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신동아 (donga.com)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조작된 기억, 불편한 진실

  • 김석우 군산대 강사·사학 swooj3k@hanmail.net
  • 입력2008-01-07 13:48:00
 

‘임진왜란-동아시아 삼국전쟁’: 정두희·이경순 엮음, 휴머니스트, 460쪽, 2만8000원

 
만일 어느 한 사람에게 임진왜란(1592∼1598)이란 국제전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단연 첫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실제로 동아시아 질서의 주도권을 움켜쥔 사람은 청조(淸朝)를 건설한 누르하치였다. 이 두 사람은 16세기말 동아시아 세계의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 한 야심 찬 도전자였다는 점에서 같지만, 이처럼 결과는 판이했다.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패하고 누르하치는 성공했을까. 계승범의 글은 그 차이를 대단히 흥미롭게 말해준다. 필자는 누르하치나 히데요시가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명(明)의 분신처럼 여겨졌던 조선을 마주해야 했는데, 그 대응 방식이 대조적이었음에 주목한다. 누르하치는 외교를 통해 조선과 명의 결속을 차단한 다음 중원을 겨냥하는 신중한 행보를 보인 반면,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해 오히려 조선과 명의 군사 동맹을 강화시켰고, 결국 그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히데요시의 오판이 개인적 문제에 기인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W J 보트도 이 책의 다른 논문에서 히데요시가 결코 전쟁광이 아니었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었음을 지적했다. 계승범은 히데요시의 선택이 동아시아세계에서 일본이 갖는 역사적 위치와 관련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히데요시의 일본은 명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세계 안에 들어가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책봉-조공 제도의 명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단지 자신의 특기인 전쟁의 방식에 기댔을 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시스템의 내부에서 그 장단점을 정확히 이해했던 누르하치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史에 대한 몰이해

누르하치와 히데요시 비교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 안에서 침략과 저항의 이야기로 임진왜란을 이해해온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먼저 동아시아사(史)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이해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동아시아사 관점이란 조선과 일본, 중국과 랴오둥(遼東) 등을 포함하는 다자 관계 분석과 더불어 책봉-조공관계에 기초를 둔 동아시아 질서의 성격에 대한 세심한 이해를 요구한다. 그 위에서 임진왜란이 논의될 때, 우리는 히데요시의 군사적 모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비로소 가능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임진왜란이 어떻게 기억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책에 실린 다카키 히로시의 글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히데요시를 현창하고 기념하는 과정과 그 현실적 배경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한일강제합방 이후 조선침략의 선구자로서, 나아가 대동아 건설의 웅지를 품었던 선각자로서 히데요시의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조작된 기억이 통용될 수 있게 하는 기름진 토양은 일차적으로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집단적인 망각과 몰이해일 것이다. 서구 역사학의 유입으로 역사의 이해가 국가 단위로 쪼개짐으로써 동아시아사에 대한 종합적 이해는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사 연구를 제기하는 것은 현재의 국가 기억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이성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이 지역에 화해와 공존의 초석을 다지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상의 논의들은 ‘임진왜란 - 동아시아 삼국전쟁’에서 표방하는 문제의식의 요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한두 해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서강대 정두희 교수 주도 아래 2003년부터 기초연구와 자료 조사, 그리고 국제 학술회의를 거쳐 책이 나오기까지 5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 결과 한국과 일본, 미국, 네덜란드 등 다양한 지역의 전문가들이 저자로 참석해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문을 작성했다. 급조된 연구 성과가 드물지 않은 현실에서 이러한 노력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함을 지적하는 것은 한국인의 민족적 정서에 부합하는 면이 있어 독자에게 별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 책은 불편한 진실들에 더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다. 전쟁 기억의 조작은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전반부에 실린 몇 편의 글은 그러한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

정지영은 놀랍게도 논개가 왜장을 안고 죽었다는 얘기는 입증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도 오늘날 논개가 역사 속 인물로 기억되는 것은 6·25전쟁 이후 국가적 위기를 돌파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로 논개의 충절이 활용된 결과다. 그 이야기 안에서 논개는 기생으로서 본래 타락한 존재이지만, 국가에 충성을 바치면 순결해질 수 있는 것으로 설정됐다. 논개를 민족의 이름으로 현창하지만 사실 여성과 소외 계층을 배제하는 위계 논리가 민족 담론 안에 작동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요네타니의 글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사람들의 운명을 추적한 것이다. 그 수가 대략 수만에 달하고, 종전 이후 6000여 명이 귀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뜻밖에도 귀환 포로들이 대부분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불행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담담히 서술한다. 그동안 일본의 대규모 인신 약탈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았지만, 막상 귀환 포로들을 조선에서 어떻게 대접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영휘의 글은 홍의장군 곽재우가 정유재란 때,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조작된 것임을 실증한다. 영조대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조헌과 칠백의총을 현창하자, 그에 대항하여 남인 집단이 ‘동고록’을 출간해 화왕산성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상의 글들은 임진왜란에 대한 한국인의 민족적 기억이 실제로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당혹스러운 사실을 일깨워준다.

한편 존 B 던컨은 역사에서 기억이 국가나 특정한 집단에 의해 조작되는 것만은 아님을 폭넓은 시각에서 보여준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민간에 유포된 ‘임진록’에 드러난 일본과 중국에 대한 적대감을 지적한 뒤, 개항 이전에 이미 조선의 비엘리트층 사이에 자신들이 살고 있는 향촌 사회를 뛰어넘는 일체감이 존재했다고 평가한다.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경험은 점진적으로 한국 사회에 ‘민족’이 형성되는 기반을 제공한 셈이다.

이순신의 기억에 대한 계보를 추적한 정두희는 나아가 기억 연구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순신에 대한 근대적 기억을 검토한 결과 신채호를 제외하면, 모두 이순신이 당면했던 조선의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일본에 대한 분노를 감추었다고 지적한다. 이순신은 무서운 현실을 잠시 잊게 하는 도피처(229쪽) 였던 셈이다. 정두희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순신과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의 역사를 역사적으로 파헤치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랴오둥과 중국적 세계질서

이 책의 총설에서 김자현은 임진왜란을 근대 일본이 취한 팽창주의의 역사적 전조로 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그것은 근대 세계의 형성을 정적인 대륙세력과 역동적인 해양세력의 충돌로 이해하는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에 근거한 이해라는 것이다(33쪽). 임진왜란은 종종 책봉-조공에 기초를 둔 동아시아의 전통적 질서를 무너뜨린 획기적 전쟁으로 평가되지만 그러한 지적은 그 뒤 어떠한 질서가 이 지역에 들어섰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한 설명은 강대국 일본의 대두라는 근대적 상황을 연상시킬 뿐이다.

전통적인 세계질서의 파괴라는 담론은 또 한편으로 이 전쟁에 참가한 명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하지만 케네스 스워프는 명의 황제인 만력제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에 명의 서북방 닝샤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만일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명의 주력군이 일본군보다 먼저 서울에 당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명의 황제는 조공국에 대한 책봉국의 의무를 강조했고, 그 점에서 중국의 전통적 외교관계는 여전히 견고했다는 것이다(353쪽).

김한규의 글은 이 문제에 대한 거시적인 이해를 돕는다. 그는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역사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당 시기에는 초원지대의 유목민족에 맞서 관중에 근거한 중원왕조가 동아시아 세계를 주도하였으나, 송-청 시기에는 랴오둥에서 건립된 요, 금, 원, 청 등 정복왕조가 잇달아 출현하여 동아시아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원과 청 사이에 있었던 명은 고대시기처럼 재차 중원에서 건립된 한족 왕조였고, 그 결과 이 시기 랴오둥은 주변부로 전락했다. 힘의 공백지대가 된 랴오둥에 고려(말)와 조선(초)이 진출을 시도했고, 그 다음 일본이 나선 것이 임진왜란이었다. 따라서 이후 랴오둥에 출현한 청의 누르하치가 동아시아 패권을 재차 장악한 것은 송-청 시기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정상적인 회귀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임진왜란이 주변 지역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오기는 했으나, 주자학과 문관 관료제에 기초한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는 당분간 견고하게 유지됐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책은 임진왜란에 대한 우리의 통념에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많은 숙제를 남겼다. 임진왜란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입력 2014.03.07 17:53

임진왜란, 100년 격동기 문을 열다 < 문화/생활 < 기사본문 - 주간조선 (chosun.com)

1592~1598년 임진왜란(2) - 대륙 세력이 되고자 한 일본의 세 번째 좌절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꽂고 싸우는 가토 기요마사의 모습. 가토에겐 임진왜란이 성전(聖戰)이었나? 1850년 ‘영걸 삼국지전’. 개인 소장.

 

유라시아 동부 도서부(島嶼部)의 유력한 세력인 일본열도의 국가들은 네 번에 걸쳐 유라시아 동부 대륙 지역의 진출을 꾀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첫 번째는 한반도의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친 시기였으며 이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끝났다. 이후 한반도는 신라와 발해가 남북으로 병립하는 시기를 맞이했으니 이것이 한반도의 첫 번째 분단이었다.

두 번째는 고려시대 말기에서 조선시대 전기에 걸친 13~16세기의 왜구였다. 이들은 한때 고려와 명나라의 안정을 흔들 정도였으나 결국 항구적인 정착지의 확보에 실패하였다.

세 번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이다. 인도까지 정복하려 했다는 이 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단기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결국 축출되었다. 이때 일본 측은 명나라 측에 한반도의 분단을 제안하였으며 명나라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논의하는 등, 한반도는 두 번째 분단의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조선의 강제병합부터 1945년 8월의 패전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일본열도의 세력은 만주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세력으로 그 지위를 확고히 하는 듯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일본 세력의 급속한 퇴각에 따른 공백기에 한반도는 또다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일본 측으로서는 유럽의 대륙부인 프랑스의 태반과 도서부인 영국을 지배하던 노르만 왕조, 동남아시아의 대륙부와 도서부의 상당 부분을 지배한 스리비자야 왕조와 같은 형태의 영토를 만들고자 한 시도가 번번이 무산된 셈이다.

역사상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정세를 뒤흔든 최초의 사건이 임진왜란이었지만, 그들의 활동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에서 관측된 것은 한반도의 삼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 ‘삼국지연의’가 아닌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서(魏書)’의 한반도 관련 기사에는 왜인이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에서도 왜인이 신라의 도읍인 금성(金城)을 공격했다는 기사를 비롯하여 왜인의 지속적인 움직임이 관측된다. 이 시기를 다루는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을 이른바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으로 상징되는 일본열도의 중앙집권적 세력에 의한 것으로서 해설하며 이러한 이해는 일본에서 20세기 전기까지 이어졌다. 이에 따라 조선을 강제병합한 20세기 전반에 일본 측은 ‘일본서기’에서 ‘임나일본부’의 거점으로 그려지는 가야 지역에 대한 발굴 내지는 도굴을 시도하였으나 그 역사적 실체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였다. 최근 들어 가야 지역이 아닌 전라남도의 영산강 지역에서 일본열도 출신의 무사(武士)들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왜계(倭系)’ 무덤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의 ‘진서(晉書)’ 열전에 보이는 마한(馬韓)의 잔존 세력 ‘신미제국(新彌諸國)’이 백제에 저항하기 위해 고용한 용병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20세기 전기에 일본이 만들어낸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게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란, 마치 일본열도의 통일 정권이 이들을 주도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파견한 양 후세에 정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일본서기’ 등의 고대 일본 역사서에서 ‘임나일본부’의 창세기(創世記)로서 존재하는 것이 이른바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 정벌’ 전설이다. 이 전설의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면 진구코고의 남편인 주아이텐노(仲哀天皇)가 규슈 지역에 군사 원정을 갔다가 한반도를 정복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도 무시한 바람에 죽자, 진구코고가 이 신탁(神託)을 수행하여 신라·백제·고구려를 정복, 일본의 속국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진구코고라는 사람의 실존 여부, 과연 이 시기에 일본열도에 이처럼 대규모의 해외 원정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단일한 중앙집권 정권이 존재했는가의 문제를 포함하여 ‘진구코고의 삼한 정벌’ 전설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성의 여부와는 별도로 전근대 일본에서는 이 전설을 통해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군사적 개입과 국제관계를 설명해 왔다.

이처럼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지역에서 자신들의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 ‘진구코고의 삼한정벌’이었다면, 그 활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한 일본의 수군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쟁에서 패한 663년 8월의 백강전투였다. 신라·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자왕 등의 지배층을 당나라로 끌고 가자, 백제 부흥군은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일본 세력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군이 육지에서 신라군에 맞서고 일본 수군이 오늘날의 금강 근처에서 당의 수군과 맞서 바다를 피로 물들일 정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신라·당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백제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한반도 남부에서 군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사라졌고, 그들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 시도는 유라시아 동부의 정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으며, 한반도의 분열상태라는 불안정 요인이 제거되어 이후 신라·당·일본은 국내외적으로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유라시아 동부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난 뒤 일본열도 세력은 대륙 국가들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지정학적 요건에 힘입어 폐쇄적이고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갔다. 그러한 일본열도의 세력을 군사적으로 위협한 것은 13세기에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열도의 서부 지역을 침공한 사건이었다. 저명한 일본 중세사 연구자 아미노 요시히코가 지적하듯이 고려가 40년간 몽골의 침공에 항거한 덕택에 일본열도는 몽골의 군사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느슨한 형태로 몽골제국의 일부가 되자 몽골은 고려를 연합하여 일본열도의 정복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일본열도를 지배하던 가마쿠라 막부의 군사 정권은 연합군에 의한 1274년, 1281년의 두 차례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막부는 무너지고 일본에는 두 명의 덴노(天皇)가 병립하는 분열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한 일본열도의 혼란기에 주로 서부 일본의 세력이 또 다시 유라시아 동부 대륙 지역에 대한 약탈과 점령을 시도하였다.

‘고려사’에서는 왜구가 처음으로 활동한 것을 1223년으로 전하면서도, 1350년 기사에서 ‘왜적의 침구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는 설명과 함께 왜구의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고대 영국의 역사서인 ‘앵글로 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도 유럽의 왜구라 할 바이킹의 첫 활동은 787년 기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793년 기사에서 “번개가 몰아치고 사나운 드래곤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 무시무시한 전조들이 노섬브리아 땅에 일어나 사람들을 매우 두렵게 하였다. 그 직후에 큰 기근이 있었고 같은 해 1월 8일에 이교도들의 무리가 린디스판에 자리한 하느님의 교회를 약탈하고 살육하였다”고 하여 바이킹의 활동이 이때 본격화되었음을 인상 깊게 전한다. 이처럼 왜구와 바이킹은 유라시아 동부와 서부의 대륙의 국가들에 충격을 주며 여러 세기에 걸쳐 활동하였지만, 노르망디·시칠리·러시아 등의 항구적 정착지를 마련한 바이킹과 달리 왜구는 대륙에 거점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일본에 상륙한 몽골·고려 연합군과 이를 피하는 일본인의 모습. ‘삼국퇴치 신덕전’ 중권. 개인 소장.

 

왜구 세력이 소멸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반도는 이종무가 이끄는 조선군이 1419년에 쓰시마를 공격한 것과 같이 일본열도에 대해 공세적 입장을 취하였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무역을 활성화함으로써 왜구가 취할 수 있는 상업적 이익을 줄이고, 왜구에 섞여 있던 왕직(王直)과 같은 중국인을 회유하여 제거하였으며, 척계광(戚繼光)과 같은 장군들이 왜구에 맞설 수 있는 효과적인 전술 전략을 개발하였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통일 정권이 수립되면서 왜구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졌다. 특히 도요토미 정권은 한편으로는 왜구를 진압한 공을 인정해 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하여 전쟁의 명분을 만들고, 또 한편으로는 왜구 세력을 흡수하여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일부에 편성시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왜구의 활동과 임진왜란이라는 침략 전쟁을 동일한 성격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지만, 왜구의 활동에서는 일본열도의 통일된 정권이 대륙을 정복하려는 의지와 그 의지가 실현되는 메커니즘이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필자는 이에 부정적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열도의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부를 침공한 세 번째 사건이었다. 열도의 100년간 분열을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열도 내에 가톨릭을 포교하려 하자 일본을 불교와 신토(神道)의 국가로 규정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의 지배가 일본열도의 구석구석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조총이나 전함과 같은 가톨릭 국가들의 우수한 군사 물자를 지원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시행한 것과 같은 철저한 기독교 탄압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고스티뇨 고니시 유키나가(Agostinho·小西行長)와 같은 유력 가톨릭 장군들이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a de Cespedes)와 같은 예수회 신부를 일종의 군종신부로서 한반도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임진왜란은 가톨릭을 믿지 않는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대한 일종의 ‘성전(聖戰)’이었다. 당시 유럽 가톨릭 국가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정복하고 원주민을 학살하는 데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니, 임진왜란 당시의 가톨릭 장군과 병사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그러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임진왜란 중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립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 正)는 열렬한 불교신도였다. 그가 신앙한 불교는 13세기에 니치렌(日蓮)이라는 승려가 개창한 니치렌슈(日蓮宗)라는 종파이다. 니치렌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 의 힘으로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 침공에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니치렌슈는 일종의 일본적 ‘호국불교’로서 기능하였다. 니치렌슈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일본이라는 국가보다 위에 있다는 근본주의적 주장을 펼치며 반란을 일으키거나 그때마다의 정권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다. 이 종교의 일파인 창가학회의 설립자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는 일본 정부가 국가신도(家神道)를 강제하는 데 저항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앙이나 사상에 투철하여 국가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사례는 일본열도의 역사상 보기 드물다. 참고로 같은 시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수십 명의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마찬가지 이유로 체포되어 옥응련 등이 옥사한 ‘등대사(燈臺社) 사건’이 있었고, 한반도에서는 박관준 등 수십 명의 기독교 신도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사하였다.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는 정치에 대한 종교의 우위를 주장하여 국가에 대립하는 것과 같은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일본의 토착 신앙인 신토와 니치렌슈라는 열광적 불교 종파의 가르침을 체화하여 자신의 군사적 행동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조선 침공을 선언한 도요토미는 가토가 독실한 니치렌슈 신도임을 알고는 이 종파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하사하였다. 가토는 이 깃발을 내걸고 임진왜란 7년간 한반도에서 활동하였으니, 그에게도 임진왜란은 니치렌슈를 믿지 않는 이교도와의 ‘성전’으로 간주되었을 터이다. 가토가 사명대사와 같은 조선의 불교 신도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로 임한 것 역시, 그가 임진왜란을 일종의 종교전쟁으로 보았음을 짐작케 한다. 불교는 역사상 평화로운 종교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대규모의 승병(僧兵)을 지닌 사찰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 일본이나 미얀마·스리랑카의 현대사에서 보듯이 불교도가 공세적 입장에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듯 1592년의 개전 당시 일본군의 선봉에 선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각기 기독교(가톨릭)와 불교(니치렌슈) 신도였으며, 이들에게 임진왜란은 일종의 종교전쟁이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일본군이 부처와 일본의 여러 신의 도움으로 전투를 잘 치를 수 있다는 대목이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을 내걸었을 때 가장 잔인하게 전쟁을 치를 수 있음을 역사는 수천 년에 걸쳐 증명한다.

여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중에 전쟁의 목표를 변경하면서 임진왜란에서의 학살은 도를 더해갔다. 인도와 중국을 정복하여 중세까지 일본에 알려진 세계 전체인 인도·중국·일본을 모두 지배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던 전쟁 초기에는 한반도가 향후 장기전의 거점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은 한반도의 주민들에 대한 지배를 철저히 함으로써 군량미의 원활한 보급 등을 꾀하였다. 그러나 조선 민관(民官)의 항전과 명나라 군의 참전으로 인해 ‘세계 정복’의 기대가 1년 만에 꺾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반도의 남부 4개 지역만이라도 점령하고자 명나라 측에 한반도 분할론을 제안한다.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러한 조건으로 강화 교섭을 추진하는 한편, 명 조정의 일각에서도 조선 국왕의 교체를 주장하는 등 조선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결국 국왕 교체와 한반도 분할안 모두 기각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실력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1597년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자신들의 당초 의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보복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학살한 것은 주로 이 시기였다.

