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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11) - 동학농민혁명 : 동학농민혁명 단체 “명칭·정신, 헌법 전문 수록해야” 본문

남국/조선

조선(11) - 동학농민혁명 : 동학농민혁명 단체 “명칭·정신, 헌법 전문 수록해야”

대야발 2024. 5. 30. 13:10

 

 

 

동학농민혁명 단체 “명칭·정신, 헌법 전문 수록해야”

김창효 기자2023. 10. 29. 11:17

 

정읍시·전국 39개 동학농민혁명단체, 국회서 성명 발표

전북 정읍시와 전국 동학농민혁명 39개 단체 관계자들이 26일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 헌법전문 포함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읍시 제공

 

전북 정읍시와 전국 39개 동학농민혁명 단체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을 한목소리로 요구했다.

지난 26일 국회에 모인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은 3·1운동의 뿌리이자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의 진정한 출발로 삼아야 한다”면서 “정부와 국회는 동학농민혁명 명칭·정신 헌법전문 명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29일 동학농민혁명 단체에 따르면 공동성명을 낭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북도의회도 지난 2월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이자 민주화 운동의 효시인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올바르게 계승·발전될 수 있도록 국회와 정부가 개헌을 통해 헌법전문에 포함해야 한다”면서 건의문을 채택했다.

앞서 2020년 대한민국 시·도지사협의회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명칭과 정신이 헌법전문에 포함돼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했지만 이후 논의가 없어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이학수 시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해야 한다”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중심도시 정읍이 혁명 세계화와 선양사업에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은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뒤 혁명 참여자 3700여 명과 유족 1만 2000여 명이 명예를 회복했고,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는 동학농민혁명 법정 기념일로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을 선정했다.(1)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 엇박자

임송학2023. 11. 21. 11:15
동학특별법 제정 19년 지났는데 교과서는 그대로
정읍시 교과서 수정 위해 표준국어대사전 개정 나서
동학농민혁명 정신 계승·발전 위해 용어 통일 시급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선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용어 통일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돼 혼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황토현 전적에 조성된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정읍시 제공

 

21일 전북 정읍시에 따르면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지 19년이 지났으나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돼 엇박자 행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정부는 2004년부터 동학농민혁명을 공식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2019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을 제정했고 2022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도 준공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도 설치됐다.

 

반면 고교 한국사 교과서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하고 있다. 정읍시는 교과서 수정을 위해 교육부와 교과서 저자 등을 방문해 여러 차례 수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과서 수정을 위해서는 민감한 용어의 경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용어부터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정읍시는 교과서 개정을 위한 전 단계로 내년부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용어 수정에 나서기로 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함께 국립국어원을 공식 방문하여 정부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법과 기념일 제정의 의미 등을 설명하고 대사전 수정에 반영해 줄 것을 공식 요청할 방침이다.

정읍시 동학문화재과 원동호 주무관은 “2세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할 경우 한국 민족운동사의 정신적 뿌리이자 근대사의 첫 출발점인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과 가치를 폄훼할 우려가 있어 내년부터 표준국어대사전 수정을 적극 추진하고 이어 교과서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며 “동학농민혁명은 정부가 공식 사용하는 용어이고 관련 법에도 명기된 만큼 국립국어원도 받아들일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2)

전주 임송학 기자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전쟁·전염병·지배층 횡포 등 도탄에 빠진 백성…이상세계 모델 제시한 동학 등장하자 전국 확산

입력 2023.05.15 10:00 수정 2023.05.15 10:00 생글생글 801호
(142)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다양한 평가(上)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드라마 . 녹두꽃 홈페이지
 
1894년 2월 1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접주인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무력 봉기를 일으켜 1년여간 정부 및 일본군에게 무력 저항을 하다 1894년 말 진압당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동학란’,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동학교도인가’ 또는 ‘농민인가’란 주체 문제, ‘혁명인가’ 혹은 ‘민란인가’란 성격 문제, 결과와 역사적 의미 등 상반된 평가로 인해서다.

‘난(亂)’은 적대적 관계였던 위정자와 양반 유림, 부정적 시선을 가진 서학(천주교)과 위정척사파, 개화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또한 조선 지배의 욕망을 가졌던 청나라와 일본의 시선이다. ‘전쟁’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무산대중의 계급투쟁으로 평가한 용어로 북한 정권이 사용했고, 남한에서도 일부가 수용한다. 반면 ‘혁명’은 평등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체제의 전면적 변화를 추진했으며, 자유를 속박하는 외세에 항전한 동학과 농민의 견해를 대변한 평가다.

