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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3) - 조선의 유학자들 본문

남국/조선

조선(3) - 조선의 유학자들

대야발 2021. 7. 5. 17:26

 

 

 

정도전의 민본, 조선을 설계하다

유용하2024. 7. 19. 05:03
정도전-백성을 위한 나라 만들기/이익주 편저/창비/280쪽/2만 1000원

창작과비평 창간 60주년 맞아 ‘한국사상선’ 1차분 공개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사상선 간행위원장을 맡은 백낙청(오른쪽 두 번째)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사상선’ 발간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

조선 왕조의 설계자였지만 절대 왕권을 꿈꾸는 태종 이방원의 칼에 쓰러진 삼봉 정도전.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했지만 정작 정도전이 무엇을 꿈꾸며 조선 건국에 참여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직후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3권과 고려 말 공양왕 시절 쓴 상소를 통해 그의 정치사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이 출간됐다. 책을 읽다 보면 ‘조선경국전’에서 천명한 “무릇 임금은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하니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며 임금의 하늘이다”라는 말이 정도전의 조선 건국 핵심 이념임을 깨달을 수 있다.

편저자인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조선 건국은 혁명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혁명의 명분으로 삼았던 민본·위민 정치의 출발”이라며 “정도전은 단순히 원칙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민본 정치를 위해 필요한 실천 덕목을 고민한 인물로 ‘권력자의 책임’에 대해 강조했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창작과비평’ 창간 60주년이 되는 2026년까지 진행되는 ‘한국사상선’의 하나다. 한국사상선은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정도전, 이이, 이황, 정약용 등 잘 알려진 역사적 인물부터 김구, 여운형, 조소앙, 홍명희, 함석헌을 거쳐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한 시대를 이끌며 큰 울림을 준 사상가 59명의 글과 생각을 상세히 다룬다. 올해 1차분 10권을 발간하고, 2025년과 2026년에 각각 10권씩 총 30권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정도전은 바로 이 시리즈의 첫 번째 포문을 여는 인물로 선정된 것이다.

계간지 ‘창작과비평’ 명예 편집인으로 한국사상선 간행위원장을 맡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 사상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고 세계적으로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친 이들을 선정해 조명했다”며 “사상 이론가뿐 아니라 여러 분야의 인물을 포함하고 정도전으로 시작해 김대중으로 끝나는 구성은 어떻게 보면 특색이 있고, 논란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이라고 이번 시리즈를 소개했다.(1)

유용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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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과 학문과 풍류의 도학자 이황

김삼웅2024. 2. 21. 07:39
[겨레의 인물 100선 94] 낭만과 자연을 즐기고 멋을 아는 풍류객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 이황 초상 일제강점기, 25.2x30.3cm, 퇴계서원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던 시기에 남명 조식과 같은 해,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안동시 도산면 은혜리)에서 진사 이식(李植)과 박씨 부인 사이에서 6남매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취 부인 의성 김씨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고 29살에 세상을 떠나자 후취 부인 춘천 박씨를 얻어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퇴계는 박씨 부인이 낳은 막내아들이다. 

2살 때 아버지가 별세하여 숙부에게 글을 배웠다. 19살 때에 서울로 올라가 문과별시 초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27살에 경상도 향시 진사시 생원에 차석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조숙한 천재형이 아니라 대기만성형에 속한다. 그 사이 허씨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으나 아내가 일찍 사망하고 29살 때에 안동 권씨와 재혼하였다. 32살에 문과별시 초시에 합격하고, 34살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에 나아간 이황은 예문관검열, 성균관전적, 호조좌랑, 홍문관수찬, 형조정랑, 홍문관 교리, 경기도어사, 사헌부지평, 의정부검상, 충청도어사, 사헌부장령, 홍문관직강, 홍문관응교(정4품), 대사성 등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는 초·중년기에 조선시대 일반 관료와 다름없는 평범한 관리의 길을 걸었다. 관리로서 외직과 내직을 오가면서 나라 일을 보았다. 그런데 그의 행보에는 남다른 점이 많았다. 19살 때에 한 번 만났던 조광조를 생각하면서 도학의 정도(正道)를 찾아 이 길을 걷고자 한다. 조광조는 국정의 일대 개혁을 시도하다가 훈구파에 몰려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어느날 조광조의 종손 조충남이 이황을 찾아와 조광조의 행장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19살 때에 만나보았던 그의 기상을 사모의 정을 담아 지었다. 조광조는 젊은 이황이 그리던 멘토였다. 이황은 64살 때에 조광조의 행장을 다시 지었다.

 대궐 계실 적 봉황같은 풍채 항상 사모했는데
 이제 후손이 오시니 그 모습 생각나네
 성대한 아름다움 떨쳐냄을 내 어찌 감당하리
 천리 눈밭 길 찾아온 그대에게 부끄럽구려.

이황이 관료생활을 할 때 조광조와 사림파는 반체제의 '역당'들이었다. 그의 문집이 불태워지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떼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이황은 마음 깊숙이 도사린 조광조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기묘사화, 을미사화, 을미왜변, 임꺽정의 난 등 사화와 국정난맥 등이 잇따르던 시기였다.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즉위하였다. 이황은 41살 때에 중종에게 언로(言路)의 자유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조광조가 주창하고 실천하려던 과제이기도 했다.

 

이황의 생애는 전반기 관료 시절과 퇴임하여 낙향한 후반기로 크게 분류된다. 46살에 자신의 호를 퇴계(退溪)로 정하고 홀연히 관계를 떠났다. '퇴계'라는 호는 물러남과 더불어 향리 온계리(溫溪里)에서 따왔다. 퇴계는 이후에도 종종 임금의 부름에 응하여 몇 차례 출사를 하기도 했으나 잠시 머물다 다시 물러나기를 거듭했다. 

그의 어머니는 "너는 성질이 고결하여 속인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벼슬을 하더라도 고을의 수령이나 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라고 한 말에서 퇴계의 성향이 잘 드러난다. 

이황이라는 이름이 관리시절의 상징이라면 퇴계라는 호는 전원·유람·학문·유유자적의 '퇴계정신'을 의미한다. 그는 상명하복과 고정된 틀에 묶이는 관리생활이 기질적으로 잘 맞지 않았다. 해서 여러 차례 사직을 하고 귀향 또는 칩거를 시도했다.

귀향한 그는 태어나 자란 온계리 양곡의 낭떠러지에 집을 짓고 '지산와사(芝山蝸舍)'라는 당호를 걸었다. 그리고 같은 이름의 시를 지었다. 

지산기슭 끊어내어 새집 지었더니
모양은 달팽이 뿔 같아도 몸은 감출 수 있네.
북쪽 낭떠러지 마음에 안 들지만
남쪽은 봄 안개 감돌아 운치 더하네.
아침 저녁 원근의 산천은 보기 좋고
뒷산은 그런대로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네.
달과 산을 보는 꿈 다 이루었으니
이밖에 또 무엇을 더 구하리오. 

그는 주자학자이면서도 낭만과 자연을 즐기고 멋을 아는 풍류객이었다.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날이면 개천에 비치는 달을 보고, 여울 소리에서 생의 환희를 느꼈다. <음귀영계월(飮歸詠溪月)>이라는 제목의 시다.

달을 밟고 돌아올 때 서릿발 하늘에 가득하고
국화 핀 그 자리 옷깃에 향기 남았네.
그 중에 달리 마음 깨워 주는 곳이란
여울 소리 맑게 울려 거문고를 뜯는 듯.

이황은 낙향하여 시 짓고 산행하는 등 한가만 즐기는 한량은 아니었다. 관리들의 탐학이 심해지고, 흉년이 거듭되면서 사방에서 도적 떼가 날뛰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그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거국이 소동하여 거꾸러진 자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자는 끊이지 않도다. 이제 흉년은 계속되어 백성은 먹을 것이 없고 목화도 전혀 없으니 백성은 무엇으로 몸을 가리울까. 기한이 몸을 베이건만 백성은 도움받을 곳이 없으니 모두가 보따리를 싸서 돌려메고 나서기 마련이다. 

혹리(酷吏)는 인연작간(因緣作奸)하여 위협과 침독이 급하기 성화같아 살을 벗기고 뼈 속까지 후려침을 그칠 줄을 모르니 무지한 백성들이 위로 덕을 보지 못하고 아래로 침해만 당하게 되어 서로 원망하고 슬퍼하여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고 처자의 사랑을 끊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찾아가지만 그곳도 마찬가지. 사방이 탕탕하여 안도할 곳이 없어 강장은 군집하여 도적이 되고 노약은 도랑에 떨어져 죽으니 슬픈 일이라. 

그는 사군자를 좋아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매화를 사랑했다. 임종을 맞아 가족과 제자들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을 정도로 매화를 아꼈다. 매화의 그윽한 향기에 취해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매화를 읊은 '매화시'만 107수에 달하고 그 가운데 91수를 뽑아 <매화시첩>을 편찬한 바 있다.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라는 시다.

 뜰을 거닐자니 달이 사람 따라 오는 데
 매화꽃 언저리를 몇 차례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내 머물고 꽃 그림 자 몸에 가득해라.

이황은 사후에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고담청정한 삶과 넓고 깊은 학문, 메일 데 없이 분방한 풍류정신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70살이 되던 1570년 12월 8일 매화가 첫 꽃망울을 틔우던 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간병 온 제자들에게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禮葬)을 사양할 것과,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는 자신이 미리 써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의 열 글자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고향과 조상의 내력 및 뜻함과 행적을 간략히 쓰도록 당부하였다. 

그가 생전에 써 두었던 자신의 <묘갈명> 한글 번역문이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성해서는 병이 많았네.  
 중년에 어찌 학문을 좋아했고  
 말년에 어찌 벼슬에 올랐던가.  
 학문은 구할수록 멀어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  
 세상에 나가서는 넘어졌으나  
 물러나 은둔하니 올발랐네.  
 나라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성인 말씀이 참으로 두텁구나.  
 나는 옛 사람 생각하니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후세 사람들이라고 어찌
 지금의 내 마음을 모르리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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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과 퇴계 두 거봉의 닮음과 다름

김삼웅2024. 8. 22. 15:33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 16] 두 사람은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김삼웅 기자]

▲ 퇴계 이황 퇴계 이황 1501 ~ 1570
ⓒ 김서연
16세기 조선사회는 걸출한 학자들이 많았다.

정암 조광조(1482~1514), 화담 서경덕(1489~1546), 보우(普雨, 1549~1565), 휴정(休靜, 1520~1604), 토정 이지함(李之函, 1527~1578), 퇴계 이황(1501~1570), 남명 조식, 율곡 이이(1536~1584) 등이다.

거듭된 사화와 당쟁으로 선비들이 제명에 살지 못하는 참극이 계속된 상황에서, 어느 시대에 못지 않는 인재들이 나온 것은 다소 역설적이었다. 그래서 16세기 조선은 정치의 폭정 속에서 학문(지성)의 서광이 비치는, '상처 입은 르네상스'였다고 하겠다.
  퇴계 이황이 손수 지었으며, 생전 머물며 학동들을 가르쳤다는 도산서당이다. 세로 현판과 이어 넓힌 처마가 독특하고 고유한 건축물이다.
ⓒ 김현자
퇴계와 남명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남명은 연산군 7년 1501년 6월(음)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태어나 선조 5년(1572) 음력 2월 산청군 시천면 사륜동에서 돌아가셨다. 퇴계는 같은 해 11월(음) 경상도 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나 1570년(선조 3) 음력 12월 18일 출생지에서 돌아가셨다. 남명이 퇴계보다 5개월 일찍 태어나 2년 2개월 늦게 돌아가셨다.

이들보다 2세기 늦게 출생한 성호 이익은 두 사람이 차지하던 위생에 대해 언급했다.

단군시대는 원시적이어서 문화가 개척되지 못했고, 천여 년을 지나 기자가 동쪽 지방에 봉합을 받게 되면서 암흑이 걷혀졌으나, 그것도 한강 이남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9백여 년을 지나 삼한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의 경계선이 모두 정해져 삼국의 영토가 정해졌고, 또 천년을 지나 우리 왕조가 창건되면서 문화가 바로 열렸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륜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이익, <성호사설>)
  남명 조식 선생 영정
ⓒ 김종신
두 사람이 유교적 도덕정치의 일현을 이상으로 여기는 유학자 곧 성리학자였다. 성리학(性理學)은 송학·명학·주자학·육왕학·이학·도학·심학 등 다양하게 불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조 이래 성리학이라 호칭되었다.

