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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5) 14대 선조(1567년~1608년), 1592년~1598년 임진왜란(동아시아삼국전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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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5) 14대 선조(1567년~1608년), 1592년~1598년 임진왜란(동아시아삼국전쟁)

대야발 2021. 7. 5. 17:36

 

 

 

 

이 전쟁은 다른 관점으로 보면 한·중·일이 삼국통일전쟁 이후 1000년 만에, 또는 여몽 연합군의 일본 공격 이후 350년 만에 격돌한 동아시아 국제대전이다. 즉 국가 간 대결을 넘어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을 놓고, 육지세력과 해양세력이 대규모 육지전과 해양전을 동시에 벌인, 7년간의 장기 전쟁이었다.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동아시아 질서 재편 놓고 벌인 육지·해양세력의 대결…일본 에도막부·청나라 등장 등 정치적 변화 불러와

입력 2022.06.20 10:00 수정 2022.06.21 10:00 생글생글 759호

(100)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의 이면

 
 
 

이는 모두 1592년 4월부터 1598년 12월까지 7년간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임진왜란’에는 피해자 조선 정부의 시각이 담겼다. ‘임진조국전쟁’은 북한이 자체 역사관에 맞게 교정한 용어다. 분로쿠역은 일본이 당시 천황의 연호를 따라 붙인 명칭이다. ‘만력조선전쟁’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다. 만력은 조선의 동맹군으로 참여한 명나라 황제의 연호를 사용해 만들었고, 현대에는 ‘항왜원조’로도 사용한다. 조일전쟁이라는 용어는 근래에 우리 학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전쟁은 다른 관점으로 보면 한·중·일이 삼국통일전쟁 이후 1000년 만에, 또는 여몽 연합군의 일본 공격 이후 350년 만에 격돌한 동아시아 국제대전이다. 즉 국가 간 대결을 넘어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을 놓고, 육지세력과 해양세력이 대규모 육지전과 해양전을 동시에 벌인, 7년간의 장기 전쟁이었다.

 

 

전쟁의 목적과 배경도 정치적인 패권 장악뿐만 아니라 무역권과 무역망, 각종 자원의 획득, 문화재 약탈, 천주교의 전파, 심지어는 조선 도공을 비롯한 노예용 포로 획득 등이었다. 조선·일본·명을 주축국으로 해 주변 여러 나라가 이해관계를 놓고 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결과는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의 에도 막부, 청나라, 중가르 제국의 등장, 유구국의 일본화 시작을 비롯해 동남아시아의 정치 질서에도 영향을 끼쳤다.

 
 

 

15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지리상의 대발견’ ‘대항해 시대’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동아시아를 세계 무역망으로 끌어들였다. 이로써 차·실크·도자기·향료·후추 등의 상품을 매개로 유라시아 세계의 동서를 연결하는 단순무역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군사력과 비약적으로 발전한 조선술 항해술을 갖춘 유럽 세력은 아메리카(멕시코 브라질), 유럽(에스파냐·포르투갈),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명), 일본, 조선까지 이어진 긴 무역망을 구축했다.

 

 

이와 함께 영토와 자원, 무역권의 획득을 비롯한 종교(기독교)의 조직적인 전파, 신기술과 신무기의 거래라는 복잡한 관계망을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동남아의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끼쳤고 태국, 베트남, 유구국 등 국가들의 정치적인 상황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포르투갈은 1513년 이미 명나라에 진출했고, 1557년에는 마카오의 사용권을 획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유구와 일본으로 진출을 시작해 임진왜란 때 사용한 조총 등의 무기와 전투기술을 공급하고, 극소수의 인원이 양 진영의 전투원으로 참여했다.

 

 

 

이 무렵 전쟁의 주축국인 명나라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건국 초기부터 왜구의 침략으로 해안지역이 심각하게 약탈당했고, 이로 인해 해금정책을 시행하면서 내륙국가로 전환했다. 하지만 남부 해안과 도서 지역은 자연환경과 문화, 종족, 역사, 생활조건의 특성상 해금정책의 실효성이 약했다.

 

 

다수의 중국인은 후기왜구에 대거 참여해 국제적인 해적집단으로 변모했고 활동 범위도 유구, 동남아 일대까지 확장됐다. 정부는 일본을 압박해 왜구의 근절을 요구하고, 감합무역을 허락하는 정책도 취했으나 도요토미 시대까지는 효험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주민들은 대거 탈출을 시도했고, 동남아 일대와 심지어는 일본까지 거주지들을 확장했다.

