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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조선

2. 조선의 강역 (1) 백두산 정계비

대야발 2024. 5. 3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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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淸, 국경 획정에 조선 대표 배제해 역관이 참석… 백두산에 정계비

입력 2018-03-26 22:44
업데이트 2018-03-27 00:09

<12>백두산정계비와 간도

300여년 전인 숙종 38년(1712) 조선과 청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압록강변 위원군에서 조선인과 청인 사이에 살인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오라총관(烏喇總管) 목극등(穆克登)을 보내 두 나라의 경계를 확정 짓게 했다. 숙종은 조상들의 산소 이장 문제로 원주에 가 있던 박권(朴權·1658~1715)을 접반사(接伴使)로 삼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국경을 획정하게 했다. 그러나 박권, 이선부 등은 목극등이 늙었다면서 따라오지 말라고 하자 주저앉았고 중인 역관 김경문(金慶門) 등만 따라갔다. 조선의 공식대표 없이 역관만 참석해 세운 것이 ‘백두산정계비’(이하 정계비)다.
백두산정계비, 1931년 7월 촬영한 것으로 며칠 후 비가 사라졌다. 같은 해 9월 일제가 만주 전역을 강점하는 만주사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사헌부 장령 구만리(具萬里)가 “경계를 정하는 막중한 일”을 소홀히 했다면서 박권, 이선부의 파직을 요청한 것은 당연했다. 정계비는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니 강이 나뉘는 고개 위(分水嶺上)의 돌에 새겨 기록한다”는 내용인데, 토문이 어느 강인가를 두고 지금껏 논쟁 중이다. 중국의 주장대로 토문이 두만강이면 간도땅이 중국령이 되는 반면, 한국의 오랜 주장대로 토문강이 만주를 흐르는 송화강 지류라면 간도가 한국령이 되기 때문이다.

●경기도 교육청 자료집 사건

2012년 6월 경기도교육청 소속 교사 17명이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라는 자료집(이하 ‘자료집’)을 발간했다. 그러자 같은 해 9월 6일 동북아역사재단이 ‘경기도 교육청 발간 자료집 검토 내용 송부’라는 공문을 교육부에 보냈다. 공문으로 보냈다는 것은 동북아역사재단(이하 동북아재단)의 공식 견해라는 뜻이다. 재단은 “(‘자료집’의) 고조선과 간도문제에 대한 서술 내용 중 일방적 주장이나 사실적 오류가 상당수 발견돼 이에 대한 보완 또는 수정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고 주장했다. ‘자료집’의 어떤 내용이 ‘사실적 오류’라는 것일까?

“(‘자료집’은)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을 중국 측에서는 두만강으로, 조선 측에서는 송화강의 지류로 인식했다고 서술하고 있음. 그러나 백두산정계비 건립 당시 청 측과 조선 측 모두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강이라고 인식하였으며,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이라는 인식은 18세기 후반에 제기됨. 따라서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이 송화강이라는 인식에 근거하여 한·중 영토 문제를 제기하는 ‘자료집’의 간도문제 서술은 전반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음.”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에 대한 분석)
일제의 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만든 ‘동간도 약도’. 일제가 간도를 불법적으로 팔아먹은 다음달에 제작한 것이다. 송화강 지류 중 사도백하 옆에 토문강이란 표기가 분명하다.
‘자료집’에서 토문강이 만주를 흐르는 송화강의 지류라고 말했는데, 두만강이 맞다는 것이다. 흡사 중국 동북공정 소조에서 보낸 항의문 같지만 중요한 것은 동북아재단이 중국의 항의를 받고 보낸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보낸 공문이라는 점이다. 그럼 비를 세울 당시 청나라와 조선이 모두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인식했다는 동북아재단의 주장은 사실일까?

●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웠나?