유라시아 동부를 지배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걸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여름에 사망하자 전쟁을 계속 할 명분을 상실한 일본군은 열도로 되돌아갔다. 이로써 일본열도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대륙부에 대한 지배를 꾀한 세 번째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시도가 유라시아 동부에 미친 영향은 이전의 두 차례와는 달랐다. 중국에서는 한족의 명나라가 만주족의 청나라로 교체되었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서는 등 정권 교체가 있었다. 이 영향은 타이완과 동남아시아에까지 미쳐서 이들 지역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었다. 한반도는 분단의 위험을 피했지만 잇따른 쿠데타와 반란, 그리고 만주족과의 두 차례 전쟁과 점령이라는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왕조 교체에 준하는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유라시아 동부의 질서를 재편한 100년간의 장기적 변동기를 연 사건이었다.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이 100년간의 격동기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입력 2014.03.02. 15:33업데이트 2014.03.02. 15:37
 
'도요토미 히데요시 승진록'. 19세기 중기. 개인 소장

 

16세기 중기까지의 일본은 간헐적으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국가들을 괴롭히는 처치 곤란한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이 이 국가들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당시 한반도와 중국 지역 국가들의 존망을 결정한 외부 세력은 주로 북아시아의 민족들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중기에 이르러 유라시아 동해안의 일본열도가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게 된다. 분열되어 있던 일본열도(오늘날의 오키나와와 홋카이도를 제외)를 통일하려 한 오다 노부나가의 이질적이고도 이단적인 야망이 시작이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을 통일한 뒤에 대륙을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가졌다고도 하는데, 그의 이러한 꿈은 부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는, 김일성의 생전 지시사항을 실현하는 것을 통치의 대의명분으로 삼는 김정일·김정은의 ‘유훈통치(遺訓通治)’ 체제와 비교할 수 있다. 권력을 장악한 뒤부터 사망까지의 도요토미를 보면, 그가 능란한 통치술을 구사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지만 그의 권력의지가 어디를 향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들 대신 손자를 정권의 계승자로 내세우고 섭정을 한 이유는 무엇인지? 1592년에 이 세계의 어디까지를 정복할 심산으로 대한해협 너머 대규모 군대를 보냈는지? 자신의 권력 일부를 양도해 주었던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뒤를 이을 아들이 태어난 직후에 할복으로 몰아간 것은 과연 그의 정상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아니, 마치 1941년에 하바롭스크 근처에서 태어난 김정일을 1942년에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북한과 같이, 애초에 그가 몇 년 며칠에 태어났는지부터가 불확실하다. 그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잘 알 수 없다. 여러 문헌에서는 도요토미의 아버지를 기노시타 야에몬(木下 右衛門)이라고 하며 이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노시타는 원래 농민이었다는 설, 하급 병사였다는 설, 아주 천한 신분의 사람이었다는 설 등, 도요토미의 아버지를 둘러싼 정보는 매우 혼란스럽다. 도요토미가 생전부터 이미 자신을 신격화하면서 아버지의 존재를 말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선언하기도 했기에, 태양의 아들을 낳은 것이 되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마치 성모 마리아와 같이 성스러운 존재로서 무한한 애정을 표현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어머니가 교토의 덴노(天皇)를 모시던 궁녀였는데, 어떤 귀족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얻은 뒤에 고향에 돌아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도요토미가 과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어디에 속한 사람이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일본에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는 과정에서 작용했을 권력의지의 지향점, 일본 바깥세계에 대한 관념, 자신의 사후에 도요토미 정권이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할지에 대한 구상 등등 그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통일된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머니는 해가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에혼히요시마루’. 19세기 중기. 개인 소장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학설이 그렇듯이, 이들 다양한 의견은 그 자체로 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 서 있는 곳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알게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도요토미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궁극적’ 목적이 조선의 정복이었다는 한국 일각의 주장은, 한국을 ‘선량한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하고 일본을 그 선한 중심에 적대하는 ‘악의 축’으로 설정하는 기독교적 관점에 기반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를 빛과 어둠의 전쟁으로 해석하고 빛이 최후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믿은 조로아스터교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그 이원론(二元論) 말이다.

모든 집단이 자기 집단을 이 세계에서 가장 유의미하고 선량한 존재로 간주하고 집단 바깥에 사악한 적대 세력을 설정하는 것은, 자기 집단의 존속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행위이다. 다만 그러한 관점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은, 자기 집단의 그러한 세계관에 대해 바깥세계로부터 동조를 구하고자 할 때이다. 2014년 현재 한국은 조선어 탄압, 731부대의 생체실험, 종군위안부 문제 등을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인에 대해 저지른 범죄’로서 세계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안은 한·일 간에 국한되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이 인류의 존엄성을 훼손한 보편적 문제이다. 최근 들어 한국의 여러 세력은 이들 사안을 한·일 간의 문제로 국한시키는 데에서 벗어나 20세기 전반에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마찬가지의 피해를 입은 중국 및 2차대전 당시의 연합국 시민들, 나아가 인류 보편의 문제로서 일본국을 비판하는 일본계 미국인 마이클 마코토 혼다(Michael Makoto Honda) 의원 등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일본’을 한 덩어리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기존의 방식을 폐기하고, 조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언어를 쓰는 것을 금지당하고 학살당한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 묵묵히 징용 조선인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양심적 일본인’들과의 연대를 본격화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한국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가 성숙해졌다는 증거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의 궁극적 목적이 조선에 국한된다고 보는 것은 전쟁 전후로 도요토미가 발급한 여러 문서와 충돌할 뿐 아니라 일본의 궁극적 목표가 자국임을 안 명나라가 20여만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병해 전선(戰線)을 한반도에서 교착시킨 것이라는 당시 조선과 명의 해석과도 엇갈린다.

한편 이 처리 곤란한 난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의견은 “나이가 들어서 판단력이 흐려져 과대망상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유라시아 동부를 뒤흔들고 한반도를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시킨 장기간의 국제전을 지나치게 도요토미 개인적인 이유로 환원시키는 인상을 준다. 역사가 필연보다 우연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한 집단의 의사결정을 주도할 수 있는 일개인의 사적인 사정이 결과적으로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연적이고 개인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움직임은, 역사 지리적 상황이 특정한 국면에 이르렀기 때문에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국수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A급 전범 용의자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에 대한 특별한 감정에서 비롯된 신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개인적 감정이 일본 국가의 정책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경제 불황 속에 자신감을 잃고 2011년의 도쿄전력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 생존의 위기를 느낀 일본 사회의 피해의식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다. 나아가 명백한 우경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100여년 전처럼 세계에 위협을 줄 수 없으며 또한 임진왜란이라는 대형 사고를 친 뒤에 ‘쇄국(鎖國)’ 체제로 숨어버린 400여년 전처럼 할 수 없는 것은, 세계의 정치·경제적 구조가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해석할 때 지나치게 개인적 이유를 강조하고 그 사회적 배경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센세이셔널한 영웅주의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의 유라시아 동부 지역을 살펴보면, 한족(漢族)과 여러 비(非)한족 집단은 현재의 중국 동부 지역의 황하와 양쯔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을 거듭하였다. 물론 북아시아 지역의 집단들은 한족의 영역뿐 아니라 중앙아시아·러시아·유럽 등으로도 세력을 팽창하였기 때문에, 이들 집단이 한족의 영역만을 절대시하여 정복을 시도했다고 말하는 것은 중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아무튼 중국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비한족 집단이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면 그 집단의 거주지만큼 ‘중국’의 영역이 확장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최근세에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만주, 즉 현재의 동북삼성(東北三省) 지역을 비롯하여 몽골·티베트·위구르 등이 현재의 중국이라는 국가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예일대학의 피터 퍼듀(Peter C. Perdue) 교수는 ‘중국의 서진(China Marches West)’이라는 책에서, 한족이 지배하는 현대 중국은 ‘이민족’ 정권이었던 청나라를 증오하면서도 그 이민족 정권이 만들어준 유산은 모두 계승하였다고 지적한다. 이렇듯 중국사의 중심을 한족으로 두고 ‘이민족’이 한족에 흡수된 것으로 보아온 기존의 중화주의(中華主義) 관점을 비판하는 학설을 신청사(新淸史·New Qing History)라고 하며, 아시아·태평양 세력으로서 중국의 지나친 팽창을 억제하고 유라시아 동부의 여러 국가들을 후원하는 미국의 국책 학문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이렇듯 서로 밀고 밀리던 경쟁관계를 갖던 한족과 비한족 집단들이었으나 이른바 중국 ‘주변’ 지역의 집단들 가운데 이 경쟁에 참여하지 않은 집단이 둘 있었으니, 그 하나가 한반도의 한국인이고 또 하나가 일본열도의 일본인이다. 오늘날 한국인의 조상이 되는 집단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부여·고구려·발해 등은 동북삼성 지역을 거점으로 하여 한반도까지 영역을 확대하였으나 끝내 황하 유역으로 서진(西進)하지 않았다. 한민족의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해 16세기 조선의 임제(林悌)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전했음을,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전한다. 즉 “자신의 죽음에 임하여 아들들이 슬퍼하자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황제를 일컫지 않는 자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렇지 못했으니 이와 같은 누추한 나라에 사는 신세로서 그 죽음을 애석히 여길 것이 있겠느냐?’라며 곡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만약 오대(五代)나 육조(六朝) 같은 시대를 만났다면 돌려가면서 하는 천자(天子)쯤은 의당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라고 농담 삼아 말하고는 했다고 한다.(권9 ‘인사문’. 한국고전종합DB에 의함) 실제로는 신라나 발해, 고려 등이 한때 연호(年號)를 세우고 황제국을 선언한 적이 있지만, 임제가 했다고 전하는 말을 음미하면, 그는 한반도에 있던 여러 국가들이 한족의 영역을 정복하지 않은 채로 ‘좁은’ 한반도에서 칭제건원(稱帝建元)한 것은 명실상부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이익은 임제가 농담을 잘했다고도 적고 있으니, 임제가 정말로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일종의 농담이라고 생각되지만 촌철살인(寸鐵殺人)임에는 틀림없다.

한편 일본열도의 세력들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백제 지원군이 당나라 군대와 충돌하고 왜구가 명나라의 해안 지역을 약탈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중국 세력과 충돌하였다. 그러나 원양 항해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서 해외로 보낼 만큼의 정치적 통일성이나 원동력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비한족 집단들과는 달리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족의 국가들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일은 없었다. 임진왜란은 이러한 상황에 근본적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준 전쟁이었다.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거치며 풍부한 실전(實戰) 경험을 지닌 대규모 병력이 생기고 유럽 해양 세력들과의 접촉을 통해 해외 정보를 확보하게 되면서, 16세기 후기의 일본은 여타 비한족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한족의 명나라를 정복할 뿐 아니라 인도까지 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도요토미는 자신의 목표가 명나라임을 선언하고 조선이 그 선봉에 설 것을 요구했다. 물론 전쟁 발발 후 1년도 안 되어 중국 정복이 불가능함이 명백해지면서 도요토미의 야망은 꺾였고, 애당초 자신의 심복들인 서일본 세력을 주력 부대로 동원한 바람에 일본 국내의 정치 군사적 기반이 약화되어 도요토미 정권은 2대로 단명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가 ‘늙음에서 기인한 오판’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족의 영역을 지배하고자 한 모든 비한족 세력들의 시도가 성공한 것이 아니고 만주족과 같이 우연이 겹치며 명나라의 정복에 성공한 사례도 있다. 따라서 도요토미가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여 명나라의 정복을 시도한 것은 한족과 비한족 세력들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경합한 수천 년의 패턴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은 한반도가 지정학적 요충지로 세계사에 등장하였음을 알린 사건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한반도가 북아시아 평원과 황하·양쯔강 지역의 외곽에 위치했기 때문에 한족과 비한족 세력 간의 충돌로부터 입은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일본이 한족의 중국을 정복하려 하자, 한반도는 험난한 동중국해를 항해하는 대신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교두보로서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원양 항해 기술이 오늘날과 같이 발달되어 있지 않던 당시에 일본이라는 유라시아 동해안의 신흥 세력이 자국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주요 루트인 한반도를 자국의 바깥 방패(번병·藩屛)로 삼아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은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16세기 후기에 한반도가 갖게 된 이러한 지정학적 동력(動力)은 120년 전에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여,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한 끝에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은 유라시아 동부의 대륙 세력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몽골·러시아 등의 대륙 제국에 대하여 에스파니아·포르투갈·영국·미국 등의 해양 제국 모델이 세계사의 헤게모니를 잡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 육지보다 바다에서 움직이는 것이 더욱 편리해진 현재, 이러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2014년 현재 중국과 일본이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동중국해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이다. 또한 남중국해의 영해권을 두고 베트남·타이완·필리핀·브루나이·말레이시아·미국과 중국이 전개하고 있는 새로운 전국시대는,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위기를 상대적으로 완화시켜 주는 효과를 낳고 있다. 한국의 일부 세력은 여전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노리며 북한에 접근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중국이 북한을 번병으로 거느리고 있다고 해석한다. 필자는 이를 ‘역사가 반복된다’는 가설을 지나치게 기계론적으로 해석한 데에서 비롯된 오류이자, 일본을 세계사 속의 불변하는 절대 악으로 간주하는 이원론적 종교관이며, 기술 문명의 발달이 이끌어낸 인류사의 비가역적(irreversible)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부의 변경이었던 16세기 중기 이전, 일본열도 세력의 대두로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해안의 지정학적 요충지가 된 임진왜란부터 20세기 전기에 이어,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세 번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인류 문명이 현재의 교통과 통신 기술을 폐기하지 않는 한, 한반도의 주민들은 이제까지의 역사적 경험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상상력으로 미래 전략을 구상해야 할 것이다.

 

 

중앙일보 입력 2019.05.19 06:00 업데이트 2019.05.26 23:55

[유성운의 역사정치] 임진왜란 후 재빨리 일어선 조선…그뒤엔 과감한 감세 있었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신윤복이 그린 &#39;야금모행(夜禁冒行)&#39;

 

“도성(都城) 안은 위로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시정의 천인까지 모두가 지극히 사치하여, 벽에 바르는 것은 외국의 능화지(菱花紙)가 아니면 쓰지 않고, 입는 옷은 능단(綾段)ㆍ금수(錦繡)가 아니면 쓰지 않고, 타는 말은 모두가 상승(上乘)이고, 먹는 음식은 모두가 맛나고 기름진 것이니… 그 밖에 혼인과 음식의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금단하는 일을 전하께서 먼저 궁중부터 다스리시면 뭇 신하가 어찌 감히 분수를 넘어서 함부로 행하겠습니까.” (『효종실록』 효종 3년 11월 13일)

이조판서를 지냈던 조경이 올린 상소문의 일부입니다. 능화지는 궁궐 침전 등에서는 색과 무늬가 있는 고급 종이고, 능단과 금수는 모두 화려한 고급 비단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효종 3년은 1653년, 그러니까 임진왜란이 끝나고 반세기 가량 지난 때입니다. 물론 50년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7년간의 전쟁으로 온 국토가 황폐해졌던 조선은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신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경대부로부터 시정의 천인까지 지극히 사치한다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소문을 올렸을 당시 조경은 일흔을 바라보는 원로였습니다. 혹시 젊은 세대를 바라보는 ‘꼰대’의 못마땅함으로 상황을 과장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과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조차 남보다 의복이 뒤처질까 우려하고, 음식이 남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다”(『승정원일기』, 현종 5년 11월 4일)는 기록처럼 이 시기의 사치풍조를 염려한 건 조경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떻게 외부의 조력도 없이 반세기 만에 이처럼 전후복구를 할 수 있었을까요.

임진왜란 후 재건 프로젝트-‘여민휴식’

임진왜란을 다룬 영화 &#39;명량&#39;의 한 장면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600년 9월 국정의 최고기구였던 비변사는 전후 복구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12개 조로 구성된 이 계획은 이후 ‘여민휴식(與民休息)’이라고 불린 국정 어젠다로 향후 60여년간 지켜졌습니다.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하면서 안정 속에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을 지닌 ‘여민휴식’ 네 글자엔 임진왜란 전 국정 운영에 대한 쓰라린 반성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7년간의 전쟁 중 조선의 지배층이 목도한 것은 전국 곳곳에서 나타난 심각한 수준의 민심의 이반이었습니다. 반란(이몽학의 난)은 그렇다 치더라도 백성들이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면서 일본군의 길잡이인 ‘순왜(順倭)’가 되는가 하면, 조선 관군을 공격하는 일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심지어 순왜 무리가 선조의 맏아들인 임해군을 사로잡아 일본군에 넘기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여민휴식’의 큰 틀은 토지 복구, 국가 재정 감축, 세금 감면이라는 큰 틀 아래 추진됐습니다. 민간의 부담을 최소화시키는 한편 중앙정부 차원의 개입보다는 민간경제를 활성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죠.

개간하면 세금 혜택을 드립니다.

조선 후기 양기훈의 &#39;밭갈이&#39;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조선에선 생산성이 높은 하삼도(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농업 상태가 사실상 국가 경제를 좌우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반도체ㆍIT 산업군 정도랄까요.

임진왜란 전 조선의 총 농경지 면적은 151만5500 결(結)이었는데 ‘하삼도’는 66.2%(100만9720 결)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죠.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 보고된 하삼도의 토지는 29만 결에 불과했습니다. 전쟁 전 1/3 수준도 안 될 정도로 급감한 것이죠.
토지 복구가 가장 긴급 과제로 떠오른 정부는 진황전(陳荒田)이라고 불린 황무지 개발을 적극적으로 독려했습니다. 하지만 악화된 민심을 감안할 때 개간을 지시한다고만 해서 성과가 담보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당근책을 제시했습니다. 토지를 개간하면 관청의 둔전(屯田)이나 개인 소유의 전답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이는 각 지방의 생산 잠재력을 크게 자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효종실록 [연합뉴스]

 

지방관의 입장에선 진황전을 개간해 관청의 수입으로 사용할 수 있으니 가용 예산이 늘어나는데다 개간 성과가 좋으면 근무평점에서도 고가를 받을 수 있으니 1석 2조나 다름없었습니다.
민간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길만 했습니다. 국가의 용인 아래 재산을 불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죠. 조선의 산업은 사실상 농업이 전부라는 점을 참작하면, 황무지 개발은 당시로선 벤처창업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사족’이라고 불린 지방의 유력 세력들은 노비도 다수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간산업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지방 관청도 성과를 내기 위해 종자와 농우를 지급하며 초기 자본을 대주는 등 독려했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부는 당근책을 더 내밀었습니다. 개간된 토지를 최저 등급인 6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죠. 토지의 비옥도와 수확량에 따라 매겨지는 등급이 낮으면 그만큼 세금도 줄어듭니다.
이런 이유로 전국 각지에서 개간 열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전쟁 후 복구사업은 대규모 국가예산을 투입해 경기를 활성화시키곤 하지만 이번엔 지역의 가용 자본을 자발적으로 끌어당긴 것이죠.

17세기 후반에 편찬된 경북 성주 지역의 지방지 『경산지(京山志)』에 따르면 이곳의 농경지들은 대부분 1600년대 중반에 개간사업이 완료된 것으로 나옵니다. ‘여민휴식’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입니다. 개간 열기가 과열돼 지역에서 보존해온 산림이나 저수지까지 농토로 바꿔버리는 세태를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중앙정부의 허리띠 졸라매기 

2015년 &#39;제21회 동래읍성역사축제&#39; 왜군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재연한 모습 [중앙포토]

 

 개간 사업을 장려한 중앙 정부가 착수한 것은 세금 경감 정책이었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에 냈던 세금은 토지 1결당 생산량의 12.1%~15.4% 정도라고 합니다. 통상 20%가량을 납부한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줄어든 셈이지요. 10% 이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세금을 줄인다는 것은 정부의 씀씀이를 줄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없습니다. 이 때는 국채를 발행한다든가 적자 재정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조선 정부는 재정 규모를 최소화하는 재정 개혁안도 내놓았습니다. 다만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주먹구구식으로 깎아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긴축예산안을 만드는 데는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 밑에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발발 첫 날부터 끝난 날까지 기록한 &#39;징비록&#39; 초본. ‘징비록(懲毖錄)은 ‘지난날의 잘못을 경계해 뒤에 환난이 없도록 삼가다’는 뜻이다. [중앙포토]

 

그렇게 해서 1605년에 나온 긴축예산안이 ‘을사공안(乙巳貢案)’입니다. 공안(貢案)은 세입을 바탕으로 왕실과 중앙의 각 관청이 필요로 하는 자금과 물품을 공급해주는 예산 지침서입니다.

을사공안에 따르면, 연간 국가재정의 총규모는 쌀 10만 석 미만으로 정해졌습니다. 이는 임진왜란 전 예산인 20만 석의 절반에 불과한 수치였습니다. 조정은 관료들의 인건비 같은 경상비 외엔 대부분 삭감하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자구책을 내놓았습니다. 정부가 재정규모 축소를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외에 국가 주도의 대규모 사업이나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진 예산 외에는 모두 폐지 혹은 축소했습니다.

조선의 빠른 회복과 혁신의 노력  

임진왜란 전과 &#39;을해양안(1635년) 당시의 토지 면적 비교.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인용

 

이런 노력은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에 따르면 1632년에 시행한 토지조사 사업에서 하삼도 지역의 토지면적은 89만4871 결로 나타납니다. 30년 만에 임진왜란 전 89% 수준까지 복구한 셈입니다.

심지어 37만9438 결(42.4%)에 달하는 ‘진황잡탈전(陳荒雜?田)’에선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정작 이 시기 국가 연간재정은 20만 석을 회복한 상태였습니다. 당시의 재건 프로젝트가 얼마나 확실한 결과를 거둬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42.4%나 되는 토지에 세금을 거두지 않고도 재정 확보가 가능했을까요.

 

서울 미동초등학교생들이 8일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 뜰에서 손모내기 체험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전쟁이 끝난 데다 농토가 확장되고 세금은 줄다 보니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토지는 한정됐기 때문에 개간을 무한정 할 수는 없었죠. 결국 생산력을 증대하려면 농업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 됐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도입된 것이 이앙법(모내기)입니다. 수전 농업의 대표적 기술인 이앙법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을 2배 가량 늘릴 수 있지만 풍부한 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뭄에는 취약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선 이앙법을 막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인구 증가와 느슨해진 중앙 정부의 통제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17세기 초반만 해도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만 쓴 이앙법이 18세기 초엔 평안도까지 퍼졌을 정도로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갑니다. 농민들은 보나 저수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가뭄에 대처하는 방법을 발전시키면서 과감하게 이앙법을 확대해 나갔습다.

조선 정부 역시 기존의 농업 위주 경제를 벗어나 상업과 유통경제에 눈을 돌렸고 염전이나 은광 개발, 동전 주조 등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임진왜란의 충격에서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사적 제118호 진주성 [연합뉴스]

 

조선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도 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의 오랜 물음표였습니다. 심지어 일본과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모두 정권이 무너지는 흐름에서 정작 무능함을 드러낸 지배층이 어떻게 계속해서 200년을 더 이어나갈 수 있었냐는 것이죠.
과거엔 조선 양반층이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해 사회 불만을 억눌렀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그러한 강압보다는 지도층의 각성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의 상처는 컸습니다. 조선의 인구는 1/3 가량 감소했고, 토지의 70~80% 가까이 황폐해졌습니다. 말 그대로 그로기 상태에 놓인 꼴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조선의 국정 운영자들은 과감하면서도 유연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세금을 줄이고, 민간의 참여를 늘리고, 국가 예산을 긴축하면서 사회 구성원의 이해를 구했습니다. 또 100년의 시간을 들여 대동법이라는 세제 개혁을 완성시키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등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용을 해본 뒤 그 성과를 갖고 전국에 확대하는 방식을 쓴 것이죠.

