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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9) 23대 순조(1800년~1834년), 1811년 홍경래의난, 1862년 임술농민봉기, 26대 고종(1864년~1897년),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본문

남국/조선

1. 조선 (9) 23대 순조(1800년~1834년), 1811년 홍경래의난, 1862년 임술농민봉기, 26대 고종(1864년~1897년),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대야발 2024. 5. 30. 11:07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홍경래는 우군칙, 김사용, 이희저, 김창시 등과 함께 봉기의 횃불을 높이 올렸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농민들 삶이 곪을 대로 곪은 시절, 홍경래는 서북지방의 대상인과 향임층(지역 향반), 무사, 유랑 농민, 노비 등을 규합했다.

 

‘서북지방 지역 차별 타파’와 ‘나이 어린 임금 아래에서 권세가 있는 간신배가 국권을 농단하니 백성의 삶이 거의 죽음에 임박했다’는 점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어린 왕 순조가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세도정치가 심화되는 상황이 반란의 동기임을 분명히 밝혔다.

 

 

■ [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36) 순조의 즉위와 세도정치 시작..농민 분노에 '홍경래의 난' 발발 정권 위기

2016. 7. 18. 09:38

 

 

 
 
 
 
 
 

1800년 6월 조선 후기 개혁정치를 이끌던 정조가 투병 끝에 승하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조선 중흥을 이끌던 정조의 죽음은 조선 정국에 파란을 몰고 왔다. 정조 승하 후 왕위는 11세의 순조(1790~1834년, 재위 1800~1834년)가 이어받았다. 순조의 즉위는 영·정조 시대의 강력한 왕권이 사라지고 왕실의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시작이 됐다.

 
 
 

순조는 정조와 수빈 박씨 사이에서 1790년 6월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공(玜), 호는 순재(純齋)다. 정조는 왕비인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의빈 성씨에게 문효세자(1782~1786년)를 얻었으나, 문효세자는 5세 나이로 요절했다. 순조는 1800년 1월 효의왕후의 양자로 들어가 세자로 책봉됐다. 그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11살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왕위에 올랐다. 조선 전기에 단종 12세, 성종 13세, 명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른 사례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엔 숙종이 14세에 즉위한 것을 제외하면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왕이 됐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시작된 원인을 어린 왕이 즉위한 것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19세기에만 유독 세도정치가 극성이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세력 있는 외척 가문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17·18세기에 행해졌던 붕당 간 견제와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특히 왕실과의 정략적인 혼인은 외척 세력에게 한층 더 큰 날개를 달아줬다. 성종이나 숙종은 신하의 보필을 잘 받고 왕으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기에 왕권이 외척의 힘에 결코 휘둘리지 않았다.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관례대로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1759년 15세에 영조의 계비로 들어왔던 정순왕후는 증손자인 순조가 즉위하면서 46세의 나이로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정조 재위 기간 동안 큰 존재감이 없었던 정순왕후는 본격적으로 정치 일선에 등장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후 정조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혁파되고 개혁정치의 중심기관인 규장각이 축소된 것은 이런 정치적 변화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노론 벽파를 두둔했던 정순왕후1801년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탄압을 주도했다. 천주교가 당시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차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천주교 신자 대부분이 남인인 것도 박해의 큰 원인이었다. 신유박해로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등 300여명의 신도와 청나라 신부가 처형됐다. 정약용은 겨우 처형을 면한 채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외가 근처인 강진에 귀양을 간 것은 정약용이 지금까지도 최고의 실학자로 기억될 수 있는 주요한 계기가 된다. 순조 초반에 전개된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은 결과적으로 위대한 실학자 정약용을 만들어준 셈이다.

 

 

순조 즉위 초반에는 정순왕후로 대표된 경주 김씨의 외척 세력이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1804년 순조가 15세가 되면서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뒀다. 이후 1805년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았다. 안동 김씨는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를 배출한 집안으로 순조 초반 최대 실세가 됐다. 어리고 허약한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해준다는 명분으로 외척 중심의 세도정치를 펼친 것. 순조는 정조를 도왔던 노론 시파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안동 김씨 가문의 도움을 받게 된다. 안동 김씨는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과 척화파의 대표자인 김상헌 이후 17~18세기 수많은 재상을 배출한 명문대가로 성장했는데, 순조 즉위는 안동 김씨의 권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었다.