정계비 건립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판론이 고조됐다. 조선과 명 사이에 맺은 공식 국경선, 즉 윤관이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운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 선춘령에 세웠어야지 왜 백두산에 세웠느냐는 비판이다. 정계비를 세울 때 생존했던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윤관비’(尹瓘碑)에서 ‘목극등이 와서 정계비를 정할 때 왜 서희가 소손녕에게 윤관의 비를 가지고 따진 것처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역사학자였던 순암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이가환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계비는 “분계강(分界江)을 한계로 삼아서…두 나라의 국경을 삼았습니다…그 강은 두만강 북쪽 300여리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두만강 북쪽 300리만 국경으로 삼아 그 북쪽 400리 땅을 버렸다는 비판이다. 규장각 검서관이었던 성해응(成海應·1760~1849)은 ‘목극등 정계비 발(跋)’에서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니다. 강 북쪽의 여러 강을 왕왕 토문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토문과 두만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해응은 또, ‘공험진 변(辨)’에서 “‘금사’(金史) 및 청나라 사람들이 그린 지도를 보니 두만강 북쪽과 수빈강(현 수분하) 남쪽을 토문강이라고 통칭했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때부터 줄곧 두만강으로만 표기하다가 숙종 18년(1692)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찬선 이현일(李玄逸)의 상소문에 토문(土門)이 처음 등장하는데, 두만과 토문을 달리 표기하고 있다. 순조 8년(1808)에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은 ‘백두산정계’조에서 “‘여지도’(輿地圖)에 분계강(分界江)이 토문강의 북쪽에 있다 했으니 정계비는 당연히 여기에 세웠어야 한다. 또 비문에 이미 동쪽은 토문강이 된다고 했으면 토문강의 발원지에 세워야 했다.”라고 비판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백두산정계비를 두만강 북쪽 700리 선춘령에 세우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토문강은 두만강 북쪽이라고 생각했다.
 

●간도는 무조건 중국 것이라는 재단

어느 나라 국가기관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동북아재단의 주장은 이뿐만이 아니다.

“(‘자료집’은) 간도협약이 사실상 무효이고 간도는 한국의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를 국제법상 유효한 국경조약으로 서술하고 있음. 그러나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된 시기는 국제법적 인식이 등장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국제법적 기준을 바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함.”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 평화를 꿈꾸다’에 대한 분석)

일제가 청과 맺은 간도협약과 조선이 청과 맺은 백두산정계비 중 간도협약만 국제법상 유효라는 주장이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후 간도파출소를 설치해 간도를 관할하다가 1909년 9월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무순(撫順)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줬다. 청나라가 철도부설권 등을 주고 간도영유권을 샀다는 것은 청나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후 맺은 불법조약이니 당연히 무효다. 그런데도 동북아재단은 거꾸로 정계비는 무효이고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유효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송화강의 여러 지류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도백하, 이도백하… 식으로 분류하는데, 오도백하가 토문강이다. 이 사실은 일제 간도파출소에서 작성한 지도에서도 명백하다. 그러나 동북아재단은 일제가 청과 맺은 간도협약만 국제법적으로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데 대한민국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을 쓴다.

●대한제국에서 파견한 북간도관리사

고종 20년(1883)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은 함경도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과 백두산정계비를 조사하고 청나라 돈화(敦化)현에 ‘토문강과 분계강 이남 강토에 대한 옛 지도 모사본과 새 지도’ 등을 보내면서 간도가 누구 소유인지 공동조사하자고 요청했다. 청나라는 꼬리를 내리고 회피했다.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종 22년(1885)에는 외교를 총괄하는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윤식(金允植)이 청나라 총리 원세개(袁世凱)에게 공문서를 보내, ‘토문강은 두만강 이북의 강’이라고 주장했다. 이때는 청나라가 대원군을 납치해 간 임오군란(1882) 이후로서 청나라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는데도 이런 주장을 한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광무(光武) 7년(1903·고종 40)에는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이 고종에게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이후 “토문강 이남 구역은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됐다”면서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 관리에 임명하자고 주청했다. 대한제국은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管理)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켰고,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09년에 일제가 간도협약으로 몰래 팔아먹은 것이다. 남북이 분단된 지금 중국에 간도를 돌려달라고 공식 제기할 상황은 아니지만 간도에 대한 역사주권만은 확고하게 정립해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늘 중국과 일본의 입장만 대변해 온 동북아역사재단을 국민들의 상식적인 역사관에 맞게 처리하는 일이 그 첫 단추가 될 것이다.(3)

 

 

 

 

윤명철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 조선 영토, 두만강 이북까지일 가능성 높아

입력 2022.12.26 10:00 수정 2022.12.26 10:00 생글생글 783호

 
(124)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上)
환인현 오녀산성. 고구려 성이었으나 건주 여진족이 이용했으며, 이성계와 성종때 조선이 공격한 성.백두산정계비는 무엇을 알려줄까. 국경 문제는 영토의 넓이, 자원의 소유권, 지정학적 가치를 넘어 존재의 명분, 자의식 등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망각하거나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