정부의 이런 노력에 민간은 기꺼이 응답했고, 조선은 불과 50년 만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는 저력을 보였습니다. 조선사에서 민관이 함께 전진했던 몇 안 되는 장면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 시행기념비`. 1659년(효종 10)에 김육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에게 균역하게 한 공로를 잊지 않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남 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설치했다. [중앙포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재정 규모는 갈수록 불어나는데 민간의 체감 경기는 살아나지 않는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인구 변동이나 제조업의 쇠퇴 흐름 등을 감안하면 분명 어려운 시기이고, 정부가 주장하는 '체질 개선'이나 시간이 필요하다는 설명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서울 강남의 유명 상권조차 줄줄이 빈 점포가 늘어나거나 중견 기업들이 줄줄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상황을 보면 "경제의 큰 그림을 보라"는 정부의 설명이 언제까지 힘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경제는 심리라고 하죠. 조선이 임진왜란 후 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던 데는 체감할 수 있는 결과가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예를 들어 세금 혜택을 받는 개간지가 재산으로 불어나는 것처럼 말이죠.
집권 3년차로 접어들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 성적표가 숫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간에 체감되는 성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신병주『1623년 인조반정의 경과와 그 현재적 의미』, 조광 『17세기 동아시아사의 전개와 특성-한국사의 흐름을 17세기 세계사 속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기사에서 쓰인 수치 및 통계는 김성우 『전쟁과 번영-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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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이 끝나는 1598년 11월 19일에 벌어진 노량해전의 모습을 그린 그림. 등장인물 약 4400명으로 연합군 2330명, 왜군 2070명으로 그 중 884명이 시체거나 물에 빠진 군사이고 선박은 205척이 묘사되어있다. 그중 136척은 연합군 선박이며 99척은 왜군 선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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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로부터 정유재란(1597~1598) 당시 순천왜교성 전투를 그린 '임진정왜도(壬辰征倭圖)' 자료집(1999)을 구했다. '임진정왜도'는 '임진왜란 때 일본을 정벌한 그림'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순천왜성을 중심으로 연합군(조선군-명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 상황 뿐만 아니라 노량해전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화가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정황상 명나라를 따라왔던 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 

두루마리로 된 그림의 길이는 6.5m다. 이 작품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을 소재로 한 것 중에 유일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내용이 중국인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이나 거북선은 등장하지 않아 아쉽다.

'임진정왜도'가 빛을 보게 된 경위는 흥미롭다. 오래전 미국의 한 교수가 미국에 사는 중국 태생 시민으로부터 이 그림에 대한 평가를 요청받았다. 그 교수는 이렇게 얻어볼 수 있었던 그림을 한 세트의 사진들로 찍었는데 대부분은 흑백사진이었고 몇 부분만 컬러사진으로 찍었다. 그림은 중개인을 통해 홍콩에 살고있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팔려 현재는 소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1968년경 미국 컬럼비아 대학 한국학 교수인 게리레드야드 교수가 다른 미국 교수에게서 흑백사진을 부분적으로 찍은 사진 한 세트를 보관하고 있던 것을 1998년 11월 순천시 전통문화보존회에서 조순승 전 국회의원을 통해 교섭해 필름 11장을 입수했다.
  
  복원된 순천왜교성 모습으로 가운데 우뚝솟아 있는 부분에 일본군 수장이 거처하는 천수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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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유재란 당시 순천왜교성 안에 있던 천수각 모습으로 일본군 수장이 머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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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된 순천왜교성 모습으로 입구부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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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왜교성 전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이 1598년 8월에 급사했다는 전보를 듣고 철군을 서둘렀던 왜교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군과 조명연합군간에 3개월 동안 벌어진 최대 최후의 격전을 펼친 전투다.

당시 전쟁에 참전한 조선과 명나라의 지휘부를 보면 육상군은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의 제독인 유정, 해상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의 도독인 진린으로 왜교성에서 요새를 구축했던 왜군 장수는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임진정왜도'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저술가들이 전쟁에 관한 여러 가지 저술을 했었지만 그림으로써 보여준 것은 전혀 없었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던 거북선을 그렸다고 하는 그림들도 훨씬 뒤에 그려진 것이다. 대부분 전쟁이 끝난 지 200년 후에 그려진 것들이다.
    
  명나라 제독 유정이 소서행장과 협상하기 위해 성밖으로 유인해 나오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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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제독 유정이 왜장 소서행장과 협상하기 위해 성밖으로 유인했으나 왜군이 눈치를 채고 황급히 성안으로 달아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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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했던 해전인 노량해전을 상세하게 묘사한 그림이 발견된 것은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전투도 속에 거북선은 한 척도 등장하지 않지만 생생한 전투 장면과 놀랄만한 화필은 당시의 정황과 전장의 긴박함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한다.

'임진정왜도'를 그린 화가의 이름은 미상이다. 그러나 왜교성 전투와 노량해전의 목격자인 것이 확실하고, 정유재란 당시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온 명나라 장군들 중 한 장군의 참모부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은 조선인이 아닌 명나라 사람이 그렸기 때문에 조선의 병사와 선박들은 비록 그림속에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역사적 지식 없이는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그려진 길이 6.5m 두루마리 그림에 나오는 장면들은 시간상으로는 정유재란이 끝나기 전 약 3개월, 거리상으로는 약 30km를 포괄한다. 
      
  정유재란이 끝나는 1598년 11월 19일에 벌어진 노량해전의 모습을 그린 그림. 등장인물 약 4400명으로 연합군 2330명, 왜군 2070명으로 그 중 884명이 시체거나 물에 빠진 군사이고 선박은 205척이 묘사되어있다. 그중 136척은 연합군 선박이며 99척은 왜군 선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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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 연합군 지휘관 선상회의 장면으로 배 앞부분 덩치큰 장수가 명군 지휘관으로 보이며 지켜보는 조선군 병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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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약 4400명이다. 왜군이 약 2070명(884명은 시체이거나 물에 빠진 사람)이고 2330명가량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다. 바다를 메우고 있는 205척의 배 가운데 136척은 명과 조선측 선박이고 99척이 왜선박이다. 왜선박 가운데 53척은 바다에 떠있고 46척은 불길에 휩싸였거나 침몰당하고 있다. 연합군 선박은 한 척도 불붙거나 침몰당하지 않아 역사적 사실과는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육지에는 나무 184그루, 건물 196채, 487개의 깃발이 점점이 산재돼 있다. 사용된 무기로는 대포 75문, 조총 322정이 있고 무수한 창검과 활, 화살이 그려져 있다.

태극기의 원형으로 보이는 조선수군기 모습? 놀랍다

기대했던 거북선은 보이지 않았지만 의외로 놀랄만한 그림이 있다. 조선수군의 배로 추정되는 배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한국이 최초로 근대적인 국제관계에 들어서면서 한국을 나타낼 국기가 필요해 1882년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정왜도'를 통해 거의 300년 전에 그려진 그림 속에 태극기의 선구적 원형이 담겨 있다고도 해석 가능하다. 더구나 태극기의 출현은 중국 선박이나 일본 선박으로부터 조선 선박임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 국가의 상징이었음을 증명한 셈이다.

순천왜교성을 공격하고 있는 전함 가운데는 맨 앞에 특이한 깃발을 단 두 척의 전함이 있다. 한 척은 '천병(天兵)'이라는 깃발을 달고 있어 당시 조선에 출정한 중국 군인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다른 한 척은 태극기와 유사하다.

그림에 보이는 증거로 보아 한국인들은 매우 오래전부터 태극을 국가적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속 깃발에는 태극말고도 네 귀퉁이에 꽃무늬 같기도 하고 새 무늬 같기도 한 것이 배열돼 있다. 이 네 귀퉁이에 그려진 무늬가 가운데 태극을 향하고 있다.
      
  연합군 함대를 확대한 장면으로 오른쪽 상단에 조선수군으로 보이는 선박에 태극기의 원형으로 보이는 깃발이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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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수군 선박에 매달려있는 수군기를 근접촬영한 모습으로 태극기의 원형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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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오늘날의 태극기에서 볼 수 있는 네 귀퉁이의 괘와 일치한다. 화가는 '천병'기와 '태극'기로써 중국 선박과 조선 선박을 구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두 배에 타고 있는 수군의 제복으로도 구분된다. 명나라수군들은 술이 달린 투구를 썼고 조선수군들은 현대 소방관의 헬멧과도 같은 밋밋한 투구를 쓰고 있다.

태극기의 기원은 1882년 대일 수교사절단의 사신들이 창안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이 사용한 깃발을 유추해보면 태극기의 기원이 조선수군기에서 유래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임진정왜도'는 정유재란 당시의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태극기의 원형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입력 2007.10.01 (14:44)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에게 귀와 코가 잘려 보내져 일본 교토(京都)에 묻혀 있던 조선 군인.양민들의 영혼이 400년만에 제대로 된 안식처를 찾게 됐다.
경남 사천시와 사천시문화원은 1일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서 `이총(耳塚.귀무덤) 안치 위령비 제막식과 함께 위령제를 갖고 이곳에 안장된 귀무덤 희생자 12만6천명의 넋을 달랬다.
이 귀무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전공을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해 잘라간 군인과 민간인 희생자의 귀와 코를 안치해 놓은 곳으로, 귀무덤은 400년 동안 일본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신사 앞에 봉분 형태로 묻혀 있었다.
귀무덤은 봉분에서 채취한 흙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져오는 형식으로 1990년 한국에 돌아와 1992년 사천의 조명군총 옆에 묻혔지만, 그동안 안내판이나 비석도 없이 쓸쓸하게 방치돼 왔다.
이번에 만들어진 위령비는 사천시가 조명군총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400년이 넘도록 일본 땅에 묻혀 있다가 고국에 와서도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귀와 코의 원혼들은 이제서야 공식적인 안식처를 찾은 셈이다.
위령비는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과 싸우다 숨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묻힌 조명군총에서 20m 가량 떨어진 곳에 세워졌으며, 1.8m 높이로 귀의 모습을 추상화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위령제에서는 희생자 유족 대표로 한산 이씨 문중이 제향을 했으며 헌다례, 헌화, 불모산 영산제 등 그동안 편안히 잠들지 못했던 넋을 달래기 위한 의식들이 이어졌다.
위령제에는 귀무덤의 환국을 추진해 온 박삼중 스님과 함께 일본 쪽에서 무덤의 환송을 도와 온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 스님이 참석, 참회사를 하고 위령비에 헌화를 해 눈길을 끌었다.
북관대첩비의 반환에 힘을 보태기도 했던 가키누마 스님은 참회사를 통해 "원혼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안식처를 찾게 돼 감개가 무량하다"면서 "한일 양국의 숙원사업이던 이번 행사를 계기로 양국 우호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삼중 스님은 "원혼들이 한국에 돌아와 이곳에 묻힌 뒤 아무런 표시도 없고 한쪽 구석에 방치돼 그동안 마음이 아팠다"며 "지금이라도 원혼들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위령비를 세우게 돼 걱정을 덜었다"고 말했다.

 

 

환향녀의 유래환향녀의 유래 - 밀양신문 (newsk.com)

기사입력 2008-04-18 16:01

 

조선 인조 때 만주족이 일으킨 후금은 스스로 조선과 형제이니 형제 국으로서 손을 잡고 명을 치자는 제의를 해온다. 하지만 이런 제안에 소중화(中華)에 빠져있던 조선은 후금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적대시하게 된다.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명을 무너뜨리고 중국대륙의 주인이 된다.

조선이 청을 오랑캐라고 무시한 보복으로 청나라는 3만의 군사로 제1차 조만전쟁(병자호란:1636년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을 일으켜서 강화조약을 맺고 돌아갔으나 조선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2차로 청태조가 이끄는 10만의 군사에 1차 때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싸움한번 해보지 못하고 항복을 하니 그것이 그 유명한 제2차 조만전쟁이고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이다.

 

강화도에 피난 갔던 세자와 왕자들이 포로로 붙잡히니 인조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고 삼전도에서 우리역사상 유례가 없는 치욕적인 항복 조인식을 치르게 된다. 

 

인조는 머리를 풀고 백성이 보는 한겨울 들판 가운데 수강단(受降檀)을 쌓고 머리를 조아리며 무릎으로 기어서 172개가 넘는 돌계단을 올라가면서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태종 홍타시에게 세 번 절을 올리되 한번 절을 할 때마다 세 번씩 아홉 번을 돌계단에 이마를 부딪쳐야 했습니다(삼배구고두: 三拜九敲頭).

 

그것도 그냥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이마를 찧는 소리가 단위의 청태종 귀에 들려야 했고 이마가 터져 피가 나서 그 피가 가슴까지 흘러내려야 항복이 받아들여졌다.

  

그때 삼전도에서 조선의 자존심이란 자존심은 다 뭉개졌습니다. 청나라는 바로 그것을 노렸던 것이었다. 

 

원래 청나라 만주족과 우리는 같은 동이족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한민족은 장손민족이며, 만주족의 원류인 말갈족이나 여진족은 다 동이족의 방계혈족이었다.  동이족의 종주국의 후예인 조선이 두 번 다시 청나라 만주족에게 도전할 마음이 없도록 만들자는 것이 청나라의 의도였다.

  

항복 후에 조선은 청나라의 군수품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다 바쳤고, 멀리 제주도의 진주부터 조선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바쳐야만 했다. 그때 열댓 살 된 앳된 딸들을 청나라의 하녀 또는 군사들의 성적인 노리개 감으로 다 갖다 바쳤다. 

 

그 어린 딸들이 오랑캐라 불리던 청나라의 노리개로 끌려갔을 때 그 부모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딸들을 빼앗긴 어머니는 통곡하다가 기절을 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고, 목매달아 죽는 등 그때 조선 백성의 삶은 완전히 삶이 아니었다. 

 

국가가 힘이 없고 약해지면 그리고 정신을 못 차리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 수모를 받을 때 ‘동방예의지국’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후 끌려간 백성들을 다시 돌려받을 수 없겠느냐고 외교교섭을 계속한 끝에 10년이 지나서야 돈을 내고 그 중 5만 명을 돌려받았다. (양반들은 100냥, 군수 딸은 50냥, 일반 백성들은 5냥)

  

그렇게 돌아온 5만 명 중에서 2만 명이 1년 안에 다 자살을 했는데, 왜 자살했을까.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자들을 청나라 군사들하고 놀아난 여자들이다 하여 이빨에 빨간 칠 까만 칠을 해서 하늘과 사람들을 똑바로 보고 살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사람들을 고향에 돌아온 여자들이라 해서 환향녀(還鄕女)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화냥년이란 욕으로 변한 것이다.  청나라에 끌려가 그 수모를 당하고, 돌아와서는 그 몸으로 살아 돌아왔다고 손가락질 해대니 어떻게 살수가 있었겠는가? 누가 환향녀가 되게 했나?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위정자들은 고향에 돌아온 환향녀들에게 부끄러워하며 반성을 할 줄 모르고, 오히려 짓밟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6만 명은 돈이 없어서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성적인 노리개로 하인으로 실컷 부리다가 병들고 힘이 없어지면 더욱 사람대접을 못 받으면서, 청나라 군사들의 활받이로 일생을 마쳤는데 화살이 정통으로 맞으면 차라리 다행이고 다른 곳에 맞으면 꽂힌 화살을 뽑아서 또 갖다 바쳐야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 중국이 티베트에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바라보라고 환향녀는 말한다.

 

 
▲ 제목을 넣으세요

(사진: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의 역사공원)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강요하여 삼전도비를 세웠다.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져 있다.

글: 김수곤 경남국학시민연합 이사/ 밀양동명고 교사

 

 

청나라로 강제 시집 가 비운의 삶을 살고 떠난 의순공주.. 묘소 관리가 시급합니다

[변영숙 기자]

의정부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무덤 하나가 있다. 기구한 삶을 살다가 간 조선 여인의 무덤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족두리 묘'로 회자되는 의순공주묘이다.
    
▲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떼가 벗겨지고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 변영숙
의순공주는 전주 이씨 종친 금림군 이개윤의 딸로 본명은 애숙이다. 청나라 구왕의 계비로 시집 보내기 위해 효종의 양녀로 입적됐다. 청나라 순칠제의 섭정왕이자 계부였던 도르곤(구왕)의 계비로 대복진이었다.

1650년(효종 1) 구왕(도르곤)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이자 부하장수인 친왕 보로에게 재가하였으나 그 역시 1652년 사망하고 홀로 이국땅에서 홀로 쓸쓸하게 지내게 된다. 청나라 사신으로 간 부친 금림군의 간청으로 조선으로 돌아와 한 많은 삶을 살다가 1662년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지 6년 만이었다. 의순공주에 대한 짧은 설명이다.  

의순공주의 기구한 삶 

족두리묘를 찾아 가는 길은 말 없이 의순공주의 기구한 삶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빌라가 빽빽이 들어선 주택가에서 내비가 목적지 도착을 알리며 안내를 종료했다. 생전 처음 와 본 천보산 자락 낯선 산 밑 동네에서 한동안 서성였다. 의순공주묘는 어디에 있을까 하면서.

그때 마침 집 밖으로 나온 동네 주민에게 물어 겨우 묘를 찾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야산 입구로 들어서자 빌라 건물의 그림자에 가려진 익숙한 석물의 두상이 삐죽이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떼가 벗겨지고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 변영숙
 
천보산 등산로 입구 골짜기 옆 야산, 빌라 뒤편에 버려진 묘처럼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는 족두리묘의 광경은 처참했다. 반쯤 무너져 내린 봉분은 떼도 다 벗겨져 메마른 흙이 드러나 있었고 군데군데 이끼가 두텁게 덮여 있었다. 상석은 깨져 나갔고 묘비석도 없었다. 내 눈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무덤처럼 보였다.

묘 앞에 의정부 문화원 명의의 안내판이 없었다면 누가 이곳을 조선 공주의 묘라고 할까. 비록 양녀라 하더라도 말이다. 살아서도 기구했던 그녀는 죽어서도 이렇게 내팽개쳐져 있었다. 이러려면 차라리 무덤이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족두리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의순공주의 아버지 금림군의 묘가 있다. 의순공주묘에 비하면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주민들 말로는 일 년에 두 차례 빠짐없이 후손들이 와서 묘역 관리를 한다고 한다. 지척에 있는 의순공주는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눈길 조차 주지 않는 것일까. 

의순공주의 한 많은 삶

갑자기 역사의 질곡 속으로 속절 없이 던져지는 삶이 있다. 의순공주의 삶이 그렇다. 
  
▲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떼가 벗겨지고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 변영숙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 여인의 수가 최소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땅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들은 '환향녀'라며 조롱과 멸시를 당했으며, '더럽다'며 혼인 무효를 요구당하거나 심지어는 자결을 강요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하는 남자들이 숱하게 많아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청나라는 조선의 여인들을 조공으로 바치라는 요구는 그치지 않았는데 심지어 조선의 왕녀나 대신의 딸까지도 요구했다. 

위키백과나 한민족사전 등에 따르면, 효종1 년(1650) 청나라 섭정왕 구왕(도르곤)은 부인이 사망하자 사신을 통해 조선의 공녀를 계비로 맞이하겠다는 구혼칙서를 보내 온다. 당시 효종에게는 혼인을 가능한 딸과 조카딸이 있었지만 그녀들이 아직 모두 어리다고 속인 후 은밀히 혼례를 치뤄서 청나라로 보내지 않았다. 조정의 다른 대신이라는 자들 역시 자기 딸들을 숨겼다. 그때 종친 금림군이 자신의 딸을 보내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 의순공주 아버지 금림군의 묘  금오동 일대에는 금림군 일가의 묘역이 있다.
ⓒ 변영숙
 
금림군 이개윤의 딸 애숙은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효종의 딸 숙안공주와 동갑이었다. 효종은 숙을 양녀로 삼고 '대의에 순순히 따랐다'는 뜻으로 '의순'이라는 공주 작위를 내렸다. 

한편 도르곤은 혼인 예물로 말 600필, 금 500냥, 은 1000냥을 보내왔으며, 청나라의 혼인 관례에 따라 6만여 명의 수행인을 대동하고 산해관 부근의 연산으로 마중 나와 혼인을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1650년 12월 31일 구왕(도르곤)이 돌연 사망하여 의순공주는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곧 그의 형 친왕 보로에게 재가했으나 보로 역시 1652년 2월에 사망하였다. 게다가 도로곤은 사후에 역모죄로 몰려 부관참시까지 당했으니 청나라에서 과부 의순공주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1656년 청나라 연경(오늘날의 북경)에 사신으로 온 아버지 이개윤이 딸이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청나라 황제에게 딸의 귀국을 간청하니 청 황제가 이를 허락하여 의순공주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효종은 돌아온 의순공주에게 매달 쌀을 내려 평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금림군 부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오랑캐에게 정조를 바치고 두 번이나 재가를 했다'며 비난했으며, 조정과 상의도 없이 딸을 귀국시켰다는 죄로 이개윤을 삭탈관작하였다(효종 실록 16권, 효종 7년 윤 5월 10일). 또 효종이 죽고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공주의 작위를 빼앗아 이개윤의 딸로 격하시켰다.

의순공주는 어린 나이에 조선 왕실의 안위를 위해 오랑캐 나라로 시집을 갔다. 또 엄연히 첩이 아닌 정비 즉, 대복진의 신분이었음에도 '환향녀'라는 업신과 멸시 속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6년 후 스물 일곱이라는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아버지 금림군은 왜 자진해서 애숙을 청나라로 보냈을까라는 점이다. 후에 이긍익이 쓴 야사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것처럼 금품과 출세와 왕의 환심을 바라고 딸을 판 것인가. 그런 성정이라면 딸을 다시 조선으로 데리고 오지는 못하지는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들 부녀의 삶이 곧 나라를 빼앗긴 모든 조선 백성의 삶이었을 것이다. 이토록 애달프니, 소설과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는 것이리라. 

