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는 조선 초기의 화단을 이끌었던 화원 화가 안견에게 안평대군이 꿈에서 도화(桃花)가 만발한 도원을 친구인 박팽년, 신숙주, 최항과 함께 어울려 노닌 것을 이야기해 주자 안견이 3일 만에 꿈의 내용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다.
몽유도원도에서 안견의 필묵법과 준법 등을 통해 그가 곽희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으며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사선 구도로 작품을 구성한 점이나 좌측은 정면에서 바라보는 평원법을 사용했고 우측에는 위에서 바라보는 부감법으로 시점 처리를 해 대비를 주는 등의 안견 고유의 화풍도 잘 나타나고 있다.
화면의 좌측을 보면 현실 세계를 의미하는 익숙한 토산으로 구성돼 있어 우측으로 이어지는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도원으로 가는 길과 대비된다. 좌측 하단부에 두 갈래 길이 있는데 한 길은 복사나무를 따라 이어져 있고 다른 길은 우측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휘감듯이 길이 나 동굴로 이어지고 있다. 그 옆으로는 물이 흐르며 운치를 더한다.
다시 그 우측을 보면 도화가 핀 곳에 2단 폭포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도화가 만발한 도원향이 펼쳐진다. 도원향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부감법으로 시점을 전환했다.
도화는 선홍색으로 그어졌으며 꽃 사이사이에 금박을 넣었고 잎은 초록의 고운 설채로 그려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나무 등의 경물은 구륵법으로 표현돼 있으며 도원의 우측의 끝에는 자그마한 집이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복사나무 사이와 화면 곳곳에 물안개가 깔려 있어 몽환적인 느낌을 더한다. 몽유도원도에는 그림과 함께 시문이 쓰인 두루마리가 있는데 여기에는 안평대군과 신숙주, 최항, 김종서 등 당대 뛰어난 학자들이 쓴 글이 남아 있어 예술적·문학적 가치는 물론이고 서예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조선 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최문영 문화칼럼니스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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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몽유도원도에 필적… 15세기 산수화 日서 발견
후쿠오카/허윤희 기자2023. 9. 22. 05:00
뒤늦게 조선시대 걸작으로 드러나
조선 15세기 산수화 ‘방곽희추경산수도(倣郭煕秋景山水圖)’. 세로 108.1㎝, 가로 86.2㎝. /후쿠오카시미술관
조선 전기 회화의 금자탑이라 불리는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에 필적할 만한 15세기 걸작 산수화가 일본에서 공개됐다.
일본 후쿠오카시미술관에서 지난 13일 개막해 10월 22일까지 열리는 ‘조선 왕조의 회화-산수·인물·화조’ 특별전에서다. 미술관은 “최근 연구가 진전돼 지금까지 중국 회화로 인식됐던 회화 중에 조선 왕조 회화가 다수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서 “새로 발견된 작품을 포함해서 조선 왕조 회화 44점을 산수도, 인물도, 화조도로 나누어 장르별로 소개한다”고 밝혔다.
특히 전시장 입구에 첫 번째로 걸린 ‘방곽희추경산수도(倣郭煕秋景山水圖)’는 북송 최고 화가 곽희(郭熙)풍으로 그린 15세기 대형 산수화다. 세로 108.1㎝, 가로 86.2㎝. 화면 한가운데, 거대한 산이 아래서부터 위로 꿈틀거리며 솟아오른다. 산 양옆으로 안개가 끼어 있고, 오른쪽 아래엔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국내 회화사 전문가들은 “조선 전기 산수화는 워낙 남아 있는 게 드물고, 더구나 15세기로 확정할 수 있는 산수화는 국내엔 없고 일본 덴리대(天理大)가 소장한 안견의 ‘몽유도원도’ 한 점만 있었다”며 “‘몽유도원도’와 전혀 다른 양식의 15세기 조선 산수화가 일본에 있었다니 놀랍다”고 입을 모았다.
조선전기 회화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안견의〈몽유도원도〉. 현실세계와 무릉도원을 그린 네 개의 경군(景群)들이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산수화로 시·서·화의 세 가지 예술이 종합적으로 구현된 작품이다. 일본 덴리대가 소장하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회화사)는 “일본인 개인 소장자는 명나라 그림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타쿠라 마사아키 도쿄대 교수가 조선 15세기 회화라고 밝혔고, 작품을 실견한 한국 연구자들도 수긍하고 있다”면서 “한국 회화사를 다시 쓸 중요한 발견”이라고 말했다. 이 그림은 2016년 일본 나라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전시에 나온 적이 있지만, 워낙 작은 전시라 주목받지 못했다가 이번 전시를 통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장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전기 회화의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그림”이라면서 “조선 전기 산수화에 새로운 영역이 있었다는 걸 알려주는 그림”이라고 했다. “국내에 남아 있는 16세기 산수화는 한쪽으로 구도가 치우친 ‘편파 구도’ 양식인데, 이 그림은 중앙 집중형으로 한가운데 산이 꽉 차 있는 곽희의 정통 산수화풍”이라는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시미술관에서 공개된 15세기 '방곽희추경산수화' 부분. /후쿠오카시미술관
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두루마리에 가로로 길게 그린 ‘몽유도원도’와는 또 다른 양식이고, 곽희의 대작인 ‘조춘도(早春圖·1072년)’와 상당히 흡사하다. 15세기 초 명나라 화원 화가 이재가 그린 곽희풍 산수화와도 유사하지만 그림 좌우에 있는 경물이나 인물 표현이 조선 시대적이어서 우리 그림이 맞고, 시기는 15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16세기 이후에는 산수화의 화법과 구성이 조금 더 조선화되었기 때문에 15세기로 특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장 교수는 “곽희의 ‘조춘도’ 양식을 15세기에 정통으로 계승한 그림이 중국에도 없는데, 조선에 들어와서 우리 식으로 해석이 됐다는 건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일본 후쿠오카시미술관에서 공개된 15세기 '방곽희추경산수화' 부분. /후쿠오카시미술관
이 그림 외에도 ‘궁녀도(宮女圖)’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등 새롭게 밝혀진 조선 회화들이 전시 중이다. 후쿠오카현 규슈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숭고한 믿음의 아름다움-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불교 미술’과 함께 관람하려는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두 전시를 연계해 다음 달 8~9일 후쿠오카시미술관에서 한일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심포지엄도 열린다.(3)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단독]2~3점 뿐이라던 안평대군 진적, 알고 보니 오구라 유물에도..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2020. 12. 15. 06:02
[경향신문]
일제강점기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반출해간 ‘오구라 유물’에 속한 안평대군 이용의 ‘행서칠언율시축’. 이 작품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오구라 유물을 조사한 뒤 펴낸 도록에 실려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도록에서
‘어, 안평대군의 글씨가 있네. 진적이 거의 없다고 하더니만….’ 얼마 전 필자가 이른바 ‘일제강점기 오구라(小倉)와 오쿠라(大倉)의 한국 문화재 반출’ 기사를 준비하면서 이른바 ‘오구라 유물’의 도록을 훑어보았다. 도록은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국외소재 문화재 조사사업의 하나로 일본 도쿄(東京) 국립박물관을 찾아가 4차례에 걸쳐 조사했던 1100여 점의 사진과 함께 유물 설명을 곁들였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해외소재문화재조사서 제12책’, 2005).
필자는 주로 일본의 중요 문화재 및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된 39건을 위주로 기삿거리를 찾았다. 그러다가 회화·전적·서예 부문까지 훑어보던 필자의 시선이 머문 곳이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오구라 유물 도록에 안평대군의 작품과 함께 유물 설명을 붙였다. 안평대군 행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도록에서
■오구라 유물 목록에 포함된 안평대군 글씨
바로 ‘오구라 유물 목록’ 863번째에 나와있는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글씨였다. ‘행서칠언율시축’, 즉 행서(획을 악간 흘려쓰는 서체)로 된 두루마리 칠언율시(34.1×56.5㎝)였다. 도록의 뒤에는 한글과 일본어로 된 작품설명이 붙어있었다.
“행서의 명가(名家)로 필속(筆速)의 완급, 필획의 강약, 허획과 실획의 운용 등의 특징에서 안평대군 행서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필자는 눈을 의심했다. 안평대군의 글씨라면 대부분 <해동명적>(신라말~조선초 명필의 글씨를 모아 목판 및 석판으로 새긴 서첩)의 석판 혹은 목판으로 찍은 서첩 등으로 전해졌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세종대왕 영릉 신도비 두전>의 전서와, <심온묘표>의 예서도 안평대군의 글씨는 맞다. 하지만 비석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받아 각수가 새긴 것이다.
안평대군의 글씨임을 확산하게 하는 독특한 서법. 조맹부의 서법을 따랐지만 자유분방한 자신만의 필법을 구사했다.
