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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조선(1) - 조선 전기 본문

남국/조선

조선(1) - 조선 전기

대야발 2021. 6. 4. 13:35

 

 

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조선(朝鮮, Chosun 또는 Joseon, 중세 한국어: 됴ᇢ션·귁)은 한반도에 있던 옛 국가이다.[1] 1392년 이성계가 건국하여[2]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대한제국이 세워질 때까지[3] 존속하였다. 수도는 지금의 서울특별시인 한양이었고[4]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 및 연해주와 국경이 있었다.[5]

조선의 정치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6] 사대부를 근간으로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서 운영되었다.[7] 조선의 국왕은 이론적으로 전제군주의 지위를 지녔으며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양반 관료와 타협하여 정치를 운영하였다.[8] 양반 관료는 초기에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갈등을 보였으나[9] 중기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였고 이후 여러 정파로 나뉘어 경쟁하는 붕당 정치를 형성하였다.[10]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사색당파로 굳어지던 붕당 정치는 성리학의 학풍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 예송논쟁[11]이나 호락논쟁[12]과 같은 주제가 정치의 첨예한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가 등장하면서 붕당 정치 체제는 쇠락하였다.[13]

조선의 군사는 초기 오위 체계로 편성되어 있다가 이후 지역 거점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구축한 진관제와 이를 보완하는 제승방략을 핵심으로 하였다.[14] 이러한 전략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급작스런 외침에 맞서기 어렵다는 점이 부각되어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오군영의 중앙군을 두고[15] 각도에 속오군을 두어 지방을 방어하는 형태로 변화되었고[16],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비변사가 상설화 되면서 의정부를 제치고 실질적인 정치 의결 기구로 변화하였다.[17] 조선군의 병력은 초기 부터 병역을 지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번을 서는 형태로 정착되었으나 양반들의 병역 기피가 극심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양인들도 되도록 군포를 대납하고 병역을 대신하고자 하는 풍조가 일어 조선 후기 이후 실제 병역에 복무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양민이나 천인들이 많아 속오군은 천예군이라고 멸시 받을 지경이었다.[18] 이는 조선 말 여러 위기에서 제대로 된 군사적 대응을 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이었던 양반은 지역에 할거하며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서 농업을 우선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조선의 경제는 화폐보다 현물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고 상당수의 교환이 상호간의 호의에 의해 선물을 주고받는 호혜경제의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국가의 조세 수취와 분배, 상품의 교환 등이 혼재하는 모습을 보였다.[19]:175-192 조선 전기 및 중기의 상업은 금난전권이 주어진 독점적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고[20] 보다 자유로운 상업활동은 금난전권이 폐지된 신해통공 이후에 이루어졌다.[21] 화폐의 원활한 보급은 조선 후기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구리를 수입한 뒤에야 가능하였다.[22] 후기에 들어 민간이 운영하는 수공업이 발달하여[23] 오늘날에도 지역 명산물로 꼽히는 한산모시[24]전주시의 부채[25]와 같은 물품들이 등장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인 상업망이 발전하면서 이익을 목적으로한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고[26] 조선 후기 등장한 오일장과 같은 정규 시장은 오늘날에도 전통 시장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27]

조선의 주요 운송 수단은 강과 바다를 이용한 수운이었다. 주요 교통 요지에 조창을 세워 세곡을 보관하였고 조운선을 통하여 한양까지 운반하였다.[28] 육지의 교통로는 역참을 두어 국가의 주요 연락망으로 삼았고[29] 전국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9 - 10 개의 도로를 운영하였다.[30]

조선의 공식적 신분제는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였으나[31], 실제로는 양반중인상민천민 등으로 세분화 되어 있었다.[32]

조선의 문화는 여러 이웃 문화의 수용과 독창적인 발전이 교차되며 형성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전통 문화로 손꼽히는 한옥한복한식 등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완성된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조선은 5백여 년 동안 이어진 국가로 그 사이 세계의 역사는 근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조선 역시 이 기간 동안 안팎의 변화를 겪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부분에서 시기별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시기를 전기와 후기 또는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33] 시기에 대한 구분은 아직 학계 전반에서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는 않으나 대략적으로 건국 및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15세기 - 16세기 초반 까지를 초기로 보고, 사림의 등장과 붕당 정치가 형성된 16세기 중반 - 17세기를 중기로 보며, 18세기 초 - 19세기의 시점을 후기로 본다.[34]

건국과 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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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와 갈등을 빚던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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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 말엽, 원나라의 세력 약화와 명나라의 건국으로 국제 정치 지형은 크게 변화하였다. 국내에서는 새롭게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가 성리학에 입각한 국가 운영을 주장하고 있었다. 신진사대부는 정몽주와 같이 고려의 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려는 온건파와 정도전과 같이 역성혁명을 불사하고자 하는 급진파가 대립하였다. 이들은 요동반도에 대한 진출을 놓고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놓고 갈등을 빚었고 요동의 정벌을 위해 출진하였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실권을 장악하였다.[35]

고조선을 근거로한 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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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를 중심으로 권력을 잡은 신진사대부 급진파는 처음에는 국왕을 하고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였으나, 결국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가 국왕으로 즉위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원래는 국호를 변경하지 않고 계속 고려로 하려 했지만, 나중에는 고려라는 이름을 버리고, 명과의 관계 속에서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였다. 국호의 결정은 고조선을 근거로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에서 유래한 화령(和寧)을 후보로 세우고 명나라에서 결정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국호가 조선으로 결정된 것은 기자조선의 사례를 들어 조선을 중국의 번국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명나라와 단군조선 이래의 독자성을 의식한 신진사대부의 의지가 절충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국왕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는 형태로 재위하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세습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조선의 국가 제도 역시 독자적인 국풍을 유지하였다.[36]

건국 초기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명나라의 홍무제가 조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고 내부에서는 왕자의 난과 같은 분열과 두문불출과 같은 일부 사대부의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을 다독여야 하였다. 조선은 외교에서는 명과의 사대를 강화하고 내부에서는 왕권의 확립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였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영락제의 즉위 이후 사대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대외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민본 사상과 천명을 앞세워 새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강화하였다.[37]

조선의 국서와 외교문서는 국명을 조선국(朝鮮國)으로 표기하였다.[38] 대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명칭은 1876년 부산항 조계 조약 체결 이후 사용되었다.[39] 한편 이씨 조선(李氏朝鮮), 또는 이조(李鮮)라는 표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사 정리 사업으로 형성된 것이다. 한국은 해방 이후에도 이 용어를 별다른 비판없이 사용하다가 1970년대 후반에 들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40]

국체 및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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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전제군주적인 국왕이 주권을 행사하는 왕국이었지만 실제 운영은 성리학적 이념에 따른 관료제로 이루어졌다.[41] 건국 초기에는 많은 부분에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였으나 점차 새로운 국가 제도를 정비하였고 《경국대전》을 통하여 이를 명문화하였다.[42] 성리학은 유학의 한 갈래로 송나라 시기 형성되어 한국에 전해졌다. 성립 시기 성리학은 양명학훈고학 등의 다른 유학 갈래들과 경쟁하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성리학만을 참된 학문으로 인정하고 유학의 다른 유파들은 배격하였다.[43]

성리학이 독점하는 국가 이념의 수립은 이후 조선 내의 성리학 발달과 함께 사림파가 형성되는 이념적 배경이 되었다.[44] 조선의 정치는 성리학 학파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었고 학파의 수장으로서 자리잡은 유학자는 비록 현직 관료로 있지 않더라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45] 조선 후기에 들어 실학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이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생각하였으나 그들 역시 성리학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46] 한편 성리학의 틀을 벗어나는 서학이나 동학과 같은 움직임은 사문난적으로 배격되었다.[47][48]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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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5백여 년 동안 이어진 국가로 그 사이 세계의 역사는 근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조선 역시 이 기간 동안 안팍의 변화를 겪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부분에서 시기별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시기를 전기와 후기 또는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33] 시기에 대한 구분은 아직 학계 전반에서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는 않으나 대략적으로 건국 및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15세기 - 16세기 초반 까지를 초기로 보고, 사림의 등장과 붕당 정치가 형성된 16세기 중반 - 17세기를 중기로 보며, 18세기 초 - 19세기의 시점을 후기로 본다. 이러한 변화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기점으로 조선의 시기를 전후 양분하였던 기존의 구분이 지나치게 외적 요인에 의존적이라는 비판에 따른 것이다. 이에 반해 초중후의 삼분 방법은 사림의 등장 등 내적 변화를 주요 원인으로 삼고 있다.[34]

조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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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 초기입니다.

세종어제 훈민정음

조선 초기는 정치적으로는 이성계의 건국에서 《경국대전》의 완성과 사림의 등장에 따른 각종 사화가 있었던 시기로 생각할 수 있다.

이성계의 건국은 성리학적 이상에 따른 정치 실현이라는 신진사대부의 요구와 함께 원나라가 북원으로 물러나고 명나라가 수립되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한 국내 세력의 갈등이 함께 맞물려 일어난 사건이다. 원나라 간섭기가 길어지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왕족과 권문세가 역시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북원과 명에 대해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공민왕이 시해된 후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고, 고려는 고토회복을 명분으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과의 전쟁을 시도하였다.[49] 명나라가 명실상부한 중국의 패자라는 인식 아래 급진적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은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이후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35]

조선의 건국 초기 새로운 왕조의 정치 질서를 두고 많은 갈등이 벌어졌다. 왕자의 난은 재상정치를 구현하려한 정도전 등과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을 주장한 이방원의 갈등이 원인으로 결국 이방원이 즉위하여 국왕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게 되었다.[19]:19-20 왕권과 신권의 갈등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세조 찬위 역시 이러한 갈등이 배경이 되었다.[50]

한편, 조선 초기는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시기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한편[51] 전국을 조사하여 《세종실록지리지》를 작성하는 등[52] 여러 개혁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이 시기 사군과 육진이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어 조선의 영토는 오늘날 한반도의 지리적 경계와 유사하게 되었다.[53] 조선의 국가 운영을 위한 법전인 《경국대전》은 세조 시기 준비되어 성종 즉위 초 반포되었다. 이후 조선은 《속대전》과 《대전회통》 등의 보완 체제를 추가하였으나 갑오경장에 이르러 폐지될 때까지 《경국대전》을 공식적인 법제로서 유지하였다.[54]

조선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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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 전투를 묘사한 동래부순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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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의 정비가 일단락 된 성종 시기 조선의 국왕은 안정된 정국의 운영과 함께 강력한 왕권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연산군의 폭정은 절제되지 않는 전제군주의 왕권에 대한 반감을 가져왔고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었다.[55] 이후 사림파는 재야의 학연을 바탕으로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학파와 정치의 연계는 후일 붕당 형성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56]

중종반정 이후 정치를 주도한 사림파는 조광조의 과감한 개혁이 좌절된 후 몇 차례의 사화를 겪으며 부침이 반복되었으나 결국 조선의 정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림의 정치주도는 반대적으로 왕권의 제약을 의미하였고 조정의 공식적인 회의인 윤대에서 군약신강(君弱臣强)이란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였다.[57] 그러나 조선의 국왕은 이론적으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절대군주였기 때문에 스스로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의 지지를 받고자 하였다. 함부로 권력을 휘둘렀을 경우 언제든 반정이 일어나 폐위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림파가 정치를 주도하게 된 후 사림 내에서는 학파와 인맥에 따라 붕당이 형성되었다. 먼저 동인과 서인의 분열이 있었고, 다시 북인남인노론소론의 사색정파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정치적 사안의 결과에 따라 정국을 주도하기도 하고 밀려나기도 하는 경쟁적 관계였다.[56]

조선 중기의 가장 큰 사건들 가운데 임진왜란과 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의 전쟁이 있다. 조선은 전대인 고려 시기와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국제 관계가 지속되는 시기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국경의 자잘한 충돌이나 초기의 왜구 침입과 같은 소요가 아닌 큰 전쟁은 드물었다. 임진왜란은 비교적 평온하였던 조선 사회를 크게 뒤흔든 전쟁으로 이후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58] 임진왜란 이후 국제 정세 변동기에서 조선의 정치는 다시 왕권과 신권이 갈등하여 광해군이 폐위되는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다.[59]

후금이 무너진 명나라를 대신하여 중국을 통치하게 된 청나라의 건국 역시 조선에 큰 영향을 주었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쟁 이전에 후방인 조선을 억누르고자 정묘호란을 일으켰고 이후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뒤 일어난 병자호란에서 조선은 정축하성으로 청에 굴복하게 되었다.[60]

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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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 후기입니다.
강원도 정선군의 한 마을에 어떤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그 양반은 성품이 어질고 글 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 그러나 그 양반은 워낙 집이 가난해서 해마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양곡을 꾸어다 먹었는데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관가에서 빌려 먹은 양곡이 1000석이 다 되었다.《양반전[61]

후기에 들어 조선은 많은 변화를 맞았다. 전후 복구를 위해 발행되기 시작한 공명첩 등은 신분제의 구분을 흐리게 하였고[62] 조선 후기 지방의 양반 상당수는 가세가 기울어 일반 백성과 다를 바 없는 몰락 양반으로 잔반(殘班)이라 불렸다.[63] 한편 상평통보가 본격적으로 유통되면서 상업 활동과 각종 산업이 발전하였고 비교적 재력있는 양인들이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꾀하여 17세기 후반 지역에 따라 10 ~ 20 %의 비율을 보이던 양반의 인구 구성비는 19세기 초에 이르면 30 ~ 80 %까지 크게 증가한다.[64] 양반은 각종 부역과 군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재력 있는 양인은 어떻게든 양반으로 등록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신분제 혼란 중에는 노비 출신 후손이 면천과 공명첩을 통해 양반으로 등록된 경우도 있다.[65]