실록과 다른 금오동 족두리묘 전설

금오동에는 실록과 다른 전설이 전해져 온다. 다음은 의정부문화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족두리 산소와 정주당놀이'에 대한 안내판 내용이다.
 
 
"... 의순 공주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 오랑캐 나라의 구왕에게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생각하여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에 수행하던 노복들이 시신은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건져와 금오동 선영의 아버지 묘 밑에 장사를 지냈고 그때부터 이곳을 '족두리 산소'라 부르고 있다.

한편, 나라에서는 의순 공주의 충효 정신을 기리기 위해 천보산에 큰당, 작은당, 각시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략) 이후 마을 주민들이 이른 봄, 비명에 간 왕족 여인의 넋을 위안하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를 지낸 다음 농악대를 앞세우고 천보산의 큰당과 작은당 등을 왕복하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때부터 '정주당놀이'가 우리 고장의 민속놀이 겸 동제로 전승되어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큰당과 작은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속놀이나 동제의 전통이 끊긴 지 오래다.
 
족두리묘 보호가 시급하다
  
▲ 의순공주묘, 일명 족두리묘  족두리묘 에 대한 보호조치가 시급하다.
ⓒ 변영숙
 
의순공주묘 옆 빈터에 마을 주민들이 나와 있길래 의순공주묘나 동제 등에 대해 이것저것 여쭤보았다. 한두 분 정도만 '족두리묘'의 존재에 대해 알 뿐 의순공주나 정주당 놀이, 동제 등에 아는 분은 없었다.

10년 이상 금오동에 거주한다는 주민에 따르면, 과거 금오동 일대는 점집과 굿당이 많아서 절골이라 불렸다고한다. 이후 일대 정비 사업으로 굿당들은 이전하거나 철거되었고 당시 꽃동네로 불릴 정도로 많았던 꽃농원도 모두 사라졌다. 

"도로공사로 족두리묘도 곧 없어질 거예요." 한 주민의 말했다. 그 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의순공주묘 혹은 족두리묘는 묘역 정비나 문화재 지정 등 어떤 보호관리 조치 없이 방치되어 온 듯 보였다. 묘역 건너편에는 대규모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 의순공주묘역 의순공주묘는 트럭 너머 야산의 비탈길에 옹색하게 위치해 있다.
ⓒ 변영숙
의순공주의 묘에 진짜 의순공주가 묻혀 있는지, 아니면 민간에서 전해 오는 대로 족두리만 묻혀 있는 빈 무덤인지에 대한 좀 더 세밀한 고증이 필요해보인다. 

현재까지 의순공주묘는 묘역 정비나 문화재 지정 등 어떤 보호관리 조치 없이 방치되어 온 듯 보였다. 묘역 건너편에는 대규모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주민의 말대로라면 의순공주묘는 곧 사라질 터였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역사의 흔적을 찾아 의순공주묘를 방문한다. 의정부시는 의순공주묘와 금림군의 묘에 대해 조속히 전문가들로 구성된 공청회나 조사위원회 등을 개최하여 문화재로서의 가치 여부 확인 및 보호 조치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무런 조치 없이 훼손되게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입력 :2008-03-13 00:00ㅣ 수정 : 2008-03-13 00:00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본국에 써 보낸 ‘심양장계’(瀋陽狀啓, 소현세자 시강원 지음, 이화여대 국문과 고전번역팀 옮김, 창비 펴냄)가 번역·출간됐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청 태종의 군대에 맞서 싸운 곳이다.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심양장계는 신하가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 형식의 글이다. 세자를 수행한 시강원(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으로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갈 때 따라감) 관리가 장계를 작성해 승정원으로 보내면 승지가 국왕에게 전달했다. 본국에 보내기 전에 세자의 재가를 거쳤다는 점에서 세자가 임금에게 보낸 글이라 봐도 무방하다.

소현세자 일행은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이듬해인 1637년 4월 심양에 도착(당시 세자 나이 26세)한 뒤부터 귀국을 허락받은 1644년 8월에 이르기까지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세자는 자신을 수행해간 남이웅, 박로, 박황 등 시강원 관료들을 통해 본국 승정원에 장계를 올렸다.

정치상황·청나라 궁실 생활상 자세히

심양장계는 명말 청초의 조선 외교사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자료 중 하나로 꼽힌다. 책엔 청나라 건국 초기의 정치상황과 궁실의 내부 사정, 만주 귀족들의 생활상까지 상세히 기술돼 있다. 당시 조선과 명·청 3국의 외교관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조선이 몰락하는 명나라와 흥성하는 청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시강원 관리는 심양의 세자와 대군 이하 종신들의 동정 외에도 청나라 관아의 모습, 심양의 정치·경제·사회 상황, 청나라와 명나라의 관계까지 탐문해 보고했다. 특히 국경 지역에서 벌어진 담배와 종이 등의 교역에 관한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본국에서는 장계 내용을 토대로 적절한 대책을 세우고 지시를 내렸다.

장계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풀어야 할 시급한 외교 현안은 요동 일대를 장악한 청나라가 명의 본토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요청한 군대 파병 문제였다. 세자는 조선과 청 사이에서 양국의 의견을 조율했고, 조선군을 향한 청군의 각종 항의를 무마시키기도 했다.

세자가 양국 의견 조율·청군 항의 무마

시급한 현안을 놓고 급하게 쓰인 글인 만큼 심양장계는 정통 한문 문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조선식의 이두가 섞여 있고 부정확한 표현들도 적지 않아 해독이 쉽지만은 않다. 미묘한 국제관계를 다룬 탓에 조선왕조 기간엔 대외유출이 철저하게 금지됐고, 규장각에 국가 기밀자료로 보관된 채 왕실 친인척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심양장계에 가장 먼저 주목한 건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명말 청초의 조선 외교관계를 파악하고 조선 식민지화 구실을 찾기 위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고서번각위원회’가 1932년 ‘규장각총서’ 제1책으로 간행했다.

이번 번역본은 이화여대 국문과 고전번역팀이 이강로 한글학회 이사의 감수를 받아 수년간 공동작업 끝에 완성한 완역주석본으로 경성대 판본에 기초했다. 학술적 목적으로 이화여대 팀과 비슷한 시기에 직역 위주로 옮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번역본에 비해,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썼다는 것이 번역팀의 설명이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조선은 청나라 속국…” 중국의 역사공작 ‘신청사(新淸史)’를 고발한다|신동아 (donga.com)

“조선은 청나라 속국…” 중국의 역사공작 ‘신청사(新淸史)’를 고발한다

  • 이정훈 │편집위원 hoon@donga.com
  • 입력2013-04-19 17:51:00
 
  • 동북공정으로 고조선-고구려-발해사를 삼키려 했던 중국이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묘사할 가능성이 높은 정사(正史) ‘신청사’를 만들고 있다. 중국은 정사로 인정되지 않은 ‘청사고’에 속국전(屬國傳)을 만들고 조선을 여기에 포함시킨 전력이 있다.
  • 중화민족을 앞세우고 ‘통일된 다민족국’을 만들기 위해 만주족 역사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중국의 역사 공작 전모를 공개한다.

북경의 자금성. 만주족은 자금성 주변에 강력한 부대인 팔기를 포진시켜 한족 관료들을 감시·통제했다.

 
‘신동아’는 2003년 9월호에 중국 ‘광명일보(光明日報)’에 실린 ‘고구려사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을 공개해, 중국이 준비해온 동북공정을 알림으로써 반(反)동북공정 열풍을 일으킨 바 있다. ‘신동아’는 중국이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 공작의 실체를 고발하고자 한다. 이름하여 ‘청사공정(淸史工程)’이 그것이다. 청사공정은 청나라에 대한 공인된 역사서인 ‘신청사(新淸史)’를 만드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신청사’를 출간할 예정이었으나 내부 사정 때문인지 올해나 내년으로 발간 시기를 미뤘다.

중국이 자기네 역사서를 만들겠다는 데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청사’에 ‘조선은 청의 속국(屬國)이었다’고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중국 정부가 공인한 정사(正史)에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표기한다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니 한중 관계가 경색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독도 영유권을 넘보는 일본에 이어 민족자존 문제를 놓고 중국과 날선 대립을 해야 한다.

중국에는 한 나라가 망하면 다음 나라가 앞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전통이 있다. 이를 ‘나라(代)가 바뀌면(易) 앞 나라의 역사(史)를 편찬한다(修)’고 하여, ‘역대수사(易代修史)’라고 한다. 역대수사의 전통에 따라 중국은 25종의 정사를 만들어왔다(약칭 25사). 정사가 꼭 시대 순으로 편찬되진 않았다. 한참 후에 들어선 나라가 오래전에 사라진 나라의 정사를 만들기도 했다. 한 나라에 대한 정사가 꼭 하나인 것도 아니다.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식으로 두 가지인 경우도 있다.

한족(漢族)은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간주한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워 자신을 지배한 데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었다. 원을 무너뜨린 명(明)은 역대수사 전통에 따라 정사인 ‘원사’를 편찬했지만, 성의 없이 몇 달 만에 제작했다. 이 때문에 내용이 엉성하고 빠진 것이 너무 많아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반원(反元) 감정 때문인지 미루고 미루다가 중화민국(북양정부) 시절에야 257권의 ‘신원사’를 편찬했다. 이를 1919년 중화민국 5대 총통인 쉬스창(徐世昌)이 공인함으로써 청나라가 펴낸 ‘명사’보다 늦게 나온 ‘신원사’가 25번째 정사가 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공인’이다. 중국은 왕이나 황제 또는 그에 준하는 국가지도자가 승인한 것을 ‘공인’으로 본다. 전문 학자들이 검토해 승인하는 게 아니라 최고지도자의 인정으로 결정되니 정사를 정치적으로 만들 수 있다. 중국이 청사공정으로 만들려고 하는 정사를 ‘신청사’로 한 것은 과거에 제작됐으나 공인받지 못한 청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의 공인 여부는 정사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중국의 최고지도부는 9명(현재)의 상무위원으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의 상무위원회다. 청사공정은 2002년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주룽지(朱鎔基), 리란칭(李嵐淸) 4명의 상무위원이 비준함으로써 시작됐다. 이에 따라 2003년 중국 런민(人民)대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청사공정’으로 약칭되는 국가청사찬수공정(國家淸史纂修工程) 사업이 시작됐다. 이 사업을 통해 ‘신청사’가 완성되면 다시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들의 비준(공인)을 받아 정사로 인정될 예정이다.

‘신청사’가 조선을 속국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명사(明史)’와 뒤에서 자세히 설명할 ‘청사고’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명사’는 명이 무너진 후 중국을 장악한 청이 역대수사의 전통에 따라 편찬한 명나라 정사다. 중국 정사는 기전체(紀傳體)로 기록한다. ‘기’는 황제의 일대기와 정치활동을 적은 본기(本紀), ‘전’은 황제를 제외한 그 시대의 주요 인물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가리킨다. 열전 편에 외국에 대한 기록을 함께 넣었다. 조선에 대한 것은 ‘조선전’, 일본에 대한 것은 ‘일본전’으로 정리하는데, 이를 통칭 ‘외국전’이라고 한다.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역사만 기록해놓았다. 삼국 이전의 우리나라 기록은 없다. 중국의 네 번째 정사로 꼽히는 ‘삼국지’ 위지의 동이전은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대의 중국은 우리를 동이(東夷)로 칭했다. 동이전은 극히 중국 중심적으로 기술됐다. 이런 까닭에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동이전을 참고하면서도 매우 불편해하고 있다.

‘조선은 속국 또는 번국’

삼국지를 비롯한 고대 중국 정사에서 우리를 ‘동이’라고 한 것은 속국이라고 일컬은 것과 진배없는 멸시의 표현이다. 중국은 주변국을 동서남북에 있는 오랑캐라며 ‘사이(四夷)’로 부르고, 그에 대한 기록을 ‘사이전(四夷傳)’ 또는 ‘사이록(四夷錄)’으로 통칭해왔다. 사이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가리킨다. 동이전이 바로 사이전 중 하나였다.

송나라는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의 공격을 받아 북경을 포함한 16개 주(연운 16주)를 떼어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 항복을 ‘전연맹약(淵盟約)’이라고 하는데, 전연맹약 후 중국 정사에서는 주변국에 대한 기록을 외국전으로 격상했다. 이에 따라 ‘명사’는 조선전을 만들었으나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표현을 넣었다. ‘조선은 중국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번국(藩國)이다’라고 한 후 ‘조선을 속국으로 일컬으니 (명의) 경계 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적은 것이다.

‘울타리 번(藩)’자를 쓰는 ‘번국’은 ‘번부(藩部)’와 같은 말로, 중국 외곽에 있는 이민족 자치구역을 가리킨다. 지금 중국은 변방에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 시짱(西藏)티베트 자치구,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등을 두고 있는데 이것이 ‘번부’나 ‘번국’이었다. 중국은 외곽의 이민족을 복속시켜 1차로는 중국을 지키게 하는 울타리로 삼고, 2차로는 중국 정치 영역에 붙잡아둠으로써 중국 영토를 넓히는 전략을 구사했다.

책봉과 明軍 파병

청나라 때의 변발. 만주족은 그들의 풍습인 변발을 전 중국인에게 적용시켰다.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책과 함께, 2004)에서

중국은 영토가 넓다보니 내지(內地)에도 이민족 거주지를 두게 됐다. 내지에 있는 이민족 자치구역은 ‘토사(土司)’라고 했다. 중국 정사는 토사와 번부는 외국전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본기나 열전 등을 기술할 때 번부와 토사에 대한 기록을 넣었는데, 이는 중국의 일부인 속국으로 본다는 뜻이다.

번부가 바로 과거의 사이(四夷)다. 전연맹약 덕분에 동이는 번부에서 빠져나왔지만,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은 계속 번부로 규정돼, 지금은 중국의 일부가 돼버렸다. 중국은 중국 중심의 역사 기록을 남김으로써 외국을 삼킨 것이다.

그런데 ‘명사’는 조선전을 따로 만들어놓고도 조선전에서 ‘조선을 번부 또는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했다. 체재만 외국으로 분류했지만 내용은 중국의 일부로 본 것이다. 청나라가 이런 내용의 ‘명사’를 출간할 때 조선은 힘이 없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명사’가 조선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표현한 것은 조선의 지나친 사대(事大)와 임진왜란 때 명군의 지원을 받은 것 때문인 듯하다.

조선이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황실은 천하의 중심을 자처했기에 외국에서 무역을 하자며 선물을 보낸 것도 ‘조공’으로 표기했다. 그러니 조공을 했다고 해서 외국이 중국을 사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도 이를 잘 아는지라 조공만으로는 속국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봉은 다르다. 책봉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고려는 요(遼)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이는 외교상 의례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명에 대한 조선의 책봉은 그 내용이 심각했다.

조선은 유구(琉球·지금의 오키나와)와 더불어 새 임금이 들어서면 무조건 중국 황실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명이 책봉을 해줄 때까지 왕이란 칭호를 못 쓰고 ‘권지국사(權知國事)’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유구는 한술 더 떴다. 유구의 어느 왕은 명이 혼란에 빠져 책봉해줄 사신을 못 보내자 평생 세자 신분으로 있다가 죽었다. 그러나 일본 왕은 책봉을 받은 적이 없기에 중국은 일본을 속국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청에 두 번 항복한 조선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는 참으로 무능하고 한심한 임금이었다. 왜군에 쫓겨 의주까지 도주한 그는 중신들의 거센 만류에도 명에 ‘나의 망명을 받아달라’ ‘명나라 군대를 보내달라’고 거듭 간청했다. 명은 선조의 망명은 불허한 대신 명나라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계의 피가 흐르는 이여송이 병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에 들어온 명군은 행패가 심했지만 조선은 이들을 ‘천군(天軍)’이라 칭하며 환대했다.

명군 참전 후 전쟁은 정전(停戰)을 하는 등 답보를 거듭하다 명-왜 간의 협상으로 왜군이 철수하면서 끝났다. 외적을 자국의 힘으로 물리치지 못하고 외국 군대가 와서 협상으로 물러나게 했으니, 조선은 명에 더욱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명에 이어 중국을 통치하게 된 청은 조선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정묘호란). 이 전쟁에서 이긴 청(당시는 후금)은 자신이 형, 조선이 동생이라는 형제지국(兄弟之國) 관계를 맺고 물러났다. 그런데도 조선은 명에 심각하게 의존한 기억 때문에 청을 무시했다.

그러자 1636년 다시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인조를 붙잡았다(병자호란). 인조는 삼전도에서 황제에게 올리는 만주식 예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는데,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림)를 하며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된다”고 약속했다. ‘군신지국(君臣之國)’을 조건으로 항복한 것이다. ‘명사’는 이러한 청이 만든 것이니 조선을 외국전에 넣긴 했어도 속국과 다를 바 없었다고 쓴 듯하다. 이러한 청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청사고’이니 청사고에는 더 심각한 내용이 들어갔다.

조선을 두 번이나 항복시킨 청은 말기인 1885년, 26세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파견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조정을 마음대로 주물러, 식민지를 통치하는 총독(總督)과 비슷한 뜻의 ‘감국(監國)대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때문에 ‘청사고’는 과거의 정사에는 없던 ‘속국전(屬國傳)’을 만들고, 그 안에 조선을 집어 넣었다.

청나라는 1911년 쑨원(孫文)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쓰러졌다. 새로 들어선 중화민국은 극심한 혼란 탓에 쑨원이 아니라 당대의 실력자인 위안스카이를 총통에 추대했다. 위안스카이는 1914년 역대수사 전통에 따라 청사관(淸史館)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청사를 만들게 했다. 청사관 학자들은 대부분 청나라 과거에 급제한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청 실록과 공문서 등을 근거로 청사를 편찬했기에 청나라적 시각이 많이 반영됐다.

위안스카이는 총통에 만족하지 않고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꿔 황제가 되려 했다. 그러다 역풍을 맞아 실각하고 쉬스창(徐世昌) 같은 군벌(軍閥)의 대표가 총통에 올랐다. 그때의 중화민국은 일본 등 열강의 공격을 받고 있는 데다 내분까지 심한 내우외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공인 못 받은 ‘청사고’

중국은 발해와 황해를 ‘북양(北洋)’이라 통칭한다.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북양에 면한 지역만 지배하고, 양자강 남쪽은 국민당 정권이 장악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 중화민국 정부를 ‘북양정부’로 부른다. 북양정부 시절인 1928년 청사가 완성됐다.

그런데 청사는 공인을 받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청나라적 시각이었다. 신해혁명으로 청을 무너뜨린 세력을 역적으로 표기한 것이 문제가 됐다. 명나라가 몽골족의 원나라를 배척했던 것처럼 중화민국을 세운 한족 엘리트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매우 싫어했다. 쑨원은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일으키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 구호를 내걸고 신해혁명을 성공시켰을 정도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반(反)봉건, 반(反)제국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한족 엘리트는 청대(代)를 한족이 만주족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한 시기로 이해했다. 청나라는 한족을 철저히 차별하는 ‘기인(旗人)통치’로 중국을 지배했다. 쑨원을 필두로 한 한족 엘리트는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한족을 해방시키자며 혁명을 일으켰으니, 청나라는 이들을 역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청사는 이런 시각으로 작성되었다.

힘없는 북양정부라 해도 ‘멸만흥한’ 정신만큼은 공유하고 있었으니 이 청사를 공인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고는 나온 마당이라 ‘원고 고(稿)’ 자를 붙여 ‘청사고’로 이름 짓고 서고에 집어 넣었다. 이러한 ‘청사고’가 소량 인쇄돼 세상에 나온 적이 있는데, 여기에 조선에 대한 내용이 속국전에 포함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 ‘청사고’는 과거 정사에는 없었던 속국전을 만들어 조선, 유구, 베트남을 집어 넣었다.

‘청사고’를 만들 때 조선은 일본,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유구는 그 이전에 일본에 병합됐다. ‘청사고’ 편찬자들은 청의 강력한 영향권에 있었던 조선, 유구, 베트남을 빼앗긴 게 억울한 나머지, 속국전을 만들어 세 나라 기록을 정리한 듯하다. 우리에겐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청사고’가 공인받지 못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북양정부 총통이 ‘청사는 청나라 처지에서 쓴 역사이니 신해혁명 세력을 역적으로 볼 수도 있다’며 승인했다면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는 항변도 못하고 앉아서 당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은 G2 반열에 올랐으니 세계는 ‘청사고’ 기록을 정설로 수용했을 것이다.

동북아재단의 추적

2003년 동북공정에 분노한 한국은 2004년 고구려역사재단을 만들고, 2006년 독도 영유권 문제를 포함시켜 다룰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학준)으로 확대 재편했다. 이 재단은 중국이 ‘신청사’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 예의 주시해 왔다. 재단에 따르면 중국은 ‘신청사’에 속국전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명사’에서처럼 ‘신청사’에 ‘조선은 청의 속국이었다’ 또는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쓰면 그만인지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은 속국전이 공인받지 못한 ‘청사고’에만 있는 체재(體裁)라, ‘신청사’엔 싣지 않기로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여러 요소가 변화했기에 ‘신청사’를 과거의 정사와는 다른 체재로 만들기로 했다. 과거의 정사는 기전체를 채택했지만 ‘신청사’는 창신체(創新體)를 취하기로 한 것. 이유는 중국의 문화와 철학이 혁명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겪은 가장 큰 변화는 한자를 정자 대신 간체자(簡體字)로 쓰게 된 것이다. 문장도 고대와 다른 백화문(白話文)으로 쓰게 됐다. 간체자로 백화문을 쓰는 현대 중국인들은 순수 한문으로 된 고대 자료를 술술 읽고 쓰지 못한다. ‘청사고’를 낼 때까지는 과거와 같은 한문 문장으로 역사서를 만들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한문을 구사할 수 있는 학자가 드물다.

