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조선 (4) 1506년 중종반정, 11대 중종(1506년∼1544년),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 본문
1. 조선 (4) 1506년 중종반정, 11대 중종(1506년∼1544년),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
대야발 2021. 7. 5. 17:33
연산군의 폭정에 한계를 느꼈던 인사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면서 왕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1506년 9월2일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을 축출하고, 그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조선시대 왕을 탄핵한 첫 사건이었다. 연산군은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된 후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혔고, 두 달 만인 1506년 11월 역질(疫疾)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 [신병주의 역사저널] 연산군이 탄핵된 까닭은
2024. 12. 23. 23:47
흥청망청 어원 만들어낸 연산군의 사치·향락
“풀 한 포기도 모두 내 것” 독재·폭정 정당화
조선시대에도 왕이 쫓겨나는 상황이 두 차례 벌어졌다. 1506년의 중종반정과 1623년의 인조반정이 그것으로, 연산군과 광해군은 조선시대판 탄핵당한 왕이 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은 연산군(燕山君:1476~1506, 재위 1494~1506)의 독재정치가 극에 달한 시점에서 이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재위 기간 내내 폭정을 일삼던 연산군의 독재정치는 점차 위험 수위에 달하고 있었다. 궁궐의 관리들에게 ‘신언패(愼言牌)’라는 패를 차고 다니게 하였다. 신언패에 새긴 내용은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간직하면 몸이 편안하여 어디서나 안전하리라”라는 섬뜩한 문구를 적게 하였다. 한마디로 보고 들은 것을 입으로 전하면 죽는다는 경고였다. “우리 임금은 신하를 파리 죽이듯 하고 여색에 절도라고는 없다”라는 한글 익명서가 올라오자, 한글을 폐지하고 한글로 간행된 서적을 불태울 것을 지시했다.
1506년에는 조정의 관리들에게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의 앞쪽엔 충(忠)자, 뒤쪽엔 성(誠)자를 새기게 하여 자신에 대해 충성 다짐을 하게 하였다. 한 해의 세금도 버거워하던 백성들에게 2, 3년치 세금을 미리 받는가 하면 각종 명목의 세금을 부과해 백성의 부담을 크게 했다. 자신의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근 민가를 철거시키기도 했다. 국정은 제쳐 놓고 전국에서 뽑은 기생인 흥청들과 함께 경복궁 경회루 등에서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이를 한탄한 백성들은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로 조롱했고, 이 말은 지금에도 유행하고 있다.
연산군의 폭정에는 흥청 출신으로 후궁의 지위에까지 오른 장녹수(張綠水)의 국정농단도 한몫을 하였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왕이 비록 몹시 노했더라도 장녹수만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웃었으므로,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일이 모두 그의 입에 달렸다”거나,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폭한 짓이 많았다”는 기록은 연산군의 총애 속에 장녹수가 막강한 권력을 가졌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산군은 폐위되기 직전까지 “조선은 왕의 나라다. 조선의 백성 모두가 왕의 신하요, 조선 땅의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큼 독재와 폭정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자주 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에 한계를 느꼈던 인사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면서 왕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1506년 9월2일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을 축출하고, 그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조선시대 왕을 탄핵한 첫 사건이었다. 연산군은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된 후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혔고, 두 달 만인 1506년 11월 역질(疫疾)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1623년에는 광해군을 폐위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조선에서는 두 차례 왕을 탄핵하는 역사를 만들어 갔다.(1)
■ 결과에만 집착 말라…최악의 ‘수’가 나온다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보는 경영’]
2025. 3. 24. 13:18

조광조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친구들은 조광조를 ‘광인(狂人)’ 또는 ‘화태(禍胎·화를 잉태한 사람)’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이 너무 뚜렷하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일은 다른 사람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주장했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처음 벼슬은 사간원 정언이었는데 사간원에 들어간 바로 다음 날 사간원과 사헌부의 모든 관리를 파직하라는 상소를 왕에게 올렸다. 입사한 바로 다음 날 신입사원이 자기 부서와 옆의 부서 선배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사장에게 건의한 셈이다.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런 파격적인 조광조의 상소는 그가 벼슬을 했던 4년간 계속 이어진다. 당시 조선 왕실이 도교 사상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소격서(昭格署)를 없앨 것을 요구했다. 중종은 “세종과 성종 같은 역대 왕도 깊이 생각한 후 남겨놨던 전통인데 갑자기 소격서를 혁파할 수 없다”고 했지만 조광조가 밤낮으로 농성하여 결국 소격서는 혁파된다. 소격서를 폐지할 것인지 아닌지를 가지고 국정을 중단시킬 정도의 분란을 일으킨 것이 과연 조선 정부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조광조는 1515년 정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벼슬을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인 1518년 종2품인 사헌부 대사헌으로 승진한다. 3년 만에 품계가 7계단 승진한 셈이니 중종의 애정이 대단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던 중 조광조가 자신에게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소를 올렸는데 바로 연산군을 내치고 중종을 국왕으로 추대하여 공신이 된 사람 중 실제로 역할도 하지 않고 나중에 은근슬쩍 공신으로 이름만 올린 사람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로부터 공신의 지위를 박탈하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 건의다. 공신 숫자가 117명인데 조광조는 그중 76명이 거짓된 공신이므로 지위를 박탈하자고 해서 결국 이를 관철시켰다. 전체 공신의 65%를 박탈한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연이어 관철시키면서 초고속 승진을 했던 조광조는 갑자기 중종의 미움을 받아 바로 사약을 받고 죽게 된다. 조광조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었다.
