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쌓은 오사카성의 해자.‘임진왜란’ ‘임진조국전쟁’ ‘분로쿠역(文祿役)’ ‘만력조선전쟁’ ‘조일전쟁’.
이는 모두 1592년 4월부터 1598년 12월까지 7년간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임진왜란’에는 피해자 조선 정부의 시각이 담겼다. ‘임진조국전쟁’은 북한이 자체 역사관에 맞게 교정한 용어다. 분로쿠역은 일본이 당시 천황의 연호를 따라 붙인 명칭이다. ‘만력조선전쟁’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만력은 조선의 동맹군으로 참여한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해 만들었고, 현대에는 ‘항왜원조’로도 사용한다. 조일전쟁이라는 용어는 근래에 우리 학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전쟁은 다른 관점으로 보면 한·중·일이 삼국통일전쟁 이후 1000년 만에, 또는 여몽 연합군의 일본 공격 이후 350년 만에 격돌한 동아시아 국제대전이다. 즉 국가 간 대결을 넘어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을 놓고, 육지세력과 해양세력이 대규모 육지전과 해양전을 동시에 벌인, 7년간의 장기 전쟁이었다. 전쟁의 목적과 배경도 정치적인 패권 장악뿐만 아니라 무역권과 무역망, 각종 자원의 획득, 문화재 약탈, 천주교의 전파, 심지어는 조선 도공을 비롯한 노예용 포로 획득 등이었다. 조선·일본·명을 주축국으로 해 주변 여러 나라가 이해관계를 놓고 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결과는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의 에도 막부, 청나라, 중가르 제국의 등장, 유구국의 일본화 시작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의 정치 질서에도 영향을 끼쳤다.
오사카성의 야경.15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지리상의 대발견’ ‘대항해 시대’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아시아를 세계 무역망으로 끌어들였다. 이로써 차·실크·도자기·향료·후추 등의 상품을 매개로 유라시아 세계의 동서를 연결하는 단순무역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군사력과 비약적으로 발전한 조선술 항해술을 갖춘 유럽 세력은 아메리카(멕시코 브라질), 유럽(에스파냐·포르투갈),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명), 일본, 조선까지 이어진 긴 무역망을 구축했다. 이와 함께 영토와 자원, 무역권의 획득을 비롯한 종교(기독교)의 조직적인 전파, 신기술과 신무기의 거래라는 복잡한 관계망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동남아의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태국, 베트남, 유구국 등 국가들의 정치적인 상황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포르투갈은 1513년 이미 명나라에 진출했고, 1557년에는 마카오의 사용권을 획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유구와 일본으로 진출을 시작해 임진왜란 때 사용한 조총 등의 무기와 전투기술을 공급하고, 극소수의 인원이 양 진영의 전투원으로 참여했다.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이 무렵 전쟁의 주축국인 명나라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건국 초기부터 왜구의 침략으로 해안지역이 심각하게 약탈당했고, 이로 인해 해금정책을 시행하면서 내륙국가로 전환했다. 하지만 남부 해안과 도서 지역은 자연환경과 문화, 종족, 역사, 생활조건의 특성상 해금정책의 실효성이 약했다. 다수의 중국인은 후기왜구에 대거 참여해 국제적인 해적집단으로 변모했고 활동 범위도 유구, 동남아 일대까지 확장됐다. 정부는 일본을 압박해 왜구의 근절을 요구하고, 감합무역을 허락하는 정책도 취했으나 도요토미 시대까지는 효험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대거 탈출을 시도했고, 동남아 일대와 심지어는 일본까지 거주지들을 확장했다.
대외관계도 불안정했다. 초기에는 북쪽에서 원나라의 잔여 세력인 북원과 전쟁을 벌였다. 이어 몽골계인 오이라트와 힘겨운 접전을 벌여 베이징이 함락당하는 등 위기에 처했을 정도다. 한편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강력해지고, 1589년에는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를 멸망시킨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거의 통일했다. 따라서 명나라는 경제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안기는 조공무역을 하는 등 온건책을 쓸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국방력과 경제력이 소진됐다.(1)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막대한 피해 입은 조선, 승전·패전 주장 엇갈려…조선군·백성 22만여명 사망하고 농토 3분의 1 유실
임진왜란이 왜 패전인가는 전쟁 발생과 진행 과정, 전투 상황, 결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592년 4월 일본 규슈 북부의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대마도 병력을 선봉으로 700척에 1만8700명의 병력으로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진 첨사인 정발은 전사하고 군대는 패배했다. 이어 벌어진 동래성 전투는 하루를 못 견딘 채 패배했고, 송상현은 전사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2만2000여 명과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군대도 함께 상륙했다. 불가사의하지만 봉화체제의 문제로 왕궁은 4일째에야 침공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정에서 급파한 이일은 상주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어 북방에서 맹위를 떨친 신립 장군이 기병 8000여 명 등 1만6000명의 군사로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했다. 하지만 그 또한 남한강변의 탄금대에 친 배수진이 실패하며 대패했다. 일본군은 3개 방면으로 나눠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당황한 선조와 사대부들은 피난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소수의 인원으로 도성을 탈출했다. 임해군과 광해군 등 왕자들을 군사 모집을 목적으로 북방으로 출발시켰고, 황급하게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했다.
선조 일행은 평양에 도착했고, 곧이어 한양이 불과 20일 만에 함락당했다. 무저항 상태에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한 것이다. 다시 의주로 피난 온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고자 요동 총독에게 사신을 파견했다.
반면 이덕형, 이항복 등의 신하들은 선조를 말렸다. 비변사 당상인 신잡은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 여러 장수는 패배가 아니라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는 일을 두려워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다행히 선조는 요동 측의 비협조 등 현실적인 원인도 작용해 의주에 주저앉았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이 밀린 원인
조선은 전쟁 1단계에서 왜 이렇게 완벽히 패배했을까.
첫째, 조선은 국제질서의 변화와 일본의 상황을 몰랐다. 쇄국정책과 사대교린을 기조로 삼았지만, 정작 일본과의 외교 관계는 부실했다.
일본의 내부 상황 등 여러 이유로 100년 이상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당연히 전국시대의 독특한 정치체제, 포르투갈식 조총 등으로 무장하고 훈련된 강력한 군사력,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성격, 전쟁 도발의 진정한 의도 등을 파악하는 데 미숙했다. 무엇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질서의 메커니즘에 서툴렀다.
상황 파악을 목적으로 파견됐던 부사 김성일은 귀국해 “그런 (침공)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보고했다. 뛰어난 성리학자이며, 전쟁 발발 후에는 전선에서 의병들을 지원하는 등 활약하다 죽은 인물인 그는 성리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해 역사와 백성에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놀라운 사실은 훗날 전쟁 승리에 큰 역할을 한 류성룡조차 그의 말에 수긍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외적으로 조선을 침공할 필요성이 있었고, 개인적인 야심도 컸으므로 ‘정명가도’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둘째, 군사동원체제가 미흡하고, 군사의 자질과 훈련이 부족했다. 조선은 ‘삼포왜란’ 등을 당한 뒤에도 방어체제를 강화하고 군대를 증강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진관체제’에서 ‘제승방략체제’로 전환하고, 군적을 정비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중종 때는 ‘군포’를 받아 대신 군적을 면제해주는 ‘군적수포제’ 때문에 양반은 국방의 의무에서 면제됐다. 이런 상황에서 병력을 15만 명 정도로 계산하지만, 대규모 국제전에 대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허약했다. 또 적의 핵심 무기인 조총을 기증받아 직접 봤음에도 그 성능을 경시했고, 사용은 고사하고 방어훈련조차 하지 않았다.(2)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꽂고 싸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모습. 가토에겐 임진왜란이 성전(聖戰)이었나? 1850년 ‘영걸 삼국지전’. 개인 소장.
유라시아 동부 도서부(島嶼部)의 유력한 세력인 일본열도의 국가들은 네 번에 걸쳐 유라시아 동부 대륙 지역의 진출을 꾀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첫 번째는 한반도의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시기였으며 이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끝났다. 이후 한반도는 신라와 발해가 남북으로 병립하는 시기를 맞이했으니 이것이 한반도의 첫 번째 분단이었다.
두 번째는 고려시대 말기에서 조선시대 전기에 걸친 13~16세기의 왜구였다. 이들은 한때 고려와 명나라의 안정을 흔들 정도였으나 결국 항구적인 정착지의 확보에 실패하였다.
세 번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이다. 인도까지 정복하려 했다는 이 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단기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축출되었다. 이때 일본 측은 명나라 측에 한반도의 분단을 제안하였으며 명나라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논의하는 등, 한반도는 두 번째 분단의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조선의 강제병합부터 1945년 8월의 패전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일본열도의 세력은 만주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세력으로 그 지위를 확고히 하는 듯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일본 세력의 급속한 퇴각에 따른 공백기에 한반도는 또다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일본 측으로서는 유럽의 대륙부인 프랑스의 태반과 도서부인 영국을 지배하던 노르만 왕조, 동남아시아의 대륙부와 도서부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 스리비자야 왕조와 같은 형태의 영토를 만들고자 한 시도가 번번이 무산된 셈이다.