동아시아에서는 육지와 해양에 걸쳐 12곳 이상 장소에서 국경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독도, 이어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와 함께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간도 문제가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이 백두산정계비다. 백두산정계비 안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란 글자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 토문의 위치 문제, 즉 두만과 토문의 동일성 여부를 놓고 한국·중국·일본, 심지어는 한국 내부에서도 쟁점이 됐다.
백두산 천지.백두산정계비의 내용과 관련된 다양한 견해를 이해하려면 우선 국경 문제의 본질과 남만주 일대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이 사건이 발생한 과정과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 대부분 여진족의 ‘생활권’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 정묘호란이 발생하고 조선과 ‘강도화맹’을 맺으면서 후금은 강역 문제를 거론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산삼·녹용 등을 구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 두 강을 몰래 건넌 조선인들로 문제가 발생했다. 강희제 때에 들어서면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이에 청나라가 정계비를 세운 목적과 배경, 경위 등을 이를 주도한 강희제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청국과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작업이었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삼번의 난’마저 진압한 강희제는 시조 발상지로 알려진 백두산(장백산)의 성지화 사업이 필요했다. 강희제는 1676년 관리를 파견해 백두산을 답사하게 한 뒤 산신께 제사를 지내게 했다. 1683년에 또 관리를 파견했으나 압록강 상류에서 조선 민간인들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 사건은 조선에 엄청난 파장과 다수의 희생을 일으켰다.

둘째, 만주 지역의 장악과 개척 필요성 때문이었다. 남쪽에서는 포르투갈 등 서양세력과 무역하고, 17세기 중반에는 명나라 복국군이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였다. 1683년에는 청나라가 대만을 점령했다.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1666년에 헤이룽강 상류 유역에 알바진 기지를 건설한 뒤 송화강 유역까지 남진하자 전투를 벌였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정했다. 서쪽으로는 강력하게 성장하는 중가르 제국과 충돌하고, 1687년에 신장성 지역을 원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강희제는 전통적인 명분과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국제관계를 인식하는 중이었고, 영토 또한 서양의 국경 개념을 수용해 조약을 맺었다.

강희제는 만주의 안정과 개척, 백두산의 성지화를 위해 조선과 국경선을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미 남만주와 국경 지역에 한족을 대거 이주시켜 개척하는 이민정책을 추진 중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런 청나라의 움직임에 놀라 ‘영고탑 회귀설’ 등이 유포되는 등 불안한 상황이었다.

셋째, 지리 개념의 변화와 서양문물의 수용이었다. 천문학과 지도 제작술이 도입되면서 정확한 지도 작성이 가능해졌다. 강희제는 1708년 프랑스 선교사인 레지 신부에게 전국의 영토와 국경을 조사하고, 지도를 제작할 것을 명했다. 레지 일행은 1709년부터 최신의 삼각측량법을 이용해 만주 일대를 측량했고, 같은 해 12월 만주지역의 지도가 완성됐다. 강희제는 1710년 조선에 파견된 사신단에 측지학자를 보내 조선 지도를 구해왔고, 레지는 이 지도를 참고 및 보완해 1718년 최종지도를 완성했다. 이 무렵 조선은 이 지역을 그린 지도를 가졌고, 급변하는 상황의 중요성도 인식했다. 다만 패전국이었고, 환국 등과 을병 대기근을 겪은 후유증으로 청나라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기억해 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동아시아에서는 육지와 해양에 걸쳐 12곳 이상 장소에서 국경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독도, 이어도,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와 함께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간도 문제가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이 백두산정계비다. 백두산정계비 안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란 글자로 인해 19세기 후반부터 토문의 위치 문제, 즉 두만과 토문의 동일성 여부를 놓고 한국·중국·일본, 심지어는 한국 내부에서도 쟁점이 됐다.(4)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청 강희제, 민족간 충돌 빌미 백두산 경계선 확정, 두만과 토문 동일성 여부 논쟁…최종 결론 못내려

