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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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는 높은데 형식적"..김홍도 그림 2점 보물서 탈락한 이유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문화재청은 지난 4일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단원(檀園) 김홍도(1745∼1806년 이후)의 회화 3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보물 지정을 앞둔 그림은 선비가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버드나무 위의 꾀꼬리를 보는 모습을 묘사한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와 중국 인물들에 얽힌 일화를 소재로 그린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 도교 신선을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한 '과로도기도'(果老倒騎圖)다.
조선 후기의 빼어난 화가인 김홍도는 풍속화로 유명하지만 인물화와 신선도, 불화도 남겼다.
이 그림들이 보물이 되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김홍도의 작품은 7점으로 늘어난다. 이 가운데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는 '김홍도 필 군선도 병풍'만 국보다.
그런데 지난달 14일 열린 문화재위원회 보물 지정 예고 심의 안건에는 김홍도의 또 다른 작품인 '낭원투도도'(낭<問에서 口 대신 良>苑偸桃圖)와 '절로도해도'(折蘆渡海圖)도 포함됐으나 부결됐다.
낭원투도도와 절로도해도는 도교, 불교와 관련된 인물상을 그린 도석화(道釋畵)다. 낭원투도도는 복숭아를 들고 있는 신선인 동방삭, 절로도해도는 갈댓잎을 타고 양쯔강을 건넜다는 달마를 묘사했다. 그림의 크기는 낭원투도도가 가로 49.8㎝·세로 102.1㎝이며, 절로도해도는 가로 68.8㎝·세로 105.5㎝다.
특히 낭원투도도는 다양한 필선과 색채를 적절하게 사용했고 기괴한 신선을 조선 백성으로 표현해 김홍도의 도석화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낭원투도도를 살펴본 조사위원들도 "신선이라는 주제를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김홍도의 명성과 개성적인 화풍을 절대적으로 반영한다고 보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고, 형식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있어서 예술성이 아주 높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절로도해도 역시 부분적으로 어색한 표현이 있고, 이러한 수준의 그림이 많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다만 일부 조사위원은 "낭원투도도와 절로도해도가 다른 작품들과 한 벌을 구성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나중에 그림이 모이면 일괄적으로 보물로 지정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위원들이 낭원투도도와 절로도해도가 김홍도의 다른 작품에 비해 작품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 같다"면서도 "유형문화재 가운데 중요한 유물을 보물로 지정하지만,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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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作 추정 병풍 미국 대학박물관서 발견
tv.kakao.com/v/v9a33YyvavavtE9YEmRmnRt@my
[앵커]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미국의 한 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견됐습니다.
보존상태가 좋아 가치도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박상돈 기자가 소개해 드립니다.
[기자]
미국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견한 10쪽짜리 병풍입니다.
중국 황실이 대규모로 무사들을 대동하고 사냥에 나선 장면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림 마지막에 '무신'과 '단원'이란 글자가 쓰여있고 낙관도 선명히 찍혀있습니다.
단원 김홍도가 1788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입니다.
높이 2m, 폭 4.5m의 거대한 병풍은 실물로 보존된데다 색채도 선명합니다.
단원의 그림은 주로 정조의 명령이 있거나 고객이 일대일로 의뢰했을 때 그려져 위작일 가능성은 작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같은 박물관에는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를 담은 족자 그림도 소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초가삼간 처마 아래 삼대 가족이 옹기종기 모인 장면을 묘사한 그림과 가족들이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일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려 넣은 작품도 있습니다.
두 그림 모두 상단 가운데 '혜원'이란 글자와 낙관이 찍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족자봉이 상아로 만들어져 한 눈에 보기에도 최고급 미술품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가게 됐는지는 미스테리입니다.(2)
연합뉴스TV 박상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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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산수화, 겸재보다 실제와 닮은 이유는
이태호 교수, 사진기에 잡힌 실경과 그림 비교
- 수정 2007-10-25 19:47 등록 2007-10-25 19:47
18세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과 단원 김홍도(1745~?)가 한국 회화사의 독보적 경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상상속의 산수가 아닌 진짜 산수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진경작가라고 부른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정선의 그림을 보면 실제와 닮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반면 김홍도 그림에선 그런 괴리감이 덜하다. 왜 그럴까.
김홍도, 35㎜렌즈 속 현장모습과 90% 유사정선, 여러시점·너른 화각 사용 풍경 재구성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오는 27일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열리는 한국미술사학회 주최 국제학술대회(‘19세기 동아시아 산수화의 양상과 관계성’)에서 발표할 논문 ‘실경에서 그리기와 기억으로 그리기-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시(視)방식과 화각(畵角)을 중심으로’에서 이 문제의 근원을 파헤쳤다.
그가 동원한 방법론은 사진기 뷰파인더에 잡힌 실경과 그림을 비교하는 것이다. 이 교수는 초점거리 35㎜ 광각렌즈 카메라 뷰파인더에 비친 화각 근사치인 62도를 기준으로 그림을 살폈을 때, 겸재 그림의 현장 유사성은 30~50%에 불과했으나 김홍도는 90~95%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정선의 시야는 대체로 수평각 90~150도이며, 혹은 180도로 넓어 파노라마 사진기에 해당된다”면서 “정선은 실경현장을 닮게 그리는 일에 무심했던 것 같다”고 했다.
대상 실경 전체를 포용하는 부감시(새가 하늘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방식)와 시점이동, 다(多)시점, 너른 화각의 단축과 단순화는 겸재 ‘진경산수’ 표현법의 특징이라고 했다. ‘합성의 대가’라는 것이다. 예컨대 〈금강전도〉는 부감시를 채택하고 있고, 〈단발령망금강전도〉는 여러 시점이 합쳐져 있다. 〈인왕제색도〉는 겸재작 가운데 가장 실경과 가깝다는 평을 듣고 있으나 화각은 150도에 이르고 구도는 부감시로 재구성되어 있다.
반면 김홍도의 대표작인 〈총석정〉이나 〈옥순봉〉의 경우 뷰파인더에 그림과 똑같은 광경이 잡혔다. 김홍도는 17세기 이후 발달한 유럽의 풍경화나 카메라에 담기는 풍경사진과 유사한 화각으로 실경을 포착했고 생생하게 현장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정선이 실경 현장의 리얼리티를 뛰어난 직관으로 재해석했다면 김홍도는 실경 포착과 일상풍경 묘사로 근대적 조선화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3)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서울 신윤복 미인도가 대구로..왜 간송이 첫 지방나들이로 대구를?