역사상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정세를 뒤흔든 최초의 사건이 임진왜란이었지만, 그들의 활동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에서 관측된 것은 한반도의 삼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아닌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서(魏書)’의 한반도 관련 기사에는 왜인이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에서도 왜인이 신라의 도읍인 금성(金城)을 공격했다는 기사를 비롯하여 왜인의 지속적인 움직임이 관측된다. 이 시기를 다루는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으로 상징되는 일본열도의 중앙집권적 세력에 의한 것으로서 해설하며 이러한 이해는 일본에서 20세기 전기까지 이어졌다. 이에 따라 조선을 강제병합한 20세기 전반에 일본 측은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의 거점으로 그려지는 가야 지역에 대한 발굴 내지는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역사적 실체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였다. 최근 들어 가야 지역이 아닌 전라남도의 영산강 지역에서 일본열도 출신의 무사(武士)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왜계(倭系)’ 무덤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진서(晉書)’ 열전에 보이는 마한(馬韓)의 잔존 세력 ‘신미제국(新彌諸國)’이 백제에 저항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20세기 전기에 일본이 만들어낸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게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란, 마치 일본열도의 통일 정권이 이들을 주도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파견한 양 후세에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일본서기’ 등의 고대 일본 역사서에서 ‘임나일본부’의 창세기(創世記)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른바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 정벌’ 전설이다. 이 전설의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면 진구코고의 남편인 주아이텐노(仲哀天皇)가 규슈 지역에 군사 원정을 갔다가 한반도를 정복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도 무시한 바람에 죽자, 진구코고가 이 신탁(神託)을 수행하여 신라·백제·고구려를 정복, 일본의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구코고라는 사람의 실존 여부, 과연 이 시기에 일본열도에 이처럼 대규모의 해외 원정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단일한 중앙집권 정권이 존재했는가의 문제를 포함하여 ‘진구코고의 삼한 정벌’ 전설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성의 여부와는 별도로 전근대 일본에서는 이 전설을 통해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군사적 개입과 국제관계를 설명해 왔다.
이처럼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지역에서 자신들의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 ‘진구코고의 삼한정벌’이었다면, 그 활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한 일본의 수군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한 663년 8월의 백강전투였다. 신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 등의 지배층을 당나라로 끌고 가자,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일본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군이 육지에서 신라군에 맞서고 일본 수군이 오늘날의 금강 근처에서 당의 수군과 맞서 바다를 피로 물들일 정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신라·당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백제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사라졌고, 그들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시도는 유라시아 동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으며, 한반도의 분열상태라는 불안정 요인이 제거되어 이후 신라·당·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유라시아 동부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일본열도 세력은 대륙 국가들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지정학적 요건에 힘입어 폐쇄적이고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러한 일본열도의 세력을 군사적으로 위협한 것은 13세기에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열도의 서부 지역을 침공한 사건이었다. 저명한 일본 중세사 연구자 아미노 요시히코가 지적하듯이 고려가 40년간 몽골의 침공에 항거한 덕택에 일본열도는 몽골의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느슨한 형태로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자 몽골은 고려를 연합하여 일본열도의 정복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일본열도를 지배하던 가마쿠라 막부의 군사 정권은 연합군에 의한 1274년, 1281년의 두 차례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막부는 무너지고 일본에는 두 명의 덴노(天皇)가 병립하는 분열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한 일본열도의 혼란기에 주로 서부 일본의 세력이 또 다시 유라시아 동부 대륙 지역에 대한 약탈과 점령을 시도하였다.
‘고려사’에서는 왜구가 처음으로 활동한 것을 1223년으로 전하면서도, 1350년 기사에서 ‘왜적의 침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설명과 함께 왜구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고대 영국의 역사서인 ‘앵글로 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도 유럽의 왜구라 할 바이킹의 첫 활동은 787년 기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793년 기사에서 “번개가 몰아치고 사나운 드래곤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 무시무시한 전조들이 노섬브리아 땅에 일어나 사람들을 매우 두렵게 하였다. 그 직후에 큰 기근이 있었고 같은 해 1월 8일에 이교도들의 무리가 린디스판에 자리한 하느님의 교회를 약탈하고 살육하였다”고 하여 바이킹의 활동이 이때 본격화되었음을 인상 깊게 전한다. 이처럼 왜구와 바이킹은 유라시아 동부와 서부의 대륙의 국가들에 충격을 주며 여러 세기에 걸쳐 활동하였지만, 노르망디·시칠리·러시아 등의 항구적 정착지를 마련한 바이킹과 달리 왜구는 대륙에 거점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일본에 상륙한 몽골·고려 연합군과 이를 피하는 일본인의 모습. ‘삼국퇴치 신덕전’ 중권. 개인 소장.
왜구 세력이 소멸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반도는 이종무가 이끄는 조선군이 1419년에 쓰시마를 공격한 것과 같이 일본열도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하였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무역을 활성화함으로써 왜구가 취할 수 있는 상업적 이익을 줄이고, 왜구에 섞여 있던 왕직(王直)과 같은 중국인을 회유하여 제거하였으며, 척계광(戚繼光)과 같은 장군들이 왜구에 맞설 수 있는 효과적인 전술 전략을 개발하였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통일 정권이 수립되면서 왜구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특히 도요토미 정권은 한편으로는 왜구를 진압한 공을 인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하여 전쟁의 명분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왜구 세력을 흡수하여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일부에 편성시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왜구의 활동과 임진왜란이라는 침략 전쟁을 동일한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지만, 왜구의 활동에서는 일본열도의 통일된 정권이 대륙을 정복하려는 의지와 그 의지가 실현되는 메커니즘이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이에 부정적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를 침공한 세 번째 사건이었다. 열도의 100년간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열도 내에 가톨릭을 포교하려 하자 일본을 불교와 신토(神道)의 국가로 규정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의 지배가 일본열도의 구석구석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조총이나 전함과 같은 가톨릭 국가들의 우수한 군사 물자를 지원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시행한 것과 같은 철저한 기독교 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고스티뇨 고니시 유키나가(Agostinho·小西行長)와 같은 유력 가톨릭 장군들이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a de Cespedes)와 같은 예수회 신부를 일종의 군종신부로서 한반도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임진왜란은 가톨릭을 믿지 않는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대한 일종의 ‘성전(聖戰)’이었다. 당시 유럽 가톨릭 국가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학살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니, 임진왜란 당시의 가톨릭 장군과 병사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중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립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 正)는 열렬한 불교신도였다. 그가 신앙한 불교는 13세기에 니치렌(日蓮)이라는 승려가 개창한 니치렌슈(日蓮宗)라는 종파이다. 니치렌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 의 힘으로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 침공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니치렌슈는 일종의 일본적 ‘호국불교’로서 기능하였다. 니치렌슈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일본이라는 국가보다 위에 있다는 근본주의적 주장을 펼치며 반란을 일으키거나 그때마다의 정권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다. 이 종교의 일파인 창가학회의 설립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는 일본 정부가 국가신도(家神道)를 강제하는 데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앙이나 사상에 투철하여 국가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사례는 일본열도의 역사상 보기 드물다. 참고로 같은 시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수십 명의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마찬가지 이유로 체포되어 옥응련 등이 옥사한 ‘등대사(燈臺社) 사건’이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박관준 등 수십 명의 기독교 신도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사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는 정치에 대한 종교의 우위를 주장하여 국가에 대립하는 것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일본의 토착 신앙인 신토와 니치렌슈라는 열광적 불교 종파의 가르침을 체화하여 자신의 군사적 행동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조선 침공을 선언한 도요토미는 가토가 독실한 니치렌슈 신도임을 알고는 이 종파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하사하였다. 가토는 이 깃발을 내걸고 임진왜란 7년간 한반도에서 활동하였으니, 그에게도 임진왜란은 니치렌슈를 믿지 않는 이교도와의 ‘성전’으로 간주되었을 터이다. 가토가 사명대사와 같은 조선의 불교 신도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로 임한 것 역시, 그가 임진왜란을 일종의 종교전쟁으로 보았음을 짐작케 한다. 불교는 역사상 평화로운 종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대규모의 승병(僧兵)을 지닌 사찰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 일본이나 미얀마·스리랑카의 현대사에서 보듯이 불교도가 공세적 입장에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듯 1592년의 개전 당시 일본군의 선봉에 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각기 기독교(가톨릭)와 불교(니치렌슈) 신도였으며, 이들에게 임진왜란은 일종의 종교전쟁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일본군이 부처와 일본의 여러 신의 도움으로 전투를 잘 치를 수 있다는 대목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었을 때 가장 잔인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음을 역사는 수천 년에 걸쳐 증명한다.
여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중에 전쟁의 목표를 변경하면서 임진왜란에서의 학살은 도를 더해갔다. 인도와 중국을 정복하여 중세까지 일본에 알려진 세계 전체인 인도·중국·일본을 모두 지배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던 전쟁 초기에는 한반도가 향후 장기전의 거점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은 한반도의 주민들에 대한 지배를 철저히 함으로써 군량미의 원활한 보급 등을 꾀하였다. 그러나 조선 민관(民官)의 항전과 명나라 군의 참전으로 인해 ‘세계 정복’의 기대가 1년 만에 꺾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반도의 남부 4개 지역만이라도 점령하고자 명나라 측에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한다.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러한 조건으로 강화 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명 조정의 일각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주장하는 등 조선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결국 국왕 교체와 한반도 분할안 모두 기각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력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1597년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자신들의 당초 의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보복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학살한 것은 주로 이 시기였다.
