길 또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다. 두 형제는 조선 시대 천문학의 끝을 장식한 인물로 평가된다. 두 형제가 천문학과 수학에서 이룬 업적은 세도정치 폐해가 극에 달한 1850~1860년대에 이뤄졌다. 정치·경제·문화 등 전반적인 부문에서 조선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고 인식되는 시기에 두 학문에만 유달리 높은 성취가 있었던 이유에 대해선 아직 구체적인 연구가 부족하다.
저서로는 추보속해(推步續解)·의기집설(儀器輯說)·해경세초해(海鏡細草解) 등이 있다. 1862년(철종 13년)에 편찬된 천문서 ‘추보속해’는 19세기 중반 조선의 유학자가 도달한 천문학적 이해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케플러의 타원궤도 운동론을 적용해 태양과 달의 운동, 월식과 일식, 항성의 이동 등 5가지 항목의 계산법을 이 책은 설명한다. 추보속해는 조선 후기 한국의 천문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1859년(철종 10년)에 집필한 ‘의기집설’은 각종 천문기구의 구조와 사용법을 담았다. 혼천의(渾天儀)·간평의(簡平儀) 등 10가지 천문의기(天文儀器)를 분류하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또 서양식 자명종 시계인 ‘험시의’를 비롯한 기계시계의 구조와 원리를 밝혔다. 남병철은 “프랑스만 해도 시계공이 1000여명이나 되고, 각종 기계시계의 연 생산량이 1만2000개에 달한다”며 조선의 시계 공장제도에 대해 아쉬움을 이 책에 드러냈다.
남병철은 이 책에서 새로운 혼천의 제작법을 소개했는데, 문헌으로만 전해온 ‘남병철 혼천의’가 170여 년만인 올해 초 성공적으로 복원되기도 했다. 지난 2월 한국천문연구원(천문연)은 ‘남병철 혼천의’ 복원 모델을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 기구에는 장소를 옮기며 천체를 관측할 수 있도록 관측의 기준인 북극 고도를 조정하는 기능이 있다. 아울러 고도, 방위 측정, 황경과 황위, 적경과 적위 등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기존 혼천의와 차별적이다.
복원을 주도한 천문연 고천문연구센터 김상혁 책임연구원은 "남병철 혼천의는 전통 혼천의 중에서 실제 천체 관측이 가능하도록 재극권(극을 바꿀 수 있도록 설치한 고리)을 탑재한 세계 유일의 과학기기"라며, “과거의 천문기기를 복원함으로써 당시의 천문관측 수준을 이해하고 천문 기록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했다.(11)
최호경 기자 hocance@asiae.co.kr
<주>
(1) 600년전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섰던 조선 천문학 (daum.net) 2015. 9. 23.
(2) [주간조선] 혜성의 꼬리 방향까지 기록한 조선시대의 천문학자들 (chosun.com)2014.03.04.
(3) 국내 最古 천문도 따로 있다?|동아일보 (donga.com)2008-05-19
(4) https://v.daum.net/v/20230804090307876
(5) https://v.daum.net/v/20200108172504344
(6) 장영실의 첨단 물시계 ‘자격루’ 복원 (hani.co.kr)2007-11-21
(7) https://v.daum.net/v/20230908085712401
(8) https://v.daum.net/v/20080430184103088
(9) https://v.daum.net/v/20160212205639866
(10) https://v.daum.net/v/20240820110821894
(11) https://v.daum.net/v/20240820170116362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151021204556499
이순지·이천을 아시나요…장영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 매경프리미엄 (mk.co.kr)2016.03.31
세종 14년(1432년) 초가을 어느 날. 세종은 신하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이같이 말했다. 세종은 조선 초기 학자로 유명한 정인지에게 "천체관측기와 계시기를 창안하고 제작하여 측정과 시험에 대비하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후 7년 동안 경복궁 서쪽 후원에 천문 관측 시설이 만들어졌고 간의, 혼의, 앙부일구, 자격루 등이 설치됐다. 조선왕조 건립 뒤 처음 시작된 '의표창제(儀表創製)' 프로젝트였다. 의표창제란 물시계, 해시계 등을 제작하기 위해 1432년, 세종 14년에 시작된 천문학 사업이었다.