성리학이란 용어는 원래 '성명(性命)·의리지학의 준말'이다. 이 용어의 의미로 짐작할 수 있듯이, 성리학은 심성의 수양을 과거 어느 유학보다도 철저히 하면서, 동시에 규범 법칙 및 자연법칙으로서의 이(理)〈또는 성(性)〉을 깊이 연구하여 그 이의 의미를 완전히 실현하려는 유학중의 하나이다.

한마디로 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과 궁리(窮理)를 지극히 중요시함으로써, 종래의 유학 〈주체 객관 양면을 망라〉을 형이상학적으로 재구성·발전시킨 것이다. (주석 1)

두 사람은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당시에는 이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배웠고, 성리학은 조선사회의 정학(正學)의 자리에 위치하였다. 퇴계와 남명은 같은 시대의 대표적 성리학자로서 공통점도 많았지만 처세관과 현실인식에서 그리고 학문관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점이 있었다. 퇴계는 출사하여 대사성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남명은 시종 초야에서 처사의 길을 걸었다.

두 사람은 동년생, 같은 영남출신의 동학(同學)이면서 평생 한 번도 상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신을 두 차례(혹은 3회) 주고 받았다. 그렇다고 비방하거나 시샘하는 등 세속적 행위는 일체 하지 않았다. 남명이 64살이던 해 퇴계에게 서한을 보내었다.
  남명 조식 선생이 태어난 생가(합천군 삼가면 외토리(外吐里)
ⓒ 김종신
평생 마음으로만 사귀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 머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결국 정신적 사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인지요? 인간의 세상사에 좋지 않은 일이 많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걸릴 것이 없음인데, 유독 이 점이 제일 한스러운 일입니다. 선생께서 한 번 의춘(의령)으로 오시면 쌓인 회포를 풀 날을 매번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오신다는 소식이 없으니, 이 또한 하늘의 처분에 모두 맡겨야 하겠습니다. (주석 2)

출사와 시국관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했거니와, 남명이 1564년 퇴계에게 다소 비판적인 편지를 띄웠다. 유생들의 부패타락상에 퇴계의 침묵에 대한 항의였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늘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정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진리를 담론하여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장로(長老)께서 꾸짖어 그만 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석 3)

 

이에 대한 퇴계의 답신이다.

보내주신 글월에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인다"는 말씀은 유독 그대만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도 역시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짖고 억제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마음 가짐이 본래부터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치려고 하는 자는 말할 것도 못 됩니다. 홀로 생각건대, 하늘이 본성을 내려주어 사람들은 모두 선을 좋아합니다. 사람의 영재 가운데서 성심으로 학문을 원하는 사람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내가 하늘과 성인의 문정(門庭)에서 죄를 얻는 것이 이미 심하거늘,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이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치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주석 4)
남명은 이에 대해 회신을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식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 시속이 숭상하는 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나귀 가죽에 기린의 모형을 뒤집어씌운 것 같은 고질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해 혹세는 면하는데 급급하고 있으니, 크게 어진 이가 있더라도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문의 종장인 사람이 오로지 상달만 주로하고, 하달을 궁구하지 않아 구제하기 어려운 습속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그와 더불어 처신을 왕복하여 논란을 했지만, 돌아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은 지금 폐단을 구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석 5)

주석
1> 윤사순, <한국성리학의 전개와 특징>, <한국사상의 심층연구>, 189쪽, 우석, 1982.
2> 강정화, 앞의 책, 125~126쪽.
3> <퇴계에게 드림>, <교감국역 남명집>
4> <퇴계전서>, 권 10, <답조전중(答曺傳仲)>.
5> <교감국역 남명집>, <오자강에게 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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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나이 차에도 논쟁이 가능하다니

이돈삼2015. 7. 3. 21:24
퇴계 이황과 8년 동안 사단칠정 논했던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

[오마이뉴스 이돈삼 기자]

 

 고봉서원의 빙월당. 서원의 주강당이다.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하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 이돈삼
광주유니버시아드가 시작됐다. 세계 대학생들의 스포츠 축제가 열리고 있는 '빛고을' 광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지역과 세대의 차이를 뛰어넘어서 경북 안동에 사는 퇴계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성리학을 논했던 고봉 기대승을 만날 수 있는 월봉서원으로 간다. 지난 2일이다.

고봉 기대승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면서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20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30대에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퇴계 이황과 8년 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면서 한국철학사 정립에 기여했다. 성균관 대사성과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지만, 4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봉이 퇴계의 사단칠정 논쟁, '사칠논변'이라고도 한다. 당시 사단과 칠정은 유교에서 중요한 개념이었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마리가 되는 인간의 네 가지 마음,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네 가지 덕목을 가리킨다.

 

 고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너브실마을 전경. 임곡에서 황룡 방면의 도로에서 본 풍경이다.
ⓒ 이돈삼
 고봉서원으로 가는 길. 돌담 기와에 능소화가 요염하게 피어 있다.
ⓒ 이돈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겸손하게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이다. 칠정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 즉 기쁨과 화남,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 등이다.

사단과 칠정을 주제로 한 고봉과 퇴계 논쟁의 쟁점은 주기론과 주리론이었다. 당시 성리학은 우주의 근원과 질서, 그리고 인간의 심성을 '이(理)'와 '기(氣)' 두 가지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고봉은 사단칠정이 모두 정이라는 주기설을 주장하며 퇴계의 주리론과 맞섰다.

퇴계의 주리론은 경험이나 현실보다는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중요시한 이론이었다. 영남학파를 형성했다. 상대적으로 주기론은 현실 세계를 중요시하면서도 도덕세계를 존중하는 철학 체계를 수립했다.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고봉도 주기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고봉서원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백우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고봉서원 앞 풍경. 말끔하게 단장된 물길과 어우러져 있다.
ⓒ 이돈삼
논제도 논제지만, 퇴계와 고봉의 나이 차이도 상당했다. 사단칠정 논쟁을 시작하던 당시 퇴계의 나이는 58살, 고봉은 32살이었다. 26년 차이였다. 퇴계가 1501년, 고봉은 1527년에 태어났다. 당시를 감안하면 할아버지와 손자뻘이 됐을 것이다. 직위 차이도 컸다. 당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 지금의 서울대학교 총장 격이었다.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선비였을 뿐이다.

퇴계의 인품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받아주지 않으면 논쟁이 성립될 수 없을 텐데, 다 받아줬다. 지금 같으면 나이와 서열을 따졌을 텐데, 퇴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퇴계의 입장에서는 시쳇말로 '잘 해야 본전'일 텐데도, 그렇게 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대단했다.

퇴계와 고봉은 나이와 직위를 떠난 벗이었다. 멘토와 멘티 관계였다. 이렇게 무려 13년 동안, 그것도 광주와 안동에 살면서 114통의 장문의 서신을 주고받았다.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은 사칠논변을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마주한 건 평생 네 번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신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교류는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논쟁으로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 후대에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고봉서원 빙월당 전경. 맑은 달과 투명한 얼음처럼 청렴한 마음을 가진 고봉 기대승의 사람됨을 닮았다.
ⓒ 이돈삼
 고봉서원을 감싸고 있는 백우산의 숲길. 이 길을 따라 서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 이돈삼
월봉서원은 고봉의 장남 기효증이 세웠다. 선조 10년, 1607년이었다.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헐렸다. 1941년에 고봉의 후손들이 지금의 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지었다. 사당과 장판각 등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복원됐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그리고 선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뤄져 있다. 월봉서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망천문(望川門)으로 들어가면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는 동쪽에 있는 기숙사, 서재는 서쪽의 기숙사다. 동재는 명성재(明誠齋), 서재는 존성재(存省齋)라 이름 붙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축물이 빙월당(氷月堂)이다. 맑은 달과 투명한 얼음처럼 청렴한 마음을 기려 정조임금이 하사했다. 고봉의 올곧고 투명한 사람됨을 담은 이름이다. 이 빙월당이 고봉서원의 주강당이다. 당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하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광주시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숭덕사는 고봉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여기서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장판각은 오늘날의 인쇄소와 비슷하다. 여기에는 고봉집(高峯集), 논사록(論思錄) 등의 목판 474개가 보존돼 있다. 

 

 고봉 기대승의 시조비. 고봉서원을 감싸고 있는 숲길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고봉 기대승의 묘. 백우산 자락에서도 앞이 탁 트여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월봉서원은 백우산이 감싸고 있다. 산속 숲길을 따라 서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볼 수도 있다. 숲길도 다소곳하다. 숲길을 따라가면 고봉의 시조비를 만난다. 고봉의 묘소도 여기에 있다. 앞이 탁 트여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 두 기의 봉분 가운데 왼쪽이 고봉이고, 오른쪽은 그의 부인이 모셔져 있다.

서원 아래에 고봉학술원도 있다. 고봉의 사상을 연구하는 공간이다. 고봉의 13대손인 기세훈씨가 주축이 돼서 설립했다. 학술원 안에 별당 애일당(愛日堂)이 있다. 고봉의 6대손 기언복이 연로한 어머니를 위해 숙종 때 세운 집이다.

 

 윤상원과 박기순의 얼굴이 새겨진 기념비. 윤상원 열사의 생가에 설치돼 있다.
ⓒ 이돈삼
 윤상원 열사의 생가. 몇 해 전 화재로 없어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열사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사진과 일기, 비품 등이 전시돼 있다.
ⓒ 이돈삼
고봉서원에서 가까운 데에 윤상원 열사 생가도 있다. 윤상원 열사는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산화했다. 윤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맺은 박기순씨의 얼굴을 함께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박기순은 광주 광천동에 들불야학을 창립해 노동자 야학을 하다가 1978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1982년 2월 망월묘역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헌정된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생가의 전시관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악보를 만날 수 있다. 열사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사진과 일기, 비품 등이 전시돼 있다.

고찰 양림사와 한말 의병활동의 본거지였던 용진정사도 가깝다. 고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임곡은 또 장성군 황룡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황룡으로 가면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는 필암서원이 있다.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리 박수량 선생의 백비도 있다. 편백숲이 아름다운 축령산 자연휴양림도 있다.

 

 대숲을 품은 너브실마을의 길. 애일당과 고봉학술원의 뒷편 풍경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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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봉서원 찾아가는 길 월봉서원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너브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호남고속국도 광산나들목에서 하남산단 9번도로를 타고 임곡 방면으로 간다. 연동삼거리에서 우회전, 임곡 소재지를 지나 장성 황룡 방면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월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다.(4)

 

 

[문학예술]김시습에서 정약용까지…‘신화가 된 천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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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업데이트 2009년 9월 26일 13시 48분 
 
◇신화가 된 천재들/윤채근 지음/299쪽·1만 원·랜덤하우스

 

이 책은 지난해 이맘때 출간된 ‘거문고 줄 꽂아놓고’(돌베개)를 떠올리게 한다. ‘거문고…’가 우리 옛사람 12쌍의 돈독한 우정이 빚어낸 고고한 내면 풍경을 그들이 남긴 글을 통해서 그려냈다면 이 책은 신라 최치원부터 조선 정약용까지 우리 문인 17명의 작품에 새겨진 영혼의 낙관(落款)을 읽어낸다.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최치원의 시에서 당나라 유학을 떠나는 12세 아들에게 “10년 안에 급제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다”라는 독한 말을 남긴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찾아낸다. 반면 서포 김만중의 작품에선 유복자였던 자신과 다섯 살 터울의 형 만기 그리고 어머니 해평 윤씨 세 모자를 운명의 동아줄로 묶어 놓은 ‘자궁 가족’의 징후를 발견한다.

조선시대 고고한 저항정신의 상징 김시습과 혁명적 풍운아를 대표하는 허균에 대한 독법은 현대작가론을 뺨칠 만큼 독창적이다.

