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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 문화유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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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정신의 끝판왕 세종의 '천기누설'.."공중해시계를 종로에 내걸라"

이기환 선임기자2020. 11. 17. 09:00

[경향신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 6월 미국의 한 경매에서 출품된 조선의 공중시계인 앙부일구를 구입환수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때를 아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밤에는 자격루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려워…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해에 비쳐 각(刻)과 분(分)이 환하고 뚜렷하게 보이고,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1434년(세종 16년) 10월2일 <세종실록> 기록이다.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또하나의 발명품을 선보였다는 내용이다. 즉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시내 혜정교(종로 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와 종묘 앞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때를 아는 시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애민정신을 오롯이 담은 앙부일구.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종로거리에 세워 시간과 절기를 알도록 하라고 배려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애민정신의 끝판왕

실록기사를 뜯어보면 세종은 가히 애민정신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한글도 창제되지 않았던 때였다. 따라서 글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시각을 글자(한자)가 아니라 12지신의 동물그림으로 표현했다. 자(子)·축(丑)·인(寅)·묘(卯) 대신 쥐와 소, 호랑이, 토끼 등의 동물 그림으로 시각을 표현했으니 삼척동자도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또 하나 대로변에 설치함으로써 지나는 백성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원래 ‘천문 기상’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천기(天機)’에 속했다. 왕(王)이라는 상형문자가 상징하듯 하늘(―)과 땅(ㅡ)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존재(ㅣ)가 바로 임금이었다. <서경> ‘요전편’은 ‘임금 만이 하늘 땅과 소통한 뒤에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시간과 절기를 나누어 주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관상수시(觀象授時·하늘을 관찰하여 백성에게 절기와 시간을 알림)’라 했다.

하지만 세종은 ‘천기’를 독점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누설’ 하고 말았다. 왜냐. 예부터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사기> ‘열전·역이기전’)고 했다. 세종은 바로 그 농사를 짓고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시간과 절기를 스스로 알고 대비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것이다. 세종은 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하여 국가의 표준 시계로 삼은 다음 일과 시간에도 백성들이 쉽게 시간 및 절기를 알 수 있는 공중 해시계(앙부일구)를 발명한 것이다. 한마디로 ‘천기누설’을 ‘천기공유’로 만든 이가 바로 세종이었던 것이다.

앙부일구는 오목한 구형 안쪽에 설치된 막대에 해 그림자가 생겼을 때 그 그림자의 위치로 시각을 측정하는 원리로 제작됐다. 해 그림자를 만드는 끝이 뾰족한 막대는 영침(影針)이다. 영침(시침)의 끝은 구의 중심이 되며, 막대의 축을 북극에 일치시켰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앙부일구를 둥글게 만든 이유

그렇다면 왜 솥뚜껑을 뒤집어놓은 곡면 모양으로 앙부일구를 만들었을까. 사실 해시계는 세계의 어느 고대 문명 사회에서나 다양하게 제작됐다. 하지만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해가 뜨는 높이와 방향이 바뀐다. 따라서 평면으로 해시계를 만들면 해의 그림자가 달라지게 되고, 시계의 숫자판이 불규칙해지며 사이 간격도 일정치 않게 된다.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은 “세종 시대의 과학자들은 바로 이런 단점을 보완하려고 숫자판을 오목하게 만든 앙부일구를 발명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앙부일구는 고유의 정밀 시계 발명품이자 독창적인 과학 문화재라 할 수 있다. 앙부일구 등을 만든 과학자들은 이순지(?~1465), 장영실, 이천(1376~1451), 김조(?~1455) 등이다.

환수된 앙부일구에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한 값인 ‘북극고 37도 39분 15초(北極高三十七道三十九分一十五秒)’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서울의 위도에서 읽은 정확한 시간과 절기

이와 같은 세종의 가없는 애민정신을 오롯이 담은 공중해시계, 앙부일구 1점이 미국에서 환수됐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올 6월 미국의 한 경매에 출품된 앙부일구를 매입해 17일 오후 2시 공개한다고 밝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평소 해외 경매 사이트 등을 통해 국외 소재 문화재의 구입 환수를 타진하고 있다. 이번에 환수되는 앙부일구도 지난 1월 미국 경매에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곧바로 검증작업에 돌입했다. 김동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통조사부장은 “해외반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골동품상에서 한 개인이 구입해 소장했던 것”이라며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여러차례 취소·연기되었다가 지난 6월 재개된 경매에서 낙찰받았다”고 전했다. 환수되는 앙부일구는 지름 24.1㎝, 높이 11.7㎝, 약 4.5㎏의 무게를 지닌 금속제 유물이다.

<국조역상고>는 1713년(숙종 39년) 한양의 종로에서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37도 39분 15초의 값을 얻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이 앙부일구는 1713년(숙종 39년) 이후~19세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김상혁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센터장은 “이 앙부일구는 1713년(숙종 39년) 이후~19세기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그렇게 본 이유가 있다. 환수된 앙부일구에는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한 값인 ‘북극고 37도 39분 15초(北極高三十七道三十九分一十五秒)’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1713년(숙종 39년) 한양의 종로에서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37도 39분 15초의 값을 얻었다”는 <국조역상고>(1796년)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환수된 앙부일구는 서울의 위도에서 정확한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다. 현대 시각체계와 비교해도 거의 오차가 나지 않고 절기와 방위, 일몰시간, 방향 등을 알 수 있는 체계적이고 정밀한 과학기기라 할 수 있다.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공중해시계를 제작해서 종로 거리에 설치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세종실록> 13


■앙부일구는 오늘날의 만능시계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에 따르면 앙부일구는 오목한 구형 안쪽에 설치된 막대에 해 그림자가 생겼을 때 그 그림자의 위치로 시각을 측정하는 원리로 제작됐다. 해 그림자를 만드는 끝이 뾰족한 막대는 영침(影針)이다. 영침(시침)의 끝은 구의 중심이 되며, 막대의 축을 북극에 일치시켰다.

영침 둘레에는 시각을 가리키는 시각선이 세로로 그려져 있다. 세종 시대엔 그 시각을 12지(十二支)의 동물인형으로 표시했다는 것이다. 또 시각선과 직각으로 13개의 절기선을 새겨 넣었다. 이 절기선 양쪽 가장자리 윗면에 24절기가 표시되어 있다. 해는 여름이면 높이 뜨지만 겨울이 되면 비스듬히 떠서 방 안 깊숙이 비춘다. 당연히 그림자도 여름이면 짧아지고 겨울에는 길게 늘어지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제직된 휴대용 해시계 ‘앙부일부’. |윤용현의 전통 속에 살아 숨 쉬는 첨단 과학 이야기 >, 교학사, 2012에서


바로 이것을 이용한 것이 이 13줄이다. 그 중 가장 바깥 줄에는 시침의 그림자가 가장 길게 되는 곳에 ‘동지(冬至)’라는 표시가 있다. 제일 안쪽 줄은 시침의 그림자가 가장 짧게 되는 곳에 ‘하지(夏至)’라 써 있다.

나머지는 소한, 대한, 입춘, 우수로 이어지는 24절기를 나타낸 것이다. 즉 계절의 변화에 따른 24절기가 그 변화에 따라 해의 기울기가 달라져 시침의 그림자가 변하는 모습을 13줄로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앙부일구는 천구상에서 일정한 주기를 갖고 회전하는 태양의 운행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기구였다. 따라서 해 그림자가 드리워진 절기선과 시각선의 눈금을 읽으면 별도의 계산 없이 그때의 시각과 절기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는 간편한 기구라 할 수 있다. 서울의 위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영침을 서울의 북극고도에 맞추어 설치했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서울을 기준으로 한 국가 표준시계이기 때문이다.