 

 

세도정치는 원래 ‘도를 회복시킨다’는 의미의 ‘세도(世道)정치’로 쓰였다. 하지만 정조 즉위 후 홍국영이 정조의 측근으로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면서, ‘세도(勢道)정치’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순조 즉위와 함께 세도정치는 19세기 외척과 소수 가문에 의해 독점되는 정치 형태를 뜻하는 용어가 됐다.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 외에도 남양 홍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대구 서씨, 반남 박씨 등 명문 양반 가문이 혈연적으로 깊은 연결을 맺으면서 정권에 참여해 서울 양반의 연합정권과 같은 성격도 띠게 된다. 왕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순조 이후에도 헌종(재위 1834~1849년)과 철종(재위 1849~1863년)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 외척 가문은 대왕대비나 왕대비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아 확고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왕이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하고 정치가 소수 외척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조선왕조는 점차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19세기 세도정치가 전개되면서 가장 고통을 받게 된 계층은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세도정치는 권력의 독점을 가져왔고 수령직까지 매관매직 대상이 됐다. 수령과 아전들은 세금을 더욱 혹독하게 거뒀고 전정(田政·토지에 대한 세금), 군정(軍政·군역), 환곡(還穀·봄에 곡식을 빌리고 이자를 쳐서 추수에 갚음)의 폐단은 극에 달했다. 농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유민이 돼 떠돌아다니거나, 산속에 숨어 살며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농한기에는 광산에 모여 임노동에 종사했다. 국경 밖으로 넘어가 간도나 연해주에 이주한 농민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다. 홍경래는 우군칙, 김사용, 이희저, 김창시 등과 함께 봉기의 횃불을 높이 올렸다.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면서 농민들 삶이 곪을 대로 곪은 시절, 홍경래는 서북지방의 대상인과 향임층(지역 향반), 무사, 유랑 농민, 노비 등을 규합했다. ‘서북지방 지역 차별 타파’와 ‘나이 어린 임금 아래에서 권세가 있는 간신배가 국권을 농단하니 백성의 삶이 거의 죽음에 임박했다’는 점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어린 왕 순조가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면서 세도정치가 심화되는 상황이 반란의 동기임을 분명히 밝혔다.

 

 

1811년 12월 18일 저녁, 홍경래는 평서대원수의 직함으로 가산의 다복동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은 격문을 낭독하며 출정식을 올렸다.

 

 

“무릇 관서지방은 단군조선의 터전으로 예부터 문물이 빛나고 임진·병자의 전란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 난 자랑스러운 곳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이 땅을 천시하니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아니한가? 현재 왕의 나이가 어려 김조순, 박종경 등 권신의 무리가 국권을 농단해 정치는 어지럽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서 헤어날 길을 모르고 있다. (중략) 각 군현의 수령들은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라.”

 

 

10년간 준비 끝에 일으킨 거사인 만큼 초기 반란군 위세는 대단했다. 처음 다복동에서 1000여명의 병력으로 군사를 일으킨 홍경래는 평안도 백성의 호응을 얻어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의 9개 읍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내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의 반격에 가로막혔다. 홍경래 일당은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관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완강한 관군의 저항에 밀려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정주성으로 퇴각했다.

 

 

