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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9) - 정조대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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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9) - 정조대왕

대야발 2024. 5. 30. 11:07

 

정조가 단군과 천부경을 찾은 까닭은

  • 기자명차태헌 기자 입력 2018.06.03 23:53수정 2018.06.22 03:38 
 

李조선 성리학 지배질서, 우리고유선맥 숨통 조이다.

 

 

이조선, 중화질서에 자진예속함에 따라 하늘제사 금지하다

중국 기자 숭배 속에서 병자호란 이후 단군 부활하다

팔관회, 불교 절간의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 등은 선맥仙脈의 잔영이다

무교巫敎에서도 선맥이어지다

사도세자 아들 정조, 생존위해 성리학 중화질서 지지하다

한편으로 단군과 천부경 찾다

 

▲李조선22대 왕 정조(正祖 서기1752-1800). 기울어가는 이조선 22대 왕에 올라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득권 신권에 제압당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학문과 기예면에서 역대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구나 잊혀져가는 선도에도 관심을 많이 둔 것으로 최근 밝혀지고 있다. 그는 단군을 민족사의 시조로 보았다(편집인 말)

 

한민족은 단군 이래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던 민족이다. 그 전통은 고려시대까지도 팔관회 연등회등으로 변형이 되기는 하였으나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것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조선초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도입하면서 부터다.

성리학 통치 이념에 따라 조선은 천자국이 아닌 명에 속한 제후국이 된다. 여기서 명 제후국인 조선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원칙이 도입이 된다.

이와 같은 것이 조선 초 상황이었다면 양란을 겪은 조선 후기 상황은 어떠했을까? 정경희는 학자로서 첫 출발점이 규장각 연구원이었다.  숙종 영조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정조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정경희는 세가지 흐름에 주목하였다.

첫 번째,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으로 상징되는 성리학 이념 강화이다.

“이처럼 양란 이후 성리학 의리론 강화는 역사인식 면에서 성리학에 기반한 전통론적 역사인식 강화로 드러났고, 그 결과 기자 마한 정통론이 등장하였다. 기자 마한 정통론은 북벌론이나 대명 의리론과도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곧 기자 마한 정통론에 의하면 중화의 전통은 조선에 이르러 기자 마한을 거쳐 조선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오랑캐인 청淸이 중화의 적통인 명明을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소중화인 조선까지 유린하였으니 명이 사라진 시점에서 유일하게 남은 중화인 조선이 청을 쳐야 한다는 북벌론 또는 북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조선이 이념적으로 명을 이은 적통이 되어 중화를 계승해야 한다는 대명 의리론이 성립하게 되었다(정경희,  정조의 한국선도 인식과 단군의 위상 제고).”

두번째는 양란 이후 성리학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그 대척점에 있던 고유 선도 사상이 성리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양란 이후 조선전기에 비하여 한국  선도仙道 전통을 강조하는 다수 선도서, 또 성리학서이면서도 선도 전통을 포용한 사서들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한 점은 이러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양란 이후 등장한 선도사서로는 선조대 조여적의 <청학집靑鶴集>, 숙종대 북애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및 홍만종의 <해동이적海東異蹟>, 영조대 이의백의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등이 있다. 청학집에서는 환인을 동방 선맥의 조종으로 설정하고 그 전통이 환웅, 단군, 문박씨, 영랑, 마한, 보덕신녀, 표공, 참시선인, 물계자 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규원사화>에서는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선도 사상을 강조하고 곳곳에서 유교 사상을 비판하였다. 특히 한국의 선도를 신교로 표현하면서 중국 도교와의 차별성을 극히 강조하였다(정경희, 정조의 한국선도 인식과 단군의 위상 제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난을 겪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국가 통치 이념의 재정립을 통한 국가 재건은 절대 절명의 지상과제였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대해서 당시 지식층은 두가지 극단적인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하나는 노론을 중심으로 기존 성리학 이념을 더 강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는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층들에 의해서 성리학 이외의 다른 곳 대안을 찾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이는 우리 고유의 선도 사상이다.조선 후기 상황을 정경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요컨대 양란을 통한 민족적 각성은 성리학 의리론을 강화하는 방식 또는 고유 선도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과 같이 전혀 상반된 방식으로 드러났다. 이중 성리학 의리론을 강화하는 방식은 역사인식 면에서 유교문화 상징인 기자 전통을 강조하는 전통론적 역사 인식 곧 기자 마한 정통론으로 드러났으며, 고유 선도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은 단군을 강조하는 역사인식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당시 지배층 지식층과 별도로 우리 고유 선도 사상을 기억하고 있던 민중들 흐름이다. 정경희는 그 민중들 흐름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고려에서는 중국도교 용어인 성황城隍을 수용하였으나 중국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곧 한국 마을 수호신이 중국 마을의 수호신과 같을 수는 없었다. 한국 마을에 있는 수호신 곧 산천이나 신사에 모셔진 신이란 한국 고대 이래 선도 전통에서 나온 신 곧 선도성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이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이규경이 살던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성황당은 선왕당仙王堂으로 불리었으며 마한 소도의 유속으로 이해되었다.

고조선 이후 선도의 본령은 점차 잊혀져 갔지만 선도 제천의례가 국가 공식적인 국중대회로서 남아있던 고려시대 까지는 선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 이르러 선도전통이 단절되면서, 선도는 민속 무속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도 제천의례의 중심인 삼신 (삼진 三眞) 에 의한 이해도 변질되었다. 삼신은 모든 사람 속에 내재한 원리, 곧 삼진이 아니라 인격신으로 기복의 대상으로 변화하였다. 기복의 대상으로 삼신을 신앙하는 것을 삼신신앙이라 한다. 조선에서는 집집마다 삼신을 모셨는데 삼신단지, 삼신바가지, 삼신자루의 형상으로 모셨다.”

기자 주 : 삼진은 대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에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삼진三眞(본성(性)과 목숨(命)과 정기(精)을 부여받았으나, 오직 사람만이 지상에 살면서 미혹되어 삼망三妄(마음(心)과 기운(氣)과 몸(身)이 뿌리를 내리고, 이 삼망三妄이 삼진三眞과 서로 작용하여 삼도三途(느낌(感)과 호흡(息)과 촉감(觸))의 변화 작용을 짓게 된다.“

▲북한 강동군 대박산에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했던 단군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릉을 발굴하여 부장된 물건을 수습했다. 단군릉도 대규모로 새로 조성하여 부장품들을 안에 안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단군은 우리 선사仙史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편집인 말).

 

이 이외에도 조선시대 사찰안에서 불교와 습합된 형태이기는 하나 삼성각,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 제석당 등의 다양한 형태로 우리 고유의 선도 신앙이 민간에 의해서 보존되었다는 것이 정경희의 주장이다.

조선 사회에서 오로지 사람만이 삼진三眞을 받는다는 한 민족 고유의 선도 사상과 중원 천자만이 하늘을 받들 수 있다는 유교 성리학은 애초부터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중들은 비록 흔적이나마 그 맥을 이어갔다.

이것이 정경희가 인식하고 있는 조선 후기 사회이다. 이 안에서 정경희가 바라 본 정조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버지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정조는 어린 소년이었다. 조선국왕 자리를 이을 세손 신분에서 생명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이런 어린 정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할아버지 영조를 계승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극에서 묘사되듯이 어린 시절 정조는 살아남기 위해서 오로지 학문에만 매달려야만 했을 것이다.

영조는 당대 최고 성리학 지식인들로 구성된 조선의 관료들을 상대로 학문적 스승으로서 위치를 유지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다졌다. 할아버지 영조가 그러했듯이 정조 역시 그 길을 가야했다. 다른 선택은 없다. 여기에서 정조는 두가지 모습을 보인다.

하나는 할아버지 영조 계승자로서의 모습이다. 명에 대한 의리론에 기초한 소중화 이념 수호자로서 조선 국왕 모습이다. 그러나 동시에 당대 최고 학자로서 정조는 중국과는 다른 조선 역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모습 역시 나타난다.   

정경희 연구에 따르면 정조는 명에 대한 의리론을 계승하는 범위 안에서 단군 혹은 하늘에 대해서 국가적인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다. 정조는 기자 정통론과 성리학 이념에 대한 수호자로서 조선 군주라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단군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정조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 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경희가 주목하고 있는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먼저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사당인 삼성사와 관련하여 정조가 한 민족 역사에서 단군의 위치에 대해서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  

[ 본 사당(삼성당) 의 체모가 숭인전(崇仁殿)과 일반이기는 하지만, 기자(箕子)는 동방으로 와서 임금이 되었고 단군은 요(堯)와 나란히 서서 임금이 되었으니, 맨 먼저 나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운 업적을 상고해 보면 높여 받드는 절차에 있어 기자보다 더욱 존경하는 것이 합당하다.  정조 13년 6월 6일 ]

현대의 한국인들은 홍산 문명의 우하량 여신 사당의 원형 천제단이나, 여타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서 한민족이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조 역시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고고학 자료가 없던 당시에 문헌 자료만을 통해서 올바로 역사를 인식한 것이다. 정조의 학문적인 깊이가 성리학 이외의 여타 학문에도 폭넓고 광범위 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교사(郊祀)하던 원구단(圜丘壇)이다. 예(禮)에 사서인(士庶人)은 오사(五祀)에 제사할 수 없고, 대부(大夫)는 사직(社稷)에 제사할 수 없으며, 제후(諸侯)는 천지(天地)에 제사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오직 기(杞)·송(宋)·노(魯)나라만이 제후로서 제사한 것은 혹 대국(大國)의 후손이거나 혹은 원성(元聖)의 공로로 인해서였다. 우리 동방은 나라를 세운 것이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역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쌓아 제천(祭天)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에도 모두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대국에서 분모(分茅) 를 받지 않았고 크게 참람하기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혐의를 구별하고 미세함을 밝히는 뜻이 엄하여 원구단의 예가 혹 소국(小國)에서 감히 지낼 제사가 아니라 하여 세조(世祖) 이후에는 원구단의 호칭을 남단이라 고쳐 일컫게 되었으니, 대개 군국(郡國)·주현(州縣)에서는 각기 풍사(風師)·우사(雨師)에게 제사지내는 제도를 쓴 것이다. 정조 16년 8월 12일 ]

▲중국 하남시 상구시에 있는 기자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이 지역을 답사하여 어렵게 기자묘를 찾아낸 바 있다. 국내 중화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인 기자를 조상으로 삼아 숭배했다. 이를 위해서 역사조작도 서슴치 않았다. 북한 평양에 기자묘까지 만들어 그곳이 중국 사료에 나오는 기자가 중국 주나라 책봉받고 온 곳이라고 선전했다.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 앞서 중화사대주의 사관이 우리역사를 먼저 파괴한 사례다. 이 덕에 민족사 정통뿌리, 단군은 찬밥신세가 된다(편집인 말).

 

정조는 고대 한민족 국가들이 중국으로부터 분모(分茅)된, 즉 제후로서 책봉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조선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하고 있다. 기자가 아닌 단군을 한 민족의 국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민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민족이라는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원구단圜丘壇의 원圜이 하늘을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 초에 남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던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풍우뇌신제라고 하는 성리학 안에서 허용된 범위 안에서 국가 제천행사의 격을 높임으로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군 이래 전통을 되살리려 한 것이다. 과연 정조는 우리 고유 사상에 대해서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정경희는 흥미있는 주장을 제기했다. 정경희에 따르면 정조는 천부경을 인지하고 있었고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사에 대한 치제문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조선 정조 5 년의 신축(1781) 삼성사 치제문에 이르기를 '빛나는 단군께서 我東'에 처음 나시니 덕이 신명에 합하였다. 천지개벽을 누가 능히 열수 있었으리 오직 二聖이 있어 상스러움을 발하시어 크게 明命을 받으셨다. '천부보전(天符寶篆)이 비록 징험할 바 없지만 신성들이 서로 이었고 동사에 칭하는 바이니 세상에 전해진 지 그 몇 해인가(여말 학계와 천부경,정경희 선도문화 6집)]

19세기 성리학자 기정진奇正鎭이 천부경을 연구하였고 기정진이 천부경을 언급할 당시 전비문篆碑文 천부경이라고 칭했다는 것이 후세에 전한다. 이러한 점을 볼 때에 삼성사 치제문에 나오는 천부보전(天符寶篆)을 천부경으로 본 정경희 주장은 타당하다.