예송 논쟁은 국왕에게도 사대부의 가례(家禮)를 강제하여 국왕 역시 성리학적 예법에 종속된 존재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신료들에 의한 관료제가 공고하게 굳어졌다.[66] 숙종 시기 붕당은 전형적인 정치 활동의 형태로 굳었다. 숙종은 각 정파와 때로 협력하고 때로는 견제하며 정치를 운영하여야 하였다. 숙종은 환국을 통해 자신이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주도권을 갖고자 하였다.[67] 장희빈의 등장과 죽음은 이러한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68] 숙종 즉위 시기 조선의 붕당은 점차 노론이 정치 운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태로 변화하여 갔고 이들의 영향력은 경종 시기 경종의 아우였던 연잉군을 전례에 없던 왕세제로 봉하게 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정조 시기 축성된 수원 화성

노론의 지지로 즉위한 영조는 지나치게 막강해진 노론을 견제하고자 탕평책을 제시하였다.[69] 후임인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왕세손으로서 즉위하였고 정국은 벽파와 시파로 나뉘어 있었다. 정조는 왕권이 보다 강화된 형태의 탕평책인 준론 탕평 정책을 실시하여 기존의 붕당 정치는 이에 따라 재편되었다.[70] 한편 노론 내부에서는 청나라와의 관계와 지방 양반의 지위 등이 배경이 된 호락논쟁이 일어나 또 다른 갈등 요소로 작용하였다.[71]

19세기 세도정치가 들어서며 붕당 정치는 종결되었다. 세도정치는 정조가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하였으나 정치권력이 혈연을 통한 특정 가문에 집중되면서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72] 세도정치 가문으로는 안동 김씨[73]풍양 조씨 등이 있다.[74] 60여년 간 지속된 세도정치 시기 조선은 안팍으로 많은 문제에 봉착하여 있었고 고종이 즉위하여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은 뒤 혁파되었다.[75]

조선 후기는 한편으로 여러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이양선이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조선에 까지 미치기 시작하였고[76] 대내적으로는 전지구적인 소빙기의 영향으로 경신대기근이나 을병대기근과 같은 기근을 겪었다.[77] 여기에 조선의 제도에 따른 모순인 삼정의 문란이 더해지면서 임술농민봉기와 같은 민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78]

조선의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실학의 연구, 서학의 수용, 동학의 수립 등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해법을 찾지 못하다가 동학 농민 혁명으로 표출되었으나 외세가 개입된 진압으로 실패하였다.[79] 외부적인 문제인 서양의 접근에 대해서도 척화비를 세우며 강경하게 거부한 흥선대원군의 척화론과 새로운 문물의 수용을 주장한 개화파의 갈등은 자주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통해 강압적으로 전개되면서 이후 위정척사파의 등장과 외세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가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80]

안팍의 어려움이 쌓인 가운데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조선의 역사는 대한제국으로 승계되었다.[3]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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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의 정치입니다.

조선의 정치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 운영되었다.[81] 조선 국왕은 이론적으로 전제 군주였으며 왕권과 신료의 권한이 긴장과 타협 속에서 조정되어 국정에 반영되었다.[82] 조선의 정치 체계와 구조는 《경국대전》으로 집대성되어 관료 체제가 규정되었고[42] 다양한 층위의 논쟁과 갈등 속에 이를 실제적으로 적용하였다. 조선 전기의 주요 갈등은 국왕과 신료들 사이의 권력 형성을 두고 일어났고 중기 이후 사림파의 등장은 붕당 정치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후기의 호락논쟁과 같이 성리학의 이해에 대한 학문적 차이에서부터 붕당의 인맥과 실제 정치적 쟁점이 뒤섞인 독특한 정치 지형을 만들어내었다.[83]

왕권과 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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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국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영조의 어진

조선은 이론적으로 국왕이 절대적 주권을 지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의 면모를 보이며 신료의 영향력 또한 크게 작용하는 관료제 사회였다.[84] 양반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 관료제는 국왕과 신료들의 통치 기구를 통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체제는 《경국대전》에 의해 규정되었다.[85] 국왕이 절대적인 전제 군주로 존중되었으며 신료를 장악하지 못하면 반정이 일어나거나 각종 역모와 반란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와 타협하여야 하였다. 조선은 건국부터 신진사대부에 의해 주도되어 왕권에 대한 견제와 재상권의 주도가 두드러진 가운데 이루어졌다.[19]:19-20 조선의 국왕은 여러 차례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고 신료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도 하였다. 왕자의 난은 정종을 앞세운 정도전의 재상권 우선 사상과 왕의 직접 통치를 이루고자 한 태종의 충돌이었으며[19]:20 이후 세조의 찬위 역시 비슷한 충돌의 성격이 있다.[86] 조선은 전기와 중기, 후기에 따라 각각의 정치 쟁점과 지형이 변화를 겪었으나 왕권과 신권의 긴장과 타협은 지속적인 정치의 주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관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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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과거 제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조선의 정치는 관료에 의해 운영되었고 이러한 관료의 선발은 주로 과거 제도를 통해 이루어졌다.[87] 과거는 문과[88], 무과[89], 그리고 각종 기술직을 뽑는 잡과[90]가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는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으나 숭유억불정책으로 폐지되었다.[91]

관료의 선발에는 과거 제도 이외에도 유력한 인물이 추천하는 천거, 공신이나 왕족의 자손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음서 등의 방법이 있었지만 과거를 통한 선발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조선의 문인들은 음서 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 모두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92]

등용된 관리들은 직위에 따라 종9품에서 정1품까지의 18단계에 이르는 품계가 주어졌다.[93]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는 작위가 수여되는 봉작이 있어 남성 왕족의 경우 군, 대군 등의 작위가 주어졌고 여성 왕족은 공주, 옹주 등의 작위가 주어졌다. 왕비의 아버지에게는 부원군의 작위가 주어졌다. 공신에게도 군의 작위가 주어졌으나 세습되지는 않아 고려 시대의 귀족 신분과는 성격이 달랐다.[94]

한편, 조선의 관료제 제일 하부에는 아전을 비롯한 여러 하급 관료들이 있었다. 이들 상당수는 급료 없이 근무하였고 과거 시험의 응시가 제한되어 중인 계급을 형성하였다.[95]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의 실시를 위해 지방 향리의 경제적 지위를 억압하고자 하였다. 국가의 급료가 없는 향리는 자신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과 함께 읍, 리 단위로 부과되는 세금에 자신의 몫인 읍징분(邑徵分)을 수취하여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향리의 이러한 추가적인 수취는 규정에 없는 임의적인 행위였지만 관행으로서 용납되었다.[96] 조선 후기에 이르러 향리의 이러한 수탈은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97]

붕당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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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의 본문은 붕당정치입니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가 정치의 중심에 들어서며 붕당이 형성되며 붕당 정치가 발달하였다. 초기에는 이른바 훈구파와 경쟁하였던 사림파는 몇 차례의 사화를 겪으며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결국 훈구파를 퇴출시키고 조선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붕당은 동인과 서인의 분화로 촉발되어 이후 남인북인노론소론 등이로 분화되었고 영조 시기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벽파와 시파가 생기기도 하였다.[98] 동인과 서인이 갈라선 붕당의 발생은 조정의 요직을 둘러싼 인사권의 장악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양반 계층의 인구 증가에 비해 관직의 수가 고정되어 있는 현실과 각종 정책의 시행에서의 대립 등이 배경에 있었다.[56] 한편 이러한 붕당 정치의 발생에는 지속적인 왕권의 약화가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반정을 통해 추대된 왕의 경우 반정공신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어려웠고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는 민심의 이반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신료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1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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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득국!' 연호한 이성계의 금강산 대권출정식…1만명 모였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1.06.15 05:00 수정 : 2021.06.15 17:51

‘최고급 석영유리로 제작됐다.’ 지난달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흥미로운 자료를 하나 냈다. 1932년 금강산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보물 제1925호) 중 유리제 사리병을 보존 처리하다가 이 병의 재료가 석영유리였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1932년 금강산 월출봉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중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최고급 석영유리의 비밀

유리제 사리병(높이 9.3㎝, 지름 1.2㎝, 무게 31g)은 은제 금도금 판에 원통형 유리를 끼우고, 위에는 은제 금도금 마개로 막았다. 내부에는 사리받침대가 들어있는 형태이다. 아마 이 사리병 속에 사리를 봉안했던 것 같다. 신용비 보존과학부 학예연구사는 “유리제 사리병의 복원과정에서 사리병의 주성분이 석영유리임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즉 일반적인 유리는 규소를 주로 사용해 1000℃ 미만에서 제작된다. 녹는 온도를 낮추기 위하여 용융제로 나트륨·칼륨·납을, 안정제로 산화칼슘 등을 사용한다.

반면 순수한 석영유리는 열에 아주 강해서 1500℃ 이상 가열하지 않으면 녹일 수 없다. 강도가 일반 유리의 2배 정도이기 때문에 고도의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황현성 학예연구사는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가 당시 최고급 재료와 기술로 제작됐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여기까지는 과학의 영역이다.

이제부터 인문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왜 이성계 사리기를 당대 최고의 재료인 석영유리로 제작했을까.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보이는 유리제 사리병은 석영유리로 제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석영유리는 열에 아주 강해서 1500도 이상 가열하지 않으면 녹일 수 없다. 강도가 일반 유리의 2배 정도이기 때문에 고도의 노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가 당시 최고급 재료와 기술로 제작됐다는 뜻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강산에서 출토된 돌상자 안에는…

1932년 10월6일 강원 금강산 월출봉(해발 1580m)에서 산불 저지선을 확보하는 공사를 벌이던 인부들이 돌상자(석함)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사리를 모시는 사리장엄구가 들어있었다.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유행한 라마불교의 탑 양식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15.5㎝)와 팔각당형 사리기(19.8㎝)가 먼저 눈에 띄었다. 이어 백자향로(12㎝)와 백자그릇, 청동사발, 은제숫가락 등도 보였다. 라마탑형 용기에는 4구의 불상이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 유물 곳곳에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원통형 은반에 새겨진 글자는 놀라웠다.

‘분충정난 광복섭리 좌명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수문하시중 이성계(奮忠定難 匡復燮理 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삼한국대부인 강씨(三韓國大夫人 康氏)…물기씨(勿其氏)’.

1932년 12월13일 중앙일보 기사. 금강산 월출봉에서 500년전의 납골기가 발견되어 조선총독부가 관리 중이라고 보도했다.

사리를 봉안한 이가 다름아닌 ‘이성계’와 부인 ‘강씨’라는 이야기이다. 이성계 앞에 붙은 25자의 기나긴 수식어는 무엇인가. 이성계는 1389년(창왕 2년·공양왕 원년) 당시 왕위에 있던 창왕이 우왕(1374~1388)과 함께 왕씨가 아니라 신씨(신돈·?~1371)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강제 폐위시키고 공양왕(1389~1392)을 세웠다. 공양왕은 그런 이성계에게 붙일 수 있는 온갖 수식어를 다 붙여 예우한 것이다.

팔각당형 사리기와 2개의 백자사발에서도 명문이 보였는데, ‘경오년(1390년) 3월’(팔각당형 사리기)와 ‘신미년(1391년) 4월’(백자사발) 등의 연대가 주목거리였다.

또 하나 ‘금강산 비로봉 사리 안유기(安遊記)’로 시작하는 다른 하나의 명문도 의미심장했다.

“신미년(1391년) 5월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1만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

명문을 종합하면 몇가지 키워드가 눈에 띈다. ‘부인 강씨’, ‘금강산’, ‘미륵하생’, ‘1391년 5월’, ‘1만명’ 등이다.

1932냔 금강산 월출봉에서 출토된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세트’. 출토유물 곳곳에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두번째 부인만 기록한 이유는

첫번째 키워드는 ‘부인 강(康)씨’이다. 아니 이성계가 부인과 함께 사리장엄구 봉안의 불사를 주도한 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있다. 왜냐면 ‘부인 강씨’는 바로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를 가리킨다. 사리를 봉안한 시점이 1391년 5월이라면 이성계의 본부인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년 9월23일)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성계는 두번째 부인인 강씨만 명문에 새겼다. 대대적으로 펼친 봉안의식에도 강씨만 참석했다. 병중이던 첫번째 부인인 한씨는 4개월 후(9월23일)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지금 잣대로 볼 수는 없다. <태조실록>은 “고려 말에는 예법이 문란해지고 기강이 무너져서 대소관리들이 서울과 지방에 각각 처(아내)를 두고 마음대로 거느렸다”고 기록했다. 무슨 말인가. 고려말 혼인제도가 무너져서 고관대작들이 ‘향처(鄕妻)와 경처(京妻)’를 두었다는 것이다.

원통형 은반에 새겨진 명문. 이성계와 부인 강씨의 이름이 보인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성계 또한 신의왕후 한씨와 신덕왕후 강씨를 향처(한씨)와 경처(강씨)로 두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이미 한씨와의 사이에 장성한 6남2녀를 두고 있었다. 장남(이방우·1354~1393)은 고려에 충성을 바쳤지만 둘째 방과(정종·1357~1419·재위 1398~1400)와 다섯째 방원(태종)이 건재하고 있었다.

첫째 부인 한씨와는 약 5살, 남편 이성계와는 약 20년 차이인 강씨는 2남1녀(방번·방석·경순공주)를 두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서울부인을 지극히 사랑했다.

우선 함경도 변방(영흥의 옛 이름) 출신인 이성계로서는 권문세족 출신인 강(康)씨가 출세의 디딤돌이었다. 강씨의 아버지 강윤성(?~1358) 가문은 충혜왕(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 공민왕(1351~1374) 때 재상권문가로 세도를 떨쳤다. 게다가 강씨는 여걸이었다. 한씨 소생인 이방원(1367~1422·재위 1400~1418)도 조선 개국 전에는 중요한 대소사를 강씨와 의논했다. 예컨대 위화도 회군 때 남은(1354~1398)이 태조(이성계)를 추대할 것을 비밀리에 의논하고 이를 태종(이방원)에게 알렸다. 그러자 태종은 “ ‘이런 큰 일을 가벼이 말해서는 안된다’면서 강씨에게 아뢰어 전달했다”(<연려실기술>)는 기록이 있다. 적어도 조선개국 때까지는 이방원과 강씨가 동지적 관계였던 것이다.