따라서 본인이 먹을 묻혀 종이에 직접 쓴 글씨를 뜻하는 진적(眞蹟)과는 거리가 있다. 필자는 그런 의미에서 안평대군의 진적이라면 일본 뎬리대(天理大)가 소장한 ‘몽유도원도’ 발문과, 2001년 도난당해 지금은 볼 수 없는 ‘소원화개첩’(국보 238호) 정도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최근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한 ‘재송엄상좌귀남서(再送嚴上座歸南序)’(27.9×14.3cm)가 안평대군의 진적으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1450년(문종 즉위년) 7월 33살이던 안평대군이 엄상좌라는 노 대선사를 떠나보내며 쓴 글씨첩이다.
오래도록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 등 딱 두 점으로 알려져 있던 안평대군의 진적이 이제야 3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오구라 유물 중에도 제4의 안평대군의 진적이 있다는 것인가.
안평대군의 진적으로 꼽힌 ‘재송엄상좌귀남서’. 송설체의 아리따운 교태를 넘어 단아한 기품을 바탕으로 한 유려하고 우아한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안평대군의 글씨가 틀림없다
하여 도록에 실린 글씨 사진을 몇몇 서예 전문가에 보여줬더니 돌아온 대답은 ‘금시초문’이었다. 그러면 안평대군의 글씨가 맞냐고 물었더니 “작품을 친견하지 않았으니 단언할 수는 없다”고 전제했지만 “사진상 보면 안평대군의 글씨가 틀림없는 것 같다”는 답이 나왔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송설체(원나라 조맹부의 서체·조맹부의 서재 이름이 송설재였다 해서 붙인 이름)를 조선화시킨 주인공으로 풍류왕자 안평대군의 유려하고도 격조 높은 안평대군 글씨가 잘 드러나있다”고 평가했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은 “작품 말미에 흘려쓴 ‘청지(淸之·안평대군의 자)’는 안평대군 서체의 전형적인 형태”라면서 이 작품 속에서 보이는 안평대군의 몇가지 특징을 설명한다. 즉 ‘도(途)’자의 책받침을 살짝 구불구불하게 흘려 쓴 것은 안평대군 특유의 필법이라는 것이다. 고기가 노니듯 세번 구부린데 해서 유어삼절법(游魚三節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연미(아름답고 수려)하기만 조맹부체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또 ‘나(那)’자의 오른쪽(제방)의 세로 획이 올라간다든지, 윗부분이 멋들어지게 휜 ‘있을 유(有)’ 자 등을 종합할 때 안평대군의 글씨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2006년 일본 뎬리대 소장 ‘몽유도원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그리고 안평대군의 발문과 함께 신숙주, 이개, 김종서, 박팽년 등 당대 대표문인들의 시문과 글씨를 모아놓았다.|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박물관개관100주년기념특별전-여민해락> 도록, 2009년에서(일본 뎬리대 소장)
이 기사의 모두에 인용한 안평대군 글씨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더니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중국 당나라의 선승인 동안상찰(?~961)이 칠언율시 형식으로 노래한 10수의 게송 중 2번째인 ‘조의(祖意)’”라고 했다.
“조사의 뜻은 공한 것 같지만 공하지 않으니(祖意如空不是空) 참된 기틀이 어찌 있다 없다는 공과를 따지랴(眞機爭墮有無功)…”.
필자와 같은 장삼이사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선문답 같은 것이다. 그저 선종의 일파인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 등을 노래한 시라는 것만 알면 된다.
궁금증이 생긴다. 2005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오구라 유물’을 조사하고 도록을 펴냈을 때 이 안평대군 글씨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다. 아마도 금동관모와 새날개모양관식, 금동신발 등 일본 중요문화재와 미술품 등으로 지정된 39건 위주로 조사했기 때문에 여타의 유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못했을 것 같다는 추정만 할 뿐이다.
당시 현지조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미술공예실이 주도했다. 그래서인지 서예·전적(22점)의 조사·연구는 깊이있게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오구라 유물’의 안평대군 글씨가 진짜가 맞다면 ‘몽유도원도’ 발문과 ‘소원화개첩’, 그리고 최근 진적으로 평가된다는 ‘재송엄상좌귀남서’ 등에 이어 4번째 진적인 셈이 된다. 물론 작품을 실제로 친견해봐야 최종판단할 수 있다. 후속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 같다.
‘몽유도원도’ 발문 부분. 안견이 그린 그림에 안평대군이 글을 붙였다. 안평대군의 꿈에 도원에서 노닌 광경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에게 그리게 한 뒤 자초지종을 발문에 썼다. |국립중앙박물관 도록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는 안평대군이 썼다
이와 별도로 필자는 최근 그 유명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의 한자를 쓴 주인공이 안평대군임을 논증한 논문을 보았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의 ‘<훈민정음 해례본>의 등재본(登梓本) 제작과 서체’라는 논문이다. 이 논문은 오는 26일 발행될 학술지 ‘<문화사학> 54호(한국문화사학회)’에 게재된다.
지금까지 귀가 아프도록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들었던 필자에게 해례본에 쓰인 한자의 작가가 안평대군이라는 이야기는 색다른 것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등재본이 무엇인가. 알다시피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발행된 훈민정음 해설서이다. 목판으로 찍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글 230종류 537자와 한자 728종류 4761자로 구성됐다. 그런데 이 책을 목판으로 찍어내기 위해서는 한글과 한자의 필자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우선 종이에 글자 수가 많은 한자를 쓴 뒤, 공란으로 남겨놓은 한글 부분의 경우 한글 목활자로 눌러 채워 넣어 완성했다, 이것이 목판에 새기기 위해 제작한 등재본이다. 이 등재본을 풀에 묻혀 뒤집어서 나무에 조심스럽게 붙여놓고 글자의 획을 따라 각수가 새긴 뒤 완성한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 바로 목판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목판본으로 찍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한자가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것이 정설이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등재본에 새긴 한글 목활자는 당대의 명필 중 한사람인 강희안(1418~1464)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해례본’ 중 절대 다수의 한자의 필자는 누구인가. ‘해례본’에 등장하는 ‘정인지 후서’의 내용, 즉 ‘신 정인지는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절하며 삼가 쓴다(臣 鄭麟趾拜手 稽首謹書)’는 내용 때문에 정인지(1396~1478)의 작품인 것처럼 됐다. 학계 일각에서도 “세종대왕 당시에는 수양대군(세조 1417~1468·재위 1455~1468)이 <동국정운> 등 주요 간행물의 글씨를 전담했다”면서 “그런 가운데 정작 가장 중요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안평대군이 썼을 리 없다”는 견해가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와 안평대군 글씨의 목판본 등과 비교하면 너무도 흡사하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의 논문에서
그렇지만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는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것이다. ‘정인지 후서’ 또한 문장은 정인지가 짓고 글씨는 안평대군이 쓴 것으로 보는게 합리적이란다. 손환일 소장은 “그러나 지금까지 안평대군 글씨의 특징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지적한 연구결과는 볼 수 없다”면서 “이번 논문은 안평대군 글씨의 목판본인 ‘진초천자문’과, ‘엄상좌찬’ 서첩의 글씨와 조목조목 비교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초천자문’은 불세출의 서성(書聖)인 왕희지(307~365)의 7대손 지영 스님이 해서와 초서로 쓴 것을 안평대군이 다시 쓴 작품이고, 엄상좌찬은 안평대군이 엄상좌라는 스님의 불법강연을 들은 뒤 이별을 아쉬워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다.
그런데 ‘해례본’과 ‘진초천자문’의 글자 중 오른쪽에 점을 찍는 습관은 안평대군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또 ‘쇠 금(金)’에서도 오른쪽 새로획이 올라간 것도 마찬가지다. 굳이 구체적으로 비교할 필요도 없겠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봐도 <훈민정음 해례본>과 ‘진초천자문’과 ‘엄상좌찬’의 글씨는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러한 비교연구가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인가.
비전문가가 봐도 안평대군의 글씨와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글씨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손환일 소장의 논문에서
■중국 황제도 감탄한 서예가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안평대군의 작품 하면 ‘몽유도원도’ 발문과 2001년 도난 당한 ‘소원화개첩’ 정도만 떠올린 것 같다. 물론 실물을 쉽게 볼 수 없고(‘몽유도원도’ 발문), 또한 소재 불명인 채(‘소원화개첩’)인 두 진적의 케이스는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던 차에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재송엄상좌귀남서’가 진작으로 꼽히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할까.
