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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11) 26대 고종(1864년~1897년), 1894년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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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11) 26대 고종(1864년~1897년), 1894년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

대야발 2024. 5. 30. 13:10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난(亂)’은 적대적 관계였던 위정자와 양반 유림,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서학(천주교)과 위정척사파, 개화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또 조선 지배의 욕망을 가졌던 청나라와 일본의 시선이다. ‘전쟁’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무산대중의 계급투쟁으로 평가한 용어로 북한 정권이 사용했고, 남한에서도 일부가 수용한다. 반면 ‘혁명’은 평등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체제의 전면적 변화를 추진했으며, 자유를 속박하는 외세에 항전한 동학과 농민의 견해를 대변한 평가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전쟁·전염병·지배층 횡포 등 도탄에 빠진 백성…이상세계 모델 제시한 동학 등장하자 전국 확산

한국경제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입력 2023.05.15 10:00 수정 2023.05.15 10:00 생글생글 801호

 
(142)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다양한 평가(上)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드라마 . 녹두꽃 홈페이지
 
 
 
 
 

1894년 2월 1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 접주인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무력 봉기를 일으켜 1년여간 정부 및 일본군에게 무력 저항을 하다 1894년 말 진압당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동학란’, ‘동학농민혁명’,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동학교도인가’ 또는 ‘농민인가’란 주체 문제, ‘혁명인가’ 혹은 ‘민란인가’란 성격 문제, 결과와 역사적 의미 등 상반된 평가로 인해서다.



‘난(亂)’은 적대적 관계였던 위정자와 양반 유림, 부정적 시선을 가진 서학(천주교)과 위정척사파, 개화주의자들의 관점이다. 또한 조선 지배의 욕망을 가졌던 청나라와 일본의 시선이다. ‘전쟁’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 무산대중의 계급투쟁으로 평가한 용어로 북한 정권이 사용했고, 남한에서도 일부가 수용한다. 반면 ‘혁명’은 평등과 자유를 기치로 내걸고 체제의 전면적 변화를 추진했으며, 자유를 속박하는 외세에 항전한 동학과 농민의 견해를 대변한 평가다.



이 봉기는 어떠한 배경과 목적을 갖고 추진됐을까? 조선은 후기에 들어서면서 ‘백성의 보호와 관리’라는 국가 기능을 상실해 가고, 백성은 몇 차례에 걸친 전쟁, 이상기후로 인한 흉작과 전염병의 창궐 등으로 대참변을 여러 번 겪었다.

 

 

그 와중에도 성리학적 세계관과 신분제도로 무장한 양반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가렴주구는 한계점을 넘어 19세기 초에는 ‘관서민란(홍경래의 난)’, ‘임술민란’ 등이 발생했다. 백성은 불만과 저항 의지를 표출할 수 있고, 희망찬 미래와 새 세상을 추구하는 미륵신앙, 후천개벽 등 민간신앙과 <정감록>, <격암록> 등 예언서에 빠져들었다. 일부 지식인 사회도 부국강병론과 개방, 서양 문물의 도입 등을 요구하며 민권 의식의 고양과 사회체제의 개혁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진격한 무장 관아의 진무루. 송화섭 중앙대학교 교수 제공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인내천(人乃天)’이란 평등의 가치관과 이상 세계의 모델을 제시한 동학이 등장하자, 서학과 서양 문물에 배타적인 농민들은 이 자생 신앙에 열광했다. 전라도 일대에서 일어난 동학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1864년 3월 사교로 몰려 창시자인 최제우가 사형을 당했다. 한편 1875년의 운양호 사건 이후에 일본과 청국을 필두로 미국과 독일 등 서구 열강들은 서양 문물을 보급하는 한편 상업, 광업, 농업 등 경제적인 침탈을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자국 상품을 판매하고 쌀 등의 자원을 수탈하면서 조선 경제와 농가를 붕괴시키는 중이었다.