신덕왕후 강씨의 역할이 특히 눈에 띄는 사료가 있다. 이방원이 정몽주(1337~1392)를 참살하자 이성계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분기탱천한다. 그러자 신덕왕후 강씨가 정색하면서 남편에게 한마디 했다.

백자주발. 이성계가 1만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미륵의 하생’을 바라면서 사리봉안식을 펼쳤음을 알리고 있다.|국맂춘천박물관 제공

“공(이성계)이 항상 대장군으로 자처했으면서…. 어찌 이렇게까지 놀라고 두려워하십니까.”

우유부단한 남편의 마음을 강씨가 확 휘어잡은 것이다.

물론 조선개국 후 신덕왕후 강씨와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들은 철천지 원수가 된다. 후계자 자리를 두고 혈투를 벌인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태조가 개국공신인 배극렴(1325~1392)·조준(1346~1405) 등을 불러 후계자 자리를 논했다. 그때 배극렴은 “시국이 평온할 때는 적장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고 고했다.

이에 따르면 강씨의 소생 둘은 적장자(신의왕후의 둘째아들 방과)도, 공있는 자(다섯째 방원)도 아니었다. 이 대화를 엿듣고 있던 신덕왕후 강씨가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울기 시작했다. 기가 질린 배극렴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결국 강씨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세웠다. 그러나 세자책봉은 화를 불렀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1396년) 불과 2년 만(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세자로 책봉된 방석과 첫째 아들인 방번이 비명횡사한다. 태종 이방원과 한때는 동지적 관계였지만 왕위를 두고는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서거한지 186년이 지난 뒤인 1582년(선조 15년)이 되어서야 재평가된다.

“신의왕후 한씨가 돌아가신 것이 고려말이며, 그 이후 태조를 내조한 이는 신덕왕후 뿐이고…. 태조가 이미 신덕왕후를 높여서 정식 배우자로 삼았고 태종 역시 모후로 삼았으니 누가 우리 신덕왕후를 국모로 보지 않겠습니까.”(<연려실기술> ‘정릉정사’)

이런 판국이니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이성계 사리함에 ‘신덕왕후 강씨’의 이름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1591년 5월) 병석에 누워있던 조강지처(신의왕후 한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병이 더 도졌을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 시대에 경처와 향처 등 2처제도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다.

“고려 말엽 부부의 도리가 무너져…욕망을 좇고 정애에 미혹되어 처가 있는데도 또 처를 얻는…자가 있으니 적은 손실이 아니므로 바로잡아야 합니다.”(<태종실록>)

가만 보면 아버지(태조 이성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청동그릇. 1391년 3월 신견, 묘명, 박룡 등 3인이 시주해서 사리합으로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태조 왕건을 좇아 금강산으로

또 하나의 키워드는 ‘금강산’이다. 이성계는 왜 하필 금강산에서 사리를 봉안한 걸까. 이유가 있다. 금강산은 고려불교의 성지였다. 담무갈보살이 1만2000명의 제자를 데리고 금강경을 설법한 산이라 해서 금강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만2000명의 제자가 봉우리로 변해서 일만이천봉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재위 918~943)이 바로 이 담무갈보살의 현신을 목격하고 예를 갖췄다는 설화가 전한다. 바로 이 만남을 기념해서 금강산 정양사가 창건됐다. 그렇다면 이성계가 굳이 금강산을 찾아 사리를 봉안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다른 키워드는 ‘미륵하생’, ‘1391년 5월’, ‘1만명’이다. 먼저 이성계는 왜 ‘미륵의 하생’을 기다렸다는 것일까. ‘미륵하생’ 신앙은 민중을 구원할 미륵불이 언젠가는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후삼국시대 스스로 미륵불로 칭했던 태봉국 궁예왕(재위 901~918)이 그랬듯 민중이 도탄에 빠지는 말세에 나타난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구세주의 출현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고려말에도 그랬다. 1382년(우왕 8년) 고성에서 이금이라는 자가 미륵불을 자처하고 나섰다. <고려사절요>는 “(술법을 부리는) 내 말을 듣지 않으면 3월에 해와 달이 없어질 것”이라는 이금의 말을 믿고 “백성들이 다투어 쌀과 비단, 금은보화를 헌납했다”고 기록했다.

은제 도금 팔각당형 사리기. 사리를 넣은 라마탑형 사리기를 품은 용기이다. 1390년 사리탑을 조성해서 모신다는 내용과 발원자의 이름을 새겼다. 강양군 부인 이씨, 낙안군 부인 김씨, 승려 월암. 영삼사사 홍영통, 동지밀직 황희석, 그리고 박자청의 이름이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불 타는 착취대장

오죽 민중의 삶이 피폐했으면 혹세무민의 말에 현혹되겠는가. 그럴만도 했다.

고려말 백성들은 극심한 외우내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1380년(우왕 6년) 왜선 500척이 충청·전라·경상도를 마구 노략질했다. 마을이 불탔고, 백성들의 시체가 산과 들판을 덮었다. 왜구는 노략질한 곡식을 배로 운반했다. 운반하느라 땅에 버려진 쌀이 한 자 두께나 될 정도였다.

<태조실록> 총서는 “포로로 잡은 어린아기까지 모두 죽여 시체가 산더미를 이뤘고 가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뤘다. 2~3세 되는 계집아이를 잡아 머리를 깎고 배를 쪼개 깨끗이 씻어 쌀·술과 함께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기록했다. 나라안 사정은 어떠했는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인 권필(1569~1612)의 <석주집>을 보면 참혹한 표현이 나온다. ‘가난’이라는 제목의 시다.

“남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다지만(人無置錐地) 나는 본래 꽂을 송곳도 없다오(而我本無錐)….”

고려말의 상황이 바로 그랬다. 원래 고려의 토지제도는 나라가 모든 토지의 소유권을 갖고 관리들에게 일정 규모의 토지를 할당하는 것이었다. 할당 받은 토지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수조권)를 관리들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말에 접어들자 권문세가들이 토지를 독점하는 단계를 지나 겸병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한 땅을 두고 7~8명이 앞다퉈 세금을 거둬갔다. 토지제도가 문란해진 것이다. 귀족들의 토지겸병이 극심해지자 새롭게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에게 줄 토지가 사라져갔다. 백성들의 굶주림도 임계점을 넘었다.

세상을 뒤집을 명분을 찾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바로 그 점을 노렸다. 권문세가들이 독점·겸병한 토지, 즉 사전(私田)을 혁파함으로써 일석삼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1389년(창왕 2년·공양왕 원년) 이성계 세력이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이벤트가 있었다. 바로 공·사전의 토지대장을 모두 불태우는 것이었다.

“공전과 사전의 장부를 저잣거리에서 불살라버렸다. 그 불길이 며칠이 가도 사그라지지 않았다.”(<태조실록> ‘총서’)

며칠이 지나도록 훨훨 타서 한 줌의 재로 변하는 토지대장 더미를 바라보며 백성들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이성계를 향해 만세를 부르지 않았을까. 고려 창왕은 불타는 토지대장을 바라보며 “고려의 토지법이 내 재위기간에 끝났구나! 애석하다!”(‘총서’)고 탄식했다. 고려왕은 한낱 기득권 세력의 대표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성계 세력은 내친김에 과전법을 시행했다. 과전법은 전·현직 관리에게 녹봉(봉급) 대신 경기도의 토지를 차등으로 지급하는 제도다. 국가가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하는 체제가 된 것이다. 과전을 받은 관리들은 수확량의 1할(10분의 1)만 세금으로 받았다. 기존에 수확량의 50%까지 내면서 수탈당했던 백성들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쌍수를 들었다. 이 제도는 경제적 기반이 없었던 신진사대부, 즉 조선 건국의 주체들에게도 큰 힘을 주었다.

백자그릇 안쪽에 새겨진 명문. 신미년(1391년) 5월 시중 이성계가 1만명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장엄구를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신용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목자득국, 이성계!’

이성계 세력이 과전법을 시행한 것이 ‘1391년 5월’이라는 착안점도 재미있다. 이성계가 금강산에서 사리를 봉안한 때와 일치한다. 착취대장(토지대장)을 불태우고(1389년), 과전법을 실시한(1391년 5월) 이성계는 백성들에게는 구세주로 떠올랐을 것이다.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려고 하생한 미륵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랬으니 ‘1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금강산에서 벌어진 사리봉안식에 동참했을 것이다. 어떠한가.

한마디로 ‘1391년 5월의 금강산 사리봉안식’은 1만명의 지지자가 참석한 이성계의 ‘대권 출정식’이었다. 지지자들은 위화도 회군 뒤에 민간에서 널리 퍼졌다는 ‘목자득국(木子得國)’의 구호와 함께 ‘이성계! 이성계!’를 연호하며 금강산을 오르지 않았을까. ‘목자득국’은 ‘木(목)+子(자)’ 즉 , ‘이(李)’씨 왕조가 도래한다는 사자성어이다. 이것이 최고급 석영유리로 제작했다는 이성계 발원 사리함의 사리기에 담겨있는 조선 왕조 개국의 비하인드 스토리이다.(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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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대가 무엇이기에 광화문 앞을 파헤치고 도로 선형까지 바꿀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2.09.20 05:00 수정 : 2022.09.21 14:16

경복궁 광화문 앞 월대 복원 후 모습의 조감도. 월대는 1866년 경복궁 중건 때 남북 52m, 동서 29.5m 규모로 조성됐다. 때문에 월대가 완전 복원되면 사직동 방면에서 광화문을 거쳐 안국동 쪽으로 가는 도로의 선형이 반원형태로 돌아간다. |서울시청 제공

광화문 광장에서 탁 트인 가을 하늘 아래 북악산과 어우러지는 광화문·경복궁의 조화를 보는 맛이 싱그럽게 느껴진다.

그런데 오랜만에 광화문 앞을 지나는 사람들이라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 법 하다. 사직동에서 안국동으로 이어지는 광화문 앞 도로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고, 또 최근에는 그마저 높은 울타리로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얼마전 문화재청이 이와 관련된 보도자료를 하나 냈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올 연말까지 광화문 월대의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월대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불편함을 무릅쓰면서까지 복원한다는 것일까. 문화재청 궁릉유적본부는 ‘광화문 앞 월대의 전면 복원’은 1990년부터 30년 넘게 진행된 경복궁 복원 공사 중 ‘경복궁 중심축 복원에서 찍는 마지막 획’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광화문 앞에 얽힌 갖가지 사연을 더듬어보자.

월대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올 연말까지 이뤄진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진행하는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1866년 조성된 월대의 규모를 파악하여 복원의 자료로 삼을 작정이다.

■동구릉에서 발견한 광화문 월대 돌기둥

한 젊은 연구자의 ‘우연한 발견’에서 이야기를 풀어본다.

한때 문화재청 산하 궁능유적본부에서 전시 큐레이터로 근무했던 전나나씨(현 국립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사)가 주인공이다. 궁능유적본부 근무 시절 조선 왕릉을 부지런히 답사했던 전 학예사의 시선에 꽂힌 석물(石物)들이 있었다.

동구릉 마당 쪽에 쌓여있던 난간석주(난간에 쓰인 돌기둥) 18점과 동자석 20개, 용두석(용머리형 돌)이었다. 난간석주의 경우 현재 광화문에 일부 복원해놓은 월대의 돌기둥 1기와 너무도 흡사했다.

전 학예사가 두 난간석주의 크기를 재보았더니 과연 쌍둥이라 할만 했다. 광화문 앞 석주(돌기둥)가 높이 152㎝, 너비 65㎝인데, 동구릉 석주도 높이 152㎝, 너비 64㎝였다. 두 석주의 양 옆 팔각형 구멍 크기도 22~23㎝로 같았다. 그뿐이 아니라 두 곳의 용두석 형태도 완전히 똑같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광화문 월대에 쓰인 부재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동구릉으로 해체 이전된 것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 단서는 99년 전인 동아일보 1923년 9월2일자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3년 훼철되기 전의 광화문 앞 거리의 모습. 왼쪽은 1890년대의 사진이고, 오른쪽은 훼철 직전인 1923년 이전의 사진이다.

“경복궁 영추문~광화문 사이에 전차를 부설할 예정이어서 광화문 앞 돌난간을 헐어버릴 것”이라는 기사다. 돌난간은 월대를 지칭한다. 이듬해(1924년) “광화문에서 중학동~안국동에 이르는 길을 정비한다”(경성일보 7월1일)는 기사로 볼 때 이 무렵이면 완전히 헐린 듯하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무렵 헐린 월대의 부재들은 영제교(경복궁 흥례문~근정문 사이에 놓인 다리)의 천록(상상의 동물 조각상) 뒤쪽에 몰아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쌓아두었던 월대 부재 대부분이 일제강점기말~1970년대, 어느 시점에 동구릉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물론 그중 상당수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가운데 1기(현재 광화문 앞에 일부 복원된 월대의 부재)가 건청궁 뒷산인 녹산에서 확인되었다. 녹산은 1895년 일본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시신이 불태워진 비극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화가 안중식(1861~1919)이 1915년에 백악산(북악산)과 경복궁의 실경을 그린 ‘백악춘효’.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전해지는데, 이 그림은 여름본이다. 광화문 앞 월대가 선명하게 보인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달을 감상하는 명당자리?

‘월대(月臺)’는 ‘달 월(月)’자에서 보듯 ‘달을 감상하는 평평한 구조물’이라는 자못 낭만적인 냄새를 피우는 단어다. 그렇지만 달만 감상하기 위한 이른바 ‘뷰 값’하는 명당자리만은 아니었다.

궁중에서 개최하는 각종 의식을 위해 조성된 시설이 광화문 앞 월대였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그 월대가 초창기부터 존재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흥미로운 기사가 <세종실록>에 등장한다.