세조의 쿠데타에 맞서 출사의 길을 포기한 김시습의 인생행로는 고심에 찬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 아니라 한때의 우발적이고 조건반사적인 행동이 낳은 파문을 자신의 운명으로 감내해야 했던 사내가 택한 니체의 ‘아모르파티(운명에 대한 사랑)’적 변주다. 그래서 김시습은 “인생을 건 한판 도박에 심취했던 얄궂은 운명의 천재였으며 그 서툴게 시작한 도박이 일파만파로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삶 자체까지 분쇄해 버린 고독한 시간의 산책자”이자 “시간과 싸운 승부사”로 포착된다.

시에 대한 절필 선언을 한 1612년을 전후로 기행을 일삼던 시인에서 마키아벨리적 정치인으로 변신한 허균이 꿈꾼 것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예술과 현실을 일치시키려 한 내면의 혁명이었다. 아버지와 맏형이 죽고 절친했던 시인 권필마저 필화(筆禍)로 숨진 절대 고독의 시간, 허균은 시를 살해한 뒤 서사공간으로 비월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정중한 은유를 견디지 못해 세계의 진정한 서사가(정치가)로 변신하려는 무모한 도박이었다. 그래서 “이 조급증의 사내는 살과 뼈의 세계를 본 자였지만 서정을 버린 대가로 생명을 바쳐야 했다”.

이처럼 우리 고전작가를 그 시대의 윤리적 세계관을 비껴서 읽어내는 저자의 독해는 현대 전위 예술가들의 작가론을 펼친 수전 손태그의 ‘우울한 열정’에 가깝다. 텍스트를 통해 그들 삶의 정수를 읽어낸다는 것은 자칫 ‘관념적 유희’라고 치부될 수 있다. 손태그는 그나마 풍성한 텍스트를 쥐고 있었지만 이 책의 저자에겐 단편적 텍스트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특정 장면을 통해 전체 풍경을 상상해 내도록 하는 영화적 몽타주 기법을 차용한다. 문인 17명의 삶에서 자신의 주제의식과 부응하는 극적인 장면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그들 삶을 관통한 주제의식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그런 영화적 기법이 가장 빛을 발한 부분은 아마도 황진이 편일 것이다. 이사종과 약속한 6년의 동거생활이 끝나자 “이제 시간이 됐군요”라고 단호하게 이별을 선고하는 황진이. 반면 한 달만 살고 헤어질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 소세양과 약속한 이별의 순간 단 한 편의 시로 그를 무너뜨린 황진이. 그리고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 베어내었다 임 오는 밤 굽이굽이 펼치리라’라는 황진이의 그 유명한 시조. 저자는 띄엄띄엄 이어진 이 장면들을 단 한 구절로 꿰뚫어 버린다. “남성은 시간을 계산하고 여성은 시간을 훔친다.”

시간을 정복하려다 시간의 노예가 된 남자들의 시계를 ‘달리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으로 줄였다 늘이는 것이야말로 황진이의 필살기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진이의 이불은 시간을 가두었다 내뿜는 풀무”가 되고 “황진이의 사랑은 주름 없이 펼쳐지는 융단”이 된다는 저자의 통찰에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조선시대의 신동, 특별한 게 있었다

2008.07.29뉴스메이커 785호
 

이이, 김시습, 유성룡, 이덕형, 이가환 등 3~4세에 글 깨우쳐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순) 율곡 이이·매월당 김시습·한음 이덕형·서애 유성룡

 

역사에는 가끔 그 시대의 수준을 뛰어넘는 천재가 등장한다. 보는 시험마다 모두 장원해 9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린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천재성은 유명하다. 그러나 ‘역사’라는 수식어가 붙는 천재는 머리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역사 속의 천재는 그 시대에 가장 머리가 좋거나 각종 시험에 탁월한 성적을 낸 사람이 아니다. 역사 속의 천재는 특유의 혜안으로 시대를 앞서 보고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을 뜻한다.

 

조선의 천재는 율곡 이이를 비롯해 매월당 김시습, 읍취헌 박은, 북창 정렴, 서애 유성룡, 아계 이산해, 하서 김인후, 한음 이덕형, 청장관 이덕무, 정헌 이가환 등을 꼽는데, 이들 모두 3~4세 때 글을 깨우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시습은 5세 때 정승 허조가 “내가 늙었으니 노(老) 자를 가지고 시를 지으라”고 하자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라고 지었고, 허정승이 무릎을 치면서 “이 아이는 이른바 신동이다”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패관잡기’에 전한다. 세종은 5살이 된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 박이창에게 명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짓게 했다. 김시습은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來時襁湺金時習)’이라고 대답했고,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키면서는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小亨舟宅何人在)’라고 지었다. 세종이 비단 30필을 내리자 그 끝을 서로 이어서 끌고 가 김오세(金五世)라고 불렸다. 그러나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세조를 인정할 수 없던 김시습은 스스로 승려가 되어 불우하게 생을 마쳤다. 세상과 불화한 천재였는데, 박은 역시 갑자사화 때 26세의 나이로 사형당했다.

 

특유의 혜안으로 시대를 앞서 보다
당대 제일의 지식인이면서 서자라는 이유로 불우하게 지낸 천재가 이덕무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어서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린 이덕무는 ‘이목구심서’에서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서 밤중에 일어나 ‘한서’ 1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추위를 조금 막았다”라고 쓸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서자들의 처지를 동정했던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용하면서 한 시대를 주름잡는다.

 

다산 정약용이 “질문한 사람마다 깜짝 놀라서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라고 말한 희대의 천재가 이가환이었다. 정약용은 “그의 기억력은 고금에 뛰어나 한 차례 눈으로 보기만 한 것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면서 “무릇 글자로 된 것은 한 번 건드리기만 하면 물 쏟아지듯 막힌 데가 없었으며, 모두 정밀히 연구하고 알맹이를 파내서 한결같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 같았다”라고 설명한다.

정조 시대에 공조판서까지 오른 이가환은 정조 사후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와 노론에 의해 천주교도라는 혐의를 받고 사형당했다. 그 역시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였다. 그런 천재를 죽인 것은 비단 그 한 사람만의 불행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불행이었다.(6)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문제적 인물' 매월당이 본 불교…'김시습, 불교를 말하다'

김예나2024. 8. 31. 07:00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 '청한잡저 2' 등 연구한 책 펴내
보물 '김시습 초상'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소설집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여러모로 독특한 삶을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를 잘 짓는 신동'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20대 초반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는 사흘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다가 통곡하고 책을 불살라 버린다.

미친 시늉을 하며 측간에 빠졌다가 달아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머리를 깎고 전국 각지를 방랑하면서 탁월한 문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과거 공부를 하던 선비에서 승려의 삶으로 나아간 김시습을 어떤 사상가로 봐야 할까.

고전문학자인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김시습, 불교를 말하다'(돌베개)는 김시습이 남긴 불교 저술을 토대로 그의 사상을 분석한 책이다.

박 교수는 김시습을 "한국 문학사와 사상사에서 대단히 문제적인 인물"이라고 본다.

"그는 평생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사상을 모색했던바, 이 점에서 대체로 둘 중 어느 하나에 속한 채 사상 행위를 했던 전통 시대의 여느 사상가와 구별된다."

충남 유형문화유산 '무량사 김시습 부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박 교수는 여러 저술 가운데 불교에 대한 담론 두 종에 주목한다.

김시습의 문집인 '매월당집'(梅月堂集)에 '잡저'라는 이름으로 실린 '청한잡저(淸寒雜著) 2', 최근 일본에서 존재가 알려진 '임천가화'(林泉佳話)가 그것이다.

박 교수는 책에서 두 글을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뒤, 그 성격을 상세히 밝힌다.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청한잡저 2'는 불교란 무엇인지, 불교의 사회·정치적 효용은 무엇인지 등을 논한 글이다. 불교에 대한 김시습의 생각이 담긴 셈이다.

 

박 교수는 특히 불교의 관점에서 군주란 어떠해야 하는지 짚은 부분을 강조했다.

그는 "(김시습은) 마음을 밝히고 욕심을 줄여 자비 즉 인애의 마음으로 백성을 편안히 잘살게 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에 대한 제대로 된 숭배라고 봤다"고 설명한다.

김시습이 수락산에 머무르던 시절인 1476년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임천가화'는 그간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다가 지난해 일본 국립공문서관 내각 문고에서 찾아 가치가 큰 자료다.

박 교수는 "두 책은 불교를 '대상화'해 바라보고 있음이 특이하다. 그리하여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정치와 인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가 등을 이야기한다"고 짚었다.

이어 "전근대 동아시아에 불경(佛經)을 해석하거나 불서(佛書·불교에 관한 서적)의 요지를 밝힌 책은 수없이 많지만 정작 이런 종류의 책은 찾기 어렵다"고 의미를 강조했다.

박 교수는 김시습의 사상 세계를 연구하면서 기존 연구에도 일부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책에 "논쟁적 문제 제기가 적지 않다"면서도 "김시습 사상 연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바랐다.(7)

 

 
책 표지 이미지 [돌베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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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백성을 편하게 만드는 仁政이 가장 급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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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업데이트 2009년 9월 24일 23시 02분 
율곡의 책문 가운데 도적책(盜賊策)편 원문. 율곡은 조정을 향해 “온 나라가 염치를 숭상하는 풍속을 이뤄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도록 올바른 정치를 펴 달라”고 당부했다.
◇율곡문답/김태완 지음/584쪽·2만5000원·역사비평사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은 오늘날의 논술시험과 비슷한 형태였다.

정치 사회 현안과 관련해 왕이 제시하는 문제에 응시생들이 답하는 것이다. 왕이 내는 문제를 책문(策問)이라 불렀고, 답을 대책(對策)이라 했다.

이 책은 율곡 이이가 쓴 책문과 대책 17편을 수록했다. 율곡의 책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율곡이 과거에 17번 응시했을 리는 없으므로 책문의 형식으로 정치적 견해를 제시하거나 철학적 사유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율곡의 활동기인 16세기는 사회 전반에 걸쳐 갖가지 모순이 발생하던 시기였다. 기득권층과 신흥 신료집단의 권력 다툼, 왕권과 신권의 갈등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졌다. 변방에선 여진족과 오랑캐가 활개를 쳤다. 내우외환의 상황에서도 오랜 문치(文治)에 젖어 허약해진 학자 관료들은 개혁에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선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낡은 집’이라고 했던 율곡은 자나 깨나 나라 걱정이었다. 율곡은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왕과 관료들에 대한 충고 등을 책문과 대책의 형태로 썼다.

‘문책(文策)’편에서 그는 “과거(科擧)의 글은 규격이 있어서 아무리 훌륭한 글이라도 규격에 맞지 않으면 내침을 당하므로 과거는 진정한 인재를 뽑기에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며 과거의 폐단을 지적한다.

‘문무책(文武策)’에서 그는 학문도, 국방도 튼튼하지 못한 조선의 현실을 비판한다. 율곡은 왕의 실천과 인도가 중요하다며 “도덕적으로 인륜의 표준이 되시고, 군대를 움직임은 하늘의 명령에 따라 하신다면 문무가 조화롭게 이뤄질 것”이라고 충고한다.

율곡은 단순히 교훈적인 문장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학식을 동원해 한 무제, 당 태종 등의 치적을 열거하거나 고사를 인용하고, 역사 속에서 벤치마킹할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도적책(盜賊策)’에선 정치가 소통하지 않는 현실이 도적을 만든다면서 이를 막을 방법을 제시한다.

“임금이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간악한 풍속이 끊어지고, 임금이 산업을 다스리는 도리를 잃으면 억센 도적이 많아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도적을 멈추게 하려면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인정(仁政)보다 시급한 것이 없다.”

율곡은 ‘천도인사책(天道人事策)’에서 하늘과 사람 사이에 선과 악이 서로 교감하는 이치가 무엇인지를 따지고, ‘성책(誠策)’에선 “정성을 다하면 결국엔 효험을 거둔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군정책(軍政策)’의 요지는 ‘훌륭한 지휘자 선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고, ‘의약책(醫藥策)’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병이 드는데 윗사람이 백성을 교화하고, 관직을 바로잡으면 나라의 병은 다스려진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사회 현실에 대한 글만 있는 건 아니다. 17편 가운데 절반 정도는 하늘의 이치, 우주의 질서, 삶과 죽음,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 등 율곡의 생각이 담겨 있다.