전황은 반군에게 점차 불리해졌다. 반군 수뇌부들은 최후 거점인 정주성에 들어가 2000여명의 농민군과 함께 마지막 저항에 나섰다. 그럼에도 관군의 거센 공격에 1812년 4월 19일 정주성은 함락됐다. 거병한 지 4개월 만의 일이었다. 홍경래는 남문 부근에서 전사했다. 당시 관군에 체포된 자는 총 2893명으로 이 중 10세 이하 어린이를 뺀 1917명이 즉시 처형됐다. 장장 4개월간 평안도 일대를 휩쓸었던 농민 봉기의 열풍은 이날 정주성 위로 타오르는 시체의 검은 연기와 함께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정치 척결과 지역 차별 철폐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세도정권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장기간 준비한 반란이었지만 충분한 물자가 준비돼 있지 않았고 지방 차별 타파라는 명분이 전국적인 호소력을 갖지 못하면서 평안도 지역에 한정된 농민전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으로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조선 사회를 저항의 시대로 열어나가는 원동력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반란은 진압됐지만, 홍경래의 난에 대한 후유증은 컸다. 순조는 세도정치에서 파생되는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을 보이지 못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왕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도 큰 원인이었다. “경연을 여는 날이 적어 책 한 권도 끝을 맺을 기약이 없다”는 영의정 김재찬의 지적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왕은 정치 의욕을 잃고, 농민 부담은 더욱 가속화되면서 19세기 조선 사회는 점차 위기에 빠지게 된다.(1)

 

 

 

■ 진주 농민, 임술민란을 시작하다

최윤필2016. 3. 14. 04:46

[기억할 오늘] 3월 14일

 

 

1862년 3월 춘궁기 진주지역 농민들에게 가외의 세금 추징 계획이 전해졌고,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하는 심정으로 죽창을 들었다. 진주민란이었다. 사진은 영화 '군도'의 한 장면.

 

 

 

동학봉기(1894년) 32년 전 ‘임술농민봉기(혹은 민란)’가 있었다. 그 신호탄이 된 진주민란이 1862년 3월 14일(음력 2월 14일) 시작됐다.

 

철종 13년, 조선 세정의 근간이던 삼정(三政, 전정ㆍ군정ㆍ환정)이 어지럽던 때였다. 토지가 많을수록, 조정에서 멀수록 폐해가 심했다고 한다. 그게 삼남(下三道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 특히 전라ㆍ경상도였다. 서울서 천리, 경상우도(남도) 진주는 봉건 경제의 종기가 가장 앞서 곪은 한 곳이었다. 그 시절을 살판난 듯 여긴 부패 관료(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백낙신이 거기 있었다.

 

그가 ‘특별’한 탐관오리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울대출판부의 ‘한국사특강’ 등이 밝힌 백낙신의 탐학은 이러했다. 그는 세무장부 조작과 세입 전용 등을 일상의 일로 여겼고, 무기를 사들일 예산으로 쌀을 매점해 춘궁기 농민들에게 강제 대출한 뒤 가을에 고리를 얹어 거둬 들였다. 묵정 밭을 일구거나 광산을 채굴한 이에게 상은커녕 벌금을 매겼다. 결정적인 발단은 도결 청산, 즉 유용한 공금의 장부상 부족액을 세금으로 추가 징수하는 거였다. 임술년 그 해에 털어야 할 도결 규모만 무려 5만2,000여 석에 달했고, 그걸 분납하려면 진주 일대 농가 대다수가 파산할 지경이었다. 하급 관료들의 부패, 지역 대소 토호들의 횡포도 물론 극심했을 것이다.

 

 

진주성 남강쪽 전경. 관광 안내판은 임진왜란 진주대첩과 '논개'의 충절이 서린 곳이라고 설명한다. 위키커먼스.

 

 

몰락한 양반 등이 주축이 돼 농민 동원 전략 등 거사 계획을 세웠다. 몽둥이와 농기구 등을 든 농민들은 스스로를 초군(樵軍ㆍ나무꾼)이라 칭하며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가는 동안 마을을 돌며 동참을 종용했고, 불참자에겐 소정의 불참 비용을 받았다고 한다. 무리가 커지면서 농민뿐 아니라 부민(浮民ㆍ떠돌이 백성) 천민(賤民)도 동참했다. 그들은 성을 ‘함락’했고, 백낙신을 공개 치죄해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냈다. 특히 악랄했던 그의 수족들은 처형했고, 지주들의 집을 불태웠다. 재물을 나눈 뒤 그들은 6일 만에 자진 해산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조정에서 안핵사를 파견한 것은 그 뒤였다. 주도자 10명이 효수됐고, 20명이 귀양을 갔다. 관리 중 효수된 자는 없었고, 유배된 이는 백낙신 등 8명이었다.

