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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4) - 세종대왕 본문

남국/조선

조선(4) - 세종대왕

대야발 2021. 7. 5. 17:33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통하지 않으니…애민군주 세종, 독창성·탁월함 갖춘 한글 만들다

입력 2022.04.18 10:00 수정 2022.04.22 13:19 생글생글 750호

 
(92) 한글에 담긴 세종대왕의 사상(上)
한글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최근에 탄생한 글자다. 동시에 인류의 지적 성장, 향상된 사고능력, 과학의 발전, 진보된 사상(인간주의)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특히 개인이 목적의식을 가지고 단기간에 창작한 글자란 점에서 주목받는다. ‘표음문자’여서 학습하기 쉽고 사용이 편리하다. 논리적인 음운체계 덕분에 사용자가 수리적 사고에 익숙해질 수 있다. 그 때문에 많은 학자가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했고, 구조와 제정 방식에 관심이 많다.

필자는 역사학자로서 한글을 창조한 목적이 궁금하다. 세종은 세상을 변혁시킬 능력을 소유한 최고의 권력자였다. 국가경영자인 동시에 뛰어난 학자였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에 그의 사상과 구현 방식(논리)이 반영된 것은 분명하다.
 
홍익인간 사상과 ‘3의 논리’
이는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표현됐다. 1446년 반포한 훈민정음 해례에는 목적을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라고 했다. 당시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이두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사정을 ‘어엿비’ 여긴 ‘어린 백성(愚民)’은 그리스나 로마의 특수한 시민이나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등장한 신사(부르주아지)가 아니었다.

세종의 정책 근간은 백성의 생활 편의와 풍족함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농사직설》을 편찬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농사에 도움을 준 점, 조세를 감면해 ‘공평화’를 도모한 점에서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의창, 혜민서, 활인서 등을 설치해 백성의 굶주림과 질병을 치료했다. 당시 이미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는 법까지 제정했다. 이런 세종은 모든 백성이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감정과 의사를 솔직하고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기호(code)’를 가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세종이 혁신적인 인간주의와 실천을 추진하게 만든 힘과 사상은 무엇일까. 뛰어난 성리학자였므로 그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훈민정음 해례에도 ‘태극도설’ ‘음양오행설’ 등의 강한 연관성을 표현하고,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송학사상’의 영향도 거론한다. 하지만 세조 3년에 내린 소위 ‘구서령’에서 확인하듯 그 시대에는 《고조선비사》 《조대기(朝代記)》 등을 비롯해 역사 및 전통 신앙과 연관된 책이 많았다. 단군 의식이 강하고 다독가였던 세종이 가졌던 인본사상의 근저에는 ‘홍익인간’이 집약된 우리 사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표음문자 한글, 우수한 컴퓨터 언어
한글은 체계의 독창성과 탁월함 때문에 ‘옛글자설’ ‘파스타 문자설’, 심지어는 ‘창살설’ 등 모방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한글은 상징문자나 표의문자가 아니라 표음문자다. 말을 만드는 이빨(齒)·혀(舌)·목구멍(咽喉) 등 발성기관의 형태를 차용하고, 28개 기호를 초성음·중성음·종성음으로 구분한 뒤 각각 순서와 비율을 계산해 조합했다. 따라서 조합 능력이 향상된 현대문명에 가장 적합하고 우수한 컴퓨터 언어가 된 것이다.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그런데 조합에는 반드시 구성 ‘논리(logic)’와 ‘의미(meaning)’가 있다. 자음은 오음, 오성의 음상에서 확인되듯 오행사상과 연관이 깊다. 또한 필요성의 반영인지, 논리적인 필연인지 중성글자인 모음은 기본자 ‘· ㅡ ㅣ’를 기본으로 변형된다. 이는 천원(天圓)·지방(地方)·인위(人位)의 3재를 의미하고, 1·2·3이라는 수리를 반영한다. 상용화된 문자는 사람의 가치관, 사회 체제, 문화의 성격에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면 명민한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해 신조선에 인간주의, 합일과 상생의 가치관을 이식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1)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권력 유지 위해 한자 고수하는 기득권자에 대응…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 만들어

입력 2022.04.25 10:00 수정 2022.04.26 10:00 생글생글 751호

 
(93) 한글에 담긴 세종대왕의 사상(下)
훈민정음 제정 무렵에 일본에 파견됐던 집현전 학자인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세종은 《용비어천가》 《농사직설》 등과 《월인천강지곡》 500여 곡을 비롯해 《석보상절》 같은 불교 서적에 훈민정음을 활용했다. 이후 신권(臣權)에 대항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을 보호하려는 왕들은 《훈몽자회》 《삼강행실도》 《소학》 《천자문》과 각종 의서 편찬에 훈민정음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 ‘기적의 문자’ 훈민정음은 공문서 등 국가의 공적 역할은 하지 못하고, ‘언문’ ‘암글’ ‘중글’ 등의 비칭으로 불렸다. 그런데 훈민정음은 왜 450여 년 만인 1894~1896년 갑오개혁 때야 비로소 나라글로 인정받았을까. 그 이유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조선 시대에 ‘문자’는 필수적인 기호가 아니었다. 우리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생태환경과 유별난 역사, 생물학적 특성 탓에 샤머니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매우 감성적이었고, 논리나 합리적인 사고에 서툴렀으며, 사회구조의 필요성도 약했다. 또한 조선은 농업 중심의 씨족공동체 사회였다. 따라서 상업·산업이 발달한 사회보다 거래와 소통이 덜 필요했고, 효율적이고 계량적인 문자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한글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성리학자는 신분적으로는 양반이고, 경제적으로 유일한 재화이자 생산수단인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었다. 또한 문화적으로 도덕과 학문·예술을 만들고 보급하며 감독하는 고위 관리 또는 출세를 고대하는 예비군이었다. 더구나 사대교린 정책을 선택했고, 자의식도 부족했으므로 임금의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 이들은 끝까지 한자와 한문을 고집했다.
 
어려운 한자 … 해석에도 유추 심해
한자는 ‘동이인’들이 처음 만들어 한족이 주도했지만, 중국을 다스린 다수 종족의 역사와 문화가 합쳐지면서 완성됐다. 따라서 역사의 노정과 다양성,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만 비합리적인 구성 때문에 해석에 유추가 심하다. 또 비논리적이므로 내용과 논지가 불명확하다. 따라서 사용 과정에서 갈등과 오해의 발생이 불가피해 방어 전략으로 유연성, 추상성, 풍부함, 깊이 등을 강조했다. 이는 중국 문학, 사상, 예술의 장점으로 포장됐다. 무엇보다 구성이 어렵고 복잡한 글자가 많아 긴 시간과 큰돈이 투자되지 않으면 습득과 활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소수 지배계급 위주의 사회와 교조적 문화의 양산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필자는 때때로 의구심을 갖는다. 조선조 학자들의 한문 실력으로 우주의 본질과 세계의 현상을 제대로 표현하고, ‘이기론(理氣論)’ ‘성정론(性情論)’ 등 형이상학적 논쟁을 깊이 있게 벌일 수 있었을까. 인간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서툴렀을 것이고, 이에 학문·문화·예술도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농업·어업·상업·산업 등의 기술과 지식을 표현하기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배격한 이유
성리학자들은 비효율적이고 학습이 어려운 한자를 고수하면서 왜 훈민정음은 용도폐기했을까. 태생적으로 특권 세력인 그들은 항구적인 권력의 독점과 유지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우민화하고, 자신들과의 차이점을 강조해 우월성을 강요할 도구로 ‘한자’라는 기호를 독점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유추에 근거한 자기주장이 강한 교조적 사회, 실생활을 무시하고 관념적인 지식인이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가 됐다. 또한 성리학과 실체가 불분명한 중국에 사대하는 독특한 나라가 됐다. 현명하고 통찰력이 강한 임금 세종은 이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런 위험성을 간파하고, 이를 방어할 목적의 하나로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창제했을지도 모른다. 한글은 나라의 멸망과 식민지라는 아픔을 겪고, 500년 만에 화려한 부활을 했다. 민주주의, 산업화, 정보화라는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맞아 표기방식의 효율성, 신속한 판단과 응용능력 향상에 적합한 기호로, 디지털 문명의 선도국이 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역사의 천재’인 세종대왕은 권력의 탈취, 생산양식의 변화, 감성에 호소하는 선동이 아니라 합리적인 정책과 지식의 전수, 기호 사용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면서 이상세계를 건설하려 한 혁명가였다.(2)

 

 

'이순신 최후' 메모한 류성룡 다이어리서 세종의 '불멸 업적' 찾았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기자2023. 5. 23. 05:00
2022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에서 구입환수한 류성룡의 1600년판 다이어리(대통력). ‘명나라 만력 28년(1600년) 경자년의 대통력’이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한양의 하늘을 관측한 결과를 기록해넣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 중인 유물 하나가 눈에 띈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지니고 다녔다는 ‘경자년 대통력’이다. 요즘으로 치면 ‘1600년판 다이어리’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에도 ‘류성룡 대통력’은 8권이나 남아있었다. 안동 하회 풍산류씨 충효당(류성룡의 종택)에 1594·1596·1597·1598·1604·1605·1606·1607년판 대통력이 소장되어 있었다. 지난해 일본 소장자로부터 구입한 ‘1600년 대통력’은 류성룡의 9번째 다이어리라 할 수 있다.

1442년 세종이 한양의 하늘을 관측하여 일출몰과 밤낮길이 등을 계산한 결과를 정리한 <칠정산>(내편). 류성룡이 지니고 다닌 1600년 다이어리(대통력)에도 <칠정산>이 계산한 하짓날 일출몰 시각과 밤낮길이가 정확하게 적혀있다.

 

■“대장은 몸을 가벼이 해서는 안됩니다.”

이번 9번째 ‘류성룡 다이어리’에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의미가 첫장부터 담겨 있었다.

임시로 철해 놓은 표지에 빼곡한 글씨 덕분에 단박에 유명세를 탔다.

“전투(노량해전·1598년 11월 19일) 하는 날에 직접 시석(화살과 돌)을 무릅쓰자, 부장들이 간언하여 만류하며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듣지 않고 직접 출전해 전쟁을 독려하다가 이윽고 날아온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 아아!(戰日 親當矢石 편裨諫止曰 大將不宜自輕 …(不)聽 親出督戰 旣而爲飛丸所中而死 嗚呼)”

 

‘절친’ 류성룡이 직접 쓴 이순신 장군(1545~1598)의 최후 모습이다.

사실 장군의 최후는 여러 사료에 등장한다. <선조실록> 1598년 11월27일자 기자는 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전한다.

“몸소 활을 쏘다 왜적의 탄환을 맞고 쓰러지니…옷으로 시신을 가리고 북을 치며 진격했다. 군사들이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했다. 왜적이 대패하니 사람들은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死舜臣破生倭)고 했다.”이항복(1556~1618)의 <백사집> 역시 인구에 회자되는 장군의 최후를 기록했다.

1600년판 류성룡 다이어리에 인쇄된 하짓날(5월12일)의 한양 일출·일몰 시각과 밤낮 길이는 140년전 세종이 편찬한 <칠정산>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장군이 배 위에 꿇어앉아 ‘오늘 결사항전에 나서니, 하느님께서 반드시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願天必殲此賊 祝罷)’라 기도했다…장군이 운명하기 전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마라(諱言我死 勿令驚軍)’고 했다.”

류성룡의 <서애집> 역시 “날아오는 탄환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부하들에게는 ‘싸움이 급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은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고 했다”고 전했다.

언급한 이순신 장군의 최후는 한결같이 읽는 이의 가슴을 격동시키는 감동을 전해준다.

 

이번에 확인된 메모 역시 서애가 육필로 ‘장군의 최후’를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무엇보다 부장들이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된다(大將不宜自輕)’고 만류했고, 장군이 직접 출전해 전투를 독려했다(親出督戰)’는 내용은 <징비록>에는 보이지 않는 구절이다.(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경자년(1600년) 다이어리’에는 귀에 익은 이름들도 간간이 보인다. “1600년 6월5일 임진왜란 도중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1567~1618)이 귀국했고”, “6월7일…허준이 약품과 당선(중국 부채)를 보내줬다”는 구절이 보인다.

또 3월25일 퇴계 이황(1501~1570) 연보(연대기)의 초안을 잡았고, 한달여 지난 4월29일 마무리지었다고 메모했다. 이밖에 지진이 일어난 사실(10월15·11월15일)에서부터 술을 담그는 방법을 여러차례 기록한 것도 눈에 띈다.

<칠정산>에 계산된 하지를 기준으로 서울의 일출몰 시각과 낮밤길이. 지금의 측정값과 3분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천기누설’은 황제의 전유물

그런데 필자는 서애의 초서 메모와 함께 활자로 인쇄된 조선시대 다이어리, 즉 달력(대통력)에 시쳇말로 ‘꽂혔다.’

‘대통력(大統曆)’이 무엇인가. 1370년(고려 공민왕 19) 수입된 명나라 달력이다.

1653년(효종 4) 서양의 역법을 가미한 시헌력을 도입할 때까지 300년 가까이 조선에서 사용됐다.

어째 좀 기분이 싸하다. 왜 조선에서 명나라 달력인 ‘대통력’을 썼다는 얘기가 아닌가.

뭐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라 할 수 있다. 왜 ‘천기(天機)’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예부터 ‘천문 기상의 관측’은 천자(황제)의 고유권한이었다. 3300년전 무렵 중국 상나라 때 만들어진 상형문자 ‘왕(王)’을 보라.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시람(†)’이 바로 군주(천자·황제)였다. <서경> ‘요전’편은 “하늘의 뜻을 읽는 군주만이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필요한 ‘시간과 절기’를 베풀어 줄 수 있다(欽若昊天 敬授人時)”고 했다.

생각해보라. 누구나 천체의 운행을 읽어(천기를 누설해서) 시간과 절기를 멋대로 정하면 어찌 되겠는가. 세상이 뒤죽박죽될 것이다. 따라서 천자(황제) 만이 제후국(신하)에게 달력을 만들어 배포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은 ‘원칙적으로’ 명나라 황제가 해마다 동짓날에 제작·반포한 ‘이듬해 대통력(달력)’을 받아왔다.

그 때 중국에 보내는 사절단의 이름을, ‘동짓날 즈음’에 보낸다 해서 ‘동지사(冬至使)’라 했다.

류성룡의 1600년 다이어리(대통력)에는 그 날 그 날의 운세가 빼곡히 정리되어 있다. 류성룡이 메모해둔 것이 아니다. 달력 전문가가 천문관측의 결과와 인간의 길흉을 연구·해석해서 기록해두었다.

 

■명나라 달력 기다리다가는…

그러나 ‘원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가 있다. 일단 동지사의 중국 체류 기간이 너무 길었다.

동짓날 즈음에 출발한 동지사는 40~60일 정도 연경에 머문 뒤 이듬해 3월 말이나 4월 초 귀국하는게 통례였다.

그때면 이미 백성들이 농사짓느라 한창일텐데, 그 무슨 철 지난 달력이란 말인가.

예컨대 1599년(선조 32) 12월 16일 선조가 “중국이 달력을 반포하기 전에 우리나라 역서를 배포하는 것이 꺼림칙하다”고 걱정했다. 그러자 승정원·예조·관상감이 일제히 나섰다.

“중국에서는 해마다 10월1일 달력을 나눠주는데…우린 동지사가 귀국하기를 기다리면 설이 지난 뒤가 될 것이고…백성들은 절기를 알지못해 농사 때를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빨리 달력을 배포해야…”(<선조실록>)

그래서 ‘원칙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물론 중국 황제가 제작한 대통력을 받아와 인쇄·반포하는 것이 당대의 법도였다.

그러나 실상은 동짓날에 맞춰 조선 나름대로 ‘새해의 달력’을 제작·배포했음을 알 수 있다.

동지사가 받아오는 대통력은 그저 외교적인 요식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1580년판 대통력(달력). 지금의 달력처럼 달 이름과 양력 날짜, 그 날짜에 해당되는 음력 날짜, 요일 공휴일 표시, 24절기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천문관측 내용과 돌아오는 절기의 특징, 그리고 인간의 하루하루 길흉 등도 빠짐없이 기록해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김종태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 설명·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연경(베이징)과는 14분 차이…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중국의 달력, 즉 대통력은 조선의 ‘시간과 절기’와는 애초부터 맞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연경(북경)과 서울의 위도와 경도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달력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세종대왕은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사기> ‘열전·역이기전’)는 고사를 누누이 강조한 분이다.

그런 마당에 ‘시간과 절기’가 다르면 백성들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마침내 세종은 서울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 현상을 연구해서 조선 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을 편찬(1442년)했다.

특히 서울(한양)을 기준으로 일출·일몰 시각과 주야 시간을 계산하여 정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칠정산>(내편)으로 구한 서울의 동짓날 낮의 길이(39.12각)는 중국 연경(베이징·38.14각)보다 0.98각(1각=14분24초)이 길었다. 즉 서울의 동짓날 낮 길이는 위도가 높은 베이징에 비해 현대 시간으로 14분 이상 긴 것을 밝혀냈다.

심수경(1516~1599)의 <견한잡록>에 잘 나와있다.

“중국은 낮의 길이가 가장 길 때가 60각,조선은 61각…조선의 일출이 가까우므로 1각의 차이가 있는 것…. 역서(달력)를 항상 활자로 인쇄하여 중외에 반포했다.”

중국 황제가 내려주는 대통력(달력)을 받아오는 사절단(동지사)의 임무는 요식행위였다. 해마다 동짓날 즈음에 달력을 받으려고 파견되는 동지사는 이듬해 3~4월에 귀국하기 일쑤였다. 농사철을 위해 새해 달력을 배포하야 하는 조선으로서는 중국달력을 기다릴 수 없었다. 미리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제작·배포했다. 중국달력은 외교용·참고용이었다.

 

■류성룡 다이어리에 숨겨진 세종의 흔적

바로 이거다. 이것으로 이번에 구입 환수된 ‘류성룡 다이어리’가 ‘무늬만’ 중국 달력(대통력)인 것이 밝혀졌다.

‘류성룡 다이어리’ 중 하짓날인 1600년 5월12일자를 보자.(최고은 충북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원의 해석·검토)

거기에는 ‘일출=인정 2각’ 및 ‘일몰=술초 1각’ 시간과 함께 ‘낮=61각’과 ‘밤=39각’의 길이가 인쇄되어 있다.

‘인정(寅正)’은 ‘새벽 4시’를, ‘2각’은 28분48초(1각=14분24초)를 각각 가리킨다. 따라서 1600년 5월12일(하지)의 일출시각은 새벽 4시28분48초라는 이야기다.

일몰 시각인 ‘술초(戌初) 1각’은 몇시인가. ‘술초’는 오후 7시를, ‘1각’은 14분24초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날의 일몰시각은 ‘오후 7시14분24초’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류성룡 다이어리’는 하짓날인 이날(5월12일)의 낮(주·晝)길이를 61각(14시간38분24초), 밤(夜)길이를 39각(9시간21분36초)로 표시해놓았다.

이 대목에서 의심이 생긴다. 이것이 당시 한양(서울)의 일출·일몰 시각과 낮·밤길이가 맞는 것일까. 그냥 당시 명나라 연경(북경)의 낮·밤 길이와 일출·몰 시각이 아닌가. 그랬더니 최고은 연구원은 ‘증거자료’를 내 밀었다.

조선 전기에서는 해마다 동짓날 즈음에 4000부 가량의 달력을 만들어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과 종친, 문무당상관 이상에게 배포했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세종실록에 정답에 나와있다

그것이 바로 <세종실록>의 ‘칠정산(내편)’ 기록이다.

거기에는 서울기준으로 각 날짜별 일출·몰 시각과 주야(낮밤) 길이를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하짓날의 일몰·일출 시각에 ‘인정 2각’(일출), ‘술초 1각’(일몰)이라고 분명히 적혀있지 않은가. 또한 주야간 길이에도 ‘낮 61각’과 ‘밤 39각’이라 또렷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이 158년 후인 1600년 ‘류성룡 다이어리’ 하짓날(5월12일)에도 한치의 틀림없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혹여 시니컬한 반응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다른 나라보다 뒤늦게 해놓고 지나친 호들갑을 떠는게 아니냐”고….

그러나 1440년대에 이 정도로 천문학을 발전시킨 나라는 중국과 아라비아 외에는 조선밖에 없었다.

서양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1676~1742)가 1759년 무렵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한 핼리혜성을 조선의 하늘에서 관측하고 기록한 ‘성변측후단자’. 조선의 천문관 35명이 1759년 음력 3~4월의 25일간 이 핼리혜성을 관측한 기록을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조선이 천문관측 실력은 당대 세계최고 수준이었다.|양홍진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제공·연세대 도서관 소장

 

■무늬만 명나라 달력

물론 ‘류성룡 다이어리’를 포함한 달력(대통력)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달력 체제에 따라 편찬·배포되었다.

그러나 누누이 강조했지만 중국 역법을 그대로 따랐다가는 시간과 절기가 맞지않았다. 농사를 망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세종 때 계산한 조선(서울) 하늘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즉 <칠정산>에 따라 달력을 수정해서 반포했다.

그 증거가 ‘1600년 류성룡 다이어리’에 보석처럼 박혀있었다. 그래서 ‘대통력’은 ‘무늬만 중국달력’일 뿐, 세종의 애민정신과 당대 최고 수준의 천문실력이 담겨있는 조선의 독자달력이라는 것이다.

‘이듬해 달력’은 매년 10월15일 즈음에 4000부 정도 발행해서 중앙 및 지방의 각 관아와 종친, 문무당상관(3품 이상) 관리들에게 배포했다.(<경국대전> <서운관지>)

서애 류성룡이 1600년 다이어리의 임시 표지에 깨알같이 적어놓은 이순신 장군의 최후 모습. 내용 중 부장들이 ‘대장께서 스스로 가벼이 하시면 안된다(大將不宜自輕)’고 만류했고, ‘장군이 직접 출전해 전투를 독려했다(親出督戰)’는 내용은 <징비록>에는 보이지 않는 구절이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설명

 

■‘매미가 운다’ ‘

지금의 달력에는 달 이름과 양력 날짜, 그 날짜에 해당되는 음력 날짜, 요일 공휴일 표시, 24절기 등이 표시되어 있다.

물론 ‘류성룡 다이어리’에서 보듯 조선시대 달력의 기본틀도 다르지 않았다.