환수된 앙부일구는 정밀한 주조 및 섬세한 은입사 기법, 다리의 용과 거북머리 등의 뛰어난 장식요소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윤용현 과장은 “이렇듯 앙부일구는 영침의 해 그림자를 통하여 시간과 그 때의 절기를 한눈에 알 수 있게 설계했다”면서 “오늘날의 만능 시계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에 환수된 앙부일구는 정밀한 주조 및 섬세한 은입사 기법, 다리의 용과 거북머리 등의 뛰어난 장식요소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고도로 숙련된 장인이 만든 예술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앙부일구는 궁궐과 관공서, 일반 사대부가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됐다. 하지만 세종 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앙부일구 7점은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또한 세종 애민정신의 상징인 ‘12지신 동물그림’이 새겨진 앙부일구도 현전하지 않는다. 다만 19세기 후반이 되면 휴대용 앙부일구로 발전한다. 한성판윤을 지낸 강윤(1830~1898)과 동생 강건(1843~1909)이 1881년(고종 18년)이 만든 제작한 휴대용 앙부일구가 대표적이다. 이번에 돌아온 앙부일구는 18일부터 12월 20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과학문화실에서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1)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조선시대 대표 공용 해시계 '앙부일구' 3점, 보물 된다

박상현2021. 12. 30. 10:01
자치통감 권266∼270·경주 분황사 금동약사불도 지정 예고
지난해 미국에서 돌아온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앙부일구'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시대 천문사상이 담긴 과학문화재이자 당시 대표 공용 해시계였던 '앙부일구'(仰釜日晷) 3점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미국 경매에서 구매해 들여온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을 비롯해 국립경주박물관, 성신여대박물관에 있는 앙부일구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30일 밝혔다.

솥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양의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앙부일영'(仰釜日影)으로도 불린다. 세종 16년(1434) 장영실, 이천, 이순지 등이 왕명에 따라 제작해 종로에 있던 다리인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든 시설에 시각보다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부어서 그릇을 만들었으니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길 옆에 둔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게 될 것이다"라는 직제학 김돈의 설명이 있다.

성신여대박물관 소장 '앙부일구'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조선시대 전기 앙부일구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전하며,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된 유물 3점도 18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앙부일구 3점의 겉면에 새겨진 글씨 '북극고 37도 39분 15초'(北極高 三十七度 三十九分 一十五秒)의 위도 값이 1713년 이후 사용됐다는 사실이 문헌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에 남아 있다. 기존에 보물로 지정된 국립고궁박물관의 다른 앙부일구 2점은 17∼18세기에 제작됐다고 알려졌다.

세 유물은 재질이 금속이며, 형태와 제작 기법이 유사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세쌍둥이'에 비유했다. 다만 국립고궁박물관 앙부일구는 색상이 조금 밝은 편인데, 소장자가 꾸준히 닦아서 달라진 결과로 분석됐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앙부일구'의 영침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오목한 몸체를 다리 네 개가 받치고 있으며, 다리에는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이 표현됐다. 안쪽에는 북극으로 향한 그림자침인 영침(影針)이 달렸다. 15분 간격의 시각선과 계절과 절기를 알려주는 눈금도 있다.

문화재청은 앙부일구 세 점에 대해 숙련된 기술자가 만들어 조형미와 독창성이 있고, 조선시대 천문기술 발전과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어 보물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자치통감 권266∼270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앙부일구가 고안된 해인 1434년에 주조한 금속활자 '갑인자'(甲寅字)로 찍은 '자치통감 권266∼270'과 조선 후기 불상인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도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보유한 자치통감 권266∼270은 1436년에 출판된 자치통감 294권 가운데 일부다. 자치통감은 송나라 사마광이 편찬한 중국 역사서로, 이 책과 유사한 판본이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다.

1436년에 간행된 자치통감은 현존하는 자료가 많지 않으며, 권266∼270도 다른 곳에는 없다고 알려졌다. 앞서 보물이 된 서적과 비교하면 인쇄와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높이가 3.4m에 이르는 대형 불상이다. 1998년 분황사 보광전 해체·수리 과정에서 나온 기록을 통해 1609년에 구리 5천360근으로 제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정유재란 때 훼손된 금동약사불을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만든 것으로 판단된다.

우람한 몸체와는 달리 얼굴이 동그랗고 통통하며 어깨가 왜소해 아이 같은 인상을 준다. 앳된 느낌의 이목구비는 16세기 불상 양식의 흔적이고, 길쭉한 비례감과 세부 주름은 17세기 불상 특징으로 평가됐다.

문화재청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이들 문화재 5건의 보물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2)

 

'이중국적' 백자, 국보지위 박탈···274, 278호 이어 세번째 '영구결번'

입력 : 2020.04.29 11:28 수정 : 2020.04.30 01:28
이기환 선임기자

1974년 조선초기에 제작된 빼어난 작품이라고 국보 제168호로 지정된 백자. 그러나 14세기 원나라 시대에 제작된 중국제라는 전문가들의 평가 때문에 46년만에 국보에서 해제 예고됐다.|문화재청 제공

 

“매화와 국화를 그린 15세기 작품으로 중국 원나라 양식과 비슷한 유일한 작품이다.”

문화재위원회가 1974년 6월21일 ‘한국미술 2000년전’에 출품한 ‘백자진사매국문병’을 국보 제168호로 지정한 이유를 기록한 회의자료이다. 요약하자면 ‘중국 원나라 양식과 비슷한 유일한 조선시대 백자’라며 국보로 지정한 것이다. ‘진사(辰砂)’란 사용원료에 관계없이 구운 후 붉은 색깔이 나는 안료를 통칭한다. 조선백자에서는 이 붉은색을 내려고 발색제로 동(銅)을 사용했기 때문에 ‘동화백자’라고도 한다. 그런 탓인지 1974년 국보 지정 당시 ‘백자 진사매국문병’이던 명칭이 나중에 ‘백자 동화매국문병’으로 바뀌었다. ‘‘백자동화문병’은 ‘붉은 색을 내려고 발색제로 동(銅)을 사용한 백자 병’이라는 뜻이다.

국보 제168호와 흡사한 중국 원나라제 유리홍 백자. 조선에서는 붉은 빛이 감도는 백자를 선호하지 않았다. 외제산이라 백안시했다.|문화재청 제공

 

하지만 전문가들은 차츰 이 국보 제168호 백자를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우선 적색안료를 사용한 이른바 ‘진사백자’가 18세기 이후가 돼서야 본격 제작됐다는 점이 꼽혔다. 조선 전기 경기 광주 지역의 가마터에서도 아직 보고된 출토예도 없었다.

왜 조선에서는 ‘진사’를 쓰지 않았을까. 이유가 있었다. 진사백자의 발색제로 쓰이는 동(銅)은 고온에서 몹시 불안정한 성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 8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기체로 휘발되거나 발색이 고르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1200~1300도 고온에서 굽는 백자에 동을 발색제로 사용했을 때는 가마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요변현상(색깔이나 모양이 변형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처럼 까다로운 소성조건 때문에 조선에서는 ‘동화백자(진사백자)’를 선호하지 않았다.

국보 278호였던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 1411년 태종이 ‘공신대우’인 원종공신 이형에게 내린 증명서다. 그러나 이 유물은 보물로 격하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게다가 조선에서는 붉은 색을 ‘외제산 색깔이며 사치품’이라해서 백안시했다. 단적인 예로 태종은 “붉은 안료는 조선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각종 그릇이나 장식품에는 순색만 쓰라”(<태종실록> 1411년)는 엄명까지 내린 바 있다.