여기서 내가 분석하고자 하는 사람은 조광조가 아니고 조광조를 중용했던 국왕 중종이다. 친구들이 보기에도 정상적이지 않았던 조광조를 어떤 이유에서 중종은 그리도 사랑하고 아꼈던 것인가? 그러다 4년 동안 곁에 두고 아끼던 조광조를 하루아침에 죽인 이유는 무엇인가?
중종도 어리석은 국왕은 아니었을 테니 아마도 조광조의 성격이 특이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바로 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오히려 그런 조광조의 특이한 성품을 이용하고 싶었을지도. 왜냐하면 중종이 내쫓은 전임자인 연산군이 바로 부하의 충언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정책을 정했던 왕이었기 때문이다. 충성스러운 마음에 연산군을 생각해 반대 의견을 냈던 신하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심지어 세종대왕부터 7명의 임금을 보필한 환관 김처선이 연산군의 음탕한 행동을 참지 못하고 “이 늙은 신하인 제가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모두 읽었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다”라고 충언을 하자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와 다리를 절단하여 죽였다고 한다.
이런 연산군의 후임자인 중종은 자신은 연산군과는 완전히 다른 국왕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연산군은 저토록 조심스러운 간언도 받아들이지 않고 제멋대로 살다 결국 왕위에서 쫓겨났지만, 중종 자신은 정반대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간언만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광인 또는 화태라고 부르는 동서 구분도 못하는 젊은 관료 조광조의 실로 어처구니없는 간언도 모두 받아들인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 조선의 모든 사람이 조광조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저런 위아래 구분도 못하는 철없는 조광조와 매일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는 중종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래서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중종이 성군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하지만 중종은 성군이 아니면서 성군인 척을 했던 국왕이었기에 4년이 한계였을 테다.
조선 국왕 중 중종과 같은 맥락의 실수를 저지른 국왕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굴복해 삼전도의 치욕을 겪었던 인조다. 인조 또한 전임자인 광해군이 반정에 의해 쫓겨난 실패한 국왕이었다. 그리고 광해군이 쫓겨난 중요한 이유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와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를 내걸고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로서는 다시는 청나라와 같은 편에 서서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었다. 인조로서는 큰 딜레마였다. 분명 청나라와 충돌하면 청에 의해 조선이 망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청나라에 신하의 예를 하면 다시 반정이 일어나 자신도 광해군과 같이 쫓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조는 뻔히 끝이 보이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감수했고 그 결과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며 조선이 그 자리에서 망할 뻔했다.
경제학에서 최근 주목을 받는 새로운 분야가 바로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이다. 행동경제학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설명하는 이론 중의 하나가 바로 ‘결과 편향(outcome bias)’이다. 경제학에서는 모든 일이 인간의 노력과 신의 장난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을 한다. 인간이 아무리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리더라도 신이 장난을 쳐서 결과를 망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완전히 잘못된 결정을 내렸지만 신이 반대로 장난을 쳐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영국 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휴가를 가면서 실험하던 물질의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고 가는 큰 실수를 했는데 신이 장난을 치는 바람에 푸른 곰팡이가 실험 물질에 퍼지면서 페니실린을 발명했던 것이 좋은 사례다.