1431년(세종 13) 3월29일 예조판서 신상(1372~1435)이 “광화문 밖에 섬돌을 쌓자고 건의했다”는 것이다.

신상은 두가지 이유를 들었다. 관리들이 궁궐을 출입할 때 바로 광화문 앞까지 말을 타고 와서 내린다는 것이다. 이게 예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하나 광화문이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는 문인데, 이렇게 누추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신상은 “따라서 돌을 채취하여 계체(길고 평평한 돌·월대를 지칭한 듯)를 쌓고, 양쪽 곁에 난간석을 둘러야 하며, 강화도산 전돌로 바닥을 포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은 “지금 막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떻게 백성들을 동원하겠느냐”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20일도 지나지 않은 4월18일자 실록에 “광화문이 완성됐다(光化門成)”는 기사가 보인다.

경기 구리 동구릉에서 발견된 경복궁 중건 당시(1866년)의 광화문 월대 난간석. 언제인지 몰라도 광화문 월대의 난간석주(난간에 쓰인 돌기둥) 18점과 동자석 20개, 용두석(용머리형 돌) 등이 동구릉으로 옮겨갔다. 난간석주의 경우 2008년 광화문 앞에 일부 복원해놓은 월대의 돌기둥 1기(경복궁 중건 때 사용한 난간석)와 쌍둥이 같았다. |전나나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학예연구사 제공

■월대는 과연 세종 때 쌓았을까

두 실록기사 만으로는 세종이 원래 입장을 바꿔 월대를 세웠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불확실하다.

다만 1550년(명종 5) 경복궁을 원경으로 비변사 관원들의 모임을 그린 ‘비변사계회도’와 겸재 정선(1676~1759)의 ‘경복궁도’에는 광화문 앞 월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지금 복원 계획에 따라 학술 발굴하는 경복궁의 광화문 월대는 무엇인가.

연구자들은 어떤 형식이든 광화문 앞에 월대와 같은 구조물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왜냐.

비록 조선 후기지만, 창덕궁 돈화문과, 창경궁 홍화문, 경희궁 흥화문 등에 월대가 조성되어 있다는 기사들이 보인다. 예컨대 “1840년(철종 11) 창덕궁 돈화문 월대에서 시전 상인들을 접견했다”(<선전관청일기>)는 기사가 그것이다. 또 19세기 자료인 ‘동궐도’와 ‘서궐도안’에는 창경궁 홍화문과 경희궁 흥화문 앞 월대의 모습이 나타난다.

경복궁 중건 당시에 조성된 광화문 월대의 부재들이 어찌된 일인지 100년 정도 만이 동구릉에서 발견됐다.|전나나 학예연구사 제공

이렇게 조선 후기까지 창덕궁·창경궁·경희궁 등 각 궁궐에 존재한 월대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광화문) 앞에는 없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각종 그림에는 월대가 보이지 않을까. 임진왜란 전(1550년) 그려진 ‘비변사계회도’의 경우 비변사 관원들의 모임이 주제여서 주변 구조물인 광화문 앞 월대는 생략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임진왜란 후에 그려진 그림은 어떤가. 정선의 ‘경복궁도’에는 문루는 소실되고 뼈대만 남은 광화문 그림이 보인다. 광화문도 그럴진대 광화문 앞 월대는 오죽했으랴. 존재했더라도 전란으로 흔적조차 사라져버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전나나 학예사는 “본래 광화문 월대에 있는 난간석주의 수량은 좌우 20개씩 총 40개가 있었는데, 동구릉에 전해지는 것은 18개뿐”이라면서 “이 18점이라도 광화문 월대를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광화문 앞 월대가 훼철된 것은 1923년 무렵이었다. 동아일보 1923년 9월2일자는 “경복궁 영추문~광화문 사이에 전차를 부설할 예정이어서 광화문 앞 돌난간을 헐어버릴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고, 10월 4일자에는 전차가 다니는 광화문 앞을 보여주고 있다.

■월대의 복원 기점은?

이전의 모습이 어떻든 지금 진행되는 경복궁 복원 사업은 그 기준점을 ‘중건 시기(1865~68년)’로 삼고 있다.

월대 복원도 마찬가지다. 알다시피 경복궁은 임진왜란 와중에 소실된 이후 270여년간 폐허로 남아있었다. 그러던 1865년(고종 2) 4월부터 경복궁 중건의 대역사가 시작되어 3년2개월만인 1868년 6월 일단락된다.

월대는 1866년(고종 3)에 조성된다. <경복궁영건일기> 3월3일자는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는데 작업자들이 궁 안에 쌓아둔 흙을 지고 왔는데 4만여짐에 이른다”면서 “한 짐 당 1푼씩 지급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조성된 월대는 1900년대초 찍힌 각종 사진에 그 모습이 담겨 있다. 광화문 앞으로 너른 월대가 T자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월대 왼쪽 오른쪽 측면에 난간석이 설치되었고, 좌우 각 20개의 난간석주(돌기둥)와 각 19개의 동자석, 8각의 난간대 19개가 배치되어 있다. 또한 월대의 남쪽에는 계단이, 가운데는 사악한 기운을 쫓아낸다는 서수상이 각 한 쌍 씩 설치되어 있다.

이렇게 조성된 월대가 일제강점기(1923~24)에 해체되어 경복궁 경내를 거쳐 동구릉까지 유랑하게 된 것이다.

1923년 10월4일자 동아일보. 조선총독부가 전차개통과 함께 광화문 앞에 있었던 해태(치)상을 거적때기에 감아 처박아두었다는 기사를 썼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료 중에는 해체 후 영제교(경복궁 흥례문~근정문 사이에 놓인 다리)의 천록상 뒤에 몰아둔 월대의 난간석 등 부재들이 보인다,

■수상한 돌무더기는?

그 사이 월대는 사직동~안국동을 연결하는 직선도로의 땅 밑에 묻혀있는 신세가 됐다.

2007년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정도 반시계 방향으로 어긋나 있었던 광화문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공사가 시작됐다. 이를 위해 1968년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던 광화문을 해체했는데, 그 참에 광화문과 월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광화문 남쪽으로 11m까지 나아가 조사를 벌인 결과 고종 연간에 중건한 월대 유구(길이 8.3m, 폭 29.7m)가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그 결과를 토대로 현재 광화문 앞에 월대의 일부를 복원해놓았다. 이때 건청궁과 국립민속박물관 사이에 방치되어 있던 난간석주(난간 돌기둥) 1점을 복원 부재로 활용했다. 정현정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주무관은 “발굴성과를 토대로 보면 월대의 남북 길이는 52m, 동서 너비는 29.7m, 그리고 임금의 길인 어로의 너비는 5.2m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2007년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정도 반시계 방향으로 어긋나 있었던 광화문에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공사가 시작됐다. 이를 위해 1968년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던 광화문을 해체했는데, 그 참에 광화문과 월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가 이어졌다. 이 때 경복궁 중건당시의 월대 유구가 학인됐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그런데 2007년 발굴조사에서 심상치않은 실마리가 한가닥 보였다.

즉 고종 때 중건된 광화문터 밑으로 70㎝를 더 팠더니 광화문 창건 시기(1395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의 석축 일부가 보였다. 그런데 그 창건 시기와 동일한 지층에서 고종 이전에 조성된 월대 추정 잡석 유구 일부가 확인됐다.

그러나 2007년 발굴 조사에서는 이 잡석들이 세종 연간(1431년)에 세웠을 수도 있는 초기 월대인지 밝혀내지는 못했다.

물론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고종 연간의 월대유구를 찾아 복원의 자료를 확보한다는 것이 우선 목표이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쌓은 월대 유구를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대박 발굴’이 될 것이다.

2007년 조사에서 수상쩍은 유구가 확인됐다. 고종 때 중건된 광화문터 밑으로 70㎝를 더 팠더니 광화문 창건 시기(1395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의 석축 일부가 보였다. 그런데 그 창건 시기와 동일한 지층에서 고종 이전에 조성된 월대 추정 잡석 유구 일부가 확인됐다. 월대가 이미 조선초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광화문에서 그려본 조선시대 삽화

물론 월대 조성과 상관없이 광화문 앞은 조선 초기부터 지금의 ‘광화문 광장’과 같은 역할을 감당해냈다.

왕실의 환궁 및 장례와 같은 주요 행사, 임금이 친히 주재하는 과거시험(무과 전시), 군사행사는 물론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전하는 상언과 격쟁이 이루어진 공간이기도 했다.

이런 행사가 열릴 때마다 광화문 앞에는 채붕(혹은 산대·일종의 무대)을 설치하고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

1488년(성종 19)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동월(1430~1502)의 ‘조선부’는 광화문 앞에서 설치된 무대와 공연을 언급했다.

“광화문 앞에 비단을 둘러 꾸민 산대(무대)는 그 높이가 광화문과 같고, 지극히 교묘하게 조성됐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외줄타기하는 사람은 두 명의 동자를 세우고 춤을 추며 줄을 탄다. 가볍기가 파도위를 타는 신선 같다.…”

광화문 앞에 설치한 무대의 높이가 ‘광화문’과 같다면 얼마나 높게 설치했다는 얘기인가.

2007년 발굴조사 결과를 반영해서 광화문 월대(액 8.3m)를 일부 복원했다. 복원에 쓰인 부재 가운데 1기(색 바랜 난간석)기가 1923년 무렵 훼철된 월대의 부재중 하나로 확인됐다. 이 난간석은 건청궁과 국립민속박물관 사이에 있는 녹산에 방치되어 있다가 발견됐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전나나 학예사 제공

1539년(중종 34) 4월10일의 일화도 눈길을 끈다. 중국 황태자의 책봉 사실을 알리려고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이 중종이 경복궁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광화문 앞 산대놀이에 넋이 빠져있다가 한참 뒤에야 궁궐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1545년(인종 1) 5월11일 중국 사신을 위해 무대를 만들고 각종 공연을 펼치던 중 무대 모퉁이가 붕괴되는 바람에 구경꾼 수십명이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다.

광화문 앞에서는 갖가지 군사시범을 보이는 장소로도 활용됐다. 1459년(세조 5) 12월27일에는 세조가 부인인 정희왕후(1418~1483)와 함께 광화문에서 화포 쏘는 것을 구경했다는 실록내용이 눈길을 끈다. 화포를 어디다 쏘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또 1445년(세종 27) 6월3일자 <세종실록>은 “세자(문종·1450~1453)가 광화문 앞에서 무관 360명의 체력 평가시험을 주재했다”고 썼다. 광화문 앞은 왕실 어른들의 행차가 돌아오는 순간을 맞아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 4월6일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1395~1446)가 온천에서 돌아오자 흥인문(동대문)부터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도로변에 오색천을 장식했으며, 각종 거리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세종실록>은 “왕후가 행차할 때 사대부의 부녀들이 도로 좌우에 채색 장막을 치고 흥인문에서 광화문 밖까지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과 같았다”고 전했다.

또 광화문 앞은 이따끔 과거시험(무과)이 펼쳐진 곳이기도 했다. 1539년(중종 34) 11월23일 <중종실록>은 “경회루에서 펼쳐지던 무과 전시(임금이 직접 주재한 시험)를 광화문에서 치렀다”고 전한다. 한겨울 북풍이 거세게 부는 경회루보다는 볕이 잘 드는 광화문 앞이 시험을 치르기에 낫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1990년 첫 삽을 뜬 ‘경복궁 복원’은 2045년까지 장장 55년의 기간을 두고 진행하는 사업이다. 중건 당시의 전각(500동) 가운데 1990년까지 남아있던 건물은 36개 동에 불과했다. 1차 복원계획이 끝난 2010년까지 총 125동(기존 36개동 포함)에 달했다. 문화재청은 2차 복원 기간(2011~2045년)에 80개동을 더 복원할 계획이다. 총 205개동인데, 그래봐야 중건 당시(500동)의 41% 정도에 불과하다.|문화재청 제공

■도끼 들고 광화문 앞서 엎드린 유생

광화문 앞은 조선시대 내내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예컨대 “1428년(세종 10) 5월24일 자재라는 사노비가 신문고를 치려다가 의금부 당직자들에 의해 제지당하자 광화문의 종을 치고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세종은 신문고를 치지 못하게 한 의금부 관리 2명을 파면했다.

1443년(세종 25) 4월27일에는 경북 고령 출신인 무관 석호가 무려 60장이 넘는 상소 글발을 광화문 앞에 펼쳐 놓는 일도 있었다. 1770년(영조 40) 3월21일에는 청주 사람인 한유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한 통의 소장을 올렸다.

그가 탄핵한 인물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권세를 누리던 영의정 홍봉한(1713~1778)이었다.

한유는 “국정을 농단한 간신 홍봉한을 참형에 처하라”고 촉구했다. 영조 앞에 불려 들어온 한유는 “망국동(亡國洞)의 망정승(亡政丞)이라는 동요가 있는 것 아시느냐”고 한다. ‘안국동(安國洞)’에 살고 있는 홍봉한을 빗댄 풍자 동요였던 것이다.

2023년으로 예정된 월대 복원이 이뤄지면 1990년부터 이어진 경복궁 복원의 중심축이 마무리되는 셈이다.|문화재청 제공

이 사건으로 한유는 흑산도로 유배를 떠났지만, 홍봉한 역시 경질되고 말았다.

1540년(중종 35) 10월 12일 광화문 서쪽 좁은 문에 누군가 종이가 맨 화살이 꽂혀있었다. 누군가 억울한 일을 종이에 담아 화살로 쏜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전례에 따라 이 종이를 그냥 태워버린다.

경복궁 중건 사업이 한창 벌어지던 1865년(고종 3)에는 고된 노역을 달래줄 노동요 가사를 광화문에 떡하니 붙여놓고 신명나게 노래를 불렀다는 기록(<경복궁영건일기>)도 있다. 그 내용은 ‘어호 조타, 경복궁은 조선 중이 대지로다…이런 명당 또 있느냐’고 이어지는데, 다른 버전에는 ‘경복궁 역사,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족 만나나 볼까’하는 가사도 전한다.