그래서 ‘신청사’는 간체자-백화문으로 편찬하기로 결정했다. 기전체는 한문 문장에 적합하지, 간체자-백화문에는 맞지 않다. 현대의 중국 학자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장과 절로 나눠 글을 쓰는 장절체(章節體)에 익숙하다. 따라서 ‘신청사’는 기전체적 요소를 가미한 장절체로 쓰기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창신체다.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도 쑨원이 세운 중화민국을 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봉건과 반제국주의 정신을 받아들여 황제의 일대기와 황제의 통치를 주내용으로 한 본기는 봉건적이라 보고 ‘신청사’에 담지 않기로 했다. 대신 ‘통기(通紀)’를 만들기로 했다. 통기는 황제의 일대기 중심이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한다. 도판도 많이 삽입하기로 했다. 과거의 정사는 글로만 채워졌으나, ‘신청사’에는 많은 사진과 그림을 덧붙여 시각적으로 청대사를 보여주기로 했다. 또한 외국전을 없애고 이웃 나라(邦)와 교류(交)한 것을 적는 ‘방교지(邦交志)’를 만들기로 했다. 조선에 대한 기록은 방교지에 넣기로 했다.

청나라 사신 일행으로 북경을 다녀온 많은 조선 선비가 ‘연행록(燕行錄)’으로 통칭되는 기행문을 남겼다[과거에는 북경을 연경(燕京)이라고 했기에 그 기행문을 연행록이라 했다]. 가장 유명한 연행록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중국은 조선 방교지의 객관성을 갖추기 위해 한국에서 간행된 연행록을 몽땅 가져가 분석했다. 이러한 연행록에는 조선실록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공 사신으로 갔다’ ‘책봉을 받았다’는 등의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 때문에 중국이 조선 방교지에 어떤 내용을 담을까 염려하는 학자가 많다.

중국은 과거엔 번부였고 지금은 중국의 일부로 있는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등은 중국 내지에 대한 기록인 ‘지리지(地理志)’에 담기로 했다. 여기에도 변화를 줬다. 과거엔 이들을 만이(蠻夷) 융적(戎狄) 견융(犬戎) 같은 경멸적 용어로 표기했으나, ‘신청사’에선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중국은 철저하게 자료에 근거해 방교지와 지리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으나 조선은 청에 두 번 항복했고 조공과 책봉을 했으니 조선 방교지에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할 수도 있다. ‘신청사’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한국과 베트남 등은 자존심이 상해 격분하고, 티베트와 위구르족은 “과거에는 청의 일부가 아니었는데 일부로 적었다”며 격렬한 독립투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해양굴기 잇는 역사굴기

최근 중국은 도련(島鍊)정책의 일환으로 남중국해의 남사군도와 서사군도, 동중국해의 조어도 영유권을 주장해, 인접국들과 큰 마찰을 빚었다. ‘해양굴기(海洋·#54366;起)’가 중국의 1차 팽창이라면, ‘신청사’ 출간은 동북아를 뒤흔드는 중국의 2차 확장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중국이 정치적 배경을 갖고 ‘신청사’를 편찬한다는 사실이다. ‘신청사’는 중국의 국가기관이 아닌 런민대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만들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베이징대도 아니고 런민대가 주도하게 된 것은, 다이이(戴逸)라는 이 대학의 노(老)역사학자 때문이다. 다이이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가까운 학자로 수십 년간 ‘신청사’ 편찬을 주장해 관철해냈다.

1940년대에 베이징대 사학과를 다닌 다이이는 공산주의에 매료돼 학업을 중단하고 연안(延安)으로 도주해 있던 중국 공산당군을 찾아갔다. 역사를 공부하는 젊은 엘리트가 연안에 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1949년 공산당군이 중국을 장악하자 그는 일약 역사학계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중국은 ‘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이전 역사를 만든다’는 ‘성세수사(盛世修史)’를 강조한다. 다이이는 성세수사를 들먹이며 여러 실력자에게 ‘신청사’ 편찬을 거론했다. 그러나 당시의 실력자들은 청나라를 ‘한족을 지배한 식민지배 세력이자 공산혁명으로 극복했어야 할 봉건세력’으로 인식했기에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족을 꼼짝 못하게 한 기인 통치

청을 세운 만주족은 한족을 가혹하게 통제했다. 만주족은 ‘팔기(八旗)’라고 하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다. 팔기는 8개의 기병부대를 가리키는데, 각각의 기는 7500여 명으로 편성됐으니 팔기는 6만여 명의 기마부대가 된다. 만주족으로 구성된 팔기를 ‘팔기만주(八旗滿洲)’라 했다.

만주족은 왕비가 몽골족에서 나오는 조건으로 몽골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중국을 통치해, ‘만몽(滿蒙)동맹’으로 불렸다. 청나라는 강력한 동맹인 몽골족으로 ‘팔기몽고(八旗蒙古)’를 만들었다. 중국을 정복한 다음에는 한족으로 ‘팔기한군(八旗漢軍)’도 구성했다.

청은 한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팔기만주를 주요 성(城)에 보내 주둔하게 했다. 반란을 막기(防) 위해 주요 성에 주둔(駐)한 팔기가 ‘주방팔기(駐防八旗)’다. 주방팔기는 각 성 안에 ‘만성(滿城)’이라는 작은 성을 짓고 그 안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며 한인들을 지배했다. 청나라 수도인 북경성에선 황궁인 자금성 주변에서 생활했다.

청나라는 원과 달리 한족 엘리트를 관료로 고용했다. 그러면서도 팔기를 동원해 철저히 감시했다. 팔기에 속한 사람을 기인(旗人)이라 했기에, 팔기를 통한 한족 지배를 ‘기인통치’라 한다. 청나라는 그들의 풍습인 변발을 강요해 한족들도 변발을 하게 됐다. 기인통치와 변발 강요는 만주족의 핵심 지배술이었다.

기인들은 자금성 주변인 북쪽의 부유한 곳에 살았고, 한족 관료들은 남쪽의 빈한한 곳에서 거주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베이징에선 자금성 주변이 부촌이고, 그 남쪽은 서민 지역이다. 지금 중국 실력자들이 거주하는 중난하이(中南海)도 기인들이 살던 곳이다. 기인통치 덕분에 100만 명도 안 되는 만주족은 100배가 넘는 1억 인구의 한족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었다. 청나라 중기 이후에는 중국 인구가 3억으로 증가했으니 300배가 넘는 한족을 통제한 것이다.

청나라 말기 청의 지배력과 경제력이 약해졌을 때를 빼면 한족들은 거의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으켜도 전부 제압당했다. 청은 한족들이 어쩌지 못했던 티베트족과 위구르족, 몽골족까지 제압해 번국으로 삼았다. 그러던 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처음으로 패하면서 몰락의 길에 빠져들었다. 그때 쑨원을 필두로 한 세력이 ‘멸만흥한’과 변발 거부로 혁명을 일으켜 쇠퇴한 청을 무너뜨렸다.

중국 건국기에는 만주족에 대한 반감 때문에 다이이 교수의 주장은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시야가 달라지는 게 역사다. 청은 중국의 어떤 왕조보다 넓은 영토를 만들었다. 몽골족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지만, 일한국(一汗國) 등 여러 나라로 쪼개졌다. 중국을 통치한 원의 강역은 청보다 좁았다. 중국은 대만을 빼고는 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았다(조선, 베트남, 유구는 제외).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한족은 만주족에 단단히 신세를 진 셈이 된다. 중국의 엘리트들이 이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康乾盛世’에 주목하다

둥비우(董必武)는 청년 시절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에 가담한 뒤 일본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돌아와 변호사가 됐다. 그러다 공산주의에 심취해 연안의 공산당군에 가담했다. 공산군이 대륙을 석권한 직후 그는 정무원 부총리 등을 맡았다. 둥비우는 공산군이 중국을 장악한 것은 대단한 일이고 성세(盛世)를 만든 것으로 보고, ‘청사고’를 대체할 ‘신청사’를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도 같은 주장을 폈다.

다이이 교수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런민대에 청사편찬위원회를 만들려 했는데,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불발됐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잔재가 정리된 1978년부터 다시 학문을 할 수 있게 됐다. 다이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사학자들이 성세수사를 강조하며 ‘신청사’ 편찬을 다시 주장한 것.

이러한 다이이를 밀어준 이가 당대의 실력자인 리란칭 상무위원이다. 그는 ‘신청사’ 편찬을 중국 공산당이 명실상부하게 중국을 장악했다는 증표로 이해했다. 그때부터 중국 지도자들은 만주족이 한족과 이민족을 지배한 것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만주족이 100~300배에 달하는 한족을 지배한 것은, 1000만도 안 되는 당원을 가진 공산당이 10억이 넘는 중국을 지배해야 하는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청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번영한 나라를 만들었다.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15년간이 극성기였다. 그 시기를 강희의 ‘강’과 건륭의 ‘건’을 따서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중국은 당나라 태종 때 중국이 융성했다며, 당 태종의 연호를 따서 이를 ‘정관지치(貞觀之治)’라고 한다. 정관지치는 한족 중심으로 통치하며 변수가 적었을 때 이룬 것이지만, 강건성세는 많은 이민족과 넓은 영토를 관리하며 만든 것이라 훨씬 더 복잡한 통치술이 필요했다. 중국 지배층은 만주족이 한족 외에 55개 소수민족을 다스리면서 번영된 강건성세를 이룬 것에 주목했다.

1999~2003년 중국 CCTV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를 연속으로 제작해 방영했다. 이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족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게 아니라, 위대한 중국을 만든 시기’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그 무렵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전 중국인을 하나로 뭉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만든 조어가 ‘중화민족’이다. 중화민족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모두를 가리킨다. 그리고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며,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합치는 역사 공작을 시작했다.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가 조선족이고, 중국 영토 안에 조선족의 선조가 만든 고구려가 있었으니,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동북공정을 본격화했다. 만주족도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니 만주족 선조가 만든 금(金)과 청도 중국 역사에 포함된다는 것 또한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였다. 중국은 번국인 위구르족 역사를 통합하기 위해 서북(西北)공정, 티베트족 역사를 흡수하기 위해 서남(西南)공정을 펼쳤다.

한족 대신 중화민족 내세워

항주의 악왕묘에 있는 무릎꿇은 진회 부부상. 벽에 ‘가래침을 뱉지 말라’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청사공정은 중화민족을 내세워 만주족이 만든 청나라를 토대로 강력한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역사 공작의 종합편이다. 여기에 성세수사(盛世修史)를 강조해 덧붙임으로써 ‘중국은 태평성대이니 중국 인민과 소수민족은 중국 공산당의 일당 통치를 받아들이라’는 강력한 암시를 보내게 되었다. 다이이를 중심으로 한 중국 역사학자와 리란청을 중심으로 한 중국 지도부는 이러한 생각으로 청사공정과 동북공정 등을 추진한 것이다.

중국이 ‘신청사’와 동북공정 등을 통해 중화민족을 앞세우게 된 것은 중국을 ‘통일된 다민족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다. 통일된 다민족국가 건설은 중국의 국시(國是)다. 중국 헌법 전문(前文)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전국의 여러 민족과 인민이 공동으로 창건한 통일된 다민족국가이다. (…) 민족단결을 유지하는 투쟁 중에는 대민족(大民族)주의, 특히 대한족(大漢族)주의에 반대해야 하고, 지방민족주의에도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사공정과 동북공정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추진되는 국가사업이다. 이는 중국 역사학계가 중국 정치에 철저히 종속돼 있다는 뜻이다. 중국은 청사공정을 위해 6억 위안(약 1000억 원)을 쏟아붓고 있다. 필자는 입찰을 통해 선발하기에 선발된 필자들은 중국 정부의 지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작은 반드시 모순을 초래한다. 좋은 예가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다. 악비는 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을 때 최선을 다해 싸운 송의 명장이다. 그러자 진회(秦檜)로 대표되는 굴종파가 구실을 만들어 그를 체포해 처형하고 조건부 항복을 했다. 중국인들은 ‘송사’ 열전에 악비를 충신으로 묘사했다. 항주에 진회 부부가 무릎을 꿇고 악비에게 비는 조형물을 갖춘 악비사당(악왕묘)을 만들고, 진회 부부상(像)을 향해 욕을 하고 가래침을 뱉는 전통을 만들었다. 그런데 중화민족과 통일된 다민족국가 건설을 추구하면서 중국은, 금나라와 타협한 진회를 영웅, 악비를 분열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정사에 있는 판단을 바꿔버린 것이다.

역사는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악비 사례에서처럼 해석은 필요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현대 국가들은 국가가 공인하는 정사를 만들지 않는다. 공인된 정사 편찬은 독재국가, 봉건국가의 산물로 이해한다.

하지만 중국은 ‘마이웨이’를 고집한다. 따라서 ‘신청사’가 나오는 날 중국은 안팎에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신청사’를 만든 목적인 ‘통일된 다민족 국가 건설’이 오히려 위협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우려 때문에 중국 내에서도 ‘신청사’를 내는 것이 무슨 실익이 있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중 역사전쟁은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


사마천의 ‘사기(史記)’로 시작된 25史

중국의 정사는 대개 국가나 왕실이 편찬했다. 그러나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와 ‘신오대사’ ‘남사’ ‘북사’ 등은 개인 저술이다. ‘사기’는 전한(前漢) 무제 때의 사마천(司馬遷)이 사고(史庫)와 집 안에 모아놓은 여러 사료를 토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사는 국가에서 내는 관찬사(官撰史)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정사는 여러 왕조를 기록한 통사(通史)와 한 왕조나 나라의 일을 기록한 단대사(斷代史)로 나뉘기도 한다. ‘사기’는 황제로 대표되는 3황5제 시대를 시작으로 하-상-주-춘추전국-진-한(전한)에 이르는 약 3000년의 역사를 서술했기에 통사(通史)로 분류된다. 진수의 ‘삼국지’와 5대10국의 역사를 기록한 ‘신·구 오대사(五代史)’ 등도 통사다. 반면 한서 당서 송사 명사 신청사 등은 단대사가 된다.

사찬(私撰)임에도 최초의 정사가 된 ‘사기’를 만든 사마천은 전한의 무제로부터 남성을 거세당하는 치욕적인 궁형을 당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통제해 객관적으로 ‘사기’를 편찬했다. 사마천은 원한을 버리고 이미 나와 있는 자료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추려 정리하는 식으로 ‘사기’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중국은 정사는, 만드는(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기술(述)해야 한다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강조했다. 신청사는 술이부작의 전통을 이어갈 것인가.

 
 

"조선 후기 수렴청정한 대비 권한, 왕권 능가하지 못해" | 연합뉴스 (yna.co.kr)

송고시간2018-04-15 11:35

 
임혜련 교수, 대비 역할 규정한 '수렴청정절목' 분석

고종이 수렴청정한 조대비를 위해 지었다는 경복궁 자경전. 고종 25년(1888) 재건됐다.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에는 나이가 어린 국왕이 즉위했을 때 왕실의 웃어른인 대비가 국정을 운영하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재위 1469∼1494)이 왕위에 올랐을 때 세조 비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한 것을 시작으로 명종, 선조를 거쳐 19세기 들어서는 순조(재위 1800∼1834)부터 새로운 왕이 나올 때마다 수렴청정이 이뤄졌다.

15일 학계에 따르면 조선시대 왕실 여성사를 연구해온 임혜련 숙명여대 연구교수는 학술지 '역사와 담론' 최신호에 게재한 논문 '조선 후기 대리정치의 권한 범주와 왕권'에서 19세기 완성된 수렴청정 규정인 '수렴청정절목'(垂簾聽政節目)을 분석했다.

임 교수는 수렴청정절목 제정에 대해 "선조대 이래 200년이 지나 수렴청정이 다시 행해지면서 그사이 대리청정(代理聽政·세자, 세제, 세손이 왕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는 행위)의 시행과 절목 제정의 영향을 받아 (수렴청정이) 제도적으로 완비된 것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순조가 즉위할 무렵 예조가 마련한 수렴청정절목은 중국 송나라 선인태후와 조선 정희왕후의 예를 따라 만들어졌다. 정사 처리와 방법, 대비의 위상 규정 등에 관한 내용을 담은 12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절목에 따르면 수렴청정을 할 때는 왕과 대비가 국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에서 정사를 봤다. 왕과 대비가 현안에 대한 보고를 함께 들은 뒤에는 왕이 직접 결재하기도 하고, 대비가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 왕이 대비에게 뜻을 묻고 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궁궐의 경비와 호위에 관한 사안은 왕이 보고를 받고 대비의 명을 받아 지시를 내렸으나, 신하들이 올리는 상소나 장계는 왕이 직접 결재하기도 했다.

임 교수는 "수렴청정절목에 국왕과 대비의 업무는 구분돼 있지 않다"며 "왕의 권한이 대비에게 위임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권한을 공유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신하들이 대부분 왕에게 먼저 보고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대비는 왕이 요청한 사안에 대해 뜻을 밝혔고, 이후 국왕이 결재했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이어 "왕과 대비가 내리는 하교는 명칭이 동일했고, 모두 자신을 '여'(予)라고 칭했다. 물건을 바치는 공상을 할 때도 왕과 대비가 같았다"며 두 사람의 위상이 같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비는 구조적으로 왕이 될 수 없었다. 여성인 대비는 왕을 대체하거나 왕권을 침해할 우려가 없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왕권을 공유할 수 있었다고 임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대비는 선왕의 왕비로서 왕조를 계승하고 국가를 성장시킨 내조의 공이 있다는 역할론에 기인해 수렴청정을 했다"며 "하지만 수렴청정 시기에도 대비의 권한은 왕권을 능가하지 못했고, 오히려 어린 국왕의 위상을 성장시키는 기능을 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임 교수는 수렴청정절목이라는 규정과 실제 적용 사례는 다를 수 있다면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psh59@yna.co.kr

 
 

 

김덕헌 교수, 함경도 지방관 명단 '관북관안' 분석
관북관안 [한국문화 논문 캡처]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소수 가문이 정국을 주도한 세도정치가 등장하면서 약화했다고 알려진 당파적 요소가 고종이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도한 1870년대에도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김덕헌 부산가톨릭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내는 학술지 '한국문화' 제85호에 실은 논문 '고종 친정 초기 지방관 임용과 당파정치'에서 함경도 지역 관리 명단인 '관북관안'(關北官案)을 분석해 고종 때에도 당파정치가 지속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관북관안은 1873년 12월부터 1878년 12월 사이에 함경도 24개 군현에 임용된 지방관과 무반 관료 41명을 수록했다.

김 교수는 "관북관안은 중앙 기관에서 작성한 기록물로 생각된다"며 "지방관 임용과 관련된 내용을 첨지(籤紙)에 기록해 덧붙이는 방식으로 작성했다"고 설명했다.

관북관안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첨지에 적은 정보다. 지방관 이름은 물론 당색(黨色), 생년, 제수연월, 부계 8조와 외조, 처부(妻父)를 기록했다.

김 교수는 "관북관안처럼 지방관 가계 배경까지 상세하게 남긴 관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며 "정치적 역학관계와 인사를 둘러싼 논의의 결과물인 임용 관련 문건에 당색을 명시했다는 것은 당색이 임용 지표로 고려됐음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관북관안에 수록된 인물의 당색을 보면 노론 19명, 소론 9명, 남인 1명, 북인 4명, 미기재 8명이다. 또 문과 출신은 9명, 무과 출신은 27명으로 유독 무과에 합격한 사람이 많다.

흥미로운 사실은 고종이 등극한 이후인 1864년 12월 27일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는 지방관 당색 비율과 관북관안에 나타난 인물의 당색 비율이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대원군 집권기에 남인과 북인 등용이 각별히 주목됐다면, 고종 친정 선포 이후 지방관 임용자 중에는 노론이 거의 절반을 점하고 남인은 급격히 감소했다"며 "이는 대원군이 등용한 남인 출신 재상과 고위직이 고종 친정 이후 교체됐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1874년에서 1876년 사이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남인과 북인은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다"며 이러한 현상도 고종이 이조와 병조를 장악하는 한편 대원군이 중용한 세력을 배제하려 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관북관안에서 당색과 가계 배경을 적지 않은 8명에 대해서는 "당색이 없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사회적으로 유력한 벌열(閥閱) 가문이었기 때문에 생략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면서 "관북관안 당색 기록은 19세기 후반 4색 당파에 속한 이들이 수령으로서 권력을 지속했음을 말해주는 전거"라는 결론을 제시했다.

psh59@yna.co.kr

 
 
  • 문화일보
  • 입력 2008-04-16 14:56

 

“당쟁이 나라를 망쳤다는 건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정치인의 소명의식만 뒷받침된다면 당파 간 대립은 얼마든지 정치적 담론의 활성화와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정치사(政治史) 전문가 신복룡(66) 건국대 정치행정학부 석좌교수는 “조선 시대의 당쟁은 망국병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형식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사 새로 보기’의 저자이기도 신 교수는 “당쟁 자체는 언제 어느 때나 있는 정치적 다툼으로, 오히려 활발한 정치적 담론은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선 시대 붕당은 그 시대의 한국적 상황에서 있을 수 있었던 정당 체제”라며 “미발달된 초기 형태의 정당, 즉 한국적 정당의 효시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느니, 한국인들은 당파싸움만 하는 민족이라느니 하는 것은 모두 식민사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조선 정치사를 근거로 당쟁이 갖는 긍정적 측면에 주목했다. 그는 “당쟁이 가장 심했을 때가 숙종 때인데, 숙종은 성군으로 추앙받는다”며 “숙종 재위 시절에 민생이 가장 행복했고, 이 시기는 조선에서 제일 정치가 부패하지 않았던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쟁이 있을 때는 국가 지탱력이 강했고, 오히려 당쟁이 없어진 순조·헌종·철종 시절에 국가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면서 당쟁이 국가의 안정에 긍정적으로 기여했음을 강조했다.