서울 성북구 보화각 보물들 대구로
간송의 첫 지방 나들이 장소는 '대구'
지방 분관 개념인 대구간송미술관 건립 예정
대구=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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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이란 이런 것···교과서 속 문화유산 한 자리에 모인다
간송 미술관 소장 국보·보물 40건 모두 전시
신윤복 단오풍정·김홍도 고사인물도 시작으로
간송 6·25 때도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도 공개
일제의 핍박이 절정에 달했던 1930년대 후반. 한 30대 청년이 ‘우리 문화재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시를 열겠다’며 근대식 사립 박물관을 세우기로 결심한다. 이미 일본이 모든 물자의 유통을 통제하던 시기였음에도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장식하고, 대만에서 화류진열장을 구해와 박물관을 꾸미기 시작한다. 그리고 1938년 7월,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 ‘보화각'이 서울 성북동에 문을 연다.
보화각을 세운 청년은 문화유산 수집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간송은 평생 전재산을 걸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우리 문화유산을 찾고 수집했다. 보화각을 세운 후에도 일본인들이 빼앗아 간 석불 등 규모가 큰 석조물들을 되찾아 왔고,1940년에는 1천 원에 시장에 나온 훈민정음 원본을 1만1천 원을 주고 구입해 수집품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수집된 ‘간송 컬렉션’ 중 국보·보물로 지정된 문화유산은 42건·97점에 이르는데, 훈민정음 해례본과 신윤복의 미인도,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그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간송 컬렉션 국보·보물급 문화유산 전체를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역대급 전시가 오는 3일 대구에서 열린다. 대구 간송미술관은 27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개관 기념 국보·보물전 ‘여세동보-세상 함께 보배 삼아’를 9월 3일부터 12월 1일까지 개최한다고 밝혔다. 간송 미술관은 이번 전시에 큰 공을 들였다. 우선 미술관은 서울에 있는 국보와 보물급 소장품 40건 전체(석탑 2건 제외)를 대구로 옮겨왔다. 이는 지금까지 간송 미술관이 개최한 전시 중 가장 큰 규모다.
보통 전시는 가장 중요한 작품을 전시 중반 이후에 배치하며 관람객의 감정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굳이 그런 기획이 필요하지 않다. ‘맛보기’라 할 수 있는 도입부에 놓이는 작품조차도 교과서 속에서나 보던 귀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고사인물화’,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등 간송이 초창기에 수집한 풍속 회화가 모두 전시실1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신윤복, 단오풍정. 사진=서지혜 기자 김홍도의 ‘고사인물화’ 전시전경. 사진=서지혜 기자전시실 2에는 신윤복의 ‘미인도’가 단독 전시된다. 전시실2는 검은색 원통 형식으로 만들어졌는데, 관람객은 이곳에 들어가 홀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미인도’ 속 여인을 만나볼 수 있다. 당초 미술관 측은 한 번에 한 사람만 전시실에 들어가 관람객이 미인도 속 여인과 독대하는 느낌을 받도록 기획했으나, 관람객이 몰릴 것으로 예상돼 수용 인원을 6명으로 늘렸다.
전시실 3에서는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관람객을 만난다.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용례를 담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귀한 문화유산이다. 간송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애지중지하며 지켜낸 것으로 전해진다. 미술관 역시 그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에 잠깐 전시됐던 것 외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언제나 서울 간송 미술관에서 귀하게 보관해 왔지만 특별히 이번 전시 목록에 포함 시켰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서울 밖에서 전시되는 것은 84년 만에 처음이다.
간송미술관에 전시된 훈민정음 해례본. 사진=서지혜 기자
전시실 4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묵란화 네 점을 모은 ‘난맹첩’과 서예작품, 도자들이 자태를 뽐낸다. 국보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과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등 병(甁)류 외에도 청자기린유개향로, 청자오리형연적 등도 전시실4에서 고고한 빛을 내뿜으며 관람객을 맞이한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사진=서지혜 기자
한편 전시가 열리는 대구 간송미술관은 서울 성북동에 있는 보화각과 함께 앞으로 간송의 수집품을 관리하고 보관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새로운 미술관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8003㎡ 규모로 건축가 최문규 연세대 교수가 설계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보화각과 함께 귀한 문화유산을 보존·관리할 새로운 전시 공간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2016년 대구시와 계약을 맺고 대구간송미술관 건립을 추진해 왔다. 미술관은 대구시가 부지를 제공하는 시립미술관으로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운영한다. 스페인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과 유사한 운영 형태다.
미술관은 이번 전시가 끝난 후 내년 1월부터 대구에서 상설전을 시작할 예정이다. 서울에서는 봄과 가을에 정기 전시를 개최하고, 대구에서는 간송 소장품을 상설 전시하는 방식으로 대중과의 접점을 늘려나가겠다는 계획이다. 전인건 대구간송미술관 관장은 “리움미술관 등 다른 주요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전시 기관과도 협업을 확대해 문화유산 애호가들에게 다채로운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말했다.(5)
전시는 12월 1일까지. 입장료는 성인 1만 원. 어린이·청소년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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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 붓질에 만취한들 어떠리
‘오원 장승업 화파’전 18일부터…미공개작 선뵈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5-14 17:55
조선 말기의 천재화가,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인 오원 장승업(1843~1897)과 그의 화파를 일별할 기회가 왔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02-762-0442)이 봄 정기전으로 18일부터 6월1일까지 여는 ‘오원 장승업 화파’전.
오원의 그림 40여점을 중심으로, 그의 화풍을 이은 심전 안중식(1861~1919), 소림 조석진(1853~1920), 백련 지운영(1852~1935)과 위사 강필주 등의 작품 100여점을 선보인다.
오원은 열 살 무렵, 추사 김정희에게 <세한도>를 받은 화가 이상적의 사위인 이응현의 집 심부름꾼으로 일하다 발탁돼 그림을 그리게 됐다. 이응현과 같은 역관 출신인 변원규의 소개로 궁중으로 들어간 오원은 1868년께 단청장이 되어 경복궁 중건에 참여했다.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정식 화원으로 승급했지만 분방한 성격으로 진득하니 그리지 않았다. 궁궐을 몰래 빠져나와 술을 마시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사자 민영환(1861~1905)이 오원을 자기 집에 가두고 그림을 그리게 하겠다고 청을 올려 사건을 무마한 일화도 있다.