고된 노역에 시달린 백성들의 애환이 광화문짝에 걸린 것이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광화문 월대 발굴조사를 위해 울타리를 쳐놓았다. 모쪼록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제대로 된 경복궁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발굴조사와 복원작업에 심혈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궁능유적본부·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월대복원은 경복궁 복원의 화룡점정?

월대 발굴조사를 한다기에 끄집어낸 이야기들이다. 새삼 광화문 월대의 복원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보았다.

1990년 첫 삽을 뜬 ‘경복궁 복원’은 2045년까지 장장 55년의 기간을 두고 진행하는 사업이다. 중건 당시의 전각(500동) 가운데 1990년까지 남아있던 건물은 36개 동에 불과했다.

1차 복원계획이 끝난 2010년까지 총 125동(기존 36개동 포함)에 달했다. 문화재청은 2차 복원 기간(2011~2045년)에 80개동을 더 복원할 계획이다. 총 205개동인데, 그래도 중건 당시(500동)의 41% 정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광화문-흥례문-근정전-침전(강녕전·교태전 등)-후원(건청궁) 등으로 이어지는 중심축과 태원전(임금 초상화를 모신 곳), 동궁(자선당·비현각 등), 함화당 및 집경당 등 보수·복원이 마무리되었다. 이 순간에도 생활공간 등을 위주로 복원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떨까. 박찬정 궁능유적본부 사무관은 “광화문 월대의 복원은 경복궁의 중심축, 즉 척추뼈를 완성하는 마침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모쪼록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제대로 된 경복궁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발굴조사와 복원작업에 심혈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이 기사를 위해 박찬정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사무관과 정현정 주무관, 전나나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학예연구사, 양숙자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등이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했습니다.)(2)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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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의 사찰에서 사지가 찢긴 불상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2.08.09 05:00 수정 : 2022.08.09 16:00

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자리집고 있는 양주 회암사터 항공사진. 발굴결과 산 아래쪽 계곡에 차곡차곡 쌓은 8개의 석축 위에서 70여개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발굴 현장을 그대로 노출시켜 놓았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고색창연한 절터가 버티고 있다. 회암사터이다. 산의 아래쪽 계곡에 차곡차곡 쌓은 8개의 석축 위에 그대로 노출된 70여기의 건물터와 함께 그곳에서 활약한 고승들의 기념물까지…. 사적으로 지정된 구역만 1만여평(3만3391㎡)에 이르는 절터에 서면 600년의 시공을 초월한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회암사 하면 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일화가 떠오른다. 양녕대군의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이야기다.

양주 회암사터. 효령대군이 머문 사찰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들판에서 잡아온 짐승들을 절간에서 굽자 효령대군이 “절간에서 무슨 짓이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은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고 응수했다.|양주시립 회암사지박물관 제공

1446년(세종 28) 4월23일 효령대군(1395~1486)이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양녕대군(1394~1462)이 들판에서 사냥해온 짐승으로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형이 신성한 절간에서 고기를 굽자 효령대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니 지금 불공을 들이고 있는데…. 좀 심하지 않느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이 했다는 말….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불자(佛者·효령대군)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세종실록>)

회암사 복원도. 목은 이색의 ‘회암사수조기’는 “회암사 전각만 모두 262칸이고 15척이나 되는 불상이 7구, 10척인 관음상 1구가 조성됐다”고 기록하고 “장대하고 미려하기가 동국(고려)에서 으뜸이고,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하니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세종대왕 3형제의 유쾌한 일화를 전하는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2세기부터 존재했던 사찰이었다.

다만 인도 승려인 지공 선사(?~1363)의 감화를 받은 제자 나옹(1320~1376)이 1374년 중건불사를 했다는 기록이 이색(1328~1396)의 <목은시고>에 실려있다.

“지공 스님이 회암사의 지세가 천축의 나란타사와 같다고 나옹(지공의 수제자)에게 말해 이곳에 회암사를 창건하게 했다.”

지공이 언급한 ‘나란타사’는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이었다. 631년 이곳을 찾았던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602?~664)는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회암사는 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불교의 종파) 사원이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차이점이 있다. 선종에서는 부처를 모시는 불전, 탑보다 현신의 부처인 주지의 공간인 방장과 수행 공간인 승당, 중료 등이 핵심시설이며, 수행 공동체 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이 사원의 마지막 졸업생이었던 지공은 원나라를 거쳐 1326년 3월부터 2년7개월 동안 고려에 머문다. 고려 백성들은 “석가모니가 환생해서 고려땅에 왔으니 어찌 뵙지 않겠느냐”고 추앙했다. 지공 스님은 “천보산 자락이 (어릴 적 수학했던) 나란타사의 지형과 비슷하다”면서 “‘삼산 양수간(三山兩水間)’에 있는 회암사를 중창하고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고 제자(나옹)에게 전했다.(1357년) 회암사는 삼산(삼각산)을 안산으로, 양수(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야말로 ‘삼산양수간’인 것이다.

나옹의 주도로 시작된 회암사의 중창불사는 1374~76년 사이에 이뤄졌다. 중창 1년 뒤인 1377년(우왕 3) 이색이 남긴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는 262칸이나 되는 사찰 건물의 규모와 위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회암사와 관련된 삼화상. 나옹 스님이 “천보산 자락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이 일어난다”는 스승인 지공 스님의 말에 따라 회암사를 중창했다.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주석했다.

“보광전 5칸은 남쪽으로 면했는데 그 뒤에는 설법전 5칸이 있으며 그 뒤에는 사리전 1칸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 3칸이 있다…회암사 전각만 모두 262칸이고 15척이나 되는 불상이 7구, 10척인 관음상 1구가 조성됐다.”

그러면서 이색은 “장대하고 미려하기가 동국(고려)에서 으뜸이고,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하니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실제로 1376년 4월 열린 회암사 낙성식에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전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전국의 백성들이 포백(布帛·삼베와 비단)·과일·떡 등을 가지고 가서 바쳤다. 앞다퉈 들어오려고 절 문이 메워질 정도였다. 즉시 부녀자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관문을 닫으라고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고려사>)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고려 조정은 나옹 스님에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죄’로 경상도 밀성(밀양)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그러나 나옹 스님은 유배지로 가는 도중 여흥(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다.

회암사는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이 수학한 나란타사를 본따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회암사의 지세가 천축의 나란타사와 같다고 제자(나옹)에게 말해 이곳에 회암사를 창건하게 했다는 것이다. 지공이 언급한 ‘나란타사’는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이었다. 631년 이곳을 찾았던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는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유네스코 잠정목록인 이유

최근 14세기말, 즉 나옹의 주도로 중창한 회암사 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잠정목록 등재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필수적인 관문이다. 최소 1년 이상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세계유산등재를 위한 신청 자격이 부여된다. 회암사터는 과연 어떤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세계유산 등재의 핵심조건)’가 있다는 걸까. 문화재청과 양주시 등은 이 유적이 ‘14세기 동아시아에 만개했던 불교 선종 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라는 점을 꼽았다. 즉 회암사는 선종 사원이다. 선종은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종파이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다르다. 따라서 선종 사원의 핵심시설은 부처를 모시는 불전과 탑보다는 ‘현신의 부처’인 주지 스님의 공간(방장)과 수행공간 등이다. 회암사가 바로 ‘14세기 수행공동체 위주로 조성된 선종 사원의 모델’이라는 점이 세계유산 등재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다.

2000년 5월 회암사터의 6단지 보광전 네 모서리 중 두 모서리에서 출토된 명문 청동풍탁(풍경). 풍탁에서는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등의 명문이 보였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풍경에 매달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체취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종교적인 가치에만 시선을 두고싶지 않다. 양녕대군 일화가 보여주듯 회암사에는 너무나 풍부한 스토리가 담겨있는데 그런 어려운 불교 사원 이야기만 하겠는가.

지금부터 22년 전인 2000년 5월로 돌아가보자. 당시 절터를 발굴 중이던 경기도박물관 조사단원의 눈에 심상치 않은 유물이 잇달아 출토되었다. 회암사의 중심건물인 보광전터의 두 모서리에서 명문 청동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천보산 중턱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라는 뜻의 명문내용이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 134자를 검토하던 조사단은 이 금탁이 여느 풍경과 다르다는 점을 금방 알게 됐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홍무 27년(1394)’이라는 제작연대까지 보였다.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

청동 풍탁(풍경)에 새겨진 명문 134자.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라는 내용이다.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는 환관인 ‘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신덕왕후 강씨가 위독해지자 이득분의 집에서 치료했으며, 그곳에서 승하했다. 이득분은 강씨와 강씨의 소생인 세자 이방석의 든든한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마디로 태조 이성계(1392~1398)가 1394년 회암사 보광전을 ‘무학대사와 총애하는 신덕왕후, 그리고 세자 방석을 위해’ 호화롭게 꾸몄다는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것은 명문에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로 등장하는 ‘환관(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이득분과 관련된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인다.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중병이 들자 이득분의 집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고, 결국 4일만에 그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태조실록> 기록(1396년 8월9·13일)이 심상치 않다. 환관 이득분이 태조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이득분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방석(세자·1382~1398)과 방번(1381~1398)의 후원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득분의 기세도 강씨가 서거하고(1396년), 1차 왕자의 난(1398년)으로 방석과 방번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후 꺾이고 만다. ‘외방종편(죄인의 의사에 따라 서울 이외의 지방에 거주하게 하는 제도)’의 처분을 받게된 것이다.

<정종실록>은 “1399년(정종 2) 3월1일 이득분이 불사를 행하도록 임금(태조)에게 권하여 국고를 탕진하게 만들었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상소를 기록한다. 이득분에게 회암사 보광전을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꾸민 죄를 물은 것이다.

회암사터에서는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높은 위상의 유물들이 출토된다. 청기와는 물론이고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이름을 새긴 수막새와 임금의 상징인 봉황문 수막새 등이 쏟아져 나왔다. 회암사가 또하나의 궁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양주 시랍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목 잘리고 토막난 불상의 정체는?

회암사터에서는 또 한가지 의미심장한 발굴 결과가 드러났다.

발굴 현장 곳곳에서 때로는 짓이겨져 부서진 채, 혹은 머리가 무참히 잘린 채 몸통은 이쪽, 머리는 저쪽으로 흩어진 불상들이 수습된 것이다. 예컨대 동자상은 네 토막으로 잘린 채 발견됐는데 각각 반경 50~60m 떨어진 채 확인됐다. 몸뚱이는 5단지, 머리는 6단지, 팔과 다리는 7단지와 8단지, 뭐 이런 식으로 흩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 불타는 적개심으로 불상들을 훼손시켜 사정없이 내던졌다는 뜻이 아닐까.

대체 회암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고려말 선승들의 수행 공간으로 중창된 회암사는 조선 개국과 함께 위상이 달라졌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1327~1405)가 머물던 사찰이었다. 태조 역시 회암사에 자주 들렀다.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1402년(태종 2)에는 아예 회암사 안에 궁실을 지어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다 무학대사가 입적하고(1405년) 태상왕인 태조가 승하(1408년)한 뒤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회암사터에서 확인된 높은 위상의 유물들. 궁궐 건물에 걸맞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이 아니던가. 불교와 회암사를 지탱해온 두 사람이 사라지자 억불(抑佛)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1434년(세종 16)4월10일 회암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태종 부인인 원경왕후(1365~1420)의 수불(繡佛·자수로 부처나 보살을 표현)이 걸려있던 보광전의 수리를 핑계로 대대적인 축하 법회를 연 것이다. 무엇보다 행사를 열면서 왕실과 사족 부녀자들로부터 막대한 시주를 받은 것이 물의를 빚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행사에 참석한 부녀자 들이 “시주를 한다”면서 승려들의 무애희(불교의 악극) 때 옷을 벗어 주고, 심지어 승방에서 여러날 머물며 숙식을 했던 일이 드러났다. 참석자 가운데는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어머니인 안씨(?~1444)까지 끼어있었다. 이 때문에 회암사의 불사를 비판하는 상소문이 빗발쳤다. 이때 효령대군이 나서 “문제삼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등 설왕설래하다가 일반 사대부 여인들만 처벌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후 50년이 지난 1484년(성종 15) 9월 9일에는, 승하한 정희왕후(1418~1483)의 국상 중에 종친과 저자의 부녀자 150여 명이 회암사에서 악기를 울리며 불공을 드리고 유숙까지 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사헌부가 나서 처벌을 요구했지만 성종은 “무식한 회암사 주지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냥 두라”고 봐줬다.

회암사터에서 출토된 백자 인물상과 용문양 암막새. 사찰 건물이 궁궐의 위상에 걸맞은 규모를 자랑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양주 시립 회암사지박물관 제공

■노비 혁파 후 토지 하사

심한 억불책을 쓴 임금들마저 회암사에 관한한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이유가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고, 태종의 능침사(왕릉을 수호하는 절)로 지정되었으며, 효령대군(세종)과 인수대비(1437~1504·성종)의 비호까지 받았던 사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419년(세종 1) 11월 27일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태종이 회암사에서 일어났던 스님들의 여자종 능욕사건을 거론했다. “회암사 중들이 부녀자(여자 종)들과 가까이 있는데, 어찌 여자종들을 범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상왕은 사찰이 부리고 있는 노비들을 혁파하는 극강의 억불책을 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9일 <세종실록>에 흥미로운 기사가 보인다.

“하루 아침에 사찰의 노비를 혁파했다. 중들이 ‘이젠 사찰의 땅까지 없애려 하는건가’하고 걱정할 것 같다. 불교를 물리치려고 하지만 갑자기 다 없앨 수는 없다. 회암사 같은 이름난 절에는 땅을 더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게 좋겠다.”