플레밍이 실험 물질 관리를 잘못해서 페니실린이라는 위대한 발명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세계의 모든 과학자가 휴가를 떠날 때 실험 물질이 오염되도록 방치하고 떠난다면 그것이 옳은 행동일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플레밍 박사는 휴가를 떠날 때 큰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행동을 따르면 안 된다. 물론 신의 장난으로 실수가 성공으로 변했지만 신의 장난을 기대하고 일부러 실수를 한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행동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모두 잘못한 것은 아닐 수 있다. 연산군은 왕권을 위협하는 신하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국익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고려 광종이나 명나라 주원장이 그런 행동으로 힘 있는 신하를 탄압하고 국가 기강을 확립했다. 또 광해군의 친청 정책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올바른 외교 정책이었다. 광해군이 내정에 실패했던 것일 뿐, 그의 외교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앞사람이 실패하면 무조건 정책을 바꾸고 앞사람이 성공하면 무조건 따라하는 결과 편향적 의사결정은 너무도 인간의 본성을 유혹하고 부합하지만, 전임자의 성공과 실패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시 원점에서 냉철하게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2)
그럴려면 선대인 9대 성종(재위기간 1469~1494) 치세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하고, 10대 연산군(1494~1506)과 그가 폭정 끝에 쫓겨난 반정 이후의 11대 중종조(1506~1544) 연간까지 살펴야 한다. 그 기간에 3번의 사화가 일어났고 첫 반정이 감행됐다.
“조선시대를 임진난을 중심으로 전·후기로 나눌 경우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진통 끝에 국왕-대신-삼사의 정립구도가 자리잡은 건국 1백여년 뒤의 이 3대 75년간의 치세가 조선후기까지 관통하는 제도의 토대를 놓은 시기다.”
■ “사화는 선비 대립 아닌 삼사 둘러싼 권력투쟁”
인터뷰 / ‘사화와 반정의 시대’ 펴낸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언론감찰 세 기관으로 구성된 ‘삼사’
국왕·대신과의 정치적 견제구도 형성이를 깨려는 시도들이 피바람 일으켜 “단순히 사림-훈구 갈등으로 봐선 안돼”
사극의 단골 메뉴로 곧잘 등장하는 조선시대 사화(士禍)는 흔히 폭군 연산의 출생비밀과 패륜이 오버랩되는 궁중 치정·암투극, 또는 고루한 훈구파와 개혁적 사림파간 싸움 쯤으로 상투화돼 있다. 김범(37)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자신의 첫 책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에서 그리는 사화는 그런 모습과는 좀 다르다.
예컨대 첫 사화인 무오사화를 폭군의 패륜으론 설명할 수 없다. “연산군은 그때까지만 해도 광포한 폭군적 면모를 보이지 않았고 방법상으로도 나름의 정합성을 갖고 있었다. 무오사화의 진정한 의도는 김종직 일파를 처벌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삼사(3司)의 언론활동을 경고하려는 데 있었다고 판단된다.”
고작 ‘삼사의 언론활동’을 규제하려고 그런 피바람을 일으켰단 말인가? ‘고작’이 아니다. 이 삼사의 언론활동 규제를 둘러싼 권력투쟁이야말로 조선시대 500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키워드의 하나라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의 핵심적 주제가 바로 “삼사라는 중요한 관서가 그 기능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과 결과를 살피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다.
그럴려면 선대인 9대 성종(재위기간 1469~1494) 치세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하고, 10대 연산군(1494~1506)과 그가 폭정 끝에 쫓겨난 반정 이후의 11대 중종조(1506~1544) 연간까지 살펴야 한다. 그 기간에 3번의 사화가 일어났고 첫 반정이 감행됐다.
“조선시대를 임진난을 중심으로 전·후기로 나눌 경우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진통 끝에 국왕-대신-삼사의 정립구도가 자리잡은 건국 1백여년 뒤의 이 3대 75년간의 치세가 조선후기까지 관통하는 제도의 토대를 놓은 시기다.”
김씨는 바로 이 제도에 천착하는 제도사적 접근자세를 취한다. “제도의 골격을 일단 파악하고 나면 현실의 수많은 복잡한 모습들은 한결 체계있게 정리될 수 있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19살 때 요절한 의경세자의 둘째 자산군. 세조비 정희왕후가 형 월산군을 제치고 13살 나이의 그를 보위에 앉힌 뒤 수렴청정을 했다. 장인 한명회로 상징되듯 그 시절은 세조대에 양산된 수많은 훈구공신들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승정원(국왕 비서실)의 재상’들을 가리키는 ‘원상’ 지배체제이기도 했다.
성종이 수렴청정과 원상제를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한 것은 재위 7년(1476)부터였고, 그 이후 그는 훈구대신들의 전횡을 꺾기 위한 장치로 대간, 곧 신하들을 감찰하는 사헌부와 국왕에 대한 간언과 잘잘못을 논박하는 사간원을 키웠다. 대간은 훈구세력을 밀어내고 성종시대를 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곧 비대해진 대간이 왕권을 제약하자 성종은 원래 학문을 담당한 홍문관의 언론기능을 강화해 대간들을 견제토록 했다.
삼사란 바로 대간에 홍문관이 가세한 언론·감찰기관이다. “조선은 절대왕정체제이긴 하나 왕이 마음대로 전횡할 수 있는 전제체제는 아니었다. 신권이 강했다. 삼사는 왕권과 신권에 대한 중요한 견제장치였는데, 중국엔 삼사가 약했다. 조선에서 환관의 발호가 거의 없었던 것은 삼사 덕이다. 삼사가 약했던 중국에선 환관의 힘이 셌다.”