 

 

대외관계도 불안정했다. 초기에는 북쪽에서 원나라의 잔여 세력인 북원과 전쟁을 벌였다. 이어 몽골계인 오이라트와 힘겨운 접전을 벌여 베이징이 함락당하는 등 위기에 처했을 정도다. 한편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강력해지고, 1589년에는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를 멸망시킨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거의 통일했다. 따라서 명나라는 경제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안기는 조공무역을 하는 등 온건책을 쓸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국방력과 경제력이 소진됐다.(1)

 

 

 


누르하치와 히데요시 비교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 안에서 침략과 저항의 이야기로 임진왜란을 이해해온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먼저 동아시아사(史)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동아시아사 관점이란 조선과 일본, 중국과 랴오둥(遼東) 등을 포함하는 다자 관계 분석과 더불어 책봉-조공관계에 기초를 둔 동아시아 질서의 성격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 위에서 임진왜란이 논의될 때, 우리는 히데요시의 군사적 모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조작된 기억, 불편한 진실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정두희·이경순 엮음, 휴머니스트, 460쪽, 2만8000원

 
 
 
 
 
 

만일 어느 한 사람에게 임진왜란(1592∼1598)이란 국제전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단연 첫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실제로 동아시아 질서의 주도권을 움켜쥔 사람은 청조(淸朝)를 건설한 누르하치였다. 이 두 사람은 16세기말 동아시아 세계의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 한 야심 찬 도전자였다는 점에서 같지만, 이처럼 결과는 판이했다.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패하고 누르하치는 성공했을까. 계승범의 글은 그 차이를 대단히 흥미롭게 말해준다. 필자는 누르하치나 히데요시가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명(明)의 분신처럼 여겨졌던 조선을 마주해야 했는데, 그 대응 방식이 대조적이었음에 주목한다. 누르하치는 외교를 통해 조선과 명의 결속을 차단한 다음 중원을 겨냥하는 신중한 행보를 보인 반면,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해 오히려 조선과 명의 군사 동맹을 강화시켰고, 결국 그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히데요시의 오판이 개인적 문제에 기인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W J 보트도 이 책의 다른 논문에서 히데요시가 결코 전쟁광이 아니었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었음을 지적했다. 계승범은 히데요시의 선택이 동아시아세계에서 일본이 갖는 역사적 위치와 관련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히데요시의 일본은 명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세계 안에 들어가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책봉-조공 제도의 명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단지 자신의 특기인 전쟁의 방식에 기댔을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시스템의 내부에서 그 장단점을 정확히 이해했던 누르하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史에 대한 몰이해

누르하치와 히데요시 비교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 안에서 침략과 저항의 이야기로 임진왜란을 이해해온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먼저 동아시아사(史)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동아시아사 관점이란 조선과 일본, 중국과 랴오둥(遼東) 등을 포함하는 다자 관계 분석과 더불어 책봉-조공관계에 기초를 둔 동아시아 질서의 성격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 위에서 임진왜란이 논의될 때, 우리는 히데요시의 군사적 모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임진왜란이 어떻게 기억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책에 실린 다카키 히로시의 글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히데요시를 현창하고 기념하는 과정과 그 현실적 배경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한일강제합방 이후 조선침략의 선구자로서, 나아가 대동아 건설의 웅지를 품었던 선각자로서 히데요시의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조작된 기억이 통용될 수 있게 하는 기름진 토양은 일차적으로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집단적인 망각과 몰이해일 것이다. 서구 역사학의 유입으로 역사의 이해가 국가 단위로 쪼개짐으로써 동아시아사에 대한 종합적 이해는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사 연구를 제기하는 것은 현재의 국가 기억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이성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이 지역에 화해와 공존의 초석을 다지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은 ‘임진왜란 - 동아시아 삼국전쟁’에서 표방하는 문제의식의 요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두 해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서강대 정두희 교수 주도 아래 2003년부터 기초연구와 자료 조사, 그리고 국제 학술회의를 거쳐 책이 나오기까지 5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 미국, 네덜란드 등 다양한 지역의 전문가들이 저자로 참석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문을 작성했다. 급조된 연구 성과가 드물지 않은 현실에서 이러한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은 한국인의 민족적 정서에 부합하는 면이 있어 독자에게 별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 책은 불편한 진실들에 더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전쟁 기억의 조작은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 실린 몇 편의 글은 그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