책을 덮으면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 떠오른다. 율곡이 살고 있다면 어떤 자문과 자답을 할까.(8)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 담긴 정신

조진태2021. 1. 2. 09:33
1월 2일, 이순신의 전사와 서애 선생의 파직일에 부쳐

[조진태 기자]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일상이 멈추었던 2020년, 임진란 7년 전란의 아픔을 담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리고 2021년에도 코로나와의 힘겨운 싸움은 여전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백성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된 공포와 고통속에서 유성룡이 징비록을 통해 후세에게 전하고 역사의 교훈은 무엇일까? 이를 살피기 위해 정치 지도자로서 7년 전란의 중심에 서 있었던 그의 행적을 한번쯤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21년 1월 2일은 음력 11월 19일, 4백여 년 전 이날, 전란을 극복한 두 주역이 역사의 중심 무대에서 사라진다. 19일 새벽 여명 무렵, 남해 관음포에서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노량 해역에는 시뻘건 불기둥이 된새바람을 뜨겁게 달구고, 총포와 조총이 뿜어내는 화약 연기 속을 비집고 화살과 편전이 날아다녔다.

매서운 강추위 속에서 장수와 병사들이 도주하는 왜군의 목숨을 끝까지 거두려고 사투를 벌이는 순간, 조정에서는 거대한 정치 공세가 마무리된다. 7년 전란을 진두지휘한 영의정 서애 유성룡이 사헌부, 사간원의 지칠 줄 모르는 탄핵을 받고 파직된다.

'파당을 만들고, 왜적과 화친했으며, 유명무실한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라를 도탄에 빠뜨렸고, 안동의 기름진 땅은 모조리 수탈한 탐관오리'라는 죄명이었다. 탄핵상소는 '글을 배운 자치고, 유성룡에게 침을 뱉지 않는 이가 없다'면서 삭탈관작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궁궐을 나선 유성룡은 목멱산 자락 묵사동의 살림을 정리하고, 여기저기 손을 벌려 길양식을 꾸어가면서 안동으로 향한다. 아마 이때쯤은 통제사 이순신의 부음을 전해 듣고 통한에 빠졌을 것이다. 생전에 이순신이 보낸 남해안의 유자 서른 개는 벗을 향한 그리움이다.

7년 전란과 오랜 지기인 이순신의 전사, 가슴 깊숙한 곳에서 느낀 통증이 유성룡에게 여생 동안 징비록 집필을 과제로 남긴다. 낙향 길, 유성룡은 전란 당시 투구를 쓰고 달리던 경기도 대탄에 이르러 시 한수를 남겼다.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무술년 12월이었다.
 
전원으로 가는 길
벼슬아치 생활, 40년
천변에 말을 멈추고 돌아보니,
한양성 기색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안동에서 유성룡은 삭탈관작된 직첩이 되돌려지고, 1601년 청백리에 이름이 올랐다는 소식을 접해도 '두문불출'로 일관했다. 1604년 선조가 임진왜란의 공신들을 회맹제에 초대했을 때에도 거절했고, 공신의 초상을 그리는 화사에게는 '세운 공이 없다'면서 발걸음을 돌려 세웠다.
 

그는 이때 짧은 글을 통해 "병이 깊어 강촌에서 스스로를 수양하는 마음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들의 발소리만 들어도 두렵다"고 심정을 토로한다. 이 두렵고 떨린 마음이,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성의 기록인 <징비록>을 탄생시킨다.

<징비록>은 "나는 조심스레 스스로를 삼간다"는 시경 주송의 소비편으로 시작해, 전사한 이순신의 생애를 압축한 글로 매듭된다. 유성룡은 "장군이 있을 때, 왜군은 한산진을 감히 범할 생각조차 못했다. 장수와 병사들은 그를 군신으로 받들고 단합했다"고 추모한다.

저술을 마친 유성룡은 안동하회마을을 떠나, 산간 오지 마을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를 짓고, 초동과 더불어 희희낙락 상수리를 줍고 장작불을 지피며 모진 삶을 웃음으로 풀어내는 휴식기를 가진 뒤, 1607년 5월 6일, 자신의 말 그대로 안정을 취해 자연으로 돌아갔다.

자식들에게는 "사람이 욕심에 빠지면 염치를 잃는다"면서 "자신이 취한 곳에 만족하면 사람은 어느 곳이든 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선조에게 유차를 보내, 공평한 정사의 처리와 낡은 제도의 개혁, 그리고 인재의 고른 등용이라는 통치 원리를 다시 청한다.

1607년 5월 13일, 천릿길 안동에서 서애의 부음이 전해진 한양성, 백성들이 시전의 문을 걸어 닫았다. 새벽부터 목멱산 북쪽 묵사동의 폐허가 된 집터에 가난한 백성들의 발걸음이 구름을 이룬다. 상가는 천리 밖에 떨어져 있었지만, 영정도 없이 지방만이 놓인 노지(露地)에 각 관청의 늙은 아전과 서리 등이 곡식과 베를 내고, 신료들이 거들면서 빈소가 하나 더 마련되었다.

선조실록은 이를 조선조 최초의 자발적인 '백성장'으로 기록한다. 부음을 전해들은 백성들의 통곡과 아픔을 자아내는 힘, 그것은 그가 살아온 여정 때문일 것이다. 징비록에 담긴 서애의 정신이 자신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실록이 증명한다.

정치 지도자로서의 서애는 합리적인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동인에 몸담았지만, 파당의 논리에 매몰되지 않았다. 서인 정철은 임진란이 발발하기 4년 전 기축옥사를 주도하면서, 동인과 무고한 백성 수천여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놓고, 동인이 서인을 쓸어버릴 수 있는 절호의 정치적 기회를 맞았지만 유성룡이 서인 편을 들어주면서 무산된다.

이때부터 동인은 남북으로 갈라져 북인은 유성룡을 '배신자'로 낙인찍고, 남인을 서인보다 더 증오했으며 끝끝내 유성룡 탄핵을 주도한다. 자신이 속한 파당을 떠나 제 목소리를 내는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될 수 있는지 지금도 미지수인 현실이다.

전란 기간 체찰사와 영의정 등 요직을 맡았던 유성룡은 늘 전란의 현장에 서 있었다. 전란이 터지자 평양과 의주를 오가며 명나라 참전을 이끌어 내었고, 임진년 7월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의 군대가 평양성 회복 작전을 전개할 때도 고질병인 치질에 시달리면서 이들의 병참과 기동 지원을 맡았다.

전란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 초 평양성 수복 작전을 주도한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조명연합 사령부를 지휘했다. 명나라 군대가 살얼음이 떠다니는 임진강을 건널 때, 백성들과 함께 부교를 만들었고, 임진강 동파역에 최전선 사령부를 꾸렸다. 명나라 총병 사대수는 왜군 자객을 우려해 개성으로 사령부를 옮기라고 사정하다 결국 명나라 군사 수십명을 호위병으로 붙어준다.

그는 전란 막바지인 울산왜성 전투에서도 한겨울의 추위속에 최전선을 지켰다. 정유재란 당시 한양이 다시 함락될 것을 우려해 가솔을 서둘러 피란시킨 신료들은 이후 유성룡을 '화친론자'로 몰아서 탄핵하는 몰염치를 보인다. 힘겨운 현실은 외면하고, 넘치는 글재주로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을 덮어버린 정치인들이 사후에 백성장을 받을 리 만무하다.

그는 전란속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아픔을 뼈저리게 공감한 지도자였다. 백성을 노역에 동원하면서 매를 들지 않고 공명첩을 빼곡하게 만들어 이들의 공과를 기록해서 훗날의 보상을 약속했다. 명나라 총병 사대수가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이를 품에 품고 오자, 그 자리에서 통곡한다. 선조가 피란간 행재소로 향하던 세곡선을 세워 솔잎가루를 빻아 섞은 쌀가루 물을 임진강가에서 백성들에게 나눈다.

쌀가루가 떨어지면서 유성룡이 초조해하자 명나라 총병은 자신의 군량 30석을 빼내 유성룡에게 보탠다.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아픔과 연민의 공감일 것이다. 포로로 잡혀 왜군에게 부역한 백성들의 생명도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그중 군기시 장인 대풍손은 옥에서 풀려나와 훈련도감의 화약을 제조하는 일에 정성을 다한다. 모든 정치인이 백성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정치인이 백성을 위하는지 백성들은 결국 알게 되는 것이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으로 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계사년(1593년)과 병신년(1596년) 동안 유성룡은 개혁정책을 쏟아낸다. 그리고 중앙 관료들의 이권을 건드리고, 신분제도를 흔들면서 미운털이 집중적으로 박힌다. 계사년 4월 명나라 군대는 한양성에 입성한 뒤, 진군을 멈추었고 왜군은 고스란히 빠져나가 남해안 일대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진주했다.

유성룡이 몸져 누운 시기, 명나라 장수 낙상지가 유성룡을 찾아, '조선이 아파 대인마저 병이 들었다'면서 조선 병사의 훈련과 진법 훈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다. 거짓말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난 유성룡은 조선의 직업군인 양성기관인 훈련도감을 태동시켰고, 그해 가을 도제조를 맡아 신분을 초월한 군관의 양성을 시도한다.

또 노비의 무과시험을 밀어붙이면서 노비와 토지를 기반으로 문벌의 부를 지탱하던 사대부들의 공적이 되었다. 이때 사대부들은 본래 노비는 지모가 부족하게 태어나, 군관이나 지휘관이 될 수 없다는 상소문을 서로 돌려가며 읽고 있었다.

제도 개혁은 최종적으로 부패의 온상이었던 공납제도를 건드린다.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이 아닌 쌀이나 곡식으로 바꾸어 받는 작미법을 들고 나온 것이다. 농어민들이 바치는 계절, 지역별 특산물에 대해 관청에서 '품질이 낮다'고 시비를 걸어 퇴짜를 놓으면, 이들은 멀쩡한 제 물건을 두고, 시세의 서너배를 주고 방납(防納)업자의 물품을 구입해야했다.

지방과 중앙 관리, 방납업자까지 치밀하게 짜여진 체계적인 비리구조였고, 백성 살림과 국가 재정을 파탄시켰다. 제도가 시행되자 사헌부과 사간원의 관리들은 작미법으로 종이가 올라오지 않아 상소를 올리지 못한다는 고발장을 연일 써대면서 유성룡을 괴롭혔다.

군제와 세제의 개혁은 모두 사대부의 이권을 겨냥했고, 제도의 정착 과정에서 유성룡은 공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들은 늘 백성을 사랑한다지만 자신의 이권만은 손상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결국 전란 기간 내내 그가 황소처럼 걸어온 길이, 탄핵 사유로 둔갑해 전란의 마지막 날 파직된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는 서애 유성룡 선생의 묘역이 있다. 마을 입구의 수동교회를 지나 차량 한 대가 겨우 지날 만한 좁은 농로를 올라가면, 자그마한 공터가 나온다. 서너 대의 차량을 세울 정도에 불과하다.
 
  안동시 풍산읍 수리 서애 유성룡묘
ⓒ 조진태
 
그 위로 서애 선생의 묘역이 보인다. 조선조 최초의 백성장을 받은 서애 선생의 묘소는 쓸쓸하고 보기에 따라 초라할 지경이다. 지난 여름 야트막한 둔덕을 올라 찾은 묘소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생전의 청백리 서애 선생을 닮았고, 스스로를 먼저 삼가는 징비록의 정신을 연상시킨다.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것, 징비록을 읽는 모든 이들이 자칫 잊기 쉬운 징비록의 정신이다. 400여년이 지난 후손이 서애 선생을 만난다면 딱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한양성 기색은 여전히 그대로 입니까?"라는 물음이다.
    