음력 달력인만큼 큰달(30일)인지 작은달(29일)인지 대소(大小)를 표시하고 그 날짜가 배열된 칸에는 그 달에 들어있는 절기를 해당날짜에 적어놓았다.

그런데 ‘류성룡 다이어리’ 등 조선시대 달력에는 당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가늠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가 담겨있다.

즉 반드시 60갑자로 순환하는 일진과, 그날의 기운을 지배하는 오행, 그날의 운세를 지배하는 별자리(28개 중), 12가지로 순환하는 운세가 적혀있다. 그중 24절기를 다시 3등분으로 세분화해서 각 절기의 특징을 설명해놓은 대목이 이채롭다.

단적인 예로 ‘류성룡 다이어리’의 ‘5월(음력) 세부 절기’를 설명한 내용을 보자.

‘당랑생(螳螂生·버마제비가 나온다), 격시명(貝+鳥)始鳴·때까치 비로소 운다), 반설무성(反舌無聲·개똥지빠귀가 울음을 멈춘다), 녹각해(鹿角解·사슴뿔이 빠진다), 조시명(조始鳴·매미가 비로소 운다), 반하생(半夏生·한약재인 반하가 난다)’

경자년(1600년) 다이어리’에는 귀에 익은 이름들도 간간이 보인다. “1600년 6월8일 임진왜란 도중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1567~1618)이 귀국했고”, “6월7일…허준이 약품과 당선(중국 부채)를 보내줬다”는 구절이 보인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또 해당 날짜의 길흉(吉凶)을 알려주고, 그에따라 ‘해야 할 일(宜)’과 ‘해서는 안될 일(不宜)’까지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다. ‘류성룡 다이어리의 5월 12일(하지)’을 보자.

이날에 ‘해야 좋은 일’(의·宜)은 ‘혼인맺기(結婚姻), 친구모임(會親友), 외출(出行), 입학, 문서작성(立券), 교역, 병치료(療病), 집수리(修造)와 흙을 나르는 일(動土)’이라 표기했다.

또 ‘진시(辰時·아침 7~9시)에 하면 좋은 일’은 ‘산실 마련, 방아와 맷돌 놓기, 씨 뿌리기, 가축 기르기, 흙 파기, 발인 때 관을 둔 곳을 열기, 문 만들기, 부엌 만들기’라 했다. 이밖에 ‘집에 사람 들이기’, ‘병충해 잡기’, ‘바느질과 수놓기’, ‘재물 들이기’, ‘옷 만들기’, ‘목욕’, ‘담장 허물기’ 등 길흉을 세세하게 기록해놓았다.

그 날 그 날의 운세가 어떤 지도 전통시대 사람들이 달력을 보는 중요한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22년 일본에서 구입한 류성룡의 1600년판 다이어리에는 이순신 장군의 충심 뿐 아니라 백성들을 긍휼히 여긴 세종의 애민정신까지 녹아있다. 당대 사람들의 깨알같은 하루하루의 삶까지도 담겨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달력 대로만 했어도…

그날의 길흉 운세가 실생활에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문헌자료가 제법 있다.

<세종실록> 1446년(세종 28) 7월17일자는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것이 불길하다’는 달력의 운세에 따라 승하한 소헌왕후(세종 부인)의 관이 출발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또 1557년(명종 12) 4월 25일 명종이 군사를 사열하기 위해 거둥할 날짜를 28일로 잡았다. 그러나 달력에 ‘28일 외출이 불길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러자 명종은 “하필 불길하다는 날에 거둥할 일이 있느냐”면서 출행일을 29일 해뜰녘으로 바꿨다.(<명종실록>)

1403년(태종 3) 5월5일 경상도 조운선(세금 현물 운반선) 34척이 침몰해서 선원 등 1000여명과 쌀 1만여석이 수장되는 참극이 빚어졌다. 이때 태종은 “출항날(5월5일)은 수사일(受死日·대흉일)이라 배를 띄우면 안되었다”면서 “바람까지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모두 과인이 책임”이라고 자책했다.

물론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비과학적인 미신이라 손가락질 할 법 하다. 그러나 하늘의 조화를 두려워하고 늘 언행을 삼가며 살았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었으니 어느 누가 비아냥 댈 수 있단 말인가.

‘류성룡 다이어리’에는 이렇게 이순신 장군의 충심 뿐 아니라 백성들을 긍휼히 여긴 세종의 애민정신까지 녹아있다. 당대 사람들의 깨알같은 하루하루의 삶까지도….(이 기사는 최고은 충북대 기초과학연구소 연구원의 자문과 도움에 힘입어 작성되었습니다. 김종태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장과 노승석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정성희 실학박물관장, 양홍진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센터장,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김충배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도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3)

<참고자료>

김종태, ‘경진년 대통력 소고’, <생활문물연구> 7권, 국립민속박물관, 2002

신기철, ‘조선 후기 작력식과 역서의 역주 연구’, 충북대 석사논문, 2017

이은희, 한영호, ‘조선초 간행의 교식가령(交食假令) 연구’,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4권 제1호, 한국과학사학회, 2012

정성희, <조선시대 우주관과 역법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최고은·이기원·민병희·리량(李亮)·류윤현·안영숙 (2018), ‘대통력의 일출과 일몰시간 계산을 위한 중국 수학적 기법 연구’, <천문회보(Astronomische Nachrichten)> 339권 6호, 2018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독서휴가'는 세종의 또다른 업적…"죽어라 책만 읽으라" 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3.03.28 05:00 수정 : 2023.03.28 10:01

1531년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독서당계회도’의 부분. 임금의 명에 따라 독서휴가를 받은 관리 12명이 두모포(동호대교 북단)인근에 조성된 독서당 앞 한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그렸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재위 1837~1901) 시대에 ‘셰익스피어 휴가(Shakespeare Vacation)’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관리들에게 3년에 한번씩 유급휴가를 주는 대신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이끈 군주가 독서를 나랏일의 으뜸으로 쳤다는 얘기다. 그러나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빅토리아 시대보다 무려 400년 이상 앞선 조선의 세종대왕이 그와 같은 제도를 시행했으니 말이다.

1426년(세종 8) 세종이 집현전 관리인 권채(1399~1438)·신석견(1407~1459)·남수문(1408~1442) 등에게 특명을 내린다.

“나이가 젊고 전도양양한 너희를 집현관에 임명한 이유는 글을 익혀서 실제 효과를 나타내라고…. 하지만 직무 때문에 독서에 힘쓸 겨를이 없으니, 이제부터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라.”(12월11일)

임금이 ‘책 읽을(讀書) 겨를(暇)을 하사(賜)했다’고 해서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한다. 쉬운말로 ‘독서휴가제’라 할 수 있다.

독서휴가자의 자격은 ‘통훈(정3품) 이하 문신으로서 문학이 뛰어난 자’(<대전회통>)로 규정됐다.

이 제도는 1773년(영조 49)까지 48차례나 이어졌으며, 총 320명이 혜택을 받았다. 독서휴가제는 정조 즉위(1776)와 함께 규장각이 설치됨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체’됐다.

‘독서당계회도’(1531년작)의 화면 아래에는 모임 참석자 12명의 명단이 보이는데 이들의 호와 이름, 자(字), 본관, 생년, 사가독서 연도, 과거 급제 연도, 부친이나 형제 등의 인적사항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연 주세붕(1495~1554), 가사 ‘면암정가’로 유명한 송순(1493~1582), 성리학의 대가인 송인수(1499~1547) 등이 포함되어 있다. |

■명 황제에게 몽둥이 매질당한 사신

조선왕조는 왜 그렇게 ‘독서에 진심’이었을까.

세종이 맨처음에 특별히 ‘젊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독서휴가를 준 이유는 분명했다.

세종은 1420년 학문 연구기관인 집현전을 만들어 인재를 양성하려 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집현전의 업무가 너무 과중했다.

국왕과 세자에게 강의하는 업무는 물론이고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사관·시험관·지제교(임금의 교서 작성)·사신 등의 역할까지 겸해야 했다. 세종은 그 때문에 촉망받는 집현전 관리들을 업무에서 해방시켜 ‘책만 읽으라’고 명한 것이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1474년(성종 5) 4월8일 영사 신숙주(1417~1475)의 언급이 함축적이다.

“모든 학자들이 과거급제 후에는 출세만을 생각하고 책을 읽지 않습니다. 이 지경이니 누가 학문에 힘쓰겠습니까.”

신숙주는 급제 후에는 책을 손에서 놓아버리고 죽기 살기로 출세만 좇는 풍토를 지적한 것이다.

또 하나 ‘독서휴가제’의 으뜸 이유가 있었다. ‘중국과의 외교에서 절대 꿇리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판 ‘중꺾마’일까.

개국(1368)한지 30년도 채 되지 않았던 명나라는 역시 새롭게 왕조가 바뀐 조선(1392)의 기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개국초(1392~97년)부터 “조선이 명나라에 올린 표전문(외교문서)에 황제를 조롱하는 문자가 섞여있다”면서 조선 조정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이 뿐이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권신인 이인임(?~1388)의 사돈이니 아버지니 하면서 ‘조선왕의 자격이 없다’고 끈질기게 괴롭혔다.

아주 기분 나쁜 수모도 겪었다. 1394년(태조2) 명나라를 방문한 사신 이염(?~1403)이 명태조(주원장·재위 1368~1398)으로부터 초죽음에 이를 정도로 몽둥이 매질을 당한 것이다.

“황제가 꿇어앉은 이염의 모습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꾸짖고 머리를 숙이게 한 뒤 몽둥이로 쳐서 거의 죽음에 이르게 했다. 약을 마시고 겨우 살아났다.”(<태조실록> 1394년 8월15일)

명 황제는 이염이 귀국길에 타고 갈 말(馬)도 주지 않았다. 결국 이염은 걸어서 천신만고 끝에 돌아올 수 있었다. 명 황제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사신은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까지 내렸다.

‘독서당계회도’. 국외소재문화재단이 미국경매를 통해 구입환수했다. 현전하는 독서당계회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있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1442년 독서휴가자 명단을 보라!

중국과의 사대외교를 펼쳐야 했던 조선으로서는 이런 수모를 견뎌야 했다.

또한 조선에 파견되는 명나라 사신들이 내세우는 조건이 있었다. “조선의 뛰어난 문사들과 시를 읊으며 화답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사람이 시를 읊으면 곧바로 화답하는 것을 ‘창화(唱和)’라 한다.

당시 ‘중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개국한 명나라는 ‘나름 문교(文敎)에 일가견이 있는’ 조선인들에게 한수 지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선 역시 꿀릴게 없다고 생각했다. <성종실록>에는 “우리가 그들(명사신들)을 압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다짐하는 내용(1476년 5월15일)이 나와있다.

그렇다면 세종이 시작한 독서휴가제, 즉 사가독서제가 실제로 효과를 얻었을까. 그랬다.

세종 연간에 독서휴가의 혜택을 받은 인물은 9명이다. 그중 앞서 거론한 3명(권채·남수문·신석조)은 1426년 첫번째로 선발된 이들이다. 세종은 16년 후인 1442년(세종 24) 새롭게 6명을 ‘독서휴가자’로 선발했다. 신숙주(1417~1475)·박팽년(1417~1456)·성삼문·1418~1456)·하위지(1412~1456)·이개(1417~1456)·이석형(1415~1477) 등이다.

24세(성삼문)~30세(하위지) 등 전도가 창창한 젊은 인재들이었다.

1426년(세종 8) 세종은 집현전 관리 3인에게 “이제부터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글을 읽으라”(12월11일)고 지시했다. 세종은 16년 후인 1442년에도 신숙주·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이석형 등 6인에게 ‘사가독서’, 즉 ‘독서휴가’의 명을 내렸다.|서울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문서비스

■조·명 학자간의 시문배틀

이 독서휴가의 진가가 발휘된 순간이 있었다.

즉 1450년(세종 32)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던 명나라 사신 예겸(1415~1479)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였다.

세종은 접반사(사신 맞이 총책임자)로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인 공조판서 정인지(1396~1478)를 내세웠다.

물론 당대 54살의 노련한 정인지만으로도 예겸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비장의 카드를 더 내놓는다.

30대 초반의 신숙주(33)와 성삼문(32)을 합류시킨 것이다. 세종은 독서휴가로 공부한 신숙주·성삼문의 문장을 믿었다.

과연 불꽃튀기는 시문배틀이 벌어졌다.

“예겸이 시 한 편을 지어 정인지에게 주니 정인지도 즉시 운을 따라 지었다. 이때부터 매일같이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이 예겸과 시를 주고 받았다.”(<세종실록> 1450년 윤1월3일)

과연 정인지는 예겸과의 ‘창화’ 대결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발휘했다. <세종실록>은 “예겸이 정인지에게 ‘그대와 나누는 하룻밤 대화가 10년 동안 글을 읽어서 얻는 소득보다 낫다’고 했다”(1450년 윤1월8일)고 전했다.

그렇다면 두 젊은 선비인 신숙주·성삼문의 실력은 어떠했을까.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두 선비와 시를 주고받은 예겸은 그들을 사랑하여 형제의 의를 맺었고, 귀국할 때에는 눈물을 닦으며 이별했다”고 전했다.

또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는 “신숙주가 예겸에게 전한 화답글은 초나라 애국시인인 굴원(기원전 343~기원전 278)의 ‘초사’와 비견된다”면서 “예겸의 문장 실력과 백중세”고 극찬했다.

독서휴가제의 성과가 이러했으니 후대의 임금들이 어찌 계승하려 하지 않았겠는가.

세종연간에 독사휴가를 받은 9명. 젊고 전도 양양한 집현전의 젊은 관리들이었다.

■필독서 없는 독서휴가 기간이 10년?

그렇다면 임금이 내려준 독서휴가의 기간이 어느 정도였을까.

1474년(성종 5) 4월8일 대사헌 이예(1419~1480)는 “10여년 동안 독서휴가를 준다면 박학능문(博學能文)의 학자가 배출될 것”이라고 건의했다. ‘10년 휴가’라면 너무 긴 것이 아닐까. 그렇지도 않았다.

1557년(명종 12) 9월14일 예조판서 홍섬(1505~1585)은 “소신이 중종조에 독서당(독서휴가를 보낸 장소)에 뽑혀 거의 10년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그러나 10년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을 것이다. 그래도 3년 이상 책을 읽었다는 실록 기사가 보인다.

즉 1426년 12월 독서휴가의 명을 받은 권채가 3년6개월 뒤인 1430년(세종 12) 5월18일 세종에게 그동안 읽은 책을 보고한 내용이다. 권채는 이때 “<중용>과 <대학>을 읽은지 3년이 되었고, 지난해 봄부터 <논어>와 <맹자>, <오경>을 읽었다”고 했다.

세종 때의 독서휴가는 3년 정도가 기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후대에 갈수록 3개월~1년까지 신축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럼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있었을까. 또 읽은 내용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그러나 성종 때 만든 ‘사가독서 문신의 권장 사목(규칙)’을 보면 정해놓은 필독서는 없었다.

또 읽은 책의 권수를 3개월마다 보고서로 올리고, 한달에 3번은 글을 지어 제출하고 채점하도록 했다. 하지만 친구간 주고받은 전별시나 흥에 겨워 읊조린 풍류시를 제출해도 딱히 문제 삼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로지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관원이 참석해야 하는 국가적인 행사 외에는 참석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성종실록> 1476년 6월27일)

한마디로 독서휴가가 요즘으로 치면 자기주도학습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나올만큼 자발적이었다는 뜻이다.

독서휴가의 혜택은 과거 성적이 좋은 이들에게 돌아갔다. 독서휴가자 300명 가운데 72.3%인 217명이 당상관의 지위에 올랐다.(출처: 서범종의 ‘조선시대 사가독서제의 교육적 성격’, <한국교육학연구> 9권2호, 안암교육학회, 2003)에서

■고위관리의 보증수표

그럼 어떤 이들이 ‘독서휴가자’로 선발되었을까.

독서휴가를 즐긴 300명을 대상으로 정리한 연구논문(서범종의 ‘조선시대 사가독서제의 교육적 성격’, <한국교육학연구> 9권2호, 안암교육학회, 2003)에 잘 정리되어 있다. 즉 300명 가운데 과거(문과)에서 장원급제한 인원이 52명(17.4%)에 이르렀다.

과거합격자 중 상위권인 갑과(2~3등)까지 포함하면 113명(37.7%)에 달했다. 아무래도 과거 성적이 좋은 이들이 독서휴가의 혜택을 더 받았다는 얘기다. 또한 300명 가운데 훗날 정3품 이상의 당상관에 오른 이가 217명(72.3%)에 이르렀다.

‘독서휴가는 고위관직으로 가는 보증수표’였던 셈이다. 이 가운데 상신(삼정승) 37명, 문형(대제학) 52명을 배출했다.

특히 학문와 도덕을 겸비한 선비만이 맡을 수 있다는 대제학은 반드시 ‘독서당(독서휴가자들이 책을 읽은 곳) 출신’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예컨대 1604년(선조 37) 10월16일 대제학의 물망이 오른 좌참찬 류근(1549~1627)은 “제가 적임자라서가 아니라 일찍이 사가독서를 했다는 이유로 전례에 따라 후보가 된 것에 불과하다”고 극구 사양했다.

‘독서휴가자’들은 세종 연간의 신숙주·성삼문처럼 외교관으로도 ‘발탁’되었다.

세종 이후 문종~인조조 사이에 외교접대사신이 된 18명 가운데 절대 다수인 16명이 ‘독서휴가자’ 출신이었다.

역시 선조대에 접반사(명 사신의 접대를 책임진 임시 관직)로 임명된 대제학 류근은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종사관(정 5~6품)의 경우 본래 독서휴가자 출신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관례”(1606년 1월4일)라고 밝혔다.

세종연간에 독서휴가의 명을 받은 성삼문과 신숙주 등은 공조판서 정인지와 함께 1450년 명나라 사신 예겸과의 ‘시문배틀’에 임했다. 예겸은 이 세사람과 시 대결을 펼친 뒤 이때 주고받은 시 37편을 뽑아 길이 16m의 두루마리 시권으로 꾸몄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육신 6명 중 4명이 독서휴가자 출신

독서휴가자들이 짧게는 몇개월에서 길게는 10년 동안 책을 읽고, 학문에 전념한 이유가 무엇일까.

단순히 관리로서 쓰임 받기 위한 ‘재충전의 기회’로 여겼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극적인 예가 있다.

1442년(세종 24) 세종으로부터 독서휴가의 혜택을 받은 6명의 행보가 그렇다.

6명 중 박팽년·성삼문·하위지·이개 등 4명이 누구인가. 쫓겨난 어린 임금(단종)의 복위(1456)에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명단에 올랐다. 나머지 2명은? 신숙주는 수양대군(세조·1455~1468)의 편에 섰다. 이석형은 단종 복위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전라감사였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석형은 평소 가깝게 지냈던 ‘독서휴가’ 동기생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익산 동헌에 그들을 추모하는 시를 남겼다. 이 때문에 죽을 위기에 놓였는데, 그를 총애한 세조의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

사육신 중 유성원(?~1456)은 다른 4명이 독서휴가를 받은 1442년 보다 2년 뒤(1444년) 급제했다. 또 한사람인 유응부(?~1456)는 독서휴가를 받을 수 없는 무신 출신이었다.

어떤가. 세종이 선발한 ‘제2대 독서휴가자’(1442년) 중 4명은 대의명분을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던졌고, 두사람은 과정이야 어떻든 현실정치에 몸을 담았다. 신숙주는 세조를 도와 조선의 기틀을 쌓은 인물이고, 이석형 역시 세조의 환대 속에 조선의 문치에 도움을 주었다. 이석형은 세조가 서거하자 그 자초지종을 명나라에 설명하는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를 방문했다. 역시 ‘독서휴가’에서 닦은 문장과 학문을 외교분야에 활용한 것이다.

독서휴가 기간은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10년까지 천차만별이었다. 명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홍섬은 “내가 중종 때 독서휴가를 받아 10년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홍섬은 “독서휴가 기간은 길면 길수록 좋다”고 말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보물로 거듭난 독서휴가자들의 모임도

최근 문화재청이 사가독서, 즉 독서휴가와 관련된 그림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중종 때인 1516~1530년 “공무에 신경쓰지 말고 책만 읽으라”는 명을 받은 독서휴가자들의 모임을 그린 ‘독서당계회도’이다.

이 작품은 본래 일본 교토(京都)박물관장을 지낸 간다 기이치로(神田喜一郞·1897~1984) 소장품으로 전해진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간다의 사망 후 유족들로부터 작품을 입수한 다른 소장자가 미국 경매에 내놓은 것을 재단측이 구입 환수했다.

현전하는 작품 중 가장 오래된 독서당계회도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두모포(서울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 근처) 일대의 자연 풍광과 사가독서의 공간이었던 독서당, 사가독서했던 주인공들이 한강에서 뱃놀이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화면 아래에는 계회 참석자 12명의 명단이 보이는데 이들의 호와 이름, 자(字), 본관, 생년, 사가독서 연도, 과거 급제 연도, 부친이나 형제 등의 인적사항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연 주세붕(1495~1554)과, 가사 ‘면암정가’로 유명한 송순(1493~1582), 성리학의 대가인 송인수(1499~1547)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강에서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그린 ‘독서당계회도’를 보면서 ‘독서휴가제(사가독서제)’를 공부하다 보면 왠지모를 부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누군가 “기사 신경 쓰지 말고 책이나 읽으라”며 선뜻 유급휴가를 내려주면 얼마나 좋을까, 뭐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이 기사를 위해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 강혜승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유통조사부장, 최수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주임, 차미애 국외소재연구재단 특임연구원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4)

<참고자료>

서범종, ‘조선시대 사가독서제의 교육적 성격’, <한국교육학연구> 9권2호, 안암교육학회, 2003

안휘준, <국보 10-회화>, 웅진출판사, 1992

최선경, ‘조선시대 사가독서(賜暇讀書)제를 모델로 한 대학 독서교육 프로그램의 성과와 과제’, <사고와표현> 11권1호, 한국사고와표현학회, 2018

이종묵, ‘16세기 한강에서의 연회와 시회, <한국시가연구> 9권, 한국시가학회, 2001

허겸, ‘독서당의 건축공간에 관한 연구-독서당계회도(1570년)를 중심으로’, 명지대 석사논문, 2002

김중권, ‘조선시대의 독서제도-사가독서와 독서당’, <문화재사랑>, 문화재청, 2009

 

 

'천재' 세종의 깜짝 용인술..죽을 때까지 탈탈 털린 신하의 재능 [이기환의 Hi-story]

역사스토리텔러 기자2021. 11. 15. 06:00

[경향신문]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아주 특별한’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된 세종 시대 등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옥루(자격루)·일정정시의 같은 과학기구의 부품 등 금속유물 1775점 전부를 전시하고 있는데요. 12월 31일까지 특별공개하고 있으니 시간나면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6월부터 인사동 출토 유물 기사를 준비하면서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으로 읽은 실록 기사가 있었습니다.