이 봉기는 어떠한 배경과 목적을 갖고 추진됐을까? 조선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백성의 보호와 관리’라는 국가 기능을 상실해 가고, 백성은 몇 차례에 걸친 전쟁, 이상기후로 인한 흉작과 전염병의 창궐 등으로 대참변을 여러 번 겪었다. 그 와중에도 성리학적 세계관과 신분제도로 무장한 양반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는 한계점을 넘어 19세기 초에는 ‘관서민란(홍경래의 난)’, ‘임술민란’ 등이 발생했다. 백성은 불만과 저항 의지를 표출할 수 있고, 희망찬 미래와 새 세상을 추구하는 미륵신앙, 후천개벽 등 민간신앙과 <정감록>, <격암록> 등 예언서에 빠져들었다. 일부 지식인 사회도 부국강병론과 개방, 서양 문물의 도입 등을 요구하며 민권 의식의 고양과 사회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진격한 무장 관아의 진무루. 송화섭 중앙대학교 교수 제공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내천(人乃天)’이란 평등의 가치관과 이상 세계의 모델을 제시한 동학이 등장하자, 서학과 서양 문물에 배타적인 농민들은 이 자생 신앙에 열광했다. 전라도 일대에서 일어난 동학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1864년 3월 사교로 몰려 창시자인 최제우가 사형을 당했다. 한편 1875년의 운양호 사건 이후에 일본과 청국을 필두로 미국과 독일 등 서구 열강들은 서양 문물을 보급하는 한편 상업, 광업, 농업 등 경제적인 침탈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자국 상품을 판매하고 쌀 등의 자원을 수탈하면서 조선 경제와 농가를 붕괴시키는 중이었다.

세력을 확장한 동학교도들은 1892년 11월에는 삼남 지방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면서 최제우의 신원을 복원하고, 동학을 인정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전봉준 등은 서학을 비판하고, 외국 상인을 추방할 것을 결의했다. 1893년에는 각지에서 상경한 대규모 교도들이 서울의 궁궐 앞에서 상소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학은 개혁과 봉기의 이론을 만들었고, 주도할 조직망과 군사력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마침내 전봉준 등의 남접은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악행을 자행하는 신임 군수 조병갑을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대부분의 사회운동과 정치 변혁은 상항에 따라 단계적으로 변화하고 확장된다. 초기 봉기는 고부 관청을 습격한 후 군수를 효수했고, 비록 행동 강령은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고 했지만, 지역 민란의 수준을 넘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더 심하게 탄압하고, 분노를 유발하는 악행들을 자행하자 전봉준은 다시 4월에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보국안민(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의 의지를 담은 ‘창의문’(倡義文)을 선포했다.

불과 10여 일 만에 근처 지역에서 농민들을 포함한 1만여 명이 집결하자 전봉준은 ‘척왜양’를 표방하고, 한양을 공격해 정부의 고위 관리와 세력을 죽인다는 행동 강령을 발표했다. 이어 정부군과 황토현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전주성을 무혈로 점령했다. 체제 위기를 두려워한 정부는 외세 개입의 위험성을 우려하면서도 청군에게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대기하던 일본군도 톈진(천진)조약을 빌미로 대규모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 무렵 최시형 등 북접 세력은 고수하던 무저항 종교운동을 포기하고, 전봉준의 무장 노선을 지지하면서 전국의 동학교도에게 이 봉기에 참여할 것을 포고했다.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난(亂)’은 적대적 관계였던 위정자와 양반 유림,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서학(천주교)과 위정척사파, 개화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또 조선 지배의 욕망을 가졌던 청나라와 일본의 시선이다. ‘전쟁’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무산대중의 계급투쟁으로 평가한 용어로 북한 정권이 사용했고, 남한에서도 일부가 수용한다. 반면 ‘혁명’은 평등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체제의 전면적 변화를 추진했으며, 자유를 속박하는 외세에 항전한 동학과 농민의 견해를 대변한 평가다.(3)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체제 변혁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한 농민봉기…근대국가·근대국민으로 성숙하는 전기 만들어

입력 2023.05.22 10:00 수정 2023.05.22 10:00 생글생글 802호
 
(143·끝)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다양한 평가(下)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 전봉준 장군 동상.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제공
 
승승장구하던 전봉준의 군대는 관군을 선제공격하다가 패배했고, 초토사인 홍계훈은 이를 계기로 탐관오리의 숙청을 약속하면서 봉기군의 해산을 요구했다.
 
전봉준은 그동안 제기했던 격문, 강령, 개혁안 등을 정리해 ‘12개 폐정개혁안’을 정부에 제시했다. 즉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리고,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하며,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하게 벌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줄 것 등의 혁명적 내용이었다. 결국 ‘전주화약’이 성립됐고, 동학 농민군은 고향으로 돌아가 포(包)를 설치하고 접을 조직해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심지어는 황해도 평안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봉기의 근원지인 전라도 일대에선 젊은이의 대다수가 동학에 입교할 정도였다. 동학 농민군은 ‘도인(道人)과 정부가 서정(庶政)을 협력한다’는 전주화약의 조항에 근거해 마을마다 집강소를 설치한 뒤 각종 개혁을 주도했다. 정부 관리의 힘이 미치지 못해 일종의 ‘해방구’적 성격도 띠었다.

