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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7) 16대 인조(1623년~1649년), 1637년 병자호란(조선-청 전쟁), 17대 효종(1649년~1659년) 북벌론 본문

남국/조선

1. 조선 (7) 16대 인조(1623년~1649년), 1637년 병자호란(조선-청 전쟁), 17대 효종(1649년~1659년) 북벌론

대야발 2024. 5. 30. 10:18

 

 

 

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 10만 포로의 눈물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입력 2007-01-11 

 

 

청태종 송덕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 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 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1)

 

 

 

 

승전국과 패전국은 협의 끝에 9개 조항을 만들어 공표했다.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관계를 끊고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인조가 항복의식을 행한 삼전도에는 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방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상황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 조인 때까지 이어졌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패전 후 조선은 청나라 속방으로 전락…백성 50만명 이상 포로로 끌려가

한국경제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입력 2022.10.31 10:00 수정 2022.10.31 10:00 생글생글 775호

 
(116) 병자호란과 백성의 눈물(上)
 
 
 
청의 요청으로 파병된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이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접근했던 등주 수성.
 
 
 
 
 

이웃한 국가 간은 협력과 우호관계일 때도 있지만 경쟁과 갈등, 불가피한 충돌도 발생한다. 때로는 우리의 선택이나 상대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제질서 때문에 충돌하기도 한다. 일부 배신자를 제외하고, 국가 간 충돌에서 패배한 국가의 백성에게는 포로, 노예, 죽음의 길이 기다린다.

조선은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국가의 존재 이유와 역할을 망각한 성리학자들의 나라였다. 광해군의 정책과 같이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를 외교적으로 이용하면 청나라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청을 자극해 전면전을 초래했다.

청태종의 친정군 12만 명의 선발대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넘었지만 12일에야 사실을 보고받았던 정부는 무능했다. 더구나 임진왜란의 대참상을 겪고, 정묘호란이 끝난 지 불과 9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몰현실적인 자주론자들의 조선은 남한산성에서 불과 45일을 버티다 항복했다.

승전국과 패전국은 협의 끝에 9개 조항을 만들어 공표했다. 조선은 청나라에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관계를 끊고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등이었다. 그리고 인조가 항복의식을 행한 삼전도에는 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이렇게 조선은 명나라 대신 청나라의 속방으로 전락했다. 이 같은 상황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의 조인 때까지 이어졌다.

조선의 정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두 번에 걸친 전쟁으로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전쟁 기간이 매우 짧았고, 전장이 한반도 북부와 수도권에 한정됐으며 큰 전투가 없었지만 완벽한 패배와 항복으로 자주성을 상실했다. 또한 나라와 백성, 역사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3만여 명의 사망자와 함께 수많은 백성이 포로로 희생됐다.

 

 

최명길은 <지천집>에서 포로를 50만 명으로 전했고, <산성일기>와 <남한일기>에서는 60여만 명으로 기록했다. 시대 상황과 조선 인구를 고려하면 이 같은 수치는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하지만 국경까지 육로로 이어져 일본과 달리 많은 포로가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전쟁이 그렇지만 특히 다종족으로 편성된 청나라 군대에 포로는 전리품이었고,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었다. 군사력, 국가 노동력, 사적 노동력, 성적 도구로 포로가 필요했다. 포로는 매매와 양도가 가능했고, 많은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왕실을 비롯해 양반 사대부의 여자들도 많이 잡혀갔다. 이 사건은 역사 이래 최대 수치로, 조선 사회의 대균열은 물론이고 혈연을 기반으로 한 조선공동체가 붕괴했다고 본다.

척화파였던 삼학사의 오달제는 심양까지 가는 데 60일이나 걸렸고 숱한 고난을 겪었음을 기록했다. 포로들은 만주의 한겨울 삭풍과 눈보라 속에서 굶주림, 매질, 강간 등을 당했고, 일부는 죽음을 맞았다. 사료에는 강화도가 점령당할 당시에도 세자를 포함한 왕족, 사대부 가족, 백성이 포로로 잡혔고, 일부 여인은 능욕당하고 자결한 일이 기록됐다.