유라시아 동부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걸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여름에 사망하자 전쟁을 계속 할 명분을 상실한 일본군은 열도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부에 대한 지배를 꾀한 세 번째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시도가 유라시아 동부에 미친 영향은 이전의 두 차례와는 달랐다. 중국에서는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로 교체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서는 등 정권 교체가 있었다. 이 영향은 타이완과 동남아시아에까지 미쳐서 이들 지역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었다. 한반도는 분단의 위험을 피했지만 잇따른 쿠데타와 반란, 그리고 만주족과의 두 차례 전쟁과 점령이라는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왕조 교체에 준하는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유라시아 동부의 질서를 재편한 100년간의 장기적 변동기를 연 사건이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이 100년간의 격동기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3)
[주간조선] 임진왜란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을 바꿔놓았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입력2014.03.02. 15:33업데이트 2014.03.02. 15:37
'도요토미 히데요시 승진록'. 19세기 중기. 개인 소장
16세기 중기까지의 일본은 간헐적으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국가들을 괴롭히는 처치 곤란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이 이 국가들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당시 한반도와 중국 지역 국가들의 존망을 결정한 외부 세력은 주로 북아시아의 민족들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중기에 이르러 유라시아 동해안의 일본열도가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게 된다. 분열되어 있던 일본열도(오늘날의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제외)를 통일하려 한 오다 노부나가의 이질적이고도 이단적인 야망이 시작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을 통일한 뒤에 대륙을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가졌다고도 하는데, 그의 이러한 꿈은 부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는, 김일성의 생전 지시사항을 실현하는 것을 통치의 대의명분으로 삼는 김정일·김정은의 ‘유훈통치(遺訓通治)’ 체제와 비교할 수 있다. 권력을 장악한 뒤부터 사망까지의 도요토미를 보면, 그가 능란한 통치술을 구사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그의 권력의지가 어디를 향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들 대신 손자를 정권의 계승자로 내세우고 섭정을 한 이유는 무엇인지? 1592년에 이 세계의 어디까지를 정복할 심산으로 대한해협 너머 대규모 군대를 보냈는지? 자신의 권력 일부를 양도해 주었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뒤를 이을 아들이 태어난 직후에 할복으로 몰아간 것은 과연 그의 정상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아니, 마치 1941년에 하바롭스크 근처에서 태어난 김정일을 1942년에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북한과 같이, 애초에 그가 몇 년 며칠에 태어났는지부터가 불확실하다. 그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잘 알 수 없다. 여러 문헌에서는 도요토미의 아버지를 기노시타 야에몬(木下 右衛門)이라고 하며 이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노시타는 원래 농민이었다는 설, 하급 병사였다는 설, 아주 천한 신분의 사람이었다는 설 등, 도요토미의 아버지를 둘러싼 정보는 매우 혼란스럽다. 도요토미가 생전부터 이미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아버지의 존재를 말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기도 했기에, 태양의 아들을 낳은 것이 되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마치 성모 마리아와 같이 성스러운 존재로서 무한한 애정을 표현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어머니가 교토의 덴노(天皇)를 모시던 궁녀였는데, 어떤 귀족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얻은 뒤에 고향에 돌아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도요토미가 과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어디에 속한 사람이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일본에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는 과정에서 작용했을 권력의지의 지향점, 일본 바깥세계에 대한 관념, 자신의 사후에 도요토미 정권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할지에 대한 구상 등등 그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통일된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는 해가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에혼히요시마루’. 19세기 중기. 개인 소장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학설이 그렇듯이, 이들 다양한 의견은 그 자체로 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 서 있는 곳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알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도요토미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궁극적’ 목적이 조선의 정복이었다는 한국 일각의 주장은, 한국을 ‘선량한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일본을 그 선한 중심에 적대하는 ‘악의 축’으로 설정하는 기독교적 관점에 기반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를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해석하고 빛이 최후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믿은 조로아스터교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그 이원론(二元論) 말이다.
모든 집단이 자기 집단을 이 세계에서 가장 유의미하고 선량한 존재로 간주하고 집단 바깥에 사악한 적대 세력을 설정하는 것은, 자기 집단의 존속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행위이다. 다만 그러한 관점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기 집단의 그러한 세계관에 대해 바깥세계로부터 동조를 구하고자 할 때이다. 2014년 현재 한국은 조선어 탄압, 731부대의 생체실험, 종군위안부 문제 등을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인에 대해 저지른 범죄’로서 세계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안은 한·일 간에 국한되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이 인류의 존엄성을 훼손한 보편적 문제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여러 세력은 이들 사안을 한·일 간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데에서 벗어나 20세기 전반에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마찬가지의 피해를 입은 중국 및 2차대전 당시의 연합국 시민들, 나아가 인류 보편의 문제로서 일본국을 비판하는 일본계 미국인 마이클 마코토 혼다(Michael Makoto Honda) 의원 등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일본’을 한 덩어리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기존의 방식을 폐기하고, 조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언어를 쓰는 것을 금지당하고 학살당한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 묵묵히 징용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양심적 일본인’들과의 연대를 본격화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성숙해졌다는 증거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의 궁극적 목적이 조선에 국한된다고 보는 것은 전쟁 전후로 도요토미가 발급한 여러 문서와 충돌할 뿐 아니라 일본의 궁극적 목표가 자국임을 안 명나라가 20여만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해 전선(戰線)을 한반도에서 교착시킨 것이라는 당시 조선과 명의 해석과도 엇갈린다.
한편 이 처리 곤란한 난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의견은 “나이가 들어서 판단력이 흐려져 과대망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유라시아 동부를 뒤흔들고 한반도를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시킨 장기간의 국제전을 지나치게 도요토미 개인적인 이유로 환원시키는 인상을 준다. 역사가 필연보다 우연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주도할 수 있는 일개인의 사적인 사정이 결과적으로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움직임은, 역사 지리적 상황이 특정한 국면에 이르렀기 때문에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국수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A급 전범 용의자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에 대한 특별한 감정에서 비롯된 신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개인적 감정이 일본 국가의 정책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경제 불황 속에 자신감을 잃고 2011년의 도쿄전력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생존의 위기를 느낀 일본 사회의 피해의식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다. 나아가 명백한 우경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100여년 전처럼 세계에 위협을 줄 수 없으며 또한 임진왜란이라는 대형 사고를 친 뒤에 ‘쇄국(鎖國)’ 체제로 숨어버린 400여년 전처럼 할 수 없는 것은, 세계의 정치·경제적 구조가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해석할 때 지나치게 개인적 이유를 강조하고 그 사회적 배경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센세이셔널한 영웅주의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을 살펴보면, 한족(漢族)과 여러 비(非)한족 집단은 현재의 중국 동부 지역의 황하와 양쯔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을 거듭하였다. 물론 북아시아 지역의 집단들은 한족의 영역뿐 아니라 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 등으로도 세력을 팽창하였기 때문에, 이들 집단이 한족의 영역만을 절대시하여 정복을 시도했다고 말하는 것은 중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아무튼 중국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비한족 집단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면 그 집단의 거주지만큼 ‘중국’의 영역이 확장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최근세에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만주, 즉 현재의 동북삼성(東北三省) 지역을 비롯하여 몽골·티베트·위구르 등이 현재의 중국이라는 국가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예일대학의 피터 퍼듀(Peter C. Perdue) 교수는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이라는 책에서, 한족이 지배하는 현대 중국은 ‘이민족’ 정권이었던 청나라를 증오하면서도 그 이민족 정권이 만들어준 유산은 모두 계승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렇듯 중국사의 중심을 한족으로 두고 ‘이민족’이 한족에 흡수된 것으로 보아온 기존의 중화주의(中華主義) 관점을 비판하는 학설을 신청사(新淸史·New Qing History)라고 하며, 아시아·태평양 세력으로서 중국의 지나친 팽창을 억제하고 유라시아 동부의 여러 국가들을 후원하는 미국의 국책 학문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이렇듯 서로 밀고 밀리던 경쟁관계를 갖던 한족과 비한족 집단들이었으나 이른바 중국 ‘주변’ 지역의 집단들 가운데 이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집단이 둘 있었으니, 그 하나가 한반도의 한국인이고 또 하나가 일본열도의 일본인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되는 집단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부여·고구려·발해 등은 동북삼성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한반도까지 영역을 확대하였으나 끝내 황하 유역으로 서진(西進)하지 않았다. 한민족의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해 16세기 조선의 임제(林悌)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전했음을,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전한다. 즉 “자신의 죽음에 임하여 아들들이 슬퍼하자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황제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추한 나라에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라며 곡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만약 오대(五代)나 육조(六朝)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천자(天子)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농담 삼아 말하고는 했다고 한다.(권9 ‘인사문’. 한국고전종합DB에 의함) 실제로는 신라나 발해, 고려 등이 한때 연호(年號)를 세우고 황제국을 선언한 적이 있지만, 임제가 했다고 전하는 말을 음미하면, 그는 한반도에 있던 여러 국가들이 한족의 영역을 정복하지 않은 채로 ‘좁은’ 한반도에서 칭제건원(稱帝建元)한 것은 명실상부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이익은 임제가 농담을 잘했다고도 적고 있으니, 임제가 정말로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일종의 농담이라고 생각되지만 촌철살인(寸鐵殺人)임에는 틀림없다.