세력을 확장한 동학교도들은 1892년 11월에는 삼남 지방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면서 최제우의 신원을 복원하고, 동학을 인정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전봉준 등은 서학을 비판하고, 외국 상인을 추방할 것을 결의했다.

 

1893년에는 각지에서 상경한 대규모 교도들이 서울의 궁궐 앞에서 상소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학은 개혁과 봉기의 이론을 만들었고, 주도할 조직망과 군사력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했다. 마침내 전봉준 등의 남접은 1894년 2월 10일 전라도 고부에서 악행을 자행하는 신임 군수 조병갑을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대부분의 사회운동과 정치 변혁은 상항에 따라 단계적으로 변화하고 확장된다. 초기 봉기는 고부 관청을 습격한 후 군수를 효수했고, 비록 행동 강령은 전주성을 함락한 후 한양으로 진격한다고 했지만, 지역 민란의 수준을 넘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더 심하게 탄압하고, 분노를 유발하는 악행들을 자행하자 전봉준은 다시 4월에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보국안민(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의 의지를 담은 ‘창의문’(倡義文)을 선포했다.



불과 10여 일 만에 근처 지역에서 농민들을 포함한 1만여 명이 집결하자 전봉준은 ‘척왜양’를 표방하고, 한양을 공격해 정부의 고위 관리와 세력을 죽인다는 행동 강령을 발표했다. 이어 정부군과 황토현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전주성을 무혈로 점령했다.

 

 

체제 위기를 두려워한 정부는 외세 개입의 위험성을 우려하면서도 청군에게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대기하던 일본군도 톈진(천진)조약을 빌미로 대규모로 군대를 파병했다. 이 무렵 최시형 등 북접 세력은 고수하던 무저항 종교운동을 포기하고, 전봉준의 무장 노선을 지지하면서 전국의 동학교도에게 이 봉기에 참여할 것을 포고했다.(1)

 
 
 
 

동학농민혁명을 놓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조선의 사상과 신분 체제를 뒤흔든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행위의 주체와 성격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운명은 물론 동아시아의 신질서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전술상의 문제점, 남접과 북접의 갈등, 청·일 전쟁을 촉발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본격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 등이 있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체제 변혁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한 농민봉기…근대국가·근대국민으로 성숙하는 전기 만들어

한국경제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입력 2023.05.22 10:00 수정 2023.05.22 10:00 생글생글 802호

 
(143·끝)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다양한 평가(下)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 전봉준 장군 동상.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제공
 
 
 
 
 

승승장구하던 전봉준의 군대는 관군을 선제공격하다가 패배했고, 초토사인 홍계훈은 이를 계기로 탐관오리의 숙청을 약속하면서 봉기군의 해산을 요구했다. 전봉준은 그동안 제기했던 격문, 강령, 개혁안 등을 정리해 ‘12개 폐정개혁안’을 정부에 제시했다.

 

 

즉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리고, 청춘과부의 개가를 허락하며,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하게 벌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줄 것 등의 혁명적 내용이었다. 결국 ‘전주화약’이 성립됐고, 동학 농민군은 고향으로 돌아가 포(包)를 설치하고 접을 조직해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심지어는 황해도 평안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봉기의 근원지인 전라도 일대에선 젊은이의 대다수가 동학에 입교할 정도였다.

 

동학 농민군은 ‘도인(道人)과 정부가 서정(庶政)을 협력한다’는 전주화약의 조항에 근거해 마을마다 집강소를 설치한 뒤 각종 개혁을 주도했다. 정부 관리의 힘이 미치지 못해 일종의 ‘해방구’적 성격도 띠었다.