오원이 활동한 때는 척족이 집권하면서 사대부층이 몰락하고 중인계급 등 상공인과 지역의 부농이 떠오르던 시기. 그들 신흥계층
과 오원이 감각적으로 그려낸 그림의 정서가 일치했다. 일자무식인 오원은 대상의 본질을 파고들기보다 회화적인 미를 추구한 탓에 그의 그림은 유치하고 허술해보이는 측면도 있다. 화제는 대부분 심전 등 제자들의 대필이다. 중국 명가의 그림을 베끼거나 흉내낸 것도 상당수. 한번 본 그림은 10년 뒤에도 기억한다는 그는 주문을 받으면 일필휘지 그려냈다. 그런 탓에 중국풍과 조선풍이 뒤섞이기 일쑤다. 예컨대 도인의 경우 문어대가리 모양의 머리는 전형적인 중국풍이지만 얼굴은 넙데데한 조선인이다. 하지만 이런 단점이 친근한 요소로 작용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은 이번 전시가 한국 동양화단의 뿌리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훗날 왕조가 몰락하면서 도화서가 해체되고, 오원의 제자였던 심전 등이 조선서화협회를 구성했으며, 심전이 자기 호 두 글자를 쪼개 나눠준 심산 노수현과 청전 이상범(1897~1972)이 각각 서울대 동양화과와 홍익대 동양화과를 창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화원시절 고종에게 그려 진상한 <추남극노인> <춘남극노인>, 민영환이 소장했던 말 그림 4폭 병풍, 2m가 넘는 두루마리 그림 <계산무진> 등이 처음 공개되며 10폭짜리로 구성된 <귀거래도>는 8폭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지운영의 그림들 역시 보기 힘든 작품들이다.(5)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178년 만에 고향으로..제주 찾은 추사 김정희 '세한도'
초라한 집 한 채와 양 옆으로 서 있는 나무가 전부인 이 작품.
작품 속 여백과 거칠고 메마른 붓칠이, 춥고 황량한 겨울을 연상케 합니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입니다.
1844년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 그린 서화로 제목처럼 세한(歲寒), 즉 한겨울의 추위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공자께서는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 지금 그대는 나에게 귀양 이전이라고 더 해준 것이 없고, 귀양 이후라고 덜 해준 것이 없습니다.
이 작품은 추사가 제자 '우선 이상적(1803~1865)'에게 준 선물이었습니다. 역관으로 북경을 오가며 자신을 잊지 않고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작품이었던 겁니다.
그는 <세한도> 옆에 위와 같이 적으며, 한결같았던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직접 전했습니다.
이후 세한도는 이상적과 그의 제자 등을 거쳐 100년가량 전승되며, 청나라 문인 16명과 우리나라 문인 4명의 감상평이 덧대어져 14.7m의 대작으로 완성됐습니다.
■ 178년 만에 고향 제주 찾은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가 178년 만에 작품 탄생지인 제주를 찾았습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세한도>를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 '세한도, 다시 만난 추사와 제주'를 4월 5일(오늘)부터 5월 29일까지 개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국립중앙박물관이 2020년 손창근 선생으로부터 <세한도>를 기증받아 개최한 특별 전시의 순회전입니다.
청나라와 우리나라 문인들의 감상평이 더해져 14.7m에 달하는 〈세한도〉 두루마리
15m에 달하는 길이 탓에, 작품이 제주에 도착해 전시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세한도> 두루마리는 1930년대 제작된 나무 상자에 보관돼왔는데, 작품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무 상자를 넣을 특수 상자를 별도로 제작한 겁니다. 이 상자를 제주까지 항공편으로 옮긴 뒤, 무진동 유물 운송차에 실어 박물관까지 옮겼다는 게 국립제주박물관 설명입니다.
또 두루마리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작품을 전시할 적절한 위치와 조명, 온도와 습도 등도 미리 맞춰야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허련, 〈김정희 초상〉
이번 특별전에서 전시되는 추사 작품은 <세한도>를 포함해 모두 13점.
유배지였던 제주까지 찾아올 정도로 애제자였던 허련이 추사를 그린 <김정희 초상>과 추사의 말기 걸작이라 불리는 <불이선란도>도 처음으로 제주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합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이 제주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김승익 연구사는 "당시 김정희에게 제주는 아주 작은 모습이었을 거고, 제주 사람들에게 김정희도 당대 문예계를 주름잡는 대학자가 아니라 유배인에 불과했을 거다"라며 "이번 전시가 김정희와 제주가 제대로 만나는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7)
허지영 기자 (tangerin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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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세한도'의 나무, 이렇게 귀했나요? [한의사와 함께 떠나는 옛그림 여행]
한의사로 일하면서 우리 조상들이 남긴 다양한 옛그림과 한의학과의 연관성을 들여다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해 온 문화와 생활, 건강 정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기자말>
[윤소정 기자]
가을이 되면 노랗게 빨갛게 물드는 나뭇잎이 아름답다. 하지만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에도 사철 푸르름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있다. 이러한 상록수는 대표적으로 소나무가 떠오르지만, 소나무의 뾰족한 잎과는 다르게 좀 더 포근한 느낌을 주는 나무가 있다. 바로 측백나무이다.
▲ 세한도 김정희, 1844년, 종이에 수묵, 23.9 x 70.4cm |
ⓒ 국립중앙박물관 |
"공자께서는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송백이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안다'고 하셨다. 송백은 본디 사철 푸르러 잎이 지지 않으니 세한(설 전후의 추위, 몹시 추운 한겨울의 추위) 이전에도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송백인데, 성인께서는 특별히 세한 이후를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하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덜하지도 않았다."
▲ 심산지록 윤두서, 종이에 담채, 127 x 90.5cm, 간송미술관 소장 |
ⓒ 공유마당(CC BY) |
▲ 사문탈사 정선, 비단에 채색, 21 x 32.8cm, 간송미술관 소장 |
ⓒ 공유마당(CC BY) |
편지는 정선의 벗이자 <사천시초>를 저술한 시인 이병연(1671~1751)이 쓴 것으로, 이병연이 '율곡 이이 선생이 소를 타고 눈 덮인 절을 찾았던 고사'를 화제로 겸재에게 보낸 것이다.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절을 둘러싼 커다란 고목들은 측백나무이다. 측백나무의 특징인 세로로 갈라진 나무껍질은 빗금으로 표현했고, 비늘처럼 납작한 잎에는 눈이 쌓여있다.
▲ 측백나무 |
ⓒ 픽사베이 |
예로부터 측백나무를 불로장생의 상징, 신선이 되는 나무라 여겨 귀하게 대접했으며,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 혹은 사찰 주변에 심었다. 측백나무는 잎과 열매를 약으로 사용한다.