한편 일본열도의 세력들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백제 지원군이 당나라 군대와 충돌하고 왜구가 명나라의 해안 지역을 약탈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세력과 충돌하였다. 그러나 원양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서 해외로 보낼 만큼의 정치적 통일성이나 원동력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비한족 집단들과는 달리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족의 국가들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일은 없었다. 임진왜란은 이러한 상황에 근본적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 전쟁이었다.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거치며 풍부한 실전(實戰) 경험을 지닌 대규모 병력이 생기고 유럽 해양 세력들과의 접촉을 통해 해외 정보를 확보하게 되면서, 16세기 후기의 일본은 여타 비한족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명나라를 정복할 뿐 아니라 인도까지 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도요토미는 자신의 목표가 명나라임을 선언하고 조선이 그 선봉에 설 것을 요구했다. 물론 전쟁 발발 후 1년도 안 되어 중국 정복이 불가능함이 명백해지면서 도요토미의 야망은 꺾였고, 애당초 자신의 심복들인 서일본 세력을 주력 부대로 동원한 바람에 일본 국내의 정치 군사적 기반이 약화되어 도요토미 정권은 2대로 단명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가 ‘늙음에서 기인한 오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족의 영역을 지배하고자 한 모든 비한족 세력들의 시도가 성공한 것이 아니고 만주족과 같이 우연이 겹치며 명나라의 정복에 성공한 사례도 있다. 따라서 도요토미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명나라의 정복을 시도한 것은 한족과 비한족 세력들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합한 수천 년의 패턴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은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로 세계사에 등장하였음을 알린 사건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한반도가 북아시아 평원과 황하·양쯔강 지역의 외곽에 위치했기 때문에 한족과 비한족 세력 간의 충돌로부터 입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족의 중국을 정복하려 하자, 한반도는 험난한 동중국해를 항해하는 대신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교두보로서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원양 항해 기술이 오늘날과 같이 발달되어 있지 않던 당시에 일본이라는 유라시아 동해안의 신흥 세력이 자국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주요 루트인 한반도를 자국의 바깥 방패(번병·藩屛)로 삼아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16세기 후기에 한반도가 갖게 된 이러한 지정학적 동력(動力)은 120년 전에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여,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한 끝에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은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세력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몽골·러시아 등의 대륙 제국에 대하여 에스파니아·포르투갈·영국·미국 등의 해양 제국 모델이 세계사의 헤게모니를 잡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 육지보다 바다에서 움직이는 것이 더욱 편리해진 현재, 이러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2014년 현재 중국과 일본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동중국해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이다. 또한 남중국해의 영해권을 두고 베트남·타이완·필리핀·브루나이·말레이시아·미국과 중국이 전개하고 있는 새로운 전국시대는,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위기를 상대적으로 완화시켜 주는 효과를 낳고 있다. 한국의 일부 세력은 여전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노리며 북한에 접근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이 북한을 번병으로 거느리고 있다고 해석한다. 필자는 이를 ‘역사가 반복된다’는 가설을 지나치게 기계론적으로 해석한 데에서 비롯된 오류이자, 일본을 세계사 속의 불변하는 절대 악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적 종교관이며, 기술 문명의 발달이 이끌어낸 인류사의 비가역적(irreversible)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부의 변경이었던 16세기 중기 이전, 일본열도 세력의 대두로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해안의 지정학적 요충지가 된 임진왜란부터 20세기 전기에 이어,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세 번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인류 문명이 현재의 교통과 통신 기술을 폐기하지 않는 한, 한반도의 주민들은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험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상상력으로 미래 전략을 구상해야 할 것이다.(4)
[유성운의 역사정치] 임진왜란 후 재빨리 일어선 조선…그뒤엔 과감한 감세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19.05.19 06:00 업데이트 2019.05.26 23:55
신윤복이 그린 '야금모행(夜禁冒行)'
“도성(都城) 안은 위로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시정의 천인까지 모두가 지극히 사치하여, 벽에 바르는 것은 외국의 능화지(菱花紙)가 아니면 쓰지 않고, 입는 옷은 능단(綾段)ㆍ금수(錦繡)가 아니면 쓰지 않고, 타는 말은 모두가 상승(上乘)이고, 먹는 음식은 모두가 맛나고 기름진 것이니… 그 밖에 혼인과 음식의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금단하는 일을 전하께서 먼저 궁중부터 다스리시면 뭇 신하가 어찌 감히 분수를 넘어서 함부로 행하겠습니까.” (『효종실록』 효종 3년 11월 13일)
이조판서를 지냈던 조경이 올린 상소문의 일부입니다. 능화지는 궁궐 침전 등에서는 색과 무늬가 있는 고급 종이고, 능단과 금수는 모두 화려한 고급 비단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효종 3년은 1653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반세기 가량 지난 때입니다. 물론 50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7년간의 전쟁으로 온 국토가 황폐해졌던 조선은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신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경대부로부터 시정의 천인까지 지극히 사치한다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소문을 올렸을 당시 조경은 일흔을 바라보는 원로였습니다. 혹시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꼰대’의 못마땅함으로 상황을 과장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조차 남보다 의복이 뒤처질까 우려하고, 음식이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승정원일기』, 현종 5년 11월 4일)는 기록처럼 이 시기의 사치풍조를 염려한 건 조경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떻게 외부의 조력도 없이 반세기 만에 이처럼 전후복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임진왜란 후 재건 프로젝트-‘여민휴식’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600년 9월 국정의 최고기구였던 비변사는 전후 복구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12개 조로 구성된 이 계획은 이후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고 불린 국정 어젠다로 향후 60여년간 지켜졌습니다.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하면서 안정 속에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을 지닌 ‘여민휴식’ 네 글자엔 임진왜란 전 국정 운영에 대한 쓰라린 반성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7년간의 전쟁 중 조선의 지배층이 목도한 것은 전국 곳곳에서 나타난 심각한 수준의 민심의 이반이었습니다. 반란(이몽학의 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백성들이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면서 일본군의 길잡이인 ‘순왜(順倭)’가 되는가 하면, 조선 관군을 공격하는 일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심지어 순왜 무리가 선조의 맏아들인 임해군을 사로잡아 일본군에 넘기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여민휴식’의 큰 틀은 토지 복구, 국가 재정 감축, 세금 감면이라는 큰 틀 아래 추진됐습니다. 민간의 부담을 최소화시키는 한편 중앙정부 차원의 개입보다는 민간경제를 활성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죠.
개간하면 세금 혜택을 드립니다.
조선 후기 양기훈의 밭갈이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조선에선 생산성이 높은 하삼도(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농업 상태가 사실상 국가 경제를 좌우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반도체ㆍIT 산업군 정도랄까요.
임진왜란 전 조선의 총 농경지 면적은 151만5500 결(結)이었는데 ‘하삼도’는 66.2%(100만9720 결)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죠.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 보고된 하삼도의 토지는 29만 결에 불과했습니다. 전쟁 전 1/3 수준도 안 될 정도로 급감한 것이죠. 토지 복구가 가장 긴급 과제로 떠오른 정부는 진황전(陳荒田)이라고 불린 황무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악화된 민심을 감안할 때 개간을 지시한다고만 해서 성과가 담보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당근책을 제시했습니다. 토지를 개간하면 관청의 둔전(屯田)이나 개인 소유의 전답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이는 각 지방의 생산 잠재력을 크게 자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효종실록 [연합뉴스]
지방관의 입장에선 진황전을 개간해 관청의 수입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가용 예산이 늘어나는데다 개간 성과가 좋으면 근무평점에서도 고가를 받을 수 있으니 1석 2조나 다름없었습니다. 민간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길만 했습니다. 국가의 용인 아래 재산을 불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죠. 조선의 산업은 사실상 농업이 전부라는 점을 참작하면, 황무지 개발은 당시로선 벤처창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사족’이라고 불린 지방의 유력 세력들은 노비도 다수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간산업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지방 관청도 성과를 내기 위해 종자와 농우를 지급하며 초기 자본을 대주는 등 독려했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부는 당근책을 더 내밀었습니다. 개간된 토지를 최저 등급인 6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죠. 토지의 비옥도와 수확량에 따라 매겨지는 등급이 낮으면 그만큼 세금도 줄어듭니다. 이런 이유로 전국 각지에서 개간 열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전쟁 후 복구사업은 대규모 국가예산을 투입해 경기를 활성화시키곤 하지만 이번엔 지역의 가용 자본을 자발적으로 끌어당긴 것이죠.
17세기 후반에 편찬된 경북 성주 지역의 지방지 『경산지(京山志)』에 따르면 이곳의 농경지들은 대부분 1600년대 중반에 개간사업이 완료된 것으로 나옵니다. ‘여민휴식’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입니다. 개간 열기가 과열돼 지역에서 보존해온 산림이나 저수지까지 농토로 바꿔버리는 세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개간 사업을 장려한 중앙 정부가 착수한 것은 세금 경감 정책이었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냈던 세금은 토지 1결당 생산량의 12.1%~15.4% 정도라고 합니다. 통상 20%가량을 납부한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줄어든 셈이지요. 10% 이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세금을 줄인다는 것은 정부의 씀씀이를 줄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없습니다. 이 때는 국채를 발행한다든가 적자 재정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조선 정부는 재정 규모를 최소화하는 재정 개혁안도 내놓았습니다. 다만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깎아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긴축예산안을 만드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 밑에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첫 날부터 끝난 날까지 기록한 '징비록' 초본. ‘징비록(懲毖錄)은 ‘지난날의 잘못을 경계해 뒤에 환난이 없도록 삼가다’는 뜻이다. [중앙포토]
그렇게 해서 1605년에 나온 긴축예산안이 ‘을사공안(乙巳貢案)’입니다. 공안(貢案)은 세입을 바탕으로 왕실과 중앙의 각 관청이 필요로 하는 자금과 물품을 공급해주는 예산 지침서입니다.