이처럼 동학은 체제 변혁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했다. 동기를 유발하는 동시에 혁명적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하고 군사력 등의 인적 자원을 제공하면서 동학화한 일반 농민과 공동으로 정부에 맞서 정면대결했다. 여기에 ‘척왜양’이라는 구호와 강령을 필두로 일본군과 벌인 본격적인 전투는 봉기의 성격과 위상을 혁명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그 무렵 일본 정부가 이 사태의 발발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척왜’ 구호가 등장했을 당시 이미 농촌까지 침투한 일본 스파이의 보고로 봉기의 성격과 진행 과정 등을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문에 청군의 상륙 소식을 듣자 즉각 군대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의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7월부터 동학이 요구한 내용에 접근한 갑오개혁에 착수했다.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30년 가까이 충돌하던 일본과 청나라는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은 비참한 전장이 됐다.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자 전봉준과 손화중 등 동학 농민군은 9월 중순 ‘척왜’를 선언하며 2차 거병했다. 불과 한 달 만인 10월 말 삼례역에만 11만 명의 동학군이 집결했으며, 손병희가 지휘하는 북접군도 남하했다.

 

 

드디어 동학 농민군은 공주의 우금치에서 정부·일본 연합군과 6~7일 동안 40~50회에 달하는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1만여 명 가운데 500여 명만 탈출하는 대패배를 당했다. 이어 다른 지역에서 김개남 부대와 손병희 부대가 패했고, 강원도와 황해도 등에서도 동학군은 패배했다. 12월 30일 밤 전봉준이 포로로 잡혀 서울로 압송되면서 군사행동은 끝났고, 이듬해 4월 그가 손화중 등과 함께 처형당하면서 1년여에 걸쳐 전투와 개혁정치를 실현하던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농민혁명을 놓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조선의 사상과 신분 체제를 뒤흔든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행위의 주체와 성격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의 운명은 물론 동아시아의 신질서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전술상의 문제점, 남접과 북접의 갈등을 비롯한 청·일 전쟁을 일으켜 일본의 조선 지배를 본격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 등이 있다.

 


하지만 ‘민족사’란 장기적이고, 통일적인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인 면이 많다. 서학(천주교)을 통해 소개됐고, 갑신정변으로 실패한 개혁 의지와 민권사상을 일반 백성이 실제 생활 속에서 재발견했고, 그 요구를 원(原) 정체성에 뿌리를 둔 민족종교와 연결해 정신과 체제를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외세의 실체를 생활 속에서 자각했으며, 저항과 타도의 대상으로 각인시켜 의병투쟁, 독립전쟁 등으로 계승되도록 했다. 무엇보다 생존권의 요구와 일회성의 저항을 넘어 평등과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군사행동 등을 전국적으로 개진한 체험은 민족의식이 탄생하고, 근대 국가, 근대 국민으로 성숙하는 전기를 만들었다. 동학농민혁명은 가치와 자유를 위해 정부군 및 일본군과 승산 없는 전쟁을 펼쳤던 민족사의 유일무이한 혁명이다.(2)

 

 

 

■2차 동학농민혁명,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다

오마이뉴스 이윤영기자 2024. 12. 13. 18:33

 

[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49]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갑오왜란·청일전쟁

 

 

 

▲ 일청사건조선전투실기 일본군과 청나라(중국)군이 조선에서 전투하는 전쟁화보 풍속화(만화)다. 일청사건조선전투실기 자료는 원본으로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청일전쟁, 동아시아 패권을 일본이 차지하다

 

[일본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였다. 이른바 풍도해전이라 일컫는 아산만 앞바다에 주둔중인 청나라 북양함대를 일본군 연합함대가 기습 공격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은 청군을 향해 선전포고와 함께 청일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평양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고, 황해해전과 대동강·압록강 해전에서 청군을 궤멸시켰다. 청군의 계속된 패전으로 조선에서 본국으로 후퇴하였으며, 일본군은 중국으로 진격하면서 연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일본은 청나라를 제압하고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일본군, 풍도해전을 일으키다

 

조선 정부를 장악한 일본은 청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청군의 철병을 요구하라고 협박하여 기어코 이를 관철시켰다. 일본군은 명분을 확보한 후, 선전포고도 하기 전에 6월 23일(양7.25) 이토 스케유키가 이끄는 연합함대로 하여금 아산만 풍도(豊島) 앞바다에 주둔 중인 청의 북양 함대를 공격하도록 했다.

