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150년 전 경복궁 화장실 발견.. "현대 정화 시설과 비슷"
홍다영 기자 입력 2021. 07. 08. 15:12 수정 2021. 07. 08. 15:15 댓글 0개
https://news.v.daum.net/v/20210708151258836
경복궁 앞 2m 팠더니..삼군부·사헌부 터 등 조선 육조거리 윤곽이
김양진 입력 2021. 05. 10. 14:26 수정 2021. 05. 11. 08:36 댓글 55개
광화문광장 공사서 4천㎡ 규모 문화재 발굴
https://news.v.daum.net/v/20210510142608788
[광화문]
광화문광장 공사서 조선시대 수로 등 문화재 발견.."보존계획 수립"(종합)
윤슬기 입력 2021. 03. 19. 16:42 댓글 0개
시 "조선시대 수로로 추정..문화재 심의와 공사 병행추진 가능"
서울시, 문화재 발굴조사 2019년 1월부터 시행..4월 심의 목표
발굴조사 9단계 중 6단계 완료..조선시대 수로 등 문화재 확인
https://news.v.daum.net/v/20210319164254273
광화문 월대,여민동락의 상징,오늘 가슴 벅찬 공개 (daum.net)
광화문 월대가 뭐지?...문화재청 발굴조사 현장 한시적 공개 (daum.net)
광화문 해치 100년 만에 제자리 찾지만..
입력 2018.04.13. 05:06 수정 2018.04.13. 08:36 댓글 16개
http://v.media.daum.net/v/20180413050607963
옮기고 뜯고 또 고치고… 광화문, 130년의 변천사
권혜련 기자
등록 : 2018.04.11 11:53
수정 : 2018.04.12 09:19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804111184590200
광화문 월대 복원되고 해태상은 제자리 찾는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입력 : 2018.04.10 15:17:00
광화문 땅밑 ‘1800년’이 살아 있다
한겨레 2007.11.30
‘시멘트’ 광화문 걷어내니 대원군 중건한 광화문터 나오고그 밑엔 태조때 축조물 온전…뻘흙 메운 기법은 백제때 것
임종업 기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3810.html
광화문 창건 터 보존 논란
입력 2007-11-21 03:00수정 2009-09-26 04:07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1210080
광화문 ‘19세기식 복원’ 고민되네
경향신문 2007년 11월 01일
“올해 조사는 끝났는줄 알았는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1011735041&code=960100
[사직단]
'조선의 상징' 사직단 복원 첫발..전사청 권역 발굴
YTN | YTN | 입력 2015.11.20 23:36
tv.kakao.com/v/v4047ckc33ZABqkcq6vvqdB@my
http://media.daum.net/life/living/tips/newsview?newsId=20151120233605701
'세종의 숨결'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 600점 쏟아졌다
강혜란 입력 2021. 06. 30. 00:19 수정 2021. 06. 30. 06:34 댓글 7개
15세기만 쓰인 ㅱ 활자 등 첫 발견
세종 당시 추정 한문활자도 포함
인사동 땅속서 1600여 점 발굴
'직지심체요절'은 인쇄본만 보존
서양보다 앞서는 실물 금속활자
세종 때 추정 천문시계 일성정시의
자동물시계 부속품 주전도 출토
https://news.v.daum.net/v/20210630001945979
조선전기 금속유물 무더기 출토 미스터리..왜 묻은 걸까(종합)
박상현 입력 2021. 06. 29. 14:58 수정 2021. 06. 29. 18:19 댓글 16개
"1588년 이후 한꺼번에 폐기한 듯..재활용 의도 있었을 수도"
출처; https://news.v.daum.net/v/20210629145823251
조선왕실 상징적 공간 '전주부성지', 전북도 기념물 지정 (daum.net)
전주 한복판서 조선시대 전주부성 성곽 흔적 발견 - 뉴스1 (news1.kr)
시굴조사 결과…市 "아시아 문화심장터 탄력"
완산부지도(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중 전주부성 고지도. 빨간색 네모는 시굴조사 현장(전주시 제공) © News1 김춘상 기자 |
전북 전주시내 한복판에서 조선시대 전주부성(全州府城) 성곽 흔적이 발견돼 아시아 문화심장터 프로젝트의 핵심사업인 전주부성 복원 계획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전주시는 전주문화유산연구원(원장 유철)과 함께 전주부성 동편(풍남문~서문~북문 구간) 성곽 추정지에서 시굴조사를 한 결과 시청 인근 한국전통문화전당의 북동쪽 주차장 부지에서 전주부성 성곽 기초부분 흔적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일제강점기 때 철거된 전주부성 조사가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곽 기초부분 흔적이 발견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시굴조사 결과 전주부성 성곽은 기초부분 1단만 남겨져 있었다. 남아 있는 성곽의 폭은 5.2m, 길이는 34m, 잔존 높이는 20㎝였다.