을사공안에 따르면, 연간 국가재정의 총규모는 쌀 10만 석 미만으로 정해졌습니다. 이는 임진왜란 전 예산인 20만 석의 절반에 불과한 수치였습니다. 조정은 관료들의 인건비 같은 경상비 외엔 대부분 삭감하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자구책을 내놓았습니다. 정부가 재정규모 축소를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외에 국가 주도의 대규모 사업이나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진 예산 외에는 모두 폐지 혹은 축소했습니다.
조선의 빠른 회복과 혁신의 노력
임진왜란 전과 '을해양안(1635년) 당시의 토지 면적 비교.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인용
이런 노력은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 따르면 1632년에 시행한 토지조사 사업에서 하삼도 지역의 토지면적은 89만4871 결로 나타납니다. 30년 만에 임진왜란 전 89% 수준까지 복구한 셈입니다.
심지어 37만9438 결(42.4%)에 달하는 ‘진황잡탈전(陳荒雜?田)’에선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정작 이 시기 국가 연간재정은 20만 석을 회복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의 재건 프로젝트가 얼마나 확실한 결과를 거둬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42.4%나 되는 토지에 세금을 거두지 않고도 재정 확보가 가능했을까요.
서울 미동초등학교생들이 8일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 뜰에서 손모내기 체험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전쟁이 끝난 데다 농토가 확장되고 세금은 줄다 보니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토지는 한정됐기 때문에 개간을 무한정 할 수는 없었죠. 결국 생산력을 증대하려면 농업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됐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도입된 것이 이앙법(모내기)입니다. 수전 농업의 대표적 기술인 이앙법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을 2배 가량 늘릴 수 있지만 풍부한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뭄에는 취약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선 이앙법을 막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인구 증가와 느슨해진 중앙 정부의 통제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17세기 초반만 해도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만 쓴 이앙법이 18세기 초엔 평안도까지 퍼졌을 정도로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갑니다. 농민들은 보나 저수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가뭄에 대처하는 방법을 발전시키면서 과감하게 이앙법을 확대해 나갔습다.
조선 정부 역시 기존의 농업 위주 경제를 벗어나 상업과 유통경제에 눈을 돌렸고 염전이나 은광 개발, 동전 주조 등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임진왜란의 충격에서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사적 제118호 진주성 [연합뉴스]
조선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도 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의 오랜 물음표였습니다. 심지어 일본과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모두 정권이 무너지는 흐름에서 정작 무능함을 드러낸 지배층이 어떻게 계속해서 200년을 더 이어나갈 수 있었냐는 것이죠. 과거엔 조선 양반층이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해 사회 불만을 억눌렀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그러한 강압보다는 지도층의 각성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상처는 컸습니다. 조선의 인구는 1/3 가량 감소했고, 토지의 70~80% 가까이 황폐해졌습니다. 말 그대로 그로기 상태에 놓인 꼴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조선의 국정 운영자들은 과감하면서도 유연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세금을 줄이고, 민간의 참여를 늘리고, 국가 예산을 긴축하면서 사회 구성원의 이해를 구했습니다. 또 100년의 시간을 들여 대동법이라는 세제 개혁을 완성시키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등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용을 해본 뒤 그 성과를 갖고 전국에 확대하는 방식을 쓴 것이죠.
정부의 이런 노력에 민간은 기꺼이 응답했고, 조선은 불과 50년 만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조선사에서 민관이 함께 전진했던 몇 안 되는 장면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 시행기념비`. 1659년(효종 10)에 김육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에게 균역하게 한 공로를 잊지 않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남 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설치했다. [중앙포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재정 규모는 갈수록 불어나는데 민간의 체감 경기는 살아나지 않는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인구 변동이나 제조업의 쇠퇴 흐름 등을 감안하면 분명 어려운 시기이고, 정부가 주장하는 '체질 개선'이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울 강남의 유명 상권조차 줄줄이 빈 점포가 늘어나거나 중견 기업들이 줄줄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상황을 보면 "경제의 큰 그림을 보라"는 정부의 설명이 언제까지 힘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경제는 심리라고 하죠. 조선이 임진왜란 후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던 데는 체감할 수 있는 결과가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예를 들어 세금 혜택을 받는 개간지가 재산으로 불어나는 것처럼 말이죠. 집권 3년차로 접어들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 성적표가 숫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 체감되는 성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신병주『1623년 인조반정의 경과와 그 현재적 의미』, 조광 『17세기 동아시아사의 전개와 특성-한국사의 흐름을 17세기 세계사 속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기사에서 쓰인 수치 및 통계는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인용했습니다.(5)
만일 어느 한 사람에게 임진왜란(1592∼1598)이란 국제전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단연 첫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실제로 동아시아 질서의 주도권을 움켜쥔 사람은 청조(淸朝)를 건설한 누르하치였다. 이 두 사람은 16세기말 동아시아 세계의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 한 야심 찬 도전자였다는 점에서 같지만, 이처럼 결과는 판이했다.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패하고 누르하치는 성공했을까. 계승범의 글은 그 차이를 대단히 흥미롭게 말해준다. 필자는 누르하치나 히데요시가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명(明)의 분신처럼 여겨졌던 조선을 마주해야 했는데, 그 대응 방식이 대조적이었음에 주목한다. 누르하치는 외교를 통해 조선과 명의 결속을 차단한 다음 중원을 겨냥하는 신중한 행보를 보인 반면,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해 오히려 조선과 명의 군사 동맹을 강화시켰고, 결국 그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히데요시의 오판이 개인적 문제에 기인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W J 보트도 이 책의 다른 논문에서 히데요시가 결코 전쟁광이 아니었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었음을 지적했다. 계승범은 히데요시의 선택이 동아시아세계에서 일본이 갖는 역사적 위치와 관련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히데요시의 일본은 명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세계 안에 들어가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책봉-조공 제도의 명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단지 자신의 특기인 전쟁의 방식에 기댔을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시스템의 내부에서 그 장단점을 정확히 이해했던 누르하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史에 대한 몰이해
누르하치와 히데요시 비교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 안에서 침략과 저항의 이야기로 임진왜란을 이해해온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먼저 동아시아사(史)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동아시아사 관점이란 조선과 일본, 중국과 랴오둥(遼東) 등을 포함하는 다자 관계 분석과 더불어 책봉-조공관계에 기초를 둔 동아시아 질서의 성격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 위에서 임진왜란이 논의될 때, 우리는 히데요시의 군사적 모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임진왜란이 어떻게 기억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책에 실린 다카키 히로시의 글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히데요시를 현창하고 기념하는 과정과 그 현실적 배경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한일강제합방 이후 조선침략의 선구자로서, 나아가 대동아 건설의 웅지를 품었던 선각자로서 히데요시의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조작된 기억이 통용될 수 있게 하는 기름진 토양은 일차적으로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집단적인 망각과 몰이해일 것이다. 서구 역사학의 유입으로 역사의 이해가 국가 단위로 쪼개짐으로써 동아시아사에 대한 종합적 이해는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사 연구를 제기하는 것은 현재의 국가 기억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이성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이 지역에 화해와 공존의 초석을 다지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은 ‘임진왜란 - 동아시아 삼국전쟁’에서 표방하는 문제의식의 요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두 해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서강대 정두희 교수 주도 아래 2003년부터 기초연구와 자료 조사, 그리고 국제 학술회의를 거쳐 책이 나오기까지 5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 미국, 네덜란드 등 다양한 지역의 전문가들이 저자로 참석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문을 작성했다. 급조된 연구 성과가 드물지 않은 현실에서 이러한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은 한국인의 민족적 정서에 부합하는 면이 있어 독자에게 별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 책은 불편한 진실들에 더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전쟁 기억의 조작은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 실린 몇 편의 글은 그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
정지영은 놀랍게도 논개가 왜장을 안고 죽었다는 얘기는 입증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논개가 역사 속 인물로 기억되는 것은 6·25전쟁 이후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로 논개의 충절이 활용된 결과다. 그 이야기 안에서 논개는 기생으로서 본래 타락한 존재이지만, 국가에 충성을 바치면 순결해질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됐다. 논개를 민족의 이름으로 현창하지만 사실 여성과 소외 계층을 배제하는 위계 논리가 민족 담론 안에 작동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요네타니의 글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사람들의 운명을 추적한 것이다. 그 수가 대략 수만에 달하고, 종전 이후 6000여 명이 귀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뜻밖에도 귀환 포로들이 대부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불행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동안 일본의 대규모 인신 약탈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았지만, 막상 귀환 포로들을 조선에서 어떻게 대접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영휘의 글은 홍의장군 곽재우가 정유재란 때,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조작된 것임을 실증한다. 영조대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조헌과 칠백의총을 현창하자, 그에 대항하여 남인 집단이 ‘동고록’을 출간해 화왕산성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상의 글들은 임진왜란에 대한 한국인의 민족적 기억이 실제로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당혹스러운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편 존 B 던컨은 역사에서 기억이 국가나 특정한 집단에 의해 조작되는 것만은 아님을 폭넓은 시각에서 보여준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유포된 ‘임진록’에 드러난 일본과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지적한 뒤, 개항 이전에 이미 조선의 비엘리트층 사이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향촌 사회를 뛰어넘는 일체감이 존재했다고 평가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경험은 점진적으로 한국 사회에 ‘민족’이 형성되는 기반을 제공한 셈이다.