세종 때 주조된 갑인자 활자들. 인사동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가운데는 1434년(세종 16) 개발한 갑인자가 여럿 보였다. 세종은 개발에 성공한 갑인자를 20만자 주조했으며, 하루에 40여장 찍을 정도로 조판 인쇄 기술도 향상됐다고 좋아했다.|국립고궁박물관·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임금의 ‘일성정시의’ 설명글 토씨 하나 고칠 수 없었다.

1437년 4월 15일자 <세종실록>인데요. 세종의 명을 받은 승지 김돈(1385~1440)이 천문기구 ‘일성정시의’의 발명 내력과 원리를 쓴 기록입니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말 그대로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으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낮에 태양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항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조선의 발명품이죠. 그런데 김돈이 세종의 명을 받아 옮긴 일성정시의의 원리는 제 깜냥에는 도저히 해득할 수 없을 정도로 고차원적입니다.

 

그래서 ‘아니 얼마나 천문학에 통달했으면 저런 해설을 달 수 있을까’하고 승지 김돈의 능력에 찬사를 보냈답니다. 그런데 글 중간에 반전의 내용을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를 주상(세종)께서 직접 지어 나(김돈)에게 주면서 ‘과인의 글을 토대로 해서 경들이 다듬고 보태라’고 하셨다. 하지만 임금이 직접 설명한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쉽고 상세해서 내(김돈)가 단 한 자도 고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글 머리와 끝만 살짝 보태 그대로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세종께서 해시계와 물시계를 결합한 ‘일성정시의’의 제작 및 작동 원리를 꿰뚫고 계셨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래서 김돈이 “토씨 하나 고칠 수 없었다”고 혀를 내둘렀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인사동 출토 금속활자 중 ‘불 화(火)’자와 ‘그늘 음(陰)’자는 1436년(세종 18) 간행된 <근사록> 속의 화(火)자와 음(陰)자와 똑같았다. 세종이 주조한 갑인자 20만자 중 포함된 글자라는 뜻이다. 그 갑인자를 써서 <근사록> 같은 서적을 인쇄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한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던 임금

저는 다른 실록 기사를 떠올렸는데요. <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자인데요.

“임금(세종)은 늘 ‘난 말야. 책을 본 뒤에는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어’라 했다. 그 총명함과 학문 좋아하심은 천성이었다. 책 뿐이 아니고, 수많은 신하들의 이름과 그 사람의 이력, 그 사람의 가계도까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 한번 신하의 얼굴을 보면 여러 해가 지났다 해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아무게야!’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 기사만 볼 때는 ‘천재 임금의 애교넘치는 자뻑’일까요. 아닙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인사동 출토유물 공개전’. 인사동에서 출토된 일성정시의와 옥루(자격루) 부품이 전시되고 있다. 세종 연간(15세기 초중반)에서 16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세종은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실록의 표현대로 ‘총명함’은 물론이고 ‘학문 좋아하심’도 장난이 아니었답니다.

책을 100~200번은 기본이고, 1100번이나 읽은 책도 있었습니다.(<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

<세종실록>은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임금의 독서열을 침이 마르도록 상찬합니다. 공부에 관한한 세종의 자부심도 대단했는데요.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느냐”고 반문하며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본인의 학문적 성취를 위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세종은 중국책의 번역서를 틈나는대로 공부했는데요.

“과인이 중국어 번역서를 배우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다. 명나라 사신을 접견할 때 미리 그 중국어 표현을 알면 대답할 말을 빨리 생각하여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답니다.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공부한 거죠,

세종 연간인 1437년 발명한 일성정시의.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을 관찰해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다. 세종은 천체의 운행을 꿰뚫어 보았고, 그에 맞게 발명한 24시간 주야시계인 일성정시의의 작동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승지 김돈은 ‘일성정시의’의 해설서를 쓰면서 “임금이 내려준 ‘일성정시의 해설문’이 너무도 쉽게 상세해서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실었다”면서 세종의 천재성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황희·맹사성 투톱을 죽을 때까지 활용한 임금

한가지 딱한 생각은 듭니다. 이런 ‘노력하는 천재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이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을 절대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해 호호백발이 될 때까지 부려먹었답니다.

비근한 예로 임금이 주야장천 근정전에 앉아있으니 원로대신들까지 퇴근 후 집에 가서도 관복을 벗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 임금이 언제 부를 지 몰랐기 때문이랍니다.

 

대표적인 예가 있죠. 세종은 1427년(세종 9) 1월 황희(1363~1452)을 좌의정, 맹사성(1360~1438)을 우의정에 발탁하는 인사쇄신을 단행하는데요. 승하한 선왕(태종)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펼치겠다는 선언이었죠.

‘황희-맹사성 투톱’은 1435년(세종 17) 맹사성이 76살의 나이에 좌의정의 신분으로 은퇴할 때까지 8년간이나 지속됩니다.

황희는 1449년(세종 31)까지 무려 18년간 재상으로 세종을 보필하다가 87살의 나이에 은퇴했습니다. 세종은 은퇴한 두 분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국사를 처리할 때 자문을 요청했습니다. 맹사성·황희 두분은 약속이나 한듯 은퇴한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돌아가실 때의 연세는 맹사성이 79살(1438년), 황희는 90살(1452년)이었습니다.

세종은 그야말로 ‘황희·맹사성 투톱’의 재능을 죽을 때까지 활용했던 셈이죠. 세종 시대의 황금기가 ‘황희·맹사성’ 투톱체제에서 이뤄진 겁니다.

세종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였다. 스스로 ‘난 말야. 책을 한번 읽으면 절대 잊는 법이 없다“고 자랑했다. 수많은 신하들의 이름은 물론 이력, 가계도까지 한번 들으면 잊지 않고 있다가 몇 년이 지나도 기억해내고는 ’아무개야!”하고 불러주었다.


■세종에게 탈탈 털린 과학자

신하의 재능을 늙을 때까지 뽑아낸 예가 또 있습니다.

세종의 즉위 초기에 세종의 부름을 받은 무관 출신의 과학자이자 공조참판이었던 이천(1376~1451)인데요. 세종은 1420년(세종 2) 이천을 불러 “(태종 때 주조한) 활자(계미자·정해자)의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으니 당신이 한번 새롭게 만들어보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당시 금속활자를 만들고, 그것을 조판·인쇄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당시 금속활자는 모래주형(주물사)에 따라 주조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조한 활자가 네모 반듯하지 않고 모래알갱이가 붙어있어 주조 상태가 고르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활자를 주조했어도 조판·인쇄 때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판한 활자들을 고정시켜놓고 인쇄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청백리로 알려진 맹사성은 피리의 명인이었으며 박연과 함께 향악을 정리했다. 황희와 함께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잡았으며, 1435년 76살의 나이에 고령으로 은퇴했다.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꼽히는 황희는 18년간이나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세종의 태평성대를 보필한 뒤 1449년 87살의 고령으로 은퇴했다.


<세종실록>(1434년 7월 2일)은 “조판틀 밑에 밀랍(꿀 찌꺼기)을 펴서 그 위에 글자를 배열한 뒤 인쇄했지만 아무리 말려도 부드러운 밀랍의 성질 때문에 겨우 두어 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졌다”고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선왕인 태종이 주자소를 만든다고 할 때 대소신료들이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극력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주자소가 설립되고, 온갖 시행착오 끝에 계미자(1403년)-‘정해자’(1407년)를 주조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이럴 때 세종이 이천에게 “당신이 한번 해보라”는 명을 내린겁니다. 활자 주조와 조판·인쇄 때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이천이 난색을 표했지만 세종은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강요했습니다.

세종은 무신출신의 과학자인 이천의 재능을 100% 활용했다. 세종은 1420년 이천을 불러 기존의 금속활자의 모양이 고르지 않고 뭔가 부족하니 당신이 한번 맡아 개발해보라는 명을 내린다. 이천은 태종 때 개발한 활자(계미자와 정해자)를 보완해서 하루 20여장을 찍어낼 수 있었다. 이 때 찍어낸 책들이 <자치통감 강목>과 <통감속편> 등이다.


결국 세종의 명을 받잡은 이천은 나름 온갖 방법을 짜내서 급기야 새로운 활자를 주조하는데요. 경자년(1420년)에 주조되었다고 해서 ‘경자자’라는 이름이 붙은 활자입니다. 경자자의 개발로 하루에 20여장 인쇄할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완벽주의자인 세종이 만족할 리 없었습니다. 여전히 활자 모양도, 조판·인쇄 때의 안정도도 부족했습니다.

찜찜했던 세종은 14년이 흐른 1434년(세종 16) 다시 이천을 소환합니다.

당시 이천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59세)였습니다. 지금의 환갑이면 ‘청춘’이라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라면 손주들 재롱 보면서 편히 지낼 나이였죠. 이천으로서는 나이도 많고, 더 이상의 활자개발도, 조판·인쇄 때 고정시킬 방도를 찾기도 쉽지 않았을겁니다. 그러나 세종이 누굽니까. 절대 그냥 둘 리 없죠. 칠순·팔순이 넘은 맹사성·황희 같은 분도 시쳇말로 부려먹었는데, 환갑도 안된 이천을 그냥 둘리 없었죠. 14년 만에 다시 세종의 명을 받은 이천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성과를 이뤄냅니다.

세종은 1434년(세종 16) 당시 59살이 된 이천을 불러 활자의 재개발을 명한다. 편히 쉴 나이에 세종에게 소환된 이천은 장영실, 김돈, 김빈,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대의 과학자와 문신들이 총동원된 ‘활자개발’ 프로젝트를 지휘한다.


‘경자자’의 단점을 상당부분 보완하고, 조판·인쇄 때 글자들이 흔들리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조판한 활자와 활자 사이의 빈곳을 대나무로 끼워 고정시킨 겁니다.(<용재총화>) 갑인년(1434년)에 개발한 활자라서 ‘갑인자’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갑인자’ 개발로 하루에 40여장 인쇄하는데 성공했는데요. 특히 ‘갑인자’로 찍어낸 책은 글자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져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합니다. 그래서 이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로 일컬어집니다.

그렇게 개발된 갑인자의 일부가 이번에 인사동에서 출토된겁니다.

아닌 말로 이천이야말로 세종에 의해 그 능력이 탈탈 털린 인재였답니다. 세종은 금속활자의 개발에만 이천을 활용한게 아닙니다.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습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실무 제작한 것도 이천이었습니다.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평가받은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었습니다.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한 쾌속선도 제작했구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세종도 대단하지만, 그런 세종의 끊임없는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 이천도 참 대단한 분이죠.

1434년(세종 2년) 개발한 갑인자로 찍어낸 책들. 갑인자는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찬사를 받는다. ①1448년(세종 30년) 갑인자로 찍어낸 <동국정운>(국보 71호)|간송미술관 소장 ② 1438년(세종 20년) 간행된 <자치통감강목> 권19(보물 552호).|아단문고 소장 ③1436년(세종 18)에 간행하여 배포한 <자치통감>(보물 1281-2호).|서울역사박물관 소장


■“호의호식하는 너희보다 낫다”

세종이 특히 심혈을 기울인 분야가 바로 천문관측이었는데요.

이유가 있었죠. 예부터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을 소통시키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습니다.

세종은 가만 있지 않았죠. 1420년(세종 2) 세종은 내관상감을 설치하여 첨성대를 세우고 전문가들을 대거 선발합니다. 심지어 은퇴 후 낙향(전남 장흥)했던 전 관상감 윤사웅(생몰년 미상)에게 역마를 보내 “이걸 타고 당장 입궁하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요즘으로 치면 낙향한 은퇴관리에게 관용차를 보낸 겁니다.

그렇게 재발탁한 윤사웅 등 천문 관리들을 경기 남양(화성)·광주·부평·인천 등의 수령으로 임명합니다. 서울 부근에 있어야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재빨리 상경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승정원에서는 “저 미천한 무리를 큰 고을 4곳의 수령으로 발탁하다니 말도 안됩니다. 빨리 명을 도로 거두시라”는 상소문을 계속 올렸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이들은 밤잠을 자지 않고 천문을 관측해서 기상이변에 대비하고 있다”면서 “편안히 앉아 호의호식하는 너희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일축해버립니다.

세종은 동래 관노 출신인 장영실의 재능을 사랑했다. 세종은 “중국에 가서 각종 천문기기를 눈대중으로 보고 와서 똑같이 만들어보라”고 지시한다. 1년간 중국에서 눈대중으로 외워 그려온 도해도를 바탕으로 각종 천문기구를 제작했다. 세종은 장영실이 자동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자 “원나라 자격루보다 그 정교함이 뛰어날 것”이라면서 “장영실은 만대에 길이 남을 기물을 제작했다”고 극찬했다.


■세종의 시대에 부응한 장영실·박연

그렇다면 장영실(생몰년 미상)은 어떨까요. 장영실은 아버지가 원나라 소주·항주 출신이고, 어미가 기생이었습니다. 신분은 동래관노 출신이었습니다. 세종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즉위 3년만인 1421년 장영실을 관상감으로 불러 혼천의(천체관측기)제도를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장영실은 이때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답니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임금의 지혜를 받든 장영실의 기묘한 솜씨는 임금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해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전합니다.

세종은 예서 그만 두지 않았습니다. “장영실 등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면서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라”고 지시한 겁니다.

박연은 왕산악, 우륵과 함께 한국의 3대 악성으로 꼽힌다. 조선 전기의 예약을 정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세종은 “율관(음악에 쓰이는 기본음을 불어서 낼 수 있는 대나무관)과 악기를 박연에게 맡기면 된다”고 전폭적으로 신뢰했다.


세종은 또한 “중국의 각종 천문 서책을 수입하고 보루각과 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해도를 도면으로 그려오라”는 특명까지 내립니다. 천재 과학자 장영실은 역시 천재 군주 세종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눈썰미였습니다. 1년 뒤 돌아온 장영실 등은 눈대중으로 외우고, 그려온 중국 흠경각과 보루각의 도해도를 바탕으로 1년 만에 조선에 돌아와 똑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세종은 장영실 등이 눈썰미로 배워온 실력으로 자격루를 제작하자 “원나라 자격루보다 훨씬 정교한 물시계를 만들다니 기이하구나”라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이천·박연·장영실 뿐이 아니라 <칠정산>을 편찬한 이순지와 김담, 간의대와 보루각 조성에 공이 큰 김돈,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 등 수많은 문신 과학자들이 세종시대를 풍미했다.


맹사성과 함께 세종 시대에 예악을 정비하는데 큰 공을 세운 박연(1378~1458)은 어떤가요.

세종은 일찌기 “율관(음악에 쓰이는 기본음을 불어서 낼 수 있는 대나무관)을 만드는 일은 박연 만이 할 수 있다”면서 “악기를 박연에게 맡기면 소리와 가락(리듬)을 알아낼 것”이라고 신뢰감을 안겼습니다.

<용재총화>는 “(세종 연간의) 사람들은 (박연과 장영실 등을 두고) 모두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들”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답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이 세자 시절 측우기를 제작해서 실험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 1441년 4월29일자에 있다.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서 강우량을 재려고 땅을 팠지만, 정확한 양을 측정할 수 없어서 구리로 만든 그릇을 궁중에 두어 비온 양을 측정했다”는 것이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세조가 진양대군 시절 큰 글자의 갑인자를 주조하여 <자치통감>의 ‘큰 제목’인 ‘강(綱)’에, 1434년에 주조한 갑인자는 ‘본문’인 ‘목(目)’에 쓰도록 했다. 세조의 글씨를 새긴 큰 글자의 갑인자를 새로 주조했다는 얘기다.


■천재 임금에 천재 신하들

앞서 거론한 분들 만이 아니죠.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한 이순지(?~1465)와 김담(1416~1464), 간의대·보루각 조성에 공이 큰 김돈,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1434) 등 손꼽을 수 없을 정도죠. 정초와 함께 각종 천문의기 설계에 간여한 정인지(1396~1478)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거론한 인물들 중 정인지 등 상당수 인물은 순수 과학자라기보다는 문·무관 출신입니다.

하기야 천재 임금과 천재 신하들 뿐이 아닙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1450~1452)이 세자 시절 측우기를 제작했다는 <세종실록> 기록(1441년 4월29일)이 있습니다.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서 강우량을 재려고 땅을 팠지만, 정확한 양을 측정할 수 없어서 구리로 만든 그릇을 궁중에 두어 비온 양을 측정했다”는 겁니다.

세종은 또 둘째아들인 세조(수양대군·1417~1468, 재위 1455~1468)를 시켜 갑인자의 큰 글씨(대자)를 쓰도록 했습니다.

세조의 글씨로 주조한 ‘대자 갑인자’는 <자치통감>의 ‘큰 제목’인 ‘강(綱)’에 사용됐습니다. 물론 1434년에 주조한 갑인자(소자)는 <자치통감>의 ‘본문’인 ‘목(目)’에 쓰도록 했구요.(<세종실록> 1436년 7월29일)

어떻습니까. 세종 연간에는 세종의 자녀들은 물론이고, 문·무신 등의 신료, 그리고 관노비까지 임금을 닮아 문과와 이과에 두루 능통한 천재들이 넘쳐났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의기투합한 결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와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과학가구들이 발명된거죠. 천재 임금에 천재 정치가, 천재 관리, 천재과학자들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세종 시대가 재림하면 얼마나 좋을까요.(5)

역사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한국 28, 중국 5, 일본 0'..백성 위해 '천기누설'한 세종의 성적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선임기자2021. 7. 27. 05:00

 
서울 공평동에서 확인된 ‘주전’은 세종 연간에 발명되어 흠경각에 설치된 자동물시계인 옥루의 부품일 가능성이 짙다. 주전은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가 방출해서 자동물시계의 시보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이다. 사진은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이 복원한 옥루의 주전 위치이다.


“아니 저건….” 2016년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 연구원 등 6개국 공동연구진은 칠레의 라스 캄파나스 천문대에서 전갈자리의 한 별을 둘러싼 가스 구름을 관측하다가 깜짝 놀랐다.

이 별의 움직인 방향과 속도를 계산하다가 지구 반대편, 그것도 579년 전인 조선의 <세종실록> 1437년(세종 19) 2월 5일(음력) 기록을 떠올린 것이다.

 

■네이처가 주목한 세종의 ‘객성’ 관측

 

“객성(客星·신성)이 미성(尾星·전갈자리)의 둘째 별과 셋째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셋째 별에 가깝기가 반 자 간격쯤 되었다.”(<세종실록>)

<세종실록>은 “특히 객성이 14일간이나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579년 후인 2016년 칠레 천문대에서 6개국 연구진이 관측한 별이 바로 조선의 천문관이 1437년 묘사한 바로 그 객성과 동일한 별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 별의 가스구름은 1437년 폭발한 신성(객성)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세종 시대의 관측기록이 579년 후 현대천문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된 셈이다. 2017년 8월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지금도 매우 드물게 관측되는 신성 관측 시점을 역사서에서 명시했다는 것을 평가해서 이 논문을 별도의 뉴스로 뽑아 소개했다.

그렇다면 세종 시대의 ‘신성(객성)’ 관측은 우연이었을까. 아니었다.

세종은 즉위 직후인 1420년(세종 2년) 첨성대(훗날 간의대)를 세워 별자리를 관측하도록 했다. 또 천문·지리·역법·측후·옥루(물시계) 등 사무를 관장하는 서운관(훗날 관상감)을 설립했다.

서운관의 총책임자는 영의정이었고, 2인의 장관급 관리가 보좌했으며 65명의 관리가 배속됐다.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가 천문대장과 기상청장을 겸한 것이다. 천문관측은 정교했다.

일·월식, 지진, 혜성, 신성 등의 천문 이변이 일어나면 출현시각, 모양과 정도, 위치, 변화 등을 매뉴얼에 따라 기록한 보고서(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를 4부씩 작성해서 올렸다. 서운관 관리들을 하루 밤낮을 5교대로 입직해서 관측해야 했다. 덕분에 1437년 ‘객성(신성)’을 관측할 수 있었다.

2007년 남문현 전 건국대교수가 복원한 자격루. 이번에 확인된 ‘주전’이 중종 때 설치한 보루각 자격루의 부품일 수도 있다.


■왕위를 내걸고 천문학에 ‘올인’

궁금증이 든다. 세종이 그렇게 하늘의 변화에 예민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단순히 천문학 발전을 위해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세종은 1420년(세종 2) 지진이 일어나고 혜성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 직접 첨성대에 올라가 관측한 다음 정사를 긴급 중단했다.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중지했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지진과 혜성을 하늘의 꾸지람으로 여긴 것이다.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세종이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고 삼가 반성함)함으로써 일주일만에 혜성이 없어졌다”고 썼다. 물론 세종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하늘의 움직임이 심상치않고 기상 이변이 생길 때마다 임금들이 반성문을 쓰고 “내 잘못을 낱낱이 고하라”는 명을 내리는 기사가 줄을 잇는다.

아니 하늘의 변화가 대체 임금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다.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을 소통시키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다. 오죽하면 고대 부여에서는 기상이변으로 농사를 망치면 군주를 죽이거나 쫓아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세종을 비롯한 임금들이 천문학에 ‘왕위를 내걸고’ 올인할 수밖에 었었던 이유이다.

공평동에서 발굴된 일성정시의 부품.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으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다. 이 시계는 낮에 태양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항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조선의 발명품이다.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 제공


■“황제의 천문역법을 극복하자”

여기에 ‘애민정신의 끝판왕’인 세종 대왕이라면 어찌했겠는가. 세종에게 ‘만고의 성군’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는게 아니다. ‘오로지 백성을 위해’라는 슬로건을 내건 세종은 두가지의 금기를 깼다.

