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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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웅의 고지도이야기 90] 조선 개국의 상징 '천상열차분야지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천상행 열차 노선도?[이기환의 Hi-story](65)
한국의 국보 가운데 유독 다가가기 어려운 문화유산이 몇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천상열차분야지도’입니다.
이 문화유산이 ‘천상행 열차 노선을 그린 지도’였다면 얼마나 쉬울까요. 그렇지 않으니까 문제죠.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해 12월 27일부터 새롭게 단장한 ‘과학문화’ 상설 전시장의 문을 열었는데요.
전시장에는 조선 왕실 과학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유산 45건을 전시해 놓았네요. 이 가운데 압권은 역시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국보)과 ‘복각 천상열차분야지도’(보물), ‘천상열차분야지도 목판본’ 등 3점입니다.
여기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풀어봅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석각(돌에 새긴) 천문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품 중 국보 ‘각석(刻石)’은 1395년(태조 4)에 돌에 새긴 천문도이고, 보물 ‘복각’은 그 천문도를 숙종 연간(17세기 말)에 다시 돌에 새긴 겁니다. ‘목판본’은 1571년(선조 4) 태조 때의 ‘각석’을 새긴 목판에 120점 찍어 2품 이상 고위관리에게 하사한 종이본 가운데 1점입니다. 그럼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이름은 어떤 뜻을 품고 있을까요.
하늘의 모습을 차례로 배열한 천문도 한마디로 ‘하늘의 모습(천상·天象)’을 ‘차(次)’와 ‘분야(分野)’로 벌려놓은(열·列) 천문도(그림)인데요.
‘차’는 지구에서 볼 때 태양이 움직이는 길(황도)을 따라 관측되는 동양의 별자리를 12개 영역으로 나눈 것을 가리킵니다.
‘분야’는 하늘의 별자리 영역 12차를 그대로 지상의 12개 왕조와 대응시킨 겁니다.
지상의 해당 왕조는 중국 춘추시대 12개국인 주·초·정·송·연·오·제·위·노·조·진(晉)·진(秦)나라를 가리키는데요.
이처럼 중국의 왕조를 대응시킨 것이 조선의 현실에 맞지 않다고 해서 조선의 땅을 적용한 천문도도 남아 있답니다.
이러한 우주관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하늘과 땅이 다를 바 없다, 하늘의 섭리가 땅에서도 통하고, 땅의 원리가 하늘까지 닿는다’는 이른바 천인감응(天人感應·하늘과 사람, 땅이 연결돼 있다는 유교사상)의 관념이 투영돼 있습니다.
1467개의 별자리가 빼곡히 구체적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들춰볼까요. 모두 290개의 별자리(1467개의 별)를 크고 작은 4개의 원 안에 그려놓고 별자리 이름까지 빠짐없이 적었는데요.
가장 바깥의 원 주위에는 28수(달의 공전주기인 27.32일에 따라 북극성을 중심으로 28개 구획으로 나눈 별자리)의 이름을 차례로 기록했고요. 앞서 밝혔듯이 28개 구획의 별자리를 12차로 나눠 지상의 왕조 12개국에 대응시키고요. 바깥 원과 가장 작은 중심원 사이의 공간을 이 28수로 나눈 모든 별자리의 도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습니다.
한가운데 중심원(주극원)에는 1년 내내 관측되는 별들을 표시했습니다. 자미원·태미원·천시원이 모여 있죠.
그다음에는 2개의 원이 겹쳐 있는 형태인데요. 하나는 지구의 적도를 연장한 선입니다. 또 하나의 선은 지구에서 바라봤을 때 태양이 움직이는 길인 황도(黃道)를 나타냈습니다.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 돌기 때문에 황도와 적도는 교차해 움직이죠. 이 두 선을 중심으로 별자리를 관측하면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즉 겨울철에는 황도가 적도 아래로 내려가고, 여름에는 위로 올라오겠죠. 태양이 적도보다 가장 낮게 내려가면 지구에서 가장 추운 겨울의 동짓날이 되고요. 가장 높이 올라가면 가장 더운 하짓날이 되겠죠. 따라서 황도와 적도가 교차하는 두 곳 중 앞엣것은 춘분점, 뒤엣것은 추분점이 됩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죠. 겨울철에는 태양이 낮게, 여름에는 높게 움직이지 않습니까.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아래위에는 천문도와 관련된 다양한 설명문과 그림이 들어 있습니다. 천문도 제작 내력과 의미, 제작에 참여한 관원들의 이력, 제작연월일까지 기록돼 있고요.
미세 조정까지 거친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가 돌판에 새겨진 것은 조선 개국 직후인 1395년(태조 4)입니다.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진 설명문과 권근(1352~1409)의 <양촌집> 등에 기록된 ‘천문도설’을 중심으로 살펴볼까요.
권근은 “천문도 석각본은 옛날 평양성에 있었는데, 병란 때문에 강물에 빠졌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천문도 인쇄본을 한 권 올렸고, 이를 전하(태조·재위 1392~1398)가 보배로 귀중하게 여겨 돌에 새기게 했다”는 겁니다.
이때(1395) 제작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1247)보다 148년 늦게 제작됐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각석 천문도로 알려졌는데요. 후속 연구결과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죠. 물론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중국의 천문관을 바탕으로 제작됐습니다. 하지만 ‘중국 따라쟁이’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우선 “천문도를 새기라”는 명을 받은 서운관(천문관)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 그림은 세월이 오래돼 별의 위치가 달라졌다”면서 “다시 측정해 고쳐 새겨야 한다”고 건의한 거죠.
무슨 말일까요. 지구의 북극점은 고정불변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약 2만6000년이라는 긴 주기를 두고 조금씩 이동한답니다. 이걸 세차운동이라 하죠. 세월이 지나면서 별들의 위치가 달라지는 겁니다.
서운관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제기했습니다. 오차 조정을 위해 나선 이가 천문학자인 류방택(1320~1402)이었습니다.
류방택은 당시 북극에 맞춰 중성(28수 가운데 해가 질 때와 돋을 때 하늘의 정남 쪽에 보이는 별)을 면밀하게 계산해 오차를 조정했습니다. 천문도의 글은 권근이 지었고요. 글씨는 설경수(생몰년 미상)가 썼습니다. 모두 12명이 참여했지요.
고구려와 조선의 합작품? 류방택이 조정한 옛 별자리는 어느 시대 것이었을까요. ‘평양성의 천문도 돌판이 병란 때문에 잃었다’는 구절이 눈에 밟히죠.
‘평양성의 병란=고구려 멸망 시기’를 의미한다는 것이 통설인데요. 연구결과 천문도의 한가운데 보이는 북극성 중심의 자미원 별들은 14세기, 그 밖의 별들은 1세기 무렵의 위치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것이 류방택 등이 조정한 오차입니다.