 

 

이미 정묘호란 때도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고, 일부는 병자호란 때 적군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정부는 포로 문제에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 포로의 숫자가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정부는 능력도 부족했지만,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살아남은 조선 포로들이 청나라 수도인 심양에 도착한 뒤 청나라는 심양관에 억류한 소현세자에게 속환의 방식과 시기 등을 전했다. 세자는 보호자들이 심양으로 와서 속환금을 내고 포로를 데려갈 수 있는 조건들을 조정에 알렸다. 이어 공식적인 속환사와 많은 원속인이 심양에 도착했고, 마침내 5월 15일 지금은 시내 가운데가 된 백탑 근처에서 ‘조선 포로 매매시장’이 열렸다.(2)

 
 

 


전쟁 후 돌아온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조선과 청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조선과 포로들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청국의 크기와 위상을 절감하고, 국제관계의 실상에 눈을 떠 몽골어를 공부했다. 또 청나라에 와 있던 아담 샬을 비롯한 천주교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수한 서양문물을 배웠다.

 

더불어 자명종, 천문의, 세계지도 등 부국강병에 필요한 서양물건을 가지고 귀국한 그의 존재는 성리학자들의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통성에 위협을 느낀 인조의 냉대.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다 결국 2개월 만에 급사했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국제관계 눈뜬 소현세자 급사, 포로·환향녀 냉대…전후에도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갇혀 망국의 길로

한국경제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입력 2022.11.07 10:00 수정 2022.11.07 10:00 생글생글 776호

 
(117) 병자호란과 백성의 눈물 (下)
 
 
 
청태종 황태극의 무덤인 북릉 심양.
 
 
 
 

조선 포로들의 속환가가 초기에는 남자 은 5냥, 여자 은 3냥 수준이었다. 하지만 혈육의 정이 남다른 조선 사람들이 선양을 계속 찾아오자 가격은 150냥에서 250냥 정도까지 올랐고, 심지어 한 고위관리는 아들을 위해 1500냥을 지급할 정도였다. 결국 재력 있는 양반 사대부의 포로들은 귀환했지만, 그것도 몇 차례에 걸쳐서 2000여 명에 그쳤다. 그나마 대다수 백성은 돌아오지 못한 채 남자들은 노예로, 여자들은 첩이나 창기로 전락했다. 그 후예들은 청나라 사람, 중국 사람들로 변했다.

관광단이나 사업가, 고구려 유적 답사에 나선 학생들은 선양의 청나라 ‘고궁’과 ‘백탑’에서 선조들의 참상을 몰라 숙연함과 반성하는 마음을 갖기보다 웃고 즐긴다. 식민지 백성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역사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이다.

 

돌아온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귀환한 포로를 ‘영웅’으로 환영하는 나라는 자주적이고, 성공한 국가다. 조선은 그 반대였다. 8년 만인 1645년 돌아온 소현세자는 선양에서 조선과 청 사이의 관계를 조정하면서 조선과 포로들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청국의 크기와 위상을 절감하고, 국제관계의 실상에 눈을 떠 몽골어를 공부했다. 또한 청나라에 와 있던 아담 샬을 비롯한 천주교 선교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우수한 서양문물을 배웠다.

 

 

더불어 자명종, 천문의, 세계지도 등 부국강병에 필요한 서양물건을 가지고 귀국한 그의 존재는 성리학자들의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통성에 위협을 느낀 인조의 냉대, 성리학자인 사대부들의 비판과 모함을 받다 결국 2개월 만에 급사했다. 상황과 세자의 시신 상태, 인조의 태도, 당쟁을 고려해 ‘독살설’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추잡한 궁중 암투가 일어나면서 인조는 세자빈을 내쫓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어린 손자인 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는데, 결국 둘은 제주도에서 장독과 병으로 죽고, 막내는 효종이 즉위하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 사건을 조선 역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항복한 왕인 인조와 개혁적인 왕위 계승자 간 권력 쟁탈전을 넘어 국내파와 포로파(송환파)의 갈등, 성리학과 실용학문(서양학문, 훗날 북학으로 발전), 명분론과 실용론의 대결이고, 친명 세력과 친청 세력 간의 대결이었다.