성의 내벽은 편평한 석재를 가로방향으로 쌓았고, 외벽은 너비 30㎝ 이상의 큰 석재로 쌓은 것으로 확인됐다.
전주부성의 남동편인 경기전~조경묘 구간 조사에서는 성돌로 추정되는 대형 석재들이 확인돼 경기전 과 조경묘 담장 밖으로 성곽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통문화전당 북동쪽 주차장 부지서 발견된 전주부성 성곽 흔적(전주시 제공) © News1 김춘상 기자 |
한국전통문화전당 북동쪽 주차장 부지서 발견된 전주부성 성곽 흔적(전주시 제공) © News1 김춘상 기자 |
2009년 전주부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국역 전주부사(全州府史)를 보면 전주부성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1388년 고려 안찰사 최유경이 처음 쌓았고, 조선 영조 10년인 1734년 전라감사 조현명이 다시 대대적으로 쌓았다고 한다.
전라도와 제주도를 통할하는 관청이었던 전라감영(全羅監營)을 포함해 객사(客舍) 경기전(慶基殿) 조경묘(肇慶廟) 등 전주부의 주요 시설을 둘러싼 성곽이었다. 풍남문(豊南門) 등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사라졌고, 지금은 풍남문 등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 전라감영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지난해 1월 신년 기자회견 때 아시아 문화심장터 프로젝트 구상을 밝히면서 “구도심의 심장부였던 전주부성 일원을 체계적으로 보전·관리·재생하기 위한 역사도심 기본계획 및 지구단위 계획을 수립하고, 국가예산을 확보해 전통문화 중심의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해 새로운 문화예술 거점으로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전주부성 복원은 전라감영 복원과 함께 조선왕조 발상지로서 전주의 위상을 살리면서 침체된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아시아 문화심장터 프로젝트의 핵심사업이다.
전주부성, 풍남문, 남부시장의 과거와 현재 모습/뉴스1 DB |
시는 전주부성 유구가 확인된 만큼 전문가 자문회의를 거쳐 전주부성의 잔존 양상을 확인하기 위한 정밀발굴조사를 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전주부성 성곽의 구체적인 축조 방식 등을 확인해 향후 전주부성 복원의 자료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전주부성이 복원되면 아시아 문화심장터 프로젝트의 완성도가 한층 높아질 것으로 시는 기대하고 있다.
황권주 문화관광체육국장은 “이번 시굴조사를 통해 문헌으로만 남아 있던 전주부성 기초부분이 확인됐다”면서 “도심지 조성으로 조사가 어렵겠지만 확인된 성곽의 일부라도 정밀발굴조사로 전환해 구체적인 축조방식을 살펴 복원 및 정비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mellotron@
[함안24시] 함안군, 조선시대 자기 유적 발굴…道 문화재 지정 추진 (daum.net)
- 수정 2008-01-10 16:20 등록 2008-01-10 16:20
국정원내 세종대왕 초장지 조선왕릉 첫 발굴 (hani.co.kr)
“사신도 발견 가능성 높아”
현재와 가장 가깝기 때문에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은 조선 왕릉.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정확한 구조를 알지 못한다. 현재까지 조선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왕비릉 중에서 발굴조사가 이뤄진 곳이 단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조선 왕릉에 대해 사상 최초로 발굴이 시작됐다. 대상지는 국가정보원 내 세종대왕 초장지(初葬地). 초장지란 처음에 묻힌 곳이란 뜻으로, 세종은 그의 비 소헌왕후와 함께 지금의 국정원 경내 영릉이란 곳에 묻혔다가 터가 좋지 않다 해서 예종 원년(1469) 3월에 현재의 경기 여주군 능서면 영릉으로 천장(遷葬.무덤을 옮기는 일)됐다.