이처럼 동학은 체제 변혁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했다. 동기를 유발하는 동시에 혁명적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군사력 등의 인적 자원을 제공하면서 동학화한 일반 농민과 공동으로 정부에 맞서 정면대결했다. 여기에 ‘척왜양’이라는 구호와 강령을 필두로 일본군과 벌인 본격적인 전투는 봉기의 성격과 위상을 혁명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그 무렵 일본 정부가 이 사태의 발발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척왜’ 구호가 등장했을 당시 이미 농촌까지 침투한 일본 스파이의 보고로 봉기의 성격과 진행 과정 등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에 청군의 상륙 소식을 듣자 즉각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의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7월부터 동학이 요구한 내용에 접근한 갑오개혁에 착수했다.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30년 가까이 충돌하던 일본과 청나라는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비참한 전장이 됐다.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자 전봉준과 손화중 등 동학 농민군은 9월 중순 ‘척왜’를 선언하며 2차 거병했다. 불과 한 달 만인 10월 말 삼례역에만 11만 명의 동학군이 집결했으며, 손병희가 지휘하는 북접군도 남하했다. 드디어 동학 농민군은 공주의 우금치에서 정부·일본 연합군과 6~7일 동안 40~50회에 달하는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1만여 명 가운데 500여 명만 탈출하는 대패배를 당했다. 이어 다른 지역에서 김개남 부대와 손병희 부대가 패했고, 강원도와 황해도 등에서도 동학군은 패배했다. 12월 30일 밤 전봉준이 포로로 잡혀 서울로 압송되면서 군사행동은 끝났고, 이듬해 4월 그가 손화중 등과 함께 처형당하면서 1년여에 걸쳐 전투와 개혁정치를 실현하던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혁명을 놓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조선의 사상과 신분 체제를 뒤흔든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행위의 주체와 성격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운명은 물론 동아시아의 신질서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전술상의 문제점, 남접과 북접의 갈등을 비롯한 청·일 전쟁을 일으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본격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 등이 있다.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하지만 ‘민족사’란 장기적이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인 면이 많다. 서학(천주교)을 통해 소개됐고, 갑신정변으로 실패한 개혁 의지와 민권사상을 일반 백성이 실제 생활 속에서 재발견했고, 그 요구를 원(原) 정체성에 뿌리를 둔 민족종교와 연결해 정신과 체제를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외세의 실체를 생활 속에서 자각했으며, 저항과 타도의 대상으로 각인시켜 의병투쟁, 독립전쟁 등으로 계승되도록 했다. 무엇보다 생존권의 요구와 일회성의 저항을 넘어 평등과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군사행동 등을 전국적으로 개진한 체험은 민족의식이 탄생하고, 근대 국가, 근대 국민으로 성숙하는 전기를 만들었다. 동학농민혁명은 가치와 자유를 위해 정부군 및 일본군과 승산 없는 전쟁을 펼쳤던 민족사의 유일무이한 혁명이다.
 
√ 기억해주세요
 
동학농민혁명을 놓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조선의 사상과 신분 체제를 뒤흔든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행위의 주체와 성격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운명은 물론 동아시아의 신질서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전술상의 문제점, 남접과 북접의 갈등, 청·일 전쟁을 촉발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본격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 등이 있다.(4)
 

 

 

녹두 전봉준, 그는 근대적 정치체제를 꿈 꿨다

2007. 6. 15. 17:35

 

"국사를 한 세력가에 맡기는 건 큰 폐해… 몇사람의 명사가 함께 정치를 맡아야"

 

정치의식·혁명성 적극적으로 해석 눈길

녹두 전봉준 평전 / 김삼웅 지음 / 시대의 창 발행ㆍ568쪽ㆍ1만6,500원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힘이 강할수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영웅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역시 지배세력에 의해 오랫동안 금기시된 민중의 영웅이었다.

동학혁명에 참가한 농민군이 한 때 동비(동학의 비적)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동학혁명이 동학난으로 통칭됐던 것처럼,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 때문에 전봉준의 이름에는 '불온'의 낙인이 찍혀있었다.

그 전봉준을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불러왔다. 저자는 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한 작업으로 이미 김구, 신채호, 한용운, 김창숙 등 민족주의자의 삶을 평가해 책으로 낸 적이 있다.

<녹두 전봉준 평전>은 그 동안 축적된 동학혁명과 전봉준에 관한 폭 넓은 연구를 섭렵해 한 평범한 농촌지식인이 근대 민중사의 절정인 동학농민혁명을 진두지휘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전봉준의 정치의식에 관한 적극적인 해석이 특히 눈길을 끈다. 노비제 폐지, 과부의 재가허용 등의 요구사항을 내건 폐정개혁 12개조에 나타난 동학혁명의 반봉건적 의식이나 '척왜(斥倭)'의 기치를 걸었던 혁명의 반제국주의적 대의는 잘 알려져 있지만 혁명의 최고 지도자가 어떤 정치체제를 열망했는지는 간과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왕권을 타도대상으로 삼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점을 들어 동학혁명의 한계를 거론하는 학자도 있지만 저자는 일본 신문의 기사와 공초(신문조서) 등을 꼼꼼히 살핀 뒤 전봉준이 분명히 근대적 정치체제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취조 과정에서 전봉준은 "국사를 들어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에게 협합(協合)해서 합의법에 의해서 정치를 맡기게 할 생각"이라고 밝히는데 저자는 이것을 근대적 대의민주주의, 나아가 공화주의체제에 대한 전봉준의 비전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한다.

 

연대기의 나열로 무미건조하기 일쑤인 여타 평전과 달리 전봉준의 일생을 소재로 한 빼어난 문학작품을 인용한 점도 돋보인다.

관군과 농민군의 대혈전이 벌어졌던 황토현 전투를 묘사한 대목에는 '한 시대의 /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시작하는 김남주의 <황토현의 노래>가 삽입돼 있다.

