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조선 (4) 1506년 중종반정 본문
[신병주의역사저널] 연산군이 탄핵된 까닭은
“풀 한 포기도 모두 내 것” 독재·폭정 정당화
조선시대에도 왕이 쫓겨나는 상황이 두 차례 벌어졌다. 1506년의 중종반정과 1623년의 인조반정이 그것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시대판 탄핵당한 왕이 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은 연산군(燕山君:1476~1506, 재위 1494~1506)의 독재정치가 극에 달한 시점에서 이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재위 기간 내내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의 독재정치는 점차 위험 수위에 달하고 있었다. 궁궐의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를 차고 다니게 하였다. 신언패에 새긴 내용은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안전하리라”라는 섬뜩한 문구를 적게 하였다. 한마디로 보고 들은 것을 입으로 전하면 죽는다는 경고였다. “우리 임금은 신하를 파리 죽이듯 하고 여색에 절도라고는 없다”라는 한글 익명서가 올라오자, 한글을 폐지하고 한글로 간행된 서적을 불태울 것을 지시했다.
1506년에는 조정의 관리들에게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의 앞쪽엔 충(忠)자, 뒤쪽엔 성(誠)자를 새기게 하여 자신에 대해 충성 다짐을 하게 하였다. 한 해의 세금도 버거워하던 백성들에게 2, 3년치 세금을 미리 받는가 하면 각종 명목의 세금을 부과해 백성의 부담을 크게 했다. 자신의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근 민가를 철거시키기도 했다. 국정은 제쳐 놓고 전국에서 뽑은 기생인 흥청들과 함께 경복궁 경회루 등에서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이를 한탄한 백성들은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로 조롱했고, 이 말은 지금에도 유행하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에는 흥청 출신으로 후궁의 지위에까지 오른 장녹수(張綠水)의 국정농단도 한몫을 하였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거나,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폭한 짓이 많았다”는 기록은 연산군의 총애 속에 장녹수가 막강한 권력을 가졌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산군은 폐위되기 직전까지 “조선은 왕의 나라다. 조선의 백성 모두가 왕의 신하요, 조선 땅의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큼 독재와 폭정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자주 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에 한계를 느꼈던 인사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면서 왕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1506년 9월2일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을 축출하고, 그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조선시대 왕을 탄핵한 첫 사건이었다. 연산군은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된 후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혔고, 두 달 만인 1506년 11월 역질(疫疾)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1623년에는 광해군을 폐위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조선에서는 두 차례 왕을 탄핵하는 역사를 만들어 갔다.(1)
중종반정 상징하는 그녀의 비참한 최후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김종성 기자]
KBS <붉은 단심>의 주인공인 유정(강한나 분)은 반정공신의 가짜 조카로 위장하고 후궁이 됐다. 그를 조카로 둔갑시킨 인물은 반정(反正, 폭군 방벌)의 주역이자 조정 실세인 박계원(장혁 분)이다.
이 드라마는 실제 역사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만, 1506년 중종반정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그 시대 인물들과 유사한 배역을 등장시키고 있다. 박계원은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을 연상케 하고, 유정은 박원종의 양녀이자 중종의 후궁인 박경빈(경빈 박씨)를 떠올리게 한다.
음력으로 중종 22년 4월 26일자(양력 1527년 5월 25일자) <중종실록>은 박경빈의 친부인 박수림이 경상도 상주 사람이며, 양반 가문 일원이기는 하지만 매우 궁색했다고 말한다. 그의 딸이 주목을 받은 것은 연산군이 쫓겨나기 1년 전인 1505년이다. 연산군이 여성들을 물색해 오라고 전국 각지에 파견한 채홍사에 의해 박경빈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위 실록은 박수림 집안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연산군 때인 을축년에 채홍의 일로 인해 아름다운 처자가 있는 것이 알려졌다"고 말한다. 연산군이 파견한 채홍사에 의해 유명세를 타게 됐으니, 그 직후에 중종반정이 발생하지 않아 연산군이 계속 재위했다면 박경빈이 연산군과 가까워졌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중종반정이라는 돌발적 사건으로 인해 연산군이 아닌 그 이복동생의 후궁이 됐던 것이다.
▲ KBS2 <붉은 단심> 한 장면. |
ⓒ KBS2 |
▲ KBS2 <붉은 단심> 한 장면. |
ⓒ KBS2 |
<붉은 단심>의 유정과 박계원은 실은 원수지간이다. 유정의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죽인 장본인이 박계원이다. 박계원은 유정의 정체도 확인하지 않고 조카로 둔갑시켰다. 자기 조카를 궁에 넣어 권세를 연장할 생각에서 그런 무리수를 썼다. 대외적으로는 삼촌 관계이지만 실제로는 원수지간이라는 이런 설정 때문에, 이 드라마에서는 두 사람의 정치적 유대 관계가 좀 덜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두 사람의 정치적 유대가 남달랐다. 박원종이 조정에서 중종반정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면, 박경빈은 왕실 여성들 사이에서 그런 상징성을 갖는 인물이었다. 박경빈은 1506년 이후에 신주류로 올라선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여성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와 중종의 관계는 반정 주체세력과 왕실의 동맹을 표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박경빈의 위상이 위 날짜 실록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됐다. 중종반정 주역들이 약해진 뒤에 기록된 것이라 그렇게 묘사된 측면이 크다. 위 실록은 박경빈이 임금의 사랑을 얻고자 술책을 부리는 한편, 불손하고 방자했으며 뇌물을 많이 챙겼다고 설명한다. 임금의 총애를 믿고 이런 일들을 저질렀다고 실록은 말한다. 박경빈이 중종의 신임을 많이 받았으며 위세가 당당하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박경빈의 위상은 1509년에 태어난 그의 아들에게도 전이됐다. 중종 34년 윤7월 5일자(1539년 8월 18일자) <중종실록>에 인용된 한산군수 이약빙의 상소문에도 언급됐듯이, 박경빈의 아들인 복성군이 중종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궐 밖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박경빈은 '중종반정'과 '중종의 사랑'이라는 두 요인에 힘입어 절정의 권세를 누렸다. 그런데 후자는 안정적이지 않았다. 여타 군주들도 어느 정도는 그랬지만, 중종은 사랑에 대해 절대적 가치를 두지 않았다.
