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조선초기에 제작된 빼어난 작품이라고 국보 제168호로 지정된 백자. 그러나 14세기 원나라 시대에 제작된 중국제라는 전문가들의 평가 때문에 46년만에 국보에서 해제 예고됐다.|문화재청 제공
“매화와 국화를 그린 15세기 작품으로 중국 원나라 양식과 비슷한 유일한 작품이다.”
문화재위원회가 1974년 6월21일 ‘한국미술 2000년전’에 출품한 ‘백자진사매국문병’을 국보 제168호로 지정한 이유를 기록한 회의자료이다. 요약하자면 ‘중국 원나라 양식과 비슷한 유일한 조선시대 백자’라며 국보로 지정한 것이다. ‘진사(辰砂)’란 사용원료에 관계없이 구운 후 붉은 색깔이 나는 안료를 통칭한다. 조선백자에서는 이 붉은색을 내려고 발색제로 동(銅)을 사용했기 때문에 ‘동화백자’라고도 한다. 그런 탓인지 1974년 국보 지정 당시 ‘백자 진사매국문병’이던 명칭이 나중에 ‘백자 동화매국문병’으로 바뀌었다. ‘‘백자동화문병’은 ‘붉은 색을 내려고 발색제로 동(銅)을 사용한 백자 병’이라는 뜻이다.
국보 제168호와 흡사한 중국 원나라제 유리홍 백자. 조선에서는 붉은 빛이 감도는 백자를 선호하지 않았다. 외제산이라 백안시했다.|문화재청 제공
하지만 전문가들은 차츰 이 국보 제168호 백자를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우선 적색안료를 사용한 이른바 ‘진사백자’가 18세기 이후가 돼서야 본격 제작됐다는 점이 꼽혔다. 조선 전기 경기 광주 지역의 가마터에서도 아직 보고된 출토예도 없었다.
왜 조선에서는 ‘진사’를 쓰지 않았을까. 이유가 있었다. 진사백자의 발색제로 쓰이는 동(銅)은 고온에서 몹시 불안정한 성질을 갖고 있다. 그래서 8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기체로 휘발되거나 발색이 고르게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1200~1300도 고온에서 굽는 백자에 동을 발색제로 사용했을 때는 가마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요변현상(색깔이나 모양이 변형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처럼 까다로운 소성조건 때문에 조선에서는 ‘동화백자(진사백자)’를 선호하지 않았다.
국보 278호였던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 1411년 태종이 ‘공신대우’인 원종공신 이형에게 내린 증명서다. 그러나 이 유물은 보물로 격하되었다. |문화재청 제공
게다가 조선에서는 붉은 색을 ‘외제산 색깔이며 사치품’이라해서 백안시했다. 단적인 예로 태종은 “붉은 안료는 조선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 각종 그릇이나 장식품에는 순색만 쓰라”(<태종실록> 1411년)는 엄명까지 내린 바 있다.
국보 168호 백자는 ‘바로 이러한 시대(15세기) 분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제작된 진사(동화)백자’라는 희귀성을 인정받아 국보의 지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백자를 조선산으로 보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후평이 속속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국보 제168호’ 백자와 유사한 원나라의 ‘유리홍자기’에 주목한다. ‘유리홍’은 조선의 진사백자와 같은 동을 사용하여 붉은 색을 내는 진사(혹은 동화)의 중국 용어이다.
백자 표면의 국화 문양도 수상했다. ‘국보 제168호’ 자기의 국화세부모양을 보면 꽃술(화심·花心)을 원 안에 격자선을 그어 표현했는데 이것은 원말 명초의 중국 유리홍자기나 청화백자에서 보이는 세부표현과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파초문도 눈에 걸렸다. 이 역시 역시 원나라 말부터 시작된 중국산 자기의 보조문양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국보 제168호’ 백자의 제작지는 조선이 아니라 원나라임이 분명하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또다른 결격사유도 있었다. 문양의 색깔이 균일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휘발되기도 했다. 다리굽은 다소 투박하며 접지면의 폭도 균일하지 않고 유약을 닦아낸 부분도 보인다. 파초의 간격도 일정치 않으며 잎의 크기도 균일하지 않다. 무엇보다 가느다란 목 위로 외반된(밖으로 휘어진) 나팔 구연이 떨어져나가 금으로 수리·복원한 흔적이 있다. 국보로 대접받기에는 무시할 수 없는 흠결이다.
1992년 해군의 이충무공 해전유물발굴단은 거북선에 장착한 대포를 인양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급에 눈이 먼 발굴단장이 조작한 가짜였다. |경향신문 자료
학계의 견해를 반영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소개란은 국보 168호 백자의 명칭을 ‘백자 유리홍 매화 국화무늬병-국적 원나라’로 바꿨지만 문화재청은 46년간이나 ‘백자 동화매국문 병-조선시대’를 고수해왔다. 졸지에 국보 제168호는 ‘이중 국적’이 되어버린 셈이다.