삼성사 치제문은 비록 정조가 적은 글은 아니나,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 지내는 삼성사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던 정조가 주도해서 만든 치제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상에서 정경희 교수 시각으로 정조를 다시 한번 재조명해 보았다.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조선 후기 상황에 대해서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당시 통치자였던 정조는 올바르고 뚜렷한 역사 의식이 있었다. 

민중들 역시 본능적이긴 하지만 우리 고유 사상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오래 전에 멸망한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거나, 혹은 한반도에 오지도 않은 기자를 국가의 시조로 존숭한다거나 하는 터무니 없고 실익도 없는 이념이 국시가 되는 이런 상황은 어떤 것일까? 하고 말이다.

이 의문에 답하기 전에 정조가 처했던 시대상황과 오늘날 우리들 모습을 한번 대비해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터 자신의 역사관을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했던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이것이 개인 문재인이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이라면 이는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올바른 역사관이다.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혁명가, 투쟁가이면서 동시에 역사가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인식했던 한민족 상고사는 중국과는 독립된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역사이고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정조가 가지고 있던 역사 인식과 부합한다(정경희 교수 선사연구 취재2부 끝).(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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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수' 정조가 정약용에게 '지옥 훈련 캠프 입소'를 명한 이유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19.02.08 09:43 수정 : 2019.02.19 18:20

1792년(정조 16년) 10월30일 창경궁 춘당대에서 벌어진 활쏘기에서 50발(10순)중 49발을 맞힌 정조의 활쏘기 점수를 기록한 오재순의 ‘고풍’지. 활은 1순에 5발씩 모두 10순에 걸쳐 쐈는데, 세부점수도 기록했다. 즉 과녁의 정가운데에 맞으면 2분(점)을 부여하는 ‘貫(관)’, 주변에 맞으면 1점인 ‘변(邊)’으로 기록했다. 예컨대 정조가 쏜 제1순(巡)의 세부점수는 ‘변(1점)·관(2점)·변(1점)·관(2점)·관(2점)’이어서 8분(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제10순째는 4발만 쏘고 마지막 한 발 자리는 공란으로 비워두었다. 정조는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므로 남보다 앞서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일부러 마지막 발을 쏘지 않거나 빗맞혔다. 당대 사람들은 이를 두고 ‘겸양의 미덕’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김문웅씨 제공 자료

50발중 49발 명중이 모두 10차례. 한번은 100발 쏘아 98발 명중….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나 태조 이성계의 활솜씨가 아니다. 문체반정을 주창한 문예군주라는 정조 임금의 활쏘기 솜씨이다.

정조의 활쏘기 점수가 다름아닌 <정조실록>에 아주 자세히 기록됐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정조실록>을 보면 정조는 1792년(정조 16년) 10~12월 사이 춘당대에 출근하다시피 해서 활쏘기 행사를 벌인다. 왜 유달리 이무렵에 집중된 것일까. 정조는 “과인이 활쏘기를 원체 좋아했고 그것이 가문의 법도여서 젊은 시절에는 즐겼지만 최근 10~20년 사이에는 거의 하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1792년 10월12일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밝혔다.

<정조실록>을 보면 10월에는 32발(17일)~47발(26일)이던 것이 30일 49발이 된 이후 가히 신궁의 경지에 올랐다. 박제가의 ‘임금의 활쏘기 기록(御射記)’을 봐도 10월 30일 이후 12월22일까지 50발 중 49발을 맞춘 회수는 무려 10회에 달한다.(<정유각전집>) 특히 12월27일에는 10순이 아니라 20순, 즉 화살 100발을 쏘아 98발을 맞추는 기염을 토한다. 이것까지 치면 ‘49발 명중’은 12회라 할 수 있다.

 

■일부러 1발을 쏘지 않은 이유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길 법하다. 왜 만점(50발 명중)은 없는 것일까. 왜 번번이 한 발이 빗나갔을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10월30일에도 정조는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50발 중 마지막 발은 쏘지 않고 남겨두거나 일부러 빗나가게 했다.(<정조실록> <홍재전서>) 정조는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니 남보다 앞서려고도 하지 않으며 사물을 모두 차지하려 기를 쓰지도 않는다”(<홍재전서>)거나 “활쏘는 사람들의 예법은 본래 1발을 빼고 49발을 쏘는 것”(<정조실록>)이라고 했다.

박제가(1750~1805)는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임금의 활쏘기 솜씨는 하늘이 내린 것이며, 50대를 쏘는데 번번이 1대씩 빠뜨린 것은 겸양의 미덕’이라 입을 모았다”고 전했다.

이 대목에서 박제가는 “문무를 겸비한 우리 성상(정조)은 백왕을 뛰어넘으셨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랬다. 정조를 밤새도록 책만 읽고, 보고서만 읽은 공부중독, 일중독의 군주로 알기 쉽지만 절대 문약(文弱)에 빠진 임금이 아니었다.

정조는 과거를 앞둔 유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재시(再試)의 책문(일종의 논술고사)으로 ‘문과 무의 겸비에 대해 논하라’고 해놓고 “문과 무의 병용이야말로 국운을 장구하게 하는 계책”이라는 지문(제시문)을 내기도 했다.

정조의 어필 소감문. “활 쏘는 기예는 바로 우리 가법”이라면서 “(내가 선물을 내려 덕을 베풀었으니) 자네들도 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줄 것을 권하고 싶다. <시경>에 ‘덕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다. 이에 다툼이 있지 않으니 왕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한 바로 그 뜻이다”라 했다. 또 끝에는 “이날 등불 아래서 생각나는 대로 쓴다(是日燈下漫題)”는 내용도 담겨있다. 맨 왼쪽에 ‘반숙마(길들이지 않은 말) 1필’을 하사한다는 내용도 적혀있다. |김문웅씨 제공

■아버지(사도세자)를 빼닮은 정조의 무인기질

즉위하는 순간 ‘아! 난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라고 선언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쏙 빼닮아 무인기질을 이어받았던 것 같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특히 북벌론을 개진하며 국방력을 키운 효종을 특히 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1736년(영조 12년) 당시 세자로 책봉된 사도세자를 보고 당대의 연신 조현명(1690~1752)은 “저하(邸下·사도세자)가 효종의 모습을 매우 닮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종묘 사직의 끝없는 홍복”이라고 치켜세웠다.(<정조실록> 1789년 10월7일자 ‘장헌대왕’ 지문)

아닌게 아니라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무예 및 군사놀이에 심취했다. 15~16살 때 이미 힘깨나 쓰던 무사들도 움직이지 못한 청동도와 쇠몽둥이를 들고 자유자재로 돌렸다.

“효종도 일찍이 무예를 좋아해서 한가한 날에 말을 몰아 무예를 시험하곤 했다. (사도세자도)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해 화살을 손에 쥐고 과녁에 쏘면 반드시 목표를 정확히 맞혔고 고삐를 잡으면 나는 듯이 능숙하게 말을 몰았고 사나운 말도 잘 다루었다.”(<정조실록> ‘장헌대왕 묘지문’)

■“동궁(세손)이 알 필요가 없다”는 세가지

정조의 신궁(神弓) 솜씨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피를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다. 정조가 무예를 닦을 수밖에 없었던 말못할 이유가 또 있었다. 평생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조의 세손시절 정권을 장악한 세력은 노론이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동궁(정조)은 세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이다. 즉 1775년(영조 51년) 11월 20일 노쇠한 영조가 전현직 고위관리들을 불러 “내 요즘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운을 뗀 뒤 “어린 동궁(정조)에게 나라를 맡길 것이 걱정된다”고 한숨을 쉬었다.

<정조실록>에는 “정조가 50발을 다 쏜 다음 덤으로 작은 가죽 과녁(小小皮革)을 쏘아 제1순에 5발 모두 명중해서 7점(관 2발, 변 3발)을 얻었고. 유엽전 1순(5발)을 쏘아 5발을 다 맞히고 6점(관 1발, 변 4발)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번에 공개된 오재순의 ‘고풍’에도 똑같은 내용이 들어있다.|김문웅씨 제공

“어린 세손이 노론을 알겠는가? 소론을 알겠는가? 남인을 알겠는가? 소북(少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는가? 조사(朝事·조정 일)를 알겠는가? 병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 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난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그것을 보고 싶다.”(<영조실록>)

그러자 세손의 외종조부이자 좌의정 홍인한(1722~1776)이 모골이 송연한 발언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이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조정 일도 알 필요 없습니다.”

노론 벽파에 가담해서 정조의 즉위를 막으려 한 홍인한은 ‘정사는 우리(노론)가 알아서 할테니 임금(영조)나 동궁은 가만 계시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기가 막힌 영조는 “내 뜻을 경들이 몰라 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는 등 참담한 심경을 토로하며 한참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모두 물러가라”고 했다. 영조는 “정녕 내 사업을 손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말이냐”면서 “지금 난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도 못한다”고 한탄했다.

■정조 암살 미수 사건의 내막

이렇게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끊임없는 살해위협에 시달렸다.

“적도(賊徒)와 역당(逆黨)들이 흉모를 빚어내고 얽어내어 위태롭게 만드니…난 낮에는 마음을 졸이고 밤에는 방 안을 맴돌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좌우에서 몰래 엿보는 무리 때문에…옷을 벗고 편안히 잠을 자지도 못했다.”(<존현각일기> 1775년 윤10월5일)

정조는 그로부터 4개월 뒤인 1776년(영조 52년) 3월 영조의 승하 후에 천신만고 끝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렇게 왕위에 올랐지만 살해위협이 줄어들기는커녕 실제 소름끼치는 암살미수사건까지 벌어졌다.

즉위한지 1년4개월 후인 1777년(정조 1년)7월 28일 밤 정조가 책을 보고 있던 존현각(정조의 침전)의 회랑 위를 따라 자객이 침입한 것이다. 사상초유의 정조 암살 미수사건이었다. 이것은 아버지 홍지해를 귀양 보낸 정조에게 불만을 품은 홍상범 등이 주축이 되어 정조를 시해한 뒤 장조(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 이찬(1759~1778)을 추대하려 했던 역모사건이다. 이런 황당한 사건이 왜 벌어졌을까.

김문웅씨가 공개한 정조와 오재순의 ‘고풍’ 자료. 1792년(정조 16년) 10월30일 정조가 신하들과 활쏘기를 해서 50발 중 49발을 맞춘 뒤 검교제학 오재순이 올린 ‘고풍’에 써준 어필 자료다. ‘고풍’은 활을 명중시킨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고풍에는 제1순부터 10순까지 정조의 활쏘기 점수가 각 발마다 기록됐다. 정조는 50발 중 49발을 맞췄고. 점수는 72점(분)이었다.|김문웅씨 제공

■병권은 노론과 무반가문의 손에

정조가 즉위할 무렵 조선의 군대(5군영)는 오랜기간 형성된 무반가문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군영은 특정 정파, 특히 노론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군영의 운영의 전권을 갖고 있는 군영대장의 임용에도 각 정파와 척리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정조도 어쩔 수 없었다. 예컨대 정조는 즉위 후에도 아버지 사도세자 사건 당시 포도대장이었고 홍인한과 함께 ‘음흉한 꾀를 부린 역적’으로 지목된 구선복(?~1786)을 ‘어쩔 수 없어서 울분과 원통함을 참으며(含痛齎憤)’ 군영대장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실록> 1791년 6월5일조)

예컨대 1786년(정조 10년) 역적죄로 능지처참을 당한 구선복의 일당을 탄핵한 사간원 정언 조진택은 “역적 구선복이 30년 동안이나 포도대장직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보통의 무사들에게 무종(武宗·무예의 종주)라 자칭하면서 무리를 모았다”고 극렬하게 비판했다.

즉위 후 정조는 자신이 임명하는 병조판서를 통해 군권을 통제하려 했다. 지금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는 훈련도감과 금위영, 어영청 등의 제조(책임자)를 겸한 군권의 핵심관리였다. 그러나 당대 병조의 인사권은 제한적이었다. 휘하 각 군영에서 단지 한사람의 후보자만 추천해서 올렸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한사람 추천하니 병조판서는 도장만 찍으라는 격이었다.