정지영은 놀랍게도 논개가 왜장을 안고 죽었다는 얘기는 입증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논개가 역사 속 인물로 기억되는 것은 6·25전쟁 이후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로 논개의 충절이 활용된 결과다. 그 이야기 안에서 논개는 기생으로서 본래 타락한 존재이지만, 국가에 충성을 바치면 순결해질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됐다. 논개를 민족의 이름으로 현창하지만 사실 여성과 소외 계층을 배제하는 위계 논리가 민족 담론 안에 작동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요네타니의 글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사람들의 운명을 추적한 것이다. 그 수가 대략 수만에 달하고, 종전 이후 6000여 명이 귀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뜻밖에도 귀환 포로들이 대부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불행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동안 일본의 대규모 인신 약탈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았지만, 막상 귀환 포로들을 조선에서 어떻게 대접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영휘의 글은 홍의장군 곽재우가 정유재란 때,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조작된 것임을 실증한다. 영조대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조헌과 칠백의총을 현창하자, 그에 대항하여 남인 집단이 ‘동고록’을 출간해 화왕산성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상의 글들은 임진왜란에 대한 한국인의 민족적 기억이 실제로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당혹스러운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편 존 B 던컨은 역사에서 기억이 국가나 특정한 집단에 의해 조작되는 것만은 아님을 폭넓은 시각에서 보여준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유포된 ‘임진록’에 드러난 일본과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지적한 뒤, 개항 이전에 이미 조선의 비엘리트층 사이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향촌 사회를 뛰어넘는 일체감이 존재했다고 평가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경험은 점진적으로 한국 사회에 ‘민족’이 형성되는 기반을 제공한 셈이다.



이순신의 기억에 대한 계보를 추적한 정두희는 나아가 기억 연구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순신에 대한 근대적 기억을 검토한 결과 신채호를 제외하면, 모두 이순신이 당면했던 조선의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감추었다고 지적한다. 이순신은 무서운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도피처(229쪽) 였던 셈이다. 정두희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의 역사를 역사적으로 파헤치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랴오둥과 중국적 세계질서

이 책의 총설에서 김자현은 임진왜란을 근대 일본이 취한 팽창주의의 역사적 전조로 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그것은 근대 세계의 형성을 정적인 대륙세력과 역동적인 해양세력의 충돌로 이해하는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이해라는 것이다(33쪽). 임진왜란은 종종 책봉-조공에 기초를 둔 동아시아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린 획기적 전쟁으로 평가되지만 그러한 지적은 그 뒤 어떠한 질서가 이 지역에 들어섰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한 설명은 강대국 일본의 대두라는 근대적 상황을 연상시킬 뿐이다.



전통적인 세계질서의 파괴라는 담론은 또 한편으로 이 전쟁에 참가한 명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하지만 케네스 스워프는 명의 황제인 만력제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명의 서북방 닝샤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만일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명의 주력군이 일본군보다 먼저 서울에 당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의 황제는 조공국에 대한 책봉국의 의무를 강조했고, 그 점에서 중국의 전통적 외교관계는 여전히 견고했다는 것이다(353쪽).



김한규의 글은 이 문제에 대한 거시적인 이해를 돕는다. 그는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역사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당 시기에는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에 맞서 관중에 근거한 중원왕조가 동아시아 세계를 주도하였으나, 송-청 시기에는 랴오둥에서 건립된 요, 금, 원, 청 등 정복왕조가 잇달아 출현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원과 청 사이에 있었던 명은 고대시기처럼 재차 중원에서 건립된 한족 왕조였고, 그 결과 이 시기 랴오둥은 주변부로 전락했다. 힘의 공백지대가 된 랴오둥에 고려(말)와 조선(초)이 진출을 시도했고, 그 다음 일본이 나선 것이 임진왜란이었다. 따라서 이후 랴오둥에 출현한 청의 누르하치가 동아시아 패권을 재차 장악한 것은 송-청 시기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정상적인 회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임진왜란이 주변 지역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오기는 했으나, 주자학과 문관 관료제에 기초한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는 당분간 견고하게 유지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책은 임진왜란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많은 숙제를 남겼다.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2)

 

 

■ 임진왜란, 100년 격동기 문을 열다

1592~1598년 임진왜란(2) - 대륙 세력이 되고자 한 일본의 세 번째 좌절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꽂고 싸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모습. 가토에겐 임진왜란이 성전(聖戰)이었나? 1850년 ‘영걸 삼국지전’. 개인 소장.

 

 

 

유라시아 동부 도서부(島嶼部)의 유력한 세력인 일본열도의 국가들은 네 번에 걸쳐 유라시아 동부 대륙 지역의 진출을 꾀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첫 번째는 한반도의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시기였으며 이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끝났다. 이후 한반도는 신라와 발해가 남북으로 병립하는 시기를 맞이했으니 이것이 한반도의 첫 번째 분단이었다.