돌이켜 보면 안평대군의 작품은 당대 중국 황제(명 경제·재위 1450~1457)로부터 “매우 좋다. 꼭 이것이 조맹부(1254~1322)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원나라 서예가인 조맹부는 왕희지 글씨의 정통적인 서법과 고법을 바탕으로 필법이 굳세고 아름다웠다는 평을 듣는 명필이다. 그런데 명 경제가 ‘안평대군=조맹부’라 했지만 실은 안평대군이 한 수 위였다. 안평대군은 이 조맹부의 필법에다 ‘호매한 필력과 늠름한 기운을 담아 날아 움직일 듯한 서법을 더 얹었다’는 극찬을 받았다(<용재총화>).
이후 조선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좋은 글씨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면 중국 사람들은 “당신네 나라에 제일 가는 사람(안평대군)이 있는데 뭐 때문에 멀리까지 와서 글씨를 사려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또 어찌어찌해서 중국의 유명한 글씨를 구입한 조선인들이 귀국해서 작품을 감식해보면 그중 절대 다수가 안평대군의 글씨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중국을 방문한 조선인들이 사온 글씨가 자신의 것임을 확인하고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기며 기뻐했다.(<연려실기술> ‘전고·필적’)
국보 238호 ‘소원화개첩’. 안평대군의 진적인데, 2001년 도난당해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개인소장
■뿔뿔이 흩어진 작품들
그렇게 잘나가던 안평대군이 어느 순간 신숙주(1417~1475)에게 자신이 수집한 작품들을 보여주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아! 물(物)이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다 때가 있다.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운수가 있다.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어찌 알겠는가”(<동문선> ‘신숙주·화기’)
안평대군 자신과 안평대군이 평생 쓰고 모아둔 작품의 운명을 소름끼치도록 예감한 것이 아닌가.
말이 씨가 되었다. 안평대군이 1453년(단종 원년) 계유정난으로 36살의 젊은 나이로 사사된 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자신의 작품과 소장품들이 모두 몰수됐다. 그 와중에서 일부가 시중에 흘러나왔다.
그렇게 흘러나온 작품은 지금으로 치면 국보급 문화재의 대접을 받았다. ‘안평대군의 작품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사대부의 자랑이자 로망이었다. 예컨대 조선 중후기의 문인 송준길(1606~1672)은 이후원(1598~1660)에게 보내는 편지(1640)에서 “나에게도 안평대군의 친필이 있다”고 자랑했다.(<동춘당집>)
“저에게도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의 친필이 있습니다. 형(이후원)께서 보신다면 형의 기호품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이것을 단연 으뜸으로 여기실 것입니다”.
안평대군의 ‘집고첩발(集古帖跋)’. 1443년(세종 25) 안평대군이 역대 명필의 서첩을 모은 책(<집고첩>)에 쓴 발문이다. 석각 첩장이다.|개인 소장
■안평대군 작품 소장은 가문의 보배
백사 이항복(1556~1618)은 아예 안평대군이 쓴 책의 인쇄본 2~3책을 베껴서 활자로 만든 뒤 다시 인쇄본을 여러 책 찍어냈다. 그러자 “인쇄본을 구하려는 사대부들이 앞다퉈 달려왔다”(<백사집>)고 한다. 지금 같으면 불법 복제물, 즉 해적판을 마구 찍어낸 셈이니 저작권법으로 처벌을 받아야 했을 판이다. 그러나 백사는 안평대군의 해적판을 찍어 자신이 관할하는 훈련도감의 비용으로 충당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다소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나 할까.
조선 중기의 문인 윤근수(1537~1616)는 “필획이 정밀하고 광채가 나서 사람들을 환하게 비추는 안평대군의 작품들은 모두 희귀한 보물”(<월정집>)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금도 사람들이 그(안평대군)의 글씨가 있는 작은 종이 조각이라도 얻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커다란 옥 같은 진귀한 보배로 여긴다.”
그러면서 윤근수는 “친구가 선물로 준 안평대군의 책과 족자를 모두 잃어버려 가슴이 아팠다”면서 “겨우 비해당첩(안평대군의 글씨책)을 얻었는데 아직 장황(표지장식)을 하지 못했으니 부끄럽다”고 토로했다.
안평대군이 쓰던 물건 역시 가보가 됐다. 예컨대 안평대군의 별장터였던 곳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벼루를 수습한 적이 있었다. 이 밭은 당시 승지 박동열(1564~1622)의 소유였기 때문에 벼루 역시 박동열의 것이 됐다. 윤근수는 이 대목에서 “안평대군이 죽은지 100년이 지났고 그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면서 “벼루가 한창 문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며 날마다 글씨를 쓰고 있는 박군(동열)에게 갔으니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부러워했다. 윤근수는 그러면서 “벼루가 박군에게 간 것도 운명이이니 보물로 간직하여 영원히 반남 박씨 집안에서 대대로 지키는 가보로 삼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전했다.
“중국 조정 선비들이 자연미 넘치는 불세출의 안평대군 작품을 한장씩 얻어도 가보로 삼았다”(<태허정집>)는 최항(1409~1474)과, “인간의 신묘한 솜씨 오래 흠모했는데 과연 높은 이름 나타나 천하가 다 알게 되었다”(<박선생유고>)고 읊은 박팽년(1417~1456) 등 동시대인 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1595~1682)은 “안평대군의 글씨는 그 변화무쌍함이 신의 경지”(<기언> ‘별집·발’)라 했고,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 역시 ‘안빠(안평대군 빠)’임을 자처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안평대군의 별장터인 무계정사터. 현재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에 수많은 문인 선비들이 드나들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진적은 국내에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지금 안평대군의 또다른 진적으로 추정되는 ‘오구라 유물’과, 그동안 대중적으로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자 필자가 안평대군이라는 사실 등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 안평대군의 흔적이 실제로는 여기저기 남아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서예 전문가들은 안평대군의 진적이 분명 국내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재송엄상좌귀남서’가 대표적이다.
손환일 소장과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개인 소장가들은 진작이 분명한 안평대군의 글씨를 좀처럼 공개하지 않고 있다”면서 “섣불리 공개했다가 누군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순간부터 논란의 중심에 서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서화는 사찰을 지키는 금강역사와 같은 눈(금강안·金剛眼)과 혹독한 세리와 같은 손(혹리수·酷吏手)으로 봐야한다”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언급처럼 철저하게 가려내야 한다.
그러나 추사와 같은 안목을 갖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 작품이 안평대군의 것이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국내에는 장담하건대 안평대군의 진적은 없다’는 식으로 으름장을 놓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누군가 혹시 안평대군의 진적을 소장하고 있다면 이런 판국에 굳이 공개하지 않을 것이다.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요즘처럼 누구라도 온라인 공간에서 자기 의견을 낼 수 있는 시대라면 그 누구라도 ‘그 작품은 가짜’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서 “그렇게 되면 그 작품은 진위와 상관없이 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만다”고 말했다.
200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일본 뎬리대 소장 ‘몽유도원도’가 출품되어 수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뎬리대에서는 그때 “이번이 마지막 대여”라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선무당이 안평대군을 죽이는가
그런 의미에서 1450년(세종 32년)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 예겸(1415~1479)의 안목이었다면 쉽게 안평대군의 진작을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예겸 등은 안평대군이 쓴 현판의 두 글자를 보고 “이 글씨는 보통 솜씨가 아니다.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예겸은 범옹 신숙주(1417~1475)가 들고 있던 책표지에 ‘泛翁(범옹:신숙주의 자)’이라고 쓴 안평대군의 정자 글씨를 보고 “필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이냐. 글씨 좀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신숙주는 이때 “강희안이 쓴 것”이라고 둘러댄 뒤 강희안의 글씨를 받아 주었다. 그러자 예겸은 대번에 “이것은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니다”라고 딱 잘랐다.(김안로의 <용천담적기>) 하기야 이 시대엔 예겸같은 감식가가 나타나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지는 의문이다. 예겸이 재림해서 ‘안평대군 진작이 맞다’해도 온라인 공간에서 ‘무슨 소리냐’고 지적하는 순간 수많은 찬반댓글이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선무당들이 안평대군의 진적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4)
[아시아경제 김세영 기자] 서울미술관은 24일부터 6월 11일까지 개관 5주년을 기념하고자 ‘사임당, 그녀의 화원(Saimdang, Her Garden)’ 특별전을 연다.
해당 전시는 조선시대 여류예술가인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1인전으로, 최근 TV 프로그램, 도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체적 여성상으로 재차 주목받는 그녀의 삶을 조명하고자 기획됐다.
작품 수는 15점으로 14점이 모두 초충도(草蟲圖)다. 초충도에는 다산, 자손 번창, 장수, 출세 등 다양한 상징적 내용이 담겨 있다.