정조는 즉위 후 해당 군영에서 후보 1명이 아닌 3명을 추천하라고 했다. 후보 3명 중 1명을 낙점하면 그래도 병조판서가 적임자를 거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 군영의 대장이 이미 노론과 연계된 무관들이 독점하다시피한 상황에서 제도개선만으로 해결하기는 힘들었다.

정조는 즉위 후 호위부대인 숙위소를 만들고(1777년·정조 1년), 그것도 모자라 훈련도감 출신 무사와 무예별감으로 장교를 지낸 30명을 선발해서 장용위(1785년·정조 9년)를 출범시켰다. 처음에 정조의 호위부대로 출범한 장용위는 장용영으로 이름을 바꿨으며(1788년) 훗날 5000명이 넘는 대부대(1794년)로 발돋움했다. 호위부대인 선기대(善騎隊)와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경군(京軍), 경기도 일대에 편제된 향군(鄕軍) 등으로 구성됐다.

문무의 겸비가 국운을 흥성하게 할 계책이라고 믿은 정조가 1794년(정조 14년) 편찬한 <무예도보통지>.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장용영 장교 백동수 등이 정조의 명을 받아 편찬했다.

■다산은 왜 10일간 ‘해병대 캠프’에 입소했을까

아버지(사도세자)를 닮아 무인의 자질을 이어받은 정조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활쏘기를 비롯한 무예연마에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무의 겸비가 국운을 장구하게 하는 계책’이라는 지론을 갖게 된 정조는 무신은 물론 문신들에게도 ‘무예를 연마하라’고 다그쳤다. 하기야 스스로를 ‘군사(君師)’, 즉 만백성의 군주이자 스승이라고 생각한 정조가 아닌가.

정조는 37살 이하의 당하관(정 3품 이하) 중 글재주가 있는 문신을 선발해서 공부시키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친히 시험문제를 내어 성적을 가르는 이른바 초계문신제도를 두기도 했다. 정조는 이들에게 “내가 만약 먼저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신하들이 공부할 수 있겠느냐”면서 “그러나 난 원래 공부를 즐겨서 하루종일 해도 피곤한 줄 모르겠다”고 했다. 이런 말을 듣고 공부하지 않는 신하들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정조가 그토록 총애했던 다산 정약용도 정조가 친히 출제한 시험에서 낙제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다산은 재시험, 3시험을 치뤄 겨우 1등에 해당되는 ‘상중(上中)’의 점수를 받아 체면치례했다.(<일성록> 1790년 6월8일자)

그런 다산에게 정조가 또한번의 굴욕을 안긴 사례가 있었으니 바로 ‘활쏘기’였다.

다산은 <여유당전서> ‘북영벌사기(北營罰射記)’에서 굴욕사건의 전말을 전한다. ‘북영벌사기’는 문자 그대로 ‘북영(창덕궁 서쪽 훈련도감 본영)에서 벌로 활쏘기를 한 기록’이다. 때는 1791년(정조 15년) 9월 어느 날이었다.

정조는 창경궁 춘당대에서 규장각 신하들에게 웅후(곰을 그린 과녁)을 10순(50발)을 쏘라고 명했다. 그러나 다산을 비롯한 7명이 50발 중 단 4발도 맞추지 못했다. 이런 경우엔 정조가 벌주(罰酒) 1잔씩 내려줘야 했다. 그러나 정조는 “벌주를 내리는 것은 그대들에게 오히려 상을 내리는 것”이라면서 다산 등 낙제점을 받은 7명에게 10일 간의 ‘북영 입소’를 명했다.

“문장은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文武)를 갖춘 재목이 아니다. 의당 그대들을 북영(北營)에 잡아놓고 하루에 20순(화살 100개)씩 쏘아서 매 순마다 한 발씩은 맞힌 뒤에야 풀어주겠다.”

100개 중 최소한 20개는 맞출 때까지 풀어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북영 입소’라면 지금으로 치면 ‘해병대 캠프 입소’가 아닌가.

졸지에 북영(훈련도감 본영)로 끌려간 다산은 이때의 생고생을 생생한 필치로 토로한다.

“벌로 북영에 가서 활을 당겨야 했다. 처음엔 활이 망가지고 화살은 굽었으며, 깍지(활을 쏠 때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끼는 기구)는 떨어져 나갔다. 팔찌(활을 쏠 때 왼팔 소매를 걷어 매는 띠)는 질질 끌렸으며, 손가락은 부르트고 팔뚝은 부어올랐다.”

화살만 쏜게 아니었다. 다산은 “말 타는 솜씨가 서툴러서 사람들이 얼마나 웃어대는지…”하고 부끄러워 했다.

■‘성인을 만나 활쏘는 법까지 배웠네’

그러나 며칠간 피나는 연습을 한 덕분에 점점 능란해졌다. 1순(5발)을 쏘면 3발을 맞히는 때가 많았다. 정조는 예서 멈추지 않았다.

“이젠 하루에 10순씩(50발) 쏘고 남는 시간에는 경서의 뜻을 연구하라”면서 <시경>과 관련된 문제를 800조목 내린 뒤 “조목별로 답안을 작성해서 올리라”고 지시했다. 신하들을 이렇게 들들 볶을 수가 있을까. 활쏘기에 경전 공부에 800문제 시험까지….

다산은 그렇게 10일간 훈련하고 나서야 겨우 북영에서 풀려났다. 다산으로서는 섭섭할만 했다. 자신을 그토록 총애했던 정조가 안면몰수하고 합숙유격훈련까지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캠프에 다녀온 다산은 오히려 “난 행운아였다”는 정조의 처사를 고마워했다.

“옛 사람들은 육예(六藝)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유자(儒者)라고 이름 붙일 수 없었다. 그래서 연회 때는 반드시 활쏘기를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문(文)을 귀히 여기고 무(武)를 천하게 여기게 됐다. 어려서부터 지필(紙筆)을 익혀 먹을 다루고 편지글이나 쓰는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평생 동안 활을 잡아 보지도 못하고 늙는 자가 있다.”

다산은 “그런데 지금 우리 몇사람은 성인(聖人·정조)의 세상에서 태어나 성인의 문하에서 노닐며 화살 쏘는 법까지 이 얼마나 천고에 한번 만나는 행운이냐”고 한상 말아올렸다. 그 뿐이 아니었다. 다산은 “360일 중에 단 10일만 훈련해도 이 정도인데 여태껏 뭐하고 있었을까”하면서 “임금의 가르침을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배웠으니 이것은 우리의 죄”라 자탄했다.

■‘고풍이요’ 소리치면…

교지연구가 김문웅씨(79)가 지난 6일 경향신문에 공개한 ‘고풍’지는 문예군주로 통했던 정조의 ‘무예군주’ 풍모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정조가 처음으로 50발 중 49발을 맞춘 1792년(정조 16년) 10월30일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특히 정조가 49발을 맞힌 다음 ‘내 활쏘기 솜씨가 가문의 법도’라는 점을 한껏 자랑하는 어필 소감문이 실려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시간을 227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활 쏘는 기예는 바로 우리 가문의 법도(家法)여서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데…내가 장난삼아 ‘49발 맞히면 그 때 가서 고풍(古風)을 청하라’ 했거늘 오늘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수와 맞아 떨어졌기에….”

1792년(정조 16년) 10월 30일 정조가 창경궁 내 춘당대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한 결과 50발 중 49발을 과녁에 맞혔다. 점수는 72점(분)이었다. 과녁을 맞추면 1점, 정곡(과녁의 한가운데)를 맞히면 2점이었으므로 49발 중 23발이 정곡을 꿰뚫은 것이다. 정조의 화살 49발이 과녁을 맞히자 ‘고풍(古風)이요’ 하는 외침이 울려퍼졌다.

■못 이기는척 선물을 하사한 임금

고풍(古風)은 활을 명중시킨 임금이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임금과 함께 활을 쏘던 신하들이 ‘고풍이요(상을 내려달라)’고 외치면 임금은 못이기는 체하고 여러 상품을 하사했다. 즉 신하가 먼저 임금이 쏜 화살의 점수를 자세하게 적어 ‘고풍’을 올리면 임금은 하사하는 선물명을 써서 내리거나 ‘후과(後課·선물은 나중에 정하겠다는 뜻)’라 써서 내려주었다. 선물명을 쓴 경우에는 즉석에서 임금의 ‘느낀 바’를 신하의 고풍지에 쓰기도 했다.

김문웅씨가 공개한 자료는 바로 그 날 정조 임금이 화살 50발 중 49발을 맞힌 뒤 당시 검교제학 오재순(1727~1792)의 ‘고풍’에 한껏 가문의 활솜씨를 자랑하며 손수 써준 어필이다. 물론 이 자료는 <정조실록> 1792년(임자년) 10월 30일자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오재순이 올린 ‘고풍’지에도 정조가 쏜 화살 점수가 차례로 기록돼있다. 임금이 쏜 유엽전(柳葉箭·촉이 버드나무 잎처럼 생긴 화살) 10순(巡·1순이 5발이므로 50발) 중 49발을 맞혔고 점수는 72분(점)이라 했다.

맨처음 5발을 쏜 제1순(巡)에서는 관(貫·과녁의 한가운데 정곡)에 3발, 변(邊·주변)에 2발 맞아 8분(점)을 기록했다. 제2순은 관에 2발, 변에 3발 맞아 7분(점)이었다. 이렇게 제10순까지 정조가 과녁의 어떤 부분을 맞혔고 각 순별 점수가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록돼있다. 정조는 10순(50발)을 다 쏘고도 만족하지 않았다. <정조실록>과 오재순의 ‘고풍’지는 “10순이 끝난 뒤에도 정조는 작은 가죽 과녁을 쏘아 1순에 다섯 발을 명중해서 7점(관2발, 변3발)을 얻고, 또 유엽전 1순을 쏘아 다섯 발을 맞히고 6점(관 1발, 변 4발)을 얻었다”고 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 ‘활쏘기와 활얹기’. 오른쪽 위 사람은 화살에 뒤틀림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고 그 아래 사람은 활을 얹고 있다. 왼쪽에서는 교사장이 상투올린 청년에게 활쏘기를 가르치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활쏘기는 가문의 법도다”

정조는 오재순의 ‘고풍’에 손수 쓴 글에서 “원래 활쏘기는 우리 가문의 법도”(射藝卽我家法也)라 어깨를 으쓱댔다. 그러나 10여년 동안 쏘지 않다가 최근 팔힘을 시험해보려고 몇차례 10순(50발)씩 쏘았는데 40여발씩 명중시켰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경(신하)들이 축하의 글을 올리기에 장난삼아 ‘그래 내가 49발까지 맞히면 그때가서 고풍을 청하라’고 했다. 그런데 마침내 오늘(10월30일) 명중한 화살수가 약속한 숫자(49발)와 맞아 떨어졌으니 선물을 내리려 한다.”

정조는 참석한 각신(규장각 관리)들에게 반숙마(길들이지 않은 말) 1필씩 하사하고 검서관(규장각 5급이하) 이하 관리에게는 차등있게 선물을 내렸다. 오재순은 현종의 셋째딸인 명안공주(1667~1687)의 손자로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냈고 학문에 뛰어나 제자백가에 두루 통했고, 특히 <주역>에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정조는 그날 평소 총애하는 인물인데다 참석자 중 맨머리에 있던 오재순에게 특별히 임금의 소감문을 써준 것으로 보인다.

<대사례도> 중 ‘어사도’. 1743년(영조 19년) 윤 4월7일 거행된 ‘대사례’ 중 임금이 활 쏘는 모습을 담은 ‘어사도’이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이번에 공개된 ‘고풍’지를 보면 오재순에게 ‘반숙마 1필 하사를 약속한다’는 증서(馬帖)와 함께 직접 어필로 소감을 써주는 특전을 배풀었다. 정조는 글의 말미에 “이날 등불 아래서 생각나는 대로 쓴다(是日燈下漫題)”고 썼다. 물론 <정조실록>과 김문웅씨의 공개자료에 똑같이 등장한다. 정조의 글내용 중 특히 주목되는 내용이 있다.

“(경들이) 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줄 것을 권하고 싶은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덕(德)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이에 다툼이 있지 않으니 왕의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는데 바로 그 뜻인 것이다.”