국보 168호 백자는 ‘바로 이러한 시대(15세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제작된 진사(동화)백자’라는 희귀성을 인정받아 국보의 지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백자를 조선산으로 보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후평이 속속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국보 제168호’ 백자와 유사한 원나라의 ‘유리홍자기’에 주목한다. ‘유리홍’은 조선의 진사백자와 같은 동을 사용하여 붉은 색을 내는 진사(혹은 동화)의 중국 용어이다.

백자 표면의 국화 문양도 수상했다. ‘국보 제168호’ 자기의 국화세부모양을 보면 꽃술(화심·花心)을 원 안에 격자선을 그어 표현했는데 이것은 원말 명초의 중국 유리홍자기나 청화백자에서 보이는 세부표현과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파초문도 눈에 걸렸다. 이 역시 역시 원나라 말부터 시작된 중국산 자기의 보조문양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국보 제168호’ 백자의 제작지는 조선이 아니라 원나라임이 분명하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또다른 결격사유도 있었다. 문양의 색깔이 균일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휘발되기도 했다. 다리굽은 다소 투박하며 접지면의 폭도 균일하지 않고 유약을 닦아낸 부분도 보인다. 파초의 간격도 일정치 않으며 잎의 크기도 균일하지 않다. 무엇보다 가느다란 목 위로 외반된(밖으로 휘어진) 나팔 구연이 떨어져나가 금으로 수리·복원한 흔적이 있다. 국보로 대접받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흠결이다.

1992년 해군의 이충무공 해전유물발굴단은 거북선에 장착한 대포를 인양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급에 눈이 먼 발굴단장이 조작한 가짜였다. |경향신문 자료

 

학계의 견해를 반영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소개란은 국보 168호 백자의 명칭을 ‘백자 유리홍 매화 국화무늬병-국적 원나라’로 바꿨지만 문화재청은 46년간이나 ‘백자 동화매국문 병-조선시대’를 고수해왔다. 졸지에 국보 제168호는 ‘이중 국적’이 되어버린 셈이다.

(▶관련기사: [단독]조선이냐 원나라냐…수십년 ‘이중국적’ 국보 백자 그냥 두시렵니까)

문화재청은 최근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 분과를 열어 학계와 언론의 지적이 계속된 ‘백자 동화매국문병’의 국보 지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하고 지정해제를 예고했다고 29일 발표했다

 

황정연 유형문화재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중국 및 한국도자사 전문가로 조사단을 구성하여 국보 제168호의 국적과 작품 수준 등을 연구했다”면서 “이번 국보해제 예고는 그러한 연구결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위원회는 “조선 전기 백자에 동화를 안료로 사용한 사례가 없고, 백자의 기형과 문양을 검토해볼 때 이른바 유리홍이라는 14세기 원나라 도자기로 판단된다”고 보았다.

물론 ‘문화재보호법 시행령’(11조)에 따르면 외국문화재라도 우리나라 문화사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회는 “이 ‘백자 동화매국문 병’은 출토지나 유래가 조선시대와의 연관성이 불분명하고, 같은 종류의 도자기가 중국에 상당수 남아 있어 희소성이 떨어지며, 작품의 수준 역시 우리나라 도자사에 영향을 끼쳤을 만큼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고 최종 판단했다. 따라서 ‘인류문화의 관점에서 가치가 크고 유래가 드문 것’이라는 국보 지정 기준에 미흡할 뿐 아니라 국보로서 위상에도 부합된다고 보기 어려워 해제가 타당하다고 보았다.

가짜총통에 새겨넣은 가짜명문, 거북선을 가리키는 ‘귀함’과 ‘한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는 내용의 가짜 글귀가 선명하다.

 

30일간의 예고기간을 거쳐 국보해제가 최종결정되면 ‘국보 제168호’는 사상 3번째로 영구결번된다. 그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보’에서 영구결번된 기존 사례는 국보 274호와 국보 278호가 있다.

 

지금은 영구결번된 국보 274호는 1992년 경남 통영시 한산면 문어포 앞바다에서 인양했다는 ‘별황자총통’이었다. 이 총통의 표면엔 ‘만력 병신년(1596년·선조 29년) 6월 일 제작해서 올린 별황자총통’(萬曆丙申六月日造上 別黃字銃筒)이라는 내용과 ‘귀함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귀함’이라면 거북선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거북선에 장착한 화포가 발견되었다는 소리였다. 이 총통은 인양 3일만에 부랴부랴 국보(제274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 총통은 3년8개월만인 1996년 4월 가짜로 밝혀졌다.

준장 진급의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던 해군유물단장 황모 대령이 벌인 희대의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났다. 명문을 잔뜩 새겨놓은 가짜총통을 한산 앞바다에 던져놓고 진짜유물인양 건져올린 것이었다. 수사결과가 발표되자 문화재위원회는 1996년 8월31일 문제의 가짜총통을 4년만에 국보에서 해제했다. 국보 274호는 이후 영구결번됐다. 또 하나의 국보 ‘영구결번’은 국보 278호이다.

문화재관리국은 1993년 조선 태종 때 발급한 공신녹권으로는 처음 발견됐다는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을 국보 278호로 지정했다. 공신녹권이 무엇인가. 개국 때나 전쟁 때, 혹은 반란 때 특별한 업적을 세운 공신에게 내리는 증서다. ‘당신이 바로 공신’이라고 인정하는 증명서인 것이다. 그런데 정식공신, 즉 정공신(正功臣)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공적을 인정받은 이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인정하고 증서를 내릴 때가 있다. 그것을 원종공신록이라 한다. 원종공신은 시쳇말로 ‘공신 대우’라 표현할 수 있겠다. 정공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공로를 세웠으니 ‘공신대우’는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1993년 당시 국보가 된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은 이형이라는 인물이 공신대우(원종공신)를 받았다는 증서와 그 증서를 넣은 상자(함)을 일컫는다. 증서와 함을 묶어 국보로 지정했다.

하지만 27년이 지난 2010년 6월 10일 이 국보 278호가 보물(1657호)로 격하된다. 따라서 ‘국보 278호’도 영구결번되었다. 왜냐면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이 국보로 지정된지 13년 만인 2006년 4월 이른바 ‘정공신녹권’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롭게 보물 제1469호로 지정된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이다

여말선초의 장군인 마천목(1358~1431)은 제2차 왕자의 난 직후인 1401년(태종 1년) 좌명공신(3등)의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진짜공신(정공신)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마천목 공신녹권은 1401년 태종이 47명에게 발급한 공신녹권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본이다. 반면 이형의 원종공신녹권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411년 ‘공신대우’로서 받은 것이다.

여기서 어색해졌다. ‘정공신’인 마천목이 받은 녹권은 ‘보물’이고, ‘공신대우’, 즉 원종공신이 그것도 10년이나 뒤에 받은 녹권이 국보라면 어쩐지 이상하지 않은가. 결국 문화재위원회는 2010년 6월10일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를 열어 17년간 국보의 지위에 있던 ‘이형 원종공신녹함’을 보물(제1657호)로 격하시켰다. 이로써 국보 278호 또한 영구결번으로 남게 됐다.(3)

 

 

 

가치 뛰어난 서원·향교·서당 20건, 한꺼번에 보물 됐다

임동근2020. 12. 29. 09:32
서원 3건·향교 14건·서당 3건..서당 보물 지정은 처음
강릉향교 전경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과거에 교육을 담당했던 서원·향교·서당 건축물 20건이 한꺼번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서원 3건, 향교 14건, 서당 3건 등의 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지역별로는 강원 2건, 경기 3건, 경상 11건, 충청 1건, 전라 3건이다.