 

진주 민란은 4월 경남 함양과 전남 장수로, 5월 충청 현풍으로, 평택과 제주 함경도 함흥으로 파문처럼 확산돼 임술민란이 됐다. 신분제와 봉건경제의 폐해에 맞선 민란의 경험과 에너지는 동학농민운동으로 계승됐고, 대한제국의 만민공동회와 3ㆍ1운동으로 이어졌다. 1923년 백정들의 사회주의적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의 근거지도 진주였다.(2)

 

 

 

 

 

흥선대원군에게는 시대적인 과제와 사명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왕권 확립과 세도정치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과 실학 이후 신사상이 추구한 체제 변화였다. 둘째는 천주교의 수용과 서양세력의 개항 요구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었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원군, 세도정치 철폐 등 기득권 일소 성공…쇄국으로 세계질서와 열강 움직임 못 읽어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입력 2023.04.03 10:00 수정 2023.04.03 10:00 생글생글 795호
 
(136) 대원군의 개혁, 쇄국정책과 조선의 개항 (上)
 
 
 
미국이 처음 공격한 강화도의 초지진.
 
 
 
 

조선은 백성에게 가난과 질병, 부패와 공권력의 폭력을 안긴 불행한 체제였다. 조선은 정조의 죽음 이후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가 지속됐다. 소수 가문이 왕권을 능가하는 정치권력과 경제, 문화 등을 장악했고, 관직 매매 등 부패를 일상화했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은 죽거나 민란을 일으켰다. 일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 정착했다. 1863년 이런 상황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역사에 등장했다.



그에게는 시대적인 과제와 사명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왕권 확립과 세도정치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과 실학 이후 신사상이 추구한 체제 변화였다. 대원군은 신속하게 중앙과 지방에 포진한 세도정치의 주역과 동조 세력을 숙청하고, 비변사를 폐지해 정치권과 군사권을 분리했다. 정치·문화 이데올로기의 산실이자 재산권 및 권력투쟁과 직결된 수많은 서원을 47개만 남겨두고 철폐했다. 양반들의 특권으로 병역 대신 부과했던 군포를 다시 거둬들였고, 사창제도 등을 시행해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런 개혁정책들은 구권력의 인적, 기득권의 물적 토대를 일소했고, 자신을 중심으로 신권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백성도 환호했다.



하지만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 회복을 목적으로 추진한 경복궁 재건은 개혁을 좌초시켰다. 백성을 무리하게 징발했고, 재정 부족 때문에 발행한 당백전은 초기 단계에서 화폐경제의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세금을 걷는 데 차질이 생겼고, 백성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원납전을 부과해 관청과 지주들의 자진 기부를 유도했지만 결국 백성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대원군은 100년 가까이 성장한 실학자들의 존재와 연구, 정책 대안을 소홀히 했다. 오히려 천주교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 탄압하기까지 했다.



둘째는 천주교의 수용과 서양세력의 개항 요구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었다. 서학과 천주교는 병자호란 직후부터 영향을 끼쳤지만, 신앙과 학문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는 서양인이 탄 이양선이 해안에 출몰했고,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했던 조선은 쇄국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서양 지도에 기록됐고, 이는 이후 독도 갈등의 씨앗이 됐다. 서양인들이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 작업을 구체적으로 시작한다는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조선을 둘러싼 세계 질서와 열강의 움직임은 어땠을까?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상륙했던 갑곶돈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면서 근대지향적인 나라로 탈바꿈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지식인과 하급 무사들은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홋카이도와 유구, 타이완, 조선 등을 점령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메이지유신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은 ‘정한론’을 주장했다. 군사력을 증강했고, 특히 서양의 해군력을 본 병부성은 20년에 걸쳐 군함 200척 및 운송선 20척을 건조하자는 계획을 건의했다. 이를 계기로 장갑함을 비롯한 수입품으로 무장한 근대 해군이 탄생했다. 1871년부터 신분해방령을 내리고 국민이 초등교육을 받도록 했고, 평민도 군인이 될 수 있는 징병령까지 만들었다. 1871년부터 1873년 사이 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 국비유학생을 대거 파견했는데, 그 비용이 1872~1873년 교육 예산의 약 10%였다.