따라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세기 무렵의 별자리를 새긴, 가장 오래된 석각(돌에 새긴) 천문도라 할 수 있습니다.
멀게는 1400년, 가깝게는 700년의 시공을 초월한 ‘고구려와 조선 천문관’의 합작품이라는 특징도 있고요.
이밖에 중국의 순우천문도와는 다른 요소가 또 있습니다. 즉 모양이 완전히 다른 별자리가 있는데요. 천주, 상서오, 외주, 팔곡, 팔괴 등의 별자리가 그렇고요. 별의 개수와 연결선, 이름이 서로 다른 별자리도 있습니다. 이중 서로의 천문도에는 보이지 않는 별자리(한국 5개·중국 3개)가 보입니다. 그중 중국 천문도에는 없는 ‘종대부’ 같은 별자리는 확연히 눈에 띕니다.
무엇보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독자성을 짐작할 수 있는 가장 뚜렷한 요소가 있습니다. 별을 새길 때 실제 밝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를 다르게 했다는 겁니다. 즉 밝은 별은 크게, 희미한 별은 작게 그렸는데요. 대표적인 예로 노인성입니다.
-0.7등급인 노인성(카노푸스)은 밤하늘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로 밝은 별입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는 이 별을 엄청 크게 그렸습니다. 분석 결과 1467개의 별을 밝기에 맞춰 일일이 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답니다.
양홍진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센터장은 “이런 표현은 한반도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고구려 벽화고분의 별자리 새김 방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중국 천문도에는 없는 표현 방식입니다.
700년 만에 찾은 천문도의 가치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자마자 천문도(‘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에 눈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대 왕조의 군주들은 다른 분야에 비해 유달리 천문학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으니까요. 민심은 곧 천심이며, 하늘의 조화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곧 백성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민심은 전 왕조인 고려를 떠나지 않았고, 왕씨(공양왕) 복위 운동까지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두문동 72현’이 상징하듯 고려의 충신들은 끝내 절의를 꺾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어떤 이가 홀연히 나타나 700여년 전 평양성에서 잃어버린 천문도 판본을 바쳤으니 ‘옳다구나’ 싶었겠죠.
유명한 고사가 있죠. 중국 하나라 시조 우임금은 9개국 제후가 바친 청동을 모아 ‘아홉 개의 솥(구정·九鼎)’을 만들었는데요.
이 청동솥은 후대 왕조에서 ‘태평성대’와 ‘왕권’의 상징이 됐죠. 성군이 나라를 세우면 그 군주에게 옮겨갔고요.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자취를 감췄답니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서 청동솥 9개 중 8개가 사라졌어요. 단 하나 남은 것조차 사수(泗水·산둥성에 있는 강이름)에 빠졌는데요. 훗날 6국을 통일한 진시황(재위 기원전 247~기원전 210)이 장정 1000명을 동원해 강바닥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답니다.
조선 개국 후 ‘천문도’ 역시 그런 ‘왕권’의 상징으로 여겼죠. 개국초 민심을 얻는 데 어려움에 빠진 태조 이성계로서는 자신이 천명, 즉 하늘의 명을 받은 인물임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때 어떤 이가 나타나 천문도를 바쳤으니 어찌 반색하지 않았겠습니까.
행방이 묘연해진 국보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숙종 연간인 17세기 말에 다시 새겼습니다. 태조 때 만들어진 돌판이 마모돼 알아보기 어렵게 되자 다시 판각한 겁니다. <연려실기술> ‘천문전고·의상’편은 “1770년(영조 46) 관상감 안에 흠경각을 마련해 태조 때 제작된 석각본(국보)과 숙종 때 다시 새긴 복각본(보물)을 나란히 옮겨두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신·구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나란히 보관해두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처음 연구·소개한 이는 평양 숭실학교 교사를 지낸 천문학자 윌 칼 루퍼스(1876~1946)였는데요. 루퍼스는 “동양의 천문관이 집약된 섬세하고도 정확한 천문도”(<한국천문학>(1936))라고 극찬했습니다.
정작 실물은 ‘오리무중’이었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사라진다는 청동솥, 즉 ‘구정(九鼎)의 고사’가 있죠.
‘천상열차분야지도’ 역시 조선 왕조가 어지러워지고, 급기야 멸망하면서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실은 등잔 밑이 어두웠습니다. 사연을 들어볼까요. 일제가 조선-대한제국을 침탈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궁궐을 훼철·유린하는 것이었습니다. 창경궁을 박물관과 동·식물원으로 격하했죠. 그때 ‘천상열차분야지도’ 같은 과학문화재들을 창경원으로 격하된 창경궁 명정전(정전)의 툇간 노천에 내놓았던 겁니다.
창경궁 추녀 밑에 방치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요. 일제강점기 이후 1950년대 말까지 ‘천상열차분야지도’ 등 과학문화재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1960년 무렵 창경궁 명정전 뒤쪽 추녀 밑에 방치된 ‘천사열차분야지도’를 찾은 과학사가 전상운 교수(성신여대·1928~2018)의 회고를 들어봅시다.
“명정전 뒤 추녀 밑은 나들이나 소풍 온 학생과 가족들이 비와 햇볕을 피하기 좋은 곳이었다. 거기에 놓인 두 장의 석판 등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펴놓고 앉기에 좋은 장소였다.”
어떻습니까. ‘천상행 열차 노선도’ 같은 이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고, 이렇게 파란만장한 사연을 담고 있는지 아셨죠. 조선 중·후기 문인·학자인 계곡 장유(1587~1638)가 ‘천상열차분야지도’ 인쇄본을 보고 지은 시가 심금을 울립니다.
“한 조각 천문도 기막히게 다 보이네(圖成一片妙堪看)…. 종이 한 장에 삼라만상 모두 담겨 있는 걸(法象都輸片幅看)…. 사계절 원기 잘 맞추면 태평성대 이루리니(玉燭調元期聖代)….”(2)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kh0745@naver.com
먼저 강리도에서 서역 부분을 보자.
▲ 강리도의 서역 부분 1910년 교토대에서 강리도를 모사한 지도 중 일부 | |
ⓒ <대지의 초상 大地の肖像> | 관련사진보기 |
왼쪽 바다는 대서양이다. 가운데에 네모로 표시된 큰 섬이 보인다. 그 오른쪽이 이베리아 반도다. 지중해는 바다 색깔이 누락돼 있지만 식별할 수 있다. 맨 오른쪽 약간 위를 보자. 붉은 원이 하나 있다. '別失八里'(별실팔리, 터키어 '비슈발리크'에서 유래)라고 쓰여 있다. 오늘날 중국 신장 자치구의 수도다.
그 서쪽 지역이 예로부터 '서역(西域)'이라고 불렸던 땅이다(붉은 선의 以西지역). 수많은 지명이 한자로 적혀 있다. 이것들은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 맨 처음 지명 해독에 본격적으로 도전한 학자는 일본 교토대학의 스기야마 마사아키(衫山正明) 교수로, 그는 224개 지명 해독(안)을 제시한 바 있다(<대지의 초상 大地の肖像>, 2007).