의표창제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조선시대 최고 과학자로 꼽히는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최근 종영된 TV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재조명받고 있다. 하지만 장영실에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당대에 큰 업적을 남겼던 다른 과학자들 공은 보이지 않는다.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그동안 우리는 장영실을 통해 15세기 조선의 과학을 바라봤다"며 "이 틀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은 의표창제를 시작하며 '투 트랙' 전략을 펼쳤다. 정인지, 정초 등 관료학자들이 문헌을 통한 이론 연구를 시작했고, 이천과 장영실 등의 기술 전문가들이 기기 제작을 맡았다. 문중양 교수는 "천문의기 제작 과정은 고위직에 있던 이천의 총책임과 감독하에 이뤄졌을 것"이라며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는 전문 기술자인 장영실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무관 출신인 이천은 한글 보급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꼽힌다. 남문현 건국대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장영실과 자격루'에서 "이천은 병기 제조와 금속가공 기술자로 고위 관리직에 등용된 기술관료"라며 "유능한 과학기술자로서 세종의 과학, 국방, 음악, 인쇄술의 혁신을 주관했다. 세종이 이천을 만남으로써 역사적 위업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서술했다. 이천은 세종 16년인 갑인년 7월에 조선조 금속활자의 기본이 되는 '갑인자'를 만들었다. 이 활자의 성분은 구리 84%, 아연 3~7%, 납 5%, 무쇠 0.1%로 그 강도가 미국 해군의 대포에 사용되는 금속 강도에 필적할 정도였다. 이천이 이 같은 업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의표창제 사업을 진행하면서 얻은 기술을 활자 주조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화학무기 체계를 완성하면서 자주국방의 길을 여는 데도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순지와 김담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조선 초기 대표적인 천문학자로 꼽힌다. 장영실과 이천이 기계 제작 및 주조에 능한 공학자였다면, 이순지와 김담은 천체를 관찰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의미의 과학자였다. 이들은 조선 고유의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해 중국의 역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역법을 시행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이순지의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모시는 '시묘'를 위해 이순지가 의표창제에서 빠지자 천문을 관측하던 일에 큰 차질이 발생했다. 김담이 대신 자리를 맡았지만 이순지가 필요했다. 결국 세종은 이순지에게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두 사람의 연구를 통해 서울을 중심으로 표준시간을 정할 수 있게 되면서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장영실은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은 "원나라의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정교함이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의 관직을 더해주고자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자격루와 옥루 개발에 많은 기술자들이 동원됐지만 장영실의 기여가 결정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5세기 장영실이 보여준 업적은 조선시대 최고 과학자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장영실의 모습에는 허구가 많다. 감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에 대해 생각하거나, 지동설을 깨닫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엄밀히 말하면 장영실은 과학자라기보다는 기구를 제작하는 '공학자'에 가까웠다. 또한 장영실이 세계 최초의 정량적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개발했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측우기는 세종의 세자인 문종이 제작했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장영실이 측우기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실인 것처럼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드라마의 기획 의도에 따라 장영실에서 나오는 허구적인 내용에 대해 다르게 접근할 수 있다"며 "드라마를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멘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드라마 장영실을 역사 교육의 수단으로 접근한다면 사실 왜곡이 될 수 있다"며 "다른 나라에 역사 교육을 제대로 하라고 말하려면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책임감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문중양 교수는 "세종대왕 시절, 과학기술의 위대한 성취는 건국 직후 혼란 시기가 지난 뒤 나타난 준비된 군주와 장영실을 비롯한 정인지, 이천, 이순지, 김담 등 수많은 뛰어난 인재들의 협동 작업 결과"라며 "장영실을 중심으로만 조선시대 과학을 살펴보게 되면 당대의 모습이 잘못 비쳐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담(金淡)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출생 연도1416년(태종 16) 사망 연도1464년(세조 10)
조선 전기에, 『칠정산내편』,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 등을 저술하였으며, 세종대의 천문 · 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한 천문학자.