▲ 백자인 |
ⓒ 윤소정 |
백자인은 다량의 지방유를 함유하여 장을 적셔주고 대변을 통하게 한다. 즉, 대장의 진액이 줄어 대변이 굳어진 변비에 도움이 된다. 이렇게 기름기가 많아 공기 중에서 산패되기 쉬우므로, 밀봉하여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
이 밖에도 백자인은 심장을 튼튼하게 하여, 잘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릴 때 혹은 불면증에 사용하며 정신을 안정시킨다. 땀을 멎게 하는 효능이 있어 식은땀이 날 때도 활용한다.
일반적으로 송백(松柏)을 나무들 중 으뜸이라 하는데, 소나무를 공(公), 측백나무는 백(伯)이라 했다. 작위로 보자면, 공작인 소나무보다는 아래지만 측백나무는 백작인 셈이다. 이는 변치 않고 푸른 송백의 자태와 향기 때문이겠지만, 유용한 쓰임새도 한몫한 것이 아닐까 싶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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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윤소정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nurilton7)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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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는 ‘관음증’ 환자의 ‘핫템’...겸재·단원·추사도 사랑한 화폭이었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하나같이 근심되는 것이 천하의 더위인데(一念長憂天下熱)….’
조선 후기 이상적인 도시인의 삶을 그린 8폭 병풍이 있다. ‘태평성시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그 중 5폭에 각종 부채를 파는 ‘부채’ 상점이 보인다. 가게의 좌우에 글자가 새겨진 길쭉한 광고판이 보인다. 오른쪽 광고판에 ‘더위가 걱정’이라는 내용의 7자가 보인다. 왼쪽 광고판에는 아쉽게도 마지막 글자인 ‘서늘할 량(凉)’만 보인다. 아마 ‘부채로 더위를 날려보내시라’는 광고 문구였을 것이다.
그보다 600년 전 인물인 이규보(1168~1241)의 시 한 수가 이 부채 상점의 광고 내용을 대신 알려줄 것 같다. “여름철에 손에 들고 흔들면 무더위 어디로 사라지는지 몰라. 응당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어야 해. 청량한 맛을 어찌 혼자만 차지하랴.(引凉那忍獨)”(<동국이상국집>)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나들이’와 ‘빨래터’) 등에 등장하는 관음증 환자들.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지나가는 여인이나 빨래하는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다. 윤기(1741~1826)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남의 행동을 엿보는 관음증 환자들을 ‘시체를 감싸는 헝겊(멱모)이나 중죄인의 머리에 씌우는 용수와 비슷하다’고 꼬집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조선시대 손풍기
요즘 선풍기와 에어컨에, 손풍기까지 등장해서 무더위를 날려주는 시대가 되었다.
‘부채’는 이제 문자 그대로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할 판이다. 물론 에어컨·선풍기·손풍기 등이 훨씬 시원하다.
그러나 어찌 수천년간 사람들의 손 때가 묻어온 손바람(부채)과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얼마전 나온 부채와, 부채에 새겨진 그림 이야기를 담은 책(이인숙 경북대 강사의 <선면화의 세계-우리 부채그림의 역사와 미학’>)에는 ‘부채 인문학’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중심으로 다른 연구 논문 등을 통해 ‘부채에 담긴 사람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
18세기 이상적인 서울풍경을 그린 태평성시도. 부채상점의 모습이다. 양 옆에는 기다란 광고판이 서있다. 오른쪽 광고판에는 ‘더위가 걱정(一念長憂天下熱)’이라고 써있다. 왼쪽 광고판에는 ‘서늘할 량(凉)’자만 보인다. 아마 ‘부채로 더위를 날려보내시라’는 광고 문구였을 것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채’는 말 그대로 ‘부치는 채’를 가리킨다. 그러나 부채는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채’ 이상의 존재였다.
전설상에 등장하는 부채의 기원부터 예사롭지 않다. 중국 순임금이 어진 신하에게 내렸다는 ‘오명선(五明扇)’이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부채다. 오방(五方·동서남북중)에 명정(明政·밝은 정치)을 펼치는 의미였다.
부채의 다른 이름은 ‘인풍(仁風·어진 바람)’이다. 동진의 원굉이 부채 선물을 받고 “‘어진 바람(인풍)’을 일으켜 백성을 위로할 것”(<세설신어> ‘언어’)이라고 다짐했던 데서 유래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부채’의 다른 이름은 ‘인풍(仁風·어진 바람)’이다. 동진 시대의 인물인 원굉(328~376)이 재상인 사안(320~385)에게서 부채 선물을 받고 “‘어진 바람(인풍)’을 일으켜 백성을 위로할 것”(<세설신어> ‘언어’)이라고 다짐했던 데서 유래했다.
또 육기(260~303)는 “촉의 제갈량(181~234)이 부채(白羽扇)를 손에 쥐고 군대를 지휘했다”(<우선부>)고 전했다. 이후 부채는 책사와 지휘관의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오죽하면 “1506년(연산군12) 중종 반정을 일으킨 박원종(1467~1510)이 광화문 앞에서 ‘부채를 휘두르며 반정군을 지휘하는 모습’이 마치 신(神)과 같았다”(<해동야언>)고 표현했을까.
한나라 성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후궁 반첩여는 식어가는 황제의 사랑을 ‘여름철 사랑받다 대나무 상자 속에 처박히는 가을철 부채’에 비유했다. 이후 추선(秋扇·가을 부채)’은 버림받은 사랑, 쓸모 없어짐, 벼슬길의 부침, 때를 잃은 신세 등을 뜻하는 성어가 되었다.|국립중앙도서관 자료■가을 부채의 원망
‘부채’하면 ‘원망의 노래’인 ‘원가행(怨歌行)’을 떠올린다.
“…합환 부채…임의 소매 속을 드나들며…산들바람을 일으키는구나. 가을철…산들바람이 더위와 열을 앗아갈까 늘 두렵다(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대나무 상자 속에 버려져서….”(<문선> ‘원가행’)
‘원가행’의 작자는 한나라 성제(기원전 32~기원후7)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후궁 반첩여(기원전48~기원후2)였다.