최근에 스기야마 교수의 해독(안)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킨 학자가 등장했다. 중앙아시아의 심장이라는 카자흐스탄의 눌란 박사(Nurlan Kenzheakhmet, 북경대에서 박사학위)다. 그는 훔볼트 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한 결과를 <Silk Road 14호>(2016)를 통해 발표했다(아직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눌란 박사는 이슬람, 페르시아, 중국의 지리 역사 문헌을 발본색원적으로 고찰했음을 밝히면서 총 171개의 서역 지명 해독(안)을 새로 제시했다.
▲ 눌란 박사가 해석한 강리도 서역 지명 | |
ⓒ (2016) | 관련사진보기 |
이 글에서는 카탈루냐 일대에 한해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 현대 지도를 보자.
▲ 카탈루냐 일대 지도 | |
ⓒ 구글 지도 | 관련사진보기 |
카탈루냐 및 그 주변에서 바르셀로나(Barcelona), 타라고나(Tarragona), 우에스카(Huesca), 팜플로나(Pamplona) 등의 지명이 보인다. 눌란 박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놀랍게도 이 지명들과 모나코 등이 강리도에 나온다.
이 부분에 대한 눌란 박사의 설명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강리도 상의 지중해 해안선을 보면, 카탈루냐의 데니아(Denia, 아랍어로는 Deniya)로부터 바르셀로나(아랍어 Barsluna), 그리고 프랑스의 남해안을 따라 이탈리아의 제노아로 뻗어 있다.
麻里昔里那(Malixilina)는 마르세유(Marseille, 스기야마 해석)거나 바르셀로나(Barcelona)겠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 북쪽에 汲里若(Jiliruo)가 있는데 스기야마에 의하면 헤로나(Jirona)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는 Moliku의 오자일 수 있으며 그렇다면 沒尼苦(Moniku)의 변이일 것이다. 강리도 혼묘지(本妙寺)본과 덴리대(天理大)본에는 沒尼苦(Moniku)라 표기돼 있다. 이는 프랑스와 이태리 사이에 위치한 도시 국가 모나고(Monaco)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지중해 해안 쪽으로 동쪽의 他喇苦那(Tarakuna)는 아랍어 지명 Talakuna를 가리킨다. 즉 오늘날의 타라고나(Tarragona)다. 그 오른쪽 麻里昔里那(Malixilina)는 위치로 보아 마르세유(스기야마 해석)라기 보다는 바르셀로나(Barcelona, 아랍어 Barsluna)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강리도에 첫 자가 B 또는 M으로 시작하는 지명이 여럿 나오는데 M은 B로 B는 M으로 환치하여 놓으면 해독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랍어 Barsluna를 가리키는 Malixilina(M을 B로 환치하면 Balixilina)도 그와 같은 경우다."
한편, 지명 해독(안) 일람표에 의하면, 拜不那(Baibuna)는 팜플로나(아랍어 어원:banbaluna), 八思八哈(Fasibaha)는 우에스카(아랍어 지명Wasqah)다.
이제 강리도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강리도는 원본(1402)은 사라지고 없지만 역시 조선에서 만들어진 모사본이 현재 일본 교토의 류코쿠(龍谷) 대학 서장고에 보존돼 있다. 정식 명칭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다. 세로 171㎝, 가로 164㎝의 대형지도다.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져 있는 이 고색창연한 보물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색상이 살아 있고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고 한다.
▲ 류코쿠 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강리도 | |
ⓒ <大地の肖像>(대지의 초상) | 관련사진보기 |
류코쿠본 이외에도 모사 시기가 각기 다른 세 개의 버전이 일본 각처에 보존돼 있다. 총 4개의 버전(조선에서 15~16세기에 제작)이 모두 일본에 있는 셈이다. 여기에다 1910년 교토대에서 류코쿠본을 모사해 만든 것이 또 있다. 이 지도는 매우 선명해 연구 자료로 활용가치가 높다(이 글의 맨 처음 지도).
여러 모사본 중에서 류코쿠본의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르고(1480년대 초로 추정 -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보존 상태가 양호해 우리는 이를 통해 1402년 원본 지도를 본다. 통상 '1402 강리도 kangnido'라고 하면 류코쿠본을 가리키는 까닭이다.
강리도 실물이 최초로 세계무대에 등장한 것은 1991년 말~1992년 초 워싱턴에서였다. 콜럼버스 항해 5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워싱턴의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특별전에 출품된 것. 여기에서 강리도가 세인의 주목과 찬탄을 받았다.
▲ <Circa 1492> 콜럼버스 항해 500주년 기념 전시회 도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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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버스 5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출품된 강리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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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강리도는 미국에서 발간된 지도역사의 대전인 <지도학의 역사(History of Cartography)>시리즈 중 아시아편의 표지 모델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 <지도학의 역사 History of Cartography>. 강리도가 표지 지도로 선정 등재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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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는 주유천하를 한다. 2002년에는 저 멀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고지도 전시회에 영인본이 출품돼 다시금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아래 사진에 만델라가 보인다. 왼쪽 벽에 강리도 혼코지(本光寺)본이 걸려 있다. 우리는 만델라가 자신의 나라를 서양인보다 수십 년 먼저 조선인들이 그렸다는 것을 알고 놀라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아마 자신이 오랫동안 수형 생활을 했던 로벤 섬 해역을 강리도에서 찾아봤을지도 모른다. 15세기 아득히 먼 극동의 조선에서 그려진 세계지도에서 말이다.
▲ 2002년 11월 남아공 국회의사당 지도 전시회 | |
ⓒ 남아공 천년 프로젝트 | 관련사진보기 |
▲ 강리도와 지리 역사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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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리도는 기존의 서양 중심의 세계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기념비적 준거로 인식되고 있다. 서양의 역사 지리서, 세계사 저작, 백과사전, 대학 강의 등에서 강리도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미국에서 소개되고 있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 미국 고등학교 Lake Norman High School 홈페이지에 언급된 강리도 | |
ⓒ Lake Norman High School 홈페이지 갈무리 | 관련사진보기 |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공립학교인 Norman Lake High School(학생 수 약 1800명) 홈페이지에는 강리도가 세계사 과제물로 올라와 있다.