이에 따라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서원은 10건, 향교는 22건이 됐다. 서당에 대한 보물 지정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원향교 대성전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향교 문화재는 강릉향교 명륜당, 강릉향교 동무(동쪽 행각)·서무(서쪽 행각)·전랑(복도), 수원향교 대성전, 안성향교 대성전, 안성향교 풍화루, 산청 단성향교 명륜당, 밀양향교 대성전, 밀양향교 명륜당, 상주향교 대성전·동무·서무, 경주향교 명륜당, 경주향교 동무·서무·신삼문, 담양 창평향교 대성전, 창평향교 명륜당, 순천향교 대성전이다.

구미 금오서원 정학당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또 서원 문화재는 구미 금오서원 정학당, 금오서원 상현묘,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이며, 서당 문화재는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도산서원 농운정사, 옥천 이지당이다.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문화재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사림(士林)이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지방에 설립한 사립 교육기관으로, 선현에 대한 제사와 학문 연구, 후학 교육을 담당했다.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각 지방에 설립된 관립 교육기관으로,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인재를 양성했다.

서당(書堂)은 조선시대 지방의 사림과 백성이 중심이 되어 마을 단위로 설립한 사립학교다. 향교나 서원에 들어가기 전에 익혀야 할 기본자세와 기초적인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은 절제되고 간결하며 소박한 유교문화를 건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역사적 인물이 건축에 관여하거나 역사적인 인물을 모셔 기리고, 고치거나 수리한 기록이 잘 남아 있는 등 역사·예술·학술·건축적으로 가치가 뛰어난 건축물들이다"라고 설명했다.(4)

dklim@yna.co.kr

 

 

 

3m 대형 불상 복장 열어보니.."조선왕실과 불교의 긴밀한 관계 나와"

김은비2021. 6. 28. 06:01
 
국보 승격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
뱃속에서 복장유물 나와 눈길
"조선후기 왕실 시주 기록 이례적"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3m가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에 국내에 현존하는 불교조각 중 유일한 삼신불(비로자나불상·석가모니불·노사나불상) 구성인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 최근 국보로 지정돼 눈길을 끈다. 삼신불은 불교의 세계관인 화엄사상에 근원을 둔 도상으로, 불화나 사경 등에는 종종 보이지만 조각품으로는 화엄사 불상이 유일하다. 삼신불좌상은 2008년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었다(보물 제1548호).

국보로 지정된 구례 화엄사 노사나불좌상(사진=문화재청)
 
이번에 삼신불좌상이 국보로 승격될 수 있었던 건 불상의 불교조각사적 가치에 더불어 불상의 뱃속에서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던 복장유물이 나오면서다. 조선시대 불상 전문가인 유근자 동국대 미술학부 초빙교수는 “새롭게 발견된 복장유물은 조선 후기 왕실과 불교계의 긴밀한 관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며 “조선 후기에 이 같은 자료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복장유물은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안에 넣는 불경·서책·보화 등이다. 영산문화재연구소는 3년 전 화엄사 불상을 대대적으로 연구하며 X레이 촬영을 진행했다. 화엄사 불상 속 복장유물은 대다수 도난을 당해 남은 것이 많지 않았다. 삼신불좌상도 본존상인 비로자나불상과 석가모니불 속은 이미 모두 도난당해 텅 비어 있었다. 노사나불상도 등쪽의 구멍을 통해 대부분이 사라졌는데, 뱃속에 일부 복장유물이 남아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불경서책·발원문 등 책 100여권 정도가 나왔다.

 

불좌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시주질’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제목 그대로 불상을 만들기 위해 시주를 했는지를 적은 것으로 불상을 만들었던 연도부터 어떤 스님이 화엄사에 있었고, 어디에 불상을 봉안했는지 등을 기록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시주질 앞부분에 의창군 이광과 신익성이 불상 조성하는 데 큰 시주자로 참여했다고 적힌 대목이다. 의창군 이광은 선조의 여덟째 아들로 서예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며 아버지 선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신익성은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혼인한 왕실의 부마다. 유 교수는 “조선시대 유달리 불교에 애정을 쏟았던 세조 이외에 숭유억불정책의 조선에서 왕실 사람의 이름이 시주자로 등장한 건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이처럼 화엄사 시주질에 왕실의 참여가 직접적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건 당시의 시대상과도 연결돼 있다. 조선은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왕이나 왕비, 세자가 전면에 나서서 사찰에 불상을 만든다거나 시주자로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17세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승려들은 자발적으로 승군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당시 많은 승려가 전쟁에서 죽고, 사찰이 불타면서 불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유 교수는 “시주질은 화엄사가 삼신불상이 조성된 1634년 왕실인물을 비롯한 유학자들도 시주에 참여한 것은 두 차례 전쟁을 겪으며 이전에는 불교를 배척하고 탄압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구체적인 방증”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왕실의 후원과 당대를 대표하는 조각승 청헌·응원·인균과 제자들이 기량을 발휘하면서 삼신불좌상은 예술적으로도 완성도 있는 모습을 갖추게 됐다. 화려한 연꽃 대좌에 앉아 있는 삼신불좌상은 굵은 선이 중후하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표현의 조형미를 자랑한다. 박수희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연구관은 “역사적 의미에 더해 예술·조형적 수준도 단연 돋보여 조선후기 대표 불상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말했다.(5)

김은비 (demeter@edaily.co.kr)

 

 

“은해사 괘불탱, 얇고 투명한 특수 비단 위에 그렸다”

 
 
입력 2020.03.26 12:10 수정 2020.03.26 16:49 
고급 직물인 특수 비단 '초'를 바탕재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보물 제1270호 은해사 괘불탱. 문화재청 제공

경북 영천 은해사의 괘불탱이 얇고 투명한 특수 비단 위에 그려진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2015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10년 기한의 ‘대형 불화 정밀 조사’ 작업 중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지난해 조사 대상이 된 대형 불화는 △청곡사 영산회 괘불탱(국보 제302호) △법주사 괘불탱(보물 제1259호) △개심사 영산회 괘불탱(보물 제1264호) △은해사 괘불탱(보물 제1270호) △예천 용문사 영산회 괘불탱(보물 제1445호) △안동 봉정사 영산회 괘불도(보물 제1642호) △김천 계림사 괘불도(비지정) 등 7건이다.

괘불도ㆍ괘불탱은 영산재(靈山齋)와 수륙재(水陸齋) 등 야외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불교 의식에 쓰려고 만든 대형 불화를 이르는 말이다.

조사 결과, 18세기 괘불탱 중 유일하게 은해사 괘불탱의 바탕재로 특수 비단인 ‘초(綃)’가 쓰였다는 사실이 파악됐다. 초는 누에고치에서 뽑힌 가늘고 굵기가 비교적 일정한 비단 직물인데 얇고 투명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시대 임금 초상화인 어진(御眞)에 사용될 정도로 고급 직물이다.

반면 19세기에 제작된 계림사 괘불도의 경우 바탕재가 종이인 것으로 나타났다. 박수희 문화재청 연구관은 “후기로 갈수록 괘불도가 양산되면서 재료의 질도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며 “비단 바탕재가 기본이었지만 초 같은 고급재가 쓰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마(麻)나 모시 같은 일반 옷감, 훼손되기 쉬운 종이가 바탕이 되는 경우도 더러 생겨났다”고 말했다.

화면 장식에 은박이 사용된 보물 제1445호 용문사 영산회 괘불탱. 문화재청 제공

 

용문사 괘불탱의 은박도 특이하다. 괘불도에 금박이 사용된 사례는 많지만, 은박은 북장사 영산회 괘불탱(보물 제1278호)이 지금껏 유일했다. 용문사 괘불도에서 은박이 사용된 곳은 석가모니불 주변에 배치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장신구 부분이다. 은박 좌우로 금박도 보인다. 대비 효과를 기대했을 거라는 설명이다.