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기원전 1세기)에서 확인된 부채 자루. 이중 한 고분에서 출토된 3자루는 피장자의 가슴 부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가 하늘신·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 썼던 무구(巫具·굿 할 때 쓰는 도구)일 가능성이 있다.(출처:이건무의 ‘다호리 출토 부채자루에 대하여’, <고고학지> 10권, 한국미술사연구소, 1999)‘합환 부채’는 두 개의 반원이 하나의 원을 이루는 부채를 가리킨다. 반첩여는 훗날 황제의 사랑이 식자 둥근 부채를 떠올리며 자신의 처지’를 ‘여름철에 사랑을 받다가 가을철 대나무 상자 속에 버려진 신세’로 표현했다. 얼마나 멋들어진 비유인가.
이후 ‘추선(秋扇·가을 부채)’은 버림받은 사랑, 쓸모 없어짐, 벼슬길의 부침, 때를 잃은 가련한 신세 등을 뜻하는 성어가 되었다.
당나라 이익(750~830)의 악부시(‘잡곡’)에 “사랑하기는 추운날 화롯불 쬐듯 하고, 버리는 것은 가을 바람에 부채 버리듯 한다”는 구절이 있다. 또 “가을부채 보듯 한다”는 우리 속담도 있다. 상황에 따라 표변하는 인심을 가리킨 것이다.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 벽화의 주인공들은 예외없이 부채를 들고 있다. 귀한 신분의 상징물처럼 보인다.■8가지 덕을 지닌 부채
한반도에서도 부채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았다. 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기원전 1세기)에서는 모두 6자루의 칠기 부채가 확인됐다.
이중 한 고분에서 확인된 3자루는 피장자의 가슴 부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발굴자는 제정일치 사회의 지도자가 사용한 무구(巫具·굿 할 때 쓰는 도구)일 가능성을 타진했다.
부채는 4~5세기 고구려 고분 벽화인 안악3호분(357)과 덕흥리 고분(408)의 주인공도 들고 있다.
지체높은 인물들이 손에 늘 쥐고있던 당대의 명품이었던 것이다. “후백제왕 견훤(재위 892~935)이 왕위에 오른 고려 태조 왕건(918~943)의 즉위 선물로 공작선(부채)을 보냈다”는 <고려사>(‘세가 태조’) 기록도 있다.
혜원 신윤복의 ‘야금모행’. 순라군이 통행금지를 위반한 남녀를 불심검문하고 있다. 한겨울, 그것도 야밤인데도 두 남자가 부채를 들고 있다. 이를 두고 연암 박지원은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이 한겨울에 갓을 쓰고, 눈 내리는 날에도 부채를 드는 것을 비웃는다”고 전했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이후 부채는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임금~백성이 모두 사랑하는 소지품이 되었다. 조선조 태종(1400~1418)은 부채를 찬양하는 ‘어제시’까지 지었다. “…대나무 깎아 둥근 부채 만든 뒤부터는 밝은 달 맑은 바람 이 손 안에 있구나.(朗月淸風在手中)”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 ‘화동옥삼편’에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풀잎으로 짠 부채를 만드는데 농부들이 사용한다. 팔덕선(八德扇·8가지 덕을 지닌 부채)이라 한다.”
팔덕선이 무엇일까. 이유원은 “맑은 바람을 일으켜 주는 덕, 습기를 제거해 주는 덕, 깔고 자게 해 주는 덕, 값이 저렴한 덕, 짜기 쉬운 덕, 비를 피하게 해 주는 덕, 볕을 가려 주는 덕, 옹기를 덮어 주는 덕…”이라고 설명했다.
혜원 신윤복의 ‘전모를 쓴 여인’. 전모를 쓰고, 부채를 든 기녀가 마치 ‘런웨이 워킹’ 하듯 당당하게 걷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채로 가린 관음증
조선인의 부채 사랑은 갈수록 도에 지나쳤던 것 같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이 한겨울에 갓을 쓰고, 눈 내리는 날에도 부채를 드는 것을 비웃는다”(<열하일기>)고 전했다. 혜원 신윤복(1758~?)의 ‘야금모행’에는 겨울철, 그것도 야밤에 부채를 들고 있는 두 남성이 보인다.
그렇게 부채를 시도 때도 없이 들고다니는 품이 꼴보기 싫다는 여론이 등장했다.
종이나 비단으로 제작하는 부채에 쟁쟁한 작가들이 글씨와 그림을 남겼다. 그러나 부채그림이 소품으로 인식되다 보니 다른 작품에 비해도 홀대받은 인상이 짙다. 정선, 강세황, 김홍도, 김정희 등 대가들의 부채 그림 중에서도 국보나 보물은 보이지 않는다.|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문화재단·개인 소장조선 후기 문신 윤기(1741~1826)의 <무명자집>은 “길거리에서 청색·혹은 검은색 비단 부채로 제 얼굴을 가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 뒤 “그 모습이 시체를 감싸는 헝겊(멱모)과 흡사하고 더욱이 중죄인의 머리에 씌우는 용수와 비슷하다”고 꼬집었다.
얼마나 꼴불견이면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것을 시체의 멱모와 죄인의 용수로까지 표현했을까.
“…내가 심히 증오하는 까닭은…내 자취는 감춘 채 몰래 남의 행동을 엿보고, 수치를 속에 숨기고서 자기의 흠을 가리는 것처럼 하기 때문….”
윤기는 이런 관음증을 꼬집으면서 “이들의 심보는 결코 정인군자가 행할 바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단원 김홍도의 ‘나들이’와 ‘빨래터’를 보면 부채로 얼굴을 가린채 음흉한 눈으로 지나가는 여인이나 빨래하는 여인들을 훔쳐보는 족속들이 등장한다.
현전하는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부채그림으로 알려진 왕실 종친 출신 화가 이징(1581~1674?)의 ‘금니 산수화’. 금가루를 아교에 개어 그렸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패션피플의 부채
<임하필기>는 끊임없이 변하는 당대 ‘부채 패션’의 트렌드도 전한다.
“요즘 서울 사대부들은 단오선(단옷날 조정이 하사한 부채)을 기피한다. 처음에는 염조대선, 다음엔 심씨소선, 그 다음엔 곡두소선을 숭상했다…지금은 전부가 소절선을 사용한다.”
‘염조대선’은 길이가 한 자(30㎝) 남짓되는 ‘장식없는 청색 부채’다. ‘심씨소선’은 심상규(1766~1838)가 전라관찰사 시절 제작한 작은 부채(5~6치·15~18㎝)다. 연필(표준길이 10㎝)보다 짧다.