강리도: 한국인의 새로운 세계관
미 대륙이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기 이전에 가장 주목할 만한 세계지도가 한국에서 출현한다. 이름하여 혼일강리역대지도(Map of Integrated Regions and Terrains and of Historical Countries and Capitals). 일반적으로 Kangnido라 불리는 이 지도는 조선왕조시대(1310~1910) 초기인 1402년에 제작됐다. 그들이 창제한 이 걸작(masterpiece)은 아프로- 유라시아Afro-Eurasia(아프리카 및 유라시아 대륙)를 그리고 있는데, 이는 당시로써는 세계 전체였다.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 지도는 괴상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높은 수준의 정확성에 아연실색하고(astounded) 말 것이다. 물론 결함이 있다. (중략)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럽이 지도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일리노이 대학 부설 평생 교육원에서 개설한 한 강좌에는 강리도가 맨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 일리노이 대학 평생 교육원에서 가르치는 강리도 | |
ⓒ 엘리노이대학 홈페이지 갈무리 | 관련사진보기 |
세계에서 지도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미국의 국회 도서관과 비르가(Virga)라는 작가가 공저로 펴낸 역작 <Cartographia(지도학)>는 강리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 서양지도는 이 1402년 한국의 지도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당시의 어떤 서양 지도도 이 지도가 포괄하고 있는 전체 세계상에 근접하지 못한다. 세종이 창제해 1446년 반포한 놀라운 한글처럼 이 지도의 구성은 어떤 형식과 틀에도 구속되지 않는다. 이 지도와 한글은 새로운 한국을 창조하였다…"
▲ <Cartographia> | |
ⓒ 김선흥 | 관련사진보기 |
또한 지리학 교양서인 <Introduction to Geography(지리학개론)>(2015)는 강리도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한, 서양의 지리상의 대발견 이전에 나온 가장 위대한 지도는 1402년 한국에서 만들어졌다. 강리도는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의 지식을 결합해 그린 것인데, 거기에는 당시 중국에 알려진 이슬람 지리학이 또한 내포돼 있다. 그 결과 이 지도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인도, 이슬람권,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에 이르기까지의 영역을 담았다. 그들이 당시 유럽인들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이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버드대 교수 발레리 한센(Valerie Hansen)이 펴낸 역저 <Voyages in World History, Volume 1 to 1600>(2013)는 강리도를 세계사 연표에 뚜렷이 부각하고 있다.
▲ 세계사 연표 속의 강리도 | |
ⓒ Voyages in World History | 관련사진보기 |
이런 몇 가지 사례만 봐도 강리도가 세계에서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터다. 우리 조상들이 남기고 간 문화유산 중에서 이처럼 세계사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 유일한 한국사 사전인 <새 국사사전>(교학사, 2013)에서 우리는 '강리도' 혹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다. 서울시 문화상과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으로 빛나는 책인데 말이다.
한편, 국사편찬위원회가 낸 <한국사> 시리즈가 있다. 여기에서는 강리도가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핵심을 놓치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읽어봐도 강리도의 세계사적 가치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단 한 줄 정도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인도·아프리카·유럽·조선·일본 등을 포함하는 舊世界 전체를 포괄하는 지도다."
이 문장만 봐서는 강리도의 독보적 가치를 알 수 없다. 강리도가 세계사적 가치가 있다는 것은, 당시 동서양의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지도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 서양 중심의 기존의 세계사를 다시 쓰게 하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사 편차위원회의 <한국사>에서는 이에 대한 통찰을 찾아보기 힘들다. 진수를 놓친 것이다. 이는 눈동자 없는 용, 미소가 빠진 모나리자 그림에 비유할 수 있을 터다. 수정·보완이 절실한 이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강리도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의 류코쿠대학 측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며 강리도 가치의 핵심을 짚고 있다.
"이 지도는 1402년 조선에서 제작한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세계지도다. (중략) 주목해야 할 것은 서방에 있다. 유럽에는 지중해가 그려져 있고, 아프리카가 바다로 둘러싸인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중략) 포르투갈인 바루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것이 1488년의 일이다. 그때의 발견보다 무려 80년 이전에 이 지도에는 그 모습이 확실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중략) 이처럼 이 지도에는 역사를 새롭게 바꾸는 대발견이 다수 숨겨져 있다. 이 지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양하고 광범위한 정보가 담긴, 실로 거대한 역사문헌이라 할 수 있다."
강리도의 세계사적 가치는 동서를 물론하고 학계에서 확립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정작 모국에서는 무관심과 몰이해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문화재를 외국에서는 찬탄하는데 정작 우리는 눈을 감고 있는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의 개탄처럼, 우리가 지적 태만에 빠져 있거나 세계사의 맥락을 잃어버린 탓일까(관련 칼럼).
▲ 강리도 류코쿠본 사진 | |
ⓒ 류코쿠대학 | 관련사진보기 |
이 지도가 던지는 의문과 메시지는 여러모로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강리도는 우리가 앞으로 불러와야 할 미래가 아닌가 싶다. 이런 관점에서 강리도를 다시 봤으면 한다.(3)
덧붙이는 글 | 네이버 포스트 '김선흥의 <고지도 천일야화>' 시리즈에 관련 내용이 연재 되고 있습니다(http://naver.me/FO3cEpQY).
안 가봤으면서, 조선 사람이 어떻게 아프리카를 그렸지?
[오마이뉴스 김선흥 기자]
강리도 혼코지本光寺 본 ⓒ김선흥먼저 책 한 권을 소개한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강리도 수록 ⓒ김선흥이 책에 수록된 사물 중에서도 일부 '특대'의 대접을 받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양면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문헌으로서는 로제타 석, 마그나카르타 헌장, 미국 최초 헌법 문서 등입니다.
우리나라의 문물 중에서는 조선 초 제작된 세계지도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일본 혼코지 소장본)가 유일하게 '특대'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첫 번째 사진). 조선시대에 총 4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그 중 절반인 두 페이지가 강리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강리도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
이 책은 강리도를 포함하여 총 4장의 지도를 수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비중 높게 다루어 지고 있는 지도는 강리도와 16세기 터키의 해군제독 피리 레이스(Piri Reis)가 만든 지도(아래 사진, 1929년 이스탄불 황궁에서 발견됨)입니다.
16세기 터키의 세계지도 ⓒ김선흥
이 책은 강리도에 대해 그 동안 학계에서 축적된 연구 성과를 종합적이고 균형있게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 셀러로 선정된 이 책은 11개의 외국어로 번역되었으며(국내에서는 <욕망하는 지도>라는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옴), 오스트리아에서는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강리도의 가치와 성가가 이를 통해 재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왜 강리도에 대한 인식이 국내외에서 이처럼 큰 괴리를 보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다시금 갖게 됩니다. 국내 유일의 국사 사전 <새국사사전>(교학사)에는 강리도가 등재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예전에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아무튼 필자가 연재하는 '지도와 인간사'가 이러한 괴리를 조금이나마 좁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제 아프리카에 주의를 집중해 보겟습니다. 프랑스어 서적 <아프리카 역사의 이해 Connaissances de l'histoire africaine>(Mahawa Kande, 2009)는 첫 머리에서 강리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24-25쪽 ⓒ<Connaissances de l'histo"강리도는 1402년 한국에서 김사형, 이무, 이회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지도에는 상대적 위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중국 제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도 그려져 있는데 중국에 비해서 실제보다 작게 나타나 있다.