청나라는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을 맺었고, 1844년에는 미국, 프랑스와도 동일한 조약을 맺었다. 러시아와는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어 헤이룽강 이북과 연해주 땅 100만㎢를 빼앗겼다. 일본과는 1871년 상호평등 관계로 전환되는 ‘청일수호조규’를 맺었다. 서양의 압력을 막으려면 일본과 연합해야 한다는 ‘연일제서(聯日制西)’ 논리 때문이었다.



이 시대 러시아는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나라였다. 일본과 1875년 5월 러·일 화친조약을 맺어 사할린을 영토로 인정받았다. 반면 일본은 쿠릴열도의 18개 섬 전체를 양도받았고, 홋카이도를 영토로 삼을 권리까지 얻었다. 이후 러시아는 동아시아 질서에 직접 영향을 끼쳤고, 조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러자 위협을 감지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와 신흥 태평양 세력인 미국은 대항마로서 일본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구도를 파악해 서구 열강을 이용했다.(3)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놓고 ‘조선의 멸망을 늦췄다’ ‘조선이 회생할 기회를 상실했다’ 등 상반된 평가가 난무한다. 그 무렵 조선은 외국 세력과 정면 대결할 수도,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와 질서 재편의 혼란기에는 우연이 존재하고, 약자의 도약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비록 실패할 확률이 높았어도 지연이라는 시차 작전과 강온 양면의 외교술을 발휘해볼 만한 여지는 있었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두 번의 '양요' 거치며 쇄국정책 옳았다고 착각…4년 후 일본 공격 대비하는 교훈조차 못 얻어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입력 2023.04.10 10:00 수정 2023.04.10 10:00 생글생글 796호
 
(137) 대원군의 개혁, 쇄국정책과 조선의 개항(下)
 
 
어재연 장군 등이 혈전을 벌인 강화도 광성돈대.
 
 
 
 
 
 

미국은 1847년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태평양에 진출했으며, 포경선들을 북태평양 어장으로 진출시켜 러시아와 부딪쳤다. 1853년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강행해 1854년에 미·일 화친조약을 맺었다. 1865년에는 남북전쟁을 종결시켰고, 1869년엔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양양(兩洋)국가’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조선을 비롯해 청나라, 필리핀 등과 캄차카 반도, 쿠릴 열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은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서해안의 모든 관청에 외국 선박과의 교섭 금지령을 내렸고, 프랑스 신부와 신도를 죽였다. 주청 프랑스 공사관은 이를 조선을 개항시키는 빌미로 활용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9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두 척의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목동 입구인 염창에 정박하고, 다음날 양화진(양화대교)까지 접근하자 도성은 공포에 휩싸였다. 곧 산둥으로 회항한 함대는 준비를 마친 뒤 10월 14일 군함 네 척으로 강화도에 진입해 갑곶진을 점령했다. 이어 벌어진 문수산성 전투에서 포수와 전국에서 동원된 보부상, 지역주민과 합동작전을 벌인 조선군과 싸우다가 퇴각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숱한 문화재를 약탈했다.

 

 

그 얼마 전인 음력 7월에는 ‘제너럴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평양에 정박했다가 정부와 백성들의 공격으로 배가 전소됐고, 선원은 몰살당했다. 미국은 5년이 지난 1871년 이 사건을 빌미로 나가사키항을 출항한 군함 다섯 척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의 초입인 초지진을 점령했고, 다음날에는 옆의 덕진진과 광성보를 공격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최소한 253명의 군인과 다수의 백성이 전사했다. 반면 미국은 단 3명 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국가와 군대가 백성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대원군은 두 번의 ‘양요’에서 승리했다고 자처하면서 쇄국정책이 옳았음을 주장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하지만 조선은 전투에서 졌고, 다수의 백성이 죽었으며, 불과 4년 뒤 발생할 일본의 공격을 예방하는 교훈조차 얻지 못했다.