우선 예부터 천문과 역법은 중국 황제의 전유물이었다. 황제국이 하늘을 관찰해서 만든 역법을 제후는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관측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명나라의 하늘과 조선의 하늘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천문관측이 틀릴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가만 있지 않았다. 조선의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 현상과 북극고도 관측 등을 연구해서 조선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했다. 세종은 1430년(세종 12) 8월 3일 “천문 계산에 있어…일월식과 별의 움직임 등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인데 당나라의 역법을 써서 착오가 많이 있었다”고 <칠정산> 편찬의 의미를 전했다. 세종은 간의대(천문대) 조성을 명하면서(1432년) “바다 밖에 있는 조선이 모든 (천문)시설을 중국의 제도에 따랐지만 자체로 하늘을 관찰하는 그릇에는 빠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시계로, 밤에는 별시계로 사용했다.|이용삼 교수 제공


■천재 임금에, 천재 세자, 천재 과학자들

그러나 과제가 생긴다. 하늘을 관측하는 도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가뜩이나 중국 황제의 눈을 피해 천문 역법을 자체적으로 연구해야 하는데…. 세종은 다소 무식한 방법을 쓴다. 동래 관노 출신인 장영실 등을 국비로 중국에 보낸다. 공식유학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귀띔한다.

“너희는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중국이 가르쳐 줄 리 만무하니 장영실 등에게 ‘눈대중으로 몰래 배워오라’는 특명을 내린 것이다. 임금의 이런 ‘무리한 명’을 받잡고 다녀와 각종 과학기구를 만든 과학자들도 참 인물은 인물이다.

세종은 장영실 등이 눈으로 배워온 실력으로 마침내 자격루를 제작하자 “원나라가 만든 자격루보다 훨씬 정교한 물시계를 만들었다”고 감탄했단다.

장영실은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한 이순지(?~1465), 간의 등 숱한 천문과학기구와 금속활자(갑인자)를 제작 지휘한 이천(1376~1451), 간의대·보루각 조성에 공이 큰 김돈(1385~1440),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1434) 등 손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 정초와 함께 각종 천문의기 설계에 간여한 정인지(1396~1478)도 빼놓을 수 없다.

2016년 6월 전갈자리 꼬리부분에서 관측된 신성의 흔적. 칠레에서 6개국 공동연구진이 관측했다. 1437년 폭발한 신성이다. <세종실록> 1437년 음2월5일자에 “객성(客星·신성)이 미성(尾星·전갈자리)의 둘째 별과 셋째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셋째 별에 가깝기가 반 자 간격쯤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그 객성(신성)의 흔적이 579년 뒤 6개국 공동연구진이 관측한 것이다.


거론한 인물들 중 정인지 등 상당수 인물은 순수 과학자라기보다는 문·무관 출신이다. 하기야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1450~1452)이 세자 시절 측우기를 제작했다는 <세종실록> 기록(1441년)도 있다.

그러고보면 과연 세종 연간에는 아들인 세자는 당연하고, 문·무신 등의 신료, 그리고 관노비까지 임금을 닮아 문과와 이과에 두루 능통한 천재들이 넘쳐났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런 분들이 의기투합한 결과물이 바로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과학가구들이다.

측우기와 혼천의(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 자격루(자동 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일정정시의(해·별시계 복합기능), 간의(천체 위치 측정), 규표(방위·절기·시각의 측정) 등 헤아릴 수 없다.

일본에서 간행된 과학사기술사사전을 토대로 집계한 ‘1400~1450년 사이 세계를 선도한 과학기술’은 조선이 29개였다. 반면 중국은 5개, 일본은 0개였다. 다른 지역을 다 합해봐야 28개였으니 참 대단한 일이다.

서울 공평동 유적에서 금속활자와 주전, 일성정시의 등이 출토된 지역. 16세기 문화층에서 확인됐다. 조선시대 때 이 지역에는 철물점이 있었다고 한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아날로그와 디지털 결합한 자동물시계

‘오로지 백성!’을 슬로건으로 건 세종이 깬 또하나의 금기가 ‘천문기구 발명’에 담겨있다.

무슨 말인가. ‘왕(王)’이라는 상형문자를 보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독점적인 존재(│)가 바로 임금이었다. <서경> ‘요전편’은 “임금 만이 하늘 땅과 소통한 뒤에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시간과 절기를 나누어 준다”고 했다. 거꾸로 말하면 천기는 군주의 몫이니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누구인가. 세종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民惟邦本)이며,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食爲民天) 존재”라고 여겼다. 그런 세종이기에 1438년(세종 20) 간의대 등의 기구를 서운관에게 맡기면서 ‘오로지 천기를 살펴 백성에게 절후(절기), 즉 농사 시기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 언급했다.

때마다 절기를 제 때 파악해야 했고, 하루에도 낮이나 밤이나 오차없이 시간을 측정해야 했다.

그래서 제작한 것이 자동물시계인 자격루(1434년)다. 이전까지는 시간을 사람이 알리다보니 번번이 착오가 생겼다. 농번기에 시각을 잘못 알려주면 어찌 되는가. 농사도 뒤죽박죽 되고, 시간을 잘못 알려준 자는 처벌을 받기 마련이었다. 세종은 두가지를 한번에 해결할 계책을 찾았다.

“시각을 알리는 자가 자주 착오가 일으킬 것을 걱정했다…시각을 알릴 목각인형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세종실록>)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20년 6월 미국의 한 경매에서 출품된 조선의 공중시계인 앙부일구를 구입환수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사람의 잘못을 원천적으로 피하면 되지 않은가. 세종이 생각해낸 ‘신의 한수’가 바로 ‘사람 대신 목각인형’이었다. 목각인형이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였던 것이다. 장영실 등이 제작한 자격루는 바로 물시계와 시보장치가 결합되어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 물시계’였다.

동아시아의 유압식 물시계와 아라비아식 자격장치를 조합시켜 스스로(自) 시간을 알려주는(擊) 최첨단 물시계(漏)였다. 물시계(아날로그)의 물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다시 일정한 시차로 구슬과 인형을 건드려 자격장치(디지털)를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자동제어시스템에 의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변환기로 접속되는 디지털 시계를 발명한 것이다. 한마디로 백성의 수고없이 자동으로 작동되는 시계를 만든 것이다. 자격루는 조선의 국가표준시계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거창한 장치가 궁중에만 있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격루가 일러주는 시간을 널리 알리는데 한계가 있지 않은가.

자격루에 설치된 목각인형. 서운관(관상감) 관리의 복장을 하고 있다. 세종은 천문기상을 담당하는 서운관 관리가 시각을 잘못 알려주면 처벌을 받을까 걱정해서 사람대신 서운관 관리복장을 한 목각인형을 설치했다. 또한 물시계와 아라비아식 자격장치를 활용해서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한자 대신 동물 그림으로

여기서 세종이 ‘천기를 누설’한다. 1434년(세종 16) 10월2일 “백성들을 위해 인적이 많은 대로변에 해시계(앙부일구·仰釜日晷)를 설치한다”고 선포했다. 설치장소는 혜정교(종로 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와 종묘 앞 등 두 곳이었다. ‘앙부일구’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시각을 재는 시계’라는 뜻이다.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다.

1434년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이었다. 아무리 공중시계를 설치해놓았다 해도 한자로 표시한 시각을 어찌 읽는단 말인가. 세종이 또한번 ‘신의 한수’를 쓴다.

바로 시각을 글자(한자)가 아닌 동물 그림(12지신)으로 표현한다는 것이었다. ‘자(子)·축(丑)·인(寅)·묘(卯)’ 대신 ‘쥐와 소, 호랑이, 토끼’ 등의 동물을 그리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세종은 “시각에 12지신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서 “해에 비쳐 세부시각이 뚜렷하게 보이고,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천기 누설 차원을 넘어 천기를 공유한 셈이다.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관측기. 1432년(세종 14) 예문관제학 정인지, 대제학 정초) 등이 왕명을 받아 고전을 조사하고, 중추원사 이천, 호군 장영실 등이 이듬해(1433년) 최초로 제작했다.


■별의 움직임으로 물시계 오차 조정

‘오로지 백성!’을 외친 세종의 열정은 한이 없었다. 해시계(앙부일구)는 낮에만 소용되었다. 또 밤에는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었지만 중력 등의 요소 탓인지 물의 흐름이 일정치 않았다. 때문에 오차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완벽주의자’ 세종이 또하나의 발명품을 선보였는데, 그것이 ‘일성정시의’(1437년)이다,

‘일정정시의(日星定時儀)’는 말 그대로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으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다. 이 시계는 낮에 태양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항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조선의 발명품이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는 세종의 노심초사가 묻어나는 독창적인 창조품이다.

또 있다. 1437~38년 사이 물의 부력으로 자격장치를 작동하는 자격루의 기법에서 한발 더 나아간 옥루를 개발했다. 옥루는 물의 부력만이 아니라 물레방아 모양의 수차를 돌리고, 수차가 기륜(기어장치)을 돌려 선녀와 무사, 12지신 등의 인형이 움직이는 방식을 쓴다. 여기에 태양의 모형까지 덧붙여 천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까지 구비됐고, 동지, 춘분, 하지, 추분까지 알려 주는 자동 종합물시계다.

종합자동 물시계인 흠경각 옥루를 발명한 뒤 그 내력을 밝힌 승지 김돈의 ‘흠경각기’. “임금이 반드시 역일(曆日)을 밝혀 백성에게 먼저 일할 때를 가르쳐 주었고, 그때를 가르쳐 주는 요체가 바로 하늘과 기후를 관찰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과문한 기자의 직무유기

지난 6월말 서울 도심 한복판인 공평동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가 쏟아져나왔다.

세종 연간에 주조된 ‘갑인자’를 포함해서 1600여점의 금속활자가 출토된 것이 첫번째이고, 세종 시대에 발명한 옥루(혹은 자격루)와 일성정시의의 부품 등 천문 과학기구가 확인된게 두번째였다.

그런데 활자쪽에 좀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세종이 계획한 국가적인 프로젝트에 따라 개발된 갑인자 등 금속활자들 모두 국보급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제작된 활자들이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확인된 옥루(혹은 자격루)와 일성정시의의 부품들 역시 한 점 한 점이 국보급이다. 왜냐면 15세기 세계 과학기술계를 선도했던 분이 다름아닌 세종대왕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때 발명한 천문 과학기구는 단 한 점, 아니 부품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랬으니 천문 분야에 과문한 필자도 공평동 출토 천문기구의 부품을 실견하자마자 ‘이건 보나마나 국보야!’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출토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먼저 여러 개의 원형 구멍을 뚫은 동판과, 원통형 동제품의 양쪽에 걸쇠와 갈고리가 결합된 구슬방출기구가 눈에 띈다. 이것이 <세종실록> 등이 설명한 ‘주전(籌箭)’, 즉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가 방출하는 자동물시계의 시보장치를 작동시키는 부품’이라는 내용과 부합된다.

자격루(혹은 옥루)는 물의 양이나 유속 등을 조절하는 ‘수량 제어 장치’와 이를 바탕으로 시간을 자동으로 알리는 ‘시보 장치’로 구성된다. 이번에 확인된 ‘주전’은 신호발생장치이자 동력전달장치라 할 수 있다. 결국 출토품은 자격루(옥루)의 부품인 ‘주전(籌箭)’이 확실하다.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 어느 것이 맞든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부품(‘주전’)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확인된 국보급 유물 중에는 ‘일성정시의’ 부품들도 있다. 주천도분환(원을 나누는 각도·365.25도로 등분), 일구백각환(하루를 100각으로 나눠 태양 관측 후 낮시간 측정), 성구백각환(하루를 100각으로 나눠 별 관측 후 밤시간 측정) 등 3개의 고리(環)가 확인됐다.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관측하여 시간을 가늠한 천문시계였다. 국가표준시계인 자격루(옥루)의 오차를 보완했기 때문에 엄청 중요시됐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7년(세종 19년) 4개를 제작해서 내정(궁궐 안)과 서운관, 함경도·평안도에 1개씩 설치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제작했다는 기록이 없다.

확인된 ‘일성정시의’ 부품들은 세종 연간에 제작된 4개 중 한 개가 분명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필자는 공평동 유적을 취재하면서 “금속활자도 중요하지만 천문기구도 그에 못지않다”는 이야기를 꽤나 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천문 분야에 문외한이다. 그러다보니 출토된 천문기구와 관련된 깊이있는 기사를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와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의 도움말로 ‘초치기’ 공부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역부족이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천문기구의 원리와 하늘 관측은 필자에게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세종실록> 1437년 4월15일자. 세종의 명을 받은 승지 김돈이 ‘일성정시의’의 발명 이력을 글로 남겼다. 그런데 김돈은 “주상(세종)께서 직접 써준 글의 내용이 워낙 쉽고 상세해서 (내가) 감히 토씨 하나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실었다”고 감탄했다.


■“임금의 글을 토씨 하나 바꿀 수 없었다”

세종은 승지 김돈(1385~1440)에게 ‘일성정시의’ 발명의 내력을 글로 남기라는 명을 내렸다. 그래서 <세종실록> 1437년(세종 19) 4월15일자에 일성정시의의 원리와 제작 방법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해놓았다.

하지만 솔직히 필자와 같은 과문한 자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하다.

그런데 이 글을 지은 김돈이 실록에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해놓았다.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를 주상(세종)께서 직접 지어 나(김돈)에게 주면서 ‘내 글을 토대로 해서 경들이 다듬고 보태라’고 하셨다. 그런데 임금이 직접 설명한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쉽고 상세해서 내(김돈)가 단 한 자도 고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글 머리와 끝만 살짝 보태 그대로 지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아니 대체 얼마나 공부를 하셨기에 우주의 원리까지 꿰뚫어 해시계와 물시계를 결합한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까지 글로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너무도 쉽고 상세하게 쓴’ 세종의 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 어리석은 자의 아둔함이여!

이렇게 580여 년 만에 도심 한복판에서 현현한 천문기구에는 백성을 위해 천기를 누설, 아니 공유하고자 한 천재이면서 성군인 세종의 따뜻한 체온이 녹아있다. 어찌 한 점 한 점이 국보가 아니겠는가.(이 기사를 쓰는데 윤용현 박사와 이용삼 교수 등의 도움말이 절대적이었습니다.)(6)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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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올스타’ 총출동해 완성한 ‘활자의 백미’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1.07.13 05:00 수정 : 2021.07.13 09:47

도심 한복판인 서울 공평동 유적에서 쏟아진 1600여점의 금속활자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세종이 1434년(세종 16년)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개발한 ‘갑인자’로 추정되는 금속활자들이다. 뒷면이 장방형인 됫박형태를 띠고 있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 관리학 교수 제공

“응, 이 형태는….” 지난 6월 초 도심 한복판인 서울 공평동에서 쏟아진 금속활자들을 검토하던 연구자들의 심장이 뛰었다. 뒷면이 장방형, 즉 쌀을 담는 됫박 형태로 보이는 활자들이 여러 점 확인됐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세종실록>의 의미심장한 구절을 떠올렸다.

■‘됫박형’ 금속활자의 비밀

“후에 고친 활자는 네모퉁이가 평평하고 바른데다(사우평정·四隅平正)….”(<세종실록> 1435년)

그렇다면 이번에 출토된 활자 중 1434년(세종 16년) 주조된 ‘네 모퉁이가 평평하고 바르다’는 바로 그 ‘사우평정’의 ‘갑인자’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세종 때 맨처음 주조한 갑인자는 인쇄본에서는 보이지만, 활자의 실물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물론 서울대 규장각도 ‘됫박 형태의 활자’를 여러 점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활자들이 <세종실록>에 표현된 이른바 ‘초주 갑인자’를 가리키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갑인자는 ‘초주 갑인자’ 이후 ‘6주 갑인자’(1777년·정조 1년)까지 오랫동안 사랑받은 활자였다.

따라서 규장각 소장 ‘활자들’은 ‘갑인자 계통’ 중 하나로 추정되지만, ‘초주~6주’ 갑인자 중 어느 것인지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조선시대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455년(세조 1년) 주조한 ‘을해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도심 한복판인 공평동의 16세기 문화층에서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고고학적인 실물 자료’가 출토된 것이다. 물론 아직 본격 연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일단 578년만에 현현한 초주 갑인자로 추정하고 있다. 자문위원들이 육안으로 훑어본 뒤 초주 갑인자(한자)로 추정한 활자는 일단 30~50자 정도라 한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미확인 금속활자. 뒷면이 됫박형태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초주 갑인자(1434년)’부터 ‘6주 갑인자(1777년)’ 까지 주조된 ‘갑인자 계통’의 활자 중 하나로만 알려져 있었다.|이승철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팀장

■이천·장영실 등 당대 과학자 총출동

‘네 모퉁이가 평평하고 반듯한’ 갑인자에는 활자 개발을 위한 세종의 분투가 배어있다.

갑인자는 ‘활자의 백미’라 통할만큼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다. 그럴만도 했다.

‘갑인자 프로젝트’는 태종이 시작하고(1403년) 세종이 완성한(1434년), 그야말로 2대에 걸친 개국 조선의 국책사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1·2차 왕자의 난 등 우여곡절을 겪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1403년(태종 3년) 금속활자를 주조할 주자소를 만든다.

“무릇 훌륭한 정치를 펼치려면 반드시 서책을 봐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책이 부족해서 유생들이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물론 목판도 있지만 판이 깎이고 이지러지는 약점이 있으므로 특별히 금속활자를 만들고 싶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신료들은 ‘소용없는 일’이라면서 반대입장을 표명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금속활자의 주조 및 조판 인쇄술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구구절절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주조기술의 부족 때문에 주조 때 생긴 쇳물찌꺼기와 같은 흠결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활자를 제대로 주조했다 해도 조판과 인쇄가 더 큰 난관이었다. 조판틀에 넣은 밀랍(꿀찌꺼기를 끓인 기름)에 활자들을 배열하고 밀랍이 딱딱하게 굳으면 먹을 묻힌 뒤에 종이를 덮고 골고루 문질러서 인쇄했다. 그러나 인쇄 때 조판된 활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종실록>은 “워낙 부드러운 밀랍의 성질 때문에 아무리 굳혀도 조판활자가 흔들려서 겨우 두어 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져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고 토로했다.

그랬으니 태종이 주자소를 만든다고 할 때 대소 신료들이 입을 모아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태종은 <세종실록>의 표현대로 ‘억지로 우겨서’ 주자소 신설을 강행했다. 비용이 큰 문제였지만 백성들에게는 부담시키지 않았다. 권근(1352~1409)이 쓴 ‘계미자’ 발문을 보면 “활자 개발에 임금의 종친과 공신들이 참여했고, 비용은 내탕금(임금의 개인 재물)까지 쾌척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래도 부족한 예산은 대소신료들이 갹출해서 충당했다. 마침내 ‘계미자’(1403년)를 만든 태종은 4년 뒤(1407년) 계미자를 보완한 활자(‘정해자’라고도 한다) 주조했다. 또 3년의 시행착오를 겪고난 후인 1410년(태종 10년) 인쇄본을 찍어냈다.

규장각 소장 활자를 세종 때(1434년) 주조된 초주 ‘갑인자’로 찍은 <자치통감>에 등장하는 같은 글자와 비교했더니 놀랍도록 흡사하다.|이승철 팀장 제공

■주자소에 술과 고기를 하사한 세종

하지만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의 눈높이에서 볼 때 계미자는 성에 차지 않았다. 여전히 조판 인쇄에도 취약했다. 1420년(세종 2년) 세종은 공조참판 이천(1376~1451), 좌대언(좌승지) 정초(?~1434), 지신사(도승지) 김익정(?~1436) 등을 불러 활자의 개선을 명했다. 이천은 대간의·소간의·앙부일구 등 해시계와 혼천의 등을 제작 지휘한 인물이다. 또한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와, 김익정 등은 지금의 대통령비서실격인 승정원 소속 관리들이었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를 수장으로 하고 직접 임금의 지휘를 받는 승정원 고위관리들을 활자개발 프로젝트에 투입한 것이다. 7개월간의 노고 끝에 ‘계미-정해자’의 단점을 보완한 ‘경자자’를 만들었다. 이로써 하루 20여 장을 찍어낼 수 있었다.(<세종실록> 1422년 10월29일) 세종은 경자자 개발에 나선 주자소 관리들에게 “수고했다”면서 술 120병과 고기를 하사했다.

세종 때 주조된 갑인자가 ‘네모퉁이가 평평하고 바르다’는 의미의 ‘사우평정(四隅平正)’이라고 기록된 <세종실록> 1435년 8월24일자

■‘갑인자’는 활자의 백미

하지만 세종은 만족하지 않았다. 애써 개발한 경자자의 글자꼴이 다소 작고, 빽빽하다는 촌평이 나왔다. 특히 1434년(세종 16년) 7월2일 세종은 “대군들(세종의 아들들)이 ‘활자를 좀더 크게 만들자’고 건의하더라”고 소개했다. 세종은 활자 프로젝트의 재가동을 선언했다.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지중추부사(명예직·정2품) 이천에게 “당신이 한번 개선해보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천이 ‘어려운 과업’이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세종은 요지부동이었다. <세종실록>은 “이천에게 활자 개발을 강요했다(予强之)”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계미·정해자(1403·1407년)-경자자(1420년)에 이은 3번째 활자 개발은 당시 조선의 역량을 결집한 그야말로 대대적인 국책사업이었다. 활자체는 왕희지체로 간행된 옛 경전 등에서 따왔고, 책에 없는 글자는 둘째아들인 수양대군(1417~1468·재위 1455~1468)이 썼다.

갑인자 개발은 수양대군을 비롯한 왕족과, 이천을 중심으로 물시계인 자격루 등을 발명한 장영실(생몰년 미상)과 이순지(?~1465), 집현전 직제학 김돈(1385~1440)과 김빈(?~1455) 등 당대 내로라는 과학자·문신들이 총출동한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출토된 추정 <갑인자> 가운데 ‘불 화(火)’자는 1449년(세종 21년) 세종이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에 인쇄된 ‘화(火)’자를 빼닮았다. 1434년 주조된 갑인자가 확실해보인다.|옥영정 교수 제공

그렇게 개발한 활자가 1434년(갑인년) 모습을 드러낸 갑인자이다. 다소 작고 빽빽한 느낌을 주었다는 경자자에 비해 갑인자는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다. 무엇보다 조판·인쇄 때 활자의 흔들림을 대폭 줄였다. 기존에 썼던 밀랍은 아무리 굳힌다 해도 그 부드러운 성질 때문에 인쇄할 때 이리저리 쏠리는 폐단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갑인자를 사우평정(四隅平正), 즉 뒷모양이 정방형인 됫박형태로 만든 이유가 바로 조판 때의 단점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활자 뒷면을 정방형으로 고르게 배열한 뒤에 대나무로 틈새를 꽂아서 고정하니 흔들림을 최소화했다.