이 지도가 보여주는 아프리카의 실제 윤곽에 대한 이해는 포르투갈 항해가 바르톨로뮤 디아스나 바스코 다 가마 보다 앞서 동양인이 그 지역을 탐험했음을 말해 준다. 아프리카 남단 부분은 대체적으로 정확한 형태를 지녔고, 오렌지 강을 찾아 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도 찾아 볼 수 있다. 나아가 아랍어로 이집트를 의미하는 Misr가 중국어로 표기되어 있다." (이형은 번역 참고)
도대체 서양인들은 어떻게 우리보다 먼저 강리도의 가치를 알아 보았을까요? 특히 아프리카에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아프리카를 알고 있었지?
명품은 숨어 있어도 결국 알아 보는 사람을 만난다고 합니다. 서양에서 강리도를 맨 처음 주목한 학자는 독일인 발터 푹스(Walter Fuch)박사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1946년에 강리도의 독보적 가치를 소개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설명할 생각입니다).
놀랍게도 푹스 박사는 강리도가 당시의 모든 유럽과 아랍의 지도들을 무색케 해버린다(completely overshadowing)고 평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강리도가 알려지지도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강리도가 주목받게 되기까지는 푹스 박사의 평가로부터 30년이 지나야 했습니다. 1970년대에 이찬 교수(서울대 지리학과)에 의해서였으니까요.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흥미로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강리도를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 평가에 있어서 우리와 서양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서양학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대목은 중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닙니다. 바로 유럽과 아프리카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프리카입니다. 우리는 그 대목의 가치를 얼른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구요.
푹스 박사의 시선이 붙잡혔던 대목도 물론 아프리였습니다. 서양과 이슬람권 보다 훨씬 먼저 어떻게 동아시아의 지도에 아프리카의 올바른 모습이 그려질 수 있었는가? 이는 한 마디로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수수께끼로 다가 온 것입니다. 실제로 서양 중심의 세계사가 근래 다시 쓰여지는 데에 강리도가 사료로 자주 등장하는 까닭입니다.
푹스 박사의 강리도에 대한 통찰은 동시대의 저명한 중국학 학자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 당시 영국 캠브리지 대학 교수)에 의해 계승 발전됩니다. 니덤 박사는 일찍이 1959년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제 3권에서 6쪽에 걸쳐(551-556) 강리도의 탄생 배경과 가치에 대하여 논술하였습니다. 세기의 명저 중의 하나로 꼽히는 이 저서를 통해 강리도가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세계학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지요.
니덤의 강리도론은 이 지도의 의미 조명 및 가치 평가에 있어서 굳건한 토대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지를 아주 간략히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강리도 상의 지리지식은 서양보다 훨씬 앞서고 광범위하다. 이러한 지리 지식은 원나라 시절 아랍, 페르시아인 그리고 투르크 인들과의 접촉에서 얻어진 것이 분명하다.
- 강리도의 아프리카는 올바른 삼각형 형태를 띠고 있고 정확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는 중국에서 1315년부터 그려진 아프리카가 반영된 것이다.
- 반면에 14세기 서양과 아랍의 지도에서 아프리카 남단은 언제나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오류는 15세기 중엽까지도 수정되지 않았다.
- 푹스 박사는 강리도가 당시의 모든 유럽과 아랍의 지도들을 완전히 무색케해 버린다(completely overshadowing)고 보았는데 제대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강리도에 그려진 아프리카 지도의 모본(밑그림)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니, 그게 전해져 내려 온다는 말일까요? 전해져 온다면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요? 다음 지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다음 호에서 이어가겠습니다.(4)
초판본 복간본 ⓒ김선흥 <광여도> 수록 ⓒ김선흥
[세종 600년 '과학기술 DNA'를 깨우자]빼어난 과학기술 21가지 보유..조선이 금메달
세종대왕 소통도 능통
32년간 1,900회 경연
‘석빙고→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지리지→농사직설→신찬팔도지리지·향약채취월령→향약집성방·혼천의→대간의대·자격루·갑인자→앙부일구→측우기·수표→칠정산 내외편→훈민정음 28자→철제화포→의방유취·제가역상법→총통등록’ 순이다. 명나라와 일본은 각각 4개와 1개에 불과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벌어지고 있던 유럽과 아라비아 등 다른 나라는 모두 합쳐 20가지가 올라 있다.
물론 연표 숫자로만 비교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지만 조선이 전 세계와 필적할 만한 과학기술력을 보유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과학올림픽에 비유한다면 금메달을 절반 정도 휩쓸었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이 중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이슬람문명이 저무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600년 전에 세종이 이끈 조선은 세계 최고의 과학 강국이었다.
과학기술 혁신 리더인 세종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선정한 과학기술인으로 국립과천과학관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산학계몽’이라는 수학책도 열심히 공부하고 간의대를 찾아 천문을 관측하며 전문가들과 논의하는 것을 즐겼다. 식사를 하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였으며 광범위하게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했다. 경연을 주 1회 이상(32년간 1,898회) 할 정도로 뛰어난 학자였고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소통에 능통한 이)였다.
위대한 과학혁신 리더인 세종 시대에는 기라성 같은 과학기술인이 즐비했다. 원나라에서 귀화한 엔지니어 아버지와 관노 어머니를 둔 장영실이 드라마틱한 요소로 부각돼 있지만 당시 출중한 엔지니어(이천·장영실·박자청), 천문역산학자(이순지·정인지·정초·정흠지·김단·김돈·김빈), 의학자(노중례·황자후), 지리학자(정척·변계량·맹사성·권진·윤회·신장) 등이 많아 찬란한 과학기술의 꽃을 피웠다.
신동원 전북대 한국과학기술문명학연구소장은 “세종은 경제·복지·군사·통치·예술문화 등 분야별로 과학문명의 꽃을 피웠다”며 “스스로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수많은 과학 인재를 키우며 집현전에서 학문방법론을 정립해 과학기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5)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천문과 시각을 동시에 알린 조선의 첨단 시계들 [최준호의 사이언스&]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경회루 남쪽에 집 3간을 세워서 누기(漏器)를 놓고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였다. 동쪽 간 사이에 자리를 두 층으로 마련하고 3신이 위에 있어, 시(時)를 맡은 자는 종을 치고, 경(更)을 맡은 자는 북을 치며, 점(點)을 맡은 자는 징을 친다. 12신은 아래에 각각 신패(辰牌)를 잡고, 사람이 하지 아니하여도 때에 따라 시각을 보(報)한다.