▲ 안동시 풍산읍 수리 유성룡 묘 안동시 풍산읍 수리 서애 유성룡 묘
ⓒ 조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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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1억번 읽은 '조선의 둔재'..세종도 무릎 꿇은 '독서왕'이 됐다 [이기환의 Hi-story]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2021. 4. 27. 06:02

[경향신문]

 

https://youtu.be/pK2QEeH6KhE

 

 

최근 충북 증평군에서 색다른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독서왕김득신문학관’이 준비한 ‘느리지만 끝내 이루었던 길 독서왕 김득신’ 특별전인데요. 김득신의 유물인 <백곡집>과 <임인증광별시방목>이 충북도지정문화재가 된 것을 기념해서 7월11일까지 열립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김득신은 ‘야묘도추’ 등을 그린 풍속화가 김득신(1754~1822)이 아닙니다. 그 분과 동명이인이자 조선 중기의 시인인 백곡 김득신(1604~1684)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백곡 김득신은 천하의 책벌레로 알려진 세종대왕(재위 1418~1450)도 울고 갈 지독한 독서왕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더욱이 김득신은 어려서부터 둔재로 소문났던 사람입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세종을 능가하는’ 독서왕이 됐을까요.

조선 중기의 시인인 백곡 김득신(왼쪽 동상)은 소문난 책벌레였던 세종대왕(오른쪽 동상)을 능가하는 독서왕이었다.


■세종의 ‘자뻑’…나보다 책 좋아하는 사람 나와봐

먼저 세종대왕을 알아볼까요. 세종의 독서열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책을 100번씩 반복해서 읽는 것은 기본이었구요. <좌전>과 <초사> 같은 책들은 200번 읽었다고 합니다. 몸이 아파도 독서에 몰입하니 하루는 아버지 태종(1400~1418)이 환관을 시켜 책을 다 거두어갔답니다. 그러나 환관의 실수로 <구소수간(歐蘇手簡·구양수와 소식의 편지 모음집)>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습니다. 세종은 이 책을 1100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 등)

김득신은 자신이 평생 읽은 책의 편수를 기록한 ‘독수기’에서 1만번 이상 읽은 고문 36편을 열거해놓았다. 1만번 이하 읽은 것은 읽은 축에도 넣지 않았다.|독서왕김득신문학관 제공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나보다 책 많이 읽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고 자화자찬했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 ‘자뻑’이나요. 그것도 정사인 <세종실록>에 버젓이 등장하는데요. 즉 1423년(세종 5년) 경연(임금에게 유학 경전을 강론하는 일)에 나선 세종이 남송 주희(1130~1200)의 역사서인 <통감강목>을 강독한 뒤 “내가 그 어렵다는 <통감강목>을 20~30번을 읽었다”면서 은근슬쩍 자랑합니다. <통감강목>은 북송 사마광(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을 주희가 공자가 지은 <춘추>의 체제에 따라 재편찬한 역사서인데요.

하지만 편수가 너무 많고 난삽해서 전체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엄청 어려웠지만 나는 그래도 20~30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은근슬쩍 자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읽었는데 자네들은 읽어봤냐”는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세종실록>은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임금의 독서열을 침이 마르도록 상찬합니다.

충북 괴산의 괴강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김득신의 누정. 김득신이 만년에 책을 읽고 시를 지었던 곳이다. <사기> ‘백이열전’을 1억번 읽었다고 해서 ‘억만재’라 했다. 지금은 ‘취묵당’(충북도문화재자료 61호) 이라 한다.


■사람 얼굴 이름 외우기 천재인 세종

세종은 독서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자랑했는데요. 예를 들면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는가. 없지 않은가.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거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말야. 책을 본 뒤에 잊어버리는 것이 없었어!”라고 한껏 자랑합니다. 이 대목에서 <세종실록>의 필자는 세종의 비범함에 강조점을 찍습니다.

“임금이 한번 읽은 서적을 기억해내는 재주만 있는게 아니다. 수많은 신하들의 이름과 그 사람의 이력은 물론 그 사람의 가계도까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 한번 신하의 얼굴을 보면 여러 해가 지났다 해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아무게야!’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한다.”

세종의 끊임없는 ‘자뻑’ 내용을 알고싶다면 <세종실록> 1423년 12월23일자를 읽어보십시요.

왼쪽 사진은 ‘왕세자 공부도’(세종대왕기념관 소장). 세종은 왕세자 시절부터 공부벌레로 유명했다. <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자는 세종이 그 어렵다는 <통감강목>을 3년에 걸쳐 20~30번씩 반복해서 독파했다고 은근슬쩍 자랑하고 있다.

■<사기> ‘백이·숙제 열전’은 1억번 이상 읽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다독’하면 천하의 세종대왕도 무릎을 꿇을만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백곡 김득신입니다. 김득신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1554~1592)장군의 손자인데요. 먼저 김득신 본인이 평생 읽은 책을 기록한 ‘독수기(讀數記)’를 볼까요.

“<사기> ‘백이전’은 1억1만1000번, ‘능허대기’는 2만500번, ‘노자전’ ‘분왕’ ‘벽력금’ 등은 2만번, ‘제책’ ‘귀신장’…등은 1만8000번 등 모두 37편….”(<백곡집>)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사기> 중 ‘열전·백이열전’ 편을 1억번 이상 읽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1만4000번 이상 읽은 책의 편수가 36편이랍니다. 무엇보다 “읽은 회수가 1만번이 넘지 않은 <장자>와 <사기>, <대학> 등은 기록에서 뺀다”고 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1만번 이상 읽지 않은 책은 ‘읽은 축’에도 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서재 이름을 ‘억만재’라 지었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에이 거짓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책을 억만번 읽었을까요. 맞습니다. 예전의 억(億)은 ‘많은 수’ 혹은 지금의 10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김득신은 <사기> ‘백이열전’을 11만3000번 읽었다는 얘기죠.

서계 박세당(1629~1703)은 “김득신은 시 한 글자를 지을 때도 1000번을 숙고하느라 끙끙 댔다. 노새에 앉아 길을 갈 적에는 ‘길을 비키라’는 관졸들의 고함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그림 출처:독서왕김득신문학관 제공)


■1억번 이상 읽은 책도 기억못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세종과 달리 조선 최고의 독서왕 김득신은 손꼽히는 둔재였다는 사실입니다.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머리가 아둔해졌다는 겁니다. ‘노둔한(미련하고 둔한)’ 김득신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단적인 예로 김득신은 머리가 나빠 그렇게 1억번 이상 읽은 책을 제대로 외우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김득신은 1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깨우쳤는데요. 그 때 배운 <십구사략>의 첫단락은 겨우 26자에 불과했는데요. 그런데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답니다.

홍한주(1798~1866)의 <지수염필>이 전하는 김득신과 관련된 ‘웃픈’ 사연이 하나 있네요.

김득신이 말을 타고 어느 집을 지나다가 글읽는 소리를 듣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글귀인데…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그러자 김득신의 말고삐를 끌던 하인이 씩 웃으며 말했답니다.

“아니 저 글귀는 ‘부학자 재적극박’(夫學者 載籍極博·무릇 학식있는 사람은 전적이 극히 많지만…) 어쩌구 하는 말이잖아요. 나으리가 평생 읽으신 글귀잖아요. 저도 (지겹도록 들어서) 외었는데 나으리만 모르겠다는 겁니까.”

김득신은 1661년(현종 2년) 환갑을 바라보는 59살의 나이에 당당히 문화증광시에 합격했다. 지금으로 치면 59살에 행정고시에 급제했다는 얘기다,. 대기만성의 끝판왕의 모습이다.|독서왕김득신문학관 제공


김득신은 그제서야 자신이 1억1만1000번(실제로는 11만1000번) 읽었다는 <사기> ‘백이열전’의 글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김득신=둔재’ 일화가 정사인 <숙종실록>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움직일 수 없는 ‘팩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숙종실록> 1684년(숙종 10년) 10월9일자는 “김득신은 젊어서부터 늙어서까지 부지런히 글을 읽었지만 사람됨이 오활(세상물정에 어두운)해서 쓰임받지 못했다”는 인물평이 나옵니다.

순암 안정복(1712~1791) 역시 <순암집>에서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했지만(性糊塗魯質)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김득신을 향한 평가는 ‘나쁜 머리에도 들입다 책만 파는’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습니다.

비록 세인들의 평가에 비아냥이 섞이긴 했어도 책읽기와 시짓기를 향한 김득신의 열정과 집념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김득신은 글을 수만번, 십수만번을 읽으면서 글의 맥락이 담긴 부분에는 밀줄 쫙, 둥근 점을 잇대어 놓았고, 핵심의미가 있는 곳에는 흘려쓴 글씨로 각주를 달았다고 합니다.

시를 지을 때는 턱수염을 배배 꼬고, 괴롭게 읊조리는 버릇이 있었답니다. 한번은 아내가 점심상을 차리면서 상추쌈을 얹어놓고는 양념장은 올리지 않았는데, 김득신은 그냥 싱거운 상추쌈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내가 “싱겁지 않냐”고 묻자 “응 잊어버렸어!”라 ‘쿨’하게 대꾸했답니다.(하겸진(1870~1946)의 <동시화>)

충북 증평 율리에 있는 김득신 묘소. 묘비에는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 짓지 마라. 재주가 부족하거든 한가지에 정성을 쏟으라. 이것저것해서 이름이 얻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는 김득신의 말이 새겨져 있다.|증평군청 제공


■59세에 ‘과거급제’

그러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김득신에게 제격인 속담 같습니다.

“책 1만 권을 읽으면 붓 끝에 신기가 어린 듯(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하며, “글을 1000번 읽으면 의미가 저절로 나타난다(讀書千遍 其義自見)”(<두소릉시집>)는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의 언급 그대로였으니까요. 당시 효종(재위 1649~59)은 김득신의 시를 “당나라 시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김득신을 ‘멍청한 둔재’라 평한 안정복도 “밤낮으로 책을 읽은 김득신은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박세당(1629~1703) 역시 김득신의 치열한 삶을 상찬하는데요.

“공은 시 한 자를 짓는데 1000번이나 단련했다. 시짓는 일에 골몰하면…타고 가던 조랑말이…나아가지 못했다”(<백곡집> ‘서’)고 상찬했습니다.

7월11일까지 충북 증평군 독서왕김득신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는 ‘독서왕 김득신’ 특별전. 조선의 독서 끝판왕 김득신을 다룬 전시회이다.|독서왕김득신문학관 제공


이렇게 노력한 끝에 김득신은 경치를 묘사할 때 ‘시중유화(詩中有畵·시 속의 그림)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았구요. 정두경(1597~1673)·임유후(1601~1673)·홍석기(1606~1680)·권항(1575~?)·김진표(1614~1671)·이일상(1612~1666)·홍만종(1643~1725) 등과 함께 17세기 시단을 이끌었답니다.

그럼에도 김득신은 과거 급제의 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5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내가 아둔하여 어머니께 불효를 저질렀다”면서 계속 과거에 도전했는데요. 급기야 59살이 된 1661년(현종 2년) 문과 증광시에 당당히 합격했답니다. 지금으로 치면 59살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니까 얼마나 대단한 분입니까.김득신이 자신의 묘비에 남긴 한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 짓지 마라. 재주가 부족하거든 한가지에 정성을 쏟으라. 이것저것해서 이름이 얻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10)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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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의 부정적 기록은 후대에 날조 된 것”

학벌 설움 딛고 독학 매진한 재야학자
모든 기록 말살된 모반사건 20여년 추적
정여립의 진보적 개혁사상 재조명
“반란 성공했다면 새 역사 열렸을 것

기자김봉규
  • 수정 2024-07-13 18:29 등록 2007-10-12 19:51
 
문화사학자 신정일씨

인터뷰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펴낸 문화사학자 신정일씨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 10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1천여명이 처형당하거나 고문받다가 또는 귀양 중에 숨지고 투옥당하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당시 인구 500만이던 조선 전토를 참화 속에 몰아넣었다. 뒤이은 임진년 왜란조차 기축옥사의 황폐가 부른 재앙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사태는 참혹했다. 그 중심에 정6품 홍문관 수찬에 올랐던 당대의 귀재 정여립(1546~1589) 모반사건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은 바로 정여립 모반사건의 시대적 배경과 연루된 인물들을 종횡으로 추적한다. “조선왕조는 정여립 사건 이후 300년을 더 버텼다. 하지만 영·정조 때 잠깐 불꽃을 피워올렸을 뿐 지리멸렬했다. 그때가 개국한 지 200년이었는데, 한 왕조의 수명은 200년 정도면 족하다는 얘기들이 많다. 그때 차라리 정여립이 반란에 성공했거나 다른 왕조가 시작됐더라면 이후 우리에겐 새 역사가 전개됐을 것이다.” 전주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서울에 사무실을 둔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대표도 맡고 있는 ‘문화사학자’ 신정일(53)씨. “1980년대 말부터 정여립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니 20여년간 공부해온 셈이다.”