김문웅씨는 “활쏘기 후에 고풍(선물)을 내림으로써 덕을 베푼 정조는 여전히 세력을 떨치던 노론 벽파에게 <시경>을 인용하면서 ‘바른 마음으로 조정에 서서 임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문예 뿐이 아니라 무예군주도 자처한 정조라는 임금 밑에서 들들 볶이며 신하노릇 했던 이들은 얼마나 피곤했을까. 하기야 똑똑한 군주 밑에서 똑똑한 신하가 나는 법이다. 그런 임금과 신하가 만나 서로 존경하고 믿으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경우를 ‘어수지계(魚水之契)’라 한다. 물고기가 좋은 강물을 만나 활발하게 헤엄칠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2)

<참고자료>

김준혁, ‘사도세자와 무예’, <사도세자 서거 250주기 추모 특별기획전 ‘사도세자’ 도록>, 수원 화성박물관·용주사효행박물관, 2012

배우성, ‘정조의 군사정책과 무예도보통지 편찬의 배경’, <진단학보> 제91권 91호, 진단학회, 2001

송일훈, 진윤수, 안진규,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정조대왕의 궁술. 무의 신체지’, <한국사회체육학회지> 제30권 30호, 한국사회체육학회, 2007

이방섭, ‘정조의 장용영 운영과 정치적 구상’, <조선시대사학보> 제53권 53호, 조선시대사학회, 2010

김형국, <활을 쏘다-고요함의 동학, 국궁>, 효형출판, 2006

 

 

 

정조 ‘문체반정’에 대한 학계의 두 평가

“책과 사상을 탄압” “노론 견제 노림수”

기자강성만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2-14 14:16

문체 오염 내세워 중국서적 수입 금지
성리학에 어긋나는 이단적 사유 색출

 

조선 22대 왕인 정조(1752~1800)에게는 ‘개혁군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규장각을 설치해 문예부흥을 이끌고 서얼을 등용해 신분 차별의 완고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또 시전 상인의 독점적 상업특권인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해 기득권 세력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 모두가 ‘개혁’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 문장을 잡문체라고 규정하고 전통적인 고문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문체 오염을 이유로 중국으로부터 고증학과 패관소설 등 명말청초의 문집을 포함해 모든 서적의 수입을 금했다. 주자학적 세계관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유와 지식을 담은 명말청초 서적들이 금서로 묶여 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연구자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는 지난해 펴낸 책 〈안쪽과 바깥쪽〉(소명출판) 등에서 “정조는 책과 사상의 탄압자”로 기억될 뿐이라고 했다. 그는 문체반정의 본질을 “성리학에 어긋나는 이단적 사유를 색출한다는 것”이라며 정조는 그가 다스리는 세상이 가장 보수적인 정통주자학에 의해 완벽하게 작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도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문체반정은 문예부흥 정책의 내용과 성과를 부정하는 정조의 자기모순이요 자기부정이라고 규정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사학(邪學) 종식’이라는 정조의 명분을 앞세워 실학자 등 개혁 세력 탄압에 나선다. 때문에 정조 사후 전개된 “세도정치와 피의 민란”에 정조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힘들다는 게 김 실장의 견해다.

이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최근 펴낸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2〉(고즈윈, 각권 1만2800원)에서 다른 견해를 폈다. 그에 따르면 문체반정은 천주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면 탄압을 막고 당시 지배층인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조의 깊은 노림수가 담긴 방책이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노론과 대립하고 있던 남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 소장은 문체반정의 시발이 된 시점이 양반 출신의 두 천주교도가 부모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도는 ‘진산 사건’ 때와 같은 점에 주목했다. 천주교 금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을 우려한 정조가 대신 패관소품과 명말청초 문집을 비판하면서 정국의 물줄기를 돌렸다는 것이다. 천주교를 뜻하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청초 문집부터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천주교에 대한 전면 탄압을 피해 갔다는 것이다.

 
노론 잡문 적발로 천주교 탄압 막아중국 학문 기대는 조선 사대부 비판

이 소장은 문체반정으로 반성문을 썼던 관련자들이 모두 노론 가문 출신이었음을 강조했다. 자파 가문 출신이 문체반정의 대상으로 계속 적발되는 상황에서 노론이 더 이상 천주교 공격에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는 게 이 소장의 해석이다.

그는 또 문체반정을 ‘성리학적 세계관의 확고한 성채 쌓기’라는 해석에도 이견을 보였다. 중국 서적 수입 금지는 중국 학문에 기대는 조선 사대부들의 태도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또한 우리나라의 책을 읽는 것이 마땅하다”(정조, 〈일득록〉 5)는 것이다. 특히 정조의 고증학 비판은 그 이단적 사유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족이 장악한 청나라 지식인들이 현실을 비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현실과 무관한 고증학에 몰두하고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이 소장은 지적했다. “성리학자를 자처하는 조선의 사대부가 어찌 북벌에 뜻을 두지 않고 청나라의 고증학에 경도되느냐”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 소장은 정조가 박지원의 문체를 문제 삼은 대목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정조의 내심은 박지원을 크게 등용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는 박지원에게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편 지어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라고 요구한 뒤 “(그렇게 한다면)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했다. 문임은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을 뜻하는 요직이다. 박지원과 같이 과거를 거치지 않은 음관이 이 직위를 맡은 적이 거의 없으니 대담한 회유책인 셈이다. 이 소장은 또 박지원이 노론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면 아예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정조의 죽음과 동시에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다면서 그가 5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뀔 수 있었다고 마무리했다.(3)

 

 

 

684호

정조가 10년 더 살았다면

등록 2007-11-09 00:00 수정 2020-05-03 04:25

 

 

 

출판·드라마에서 ‘비운의 임금’ 신드롬… 시대 상황에서 비슷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일까

바야흐로 정조의 시대다. 200여 년 전 갑작스레 죽음을 맞은 조선의 왕은 서점에서, TV 화면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사람들은 그의 시련에 얼굴을 찡그리고, 그의 적들에 분노하며, 그에게 닥쳤던 갑작스런 죽음에 가슴 아파한다. 사람들은 왜 정조에 환호하는가. 정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서울 창덕궁 후원의 모습을 둘러보고, 그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의 촬영 현장을 찾아가봤다. 편집자

▣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창덕궁 낙선재를 오른쪽으로 스치고 지나 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얕은 언덕을 따라 오르니, 저만치 너른 연못과 그 주변을 감싸는 고졸한 전각들이 눈 안 깊숙이 밀려든다. 연못의 이름은 ‘부용정’(芙蓉亭)이고, 그 북쪽에 자리한 잘생긴 2층짜리 전각의 이름은 ‘주합루’(宙合樓)다. 엄밀히 말해 주합루는 그 전각 2층을 불렀던 말이고, 건물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 1층의 이름은 ‘규장각’(奎章閣)이었다.

아동도서까지 “정조 암살을 막아라”

 

규장각이 ‘규장각’이었던 것은 그것이 정조의 규장각이었기 때문이다. 1999년 를 써낸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정조는 왕의 글이나 왕실의 족보, 물품을 보관하던 작은 서고였던 규장각을 국내외 도서를 다수 소장한 왕립 도서관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젊은 인재들이 그곳에서 글을 읽고 정리하며 앞으로 왕과 함께 만들어나갈 미래를 준비했다. 그 인재들이 자라남에 따라 규장각은 도서관에서 연구소로, 연구소에서 왕의 비서실과 정책개발실과 감사실과 출판소로 기능이 점차 확장됐다. 규장각은 정조의 규장각이었고, 그랬기 때문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사멸했고,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왕의 화려한 귀환일까? 2007년 가을, 대한민국 대중이 가장 사랑하게 된 문화 아이콘은 207년 전 숨진 조선 22대 국왕 ‘정조’(1752~1800)다. 시중에 나온 정조 관련 문화 콘텐츠는 너무 많아 일일이 이름을 꼽기가 어려울 정도다. 문화방송에서는 9월17일부터 정조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 을 방영 중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정조의 말년을 그린 한국방송의 8부작 미니시리즈 은 지난 7월 호평을 받으며 방송을 끝냈다. 케이블방송 CGV에서는 ‘정조 암살 미스터리’ 을 11월17일부터 방송할 예정이다. 책으로는 서울 주요 서점들의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에 이름을 올린 작가 이상각의 와 소설가 김탁환의 정조 시대 3부작 완결판 이 눈에 띈다. 아동도서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은 ‘노빈손 시리즈’는 한국사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조다. 책 이름 는 정조에 대한 대중의 심리를 소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최근 불어닥친 ‘정조 신드롬’의 화룡점정이라 부를 만하다.

비운의 군주 정조를 가장 먼저 호출해낸 것은 소설가 이인화였다. 그는 1993년 쓴 에서 노론과의 세력 다툼에 밀려 죽음을 맞게 되는 ‘정조 상(像)’을 창조해냈다. 그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대중은 정조에 대해 지금과 같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시간 동안 한국 사회가 겪은 변화를 평가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는 아마도 ‘아쉬움’일 것이다. 1993년 이후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를 겪었고, 정권 교체를 이뤘으며, 정권 교체를 이룬 그 진보·개혁 세력이 10년 동안이나 한국 사회를 이끌어왔다. 그렇지만 빈부격차는 여전하고, 비정규직은 차별받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20 대 80의 사회’에서 ‘88만원 세대’로 살 것을 강요받고 있다.

 

정조, 노무현이 꾸는 꿈?

정조와 그 아버지 사도세자에 관해 여러 글을 남긴 역사학자 이덕일은 “정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그와 유사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정조는 비운의 임금이다. 사람들의 심리 속에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우리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있다.” 정조가 좀더 왕위에 머물렀다면 그가 키워낸 정약용, 이승훈, 이가환 등 깬 사고를 가진 남인들이 정승이나 판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들이 정조의 개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역사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이긴 해도,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보다는 좀더 피부에 와닿는 얘기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노무현의 개혁을 정조의 개혁과 연관짓기도 하고, 정조에 지나친 감정이입을 하기도 한다. 에서 정조를 연기한 탤런트 안내상씨는 “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좋아하게 됐으며, 내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그 아픈 부분을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조가 꿈꾼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부용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연못과 그 주변에는 정조가 가슴 깊이 묻어뒀던 통치철학이 담겨 있다. 정조는 1776년 3월10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즉위한 지 석 달 만에 정조가 내린 명은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과 부속 건물들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왕위에 오른 지 석 달 만에 내린 명인 만큼 세손 시절부터 준비하고 고심해왔던 일임이 틀림없다.

부용정은 반듯한 장대석으로 네모지게 조성했고, 가운데는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부용정을 돌아 주합루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로막는 문의 이름은 ‘어수문’(魚水門)이다. 여기서 물은 왕, 물고기는 신하를 뜻한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없듯, 신하는 왕의 뜻 안에서 살라는 정조의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왕이 중심이 돼 위민정치를 펼치는 조선의 계몽군주가 되려 했다. 어수문에서 바라본 주합루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듯 높고 가팔라 함부로 올려다볼 수도 없다. 신하들은 왕이 지나는 어수문을 사용할 수 없어 그 양옆으로 난 쪽문을 통해 허리를 굽실거리며 드나들어야 했다.