입력 2023.01.09 10:00 수정 2023.01.09 10:00 생글생글 784호

 
(125) 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下)
요녕성 봉성시에 있는 봉황산성. 고구려의 부수도 격인 오골성으로 추정된다.강희제는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서 조선인들과 여진인 한인들이 충돌하는 상황을 빌미로 백두산 일대를 측량하고, 경계선을 확정하는 2차 작업에 착수했다. 드디어 1712년 3월 강희제의 명을 받은 오라(길림) 총관인 목극동은 조선 관원들의 참여를 막은 채 백두산 대택(천지)에 올라갔다. 내려온 그는 주위를 유심히 관찰한 뒤 천지(대택)의 동남쪽 4㎞ 지점(해발 2150m)을 지정하고 높이 70.6㎝, 폭 54.6㎝의 돌비를 세워 82글자를 새겨 넣었다. 이 비는 1929년(1931년 7월 설) 사라지고, 현재는 주변에 표지석인 돌무더기만 일부 남아 있다.(이한기 <한국의 영토>) 그런데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글로 인해 다양한 해석과 주장이 나왔다. 19세기 후반부터 간도 분쟁을 거쳐 최근에는 간도 영유권 문제로 비화된 상태다. 논쟁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최종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째, 토문(土門)과 두만(豆滿), 투먼(圖們)은 위치, 지형, 물길, 발음 등이 분명히 다르다. 목극등(穆克登)은 지형을 설명하면서 토문(강)의 물이 끊긴 곳(건천)을 조선에서 표시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두만강 선을 고수한다는 조선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박권은 두만강이 그곳이 아니라며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목극등은 ‘토문’이 분명하다며 설명까지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목극등의 판단에 실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청나라에는 레지가 정확하게 측량한 뒤 조선의 지도까지 참고해 만든 만주지도가 이미 있었다(1709년 12월 완성). 그렇다면 황제의 명을 받고(奉旨) 국가사업을 실행하는 목극등이 이 지도를 참조했거나 소지했음은 분명하다. 더구나 그는 1차 답사에서 토문강이 송화강과 합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따라서 그의 목적은 천지(대택)를 포함한 백두산(장백산)을 청나라의 영토 또는 관할권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조선은 이때 백두산과 대택(천지)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청나라에 넘기고 말았다. 다음해(1713년) 9월 중단될 때까지 토문강 상류의 건천(끊긴) 부분에 185개의 흙무더기와 돌무더기를 쌓고 목책을 설치했다.(육락현 <간도는 왜 우리땅인가?>)

또 하나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만약에 ‘토문’이 ‘두만’이라면 두만강 이북은 청나라 영토여야 한다. 그런데 레지가 측량하고 조선의 지도를 참고해 만든 프랑스인 당빌의 ‘새중국지도’와 1718년 완성된 ‘황여전람도(黃輿全覽圖)’에는 조청의 경계선이 더 북쪽에 그려져 있다. 당빌의 지도를 보면 두만강 하구 약 6㎞ 동쪽 지점에서 시작해 백두산을 가로질러 압록강 상류의 모든 수계를 포함하는 동서산맥에 선을 긋고, 봉황성의 남쪽을 압록강 하구의 대동만에 이르는 지역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다. 이는 듀 알드의 ‘중국지’에서도 동일하다. 당빌은 ‘새중국지도’의 서문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선은 거의 정확하고 완전함을 강조했다.(김득황 <백두산과 북방경계>)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를 그린 ‘서북피아양계일람지도’. 국경의 범위가 압록강 두만강을 잇는 선을 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면 레지가 측량했을 때, 목극등이 비를 세웠을 때, 강희제가 승인해서 서양까지 알려진 ‘황여전람도’가 반포됐을 때에는 조선의 영토를 두 강의 이북까지 인식했을 개연성이 크다. 물론 지도를 제공한 조선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를 입증하는 지도와 글이 많다. 반면 토문을 두만강으로 인식한 다른 견해들이 있으므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연행록’을 비롯해 다른 자료들의 비중, 실제 사건들과 향후 전개된 역사적 상황 등을 고려하면 두 강은 국경선이 아니라 청나라의 무력과 조선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설정된 봉금지대의 남쪽일 가능성이 높다. 일종의 무인지대로 지금의 ‘휴전선(DMZ)’과 동일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더불어 정계비에 새겨진 ‘압록’과 ‘토문’은 본류만이 아니 수계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당빌이 만든 ‘새중국지도’ 등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앞으로 정계비 문제는 압록강 이북의 조선 영토 및 국경선과 더불어 해석할 필요가 있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정계비를 자국 중심으로 해석하고, 심지어 비의 위치가 네 번이나 이동됐다는 주장까지 한다. 러시아의 영토 전문학자 갈레노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자들은 ‘지도를 통한 공격’을 했다.” 중국인들은 지도를 왜곡하거나 유리하게 바꾸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 지도를 제시하면서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방식을 쓴다는 것이다.(5)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청과 2차례 감계회담에서 영유권 주장 '충돌'…일본 개입으로 간도협약 맺어진 후 진척 없어

입력 2023.01.30 10:00 수정 2023.01.30 10:00 생글생글 786호

 
(127) 간도 개척과 영유권 갈등(下)
1790년대 제작한 ‘여지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사진=규장각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청나라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한 뒤 발언권이 다시 강해졌고, 1885년에는 간도 지역에 살던 조선인들의 농가를 소각하고 무력으로 추방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토문감계(土門勘界), 즉 감계회담을 요청했고, 두 나라는 9월부터 11월까지 네 번에 걸쳐 제1차 감계회담을 열었다.