이순신의 기억에 대한 계보를 추적한 정두희는 나아가 기억 연구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순신에 대한 근대적 기억을 검토한 결과 신채호를 제외하면, 모두 이순신이 당면했던 조선의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감추었다고 지적한다. 이순신은 무서운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도피처(229쪽) 였던 셈이다. 정두희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의 역사를 역사적으로 파헤치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랴오둥과 중국적 세계질서
이 책의 총설에서 김자현은 임진왜란을 근대 일본이 취한 팽창주의의 역사적 전조로 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그것은 근대 세계의 형성을 정적인 대륙세력과 역동적인 해양세력의 충돌로 이해하는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이해라는 것이다(33쪽). 임진왜란은 종종 책봉-조공에 기초를 둔 동아시아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린 획기적 전쟁으로 평가되지만 그러한 지적은 그 뒤 어떠한 질서가 이 지역에 들어섰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한 설명은 강대국 일본의 대두라는 근대적 상황을 연상시킬 뿐이다.
전통적인 세계질서의 파괴라는 담론은 또 한편으로 이 전쟁에 참가한 명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하지만 케네스 스워프는 명의 황제인 만력제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명의 서북방 닝샤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만일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명의 주력군이 일본군보다 먼저 서울에 당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의 황제는 조공국에 대한 책봉국의 의무를 강조했고, 그 점에서 중국의 전통적 외교관계는 여전히 견고했다는 것이다(353쪽).
김한규의 글은 이 문제에 대한 거시적인 이해를 돕는다. 그는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역사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당 시기에는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에 맞서 관중에 근거한 중원왕조가 동아시아 세계를 주도하였으나, 송-청 시기에는 랴오둥에서 건립된 요, 금, 원, 청 등 정복왕조가 잇달아 출현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원과 청 사이에 있었던 명은 고대시기처럼 재차 중원에서 건립된 한족 왕조였고, 그 결과 이 시기 랴오둥은 주변부로 전락했다. 힘의 공백지대가 된 랴오둥에 고려(말)와 조선(초)이 진출을 시도했고, 그 다음 일본이 나선 것이 임진왜란이었다. 따라서 이후 랴오둥에 출현한 청의 누르하치가 동아시아 패권을 재차 장악한 것은 송-청 시기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정상적인 회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임진왜란이 주변 지역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오기는 했으나, 주자학과 문관 관료제에 기초한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는 당분간 견고하게 유지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책은 임진왜란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많은 숙제를 남겼다.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6)
▲ 정유재란이 끝나는 1598년 11월 19일에 벌어진 노량해전의 모습을 그린 그림. 등장인물 약 4400명으로 연합군 2330명, 왜군 2070명으로 그 중 884명이 시체거나 물에 빠진 군사이고 선박은 205척이 묘사되어있다. 그중 136척은 연합군 선박이며 99척은 왜군 선박이다
순천시로부터 정유재란(1597~1598) 당시 순천왜교성 전투를 그린 '임진정왜도(壬辰征倭圖)' 자료집(1999)을 구했다. '임진정왜도'는 '임진왜란 때 일본을 정벌한 그림'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순천왜성을 중심으로 연합군(조선군-명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 상황 뿐만 아니라 노량해전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화가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정황상 명나라를 따라왔던 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두루마리로 된 그림의 길이는 6.5m다. 이 작품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을 소재로 한 것 중에 유일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내용이 중국인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이나 거북선은 등장하지 않아 아쉽다.
'임진정왜도'가 빛을 보게 된 경위는 흥미롭다. 오래전 미국의 한 교수가 미국에 사는 중국 태생 시민으로부터 이 그림에 대한 평가를 요청받았다. 그 교수는 이렇게 얻어볼 수 있었던 그림을 한 세트의 사진들로 찍었는데 대부분은 흑백사진이었고 몇 부분만 컬러사진으로 찍었다. 그림은 중개인을 통해 홍콩에 살고있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팔려 현재는 소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1968년경 미국 컬럼비아 대학 한국학 교수인 게리레드야드 교수가 다른 미국 교수에게서 흑백사진을 부분적으로 찍은 사진 한 세트를 보관하고 있던 것을 1998년 11월 순천시 전통문화보존회에서 조순승 전 국회의원을 통해 교섭해 필름 11장을 입수했다.
▲ 복원된 순천왜교성 모습으로 가운데 우뚝솟아 있는 부분에 일본군 수장이 거처하는 천수각이 있었다.
순천왜교성 전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이 1598년 8월에 급사했다는 전보를 듣고 철군을 서둘렀던 왜교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군과 조명연합군간에 3개월 동안 벌어진 최대 최후의 격전을 펼친 전투다.
당시 전쟁에 참전한 조선과 명나라의 지휘부를 보면 육상군은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의 제독인 유정, 해상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의 도독인 진린으로 왜교성에서 요새를 구축했던 왜군 장수는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임진정왜도'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저술가들이 전쟁에 관한 여러 가지 저술을 했었지만 그림으로써 보여준 것은 전혀 없었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던 거북선을 그렸다고 하는 그림들도 훨씬 뒤에 그려진 것이다. 대부분 전쟁이 끝난 지 200년 후에 그려진 것들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했던 해전인 노량해전을 상세하게 묘사한 그림이 발견된 것은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전투도 속에 거북선은 한 척도 등장하지 않지만 생생한 전투 장면과 놀랄만한 화필은 당시의 정황과 전장의 긴박함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한다.
'임진정왜도'를 그린 화가의 이름은 미상이다. 그러나 왜교성 전투와 노량해전의 목격자인 것이 확실하고, 정유재란 당시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온 명나라 장군들 중 한 장군의 참모부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은 조선인이 아닌 명나라 사람이 그렸기 때문에 조선의 병사와 선박들은 비록 그림속에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지식 없이는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그려진 길이 6.5m 두루마리 그림에 나오는 장면들은 시간상으로는 정유재란이 끝나기 전 약 3개월, 거리상으로는 약 30km를 포괄한다.
▲ 정유재란이 끝나는 1598년 11월 19일에 벌어진 노량해전의 모습을 그린 그림. 등장인물 약 4400명으로 연합군 2330명, 왜군 2070명으로 그 중 884명이 시체거나 물에 빠진 군사이고 선박은 205척이 묘사되어있다. 그중 136척은 연합군 선박이며 99척은 왜군 선박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약 4400명이다. 왜군이 약 2070명(884명은 시체이거나 물에 빠진 사람)이고 2330명가량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다. 바다를 메우고 있는 205척의 배 가운데 136척은 명과 조선측 선박이고 99척이 왜선박이다. 왜선박 가운데 53척은 바다에 떠있고 46척은 불길에 휩싸였거나 침몰당하고 있다. 연합군 선박은 한 척도 불붙거나 침몰당하지 않아 역사적 사실과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육지에는 나무 184그루, 건물 196채, 487개의 깃발이 점점이 산재돼 있다. 사용된 무기로는 대포 75문, 조총 322정이 있고 무수한 창검과 활, 화살이 그려져 있다.
태극기의 원형으로 보이는 조선수군기 모습? 놀랍다
기대했던 거북선은 보이지 않았지만 의외로 놀랄만한 그림이 있다. 조선수군의 배로 추정되는 배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한국이 최초로 근대적인 국제관계에 들어서면서 한국을 나타낼 국기가 필요해 1882년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정왜도'를 통해 거의 300년 전에 그려진 그림 속에 태극기의 선구적 원형이 담겨 있다고도 해석 가능하다. 더구나 태극기의 출현은 중국 선박이나 일본 선박으로부터 조선 선박임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국가의 상징이었음을 증명한 셈이다.
순천왜교성을 공격하고 있는 전함 가운데는 맨 앞에 특이한 깃발을 단 두 척의 전함이 있다. 한 척은 '천병(天兵)'이라는 깃발을 달고 있어 당시 조선에 출정한 중국 군인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른 한 척은 태극기와 유사하다.
그림에 보이는 증거로 보아 한국인들은 매우 오래전부터 태극을 국가적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속 깃발에는 태극말고도 네 귀퉁이에 꽃무늬 같기도 하고 새 무늬 같기도 한 것이 배열돼 있다. 이 네 귀퉁이에 그려진 무늬가 가운데 태극을 향하고 있다.
▲ 연합군 함대를 확대한 장면으로 오른쪽 상단에 조선수군으로 보이는 선박에 태극기의 원형으로 보이는 깃발이 달려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태극기에서 볼 수 있는 네 귀퉁이의 괘와 일치한다. 화가는 '천병'기와 '태극'기로써 중국 선박과 조선 선박을 구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두 배에 타고 있는 수군의 제복으로도 구분된다. 명나라수군들은 술이 달린 투구를 썼고 조선수군들은 현대 소방관의 헬멧과도 같은 밋밋한 투구를 쓰고 있다.