천추전 서쪽에 작은 집을 짓고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하고, 종이를 붙여서 산 모양을 만들어 높이는 일곱 자 가량인데, 집 가운데 놓고 안에는 기륜(機輪)을 만들어서 옥루수(玉漏水)를 이용하여 치게 하였다. 오색 구름은 해를 둘러 나들고, 옥녀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며, 사신무사(司辰武士)는 스스로 서로 돌아보고, 4신과 12신은 돌고 향하고 일어나고 엎드린다. 산 사면에는 빈풍(豳風) 사시(四時)의 경(景)을 진열하여 백성의 생활이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였다. 기기(欹器)를 놓고 누수의 남은 물을 받아서 천도의 영허(盈虛)하는 이치를 살피게 하였다.‘ (조선왕조 세종실록 77권, 세종 19년 4월 15일에 적힌 보루각 자격루와 흠경각 옥루에 대한 기록)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된 장영실의 자동 물시계 흠경각 옥루(앞쪽)와 보루각 자격루. 프리랜서 김성태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精髓)가 한자리에 모인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의 한국과학기술사관이 3년간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다음 달 17일 문을 연다. 조선의 주요 과학기술 문물들이 선별됐지만, 전시의 으뜸은 세종 당시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자동 물시계 자격루와 옥루다. 두 물시계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처음이다. 둘 다 조선 최고의 과학기술인 장영실의 작품이지만, 쓰임이 다르다. 자격루는 백성을 위한 국가표준시계다. 경회루 인근 보루각에 설치됐던 자격루가 시간을 알리면, 문루에서 같은 신호를 받아 큰 종과 북으로 서울 시내에 시각을 전파했다. 이전에도 물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록은 자격루 제작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금께서는 시각을 알리는 사람이 잘못 알리게 되면 중벌을 면치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장영실에게 명하여 시각을 알리는 일을 맡길 시보인형을 나무로 만들었으니, 이에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리므로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 (세종 16년, 1434년 7월 1일)
■
「 국립중앙과학관 3년 리모델링
한국과학기술사관 다음달 개관
자격루ㆍ옥루, 처음으로 한 자리에
“15세기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
반면 옥루는 임금만을 위한 화려한 천문 물시계다. 왕의 침전 바로 옆 흠경각에 옥루를 두고 언제든 시간을 알 수 있게 했다. 둘 다 원형은 남아있지 않다. 자격루만 일부(물 항아리와 수수호 부분, 국보 229호)가 남아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2007년 남문현 건국대 교수팀이 원형을 복원, 2022년까지 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해왔다. 옥루는 조선 중기에 소실된 이후 문헌상으로만 남아있다가 2019년 9월에서야 국립중앙과학관에서 복원했다.
국립중앙과학관 한국과학기술사관 초입에 전시된 소간의와 간의대. 세종의 천문관측 기기 개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4계절 변화 보여주는 산 모양 시계
지난 7일 대전 국립중앙과학관 2층 한국과학기술사관을 찾았다. 개관을 한 달여 앞두고 있었지만, 전시물과 안내판 설치를 마치고 시스템 점검 등 안정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자격루와 옥루는 첫 번째 주제인 ’천문역법 존‘(zone)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2022년 서울 고궁박물관을 떠났던 높이 4m50㎝의 중후한 자줏빛 자격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물항아리 구조물이 오른쪽으로 연결돼 시간을 알리는 장치들을 움직인다. ’탁, 또르르…‘ 구슬이 목판 위에 떨어져 둔탁하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누각 위 인형이 움직이며 징과 북을 울렸다.
자격루 바로 옆엔 화려한 천연색으로 단장한 높이 3.3m의 옥루가 우뚝 서 있다. 산의 사면과 그 아래 들판은 4분의 1씩 구획을 나눠 봄·여름·가을·겨울의 자연을 모두 담고 있었다. 겨울의 산과 들판엔 흰 눈이 쌓였고, 가을은 황금 들판과 붉은 단풍으로 단장했다. 산을 둘러싼 들판엔 12지신상이 누워있다가 때가 되면 일어나고, 동시에 땅속에서 12옥녀가 시패(時牌)를 들고 올라와 시간을 알렸다. 산꼭대기엔 금빛 혼천의가 해와 달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물이 수차를 돌리고, 연결된 기륜이 작동하면서 인형과 혼천의를 움직이는 구조다. 옥루엔 과학기술과 아름다움·철학이 모두 담겨있었다. 봄에 모내기를, 가을에 추수하는 모습을 구현한 옥루를 보면서 백성을 생각한 세종의 마음이 느껴졌다.
조선의 최첨단 무기 신기전. 일종의 다연장 로켓포다. 프리랜서 김성태
신기전 등 조선의 첨단 무기들
옥루 복원을 주도한 윤용현 중앙과학관 박사는 ”흠경각 옥루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자동물시계가 어우러진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이자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이며 아름다운 천문시계“라며 ”세종이 1432년부터 7년에 걸쳐 진행한 대규모 천문의기 제작 사업이 완성된 것을 천명한 기념물인 셈“이라고 말했다. 윤 박사는 ”장영실이 세종으로부터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종 3품 대호군에 오른 뒤 임금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아 만든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과학기술사관엔 천문역법을 필두로, 인쇄·지리·군사·금속·요업·근현대과학 순으로 전시 주제가 이어졌다. 천문역법 존은 해와 별을 관측하는 소간의(小簡儀)와 간의대, 해 그림자로 절기와 시간을 알 수 있게 한 규표(圭表)로 시작했다. 천문관측 기기의 기본으로, 1432년 세종이 정인지 등에 ”천문의기를 만들라“고 명한 이후 첫 번째 작품이다. 태조 4년 때 한반도의 밤하늘 별자리를 돌에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 복제), 자격루와 옥루, 천체 관측과 시간을 같이 볼 수 있는 송이영의 혼천시계(국보 230호 복원), 홍대용의 혼천시계(복원) 등도 볼 수 있다.
인쇄코너에는 팔만대장경의 인쇄본과 월인천강지곡 조판 금속활자 등 우리 민족의 활자 역사가 전시돼 있다. 지리코너에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다양한 지도와 조선시대 거리 측정 수레였던 기리고차(記里鼓車) 등을, 군사코너에는 로켓형 발사 무기인 신기전, 시한폭탄의 일종인 비격진천뢰 등 조선의 다양한 첨단 무기들을 관람할 수 있다.
조선시대 거리 측정 수레였던 기리고차(記里鼓車). 말이 수레를 끌고가면서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프리랜서 김성태
권석민 국립중앙과학관장은 ”자격루와 옥루가 제작된 15세기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며 ”1983년 일본에서 편찬한 과학사기술사전에 따르면 1400~1450년의 주요 업적으로 한국이 29건, 중국 5건, 일본 0건이며, 동아시아 이외의 전 지역이 28건으로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 조선 과학기술의 자랑이라는 자격루와 옥루는 왜 대전 중앙과학관에만 있을까. 원래 있던 경복궁은 물론, 대통령실·국회·인천공항에도 전시할 만하지 않을까. 세종대왕 동상이 앉아있는 세종대로엔 왜 세종문화회관만 있고, 세종과학관은 없을까. 어젠다는 실천하는 사람의 몫이다.(6)
대전=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문헌으로만 전해진 조선 후기 '남병철 혼천의' 복원
문헌으로만 전해졌던 조선 후기 천문학자인 '남병철' 혼천의가 170여 년만에 되살아났다. 혼천의란 지구, 태양, 달 등 여러 천체의 움직임을 재현하고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기로 현대천문학으로 넘어오기 이전까지 표준이 된 천체관측기구다.