1436년 이순지(李純之)가 간의대(簡儀臺)에 나가 천문을 측후하다가 어머니 상을 당하자, 그 일을 대신 맡게 되었다. 1437년에는 집현전저작랑, 1439년에 집현전박사가 되었고, 그해 이순지와 더불어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고교윤정(考校潤正)해서 올렸다.
이 때 왕명으로 정흠지(鄭欽之) · 정초(鄭招) · 정인지(鄭麟趾) 등이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대통력태양태음통궤(大統曆太陽太陰通軌) 등에 대하여 그 계산법을 밝히고, 약간의 은괄(檃括:교정)을 가해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규장각본인 『칠정산내편』과 『태양통궤』 · 『태음통궤』 등이 모두 이순지와 김담의 편찬으로 되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칠정산내편』의 교정 · 편찬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25세 때에는 전료(殿僚)와 더불어 국어와 음의(音義)를 보정해서 올렸다. 28세 때에는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가 되었고, 이듬해에 정인지 · 이순지 · 박윤창(朴允昌)과 더불어 경기도 안산(安山)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할 때도 공이 컸다.
29세 때는 이조정랑이 되었고, 제언종사관(堤堰從事官)이 되어 이순지와 더불어 언제공사(堰堤工事)에서 계산을 맡았다. 32세 때 승문원부교리로 있을 때, 명을 받아 『전부구등지법(田賦九等之法)』을 찬정하였다.
1448년(세종 30)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이 되었고, 이듬해 친상을 당하였으나 계속 출사하여 역법과 측후의 일을 하였다.
1451년(문종 1) 사헌부장령이 되어 불사(佛事)를 배척하는 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1452년 홍문관직제학이 되었고, 이어 충주목사로 나갔다. 1456년(세조 2) 안동부사, 1458년 경주부윤, 1464년 중추원사가 되었다.
이순지와 더불어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로서 세종대의 천문 · 역법 사업에 크게 공헌하였고, 정인지 · 정초 · 정흠지 · 이순지 등과 더불어 『칠정산내편』 · 『칠정산내편정묘년교식가령(七政算內篇丁卯年交食假令)』 · 『칠정산외편』 · 『칠정산외편정묘년교식가령(七政算外篇丁卯年交食假令)』 · 『대통력일통궤(大統曆日通軌)』 · 『태양통궤(太陽通軌)』 · 『태음통궤(太陰通軌)』 · 『교식통궤(交食通軌)』 · 『오성통궤(五星通軌)』 · 『사여전도통궤(四餘纏度通軌)』 ·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 · 『경오원력(庚午元曆)』 · 『선덕십년월오성릉범(宣德十年月五星陵犯)』 등 많은 천문역서를 교정, 편찬하였다.
그가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관내에 도적이 많아 고을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그는 이 도적을 잘 다스렸으며, 장물의 증거를 발견하면 비록 그 양이 적더라도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광해군 때에 사림에서 향현사(鄕賢祠)와 문계서당(文溪書堂)을 지었는데, 뒤에 다시 구강서원(龜江書院)과 단계서원(丹溪書院)으로 옮겨 개명되었다가 흥선대원군 때 철폐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이순지]
이순지(李純之)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출생 연도미상 사망 연도1465년(세조 11)
조선전기 승정원좌부승지,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천문학자.
그는 세종의 명으로 역법(曆法)을 연구한 뒤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 등과 같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저술하였다. 이 『칠정산내외편』의 완성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그 뒤 역법의 계산은 주로 이순지와 김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 이천(李蕆)·장영실(蔣英實)과 함께 천문의상(天文儀象)들을 교정, 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그때까지 조사, 정리된 모든 천문관계 문헌과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가역상집』 4권 3책을 펴내었다.