“처음에는 조판법을 몰라 밀랍을 녹여서 글자를 붙였다. 이 때문에 경자자는 끝이 모두 송곳 같았다(미개여추·尾皆如錐). 그런데 그 뒤에 대나무로 빈 데를 메워 납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다.”(<용재총화>)

이런 방법을 써서 하루 40여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갑인자로 찍어낸 인쇄본은 글자획에 필력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져서 판면이 크고 늠름하다. 때문에 갑인자로 찍어낸 책을 ‘활자본의 백미’라 하는 것이다.

공평동에서 대거 쏟아진 한글금속활자. 1461년(세조 7년) <능엄경언해>를 찍을 때 쓰인 것과 흡사한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인 것으로 평가된다. 또 1465년(세조 11년) 새롭게 주조한 ‘을유 한글활자’도 눈에 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음주의 폐해를 경계하는 글도 금속활자본으로

세종은 이렇게 주조한 금속활자로 기존에 이미 주조한 경자자와, 새롭게 개발한 갑인자로 찍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펴낸다.

<세종실록>은 “이제 큰 활자(갑인자)를 주조했으니 종이 30만권을 준비하면 500~600질을 인쇄할 수 있다”면서 “<자치통감>을 인쇄하고 전국에 반포해서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한다”고 기록했다.

심지어 술과 관련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교지를 인쇄하여 전국에 반포했다. <세종실록> 1433년(세종 15년) 10월 28일조는 “술의 해독이 참혹한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서 “비록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지는 못할 망정 제 한 몸도 챙기지 못한단 말이냐”는 교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태아의 교양법을 논한 태교와 영아의 보호육성법을 담은 <태산요록>도 주자소에서 간행했다. 이밖에 <성리대전>과 <사서대전>, <오경대전>과 이백의 시와 다양한 역사서 등도 찍어냈다.

기존의 목판인쇄도 함께 활용했다. 삽화와 그림설명 및 시까지 붙인 <삼강행실도> 역시 간행했다. 법령을 몰라 불효를 저지르고 존속살인까지 저지르는 일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또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소학>)도 찍었다.

공평동에서 출토된 한글활자는 <능엄경언해>(1461년)에 쓰인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와 흡사하다. 세종 때인 1447년 <석보상절>을 간행하면서 주조한 한글활자와는 확연히 다르다.|옥영정 교수 제공

■‘갑인자’와 ‘갑인자 병용 한글활자’

물론 1434년 개발된 갑인자는 한자 활자였다. 따라서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예쁜 활자’(갑인자)를 만든다 해도 백성들이 읽을 줄 모르면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세종은 갑인자 개발 9년 만인 1443년(세종 25년)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한글을 창제했다. 그 이유가 ‘나랏말이 중국의 말과 달라 잘 통하지 않아서 어리석은 백성이 자기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실제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훨씬 이전부터 한자와 이두만으로는 무지한 백성을 깨우치기 힘들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1426년(세종 8년)에는 “법조문은 한문과 이두로 복잡하게 쓰여있다”면서 “문신도 이해하기 힘든데 하물며 법조문을 이제 막 배우는 생도는 얼마나 어렵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든다. 이번에 공평동에서 출토된 한글활자는 ‘갑인자’인가, 아닌가.

출토 금속활자 중에는 갑인자(1434년)보다 14년 빠른 1420년(세종 2년) 주조한 ‘경자자’일 가능성이 있는 활자들이 보인다는 주장이 있다.|이승철 팀장 제공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중인 금속활자는 40만자가 넘는다. 그러나 이중 한글금속활자는 불과 750여 점이다. 한글을 창제하고(1443년) 반포한(1446년) 세종이 한글로 처음 찍어낸 책은 <석보상절>(보물·1447년)이다. <석보상절>은 승하한 부인(소헌왕후·1395~1446)의 명복을 빌기 위해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을 시켜 펴낸 석가모니의 일대기이다. 세종은 아들이 지어바친 <석보상절>을 꼼꼼이 읽고 각 2구절에 따라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한 찬불가 583곡을 손수 지었다. 이것이 <월인천강지곡>(국보·1449년)이다.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은 모두 가장 아름다운 활자라는 ‘초주 갑인자 한자’와 함께 주조한 이른바 ‘초주 갑인자 병용 한글활자’로 찍어냈다. 갑인자(한자)로 이 두 책을 찍을 때 함께 사용한 한글금속활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에 쓰인 한글활자는 현전하지 않는다.

남아있는 한글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을해자 병용 한글금속활자’이다. ‘을해자’는 1455년(세조 1년)에 주조한 한자 활자이다. 따라서 한자활자인 ‘을해자’와 함께 쓰인 한글활자라 해서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라 한다.

이번에 출토된 한글금속활자 가운데 바로 이 ‘을해자’와 ‘을해자 병용 한글 활자’가 보인다. 1461년(세조 7년) <능엄경언해>를 찍을 때 쓰인 것과 흡사한 활자로 평가된다. 출토된 활자 중에는 1465년(세조 11년) 새롭게 주조한 ‘을유 한글활자’도 눈에 띈다.

하지만 일단 <석보상절>(1447년)과 <월인천강지곡>(1449년)에 쓰인 이른바 ‘초주 갑인자 병용 한글금속활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본격적인 검토가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섣부른 단정은 금물이다.

출토 활자 중에는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표기하여 연결하는 어조사의 역할을 한 연주활자(‘이나’, ‘하고’, ‘하며’, ‘시니’)도 10여 점 출토됐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동국정운식 표기란?

출토된 한글금속활자 중에는 15세기에 한정 사용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보였다.

<동국정운>은 당시 들쭉날쭉했던 중국의 한자음을 표기하려고 만든 표준운서이다. 돌이켜보면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최만리(?~1445) 등이 반대한 명분은 바로 “언문(한글)을 창제하면 누가 한문을 배우겠냐. 언문 창제는 중국을 저버리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때 세종은 “아니야. 오히려 한자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한글을 만드는 거야”라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그러려면 들쭉날쭉했던 한자음 갖고는 안돼. 한글로 통일된 표준음으로 한자음을 표기해야 해”라면서 <동국정운>을 편찬했다. 말하자면 한글 반대파의 목소리를 무마시키려고 만든 책이었다.

출토된 금속활자 중 ‘동국정운’식 표기법일 쓴 활자가 보였다. 한글창제 연간인 15세기에만 쓰인 표기법이다. |백두현 경북대 교수 제공

하지만 막상 만들고보니 비현실적이었다. 일률적으로 수많은 한자의 표준음을 표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15세기 말인 성종(1469~1494) 때 흐지부지됐다.

그 중에 ‘ㅭ, ㆆ, ㅸ’ 등은 15세기에 반짝 쓰였다가 사장된 이른바 ‘동국정운’식 표기라 한다. 그런데 이번에 바로 그런 활자가 보인 것이다. 또한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표기하여 연결하는 어조사의 역할을 한 연주활자(‘이나’, ‘하고’, ‘하며’, ‘시니’)도 10여 점 출토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도심한복판인 공평동에서 쏟아진 1600여 점의 금속활자는 세종 연간에 제작된 활자(한글이든 한자든)가 전무한 상태에서 맞이한 갑작스러운 홍복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직 연구자들이 자세히 검토한 것이 아니어서 1600여 점 가운데 또 어떤 의미를 간직한 활자들이 존재하는 지 모른다.

출토된 한자금속활자 중에서 1434년 주조한 ‘초주 갑인자’보다 14년 앞선 ‘경자자’일 수 있는 활자가 보인다는 일부 연구자의 견해도 눈여겨 볼 만 하다. 또 한글금속활자 중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에 쓰인 활자가 있는 지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출토된 ‘동국정운’식 한글활자가 <동국정운>에 사용된 예. |백두현 교수 제공

■한글활자에 명칭을 부여하자

필자는 어느날 시쳇말로 ‘갑툭튀’한 금속활자 관련 공부를 하다가 굉장히 헷갈리는 대목이 있었다.

한자 활자에는 ‘갑인자’니 ‘을해자’니 하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 왜 한글활자에는 그에 합당한 명칭은 없을까. 아무리 한자와 함께 쓰인 한글이라도 그렇지, ‘갑인자 병용 한글활자’니 ‘을해자 병용 한글활자’이 하는 이름을 얻었을까. 왠지 남의 이름으로 사는 느낌이랄까. 뭐 지금까지는 워낙 현전하는 한글활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치자. 그러나 이번에 엄청난 양의 한글금속활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니 앞으로는 한글금속활자에도 그에 걸맞은 명칭을 부여해야 할 것 같다.

도심 한복판에서 홀연히 나타난 세종의 흔적이다. 그 흔적을 어찌 대접하고 어찌 보존하며, 어찌 연구해야 할지 머리를 맞대야 할 것 같다.

(이 기사는 출토 금속활자들을 자문한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 관리학 교수, 이승철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팀장,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백두현 경북대 교수 등의 도움말로 작성되었습니다.)(7)

 

 

'세종의 숨결'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 600점 쏟아졌다

강혜란2021. 6. 30. 00:19
 
15세기만 쓰인 ㅱ 활자 등 첫 발견
세종 당시 추정 한문활자도 포함
인사동 땅속서 1600여 점 발굴
'직지심체요절'은 인쇄본만 보존
서양보다 앞서는 실물 금속활자
세종 때 추정 천문시계 일성정시의
자동물시계 부속품 주전도 출토
서울 인사동 땅속 항아리에서 나온 한글 금속활자 600여 점 중 일부. [사진 문화재청]

 

ㅱ, ㆆ, ㆅ …. 훈민정음 창제 초창기인 15세기에 중국 한자를 표준음에 가깝게 발음하기 위해 쓰인 한글 자음이다. 일명 동국정운식 표기 한글이다. 『동국정운』(1448·세종30)은 세종(재위 1418~1450)이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양반들을 설득하려고 본보기로 펴낸 책이다. 훈민정음을 본격 선보인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에도 이들 표기가 나타난다. 다만 그간 책으로만 전해져 왔다.

15세기에 한정해 쓰인 동국정운식 한글 활자가 실물로 처음 발견됐다. 형태상 세조 즉위년(1455년)에 주조한 ‘을해자(乙亥字)’로 보인다. 이를 포함,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서울 인사동(공평동) 땅속 항아리 안에서 나왔다. 한자(1000여 점)와 한글(600여 점)의 다양한 형태·크기를 아우른다. 조선 세종 시기 과학기술의 성과인 물시계·천문시계 등 금속 유물도 무더기로 나왔다. 문화재청은 29일 수도문물연구원이 조사해 온 공평동 유적의 발굴 성과를 발표했다.

특히 금속활자 무더기 발굴은 조선 전기 인쇄·출판·서지학사를 다시 쓸 수 있는 중요 성과로 보인다. 자문에 참여한 백두현 경북대 교수(국문학)는 “세조가 아버지 뜻을 받들어 불경을 한글로 해석한 『능엄경언해』(1461)와 일치하는 활자들이 다수 나왔다”고 했다.


한문 금속활자 ‘갑인자’ 확인 땐 구텐베르크보다 앞서

서울 인사동(공평동) 땅속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29일 공개됐다. [연합뉴스]

 

이들 활자가 세조가 즉위한 해 만든 을해자(乙亥字)란 얘기다. 을해자는 현재 전해지는 가장 이른 시기의 조선 금속활자로 이전까진 국립중앙박물관(이하 중박)이 소장한 한글 30여 자뿐이었다. 크기가 모두 소자(小字)다. 이번엔 대자(大字), 중자(中字), 소자, 특소자까지 나왔다.

‘하며’ ‘하고’ 등 어조사 표기 때 쓴 연주활자(連鑄活字)도 10여 점 나왔다. 연주활자란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표기하는 것으로. 당시엔 한문 사이에 자주 쓰는 한글 토씨를 인쇄 편의상 한번에 주조했다. 16세기까지 쓰인 주격조사 ‘l(이)’ 활자도 처음 출토됐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 방식이 활자 실물로 대거 확인된 건 처음이다.

 

“기록으로 전해지던 과학 유물 실체 확인”

나아가 한문 금속활자 중 일부(현재까지 8점)가 세종 때(1434년)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일 가능성도 있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 교수는 “『자치통감』(1436년) 인쇄본과 상당히 유사하다”며 이들이 1434년 제작된 ‘초주갑인자’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을해자보다 21년 앞선, “가장 완벽한 형태로 칭송받는”(이승철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 팀장) 갑인자 추정 활자의 첫 등장이다. 실제라면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본(『직지심체요절』)을 가진 우리나라가 구텐베르크 성경(1455년)에 앞서는 확실한 실물 활자까지 갖게 된다. 특히 이 갑인자 추정 활자들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미확인 활자 100여 점과도 유사해 관련 연구를 급진전시킬 수 있다.

신중론도 나온다. 금속활자 전문가인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활자 형태만으로 예단하기 이르고, 향후 각종 인쇄본과 대조해 가며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선 전기 금속활자 발굴

앞서 전해진 조선 금속활자는 조선왕실에서 조선총독부를 거쳐 박물관과 규장각 등으로 나누어진 것들이다. 땅속에서 금속활자가 대거 출토된 것도 처음이다. 출토 지역은 현재의 종로2가 사거리의 북서쪽으로 지명상 인사동이다. 발굴을 담당한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은 “이 일대는 조선 한양도성의 중심부에 해당하는데 조선시대 유물이 떡시루처럼 층층이 쌓여 있다. 이 중 16세기에 해당하는 층위에서 유물들이 나왔다”고 했다. 금이 간 항아리가 발견돼 진흙을 걷어내니 금속활자와 다른 유물 파편이 쏟아졌다고 한다.

유물들은 물시계 부속품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천문시계 부품, 조선시대 화포인 총통(銃筒), 동종(銅鐘) 등 모두 금속제다. 특히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부속품 주전(籌箭)으로 보이는 동제품들이 잘게 잘린 상태로 나왔다.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되는 유물이다.

15세기에 중국 한자를 표준음에 가깝게 표기하기 위해 쓰였던 동국정운식 한글 활자. 왼쪽부터 차례로 ㅱ, ㆆ, ㆅ 이 보인다. [사진 문화재청]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 부품도 나왔다.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되고 밤에는 해를 이용할 수 없는 단점을 보완해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한 장치다. 1437년(세종 19년) 세종이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나오는데 이 중 하나로 보인다. 이용삼(천문우주학) 충북대 교수는 “기록으로만 전해온 조선시대 과학 유물의 실체를 확인하게 한 귀한 유물”이라고 감격했다.

이들은 모두 일반인이 접할 수 없는 궁궐·왕실에서나 소유·사용이 가능했던 것들이다. 그럼에도 출토된 곳은 관가 건물이 아니라 시전(市廛)과 관련된 중인들이 거주하던 건물로 보이는 점도 이채롭다. 유물 가운데 화포인 소승자총통은 제작연도가 1588년으로 확인된다. 이후 유물을 한꺼번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유물 떡시루처럼 층층이

오경택 원장은 “발굴된 유물이 모두 일부러 조각낸 상태라서 나중에 ‘재료 재활용’을 염두에 둔 것 같다”면서 “아마도 임진왜란 등으로 피란을 가며 급하게 파묻었다가 되찾지 못한 게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출토 유물들은 현재 1차 정리만 마친 상태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해 보관 중이다. 문화재청은 “보존 처리와 분석 과정을 거쳐 분야별 연구가 진행된다면 조선시대 전기, 특히 세종 연간의 과학기술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8)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구텐베르크와 동년배, 세종은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이기환의 Hi-story]

경향신문 선임기자2021. 4. 12. 06:01

https://youtu.be/5CcBQTaR8JY

 

얼마전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국내에서는 전해지지 않는 15세기 금속활자본을 일본 도쿄(東京) 와세대대(早稻田大) 도서관에서 찾아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요. <이학지남>(吏學指南)이라는 책은 중국 원나라 때인 1301년에 편찬한 법률·제도 용어집이자 관리 지침서랍니다.

그러나 저는 <이학지남>이라는 책 자체에는 그리 관심이 없구요. 이 책이 1420년(세종 2년) 제작된 ‘경자자(庚子字)’라는 금속활자로 만들었다는 것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세종대왕 기념관에 전시된 ‘주자소도’. 태종과 세종 때 한문과 한글 금속활자를 만든 연구소이자 공장이었다. 1420년 주자소 관리들이 경자자를 개발하자 세종은 술 120병과 고기를 하사했다.


■신료들은 왜 금속활자를 반대했을까

1420년이라면 어떻습니까.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직지>(1377년)이든, 혹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758-2호·1239년 무렵)이든 43~181년이나 흘렀던 때입니다.

바로 그럴 때 조선의 태종과 세종은 양질의 금속활자를 개발해서 책을 대량인쇄하는 것을 국책사업으로 여기고 분투하고 있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태종(재위 1400~1418)은 1403년(태종 3년) 주자소를 만들면서 “국내에 책이 너무 적어서 유생(儒生)들이 공부할 수 없다”(2월13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태종이 주자소를 만들려 했을 때 신료들은 “소용없는 일”이라면서 한결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답니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억지로 우겨서’ 주자소를 만들었습니다(<세종실록> 1434년 7월2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 와세대대(早稻田大) 도서관에서 찾아낸 <이학지남>(吏學指南). 중국 원나라 때인 1301년에 편찬한 법률·제도 용어집이자 관리 지침서이다. 이 책은 1420년(세종 2년)제작한 ‘경자자(庚子字)’라는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이다. 국내 유일본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왜 신료들이 입을 모아 반대했을까요. 고려·조선시대 금속활자의 주조 및 인쇄술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죠. 왜냐. 이때의 금속활자는 모래주형(주물사)에 따라 주조했습니다.

“부드러운 갯벌을 평평하게 편 인판(印板)에 나무에 새긴 활자를 찍으면 글자가 새겨진다. 인판이 말라 굳어지면 쇳물이 통할 구멍과 길을 만들어놓고 다른 판을 겹친 뒤 구리액을 구멍으로 쏟아붓는다. 그러면 구리액이 패인 곳에 들어가 하나하나 글자가 된다.”(성현의 <용재총화>)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주조기술이 부족했습니다. 초기의 금속활자를 보면 주조 때 생긴 쇳물찌꺼기와 같은 흠결이 보입니다. 인쇄할 때도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조한 활자들을 조판틀에 움직이지 않게 배열하고 먹을 묻힌 뒤 종이를 덮고 골고루 문질러야 인쇄가 되겠죠. 하지만 한 자 한 자 조판된 활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1434년 7월2일)을 보면 인쇄 때의 괴로움이 절절이 배어나옵니다.

“인쇄할 때 먼저 밀랍(蜜蠟·꿀 찌꺼기를 끓여서 짜낸 기름)을 조판틀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밀랍의 성질이 원래 부드러우니 조판활자가 굳지 못했다. 겨우 두어 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져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태종이 주자소를 만든다고 할 때 대소신료들이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반대한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죠. 태종이 온갖 어려움 끝에 계미자(1403년)를 보완한 ‘정해자’를 만들고(1407년) 그 뒤에도 3년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인 1410년(태종 10년) 인쇄본을 찍어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답니다.

① 주조기술의 부족으로 쇳물찌꺼기가 그대로 보이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758-2호)의 활자본 글자> ② 주조기술 부족으로 획이 탈락한 부분을 인위적으로 칠했다. ③초창기 금속활자는 주물기술 부족으로 점과 필획의 완성도가 떨어져 글자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런 부분을 가필해서 보사한다. ④ 쇳물찌꺼기 때문에 판독이 어려우면 나중에 덧칠하지만 때로는 가필이 잘못 된 경우가 생긴다, ⑤주조과정에서 활자가 탈락되면 인위적으로 가필하기도 했는데, 틀리게 가필한 경우도 많았다.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의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김영사간), 2020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활자 발명

1418년 세종(재위 1418~1450)이 아버지(태종)가 이루지못한 과업의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1420년(세종 2년) 세종은 우선 당대의 과학자이자 공조참판인 이천(1376~1451)에게 “아무래도 (‘정해자’ 등 기존의)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으니 당신이 한번 새롭게 만들어보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이천은 온갖 방법을 짜내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니 ‘경자자’입니다. 경자년(1420년)에 개발했다 해서 ‘경자자’가 된거죠. 이번에 와세대대 도서관에서 찾아낸 <이남지남>이 바로 이 경자자로 찍었다는 거죠.

어쨌든 <세종실록>은 “나름 정교하고 치밀했다는 ‘경자자’ 개발로 하루에 20여장 인쇄할 수 있었다”(1422년 10월29일)고 했습니다. 세종은 경자자를 개발한 주자소 관리들에게 “수고했다”면서 술 120병과 고기를 하사했습니다. 주자소에서는 1420년부터 2년간 <자치통감강목>을 찍어냈습니다.

①초창기 금속활자본을 보면 이중으로 인쇄된 흔적이 보인다. 조판된 활자가 움직인 경우, 종이가 말린 경우, 종이 놓인 위치가 바르지 않아 바로잡는 과정에서 이중 인출된다. ②조판된 활자를 인쇄할 때 활자의 기울기에 따라, 혹은 인쇄하는 사람의 힘 조절에 따라 인쇄상태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보인다. 어느 한쪽이 흐려지거나 진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박상국 교수의 단행본에서


그래도 뭔가 부족했습니다. 여전히 ‘인쇄 때 글자가 이리저리 쏠리고 비뚤어지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이죠. 다시 14년이 흐른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다시 이천을 호출합니다. 당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59세)였던 이천은 “할 수 없다”고 완곡히 사양했는데요. 세종이 누굽니까. “당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세종 본인의 표현대로 ‘강요’했습니다. 세종의 특명을 받은 이천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경자자’의 단점을 상당부분 보완합니다. <세종실록> 1434년 7월2일자를 볼까요.

 

“내(세종)가 ‘강요하자’ 경(이천)의 지혜로 밀랍을 쓰지 않고도 조판한 글자들이 흔들리지 않으니….”