왼쪽은 신범화(1647~?)의 ‘여협도’. 말이 여성협객이지 실제로는 ‘미인도’를 그린 인상이 짙다. 오른쪽은 신명연(1808~1886)의 부채그림(‘병오청서도’). 점잖은 양반들은 이와같은 미인도를 부채에 그려놓고 감상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곡두소선(꼭지가 굽은 부채)과 소절선 등도 작은 부채다. 당시 유행한 좁은 옷소매에 놓기 위해 제작됐다.(<임하필기> ‘벽려신지’)
반면 여성들은 부채를 지니고 다닐 수 없었다. 태종 연간(1414년 11월17일)에 국법으로 부녀자의 부채 소지를 금했기 때문이다.(<태종실록>) 그러나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했던 기녀들은 괜찮았던 모양이다.
신윤복의 ‘전모를 쓴 여인’은 전모(나들이용 쓰개)를 쓰고 부채를 든 여인의 외출을 그렸다. 마치 당대 패션리더인 여성의 ‘런웨이 워킹’을 보는 듯 하다. 조선 최초의 패션쇼에 부채가 등장한 격이다.
겸재 정선(1676~1759)의 부채그림인 ‘금강내산’. 부채를 펴는 순간 방사형으로 뻗은 부챗살과 함께 흰 바위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는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실수로 시작된 부채그림?
사람은 공백이 있으면 무언가를 끄적대고 싶어하는 ‘낙서하는 인류’이다.
게다가 종이나 비단으로 만든 부채라면 어떤가. 뭔가 작품을 남기고 싶어 안달 했을 것이다.
부채는 사각형의 정형화된 화면이 아니었다.
가을 금강산을 그린 ‘풍악전면’. 방사형 화폭을 따라 봉우리들이 뒤쪽으로 가득 솟아오르고 있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어 그냥 ‘부채꼴’로 표현되는 반원형 화면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부채 그림은 접혀지는 부채면의 요철과, 뒷면의 부챗살 때문에 그리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작가들은 색다른 도전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부채그림은 소매 속에서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는 이동형 갤러리였다. 몇명이 모여 부채를 펴면 그곳은 저마다의 안목을 논하는 ‘은근한’ 경쟁의 장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부채는 손에 쥔 가장 우아한 예술품이었다.
사찰인 정양사를 중심으로 금강산을 그린 정선의 ‘정양사’. 천일대에서 금강산을 조망하고 있는 탐승객들의 모습이 보인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부채 글씨와 그림은 왕희지(307~364·글씨)·왕헌지(348~388·그림) 부자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왕희지가 거리의 한 노파가 만든 6각 부채에 글씨를 써준 것이 ‘부채 글씨(서선·書扇)’의 시초라 한다.
‘부채 그림(선화·扇畵)’의 시작은 극적이다. 왕헌지가 부채에 글씨를 쓰다가 실수로 붓을 떨어뜨려 오점이 생겼다.
그러자 왕헌지는 오점 위에 검은 말과 암소를 절묘하게 그려넣었다.(<진서> ‘열전·왕헌지’)
정선의 ‘소의문(서소문)에서 바라본 도성’ 그림. 부채로 사용했다가 떼어내 화첩에 보존한 그림이다. 도성안팎을 한 폭의 실경 산수로 일목요연하게 그렸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홀대 받은 부채그림
우리 역사 속 부채 그림은 어떨까. <도화견문지>(1074년 무렵 편찬)는 “고려의 귀족 그림에 부인과 안장을 지운 말(馬)을 함께 그리거나 혹은 금빛 모래 여울로 이뤄진 물가 연꽃과 꽃나무, 물새 등을 정교하게 점철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부채 그림은 기본적으로 여름철에 더위 쫓기용으로 수시로 사용되었기에 훼손되기 쉬웠다.
단원 김홍도의 ‘서원아집도’ 부채 그림. 부채꼴 각도가 180도(보통은 140도)에 달한다. 북송의 문호 소동파 등 16명이 모여 문예활동을 펼치는 내용을 그린 ‘고사인물도’이다. 이 그림에는 스승인 표암 강세황의 글이 부채의 모양에 맞게 배치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그중 일부가 부챗살에서 떼어내어 독립적인 작품으로 소장되었다. 소품으로 인식되다 보니 다른 작품에 비해도 홀대받은 인상이 짙다.
정선(1676~1759), 김홍도, 김정희(1786~1856)의 부채 그림(글씨 포함) 중에서도 국보나 보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채꼴 화폭에 그린 작품은 여느 국보·보물 못지 않다.
정선의 ‘금강내산’ 및 ‘풍악전면’과 김홍도의 ‘서원아집도’ 등은 가로폭이 80㎝가 넘는 대작이다. 두 대작의 부채꼴 각도는 180도(보통은 140도)에 달한다. 파노라마 효과의 극치를 이룬다.
찔레꽃에 날아드는 호랑나비를 그린 단원 김홍도의 ‘화접도’. ‘화접도’에는 “마치 나비 가루가 손에 묻을 것 같다. 사람의 솜씨가 자연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스승 강세황의 찬사가 달려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내 손 안의 금강산
현전하는 부채그림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이징(1581~1674?)의 산수화이다. 선비화가 신범화(1647~?)의 ‘여협도’도 있다. ‘여협도’는 ‘의협심있는 여성 신선 그림’이지만, 실상은 당대의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미인도에 가깝다. 점잖은 체면의 당대인들은 ‘사녀도’ 혹은 ‘여협도’라는 고상한 제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미인’을 그려 품 안에 놓고 감상했다.
현전하는 부채그림의 대부분은 18세기 이후의 작품들이다. 이중 가장 인기있는 주제는 ‘금강산’이었다.
추사 김정희가 한여름에 길 떠나는 벗에게 부채를 선물하며 그려준 부채그림(송백간노형).‘ 김정희는 ‘길이 서로 잊지 말자(長毋相忘)’는 내용의 인장까지 찍어주었다.|선문대 박물관 소장정선의 ‘금강내산’과 ‘풍악전면’, ‘정양사’ 등은 결코 ‘소품’으로 여길 수 없는 걸작이다. ‘금강내산’ 부채그림은 펴는 순간 방사형으로 뻗은 부챗살을 따라 금강전도가 드러난다. 그 사이 넓은 여백 아래에서 흰 바위봉우리가 꽃송이처럼 솟아오른다.
가을 금강산을 그린 ‘풍악전면’은 방사형 화폭을 따라 봉우리들이 뒤쪽으로 가득 솟아올랐다. ‘정양사’ 그림에는 정양사 앞 천일대에서 금강산을 조망하는 갓쓰고 한복 입은 탐승객이 보인다.
겸재의 금강산 부채그림을 두고 금위대장 출신인 박준원(1739~1807)의 찬사가 눈에 띈다.