안병광 서울미술관 설립자(유니온제약 회장)는 “정부와 감정가협회에서 인정받은, 출처가 확실한 15점으로만 구성했다. 40~50점을 모아 전시하는 것은 쉽지만, 그럴 경우 진위여부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숫자는 적지만, 미술관의 공신력과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다”고 했다.
나머지 한 점은 ‘묵란도(墨蘭圖)’로 개관 이래 첫 공개된다. 송시열은 묵란도를 두고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려 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극찬한 바 있다.
묵란도는 2005년 KBS 1TV ‘TV쇼 진품명품’에서 처음 공개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수묵화다. 안 회장은 당시 이 작품을 구매하기 위해 1년 6개월간 공을 들였다고. 끝내는 당시 평가액의 두 배 이상을 지급하고서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묵란도, 비단에 수묵, 92.5x45cm [사진=서울미술관 제공]
시·서·화 삼절의 효시로 평가받는 사임당에 대한 이해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다. 15세기에는 산수화에 능한 화가로, 18세기 후에는 훌륭한 아들 율곡 이이를 키워 낸 어머니로, 근대 이후에는 여성 계몽 과정에서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본 전시에서는 사임당의 작품과 그녀의 작품을 평하는 후세의 글들을 함께 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모양처의 상징만이 아닌 예술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았던 화가로서의 사임당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임당의 친정 오죽헌 뜰에서 피어나던 맨드라미, 가지, 오이와 그 옆에서 노닐던 나비와 방아깨비, 개구리, 쥐 등 온갖 동식물들이 묘사된 여러 작품들을 통해 그만의 뛰어난 미의식과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
안 회장은 “신사임당은 요즘으로 치면 워킹맘 또는 슈퍼우먼이었다“면서 “그의 그림은 현시대와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림 속 중심이 되는 식물 옆에 방아깨비나 여치가 마치 마실을 나온 것처럼 잘 어울린다. 이웃처럼 같이 호흡하고 공존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속에서 인간미도 느낄 수 있다.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뽐내지 않는다”라고 했다.
한편, 서울미술관은 설 연휴기간(27~30일)동안 정상 개관하며, 5개월 전시기간 동안 매일 오후 2시에 전시해설 프로그램인 ‘큐레이터의 이야기로 만나보는 신사임당’으로 관람객에게 깊이 있는 설명과 작품의 현대적 해석을 들려줄 예정이다.(5)
한국화가 김현철씨의 신작인 <공재 윤두서 초상>(부분). 세로 길이 1m35의 긴 족자 비단에 진채로 그렸다. 공재의 자화상과 관련 문헌기록을 치밀하게 검토한 뒤 그린 역작이다.
한국 초상화의 최고 걸작인 국보 240호 공재 윤두서 자화상. 이 자화상에 대한 헌정 작품들이 이번 녹우당 전시를 통해 처음 한자리에 모였다.
전시가 열린 해남 녹우당 충헌각. 2010년까지 유물전시관으로 쓰였던 건물이다.
남도 해남의 뙤약볕은 질기다. 살갗을 쿡쿡 찌르는 햇살 아래 녹음 가득한 해남 덕음산 기슭으로 걸어간다. 산야 언저리에선 거름 냄새가 스며나왔다.
고산 윤선도, 공재 윤두서 등을 배출하며 조선 중후기 문예 중흥 밑돌을 놓았던 해남 윤씨 가문의 종택, 덕음산 자락 녹우당은 한결같은 푸르름으로 길손들을 맞아주었다. 요즘 그 주변에서는 이 가문의 옛 거장과 후대 작가들의 특별한 만남이 펼쳐지는 중이다. 녹우당에서 나고 자랐고, 말년에 돌아와 불세출의 명작인 자화상(국보 240호)을 그린 뒤 세상과 이별한 거장 공재 윤두서(1668~1715)를 기리는 전시다. 형형한 눈빛과 이글거리는 듯한 터럭의 묘사로 후대 한국 화단에 영감의 온상이 된 공재의 자화상에 바치는 현대미술가 18명의 신작들을 선보이는 기획전 ‘공재, 녹우당에서 공재를 상상하다’(해남 행촌문화재단 주최)가 지난달부터 고택 경내 충헌각에서 열리고 있다.
자욱한 매미 소리 들으며 충헌각 전시실로 들어가면 김억 판화가의 대작들에 눈길이 멎게 된다. 문인 고산 윤선도의 발자취를 따라 녹우당부터 보길도까지 이어지는 가로 길이 10m 넘는 대작 <남도풍색>과 다산 정약용의 발길이 오갔던 해남, 강진의 산록을 담은 세로축 병풍 12폭이 시선을 압도한다. 2012년 행촌재단의 남도아트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작가가 2년 넘게 해남, 강진의 산야를 종으로 횡으로 달리며 인문답사기행을 벌인 여정이 담겼다. 8개월여 판각 작업을 거쳐 옹골찬 매무새의 진경 목판화 대작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깔깔한 명암의 잔선으로 산세의 맥을 옮겨내고 골짝과 벌판, 바다를 오가는 다산, 고산, 공재 등 옛 선인들의 답사길과 사생하는 화가들, 고기 잡는 어부들 같은 지금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화폭 속에 쟁여넣은 21세기 총체적인 진경그림이다. 전시현장에서 만난 작가는 “땅이 인간과 인생을 만든다는 것을 남도를 발품 들여 돌면서 절감했다. 자연이 안긴 터전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이들의 인기척 있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그림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화가 김현철씨의 <공재 윤두서 초상>은 김억 작가의 대작들과 더불어 이번 전시의 쌍벽으로 꼽을 만하다. 빈틈없는 묘사와 정갈한 배색, 엄숙한 느낌의 선비적 자태를 담은 그림이다. 간송미술관 연구원으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와 초상화를 공부한 작가는 옷 부분은 사라진 공재 자화상의 이미지를 바탕삼아 공재의 자화상에 얽힌 옛 기록들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긴 수염 나부끼는 얼굴은 윤택하고 붉구나’라며 공재 자화상을 상찬한 지인 담헌 이하곤의 글 등을 뜯어본 뒤 도포에 동파관을 쓴 선비의 온전한 전신상으로 새로운 공재 초상의 전형을 완성해냈다.
여성주의 작가 윤석남씨가 처음 먹붓으로 그린 자화상도 귀기 같은 혼기운이 와닿는 수작이다. 르네상스기 독일 작가 뒤러의 드로잉을 떠올리게 하는 예민한 선들로 자의식이 번뜩이는 일상적 자태를 담았다. 담담한 필치로 그린 듯하면서도 물결처럼 일어난 머리카락들과 치켜뜬 눈, 활력이 가득한 표정선의 흐름 등에서 대가의 내공이 느껴진다. 이외에도 해남 윤씨 가문의 살림살이를 떠받쳤던 종부들의 심정을 투영해 녹우당의 이끼 낀 연못을 주관적 색감으로 그려낸 방정아 작가의 <텅빈 연못>이나 부처, 동물, 인물상 등을 짜집기한 이미지로 인간의식의 심연을 조망한 김기라 작가의 콜라주 작품, 해남 미황사 만물공양 때 팥 한부대를 보시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담은 이종구 작가의 그림 등이 전시장을 수놓았다. 필력과 작가의식 측면에서 모두 고른 수준이라고 평하기는 어렵지만, 각양각색의 상상력으로 공재 화풍의 성취를 계승하려한 참여작가들의 개성과 노력들이 엿보인다.