조선은 전쟁 패배로 인구가 급감해 농업 등 기간산업에 차질이 생기면서 국가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인조가 취한 대동법 등 몇 가지 정책도 차질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이 전쟁은 혈연 공동체 의식에 균열을 만들었고,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양반 사대부들의 무능함을 드러냈다. 더욱이 ‘환향녀(還鄕女)’ 문제는 그들의 열등감으로 뭉쳐진 오만과 위선을 드러냈다. 포로로 끌려갔다 집안의 재력으로 귀국한 환향녀들은 사회에서, 가족과 남편에게서 철저히 버림받았다. 인조는 환향녀들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어 몸을 정화하는 의식을 통해 조선 사회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버림받은 그들은 일부는 자결하거나 몸을 팔면서 생활을 유지했고, 일부는 청나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현실로 체험하지 못한 후대인들은 ‘객관’이라는 핑계로 원론적인 잣대를 들이대 평하고, 경망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특성이 있다. 필자 또한 ‘관찰자’란 자격 미달의 평가자이지만, 역사학자라는 이름을 빌려 비겁한 조선 사내들을 비판한다. 조선의 왕과 위정자이며 성리학자, 남편이며 아비인 그들을 말이다. 그들은 나라(國)와 백성(民) 대신 ‘충(왕)’을 더 소중히 했고, 가족 대신 가문에 집착해 나라도 가족도 지키지 못한 무능한 죄인들이다. 8년 고생 끝에 귀국한 소현세자 등을 배척해 죽게 했고, 사지에서 돌아온 환향녀들을 사회에서 매장하거나 자결을 강요했다. 그들은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도, 인정도 없는 부도덕한 죄인들이다.



형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은 인재를 등용하고, 군사 체제를 정비하며 북벌을 야심 차게 추진했으나 10년 만에 죽었다. 이후 비겁한 양반 성리학자들은 통한의 반성과 절치부심의 복수, 부국강병의 실천을 포기한 채 성리학을 확대 재생산하며 당쟁에 몰두했다. 그 결과 백성을 더 탄압하고 가렴주구가 심해지면서 조선은 붕괴의 길로 치달았다.(3)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정책기조로 삼고, 실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과 추진했다. 왕을 방어하는 어영청군을 강화해 수도에 상주시켰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군도 재정비했다. 기병전에 대비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기병을 재편했고, 신병기들을 제조했다.

 

북벌론은 왕과 양반 체제에 대한 백성의 불신과 저항을 무마하고, 전쟁의 위기의식을 일으켜 국론을 통일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군사력을 재건하고, 정치력을 강화하면서 지지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는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효종과 서인들의 실천 의지에 의구심 생기는 북벌론 국론 통일에는 효과적 수단…추후 나선정벌로 연결돼

한국경제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입력 2022.11.14 10:00 수정 2022.11.14 10:00 생글생글 777호

 
(118) 효종의 북벌론과 나선정벌 (上)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병자호란 후 효종 때 개축했다.
 
 
효종의 ‘북벌론’은 비록 꿈이었을지라도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이성계는 1388년 음력 5월 하순, 압록강가에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탄 말의 눈빛과 꼬리짓, 울음소리는 어땠을까. 이후 이종무가 1419년 잠시 대마도에 발을 디뎠고, 세종 때 김종서와 최윤덕은 멀리서 그림자만 봤을 뿐이다. 이후 조선은 ‘남정북벌’을 꿈꾼 적은 없다. 한정된 인식과 무능함, 현실에 안주하는 습성 때문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군에 포위된 채 울음을 터뜨린 인조는 포로로 끌려가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를 냉대하고 그의 가족을 멸한 뒤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효종은 즉위 후 ‘북벌론’을 정책기조로 삼고, 실권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과 추진했다. 왕을 방어하는 어영청군을 강화해 수도에 상주시켰고,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수어청군도 재정비했다. 기병전에 대비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기병을 재편했고, 신병기들을 제조했다.
 
 

 

청나라의 북진 정책에 맞서 싸운 흑룡강 상류, 소흥안령 지역에 거주하는 다구르족의 서낭당 신앙인 오보에.
 
 
북벌론의 실상
 
효종의 ‘북벌론’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

첫째, 효종을 비롯한 서인 일파들은 정말로 실천할 의지가 있었을까.