신기하죠. 이천은 어떻게 밀랍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조판한 글자를 흔들리지 않게 만들었을까요.

“처음에는 글자를 조판하는 법을 몰라서 밀랍을 녹여서 글자와 글자 사이를 붙였다. 그러나 단단하게 굳지 않았다. 그 뒤에 대나무로 빈 곳를 메우는 재주를 써서 밀납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다.”(<용재총화>)

즉 활자와 활자 사이의 빈곳에 대나무를 메워서 조판한 활자들을 고정시킨 겁니다.

이때, 즉 갑인년인 1434년(세종 16년) 개발한 이 활자에는 ‘갑인자’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갑인자’는 14년전에 개발한 ‘경자자’에 비하여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았습니다. ‘경자자’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해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개선한 거죠. 이 ‘갑인자’로 하루에 40여 장 인쇄하는데 성공할만큼 조판틀(활판)을 고정시키는 기술도 발전했습니다.

‘갑인자’로 찍어낸 책은 글자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져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합니다. 또 먹물이 시커멓고 윤이 나서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로 일컬어집니다. 이로써 활자는 정해자(1407년)→경자자(1420년)→갑인자(1434년)로, 인쇄는 두어장(태종 때)→20여장(1420년)→40여장(1434년)으로 진보했답니다.

정해자(혹은 계미자)로 찍어낸 책들. 왼쪽이 ‘국보 제149-2호’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이고, 오른쪽 사진은 ‘국보 제148-1호’인 <십칠사찬고금통요>권16이다. 그러나 정해자(계미자)로 책을 찍어냈지만 조판 및 인쇄기술의 부족 때문에 한번에 겨우 2~3장 인쇄하는데 그쳤다.


■손수 한글로 지은 월인천강지곡

모처럼 만족할만한 활자(갑인자)를 20여 만 자를 주조했습니다. 그 활자로 평소 찍고 싶었던 책을 발행 보급합니다. 조선과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각 110명을 선정해서 삽화(그림)를 그리고, 그림 설명과 시(詩)까지 붙인 <삼강행실도>를 제작·배포합니다(1434년). 무지몽매 때문에 삼강오륜을 저버리는 범죄는 없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또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한 유학 수신서인 <소학>도 찍었고, 역사서인 <자치통감>까지 간행합니다. <세종실록>은 “이제 큰 활자(갑인자)를 주조했으니…<자치통감>을 인쇄하고 전국에 반포해서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한다. 종이 30만권만 준비하면 500~600질을 인쇄할 수 있다”고 뿌듯해 했답니다. 눈이 침침한 노인들도 책을 보게 하려고 활자가 큰 갑인자를 개발했다는 얘기잖습니까.

금속활자를 그토록 개발하려 했던 세종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가 구구절절 배어나옵니다.

세종은 “‘갑인자’ 개발로 서적이 널리 인쇄되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화와 교육이 번성하고 세상의 도리가 높아질 것”이라 했습니다.

1420년 개발한 경자자로 찍어낸 책들. 왼쪽 사진은 중국 상하이(上海)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치통감 강목>. 오른쪽 사진은 국보 283호 <통감속편>(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그렇게 1434년(세종 16년) 한자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갑인자’를 제작한 세종은 9년 뒤(1443년) ‘훈민정음 창제’라는 불세출의 과업을 완수하죠. 그런 뒤에는 또하나의 과업을 시도합니다.

막 창제(1443년), 반포(1446년)한 한글의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둘째아들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재위 1455~1468)에게 특명을 내리는데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해서 훈민정음 반포 7개월전 죽은 부인(소헌왕후·1395~1446)의 명복을 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헌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거든요.

이 명에 따라 수양대군은 <석보상절>을 편찬한 뒤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는데요(1447년). 세종은 이 <석보상절>을 꼼꼼이 읽고 각 2구절에 따라 막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한 찬불가 583곡을 손수 지었는데요. 그것이 <월인천강지곡>이죠.

1434년(세종 2년) 개발한 갑인자와 갑인자를 보완한 활자로 찍어낸 책들. 갑인자는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찬사를 받는다. ①1448년(세종 30년) 갑인자로 찍어낸 <동국정운>(국보 71호)|간송미술관 소장 ② 1438년(세종 20년) 간행된 <자치통감강목> 권19(보물 552호).|아단문고 소장 ③1436년(세종 18)에 간행하여 배포한 <자치통감>(보물 1281-2호).|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최초의 한글활자는?

중요한 것은 이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등 두 책은 1434년 개발한 갑인자(한자 활자)와 함께 특별히 주조한 한글 금속활자를 조판해서 간행했다는 거죠. <석보상절>의 편찬이 1447년 9월에 완료·간행되었으니 한글활자도 이 무렵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죠.

그러니까 두 책은 훈민정음 창제 후 1년 남짓 지났을 때 주조된,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최초의 한글금속활자로 간행된 겁니다. 그러나 이때 주조한 한글활자는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요.

지난해(2020년) 10월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후 주조한 최초의 한글금속활자를 최첨단 기술인 인공지능(AI)을 활용하여 분석·복원하는 기법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는데요. 정재영·최강선 한국기술교육대 연구팀이 4개월동안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서 현존하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활자본을 분석한 뒤 세종대왕 당시의 한글금속활자를 복원하는 과정을 개발한 건데요.

정해자와 경자자, 갑인자본의 비교. ①1407년 정해자(혹은 계미자)로 찍어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국보 149-2호) ②경자자로 간행한 <자치통감 강목>. ③1438년(세종 20년) 갑인자 등으로 간행한 <자치통감강목> 권19(보물 552호).|아단문고 소장. 정해자(1407년) 및 경자자(1420년)와 비교할 때 갑인자(1434년)는 글자가 예쁘고 생동감이 넘치며 자간 거리도 떨어져 읽기 쉽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갑인자를 두고 ‘활자본의 백미’라 한다. 인쇄도 두 어 장(태종 때)→20여장(1420년)→40여장(1434년)으로 획기적으로 진보했다.


■천지인으로 만들었는데 어찌 삐침을?

그렇게 3D 기술로 복원한 한글금속활자는 일단 ‘월’, ‘인’, ‘천’, ‘강’, ‘지’, ‘곡’과 ‘니’, ‘텬’ 등 8자였는데요. 연구를 주도한 정재영 교수의 촌평이 인상깊더군요. 세종이 붓글씨만이 존재했던 당대에 ‘돋움체(고딕체)’의 한글을 창제한 것에 새삼 감탄했다는 거예요. ‘돋움체’는 서양에서 ‘획의 삐침이 없는 글씨체’를 뜻하는데요. 산세리프, 혹은 고딕체로도 하는데요. 이 글씨체는 18~19세기 사이에 유행한 글꼴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러나 그보다 300~400년 전 조선의 세종이 다양한 획과 굵기로 쓰는 한자 붓글씨 사회에서 점과 선 만을 이용한 ‘돋움체’의 글자, 즉 한글을 창제할 생각을 한 거죠.

①세종의 특명을 받은 수양대군은 1447년 <석보상절>(보물 523호) 을 편찬한 뒤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②세종은 이 <석보상절>을 꼼꼼이 읽고 각 2구절에 따라 막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한 찬불가 583곡을 손수 지었다. 이것이 <월인천강지곡>(국보 320호)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정재영 교수는 그것을 훈민정음 창제 원리와 연결짓는데요. 즉 세종은 한글의 첫음(자음)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떴고, 가운데 소리(모음)는 하늘(·)과 땅(ㅡ), 사람(ㅣ)을 뜻하는 천지인을 바탕으로 만들었는데요. 사람의 발성기관을 본떴고, 자연 및 인간의 섭리를 담은 천지인을 떠올려 가장 간단한 점(·)과 선(ㅡㅣ)만으로 표현했는데 어떻게 흘림체나 삐침을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극히 간단하지만 심오한 뜻을 품고 있는 ‘돋움체’로 표현했다는 거죠.

인공지능으로 복원해본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한글활자. 1447년(세종 29년) 무렵 한자 활자(갑인자)와 함께 막 창제한 한글의 동활자로 찍어낸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토대로 복원해봤다.|한국기술교육대 연구팀 제공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서양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동년배라는 겁니다. 세종이 1397년생이고, 구텐베르크 역시 1397년에서 1400년 사이 태어났다고 하거든요.

세종이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라는 ‘갑인자’를 개발한 1434년이면 어떨까요.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의 걸음마도 떼지 못했거나 막 내딛었던 때였답니다. 또 1447~48년 무렵이라면 어떨까요. 구텐베르크는 이제야 금속활자술을 터득하고 고향인 마인츠로 돌아오던 때였습니다. 이 무렵 세종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쉬운 글자를 창제하고 이를 곧바로 금속활자로 찍어내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9)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세종은 왜 큰아버지 정종에게 "정통성 없다" 낙인 찍었을까 [이기환의 Hi-story]

경향신문 선임기자2021. 2. 15. 06:00
 

 

조선을 다스린 임금 27분 가운데 무려 262년간이나 ‘임금’ 대접을 받지못한 분이 계신다는 거 아십니까.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44곳 중 40곳) 중에 폐위된 연산군(10대·1494~1506)·광해군(15대·1608~1623)묘와 함께 그 임금 부부의 능(후릉)이 빠졌답니다. 그거야 그 부부의 능이 북한 땅(개성)에 묻혀있으니 불가피하다 칩시다. 태조의 정부인이자 태종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도 황해도 개풍에 묻혀있어서 제외되었으니 말입니다.

정종과 그의 부인 정안왕후가 묻힌 후릉. 현재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다. 조선시대 땐 개성부가 관리했다. 능이 북한에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일단 빠졌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아들이 15명이나 되었는데…

아니 그런데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 조차도 그 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대체 어떤 분이기에 세종대왕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을까요. 자초지종을 풀어봅시다. 그 문제의 임금이 바로 조선의 제2대 임금인 정종(1357~1419·재위 1398~1400)입니다. 정종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아들인 영안대군 이방과인데요. 나름 고려 말에 왜구 토벌에 나름의 공적을 세웠답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 창업에는 참여하지 않아서 태조의 꾸지람을 들었답니다. 사실 차남이었기에 왕위와도 거리가 멀었죠. 그런데 고려의 충신을 자처한 장남(이방우·1354~1393)이 술병으로 죽은 뒤 어쩔 수 없이 맏아들 노릇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천성이 권력하고는 거리가 멀었나 봅니다. 1398년(태조 7년) 정안대군 이방원(태종)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때는 황급히 성을 넘어 숨어버렸다는 일화도 있어요. 난이 수습되고, 세자 책봉 문제가 불거지자 이방과는 “조선 왕조가 개국하기 까지는 모두 정안군(5남 이방원)의 공이 크며 나는 세자가 될 수 없다”고 버텼는데요. 하지만 이방원이 굳이 사양하자 어쩔 수 없이 세자가 됐답니다.

결국 자식들 간 피바람에 염증을 느낀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양위로 임금이 됩니다. 그러나 허수아비 임금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398년(태조 7년) 11월7일 <태조실록>에 묘한 기사가 등장합니다. 정종이 사가에 있을 때 첩이던 류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아들을 자처하는 ‘불노’라는 인물을 갑자기 원자로 삼은 겁니다. 사실 정종의 정부인은 정안왕후 김씨(1355~1412)였는데요. 부부 금슬은 매우 좋았지만 자식은 두지 못했습니다. 정종은 대신 8명(혹은 10명)의 첩에게서 15남 8녀의 자식을 두었는데요.

정종과 태종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제릉)도 역시 북한 개성(상도면 풍천리)에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빠졌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동생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형’

그런데 정종은 어느날 갑자기 ‘불노’라는 아들을 ‘원자’로 삼았다는 겁니다. 원자가 무엇입니까. 아직 왕세자로 책봉은 되지 않았지만 임금의 맏아들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그러자 이방원의 측근들은 바싹 긴장했습니다. 자칫 ‘죽쒀서 개 줄 판’이었으니까요. 이방원의 최측근인 이숙번(1373~1440)은 “공신들이 목숨을 걸고 공(이방원)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데, 지금 ‘원자’라는 사람이 궁중이 있으니 화근이 될 것”이리고 경고했답니다. 남재(1351~1419)는 대궐 뜰에 나타나 큰소리로 “속히 정안군을 세자로 정해야 한다”고 외쳤고, 이방원의 책사인 하륜(1347~1417)도 2차 왕자의 난(1400년 1월27~28일) 직후 “하늘과 백성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정종을 겁박했습니다.

 

심상치않게 돌아가는 낌새를 눈치챈 정종은 당신이 원자로 삼은 불노를 두고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정종는 한술 더 떠 슬하의 아들 15명에게 “전원 출가하라”는 명까지 내립니다. 정종도 사람이어서 잠깐 권력욕심을 부렸다가 ‘앗 뜨거’ 싶었나봅니다. 정치, 아무나 하는 거 아니죠.

오죽하면 정종의 정부인인 정안왕후가 동생(이방원) 이야기만 나오면 부들부들 떠는 남편(정종)에게 “전하께서는 왜 동생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느냐, 빨리 양위해서 편히 사시라”고 간곡하게 청했다고 합니다.(<연려실기술>) 아닌게 아니라 이복 동생들을 무참히 죽이고, 동복 형(방간·미상~1421)까지 쫓아낸 이가 동생(이방원)이 아닙니까. 정종이 불노를 세자로 고집했다면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정종은 공식적으로 15남 8녀의 자식을 두었다. 정부인인 정안왕후와는 자식이 없었지만 후궁들에게서 많은 자식을 낳았다. 조선왕조에서 자식을 많이 둔 역대 임금 중 4위를 달린다.


■‘상왕’ 보직이 더 행복했던 임금

정종은 왕위를 동생에게 내주려 합니다. 원래는 동생을 후사로 책봉했으니 ‘왕세제’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종은 “지금 이 순간 과인은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고 선언하고 동생을 ‘왕세자’로 책립했습니다. 정종은 동생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삼아, 즉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한 거죠.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이방원의 입김이 작용했겠겠죠. 이방원으로서는 ‘두차례의 골육상쟁에 이어 형의 왕위까지 찬탈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는 없었겠죠. 가장 좋은 방법은 태조로부터 직접 왕통을 승계한 것으로 종통을 꾸몄던 겁니다. 정종은 그 해 11월(1400년) 동생 정안군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상왕으로서 정종의 삶은 외려 행복했답니다. 격구와 사냥, 온천, 연회 등을 즐기면서 19년 간이나 살다가 1419년(세종 1년) 승하했습니다.

1398년11월7일자 실록. 정종에게 갑자기 ‘불노’라는 아들이 등장하고, 정종은 그 아들에게 ‘원자’의 칭호를 부여한다. ‘원자(元子)’는 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을 뜻한다. 그러자 이방원의 측근들이 거세게 반발한다.


■조선의 2대 임금은 ‘공정왕’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조선의 2대 임금을 ‘정종’이라 했죠. 그러나 정작 왕실이 공식적으로 올려주는 ‘정종’ 묘호를 받기까지 무려 262년이나 걸렸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기서 세종대왕(1418~1450)이 등장합니다. 세종은 정종 사후에 묘호를 내려야 할 때 매우 이상한 말을 남깁니다. 즉 “과인의 생각으로는 사시(賜諡·명나라가 내려주는 묘호)만이 허락될 뿐, 사시(私諡·조선 조정이 올리는 묘호)는 올릴 수 없을 것 같다”(<세종실록> 1419년 11월 29일)고 발언한 겁니다.

세종의 이 발언 때문에 정종은 명나라가 내려주는 ‘공정’의 묘호만 인정되고, 조선 조정이 공식적으로 내리는 묘호(정종이나 태종이나 세종과 같은)는 받지 못했답니다. 명나라가 내리는 묘호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겠지만 조선 왕실에서는 절대 정통으로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조선의 2대 임금은 ‘공정왕’이라고만 했답니다.

전통적으로 왕조의 창업주에게는 ‘태조’, 2대 황제(임금)에게는 ‘태종’의 묘호를 올렸다. ‘태종’은 태조의 적통인 제1대 종자(宗子·종가의 맏아들)에게 올리는 묘호였다.


■태조와 태종의 차이

세종은 왜 이런 각박한 결정을 내렸을까요. 한마디로 큰아버지인 공정왕을 조선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의 속내는 어머니(태종의 정비·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승하 직후 능의 조성을 두고 논의를 벌이면서 드러납니다. 즉 세종은 “부왕(태종)의 승하하신 뒤에는 반드시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으실 것”(<세종실록> 1420년 7월17일)이라고 한겁니다. 이 무슨말일까요.

세종은 만약 부왕이 돌아가시면 그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밝힌 거죠. 이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로부터 창업군주에게는 주로 ‘태조’의 묘호를 붙였고, ‘태조’를 계승한 이를 ‘태종’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중국 송나라-요나라-금나라-원나라가 줄줄이 2대 황제를 태종이라 했답니다. 한마디로 ‘태종’은 태조의 적통인 제1대 종자(宗子)에게 올리는 묘호였던 겁니다.

그런 예법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은 2대 국왕, 즉 훗날 정종이 되는 공정왕의 묘호는 당연히 ‘태종’이어야 했죠. 하지만 정종은 ‘태종’은 커녕 묘호 조차 받지 못한채 ‘공정왕’의 이름을 얻는데 그쳤던 겁니다. 세종은 곧 “조선의 적통은 ‘태조-정종-태종’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태조-태종’으로 곧장 이어진다”는 것을 선언한 거죠.

월북화가 이여성(1901~?)의 ‘격구도’. 정종은 왕위를 동생 이방원에게 넘긴 뒤 격구와 사냥, 온천, 연회 등을 마음껏 즐기며 19년을 더 살다가 1419년 승하했다.|렛츠런파크서울말박물관 소장


■“원래 태종의 나라였다”

세종의 이러한 발언은 후대 임금들에게도 금과옥조가 됩니다. 공정왕의 묘호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양위를 받은 태종과, 예의범절이 지극한 세종이 공정왕에게 묘호를 내리지 않은 데는 ‘반드시 그 깊은 뜻이 있었을 것(必有深意)’”이라는 조정의 공론이 일었습니다. 그나마 1469년(예종 1년) 예종이 공정왕에게 ‘희종’이라는 묘호를 내리도록 결정했습니다.(<성종실록> 1475년 1월 15일)

그러나 예종이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답니다. 성종 때(1482년 7월 20일) 또다시 이 문제가 거론되자 일부 신료들이 ‘태종과 세종의 깊은 뜻(深意)’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답니다.

“(왕자의 난 이후) 나라는 태종의 소유였는데, 다만 형제의 차례 때문에 공정왕에게 양보했습니다. 공정은 즉위 3년 만에 태종에게 도로 양위했는데….”

원래 태종의 나라였는데, 나이 때문에 잠시 형(공정)에게 맡겼고, 그것을 3년 만에 되찾았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정왕의 나라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태종은 처음부터 형을 ‘적통 임금’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이후에도 홀대는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정종의 신위는 제사 때도 철저히 무시됐는데요. 더욱이 정종의 신위는 성종 때 영녕전의 협실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사 때도 무시 당했죠.

예컨대 1475년(성종 6년) 회간왕(1438~1457)의 부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공정왕이 종묘의 정실에서 협실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집니다.(<성종실록> 1475년 9월16일) 즉 성종의 아버지이자 인수대비의 남편인 회간왕은 20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요. 회간왕이 덕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그 신위가 종묘로 옮겨 봉안하게 됐는데, 그 때 공정왕이 우선 순위에서 밀려 협실로 쫓겨난 거죠. 정식군주였는데도 추존왕에게 밀린 셈이니 얼마나 원통했겠습니까.

4개월간 숙의 끝에 숙종은 공정왕의 묘호를 ‘정종(定宗)’이라 결정한다. ‘백성을 편안하게(定) 한 임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무려 262년만의 복권이었다.|임민혁의 <왕의 이름, 묘호>, 문학동네, 2010년에서


■“그 분들도 불편했을 것”

공정왕의 한은 승하한 지 262년이 지난 숙종 7년(1681년)이 돼서야 풀립니다. 그해 5월18일 선원계보(왕실족보) 교정청이 어첩(왕실의 계보를 뽑아서 적은 접책)을 수정하던 중 열성조의 묘호 가운데 공정왕의 묘호가 빠진 것을 발견하고 숙종에게 보고한 겁니다. 숙종은 이후 4개월간이나 대신들의 자문을 받는데요. 결론은 공정왕의 묘호가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중추부사 송시열(1607~1689)의 상언이 재미있었죠. 즉 “태종이 평소 조용히 살고자 하는 공정왕의 뜻을 받들어 묘호를 올리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편치 않았을 것”(<숙종실록> 1681년 9월14일)이라 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지만 뭐 어떻습니까. 숙종이 “당장 묘호를 올리라”는 명을 내리자 불과 4일 후인 9월18일 공정왕의 묘호를 ‘정종(定宗)’으로 정했답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定)’는 뜻을 담았습니다.

무려 262년만의 복권이었던 셈이죠.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종으로서는 임금 노릇 하고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요. 그나마 빨리 그 짐을 벗어던졌으니 발 쭉 뻗고 마음 편히 오래 산 것이 아닐른지요. 지금 정종과 정안왕후의 무덤(후릉)은 지금 북한에 뚝 떨어져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지도 못했지만 뭐 어떻습니까. 통일이 되거나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추가 등재될 수도 있겠죠. 그게 대수겠습니까.(10)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unghyang.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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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병 세종이 7년 논쟁 끝에 만든 '슬기로운 후계 양성법'···대리청정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0.04.07 06:00 수정 : 2020.04.30 07:17

1449년(세종 31년) 12월26일 왕세자 문종이 대리청정기에 문신 정식(1407~1467)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정식을 조봉대부(종4품)·의정부사인(정4품)·직보문각지제교(정4품)로 임명했다. |조미은의 ‘조선시대 왕세자 문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14에서

“내가 세종의 업적을 계승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궁(순종)은 훗날 나(고종)의 가르침을 준수해주기를 바란다.” 1891년(고종 28년) 2월8일 고종은 경복궁 안에 계조당을 고쳐 지은 뜻을 밝혔다.

“세종 계해년(1443년) 문종이 동궁에 있을 때 계조당을 세웠고, 문종이 곧 대리청정했다. 세종 시대에 모든 제도와 문물, 법식을 다 갖췄고 가장 융성했다.”