전시는 의미만큼이나 한계도 뚜렷하다. 무엇보다 출품작들은 공재 자화상과 동선상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 충헌각 아래 100m 떨어진 고산 윤선도 기념관 지하에 공재 자화상이 더부살이를 하고 있어서다. 전시를 기획한 행촌문화재단 쪽은 애초 기념관에 출품작을 같이 전시하는 방안을 생각했지만, 운영을 맡은 해남군 쪽의 완강한 입장에 부딪혀 구상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는 후문이다. 충헌각 전시또한 협소한 공간 탓에 김억 작가의 판화 대작은 표지만 보여주고 대부분 접어놓은 채 전시하는 등 품격 있는 기획전의 틀은 갖추지 못했다. 해남 윤씨 문중에서는 최근 공재미술관 건립사업을 추진 중이다. 아쉬움이 남는 녹우당의 첫 현대미술 전시는 공재를 재조명하기 위한 미술관 건립이 왜 필요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0월3일까지. (061)530-8281. 해남/글·사진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도판 나무화랑, 행촌문화재단 제공(6)
윤두서와 베이컨의 자화상이 말하는 것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2023. 6. 25. 23:33
〈69〉이 사람을 보라
윤두서의 자화상은 외관을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 정신을 가다듬어 올바른 상태에 놓고, 우주를 관통하는 이치를 응시하고자 하는 강고한 자아가 엿보인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먼저, 윤두서(1668∼1715)를 보라. 윤두서는 17세기 조선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던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어부사시사’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윤선도가 함경도에 유배되었을 때, 큰아들에게 집안 관리 잘하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쓴다. 그 편지는 ‘충헌공가훈(忠憲公家訓)’이라는 이름을 띠고서, 해남 윤씨 집안에서 대대로 전하는 가훈이 되었다. 그 가훈에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 법, 자산 관리를 잘하는 법, 공부를 제대로 하는 법, (원한을 품지 않게) 노비를 적절히 때리는 법 등이 담겨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증손자 윤두서는 아마도 그러한 가훈을 마음에 새기며 자랐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여 1693년(숙종 19년) 진사시에 합격한다. 그러나 해남 윤씨 집안은 당쟁에서 패배하게 되고, 그 여파로 윤두서에게도 더 이상 관로가 열리지 않게 된다. 이제 윤두서는 관직의 꿈을 접고 집안에 은거하면서 학문과 예술 활동에 열중한다. 그가 남긴 자화상은 한국 회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단지 대상의 외관을 묘사한 데 그치지 않는다. 외관을 내면을 드러내는 창구로 활용한다. 과연 어떻게?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내면의 창구일까? 고대 중국의 사상가 맹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 속에 있는 것 중에 눈동자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눈동자는 그 악을 덮어두지 못한다.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고, 가슴속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흐리다. 그 말을 듣고 그 눈동자를 보면,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가슴속을 숨기겠는가?”(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不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不正, 則眸子眊焉. 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 실로 윤두서 같은 눈동자를 한 사람이라면, 지조 있는 인생을 살았을 것 같다.
눈 못지않게 인상적인 게 털이다. 털은 자신의 일부이면서 일부가 아니다. 자신의 몸으로부터 자라난 것이기는 하지만, 잘려 나가도 통증을 느낄 수 없다. 충분히 자기의 일부가 아니기에, 잘 관리하지 않으면 추레한 꼴이 되고 만다. 수염을 깔끔하게 밀어버린 사람이 수염 기르는 사람보다 단정한 사람일까. 수염을 방치하는 사람보다야 단정한 사람이겠지. 그러나 수염을 맵시 있게 기르는 사람보다는 덜 단정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수염을 밀어버리는 일보다 수염을 관리하는 일이 더 집요한 노력과 자기 통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풍성하되 정확한 비례를 유지하도록 잘 관리된 윤두서의 수염은 그에게 고도의 자기 통제력이 장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자화상이 윤두서의 실제 모습과 얼마나 닮았을까.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자신을 추한 모습으로 그리고 싶은 사람은 드물다. 윤두서의 자화상이 보여주는 것은 윤두서의 실제 모습이라기보다는, 윤두서가 보고 싶었던 자기 모습일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어 올바른 상태에 놓고, 우주를 관통하는 이치를 응시하고자 하는 강고한 자아. 윤두서의 자화상에 따르면, 인간은 감히 그 정도의 존재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자화상은 강고한 자아가 아닌 무엇이 오고 간 흔적, 그 자체를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자신을 어여쁘게 이상화하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은 없다. 사진 출처 경매회사 크리스티 홈페이지, 미 휴스턴현대미술관 홈페이지
그러나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을 보라. 영국 화가 베이컨은 윤두서와는 달리 경주마 조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말을 조련하는 일이라, 우주의 이치를 응시하기에 바쁜 조선 시대 양반이 할 일은 아니다. 아들이라고 태어났는데 별로 남자답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베이컨의 아버지는 인부들에게 아들을 채찍질로 때리라고 시켰다. 윤두서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노비라도 마구잡이로 구타하면 앙심을 품을 수 있으니, 잘 때려야 한다고.
구타당한 베이컨은 앙심 같은 것은 품지 않았다. 그는 맞는 것을 오히려 좋아했다. 오, 제발 더 때려줘. 베이컨을 때리고 나서 당황했을 구타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연구자 데즈먼드 모리스에 따르면, 베이컨은 자기를 고문한 사람들과 섹스를 즐겼다. 피학적 동성애자였던 베이컨은 남창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곤 했다. 역시, 조선 시대 양반이 할 일은 아니다.
자화상 속에서 베이컨은 실로 두들겨 맞은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 무엇에 두들겨 맞은 것일까? 인부들의 주먹에? 함께 피학적 성행위를 즐기던 애인의 채찍에? 아니면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던 동시대에? 그것도 아니라면 삶 자체에? 피학 성애자였던 그는 자신을 두들겨 패는 삶 자체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랑의 결과가 그의 예술이다. 그가 예술가로 큰 성취를 이루자, 세상은 살갑게도 기사 작위를 제의했다. 베이컨은 이렇게 거절했다. “그런 명예를 받으면 늙어 보여서 싫어.”
베이컨의 초상화에는 강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붓질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무엇인가 지나간 것이다. 붓이 지나갔다. 충동이 지나갔다. 감각이 지나갔다. 생명이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갔다. 무엇인가 왔다가 지나가 버렸다. 무엇이 오고 가든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강고한 자아를 그린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 오고 간 흔적이 바로 자신이라고 그린 것이다. 이 구타의 흔적과도 같은 붓질 너머에, 별도의 불변하는 자아 같은 것은 없다.
이게 베이컨의 실제 모습일까. 글쎄. 이것은 베이컨이 자기라고 생각한 모습이다. 베이컨은 생전에 자기 얼굴은 푸딩처럼 생겼다고 말했다. 자신을 어여쁘게 이상화하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은 없다. 베이컨은 과연 자신의 모습을 그저 뭉개버린 것일까. 그저 지워버린 것일까. 그래도 거기에는 흐릿하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흔적이 있다. 베이컨의 초상화를 통해서 본, 인간이란 간신히 그 정도의 존재다. 그러한 존재는 가훈 같은 건 남기지 않는다. 베이컨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순간을 넘기려고 아무 말이나 한다.”(7)
[해외 우리 문화재 바로알기] 〈6〉 근대 한국 문화재 지킴이들 / 친일파 송병준 머슴이 태우려던 화첩 / 골동상 장형수가 불사르기 직전 구해 / '간송' 전형필이 수장할 수 있게 만들어 / 1930년대 무지한 문화재 인식 보여줘 / 월북 함석태와 종적감춘 '금강산연적' / 60여년 지나 北 국보되어 일반에 공개 / 후지쓰카, 日로 가져간 김정희 '세한도' / 손재형, 두 달간 매일 문안해 되찾아와
“… 사랑채 한쪽에 붙은 변소엘 가다 보니까 머슴이 군불을 때고 있는데 무슨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처넣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문득 들여다보니 초록색 비단으로 귀중하게 꾸민 책이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아마 무식한 머슴이 군불 땔감으로 휴지며 뭉치를 안고 나올 때 잘못 섞여 나온 거겠지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 책을 보자고 했지요. 그리고 펼쳐보니 겸재 정선의 화첩이란 말이에요. 내가 그 시각에 변소엘 가지 않았거나 한 발짝만 늦었어도 그 화첩은 아궁이 속으로 불타서 영원히 사라졌을 테지요.”
골동상 장형수가 1933년에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겪은 일이다. 장형수는 겸재화첩을 송병준의 손자에게서 사서 전형필의 서화 수집창구 역할을 하던 한남서림의 이순황에게 보여 주었고 이순황은 전형필이 수장하도록 중개했다. 겸재화첩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전하고 있는 보물 제1949호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이다. 이 일화는 친일파들이 얼마나 부유했고 또 많은 미술품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근대기에 소중한 미술품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문화재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근대의 화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1904∼1967)의 개탄에서도 비슷한 시대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신사조에 대한 갈망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서…가가호호 전래의 진귀한 책과 기이한 보배는 휴지값, 개값으로 팔아 치우고 하는가 하면”이라며 새로운 것에의 관심이 커질수록 과거의 것들을 돌보지 않게 된 세태를 꼬집었다.
옛 유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현실에서 자신의 재산을 기울여 우리 문화재를 모은 수장가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마땅하다. 이들이야말로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수집을 시작할 때의 의도와 달리 어렵게 수집한 유물이 흩어지거나 없어지는 운명에 처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정선의 단발령망금강정선의 ‘해악전신첩’에실린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친일파 송병준의 집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해악전신첩의 사연은 일제강점기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실감케 한다.