이 밖에 법주사 괘불탱에 남아 있는 유소(流蘇ㆍ여러 실로 매듭짓고 꼬아서 다는 장식)로 괘불도에 장엄물을 걸었던 흔적이 확인한 것도 이번 조사의 성과라는 게 문화재청 측 평가다.

문화재청은 “자외선ㆍ가시광선 반사 분광 분석을 이용한 염색 재료 분석 및 보존 환경 개선 목적의 미생물 조사 등 새로운 분석 기법을 썼고, 이 내용이 고스란히 보고서에 담겼다”고 했다.(6)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1883년에 그린 현존 최고 추정 단군 초상화 공개

2019. 9. 23. 12:02
단군문화포럼, 26일 천도교 수운회관서 개막하는 전시회서 선보여
1883년 단군 초상화 [단군학자료원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후기인 1883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군 초상화가 일반에 공개된다.

단군 초상화는 20세기 이후에 제작한 그림만 존재한다고 알려져 이 그림이 현존 최고(最古) 작품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인 임채우 단군학자료원장은 23일 단군문화포럼 주최 '독립운동의 상징, 단군 영정 전시회'에서 1883년 10월 봉안한 단군 영정을 선보인다고 밝혔다. 전시회는 오는 26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종로구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열린다.

 

임 교수가 발굴한 단군 영정은 크기가 대략 가로 51㎝, 세로 80㎝이다. 초상화는 천에 그렸으며, 뒤쪽에 초상화 초본과 선관(仙官) 스케치 등 그림 3장을 배접했다.

오른쪽 하단에 그림에 관한 정보인 화기(畵記)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임 교수는 화기를 '광서구년 계미 10월 봉안단군화상/ 시주질/ 시주 을해생 김전 을축생 이두성/ 편수 을묘생 김관오'(光緖九年 癸未 十月 奉安檀君畵象/ 施主帙/ 施主 乙亥生 金奠 乙丑生 李斗聖/ 片手 乙卯生 金觀伍)로 해독했다. 광서는 청나라 광서제 연호로 보이며, 그렇다면 광서 9년은 1883년이라고 그는 전했다.

임 교수는 "편수는 불교에서 보조화사로, 김관오가 태어났다는 을묘년은 1855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다만 김관오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찾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화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희미한 글씨가 있어 중복해 화기를 조성했을 수도 있다"며 "광서본 안료가 일제강점기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으나, 후대에 덧칠했을 확률이 높고 양식상 위작이라고 볼 근거는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엇보다 단군 초상화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단군 화상(충남 문화재자료 제369호)과 비교하면 광서본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부여에 있는 초상화는 가로 53.3㎝, 세로 33.6㎝다.

임 교수는 광서본 초상화에서 확인되는 화풍도 다른 단군 영정과는 구분된다고 밝혔다.

그는 광서본 초상화 특징으로 색동치마, 씩씩하고 우람해 보이는 인상, 밑그림과 후광(後光)을 꼽고 "상의에는 꽃무늬가 있고, 하의는 색색으로 칠했다"며 "색동치마는 고구려 수산리 벽화에 나오는 의상과 형태가 비슷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광서본 초상화를 직접 살핀 이태호 명지대 초빙교수는 "단군을 위한 독립 공간보다는 여러 무속 신들이 함께한 민간 사당에 봉안한 것으로 짐작된다"며 "조선시대 불화와 제작방식이 유사하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얼굴에 대해서도 "좌우 끝부분을 살짝 올려 날카롭게 그린 눈썹은 불화에서 흔히 발견되며, 담홍색 선묘로 부드럽게 표현한 눈과 코는 조선 후기 초상화 기법"이라며 "신라 솔거가 그렸다는 단군 초상화에 근접한 작품이 발굴되고, 김관오라는 화가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출현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전시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단군 초상화와 조각상, '광무 9년'(1905)이라는 명문이 있는 천부경(天符經) 각석, 대종교 독립운동가 나철 편지 등이 나온다. 오는 28일과 다음 달 4일에는 학술대회도 연다.(7)

psh59@yna.co.kr

 

 

 

큰 불에도 살아남았는데... 덕수궁의 잃어버린 문

박배민2024. 5. 19. 10:42
[대한민국 문화유산 탐방기] 조원문부터 일월오봉병까지

서울 한복판, 많은 이에게 가깝고도 아직은 낯선 덕수궁이 있습니다. 직접 그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덕수궁을 두 발로 느끼며 발견한 이야기들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덕수궁의 숨겨진 면면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가며, 이 고궁이 지닌 매력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기자말>

[박배민 기자]

- 이 기사는 1편 "대한문이 걸어갔나"... 덕수궁 곳곳 숨겨진 뒷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덕수궁 중화전
ⓒ 박배민
 
📌 사적 '덕수궁(德壽宮)'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시대: 조선, 대한제국
탐방일: 2024년 4월 2일

덕수궁 연혁
1592년 이전: 월산대군 사저
1593년: 정릉동 행궁으로 사용
1611년: 경운궁으로 개칭
1897년: 대한제국 황궁으로 사용 시작
1904년: 대화재 발생 (중화전 등 대부분 전각 소실)
1906년: 대대적 중건
1907년: 고종의 황위 이양 후, 덕수궁으로 개칭
1910년: 석조전 완공

3문 체제의 완성, 조원문
지금이야 금천교 앞에서 저 멀리 내다보면 중화문과 그 행각을 수풀 사이로 언뜻 언뜻 볼 수 있지만, 120여 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는 대한문과 중화문 사이에 위치한 조원문이 있어, 지금처럼 뻥 뚫린 모습이 아니었다. 조선의 궁궐은 3문 형식을 표준으로 삼았는데, 조원문은 중화문과 대한문 사이에 놓여 덕수궁의 3문 체제를 완성시키는 문이었다.
 
  중화문, 중화문 - 조원문 - 대한문으로 이어지는 3문 체제를 확인할 수 있다.
ⓒ 박배민
 
문화재청에서 2005년 발간한 <대한문수리보고서(2005)>에서는 <중화전영건도감의궤>를 근거로 조원문이 1902년 9월에 공사를 시작해, 같은 해 11월에 완공하고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1902년이면 중화전(불타기 전 2층 지붕 중화전)과 중화문이 세워질 때다. 이때 조원문도 함께 세운 것인데, 조원문의 방향을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다.
 
  중화문 앞에서 대한문을 바라 본 모습. 이 길 중간에 조원문이 서있었을 것이다.
ⓒ 박배민
 
조원문은 중화전이 바라보는 방향(남쪽)이 아닌, 대한문(당시 대안문)과 같은 방향(동쪽)을 바라 보고 있다. 이것은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인화문이 아닌, 대한문을 정문으로 사용하려는 일종의 의지 표시였다.
 
  조원문과 대한문 모두 동쪽을 향해 서있었다.
ⓒ 박배민
 
조원문은 1904년 대화재의 위협에서도 살아 남았지만, 일제에 의해 덕수궁이 공원처럼 바뀌며 함께 훼철되었다. 언제 어떻게 철거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1913년 이왕직사무실이 만들어지는 그 즈음에 없어지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1904년 덕수궁(경운궁) 화재 현장을 일본인 사진가 무라카미 고지로가 찍은 사진. 오른쪽에 조원문이 보인다. 위치상 대한문과 헷갈릴 수 있지만, 조원문은 팔작지붕을 얹은 덕분에 대한문과 명확히 구분이 된다.
ⓒ 코넬대학교 소장
 
문화재청은 2022년부터 2029년까지 진행될 덕수궁 2단계 복원 사업을 통해 조원문을 재건할 계획이다. 조선 궁궐의 전통적인 3문 체제가 완성된 덕수궁의 새로운 경관을 기대하며 중화문을 향해 나아간다.