 

 

두 번째는 고려시대 말기에서 조선시대 전기에 걸친 13~16세기의 왜구였다. 이들은 한때 고려와 명나라의 안정을 흔들 정도였으나 결국 항구적인 정착지의 확보에 실패하였다.

 

 

세 번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이다. 인도까지 정복하려 했다는 이 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단기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축출되었다. 이때 일본 측은 명나라 측에 한반도의 분단을 제안하였으며 명나라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논의하는 등, 한반도는 두 번째 분단의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조선의 강제병합부터 1945년 8월의 패전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일본열도의 세력은 만주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세력으로 그 지위를 확고히 하는 듯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일본 세력의 급속한 퇴각에 따른 공백기에 한반도는 또다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일본 측으로서는 유럽의 대륙부인 프랑스의 태반과 도서부인 영국을 지배하던 노르만 왕조, 동남아시아의 대륙부와 도서부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 스리비자야 왕조와 같은 형태의 영토를 만들고자 한 시도가 번번이 무산된 셈이다.

 

 

역사상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정세를 뒤흔든 최초의 사건이 임진왜란이었지만, 그들의 활동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에서 관측된 것은 한반도의 삼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아닌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서(魏書)’의 한반도 관련 기사에는 왜인이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에서도 왜인이 신라의 도읍인 금성(金城)을 공격했다는 기사를 비롯하여 왜인의 지속적인 움직임이 관측된다. 이 시기를 다루는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으로 상징되는 일본열도의 중앙집권적 세력에 의한 것으로서 해설하며 이러한 이해는 일본에서 20세기 전기까지 이어졌다.

 

 

이에 따라 조선을 강제병합한 20세기 전반에 일본 측은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의 거점으로 그려지는 가야 지역에 대한 발굴 내지는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역사적 실체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였다. 최근 들어 가야 지역이 아닌 전라남도의 영산강 지역에서 일본열도 출신의 무사(武士)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왜계(倭系)’ 무덤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진서(晉書)’ 열전에 보이는 마한(馬韓)의 잔존 세력 ‘신미제국(新彌諸國)’이 백제에 저항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20세기 전기에 일본이 만들어낸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게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란, 마치 일본열도의 통일 정권이 이들을 주도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파견한 양 후세에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일본서기’ 등의 고대 일본 역사서에서 ‘임나일본부’의 창세기(創世記)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른바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 정벌’ 전설이다. 이 전설의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면 진구코고의 남편인 주아이텐노(仲哀天皇)가 규슈 지역에 군사 원정을 갔다가 한반도를 정복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도 무시한 바람에 죽자, 진구코고가 이 신탁(神託)을 수행하여 신라·백제·고구려를 정복, 일본의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구코고라는 사람의 실존 여부, 과연 이 시기에 일본열도에 이처럼 대규모의 해외 원정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단일한 중앙집권 정권이 존재했는가의 문제를 포함하여 ‘진구코고의 삼한 정벌’ 전설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성의 여부와는 별도로 전근대 일본에서는 이 전설을 통해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군사적 개입과 국제관계를 설명해 왔다.

 

 

이처럼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지역에서 자신들의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 ‘진구코고의 삼한정벌’이었다면, 그 활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한 일본의 수군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한 663년 8월의 백강전투였다.

 

 

신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 등의 지배층을 당나라로 끌고 가자,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일본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군이 육지에서 신라군에 맞서고 일본 수군이 오늘날의 금강 근처에서 당의 수군과 맞서 바다를 피로 물들일 정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신라·당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백제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사라졌고, 그들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시도는 유라시아 동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으며, 한반도의 분열상태라는 불안정 요인이 제거되어 이후 신라·당·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유라시아 동부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일본열도 세력은 대륙 국가들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지정학적 요건에 힘입어 폐쇄적이고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러한 일본열도의 세력을 군사적으로 위협한 것은 13세기에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열도의 서부 지역을 침공한 사건이었다.

 

 

저명한 일본 중세사 연구자 아미노 요시히코가 지적하듯이 고려가 40년간 몽골의 침공에 항거한 덕택에 일본열도는 몽골의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느슨한 형태로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자 몽골은 고려를 연합하여 일본열도의 정복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일본열도를 지배하던 가마쿠라 막부의 군사 정권은 연합군에 의한 1274년, 1281년의 두 차례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막부는 무너지고 일본에는 두 명의 덴노(天皇)가 병립하는 분열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한 일본열도의 혼란기에 주로 서부 일본의 세력이 또 다시 유라시아 동부 대륙 지역에 대한 약탈과 점령을 시도하였다.