한국천문연구원은 김상혁 책임연구원과 민병희 책임연구원이 남경욱 국립과천과학관 연구관과 함께 조선 후기 천문 유산인 남병철의 혼천의를 복원한 모델을 제작했다고 29일 밝혔다.
남병철은 19세기 중반에 활약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당시 오늘날 한국천문연구원에 해당하는 천문학 관서인 '관상감' 고위직으로 재임하며 천문학에 관심을 뒀다. 1850년대 후반 각종 천문의기 제작법과 사용법을 정리해 책 '의기집설'을 썼다. 책에서 동아시아에서 그동안 제작됐던 혼천의의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혼천의에 대한 제작법과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연구팀이 복원한 혼천의가 바로 이 의기집설에서 남병철이 설명한 혼천의다. 문헌으로만 전해질 뿐 실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김상혁 책임연구원은 20년 전 남병철의 혼천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22년부터 연구팀을 꾸려 의기집설 내용을 번역해 기초 설계를 진행하며 본격적으로 복원을 시작했다.
남병철의 혼천의는 조선시대에서 쓰이던 기존 혼천의를 보완하고 관측에 편리하도록 개량한 천문기기다. 남병철 혼천의는 장소를 옮겨가며 천체를 관측할 수 있도록 관측의 기준이 되는 북극 고도를 조정하는 기능을 갖췄다. 기존 혼천의는 북극 고도를 관측지에 맞게 한번 설치하면 더 이상 변경할 수 없었다.
또 남병철 혼천의는 특별한 고리가 설치되어 있어 상황에 맞는 천체 관측이 가능하다. 고리를 조절하면 지구의 회전축을 중심으로 천체의 위치를 표현해 적경과 적위를 측정할 수 있다. 고도와 방위 측정이 가능하며, 태양의 운동을 기준 삼아 사용되는 황도좌표계의 황경과 황위를 측정할 수 있다.
김상혁 책임연구원은 "남병철의 혼천의를 복원함으로써 당시의 천문관측 수준을 이해할 수 있고 천문 기록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었다"면서 "우리 선조의 우수한 과학문화재를 되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밝혔다. 복원된 남병철의 혼천의는 올해 하반기에 국립과천과학권에서 특별 전시될 예정이다. (7)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중·이슬람양식에 전통 접목한 ‘간의대’… 세종이후 매일 밤 천문 관측[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천체 운행 측정한 ‘혼천의’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
지구본 모양의 우주본 ‘혼상’
당시 최고의 과학 결정체
해그림자로 시간 아는 해시계
앙부일구는 절기도 알게 해줘
측우기는 강우량 측정장비
현대적 계측기와도 비슷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
간의대와 각종 천문 관측기구들
관상감 관원들은 조선 천문 과학의 유산들을 남겼는데, 우선 간의대를 꼽을 수 있다.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설치된 석축 간의대는 높이 6.3m, 길이 9.1m, 넓이 6.6㎡의 천문관측대였다.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간의대와 주변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 양식에다 조선의 전통 양식을 혼합한 것이었는데, 1438년(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관상감)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간의대에 설치된 혼천의란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기계로 중국 고대 우주관 중 하나인 혼천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혼천의는 천구의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된 것으로써 일종의 천문시계 기능을 하고 있었다. 또 간의대에 설치되었던 혼상은 일종의 우주본으로 지구본처럼 둥글게 되어 있으며, 둥글게 만든 씨줄과 날줄을 종이로 감싼 모양이다. 어설프게 보이는 이 천문관측기는 당시로는 최고의 과학적 결정체였다.
이 외에도 간의대에 방위와 절기, 시각을 측정하는 도구인 규표와 태양시와 별의 시간을 측정하는 일성정시의가 설치되어 있었다.
각종 시계와 측우기, 활자
천문학의 발전은 시계의 발명을 가져왔다. 당시의 시계는 해시계와 물시계로 대표되는데, 해시계는 앙부일구·현주일구·천평일구·정남일구 등이 있었으며, 물시계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해시계를 일구(日咎)라고 한 것은 해 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구들은 모양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시계인 앙부일구는 그 모양이 ‘솥을 받쳐놓은 듯한(仰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이것은 혜정교와 종묘 남쪽 거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규모가 작은 일종의 휴대용 시계였고 정남일구는 시곗바늘 끝이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장영실 등이 만든 앙부일구는 단순히 해시계를 발명했다는 측면 외에 더 중요한 과학적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른 나라의 해시계가 단순히 시간만을 알 수 있게 해준 데 반해 앙부일구는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간과 절기를 동시에 알게 해주는 다기능 시계였기 때문이다. 또한 앙부일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로 된 해시계였다. 앙부일구가 반구로 된 점에 착안해서 그 제작 과정을 연구해보면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해의 움직임뿐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과 같은 지구 구형설이나 지동설에 따른 것이 아니라 혼천설에 따른 것이었다.
해시계는 이처럼 조선의 시계 문화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기능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해시계는 해의 그림자를 통해 시간과 절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었기에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물시계였다.
물시계로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보장치가 달린 이 물시계는 일종의 자명종 시계다. 1434년 세종의 명을 받아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고안한 자격루는 시, 경, 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종, 북, 징을 쳐서 시간을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1437년에는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천상시계인 옥루를 발명했고, 세종은 경복궁에 흠경각을 지어 옥루를 설치했다. 옥루는 중국 송·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시계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시계·물시계와 더불어 천문학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뜻깊은 발명품은 측우기였다. 측우기는 1441년에 발명되어 조선시대의 관상감과 각 도의 감영 등에서 강우량 측정용으로 쓰인 관측 장비로, 현대적인 강우량 계측기와 유사하다. 이는 갈릴레오의 온도계나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보다 200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기상 관측 장비다. 측우기의 발명으로 조선은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를 농업에 응용하게 되어 농업기상학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하였다. 또 강우량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홍수 예방에도 도움이 되었다.
조선의 ‘위대한 손’ 장영실과 세종의 과학 혁명
조선 천문 과학을 논하자면 장영실을 빼놓곤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세종의 과학 정책을 현실화시킨 ‘위대한 손’이었기 때문이다.