 

 

서양식 편제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청군은 1천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일본군은 북양 함대의 일부를 침몰시키고 수천 명을 수장시키는 등 풍도해전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이어 27일에 아산과 성환에 주둔한 청군을 공격해서 1천여 명을 살상하여 청군을 한양성 이북으로 쫓아 버렸다.

 
 
 
▲ 일청사건조선전투실기 청일전쟁화보 평양전투 풍속만화이다. 본 자료는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일본군, 청군에게 선전포고를 하다

 

청의 이홍장은 6월 29일 청나라 주재 각국 공사를 초빙하여 '청과 일본은 아직 선전포고도 하지 않았는데, 일본이 청의 함대와 군사들을 기습 공격하여 국제법을 위반하였다.'는 성명을 내고 일본과 국교를 단절한다고 공표하였다. 또 조선에 대해서는 속방의 보호를 내세워 국가를 인정하지만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군을 축출한다고 공개 선언하였다. 이에 일본은 7월 1일(양8.1) 청에 정식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7월 26일 조일공수동맹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는 청과 전쟁을 하는 일본에 대해 조선이 중부 이북을 병참기지로 제공해야 하고, 식량 조달 및 노동력과 물자까지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파병하는 군대와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해 부산과 한양 사이 21개 요충 지역에 병참부를 불법적으로 설치하였으며, 한양-부산 간 군용전선 가설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항하여 후일 영남의 동학군들이 호남의 혁명군보다 먼저 기포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게 된다.

 

 
 
 
 
▲ 평양성 청일전쟁 평양성 전투는 8월 16일과 17일(양9.15-9.16) 양일에 걸쳐 평양에서 전개되었다. 청군 2만여 명과 일본군 1만 2천여 명은 평양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청군은 일본군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여 자만하였고, 동시에 본국의 내부 분열 등 악재가 겹쳐 대패하고 말았다. 본 사진은 평양성 옛 사진으로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했다.
ⓒ 동학혁명기념관
 
 

일본군 평양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하다

 

청일전쟁에서 결정적인 전투는 8월 16일과 17일(양9.15-9.16) 양일에 걸쳐 평양에서 전개되었다. 청군 2만여 명과 일본군 1만 2천여 명은 평양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청군은 일본군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하여 자만하였고, 동시에 본국의 내부 분열 등 악재가 겹쳐 대패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평양전투 승전의 여세를 몰아 17~18일의 황해해전에서 북양 함대의 주력들을 격파한 후 대동강과 압록강 앞바다의 해전에서 청군을 궤멸시켰다.

 

 

청군은 연이은 참패로 9월 말 조선에서 본국으로 후퇴하였다. 일본군은 청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한반도를 넘어 중국으로 진격해 갔다. 일본군은 10월 초부터 중순까지 청의 봉천성과 뤼순항, 12월 말에는 산둥반도를 장악하고, 1895년 초에는 북경·톈진까지 위협하였다.

 
 
 
▲ 정청기담 종군견문록 청일전쟁(중국 청나라와 일본과의 전쟁) 종군기자 보고서이다. 정청기담 종군견문록 자료는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일본군, 뤼순 점령 6만 명 학살

 

일본군은 뤼순을 점령하여 포로와 시민 6만여 명을 처참하게 학살하면서 시내를 불바다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고, 웨이하이(威海衛)마저 상륙작전으로 함락했다. 청은 결국 일본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일 양국 강화조약의 협상에 들어가는데, 일본의 요구 조건은 전쟁 비용을 배상하고 요동반도를 넘기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계속된 위협과 침공에 의해 1895년 3월 23일(양4.17) 결국 청의 이홍장, 이경방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와 일방적이고 불평등한 청일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 평양전투도 1894년 (명치 27년) 9월 15일 제작된 평양전투지도이다. 평양전투도 자료는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일본군, 청군에게 완승하다

 

일본이 청에 승리를 거두자, 일본군과 일본 국민들은 대륙 진출에 승리했다고 열광하였지만, 주변 강국이 견제하고 나서면서 요동반도 할양은 벽에 부딪혔다. 즉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반대와 미국의 거중조정으로 4월 16일(양4.30) 일본이 청의 요동반도를 포기하고 전쟁 배상금만 받는다는 조건의 각서에 서명함으로써 청일전쟁은 막을 내렸다.