◆60여년 만에 북한의 국보로 재등장한 금강산연적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난 함석태(1889∼?)는 일본 유학 후 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되었다. 서울시 중구 삼각동에 개업한 함석태는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라는 명예로운 기록 외에 ‘소물진품대왕’(小物珍品大王)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많은 고미술품을 소장하였다. 그러나 함석태의 소장품 가운데 사진으로나마 전해지는 것은 ‘조선고적도보’(1935)의 도자기 15점, ‘조선명보전람회도록’(1938)에 수록된 회화 4점에 불과하다. 근현대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수장가의 소장품들이 그 소재조차 알 수 없게 된 경우가 많은데 함석태의 소장품 역시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함석태는 특히 ‘금강산연적’을 지극히 아껴 어딜 가든 반드시 휴대하고 다녔다. “부산에서 연락선을 탈 때 일본 형사에 의해 추궁을 당했지만 여러 번 왕래하는 동안에 소문이 나서 금강산연적만은 검사를 받지 않을 정도로” 그의 금강산연적에 대한 애정은 유명했다. 1944년 가을 함석태는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자신의 소장품을 모두 세 대의 차에 나눠 싣고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가서 해방을 맞이했다. 그 후 황해도 해주를 거쳐 월남하려다 실패한 이후 함석태의 소식은 알 수 없다. 육로를 택하면 충분히 월남할 수 있었지만 해주에서 배를 이용하여 고미술품을 가져오려다 실패한 듯하다. 결국 미술품 사랑이 그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금강산연적은 그 이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2006년 6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북녘의 문화재’ 전시회에 북한의 국보 ‘진홍백자금강산모양연적’으로 출품되었다. 없어진 것으로만 여겨졌던 국보급 문화재가 당시의 남북화해 분위기에 따라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금강산 모형 연적한국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가 가장 아꼈던 ‘금강산연적’은 해방 직전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다가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에 ‘진홍백자금강산모양연적’이란 이름으로 출품되었다.
◆목숨 걸고 모은 문화재 일시에 흩어지기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수장가들은 일본인들과 재력 면에서 차이가 컸기 때문에 값비싼 물건은 살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장택상과 전형필은 일본인에 맞서 귀한 물건을 많이 수집했다. 장택상은 특히 “도자기 수집의 권위”로 유명했다. 그러나 장택상의 수장품은 대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6·25전쟁으로 인해 그의 경기도 시흥, 노량진에 있던 별장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시흥에서 벌어진 전투로 그의 별장에 보관했던 숱한 유물이 사라졌으며, 노량진 별장에 둔 많은 미술품도 직격탄을 맞아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장택상의 남은 수장품은 그가 이승만과 맞서기 위한 활동에 나서면서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처분하는 바람에 곳곳으로 흩어졌다.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일본의 동양철학자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는 추사 김정희를 청나라 고증학의 완성자로 높이 평가했다.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는 당시 휘문고등학교 설립자인 민영휘가 소장하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을 거쳐 후지쓰카가 갖게 되었다.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1940년에 교직을 그만두고 도쿄로 돌아갈 적에 가져갔는데, 이 사실을 추사 작품 수집가로도 유명한 서예가 손재형(1903∼1981)이 뒤늦게 알게 되었다. 손재형은 미군 공습이 한창인 도쿄에 가서 생면부지 후지쓰카에게 세한도 양도를 요청했다. 후지쓰카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두 달간 매일 문안인사 드리며 부탁하는 손재형의 정성에 감복하였다. 마침내 후지쓰카는 손재형이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다며 건네주었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인수한 지 석 달 뒤인 1945년 3월 10일, 후지쓰카의 연구실은 공습을 받아 많은 서적과 서화가 불타고 말았다. 손재형의 노력에 의해 세한도는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손재형은 1958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자신의 소장품인 정선의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김홍도의 ‘군선도’ 병풍 등을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썼다가 결국 빚을 갚지 못해 이들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모두 국보로 지정된 명품들인데 세한도 역시 저당 잡혔다가 개성 갑부 손세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손재형은 자신의 손을 떠나게 된 세한도를 보며 목숨 걸고 현해탄을 건너가 직접 가져온 찬란한 기억을 아프게 회고했을 것이다.
세한도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는 손재형이 목숨을 걸고 일본에서 가져온 작품이다.
◆문화재 유출 막은 수장가들의 공로 기억해야
정선의 해악전신첩을 소홀히 다룬 송병준가와 심지어 불쏘시개로 쓰려고 했던 머슴, 폭격을 피해 평안북도 영변까지 자신의 수장품을 가져갔다가 결국 수장품 때문에 월남에 실패한 함석태, 6·25전쟁으로 인하여 소중한 작품의 대부분을 날려버린 장택상, 목숨 걸고 도쿄까지 가서 일본인 학자의 양보를 통해 가져온 세한도를 저당 잡혀 넘겨주고만 손재형까지 근대 한국의 미술품은 지난한 과정을 통해 전수되었음을 보았다. 우리의 근대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일상적인 생활은커녕 생존마저 위협받을 정도로 곡절이 많은 시기였음을 수장가와 그들이 수집했던 미술품을 통해서도 실감할 수 있다.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장
골동가에서 “골동이란 바람기 있는 기생 같은 것”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골동은 태생적으로 돈에 휘둘리기에 머무를 곳을 알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결국 골동의 운명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고미술품의 수장에 대하여 부정적 느낌을 주는 이와 같은 표현이 사용된 원인은 우리나라 근대 이후의 골동품 수장과 거래가 도굴·밀매·밀반출·위조 등으로 점철된 탓이 크다. 그렇지만 미술품과 미술시장 그리고 수장가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미술품은 민족의 문화역량과 미의식의 총화이고 미술시장은 미술품이 유통되는 장이기 때문이다. 한편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재산을 기울여 문화재를 지켜낸 수장가들의 노력 역시 길이 조명될 가치가 있음은 물론이다.(8)
신들린듯 흘려쓴 양사언의 초서… ‘조선서화 보묵전’
업데이트2009-09-25 04:48
사진 제공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봉래 양사언,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 오원 장승업….
29일 개막해 5월 25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 ‘조선 서화 보묵(寶墨)’에는 조선시대를 총망라하는 다양한 글씨와 그림 90여 점이 선보인다.
일반에게 처음 공개되는 작품도 많다. 봉래 양사언(1517∼1584)의 ‘학성기우인(鶴城寄友人·학성에서 벗에게 보냄·사진)’이 대표적이다. 양사언은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꼽힌다. 양사언은 ‘봉래시집’에 실린 이 작품에서 광초(狂草·미친 듯 써 내려간 초서)의 면모를 드러내 보인다.
양사언의 자유분방한 글씨를 퇴계 이황(1501∼1570)의 단정한 행서 작품 ‘유거(幽居·그윽한 거처)’와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유거’ 역시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
정조가 재상의 안부를 물으며 쓴 어찰 ‘근후안승(近候晏勝·요즘 안녕하신지요)’도 처음 공개된다. 이 어찰은 정조 낙관이 찍혀 있는 희귀 작품이다.
오원 장승업(1843∼1897)의 10폭 병풍 ‘노안도(蘆雁圖)’도 처음 선보인다. 하늘을 날거나 걸어 다니는 기러기 수십 마리는 모두 생김새와 행동이 다르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오원의 완숙한 필치를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글씨 ‘각고(刻苦)’는 지난해 12월 서예박물관 전시에서 공개돼 주목받은 작품. 크기가 164×82cm에 이르는 이 작품은 힘이 넘치는 송시열의 정신을 한눈에 읽어낼 수 있는 명품이다.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안평대군의 작품뿐 아니라 17세기 조선 화단에서 명성을 얻은 김명국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기려도’ ‘선인도’도 만날 수 있다.
이번 출품작들은 커피 브랜드 ‘테라로사’ 김명성 회장의 소장품. 이번 전시는 김 회장의 장서각인 ‘아라재(亞羅齋)’에서 이름을 따 ‘아라재 컬렉션’이라는 별칭이 붙었다.(9)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16세기 조선 산수화 日서 돌아왔다.."국내 최고 소상팔경도"
2017. 11. 13. 07:16
'산시청람'·'강천모설' 등 2점..이태백의 시 표현한 그림일 수도
소상팔경도 중 '산시청람'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중국미술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6세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산수화 2점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작자 미상의 이 그림들은 국내 회화 중 최고(最古)의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일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미술연구소는 일본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 전기 소상팔경도 2점을 국내로 들여왔다고 13일 밝혔다. 이 그림은 가로·세로가 각각 약 30.5㎝ 크기다
중국에서 11세기부터 그려진 소상팔경도는 후난(湖南)성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곳의 풍경을 묘사한 산수화를 통칭한다.
소상팔경도는 8개의 각기 다른 주제로 구성되는데, 이번에 돌아온 그림은 '산시청람'(山市晴嵐)과 '강천모설'(江天暮雪)에 해당한다. 산시청람은 산골 마을의 아지랑이 낀 모습을 나타낸 그림이고, 강천모설은 해가 저물 무렵 강가에 내리는 눈을 표현한 작품이다.