 

 

‘고려사’에서는 왜구가 처음으로 활동한 것을 1223년으로 전하면서도, 1350년 기사에서 ‘왜적의 침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설명과 함께 왜구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고대 영국의 역사서인 ‘앵글로 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도 유럽의 왜구라 할 바이킹의 첫 활동은 787년 기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793년 기사에서 “번개가 몰아치고 사나운 드래곤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 무시무시한 전조들이 노섬브리아 땅에 일어나 사람들을 매우 두렵게 하였다.

 

 

그 직후에 큰 기근이 있었고 같은 해 1월 8일에 이교도들의 무리가 린디스판에 자리한 하느님의 교회를 약탈하고 살육하였다”고 하여 바이킹의 활동이 이때 본격화되었음을 인상 깊게 전한다. 이처럼 왜구와 바이킹은 유라시아 동부와 서부의 대륙의 국가들에 충격을 주며 여러 세기에 걸쳐 활동하였지만, 노르망디·시칠리·러시아 등의 항구적 정착지를 마련한 바이킹과 달리 왜구는 대륙에 거점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일본에 상륙한 몽골·고려 연합군과 이를 피하는 일본인의 모습. ‘삼국퇴치 신덕전’ 중권. 개인 소장.

 

 

 

왜구 세력이 소멸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반도는 이종무가 이끄는 조선군이 1419년에 쓰시마를 공격한 것과 같이 일본열도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하였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무역을 활성화함으로써 왜구가 취할 수 있는 상업적 이익을 줄이고, 왜구에 섞여 있던 왕직(王直)과 같은 중국인을 회유하여 제거하였으며, 척계광(戚繼光)과 같은 장군들이 왜구에 맞설 수 있는 효과적인 전술 전략을 개발하였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통일 정권이 수립되면서 왜구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특히 도요토미 정권은 한편으로는 왜구를 진압한 공을 인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하여 전쟁의 명분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왜구 세력을 흡수하여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일부에 편성시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왜구의 활동과 임진왜란이라는 침략 전쟁을 동일한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지만, 왜구의 활동에서는 일본열도의 통일된 정권이 대륙을 정복하려는 의지와 그 의지가 실현되는 메커니즘이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이에 부정적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를 침공한 세 번째 사건이었다. 열도의 100년간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열도 내에 가톨릭을 포교하려 하자 일본을 불교와 신토(神道)의 국가로 규정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의 지배가 일본열도의 구석구석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조총이나 전함과 같은 가톨릭 국가들의 우수한 군사 물자를 지원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시행한 것과 같은 철저한 기독교 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고스티뇨 고니시 유키나가(Agostinho·小西行長)와 같은 유력 가톨릭 장군들이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a de Cespedes)와 같은 예수회 신부를 일종의 군종신부로서 한반도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임진왜란은 가톨릭을 믿지 않는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대한 일종의 ‘성전(聖戰)’이었다. 당시 유럽 가톨릭 국가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학살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니, 임진왜란 당시의 가톨릭 장군과 병사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중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립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 正)는 열렬한 불교신도였다. 그가 신앙한 불교는 13세기에 니치렌(日蓮)이라는 승려가 개창한 니치렌슈(日蓮宗)라는 종파이다. 니치렌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 의 힘으로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 침공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니치렌슈는 일종의 일본적 ‘호국불교’로서 기능하였다. 니치렌슈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일본이라는 국가보다 위에 있다는 근본주의적 주장을 펼치며 반란을 일으키거나 그때마다의 정권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다. 이 종교의 일파인 창가학회의 설립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는 일본 정부가 국가신도(家神道)를 강제하는 데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앙이나 사상에 투철하여 국가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사례는 일본열도의 역사상 보기 드물다. 참고로 같은 시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수십 명의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마찬가지 이유로 체포되어 옥응련 등이 옥사한 ‘등대사(燈臺社) 사건’이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박관준 등 수십 명의 기독교 신도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사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는 정치에 대한 종교의 우위를 주장하여 국가에 대립하는 것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일본의 토착 신앙인 신토와 니치렌슈라는 열광적 불교 종파의 가르침을 체화하여 자신의 군사적 행동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조선 침공을 선언한 도요토미는 가토가 독실한 니치렌슈 신도임을 알고는 이 종파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하사하였다. 가토는 이 깃발을 내걸고 임진왜란 7년간 한반도에서 활동하였으니, 그에게도 임진왜란은 니치렌슈를 믿지 않는 이교도와의 ‘성전’으로 간주되었을 터이다. 가토가 사명대사와 같은 조선의 불교 신도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로 임한 것 역시, 그가 임진왜란을 일종의 종교전쟁으로 보았음을 짐작케 한다. 불교는 역사상 평화로운 종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대규모의 승병(僧兵)을 지닌 사찰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 일본이나 미얀마·스리랑카의 현대사에서 보듯이 불교도가 공세적 입장에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듯 1592년의 개전 당시 일본군의 선봉에 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각기 기독교(가톨릭)와 불교(니치렌슈) 신도였으며, 이들에게 임진왜란은 일종의 종교전쟁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일본군이 부처와 일본의 여러 신의 도움으로 전투를 잘 치를 수 있다는 대목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었을 때 가장 잔인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음을 역사는 수천 년에 걸쳐 증명한다.