정조의 이상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노론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었다. 정조의 치세는 암살 기도로 시작된다. 보위에 오른 지 1년이 조금 지난 1777년 7월28일, 정조는 평소처럼 침소가 마련된 경희궁 존현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내시는 호위 군사들을 점검하러 나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궁에 자객이 침입했다. 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寶章門) 동북쪽에서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려왔고, 어좌(御座)의 중류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그를 암살하려고 한 사람들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홍계희 집안이었다. 자객들이 정조를 습격했던 경희궁 존현각은 이미 헐리고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건물 앞에는 정조가 상서롭다고 칭찬한 대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지나치게 독선적이지는 않았을까

후원 쪽으로 조금 더 나아간다. 부용정을 지나 5분쯤 걸으면 한반도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반도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반도정의 제일 북쪽 끝에는 ‘존덕정’(尊德停)이라 이름 붙은 잘생긴 정자가 있다. 그 안에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부른 정조의 글이 남아 있다. 만천명월주인옹은 ‘수많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이란 뜻이다. 뭇 개울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지만 달은 오직 하나이고, 그 달은 바로 정조 자신이고 신하와 백성들은 개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조의 태도는 당시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독선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지배했던 노론의 눈에 그런 정조의 모습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기자 이한우는 2007년 10월 펴낸 에서 “정조는 나름의 비전과 강력한 의지를 일찍부터 갖고 있었지먼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고, 자신을 뒷받침할 현실세력 또한 강력하지 못했다”고 썼다. 이한우의 정조 비판은 그대로 의 노무현 대통령 비판의 패러디인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18세기에 주목한다. 정조의 18세기는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사적인 격동기였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영국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을 썼다. 그 무렵 조선을 떠받치던 ‘주자학’이라는 유일 신앙 체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대 엘리트들인 남인과 북학파들은 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에 매료됐고, 그 새로운 사상의 힘을 빌려 세상을 개조하려 했다. 정조의 신하들은 총명하고 반듯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한 소장은 “한 시대가 지나고 다른 세대로 진입하는 18세기 문화 격동기와 지금의 모습이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정조의 개혁은 어떻게 됐는가. 그의 사후에 그가 벌였던 개혁 조처들은 할머니 정순왕후에 의해 철저히 무력화됐다. 규장각은 이름만 남았고, 화성은 방치됐으며, 장용영은 해체됐고, 천주교와 서학에 대한 엄청난 핍박이 몰아쳤다. 소설가 김훈은 둘째 권에서 “(남은 사람들은) 이단과 대역을 다스리는 형상에 으깨져 죽었거나 망나니의 칼에 베어졌고, 그 사체는 거리에 버려졌다”고 썼다. 정약용 같은 일부 신하들은 살아남아 먼 귀양길을 전전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름만 남은 규장각, 해체된 장용영

정조가 태어난 곳은 창경궁의 경춘전, 숨진 곳은 창경궁의 영춘헌이다. 두 전각 모두 순조 때 불타 지금은 본모습이 아닌 재건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정조가 죽던 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으며 양주와 장단 등의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가 하얗게 말라 죽었다고 한다. 정조가 독살당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10년 더 살았다면 우리나라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도 알 수 없다.(4)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사상 첫 해외이민 우리 문화재 '책가도'에 담긴 정조의 숨은 뜻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19.07.04 11:07

해외 영구반출이 결정된 ‘책가도’. 책가도는 중흥군주인 정조의 문체반정 의지를 담은 그림이다. 정조 임금 이후 책가도 병풍 제작이 크게 유행됐다. 이번에 반출이 허용된 책가도는 19세기말~20세기 초 제작된 그림이다. 반출된 책가도는 호주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제공

1만원권 지폐 앞면에 세종대왕의 초상화 뒤에 용비어천가의 ‘뿌리깊은 나무…’ 구절과 함께 심상치 않은 그림이 보인다. 바로 일월오봉도이다. 해와 달, 다섯봉우리, 소나무와 물 등을 그린 일월오봉도는 왕권의 상징이자 군왕의 분신이며 동일체로 여겨져 언제나 조선 임금의 어좌 뒤편에 걸려 있었다.

일월오봉도가 왜 왕관의 상지이자 국왕의 분신이라 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연구자들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시경>의 ‘천보’라는 시에서 묘사된 9가지 자연현상을 인용한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다섯봉오리는 하늘이 내린 왕을 보호하는 물체를 일컬고, 나머지 4개, 즉 해와 달, 소나무, 물 등은 통치자가 자신의 미덕을 발휘하는 법을 보여준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이 임금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월오봉도는 항상 왕의 뒤에 놓이고 죽을 때도 같이 묻는다고 한다. 병풍만 걸려있다면 완성된 그림이 아니고 반드시 왕이 앉아있어야 완성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1만원권 지폐에 세종대왕 초상화 뒤에 일월오봉도 병풍이 걸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1791년(정조 15년)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재위 1776~1800)는 군왕의 상징그림이라는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이른바 책가도(冊架圖) 병풍을 내걸었다. 책가도가 무엇인가. 책장과 서책을 중심으로 하여 각종 문방구와 골동품, 화훼, 기물 등을 그린 그림이다.

정조가 일월오봉도 병풍을 내리고 책가도 병풍을 건 이유가 무엇일까. 이때 정조와 신하들과의 대화가 실마리를 풀어준다. 정조는 책가도 그림을 내건 뒤 신하들에게 “경들은 보이느냐”고 물었다.

“보입니다.”

그러자 정조는 신료들을 놀리는 듯 하며 “경들은 이것을 진짜 책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림이다.”라며 일월오봉도를 내리고 책가도 그림을 건 이유를 밝힌다.

“정자(북송의 정이천·정명도 형제)가 이르기를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더라도 서재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이 그림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정조는 이 대목에서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글에 대한 취향이 나와 상반된다”고 장탄식한다.

“그들이 즐겨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글이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 그 사이에 이와 같은 뜻을 담아두기 위함이다.”

여기서 정조의 숨은 뜻이 드러난다. 정조가 책가도를 건 것은 바로 ‘후세의 병든 글’을 바로잡기 위해 단행한 문체반정의 예고편이었다. 정조는 문체의 성쇠흥폐는 정치와 통한다고 했다.

조선 후기 화가 이응록이 그린 <책가도>. 책 뿐이 아니라 출세를 상징하는 산호와 공작, 그리고 다양한 고동서화가 그려져 있다. |KBS ‘천상의 컬렉션’ 캡처

특히 서양학, 민간에서 떠도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모은 패관 잡문 그리고 명말청초의 문집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를 배격함으로써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했다.

단적인 예로 연암 박지원(1737~1805)에게는 “경박한 문체로 <열하일기>를 썼다”면서 반성문 제출을 요구했고, 상재생(생원 혹은 진사시험에 합격한 성균관 소속 유생) 이옥(1760~1815)의 과거(대과) 응시를 막기도 했다. 정조는 1787년(정조 11년)에는 서학교수 이상황(1763~1841)과 이조참의 김조순(1765~1832)이 예문관에서 숙직하다가 재미삼아 소설책을 본 것을 적발했다. 두사람이 읽은 책은 당송시대의 각종 소설류와 <평산냉연>이었다. <평산냉연>은 재주가 뛰어난 남자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의 혼인과정을 소재로 한 청나라 통속소설이다.

정조가 소설을 “이치에 어긋나고 사람에게 해를 주는 음란하고 사특한 음악이나 색깔 같은 것”으로 치부했으니 화를 낼만 했다. 정조는 문제가 된 불온서적들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는 이상황·김조순 등 두 사람을 파직시켰다.

정조는 이어 임금에게 올리는 대책문에 ‘상스러운 패관문자’를 올린 초계문신 남공철(1760~1840)을 엄히 문책했다. 패관문자는 정통 산문문체인 고문(古文)과 상대적인 개념의 가벼운 한문문체이다. 주로 소설이나 야담 같은 서사물이나, 생활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낸 소품문을 가리킨다. 길이가 짧고 주제가 가벼우며 감성적인 산문 문장을 일컫는다. 요즘이라면 젊은이들이 주로 쓰는 인터넷용어나 은어 등이 포함된 것이리라. 남공철을 향한 정조의 추상같은 꾸지람을 보라.

“명색이 각신(규장각 관리)이고 명문가의 아들(남공철은 정조의 스승인 남유용의 아들이다)이라는 자가 가훈을 어기고 임금의 명령까지 저버린채 불경한 문체를 쓰다니…. 저 자가 반성할 때까지 경연에 얼씬도 못하도록 하고 그 집안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하라.”(<정조실록>)

또다른 책가도 병풍. 필선 위주의 사물을 형상화하는 전통에 익숙했던 조선화원들에게 투시도법과 면으로 입체를 분석하여 명암을 넣은 서양화법의 책가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정조는 이런 그림에 익숙치않은 신료들에게 보여주며 ‘이거 책인줄 알았지 그림이야’라고 놀렸다.

남공철은 임금에게 올리는 대책문에 요즘으로 치면 젊은이들이 쓰는 신세대 용어와 문장을 쓴 죄로 곤욕을 치른 것이다. 그런 정조가 일월오봉도 병풍을 내리고 책가도를 내건 이유는 두가지였다. ‘내가 이런 한심한 세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으니 조심해!’라는 경고 메시지인 동시에 ‘너희들은 모름지기 이런 책을 읽어야 해!’라는 가이드라인의 의미도 함께 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책은 군주에게 무엇인가. 군주가 자신의 정치이념을 전파라는 도구이자 권력과 권위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정조는 책가도를 그리면서 구체적인 책 끝의 표제까지 지정했다.

그것이 ‘경사자집’이다. ‘경사자집’은 중국 육조시대에 비롯된 서적 분류법이다. 경은 경서(經書), 사는 역사책, 자는 ‘맹자’와 노자 등의 자서(子書), 집은 시(詩) ·부(賦) 등의 집(集)을 말한다. 제자백가 중에서는 오로지 장자 만을 포함시켰다. 그렇게 정조는 책가도 병풍을 내걸면서 책과 학문으로써 세상을 다스리겠다고 천명한 뒤 1년 뒤인 1792년(정조 16년) 문체반정을 시작했다.

 

사실 필선 위주의 사물을 형상화하는 전통에 익숙했던 조선화원들에게 투시도법과 면으로 입체를 분석하여 명암을 넣은 서양화법의 책가도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투시도법은 르네상스식 원근법으로 물상이 뒤로 물러나면서 점점 작아져 결국 점으로 모아지게 하여 깊이있는 공간감을 표현하는 원근법이다. 정조는 이런 그림에 익숙치않은 신료들에게 보여주며 ‘이거 책인줄 알았지 그림이야’라고 놀린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가도 병풍을 잘 그린 화가는 바로 단원 김홍도(1745~?)였다. 이규상(1727~1799)의 ‘일몽고’는 “김홍도는 서양의 화법을 모방했는데, 이 법을 따라 그린 그림을 한 눈을 감고 보면 그림 속의 모든 물건이 잘 정돈되어 서 있는 것 같이 보인다”면서 “세속에서는 이를 책가화라 칭하며 반드시 채색을 가했다”고 전했다.

이 책가도는 정조 임금 이후 잘난 체 하는 사대부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규상은 “귀한 신분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유식한채 했다”고 전했다. 가뜩이나 책을 좋아했던 조선의 사대부는 서양이나 중국에서처럼 그저 골동품 같은 온갖 물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책 위주의 책거리 그림을 그것도 2차원 병풍으로 항상 뒤에 두고 감상하면서 “나 이런 사람이오”하고 자랑했던 것이다.

책가도 그림은 민간에 퍼지면서 다양한 형태로 바뀌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관대작의 상징인 공작과 산호 등은 물론, 다산과 풍요를 의미하는 부처손과 석류, 포도, 오이, 수박, 가지 등과, 장수와 성공, 부부금슬 등을 뜻하는 잉어, 금붕어, 나비, 호랑이 등까지 책 뿐 아니라 다양한 그림을 책가도에 그렸다. 이와함께 안경, 알람시계와 같은 서양기물과 중국의 엣 서책과 유물 등 고동서화가 그림을 장식하기도 했다.

책가도는 이렇게 정조의 문체반정 의지에서 비롯되어 19~20세기 민간에까지 대유행한 그림이다. 그런 책가도 1점과 함께 연꽃을 주제로 그린 연화도 1점이 국내 문화재 가운데는 처음으로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외국에 영구 반출된다. 문화재청은 근대에 제작한 전통 회화 병풍 ‘책가도’(冊架圖·19세기말~20세기초)와 ‘연화도’(蓮花圖·20세기초)를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국립미술관으로 영구반출하기로 최근 확정했다.

문화재청은 “두 작품 모두 국내에서는 비교적 흔한 회화작품들”이라면서 “국내에 있기보다 국외에서 전시용으로 활용된다면 오히려 가치가 더 크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 두 그림을 확보한 빅토리아 국립미술관은 1861년 설립된 호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미술관이다. 미술관측은 미술관의 ‘한국실’이 중국실이나 일본실에 비해 전시품이 크게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해외전시가 가능한 한국 문화재를 조사한 끝에 이들 문화재 2점을 소장자로부터 정식구매한 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았다. 두 그림은 7월중 반출된다.