소상팔경도 중 '강천모설'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중국미술연구소 제공]
한국과 중국 회화사 연구자인 이타쿠라 마사아키(板倉聖哲) 일본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교수는 "2008∼2009년 일본 도치기현립미술관에 전시된 소상팔경도 두 점과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보인다"며 "이 그림들은 각각 '조세쓰'(如雪)라는 서명이 있는 상자에 보관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림을 직접 살핀 홍선표 한국전통문화대 석좌교수는 "상당히 잘 그린 수작으로 보존상태도 뛰어나다"며 "조선 전기 소상팔경도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있는데, 이 작품은 양식상 가장 오래된 팔경도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특히 계절감을 살린 화법에 주목했다. 당시에 그려진 소상팔경도는 정형화된 모습을 보이지만, 두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회화는 꽃으로 봄을 나타내고, 낙엽으로 가을을 드러내는 등 모티브로 계절을 암시했다"며 "산시청람은 봄, 강천모설은 겨울 풍경을 나타낸 그림인데, 특정 사물을 그리는 대신 농담의 대비를 주는 필묵법을 썼다"고 강조했다.
이태호 명지대 초빙교수는 이 그림들이 소상팔경도 유형에 속하지만, 시(詩)의 내용이나 정서를 표현한 그림인 시의도(詩意圖)일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교수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성을 묘사한 산시청람 그림은 이태백의 시에 나오는 구절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며 "조선 후기에 많이 만들어진 시의도의 초기 형태로 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형적인 소상팔경도의 구도에서 벗어나 회화적인 맛을 살린 그림"이라며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회화가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덧붙였다.
중국미술연구소는 조선 후기 공예품 중 걸작으로 불리는 달항아리와 채색 행렬도인 동가반차도를 들여온 바 있으며, 나한도와 수월관음도 등 다양한 불교 문화재를 환수한 기관이다.(10)
이 시기 서민문화의 여러 양상 가운데서 가장 중요시되는 변화는 한글 서책의 유행이었다. 고대사회에 이어 중세사회가 지속되는 동안 내내 지배층 가운데서도 핵심 세력의 전유물이었던 문자에 대한 해독 능력과 문자에 의해 축적되는 지식을 소수이기는 하나 서민들이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변화였다. 물론 서민들이 해독하는 문자는 주로 한글이었다. 서양 근대사회의 진전에 각각의 민족이 로마 문자를 빌려 자신들의 언어로 문자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 끼친 영향은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조선에서는 여기에 더해 독자적인 문자로 문화 활동을 하는 이들이 지배층의 여성으로부터 서민층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민들은 이와 아울러민요와탈춤등을 통해서 독자적인 정서를 응집하여 표출하고 있었다. 중세 신분질서의 모순 등을 담아 공동 제의에 이어 축제로서 공연되던 탈춤은 차츰 여러 지역에서 상업문화로 변모하였고, 나아가 판소리나 한글소설에도 서민적 정서가 담겨지게 되었다. 장시의 발달로 전보다 정보의 확산이 쉬워진 환경 속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민중의식을 고취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민화는 조선 후기 서민의 독특한 미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장르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민화는 대부분 서민 가운데서도 경제력을 축적한 축이 향유하였던 내용에 국한된다. 이 시기의 신분제 변동 양상이 양반이 급증하는 추세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여러 가지인데, 민화는 경제력을 축적한 서민들이 한편으로는 선비 내지 학자관료를 흠모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한편, 세속적인 욕망이 가득한 존재였음도 내비치고 있다. 개항 이후 주자성리학의 시대가 마감된 뒤 사회를 주도하게 될 자본가 계층이 어떠한 문화와 정서를 갖게 될지를 이미 이 시기의 민화가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국립국악원은 정월대보름 공연 ‘2008 산대희’를 21일 오후 7시30분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린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화려한 꽃을 피웠던 ‘산대희’는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을 만들어놓고 광대들이 펼치는 ‘가무백희’다. 축제가 절정을 이뤘던 조선 중기에는 광화문을 가릴 정도로 높은(2 가량) 산대를 설치하고 600여명의 광대들이 좌대와 우대로 나뉘어 경쟁적으로 재주를 뽐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열린 것은 1865년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당시로 추정된다. 국립국악원이 산대희를 무대에 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5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산대희’ 연습이 한창이다. 객석에 앉으니 악사들의 붉은 옷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원색의 향연이라 해도 좋을 만큼 화려한 색채감으로 황홀하다. 거문고와 가야금, 아쟁과 해금, 대금과 단소를 든 악사들은 왕이 움직일 때만 연주를 했다고 한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낙양춘’과 ‘수제천’이 울려퍼지고, 장수를 상징하는 청학과 백학, 연꽃 속에 숨어있던 여령(춤추는 여자)이 어울려 ‘학연화대무’를 춘다. 3천년에 한번 열리는 불로장생의 복숭아를 바치는 궁중무용인 ‘헌선도’,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호랑이 놀이’가 이어진다. 호랑이는 “남대문 태워먹은 인간들”을 나무란다.
산대에서는 경기민요와 가야금병창 소리꾼들이 ‘사철가’ 등을 부른다. 땅재주와 구슬받기 등 흥미진진한 기예들은 영화 <왕의 남자>의 모태가 됐던 ‘소학지희’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풍물패가 열어가는 2부에서는 지난해의 묵은 액을 풀고 새해의 만복을 나누는 ‘비나리’에 이어 온갖 짐승들이 춤을 추는 ‘백수무’가 펼쳐진다. 공연의 마지막은 출연진과 관객이 하나 되어 만드는 달처럼 둥근 춤, ‘강강술래’다.
이번 공연은 국립국악원의 정악단, 민속악단, 무용단과 남사당놀이보존회, 사자놀이 연구회 등 120여명이 총출동하는 전통판 버라이어티쇼다. 관객들은 직접 만든 짐승 탈을 쓰고 ‘백수무’에 동참할 수 있다. 동물가면이나 모자를 미리 준비해 올 수도 있고, 공연 시작 전 로비에 마련된 ‘체험 코너’에서 만들어도 된다. ‘귀밝이술 맛보기’, ‘부럼 깨기’도 준비돼 있다.
공연의 자문을 맡은 사진실 중앙대 교수(연희예술학)는 “산대 문화는 동아시아에 보편적이었는데, 일본에서는 마쓰리 형태로 남아있는 반면,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자취를 감췄었다”며 “언젠가 종묘에서 광화문까지 산대희의 행렬이 이어지는 날을 기대해본다”고 말했다. (02)580-3300~3.
조선시대의 그림은 주로 신분이 낮은화원(畵員)들이 그렸으나, 양반 중에도 취미로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있었다. 전기의 그림은 초상화가 많았는데, 이는 양반들이 자신들의 출세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는 희박하였다. 양반의 그림은 대부분이 산수화였는데북종화(北宗畵)계통의 화풍이었다. 초기의 주요 화가로는 세종 때안견(安堅)·최경(崔涇)·강희안(姜希顔), 중종 때의이상좌(李上佐)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이정(李楨)·신사임당(申師任堂)등의 그림에서는 화법이나 의도에 한국적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후기에는 북종화에서남종화로 바뀌어갔고, 한국적 특징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농후해졌다. 또, 전기의 사실적 화풍에서 운치를 중시하며 수묵화를 주로 하는 문인 화풍이 널리 유행하였다.
17세기이징(李澄)·윤두서(尹斗緖)등은 보다 한국적인 그림을 그렸고,정선(鄭敾)에 이르러 한국적 독자성이 완전히 정착되었으니, 그의 「금강산도(金剛山圖)」는 대표적인 예이다. 후기 그림 중 또 하나의 특징은풍속화의 개척이다.김홍도(金弘道)와신윤복(申潤福)은 풍속화의 쌍벽으로, 서민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어 그 애환을 소박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해냈다. 19세기 말에장승업(張承業)이 나와 안견 ·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화가로 일컬어졌다.
서예는 양반들의 필수 교양이어서 누구나 글씨를 썼다. 여말 선초에는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였고, 중기에는 왕희지(王羲之)의 서체가 유행하였다.안평대군(安平大君)은 송설체, 중종 때의김구(金絿)는 왕희지체의 명필이었다. 여기에초서의양사언(楊士彦),해서의한호(韓濩)를 합해 조선 전기 서예의 4대가라 일컫는다. 후기에김정희(金正喜)는 중국 서예의 모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추사체(秋史體)를 개척하였다.