한마디로 고종은 세자인 순종과 더불어 조선의 성군인 세종과 그 아들 문종을 본보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계조당을 고쳐 지은 것이다. ‘계조(繼照)’는 ‘사방에 비치는 광명을 계승하여 비춰준다(以繼明照于四方)’는 <주역> ‘이괘·삼전’의 구절에서 따왔다. 따라서 ‘계조’은 왕위계승을 뜻한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바로 ‘슬기로운 왕위계승’을 위해 계조당을 만들어 세자(문종)에게 정사를 대신 돌보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세종의 후계자 양성법인 ‘대리청정’이다.

대리청정기인 1449년(세종 31년) 9월3일 배임의 관직을 허락한 서경을 인증하는 문서이다. 배임은 병조의 인사권 발동 이후 대간의 적격여부 판단(서경)을 거친 뒤 세자 문종에 의해 최종 임명됐다. |조미은의 논문에서

 

■‘독이 든 성배’ 마시는법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했는데, 세종은 왜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게 됐을까. 왕조시대에 세자를 두고 흔히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에서 ‘국본(國本)’이라 했다. 다음 왕위를 이을 후계자 양성은 국본을 튼튼히 하는 과정이었다.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또하나 세종 스스로의 뼈저린 경험이 단초가 되었다. 세종은 원래 세자가 아니었다. 맏형인 양녕대군이 폐위되어(1418년 6월 3일) 졸지에 세자가 되고, 그리고 8월10일 태종의 선위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두 달 여 만에 대군에서 세자, 세자에서 군왕으로 발탁된 것이다. 하지만 군왕이라는 자리는 ‘독이 든 성배’라 할 수 있다. 잘하면 명군, 현군, 성군이라는 칭송을 받지만 삐끗하면 용군, 혼군, 폭군 소리를 듣고 쫓겨나거나 세세토록 손가락질 받는다.

국왕의 명령인 ‘교지’와 왕세자의 명령인 ‘휘지’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른쪽 ‘교지’는 1443년(세종 25년) 12월6일 세종이 이정석을 정헌대부·경상도좌도병마절제사·조치토영전사로 임명하면서 내린 임명장이다. 정헌대부가 정2품 벼슬이고, 병마절제사 직책이 군권에 해당되므로 국왕이 인사권을 행사했다. 연호부분에 국왕의 보인인 ‘시명지보’를 썼다, 왼쪽 ‘휘지’는 왕세자 문종이 정식에게 발급한 문서다. 연호 부분에 ‘왕세자인’을 찍었다. |조미은의 논문에서

■‘웃는 낯을 띠었다’며 멸문지화 당한 외숙집안

또 아무리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세종이라지만 예외없이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 뻔하다. 예부터 군주의 정사를 ‘일일만기(一日萬機)’라 했다.(<상서> ‘고요모’) 군주가 하루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1만 가지나 된다고 해서 일컬어졌다. ‘만기친람’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세자~국왕이 된 세종은 아들인 세자(문종)에게만큼은 서서히 권력을 이양하는 방법을 찾았다. 준비된 후계자를 키우는 것, 그것이 바로 ‘대리청정’이었다.

하지만 군주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는 순간 그 명을 받들어야 할 세자나 신하들은 죽을 노릇이었다. 저 군주가 대체 무슨 마음을 품고 저런 명을 내리는가. 혹은 세자나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태종은 여러차례 양위 소동을 벌이며 세자와 신하들의 의중을 떠봤는데, 그 올가미에 세자(양녕대군)의 외숙인 민무구·무질 형제가 걸려들었다. 그 이유가 기막혔다. “임금이 선위의 뜻을 밝히자 민무구·무질 형제가 얼굴에 기쁜 빛을 띠었다(喜形于色)”(<태종실록> 1407년)는 것이었다. 민무구·무질 형제는 “신들의 얼굴빛은 우리도 모르겠는데 전하가 어찌 아시느냐”고 가슴을 쳤지만 부질없었다. 결국 태종의 정부인인 원경왕후 민씨(1365~1420) 집안은 멸문의 화를 입었다.

세종의 교지와 세자(문종)의 휘지에 찍은 ‘시명지보’(施命之寶·국왕의 도장·오른쪽 )와 ‘왕세자인’(오른쪽).|조미은의 논문에서

■도둑·사형수가 들끓은 세종 시대

세종이 ‘대리청정’을 발설한 것은 재위 18~19년이 된 1436년 말~1437년 초였다. 그 이유는 “재위동안 해마다 수재를 만나 기근이 끊이지 않고 도적이 창궐 하는 등 이렇다 할만한 업적이 없었다”(<세종실록> 1437년 3월)는 것이었다. 만고의 성군께서 웬 겸손의 말씀일까 하겠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세종의 시대는 조선 건국 초였다. 아직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아 인심이 흉흉했고, 범죄가 들끓었다. 비근한 예로 1439년(세종 21년) 12월 세종은 “복역 중인 사형수가 190명에 달하니 감형 좀 하면 어떠겠느냐”고 의정부에 하문했다. 세종은 이때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가 되니 내가 부끄럽게 여긴다”고 반성했다.

“왕실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의 황금술잔과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의 은찬(銀瓚·제기)까지도 털렸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또 “온 백성이 들끓는 도둑들을 원망하며 그 고기를 씹고자 해도 어쩔 줄 몰랐다”는 기사(<세종실록> 1435년)도 있다. 이런 판국에 분위기 쇄신책이 필요했고, 그 일환으로 세자의 대리청정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했던 사도세자의 흔적. 사도세자는 15살의 나이인 1749년(영조 25년) 대리청정을 시작했다가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당했다. |조미은의 논문에서

■과체중 당뇨병에 시달린 세종의 선택

또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세종의 건강이었다. 세종은 전형적인 ‘공부벌레’이자 ‘일벌레’였다. 책 한 권을 최소한 100번씩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이뿐이 아니라 날마다 새벽 2~3시에 일어나 하루 평균 20시간씩 격무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세종이 건강을 너무 챙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몸이 뚱뚱했다. 오죽하면 상왕 태종이 막 즉위한 아들(세종)에게 “주상은 몸이 비중한데 때때로 나와 놀면서 살 좀 빼야 한다”(<세종실록> ‘즉위년조·10월9일)고 권했을까. 게다가 육고기를 엄청 즐겼다. 때문에 태종은 “주상(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는데…”라고 걱정하는 유언을 남겼다.(<세종실록> 1420년 8월)

이 지경이니 몸이 배겨날 리가 없었다.

“하루에 한동이 이상 물을 마시는 병(당뇨병)이 있고, 또 등 위에 부종(浮腫)을 앓고 있는데… 이제 또 임질(淋疾·성병이 아니라 요로결석으로 추정)이 걸렸다. 그러니….”(<세종실록> 1438년 4월)

세종은 무엇보다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져 눈 앞의 사람마저 구별할 수 없으니 대리청정은 불가피하다”고 호소했다.

1759년 대리청정 중이던 사도세자가 황해도 감사 정옥에게 내린 치제문이다. 1760년 사망한 정옥의 1주기를 맞아 내린 제문이다. |조미은의 논문에서

■소통의 지도자인가

‘대리청정 하겠다’는 세종과 ‘아니되옵니다’라고 머리를 바닥에 짓찧고 버티는 신하들과의 다툼은 7년이나 이어졌다. 여기서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흔히들 세종을 ‘소통의 지도자’라 한다. 단적인 예로 세종은 일종의 소득세인 공법의 실시를 두고 전국의 세민(細民·가난한 백성)까지 17만명이 참여하는 여론조사까지 실시했다.(1430년 3~8월) 그러나 세종이 마냥 ‘소통의 대마왕’이었던 것은 아니다. 세종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정책을 두고는 결코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때로는 치밀한 논리로 설득했고, 때로는 감정적인 언사로 숨돌릴 틈없이 몰아붙였다. 때로는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연출했다가 다시 더욱 더 센 카드를 내밀어 신료들을 ‘멘붕’에 빠뜨리면서 이전에 던진 카드는 기정사실로 만들어갔다. 이러한 ‘밀당 전술’은 황희·맹사성 등 70이 넘은 노구의 정승들까지 질리게 만들었다.

복원될 계조당. 계조당은 세종 연간에 왕세자(문종)의 대리청정 때 신하들을 조회하고 정사를 펼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고종도 왕세자인 순종을 염두에 두고 ‘세종과 문종’을 본보기로 삼겠다면서 계조당을 재·개건축했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한글을 위한, 부인을 위한 독선들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싸고 최만리(?~1445) 등과 논쟁을 벌이면서 언급한 표현을 보라.(1444년)

“너희는 (이두를 만든) 설총은 옳다 하면서 내가 한 일(훈민정음 창제)은 그르다 하는 거야.” “저런 아무 짝에도 쓸데 없는 저속한 선비 같으니….” 세종은 글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창제한 훈민정음을 두고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기예일 뿐(不過新奇一藝耳)’이라고 폄훼한 이들의 주장을 절대 간과할 수 없었다.

창덕궁 중장 밖 문소전 옆에 불당을 짓는 문제를 두고도 세종의 ‘막말’이 반복됐다.(1448년·세종 30년)

“대소신료들이 떼지어 날 겁박하는 것이냐” “난 어진 임금이 아니다. 부덕한 임금이라 마음대로 한다” “정승 1000명이 나와 말해봐라. 그래도 난 굽히지 않는다.” “분명한 일은 임금 독단으로 한다.”

이 역시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말본새이다. 유교국가에서 무슨 불당을 짓겠다고 저런 험한 말을 내뱉으면서까지 고집했을까. 이유가 있었다. 2년전(1446년) 승하한 부인(소헌왕후 심씨·1395~1446)을 추모하려 했다. 소헌왕후는 기구한 여인이다. 상왕(태종)이 뒤집어씌운 역적죄 때문에 친정아버지(심온·1375~1418)가 억울하게 죽어갔다. 이때(1418년) 세종이 임금이었지만 군권을 휘두르던 상왕(태종)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었다. 처가가 멸문의 지경으로 몰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남편 세종으로서는 그런 부인의 가문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다. 이에 세종은 석가의 일대기인 <석보상절>과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월인천강지곡>을 지었고, 불당까지 만들어 독실한 불교신자인 부인을 추모하려고 했다. “임금 노릇 못해먹겠으니 선위하겠다”고 배수의 진을 치면서까지 불당건립을 강행한 세종의 독단에는 부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녹아있다. 불당건립은 한 나라의 군주이기 전에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계조당의 배치도, 건물 자체는 남쪽을 향해 지었지만 세자는 대리청정 때 서쪽을 향해 앉아 대신들을 맞았다. 오로지 군주만이 남쪽을 향해 태양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대리청정 때 ‘세자의 남면’을 지시했지만 신료들은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다”며 반대했다. 결국 세자는 계조당 안에서 서쪽을 향하는 ‘서면’으로 대신들을 맞는 것으로 결정됐다. |궁능유적본부 제공

■대리청정 7년의 논쟁

대리청정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이 1436년(세종 18년) 말부터 “인사권과 3품 이상의 형벌권, 군권 등 나라의 대사 외에 다른 정사를 세자에게 맡길 것”이라며 대리청정을 명하자 신료들은 끈질기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버텼다. 신료들은 ‘중국 주나라 문왕이 세자 시절 부왕(왕계)을 위해 ‘하루 세번 문안을 드리고(問寢) 수라를 돌보는 것(視膳)’에 불과했다”(<예기> ‘문왕세자’)는 ‘문침시선(問寢視膳)’의 고사를 인용했다. 세자는 ‘정사를 돌볼 필요가 없고, 그저 부왕만 잘 섬기면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사가 한 곳(임금)에서 나와야지 두 곳(임금과 세자)에서 나오면 혼란이 생기니 대리청정은 어불성설이라 했다. “지금의 전하(세종)와 세자(문종)라면 좋겠지만 후세에 부자지간에 틈이라도 생기면 어쩔거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세종은 ‘넋놓고 있다가 내가 갑자기 죽은 뒤에야 아무런 준비없이 세자가 왕위를 받는 꼴을 봐야겠냐’고 반박했다. ‘지척의 사람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세종으로선 절박했으리라. 영의정 황희 등은 “아직 긴급한 일은 없사오니(주상께서 승하할 일이 없사오니)이 그럴 필요는 없다”던가, “대리청정은 전하의 춘추가 높아지시더라도 결코 행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신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지속적으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세종은 집요했다. 한발 물러서는 듯 하다가 이내 더욱 더 강한 카드를 꺼냄으로써 이전의 카드를 기정사실화하는 ‘밀당전략’으로 한발한발 나아갔다. 1442년(세종 24년) 7월 “이제 그대들과 토론하자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명을 전하는 것일 뿐”이라면서 “세자궁에 대리청정을 담당할 관청(첨사원)까지 두라”고 지시했다. 신료들은 “국왕의 명령을 받드는 승정원이 있는데, 세자의 명을 출납하게 될 첨사원까지 생긴다면 어찌되겠느냐”고 아우성쳤다. 명령이 두 군데서 나온다면 큰 혼란이 빚어질 것이라는 신료들의 우려였다.

이때 신료들 중에는 “동궁이 서무에 참여하더라도 반드시 승정원에서 그 명을 출납해야 한다”(좌찬성 하연 및 좌참찬 황보인)는 논의가 일었다. 세종의 전략이 먹혔다. 세종이 ‘첨사원 설치’의 명을 내리자 기존 세자의 대리청정 이야기는 어느새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세종은 “첨사원 조직은 세자(문종)의 등극 이후에는 없어질 한시조직이 될 게 아니냐”는 신료들의 반대 릴레이에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첨사원 조직은 후세의 젖먹이 어린애가 세자가 된 때라도 제대로 일할 수 있게 상설 설치하는 것이다.”1회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종은 후세에 어린나이가 세자가 된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상설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세종은 첨사원 설치 외에도 한때(1439년) 꺼냈다가 포기한 세자의 ‘강무’ 주재건을 기어코 성사시켰다. 강무(講武)는 국왕의 친림아래 실시하는 수렵대회를 겸한 군사훈련이다. 대간은 물론 의정부와 육조 판서들까지 다 나서 “임금이 엄연히 계시는데 세자가 군통수권자가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면서 “군령은 두 곳에서 나올 수 없다”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세종은 “너희는 임금의 병이 깊어져 손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대리청정을 맡기겠느냐”고 윽박질러 기어코 성사시켰다.

계조당의 발굴조사 모습. 계조당은 1443년 세종이 세자(문종)의 대리청정을 위해 만들었다가 단종 즉위년에 허물었다. |궁능유적본부 제공

■측우기의 발명가는 문종?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4월17일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는 교지(왕의 명령을 담은 공문서)를 내린다. 이때 세자가 신료들의 조회를 받으며 정사를 펼칠 정당(正堂·집무실)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계조당이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세자위에 오르고, 다시 두 달 여 만에 지존의 자리에 오른 세종은 세자(문종)을 ‘준비된 임금’으로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신하들과 7년 논쟁 끝에 만든 제도가 바로 후계자 교육. ‘대리청정’이었다. 세자 문종은 29살 때인 1442년(세종 24년)부터 사실상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닮아 성군의 기질을 타고 난 문종에게 8년 여의 ‘후계자 실습’(대리청정)은 더욱 더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하지만 본래 병약한데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3년상을 잇달아 치르는 바람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문종은 왕위에 오른지(1450년 2월) 불과 2년 3개월 후(1452년 5월) 39살의 춘추로 승하하고 만다. 비록 재위기간을 짧았지만 대리청정 기간까지 합한다면 문종의 치세는 사실상 10년 정도는 된다.

왕세자 문종의 업적 또한 만만치 않다. 대리청정이 논의되던 1441년(세종 23년) 4월 <세종실록>에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등장한다. “세자(문종)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 올 때마다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다. 정확하게 푼수(얼마에 상당하는 정도)를 알 수 없어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측우기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1837년제 측우기. 문종이 세자시절 착안했다는 <세종실록> 기록이 남아있다.

이 기록 때문에 세종 시대의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 발명가가 다름아닌 세자(문종)라는 설도 등장한다. 아닌게아니라 <연려실기술>은 “문종이 천문을 잘 관측하고 후기(候氣)에 정교하여, 우레가 어느 때에 치고 어느 방위에서 일어난다고 예언하면, 뒤에 반드시 맞았다”고 기록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절세의 성군(세종)이 승하했지만 권력의 공백은 없었다. 모두 대리청정의 덕분이었다. 문종은 특히 6품 이상까지 윤대(輪對·문무 관원이 교대로 궁중에 참석하여 임금의 질문에 응대하던 일)를 허락했다. 하급관리들의 말까지도 경청함으로써 언로를 활짝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아직도 언로가 좁다고 여겨, 6품 이상의 조신에게는 모두 윤대를 허용하였다. 지위가 낮은 신하라도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말씨로 응대해서 그들이 할 말을 다하게 하였다.”(<연려실기술>)

이민족과의 전쟁·전란사인 <동국병감>을 펴냈고.,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기도 했다. 또 태종 때 만들었던 화차를 새롭게 개발하여 혹시나 있을 전쟁과 국방에 대비하고자 했다. 또한 2년 3개월의 짧은 치세 치고는 만만치않은 업적임을 알 수 있다. 이 모두가 성군 아버지인 세종의 후계자 이양 방안인 ‘8년여 대리청정’의 덕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종이 너무 일찍 승하하고 세자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잇는 불행이 찾아왔다. 만약 문종이 오래 왕위에 있었다면 계유정난(1453년)과 같은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세종의 치세가 계승되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 왕의 등극으로 쓸모가 없어진 계조당은 단종 즉위년(1452년)그만 헐리고 만다. 그래도 대리청정은 후대 왕세자의 후계자 양성 프로그램의 본보기로 활용됐다. 바로 경종과 영조, 장조(사도세자), 정조, 익종(효명세자) 등의 대리청정이다.

■계조당 복원의 의미

그로부터 400여 년이 훌쩍 지난 뒤 고종은 세종과 문종을 본보기로 삼으려고 계조당을 재·개건(1868년과 1891년)했다. 당시 17세가 된 세자(순종)를 바라보며 ‘나도 세종처럼 세자(순종)에게 대리청정 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사람도 시대도 달랐다. 세종-문종은 고종-순종이 ‘감히’ 넘볼 수 있는 군주가 아니다. 게다가 시대는 늙고 병들어간 500년 왕조의 황혼인 19세기말이었다. 이후 20년도 안되어 국권을 침탈당한 직후 계조당 역시 무참하게 훼철된다. 일제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를 연다는 이유로 조선왕실의 권위를 지우고 식민통치 정당성을 선전하는 행사 공간으로 파괴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3월부터 준비된 후계자를 양성하려고 신료들과 7년간의 투쟁을 거쳐 건립한 세자(문종)의 공간(계조당)을 복원중이다. ‘슬기로운 임금’을 키우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노심초사, 동분서주가 눈 앞에 보이는 듯 삼삼하다.(11)

<참고자료>

김문식, ‘세종의 국왕권 이양방안, 대리청정’, <문헌과해석> 31권 2005년 여름호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해석> 45권, 2008년 겨울호

조미은, ‘조선시대 왕세자 문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논문, 2014

‘조선시대 왕세자 대리청정기 문서연구’, <고문서연구> 36권, 한국고문서학회, 2010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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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전 백성' 여론조사, 그걸 세종이 해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19.10.08 05:00 수정 : 2019.10.10 09:20

1430년(세종 12년) 세종은 공법 시행을 놓고 무려 5개월간 17만명이 참여한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찬성 57.1%(9만8657명, 반대 42.9%( 7만4149명)로 집계됐다.

“전국의 전·현직 관리는 물론이고 세민(細民·가난하고 비천한 백성)들에게까지 모두 가부를 물어 그 결과를 아뢰도록 하라.” 1430년(세종 12년) 3월 5일 세종대왕은 가히 혁명적인 명을 내린다. 호조가 ‘전답 1결 당 조 10두 징수’를 골자로 한 공법(세금) 방안을 제출하자 세종이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지시한 것이다.

이 최초의 여론조사에는 무려 5개월여가 걸렸다. 꼭 4개월이 지난 7월5일에는 ‘여론조사 중간점검 회의’까지 열었다. 이때 호조판서 안순(1371~1440)은 “지금까지의 조사를 보면 경상도에서는 찬성이 많고 함길·평안·황해·강원 등은 반대가 많다”고 중간보고했다. 세종은 “각 도의 (여론 조사) 결과가 도착하면 중앙 및 지방의 관리들은 공법의 장단점과 해결방안을 마련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세종실록> 1430년 8월10일자에 실린 공법 관련 기사에서 여론조사를 분석한 각 도별 결과. 전라와 경상 등 상대적으로 전답이 많고 비옥한 지역의 찬성률이 높았고, 강원 평안 함길 등 척박한 지역일수록 반대여론이 높았다. |소진형의 논문에서 인용한 표를 재정리한 것

 

■찬성 57.1%, 반대 42.9%

그로부터 한달여가 지난 8월10일 마침내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총 17만2806명 가운데 찬성 9만8657명, 반대는 7만4149명’이었다. <세종지리지>에 따르면 당시의 조선인구가 69만 2477명이었으니 인구의 4분의 1이 참여한 대규모 여론조사였던 것이다. 어린이를 빼면 전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국민투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날짜 실록은 3품 이하 전·현직 관리들의 찬반과 각도 감사·수령과 백성들의 찬반 결과를 숫자로 기록했다. 즉 3품 이하의 전·현직 관리 중 찬성은 702명(현직 259명 전직 443명), 반대가 510명(현직 393명 전직 117명)이었다. 3품 이상의 고위 및 3사(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관리들은 “공법의 장단점과 해결책을 제시하라”는 세종의 지시에 따라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했다. 기자가 1430년 8월15일자 <세종실록>에서 의견을 피력한 3품 이상 및 3사 관리들의 찬반을 분석해보니 찬성은 26명 안팎이었고, 반대는 89명 안팎이었다. 절충안을 제시한 경우도 2~3명 정도는 됐다.(물론 숫자없이 의견만 피력한 정3점 이상 및 삼사 관리들만 인용했으니 정확치는 않다.)