신 교수는 정쟁이 심했을 때 역설적으로 부패가 적고 민생이 안정됐던 이유에 대해 “정적들의 감시가 심하기 때문에 정치가들이 부패할 수 없다”며 “당쟁이 심했다는 것은 또 정치적 담론이 그만큼 활발했다는 뜻이고, 그로 인해 정치도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 교수는 그러나 현재 정치권의 정당 간 대립과 계파 갈등에 대해서는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그는 “조선 시대에는 종묘사직, 왕실 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전제된 상태에서의 정치 담론 간 경쟁이었지만, 요즘 담론은 금권과 이해관계에만 치우쳐 있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요즘의 정치는 조선 시대보다 더 타락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신 교수는 “당쟁이 긍정적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치인의 도덕성과 소명의식이 제고돼야 한다”며 “결국 정치를 하는 사람의 문제다. 가치를 중심에 놓는 정파 간 경쟁이 되면 당파 간 대립이 정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성훈기자 tarant@munhwa.com

 

 

정조가 10년 더 살았다면 (hani.co.kr)

정조가 10년 더 살았다면

등록 2007-11-08 00:00 수정 2020-05-02 04:25

 

출판·드라마에서 ‘비운의 임금’ 신드롬… 시대 상황에서 비슷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일까

바야흐로 정조의 시대다. 200여 년 전 갑작스레 죽음을 맞은 조선의 왕은 서점에서, TV 화면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사람들은 그의 시련에 얼굴을 찡그리고, 그의 적들에 분노하며, 그에게 닥쳤던 갑작스런 죽음에 가슴 아파한다. 사람들은 왜 정조에 환호하는가. 정조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서울 창덕궁 후원의 모습을 둘러보고, 그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의 촬영 현장을 찾아가봤다. 편집자

▣ 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창덕궁 낙선재를 오른쪽으로 스치고 지나 북쪽으로 길을 잡는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얕은 언덕을 따라 오르니, 저만치 너른 연못과 그 주변을 감싸는 고졸한 전각들이 눈 안 깊숙이 밀려든다. 연못의 이름은 ‘부용정’(芙蓉亭)이고, 그 북쪽에 자리한 잘생긴 2층짜리 전각의 이름은 ‘주합루’(宙合樓)다. 엄밀히 말해 주합루는 그 전각 2층을 불렀던 말이고, 건물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을 때 1층의 이름은 ‘규장각’(奎章閣)이었다.

아동도서까지 “정조 암살을 막아라”

 

규장각이 ‘규장각’이었던 것은 그것이 정조의 규장각이었기 때문이다. 1999년 를 써낸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정조는 왕의 글이나 왕실의 족보, 물품을 보관하던 작은 서고였던 규장각을 국내외 도서를 다수 소장한 왕립 도서관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젊은 인재들이 그곳에서 글을 읽고 정리하며 앞으로 왕과 함께 만들어나갈 미래를 준비했다. 그 인재들이 자라남에 따라 규장각은 도서관에서 연구소로, 연구소에서 왕의 비서실과 정책개발실과 감사실과 출판소로 기능이 점차 확장됐다. 규장각은 정조의 규장각이었고, 그랬기 때문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사멸했고, 세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왕의 화려한 귀환일까? 2007년 가을, 대한민국 대중이 가장 사랑하게 된 문화 아이콘은 207년 전 숨진 조선 22대 국왕 ‘정조’(1752~1800)다. 시중에 나온 정조 관련 문화 콘텐츠는 너무 많아 일일이 이름을 꼽기가 어려울 정도다. 문화방송에서는 9월17일부터 정조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 을 방영 중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정조의 말년을 그린 한국방송의 8부작 미니시리즈 은 지난 7월 호평을 받으며 방송을 끝냈다. 케이블방송 CGV에서는 ‘정조 암살 미스터리’ 을 11월17일부터 방송할 예정이다. 책으로는 서울 주요 서점들의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에 이름을 올린 작가 이상각의 와 소설가 김탁환의 정조 시대 3부작 완결판 이 눈에 띈다. 아동도서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은 ‘노빈손 시리즈’는 한국사 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정조다. 책 이름 는 정조에 대한 대중의 심리를 소박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최근 불어닥친 ‘정조 신드롬’의 화룡점정이라 부를 만하다.

비운의 군주 정조를 가장 먼저 호출해낸 것은 소설가 이인화였다. 그는 1993년 쓴 에서 노론과의 세력 다툼에 밀려 죽음을 맞게 되는 ‘정조 상(像)’을 창조해냈다. 그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대중은 정조에 대해 지금과 같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 사회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시간 동안 한국 사회가 겪은 변화를 평가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는 아마도 ‘아쉬움’일 것이다. 1993년 이후 한국 사회는 외환위기를 겪었고, 정권 교체를 이뤘으며, 정권 교체를 이룬 그 진보·개혁 세력이 10년 동안이나 한국 사회를 이끌어왔다. 그렇지만 빈부격차는 여전하고, 비정규직은 차별받고 있으며, 젊은이들은 ‘20 대 80의 사회’에서 ‘88만원 세대’로 살 것을 강요받고 있다.

 

정조, 노무현이 꾸는 꿈?

정조와 그 아버지 사도세자에 관해 여러 글을 남긴 역사학자 이덕일은 “정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그와 유사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정조는 비운의 임금이다. 사람들의 심리 속에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우리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 있다.” 정조가 좀더 왕위에 머물렀다면 그가 키워낸 정약용, 이승훈, 이가환 등 깬 사고를 가진 남인들이 정승이나 판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들이 정조의 개혁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역사에 대한 지나친 단순화이긴 해도,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보다는 좀더 피부에 와닿는 얘기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노무현의 개혁을 정조의 개혁과 연관짓기도 하고, 정조에 지나친 감정이입을 하기도 한다. 에서 정조를 연기한 탤런트 안내상씨는 “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많이 좋아하게 됐으며, 내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그 아픈 부분을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조가 꿈꾼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부용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연못과 그 주변에는 정조가 가슴 깊이 묻어뒀던 통치철학이 담겨 있다. 정조는 1776년 3월10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즉위한 지 석 달 만에 정조가 내린 명은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과 부속 건물들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왕위에 오른 지 석 달 만에 내린 명인 만큼 세손 시절부터 준비하고 고심해왔던 일임이 틀림없다.

부용정은 반듯한 장대석으로 네모지게 조성했고, 가운데는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표현한 것이다. 부용정을 돌아 주합루로 올라가는 계단을 가로막는 문의 이름은 ‘어수문’(魚水門)이다. 여기서 물은 왕, 물고기는 신하를 뜻한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없듯, 신하는 왕의 뜻 안에서 살라는 정조의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왕이 중심이 돼 위민정치를 펼치는 조선의 계몽군주가 되려 했다. 어수문에서 바라본 주합루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듯 높고 가팔라 함부로 올려다볼 수도 없다. 신하들은 왕이 지나는 어수문을 사용할 수 없어 그 양옆으로 난 쪽문을 통해 허리를 굽실거리며 드나들어야 했다.

정조의 이상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노론의 세계와 양립할 수 없었다. 정조의 치세는 암살 기도로 시작된다. 보위에 오른 지 1년이 조금 지난 1777년 7월28일, 정조는 평소처럼 침소가 마련된 경희궁 존현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내시는 호위 군사들을 점검하러 나가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궁에 자객이 침입했다. 은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寶章門) 동북쪽에서 회랑 위를 따라 은은하게 울려왔고, 어좌(御座)의 중류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그를 암살하려고 한 사람들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홍계희 집안이었다. 자객들이 정조를 습격했던 경희궁 존현각은 이미 헐리고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건물 앞에는 정조가 상서롭다고 칭찬한 대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지나치게 독선적이지는 않았을까

후원 쪽으로 조금 더 나아간다. 부용정을 지나 5분쯤 걸으면 한반도를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한 반도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반도정의 제일 북쪽 끝에는 ‘존덕정’(尊德停)이라 이름 붙은 잘생긴 정자가 있다. 그 안에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부른 정조의 글이 남아 있다. 만천명월주인옹은 ‘수많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이란 뜻이다. 뭇 개울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지만 달은 오직 하나이고, 그 달은 바로 정조 자신이고 신하와 백성들은 개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조의 태도는 당시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독선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지배했던 노론의 눈에 그런 정조의 모습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기자 이한우는 2007년 10월 펴낸 에서 “정조는 나름의 비전과 강력한 의지를 일찍부터 갖고 있었지먼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고, 자신을 뒷받침할 현실세력 또한 강력하지 못했다”고 썼다. 이한우의 정조 비판은 그대로 의 노무현 대통령 비판의 패러디인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18세기에 주목한다. 정조의 18세기는 조선뿐만 아니라 전 세계사적인 격동기였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영국에서는 애덤 스미스가 을 썼다. 그 무렵 조선을 떠받치던 ‘주자학’이라는 유일 신앙 체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대 엘리트들인 남인과 북학파들은 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에 매료됐고, 그 새로운 사상의 힘을 빌려 세상을 개조하려 했다. 정조의 신하들은 총명하고 반듯했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한 소장은 “한 시대가 지나고 다른 세대로 진입하는 18세기 문화 격동기와 지금의 모습이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정조의 개혁은 어떻게 됐는가. 그의 사후에 그가 벌였던 개혁 조처들은 할머니 정순왕후에 의해 철저히 무력화됐다. 규장각은 이름만 남았고, 화성은 방치됐으며, 장용영은 해체됐고, 천주교와 서학에 대한 엄청난 핍박이 몰아쳤다. 소설가 김훈은 둘째 권에서 “(남은 사람들은) 이단과 대역을 다스리는 형상에 으깨져 죽었거나 망나니의 칼에 베어졌고, 그 사체는 거리에 버려졌다”고 썼다. 정약용 같은 일부 신하들은 살아남아 먼 귀양길을 전전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름만 남은 규장각, 해체된 장용영

정조가 태어난 곳은 창경궁의 경춘전, 숨진 곳은 창경궁의 영춘헌이다. 두 전각 모두 순조 때 불타 지금은 본모습이 아닌 재건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정조가 죽던 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으며 양주와 장단 등의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가 하얗게 말라 죽었다고 한다. 정조가 독살당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가 10년 더 살았다면 우리나라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도 알 수 없다.

 

정조 ‘문체반정’에 대한 학계의 두 평가

“책과 사상을 탄압” “노론 견제 노림수”

기자강성만
  • 수정 2019-10-19 11:23
  • 등록 2008-02-14 14:16

문체 오염 내세워 중국서적 수입 금지
성리학에 어긋나는 이단적 사유 색출

 

조선 22대 왕인 정조(1752~1800)에게는 ‘개혁군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규장각을 설치해 문예부흥을 이끌고 서얼을 등용해 신분 차별의 완고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또 시전 상인의 독점적 상업특권인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해 기득권 세력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 모두가 ‘개혁’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 문장을 잡문체라고 규정하고 전통적인 고문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문체 오염을 이유로 중국으로부터 고증학과 패관소설 등 명말청초의 문집을 포함해 모든 서적의 수입을 금했다. 주자학적 세계관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유와 지식을 담은 명말청초 서적들이 금서로 묶여 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연구자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는 지난해 펴낸 책 〈안쪽과 바깥쪽〉(소명출판) 등에서 “정조는 책과 사상의 탄압자”로 기억될 뿐이라고 했다. 그는 문체반정의 본질을 “성리학에 어긋나는 이단적 사유를 색출한다는 것”이라며 정조는 그가 다스리는 세상이 가장 보수적인 정통주자학에 의해 완벽하게 작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도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문체반정은 문예부흥 정책의 내용과 성과를 부정하는 정조의 자기모순이요 자기부정이라고 규정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사학(邪學) 종식’이라는 정조의 명분을 앞세워 실학자 등 개혁 세력 탄압에 나선다. 때문에 정조 사후 전개된 “세도정치와 피의 민란”에 정조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힘들다는 게 김 실장의 견해다.

이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최근 펴낸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2〉(고즈윈, 각권 1만2800원)에서 다른 견해를 폈다. 그에 따르면 문체반정은 천주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면 탄압을 막고 당시 지배층인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조의 깊은 노림수가 담긴 방책이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노론과 대립하고 있던 남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 소장은 문체반정의 시발이 된 시점이 양반 출신의 두 천주교도가 부모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도는 ‘진산 사건’ 때와 같은 점에 주목했다. 천주교 금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을 우려한 정조가 대신 패관소품과 명말청초 문집을 비판하면서 정국의 물줄기를 돌렸다는 것이다. 천주교를 뜻하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청초 문집부터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천주교에 대한 전면 탄압을 피해 갔다는 것이다.

 
노론 잡문 적발로 천주교 탄압 막아중국 학문 기대는 조선 사대부 비판

이 소장은 문체반정으로 반성문을 썼던 관련자들이 모두 노론 가문 출신이었음을 강조했다. 자파 가문 출신이 문체반정의 대상으로 계속 적발되는 상황에서 노론이 더 이상 천주교 공격에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는 게 이 소장의 해석이다.

그는 또 문체반정을 ‘성리학적 세계관의 확고한 성채 쌓기’라는 해석에도 이견을 보였다. 중국 서적 수입 금지는 중국 학문에 기대는 조선 사대부들의 태도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또한 우리나라의 책을 읽는 것이 마땅하다”(정조, 〈일득록〉 5)는 것이다. 특히 정조의 고증학 비판은 그 이단적 사유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족이 장악한 청나라 지식인들이 현실을 비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현실과 무관한 고증학에 몰두하고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이 소장은 지적했다. “성리학자를 자처하는 조선의 사대부가 어찌 북벌에 뜻을 두지 않고 청나라의 고증학에 경도되느냐”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 소장은 정조가 박지원의 문체를 문제 삼은 대목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정조의 내심은 박지원을 크게 등용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는 박지원에게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편 지어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라고 요구한 뒤 “(그렇게 한다면)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했다. 문임은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을 뜻하는 요직이다. 박지원과 같이 과거를 거치지 않은 음관이 이 직위를 맡은 적이 거의 없으니 대담한 회유책인 셈이다. 이 소장은 또 박지원이 노론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면 아예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정조의 죽음과 동시에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다면서 그가 5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뀔 수 있었다고 마무리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 기자명차태헌 기자 
  • 입력 2018.06.03 23:53
  • 수정 2018.06.22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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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조선 성리학 지배질서, 우리고유선맥 숨통 조이다.

 

 

이조선, 중화질서에 자진예속함에 따라 하늘제사 금지하다

중국 기자 숭배 속에서 병자호란 이후 단군 부활하다

팔관회, 불교 절간의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 등은 선맥仙脈의 잔영이다

무교巫敎에서도 선맥이어지다

사도세자 아들 정조, 생존위해 성리학 중화질서 지지하다

한편으로 단군과 천부경 찾다

 

▲李조선22대 왕 정조(正祖 서기1752-1800). 기울어가는 이조선 22대 왕에 올라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득권 신권에 제압당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학문과 기예면에서 역대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구나 잊혀져가는 선도에도 관심을 많이 둔 것으로 최근 밝혀지고 있다. 그는 단군을 민족사의 시조로 보았다(편집인 말)

 

한민족은 단군 이래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던 민족이다. 그 전통은 고려시대까지도 팔관회 연등회등으로 변형이 되기는 하였으나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것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조선초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도입하면서 부터다.

성리학 통치 이념에 따라 조선은 천자국이 아닌 명에 속한 제후국이 된다. 여기서 명 제후국인 조선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원칙이 도입이 된다.

이와 같은 것이 조선 초 상황이었다면 양란을 겪은 조선 후기 상황은 어떠했을까? 정경희는 학자로서 첫 출발점이 규장각 연구원이었다.  숙종 영조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정조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정경희는 세가지 흐름에 주목하였다.

첫 번째,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으로 상징되는 성리학 이념 강화이다.

“이처럼 양란 이후 성리학 의리론 강화는 역사인식 면에서 성리학에 기반한 전통론적 역사인식 강화로 드러났고, 그 결과 기자 마한 정통론이 등장하였다. 기자 마한 정통론은 북벌론이나 대명 의리론과도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곧 기자 마한 정통론에 의하면 중화의 전통은 조선에 이르러 기자 마한을 거쳐 조선에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오랑캐인 청淸이 중화의 적통인 명明을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소중화인 조선까지 유린하였으니 명이 사라진 시점에서 유일하게 남은 중화인 조선이 청을 쳐야 한다는 북벌론 또는 북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조선이 이념적으로 명을 이은 적통이 되어 중화를 계승해야 한다는 대명 의리론이 성립하게 되었다(정경희,  정조의 한국선도 인식과 단군의 위상 제고).”

두번째는 양란 이후 성리학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그 대척점에 있던 고유 선도 사상이 성리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주목받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양란 이후 조선전기에 비하여 한국  선도仙道 전통을 강조하는 다수 선도서, 또 성리학서이면서도 선도 전통을 포용한 사서들이 다수 등장하기 시작한 점은 이러한 현상으로 이해된다. 양란 이후 등장한 선도사서로는 선조대 조여적의 <청학집靑鶴集>, 숙종대 북애자의 <규원사화揆園史話> 및 홍만종의 <해동이적海東異蹟>, 영조대 이의백의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등이 있다. 청학집에서는 환인을 동방 선맥의 조종으로 설정하고 그 전통이 환웅, 단군, 문박씨, 영랑, 마한, 보덕신녀, 표공, 참시선인, 물계자 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규원사화>에서는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선도 사상을 강조하고 곳곳에서 유교 사상을 비판하였다. 특히 한국의 선도를 신교로 표현하면서 중국 도교와의 차별성을 극히 강조하였다(정경희, 정조의 한국선도 인식과 단군의 위상 제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난을 겪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 국가 통치 이념의 재정립을 통한 국가 재건은 절대 절명의 지상과제였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대해서 당시 지식층은 두가지 극단적인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된다.

하나는 노론을 중심으로 기존 성리학 이념을 더 강화시키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는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층들에 의해서 성리학 이외의 다른 곳 대안을 찾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이는 우리 고유의 선도 사상이다.조선 후기 상황을 정경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요컨대 양란을 통한 민족적 각성은 성리학 의리론을 강화하는 방식 또는 고유 선도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과 같이 전혀 상반된 방식으로 드러났다. 이중 성리학 의리론을 강화하는 방식은 역사인식 면에서 유교문화 상징인 기자 전통을 강조하는 전통론적 역사 인식 곧 기자 마한 정통론으로 드러났으며, 고유 선도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은 단군을 강조하는 역사인식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당시 지배층 지식층과 별도로 우리 고유 선도 사상을 기억하고 있던 민중들 흐름이다. 정경희는 그 민중들 흐름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고려에서는 중국도교 용어인 성황城隍을 수용하였으나 중국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곧 한국 마을 수호신이 중국 마을의 수호신과 같을 수는 없었다. 한국 마을에 있는 수호신 곧 산천이나 신사에 모셔진 신이란 한국 고대 이래 선도 전통에서 나온 신 곧 선도성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이 문제를 잘 지적하고 있다. 이규경이 살던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성황당은 선왕당仙王堂으로 불리었으며 마한 소도의 유속으로 이해되었다.

고조선 이후 선도의 본령은 점차 잊혀져 갔지만 선도 제천의례가 국가 공식적인 국중대회로서 남아있던 고려시대 까지는 선도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 이르러 선도전통이 단절되면서, 선도는 민속 무속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도 제천의례의 중심인 삼신 (삼진 三眞) 에 의한 이해도 변질되었다. 삼신은 모든 사람 속에 내재한 원리, 곧 삼진이 아니라 인격신으로 기복의 대상으로 변화하였다. 기복의 대상으로 삼신을 신앙하는 것을 삼신신앙이라 한다. 조선에서는 집집마다 삼신을 모셨는데 삼신단지, 삼신바가지, 삼신자루의 형상으로 모셨다.”

기자 주 : 삼진은 대종교의 경전인 삼일신고에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삼진三眞(본성(性)과 목숨(命)과 정기(精)을 부여받았으나, 오직 사람만이 지상에 살면서 미혹되어 삼망三妄(마음(心)과 기운(氣)과 몸(身)이 뿌리를 내리고, 이 삼망三妄이 삼진三眞과 서로 작용하여 삼도三途(느낌(感)과 호흡(息)과 촉감(觸))의 변화 작용을 짓게 된다.“

▲북한 강동군 대박산에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했던 단군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릉을 발굴하여 부장된 물건을 수습했다. 단군릉도 대규모로 새로 조성하여 부장품들을 안에 안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단군은 우리 선사仙史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편집인 말).

 

이 이외에도 조선시대 사찰안에서 불교와 습합된 형태이기는 하나 삼성각,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 제석당 등의 다양한 형태로 우리 고유의 선도 신앙이 민간에 의해서 보존되었다는 것이 정경희의 주장이다.

조선 사회에서 오로지 사람만이 삼진三眞을 받는다는 한 민족 고유의 선도 사상과 중원 천자만이 하늘을 받들 수 있다는 유교 성리학은 애초부터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중들은 비록 흔적이나마 그 맥을 이어갔다.

이것이 정경희가 인식하고 있는 조선 후기 사회이다. 이 안에서 정경희가 바라 본 정조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버지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정조는 어린 소년이었다. 조선국왕 자리를 이을 세손 신분에서 생명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까지 몰린 것이다. 이런 어린 정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할아버지 영조를 계승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극에서 묘사되듯이 어린 시절 정조는 살아남기 위해서 오로지 학문에만 매달려야만 했을 것이다.

영조는 당대 최고 성리학 지식인들로 구성된 조선의 관료들을 상대로 학문적 스승으로서 위치를 유지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다졌다. 할아버지 영조가 그러했듯이 정조 역시 그 길을 가야했다. 다른 선택은 없다. 여기에서 정조는 두가지 모습을 보인다.

하나는 할아버지 영조 계승자로서의 모습이다. 명에 대한 의리론에 기초한 소중화 이념 수호자로서 조선 국왕 모습이다. 그러나 동시에 당대 최고 학자로서 정조는 중국과는 다른 조선 역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모습 역시 나타난다.   