형형한 눈빛으로 최후를 맞은 전봉준의 죽음에는 '저 들판 끝 바람 앞에 선 사내하나 / 앙상한 뼛골로 우뚝 서 있는 / 서서 죽은 사내의 정수리에 들입다 꽂히는 바람아'로 시작하는 문병학의 시 <전봉준의 눈빛>이 수록돼 있다.

그래서 평전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웅서사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지 못한 것이나 전봉준이 동학의 접주였는지, 대원군과 내통했는지 등 학술적 쟁점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저자는 "전봉준은 개혁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 결국 망국의 길을 간 지배층에 온몸으로 경고한 인물"

이라며 "전봉준 사상의 근대성, 혁명성을 부각하는데 주력했다"며 고 말했다.(5)

이왕구기자 fab4@hk.co.kr

 

 

동학농민운동과 4·19 혁명, 세계사적 가치 인정 받다

유승오2023. 5. 19. 01:50
유네스코, '동학농민운동' '4·19 혁명'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최종 승인
2017년 등재 이후 6년 만…한국 보유 세계기록유산 18건으로 늘어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세계가 배우고 기억해야 할 가치 인정"

 

4·19 혁명 기록물 자료. 연합뉴스 출처.

 

우리나라의 두 역사적 사건인 동학농민운동과 4·19 혁명에 관한 주요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유네스코는 현지시각으로 어제(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집행이사회에서 한국이 신청한 '4·19 혁명 기록물' 1,019점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185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최종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이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린 건 지난 2017년 이후 약 6년 만으로, 이번 유산 등재로 세계 3위(총 18건) 기록유산 보유국 지위를 더욱 굳혔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 자료인 전봉준 공초(1895). 연합뉴스 출처.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 1894~1895년 일어난 당시 조선 정부와 동학농민군, 농민군 진압에 참여한 민간인, 일본 공사관 등이 생산한 자료들로 구성된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들은 한국 사회 근대적 전환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1960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 주도 민주화 운동인 4.19 혁명에 대한 자료들은 혁명의 원인과 전개 과정, 혁명 직후 처리 과정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물들"이라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넘어 전 세계 인류가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6)

 

 

'녹두장군' 123년만에 돌아왔다…전봉준 동상 제막

종로 네거리 앞 순국터에 국민모금으로 건립
박원순 "장군 뜻 이어 새로운 대한민국 만들자"

2018.04.24 오후 5:24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전옥서 터 앞에서 열린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전봉준 장군 동상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2018.4.24/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들꽃들아/그날이 오면 닭 울 때/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귀를 기울이라’

잔뜩 찌푸린 하늘에 강풍이 몰아치던 서울 종각 네거리. 불현듯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안도현 시인의 '녹두장군' 전봉준 추모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낭송되던 순간이었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앞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이 열린 24일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1855~1895)이 순국한 지 딱 123년이 되는 날이었다.    

1895년 전봉준 장군은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한 뒤 ‘전옥서’에 갇혔다. 사형판결을 받은 바로 다음날인 4월24일 새벽 2시 교수형을 당했다. 바로 지금의 영풍문고 빌딩 앞 터다. 
   
사형 선고 후에도 "나를 컴컴한 도둑의 소굴에서 죽이려 하느냐. 내 피를 종로 네거리에 뿌려라"며 기개를 잃지않던 그는 죽음에 앞서 ‘운명’이라는 이름의 유언시를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더냐/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랴’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녹두장군이 한 세기가 지나 서울의 중심에 우뚝 섰다. 그가 우금치의 분루를 머금고 눈을 감은 종로는 이후 3.1운동, 4.19혁명, 6.10민주항쟁을 거쳐 지난해 촛불집회 등 격변하는 한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무대로 자리잡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제막식 축사에서 “동학의 반봉건, 척왜척화 정신은 민주·민족·민권정신으로 현대사까지 이어졌다”며 “전봉준 장군의 큰 뜻을 받들어 서로 하늘같이 섬기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자”고 강조했다.

동상 건립은 동학혁명 100주년인 1994년부터 거론됐으나 구체화된 건 2016년 동상건립추진모임이 구성되면서부터다.

관건은 동상이 들어설 터였다.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점찍은 영풍문고 앞 전옥서 터는 서울시 땅이라 시의 협조가 필요했다. 박원순 시장이 그해 8월 전주에서 열린 동학혁명 기념식에서 기념사업회 측의 제안을 받고 적극적인 검토를 약속하면서 물꼬를 텄다.

동상 건립을 계기로 동학혁명 기념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유성엽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민주평화당)은 이날 제막식에서 "동학혁명일의 국가기념일 지정, 헌법 전문에 동학혁명 정신의 반영도 필요하다"며 "동학혁명 참여자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정부나 기업의 도움없이 국민 모금으로만 2억7000만원을 모아 제작됐다. 높고 위압적인 기존 동상들과도 다르다. 2.8m 정도의 높이에 앉아서 사람들과 눈을 맞추는 모습이다. 주변 도시경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민중의 벗'인 녹두장군의 풍모를 살렸다.   
이이화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은 "전봉준 장군 동상이 오래오래 외침에 저항한 민족운동의 상징물로 평등과 자주의 가르침을 익히는 청소년의 학습장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7)

 

 