또, 1457년에는 세종대에 정리되었던 일월식(日月蝕) 계산법을 알기 쉽게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고 김석제(金石悌)와 함께 그 법칙을 외우기 쉽게 산법가시(算法歌詩)를 짓고 사용법 등을 덧붙여,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2권 1책을 완성하였다.
이 『교식추보법』은 뒤에 천문분야 관리채용의 1차 시험인 음양과(陰陽科) 초시의 시험교재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 산학(算學)·천문·음양·풍수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시호는 정평(靜平)이다.
[이천]
이천(李蕆)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출생 연도1376년(우왕 2)사망 연도1451년(문종 1)
조선전기 충청도병마도절제사, 평안도 도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과학자.
본관은 예안(禮安). 호는 불곡(佛谷). 군부판서 이송(李竦)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 2)에 17세의 나이로 별장(別將)에 임명되었고, 1402년(태종 2)에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병선(兵船)을 만드는 일에도 힘쓰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물리학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무예를 닦으면서도 틈틈이 여러 기계장치의 원리를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특히 금속공예와 그 주조법에 조예가 있어 세종은 그를 공조참판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드는 일에 힘쓰게 하였다.
경자자의 주조로 인쇄 능률은 많이 좋아졌으나, 좀더 아름다운 자체(字體)와 인쇄 능률을 높이기 위한 주조사업이 다시 시행되어, 마침내 1434년(세종 16)에 갑인자(甲寅字)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이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것이었다.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
그는 또한 서운관에서 정초(鄭招) · 장영실(蔣英實) · 김빈(金鑌) 등과 수년 동안 노력한 끝에 1437년에 대간의(大簡儀) · 소간의 · 앙부일구(仰釜日晷) ·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규표(圭表)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고도 불리는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나타나는 야인(野人:만주족)들의 침략을 막고, 그들을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무쇠)을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써 대포를 만드는 등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밖에 병선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있어 갑조법(甲造法), 즉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장영실(蔣英實)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조선 전기에, 상의원별자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 활동하며 천문관측기계인 혼천의,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 등을 제작한 학자.
중국계 귀화인과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아산(牙山)의 명신으로만 기재되어 있다. 동래현의 관노로 있을 때 그의 재주가 세종에게 인정되어 중국에 파견, 천문기기 연구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귀국하자 면천되고 1423년(세종 5)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세종실록』에는 중국의 것을 참고하여 청동으로 경점(更點)의 기(器)를 부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공로로 정5품의 행사직(行司直)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 경복궁과 서운관 두 곳에 설치할 많은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를 만드는 계획이 착수되었는데, 이때부터 이천(李蕆)과 함께 천문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하였다. 먼저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의 두 기본 관측기계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 완성된 천문관측의기에는 대간의·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규표(圭表) 등이 있다.
그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自擊漏)의 제작이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金鑌)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 시보장치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 물시계를 비교,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를 만든 것이었다.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하였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다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어냈다.
1438년에 만들어져 흠경각(欽敬閣)에 설치된 이 옥루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모든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룩한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또, 이천 등과 함께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조선시대의 활판인쇄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
유리건판 궁궐사진전-자격루 (daum.net)2007. 12. 27.
【서울=뉴시스】
1434년 세종의 명으로 장영실 등이 만든 자동 시보장치 물시계이다.
현존하는 자격루는 1436년(중종31)에 제작한 것으로서 현재 덕수궁에 옮겨져 있다.
창경궁 원래 위치 보루각에 있는 당시 유리건판 사진이며 이 자격루는 청동으로 만든 파수호 하나, 수수호 둘 그리고 수수통 둘 만이 남아 있다. 수수통 양 옆에는 측우기와 석조대와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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