문화재보호법상 국내 문화재의 국외반출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그러나 외국 정부가 인증하는 박물관이나 문화재 관련 단체가 자국의 박물관 등에서 전시할 목적으로 국내에서 일반동산문화재를 구매 또는 기증받아 반출하는 경우,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반출할 수 있다.(5)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산'에서 '이성'으로 개명한 정조의 어처구니없는 이유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19.08.09 10:22 수정 : 2019.08.09 12:56

1846년(헌종 12년)에 간행된 <어정시운>. 주로 한시를 창작할 때에 운자를 찾아보는 사전으로 이용되었다. 산(示+示)자에 정조의 어휘(이름)임을 표시하고 난외에도 어휘임을 밝혔다. |안대회 교수의 논문에서

‘이산이 아닌 이셩(성)이라고?’ 최근 수원시가 설립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개최한 기획전의 제목이 ‘셩: 판타스틱 시티’이다. 수원이라는 도시를 상징하는 두 개의 성을 주제로 한다는 것인데, 하나는 ‘수원 화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셩(성)’이란다. 그런데 ‘이셩(성)’이 뭔가하면 조선의 제22대 임금인 정조(재위 1776~1800)란다.

혼란스럽지 않은가. 잘 알려진 정조의 이름은 이산(李示+示)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산’이라는 사극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정조대왕의 이름은 이산도 맞고, 이셩(성)도 맞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정조의 이름은 원래 이산이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예전에는 이름이 일종의 신성성을 지녔다. 일반 백성도 조상이나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보통은 자(字)나 호를 사용했는데, 상대방을 욕하고 싶으면 곧장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도 ‘그에게 모욕감을 안겨주는’ 효과를 얻었다.

일반 백성도 그럴진대 군주의 이름이야 말해 무엇할까. 군주의 이름은 재위 때는 어명(御名), 사후에는 어휘(御諱)라 했는데 휘(諱)자에는 사람의 이름이라는 뜻과 함께 ‘숨기다, 피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높은 사람의 이름은 감추고 숨기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정조가 즉위(1776년 3월10일)한 지 두 달 뒤인 1776년 5월22일 <정조실록>은 정조 이름과 관련해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영조 때 명신 홍계희(1703~1771)의 저작인 <삼운성휘>의 ‘경부(梗部)’. ‘셩(성)’에 서성의 이름자(삼수면에 省자)가 들어있다. <규장전운> 편찬 때 이 ‘성’자를 빼내고 그 자리에 ‘示+示’자를 넣고 ‘성’으로 읽도록 했다.|국립중앙도서관 제공

“호조의 산학산원(算學算員)을 주학계사(籌學計士)로, 이산(理山)은 초산(楚山)으로, 이산(尼山)은 이성(尼城)으로 고쳤다. 발음이 어명(御名)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슨 말일까. 정조 임금의 어휘, 즉 이름과 발음이 같은 평안도와 충청도의 이산을 초산(평안도)과 이성(충청도)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북한 자강도 초산군은 바로 정조의 이름과 같다(이산·理山)는 이유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됐다. 요즘의 산수와 수학을 담당하는 공무원인 호조의 산학산원(算學算員)을 같은 의미인 주학(籌學)과 계사(計士)로 각각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산(算)’ 자 역시 임금의 이름인 ‘산(示+示)’의 고어(古語)로 인식됐기 때문에, 주학이니 계사니 하는 대체어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즉 18세기 당대에 통용되던 자전에 따르면 정조의 이름(示+示)은 당연히 ‘산’으로 읽어야 한다. 당대 대표적인 자전은 <자휘>였다. 그런데 <자휘>는 “示+示의 음은 산(算)인데, ‘밝게 살펴서 헤아린다’는 뜻”이라 풀이했다. 또 후한 허신(58~147)이 한문의 내력을 집대성한 <설문해자>에서 인용한 <일주서>는 “선비가 나누어 밝히는 ‘示+示’이고, 균등하게 나누어 보여준다는 뜻인데, 산(算)으로 읽는다”고 했다.

19세기 문사인 옥산 장지완(1806~?)이 <규장전운>의 오류를 교정하고, 간행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한 <비연외초> ‘규장전운간오’의 내용. “정조의 이름을 처음에는 산(算)으로 읽었지만 고증을 거쳐 경부(梗部)에 소속시켰다…계란(界欄·인쇄의 판식)이 벌써 정해졌기 때문에 ‘셩(삼 수변에 省)’자를 삭제하고 어명을 채워넣었다. 왜냐면 ‘성’자는 서성의 이름으로 자손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라 했다.|장서각 소장

또하나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또 있다. 1781년(정조 15년) 정조는 박성원(1697~1767)의 편저인 <정음통역>에 직접 서문을 지어 내각에서 간행토록 했다. 그런데 정조가 직접 신하들에게 하사(內賜)한 간본 가운데 강이천(1769~1801)이 소장한 책을 보면 ‘산(算)’ 자 부분에 원래는 없던 어명 표시를 붓으로 하고, 상단에 ‘당저어휘(當저御諱·현재 재위중인 임금의 이름)’이라는 글씨를 써놓았다. 정조가 <정음통역>에 서문을 지은 것이 1781년이고, 그 책을 소장한 강이천이 죽은 해가 1801년이다. 따라서 ‘당저’, 즉 현재 재위중인 임금은 바로 정조를 일컫는다. 정조가 승하한 것은 1800년이었으니 말년까지도 정조의 이름은 ‘이산’으로 읽혔음이 틀림없다.

■‘이성’으로 둔갑한 정조의 이름

그렇다면 왜 ‘이산’이 아니라 ‘이성’도 맞다고 하는 것인가.

다름아닌 정조의 명에 따라 1796년 편찬된 <규장전운>과 옥편인 <전운옥편>, 그리고 <자전석요> 등에서 ‘示+示’자를 ‘셩’으로 읽었다는 것이다. 단모음화를 고려한다면 ‘셩’은 ‘성’이다.

궁금증이 생긴다. 정조 말년에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산’이 성’으로 바뀌었을까.

여기에 조선의 중흥군주이며, 세종에 버금가는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정조의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막무가내 조치’가 취해진다. 지금 생각해봐도 수수께끼 같은 일의 전말을 살펴보자.

‘만백성의 어버이이자 뭇 신하들의 스승’을 자처한 정조의 만기친람은 유명했다. 정조는 운서(韻書)에도 각별한 관심을 표명했다. 운서는 한자의 운을 중심으로 분류하여 일정한 순서로 배열한 자전이다.

정조는 창작의 기준이 되는 사전인 운서 제작에 힘을 쏟았다. 특히 1792년(정조 16년) 이덕무(1741~1793) 등에게 <규장전운>의 편찬을 명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교정과 교감을 보았던 <규장전운>은 4년 뒤인 1796년(정조 20년) 완성된다. 정조 시대 학문과 기술의 결정체로 평가할 수 있다.

■‘성’자를 빼내고 그 자리에 정조의 이름자를 집어넣은 이유

그런데 완성단계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당시 널리 통용되던 <삼운통고>나 <삼운어휘>, <정음통석> 등의 운서에서 ‘示+示’자는 들어있지 않았다. 왜냐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른바 벽자였던데다 ‘산(算)’자로 통용되어 그냥 ‘산’으로 읽으면 되었기에 굳이 운서에 넣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정조는 <규장전운>의 편찬이 마무리되어 판각까지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부랴부랴 ‘示+示’자를 포함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미 계란(界欄·인쇄의 판식·틀)이 벌써 완성되었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다른 글자를 빼고 임금의 이름자인 ‘示+示’자를 대신 채워 넣어야 했다. 이때 그동안 ‘산(算)’으로 읽었던 ‘示+示’를 갑자기 ‘경(梗)’부에 포함시켜 발음을 ‘셩(성)’으로 바꿨다. 이때 뽑혀나간 글자는 ‘셩(삼수변에 省)’자였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규장전운>은 조선왕조 운서의 근간이 되어 모든 독음의 표준이 되었다. 이후 편찬된 모든 서적에 이 독음이 적용됐다. 정조는 급기야 1796년(정조 20년) 8월11일 1만부에 달하는 <규장전운>을 인쇄했다. 이로써 1796년 8월11일을 기점으로 이전에는 ‘이산’이었던 정조의 이름은 이후에 ‘이성’으로 바뀌었다. 이후 조선에서 간행된 운서에서 ‘성(삼수 변에 省)’자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

1781년 정조가 친히 서문을 써서 내각에서 간행한 박성원 편저의 <정음통석>. 이 책은 본래 강이천이 소장한 것인데 한부(翰部)의 산(算)자에 표식을 가하고 상부 난 외에 ‘당저어휘(當저御諱·현재 재위 중인 임금)’라 기입했다. |안대회 교수의 논문에서

■자손 번성한 가문의 이름을 채갔다

그렇지만 하늘이 두쪽난다 해도 ‘示+示’는 ‘산(算)’의 고어이며, 따라서 정조의 이름은 ‘이산’으로 일컬어져야 한다. 그것이 자전과 운서의 상식이다.

그러나 안대회 성균관대교수(한문학)은 “대체 이 글자를 왜 셩(성)으로 읽어 경(梗)부에 집어넣고 굳이 기존의 셩(성)자를 뽑아버렸는지 그 학술적인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 다른 분도 아니고 조선의 중흥군주인 정조대왕이라면 누가봐도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야 한다.

이와 관련, 19세기 저명한 중인 문사인 옥산 장지완(1806~?)이 <규장전운>의 오류를 교정하고, 간행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한 <비연외초>·‘규장전운간오’를 보면 그저 헛웃음이 나온다.

“정묘(정조)의 어휘는 처음에 산(算)으로 읽었다…그러나 고증을 거쳐 경부(梗部)에 소속시켰다…계란(界欄·인쇄의 판식)이 벌써 정해졌기 때문에 ‘셩(삼 수변에 省)’자를 삭제하고 어명을 채워넣었다. 왜냐면 ‘성’자는 서성의 이름으로 자손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규장전운>의 편찬(1796년)을 계기로 정조의 이름(어명)을 ‘이산’에서 ‘이셩(성)’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사실 책(<규장전운>)의 판각이 완성된 상태에서 임금의 어명(示+示)을 새롭게 집어넣기로 했으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글자를 넣을 앞 뒤 전체 판식을 새롭게 짜서 특정한 부분에 포함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난관에 봉착해서 짜낸 묘안이 바로 아예 ‘특정 글자’를 완전히 빼버리고 그 자리에 집어넣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셩(성)’자를 빼고 그 자리에 임금의 이름자를 채워넣고, 산(算)으로 읽어야 할 글자를 “앞으로는 ‘셩(성)’으로 읽으라”고 우겼을까.

장지완은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혔다. 바로 “‘서성’이라는 인물의 자손이 번성했기 때문”이라고….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 말이 맞다면 조선의 중흥군주 정조대왕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선조~인조 시대를 살았던 서성(1558~1631)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경화세족인 대구 서씨의 중흥조였다. 서성의 후손은 서종태(1652~1719). 서명선(1728~1791), 서명웅(1716~1787) 등 정승 판서와, 서호수(1736~1799)·서유구(1764~1845) 같은 유명한 학자들을 다수 배출했다. 그렇다면 좀 이해는 간다.

조선시대 국왕의 업적을 뽑아 기록한 <국조보감>. 세종대왕의 이름과 자를 붉은 종이로 가려놓았다. 임금의 이름자를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기휘> 때문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자식부자 세종대왕과는 사뭇 다른 정조

정조에게는 깊은 고민이 있었다. 바로 자식이 귀하다는 것이었다. 당뇨병을 비롯해 온갖 질병에 시달렸는데도 무려 18남4녀를 낳았고, 그것도 정부인인 소헌왕후와 8남2녀를 생산한 ‘롤모델’ 세종대왕을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게다가 세종의 자식들은 문종·수양대군·안평대군 등 하나같이 다재다능한 이들이 아닌가.

반면 정조는 정부인인 효의왕후 김씨(1753~1821)와는 자손을 얻지 못했고, 의빈 성씨(1753~1786)와 낳은 아들(문효세자)은 2살도 안되어 요절했다. 딸은 1년도 못살고 죽었다. 38살의 늦은 나이에 수빈 박씨(1770~1822)와의 사이에서 아들(순조·1790~1834) 1명과 딸(숙선옹주·1793~1836) 1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는 “정조는 정부인인 효의왕후와는 금슬이 심하게 좋지 않았고, 그렇다고 총애하는 다른 궁인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러고보면 공부를 지극히 좋아하고 일중독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큼 정사에 심혈을 기울인 두 분(세종과 정조)이지만 이른바 ‘여색’에 관한 한 다른 성향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식은 얻고 싶지만 그럴 기회는 잘 만들지 않고….