조선은 문제의 핵심인 ‘토문’이 ‘두만강’과 다르다는 사실의 확인을 요구했고, 반면 청나라는 정계비를 무시한 채 토문(土門)을 두만(圖們)강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중하와 청나라의 가항계는 공동으로 정계비와 주변을 조사해 ‘목책’ ‘돌무지(석퇴)’ ‘흙무지(토퇴)’ ‘건천’과 ‘토문’ 등을 발견했으며, 토문강이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지금의 오도백하인 사실을 확인했으나 담판은 결렬됐다. 1948년 7월 이곳을 답사한 북한의 황산철은 1957년 발표한 글에서 이곳에 돌각담이 106개 있었으며, 길이는 5391m라고 썼다.

1887년 4월에는 제2차 감계회담이 열렸다. 청나라는 석을수(石乙水)를 잇는 선을 국경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간도와 백두산을 청나라 영토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중하는 지도 등 여러 자료와 증거를 내놓고 토문과 두만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강희제가 국책사업으로 만든 J B 당빌의 <새중국지도>와 <황여전람도(黃輿全覽圖)>는 두 나라의 경계선을 두 강의 북쪽에 그렸고, 청나라도 이 사실을 인지했다. 물론 조선도 일부의 예외를 빼놓고는 같은 인식을 가졌던 증거들이 지도를 비롯해 연행록 등에 많다.

또 간도와 연관해 영조 7년과 22년(1746년)에 주목할 만한 사실이 발생했다. 청나라에서 애하(河)와 초하(草河)가 만나는 지금 봉황성 남동쪽 아래 망우초 카룬을 설치한다며 조선에 양해를 구했다. 명분은 조선인들의 인삼 채취와 밀 무역을 단속한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강력한 반발로 두 번 다 무산됐다.(육락현 <간도는 왜 우리땅인가?>) 이런 사실을 보면 두 강은 청나라가 설정한 봉금지대의 남쪽이며, 조선이 현실적으로 양해한 일종의 무인지대일 가능성이 크다.

양국의 주장이 계속 충돌하자 청나라 관리는 이중하에게 칼로 위협하려 했고, 이중하는 ‘내 머리는 잘릴 수 있어도, 나라 영토는 줄일 수 없다(吾頭可斷國不可縮)’며 강격책을 고수했다. 결국 2차 감계회담은 결렬됐지만 국제정세는 조선에 유리하게 변해갔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1895년에 맺어진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의 1항에서 ‘조선은 자주 독립국이다’란 조항을 수용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됐고, 조선은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하면서 자주성을 표방했다. 이후 조선은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하고, 간도 주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국경 조사를 재차 시행했다. 관리들을 파견해 조선인의 호구와 경작 면적 등을 조사하면서 보호와 소송을 담당하게 했다.

1900년에 들어오면서 서간도는 평안도로, 동간도는 함경도로 편입시키고 세금을 징수해 군사들의 훈련 등 운영비로 충당했다. 1902년 5월 북간도 시찰사로 파견된 이범윤은 인구와 호구조사 등을 실시했고, 포수 등을 모집해 사포대를 조직하며 무장력을 갖췄다. 반발한 청나라가 조선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이에 굴복한 조정은 그에게 철수를 명했다. 하지만 그는 불복했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망명한 뒤 훈춘 부근에 주둔했다. 이후 연해주로 넘어가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1904년에 조선의 지배권,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에도 요동 진출에 실패했지만, 러시아의 압록강 하구 진출을 막은 용암포 사건 등에서 보이듯 서간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포츠머스 회담에서 랴오둥반도를 다시 차지했고, 러시아와 장춘에서 여순을 연결한 동청철도 등을 양도받았다. 이제 만주로 본격적인 진출을 추진하는 일본에 무순 등의 지하자원과 철도부설권 등은 매우 현실적인 관심사였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간도’를 만주 진출에 활용했고, 청나라는 이에 맞서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그 결과 1909년 9월에 소위 ‘간도협약’이 맺어졌고, 지금껏 진행 중이다.