정경희 연구에 따르면 정조는 명에 대한 의리론을 계승하는 범위 안에서 단군 혹은 하늘에 대해서 국가적인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다. 정조는 기자 정통론과 성리학 이념에 대한 수호자로서 조선 군주라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단군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정조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 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경희가 주목하고 있는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먼저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사당인 삼성사와 관련하여 정조가 한 민족 역사에서 단군의 위치에 대해서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  

[ 본 사당(삼성당) 의 체모가 숭인전(崇仁殿)과 일반이기는 하지만, 기자(箕子)는 동방으로 와서 임금이 되었고 단군은 요(堯)와 나란히 서서 임금이 되었으니, 맨 먼저 나와서 비로소 나라를 세운 업적을 상고해 보면 높여 받드는 절차에 있어 기자보다 더욱 존경하는 것이 합당하다.  정조 13년 6월 6일 ]

현대의 한국인들은 홍산 문명의 우하량 여신 사당의 원형 천제단이나, 여타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서 한민족이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조 역시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고고학 자료가 없던 당시에 문헌 자료만을 통해서 올바로 역사를 인식한 것이다. 정조의 학문적인 깊이가 성리학 이외의 여타 학문에도 폭넓고 광범위 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교사(郊祀)하던 원구단(圜丘壇)이다. 예(禮)에 사서인(士庶人)은 오사(五祀)에 제사할 수 없고, 대부(大夫)는 사직(社稷)에 제사할 수 없으며, 제후(諸侯)는 천지(天地)에 제사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오직 기(杞)·송(宋)·노(魯)나라만이 제후로서 제사한 것은 혹 대국(大國)의 후손이거나 혹은 원성(元聖)의 공로로 인해서였다. 우리 동방은 나라를 세운 것이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역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돌을 쌓아 제천(祭天)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에도 모두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대국에서 분모(分茅) 를 받지 않았고 크게 참람하기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혐의를 구별하고 미세함을 밝히는 뜻이 엄하여 원구단의 예가 혹 소국(小國)에서 감히 지낼 제사가 아니라 하여 세조(世祖) 이후에는 원구단의 호칭을 남단이라 고쳐 일컫게 되었으니, 대개 군국(郡國)·주현(州縣)에서는 각기 풍사(風師)·우사(雨師)에게 제사지내는 제도를 쓴 것이다. 정조 16년 8월 12일 ]

▲중국 하남시 상구시에 있는 기자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이 지역을 답사하여 어렵게 기자묘를 찾아낸 바 있다. 국내 중화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인 기자를 조상으로 삼아 숭배했다. 이를 위해서 역사조작도 서슴치 않았다. 북한 평양에 기자묘까지 만들어 그곳이 중국 사료에 나오는 기자가 중국 주나라 책봉받고 온 곳이라고 선전했다.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에 앞서 중화사대주의 사관이 우리역사를 먼저 파괴한 사례다. 이 덕에 민족사 정통뿌리, 단군은 찬밥신세가 된다(편집인 말).

 

정조는 고대 한민족 국가들이 중국으로부터 분모(分茅)된, 즉 제후로서 책봉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조선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하고 있다. 기자가 아닌 단군을 한 민족의 국조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 민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민족이라는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원구단圜丘壇의 원圜이 하늘을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 초에 남단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던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정조는 풍우뇌신제라고 하는 성리학 안에서 허용된 범위 안에서 국가 제천행사의 격을 높임으로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군 이래 전통을 되살리려 한 것이다. 과연 정조는 우리 고유 사상에 대해서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정경희는 흥미있는 주장을 제기했다. 정경희에 따르면 정조는 천부경을 인지하고 있었고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삼성사에 대한 치제문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조선 정조 5 년의 신축(1781) 삼성사 치제문에 이르기를 '빛나는 단군께서 我東'에 처음 나시니 덕이 신명에 합하였다. 천지개벽을 누가 능히 열수 있었으리 오직 二聖이 있어 상스러움을 발하시어 크게 明命을 받으셨다. '천부보전(天符寶篆)이 비록 징험할 바 없지만 신성들이 서로 이었고 동사에 칭하는 바이니 세상에 전해진 지 그 몇 해인가(여말 학계와 천부경,정경희 선도문화 6집)]

19세기 성리학자 기정진奇正鎭이 천부경을 연구하였고 기정진이 천부경을 언급할 당시 전비문篆碑文 천부경이라고 칭했다는 것이 후세에 전한다. 이러한 점을 볼 때에 삼성사 치제문에 나오는 천부보전(天符寶篆)을 천부경으로 본 정경희 주장은 타당하다.

삼성사 치제문은 비록 정조가 적은 글은 아니나,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 지내는 삼성사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던 정조가 주도해서 만든 치제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상에서 정경희 교수 시각으로 정조를 다시 한번 재조명해 보았다.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조선 후기 상황에 대해서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당시 통치자였던 정조는 올바르고 뚜렷한 역사 의식이 있었다. 

민중들 역시 본능적이긴 하지만 우리 고유 사상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오래 전에 멸망한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거나, 혹은 한반도에 오지도 않은 기자를 국가의 시조로 존숭한다거나 하는 터무니 없고 실익도 없는 이념이 국시가 되는 이런 상황은 어떤 것일까? 하고 말이다.

이 의문에 답하기 전에 정조가 처했던 시대상황과 오늘날 우리들 모습을 한번 대비해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초반부터 자신의 역사관을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했던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이것이 개인 문재인이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이라면 이는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올바른 역사관이다.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혁명가, 투쟁가이면서 동시에 역사가들이기도 했다.

그들이 인식했던 한민족 상고사는 중국과는 독립된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역사이고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정조가 가지고 있던 역사 인식과 부합한다(정경희 교수 선사연구 취재2부 끝).

 

 

어린 정조의 삐뚤한 손글씨, '개야 짖지 마라' 적힌 차사발 보셨나요? (chosun.com)

[조선일보 100년 기획 - 말모이 100년,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

한글박물관 '김씨 부인 한글 상언', 중앙박물관 '한글 금속활자' 등
상설전시실에 숨어있는 우리가 몰랐던 한글 유물들

입력 2020.03.19. 03:00
 
어린 정조가 큰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위)와 한글 묵서가 적힌 차사발(가운데).

 

'상풍(서릿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 알고자 합니다.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 그리웠는데 어제 편지 보니 든든하고 반갑습니다.'

어린아이 글씨가 삐뚤빼뚤한데 내용은 사뭇 의젓하다. 이 한글 편지를 쓴 주인공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1752~1800). 편지 끝에 '원손(元孫)'이라 썼으니 세손 책봉 이전인 1759년 이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가 7세 이전에 큰 외숙모인 여흥 민씨에게 보낸 안부 편지다.

'정조어필 한글 편지첩'은 국립한글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있다. 원손 시절부터 재위 22년까지 정조의 한글 편지 16점을 묶었다. 정조가 한글로 쓴 편지라는 희소성이 있는 데다 연령대에 따른 정조의 한글 필치 변화상을 볼 수 있어 가치가 높다. 김민지 학예연구사는 "정조가 쓴 편지는 지금까지 원문이 공개된 것만 수백 점에 달하나 대부분 한문 편지"라며 "외가 친척인 큰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는 주로 안부를 묻는 것으로, 외가 식구들을 살뜰히 챙기는 정조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다"고 했다.

박물관 상설전시실에는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귀한 한글 유물이 숨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엔 18세기 사대부 여성이 한글로 쓴 정치적 탄원서도 있다. 서포 김만중의 딸이자 신임옥사(辛壬獄事) 때 죽임을 당한 이이명의 처 김씨 부인(1655~1736)이 손자와 시동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영조에게 올린 '김씨부인 한글 상언(上言)'이다.

가로 160㎝, 세로 81.5㎝. 정자체로 1400자 남짓 정성 들여 썼다. '이 몸이 만 번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하고 부월(斧鉞)에 엎드리기를 청하니, 바라오니 천지부모(天地父母, 즉 영조)께서는 특별히 원혹한 정사를 살피시옵소서.' 박물관은 "정치적 격변기에 일어났던 당쟁의 참화 속에서 한 사대부 여성의 절박한 심정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며 "당시에 한글의 사용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보여주며 18세기 당시의 한글을 격조 높은 언어로 구사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고 했다.

조선시대 한글 금속활자.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도 흥미로운 한글 유물이 많다. 2층 기증문화재실에는 한글 묵서가 적힌 일본 도자기가 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이 17세기 초 야마구치현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차사발이다.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다 도둑인가. 자목땅 호고려님이 지슘 다니는구나. 그 개도 호고려 개로다. 듣고 잠잠하노라.' 호고려(胡高麗)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을 현지 일본인이 부르던 호칭으로 '오랑캐 고려 사람'을 뜻하는 말.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조선 도공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심경을 도자기 표면에 써내려간 것이다.

왕세자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한글 활자도 감동을 준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한글 금속활자 750여 자와 한글 목활자 1만3000여 자가 소장돼 있다. 박물관은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자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만든 활자도 대부분 한자 활자였다. 하지만 왕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을 교육하거나 백성에게 유교 이념을 가르치기 위해 언해본이 필요했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한글 활자를 제작했다"고 했다. 백성에게 배포하는 언해본에는 주로 목활자를 사용했다.

 

  • 2008.10.09 15:19
 
↑정조가 쓴 한글편지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안부를 주고받는 시대에 글쓴이의 정이 듬뿍 담긴 편지는 보는 이에게 훈훈한 감동을 준다. 특히 오래된 편지일수록 감동의 깊이는 더욱 깊다.

조선시대에 씌어진 한글편지에 네티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9일 한글날을 맞아 네티즌들은 주요 포털사이트에 정조, 효종, 명성황후가 쓴 한글편지를 올리며 한글의 멋과 위대함에 감탄했다.

조선 제22대왕인 정조가 원손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편지에는 어린 정조의 귀여움이 묻어 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풍에 긔후 평안하오신 문안 아옵고져 바라오며 뵈완디 오래오니 섭~ 그립사와 하옵다니 어제 봉셔 보압고 든~ 반갑사와 하오며 한아바님 겨오셔도 평안하오시다 하온니 깃브와 하압나이다. 元孫"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오며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시오니 기쁘옵나이다. 원손)

글씨가 삐뚤빼뚤하고 문법도 맞지 않지만 네티즌들은 한글로 문안을 드리는 어린 정조의 깊은 마음에 감동했다. 한 네티즌은 정조가 악필이라는 댓글에 "아이 때 쓴 것이라 그렇지 또박또박 쓴 글이 귀엽지 않느냐"며 두둔하고 나섰다.

↑효종이 쓴 한글편지

조선 제17대왕인 효종이 보낸 편지도 이색적이다.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 심양에 볼보로 가 있을 때 장모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이다.

"새해에 기운이나 평안하신지 궁금합니다. 사신 행차가 (심양으로) 들어올 때 (장모님께서) 쓰신 편지 보고 (장모님을) 친히 뵙는 듯, 아무렇다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청음(김상헌의 호)은 저리 늙으신 분이 (심양에) 들어와 어렵게 지내시니 그런 (딱한) 일이 없사옵니다. 행차 바쁘고 하여 잠깐 적사옵니다. 신사(인조 19년, 1641년) 정월 초팔일 호"

당시 23세였던 효종은 함께 잡혀 와 있던 청음 김상헌을 걱정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가 끌려온 김상헌은 당시 72세였다.

↑명성황후가 쓴 한글편지 <사진출처=민영환의 손자 민병진씨가 2005년 10월 27일 조선일보에 제공>

명성황후가 1874년 오빠 민승호에 보낸 2통의 한글편지는 예쁜 색지와 깔끔한 글씨체로 눈길을 끌었다. 정갈한 궁서체로 씌어진 편지 글은 색지에 그려진 대나무, 꽃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24세의 나이였던 명성황후는 정적이었던 대원군이 1873년 실각한 이후 어수선한 정세로 편치 않은 심경을 드러냈다. "(오빠의) 편지에서 밤사이 탈이 없다 하니 다행이다. 주상과 동궁(훗날 순종)은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니 좋지만 나는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롭고 답답하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네티즌들은 "명성황후 글씨가 편지지와 어울리고 너무 예쁘다", "컴퓨터 글씨체처럼 반듯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조의 여동생이자 사도세자의 딸인 청연군주가 입은 명주저고리. 국가민속문화재 53호이다.|세종대박물관 소장

 

‘정조의 여동생 청연군주를 아십니까.’ 정조(재위 1776~1800)는 비정한 아버지(영조)의 명에 따라 뒤주에 갇혀 비명횡사한 사도세자(1735~1762)와 동갑내기 부인인 혜경궁 홍씨(1735~1815)의 아들이다. 그런 정조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살, 네 살 터울의 여동생이 둘 있었으니 청연군주(1754~1821)와 청선군주(1756~1802)이다. 할아버지인 영조 임금도 42살이 되어 낳은 아들(사도세자)이 본 손자(정조)와 손녀(청연·청선군주)가 얼마나 귀여웠을까.

1906년 순종이 황태자 시절 동궁비(훗날 순정효황후가 입었던 원삼으로 추정되는 ‘동궁비 원삼’. |세종대박물관 제공

 

<영조실록>은 “영조(1694~1776·재위 1724~1776)가 72살 때인 1765년(영조 41년) 4월 가뭄 끝에 내린 단비를 맞아 경기 지역을 돌고 돌아오던 길에 청연군주의 집을 찾았다”고 썼다. 그해 윤 2월 청연군주는 광산 김씨 가문인 김상익(1721~1781)의 아들 김두성(?~1811·훗날 김기성으로 개명)과 혼인해서 하가한 바 있다. 임금인 할아버지가 시집간지 두 달 된 손녀의 집을 찾을 정도로 귀여움을 독차지한 했다는 뜻이다. ‘군주(郡主)’는 왕세자(사도세자)의 적실녀에게 내린 외명부 정2품의 봉작이었다. 만약 왕세자의 서녀(庶女)라면 현주(縣主)라 해서 정3품의 봉작을 내린다.

순종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傳) 왕비 당의’. 금사를 넣어 봉황을 시문한 직물을 사용했다.|세종대박물관 소장

 

1964년 경기 광주 세촌면 암동리의 청연군주와 김두성의 부부합장묘를 이장하던 중 150여점의 의복을 포함해서 모두 200여점에 이르는 부장품이 출토됐다. 이 부장품들은 훗날 국립중앙박물관과 단국대 석주선기념 박물관, 고려대박물관 등에 분산 소장됐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진 청연군주의 의복이 세종대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었다. 그것이 국가민속문화재 53호인 ‘토황색 명주저고리’이다. 안보연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센터 연구사는 “세종대박물관 소장품이 청연군주의 복식이라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세종대 박물관 소장품과 다른 기관의 청연군주 복식을 비교할 때 색상변화와 보존상태가 똑같다”고 밝혔다.

문화재보존과학센터는 3일 “청연군주의 ‘명주저고리’ 외에도 조선말기 동궁비가 입었던 동궁비 원삼(국가민속문화재 제48호)과 전(傳) 왕비 당의(唐衣·예복·국가민속문화재 제103호),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1885~1967년)의 원삼(圓衫·국가민속문화재 제52호) 등의 보존처리를 마쳤다”고 밝혔다. 문화재보존센터는 이러한 왕실복식 유물의 보존처리 전과정과 유물 소장 경위, 문화재관리 이력을 정리한 보고서(<직물보존 Ⅰ-Insight for Textile Conservation>)를 발간했다.

고종의 후궁인 광화당 귀인 이씨(1885~1967년)의 원삼(圓衫·국가민속문화재 제52호).|세종대박물관 소장

 

이중 ‘동궁비 원삼’은 1906년 순종이 황태자 시절, 두 번째 가례인 병오가례를 올렸을 당시 동궁비(훗날 순정효황후·1894~1966년)가 입었던 원삼으로 추정된다, ‘전(傳) 왕비 당의’ 역시 순종비의 것으로 두 벌의 당의를 함께 끼워 만들었다. 모두 금사(金絲·금실)를 넣어 봉황을 시문한 직물을 사용했다. 오조룡보(五爪龍補)가 가슴, 등, 양 어깨에 달려있어 유물로서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오조룡보’는 왕과 왕비의 옷에 덧붙인 원형의 장식품이다. 발톱이 다섯 개인 용을 수놓았다. 안보연 연구사는 “왕실 복식의 약한 부분을 보강하고, 구김과 직물 손상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맞춤형 충전재를 직접 제작하여 복원했다”고 덧붙였다.

국가민속문화재 제50호 옥색 명주 장옷. 이 장옷의 안감에는 머릿기름 등으로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는 한지가 부착되어 있다. 한지의 윗 부분에는 ‘통영 군선동 입자…’의 지명과 인명이 적혀있다. |세종대박물관 소장

 

또한 이번 보고서에는 복원과정 전체와 왕실 복식 연구의 핵심이 되는 금사(金絲, 금실)의 성분 분석 결과를 담았다. 이밖에 명부(命婦·봉작받은 부인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예복인 ‘원삼’의 금(金) 장식 문양의 형성 배경에 대한 전문가 논고와 함께, 부록으로 미국 브루클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삼과 당의, 활옷을 조사한 내용도 실었다. 이번 보고서는 특히 상세한 사진을 통해 국내외 전문가가 참고할 수 있도록 국문과 함께 영문 설명을 기술해 왕실 복식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유성운입력 2021. 4. 26. 00:05수정 2021. 4. 26. 06:33

"실학은 성리학 반성의 산물 아닌
그 안에서 꾸준히 진행된 학문"
강지은 교수

 

17세기 일본의 성리학자 야마자키 안사이는 제자들에게 “만약 중국이 공자를 대장으로, 맹자를 부장으로 삼아 일본을 공격한다면 공맹(孔盟)의 도를 배운 이들은 어떻게 해야겠는가?”라고 물었다. 제자들이 당황해하자 그는 “무기를 쥐고 그들과 일전을 벌여 공맹을 사로잡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 이것이 공맹의 도”라고 답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에게 멸망한 부모의 나라 명나라의 원수를 갚자는 북벌론(北伐論)이 한창 논의되고 있었다. 같은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두 나라의 인식은 이렇게 달랐다.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사진 푸른역사]

 

17세기는 조선에서 성리학적 질서와 세계관이 더욱 강화된 시기다. 장자 상속, 노비제, 남녀 차별 등이 이때 굳어졌다. 반면 성리학의 원조 중국에선 신분 질서를 탈피하고 실천을 강조한 양명학이 자리 잡았다. 임진왜란 후 조선을 통해 성리학을 수입한 일본도 이 당시 주자성리학을 비판하고 자국을 중국(中國)으로 여기는 시각마저 나타났다. 조선이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며 자부한 것과는 결이 다르다.

신간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사진)는 17세기 조선에서 성리학이 한층 강화·발전되는 양상을 다룬 교양학술서다. 조선이 ‘성리학 월드’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 강지은 국립대만대 국가발전대학원 부교수를 25일 e메일로 만났다.

 

Q : 17세기 성리학은 왜 강화했나.
A : “임진왜란 시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패전 소식을 접하며 "전쟁으로 인해 윤리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 "조정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발휘하도록 고무하는 것이 관건이다” 등의 발언을 많이 남겼는데 이런 생각이 전후 국정 운영과 각 사회에 자연스레 반영됐다고 본다. 반면 국방력 강화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기준으론 한심해 보이지만 당시 명나라 원군이나 의병 활동 등을 감안하면 그들이 틀렸다고만 일갈하기도 어렵다.”

Q : 같은 시기 일본에선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보고 양명학도 수용했다.
A : "조선 양반은 태어나면서부터 유학을 공부해야 했고, 이를 통해 관직을 얻고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었다. 주자가 남긴 책만 공부하면 되는 사회였다. 반면 일본은 과거제가 없었다. 심지어 무사의 도(道)와 다르다고 배척당했다. 유학에 관심 있는 무사는 밤에 몰래 경서를 읽었을 정도다. 유학의 필요성이 인정받지 못하니 유학과 사회적 이익이 만나는 유용성을 추구했고 ‘독창적’인 해석도 했다. 또 성리학과 비슷한 시기에 양명학 등 다른 유학 사상도 들어와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었다.”

Q : 18세기 실학은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움직임 아닐까.
A : "주자는 행위의 결과를 우선하여 관심을 갖는 공리주의를 비판했다. 옳음(義), 이치(理)를 중요시했다. 그런데 오늘날 말하는 조선 후기 실학의 특성 안에 공리주의가 포함되기도 하고, 좋은 것은 다 실학으로 귀결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학(實學)’은 조선에서 학자들 사이에 꾸준하게 거론된 용어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수기만 하고 치인을 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고민들이다. 실학은 18세기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게 아니라 성리학 안에서 꾸준히 진행된 학문이다.”

Q : 조선에선 독창적인 성리학 연구가 없었나.
A : "17세기 일부 ‘정설’과 다른 목소리를 자꾸 반주자학적인 움직임으로 해석하려고 하는데 일본의 영향이 있다고 본다. 일본 식민당국이 ‘독창성’을 강조하면서 조선 유학을 깎아내리니 이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은 정밀한 해석보다 독창성을 중요시했다. 그렇다고 조선 유학사에서 독창성이 키워드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 수정 2008-01-04 20:28 등록 2008-01-04 20:28

조선엔 ‘주자학’ 현대엔 ‘돈’이 교주님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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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의 고금변증설

 

고금변증설/

1653년 윤7월 21일이었다. 송시열과 유계, 윤선거는 충청도 강경의 황산서원에 모였다. 송시열이 연기에서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 유계를 방문하고 여러 사람을 초청해 뱃놀이를 했는데, 시도 짓고 술도 마시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사건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황산서원의 재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윤휴의 학문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이야기가 번졌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의 경전 해석에 반기를 든 이단이라 못을 박았다. 윤휴는 송시열만큼이나 주자학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또 정통했기 때문에 주자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윤휴의 학설은 곧 성리학의 발전인 셈이다. 그는 단지 경전의 해석에 있어 주자와는 다른 주장을 내세웠을 따름이다. 문제는 송시열의 경직된 주자 옹호였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윤휴가 이단이라면서 계속 그와 관계를 끊으라고 다그쳐 왔지만, 윤선거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날 밤 송시열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윤휴는 이단이다. 나의 말에 동의하고, 윤휴와 관계를 끊어라!” 윤선거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또 박절한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송시열의 말을 듣고 이내 수긍하지 않는다. 송시열의 말이 더 거세게 나갔다.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세상에 낸 것은, 실로 만세의 도통을 위한 것이다. 주자 이후 드러나지 않은 이치가 한 가지도 없고, 밝혀지지 아니한 글이 한 구절도 없다. 그런데 윤휴는 감히 자기 견해를 내세우며 제 하고 싶은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대는 성혼 선생의 외손이면서도 도리어 그의 편을 들어 주자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의 졸개가 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송시열에 의하면 모든 진리는 주자에 의해 밝혀졌기에 더는 진리에 대해 시비하거나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늘 궁금했다. 송시열이 살아 있다면, 그에게 질문할 수 있다면 묻고 싶다. 모든 진리가 주자에 의해 완전히 밝혀졌다는 그 말이 요지부동의 진실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이다.