시도별 여론조사 결과에서 주목할 것은 전라도(찬성 2만9547명 반대 269명)와 경상도(찬성 3만6317명 반대 393명), 경기도(찬성 1만7106명 반대 241명) 등 3도에서 99%의 찬성 몰표가 나왔다는 점이다. 개성 유후사(특별시)에서도 94.1%(찬성 1123명 반대 71명)가 찬성했다.

1430년 3월5~8월10일까지 ‘공법 시행’을 두고 5개월여에 걸친 전국적인 여론조사 결과 17만2806명 가운데 57.1%인 9만8657명이 판성표를. 42.9%인 7만4149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충청도(찬성률 33%·찬성 6995명 반대 1만4039명)와 황해도(22.3%·찬성 4471명 반대 1만5618명)의 찬성률은 저조했고, 논밭이 부족한 강원도는 12.6%(찬성 944명 반대 6898명)에 그쳤다. 특히 국경지대인데다 땅이 척박한 평안도는 4.5%(찬성 1332명 반대 2만8510명)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함길도는 주민의 단 1%(찬성 78명 반대 7401명)만이 공법에 찬성했다.

전체적으로는 여론조사에 응한 백성의 57.1%가 찬성표를, 42.9%가 반대표를 던졌다, 그렇다면 여론조사 결과가 과반을 기록한 이상 ‘해마다 전답 1결 당 조 10두 징수’를 골자로 한 공법안은 통과돼야 마땅했다,

■3분의 2 가중 다수결 원칙까지

그런데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장시간 관리들의 백가쟁명식 견해와 대책을 모두 청취한 세종은 고심 끝에 뜻밖의 결정을 내린다. “영의정 황희 등의 의논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이날 영의정 황희과 우의정 맹사성, 찬성 허조 등이 “공평치 않고 자칫 국가재정의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공법의 시행을 극력반대했다. 그러니까 세종은 5개월간이나 공들여 진행해온 여론조사 결과에 반해 공법안의 시행을 ‘보류’한 것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공법의 시행을 추진하던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10월 27일 또 한 번 흥미를 끌만한 제안을 던진다.

세종대왕의 최고의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훈민정음> 창제하라 할 수 있다. 공법의 완성 또한 세종의 숨겨진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간송미술관 소장

“지금 공법은 시행하지 않더라도 후세 자손들은 반드시 재론할 것이다. 그러니 미룰 수 없다. 과인은 경상·전라 양도의 백성 중 공법의 시행을 희망하는 자가 3분의 2가 되면 우선 이 양 도에서 시행할 것이다.”(<세종실록>)

어떤 중요한 정책을 두고 일종의 국민투표라 할 수 있는 여론조사를 실시한 왕조시대 군주가 급기야 현대에서도 시행하기 어렵다는 3분의 2 가중 다수결 원칙까지 천명했다. 민주주의의 기틀이 다져진 유럽에서도 볼 수 없는, 가히 해동의 성군다운 세종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최악의 세법을 택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이 그토록 시행하고자 했던 공법(貢法)은 무엇인가. 공법은 해마다 일정량의 곡물을 거두는 정액제 세금을 가리킨다. 그러나 맹자는 풍흉에 관계없이 일정세액을 거둬가는 공법을 최악의 세법으로 지목했다.(<맹자> ‘등문공’) 일정액을 책정하다보니 풍흉에 관계없이 풍년 때는 너무 적게, 흉년 때는 너무 지나치게 거둬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동의 성군이라는 세종은 왜 맹자가 ‘최악의 세법’이라 폄훼한 ‘공법’을 도입하려 했을까. 여말선초의 세금제도는 답험손실법이었다. 일단 ‘논 1결마다 조미 30두, 밭 1결마다 잡곡 30두’로 정했다. 그런 뒤 가을철 추수기에 관리들이 현장 조사를 통해 한 해 농사작황의 등급을 정하고(답험·踏驗), 그 작황 등급에 따라 적당한 비율로 조세를 감면(손실·損失)해 주었다. 이것이 답험손실법의 골자다.

세종의 업적으로 물시계인 자격루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빼놓아서는 안된다.

“진실로 아름다운 법이었다”는 세종의 평가처럼 답험손실법은 제대로 작동되기만 한다면 그렇게 이상적인 제도일 수 없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문제가 아닌가. 이 제도는 전적으로 현장조사관의 능력과 인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법규정은 미비했고, 전문성있고 청렴한 관리는 적었다. 그런 마당에 수령과 감사에 재량권을 주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었다.

그러자 태종은 1415년(태종 15년) 다른 도의 위관(임시로 뽑은 관리)이 1차로 현장 조사한 뒤, 2차로 해당 고을의 수령이 재검하며, 3차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경차관·조관)가 최종적으로 심사해서 결정하는 ‘3심제’를 도입했다. 현장조사 하는 위관의 지나친 재량권을 막으려고, 다른 지역의 관리를 투입하는 상피제를 채택했고, 그것도 모자라 중앙관리를 파견해서 세율을 최종결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불법과 편법이 난무했다.

■현장조사 관리 접대에 등골이 휘어진다

“매양 벼농사를 답험할 때 중앙에서 조관을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감사(도지사)에게 위임하기도 하며…각 지방 향곡(鄕曲·두메산골)에 늘 거주하는 지방관을 위관(委官)을 삼았는데…이들이 조세행정에 어둡기도 하고, 혹은 사정에 끌려 멋대로 줄이거나 보태고…간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기도 하며…”(<세종실록> 1430년 3월5일)

세종은 무엇보다 현장조사에 나선 관리들의 접대에 백성들의 등골이 휘어진다는 것을 너무도 가슴아파했다.

“현장조사에 나선 관리는 물론이고 하인들의 접대 비용까지도 모두 민간에서 나오고…농민들은 앞다퉈 술과 음식으로 후히 대접하면서 ‘세금 좀 낮춰 달라’고 청탁한다. 접대비용이 오히려 세금 액수와 맞먹고….”(<세종실록> 1437년 7월9일자)

1435년(세종 17년) 답험손실법의 폐단이 수치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해 작황이 좋았는데도 충청도에서 현지조사(답험)를 통해 집계된 실전(실제로 경작하고 있는 전답)의 결수가 겨우 8%에 그친 것이다.(<세종실록>) 현지 수령과 감사(도지사)의 현지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받아야 할 세금이 줄줄 새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고 직접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지 않았다. 백성들은 세금과 맞먹는 접대비용 및 뇌물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격루가 물시계라면 앙부일기는 해시계다. 이 또한 세종대왕의 업적이다,

■공법은 부자에게는 다행, 빈자에게는 불행?

그렇다면 세종은 왜 찬성이 과반을 기록한 여론조사 결과에도 ‘보류’ 결정을 내렸을까. 우선 영의정 황희(1363~1452), 우의정 맹사성(1360~1438), 찬성 허조(1369~1439) 등 고위 관리들의 반대가 거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반대론자들은 세종식 공법이 ‘부자에는 다행이고, 백성에는 불행’이라고 주장했다.(<세종실록> 1430년 8월10일)

즉 비옥한 전답을 점유하는 자들은 거개가 부강한 자들이며 척박한 전토를 갖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빈한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전답이 넓고 비옥한 전라·경상도 등에서 99%의 찬성 몰표가, 척박하고 비좁은 평안·함길에서는 거꾸로 95~99%의 반대 몰표가 나왔다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답험손실법에서는 ‘결당 30두’ 원칙에서 그 해의 풍흉에 따라 감해주었는데, 공법은 ‘1결당=10두’라는 일정액을 부여했다. 반대론자들인 이것이 문제라 했다. 이들은 “부자나 빈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들에게 1결당 10두씩 일정한 양의 세금을 거두는 것은 결국 부자에게만 유리한 세금제도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결당 10두’로 세금을 낮추는 결과가 되니 세수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도 지적됐다. 또한 풍년·홍년을 가리지 않고 일정액을 거두는 것 자체가 백성들의 불만을 사는 요인이라 꼬집었다. 반대론자들은 차라리 조세 관련 전문관료들을 육성해서 현지조사(답험손실)에 나서게 하는 등의 제도개선을 주장했다.

세종은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개발하려 애썼다. 세종은 각 도 감사에게 명하여 각지의 익숙한 농군들에게 물어 땅에 따라 이미 경험한 바를 자세히 듣고 수집하여 편찬하고, 인쇄, 보급했다. 세종 시대의 문신인 정초와 변효문 등이 왕명에따라 편찬한 농서다.

■여론조사의 조작 가능성 제기

이떤 이들은 여론조사의 결과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형조판서 정연(1389~1444)가 대표적이다.

“부자는 일반적으로 좋은 전답을 갖고 있고 빈민들은 척박한 땅을 경작합니다. 그래서 부자는 공법을 좋아하지만 빈민은 싫어합니다. 지금 경상·전라 양도의 경우 공법 찬성자가 3분의 2가 넘지만 아마도 호족과 부유층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세종실록> 1438년 7월10일)

한마디로 정연은 전라·경상 양도의 ‘공법=찬성 몰표’는 호족과 부유층의 여론조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조참판 안숭선(1392~1452)은 공법 찬성론자이기는 했지만 ‘다수결’로 정책을 결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옛 것을 좋아하고 새 것을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감정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현혹되어 다른 백성(소수의 백성)의 선호도에 따라 발언한다면…결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세종실록> 1438년 7월 10일)

세종의 공법 여론조사는 이처럼 ‘여론조작’ 및 ‘다수결의 원칙’과 관련된 논란으로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리있는 주장들이었다. 특히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 등 재상들의 반대는 ‘과반의 찬성여론’에도 세종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세종은 ‘황희 등의 의론(반대)에 따른다’며 한발 물러선 이유다.

세종은 조선의 하늘에서 일어나는 각종 천문현상 및 북극고도 관측과 각종 역법이론을 연구해서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을 만들었다.

■애덤 스미스보다 350년 먼저

하지만 세종이 ‘공법’을 줄기차게 주장한 이유가 또 있었다. 바로 ‘불확실성을 배제한 공평조세’였다. ‘조세의 공평’은 고전학파 경제학의 창시자인 영국의 애덤 스미스(1723~1790)가 조세부과의 4원칙 가운데 하나로 ‘예측가능한 공평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조세의 기본원칙으로 강조됐다.(<국부론>) 애덤 스미스는 특히 ‘아무리 큰 불공평도 아주 작은 불확실성만큼 유해하지는 않다’는 주장했다.

그런데 애덤 스미스보다 350여년이나 앞선 15세기 중엽, 그것도 절대군주인 세종이 ‘불확실성을 배제한 공평과세를 부르짖었고, 그것을 나름 실행에 옮겼으니 이것이야말로 천고에 빛날 세종의 또다른 업적이 아닐까.

과장이 아니다. 1437년(세종 19년) 7월9일 세부적인 공법안을 만든 호조가 세종에게 아뢴 대목을 보라.

“공법이 만들어지면 백성들은 모두 미리 바칠 조세의 양을 알아서 스스로 납부하게 되므로 번거롭지 않을 것이며…세법은 만세에 행해질 것입니다.”(<세종실록>)

그것이 바로 평균 수확량을 고려해서 매년 일정액의 조세를 징수하는 공법을 도입한 이유이다. 조세의 확실성을 높이고자 한 것이다.

세종 말년에 개발된 신기전, 조선시대에 사용된 로켓추진 화살이라는 평을 듣는다.

■꺼져가던 불씨 살린 정인지

꺼져가던 ‘공법’의 불씨를 되살린 이는 바로 충청도 감사 정인지(1396~1478)였다. 정인지는 공법논의가 중단된지 6년이 지난 1436년(세종 18년) 2월 22일 “풍흉에 따라 수확량과 세율을 조정하는 답험손실법이 가장 알맞지만 그것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공법을 시행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정인지는 특히 “‘공법보다 좋지않은 법이 없다’는 <맹자>의 언급은 후대의 실수로 전해진 것”이라 단언했다.

정인지가 누구인가. 바로 세종이 ‘공법’을 과거(중시·重試)의 책문 시제로 출제했을 때 ‘답험손실법의 폐단이 너무 크니 공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출제자의 의도에 꼭 맞는 정답을 써서 급제자 12명 중 장원(수석)을 차지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정인지는 세종의 공법 시행에 실무책임자가 되었다.

그랬으니 1446년(세종 28년) 6월18일 세종은 “경(정인지) 등이 중시(과거)에서 책문의 답안을 썼고, 경이 충청감사에 있을 때 공법 재추진의 상소를 올려 청했기 때문에 내가 결단을 내렸다”고 치켜세웠다.

■세수증가보다 민생이 먼저

물론 세종은 황희 등의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일부 도(전라·경상)에서 시범으로 실시하면서 최대한 반영해가며 공법의 틀을 짜갔다. 그 와중에 “전라·경상도민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실시한다”는 ‘가중 다수결’의 개념까지 설파한 것이다.(<세종실록> 1443년 10월 27일) 시험 운영 중 드러난 문제점은 그때그때 수정·보완했다.

단적인 예가 1438년(세종 20년)부터 공법을 시험 운용하자 단 1년 만에 세수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공법 시험 시행으로 세수가 늘었지만 예전 답험손실법의 폐단으로 드는 부당한 비용의 일부를 오히려 세수로 환수했다”고 밝혔다.(<세종실록> 1439년 5월4일)

그렇지만 세종은 공법 시험 시행에 따른 세수증가를 당연시하지 않았다.

1441년(세종 23년) 7월 5일 우의정 신개(1374~1446)는 “공법을 시범시행중인 전라도(52%↑)와 경상도(70%↑)는 물론 처음 시행하는 충청도(108%↑)에서도 세수가 급증했다”면서 백성의 가중된 부담을 우려했다.

그러자 세종은 “내가 백성을 괴롭혀 세수 증대를 꾀하려고 하는 줄 아느냐”고 묻고는 “그저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없애고 민생을 편리하게 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설득했다.

세종은 4군6진과 대마도 정벌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1419년(세종 1) 6월에 이종무를 삼군도체찰사로 임명하여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 그림은 전쟁기념관에 있는 대마도 정벌 기록화다.

■세종 덕분에 창고가 넘쳐난 조선

결국 세종은 논의중단과 재개, 그리고 시험 운용을 통해 공법을 아주 세밀하게 다듬어갔고, 1444년(세종 26년) 윤 7월23일 ‘전분 6등과 연분 9등’의 공법을 마침내 확정했다.

결부법(면적이 아니라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토지계산법)을 근간으로 해서 비옥도에 따라 각 전답의 면적을 6등분으로 나눠 1차 공평과세를 이루는 것이 전분 6등법이다. 또 해마다 풍흉에 따른 계량적인 세율로 조세를 징수하여 2차 공평과세를 실현하려는 것이 연분 9등법이다. 덧붙여 이전까지는 농부의 수지척(손가락 길이)으로 어림잡아 계산하던 제도를 폐지하고 표준자(주척)을 기준으로 한 과학적인 양전척을 사용하도록 했다.

공법은 한마디로 부정부패를 원천봉쇄하는 제도를 마련해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처음엔 원망했던 백성들도 차츰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이렇게 세종이 즉위후부터 30년 가까이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심지어는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전국의 17만명이 참여한 여론조사까지 실시하면서, 미세조정을 거쳐가며 완성한 공법은 이후 조선의 공식 세법이 되었다. 1460년(세조 6년) 편찬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으나 말이다.

성종시대에 들어 “백성들은 세종께서 만든 전분 6등, 연분 9등의 공법을 편리하게 여겼고, 참으로 만세토록 지켜 시행해야할 법”(<성종실록> 1474년 7월24일)이라고 했고, “공법이 완성되자 백성들이 원망했지만 오래 행한 뒤에는 도리어 편하게 여겼다”(<성종실록> 1478년 1월17일)고 했다.

■세종의 업적에서 추가해야 할 공법

1551년(명종 7년) 7월4일 영의정 이기(1476~1552)는 “예전 성종조에 와서는 창고가 다 차고 쌀을 저장할 곳이 없었다”면서 풍성했던 조선왕조의 ‘리즈 시절’을 회상했다.

“<경국대전>에 정해진 공법은 지극히 자세하고 정밀하여…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게 중용을 지켰는데…창고가 다 차고 쌀을 저장할 곳이 없었는데…백관은 물론이고 기술자들의 녹봉과 보수가 차고 넘쳤습니다.”

세종이 그렇게 조세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면서 이룩한 국가의 재정수입으로 조선은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다.

흔히들 세종대왕의 업적을 논할 때 훈민정음 창제를 첫손으로 꼽고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 ‘앙부일구’해시계)·‘자격루’(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의 발명, 신기전 등 각종 화약무기의 개량 개발, 조선의 풍토에 맞는 농서 ‘농사직설’ 편찬, 한성을 기준으로 한 역법 ‘칠정산’의 편찬 등을 열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업적 가운데 국민투표를 방불케하는, 그야말로 왕조시대에 걸맞지 않은 ‘전 백성 여론조사’까지 실시해서 이룩한 조세제도, 즉 공법의 확립을 빼놓는다면 지하의 세종대왕께서 섭섭해하실 것 같다. 왕위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26년간이나 민주적 절차에 의해 절차탁마하며 공들여온 ‘확실한 조세제도’였으니까 말이다.
(이 기사는 오기수의 단행본인 ‘<세종 공법>’(조율·2016년)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또한 소진형의 논문인 ‘세종시대 공법 논쟁에서 나타난 조세개혁과 인정의 관계, 그리고 그 범주 및 의미’(<정치사상연구> 24, 정치사상학회, 2018)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12)

 

 

<주>

 

 

(1)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통하지 않으니…애민군주 세종 독창성·탁월함 갖춘 한글 만들다 | 생글생글 (hankyung.com)

 

 

(2)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권력 유지 위해 한자 고수하는 기득권자에 대응…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훈민정음 만들어 | 생글생글 (hankyung.com)

 

 

(3) https://v.daum.net/v/20230523050003823

 

 

(4)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3280500001

 

 

(5) https://v.daum.net/v/20211115060005772

 

 

(6) '한국 28, 중국 5, 일본 0'..백성 위해 '천기누설'한 세종의 성적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daum.net)2021. 7. 27. 

 

 

(7)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107130500001

 

 

(8) 세종의 숨결'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활자 600점 쏟아졌다. 중앙일보. 2021.06.30.

 

 

 

(9) 구텐베르크와 동년배, 세종은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를 발명했다 [이기환의 Hi-story] (daum.net) 2021. 4. 12. 

 
 

 

(10) 세종은 왜 큰아버지 정종에게 "정통성 없다" 낙인 찍었을까 [이기환의 Hi-story] (daum.net) 2021. 2. 15. 

 

 

(11)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4070600001

 

 

(12)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10080500001

 

 

 

<참고자료>

 
 

 

‘밀어주는’ 세종-‘끌고가는’ 정조 (hani.co.kr)2008-01-14 

 

박현모 교수 글 ‘리더십 비교’

 


세종 “충분한 토론 거쳐 업무 위임”
정조 “국정목표 설정 뒤 동참 설득”

 

세종과 정조는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君師)’로 칭송받고 있다. 군사란 임금이 곧 스승이란 의미다. 마침 이들을 다룬 사극이 방송 전파를 타고 있다. 드라마 제작에 발맞춰 두 군주의 삶과 정치를 다룬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세종과 정조, 이들이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의 닮은 꼴과 다른 꼴은 무엇일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는 동양철학 비평·리뷰지인 <오늘의 동양사상> 제17호에 투고한 글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 스타일 비교>에서 이 문제를 검토했다. 박 교수는 둘의 리더십 차이를 결론적으로 이렇게 규정했다. “세종이 ‘뒤에서 미는’ 방식의 지도력을 발휘했다면, 정조는 ‘앞에서 끄는’ 방식의 지도자였다.” 즉 세종은 충분한 찬반토론을 거쳐 정책의 장단점을 드러나게 한 다음, 그 일을 주관할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긴 반면, 정조는 국정의 목표를 설정해 놓고 신하들에게 그 길에 동참하도록 설득하거나 위협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회의를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고 지은이는 밝혔다. 세종은 “어전회의를 국가 운영의 핵심적 과정으로 부각시키”려고 했다. 태조와 태종 때 23회와 80회에 불과했던 어전회의인 경연을 세종은 무려 1898회 열었다는 것이다. 세종은 경연에서 말끝마다 “경들의 의견을 말해 보라”고 하여 신료들의 토론 참여를 적극 유도했다고 박 교수는 적었다. 세종의 회의 활성화 전략에는 ‘자신의 약점 드러내기’도 포함된다. 그는 계속되는 가뭄에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마음이 아프고 낯이 없어서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반면 정조는 자신이 직접 나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개혁한다는 혐의’를 두려워 하는 개혁 반대론자들에게 “현상 유지의 폐해가 훨씬 심각하다”면서 개혁의 정당성을 강하게 피력했다는 것이다. 송나라때 개혁을 시도했던 왕안석과 같은 인물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도 정조의 개혁 전략 가운데 하나였다고 박 교수는 지적했다. “정조는 경연에서 왕안석을 재평가함으로써 개혁 부정론과 소극적 국왕론을 동시에 극복하려고 했다. 재위 15년의 ‘중용강의’가 그 예다.” 중용 강의에서 좌의정 채제공이 “한 자의 글을 읽는 것보다 한 치의 실천이 낫다”고 하자 정조는 이에 공감하며 “용의 고기가 어떻다고 하는 것보다는 돼지고기라도 먹는 것이 낫다”고 했다는 것이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까닭을 실천이 아니라 앎의 문제로 보는 당시 보수적 노론 신하들의 견해를 경연에서 정면 반박한 것이다.

말투와 성격도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이라고 했다. 정조의 말 첫머리에는 “그렇지 않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경들이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고 했다. 반면 세종은 “일단 긍정하면서 대화를 시작하는 스타일”이다. 예컨대 “네 말이 아름답다” “경들이 말을 합하여 간하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고 말한 뒤 “그러나 말을 따를 수는 없다”고 하는 식이다.

“세종이 ‘정치적 리더십’에서 뛰어났다면 정조는 ‘지적 리더십’에서 역사에 기여했다.” 박 교수는 세종 시대 배출된 100여 명의 집현전 학사가 조선 전기의 기틀을 닦은 정치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이나 박지원과 같은 걸출한 학자로 성장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정조의 ‘가르치기 좋아하는’ 회의 방식이 정약용 박제가 등의 왕성한 학문적 결실로 이어진 점을 긍정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평가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국정원내 세종대왕 초장지 조선왕릉 첫 발굴 (hani.co.kr)200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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