 

 

여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중에 전쟁의 목표를 변경하면서 임진왜란에서의 학살은 도를 더해갔다. 인도와 중국을 정복하여 중세까지 일본에 알려진 세계 전체인 인도·중국·일본을 모두 지배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던 전쟁 초기에는 한반도가 향후 장기전의 거점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은 한반도의 주민들에 대한 지배를 철저히 함으로써 군량미의 원활한 보급 등을 꾀하였다. 그러나 조선 민관(民官)의 항전과 명나라 군의 참전으로 인해 ‘세계 정복’의 기대가 1년 만에 꺾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반도의 남부 4개 지역만이라도 점령하고자 명나라 측에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한다.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러한 조건으로 강화 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명 조정의 일각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주장하는 등 조선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결국 국왕 교체와 한반도 분할안 모두 기각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력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1597년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자신들의 당초 의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보복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학살한 것은 주로 이 시기였다.

 

 

유라시아 동부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걸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여름에 사망하자 전쟁을 계속 할 명분을 상실한 일본군은 열도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부에 대한 지배를 꾀한 세 번째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시도가 유라시아 동부에 미친 영향은 이전의 두 차례와는 달랐다. 중국에서는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로 교체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서는 등 정권 교체가 있었다. 이 영향은 타이완과 동남아시아에까지 미쳐서 이들 지역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었다. 한반도는 분단의 위험을 피했지만 잇따른 쿠데타와 반란, 그리고 만주족과의 두 차례 전쟁과 점령이라는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왕조 교체에 준하는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유라시아 동부의 질서를 재편한 100년간의 장기적 변동기를 연 사건이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이 100년간의 격동기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3)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진왜란으로 최대 10만명 안팎의 백성이 포로가 돼…마카오·인도·이탈리아·포르투갈 등지로 팔려나가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입력 2022.08.29 10:00 수정 2022.08.30 10:00 생글생글 767호

 
(108) 임진왜란으로 세계로 끌려간 조선 포로들 (上)
 
 
 
사명당이 귀국할 때 되찾아온 불사리와 부처님 치아를 봉안한 강원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의 대웅전.
 
 
 
 

정권과 나라는 붕괴해도 괜찮다. 이민족, 다른 국가에 지배받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백성은 죽어서는 안 된다. 백성이 살아야 새 세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일본은 전쟁 결과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정권이 교체됐다. 명나라는 파병 목적을 이룬 대신 멸망이 앞당겨졌다. 만주의 여진족은 어부지리를 얻어 청 제국을 건설했다.

침략을 받아 전장이던 조선은 승전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의병장들과 백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끌려간 포로를 내버렸다. 교토 시내의 ‘미미쓰카(耳塚)’라는 크지 않은 무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베어온 조선인의 귀 5만 명분이 묻혀 있다고 한다.

 

 

포로는 적게는 2만~3만, 많게는 10만 명이 넘고, 그 가운데 7500명 정도만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국에 귀환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포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고, 책임져야 할 조선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전쟁은 고도의 정치행위, 경제행위며 또한 문화행위다. 그 때문에 사람의 약탈이 있었고, 노예무역이 병행됐다. 일본군은 정치적인 영토 외에 자원과 문화재 약탈, 포로 획득을 목적으로 군대 체재까지 개편했다.

 

그 결과 학자, 의원, 도공 등의 기술자와 농민을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 적선에 실린 채로 대한해협을 건너 적지에 내팽개쳐진 조선 포로들의 운명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첫째, 대부분은 귀환을 체념한 상태로 정착해 일본인으로 변신했다. 노비를 비롯한 천민은 물론이고,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홍호현 이성현 등의 양반도 정착해 상급 무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 무렵 일본의 여러 곳, 특히 규슈에는 조선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됐고 일부는 일본인의 가정 노예로 변했다.