태극기의 기원은 1882년 대일 수교사절단의 사신들이 창안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이 사용한 깃발을 유추해보면 태극기의 기원이 조선수군기에서 유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임진정왜도'는 정유재란 당시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태극기의 원형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7)
사명대사 유정의 초상화. 화면 왼쪽 위에 ‘널리 세상을 구하는 스님’이라는 뜻의 사명대사의 시호인 ‘자통홍제존자’에서 나왔다. ‘송운’은 사명대사의 별호이다. |동국대박물관 소장
“승장 유정의 정예병이 왜적을 참획(斬獲)하는 공을 여러번 세웠다. 그렇지만 속세를 떠난 유정이 군직(軍職)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파격적인 상을 내려 훗날의 공효를 거두지 않을 수 없다. 유정에게는 당상관(堂上官·정 3품 이상)의 직을 제수하여….” 1593년(선조 26년) 4월 12일 선조가 승병장인 사명대사 유정(1544~1610)에게 “당상관(정 3품 이상)의 상급을 내리라”는 특명을 내렸다는 내용의 <선조실록> 기사이다. 그런데 이 기사를 쓴 사관이 붙인 평가가 폐부를 찌른다.
“전란을 당해 날래고 건장한 장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는데 엄청난 전공이 도리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늙은 승려에게서 나왔다. 이것이 어찌 무사들만의 수치이겠는가.”
<실록>의 사가는 쉰살이 된 사명대사의 분전을 인용하면서 임진왜란 때 도망가기 바빴고, 두려움에 떨기에 급급했던 무사는 물론 조정대신들까지 싸잡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은 사명대사가 ‘중생을 구하라’는 스승 서산대사(1520~1604)가 남긴 뜻에 따라 일본에 왔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행(使行)의 목적이 포로송환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고쇼지 소장
■‘당상관으로 예우하라.’
대체 사명대사의 공훈이 얼마나 컸기에 임금이 나서 당상관의 예우로 대접했을까.
사명대사는 임진왜란(1592-1598) 때 의승군(義僧軍)을 이끈 승병장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은 물론이고 조정의 명망대신들까지 줄행랑 쳤다. 그럼에도 초야에 묻힌 선비와 백성들은 물론이고, 속세를 떠난 스님들까지 분연히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의 사명대사 행적은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진다.
먼저 유몽인(1559~1623)의 야담집인 <어우야담>을 보자.
임진왜란 때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에 있었다. 그런데 왜병들이 금강산에 들이닥치자 사명대사는 다른 스님들과 함께 깊은 골짜기로 피난했다. 이때 왜적들이 유점사를 약탈하고 미처 피하지 못한 스님 10여명을 묶어두고 금은보화를 뒤졌다.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자 왜적들은 스님들을 죽이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명대사는 다른 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점사로 달려가 왜병들이 총칼을 들고 도열해있는 길을 유유히 통과했다.
단숨에 법당까지 올라간 사명대사가 왜장들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기웃거렸다. 어이가 없어진 왜장들이 “뭐하는 거냐. 빨리 이 절에 있는 금은보화를 내놓아라”고 윽박질렀다.
사명대사는 이때 “불법은 살생을 하지않고 자비를 전부로 하고 있는데 죽인다는게 말이 되냐”면서 “마을을 돌며 걸식하고 사는 스님들이 무슨 금은보화가 있겠냐”고 오히려 큰소리 쳤다. 대사의 언성에 기가 죽은 왜장이 묶여있던 스님 20여명을 풀어주었다. 스님들을 구해낸 사명대사는 소매를 떨치고 지팡이를 끌며 절을 나섰는데, 이때 왜장들은 “이 절에는 도를 아는 고승이 있으니 모든 장병은 다시는 절에 들어가지 말라”고 명했다.
<어우야담>의 작자인 유몽인은 사명대사와 동시대인이다. 당대 민간에서 사명대사가 신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애 류성룡의 <서애집>은 약간 버전이 다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병들이 난입했는데도 금강산에 있던 사명대사가 꿈쩍도 않고 홀로 가부좌하고 앉아있었다. 이를 본 왜병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빙 둘러서서 합장을 하고 존경에 마지 않으며 철수했다. 이후 왜병들은 유점사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사명대사의 유묵. ‘벽란도의 시운을 빌려 지은 시’는 임진왜란부터 10년간 사명대사의 감회가 담긴 시다. 일본에서의 사명을 잘 마무리 지은 뒤 속세를 정리하고 선승의 본분으로 돌아간다는 사명대사의 의지가 드러난다.|일본 교토 고쇼지 소장
■“선승의 참뜻은 백성 구제에 있다”
사명대사는 스님 몇 명을 구해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가만히 금강산에 앉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사는 “나라와 백성을 등지고 세상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불자의 도리는 아니며, 산중에서 세속 티끌을 떠나 마음을 닦는 선승의 참뜻은 세상의 뭇 백성들을 구제하려는 것”이라 믿었다.
선조 임금의 피란소식을 들은 사명대사가 통곡하며 남겼다는 글이 있다.
“국왕의 깃발이 서쪽으로 향하니 궁성이 텅 비고,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길 가운데서 헤맨다. 해는 저물고 요동은 멀어 어느 곳인고. 초의(승려 자신)가 머리를 돌이키니 눈물이 그지 없다.”(<사명대사전집>)
그러나 마냥 통곡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명대사는 “혈기있는 자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거늘 비록 이 몸은 산승이지만 조금은 지각있는 자인데 어찌 보고만 있느냐”(<분충서란록>)고 다짐했다. 대사는 여러 스님들에게 “지금 이처럼 어렵고 위태로울 때를 만나 어찌 가만히 있겠느냐”고 설득하며 승병을 모았다. 사명대사가 모은 승병은 처음엔 210여 명 정도였지만 류성룡(1542~1607)의 <서애별집>을 보면 1000명 정도로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못난 임금을 ‘미인’이라 칭하고…
1592년(선조 25년) 10월 승병을 이끌고 순안(평안도 평원)으로 달려간 사명대사가 남긴 다짐을 보라.
“왜적이 잇달아 덤벼 백성들을 어육으로 만들고 길가에 송장이 서로 베고 있네. 통곡하고 다시 통곡하니 날은 저물고 산은 창창하다. 미인(국왕)을 하늘 한 끝에 바라보네.”(<사명당대사집>)
대단하지 않은가. 전쟁이 나자 맨 먼저 줄행랑쳤던 임금을 ‘미인’이라고 일컬으면서 충성을 다짐하는 모습이…. 비단 사명대사 뿐 아니라 이름없는 백성들도 의병의 기치 아래 모였으니 이런 착한 백성들이 어디 있는가.
사명대사는 순안에서 스승인 서산대사(1520~1604)의 부장이 되어 군량을 마련하고 제반 병기를 손질한 뒤 전장에 나가 왜적을 무찔렀다. 이때 조정은 사명대사에게 절충장군과 함께 팔도의승군 부총섭의 직함을 내렸다. 그 이야기가 맨처음 인용한 1593년 4월12일 <선조실록> 기사이다.
사명대사는 승병 2000여 명을 거느리고 대동강 남쪽으로 건너가 왜적의 통로를 차단한 뒤 1593년(선조 26년) 1월 벌어진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군은 명나라 군과 함께 모란봉의 적진을 향해 진격하여 한사람의 희생도 없이 적병 2000여명을 죽였다.(<건봉사 사적비문>)
사명대사가 일본 승려 엔니에게 ‘허응’이라는 도호를 지어주고 써준 글씨. |고쇼지 소장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사명대사의 또다른 공적은 적진에 뛰어들어 왜장하고 담판을 지은 것이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1594년(선조 27년) 왜군은 서생포(울산)과 거제도. 웅천(창원) 사이 여러 곳에 왜성을 쌓고 지구전에 대비했다, 전쟁은 바야흐로 소강상태에 빠진 것이다. 사명대사는 당시 세수 51세였는데, 군량미 충당을 위해 승병을 동원해서 땅을 갈고 보리를 심었다.
그 사이 명나라와 왜 사이에 강화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강화협상은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사신 심유경(?~1597)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558~1600) 사이에 진행됐다.
이무렵 사명대사는 도원수 권율(1537~1599)과 명군도독 유정(?~1619)의 지시에 따라 서생포에 주둔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 진영에 4차례나 들어가 회담했다.
이 때 왜군진영에서는 명나라와 왜 사이에 추진되던 강화조약의 내용을 전해주었다. 사명대사는 그 내용을 전해듣고 깜짝 놀랐다. 그 조건이란 명나라 황녀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과 예전처럼 교린할 것, 조선 땅을 떼어줄 것과 조선의 왕자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이었다.
■사명대사에게 글을 받아간 가토
이런 조건을 들은 사명대사는 불가한 이유를 조목조목 대며 “말도 안되는 조건”이라고 비판했다.
“…조선땅을 떼어 일본에 준다고? 일본이 명분없이 군사를 일으켜 함부로 조선의 땅을 짓밟고 생령을 도탄의 지경에 빠뜨려서 중국 황제까지 지원군을 보내 3년간이나 싸웠다. 그런 마당에 땅을 떼어줄 리가 있는가…또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낸다? 이게 말이 되는가.”