조선시대 공예품 중 자기에는 분청과 백자가 있었다. 초기의 분청자기는고려청자가 퇴화한 것인데, 기법의 차이에 따라 상감분청(象嵌粉靑)과 백토분청(白土粉靑)으로 구분된다. 분청자기에 이어청화백자(靑華白瓷)가 만들어졌는데, 백자에도 순백 · 유백 · 회백 등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백자의 형태는 아래쪽이 펑퍼짐해져서 안정감과 실용성이 더해졌다. 조선시대의 백자는 귀족적 · 곡선적인 고려청자에 비해 서민적 · 직선적인 것이 특징이다.
안견은 조선 전기 「팔준도」, 「몽유도원도」, 「대소가의장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세종 대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 대까지도 화원으로 활약했다.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기면서 그가 소장하고 있던 고화들을 섭렵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는 토대로 삼았다. 북송 때의 화원 곽희의 화풍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다른 화풍의 요소를 수용하여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하여 조선 중기까지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산수화에 가장 뛰어났지만 초상·화훼·매죽·노안·누각·말·의장도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신사임당은 조선전기 「자리도」·「초충도」·「노안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1504년(연산군 10)에 태어나 1551년(명종 6)에 사망했다. 이이의 어머니로서 시·그림·글씨에 능한 예술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친정의 아들잡이로서 친정에 살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자녀교육을 할 수 있었고, 신사임당도 남편의 외조 속에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 고상한 정신·기백을 드러내는 글씨는 모두가 탐낼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개척한 여성이다.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1774년(영조 50)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자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다. 장남인 윤덕희(尹德熙)와 손자인 윤용(尹熔)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문을 이루었다.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막대한 경제적 부를 소유하였으며 윤선도와 이수광(李睟光)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으로도 탄탄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가풍을 이어 과거시험에 매진하였다.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해남 윤씨 집안이 속한 남인 계열이 당쟁의 심화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남은 일생을 학문과 시서화로 보냈다. 1712년 이후 고향 해남 연동(蓮洞)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1715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선은 조선후기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통천문암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1676년(숙종 2)에 태어나 1759년(영조 35)에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김창집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중국의 남종화법과 오파의 새로운 산수화 기법을 수용하고 시서화 일체 사상을 중시하던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열었다. 거기에 자기 나름의 필묵법을 개발하여 조선의 실제 자연을 담아낸 뛰어난 진경산수화를 개척했다. 겸재파 화법이라 할 수 있는 실경산수화는 19세기 초반까지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안평대군은 조선전기 제4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왕자이자 서예가이다. 1418년(세종 즉위)에 태어나 1453년(단종 1)에 사망했다. 시문·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이라 불렸으며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유명하다. 도성의 북문 밖에 무이정사를 짓고 많은 책과 서화 명적들을 수장하여 시회를 열고 서화가를 후원하는 등 당대 서화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황보인·김종서 등 문신들과 제휴, 수양대군측 무신 세력과 맞서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으나 1453년 계유정난으로 대신들이 살해된 뒤 강화도로 귀양 갔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사사되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다. 주부인 양희수(楊希洙)의 아들이다. 형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와 함께 글에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소식·소순·소철)에 견주어졌다.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19일 일본 구마모토 현 야쓰시로 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조선고면’. 사라진 3종의 하회탈 가운데 하나인 별채 탈로 추정된다. 야쓰시로=서영아 특파원
박물관 연구원 18세기 문헌보고 존재 처음 알아
올 1월 가정집서 대대로 보관하던 탈 직접 확인
사라진 하회탈(국보 121호) 중 하나로 추정되는 조선시대의 탈이 일본 구마모토(熊本) 현 야쓰시로(八代) 시립박물관에서 19일 일반에 공개됐다.
이 탈은 이날 시작된 전국시대 무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유품 전시회에서 85점의 다른 유품과 함께 ‘조선고면(朝鮮古面)’이란 이름으로 전시됐다.
이 탈은 전시장 입구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배치됐고 옆에는 탈을 360도 각도에서 촬영한 3D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바로 옆에는 한국의 하회탈에 대한 사진과 설명이 쓰인 패널이 걸려 하회탈과의 연관성을 짚고 있다.
이 탈이 발견된 것은 올해 1월. 이 박물관 학예연구원 도리즈 료지(鳥津亮二) 씨가 2년 전부터 고니시 관련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사료를 뒤지던 중 ‘기타마쓰에(北松江) 마을 농민의 집에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가져온 커다란 가면이 있다’는 18세기 지방사료 ‘히고(肥後·구마모토의 옛 이름)국지’의 기록을 발견했다.
도리즈 씨는 그 뒤 동료 학예원에게서 “10여 년 전 어느 가정집에서 임진왜란 때 조상이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커다란 가면을 본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찾아가 실물을 확인했다.
전시된 탈은 가로 21cm, 세로 25.6cm로 일본의 가면에 비해 매우 크다. 이마는 11.6cm, 코 높이가 14cm에 이를 정도로 얼굴의 굴곡이 커 일본의 가면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박물관의 후쿠하라 도루(福原透) 학예계장은 “하회탈 사진과 비교해 보면 눈의 표정이나 뺨의 주름, 코의 느낌이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물관 측은 “이 탈이 임진왜란 때 가져온 조선시대 가면이란 점은 확실하지만 하회탈인지는 알 수 없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나타냈다.
박물관 관계자는 “탈을 일개 농민 가정에서 대대로 400여 년간이나 보관해 왔다는 점 자체도 대단한 일”이라며 “야쓰시로 지역으로서도 귀중한 사료지만 한국의 탈 역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탈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은 편이었다. 벌레가 먹고 건조해져 오른쪽 뺨과 턱 일부가 유실됐고 만지기만 하면 부스러져 박물관 내에서도 운반이 어려울 정도다.
이번 전시회에는 이 탈과 비슷한 시기에 조선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기와 2점도 함께 전시됐다. 기와들은 고니시가 생전에 이 지역에 세웠던 무기시마(麥島) 성 유적에서 출토됐으며 제작 기법 등으로 볼 때 조선의 것이 확실해 역시 임진왜란 때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야쓰시로는 인구 13만 명의 작은 도시로 박물관은 구마모토 공항에서 버스로 1시간, 다시 택시로 15분 정도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전시회는 11월 25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한편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69호 하회 별신굿 탈놀이 예능 보유자 김춘택(할미 탈 역) 씨는 “그 탈이 실제로 사라진 하회탈 중 하나로 확인된다면 탈놀이 복원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표 하회동 탈 박물관 관장은 22∼25일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와 함께 이 박물관을 방문해 탈을 조사하고 정밀 실측해 별채(세금을 징수하는 포악한 관리) 탈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바로잡습니다▼
△19일자 A1, 16면 ‘‘별채 탈’ 日서 400년 만에 발견’ 기사에서 이 탈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하치다이(八代) 시립박물관이 아니라 야쓰시로(八代) 시립박물관입니다. 일본어에서는 같은 한자라도 음으로 읽느냐(음독), 뜻으로 읽느냐(훈독)에 따라 발음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八代’라는 지명은 뜻으로 읽어야 하는데, 음으로 읽어 실수가 빚어졌습니다.
‘사라진 하회탈 중 하나’로 추정되는 탈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데는 야쓰시로(八代) 시립박물관 학예연구원 도리즈 료지(鳥津亮二·30·사진) 씨의 역할이 컸다.
도리즈 씨는 일본 전국시대인 1588∼1600년 야쓰시로 지역 다이묘(大名·영주)였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 내 첫 전시회를 기획하면서 전국에 흩어진 관련 사료를 모으던 중 이 탈을 발견했다.
―고니시 유품 전시회를 기획했던 동기는….
“고니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장수지만 이 지역에서는 성을 짓고 시가지의 원형을 만들었으며 천주교를 전파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지역사에 중요한 인물이지만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가신이던 고니시는 조선에서 돌아온 뒤인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전국을 통일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 처형됐다. 이후 야쓰시로는 도쿠가와의 가신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손에 넘어갔다.
―탈은 어떻게 보관돼 있었나.
“400년간 대대로 야쓰시로에서 살아온 한 가정의 불단 밑 오래된 나무상자에 담겨 보관돼 있었다.(일본인들은 가보를 불단 밑에 보관한다) 이 가족은 대대로 ‘조상이 고니시 장군의 조선 출병에 참가해 조선반도에서 가져온 것’이라며 보관해 왔을 뿐, 지방 사료에 관련 기록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이 가족이 4월 박물관 측에 보관을 의뢰했다.”
―탈의 유래를 확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이 지방의 학자가 조선에서 온 가면임이 확실하다고 고증했다. 6월에는 한국에 가서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원의 도움으로 전경욱 고려대 교수를 소개받았다.”
―한국에 연구 목적으로 빌려주거나 연구에 협조할 의향은….
“한국의 탈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기쁘게 협력하고 싶다. 그러나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문화재를 관리하는 처지에서는 보존이 우선이다. 아직 나무의 재질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부터 보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한다. 시간이 걸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