문화재청 김상구 건축문화재과장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 의뢰해 이 초장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10일 개시했다고 말했다. 이번 조사는 예산 7천만원을 들여 2월말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김 과장은 "조사성과에 따라 발굴이 확대될 수 있다"면서 "사상 최초의 조선왕릉 발굴이란 점에서 문화재청에서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국정원 내 초장지는 그 유해가 옮겨졌기 때문에 더 이상 조선왕릉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천장 당시에 완전히 파괴된 것이 아니라 유해를 수습하는데 그치고 그 외 신도비를 비롯한 다양한 무덤 장식 석물(石物) 30여 점은 1973-7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수습해 갈 때까지 그대로 현장에 남아있었다.
이 초장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전격적으로 결정됐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21일 옛 영릉터를 보존 관리하고 정비하기 위한 협약을 국정원과 체결했다. 이 협약에 의해 국정원은 세종 초장지 능침 조성에 필요한 토지를 무상으로 문화재청에 제공하고, 그 관리 주체는 문화재청으로 하되 일상적인 관리는 국정원이 맡기로 했다.
협약서 체결 이후 정비작업을 위해 초장지 일부 표토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강회 다짐이 출현하고, 그 밑에서는 두터운 숯층을 확인함에 따라 작업을 중단했다. 석실이 남아있음이 확인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유해는 여주로 옮겨졌지만 그 외 왕릉 구조물이나 유물은 그대로 남아있을 있을 공산이 크다고 판단하고 발굴을 결정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의 현실 네 벽면에는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사신도를 각각 그려넣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이런 사신도가 발견될 가능성도 내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16-07-26 15:50
임진왜란 전투현장 부산 다대진성의 해자 발견 (hani.co.kr)
부산박물관, 주택신축 공사현장에서 발견해 정밀발굴조사
동래읍성 해자처럼 전투 관련 유물 출토 가능성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과 왜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부산 다대진성 터에서 해자가 처음 발견됐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도랑처럼 만든 방어시설을 말한다.
부산박물관은 지난달 27일 부산 사하구 다대동의 주택신축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진성 ‘다대진성’의 해자를 처음 발견했다고 26일 밝혔다. 다대진성 동북쪽 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해자에선 채움 돌과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됐다.
부산박물관은 다대진성이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과 동래읍성처럼 치열한 전적지였던 점으로 미뤄, 해자에서 또다른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정밀 발굴조사하기로 했다. 동래읍성 터에선 2005년 4월 부산도시철도 건설 과정에서 해자가 발견돼, 왜란 당시 전투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골 등 유물이 대거 출토된 바 있다.
다대진성은 1490년(성종 21년) 부산 해안과 낙동강 방어를 위해 돌로 쌓은 둘레 541.8m, 높이 3.9m 규모의 수군진성으로, 병선 9척과 수군 700여명이 주둔했다고 한다. 1592년 음력 4월14일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한 뒤 다대진성을 공격했다. 다대진 첨사 윤흥신 장군은 수적 열세에도 잘 싸워 왜군의 1차 포위 공격을 물리쳤다. 일부 병사가 퇴각을 권유했지만, 장군은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자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왜군은 이튿날 대군을 이끌고 다대진성을 다시 포위 공격했고, 결국 성은 함락됐다. 윤흥신 장군은 남은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왜군에게 뛰어들어 분투하다 전사했다.
다대진성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성, 동래읍성과 마찬가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지만, 변방의 진성이라는 이유로 사서에 그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윤흥신 장군 등은 1757년(영조 33년)에야 그 공을 인정받았고, 1765년(영조 41년) 그 충절을 기리는 윤공단(부산시기념물 제9호)이 세워졌다.
다대진성은 1894년 폐성된 뒤 관련 기관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 문화재로도 지정되지 않았고, 현재 성터에는 주택 등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부산도시철도 1호선 연장선인 다대선 공사구간도 성터 북서쪽 일부를 관통하고 있다. 부산 사하구는 지난 2월부터 다대진성 흔적을 찾는 기초조사 용역을 진행 중이다.
사하구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다대진성 복원은 현실적으로 힘들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성벽과 해자의 보전관리가 최우선이다. 이후 성터 근처에 역사박물관 등을 세워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