사실 진리가 주자에 의해 완전히 밝혀졌다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자신, 곧 주자의 말을 진리라 설하는 자신의 말이 곧 진리라는 말이다. 어찌 좀 수상하다. 어쨌거나 송시열의 호된 다그침에 윤선거는 윤휴를 비난하는 말을 몇 마디 내뱉었다. 한데 내심 승복하지 않았기에 조금만 더 깊은 이야기를 하면,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항변했다. “의리란 천하의 공적인 것이다.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을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자 이후에는 딴 말을 할 수 없다면, 진순과 진역과 같은 학자들은 어찌하여 경전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의리란 천하의 공적인 것’이란 말은 진리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참여해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주제란 말이다. 이 말은 윤휴의 주장이기도 했다. 윤휴는 일찍이 “주자만 천하의 이치를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라고 말한 바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말이야 맞지 않은가.

‘조선의 절대진리’ 주자학은 모든 문화와 사유를 무너뜨리고 이념적 독재로 군림했으나 결국 조선의 멸망과 더불어 역사에서 퇴장당했다. 인간을 해방시키는 건 진리지만, 그것이 절대진리가 되는 순간 인간의 족쇄로 전락한다. 지금의 절대진리는 ‘돈’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의 주머니로 평가될 뿐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오직 물신교를 철저히 섬기겠다는 공약만 넘쳐났다.

윤선거의 항변에 송시열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만 근거 없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송시열은 황산서원의 모임 뒤에도 윤선거에게 편지를 보내 윤휴와 단절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 이면에는 아마 윤휴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윤휴는 너무 뛰어난 인물이다” “그대가 윤휴를 너무 겁내고 있는 것이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던가.

송시열이란 이름에 접할 때마다 나는 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를 떠올린다. 다른 수도사가 이단의 서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그 늙은 수도사 말이다.

황산서원에서 모임이 있었던 그해(1653)는 조선 건국(1392)으로부터 거의 2세기 반 뒤였다. 조선은 그로부터 2세기 반이 지나 망한다. 말하자면 그해는 조선조의 꼭 중간이다. 나는 그해 그 모임이 조선 역사를 전후로 가르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송시열의 발언 이후 주자학은 조선에서 절대 진리가 되었다. 조선 전기의 다양한 문화와 사유가 무너지고 성리학의 이념적 독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와 국가가 쇠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진리다. 하지만 진리가 독점적인 절대진리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인간에게 족쇄를 채우고 인간을 압살한다. 호르헤가 지키고자 했던 기독교가 진리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했던 것처럼, 성리학 역시 같은 구실을 하다가 역사에서 퇴장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기독교의 신이 진리가 아닌 지금, 성리학의 진리가 더는 진리가 아닌 현재, 진리란 이제 없는가. 혹여 그 진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상대주의가 편만한 세상이니, 진리는 개인에 따라 다르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리석은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결코 아니다. 인간 행위의 준칙이 되는,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숭배하는 유일한 진리는 지금도 존재한다. 바로 ‘돈’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여 ‘화폐’이고 ‘자본’이다. ‘돈’ ‘화폐’ ‘자본’은 이 종교의 삼일일체이고, ‘유전천국(有錢天國)’ ‘무전지옥(無錢地獄)’은 그 교리의 핵심이다. 인간은 이제 더는 다른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갖고 있는 화폐량과, 그 화폐에 의한 소비능력으로 평가될 뿐, 윤리적 실천, 진리를 향한 기원 따위는 서푼어치의 값도 없다. 우리는 물신교라는 신흥종교의 충실한 교인일 뿐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오직 물신교를 철저히 섬기겠다는 공약만을 보았다. 정말 우울하다.

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동학농민혁명]

입력 2007. 6. 15. 17:35수정 2007. 6. 15. 17:35

"국사를 한 세력가에 맡기는 건 큰 폐해… 몇사람의 명사가 함께 정치를 맡아야"

정치의식·혁명성 적극적으로 해석 눈길

녹두 전봉준 평전 / 김삼웅 지음 / 시대의 창 발행ㆍ568쪽ㆍ1만6,500원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는 힘이 강할수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영웅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 역시 지배세력에 의해 오랫동안 금기시된 민중의 영웅이었다.

동학혁명에 참가한 농민군이 한 때 동비(동학의 비적)로 불렸고,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동학혁명이 동학난으로 통칭됐던 것처럼, 민중의 계급적 각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 때문에 전봉준의 이름에는 '불온'의 낙인이 찍혀있었다.

그 전봉준을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불러왔다. 저자는 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한 작업으로 이미 김구, 신채호, 한용운, 김창숙 등 민족주의자의 삶을 평가해 책으로 낸 적이 있다.

<녹두 전봉준 평전>은 그 동안 축적된 동학혁명과 전봉준에 관한 폭 넓은 연구를 섭렵해 한 평범한 농촌지식인이 근대 민중사의 절정인 동학농민혁명을 진두지휘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전봉준의 정치의식에 관한 적극적인 해석이 특히 눈길을 끈다. 노비제 폐지, 과부의 재가허용 등의 요구사항을 내건 폐정개혁 12개조에 나타난 동학혁명의 반봉건적 의식이나 '척왜(斥倭)'의 기치를 걸었던 혁명의 반제국주의적 대의는 잘 알려져 있지만 혁명의 최고 지도자가 어떤 정치체제를 열망했는지는 간과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왕권을 타도대상으로 삼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점을 들어 동학혁명의 한계를 거론하는 학자도 있지만 저자는 일본 신문의 기사와 공초(신문조서) 등을 꼼꼼히 살핀 뒤 전봉준이 분명히 근대적 정치체제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취조 과정에서 전봉준은 "국사를 들어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에게 협합(協合)해서 합의법에 의해서 정치를 맡기게 할 생각"이라고 밝히는데 저자는 이것을 근대적 대의민주주의, 나아가 공화주의체제에 대한 전봉준의 비전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한다.

 

연대기의 나열로 무미건조하기 일쑤인 여타 평전과 달리 전봉준의 일생을 소재로 한 빼어난 문학작품을 인용한 점도 돋보인다.

관군과 농민군의 대혈전이 벌어졌던 황토현 전투를 묘사한 대목에는 '한 시대의 /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시작하는 김남주의 <황토현의 노래>가 삽입돼 있다.

형형한 눈빛으로 최후를 맞은 전봉준의 죽음에는 '저 들판 끝 바람 앞에 선 사내하나 / 앙상한 뼛골로 우뚝 서 있는 / 서서 죽은 사내의 정수리에 들입다 꽂히는 바람아'로 시작하는 문병학의 시 <전봉준의 눈빛>이 수록돼 있다.

그래서 평전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웅서사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지 못한 것이나 전봉준이 동학의 접주였는지, 대원군과 내통했는지 등 학술적 쟁점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저자는 "전봉준은 개혁을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 결국 망국의 길을 간 지배층에 온몸으로 경고한 인물"

이라며 "전봉준 사상의 근대성, 혁명성을 부각하는데 주력했다"며 고 말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정부는 ‘동학농민혁명’, 교과서는 ‘동학농민운동’ 엇박자 (daum.net)

임송학입력 2023. 11. 21. 11:15수정 2023. 11. 21. 11:30
 
동학특별법 제정 19년 지났는데 교과서는 그대로
정읍시 교과서 수정 위해 표준국어대사전 개정 나서
동학농민혁명 정신 계승·발전 위해 용어 통일 시급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선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용어 통일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현행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돼 혼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황토현 전적에 조성된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상.정읍시 제공

 

21일 전북 정읍시에 따르면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지 19년이 지났으나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돼 엇박자 행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정부는 2004년부터 동학농민혁명을 공식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2019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을 제정했고 2022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도 준공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도 설치됐다.

 

반면 고교 한국사 교과서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하고 있다. 정읍시는 교과서 수정을 위해 교육부와 교과서 저자 등을 방문해 여러 차례 수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과서 수정을 위해서는 민감한 용어의 경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용어부터 수정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정읍시는 교과서 개정을 위한 전 단계로 내년부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용어 수정에 나서기로 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함께 국립국어원을 공식 방문하여 정부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법과 기념일 제정의 의미 등을 설명하고 대사전 수정에 반영해 줄 것을 공식 요청할 방침이다.

정읍시 동학문화재과 원동호 주무관은 “2세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동학농민운동으로 표기할 경우 한국 민족운동사의 정신적 뿌리이자 근대사의 첫 출발점인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과 가치를 폄훼할 우려가 있어 내년부터 표준국어대사전 수정을 적극 추진하고 이어 교과서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며 “동학농민혁명은 정부가 공식 사용하는 용어이고 관련 법에도 명기된 만큼 국립국어원도 받아들일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정읍시·전국 39개 동학농민혁명단체, 국회서 성명 발표
전북 정읍시와 전국 동학농민혁명 39개 단체 관계자들이 26일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정신 헌법전문 포함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정읍시 제공

 

전북 정읍시와 전국 39개 동학농민혁명 단체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을 한목소리로 요구했다.

지난 26일 국회에 모인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은 3·1운동의 뿌리이자 민주화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의 진정한 출발로 삼아야 한다”면서 “정부와 국회는 동학농민혁명 명칭·정신 헌법전문 명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29일 동학농민혁명 단체에 따르면 공동성명을 낭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북도의회도 지난 2월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이자 민주화 운동의 효시인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올바르게 계승·발전될 수 있도록 국회와 정부가 개헌을 통해 헌법전문에 포함해야 한다”면서 건의문을 채택했다.

앞서 2020년 대한민국 시·도지사협의회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명칭과 정신이 헌법전문에 포함돼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했지만 이후 논의가 없어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이학수 시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듯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해야 한다”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중심도시 정읍이 혁명 세계화와 선양사업에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은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뒤 혁명 참여자 3700여 명과 유족 1만 2000여 명이 명예를 회복했고,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는 동학농민혁명 법정 기념일로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을 선정했다.

김창효 선임기자 chkim@kyunghyang.com

 

유네스코, '동학농민운동' '4·19 혁명'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최종 승인
2017년 등재 이후 6년 만…한국 보유 세계기록유산 18건으로 늘어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세계가 배우고 기억해야 할 가치 인정"
4·19 혁명 기록물 자료. 연합뉴스 출처.

 

우리나라의 두 역사적 사건인 동학농민운동과 4·19 혁명에 관한 주요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유네스코는 현지시각으로 어제(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집행이사회에서 한국이 신청한 '4·19 혁명 기록물' 1,019점과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185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최종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우리 문화유산이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린 건 지난 2017년 이후 약 6년 만으로, 이번 유산 등재로 세계 3위(총 18건) 기록유산 보유국 지위를 더욱 굳혔습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 자료인 전봉준 공초(1895). 연합뉴스 출처.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 1894~1895년 일어난 당시 조선 정부와 동학농민군, 농민군 진압에 참여한 민간인, 일본 공사관 등이 생산한 자료들로 구성된 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들은 한국 사회 근대적 전환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1960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 주도 민주화 운동인 4.19 혁명에 대한 자료들은 혁명의 원인과 전개 과정, 혁명 직후 처리 과정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물들"이라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넘어 전 세계 인류가 배우고, 기억해야 하는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유승오 기자 victory5@mbn.co.kr]

 

 

2018-04-24 17:24 송고

'녹두장군' 123년만에 돌아왔다…전봉준 동상 제막 - 뉴스1 (news1.kr)

종로 네거리 앞 순국터에 국민모금으로 건립
박원순 "장군 뜻 이어 새로운 대한민국 만들자"

(서울=뉴스1) 장우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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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전옥서 터 앞에서 열린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전봉준 장군 동상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2018.4.24/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들꽃들아/그날이 오면 닭 울 때/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귀를 기울이라’

잔뜩 찌푸린 하늘에 강풍이 몰아치던 서울 종각 네거리. 불현듯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안도현 시인의 '녹두장군' 전봉준 추모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낭송되던 순간이었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앞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이 열린 24일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1855~1895)이 순국한 지 딱 123년이 되는 날이었다.    

1895년 전봉준 장군은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한 뒤 ‘전옥서’에 갇혔다. 사형판결을 받은 바로 다음날인 4월24일 새벽 2시 교수형을 당했다. 바로 지금의 영풍문고 빌딩 앞 터다.    
사형 선고 후에도 "나를 컴컴한 도둑의 소굴에서 죽이려 하느냐. 내 피를 종로 네거리에 뿌려라"며 기개를 잃지않던 그는 죽음에 앞서 ‘운명’이라는 이름의 유언시를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더냐/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랴’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녹두장군이 한 세기가 지나 서울의 중심에 우뚝 섰다. 그가 우금치의 분루를 머금고 눈을 감은 종로는 이후 3.1운동, 4.19혁명, 6.10민주항쟁을 거쳐 지난해 촛불집회 등 격변하는 한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무대로 자리잡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제막식 축사에서 “동학의 반봉건, 척왜척화 정신은 민주·민족·민권정신으로 현대사까지 이어졌다”며 “전봉준 장군의 큰 뜻을 받들어 서로 하늘같이 섬기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자”고 강조했다.

동상 건립은 동학혁명 100주년인 1994년부터 거론됐으나 구체화된 건 2016년 동상건립추진모임이 구성되면서부터다.

관건은 동상이 들어설 터였다.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점찍은 영풍문고 앞 전옥서 터는 서울시 땅이라 시의 협조가 필요했다. 박원순 시장이 그해 8월 전주에서 열린 동학혁명 기념식에서 기념사업회 측의 제안을 받고 적극적인 검토를 약속하면서 물꼬를 텄다.

동상 건립을 계기로 동학혁명 기념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유성엽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민주평화당)은 이날 제막식에서 "동학혁명일의 국가기념일 지정, 헌법 전문에 동학혁명 정신의 반영도 필요하다"며 "동학혁명 참여자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정부나 기업의 도움없이 국민 모금으로만 2억7000만원을 모아 제작됐다. 높고 위압적인 기존 동상들과도 다르다. 2.8m 정도의 높이에 앉아서 사람들과 눈을 맞추는 모습이다. 주변 도시경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민중의 벗'인 녹두장군의 풍모를 살렸다.   
이이화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은 "전봉준 장군 동상이 오래오래 외침에 저항한 민족운동의 상징물로 평등과 자주의 가르침을 익히는 청소년의 학습장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nevermind@

 

 

“한줄로 세워 놓고 일제히 총검으로…” (hani.co.kr)

‘동학 농민군 학살’ 일본군 병사 일기 첫 공개

‘불태워 죽여라’ ‘모조리 총살’ 등
일본군의 동학 학살 상세히 드러나
당시 한국인 항일투쟁 부인하는
일본 정부 주장 뒤엎을 획기적 자료
“3만명 학살…일본 최초의 대량학살”

  • 수정 2019-10-19 11:23
  • 등록 2013-07-23 08:29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도 그 성과 가운데 하나다.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그곳(나주)에 도착했다. 남문 바깥에 작은 산이 있었고 거기에 주검들이 쌓여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민병 또는 우리 부대 병사에게 붙잡힌 자는 심문한 뒤 중죄인은 죽였다. 매일 12명 이상, 103명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버린 주검이 680명에 달했다. 근방은 악취가 진동했고 땅은 하얗게 사람 기름으로 얼어붙었다….”

“(해남의) 잔존 동학 무리 일부인 7명을 붙잡아와 오늘(1월31일) 성 바깥 밭 가운데에 일렬로 세워 놓고 총검을 부착한 뒤 모리타 일등 군조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찔러 죽였다. 이를 구경한 한인(韓人)들과 통영(統營)병사들이 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경악했다.”

청일전쟁기인 1895년 1월 일본 진압군이 전남 나주, 해남, 장흥 일대의 동학 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했던 당시, 후비(後備)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2분대에 배속돼 있던 한 일본인 병사가 남긴 ‘진중일지’의 일부다. 1995년 7월 홋카이도대 문학부 연구실에서 효수당한 동학 농민군 해골이 발견됐고, 일본군의 공식보고서도 일부 남아 전하지만, 생생한 당시 상황이 담긴 개인의 일기가 공개된 것은 이례적이다.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표지

 

진중일지는 이노우에 가쓰오(68)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가 지난해 봄 일본 한 향토사학자의 소개로 도쿠시마현 출신 병사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한 것. 이노우에 교수는 나카쓰카 아키라(84)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박맹수(58) 원광대 교수와 함께 지난달 일본에서 출간한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또 하나의 청일전쟁>(고분켄 펴냄)에서 이 일지의 상세한 내용을 밝혀놓았다.

미나미 고시로 대대장(소좌)이 이끈 후비군 제19대대는 “남김없이 죽여라”는 당시 일본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동학 농민군 ‘삼로포위섬멸작전’에 나선 부대였다. 미나미 대대장이 이노우에 가오루 당시 주한 일본공사에게 올린 공식보고서에선 나주 처형자 수를 230명이라 밝혔지만, 이 일지는 그 수가 3배 가까이 되는 680명이라 적시하고 있다.

이노우에 교수는 “붙잡아서 총살” “심하게 고문” “모조리 총살” “민가를 모두 불태워라” “불태워 죽여라(燒殺)” “고문하고 총살한 뒤 주검은 불태워라” 같은 말들이 곳곳에 나오는 이번 일지가 “일본군 학살에 따른 지옥도를 증언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최근 동학농민전쟁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숨진 동학 농민들은 3만~5만명에 이른다. 3인 공동연구의 좌장인 나카쓰카 교수는 이 일지가 청일전쟁 당시 한국(조선)인들의 항일투쟁을 지금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나 연구자들의 주장을 뒤엎을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본 문부성은 일본 고교 일본사 교과서 집필자였던 이에나가 사부로(1913~2002) 교수가 1965년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유명한 ‘교과서 재판’에서 이에나가 교수가 자신의 책에 기술한 “청일전쟁 때의 조선인민의 반일저항” 부분을 삭제하도록 명했고, 1997년 일본 최고재판소도 문부성 손을 들어주었다. 이노우에 교수는 이 책에서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가 한국인들의 저항 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학 ‘토벌’ 과정에서 전사한 일본군을 청국(중국)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날조해 야스쿠니 신사 명부에 올린 사실도 밝혀냈다.

나카쓰카 교수 등은 동학농민전쟁 학살을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대량학살)”로 규정했다. 중일전쟁과 2차대전 때의 ‘난징학살’ 등 일본군이 20세기에 저지른 집단 인종학살의 시초가 19세기 말 동학 때부터 시작됐다는 얘기다. 역사가 하라다 게이이치는 최근 저서 <일청전쟁>에서 청일전쟁 당시 전사자를 “일본인 약 2만명, 중국(청)인 약 3만명, 조선인(동학농민전쟁 전사자) 3만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청일전쟁’이라는 이름을 단 전쟁의 최대 희생자는 실은 한반도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동학 농민군과 일본군의 싸움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후비 제19대대의 경우 전사자는 단 1명, 질병과 사고 등으로 숨진 자는 36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서방의 최신식 라이플총으로 무장한 일본 진압군(최대 4000명으로 추산)은 ‘죽창과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깃발을 흔들면서 피리를 불고 북을 치며 순식간에 언덕을 하얗게 덮을 정도로 일본군을 향해 쇄도하던’ 농민들을 손쉽게 제압했다.

청일전쟁 당시 발행된 <우와지마 신문>에 실렸던 홍주(충남 홍성군)에 투입된 제2중대 배속 일등군조가 형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고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은 전한다. “적(농민군)이 근접하기를 기다렸다. 적은 앞다퉈 어지러이 진격(亂進)해 왔다. 400m까지 다가오자 세 방면에 포진한 우리 부대가 먼저 저격을 시작했다. 백발백중, 실로 유쾌했다. 적은 오합지졸의 주민(土民), 공포감으로 전진해 오지 못하고.(이날 3100여발을 쏘았다)”

당시 동학 농민군 학살은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 외상,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공사 등의 직접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발발 뒤 청나라가 파병하자 톈진조약을 핑계로 건너와 경복궁을 점령했다. ‘척양척왜’를 내세운 동학 2차 봉기는 이런 일본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컸다. 후비 제19대대를 이끌었던 미나미 대대장은 메이지유신 때 막부타도·존왕양이를 앞세우며 결성한 조슈번 지방군의 간부였던 이노우에 공사의 직속 부하 출신. 당시 일본군은 정규군과 예비역, 그리고 후비병(後備役)으로 짜여 있었는데, 후비병은 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28~32살의 기혼남성들로 구성돼 있었다. 명성황후(민비) 시해를 현장에서 자행한 것도 바로 후비병들이었다.

나카쓰카 교수 등은 개별 전투에서 동학군은 참패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동학군의 장기 게릴라전이 일본군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이는 “나중의 중국 공산군이나 베트콩의 게릴라전 같은, 강자인 서방 침략에 맞서 약자인 아시아인들이 전통적으로 저항하는 방식의 선구를 이룬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참고자료>

 

최제우(崔濟愚)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최시형(崔時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전봉준(全琫準)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동학(東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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