사찰의 노비를 혁파해놓고 좀 미안했던지, 회암사에 전토를 더 얹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그래도 여노비 능욕사건을 일으키는 사찰에 그런 은전을 베풀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만큼 회암사는 임금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만큼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던 사찰이었던 것이다.

회암사 보광전 모서리에서 청동금탁이 출토되는 순간. 회암사가 어느날 갑자기 폭삭 무너져 내렸음을 암시하고 있다.|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

■‘쓸모없고 못난 선비’라 욕설 퍼부은 세종

유생들은 끊임없이 불교와 회암사의 폐단을 거론했지만 소용없었다. 임금들은 조종(祖宗)의 유습이라든가, 종실의 효성이라고 하면서 유생들의 입을 막았다. 세종은 한술 더 떴다. 부인(소헌왕후)의 승하(1446년) 이후 잇달아 불사를 추진한다. 아들(수양대군)을 시켜 <석보상절>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하고, 손수 <월인천강지곡>을 찬술했으며, 철폐했던 내불당을 다시 건립했다.

세종은 불사를 극력 반대하던 조정 유신들에게 ‘쓸모없는 선비(迂儒)’, ‘못난 선비(竪儒)’라며 욕설까지 퍼부었다.

세조의 경우 “나는 비록 불교를 믿지만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뒤의 임금도 나를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여긴 성종은 할머니인 정희왕후(1418~1483)와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신앙생활을 어쩌지는 못했다. 1492년(성종 23) 도첩제 자체를 폐지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버린 성종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교 자체를 없앨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요승 보우의 업적은 휴정·유정대사 발탁

억불의 물결 속에도 나름 건재했던 회암사는 연산군(1494~1506)의 폐불로 위축됐다가 다시 살아난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1501~1565) 덕분이었다. 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된 보우(1509~1565)는 불교의 세속적 권리를 회복하려고 선·교 양종과 승과를 부활했다.

그런데 이 승과 부활은 문정왕후와 보우의 간과할 수 없는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 1552년(명종 7)의 제1회 승과에서 휴정(서산대사·1520~1604)이, 1561년(명종 16)의 7회 승과에서 사명(1544~1610)이 합격했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은 73살의 노구를 이끌고 승병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유정은 어떤가. 역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유정은 1604년(선조 37)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귀국하기도 했다.

한음 이덕형(1561~1613)은 1610년(광해군 2) 입적한 유정을 위한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슬프다. 길고 짧은 것을 대보면 모두가 같고…유교와 불교가 어찌 다르랴, 오직 그 진리를 보전하여 마침내 세상에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이덕형의 <한음선생문고> ‘제송운문’)

성리학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덕형이 승려를 위해 제문을 쓴 것도 파격이지만 “유교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설파한 것 역시 예사롭지 않다. 문정왕후와 보우가 승과를 부활시키지 않았다면 휴정과 유정의 스토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된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급제한 휴정과 유정대사. 두 분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폭삭 내려앉은 절터

그러나 두 사람의 불교 중흥의 꿈은 금방 산산조각난다. 보우는 순회세자(1551~1563·명종의 첫아들)가 13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복을 기원해야 한다”면서 회암사 무차대회를 기획한다.(1565년)

쇠락해가는 불교세력을 확장하고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한 행사였다. 무차대회는 승려·속인·남녀노소·귀천의 차별 없이 잔치를 벌이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행하는 불교의례를 가리킨다.

그러나 “전국에서 승려들이 수천명 몰려오고 있고, 그 행사가 너무 화려하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친다.

공교롭게도 문정왕후가 행사 도중 병환을 얻으면서 무차대회 또한 중지된다.(4월5일)

그러나 문정왕후는 결국 승하하고 만다. 이후 보우와 회암사는 유생들의 공적이 된다.

1년 여 뒤인 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은 심상치않는 기사 2건이 보인다.

“문정왕후 승하 이후 제주도에 유배된 보우가 제주 목사(변협·1528~1590)에게 주살 당했다”는 내용과, “송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내용 등이다. 회암사가 정말로 유생들에 의해 불에 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30년 후인 1595년(선조 28) 6월4일 “회암사 옛 터에 불탄 큰 종이 있다”는 <선조실록> 기사를 보면 회암사가 유생들에 의해 파괴되고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어떤가.

회암사터에서 왜 불상들이 목이 잘리고 몸통이 갈기갈기 찢긴채 흩어져 있었는지 어렴풋 그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보물). 1565년(명종 20) 중종 계비 문정왕후(1501~1565)가 명종의 만수무강과 왕비의 후손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한 400점의 불화 중 하나이다. 회암사의 낙성에 맞춰 조성된 것이다. 문정왕후가 발탁한 보우 스님이 쓴 화기(畵記)에 따르면 당시 석가약사·미륵·아미타불 등 모든 부처와 보살을 소재로 하여 금니화(金泥畵)와 채색화(彩色畵) 각 50점씩 조성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제 회암사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랐으니 얼마 있으면 정식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커졌다. 종교시설 뿐 아니라 각종 스토리가 차고 넘치는 회암사의 가치를 찾기를 바란다.(이 기사를 위해 김종임 양주회암사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3)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조선의 설계자 '핵심 브레인' 정도전…성리학 중시하며 산업 억제정책 펼쳤죠

입력 2022.02.28 10:00 수정 2022.03.02 15:00 생글생글 743호

 
(85) 조선 건국은 정변인가, 혁명인가 (下)

중국인이 1997년 이후 새로 쌓은 호산장성. 고구려 박작성 위에 쌓았다.

 
신진사대부는 성균관과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치른 학자적 관리들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비판의식이 강한 이상주의자로, 야망을 실현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도전과 같이 신분이 한미하거나,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중소 토지만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기득권에 막혀 중간 관료에 머물렀다. 따라서 권문세족과 기존 질서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력이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해 세력을 이룬 이들은 ‘내우외환’이라는 고려 사회의 위기를 통감했다. 따라서 개혁이라는 뜻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위기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과 학문적인 기반, 가계의 차이 등으로 점차 입장에 차이가 생겨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됐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서 최영이 죽고 우왕이 쫓겨나자 온건파의 위기감은 최대치로 증폭됐다. 결국 두 세력은 권력투쟁을 벌였고, 온건파의 대표였던 정몽주는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이색·길재 등을 비롯해 ‘두문동 72인’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다가 숙청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위화도 앞 압록강에서 도하작전 훈련 중인 중국군.
 
정도전이 추진한 혁명의 내용과 성격
 
3단계는 건국에 성공한 이들이 사회를 개혁시키는 혁명 과정과 권력투쟁이다. 급진 개혁파는 다시 두 부류로 분열됐다. 하나는 힘을 장악한 이성계 이방원 등의 무장과 조준 같은 학자들이었다. 또 하나는 왕조 창업의 실질적 주역이자 혁명 이론과 정책의 근본 틀을 다진 정도전 중심의 강성 개혁자들이었다.

정도전은 학식이 뛰어나고,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장량을 자처할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지니기도 했다. 자기 목표를 실현하는 야망에 이성계를 끌어들이고, 끝내 성공하게 한 사람이다. 개혁 추진 이전부터 혁명에 이르는 과정 내내 정책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사회 개혁의 핵심인 토지의 경작과 분배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정책을 제안하고 부분적으로 실천했다. 철저한 이론 무장으로 성리학을 정치와 정책에 활용해 권문세족을 공격하기도 했다. 《불씨잡변》을 집필해 기득권인 불교 세력을 붕괴시켰다. 외교관의 경험을 살려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명나라를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보였다.

반면 요동정벌의 필요성을 주장해 명의 황제인 주원장의 위협을 받았다. 결국엔 이방원에게 죽임당하는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진나라의 한비자처럼 법률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법치주의 사회의 정착을 도모했고 백성의 이익을 소중하게 여겼다. ‘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민(民)은 복종하지만 민(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민(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 그가 쓴 《조선경국전》에 나오는 글이다. 나아가 개인과 혈통에 중심을 두는 왕권보다는 조직과 능력을 중시하는 관료정치와 재상정치를 추진했다. 과거 제도가 활성화되고, 서당 등의 교육기관이 전국에 걸쳐 생겨나는 등 교육의 수혜 범위가 확대되기도 했다. 결국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임당했지만, 그가 추진한 많은 정책은 정적인 태종에 의해 수용됐다. 이후 세종 때 꽃을 활짝 피우면서 조선은 질적으로 변신했다.
 
왕권과 신권의 투쟁·자주성 상실 문제도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정도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났던 이상주의 정치가이자 성공한 혁명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은 군사력을 동원한 권력쟁탈전을 넘어 이론과 실무능력을 겸비한 개혁세력이 청사진을 갖고 추진해 성공한 혁명으로 평가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정도전 등이 선택한 이론과 추진한 정책 등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왕권과 신권의 영원한 정치투쟁을 낳았고, 학자적인 관료들의 무능과 교조성, 성리학 중시로 인한 산업 억제와 자주성 상실 등이 심화됐다. 이런 폐해들은 조선 사회에 점점 암울한 기운을 드리웠고, 백성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지 혁명의 추진 세력이 그것까지 감당할 순 없는 것 아닌가.

어떤 성격의 주체들이 어떠한 이론과 청사진을 갖고 무슨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할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전체가 공평한 권리를 가지고 책임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영논리로 개혁과 혁명을 대하는 것은 결코 옳은 태도가 아니다.(4)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정도전 집에 웬 ‘말(馬) 운동 트랙’?…‘왕실마구간’ 드러난 종로구청터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4.05.14 05:00 수정 : 2024.05.14 20:53

정도전 저택에 웬 ‘말(馬)운동 트랙’? ‘왕실마구간’ 드러난 종로구청터

정도전 집에 웬 ‘말(馬) 운동 트랙’?…‘왕실마구간’ 드러난 종로구청

“말이 다닐 때 땅이 파이지 않게 한 시설일까.” 2021년 10월이었다. 종로구청 부지에 들어설 새로운 통합청사(구청+소방서 등) 공사 현장에서 수상쩍은 흔적이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건물터 5채와 함께 원형으로 깔아놓은 잡석 사이에 트랙 형태의 통로가 조성된 유구였다. 이곳은 조선 창업의 공신인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집터였고, 이후 사복시(궁중의 가마와 말 등을 관장하는 관청)가 들어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원형 마장 트랙

공사 중인 종로구청 통합청사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유구. 1843년 제작된 <숙천제아도> 와 발굴유구를 비교해보니 조선시대 사복시터가 분명했다. <숙천제아도> ‘사복시도’에 등장하는 열청헌터(사복시 책암관리 집무실 터와 좌우 마구간인 동고와 서고의 흔적도 보였다. ‘트랙을 갖춘 잡석 유구’ 역시 숙천제아도에 그 정체가 드러났다. |종로구청·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둥근 원형트랙의 정체

그랬으니 말과 관련된 유구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처음엔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말의 하중 때문에 지표면이 울툴불퉁해질까봐 깔아놓은 잡석’ 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발굴단(수도문물연구원)이 19세기 인물인 한필교(1807~1878)의 ‘숙천제아도(宿踐諸衙圖)’에 열람하자 그 단서를 찾아냈다. ‘숙천제아도’는 한필교가 평생 거쳐온(숙천·宿踐) 여러 관청(제아·諸衙)를 그린 그림(화첩)이다. 그 중 한필교가 1843년 사복시 판관(종5품) 시절 그린 ‘사복시’ 그림을 본 것이다.

발굴단은 드러난 유구와 그림 속 관아 및 시설을 비교해보았다. 우선 책임자인 사복시정(정3품)의 집무실(열청헌)과 좌우 마구간인 동고와 서고의 흔적이 맞았다. 그럼 이번 발굴의 핵심인 ‘원형 트랙을 갖춘 잡석 유구’는 어떤가.

둥근 대열의 정체

‘숙천제아도’를 보면 사복시 뜰에 말의 훈련을 담당하는 이마(理馬·정6품)의 지휘 아래 마부들이 둥근 대열로 말을 조련하고 있다. 그 그림과 발굴유구의 형태가 꼭 맞았다.|수도문물연구원·종로구청 제공

마침 ‘숙천제아도’에 심상치않은 모습이 보인다. 말의 훈련을 담당하는 이마(理馬·정6품)의 지휘 아래 마부들이 둥근 대열로 말을 조련하고 있다. 그 그림과 발굴 유구의 형태가 꼭 맞았다.

대체 어떤 훈련일까. 베테랑인 홍대유 과천 서울경마장 조교사에게 문의했더니 ‘말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인 시설’이란다.

말을 마굿간에만 두면 스트레스 받아서 살 수 없으며, 무엇보다 건강에도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소는 위가 4개지만 말은 1개죠. 여물을 먹고 되새김질 하는 소와 달리 말은 토하면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소화기관이 약한 말은 장에 가스가 차고, 혹은 장이 꼬이는 산통(疝痛)에 걸리기 쉬운데, 말의 사망 원인 중 으뜸이죠.”(홍대유 조교사)

그래서 말을 기르는 곳에서는 필수적으로 ‘원형 마장’을 조성시켜준다는 것이다.

경마장의 말운동

과천 서울경마장에서 운동 중인 경주마들. 소화기관이 약한 말은 장에 가스가 차고, 혹은 장이 꼬이는 산통(疝痛)에 걸리기 쉽다, 말을 기르는 곳에서는 필수적으로 ‘원형 마장’을 조성시켜준다.(홍대유 과천 서울경마장 조교사 제공

■구청사에 들어설 말 운동 시설

그렇다면 어떨까. 새롭게 들어설 종로구청 통합청사 자리에서 조선시대 옛 관청(사복시)의 흔적이 또렷하게 드러났다면….