정여립은 정말 반란을 꾀했을까? 실은 이 기초적인 사실조차 규명돼 있지 않다. 사건조사기록 <기축옥안>은 임진란에 불탔고, 남아 있는 얘기들은 당파에 따라 극단으로 엇갈려 어느쪽이 진실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정여립은 행적이 모두 말살돼 남들이 전하는 얘기 외에 그가 쓴 문서 하나 남은 게 없다. 유혈낭자했던 그 ‘최대의 역모사건’은 애초부터 시비를 가릴 아무런 물증도 없었다. 동서 ‘붕당’의 파벌전쟁 속에 고변과 음해, 아비규환의 고문과 자백만으로 엮어낸 대숙청극이었다. 그래서 완전한 날조극이라는 주장이 예부터 있었다.

지은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정여립이 모반을 꿈꾸고 준비를 한 것은 사실이다. 50%가 날조된 옥사이고 50%가 정여립의 역모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인 김지하씨는 정여립을 “(세상 뒤엎기를) 하다 만 사람”이라 평했다. 사건은 발생 초기 선조(1552~1608)마저 거의 뜬소문으로 여길만큼 첩보조차 구체성이 없었다. 조정은 정여립이 붙잡혀 와 자초지종을 고하기만 해도 해소될 별볼일 없는 무고사건 정도로 여겼으나 첫 비밀장계가 뜬 지 닷새 뒤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장계가 떴고 곧 다시 그가 자살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가 도망쳐서 자살했다는 것은 곧 실제 반역을 꾀했다는 얘기가 된다.” 지은이는 이를 당시 정권에서 소외돼 있던 서인들이 정권 재탈환을 위해 정여립 일당을 이용한 모략극으로 본다. “기축옥사 최고 지휘관이 정철이었다면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은 송익필이었다.” 토정 이지함이 율곡 이이, 성혼과 더불어 시대의 스승으로 꼽았던 서인 송익필은 조선중기 8대 문장가에 들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나 아버지 송사련이 기묘사화 때 사건을 날조해 좌의정 안당 가문에 멸문지화를 안긴 과거사 때문에 동인의 핵심 제거대상이 됐고 마침내 동인 이발 등이 나서 송익필의 조모가 원래 안씨 가문 노비였던 걸 들춰내 송씨 일가를 모두 노비신분으로 ‘환천’시켜버렸다.

 

가문 몰락의 한을 품고 보복의 기회만 노리던 송익필은 낙향한 뒤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 반왕조적 대동사상에 빠져 이상사회를 꿈꾸던 정여립의 대동계를 반격의 고리로 활용했다. 신씨는 <동소만록>에 나오는 “정여립이 진안 죽도로 단풍놀이 삼아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죽인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는 기록을 믿는다. 정여립이 고변으로 역모가 들통나자 도망친 것이 아니라 서인 쪽이 미리 심어놓은 진안현감 민인백 등이 단풍놀이 가자며 정여립을 죽도로 유인한 뒤 죽여버리고는 도망치다 자살했다고 보고함으로써 역모사건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건조사 총책임자가 된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은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에 정여립이 도망갔을 것이라 발설했다. 사전에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신씨는 단재 신채호도 “동양의 위인”이라 칭송한 “당대의 인물” 정여립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기록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얘기가 세월 갈수록 그에겐 더욱 깊게 와 닿는다. 하지만 ‘정여립이 억울하게 당했다’며 그의 누명 벗기기에 골몰하는 역모사건 날조설엔 부정적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해서는 영국의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선 공화주의자였던 정여립의 진보적 개혁사상을 재조명할 수도 없고, 역사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축기사>에는 정여립 남겼다는 몇 마디 말이 기록돼 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유비의 촉한이 아니라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는데….” 가히 혁명적이다.

신씨는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허균의 호민론으로, 그리고 다산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으며 근대의 동학사상과 강증산의 화엄적 후천개벽사상, 미륵신앙도 그 줄기로 엮여져 있다”고 본다. 민중은 새 세상을 염원했다.

<한국사의 변혁을 꿈꾼 사람들>, <섬진강 따라걷기>, <다시 쓰는 택리지>, 그리고 이번 책까지 33권의 책을 써낸 신씨는 그 자신이 학위날조로 얼룩진 요즘 세태에 대한 하나의 ‘모반’이요 ‘풍자’처럼 보인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는 진안 백운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 중·고교 모두 검정고시로 넘었고 대학은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옛문서들을 웬만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도 오직 독학한 덕”이다. “학벌 없어 당한 설움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이젠 그게 오히려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야말로 학맥 학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통합적으로 쓸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11)

 

 

 

 

 

 

<주>

 

 

(1) https://v.daum.net/v/20240719050340641

 

 

(2) https://v.daum.net/v/20240221073901176

 

 

(3) https://v.daum.net/v/20240822153300426

 

 

(4) 26년 나이 차에도 논쟁이 가능하다니 (daum.net)2015. 7. 3. 

 

 

(5) [문학예술]김시습에서 정약용까지…‘신화가 된 천재들’|동아일보 (donga.com) 2007-09-15

 

 

(6) [커버스토리]조선시대의 신동, 특별한 게 있었다 - 주간경향 (khan.co.kr)뉴스메이커 785호2008.07.29

 

 

(7) https://v.daum.net/v/20240831070007722

 

 

(8) [인문사회]“백성을 편하게 만드는 仁政이 가장 급하옵니다”|동아일보 (donga.com)2008-06-07 

 

 

(9) https://v.daum.net/v/20210102093300318

 

 

(10) 책 1억번 읽은 '조선의 둔재'..세종도 무릎 꿇은 '독서왕'이 됐다 [이기환의 Hi-story] (daum.net)2021. 4. 27. 

 

 

 

 

<참고자료>

 

 

 

묵향 사랑 꽃피운 사대부의 육아일기 (hani.co.kr)2019-10-19

 

당시 돌잔치는 살아남은 아이에 대한 축하 의례였다. 돌잡이를 하는 손자가 첫번째로 붓과 벼루를 집자 이문건은 내심 흐뭇했다.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김찬웅 지음/글항아리·1만5000원

 
비운의 선비 이문건 유배지서 손자 키운 ‘양아록’
병든 아비 죽자 우는 아이…눈에 핏방울 맺힌다”17년 내리사랑 책 건네 손자 앞길 하늘에서 인도

조선 최초의 육아일기. 게다가 남자가, 더구나 할아버지가 썼다. 그렇다고 일기의 내용이 특별하진 않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우리 부모들의 손자 양육기를 연상하면 된다. 관심은 왜 그 고통스런 체험을 굳이 기록했느냐에 있다.

일기장의 주인은 이문건(1494~1567)이라는 사대부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귀양살이 중 <다정가>를 읊조린 고려 후기 명재상 이조년이 그의 8대조다. 이조년 앞에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5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한 이름대로 ‘영겁’의 집안이다.

이문건과 두 형님도 과거에 급제했지만 그 인생은 지독히도 고단했다. 이문건의 시대적 삶은 사화와 당쟁의 희생양 그 자체였다. 중종 14년 기묘사화의 후폭풍으로 20대 나이에 유배됐고 명종 때 다시 을사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50대에 귀양을 갔다. 23년간의 유배생활 도중에 생을 마감했다. 가족적 삶은 더 비극적이었다. 8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두 형도 한꺼번에 죽었다. 여섯 자식 중 성인까지 살아남은 것은 아들 온 하나뿐이었다. 그마저 아들은 어릴 때 열병을 앓아 몸과 정신이 성치 않았다.

 

이문건은 책과 담을 쌓은 손자를 직접 가르쳤다. 때론 손자가 가르침에 감히 토를 달고 논쟁을 벌여 화가 나 매질을 하기도 했다.

 

아들이 죽기 전에 손자를 낳았으니 그때 58살이었던 그의 관심은 온통 손자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손자를 당당한 사대부가 되도록 가르치고 가문의 맥을 잇도록 하는 게 유배기간 중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유배지 성주에서 탯줄을 끊으면서 시작된 양육기는 이문건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이어진 유배일기이기도 하다.

지은이 김찬웅씨는 마흔에 첫아이를 얻어 어떻게 길러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 일기책을 만났다고 한다. 한시로 쓰인 일기 <양아록>(養兒錄)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원문과 한자풀이를 부록으로 담았다. 고사에 얽힌 인물과 역사상식도 재미있다.

 

 

 

방패 베고 병사와 한솥밥 먹은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daum.net)2018. 6. 10. 

 
 
[더,오래] 김준태의 후반전(9)
김준태 동양철학자 역사칼럼니스트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역사 속에 수많은 명재상이 있었지만, 이원익(李元翼, 1547~1634)만큼 완벽함에 가까웠던 인물은 드물다.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그는 능력과 인품, 청렴한 삶으로 온 나라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직후 이원익이 한양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민심이 안정됐다는 전설 같은 실화가 전해올 정도다.

 

이원익이 주목을 받은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다. 평안도 관찰사를 맡아 후방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우의정 겸 4도(강원·충청·경상·전라) 도체찰사로서 최전선을 지휘했다. 특히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는데, 평안도 백성들은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그의 선정(善政)에 감사했다고 한다. 이를 민망하게 여긴 이원익이 사당을 허물도록 하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세웠다.

 

선조가 남부 전선에 있던 그를 다시 평안도로 복귀시키려 하자 신하들이 한사코 만류하기도 했다. “오직 이원익만을 의지하고 있는 민심이 무너져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다(선조 29년 11월 9일의 실록기사, 이하 날짜만 표시). “비록 전쟁을 겪었지만, 이원익 덕분에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선조 27년 6월 24일)는 평가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이원익, ‘항상 보이는 지도자’로 백성의 신뢰받아
이처럼 이원익이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항상 보이는 지도자(visible leader)’였기 때문이다. 그는 방패를 베고 군막에서 잠들었으며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밥을 먹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 백성이 고통받는 현장을 지키며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진정성을 백성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조 국가에서 임금이 아닌 신하에게 민심의 지지가 쏠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왕의 의심을 사고 심지어 제거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원익이 모신 임금은 하나같이 그를 아끼고 중용했다. 그중에서도 인조는 남달랐는데 “경이 조정에 없으면 단 하루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인조 4년 8월 16일), “과인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보듯 경을 바라본다”(인조 4년 12월 7일), “경이 머물러만 준다면 나라의 광영일 것이다”(인조 9년 4월 4일)라고 말할 정도다.

 
이원익( 李元翼 )의 종가 옆에 있는 충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옛 문서들. [중앙포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원익이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줬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인조 때 그의 나이는 이미 팔십 대였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조정의 최고 원로로서 그저 가만히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은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어찌 나라를 위한 일에 감히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며 자신이 반란을 진압하러 평안도로 가겠다고 자원했다(인조 2년 1월 24일).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4도 도체찰사를 맡아 후방지원을 총괄하고 소현세자의 분조(分朝,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책임졌다(인조 5년 1월 17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원익은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제일 먼저 달려왔다. 한번은 오랑캐가 국경을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85세의 나이에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 출사했는데(인조 9년 3월 28일), 이런 모습에 인조가 크게 감동했고 신하들은 “이원익이 어제 서울에 들어왔으므로 조야가 모두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요컨대 위기 앞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자원해 떠맡는 이원익의 행동이 백성뿐 아니라 동료 신하들, 나아가 임금의 신뢰를 끌어내게 된 것이다. 임금과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이 곧 쓰러져 죽기 직전의 상황이어도 행동에 옮기는 이원익에게 그의 진심을 의심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의미한 일이었다.

더욱이 인조 대에 이원익이 보여준 처신에서는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이원익은 인조가 왕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간청하고, 때로는 강권하는데도 불구하고 조정에 나서질 않았다. 인조 초기 잠시 영의정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면 향리에서 움직이질 않는다. 나라에 큰일이 생겨 잠시 조정에 나오더라도 그날로 돌아가 버렸다. 조정 일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자문을 구해도 “노신의 정신이 혼미하여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인조 9년 4월 4일).