동학혁명 진압 위해 출병한 일본 청과 전쟁 명분 만들려 동학군 지원

1894~1895년 한반도와 타이완 : 중국에 대한 일본의 우위가 수립되다

1894년 10월에 간행된 ‘일청전투화보’ 중 경복궁을 장악한 일본 측이 대원군을 입궐시키는 장면. 김시덕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장관이었던 무쓰 무네미쓰는 회고록 ‘건건록(蹇蹇錄)’의 첫머리에서 중국이 패권을 유지해 온 유라시아 동해안의 정치적 구도를 일변한 청일전쟁의 근본에는 동학(東學)이 있다고 서술한다. “일·청 양국이 해전과 육전을 치르게 되는 것도 우리 군이 연전연승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케 되어 종래 일·청 양국의 외교관계를 일변시켜 세계에서 일본을 동양의 우등국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도록 한 것도 그 근본 원인은 청·한(淸韓) 양국 정부가 이 동학당의 난에 대한 내치(內治)와 외교적 루트를 잘못 찾은 데 있었다. 앞으로도 일·청 양국 사이에 있어서 당시의 외교 역사를 쓰게 된다면 먼저 동학당의 난을 제1장에 놓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건건록’ 32쪽·범우사) 여기에서 동학의 교리와 역사를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제노네 볼피첼리라는 외교관이 청일전쟁에 관한 자신의 저술 속에서 동학에 대해 흥미로운 논평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는 “경주에서 로마 가톨릭교에 큰 감명을 받은 최제우라는 인물이 몸져누웠다가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광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병을 고칠 치료법을 알려주는 환영과 함께 민중의 복지를 이루기 위한 새로운 교리를 열었다”고 주장한다.(‘청일전쟁’ 81쪽·살림) 비슷한 시기에 환각 속에서 야훼와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홍수전이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것과 유사하게 동학농민운동을 이해하는 경향이 서구 사회의 일각에 있었던 것 같다. 볼피첼리의 관점과 마찬가지로 조선 정부도 동학을 가톨릭의 일파로 파악하여 1864년에 최제우를 처형시켰다. 그 후로 동학 교도들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정부는 오히려 이를 탄압했다. 여기에 고부군수 조병갑으로 대표되는 관료들의 학정에 대한 반발이 결합하면서 1894년 1월에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된다.

 

동학군이 빠른 속도로 세를 확장하자 자국군만으로는 이들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원군의 파병을 요청한다.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5월 말 조선이 중국에서 군대를 빌리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외무성에 통보했다. 실제로 그 후 원세개로부터 조선 정부가 청의 원병을 청했다는 통지가 조선의 일본공사관에 전해졌다. 조선의 유사시에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출병하면 다른 나라에 통고하기로 한 톈진조약에 따른 것이었다. 청은 어디까지나 속국을 지킨다는 종주국의 의무에 따라 파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올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의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운영이 곤란한 상태였다. 그래서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중의원을 해산하고 일본군을 조선에 출병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5월 31일에 전주를 점령한 동학군은 외국군이 조선에 주둔하면 국가의 안녕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하였다. 그러자 청은 청·일 양국 군대의 출병 원인이 소멸되었으므로 양국 군을 모두 철수시키자고 일본 측에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미 칼을 뽑은 일본 측은 이번 기회에 청과 한판 붙어서 조선을 청에서 떼어내고 일본의 우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새로운 출병 이유를 만들고자 했다. 무쓰 무네미쓰는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적고 있다. “당장에 급박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표면상 마땅한 구실도 없어서 교전할 이유도 없었으므로, 이러한 답보적인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일종의 외교적 정략을 통해 이런 정국을 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이었다.”(‘건건록’ 54쪽) 일본 측의 정략은 정부와 민간 양측에서 이루어졌다. 우선 민간에서는 이른바 ‘낭인(浪人)’들이 천우협(天佑俠)이라는 단체를 결성해서 동학군과 접촉, 전봉준과의 회견 자리에서 군사 원조를 제안했다. 이들은 동학군을 ‘조선 유일의 혁명세력’이라고 판단하여 이들이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면 참가하려 했다고 한다.(강창일·‘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38~101쪽) 그러나 반(反)정부적 성격을 띤 이들 천우협 세력의 조선 내정 개입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어떻게든 청과 충돌할 계기를 만들어야 했던 일본 측은 조선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명분을 만들도록 했다. 이에 따라 오토리는 7월 20일에 조선 정부에 대해 청과의 복속 관계를 해소하고 정치를 개혁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대한 조선 측의 대응을 문제 삼아 사흘 뒤인 23일 새벽에 경복궁을 침략했다. 당시 일본 조야에서는 이를 ‘전쟁’으로 칭했고, 일본 측의 선전포고문 초안에는 조선을 ‘적국’으로 칭하는 대목도 있었으나,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케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적국’ 운운 대목은 삭제되었다.(原田敬一·‘日淸·日露戰爭’ 66쪽) 그리하여 훗날 이 전쟁은 청과 일본이 한반도를 무대로 충돌한 ‘청일전쟁’이라는 타이틀로 기억되지만, 전쟁 당시 일본에서는 1894년 8월에 간행된 ‘일·청·한 전쟁기(日淸韓戰爭記)’와 같이 이 전쟁을 조선·청·일본 삼국이 충돌한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도 적지 않았다.