다행히 종로구청이 새로 들어설 통합청사 지하에 유적전시관(967평·3196㎡)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 공간에는 발굴된 원형 마장 유구와 열청헌, 동·서고 등이 모두 원형 복원된다. 특히 바닥에 흔적만 남은 유구를 미디어 파사드 영상으로 재현해서 보여줄 계획이다. 지하의 유구는 구청 1층 로비와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연결되도록 할 계획이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시각적인 연출이다. 지상 1층에는 건물터 및 마장 유구의 실제 위치를 표시하는 경계석과 표식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종로구 통합청사는 2027년 말까지 완공할 계획이다. 정문헌 종로구청장은 “새롭게 짓는 관청에 이와같은 유구 전시관을 조성하는 것은 종로구청이 처음”이라고 밝힌다.

조선시대 사복시

19세기 인물인 한필교(1807~1878)가 평생 벼슬살이를 하면서 거쳤던 관청을 그린 <숙천제아도>. 그중 한필교가 1843년 사복시 판관 시절 그린 ‘사복시도’에서 원형 대열로 운동하는 그림이 표현되어 있다.|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정도전의 집 마굿간이 사복시터

이 대목에서 필자의 시선을 잡아끈 사료가 있다. 그것이 수진방이라고 일컫는 이 일대의 원래 주인공 이야기다.

그 주인공이 개국 조선의 설계자라 하는 삼봉 정도전이다. 그와 관련된 사료를 한번 살펴보자.

“정도전이 오래 살려고 ‘목숨 수(壽)’에 ‘나아갈 진(進)’자를 붙인 ‘수진방(壽進坊)’에 집을 마련했다. 그러나 천명에 죽지 못하자 사람들은 ‘수진(壽盡·목숨이 다함)의 조짐’이라 했다. 진(進·나아감)자가 진(盡·다함)자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삼봉집> 권8 ‘부록·사실’, <연려실기술> ‘지리전고·도성과 궁궐’)

무슨 말인가. 정도전은 경복궁과 근정전, 숭례문·흥인지문 등 궁궐과 전각, 성문은 물론이고 서울 5부 49방의 동네 이름까지 전부 지었다. 정도전이 지은 동네 이름 중에 ‘수진방’이 있었다. ‘오래 살기’(수진·壽進)를 원했던 정도전은 이 ‘수진방’에 집을 마련했다. 하지만 중도에 비명횡사했다. 사람들이 그때 “‘수진(壽進·오래 삶)’이 아니라 ‘수진(壽盡·목숨이 다함)’했다”고 혀를 찼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비고’ 등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유구 전시관

종로구청은 2027년 들어설 통합청사 지하 1층에 전시관을 마련, 발굴된 사복시의 건물과 마장 유구 등을 전시할 방침이다.|종로구청 제공

“수진방에 정도전의 집터가 있었다. 제용감(궁궐의 직물 조달·감독 관청), 사복시, 중학당이 모두 정도전의 집터라 한다.”

<한경지략> ‘각 동조’와 <고운당필기> ‘재용감’에 디테일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정도전의 사가(私家)가 수진방에 있었다. 지금의 중학은 서당 자리이고, 지금의 제용감은 안채 자리이며, 지금의 사복시는 마구간 터라고 한다. 아마도 정도전이 지세를 잘 보아서 말 4000마리를 매어둘 수 있는 땅을 차지한 것이다.”

정리하면 정도전 옛 집의 서당에 중학당이, 안채에 제용감이, 마구간에 사복시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중학동~수송동 사이에 어마어마한 토지를 소유했다눈 것이다.

사료대로라면 지금의 종로구청 통합청사 부지가 정도전 집의 마구간 자리였다는 뜻이다. 하기야 말을 4000마리를 매어둘 수 있을 정도의 마구간이었다니….

종로구청 통합청사 청사진

종로구청 통합청사의 지하에 들어설 유적 전시관에는 발굴된 원형 마장 유구와 열청헌, 동·서고 등이 모두 원형 복원된다. 특히 바닥에 흔적만 남은 유구를 미디어 파사드 영상으로 재현해서 보여줄 계획이다. 지하의 유구는 구청 1층 로비와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연결되도록 할 계획이다. 지상 1층에는 건물터 및 마장 유구의 실제 위치를 표시하는 경계석과 표식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종로구청 제공

■말발굽에 짓밟힌 정도전의 기운?

필자는 이 대목에서 ‘파가저택(破家저澤)’의 형벌을 떠올린다.

대역죄나 존속살인 등 강상죄인을 극형에 처한 뒤 그 집을 헐고(파가·破家), 집터에 연못을 팠던(저택·瀦澤)….

대역죄를 뒤집어쓴 풍운아 허균(1569~1618)이 능지처참과 함께 파가저택의 형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정도전은 허균처럼 ‘파가저택’의 극형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정도전의 집은 왜 그리 갈기갈기 찢겨 여러 관청터로 나뉘어진 것일까. <태종실록> 1409년 12월19일자에 ‘팩트’가 등장한다.

“어린 세자(이방석)를 등에 업고 종사를 무너뜨린 정도전 등의 토지와 밭, 노비를 국고로 몰수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환수된 땅에 여러 관청이 들어섰다. 그중에서도 굳이 궁중의 말을 담당하는 사복시를 세운게 심상치않다.

정도전의 기운이 서려있는 땅을 말발굽으로 짓밟으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수진(壽進)과 수진(壽盡) 사이

사복시터의 원 주인은 개국 조선의 설계자라 하는 삼봉 정도전이다. 여러 사료에 따르면 서울의 동네이름을 모두 지은 정도전이 오래 살기 위해 ‘목숨 수(壽)’에 ‘나아갈 진(進)’자를 붙인 ‘수진방(壽進坊)’에 집을 마련했지만 중도에 죽었고, 사람들은 ‘수진(壽進·오래 삶)’이 아니라 ‘수진(壽盡·목숨이 다함)’한 것이라고 설왕설래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정도전의 죄상

그렇다면 정도전의 죄상은 무엇이었던가. 1398년 8월26일이었다.

정도전은 자신의 집과 지근거리인 송현방(옛 미 대사관저 부근)에서 측근인 남은(1354~1398)·심효생(1349~1398)과 머리를 맞대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집은 남은의 첩 집이었다. <태조실록>이 전한 그 날의 긴 하루를 더듬어보자.

정도전 등은 어린 세자(방석·1382~1398)을 세워 국정을 농단했다. 세자(방석)는 태조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96)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당시 어린 세자에게는 장성한 이복형이 4명이나 살아있었다.

태조의 첫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의 소생들이었다.

그중 조선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다섯째 정안군 이방원(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은 어린 세자의 앞길에 큰 위협이 되었다. 정도전 등은 그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급기야 운명의 그날(8월26일) 정도전은 “임금(태조)이 위중하다”면서 정안군 등 왕자들을 긴급 소집했다. 궁궐로 끌어들여 모조리 죽일 참이었다.

정도전의 마굿간

<한경지략>과 <고운당필기> 등은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에 있었다. 지금의 중학은 서당 자리이고, 지금의 제용감은 안채 자리이며, 지금의 사복시는 마구간 터”라 했다. 정도전의 집에는 말 4000필을 매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한잔 술 실수에 그만…’

그 사이 정도전 등은 남은의 첩 집인 송현방에서 술을 마시며 ‘거사 후’를 모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낌새를 알아차린 정안군 등이 반격을 가했다. 세자(방석)와 그의 친형 방번(1381~1398) 등이 무참히 살해됐다.

또한 송현방의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1차 왕자의 난’이다.

<태조실록>은 “정안군(태종)이 엉금엉금 기어나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정도전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정도전이 그렇게 구차하게 삶을 구걸했을까. <삼봉집>(정도전의 문집)에는 죽기 직전 읊었다는 시 한 수(‘자조·自嘲)’가 실려있다. “조심, 또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操存省察兩加功) 책 속의 성현을 저버리지 않았는데(不負聖賢黃卷中), 30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三十年來勤苦業) 송현방 정자 한 잔 술에 허사가 되었네.(松亭一醉竟成空)”

이 시에는 정도전의 삶이 오롯이 정리되어 있다. 즉 새 왕조 건설을 위해 눈코뜰새없이 움직이던 중 일순간의 순간 방심으로 변을 당했음을 슬퍼했던 것이다.

정도전의 저택

각종 사료와 옛 지도 등을 토대로 보면 정도전의 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중학동~수송동 사이에 어마어마한 토지를 소유했다는 것이다.|수도문물연구원·종로구청 제공

■‘불의한 군주는 죽여도 좋다’

정도전의 삶이 어땠기에 그랬을까. 젊은 날의 정도전은 여느 사대부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나 모친·부친상으로 3년(1366~1369)의 낙향과, 부원파 이인임의 견제로 인한 9년의 유배 및 유랑 생활(1375~84)이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 사이 정도전의 가슴엔 ‘혁명의식’이 차곡차곡 쌓였다. 우선 절친인 포은 정몽주가 ‘읽어보라’고 건네준 <맹자>가 그의 심금을 울렸다.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군주가 아니라 한낱 사내에 불과하므로 (신하가) 죽여도 좋다”는 구절(‘양혜왕 하’)이 그것이었다. 역성혁명을 옹호하는 무시무시한 ‘맹자왈(曰)’이 아닌가.

긴 유배 및 유랑 생활에서 마주친 백성들의 비참한 삶도 정도전의 혁명의식을 깨웠다.

바야흐로 홍건적의 난과 왜구의 침입 등의 외우와 권문세족의 토지겸병 등 내환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권문세가들이 농민을 압박, 토지를 빼앗기에 혈안이 돼 토지 하나에 주인만 7~8명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반면 방방곡곡이 홍건적의 난과 왜구 침략으로 싸움터가 됐다.”(<고려사절요> 등)

비참한 밑바닥 백성들의 삶을 목도했기 때문일까. 정몽주(1338~1392) 등 다른 이들은 유배 중이나 유배가 풀렸을 때 임금을 향한 ‘연군시(戀君詩)’를 남겼다. 그러나 정도전은 일절 쓰지 않았다. 백성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임금을 무엇 때문에 고마워한다는 말인가.

한양 도성의 설계자

정도전은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을 잇는 총 18km의 한양도성을 설계하고 완성했다.}문화재청 제공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여전히 유랑 중이던 정도전은 1383년(고려 우왕 9) 함주(함흥)를 찾아 도지휘사로 동북지방 국토방위 책임자였던 이성계를 만난다.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1398년 8월26일)를 보자.

“(1383년) 정도전이 동북면의 이성계를 방문했다. 정도전은 (이성계) 정예부대의 호령과 군령이 자못 엄숙한 것을 보고 이성계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은들 못하겠습니까.’”

‘이성계의 그릇’을 탐색하러 온 정도전이 이성계군의 엄정한 군세를 보고 ‘역성혁명의 뜻’을 굳힌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내용이 ‘정도전 졸기’에 들어있다.

“조선 개국 즈음, 정도전은 왕왕 취중에 슬쩍 말했다. ‘한 고조(재위 기원전 202~195)가 장자방(장량·?~기원전 186)을 쓴 것이 아니다. 장자방이 곧 고조를 쓴 것 뿐’이다….”

장자방은 항우(기원전 2032~202)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개창한 한 고조 유방의 책사였다.

정도전은 술자리를 빌려 큰 일 날 소리를 해대고 있다. ‘태조 이성계(한 고조 유방)가 정도전(장자방)을 기용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장자방)이 이성계(한 고조)을 이용해서 조선(한나라)을 개창했다’고 취중진담했다는 게 아닌가.

만기친람

정도전은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했다. 또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소지문 등 4대문과 소의문·창의문·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개국 조선의 설계자

‘이성계의 장자방’이 된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절대 공훈자가 된다.

정도전은 동북면 도안무사가 되어 함길도를 안정시키고 돌아왔다. 태조는 그런 정도전을 두고 “경(정도전)의 공이 (고려 때 동북 9성을 경영한) 윤관보다 낫다”고 치하했다.(<태조실록> 1398년 3월30일)

1394년 조선왕조의 기초 헌법이 된 <조선경국전>의 편찬도 업적이다. 통치규범을 육전으로 나누었는데, 국가형성의 기본을 논한 규범체계서였다. <조선경국전>은 훗날 <경국대전> 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도전은 신도읍지(한양) 건설의 총책임자가 되어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한양의 종묘·사직·궁궐·관아·시전·도로의 터를 정하고 그 도면까지 그려 태조 임금에게 바쳤다. 한양도성(18㎞)을 쌓은 것도 정도전이었다. 백악산(북악산)~인왕산~목멱산(남산)~낙타산(낙산)을 잇는 도성을 설계했다. 오행의 예에 따라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소지문(숙정문) 등 4대문과 소의문·창의문·혜화문·광희문 등 4소문의 이름도 지었다. 서울을 동·서·남·북·중 5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수십개의 방(坊)으로 구획하고 이름을 정한 것도 정도전이었다. ‘수진방’처럼….

동네 이름까지…

서울을 5부49방으로 나누고 이름을 정한 것도 정도전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군주는 어리석어도 좋다”

정도전의 사상 가운데 으뜸은 역시 ‘재상 중심’의 신권(臣權) 정치였다. 그의 주장은 너무 혁명적이었다.

“군주의 실제 권한은 딱 두가지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임명하는 권한이다. 다른 하나는 그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는 것이다.”(<조선경국전> ‘상·치전·재상연표’ <경제문감> ‘상·재상’)

여기서도 주안점이 있다. 군주는 국사에 관계된 큰 문제만 협의할 뿐, 그 밖의 정사는 재상이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도전은 왜 재상에게 사실상의 전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재상정치

정도전은 군주의 직책은 “훌륭한 재상을 잘 선택하는 것”이라고 못박았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군주는 어둡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이 한결 같지 않다. 따라서 군주의 아름다운 점은 따르고 (군주의) 나쁜 점은 바로잡으며…그래서 ‘도와서 자로잡는다’는 의미에서 상(相·재상)이라 한다.”(<조선경국전> ‘상·치전총서’)

무슨 말인가. 대대로 왕위를 잇는 세습 군주가 늘 현명하거나 똑똑할 수 없다. 군주가 현명하면 물론 좋다. 그러나 설혹 어리석은 군주가 즉위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서 뛰어난 관료들이 정사를 펼치고, 그중에서도 최고의 영재인 재상이 정사의 구심점을 이루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권정치, 즉 재상정치의 요체이다.