삼사가 겨냥하는 주표적은 대신들. 대신은 최고관서로 영의정 등이 포진한 의정부와 이·호·예·병·형·공의 판서와 참판들이 포진한 육조(6曹), 즉 집행기관 고관들을 가리킨다. 성종은 대신과 삼사를 상호견제케 했고 삼사가 비대해지자 홍문관을 강화해 내부견제토록 했다. 이는 국왕-대신-삼사라는 조선조 특유의 정치정립구도의 토대가 됐으나 항상 제대로 작동한 건 아니었다. 말년에 성종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19살 나이에 왕이 된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삼사의 약진에 눌려 있던 대신들과 공모해 삼사를 친 게 무오사화였다. 훨씬 더 처참했던 갑자사화는 무오사화 이후 강화된 왕권을 자의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한 연산군에게 대신과 삼사가 합세해 견제에 나서자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 못한 채 자제력을 잃은 연산군이 훈구, 사림 구분없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 결과다.
결국 조야 모두로부터 원한을 산 연산군은 재위 12년만에 쫓겨나는데 그게 중종반정이다. 중종 14년(1519)에 조광조 등을 숙청한 기묘사화 역시 반정공신들이 주축이 된 대신의 전횡을 삼사 강화로 견제했다가 그 삼사가 왕권마저 위태롭게 한다고 느낀 중종이 이번엔 대신들과 짜고 삼사를 친 사건이라는 게 김범씨가 내린 결론이다.
“사화를 출신배경이 다른 훈구파-사람파 단순 선악대립구도의 이분법으로 봐서는 안 된다. 조선사회는 혈통과 가문 등이 공고하게 짜여진, 상상을 초월하는 인맥사회였다. 사림파 거두로 알려진 조광조나 김종직도 명문거족 출신이었고 훈구파 거두 양성지와 후손들은 사림파로 분류될 수도 있다. 훈구와 사림은 서로 얽혀 있었다.”
김씨는 국사편찬위에서 <승정원 일기>(실록보다 몇배나 더 방대한 기록이나 임진란 때 불타 인조 이후 기록만 남았다) 디지털화 작업을 하면서 지난해 타계한 미국의 한국학 연구분야 거두 제임스 팔레의 반계 유형원론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있다. 해외 한국연구는 내부시각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수준높은 일급의 연구들에 대해서는 시각이 다르더라도 “감정적 대응보다는 공부에는 공부로 대응하는 실체적 접근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때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 사화란= 사화(士禍)는 말 그대로 선비(사대부)들이 입은 참화다. 조선시대 4대 사화라면 연산군 4년(1498년) 때의 무오사화, 10년 때의 갑자사화, 중종조의 기묘사화, 13대 명종(재위 1545~1567)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를 가리킨다.
무오사화는 사림(‘사대부의 숲’이라는 뜻)파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춘추관 사관으로 있을 때 훈구대신 이극돈 등의 비행을 사초에 넣고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삽입한 게 발단이 됐다. 김종직 일파와 대립했던 이극돈, 유자광 등이 <성종실록> 편찬 때 조의제문이 단종한테서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며 연산군에 고하고 처벌을 부추겼다.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한 연산군의 무차별 보복극,
기묘사화는 유교적 도덕정치를 지향한 조광조 등이 남발된 훈구대신들의 공훈 삭제를 감행한 데 대한 대신과 국왕의 반격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을사사화는 대윤, 소윤으로 갈라진 문정왕후 외척간의 권력투쟁이었다. 수십, 수백명에 이르는 피화자들은 다수가 사사, 주살 등의 형태로 사형당하거나 고문당하고 유배됐으며, 무덤에서 주검을 꺼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도 드물지 않았고 가족, 친척, 친구, 제자들도 연루돼 맞아죽거나 노비가 되고, 유배당하는 참혹한 화를 당했다.
반정(反正)은 정통이나 정도를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다. 조선시대에 두 번의 반정이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과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을 쫓아낸 16대 인조(1623~1649)반정이다.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비사건을 구실로 삼은 인조반정은 나름대로 치적을 쌓은 광해군의 치세와도 관련해 명분없는 궁정쿠데타였다는 지적이 많다.(3)
(2) https://v.daum.net/v/20250324131800889
(3) “사화는 선비 대립 아닌 삼사 둘러싼 권력투쟁” (hani.co.kr)2007-12-28
<참고자료>
https://v.daum.net/v/20220612114501678
선비정신 재조명 소설 잇따라 | 서울신문 (seoul.co.kr)2007-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