조선 임금들의 이름. 3대 태종(방원)과 6대 단종(홍위)를 빼고는 모두 외자 이름이다. 태조 이셩계와 정종 이방과, 철종 이원범, 고종 이명복 등은 왕위에 오른 뒤 외자로 고쳤다. |정종수의 논문에서

희한한 일도 있었다. 후궁인 화빈 윤씨(1781년)와 정부인 효의왕후(1787년)의 잇단 임신소식에 산실청을 설치하는 등 기대를 한몸에 모았지만 두 사람 다 30개월이 지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화빈 윤씨(1765~1824)와 효의왕후 모두 산실청이 철수되는 촌극을 빚었다.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정조와 부인들의 염원 때문인지 시쳇말로 ‘상상임신’을 했음에 틀림없다.

<규장전운>을 편찬한 1796년이면 유일한 아들인 세자(순조)가 7살 되던 해였다. 자손이 풍성해야 왕실이 번창하는 법이라는데 달랑 아들이 한 명이라니…. 게다가 45살의 정조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정조로서는 마음이 급했을 것이다. 그래서 막 완성한 <규장전운>에 자신의 이름을 자손이 번창한 인물(서성)의 이름자(성)에 어거지로 밀어넣었을 것이다. 남의 묘자리를 파내고 자기 무덤을 써서 가문의 번창을 꾀한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정조 답지 않은 무리수를 둬가며 왕실의 번창을 바랐던 정조의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아들(순조)과 손자(효명세자·1809~1830), 증손자(헌종·재위 1834~1849)까지 달랑 아들 1명씩만 두었고, 결국 헌종에서 대가 끊겼으니 말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정조대왕이었으니 만큼 순리를 좇아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산→이성→노성으로 바뀐 마을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정조가 ‘이산’에서 ‘이셩(성)’으로 독음을 바꿨음에도 별다른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800년 8월이 되어서야 “예전에 이산(尼山)에서 이성(尼城)으로 바꾼 충청도 고을 이름을 다시 노성(魯城)으로 고쳤고, 함경도 이성(利城)도 이원(利原)으로 바꾸었다”는 <순조실록> 등의 기사가 등장한다. 특히 정조 재위 시기에 고을이름이 임금 이름과 같은 ‘이산’이라 해서 ‘이성’으로 고친 충청도 고을은 임금이 ‘이성’으로 개명하자, 이번에는 다시 ‘노성’으로 이름이 바뀐 기구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18·19세기 인물인 노상추(1746~1829)의 관직일기인 <노상추일기>는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규장전운>에 따라 어휘(승하한 임금의 이름)의 자음을 ‘성’자로 바꾸었다. 따라서 어휘와 음과 훈이 같은 고을 이름을 바꿔야 한다는 상주를 올렸는데 주상(정조)께서 ‘그냥 두라’고 하셨다. 그러다 이제….”

정조가 <규장전운> 편찬 이후에도 “고을 이름이 바뀐 과인의 이름(이성)과 같더라도 고치지 말고 그냥 두라”는 특명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한 이후 비로소 ‘개명’에 따른 후속조치를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순조 즉위후의 후속조치에따라 고을 뿐 아니라 ‘이성’이라는 발음이 이름에 들어간 관리들의 잇단 개명으로 이어졌다. 행호군 이성묵이 이철묵으로, 이성순이 이영순으로, 이성연이 이영연으로 바꾸었다. 대사헌 이성보는 이직보로, 전 군수 이성구는 이원구로, 연천현감 이성렴은 이경렴으로, 무관 송이성은 송이경으로, 이성도는 이만도로 각각 개명했다.

1875년(고종 12년) 고종은 왕세자(순종)의 이름을 두고 빈청에서 올린 ‘3개의 후보’(삼망) 가운데 ‘척(土+石)’을 낙점했다. 이렇듯 임금이 될 세자의 이름은 쉽게 쓰이지 않는 한자나 혹은 없는 글자를 만들어 지었다. |임민혁의 단행본에서

■원래는 이순신 이름도 바꿔야 했다

이름을 ‘이산’에서 ‘이성’으로 바꾼 정조가 일관되게 “고을이나 사람 이름이 과인과 같다해서 바꿀 필요가 없다”고 누누이 강조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임금 이름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이나 고을 이름도 중요한 것인데 굳이 번거롭게 바꿀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규장전운> 반포 직후인 1796년(정조 20년) 9월15일 정조와 우의정 윤시동(1729~1797)의 대화가 이것을 반영한다. 즉 윤시동은 “임금의 이름과 같은 고을의 읍호를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아뢰었다.

윤시동은 특히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인 <일록>의 사이에 있는 글자를 감히 신들이 부를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일록>의 가운데 있는 글자는 바로 성(省)이며, 그 책인 <일성록>이다. 그러자 정조는 ”읍명과 인명도 고칠 필요가 없다는데, 책명을 감히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뭐야“고 꾸짖었다.

“며칠 전에 화성의 공사를 마친 후에 올린 첨부문서에 ‘이성연’을 ‘이연성’으로 썼던데 그릴 필요가 없다…선대왕(영조)께서도 이 충무공(이순신)의 이름을 고친 적이 없지 않느냐.”

이 충무공의 이름인 ‘이순신(李舜臣)’의 ‘순’자는 숙종(재위 1674~1720)의 이름인 이순(李+불 火변에 享)과 발음이 같다. 정조는 “그렇지만 증조 할아버지(숙종)를 누구보다도 더욱 공경하던 할아버지(영조)도 “이순신의 이름을 고치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영조가 40년간 본명을 숨긴 이유

아닌게 아니라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는 ‘지나친 휘피(諱避·임금의 이름을 피하는 것)는 금물’이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다. 이 조치는 영조 임금이 40년간이나 입밖에 내지 않았던 자신의 이름(금·昑)을 우연히 발설한 것이 발단이 됐다. 그러자 임금의 본명을 처음 알게 된 승지들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보고문을 읽어올릴 때 임금의 이름자인 금(昑)자와 같은 발음의 글자만 나오면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그러자 영조는 혀를 끌끌 찼다.

“내가 그래서 지난 40년간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승지들은 그럴 필요없다. 분명히 읽어라.”

영조는 특히 “이름 자와 음이 같은 이름조차 피하는 것은 지나치다”면서 국왕의 이름을 회피하는 범위를 좁히라는 명을 내렸다.(<연려실기술> ‘국조전고·휘피’)

물론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인용하는 것이야 임금을 능멸한 ‘역적죄’로 처벌받아도 싸다. 그러나 기왕에 지은 사람이나 고을의 이름이 나중에 즉위한 군주의 이름과 같아지는 것이야 어쩌겠는가. 그리고 영조와 정조처럼 ‘괜찮다’고 누누이 강조하는데 굳이 바꿔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 신하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군주가 ‘괜찮다’고 해도 반드시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린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좋은 시절이라면 두루두루 좋게 넘어가겠지만 만약 꼬투리를 잡히면 멸문의 화까지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본명 이도에 얽힌 이야기

이것은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대왕 치세에도 예외가 없었다. 세종의 이름은 ‘이도’였다. 그런데 세종이 즉위하자(1418년) 개성 유후 이도분(李都芬)은 이사분(李思芬)으로 고쳤다. 충청도 공주의 교통통신시설인 ‘이도역(利道驛)’도 ‘이인역(利仁驛)’이 됐다. 임금의 이름과 한자가 같지 않는데도 단지 음이 같다는 이유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대구와 공자의 사연

대구(大邱)의 명칭은 달구벌이다. ‘넓은 공간(達)의 마을(伐)’의 뜻이다. 그러므로 원래는 ‘대구(大丘)’라 써야 한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년) 대구 유학자 이양채가 “대구 향교에서 공자께 제사를 지내는데 축문에 ‘대구(大丘) 판관 아무개’라 써는데 이게 영 불편하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영조는 “지난 300년 동안 중앙의 많은 선비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이양채 같은 자보다 못해서 지금까지 가만 있었겠느냐”고 일축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780년(정조 4년) 정조가 즉위한 직후 대구(大丘)는 지금의 대구(大邱)로 은근슬쩍 바뀌어 표기되고 만다.

■안향이 안유로 바뀐 이유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최초의 주자학자의 이름은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안향(安珦·1234~1306년)이다. 그런데 안향의 이름은 140여년이 지난 조선조 문종(재위 1450~1452) 때부터 ‘안유(安裕)’로 슬그머니 바뀐다. 왜냐. 문종의 이름이 향(珦)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촌극도 있었다. 1419년(세종 1년), 우의정을 지낸 류관(柳觀·1346~1433)의 아들 류계문(1383~1445)은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됐다. 지금으로 치면 충청도지사가 되었으니 가문의 경사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류계문은 부임을 매우 꺼려했다. 이유는 딱 하나. 관찰사(觀察使)의 ‘관(觀)’자가 부친의 이름과 같다는 것이었다. 직함을 부르게 되면 아버지의 이름을 범하는 격이니 도저히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류관)가 이름을 ‘관(觀)’에서 ‘관(寬)’으로 바꾸고 나서야 아들이 임지로 떠났다.

조선 뿐이 아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삼국사기>는 고구려 대막리지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천개소문(泉蓋蘇文)으로 기록했다. 중국측 사서인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등도 모두 천개소문으로 돼있다. 당나라 고조의 이름(이연·李淵)을 피하기 위해 ‘연씨’가 ‘천씨’로 둔갑한 것이다.

■임금의 이름은 왜 어려운 외자인가

그런데 역대 군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임금의 이름을 외자로, 그것도 매우 어렵거나 사전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를 일부러 만들어 짓는다는 것이다. 475년 동안 34대의 국왕이 거쳐간 고려의 임금 이름은 모두 외자였다. 1대 태조(건·建), 2대 혜종(무·武), 3대 정종(요·堯), 4대 광종(소·昭)….

조선은 어떤가. 3대 태종(방원)과 6대 단종(홍위·弘暐)를 뺀 나머지 25명의 국왕 이름이 외자이다. 조선 건국 이전에 지은 태조(이성계)와 2대 정종(방과), 3대 태종(방원)의 이름만 두자였다. 그러나 그것도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이후 성계→단(旦)으로, 정종은 방과→경(日+敬)으로 각각 바꿨다. 그러니 두 자 이름 임금은 태종 이방원과 17살에 승하한 단종 이홍위 뿐이다. 왕족이지만 강화도에서 평민처럼 살았던 이원범은 철종으로 즉위하자 외자인 ‘변(日+弁)’으로 개명했다. 또 초명이 이명복이었던 고종은 왕위에 오르자 역시 ‘희(혹은 형)’로 바꿨다.

역대 국왕들이 사전에도 없는 그 어려운 한자를, 그것도 외자로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씨’였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황제나 임금, 옛 성현의 이름을 피해야 했던 ‘기휘(피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제도였다. 그러니 임금으로서는 피해야 하는 글자를 한자라도 줄여 백성들의 편의를 돌봐야 했다.

그렇기에 역대 임금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희귀한 글자를 골라썼고, 심지어는 사전에도 없는 한자를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선조는 아예 역대 임금들의 이름을 대신하는 글자를 제정하기도 했다.

이도(세종), 이향(문종), 이유(세조), 이금(영조), 이산 혹은 이성(정조)…. 그 어려운 외자 이름을 왜 썼나 싶지만 그 이름 속에 담긴 코드는 그래도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였음을 알 수 있다.(6)

<참고자료>

안대회, ‘정조 어휘의 개정: 이산과 이성-<규장전운>의 편찬과 관련하여’, <한국문화> 52권 52호,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2010

남현희 편역, <일득록:정조대왕 어록>, 문자향, 2008

정종수, ‘조선시대 국왕의 호칭과 묘호’, <동원학술논문집> 제14집, 국립중앙박물관·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12

한용수, ‘韓中避諱小考’, <한중인문학연구> 제28집, 한중인문학회, 2009

임민혁, <왕의 이름, 묘호>(하늘의 이름으로 역사를 심판하다), 문학동네, 2010

 

 

어린 정조의 삐뚤한 손글씨, '개야 짖지 마라' 적힌 차사발 보셨나요?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한글박물관 '김씨 부인 한글 상언', 중앙박물관 '한글 금속활자' 등
상설전시실에 숨어있는 우리가 몰랐던 한글 유물들

입력 2020.03.19. 03:00
 
 
어린 정조가 큰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위)와 한글 묵서가 적힌 차사발(가운데).

