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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조선

1. 조선 (1) 조선 초기

대야발 2021. 6. 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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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는 정치적으로는 이성계의 건국에서 《경국대전》의 완성과 사림의 등장에 따른 각종 사화가 있었던 시기로 생각할 수 있다.

 

 

이성계의 건국은 성리학적 이상에 따른 정치 실현이라는 신진사대부의 요구와 함께 원나라가 북원으로 물러나고 명나라가 수립되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국내 세력의 갈등이 함께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다. 원나라 간섭기가 길어지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왕족과 권문세가 역시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원과 명에 대해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공민왕이 시해된 후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고려는 고토회복을 명분으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과의 전쟁을 시도하였다.[49] 명나라가 명실상부한 중국의 패자라는 인식 아래 급진적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은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이후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35]

 

 

조선의 건국 초기 새로운 왕조의 정치 질서를 두고 많은 갈등이 벌어졌다. 왕자의 난은 개국공신인 정도전 등과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을 주장한 이방원의 갈등이 원인으로 결국 이방원이 즉위하여 국왕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게 되었다.[19]:19-20 왕권과 신권의 갈등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세조 찬위 역시 이러한 갈등이 배경이 되었다.[50]

 

 

한편, 조선 초기는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시기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한편[51] 전국을 조사하여 《세종실록지리지》를 작성하는 등[52] 여러 개혁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시기 사군과 육진이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어 조선의 영토는 오늘날 한반도의 지리적 경계와 유사하게 되었다.[53] 조선의 국가 운영을 위한 법전인 《경국대전》은 세조 시기 준비되어 성종 즉위 초 반포되었다. 이후 조선은 《속대전》과 《대전회통》 등의 보완 체제를 추가하였으나 갑오경장에 이르러 폐지될 때까지 《경국대전》을 공식적인 법제로서 유지하였다.[54]

 

 

 

 

2.1. 정치사의 흐름과 주요 사건

조선의 정치는 건국, 임진왜란 등 주요 사건과 관련하여 시기마다 맞게 된 과제들의 해결을 모색하면서 전개되었다. 이와 아울러 통치 일변도였던 데서 차츰 벗어나 정치세력 사이에서 이해관계 조절의 모색 또한 나타났으나, 그보다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하여 파국으로 치닫는 일이 더 많았다. 확대된 정치세력은 새로운 차원의 정치적 전망과 실천이 요구받기 시작한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중앙세력과 지방세력으로 나뉘었고, 결국은 식민지로 전락하는 거대한 파국을 맞고 말았다.

 

 

2.1.1. 건국과 통치기반 확충

이성계가 강력한 군사권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건국 주도세력이 조선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고려말에 분출된 여러 사회적 요구의 일부는 법과 제도로 수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새로 양전을 하고 과전법을 시행하여 토지제도를 바꾼 것으로, 이로써 국가재정이 전보다 튼튼해지고 자영농의 수가 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양전 결과로는 평상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정도를 채웠을 뿐, 비상시 군사력 가동에 필요한 몫을 비축할 수는 없었다. 다만 과전 공신전 등의 사전을 경기에만 둘 수 있도록 제한하고 다른 도에는 공전만 존재하도록 함으로써 지배층의 불법적 수탈을 감시 통제하기 쉽도록 하고 자영농 계층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점은 새 왕조가 들어선 뒤 전개될 정치의 방향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직후의 상황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새 왕조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무엇인지, 무엇이 더 중요한지 등에 대해 권력집단 안에서도 생각이 서로 달랐다. 태조 이성계는 가장 먼저 자신의 즉위 사실을 명에 알리도록 하고, 이어서 그가 직접 군사권을 장악하고 행사해온 기구인 도총중외제군사부를 폐지하는 대신 의흥친군위를 설치하여 자신의 군사권이 변함없이 지속되도록 하였다.

 

 

친군은 태조 자신의 아들과 종친 및 핵심 공신들로 지휘부를 구성하였고, 친군 외의 병력도 도별로 태조의 종친과 대신들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즉위할 때 서서 신하들의 조하를 받았던 태조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신하들을 강제하면서도 두 차례나 더 서서 조하를 받은 뒤에야 앉아서 조하를 받음으로써 신하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둘째 부인 강씨를 왕비로 책봉하고, 그 사이에서 낳은 당시 12세인 아들 이방번을 2품 재상의 직책인 의흥친군위 절제사로 임명하고, 이어서 이방번의 친동생으로 당시 11세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함으로써 국왕의 확고한 사적 지배 영역이 존재하며, 그 영역에서는 전제 권력을 행사하고자 함을 드러내었다. 이는 신하들, 특히 정예 문신들의 지향과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조선 건국을 반대한 세력에 대한 숙청은 즉위 교서에 사면령을 넣으며 사면에서 제외한 자들의 명단을 알리는 방식으로 56명을 처벌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권위를 부인하거나 깎으려는 언행은 꽤 오래 이어졌다. 1394년(태조 3)에는 일부 관원이 새 왕조의 운명을 점친 일이 드러나고 이어서 고려 왕족 일부가 반란을 꾀한 혐의를 잡게 되자, 공양왕과 그 아들들은 물론이고 고려 왕족 전체를 찾아내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살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양 천도 또한 이러한 일을 겪은 뒤에야 결정되었다. 1394년 9월부터 약 2년 동안 국력을 기울여 한양에 종묘와 사직, 궁궐과 여러 관아, 도성을 짓는 공사가 이어졌고, 그 중간에 한양부는 이름을 한성부로 바꾸었다.