 

 

청일전쟁에서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어 왔던 중국이 섬나라 일본에게 힘없이 무너지고, 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자 조선과 중국은 물론 세계가 경악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와 동학농민군 섬멸 작전을 시작으로, 동아시아 패권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또한 이 기세를 몰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은 물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태평양전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일본은 그들의 계략대로 조선을 대륙 침공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우리 땅에 불법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중국을 제압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1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의 기반을 조선의 식민지화를 통해 이뤄낸다. 이로써 청일전쟁에서 청군의 패배는 곧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지름길로 들어선다. 이러한 국난을 당하여 조선정부는 이렇다 할 대책도 없었고 항전할 의지도 부족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은 보국안민과 척왜창의를 내세우며 일본군과 한판 붙을 준비를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일본의 내정간섭과 갑오개혁

 

[조선 정부의 때늦은 자주개혁 방안은 휴지 조각이 되었으며, 흥선 대원군을 통한 국정 최고 권한의 군국기무처가 설치된다. 그리고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면서 갑오개혁(갑오경장) 12개 조가 기무처를 통해 발표된다. 이는 동학군의 폐정개혁안을 상당부분 받아들였으나, 이는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고 무단통치를 하려는 야심에서 비롯되었다.]

 

 

일본군이 궁궐을 점령한 후 조선 정부의 자주 개혁 노선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은 6월 22일부터 섭정을 하면서 민비의 측근들을 내쫓았다. 또한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오도리의 권고에 따라 6월 25일 최고의 국정 처결 권한을 갖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했다.

 

 

김홍집이 조정의 영의정과 기무처의 총재를 겸하고, 그 아래 박정양, 민영달 등 개화파 17명을 위원으로 두었다. 이들은 일본의 통제 아래 기무처를 통해 개혁 정책을 펴 나갔다. 기무처는 3개월 동안 40여 차례에 걸쳐 189개의 개혁 안건과 210여 건의 의안을 심의하여 통과시켰다.

 
 
 
 
▲ 삼례가는길 동학농민혁명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식민지화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남원에서 기포하고, 삼례에서 척왜창의 즉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한 의병을 일으킨다.
ⓒ 박홍규

 

 

 
 

군국기무처의 갑오개혁

 

갑오개혁 또는 갑오경장으로 불리는 기무처(機務處) 의안은 6월 28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1. 국내외의 공사 문서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말고, 조선 개국기년을 쓸 것.
2. 청국과는 조약을 바꿔 바르게 하고, 전권공사를 각국에 파견할 것.
3. 가문의 신분과 양반 상민의 등급을 없애고, 귀하고 천함이 없이 인재를 뽑아 쓸 것.
4. 문무(文武)는 높고 낮음의 구별을 폐지하고, 벼슬의 직품에 의해서만 서로 의식을 거행할 것.
5. 죄인 외의 친족에게 연대책임과 처벌을 일체 폐할 것.
6. 본처와 첩실 모두에게 아들이 없는 뒤에야 양자를 허용할 것.
7. 어린 나이의 결혼은 엄금하고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가 되어야 혼인을 허락할 것.
8. 홀로 된 여자의 재혼은 귀하고 천함을 가릴 것 없이 허락할 것.
9. 공적 사적 노비의 법은 일체 없애고 사람을 사고파는 것을 금할 것.
10. 평민이라도 나라에 이롭고, 백성을 위한 의견이 있는 자는 군국기무처에 글을 올려 회의에 부칠 것.
11. 각 관청의 부서는 필요한 수만큼 더하거나 줄여서 설치할 것.
12. 의복에 관한 제도는 편리하게 고칠 것.