 

이리하여 전쟁을 일으킬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낸 일본은 명성황후 민씨와의 정치 투쟁에서 밀려나 있던 대원군을 입궐시킴으로써, 조선의 정치를 개혁한다는 명분을 더욱 그럴 듯하게 만들려 했다. 그리고 일본은 아산에 주둔하던 청국 군대를 소탕해 줄 것을 대원군이 일본 측에 요청한다는 형식을 취하여 개전(開戰) 명분을 성립시켰다.

 

이리하여 전쟁을 위한 명분을 만들어낸 일본군은 7월 25일에 아산 옆 풍도 앞바다에서, 그리고 29일에 아산·성환에서 청군과 충돌하여 모두 승리한다. 청·일 양국은 8월 1일에 상호 선전포고한다. 그리고 9월 15일에는 평양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한다. 1593년 2월의 평양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에 패한 일본군이 근 300년 만에 복수를 한 셈이었다. 이 전투에서는 하라다 주키치(原田重吉)라는 병사가 청나라 군대가 견고히 지키는 현무문(玄武門)을 돌파하여 단신 돌격한 일이 유명하다. 그는 청일전쟁의 상징적인 존재로 일본 전국에서 숭앙받았으나, 전후에는 이 한때의 영광을 잊지 못하여 꿈속에 살다가 비참하게 삶을 마쳤다고 한다. 청일전쟁을 주제로 한 연극에 직접 출연하여, 자신이 실제로 한 행동보다 과장된 활약상을 연기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하기와라 사쿠타로·‘청일전쟁 이문(異聞)-하라다 주키치의 꿈’) 한편 ‘미야코신문(都新聞)’이라는 일간지는 청일전쟁 초기에 군부의 검열로 인해 전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자 무라이 겐사이(村井弦齋)라는 작가에게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조선 정벌(朝鮮征伐)’이라는 소설을 연재하게 했다.(井上泰至·김시덕·‘秀吉の對外戰爭’ 270~271쪽) 소설의 전개를 통해 청일전쟁의 전황을 은유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17~19세기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다루면 상업적 이익이 보장되었다는 사정도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9월 17일에는 서해에서 청·일 양국 수군의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 황해 해전 또는 압록강 해전(Battle of the Yalu River)이라 불리는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한다. 황해 해전에서는 일본이 보유한 영국·프랑스의 군함과 청이 보유한 영국·독일의 군함이 정면 충돌했으므로 서구의 군수업체들은 전투의 귀추를 주목했고, 이 전투에서 일본이 압승한 덕분에 제조사인 암스트롱사는 막대한 광고 효과를 얻었다.(‘日淸·日露戰爭’ 82~84쪽) 또한 이 전투에서 일본 해군이 구사한 전술은 그 후 세계 해군에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청일전쟁은 새로운 무기, 새로운 전략이 실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전쟁이기도 했다. 서양에서 개발된 불랑기포와 조총이라는 새로운 화약무기를 지닌 명과 일본이 정면 충돌한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는 이번에도 신무기의 시험장으로서 기능했다.

1894년 10월에 간행된 ‘일청전투화보’ 중 7월 25일의 풍도 해전. 김시덕

 

한편 청일전쟁 당시 일본은 서구 국가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해야 비로소 열강의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유럽 문명의 결정체인 국제법, 현대적 군대, 입헌정체가 기독교 백인 이외에는 실현불가능하다는 당시 유럽인들의 편견을 깰 필요가 있었다. 무쓰 무네미쓰는 “황해 해전의 결과는 비로소 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기독교 국가 이외의 국가에서는 유럽식 문명이 생식될 수 없다는 비몽사몽에서 깨어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나아가 우리 군대의 혁혁한 무공을 표명함과 동시에, 우리 국민 모두가 유럽 문명을 채용했고 이것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건건록’ 177쪽)고 주장한다. 19세기 일본인들에게 ‘서구화’는 그만큼 절실한 과제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에 승리한 것은 ‘서양’ 문명과 ‘동양’ 문명의 충돌에서 ‘서양’이 승리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제 일본은 전통시대 문명의 근원이었던 중국을 ‘야만’이라 부르고 서구 문명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여 ‘문명화’되었다고 자처했다. 청·일 양국의 선전포고 직전, 일본의 한 신문은 ‘청일 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이 전쟁에서 무고한 인민이 죽는 것은 불쌍하지만 청과 같이 부패한 국가에서 태어난 것은 그들의 불운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日淸·日露戰爭’ 68쪽) 미국 유학 후 상하이의 미션스쿨에서 강의하던 윤치호 역시 일본과 청을 문명과 야만으로 간주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전 동양을 위해 일본이 승리하기를!’이라고 적었다.(‘개화파 열전’ 268쪽·푸른역사)

 

이후 일본의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육지로 진격하고, 제2군은 랴오둥 반도로 상륙한다. 11월 21일에 여순을 점령한 제2군은 수일간에 걸쳐 시민을 학살했다. 이는 국제법을 준수하는 문명국 일본이라는 일본 측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건으로, 일본 측은 이를 극력 축소 은폐하려 했다. 게이오의숙대학의 창립자이자 김옥균이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살 자체를 부정했다.(‘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246~253쪽·푸른역사) 이처럼 학살을 자행하고 은폐하는 선례를 수립한 일본군이 그 후 1945년의 패전 때까지 점점 더 대담하게 학살과 은폐를 되풀이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청일전쟁은 미래를 예견케 하는 전쟁이었다.