(▶관련기사: [단독]조선이냐 원나라냐…수십년 ‘이중국적’ 국보 백자 그냥 두시렵니까)
문화재청은 최근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 분과를 열어 학계와 언론의 지적이 계속된 ‘백자 동화매국문병’의 국보 지위를 박탈하기로 결정하고 지정해제를 예고했다고 29일 발표했다
황정연 유형문화재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중국 및 한국도자사 전문가로 조사단을 구성하여 국보 제168호의 국적과 작품 수준 등을 연구했다”면서 “이번 국보해제 예고는 그러한 연구결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위원회는 “조선 전기 백자에 동화를 안료로 사용한 사례가 없고, 백자의 기형과 문양을 검토해볼 때 이른바 유리홍이라는 14세기 원나라 도자기로 판단된다”고 보았다.
물론 ‘문화재보호법 시행령’(11조)에 따르면 외국문화재라도 우리나라 문화사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회는 “이 ‘백자 동화매국문 병’은 출토지나 유래가 조선시대와의 연관성이 불분명하고, 같은 종류의 도자기가 중국에 상당수 남아 있어 희소성이 떨어지며, 작품의 수준 역시 우리나라 도자사에 영향을 끼쳤을 만큼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고 최종 판단했다. 따라서 ‘인류문화의 관점에서 가치가 크고 유래가 드문 것’이라는 국보 지정 기준에 미흡할 뿐 아니라 국보로서 위상에도 부합된다고 보기 어려워 해제가 타당하다고 보았다.
가짜총통에 새겨넣은 가짜명문, 거북선을 가리키는 ‘귀함’과 ‘한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는 내용의 가짜 글귀가 선명하다.
30일간의 예고기간을 거쳐 국보해제가 최종결정되면 ‘국보 제168호’는 사상 3번째로 영구결번된다. 그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보’에서 영구결번된 기존 사례는 국보 274호와 국보 278호가 있다.
지금은 영구결번된 국보 274호는 1992년 경남 통영시 한산면 문어포 앞바다에서 인양했다는 ‘별황자총통’이었다. 이 총통의 표면엔 ‘만력 병신년(1596년·선조 29년) 6월 일 제작해서 올린 별황자총통’(萬曆丙申六月日造上 別黃字銃筒)이라는 내용과 ‘귀함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귀함’이라면 거북선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거북선에 장착한 화포가 발견되었다는 소리였다. 이 총통은 인양 3일만에 부랴부랴 국보(제274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 총통은 3년8개월만인 1996년 4월 가짜로 밝혀졌다.
준장 진급의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던 해군유물단장 황모 대령이 벌인 희대의 사기극이었음이 드러났다. 명문을 잔뜩 새겨놓은 가짜총통을 한산 앞바다에 던져놓고 진짜유물인양 건져올린 것이었다. 수사결과가 발표되자 문화재위원회는 1996년 8월31일 문제의 가짜총통을 4년만에 국보에서 해제했다. 국보 274호는 이후 영구결번됐다. 또 하나의 국보 ‘영구결번’은 국보 278호이다.
문화재관리국은 1993년 조선 태종 때 발급한 공신녹권으로는 처음 발견됐다는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을 국보 278호로 지정했다. 공신녹권이 무엇인가. 개국 때나 전쟁 때, 혹은 반란 때 특별한 업적을 세운 공신에게 내리는 증서다. ‘당신이 바로 공신’이라고 인정하는 증명서인 것이다. 그런데 정식공신, 즉 정공신(正功臣)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공적을 인정받은 이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인정하고 증서를 내릴 때가 있다. 그것을 원종공신록이라 한다. 원종공신은 시쳇말로 ‘공신 대우’라 표현할 수 있겠다. 정공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은 공로를 세웠으니 ‘공신대우’는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1993년 당시 국보가 된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은 이형이라는 인물이 공신대우(원종공신)를 받았다는 증서와 그 증서를 넣은 상자(함)을 일컫는다. 증서와 함을 묶어 국보로 지정했다.
하지만 27년이 지난 2010년 6월 10일 이 국보 278호가 보물(1657호)로 격하된다. 따라서 ‘국보 278호’도 영구결번되었다. 왜냐면 ‘이형 원종공신녹권부함’이 국보로 지정된지 13년 만인 2006년 4월 이른바 ‘정공신녹권’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롭게 보물 제1469호로 지정된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이다
여말선초의 장군인 마천목(1358~1431)은 제2차 왕자의 난 직후인 1401년(태종 1년) 좌명공신(3등)의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진짜공신(정공신)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마천목 공신녹권은 1401년 태종이 47명에게 발급한 공신녹권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본이다. 반면 이형의 원종공신녹권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1411년 ‘공신대우’로서 받은 것이다.
여기서 어색해졌다. ‘정공신’인 마천목이 받은 녹권은 ‘보물’이고, ‘공신대우’, 즉 원종공신이 그것도 10년이나 뒤에 받은 녹권이 국보라면 어쩐지 이상하지 않은가. 결국 문화재위원회는 2010년 6월10일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를 열어 17년간 국보의 지위에 있던 ‘이형 원종공신녹함’을 보물(제1657호)로 격하시켰다. 이로써 국보 278호 또한 영구결번으로 남게 됐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