 

세월이 흘러 조선통신사들이 도착했을 때 애까지 낳은 조선 여인들이 행렬로 다가와 향수를 하소연하기도 했다. 대마도의 바닷가 마을인 우나쓰라(女連)에는 선조의 딸인 옹주의 무덤이 잊힌 채로 남아 있다.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姜沆)은 귀국해서 쓴 《간양록》에 대마도에 있는 많은 사람이 조선 의복과 언어를 사용한다고 기술했다. 포로로 붙들려간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처참한 증언이다.

기술자로 정착한 사람도 많았다. 일본은 다도와 무역 상품 수요로 수준 높은 도자기의 필요성이 컸다. 조직적으로 끌려온 도공들은 혼슈 남쪽의 하기(萩), 규슈의 가라쓰(唐津), 아리타(有田), 사쓰마(薩摩) 등에서 가마를 열고 도자기를 생산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이마리항과 나가사키항을 통해 1650년부터 한 세기 동안 아리타 도자기를 520만 점이나 유럽으로 수출했다.

또한 많은 포로가 자의 또는 타의로 천주교인이 됐다. 나가사키에만 세례자가 1300여 명이었고, 1610년에는 고려정(마을)에 성당을 건축했을 정도다. 막부의 억압으로 많은 조선인 순교자가 나왔다. 그 예로 오타 줄리아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어린 양녀로 들어가 천주교 세례를 받고, 절해고도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가장 불행한 운명을 맞이한 포로는 해외에 노예로 팔려나간 사람들이다. 일본,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청나라 상인에 의해 마카오, 동남아시아, 인도,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지로 팔려나갔다. 루벤스가 그린 소묘의 모델로 알려진 안토니오 코레아는 이때 이탈리아로 팔려간 인물이다.

 

 

탈출을 시도해 귀환에 성공한 일부 포로도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1600년 2월 29일 옥포에는 ‘남녀노약’ 30구 조선인 포로들이 탈출해서 생환했다. 그해 4월 27일 조정에 보고된 내용인데, 남원 전투에서 포로가 됐던 김학성 등 남녀 21명은 오사카부터 대마도를 거치지 않은 채 곧장 동쪽 바다(동해)를 건너 귀환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교류하면서 정보를 주고받았으며, 일본 상황을 국내에 비밀리에 보고했거나 귀국 후에 보고했다. 도망쳐온 강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일본은 분열됐고, 앞으로 조선엔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를 했다.(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전후 귀환한 조선 포로들 환영은커녕 냉대받아…문벌사족들은 가족이 돌아온 사실 숨기기도

입력 2022.09.05 10:00 수정 2022.09.06 10:00 생글생글 768호

 
(109) 임진왜란으로 세계로 끌려간 조선 포로들 (下)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가 일본 대표 명품 도자기 ‘아리타야키’ 탄생을 이끈 경남 김해 여성 도공 백파선(百婆仙·1560~1656) 갤러리. 아리타야키 탄생 400주년을 맞은 2016년 일본 아리타에 문을 열었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사람도 꽤 많았다. 《국조인물지》에 기록된 이엽 장군은 원균이 대패한 칠천량 해전에서 잡혀 포로로 끌려갔다. 좋은 대우와 회유를 뿌리치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결국 자결했다.

쇄환, 즉 정부의 공식적인 노력으로 귀환한 사람들도 있었다.

1604년 6월 나라를 망친 성리학자들 대신 승병장인 사명당이 ‘탐적사’로 파견됐다. 일행은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만나고, 300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1607년에는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돼 전후 문제 등을 논의하고, 124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1624년에도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물론 일본이 자발적으로 쇄환시킨 포로도 있었다.

대마도 도주는 종전 전에 강화를 요구하면서 조선 포로를 500명 가까이 돌려보냈다. 광해군 때도 우호 관계를 회복하자면서 잡혀갔던 백성을 잇달아 쇄환시켰다.



조선 정부와 사회는 귀국한 포로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의병장이며, 1차 탐적사로 포로들을 쇄환한 유정 사명당 동상.
 
 
 
 
 

첫째, 의심하고 경계했다. 선조 38년 6월 17일 기록에는 사명당을 따라 대마도에서 온 박수영이 나라를 배반해 인명을 많이 살해했으니 형벌을 주자는 요청에 선조가 윤허한 내용이 있다. 1601년에는 강사준과 여진덕 등이 80여 명이 함께 탈출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일본의 자연재앙과 분열상황 등을 보고했다. 그런데도 조정은 일단 의심하고, 조사를 단행했다.