 

청측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청·일 양국 간에 종전 협상이 시작된다. 협상을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리홍장이 일본인에게 저격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서구 열강에서 청에 대한 동정론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일본은 애초의 요구를 누그러뜨려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핵심은 랴오둥반도·펑후제도·타이완의 할양이었다. 그러나 1895년 4월에 들어서면 러시아·프랑스·독일이 청의 랴오둥반도 할양에 반대하고 나섰다.(삼국간섭) 만주에서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던 러시아가 주축이 되어 일본을 견제한 것이다. 승전 대가를 기대한 일본인들은 분노했다. 더욱이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할양받는 것을 방해한 러시아가 1898년에 청으로부터 뤼순·다롄을 조차받자 러시아에 대한 일본 측의 분노는 극치에 달했고 이 적개감은 이후 러일전쟁의 전초가 된다. 한편 타이완 등에 대한 할양은 유효했으므로 일본군은 5월에 타이완 북부에 상륙했다. 청으로부터 버림받은 일부 청의 관료들이 건국한 타이완 민주국이 단기간에 무너진 뒤 타이완 주민들이 11월까지 격렬한 저항을 전개하였음은 지난 회에 소개한 바 있다.

 

일본군의 타이완 정복 전쟁이 전개되던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발생한다. 삼국간섭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일본 정부는 이를 만회코자 명성황후 민씨를 제거했다. 조선이 혼란스러운 원인을 민씨 정권에서 찾은 우범선과 같은 조선인이 이에 가담했으며, 명성황후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대원군이 그 배후에 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갑오개혁의 취지에 찬성했던 유길준이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이야기가 당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의 왕비는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입니다.… 우리 국민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지난 가을 개혁가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 있으나 국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 공사와 협의하여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실행되었지만 대원군이 이 문제를 일본 공사와 협의하고 공사에게 약간의 도움을 청한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정용화·‘문명의 정치사상: 유길준과 근대 한국’ 93쪽에서 재인용)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면담한 바 있는 I. B. 비숍은 이 사건 이후 고종을 다시 면담했을 때 그가 극도로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고 증언한다. 선교사들이 번갈아 고종을 지키고, 음식도 러시아인·미국인이 상자에 담아 열쇠로 잠가 그에게 전달했다고 한다.(‘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275~276쪽·집문당) 이처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기세가 올랐던 일본은 러시아의 견제로 기대만큼 이익을 얻지 못했고, 조급하게 이를 만회하려다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켰다. 을미사변과 갑오개혁에 반발한 조선 관민은 반일 의병투쟁을 일으켰고, 일본에 혐오와 공포를 느낀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리기 위해 비밀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했다.(아관파천) 일본의 개입하에 성립한 김홍집 내각은 이에 무너지고, 도피할 것을 권유받은 김홍집은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오. 다른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구출되는 것은 오히려 깨끗하지 못한 것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살해된다. 그가 살해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개화할 사람이 없다”며 한탄했다.(‘개화파 열전’ 109쪽)(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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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남겨둔 꿈’ 건대출판부

‘건건록’ 범우사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한줄로 세워 놓고 일제히 총검으로…”

‘동학 농민군 학살’ 일본군 병사 일기 첫 공개

‘불태워 죽여라’ ‘모조리 총살’ 등
일본군의 동학 학살 상세히 드러나
당시 한국인 항일투쟁 부인하는
일본 정부 주장 뒤엎을 획기적 자료
“3만명 학살…일본 최초의 대량학살”

기자한승동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13-07-23 08:29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도 그 성과 가운데 하나다.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그곳(나주)에 도착했다. 남문 바깥에 작은 산이 있었고 거기에 주검들이 쌓여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민병 또는 우리 부대 병사에게 붙잡힌 자는 심문한 뒤 중죄인은 죽였다. 매일 12명 이상, 103명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버린 주검이 680명에 달했다. 근방은 악취가 진동했고 땅은 하얗게 사람 기름으로 얼어붙었다….”

“(해남의) 잔존 동학 무리 일부인 7명을 붙잡아와 오늘(1월31일) 성 바깥 밭 가운데에 일렬로 세워 놓고 총검을 부착한 뒤 모리타 일등 군조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찔러 죽였다. 이를 구경한 한인(韓人)들과 통영(統營)병사들이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경악했다.”

청일전쟁기인 1895년 1월 일본 진압군이 전남 나주, 해남, 장흥 일대의 동학 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했던 당시, 후비(後備)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2분대에 배속돼 있던 한 일본인 병사가 남긴 ‘진중일지’의 일부다. 1995년 7월 홋카이도대 문학부 연구실에서 효수당한 동학 농민군 해골이 발견됐고, 일본군의 공식보고서도 일부 남아 전하지만, 생생한 당시 상황이 담긴 개인의 일기가 공개된 것은 이례적이다.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표지

 

진중일지는 이노우에 가쓰오(68)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가 지난해 봄 일본 한 향토사학자의 소개로 도쿠시마현 출신 병사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 이노우에 교수는 나카쓰카 아키라(84)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박맹수(58) 원광대 교수와 함께 지난달 일본에서 출간한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또 하나의 청일전쟁>(고분켄 펴냄)에서 이 일지의 상세한 내용을 밝혀놓았다.