한 시대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를 외면하거나 포기하면 결국 후손들에게 멍에를 씌운 부끄러운 조상으로 역사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1904년에 조선의 지배권,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 후에도 요동 진출에 실패했지만, 러시아의 압록강 하구 진출을 막은 용암포 사건 등에서 보이듯 서간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알고 있었다. 때문에 포츠머스 회담에서 랴오둥반도를 다시 차지했고, 러시아와 장춘에서 여순을 연결한 동청철도 등을 양도받았다. 이제 만주로 본격적인 진출을 추진하는 일본에 무순 등의 지하자원과 철도부설권 등은 매우 현실적인 관심이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간도’를 만주 진출에 활용했고, 청나라는 이에 맞서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그 결과, 1909년 9월에 소위 ‘간도협약’이 맺어졌고, 지금껏 진행 중이다.(6)

 

 

 

 

 

두만강 북쪽은 누구 땅인가? 한·중·일 근대는 '국경 만들기'에서 시작됐다[책과 삶]

김지혜 기자2022. 5. 6. 15:04
1712년 조선과 청의 분계강 역할을 했던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 1931년 불가사의하게 사라졌다. 너머북스 제공.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쑹녠선 지음 | 이지영·이원준 옮김 | 너머북스 | 464쪽 | 2만8000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불러본 국민이라면 누구나 안다. 백두산은 ‘우리 땅’이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대한민국 헌법, 압록강과 두만강, 백두산 천지 중앙을 국경으로 확정한 1962·1964년의 북·중 국경 조약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누구인가. ‘민족의 영산’이라는 수사는 한국 국민과 북한 주민을 포괄하는 한민족이라는 오래된 정체성을 소환한다. 그런데 1712년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 전까지 조선 사람들은 “백두산은 오랑캐의 땅”이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 땅, 우리 민족’을 만드는 경계들은 절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며 유연한 것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는 1881년부터 1919년 사이 두만강 경계 획정과 중국 조선족 집단 형성 과정을 다룬 책이다. 기존 한·중·일의 연구들은 이 시기 두만강 양안을 둘러싸고 청과 조선, 일본, 러시아 등이 벌인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했다. 이 책은 황무지에 불과한 작은 변경으로만 치부됐던 두만강 지역이 국가 간 경계로 획정되는 과정 속에서 “한·중·일 삼국이 모두 국가와 국민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흥미로운 통찰을 내놓는다.

저자는 두만강 국경 획정을 둘러싼 경쟁이 “중국의 변경 건설사업을 촉진했고, 한국의 민족주의적 상상을 추동했으며, 일본의 식민사업을 자극”했고, 이 과정에서 한·중·일 3국의 ‘근대’가 태동했다고 주장한다. ‘국경은 근대의 산물’이라는 고전적 근대국가 기원론에는 반기를 든다. 대신 뚜렷한 국경을 갖고서도 오랫동안 지리적·역사적 연결성을 지녀온 3국이 근대국가·국민의 개념을 만들어가는 ‘상호작용’과 ‘다층적 경쟁’에 주목한다. 한·중·일 근대 국가의 형성은 단지 서구에서 유입된 제국주의·식민주의·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기존 질서와 지역적 교류를 승계한 측면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다. 미국 UMBC 역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중국 칭화대 교수로 있는 저자 쑹녠선이 국경 경쟁을 둘러싼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여러 언어의 자료를 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동아시아의 초지역적 네트워크, 역사·지리, 국제관계 등을 주제를 주로 연구하는 저자는 전작인 <동아시아를 발견하다>에서도 국민국가를 초월한 통합적 역사 단위로서의 동아시아를 그려냈다.


1881년 조선인 빈농 수천명이
만주 동남부 황무지 개간하며
공식적으로 시작된 영토분쟁

이곳에서 일어난 3국의 투쟁은
중국 변경 건설사업을 촉진했고
일본 식민사업을 자극했으며
한국 민족주의적 상상을 추동했다

 

책은 백두산 정계비(중국에서는 ‘목극등비’)라 불리는 역사적 비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1712년(숙종 36년),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세워졌던 이 비석은 “한국과 중국의 경계를 가르는 두 강, 즉 서쪽으로 흐르는 압록강과 동쪽으로 흐르는 두만강의 원류를 표시”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어쩌면 가장 안정적인 기점”이었다. 이 시기 조선인들이 압록강을 몰래 넘어가 청나라 사람을 살해하는 월경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자, 청과 조선의 지리적 구분을 명확히 하라는 강희제의 지시에 따라 세워졌다.