둘째, 믿기 힘들지만 냉대와 억압 등을 많이 저질렀다. 2차 쇄환, 3차 소환 때는 관리들이 마중조차 나오지 않았고, 정부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귀환 포로를 억압하고 약탈하는 일도 빈번했다.

1605년 6월 7일자에는 유정(사명당)이 쇄환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소유하고, 매질하니 속량(노비를 면해주는 일)해서 군인으로 해야 한다고 아뢰어 선조의 윤허를 받는다는 내용이 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도 (부모·성명 등) 연고를 모르는 사람들은 종으로 만들고, 여자가 예쁘면 남편을 묶어 바다에 던지고, 멋대로 자기 여자로 만드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기록했다. 특히 문벌사족은 식구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절개와 의리를 상실한 일이라고 평가해 쇄환된 사실을 숨겼다.

이런 부정적 인식 때문에 강항이나 정희득 등의 인물은 능력이 뛰어나고, 나라를 위해 위험을 무릅쓴 채 정보를 보고했음에도 중용되지 못했다. 조완벽은 포로로 끌려가 일본 무역선에 함께 타서 베트남을 3회, 필리핀을 1회 방문했다. 조선이 필요로 한, 국제사회 동향과 무역 등 필수적 정보와 실무경험을 보유한 인물임에도 고향에서 평범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정부가 쇄환 포로들을 냉대한다는 사실은 일본에 알려졌고, 일본은 이를 과장해 포로들의 귀국을 막으려 했다. 중국 지역으로 간 백성들도 있었다. 전쟁통에 살 곳을 잃은 백성들이 명군을 따라다니며 생존하다가, 철군할 때 함께 건너가 1000여 명의 백성이 요동, 산해관 등지에 살면서 귀국을 원한다는 내용을 비변사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조선 정부는 백성들의 삶에 무관심했고, 그들의 기술력, 문화적 능력, 경제적 가치 등을 일본처럼 주목하지 않았다. 또 백성을 죽음과 파멸로 몰아넣는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남의 나라에서 포로로, 노예로 고통받는 자국민을 구원하는 데 소홀했다.

역사에는 반드시 ‘인과응보’라는 원리가 작동한다. 결국 임진왜란이 끝나고 30년도 채 못된 1627년에 정묘호란, 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생해 멸망 직전까지 갔다. 당시 세자를 비롯해 무려 50만~60만 명의 백성이 추운 북쪽 땅으로 끌려가 노예생활을 하고, 죽임을 당했다.(5)

 

 

 

<자료출처>

 

(1)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061773291

 

 

(2)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조작된 기억, 불현한 진실|신동아 (donga.com)2008-01-07

 

 

(3) 임진왜란, 100년 격동기 문을 열다  - 주간조선 (chosun.com) 2014.03.07

 

 

(4)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082697291

 

 

(5)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090262241

 

 

 

<참고자료>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070198551

 

 

[주간조선] 임진왜란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을 바꿔놓았다 (chosun.com) 2014.03.02.

 

 

[유성운의 역사정치] 임진왜란 후 재빨리 일어선 조선…그뒤엔 과감한 감세 있었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2019.05.19 

 

 

 

정유재란 순천왜교성 전투를 생생하게 그린 '임진정왜도' - 오마이뉴스 (ohmynews.com)22.04.14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10171316001

 

'조선의 최종병기' 비격진천뢰, 땅구덩이서 우르르 (daum.net) 2018. 11. 16.

고창 무장읍성서 11점 쏟아져

 

 

 

 

 

 

서울시, 북-러와 '북방의 이순신' 흔적 찾는다 (daum.net)  2019. 12. 8. 

 

 

https://v.daum.net/v/20240809083300316

 

 

https://v.daum.net/v/20240611165156646

 

 

https://v.daum.net/v/20240612201126220

 

 

https://v.daum.net/v/20240420004138002

 

 

https://v.daum.net/v/20240827050021883

 

 

https://v.daum.net/v/20231226145401435

 

 

https://v.daum.net/v/20240214143001836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802080948001

 

 

충무공 탄신 472주년..이상한 현충사 (daum.net) 2017.04.30.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406110500001

 

 

충무공에 군수물자 댄 현건·현덕승, 오간 편지들 국보 지정 (daum.net) 2021. 4. 27.

 

 

이순신, 원균을 ‘흉악한 도적’에 비유 (hani.co.kr)2019-10-19

 

 

[단독] 이순신 종가 "현충사에 박정희 현판 내려라" (daum.net)2017.09.14. 

 

 

거북선 이번엔 찾을까 (hani.co.kr)200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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