미나미 고시로 대대장(소좌)이 이끈 후비군 제19대대는 “남김없이 죽여라”는 당시 일본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동학 농민군 ‘삼로포위섬멸작전’에 나선 부대였다. 미나미 대대장이 이노우에 가오루 당시 주한 일본공사에게 올린 공식보고서에선 나주 처형자 수를 230명이라 밝혔지만, 이 일지는 그 수가 3배 가까이 되는 680명이라 적시하고 있다.

이노우에 교수는 “붙잡아서 총살” “심하게 고문” “모조리 총살” “민가를 모두 불태워라” “불태워 죽여라(燒殺)” “고문하고 총살한 뒤 주검은 불태워라” 같은 말들이 곳곳에 나오는 이번 일지가 “일본군 학살에 따른 지옥도를 증언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최근 동학농민전쟁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숨진 동학 농민들은 3만~5만명에 이른다. 3인 공동연구의 좌장인 나카쓰카 교수는 이 일지가 청일전쟁 당시 한국(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나 연구자들의 주장을 뒤엎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본 문부성은 일본 고교 일본사 교과서 집필자였던 이에나가 사부로(1913~2002) 교수가 1965년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유명한 ‘교과서 재판’에서 이에나가 교수가 자신의 책에 기술한 “청일전쟁 때의 조선인민의 반일저항” 부분을 삭제하도록 명했고, 1997년 일본 최고재판소도 문부성 손을 들어주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한국인들의 저항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학 ‘토벌’ 과정에서 전사한 일본군을 청국(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날조해 야스쿠니 신사 명부에 올린 사실도 밝혀냈다.

나카쓰카 교수 등은 동학농민전쟁 학살을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대량학살)”로 규정했다. 중일전쟁과 2차대전 때의 ‘난징학살’ 등 일본군이 20세기에 저지른 집단 인종학살의 시초가 19세기 말 동학 때부터 시작됐다는 얘기다. 역사가 하라다 게이이치는 최근 저서 <일청전쟁>에서 청일전쟁 당시 전사자를 “일본인 약 2만명, 중국(청)인 약 3만명, 조선인(동학농민전쟁 전사자) 3만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청일전쟁’이라는 이름을 단 전쟁의 최대 희생자는 실은 한반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의 싸움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후비 제19대대의 경우 전사자는 단 1명, 질병과 사고 등으로 숨진 자는 36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서방의 최신식 라이플총으로 무장한 일본 진압군(최대 4000명으로 추산)은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깃발을 흔들면서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순식간에 언덕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 일본군을 향해 쇄도하던’ 농민들을 손쉽게 제압했다.

청일전쟁 당시 발행된 <우와지마 신문>에 실렸던 홍주(충남 홍성군)에 투입된 제2중대 배속 일등군조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고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은 전한다. “적(농민군)이 근접하기를 기다렸다. 적은 앞다퉈 어지러이 진격(亂進)해 왔다. 400m까지 다가오자 세 방면에 포진한 우리 부대가 먼저 저격을 시작했다. 백발백중, 실로 유쾌했다. 적은 오합지졸의 주민(土民), 공포감으로 전진해 오지 못하고.(이날 3100여발을 쏘았다)”

당시 동학 농민군 학살은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공사 등의 직접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발발 뒤 청나라가 파병하자 톈진조약을 핑계로 건너와 경복궁을 점령했다. ‘척양척왜’를 내세운 동학 2차 봉기는 이런 일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컸다. 후비 제19대대를 이끌었던 미나미 대대장은 메이지유신 때 막부타도·존왕양이를 앞세우며 결성한 조슈번 지방군의 간부였던 이노우에 공사의 직속 부하 출신. 당시 일본군은 정규군과 예비역, 그리고 후비병(後備役)으로 짜여 있었는데, 후비병은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28~32살의 기혼남성들로 구성돼 있었다. 명성황후(민비) 시해를 현장에서 자행한 것도 바로 후비병들이었다.

나카쓰카 교수 등은 개별 전투에서 동학군은 참패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동학군의 장기 게릴라전이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이는 “나중의 중국 공산군이나 베트콩의 게릴라전 같은, 강자인 서방 침략에 맞서 약자인 아시아인들이 전통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의 선구를 이룬 것”이라고 평가했다.(9)

 

 

 

<주>

 

 

(1) 동학농민혁명 단체 “명칭·정신, 헌법 전문 수록해야” (daum.net)2023. 10. 29.

 

 

(2)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 엇박자 (daum.net) 2023. 11. 21. 

 

 

(3)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3051202561

 

 

(4)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3051958691

 

 

(5) 녹두 전봉준, 그는 근대적 정치체제를 꿈 꿨다 (daum.net) 2007. 6. 15.

 

 

(6) 동학농민운동과 4·19 혁명, 세계사적 가치 인정 받다 (daum.net) 2023. 5. 19.

 

 

(7) '녹두장군' 123년만에 돌아왔다…전봉준 동상 제막 - 뉴스1 (news1.kr)2018-04-24

 

 

(8)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7825

 

 

(9) “한줄로 세워 놓고 일제히 총검으로…” (hani.co.kr)2019-10-19

 

 

 

 

<참고자료>

 

 

 

최제우(崔濟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최시형(崔時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전봉준(全琫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학(東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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