1931년 7월 이 비석은 불가사의하게 사라진다. 그러나 비석은 사라지기 전부터 이미 두만강 국경 획정을 둘러싼 온갖 ‘모호한’ 논쟁의 주된 이유가 됐다. 1712년 만주족 지방 관리 목극등이 이끈 청과 조선의 조사단은 전통적으로 두 나라를 가르는 ‘분계강’으로 기능한 압록강과 두만강의 수원을 찾기 위해 백두산을 올랐다. 조사단은 나흘간의 고된 탐사 끝에 찾아낸 작은 물줄기를 두만강의 최종 수원지로 결정하고 그곳에 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을 알리는 비석을 세웠다. 이 과정에 실수가 있었다. 사실 그 물줄기는 두만강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송화강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두만강을 잇는 목책·흙무더기로 국경을 표시한 1880년대 북관장파지도. 18세기와 19세기 조선의 지도 중에는 북관장파지도처럼 비석과 두만강을 연결하는 울타리로 국경을 표시한 것도 있었지만, 상당수 지도들은 비석이 토문강 또는 분계강이라는 다른 강과 연결되는 것으로 표시해 국경 인식에 혼란을 야기했다. 너머북스 제공.
18세기 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는 정계비와 북쪽으로 흐르는 이름 없는 강으로 연결되는 ‘책문’이 묘사돼 있다. 지도에는 강의 중간 부분이 완전히 빠져 있어 한국 북쪽 경계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암시한다. 너머북스 제공


조선 관리는 실수를 굳이 청에 알리지 않고, 비석을 두만강의 실제 수원과 연결하는 목책을 세우는 것으로 무마했다. 시간이 흘러 썩어버린 목책과 함께 경계 획정의 기억도 사라졌다. 양국의 경계를 이루는 것이 두만강인지 송화강인지 아니면 ‘토문강(두만강의 중국식 발음일 뿐이다)’ 혹은 ‘분계강’이라는 강이 따로 있는 것인지 논란이 지속됐다. 1881년, 조선인 빈농 수천명이 두만강 건너 만주 동남부의 황무지를 개간하자 이러한 모호함은 결국 공식적인 영토 분쟁을 일으켰다. 두만강 북안 황무지를 무단점거한 조선의 농민들이 이 지역을 ‘간도’라 부르며 청의 관리에게 땅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중원의 땅을 경작하므로 중원의 백성입니다.” 그해 말, 청의 관료들이 내린 결론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뜻밖이다. 이들은 “조선인은 근본적으로 청의 속민”이라는 ‘종번’ 논리를 활용해 조선 농민이 간도에 계속 머물며 지방(길림) 정부에 세금과 소작료를 내게 해달라고 황제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이 포용적인 제안의 배경에는, 간도 조선인들을 포섭하며 호시탐탐 만주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팽창적 자본주의·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견제 의도가 있다. 당시 청에게 두만강 국경은 “제국의 포용성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을 차단하는 제국의 배타성을 모두 보여주는 이중적 상징”으로 기능했다.

한국과 중국의 두만강 국경 획정 과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애초 두만강의 수원으로 표시된 정계비와 두만강 사이를 잇는 여러 물줄기 중 어떤 것을 국경으로 정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1887년 조선과 청나라의 2차 국경회담에서 조선은 두만강의 가장 북쪽 물줄기인 ‘홍토산수’를, 청은 남쪽 ‘홍단수’를 주장하다가 가운데 물줄기인 ‘석을수’를 타협안으로 제시했으나 조선의 거부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09년 청·일간의 이른바 ‘간도협약’에서 청의 타협안인 ‘석을수’를 일본이 만주의 이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받아들이며 경계가 획정됐다. 너머북스 제공


국경이 모호하게 남아 있는 사이, 공간을 둘러싼 각국의 서사는 한층 경쟁적으로 변모해갔다. 1885~1887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조선과 청의 두만강 국경회담은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조약까지 거친 일본은 1907년 두만강 국경 분쟁에 개입하기에 이른다. 일본은 “간도가 동아시아 지배의 관건인 만주를 차지하는 열쇠”라고 인식했다. 일본은 간도가 버려진 황무지 즉 ‘무인지대’로서 중국과 한국 어느 곳에도 영유권이 없다는 주장을 내놓으며 간도 침략을 본격화했다.