 

 

천도가 마무리될 무렵 조선이 명에 보낸 표전을 놓고 두 나라 사이에 알력이 벌어지자, 조선의 주요 신료 사이에서 의견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전개된 까닭에 태조 재위 동안에는 국가의 통치기반을 확충할 수 없었을 뿐더러, 고려 멸망 때의 법과 제도도 부분적으로만 변혁할 수 있었다. 정치세력 또한 왕족의 교체를 제외하면 그렇게 크게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태종 이방원은 1398년(태조 7)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고, 1400년(정종 2) 친형 이방간이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여 권력을 더 굳건히 한 뒤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 해에 사병을 혁파하고 도평의사사 의정부로 개편하는 등의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정치제도로 바뀌는 출발점이었다. 태종은 부왕의 뜻을 거슬러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복동생 등을 죽인 행위 등과 관련하여 권위에 큰 약점을 갖고 있었으나, 이러한 개혁을 통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명분도 쌓은 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태종은 중부 이남 지역에 대해 국가 통치기반을 확충하기 위한 호구 조사와 양안 사업을 명령하였는데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다시 시행하도록 하였다. 재위 후반에는 양계라 부르는 북부지역으로도 사업을 확대하였다. 호구 조사의 주목적인 장정 파악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14131416년(태종 1316)에는 호패법도 시행하였다.

 

 

국가 통치기반을 확충하는 명분은 부국강병과 민본이었다. 이에 더해 태종이 공신과 자신의 외척을 숙청하면서 조성한 공포 분위기는 지역 사회에서는 공공연하나 중앙 권력에게는 들키지 않으면서 사적 지배 영역에 있던 양인 장정과 농경지의 상당 부분을 큰 저항 없이 공적 지배 영역 아래로 바꾸어 놓는 데에 한몫하였다.

 

 

1418년 태종은 적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전통을 세우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14년이나 세자 자리에 있던 양녕대군 이제(李禔) 대신 그 동생 충녕대군 이도(李祹)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종이 선위함으로써 세자가 된 지 불과 두 달 만에 즉위한 세종은 부왕인 태종과 대립을 한 때도 없지 않았다.

 

 

세종은 특히 재위 초엽 태종이 주도하여 세종의 외척세력을 숙청한 것과 같은 정치 행태를 보인 일이 없었고, 불교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태종의 정치 방침을 대체로 존중하여, 중대한 사건을 겪으며 큰 공을 세운 신료가 나오더라도 공신 책봉을 하지 않았고, 국가 통치기반 확충에도 적극적이었다.

 

 

세종 때에는 태종 때에 비해 호구와 농경지의 추가 파악이 이루어진 것에 더해 고을별 특산물 조사도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 세종실록』의 「지리지」에 수록되었다. 국가가 파악한 호구의 수는 그 뒤로 증감을 겪기는 하였으나 뒷 시기로 가면서 증가 경향을 보인 반면에, 농경지는 세종 때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적 지배 영역이 농경지를 중심으로 다시 확대되어 갔음을 뜻하였다. 즉, 세종 때는 조선시대 전체에서 지배층의 경제력이 가장 강하게 통제된 반면 국가의 경제력은 가장 여유로웠던 시기였고, 세종 때의 여러 성과는 이를 바탕으로 가능하였다.

 

 

 

 

 

 

<참고자료>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조선의 설계자 핵심 브레인 정도전…성리학 중시하며 산업 억제정책 펼쳤죠 | 생글생글 (hankyung.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정도전 집에 웬 ‘말(馬) 운동 트랙’?…‘왕실마구간’ 드러난 종로구청터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산 메뚜기 삼킨 당태종, 제단 오른 조선 태종'···작금엔 "내 탓이오" 지도자가 없다 - 경향신문 (khan.co.kr)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집현전 설치해 젊고 뛰어난 학자들 등용 건국세력 대체…정치의 세대교체 추진했죠 | 생글생글 (hankyung.com)

 

 

정치의 근본은 백성의 유복한 생활임을 안 세종…농업 기술개발에 힘쓰고 세금 공평하게 내게 했죠 | 한국경제 (hankyung.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580년 만에 ‘갑툭튀’한 장영실의 ‘신상정보’…새빨간 가짜뉴스일까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임금을 '너'라 한 정인지, 임금의 '팔'을 꺾은 신숙주…취중 실수의 끝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분(화장품)과 바늘 보내오"…조선시대 '츤데레' 군인 남편이 보낸 선물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전하! 제 하소연 좀!"…북악산은 조선시대 고공농성장이었다 - 경향신문 (khan.co.kr)

 

 

 

 

조선(朝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Joseon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500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600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700 - Wikipedia

 

 

 

 

 

이성계는 몽골인? 漢字만이 아는 역사의 비밀! | Save Internet 뉴데일리 (newdaily.co.kr)2012-10-24

 

 

 

[블로그] 조선의 왕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hani.co.kr)2019-10-20

 

 

 

 

 

"조선 후기 수렴청정한 대비 권한, 왕권 능가하지 못해" | 연합뉴스 (yna.co.kr)2018-04-15 

 

 

 

https://v.daum.net/v/2024090614515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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