 

중화전으로

조원문이 있던 자리를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행각이 없이 홀로 서 있는 중화문을 만날 수 있다. 처음부터 중화문만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덕수궁 전체가 크게 훼손되면서 중화전을 중심으로 중화문까지 이어지던 행각이 모두 파괴되었다. 현재 중화문 동쪽에 남아 있는 작은 행각만이, 과거 행각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유일한 흔적이다.
 
  중화문 사이로 보이는 중화전. 많은 관람객이 중화문에 걸터 앉아 중화전을 감상한다.
ⓒ 박배민
 
중화문 너머로 중화전이 보인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중심 건물이다. 물리적으로도 덕수궁 권역 중심에 위치해 있고, 위계상으로도 덕수궁에서 으뜸 건물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중화전은 단층 건물이다. 엄연히 임금(황제)이 머물렀던 중화전인데 위계에 맞지 않게 단층이 아쉬워 보일 수 있다. 여기에는 숨은 사정이 있다.

1902년 처음 지어진 중화전은 본디 2층 외관의 장엄한 건물이었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처럼 말이다. 하지만 축조 2년 만에 화재로 중층 중화전이 소실되고, 1906년에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단층 중화전으로 다시 지어진다. 

지금보다 훨씬 웅장했을 중층 중화전의 모습을 엽서로나마 눈에 담아 보자.
 
  중층 모습의 중화전. 왼쪽 뒤 하얀 석조 건물은 구성헌이다. 구성헌은 석조전을 완공하며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화전과 중화문을 둘러 싸고 있는 행각도 확인할 수 있다. 1902년~4년 사이 제작 추정.
ⓒ 국립고궁박물관
 
10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화문을 넘어 중화전으로 다가가보자.

 

법궁의 상징, 향로

중화전 양쪽 월대(중화전을 받치고 있는 넓은 돌 기단) 귀퉁이에 청동 향로가 한 개씩 배치되어 있다. 요즘은 일상적으로 향을 피우지만, 과거에는 제례나 국가 의례에서 신과 교감하고 예를 표하기 위해 향을 피웠다(이경희, 이주영, 권영숙 2005).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발견된 향로 뚜껑(왼쪽). 뚜껑을 향로에 올려 놓은 모습(오른쪽)
ⓒ 문화재청
 
향로의 상징성 때문에 크고 고정된 형태의 향로는 법궁에만 설치할 수 있었다. 때문에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 대한제국의 법궁 덕수궁에서만 향로를 만날 수 있다. 반면, 별궁이었던 창덕궁과 경희궁 그리고 창경궁에서는 고정식 대형 향로를 찾을 수 없다.
 
  덕수궁 월대 위에 있는 정형향로. 뚜껑으로 덮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정확한 촬영일은 알 수 없으나, 문화재청은 1897년으로 추정한다.
ⓒ 국립중앙박물관(건판 28491)
 
이 향로 한 쌍은 원래 뚜껑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대 이후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뚜껑이 사라졌고, 100년이 지난 2010년에 이르러서야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문화재청은 뚜껑을 복제해 향로에 다시 올려놓겠다고 밝혔지만, 필자가 방문한 날에는 아쉽게도 뚜껑이 덮혀 있지 않았다.

 

황제의 답도

중화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돌계단을 거쳐야 한다. 이 계단 사이에는 임금이 가마를 타고 오르던 '답도'가 설치되어 있다. 답도에는 군주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짐승이 새겨지는데, 경복궁과 창덕궁 모두 봉황이 새겨져 있다. 중국의 거대 왕조로 인해 조선이 제후국의 위상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제를 상징하는 용을 적극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답도에도 용이 새겨졌다.
 
  답도에 새겨진 용 두 마리
ⓒ 박배민
 
천장을 뒤덮은 용
답도를 지나 중화전 안을 살펴보자. 우선 고개를 들어 천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화려한 단청 사이로 노오란 용 장식이 도드라진다. 두 마리 황룡이 경복궁 근정전 천장의 황룡과 닮은 듯하다. 실내디자인 박사 정유나는 두 쌍의 황룡이 동일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정유나, 2004).
 
  중화전 천장 중앙에 새겨진 황룡 두 마리
ⓒ 박배민
외형적으로는 유사해 보이지만, 소소한 차이도 있다. 근정전의 용은 발톱이 7개인 칠조룡이고, 중화전의 용은 발톱이 5개인 오조룡이다. 창덕궁 인정전과 창경궁 명정전에는 황룡이 아닌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천장(우물반자) 격자 무늬에서도, 사각판(청판)마다 쌍룡이 그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의 병풍, 일월오봉병

시선을 천장에서 조금 내려보자. 전돌이 깔린 바닥 위로 임금(황제)의 자리(용상)가 보인다. 임금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병도 보인다.
 
  어좌 뒤로 하얀색 달, 빨간 색 해, 봉우리 5개가 그려진 일월오봉병이 보인다.
ⓒ 국가문화유산포털
 
중화전 영건도감의궤과 경운궁 중건도감의궤에 따르면 당시 오봉병의 높이는 12척 6촌(384㎝)이고, 넓이는 11척2촌 (342㎝)이다. 현대에 실측한 일월오봉병의 크기(385cm * 363cm)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덕수궁 전시 학예연구사 전나나는 이를 근거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오봉병은 1906년 중화전 중건 당시 설치된 일월오봉병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전나나 2020).

 

녹색보다 위, 황색

덕수궁의 문살은 황색으로 칠해져 있다. 동양에서 황색은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이후, 중화전 창살과 문살을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으로 제작했다. 마찬가지로 순종 황제가 머물렀던 창덕궁 인정전의 문살도 황색이다. 반면, 황제가 아닌 임금의 지위에서 사용되었던 경복궁 근정전의 창살은 녹색으로 칠해져 있다.
 
  덕수궁 중화전의 황색 문살, 창살
ⓒ 박배민
 
중화전을 돌아 봤으니, 목조 건물 사이에서 이질감을 뽐내고 있는 석조전으로 넘어 가보자.

-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전나나, 덕수궁 중화전 당가 구조와 오봉병의 원형에 대한 고찰, 2020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 편 2>, 2017 문화재청, 「덕수궁 조경 정비 기본 계획」, 2016 문화재청, 「대한문수리보고서」, 2005 이경희 •이주영•권영숙, 「우리나라 전통 향의 용도와 성격적 특성」, 2005 정유나, 덕수궁의 천장 조형에 관한 연구, 2004 * 이 글은 외부 채널(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발행됩니다.(8)

 

 

<우리 마을 문화재>1897년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 위해 옛 남별궁터에 조성

이경택 기자2018. 2. 21. 11:20

중구 소공로 환구단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원丘壇)에 나아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했다. 이때 조선의 국호를 ‘대한’으로 고쳐 대한제국의 탄생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다음 날 고종황제는 외국 공사들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초청해 대한제국 선포를 알렸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뒤편과 서울시청광장 왼쪽에 위치한 환구단(서울 중구 소공로 106)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됐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열렸고 설치와 폐지를 되풀이하다가 조선 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됐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해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됐다. 그러나 세조 10년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됐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다.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터에 3층의 원형 제단 형태로 조성했다. 당시 최고 도편수였던 심의석이 설계, 10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돼 10일 만에 완공했다. 풍수가들은 조선의 옛 남별궁(南別宮) 터에 조성한 환구단에 대해 하늘의 천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곳이고, 하늘상제와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는 지기가 솟구쳐 오르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환구단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 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돼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조선호텔이 세워졌다. 자주국으로의 열망이 담긴 국가의 성역을 허물고 서양식 호텔이 들어선 것이다. 웨스틴조선호텔 뒷마당에 서 있는 황궁우와 석고단은 철거된 환구단의 일부다.