갑오개혁의 내용에 동학혁명군의 폐정개혁안을 참고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이는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후 조선에서 입지를 강화하려는 술책이었다. 조선의 근대 개혁의 효시로까지 평가받는 기무처의 개혁안은 일본의 간섭에 의한 정략적 내용으로, 선언적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갑오개혁안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내용이 후퇴하고, 조선의 운명은 일본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본의 대륙 진출과 곡물수송로 개척

 

일본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많은 경제적 이권을 강탈하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면서, 조선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양과 부산 간 일본군용 전신을 가설하고 철도 및 전신 시설 설치를 무력으로 강행했다. 이러한 일본의 이권 강탈 과정에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이 체결되었다.
이는 경부선과 경인선의 철도부설권을 빼앗아 호남일대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일본 국내로 운반하기 위한 조처였다. 일본은 목포를 중심으로 항구들을 개항할 것을 조선에 요구하였다. 청일전쟁 등 대륙 진출을 위해 정치는 물론 경제 침탈의 야욕을 확연히 드러낸 것이었다.

 

 

근대적 헌법 홍범(洪範_모범이 되는 큰 규범)14조 반포

 

일본은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시점인 1895년 1월 7일에 고종을 협박하여 홍범14조를 발표하게 했다. 홍범14조는 박영효 등 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갑오개혁에 기반을 두고 정치·경제·사회 등의 개혁을 단행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하고 왕권을 분산시키며 민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일본의 정략적 간섭에 의한 조선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 할 수 있다. 갑오개혁12개조와 근대헌법 홍범14조는 동학혁명군이 발표하고 실천했던 12개조 폐정개혁안과 27개조 폐정개혁안을 참고하였고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일제의 조선강점을 위한 술책에서 비롯되었다는 부정적인 사실에 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홍범14조(洪範十四條)

 

제1조: 청국(중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제2조: 왕실 전범(왕실예절)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제3조: 국왕(대원군)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비빈·종실 및 척신이 관여함을 용납지 않는다.
제4조: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제5조: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제6조: 부세(賦稅, 세금의 부과)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제7조: 조세 부과와 징수 및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제8조: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제9조: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1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제10조: 지방관 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의 직권을 한정한다.
제11조: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제12조: 장교(將校)를 교육하고 징병 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제13조: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제14조: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일본의 강점기를 벗어난 해방 이후 현재까지 조선 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 지금도 대한국민 안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협조하는 밀정들이 수두룩하다. 최근 이종찬 광복회장의 말씀에 의하면, 밀정 즉 소위 친일 뉴라이트 출신들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분명 반민족행위에 해당되며, 조선말 일본에 의한 강점기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는 우려를 씻을 수 없다. 최근 황석영 작가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일제라는 도둑이 조선에 들어와 강도짓을 하다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고 철수할 때 도둑질에 사용했던 사다리를 두고 간 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라는 비유 적절한 말씀을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명언이 우리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3)

 

 

 

 

<자료출처>

 
 
 

 

 

(2)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체제 변혁의 명분과 이론을 제공한 농민봉기…근대국가·근대국민으로 성숙하는 전기 만들어 | 생글생글 2023.05.22  

 

 

 

<참고자료>

 

 

최제우(崔濟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최시형(崔時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전봉준(全琫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학(東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학농민혁명 단체 “명칭·정신, 헌법 전문 수록해야” (daum.net)2023. 10. 29.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 엇박자 (daum.net) 2023. 11. 21. 

 

 

 

동학농민운동과 4·19 혁명, 세계사적 가치 인정 받다 (daum.net) 2023. 5. 19.

 

 

 

“한줄로 세워 놓고 일제히 총검으로…” (hani.co.kr)2019-10-19

 

 

 

'녹두장군' 123년만에 돌아왔다…전봉준 동상 제막 - 뉴스1 (news1.kr)2018-04-24

 

 

 

동학혁명 진압 위해 출병한 일본 청과 전쟁 명분 만들려 동학군 지원  - 주간조선2014.11.07 

 

 


녹두 전봉준, 그는 근대적 정치체제를 꿈 꿨다 (daum.net) 2007.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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