이에 가토 기요마사 진영에서는 “명나라와 일본의 조약이 깨지면 일본군사는 다시 바다를 건너 명나라를 직행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조선백성들은 한꺼번에 굶어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렇지만 사명대사는 “우리 조선은 예와 의에 죽고사는 나라다. 백번 죽는 한이 있어도 명나라와 일본의 화약조건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사명대사가 그렇게 굴하지 않고 할말을 다 하자 가토 기요마사도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토는 “내가 함경도에 있을 때 ‘강원도 금강산에 귀한 스님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대사가 바로 그 분일 것”이라면서 “이렇게 만나주니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했다.
사실 가토 기요마사는 ‘악귀’라는 별명에 맞게 흉악무도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자가 종이와 부채를 여럿 가지고 와서 사명대사의 글씨를 받아갔다. 이에 사명대사는 가토에게 “옳은 일이 아니면 이로움을 찾지 말라. 밝은 곳에는 해와 달이 있고, 어두운 곳에는 귀신이 있으니,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털 한 올이라도 탐내지 말라.(正其誼而 不謀其利 明有日月 暗有鬼神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고 써주었다.
한마디로 “남의 땅을 탐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라”고 비판한 것이다. 그럼에도 왜병들은 사명대사의 글을 받아가느라 줄을 섰다. 사명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병으로 일어난 나라는 멸망하는데, 일본은 스스로 그 멸망을 취하고 있다”면서 “조선과 명나라군이 합세했으니 너희 군사들쯤이야 담소하면서 막아낼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사명대사의 친필. 신라말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시 중 두 구절이다. |고쇼지 소장
■“그대가 환속하면 지방장관 시키겠다”
사명대사는 1594년(선조 27년) 9월 선조에게 ‘적을 치고 백성을 보전하기 위한 글’을 올렸다.
대사는 이 상소문에서 적진의 상황 등 보고한 뒤에 “허락하신다면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터로 달려나가 왜적을 몰아낼 것이고, 혹시 사절단을 따라 강화회담에 나서라고 하면 반드시 그 일을 성사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대사의 충정에 감읍한 선조는 “유정은 다른 중과 다르다, 유정을 차비문(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편전의 앞문)에 불려들여 모든 것을 묻겠노라”는 특명을 내렸다.
“유정은 스님인데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섬멸하는데 공을 세웠고, 적진에 들어가 적장과 담판을 짓고 있다. 이야말로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땅히 후한 상급을 내려라.”(<분충서란록>)
실제로 선조는 사명대사를 ‘차비문’으로 불러 시시콜콜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그대는 선비 가문인가. 송운(사명대사의 호)의 이름은 별호인가. 왜란전에는 어느 절에 있었는가. 묘향산의 휴정(서산대사)과는 벗인가 혹은 사사하는가…지금 국세가 급급한데 어떻게 흉적을 소탕하겠는가. 그대가 거느린 군사의 군량과 무기는 어디서 구하는가….”
선조는 그러면서 “형세가 어려운 지금 그대가 환속한다면 지방장관의 중임을 맡겨 장수로 삼을텐데 어떠냐”고 물었다. 사명대사 같은 고승에게 환속 운운했으니 참 딱한 임금이다. 하기야 얼마나 인재가 없으면 그랬겠는가.
선조의 폭포수 같은 질문에 사명대사가 대답을 했을 터인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와 관련 사명대사의 사적을 기록한 <분충서란록>의 편찬자인 신유한(1681~?)은 “왕이 이토록 대사를 융숭하게 여겼는데 사명대사의 대답이 볼 만 했을 텐데 병란 중에 이런저런 문서가 소실되어 버렸으니 알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우리나라의 보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목‘
이밖에도 선조가 “유정(사명대사)이 어디 있느냐”고 다급하게 찾는 기사도 등장한다.
“유정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이 사람은 비록 중이기는 하나 장수로 쓸 만한 사람이다. 유정은 영남 사람이니 영남으로 내려 보내어 원수(元帥)의 결제를 받게 하는 한편,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한쪽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국사에 충성을 다하고 있으니 후하게 대우하지 않을 수 없다.”(<선조실록> 1596년 12월5일)
아무튼 가토 기요마사의 담판 중 마지막 4차의 일화가 엄청 유명하다.
가토 기요마사를 사명대사에게 “그대 나라의 보배는 무엇이냐”고 묻자 사명대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나라엔 보배가 없다. 우리나라의 보배는 바로 당신의 머리니까….”
가토가 그 무슨 이야기냐고 묻자 사명대사는 이렇게 응수했다.
“난리가 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우리나라 형편에 보배가 어디 있는가, 오직 그대의 목이 하나 있으면 조선은 전쟁없이 편안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머리를 가장 값비싼 보배로 여긴다.”(<해인사 사명대사 석장비문>)
다른 버전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대의 목에 천근의 금과 만가구의 읍을 상으로 걸어놓았으니 어찌 보배가 아니겠느냐“고 했다고도 전해진다.(<지봉유설> ‘송운사적’)
“자순불법록”은 고쇼지를 창건한 엔니가 선종의 기본 개념과 임제종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1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정리한 글이다. 엔니는 자신이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사명대사에게 이 글을 보이고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고쇼지 소장
■‘설보대사가 왔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명대사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선조는 1604년(선조 37년) 스승 서산대사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던 길에 “일본에 가서 그 나라 실정을 상세히 탐지하고 그들의 강화 속셈을 알아보라”는 선조의 특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실록을 쓴 사관은 “조정에 얼마나 자모가 없기에 왜적의 사신 하나를 감당못해서 어쩔 줄 몰라하느냐”면서 “사명대사가 아니고는 국가의 긴급대사를 맡을 사람이 그렇게 없느냐”고 한탄했다.(<선조실록> 1604년 2월24일)
일리 있는 지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특별히 사명대사를 사신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유정은 왕년에 여러번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진중을 출입해서도 대언(大言·큰소리)으로 굽히지 않아 가토 기요마사가 매우 존경했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기요마사는 사명대사의 사람됨을 칭송했다. 일본에 포로로 잡혀왔다가 도망쳐온 조선사람들까지 ‘송운(사명대사의 호)의 이름이 일본인들 사이에 자자하다’고 했다. 그래서….”(<선조실록> 1604년 6월 8일)
또다른 이유도 있었다. 조선 조정은 사실 일본의 속셈을 몰랐다. 일본이 재침할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유정(사명대사)이 대마도로 가면 일본 본토로 가자고 협박할 것인데…만약 그들이 협박하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명대사라면 ‘대마도에서 백성들을 구제할 것이고 그 외에는 산승(사명대사)이 알 바가 아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사명대사라면 협박당해도 다만 죽을 각오로 완강히 거절하여 국가에 치욕을 남기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선조실록>)
무슨 뜻인가. 조선정부를 대표하는 관리를 공식 사절로 보냈다가 일본 외교의 농간에 놀아날 경우를 대비해서 ‘산승’, 즉 사명대사를 보냈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명대사는 이런저런 이유로 전후처리를 위해 대마도로 향했다. 그런다음 약 3~4개월 후인 그해(1604년) 12월27일 도쿄에 닿았다. 대마도에서는 전후처리를, 일본 본토에서는 끌려간 포로의 송환문제를 매듭짓는 중차대한 길이었다. 일본인들은 사명대사를 보자 “설보(說寶)화상이다. 저 스님이 설보화상이다”라고 환영하며 존경했다. ‘설보화상’이란 지난날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 진영에서 기요마사를 보고 “네 머리가 보배”라고 한 것에서 비롯됐다. 일본인들은 ‘보배를 그렇게 멋지게 설명한 스님이 어디있냐’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것이다.
결국 사명대사는 1605년(선조 38년) 3월 일본과의 화호(和好)를 성립시켜 조선 조야의 근심을 없앴다. 특히 일본에 잡혀갔던 3000여 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사실 조선 조정은 1605년(선조 38년) 5월4일까지만 해도 “일본에 간지 10개월이나 지났는데 소식이 망연하다”(<선조실록>)고 초조하게 사명대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불과 8일 뒤인 12일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쇼 요시토시)가 “화해를 허락해 주셔서 그 감격함을 이기지 못한다”는 답서를 조선에 보냄으로써 보냄으로써 조선-일본간 화의가 이뤄졌음을 알게 됐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 선보이는 사명대사 유묵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15일부터 11월17일까지 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1실에서 일본 교토(京都) 고쇼지(興聖寺) 소장 사명대사 유묵 6점을 400년 만에 국내 최초로 특별공개하고 있다.
이번에 전시되는 고쇼지 소장 사명대사 유묵은 ‘벽란도…’외에도 한시 2점(‘최치원의 시구’)과 ‘대혜선사의 글씨를 보고 쓴 글’, ‘승려 엔니에게 지어준 도호’, ‘승려 엔니에게 준 편지’ 등이다. 모두 사명대사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후 처리와 포로협상 등을 위해 1604~05년 일본에 갔을 때 교토에서 남긴 유묵들이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 전시회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백성을 구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진정한 깨달음을 추구한 사명대사의 뜻을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8)
<참고자료>
채상식, ‘사명대사의 일본행과 이에 대한 양국의 태도’, <한국민족문화> 27, 부산대 한국민족연구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