“만이천봉 손에 쥐었으니 겸옹(정선)의 신필, 더욱 뛰어나네. 개성 사람 손에 들어갔다고 탄식하지 말게. 지극한 보물이 결국 나라 안에 있으니….”(<금석집>)
김정희의 ‘송백간노형’ 부채그림은 얼핏 김정희의 대표작인 국보 ‘세한도’를 연상케한다.|선문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 소장겸재의 금강산 부채 그림 중 한 점이 개성 소장가의 수중에 넘어갔던 모양이다. 박준원은 “그래도 보물이 다른 곳에 아닌 조선 안에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안하고 있다. 문인화가 허필(1709~1768)의 ‘금강산’ 부채그림도 유명했다.
허필은 “성균관 유생들은 허필의 그림이 없는 부채는 손에 잡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사랑받았다.
김정희와 권돈인(1783~1859)의 지란지교(영지와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정)를 시각화한 부채그림(지란병분·芝蘭竝芬). 권돈인은 “백년을 산다 해도 우정은 끊어질 수 없고, 모든 꽃이 시든다 해도 우정의 향기는 없앨 수 없다”는 소감을 남겼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최북(1712~1786?)의 ‘금강총도’ 부채 그림도 ‘신필(神筆)’이다.
“금강산 구룡연에 들어간 최북이 술을 잔뜩 마시고 울고 웃다가를 반복하다니 ‘천하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명산에서 죽어야 한다’고 소리친 뒤 물에 뛰어들었다가 겨우 구출됐다”(<금릉집> ‘최칠칠전’)는 최북의 일화도 유명하다.
금강산 그림 외에 역시 겸재의 ‘소의문(서소문)에서 바라본 도성도’(소의문망도성도)가 눈에 띈다.
사용하던 부채에서 떼어내 화첩으로 보존한 작품이다. 도성 안팎을 회화로 구성해 한 폭의 실경산수로 일목요연하게 그려낸 ‘한양전도’ 부채그림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화가 한종유(1737~?)가 1781년 69세를 맞이한 표암 강세황의 부탁을 받고 그려진 부채 초상화. 강세황이 그린 자화상(보물)과 닮았다.|국립중앙박물관·개인 소장■나비 가루가 손에 묻을 듯
김홍도가 역관 이민식(1755~?)에게 그려준 ‘서원아집도’ 부채그림은 가로 81㎝에 이르는 대작이다. ‘서원아집도’는 북송의 문호 소동파 등 16명이 모여 문예활동을 펼치는 내용을 그린 ‘고사인물도’이다. 이 그림에는 강세황(1713~1791)의 글이 부채의 모양에 맞게 배치되어 있다.
대나무 숲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는 주인공을 그린 ‘죽리탄금도’와 찔레꽃에 날아드는 호랑나비를 그린 단원의 ‘화접도’도 단원의 부채그림이다. 특히 ‘화접도’에 쓴 스승 강세황의 찬사가 심금을 울린다.
“그림 속 나비의 가루가 손에 묻을 것 같다. 사람의 솜씨가 자연의 창조를 빼앗을만 한 것이 이런 경지에 이르는 건가. 펼쳐보고 놀라 감탄하며 쓴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극찬이다. 대체 이런 작품을 그린 부채를 갖고 있던 ‘행운아’는 과연 누구였을까.
화가 정종여(1914~1984)가 1941년 그린 78세의 ‘위창 오세창. 나막신은 북송 소동파가 유배시절 신었던 신발이다. 고난 속에서도 의연했던 오세창을 상징하는 소품이다.|개인 소장■우정의 향기가 부채 속에
김정희는 어떨까. 여름철 무더위에 길을 떠나는 벗 백간 이회연에게 부채를 선물하며 그림을 그리고, 자작시까지 써주었다.
“무더위에 그댈 송별하자니…차갑고 황량한 경치 그려주네…내 마음과 내 정이…이 부채에 있으니…아침 저녁으로 (나를) 자주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
김정희는 그러면서 ‘길이 서로 잊지 말자(長毋相忘)’는 인장을 찍었다. 이 부채를 펴면 곧 나를 펴는 것과 마찬가지라니….
김정희가 ‘차갑고 황량하게 그렸다’고 한 이 부채 그림은 얼핏 ‘세한도’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김정희와 권돈인(1783~1859)의 지란지교(영지와 난초처럼 향기로운 우정)를 시각화한 부채그림(지란병분·芝蘭竝芬)도 눈길을 끈다. 벗 권돈인의 글이 심금을 울린다. “백년을 산다 해도 우정은 끊어질 수 없고, 모든 꽃이 시든다 해도 우정의 향기는 없앨 수 없네.”
부채에는 겨울철 설경과, 시원한 바닷바람, 소나무가 우거진 솔숲과 오밀조밀한 계곡의 물가풍경 등을 담았다. 무더위를 날려줄 부체에 걸맞은 그림들이다.|고려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선문대박물관·한빛문화재단 소장■부채에 새긴 인물화
인물을 그린 부채그림 중에는 ‘표암 강세황의 69세 소상’이 흥미롭다. 1781년(정조 5) 69세를 맞이한 강세황이 화가 한종유(1737~?)에게 부채를 가져가 ‘그려달라’고 부탁한 작품이다.
강세황은 부채 그림에 “화가 한종유가 그려준 초상화가 제법 (나와) 비슷하니 손자에게 전한다”고 썼다. 가만 보면 보물로 지정된 강세황의 초상화(2점) 얼굴과 제법 비슷하다.
인물화 가운데는 정종여(1914~1984)가 그린 위창 오세창(1864~1953)의 초상화도 눈길을 끈다.
1941년 78세가 된 위창을 그린 것이다. 용머리로 장식한 지팡이와 나무 나막신이 이채롭다.
그중 나막신은 북송의 소동파가 유배시절 신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난 속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상징하는 소품이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독립운동가이자 개화운동가, 서예가, 전각가, 언론인, 수집가 등으로 이름을 떨친 위창에게 꼭 맞는 물품이다.
이밖에 겨울철 설경과, 시원한 바닷바람, 소나무가 우거진 솔숲과 오밀조밀한 계곡의 물가풍경 등이 부채에 담겨있다. 무더위를 날릴 부채에 걸맞은 그림들이다.