물러나 있다가 위기 닥치면 앞장선 진정한 어른
이는 그의 정신과 기력이 쇠약해져서거나 조정 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라의 큰 공신이자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최고 원로, 그것도 왕이 깍듯이 모시는 80대 노인이 조정에 나와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해보라.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시시콜콜 잔소리하고 가르쳐 들어보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도 잘하지 못하면서 후배들에게 부담만 줄 뿐이다.

뒤로 물러나 있되 위기가 닥치면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준 사람, 입을 다물고 간섭하지 않되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지가 되어준 사람, 이원익은 그렇게 진정한 어른으로 남았다.

 

 

[인문사회]좋은 글은 초상화와 같다…‘조선의 마지막 문장’|동아일보 (donga.com)2008-05-24

인천 강화군에 있는 영재 이건창의 묘. 비석 하나 없이 외롭게 있어 잊혀진 명문장가의 삶이 더 애처롭게 느껴진다. 사진 제공 글항아리
 
◇ 조선의 마지막 문장/이건창 지음·송희준 옮김/408쪽·1만6000원·글항아리

 

《“주된 뜻(주의·主意)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 대적하는 뜻(적의·敵意)이 있어야 합니다. 문장을 별도로 만들어 적의로 주의를 공격해야 합니다. 주된 뜻은 갑옷처럼 방어하고 대적하는 뜻은 병기처럼 공격하니 갑옷이 견고하면 병기는 저절로 꺾일 것이고 누차 공격해 여러 번 꺾이면 주된 뜻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면 곧바로 대적의 뜻을 거둬 포로를 잡아들임으로써 주된 뜻이 더욱 높이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17, 18쪽· ‘글을 어떻게 지어야 훌륭한 문장이 될까?’ 중에서)》

좋은 글은 초상화와 같다

 

눈 코 입 평범한 묘사보다

 

수염처럼 특징을 부각하라

고서를 번역한 책으로 400여 쪽에 이르는데 술술 읽힌다. 촌철살인 문장이 날카롭다가 깊은 성찰이 드러나고 인간을 향한 따뜻한 애정이 느껴진다. 때로는 문장은 숨 가쁘게 차오르다가 차분하게 숨을 고르기도 한다.

원문 저자가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글보다 아름다운 리듬이 있는 글이 조화로운 글”이라고 말했는데 스스로 그 본보기를 제시한 셈이다.

저자는 영재 이건창(1852∼1898). 낯선 이름이지만 세속적 글쓰기를 멀리하고 순수하고 강건한 체의 고문을 추구한 19세기 명문장가다.

이 책은 이건창의 당호를 딴 문집 ‘명미당(明美堂)집’을 처음 완역해 총 180여 편의 산문 가운데 50여 편을 뽑은 것이다. 글마다 붙은 옮긴이의 해설이 본뜻의 이해를 돕는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조언, 논설과 평론, 충정과 절의(節義)에 대한 매서운 글부터 가족을 향한 애틋한 심정, 민초들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한데 담겼다.

문장 이론이 유독 눈에 띈다. 이건창은 창강 김택영(1850∼1927), 매천 황현(1855∼1910)과 함께 대한제국 때 3대 문장가로 불린다. 김택영은 고려 및 조선시대 뛰어난 고문가(古文家) 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건창을 꼽을 정도다.

자신의 글에 자부심이 대단했던 이건창. 글을 어떻게 지어야 훌륭한 문장이 되는지 물어온 학자 여규형(1848∼1922)에게 답을 보낸다.

“무릇 글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뜻을 얽어야 한다.”

처음, 끝, 중간으로 뜻의 뼈대가 갖춰지면 이 뜻이 연속하고 관통하게, 분명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붓을 놀려 써내려 간다는 것.

“어조사 따위의 쓸데없는 말을 구사할 겨를이 없으며 속어 사용을 꺼릴 겨를이 없다.” 그 다음 “언어를 다듬어야 한다”.

언어를 다듬을 때는 “한 글자를 놓는 데 전전긍긍해 마치 짧은 율시 한 편을 짓듯 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백미는 그 다음이다. “주된 뜻에 대적하는 뜻이 있어야 한다.”

주제를 돋보이게 하려면 반론을 함께 제기하고 이 반론이 설득력 없음을 보이라는 것이다. 주된 뜻과 대적하는 뜻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없으면 훌륭한 글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긴 것은 짧게 하고 짧은 것은 길게 하며 엉성한 것은 긴밀하게 하고 긴밀한 것은 엉성하게 해야 한다. 느슨한 것은 촉급하게 하고 촉급한 것은 느슨하게 하며 드러나는 것은 숨기고 숨은 것은 드러나게 해야 한다.” 수없이 고쳐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창은 글을 쓴 뒤 2, 3일 보지 않고 마음에도 두지 않았다가 다시 보고 남의 글 보듯 엄정하게 봐야 그제야 글을 제대로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좋은 문장은 초상화 그리는 것과 같아 눈, 코, 입 같은 평범한 사실을 나열하지 말고 눈썹과 뺨의 수염처럼 그 사람만의 특징을 집중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실제로 이건창은 알아줄 사람 없는 백성들의 행적을 수십 편 전기로 남겼는데 가계와 생애는 최대한 줄이고 특징적인 면을 부각했다.

문집에 실린 유 씨 노인 이야기가 그렇다. 유 씨 노인은 남의집살이하며 평생 짚신을 삼다 일흔 살에 죽었다. 이건창은 이웃집 유 씨 노인의 평범한 삶을 성현에 잇는다.

“성현의 학업이 후세에 전해지듯 그가 만든 짚신을 세상 사람들이 신고 다닌다. 성현은 그들이 만든 도를 세상 사람들이 행하지 않아 근심했지만 유 씨 노인의 짚신은 뜻대로 모두 신고 다니니 걱정이 없다.”

스물두 살에 세상을 떠난 첫 부인을 그리워하는 글에서는 꼿꼿한 선비답지 않은 고독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침실은 고요해 적막하고 화장대에는 먼지가 보얗게 앉았네. 낮에 생각하면 도움 주는 친구 없어진 것을 한스러워하고 밤에 꿈꾸면 상스럽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네. 아! 슬프다. 봄바람이 때맞춰 불어와 만물이 생기가 나는데, 어찌하여 반짝반짝하던 눈동자는 다시 볼 수 없고 다정한 말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는가?”

이 책의 명문장들은 원문을 간결, 명료하게 우리말로 풀어쓴 옮긴이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 옮긴이는 30년간 한문 공부하며 서당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인문사회]“누가 역사의 승자…”정사가 외면한 비주류 이야기|동아일보 (donga.com)2008-05-31 

 
◇한국사의 아웃사이더/이이화 지음/360쪽·1만3000원·김영사

◇잡인열전/이수광 지음/316쪽·1만2000원·바우하우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주로 주류의 역사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거나 시대에 저항한 인물들, 양반 아닌 평민의 역사는 많이 기록되지 못했고 잘 알지 못한다.

기록되지 못한 비주류의 역사 이야기를 인물 중심으로 풀어낸 책이 잇따라 나왔다.

‘한국사의 아웃사이더’는 역사가 이이화 씨가 한반도 밖에서 걸출한 활약을 벌였으나 잊혀진 인물들, 시대에 맞서 변혁을 꿈꿨으나 역적으로만 기억된 사람들, 신분 사회의 한계를 딛고 과학 분야에서 족적을 남긴 이들 30명을 재조명한 인물 열전이다.

이 중엔 왕인, 장보고, 신돈, 홍경래, 허준 등 유명한 인물도 포함돼 있고,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

고구려 유민으로 서역을 개척한 고선지(?∼755)도 그런 인물이다. 당나라 절도사 자리에 오른 그는 다양한 지략으로 서역 땅 가는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당나라의 국익에 공헌했지만 결과적으로 한반도와 일본의 동서교류에까지 이바지한 것이다. 저자는 오랑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면서도 특유의 아량과 지혜로 오히려 무지한 상대를 감복시킨 고선지의 면모를 부각시킨다.

조선 중기의 역신으로만 알려진 정여립(1546∼1589)을, 임금을 백성의 의지로 바꿀 수 있다며 민권을 중심 사상에 두고 통치술을 주장한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하고 19세기 진천 진주 문경 등지에서 봉기를 일으킨 몰락 양반 출신의 이필제(1826∼1871)에게서 사대질서에 반기를 든 자주 정신을 찾는다.

‘잡인열전’은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평민, 그들 가운데서도 유별나고 특별하게 살았던 ‘잡인’ 24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본받아야 할 위인들은 아니지만 당시 저잣거리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등 역사서를 집필해 온 저자는 ‘어우야담’ ‘역옹패설’ 등 야사 기록을 뒤졌다.

우의정에 이른 문신 원인손(1721∼1774). 그의 젊은 시절은 놀랍게도 한양 거리의 투전꾼들이 우러러 볼 정도의 ‘신의 손’이었다. 원인손은 투전판에서 돈을 잃고 싸우다 죽는 중인의 모습을 보고 학문에 전념한다.

조선 중종 때 세 번 개가하며 난봉녀로 기록된 김씨 부인, 조선 시대 100여 번이나 대리시험을 본 유광억 등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서울 서예박물관 내년 2월까지 전시

17세기 조선 서예의 힘과 매력!

이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과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1606∼1672)이다.

평생 지기(知己)이던 이들은 당시 조선의 대표적 도학자(道學者)이고 북벌(北伐)을 주창한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또한 17세기 최고 서예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상은 두 송 씨의 서예를 놓고 양송체(兩宋體)라고 칭한다.

그 유명한 양송체의 서예는 어떠했을까. 한 시대를 풍미한 도학자에게 서예라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그 전모를 가까이에서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내년 2월 24일까지 열리는 ‘동춘당·우암-직필(直筆)’전. 두 사람의 각종 서예 작품을 비롯해 탁본과 문집, 송시열을 그린 초상화(얼굴), 송준길 송시열과 연관된 인물들의 서예 회화 등 모두 100여 점을 전시한다. 그동안 선보이지 않았던 미공개작도 다수 포함돼 있다.

송준길은 자질이 온후 순수하고 예법과 태도가 탁 트인 반면 송시열은 국상의 형식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논쟁을 벌인 예송(禮訟)논쟁 등 파란만장한 삶을 헤쳐 갔던 인물답게 매우 고집스럽고 매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세상은 송준길을 빙옥(氷玉)에, 송시열을 태산에 비유하곤 한다.

이들의 글씨엔 이 같은 각자의 성정(性情)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송준길의 글씨는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단정한 편이다. ‘陽氣發處(양기발처)’처럼 그 획이 자신감 넘치고 거침없으면서도 그 안엔 정제된 질서가 교묘히 숨어 있다.

이에 비해 송시열의 글씨는 좀 더 대담하고 자유분방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각고(刻苦)’라는 작품.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당부의 뜻을 전하기 위해 써 준 글씨로, 크기가 164×82cm에 이른다. 장중하고 힘이 넘치는 획 하나하나에서 우암의 성향과 내면을 한눈에 읽어 낼 수 있다. “글씨는 곧 정신”이라는 옛말이 실감난다.

송시열을 그린 초상화 9점도 매력적이다. 대부분 노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유학자의 고집과 매서움이 얼굴에 그대로 배어난다. 하지만 송준길의 초상은 전하는 것이 없어 전시에 소개되지 못했다.

전시 기간에 일반인을 위한 특강이 마련된다. 내년 1월 12일 오후 2시엔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1월 19일 오후 2시엔 송시열의 후손인 송준호 연세대 명예교수, 2월 2일 오후 2시엔 예송논쟁 전공자인 오석원 성균관대 교수가 특강을 맡는다. 02-580-1284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사명대사(1544∼1610·영정 사진)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호국 불교’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왔다. 하지만 사명대사의 참모습은 전쟁이 끝난 뒤 당시 일본 집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회담을 통해 포로 송환 등 전후처리를 마무리 짓고 평화외교의 틀을 구축한 데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가 적지 않다.