 

'상풍(서릿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편지 보니 든든하고 반갑습니다.'

어린아이 글씨가 삐뚤빼뚤한데 내용은 사뭇 의젓하다. 이 한글 편지를 쓴 주인공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1752~1800). 편지 끝에 '원손(元孫)'이라 썼으니 세손 책봉 이전인 1759년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7세 이전에 큰 외숙모인 여흥 민씨에게 보낸 안부 편지다.

'정조어필 한글 편지첩'은 국립한글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있다. 원손 시절부터 재위 22년까지 정조의 한글 편지 16점을 묶었다. 정조가 한글로 쓴 편지라는 희소성이 있는 데다 연령대에 따른 정조의 한글 필치 변화상을 볼 수 있어 가치가 높다. 김민지 학예연구사는 "정조가 쓴 편지는 지금까지 원문이 공개된 것만 수백 점에 달하나 대부분 한문 편지"라며 "외가 친척인 큰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는 주로 안부를 묻는 것으로, 외가 식구들을 살뜰히 챙기는 정조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다"고 했다.

박물관 상설전시실에는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귀한 한글 유물이 숨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엔 18세기 사대부 여성이 한글로 쓴 정치적 탄원서도 있다. 서포 김만중의 딸이자 신임옥사(辛壬獄事) 때 죽임을 당한 이이명의 처 김씨 부인(1655~1736)이 손자와 시동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영조에게 올린 '김씨부인 한글 상언(上言)'이다.

가로 160㎝, 세로 81.5㎝. 정자체로 1400자 남짓 정성 들여 썼다. '이 몸이 만 번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하고 부월(斧鉞)에 엎드리기를 청하니, 바라오니 천지부모(天地父母, 즉 영조)께서는 특별히 원혹한 정사를 살피시옵소서.' 박물관은 "정치적 격변기에 일어났던 당쟁의 참화 속에서 한 사대부 여성의 절박한 심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며 "당시에 한글의 사용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보여주며 18세기 당시의 한글을 격조 높은 언어로 구사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조선시대 한글 금속활자.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도 흥미로운 한글 유물이 많다. 2층 기증문화재실에는 한글 묵서가 적힌 일본 도자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이 17세기 초 야마구치현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차사발이다.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둑인가. 자목땅 호고려님이 지슘 다니는구나. 그 개도 호고려 개로다. 듣고 잠잠하노라.' 호고려(胡高麗)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현지 일본인이 부르던 호칭으로 '오랑캐 고려 사람'을 뜻하는 말.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조선 도공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심경을 도자기 표면에 써내려간 것이다.

왕세자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한글 활자도 감동을 준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한글 금속활자 750여 자와 한글 목활자 1만3000여 자가 소장돼 있다. 박물관은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자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만든 활자도 대부분 한자 활자였다. 하지만 왕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을 교육하거나 백성에게 유교 이념을 가르치기 위해 언해본이 필요했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한글 활자를 제작했다"고 했다. 백성에게 배포하는 언해본에는 주로 목활자를 사용했다.(2)

 

 

정조의 여동생 '청연군주'가 입은 저고리 등 보존처리 공개

입력 : 2020.02.03 13:21 수정 : 2020.02.03 15:10
이기환 선임기자

 

 

정조의 여동생이자 사도세자의 딸인 청연군주가 입은 명주저고리. 국가민속문화재 53호이다.|세종대박물관 소장

 

‘정조의 여동생 청연군주를 아십니까.’ 정조(재위 1776~1800)는 비정한 아버지(영조)의 명에 따라 뒤주에 갇혀 비명횡사한 사도세자(1735~1762)와 동갑내기 부인인 혜경궁 홍씨(1735~1815)의 아들이다. 그런 정조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살, 네 살 터울의 여동생이 둘 있었으니 청연군주(1754~1821)와 청선군주(1756~1802)이다. 할아버지인 영조 임금도 42살이 되어 낳은 아들(사도세자)이 본 손자(정조)와 손녀(청연·청선군주)가 얼마나 귀여웠을까.

1906년 순종이 황태자 시절 동궁비(훗날 순정효황후가 입었던 원삼으로 추정되는 ‘동궁비 원삼’. |세종대박물관 제공

 

<영조실록>은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가 72살 때인 1765년(영조 41년) 4월 가뭄 끝에 내린 단비를 맞아 경기 지역을 돌고 돌아오던 길에 청연군주의 집을 찾았다”고 썼다. 그해 윤 2월 청연군주는 광산 김씨 가문인 김상익(1721~1781)의 아들 김두성(?~1811·훗날 김기성으로 개명)과 혼인해서 하가한 바 있다. 임금인 할아버지가 시집간지 두 달 된 손녀의 집을 찾을 정도로 귀여움을 독차지한 했다는 뜻이다. ‘군주(郡主)’는 왕세자(사도세자)의 적실녀에게 내린 외명부 정2품의 봉작이었다. 만약 왕세자의 서녀(庶女)라면 현주(縣主)라 해서 정3품의 봉작을 내린다.

순종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傳) 왕비 당의’. 금사를 넣어 봉황을 시문한 직물을 사용했다.|세종대박물관 소장

 

1964년 경기 광주 세촌면 암동리의 청연군주와 김두성의 부부합장묘를 이장하던 중 150여점의 의복을 포함해서 모두 200여점에 이르는 부장품이 출토됐다. 이 부장품들은 훗날 국립중앙박물관과 단국대 석주선기념 박물관, 고려대박물관 등에 분산 소장됐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진 청연군주의 의복이 세종대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었다. 그것이 국가민속문화재 53호인 ‘토황색 명주저고리’이다.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센터 연구사는 “세종대박물관 소장품이 청연군주의 복식이라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종대 박물관 소장품과 다른 기관의 청연군주 복식을 비교할 때 색상변화와 보존상태가 똑같다”고 밝혔다.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3일 “청연군주의 ‘명주저고리’ 외에도 조선말기 동궁비가 입었던 동궁비 원삼(국가민속문화재 제48호)과 전(傳) 왕비 당의(唐衣·예복·국가민속문화재 제103호),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1885~1967년)의 원삼(圓衫·국가민속문화재 제52호) 등의 보존처리를 마쳤다”고 밝혔다. 문화재보존센터는 이러한 왕실복식 유물의 보존처리 전과정과 유물 소장 경위, 문화재관리 이력을 정리한 보고서(<직물보존 Ⅰ-Insight for Textile Conservation>)를 발간했다.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1885~1967년)의 원삼(圓衫·국가민속문화재 제52호).|세종대박물관 소장

 

이중 ‘동궁비 원삼’은 1906년 순종이 황태자 시절, 두 번째 가례인 병오가례를 올렸을 당시 동궁비(훗날 순정효황후·1894~1966년)가 입었던 원삼으로 추정된다, ‘전(傳) 왕비 당의’ 역시 순종비의 것으로 두 벌의 당의를 함께 끼워 만들었다. 모두 금사(金絲·금실)를 넣어 봉황을 시문한 직물을 사용했다. 오조룡보(五爪龍補)가 가슴, 등, 양 어깨에 달려있어 유물로서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오조룡보’는 왕과 왕비의 옷에 덧붙인 원형의 장식품이다.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을 수놓았다. 안보연 연구사는 “왕실 복식의 약한 부분을 보강하고, 구김과 직물 손상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맞춤형 충전재를 직접 제작하여 복원했다”고 덧붙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0호 옥색 명주 장옷. 이 장옷의 안감에는 머릿기름 등으로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는 한지가 부착되어 있다. 한지의 윗 부분에는 ‘통영 군선동 입자…’의 지명과 인명이 적혀있다. |세종대박물관 소장

 

또한 이번 보고서에는 복원과정 전체와 왕실 복식 연구의 핵심이 되는 금사(金絲, 금실)의 성분 분석 결과를 담았다. 이밖에 명부(命婦·봉작받은 부인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예복인 ‘원삼’의 금(金) 장식 문양의 형성 배경에 대한 전문가 논고와 함께, 부록으로 미국 브루클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삼과 당의, 활옷을 조사한 내용도 실었다. 이번 보고서는 특히 상세한 사진을 통해 국내외 전문가가 참고할 수 있도록 국문과 함께 영문 설명을 기술해 왕실 복식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7)

 

 

 

<주>

 

 

(1) 정조가 단군과 천부경을 찾은 까닭은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koreahiti.com)2018.06.03 

 

 

(2)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2080943001

 

 

(3)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269557.html 

 

 

(4) 정조가 10년 더 살았다면 (hani.co.kr)2007-11-08 

 

 

(5)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7041107001

 

 

(6)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8091022001

 

 

(7) 어린 정조의 삐뚤한 손글씨, '개야 짖지 마라' 적힌 차사발 보셨나요? (chosun.com)2020.03.19. 

 

 

(8) 정조의 여동생 '청연군주'가 입은 저고리 등 보존처리 공개 - 경향신문 (khan.co.kr)2020.02.03

 
 
 

 

<참고자료>

 

 

↑정조가 쓴 한글편지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안부를 주고받는 시대에 글쓴이의 정이 듬뿍 담긴 편지는 보는 이에게 훈훈한 감동을 준다. 특히 오래된 편지일수록 감동의 깊이는 더욱 깊다.

조선시대에 씌어진 한글편지에 네티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9일 한글날을 맞아 네티즌들은 주요 포털사이트에 정조, 효종, 명성황후가 쓴 한글편지를 올리며 한글의 멋과 위대함에 감탄했다.

조선 제22대왕인 정조가 원손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린 정조의 귀여움이 묻어 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풍에 긔후 평안하오신 문안 아옵고져 바라오며 뵈완디 오래오니 섭~ 그립사와 하옵다니 어제 봉셔 보압고 든~ 반갑사와 하오며 한아바님 겨오셔도 평안하오시다 하온니 깃브와 하압나이다. 元孫"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오며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시오니 기쁘옵나이다. 원손)

글씨가 삐뚤빼뚤하고 문법도 맞지 않지만 네티즌들은 한글로 문안을 드리는 어린 정조의 깊은 마음에 감동했다. 한 네티즌은 정조가 악필이라는 댓글에 "아이 때 쓴 것이라 그렇지 또박또박 쓴 글이 귀엽지 않느냐"며 두둔하고 나섰다.

↑효종이 쓴 한글편지

조선 제17대왕인 효종이 보낸 편지도 이색적이다.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 심양에 볼보로 가 있을 때 장모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이다.

"새해에 기운이나 평안하신지 궁금합니다. 사신 행차가 (심양으로) 들어올 때 (장모님께서) 쓰신 편지 보고 (장모님을) 친히 뵙는 듯, 아무렇다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청음(김상헌의 호)은 저리 늙으신 분이 (심양에) 들어와 어렵게 지내시니 그런 (딱한) 일이 없사옵니다. 행차 바쁘고 하여 잠깐 적사옵니다. 신사(인조 19년, 1641년) 정월 초팔일 호"

당시 23세였던 효종은 함께 잡혀 와 있던 청음 김상헌을 걱정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끌려온 김상헌은 당시 72세였다.

↑명성황후가 쓴 한글편지 <사진출처=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가 2005년 10월 27일 조선일보에 제공>

명성황후가 1874년 오빠 민승호에 보낸 2통의 한글편지는 예쁜 색지와 깔끔한 글씨체로 눈길을 끌었다. 정갈한 궁서체로 씌어진 편지 글은 색지에 그려진 대나무, 꽃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24세의 나이였던 명성황후는 정적이었던 대원군이 1873년 실각한 이후 어수선한 정세로 편치 않은 심경을 드러냈다. "(오빠의) 편지에서 밤사이 탈이 없다 하니 다행이다. 주상과 동궁(훗날 순종)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니 좋지만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네티즌들은 "명성황후 글씨가 편지지와 어울리고 너무 예쁘다", "컴퓨터 글씨체처럼 반듯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