장영실에 대해 ‘세종실록’은 그의 아버지가 원나라 소항주(蘇杭州) 사람이며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동래현의 관노 신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영실의 성씨를 감안할 때,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사람이긴 했지만 몽골인이 아닌 한족이었고, 장영실이 관노였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어머니는 관비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장영실은 몽골 지배 시절의 한족 아버지와 고려 동래현에 예속된 관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다는 뜻이다.
동래의 관노 신분인 장영실을 궁궐로 불러올린 사람은 태종이었고, 그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본 사람은 세종이었다. 세종은 관노 신분이었던 장영실을 종3품 대호군의 벼슬까지 주면서 능력 발휘를 독려했다.
세종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장영실이 일궈낸 과학적 쾌거를 열거하자면 대표적으로 혼천의, 혼상, 물시계, 해시계, 측우기, 간의대, 갑인자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장영실 혼자 이 일을 해낸 것은 아니었다. 주로 정초와 정인지, 세종 등이 이론과 원리를 설명하고 이순지·김담 등이 수학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천이 현장을 지휘했다. 하지만 실제 이 기계들을 제작한 기술자는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이 세계 과학사에 빛나는 업적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뛰어난 지도력과 안목 덕분이었다. 학문은 물론이고 기술적인 측면에도 지대한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세종은 측우기의 제작에 왕세자를 직접 참여시키는 열성을 보였는가 하면, 출신 성분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학자와 기술자를 등용하기도 했다. 장영실은 세종의 그와 같은 실용적 가치관에 힘입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조선은 과학 혁명을 이룰 수 있었으며 15세기 문예부흥을 구가할 수 있었다.
작가
■ 용어설명 - 혼천설(渾天說)
중국 고대에 형성된 우주 개념 중 하나다. 고대 중국에서는 우주의 원리에 대해 개천설과 혼천설이 대립했는데, 개천설(蓋天說)에서는 우주의 모양에 대해 하늘이 땅 위를 덮고 있는 형태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혼천설에서는 땅은 둥글고 하늘은 주변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형태라고 주장한다. 또 개천설에서는 하늘의 중심을 북극으로 설정하고 북극을 중심으로 하늘이 회전하며, 하늘과 땅은 평면이라고 주장한다. 혼천설은 하늘과 땅을 곡면으로 설정하고 천체의 모양을 달걀 모양이라고 주장하며 개천설의 한계를 극복한다.(8)
세계서 두번째 오래된 돌 천문도·첫공개 자격루…알기 쉬워진 조선 왕실 과학기술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체험하고
자동 시간 알려주는 자격루 첫 공개
미디어아트 결합해 관람객 이해 쑥
하늘의 뜻을 따르는 왕이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해 핵심적인 천문기구들을 갖추고 관측과 연구도 꾸준히 해서 궁궐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천문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새 단장한 ‘과학문화’ 상설전시실을 27일부터 일반에 공개한다. 지난해 탑골공원 인근 인사동 피맛골에 대거 발굴된 유물 덕분에 조선시대 과학문화유산 총 45건(국보 3건, 보물 6건 포함)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선보였다.
새로운 과학문화실은 어려운 과학문화유산의 의미와 작동원리 등을 쉽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춰 총 3부로 구성됐다.
먼저 1부 ‘조선 국왕의 통치 이념과 천문’에서는 농업국가 조선에서 국왕의 임무 중 으뜸인 ‘관상수시(觀象授時·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한 결과를 바탕으로 절기와 날짜, 시간 등을 정하며 널리 알리는 일)’가 국가 통치 이념이었음을 보여준다. 강우량 측정 기구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 고대부터 왕권의 상징물이던 천체관측기구 ‘혼천의’ 등을 볼 수 있다.
2부 ‘조선왕실의 천문사업’에서는 천문 관련 사업과 관련된 여러 역서(달력)를 소개한다. 주요 유물로는 천문사업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서인 관상감 관련 유물과 천문학서인 ‘천문류초(天文類抄)’, 역서인 ‘칠정산 내편’, ‘칠정산외편’, ‘내용삼서(內用三書)’, ‘대통력’ ‘시헌서’ 등이 있다. 1759년 3월 핼리혜성(약 76년 주기로 지구에 접근하는 혜성)을 25일간 형태와 시기 등을 관측한 기록도 흥미롭게 펼쳐져 있다.
3부 ‘조선의 천문의기’ 에서는 천체관측기구인 ‘일성정시의’, ‘소일영’, ‘혼천의’, 각종 시계인 ‘앙부일구’, ‘지평일구’,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복각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보물) 등이 있다.
특히 현재까지 완형이 남아 있지 않은 ‘자격루’의 부속품인 항아리, 부표(물 위에 띄워 표적으로 삼는 물건), 주전(물시계의 동력 전달 및 시각 조절을 하는 장치) 등 유물을 볼 수 있고, 경복궁과 창덕궁·창경궁에 설치된 여러 기구의 위치와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에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과 ‘복각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을 위한 별도 공간에 진입하면 관람객이 숫자를 눌러보며 각석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실감영상과 각석 투사영상은 15분 단위로 관람하게 했다.
이번 개편에서는 어려운 과학유물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정보영상과 혼천의, 측우대, 앙부일구, 자격루의 수수호 등 4개의 유물을 촉지 모형으로 만져볼 수 있게 했다. 측우대 근처에서 빗소리를, 자격루에서는 시각을 알리는 북·종소리를 들으며 유물을 체험하게 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창경궁 자격루 누기 <사진제공=고궁박물관>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 <사진제공=고궁박물관>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국보) <사진제공=고궁박물관>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9)
[사진톡톡] 조선시대 혼천의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26일 새로 단장한 국립고궁박물관 '과학문화'실에서 혼천의를 소개하고 있다. 일반 공개는 27일부터다.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26일 새로 단장한 국립고궁박물관 '과학문화'실에서 자격루를 소개하고 있다. 일반 공개는 27일부터다. 2022.12.26 xyz@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26일 새로 단장한 국립고궁박물관 '과학문화'실에서 자격루를 소개하고 있다. 일반 공개는 27일부터다. 2022.12.26 xyz@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26일 새로 단장한 국립고궁박물관 '과학문화'실에서 자격루를 소개하고 있다. 일반 공개는 27일부터다. 2022.12.26 xyz@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26일 새로 단장한 국립고궁박물관 '과학문화'실에서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을 소개하고 있다. 일반 공개는 27일부터다.(10)cityboy@yna.co.kr
<주>
(1) https://v.daum.net/v/20200114101019970
(2) https://v.daum.net/v/20230103072202430
(4) 안 가봤으면서, 조선 사람이 어떻게 아프리카를 그렸지? (daum.net) 2018. 5. 17.
(8) https://v.daum.net/v/20230908085712401
(9) https://v.daum.net/v/20221226114201920
(10) https://v.daum.net/v/20221226135225761
<참고자료>
조선 왕실 유물이 잔뜩…경복궁 아래 '비밀의 방' 열렸다 (daum.net) 202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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