현재 볼 수 있는 황궁우 3층 건물은 신위판을 모시던 곳이다. 황궁우의 경우 보수공사가 2015년경 시작돼 약 2년 만에 완료됐다. 과거에는 1층 단에는 올라갈 수 있게 했지만 지금은 1층 단도 출입이 금지되고 건물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 가능하다. 황궁우는 겉에서 보면 3층이지만 내부는 통 건물로 천장에는 황금색 용무늬 등 황제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돌북 형태의 석고는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해 1903년 세워졌다. 석고는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용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정교하게 조각돼 눈길을 끈다.(9)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단독] 조선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 인장' 찾았다

장혁진2018. 5. 3. 17:33
미국 경매 사이트 ‘크리스티’에 올라온 덕온공주 인장

 

[연관 기사] [뉴스9/단독] ‘조선 마지막 공주’ 인장 되찾기 비밀작전…고국 품으로

미국 경매에 나온 덕온공주 인장

지난달 18일,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 눈길을 끄는 유물 하나가 출품됐습니다. 조선 시대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1822년~1844년)의 인장이었죠. 공주 인장의 화려한 실물이 공개되자 경매장에선 해외 수집가들의 치열한 응찰이 시작됐습니다. 경매 시작가는 약 2만 달러였지만 금방 10배 가까이 가격이 뛰어올랐는데요. 최종 낙찰 가격은 23만 7천5백 달러. 낙찰을 알리는 경쾌한 망치 소리가 경매장에 울려 퍼지자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덕온공주 인장


■ 문화재청 관계자에 낙찰…조선 마지막 공주 인장 환수

KBS 취재 결과 덕온공주 인장의 낙찰자는 우리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였습니다. 재단 측은 지난 2월 덕온공주 인장이 경매에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어 고미술 전문가와 함께 미국에 가서 직접 실물 검증을 진행해 우리 문화재임을 확인했죠. 다만 공주의 인장은 혼례를 치르고 궁궐을 나가면서 사가(私家)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기 때문에 왕실 소유, 즉 국가의 소유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정부가 경매업체 측에 거래를 금지해달라고 요청할 근거가 부족했는데요. 결국 문화재청은 경매에서 낙찰을 받는 방식으로 인장을 환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던 중 덕온공주 인장이 미국 경매 사이트에 올라왔다는 일부 언론 보도가 나왔는데요. 비밀리에 작업(?)을 진행하던 문화재청 측에선 조금 난감했다고 합니다. 인장을 입수하기 전에 환수 절차가 진행 중이라고 우리 정부가 공식 확인하면 해외 수집가들의 관심을 이끌어 경매가가 치솟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숙휘공주 인장(좌)와 정명공주 인장(우). 덕온공주 인장과 정교함에서 큰 차이가 느껴집니다. / 출처 : 고려대 박물관


■ 정교한 공예 기법…"공주 신분 보증하는 핵심 물건"

다행스럽게도, 경매장에서 크게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해외에서 정처 없이 떠돌던 덕온공주 인장이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죠. 인장은 구리 재질로 가로 8.9㎝, 세로 8.9㎝, 높이 8.6㎝ 크기입니다. 손잡이 역할을 하는 동물은 해태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사자입니다. 왕과 왕후의 어보(御寶)에 쓰이는 동물은 거북이, 후궁과 공주의 인장에 쓰이는 동물은 사자라고 하네요. 덕온공주 인장은 공예 기법이 매우 정교하고 보존 상태가 양호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미 고려대 박물관에 숙휘공주와 정명공주의 인장이 있지만, 국가가 소유한 공주 인장은 덕온공주 인장이 유일합니다. 최응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는 "덕온공주는 입었던 당의(唐衣)가 국가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면서 "인장은 공주의 왕실 신분을 보증하는 핵심 물품이기 때문에 이번 문화재 환수는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덕온공주가 입었던 당의. 국가민속문화재 제1호. / 출처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 인장 반출 경위는 불투명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유물을 왜 미국인이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일단 반출 경위는 오리무중입니다.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무단으로 가져갔을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문화재청은 덕온공주의 인장을 도난 문화재로 따로 분류하고 있진 않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은 "덕온공주의 후손들이 한국전쟁 때 공주의 소지품을 일부 분실했다고 하는 만큼, 인장도 그 시기에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는데요. 거의 반세기 전에 미국에서 이미 거래가 됐던 점을 감안하면 정확한 반출 경위를 밝히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덕온공주의 혼수품을 작성한 ‘혼수발기’ / 출처 : 국립한글박물관


■ 요절한 비운의 공주…이달 내 인장 들여올 듯

덕온공주는 조선 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의 셋째 딸입니다. 2016년 방영된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배우 박보검이 연기한 효명세자의 실제 여동생이기도 하죠. 궁궐의 막내라 어머니 순원왕후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고 하는데요. 1837년 혼례를 치렀는데 당시 왕실에서 혼수품 목록을 적은 종이의 길이만 5m가 넘을 정도였습니다. 순원왕후는 시집 보낸 막내딸 덕온공주를 늘 걱정하며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한글 편지만 수십 점에 달할 정도인데요. 몸이 약했던 덕온공주는 안타깝게도 22살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덕온공주의 인장은 남은 반입 절차를 거쳐 이번 달 안에 국내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합니다. 전시 장소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건 서울 종로구 경복궁 바로 옆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인데요. 조선 마지막 공주의 인장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될 날을 기대해 봅니다.(10)

장혁진기자 (analogue@kbs.co.kr)

 

 

<주>

 

 

 

(1) https://v.daum.net/v/20201117090011928

 

 

(2) https://v.daum.net/v/20211230100110670

 

 

(3)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291128001

 

 

(4) 가치 뛰어난 서원·향교·서당 20건, 한꺼번에 보물 됐다 (daum.net)  2020. 12. 29. 

 

 

(5) 3m 대형 불상 복장 열어보니.."조선왕실과 불교의 긴밀한 관계 나와" (daum.net)  2021. 6. 28. 

  

 

(6) “은해사 괘불탱, 얇고 투명한 특수 비단 위에 그렸다” (hankookilbo.com) 2020.03.26  

 

<참고자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44년째 '이중국적' 국보 백자, 조선이냐 원나라냐 - 경향신문 (khan.co.kr) 2018.12.28

 

 

 

'국적 논란'으로 46년만에 심판대 오른 국보 도자기 (daum.net)  2020.01.05. 

문화재위원회, 백자 동화매국문 병 지정 해제 검토
"지정 당시엔 조선 유물, 지금은 14세기 원나라 견해 우세"

 

 

실학박물관 소장 유물 ‘혼개통헌의’ 국가보물 지정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2019-06-26

 

 

 

해묵은 건물 사이, 켜켜이 쌓인 열강의 흔적…오래된 골목 사이, 틈틈이 쌓인 동심 | 서울신문 (seoul.co.kr)  :2018-12-13 

 
 
 

 

 

 

 

리움 병풍그림 들여다보니..다산이 유배시절 쓴 미공개 詩 발견 (daum.net)  2017.03.19.

 

 

 

바티칸이 처음 초대했다.. 한복 입은 성모자像, 정약용의 십자가 (daum.net)  2017.08.09.  