함께 포로생활을 겪었지만 소현세자는 조선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위해 청을 학습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면 효종은 원한과 복수심으로 대결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인은 국력과 국제관계의 실상을 외면했고, 전쟁의 참상과 백성의 희생을 가볍게 여긴 죄로 역사와 백성에 책임져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반청정책과 자주성의 표방은 피해의식과 복수심, 자주라는 감성을 이용해 정책적인 과오를 반전시키고 면피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와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재야의 거두이자 권력자인 송시열은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에서 ‘존주대의(청을 오랑캐로, 명을 정통으로 해 중화사상을 따른다)’와 ‘복수설치(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다)’란 북벌론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고, 이조판서로 북벌을 추진했다.

북벌론은 왕과 양반 체제에 대한 백성의 불신과 저항을 무마하고, 전쟁의 위기의식을 일으켜 국론을 통일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군사력을 재건하고, 정치력을 강화하면서 지지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이는 정통성이 부족한 효종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물론 이 정책의 긍정적인 점도 몇 가지 있다. 학자적 관료인 송시열은 ‘정치를 개선해 오랑캐를 물리친다(修政事以攘夷狄)’는 명분을 내걸고, 궁정사업과 토목공사를 줄여 국가재정을 건전하게 만들었다. 세금을 줄이는 등 백성의 삶을 중요시하는 정책도 건의했다. 하지만 실제로 백성들은 농사철에도 군사 훈련에 투입됐고, 성벽과 개수공사 등에 동원되면서 농사에 차질이 많았다.

둘째, 효종 세력들은 북벌정책을 실현 또는 실천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까.

국내 환경을 고려하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3만 명의 전사자, 50만 명 이상의 포로로 인한 군사력과 노동력의 막대한 상실, 전답의 파괴와 손실로 인한 경제 추락과 국가 재정의 부족 등은 전쟁 준비에 장애 요인들이다. 불안감과 염전 분위기의 증폭도 문제였다. 따라서 왕과 일부 양반 권력자를 빼놓고는 명분도 희박하고, 승산 없는 전쟁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와 만주의 국제환경
 
국제환경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임진왜란, 병자호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남북 분단과 6·25전쟁처럼 우리 운명은 국제환경에 좌우되는 일이 많았다. 1654년 당시 명나라는 멸망(1644년)한 지 이미 10년이 됐다. 물론 복명운동이 계속됐고, 1658년에는 남쪽에서 정성공이 10만 명의 병력과 전선으로 남경 근처까지 공격했다. 북쪽 몽골 지역에서는 준가르 제국이 일어나 청과 갈등을 벌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강희제가 등극하기 직전이었고, 통일 제국을 완성하는 단계였다.

동아시아 세계는 이미 서양 세계의 구심력에 끌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의 발생과 과정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양 세계의 역할이 있었고, 소현세자는 독일 출신인 아담 샬 등의 선교사와 교류하면서 서양의 신사상을 체험하고, 발달된 과학과 기술문명을 접촉한 뒤에 이를 이식하려고 시도했었다.(4)
 
 
 
 

 

<자료출처>

 

 

(1)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111001011&spage=3

 

 

(2)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102807411

 

 

(3)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110465731

 

(4)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111124021

 

 

 

 

<참고자료>

 

 

병자호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병자호란 부른 ‘孝’ 대립… 대한민국은 ‘아버지의 그늘’ 벗어났나[북리뷰] (daum.net)2024. 6. 7.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604026002&spage=1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611028002&spage=1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1231026003&spage=1

 

 

 

버려진 조선의 공주.. 묘까지 이렇게 방치하다니요 (daum.net)2021. 4. 15. 

 

 

‘삼전도의 굴욕’ 안긴 청 태종 칼…한국에 볼모처럼 남은 이유는?2020-02-24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29552.html#csidx95106c734ce83ffae4ea5b27fb6427e

 

 

 

“조선은 청나라 속국…” 중국의 역사공작 ‘신청사(新淸史)’를 고발한다|신동아 (donga.com)이정훈.2013-04-19

 

 

 

명말·청초 조선외교 ‘현장보고서’ | 서울신문 (seoul.co.kr) :2008-03-13

 

 

 

환향녀의 유래 - 밀양신문 (newsk.com)200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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