어떠한가. 그동안 눈여겨 보지 않았던 부채 그림 속에는 이렇게 녹록치 않은 인문정신이 담겨있다.(9)
(이 글을 위해 이인숙 경북대 강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부채그림 속 인문학을 더 알고싶다면 이인숙의 ‘<선면화의 세계-우리 부채 그림의 역사와 미학>, 눌와’를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기사에 다 실을 수 없는 80장의 부채그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이인숙, <선면화의 세계-우리 부채 그림의 역사와 미학>, 눌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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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무, ‘다호리 출토 부채자루에 대하여’, <고고학지> 10권, 한국미술사연구소, 1999
진가려, ‘동아시아 회화의 반첩여 이야기 수용양상’, 성균관대 석사논문, 2022
고혜련, ‘반첩여 도상’, <중국사연구> 제58집, 중국사학회, 2009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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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 '서원아집도'·이인문 '강산무진도' 공개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국립중앙박물관은 8월 서화실 전시 교체로 조선시대 그림과 글씨 50점을 새로 선보인다.
이중 보물 조선 후기 대표 화가 김홍도(1745-1806)의 '서원아집도'와 이인문(1745-182)의 '강산무진도'가 공개된다.
김홍도가 1778년 그린 '서원아집도'는 북송 신종의 부마 왕선(1036-1104)이 소식(1036-1101)을 비롯한 문인묵객 15명을 초청한 모임을 그린 그림이다.
'서원아집'은 빼어난 문인들이 한자리에 어울린 기념비적 모임으로 후대에도 글과 그림의 주제로 사랑받았다.
김홍도의 서원아집도는 조화로운 구도, 개성이 뚜렷한 인물, 변화가 넘치는 필선 등 그의 기량이 잘 발휘된 명작이다.
김홍도는 북송화가 미불(1051-1107)이 쓴 '서원아집도기' 내용을 충실히 재현했다.
제5~6폭 위쪽에 강세황(1713-1791)이 쓴 발문이 있다. 강세황은 이 그림이 명나라 화가 구영(1494-1552)의 '서원아집도'보다 뛰어나며, 북송 이공린(1049-1106)의 원작과 우열을 다투는 신필의 솜씨라고 극찬했다.
고사를 소재로 하면서도 원작을 넘어서는 창조성을 이룩한 김홍도의 34세 기년작 '서원아집도'는 지난 4월 보물로 지정됐다.
[서울=뉴시스]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0 2024.08.19.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대자연 절경과 그 속에 펼쳐진 삶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조선 후기 화원 화가 이인문은 동년배 단원 김홍도와 더불어 18세기 화단의 대표 인물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로 8.5m가 넘는 '강산무진도' 전폭이 펼쳐진다.
강산무진도에서 잔잔한 수면과 깎아지른 듯한 산, 절벽이 이어지며 조화를 이룬 장면은 대자연의 순환과 세상사의 부침을 보는 듯하다.
이인문은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집, 마을, 시장, 성, 누각, 사찰 등을 세밀한 필치로 담았다. 실재 장소를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그림으로 펼쳐놓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이상향으로 볼 수 있다.
손세기·손창근 기념실 서화Ⅱ실 202-3호에는 지난 6월 고(故) 손창근 선생의 별세를 추모해 선생이 기증한 조선시대 회화를 전시한다.
[서울=뉴시스] 장승업의 '말 씻기기'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4.08.19.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손창근 선생은 지난 2018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등 국보·보물급 문화재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전시되는 선생의 기증 회화는 장승업(1843-1897)의 '말 씻기기' 등 5점과 202-4호실에 함께 선보이는 심사정의 '풍랑 속의 뱃놀이'까지 총 6점이다. '풍랑 속의 뱃놀이'는 거친 풍랑이 이는 바다를 유유히 항해하는 신선들의 모습을 그렸다.
고양이 그림으로 유명한 변상벽(1726-1775)의 '고양이와 참새'도 전시된다. 이밖에 이상범(1897-1972), 최우석(1899-1964) 등 6명이 1948년 함께 그린 '꽃과 새'도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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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가치는 높은데 형식적"..김홍도 그림 2점 보물서 탈락한 이유 (daum.net)2018.01.07.
(2) 단원 김홍도作 추정 병풍 미국 대학박물관서 발견 (daum.net)2015. 11. 23.
(3) 단원 산수화, 겸재보다 실제와 닮은 이유는 (hani.co.kr)한겨레신문 2007년 10월 26일
(4) 서울 신윤복 미인도가 대구로..왜 간송이 첫 지방나들이로 대구를? (daum.net)2018.06.10.
(5) https://v.daum.net/v/20240828070240156
(6) ‘취화선’ 붓질에 만취한들 어떠리 (hani.co.kr)한겨레 2008.5.15
(7) https://v.daum.net/v/20220405060019246
(8) https://v.daum.net/v/20221119115701104
(9) https://v.daum.net/v/20240711050007865
(10) https://v.daum.net/v/20240819103119251
<참고자료>
김홍도(金弘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출생 연도1745년(영조 21) 사망 연도1806년(순조 6)
김홍도는 조선후기 「군선도병」·「단원풍속화첩」·「무이귀도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1745년(영조 21)에 태어났고 사망일은 미상이다.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29세 때 영조와 왕세자의 어진을 그렸고,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 일대를 기행하고 명승지를 그려 바치기도 했다. 50세 이후로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실경 산수화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세련된 화풍을 이룩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해학적 감성으로 표현한 독창적인 풍속화도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회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화가다.
신윤복(申潤福)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신윤복은 조선후기 「미인도」·「단오도」·「선유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1758년(영조 34)에 태어났고 사망일은 미상이다. 도화서의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를 지냈다. 풍속화를 비롯하여 산수화와 영모화에 능했다. 특히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사용한 풍속화는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로 조선후기 도회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후기 풍속화를 개척한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장승업(張承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장승업은 조선 후기 「방황학산초추강도」·「기명절지도」·「호취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1843년(헌종 9)에 태어나 1897년(고종 34)에 사망했다. 역관 이응헌·변원규 등의 후원 아래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화풍을 수용했다. 화원 유숙에게 배워 회화의 기틀을 다졌고 40대 이후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다. 강렬한 필법과 묵법,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이 특징이며, 문기 어린 격조보다는 뛰어난 기량이 돋보인다. 산수화, 도석·고사인물화, 화조영모화, 기명절지도, 사군자 등 여러 분야에 고루 능했고, 안중식·조석진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겨울 지나 봄 오듯”…명작으로 보는 인생의 고락(苦樂) | KBS 뉴스 2020.11.23
[문학예술]혁명을 꿈꾸다 세상을 비워버리다…‘추사’ (donga.com) 동아일보 2007년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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