 

 

이 무렵 일본은 서양을 자기화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침략했다. 1872년 류큐 왕국을 류큐 번으로 만들었고, 1874년 5월에는 대만을 침공했다. 1875년엔 류큐국을 점령해 1879년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만들었다. 다음 단계는 조선이었고, 열강들은 이를 예측했다. 하지만 물러난 대원군도,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정체제도 무능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예고 없이 부산항에 입항했고, 운요호를 비롯한 함대 세 척이 강화 해안에 상륙해 조선군을 패배시켰다. 이어 ‘조선병탄론’ 등 시나리오대로 움직여 열강들에 외교전을 펼쳤고, 군함 세 척과 수송선 세 척에 전권대표와 해병대 등 800여 명을 태우고 강화도 연안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조선의 신정권은 최초의 근대조약이면서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사대교린 외교체제는 무너졌고, 조선은 청나라에서 벗어난 자주국으로 변신해 일본에 종속되기 편하게 변형됐다. 신정부는 자국책을 강구해 서양 세력과 근대조약을 맺으면서 개항과 또 다른 개혁을 선택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놓고 ‘조선의 멸망을 늦췄다’ ‘조선이 회생할 기회를 상실했다’ 등 상반된 평가가 난무한다. 그 무렵 조선은 외국 세력과 정면 대결할 수도,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와 질서 재편의 혼란기에는 우연이 존재하고, 약자의 도약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비록 실패할 확률이 높았어도 지연이라는 시차 작전과 강온 양면의 외교술을 발휘해볼 만한 여지는 있었다.



대원군의 역사적인 성격과 정책은 오늘 우리에게도 교훈을 준다. 사회 개혁은 사적인 경험과 교조적인 행동으로는 성사될 수 없다. 신념보다 자유심, 명분보다 필요성, 사심보다 공감이 더 효율성이 높다. 백성은 전 시대의 폭정에 반동적인 존재로 대원군을 지지했지만, 결국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해 절망한 백성은 국가 의식이 희박해졌고, 이는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에 보이듯 조선 멸망에 큰 요인이 됐다.(4)

 
 
 

 

<자료출처>

 

 

(1) [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36) 순조의 즉위와 세도정치 시작..농민 분노에 '홍경래의 난' 발발 정권 위기. 매경이코노미 2016. 7. 18.

 

 

 (2) 진주 농민, 임술민란을 시작하다. 한국일보 2016. 3. 14. 

 

 

 (3)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원군 세도정치 철폐 등 기득권 일소 성공…쇄국으로 세계질서와 열강 움직임 못 읽어 | 생글생글. 한국경제 2023.04.03 

 

 

(4)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두 번의 양요 거치며 쇄국정책 옳았다고 착각…4년 후 일본 공격 대비하는 교훈조차 못 얻어 | 생글생글. 한국경제 2023.04.10

 

 

<참고자료>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106010500001

 

 


실학박물관, 실학 대중화·보급 위해 ‘실학, 고전으로 만나다 열하일기’ 발간. 경기일보 2024. 9. 4.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0.남양주 실학박물관 (daum.net)경기일보 2023. 10. 5. 

 

 

 

과천 추사박물관 특별기획전 '영남을 찾아간 추사’. 뉴시스 2024. 9. 5.   

 

 

 

조선후기 실학자 최한기 저서 ‘통경’ 실물 첫 발견. 동아일보 2024. 3. 26. 

 

 

 

최초의 지전설 수용한 실학자 홍대용. 오마이뉴스 2024. 1. 15.   

 

 

 

[신병주의역사저널] 열린 세계 지향한 박제가와 ‘북학의’ 세계일보 2023. 3. 3. 22:

 

 

 

'한국인의 밥상' 김훈 작가, "서유구 선생, 굶주린 백성 위해 고구마 보급" 스타투데이 2021. 1. 28.   

 

 

 

조선의 은둔 천재 실학자 류희의 삶·업적 '집대성' 뉴스1 2024. 5. 28.

 

 

 

 

 

 

 

 
 
 

 

 

조선시대 생물대백과 사전 | 서울신문 (seoul.co.kr)200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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