청과 중화민국에 있어 이제 연길(간도)은 러시아·일본을 견제할 뿐만 아니라, 만주족·한족 통합을 촉진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불가분한” 땅이 됐다. 중국 동북지역을 국가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연길을 지켜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청(중국)은 이전처럼 너그러운 ‘종번’의 논리에 머물지 않고, 본격적으로 ‘변경 건설’에 집중하고 이 지역에 ‘국경’과 ‘국민’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도입하는 데 집중했다. 1907년 일본의 간도파출소 설립을 계기로 청·일 양국은 간도의 군사화, 관료화, 인구조사, 치안유지, 공교육, 공공의료 등 근대적 통치 기제를 경쟁적으로 적용했다. 결국 두만강이 최종적으로 한국과 중국, 러시아의 국경선으로 획정된 것은 1909년 청·일 간의 이른바 ‘간도협약’이었다.

양국의 경쟁 국면에서 “한국인들은 전혀 침묵하지 않았다”. 간도 지역의 경계와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는 국가 권력뿐만 아니라 이곳을 개간한 한국의 농민과 이주민, 그리고 친일파·독립운동가 등의 엘리트들로 구성된 비국가 행위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1910년 이후 한국인에게 간도는 민족주의적 결집의 상징적 공간이 됐다.

‘한국적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 ‘기자조선’ 서사를 부정하고 “단군-부여-고구려” 계통을 강조하고 나선 신채호 등의 한국 민족주의자들에게 간도는 “위기에 빠진 ‘상상된 공동체’의 모든 옛 영광을 품은 가상의 고향”이자 “국가를 잃은 민족을 위한 영혼의 안식처”였다. 실제로 간도에 세워진 학교 대다수에서는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한국어와 한국 역사·지리 수업을 제공하며 한국보다 더 ‘한국적인’ 장소로 기능했다. 저자는 1919년 3·1운동과 연변 3·13운동의 역동적 연관성을 설명하며 “3·1운동이 ‘근대’라는 이름이 붙는 한국 민족주의의 시대를 출범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 ‘근대’의 시대가 실제로는 한국 국경 너머 두만강 이북의 연변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책은 이처럼 두만강 국경을 획정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된 청의 ‘내지화(內地化)’, 일본의 ‘식민화’, 한국의 ‘독립’ 서사가 결국 국민, 국경, 국가, 영토 등에 대한 각국의 ‘근대적’ 이해를 등장시켰다고 주장한다. 경계는 “무엇인가 멈추게 되는 지점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라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처럼 국경에서부터 동아시아의 근대가 창출된 것이다. 이 창출은 단순히 국가 권력의 주도나 서구 개념의 이식이 아닌, 농민과 관료, 지식인까지 ‘경계’를 넘나들며 경쟁하고 충돌한 각국의 다양한 주체들이 써내린 서사다. 옮긴이의 말에서 두 역자는 이 책이 “민족국가를 초월한 대안적 역사 연구의 모범적 사례”라고 평가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주>

 

 

(1)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 서울신문 (seoul.co.kr)

 

 

 

(2)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이성계 때 고려 강역도 계승..'철령~공험진'까지 엄연한 조선 땅 (daum.net)2018. 3. 20. 

 

 

 

(3)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淸, 국경 획정에 조선 대표 배제해 역관이 참석… 백두산에 정계비 | 서울신문 (seoul.co.kr)

 

 

 

(4)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 조선 영토 두만강 이북까지일 가능성 높아 | 생글생글 (hankyung.com)

 

 

(5)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청 강희제 민족간 충돌 빌미 백두산 경계선 확정 두만과 토문 동일성 여부 논쟁…최종 결론 못내려 | 생글생글 (hankyung.com)

 

 

(6)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청과 2차례 감계회담에서 영유권 주장 충돌…일본 개입으로 간도협약 맺어진 후 진척 없어 | 생글생글 (hankyung.com)

 

 

(7) 두만강 북쪽은 누구 땅인가? 한·중·일 근대는 '국경 만들기'에서 시작됐다[책과 삶] (daum.net)2022. 5. 6. [경향신문]

 

 

 

 

<참고자료>

 

 

 

 

간도(間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간도 - Daum 백과

 

 

 

 

 

 

 

 

 

KBS HD역사스페셜 – 신년기획, 백두산 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 KBS 2006.1.13 방송

https://youtu.be/HTZVqGn8c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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