반정 주역들의 압력 때문인 측면도 있었지만, 그는 왕이 되고 7일 뒤에 조강지처 신씨와 이혼했다. 신씨가 연산군의 처조카인 동시에 연산군 정권 실세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이유로 그는 신씨를 사랑하면서도 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로부터 9년 뒤인 1515년, 반정 주역들의 추천을 받고 중전이 된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는 반정 주역들이 약해져 있었고 신씨를 동정하는 개혁세력인 사림파가 중종과 신씨의 재결합을 적극 추천하고 있었다.
이때도 중종은 신씨를 사랑했지만, 재결합을 촉구하는 여론만큼은 외면했다. 신씨와 재결합하게 되면 신씨를 몰아낸 반정 주역들이 정당성을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반정 주역들의 추대를 받은 자신의 위상도 불리해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중종은 사랑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는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것이 박경빈의 미래를 담보할 수는 없었다. 박경빈에게 확실한 보증이 되는 것은 중종반정으로 인한 정치체제가 오래 유지되는 것뿐이었다.
▲ KBS2 <붉은 단심> 한 장면. |
ⓒ KBS2 |
그런데 그 체제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븕은 단심>의 반정공신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권세를 유지하지만, 실제의 중종반정 주역들은 그렇지 않았다.
연산군을 실각시킨 3대 주역은 박원종·유순정·성희안이다. 박원종은 반정 4년 뒤인 1510년에, 유순정은 1512년에, 성희안은 1513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상태에서 1515년 하반기부터 청년 사림파인 조광조가 갑자기 부상하더니 1516년에 중종반정 주체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획득했다.
박경빈의 권세는 박원종과 중종이라는 두 남자에 의해 지탱됐다. 중종의 신임은 믿을 게 못 됐기 때문에, 양부 박원종이 확실한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양부는 반정 4년 뒤에 4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너무 일찍 사라졌던 것이다.
박원종의 사망에 더해, 박경빈을 위험에 빠뜨린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그의 아들 복성군의 출생이 그것이다. 후궁의 아들은 후궁에게 든든함을 주기 마련이지만, 박경빈에게는 복성군이 그런 아들이 아니었다. 복성군이 정치적 휘발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중종 34년 실록을 기록한 사관이 기록 말미에 논평을 달았다. 복성군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중종의 사랑을 받는 데다가 훗날 인종 임금이 될 장경왕후 소생보다 나이가 많은 점이 문제가 됐다는 논평이다. 향후 세자가 되고 주상이 될 원자(元子)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비쳤던 것이다. 그래서 복성군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어머니도 위험에 빠트리는 아들이 되고 말았다.
박경빈이 왕자를 낳지 않았다면, 설령 박원종이 죽은 뒤에라도 박경빈은 무사했을지 모른다. 양부도 없고 왕자도 없는 박경빈에게는 정치적 무게가 실리기 힘들었다. 그래서 정치권이 크게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박경빈은 원자보다 여섯 살 많은 아들을 뒀고, 이 점은 박경빈 모자가 의심의 시선을 받는 원인이 됐다. 이 모자를 보호해 줄 박원종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런 시선은 이 모자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경빈과 복성군은 불행하게 됐다. 1527년, 작서(灼鼠)의 변이 발생했다. 이때는 인종이 세자가 된 뒤였다. 사지와 꼬리가 잘린 쥐(鼠)가 입·귀·눈이 불로 지져진(灼) 상태로 세자 침소 주변의 은행나무에 걸린 채 발견됐다.
이 일은 왕위계승을 노리고 세자를 저주한 사건으로 해석됐다. 정치권은 박경빈과 복성군을 주시했고, 두 사람은 왕실에서 쫓겨났다. 이렇게 추락하기 시작한 두 모자는 1533년에 사형을 당했다. 나중에 진범이 밝혀져 명예가 회복됐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폭군 연산군이 쫓겨난 이후, 조선에는 일종의 해방감이 감돌았다. 그런 해방감 속에서 박경빈이 박원종의 후원으로 중종의 후궁이 됐다. 대궐에 들어간 박경빈은 중종반정을 표상하는 상징적 인물이 됐다.
하지만 박원종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데다가 그의 아들이 정치적 휘발성을 가졌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박경빈은 중종반정이라는 정치적 사건의 성쇠 과정을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인물이었다.(2)
(2) https://v.daum.net/v/20220612114501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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