 

사명당기념사업회(회장 오재희 전 주일대사)가 8일 일본 오사카(大阪) 민단본부 대회의장에서 개최한 국제심포지엄 ‘사명대사의 도일(渡日)과 전후처리 평화외교’(동북아역사재단 등 후원)는 한국과 일본 학자들이 사명대사의 업적과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사명대사의 평화외교 정신이 역사문제에서 마찰을 빚고 있는 두 나라의 화해를 앞당기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대 명예교수는 기조 강연에서 “사명대사는 결사항쟁의 결의에 투철한 의승장과 전후 강화협상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각오를 다진 외교관의 면모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며 “그의 주도면밀한 언행과 협상에 힘입어 조선 왕조와 도쿠가와 막부가 국교 회복에 합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중세 한일 문화교류의 꽃을 피운 조선통신사도 당시 선조의 특사로 일본을 찾은 사명대사의 협상력 덕택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송운(松雲)대사로 알려진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중에도 당시 일본 지휘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4차례 협상을 하고 왜군의 철수 조건 등을 협의했다. 조영록 동국대 명예교수는 “이 과정에서 일본 수뇌부의 한반도 분할 구상을 간파하고 왜군 내부의 이간책을 시도해 협상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오사카 부(府)와 오사카 시,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가 후원하는 등 일본 사회가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일본에서 사명대사가 재조명되는 것은 전쟁으로 헝클어진 양국 관계를 정상화한 사명대사의 정신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게 사명당기념사업회 측의 설명이다.

오 회장은 “일본인들이 20세기에 한국을 강점한 역사는 비교적 잘 알지만 400여 년 전 조선을 침략한 데 대해서는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며 “사명대사 관련 사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임진왜란에 대해 역사 교육을 시키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사명당기념사업회는 1997년 발족된 이후 한국과 일본에 있는 사명대사의 유적지 및 자료 발굴과 서적 발간, 학술회의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오사카=박원재 기자 parkwj@donga.com

 

 

조선시대에 불상을 제작한 스님들은 과연 몇 명이었을까.

이 흥미로운 질문에 답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 최선일 씨가 3년간의 조사 연구 끝에 최근 출간한 ‘조선후기 승장(僧匠) 인명사전’(양사재).

조선후기(1600∼1910년) 전국 사찰에 봉안할 불상을 제작하거나 불상을 수리 또는 개금(改金)한 승려 장인들의 명단을 최초로 밝혀낸 것이다. 최 씨는 불상의 발원문(發願文), 불화(佛畵)의 화기(畵記), 사찰의 사적기(寺蹟記)와 각종 비문 등 300여 건의 기록을 통해 승려 장인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렇게 확인한 승려 장인은 942명. 그들의 이름과 약력을 한데 모아 정리하고 승장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수화승(首畵僧)으로 활동한 118명을 별도로 표시해 놓았다. 수화승은 불상을 제작하는 승려들로 이뤄진 팀의 책임자를 말한다.

최 씨는 “15세기까지는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16세기부터 조사했다”며 “이 연구 결과, 하나의 불상을 만드는 데 두세 명부터 예닐곱 명이 참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책은 단순한 인명사전이 아니라 역사 속에 감춰졌던 승려 장인들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곽병찬의 향원익청] 가부장 앞에서 길 잃은 시의 혼, 옥봉 (hani.co.kr)2016-08-0

곽병찬의 향원익청

옥봉은 조선 왕실의 자손인 자운 이봉의 서녀로 태어났다. 첩의 자식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강했다. 길쌈, 바느질에는 관심 없이, 글공부와 시 짓기에 열중했다. 10대의 옥봉은 이미 인근에 잘 알려진 여류시인이었다.

‘강물에 노니는 갈매기의 꿈은 드넓고(江涵鷗夢闊), 하늘 멀리 나는 기러기의 수심은 아득하구나(天入雁愁長)’ 그의 시혼은 갈매기 꿈처럼 드넓었으나, 가부장 사회에서 그가 가야 할 길은 기러기의 북행처럼 멀고 고단했다.

일러스트 이림니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승지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로대신으로부터 시집 한 권을 받는다. 놀랍게도 이옥봉 시집이었다. 옥봉은 부친 조원의 첩. 대신이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40여년 전 바닷가에 괴이한 주검이 떠돌아, 사람을 시켜 건져 올리도록 했다. 주검은 종이로 수백 겹 말려 있었고, 안쪽 종이엔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가 빼어나 책으로 엮었다. 말미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화다. 그러나 ‘햇빛에 바래면 역사요, 달빛에 바래면 신화가 된다’(소설가 이병주)고 했던가. 못난 정인에게 버림받아 불행하게 죽어간 여인 이옥봉의 ‘시혼’을, 당대의 여인들은 달빛에 물들이고 또 다듬어 그런 신화를 빚어낸 것이었다.

조원의 셋째 아들인 조희일은 명나라 사신으로 간 일이 없었다. 다만 1606년 허균과 함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 일행을 맞이했다. 종사관은 중국 사신이 조선 땅에 발 디딜 때부터 이들을 수행하며 접대하는 직책. 단순히 향응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문장으로 나라의 자존심을 세우는 역할도 했다. 1652년 중국에서 간행된 <열조시집>에 이달(36수), 옥봉(11수), 허균(10수), 허봉(4수) 등 조선 시인들의 시가 실린 것은 그 결과물일 것이다. 이달은 허균의 스승이고 허봉은 허균의 형이다. 옥봉은 허균이 제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당시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꼽았던 인물이다.

달빛에 바랜 옥봉의 신화는 더 있다. 남도소리 하면 ‘육자배기’요 서도소리 하면 ‘수심가’라 했다. 80여 소절로 이루어진 수심가를 여는 사설은 이렇다. “약사몽혼(若使夢魂)으로 행유적(行有跡)이면, 문전석로(門前石路)가 반성사(半成沙)로다, 생각을 허니 님의 화용이 그리워 나 어이할까.” ‘꿈속 내 혼이 자취를 남겼다면, 님의 집 앞 돌길은 이미 모래가 되었을 것이오’라는 뜻이다. 옥봉의 ‘자술’(自述, 내 마음을 술회함) 또는 ‘몽혼’(夢魂)의 전구와 결구다. 기구와 승구는 이렇다. “묻노니, 임께서는 요즘 어찌 지내시나요, 사창엔 달빛이 가득한데 이내 가슴엔 한만 가득합니다.” 현실에선 갈 수 없는 그곳을 꿈속에서 얼마나 오갔으면 길에 깔린 돌이 모래가 되었을까. ‘수심가’엔 옥봉의 시 또 한 편이 스며 있다. “님 떠날 내일 밤이야 짧고 짧아도, 님과 함께하는 오늘 밤은 길고 길었으면. 닭의 홰치는 소리 새벽을 재촉하니, 천 가닥 눈물 두 눈에서 흐르네.”(‘별한’, 別恨) 옥봉은 조선 왕실의 자손인 자운 이봉의 서녀로, 이봉이 옥천 군수를 지낼 때 태어났다. 비록 첩의 자식이었지만, 어려서부터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길쌈, 바느질 등 가사에는 관심 없이, 글공부와 시 짓기에 열중했다. 10대의 옥봉은 이미 인근에 잘 알려진 여류시인이었다.

서녀인 그는 서얼금고법에 따라 양반가에 정실로 시집갈 수 없었다. ‘가봤자 첩인데…’, 그는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짝으로 삼으리라 각오했다. 마침 그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운강 조원. 이조판서를 지낸 신암 이준민의 사위였다. 부친은 그 뜻을 알고, 조원을 찾아가 사정을 했다. 조원은 거절했다. 이봉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그의 장인에게 사정했다. 빼어난 시문과 아름다운 자태에 감복한 이준민은 사위를 설득했다. 조원이 진사시험에 장원한 1564년 옥봉은 그의 첩이 되었다.

짝을 맺는 건 힘들었지만, 버림당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1589년부터 1592년 사이의 일이었다. 조씨 집안의 먼 친척으로 선산을 지키던 이가 소도둑으로 몰려 잡혀갔다. 옥봉은 그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 글 한 편을 써 줬다. 이 호소문을 본 형조의 당상관들은 문장에 감탄하며 피의자를 풀어주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원은 불같이 화를 냈다. “어찌하여 소백정의 아내에게 그런 글을 써 주어, 남들의 귀와 눈을 번거롭게 하는가? 이것은 크게 몹쓸 짓이니 집에서 나가라.”

당쟁의 와중에 빌미가 잡혀 출셋길이 막힐까 걱정했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김효원과 심의겸을 우두머리로 한 동서 붕당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는 이조좌랑 시절 서인의 총대를 메고 심충겸(심의겸의 동생)을 동인 김효원 후임으로 이조정랑에 추천했다가 동인의 지탄을 받아 괴산군수로 좌천된 바 있었다.

그렇다고 사대부가 향리의 토색질에 희생당한 산지기의 억울함을 모른 척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문장가를 자처하는 자임에랴…. 옥봉의 호소문은 과연 명문이었다.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물을 기름 삼아 머리를 빗질한 뒤 쓰옵니다/ 신첩이 직녀가 아닐진대/ 어찌 낭군이 견우(소를 훔친 사람이라는 은유)가 되리이까.”

일각에선 옥봉이 첩이 되는 조건으로 절필을 약속했으며, 이 약속을 어긴 것이 소박의 이유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원은 함께 살면서 옥봉의 문장에 크게 기댔다. 어느 날 한 선비가 책력 한 부를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조원은 고민하다가 옥봉에게 답장을 부탁했다. “어찌 남산의 스님에게 빗을 빌려 달라 하지 않으십니까.”

조원이 삼척부사 시절 쓴 옥봉의 ‘추사’(秋思)는 외직으로 전전하던 남편 구명용이었다. “서리 내려 나무에 진주가 달렸으니, 성안엔 벌써 가을이 가득하겠네, 마음은 임금 곁에 있지만, 몸은 바닷가 끝에서 일에 매였네….” 조원의 부탁으로 함경병마절도사 신립에게 보낸 것도 있다. “…북소리 울리자 쇠피리 함께 울고, 달이 창해에 잠기니 어룡도 춤을 추네.”(증병사)

1589년 조원은 성주부사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던 중 상주 관아에서 하루 묵었다. 친구인 윤국형 상주목사가 술자리를 베풀자, 조원은 옥봉에게 시 한 수 지어 답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옥봉은 즉석에서 시를 읊고, 조원이 받아 적었다. 윤국형은 그때 그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목소리가 맑고 처절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문소만록>)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애오라지 제 출세만 생각하던 조원은 옥봉을 버렸다. “문명은 있었지만, 국량과 식견이 좁아 사류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조원에 대한 일부의 평가였다. 그는 권력 주변을 서성이다가 임진왜란 중인 1595년 죽었다.

조원은 옥봉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고손자 조정만이 1704년 부친의 명을 받아 고조부터 조부까지 3대의 문집 <가림세고>를 엮으면서 부록에 ‘옥봉집’을 실었다. 중국의 <열조시집>에도 올라 있으니 그제야 옥봉 시를 가문의 자랑으로 삼으려 했던가 보다. 말미엔 이런 반성적 평가가 붙어 있다. “그 삶은 불행했으나, 그 죽음은 불후하였다.”

옥봉은 소박당한 뒤에도 애걸복걸하지 않았다. 조원에게 보낸 두 편의 시 가운데 하나인 ‘만여증랑’은 이런 투다. “…기다리다 여윈 얼굴, 님에게 보이기 민망해, 매화 핀 창가에 앉아 반달눈썹 그리네.” 정한은 쌓여 병이 되었지만, 그저 속으로 삭였다. “이불 속에서 흘린 눈물, 얼음장 밑 흐르는 물 같아, 밤낮 이불을 적신들, 그 누가 알겠습니까.”(‘규정’, 閨情) 속좁은 남자가 어찌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옥봉의 시가 정한에만 매여 있는 건 아니었다. 허균은 시평집 <학산초담>에서 옥봉의 시를 두고 “맑고 굳세어 지분(화장)의 태가 전혀 없다”고 극찬했다. 특히 그는 ‘비’와 ‘영월도중’을 높이 평가했다.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햇살 쏟아지니, 은빛 대나무 하늘 가득, 강을 가로질러 흐르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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