 

 

 

소재 불분명했던 1점 낙찰..4점 모두 국내에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1950∼1960년대 외국에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후기 불화 한 점이 경매를 통해 돌아왔다.

대한불교조계종은 미국 경매에서 낙찰받은 '봉은사 시왕도(十王圖)' 한 점을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공개했다.

봉은사 시왕도 한 점이 귀환하면서 이 작품은 네 점 일체가 모두 국내에 존재하게 됐다. 나머지 세 점 중 두 점은 동국대 박물관, 한 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시왕도도 1990년대 미국 경매에서 구매한 유물로 알려졌다. 시왕도는 저승 세계를 관장하는 10대 왕의 재판 광경과 지옥에서 고통받는 망자를 묘사한 그림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은 공개식에서 "이산가족처럼 흩어졌던 봉은사 시왕도가 제자리를 찾았다"며 "문화재를 본래 자리에 돌려놓는 환지본처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낀다"고 말했다.

 

봉은사 시왕도 환수 과정은 지난달 13일 조계종이 공개한 '청도 운문사 칠성도(七星圖)'와 비슷하게 외국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조사·환수하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조계종, 봉은사 협업으로 진행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4월 중순 봉은사 시왕도가 미국 경매에 출품된 사실을 파악해 조계종에 알렸다. 이 그림은 운문사 칠성도와 달리 정보를 담은 화기(畵記)와 장황이 사라진 상태였다.

조계종은 불화 구도와 양식을 검토해 동국대 박물관에 있는 봉은사 시왕도와 일체를 이루는 유물임을 확인했고, 환수 추진단을 구성해 지난달 24일 경매에서 사들였다.

봉은사는 시왕도가 돌아왔음을 알리는 고불식(告佛式)을 연 뒤 법왕루에서 그림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후 다른 시왕도와 함께 봉안하는 방안을 추진할 방침이다.

(서울=연합뉴스) 대한불교조계종이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공개한 미국 경매에서 낙찰받은 '봉은사 시왕도(十王圖)'. [대한불교조계종 제공=연합뉴스] photo@yna.co.kr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한 봉은사 시왕도 화기에 따르면 이 불화는 건륭 42년(1777) 경기도 일대에서 활동한 승려화가 인종, 수밀, 영인, 도준, 상훈 등이 '삼장보살도', '사자도'와 함께 봉은사에서 제작했다.

그림 크기는 가로 148.3㎝·세로 114.8㎝이며, 시왕 중 한 명을 한 폭에 그리는 일반적 시왕도와 달리 한 폭에 두 명(제2대왕, 제4대왕)을 담았다.

조계종 관계자는 "봉은사 시왕도는 한 폭에 대왕 2∼3명이 심판하는 모습을 묘사했다"며 "이렇게 독창적인 구도는 봉은사 시왕도 외에는 1862년 조성된 화엄사 시왕도에서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초강대왕과 오관대왕 아래에 망자의 행적을 정리한 명부를 든 판관이 있고, 자연스럽게 표현한 구름 하단에 지옥을 그렸다"며 "봉은사에서 조성한 시왕도 4점을 국내에 온전하게 갖추게 됐다는 점에서 이번 환수는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미국 경매 나왔던 조선불화 '청도 운문사 칠성도' 귀환(종합) | 연합뉴스 (yna.co.kr) 2018-04-13 

 

150년전 승려화가가 그린 작품…"1950∼1960년대 유출 추정" 
 
 

이번에 돌아온 청도 운문사 칠성도에는 그림에 관한 정보가 담긴 화기(畵記)가 남아 있다. 화기에는 불화가 운문사에 봉안됐고, 작자는 19세기 후반 경상도에서 활동한 승려화가 위상(偉相)과 봉전(奉典)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림의 크기는 가로 74.3㎝, 세로 129.5㎝이며, 150년 전인 1868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계종 관계자는 "상하 2단 구도로 나눠 위쪽에는 병풍을 배경으로 가부좌한 칠성여래를 배치하고, 하단에는 연꽃대 양옆에 권속을 묘사했다"며 "안정된 구도와 가볍고 화사한 색감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어 "불화 위쪽의 주홍색 그림 무늬가 1868년 제작된 운문사 관음전 관음보살도의 무늬와 일치해 당시 불화를 중수할 때 같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청도 운문사 칠성도. [대한불교조계종 제공]

칠성도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하늘의 별들을 형상화한 칠성신을 그린 불화로, 18세기 이후에 특히 유행했으며 보통 칠성각에 봉안됐다.

청도 운문사 칠성도는 모두 9폭에 나누어 그려졌고, 이번에 공개된 불화가 그중 한 점이다. 나머지 그림들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조계종 관계자는 "운문사 칠성도 한 점이 나온 만큼 다른 그림의 소재도 확인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계종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그동안 협업을 통해 외국에 빠져나갔던 문화재를 환수해 왔다.

2015년 순천 선암사 '동악당재인대선사진영'을 시작으로 남양주 석천암 '지장시왕도', 고성 옥천사 '나한상' 등이 두 기관의 노력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원광대 '대곡사명 감로왕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 (daum.net) 2018. 7. 17. 

원광대학교는 최근 본교 박물관 소장품 '대곡사명 감로왕도'(사진)가 올해 초 지정예고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90호로 지정됐다고 17일 밝혔다.

 

대곡사명 감로왕도는 1764년 불화승(佛畵僧) 치상(雉翔)을 비롯해 모두 13명 화승이 참여해 그린 그림이다. 화기(畵記)가 일부 손상됐으나, '대곡사(大谷寺)'라는 문구를 통해 경상북도 의성 대곡사에 봉안(奉安)됐던 불화로 추정된다.

그림 구성은 상단에 칠여래를 비롯한 불·보살, 중·하단에는 의식장면과 아귀 및 영혼의 생활 장면 등 짜임새 있는 구도 속에 그려졌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조가 조화를 이뤄 종교화로서 숭고하고 장엄한 화격(畵格)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한, 화면 속 경물과 전각, 인물 세세한 모습을 정교한 필치로 그려 동시기 감로왕도 중 고가치 작품으로 평가됐다.

특히 이 보물은 제작 시기가 분명하고, 봉안사찰, 시주자명, 제작주체 등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18세기 불화 연구 기준작으로 인정받는다.

이 그림은 지난 1978년 원광대 박물관에서 구입했다. 지난 2000년 11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6호로 지정, 이어 지난 2014년 11월 보물지정신청을 했다. 결국 올해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에서 보물로 최종 결정됐다.

한편,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은 원광대 박물관은 대학박물관 소장 불화유물 가운데 유일하게 대곡사명 감로왕도가 보물로 지정돼 의미를 더했다. 일반인도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박물관 4층 불교미술실에 공개 전시하며 방문객은 평일(공휴일 제외)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美 오벌린대 소장 19세기 조선 '왕의 행차' 병풍, 온라인 공개 (daum.net) 2020.09.15. 

국립중앙박물관, 외국박물관 한국실 지원 사업..2년간 보존처리

 


132년 전 프랑스 대통령이 고종에게 보낸 선물 처음 세상에 나왔다 (daum.net)
 2020.07.28. 

1888년 조선 프랑스 수교기념 예물 '살라미나'병 공개

 

 

 

 

조선 마지막 공주 '한글 서첩' 돌아왔다 (daum.net)2019.01.17

 

 

 

독립기념관 '最古태극기' 원본 아니었다 (daum.net) 한국일보 | 2008.03.19 

 

 

 

‘최초 태극기’ 원형 찾았다 :: 문화일보 munhwa  2008-02-28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인이 본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2018-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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