어리석은 군주, 똑똑한 재상

정도전은 재상에게 사실상 국정 운영의 전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습하는 군주가 똑똑할 수도 있지만 어리석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쭉날쭉하지만 그 시대에 똑똑한 현인집단, 관료집단에서도 가장 똑똑한 재상을 구심점으로 정사를 펼치면 된다고 보았다,

■유학도 으뜸, 개국의 공도 으뜸

이런 정도전이었으니 송현방에서 죽임을 당할 때 ‘30년 사업이 한 잔 술에 허사가 되었다’고 한탄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과연 물거품이 되었을까. 아니었다. 아니었다. <태조실록>은 정도전을 참수한 태종의 명으로 편찬된 정시이다. 그런 <태조실록>은 정도전의 죄상을 거론하기는 했다. 그러나 말미에 “태조(이성계)와 함께 조선개국에 모든 힘을 쏟은 정도전이야말로 ‘참으로(誠)’ 상등의 공훈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참으로(誠)’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진심’이 듬뿍 담겨있는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정도전의 목을 벤 태종마저도 그를 ‘조선의 개창자’임을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영웅호걸이 등장했으나…

1465년(세조 11) 영의정 신숙주는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다.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선생(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고 극찬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자료

1465년(세조 11) 영의정 신숙주(1417~1475)는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1427~1501)의 부탁을 받아 <삼봉집>의 후서를 써주면서 이렇게 평했다. “개국 초 나라의 큰 규모는 모두 선생이 만들었다. 당시 영웅호걸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만 그 분(정도전)과 비교할 만한 이가 없었다”고…. 태조(이성계·재위 1392~1398)는 1395년(태조 4) 10월29일 낙성된 경복궁에서 연회를 베풀며 정도전에게 네 글자를 대서특필해 선물했다. ‘유종공종(儒宗功宗)’. 즉 ‘유학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도 으뜸’이라는 글자였다. 그야말로 핵심을 찌르는 당대의 평가가 아닐 수 없다.

목만 남은 유골

1989년 삼봉 정도전의 묘로 알려진 서울 서초동 우면산자락에서 확인된 무덤에서 상급의 조선백자와 함께 몸통없이 머리만 남은 유골이 확인됐다. 참수된 정도전의 머리일 가능성이 있다.|한양대박물관 제공

■목없는 시신의 주인공

지난 1989년 3월,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 삼봉 정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수상한 유골이 확인됐다.

몸통은 없고, 머리만 남은 유해였다. 이와함께 상당히 정제된 조선초기의 백자도 함께 수습됐다.

무덤을 발굴한 한양대박물관은 “상당한 신분의 피장자였음이 분명하다”면서 “정도전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고 추정했다. 이 대목에서 “정안군이 정도전의 참수를 명했다(令斬之)”는 실록의 기사(1398년 8월26일)가 눈에 띈다.

아마도 어떤 용기있는 이가 정도전의 잘린 목을 수습해서 정성스럽게 묻어두었을 지도 모른다.

이번 종로구청 통합청사 발굴에서도 사복시터는 나왔지만 정도전 집터는 확인되지 않았다.

사료에 표시된 정도전의 옛 집 영역이 너무 넓으니 특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근처 어디엔가 묻혀있을 삼봉 정도전의 자취를 가늠해보며 그 이의 업적을 떠올려봄이 어떨까.(이 기사를 위해 수도문물연구원의 오경택 원장과 김윤호 조사연구팀장, 종로구청의 강영식 문화유산과 문화유산활용팀장, 홍대유 과천 서울경마장 조교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5)

<참고자료>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수송동(146-2번지) 종로구·종로소방서 통합개발 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약식보고서’, 2024

한양대박물관, <전 삼봉 정도전 선생묘 발굴조사보고서>, 1990

한영우, <정도전-왕조의 설계자>, 지식산업사, 199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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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메뚜기 삼킨 당태종, 제단 오른 조선 태종'···작금엔 "내 탓이오" 지도자가 없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0.02.21 06:00 수정 : 2020.02.2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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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선도본>(조선 후기 조운선과 군선을 그린 도본)에 나타난 조운선. 선수(뱃머리)가 선미보다 넓고 깊이가 깊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의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배의 구조를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선박사고의 위험성도 커졌을 것이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정관(당 태종의 연호) 2년인 628년 당나라 황제 태종(재위 626~645)이 살아있는 황충(蝗蟲·메뚜기 혹은 풀무치)을 꿀꺽 삼켰다. 독특한 음식 취향인가 싶지만 그게 아니다. 당시 당나라 백성들은 큰 시름에 빠져 있었다. 가뭄과 함께 황충떼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뒤덮었다. 가뜩이나 가뭄 때문에 고초를 겪던 백성들은 황충떼까지 창궐해서 그나마 맺힌 곡식을 훑고 지나가자 발만 동동 굴렀다.

■탄황의 고사

당 태종이 황급히 들에 나가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한 뒤 황충떼를 향해 소리쳤다.

“사람은 곡식으로 살아가는데, 너희가 먹어대면 백성에게 해가 된다. 잘못이 있다면 모든 책임은 짐(나)에게 있다. 너희는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어라. 백성에게는 해가 없도록 해라.”

태종은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돌발행동을 벌였다. 들판을 메우던 황충을 손수 두 마리 잡아 삼킨 것이다. 대신들이 뜯어 말렸지만 늦었다. 태종은 “황충의 피해가 나에게만 옮겨지기를 바랄 뿐”이라며 ‘삼키고’(呑蝗) 말았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황충떼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것이 당 태종의 ‘탄황의 고사’이다.(<정관정요>)

 

■“내가 희생양이 되겠다”

비단 당 태종 뿐이 아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국가적인 재난 발생 때마다 “내탓이오”를 외친 군주들이 있었다. ‘내탓이요’의 원조는 바로 상나라를 세운 탕왕(기원전 1600~1589)이다. 우여곡절 끝에 창업한 탕왕에게 위기가 닥쳤다. 무려 7년간이나 가뭄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자 나라의 길흉을 점치던 태사(太史)가 “사람을 제물로 삼아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고 아뢰었다. 탕왕은 “어찌 생사람을 죽일 수 있냐”면서 “내가 희생양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탕왕은 목욕재계하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른 뒤 자기 몸을 흰띠풀로 싸서 희생물의 모습을 갖추고는 뽕나무숲, 즉 상림(桑林)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탕왕은 이 때 ‘6가지의 일(六事)’로 자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가 무절제해서 정치가 문란해진 겁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어 곤궁에 빠졌습니까. 궁궐이 너무 화려합니까. 제가 궁궐 여인들의 청탁에 빠졌습니까. 뇌물이 많아져서 정도를 해치고 있습니까. 제가 아첨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어진 이를 배척하고 있습니까.”(<사기> ‘은본기’)

그렇게 탕왕이 간절한 자책의 기도를 올리자 금방 천 리에 구름이 몰려들어 비를 뿌렸다. 덕분에 수 천 리의 땅이 해갈되었다. 상 탕왕이 가뭄을 맞아 상림에서 스스로 6가지를 자책했다고 해서 ‘상림육책(桑林六責)’ 혹은 그냥 ‘육사(六事)의 자책’라고 한다.(<십팔사략> <제왕세기> <사문유취> 등)

상 탕왕과 당 태종을 섞어 벤치마킹한 황제가 있었으니 바로 송나라 태종(재위 976~997)이다. 송 태종은 황충떼가 하늘을 뒤덮자 ‘하늘의 노여움을 산 것은 곧 짐(태종)의 책임’이라고 자책하면서 역시 돌발행동을 벌였다. “짐이 내 몸을 태워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고자 한다”고 자기 몸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곧 비가 내리고 황충의 떼가 즉시 죽은 것이다. 비단 중국 뿐이 아니다. 조선의 임금들도 상나라 탕왕과 당나라 태종, 송나라 태종의 고사를 줄기차게 인용했다. 영조는 1765년부터 3년 이상 가뭄이 이어지고 황충떼가 창궐하자 ‘당태종의 탄황’ 고사를 인용하며 한탄했다.

“당 태종은 백성을 위해 황충를 삼켰는데 아무리 어진 군주라도 정성이 없었다면 어찌 목구멍으로 넘어갔겠느냐. 그러나 이제 늙어버린 과인이 당 태종처럼 할 수 있을 지 걱정이다.”(<영조실록> 1765년)

조선시대 조운선 그림(19세기 화기 유운홍의 작품)이다. 조운선 운행과정에서 과적과 무리한 운항 때문에 대형참사가 잇달아 발생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태종우를 아시나요?

조선에서 ‘모두 내탓이요’ 정신을 몸소실천한 이가 바로 태종이다.

즉 조선시대에 해마다 음력 5월10일에 내리는 비를 특별히 ‘태종우(太宗雨·태종 임금이 내려준 비)’라 했다. ‘태종우’가 과연 무엇인가, 조선말기 문신인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 ‘문헌지장’ 편을 보면 이 태종우의 유래가 잘 나와있다.

“태종이 승하하기 직전 시절이 하수상했다. 전국에 가뭄이 들었다. 이때 태종이 ‘백성들이 어찌 살라는 것이냐’고 걱정하고는 ‘안되겠다. 과인이 하늘에 올라가 천제에게 즉시 단비를 내려달라고 고하겠다’고 했다. 과연 음력 5월10일 태종이 승하했는데,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

이러한 민간의 속설에 시간이 흐를수록 드라마가 덧붙여진다.

“태종 말년에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많은 사람이 죽자 태종은 스스로 제물이 되기로 했다.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붙이고 비가 내리기를 간구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장작불이 꺼졌다. 해마다 이날 전국적으로 비가 왔는데 이 비를 태종우라 한다.”(<한국대표야담집> 2)

처음엔 태종이 “내가 죽은 뒤에 하늘에서 천제를 만나서 비를 뿌리게 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기우제의 희생물을 자처했다느니, 실제로 장작더미 위에 앉아 불을 붙였다느니 하는 이야기로 번졌다. 상나라 탕왕의 고사를 덧붙인 것이 틀림없다.

야사 뿐이 아니다. 정사인 <영조실록>에도 ‘태종우’가 나온다. 즉 1764년(영조 40년) 음력 5월10일 약간의 비가 내리자 영조가 반색하는 내용이다.

“비가 약간 내렸다. 영조는 ‘이는 조상(태종)의 덕분’이라고 했다. 해마다 이날이면 문득 비가 내리니, 사람들이 ‘태종우(太宗雨)’라고 했다. 그래서 임금이 언급한 것이다.”

선조~인조 때의 문신인 박동량(1569~1635)의 <기재잡기>에는 심상치않은 내용이 들어있다.

즉 “1591년 5월 10일 근 200년 만에 처음으로 태종우가 내리지 않아 식자들이 은근히 걱정했다”는 것이었다. 이 언급이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태종의 승하(1422년) 이후 1590년까지 170년 가까이 해마다 음력 5월10일이면 어김없이 태종우가 내렸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랬던 태종우가 내리지 않았으니 조짐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니 태종우가 내리지 않은 조짐이 전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당대의 속설이었던 듯 싶다.

조선시대 조운선을 복원한 모양. <각선도본>을 근거로 만들었다. 태종 때 이러한 조운선이 침몰하면서 1000여명이 물에 빠져 수백명이 죽고 쌀 1만석이 수장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선판 세월호 사건

‘태종우’의 당사자인 태종이 또 ‘자책의 임금’으로 등장한다. 때는 바야흐로 1403년(태종 3년) 5월5일 큰 재난이 일어났다. 경상도의 조운선(세금 현물을 운반하는 배) 34척이 배가 한가운데서 침몰했다.

피해가 막심했다. 쌀 1만여석이 수장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배에 탔던 1000여명이 물에 빠져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태종은 “모든 사고의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고 자탄했다.(<태종실록>)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출항날(5월5일)은 수사일(受死日·대흉일)이고, 풍랑마저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우면 안되었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백성을 몰아서 사지로 나가게 만든 것이다.”

태종은 그러면서 “쌀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느냐”고 애통해했다. 이 참사의 원인을 보면 기막힌다. 사고발생 후 3개월 후인 8월,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보자.

“올해 조운선을 올릴 때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의 중량을 제대로 감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수군 수백명을 수장시키고, 적재한 쌀 1만 여 석을 모두 물에 빠뜨렸습니다. 이로써 부모 처자가 하늘을 부르며 통곡했습니다.”

결국 사고가 난 배는 자질이 부족한 선장이 날씨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채 운항을 강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과적이 사고의 큰 원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태종은 신하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깨알지시’를 내리는 대신 ‘내탓이오’를 외치고 있다.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 날라든 메뚜기 떼. 1억 마리의 메뚜기가 서아프리카 대륙에서 넘어왔단다.

■천재지변까지 책임진 군주

사실 조선시대 조운선이나 6년 전의 세월호는 전형적인 인재(人災)여서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국왕이나 황제가 ‘당신 탓’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천재지변까지 어떻게 책임지란 말인가.

하지만 왕조시대의 왕은 특별한 존재다. 한자인 ‘왕(王)’ 자를 뜯어보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소통시켜서 백성들을 먹고 살게 하는 것이다. 조선조 세종대왕이 이런 말을 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처럼 우러러 보는 사람들(民惟邦本 食爲民天)이다. 만약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 군주의 책임이다….”(<세종실록>)

그렇다면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어렵게 하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순자> ‘왕제(王制)’는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水則載舟 水則覆舟)”고 했을까.

순자가 말한 물(水)은 백성, 즉 민심을 말하고, 배(舟)는 군주를 말한다. 민심을 잃은 군주는 언제든 민심에 의해 뒤집힌다는 얘기다. 좀 극단적인 사례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부여에서는 기상이변으로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인다”고 했다.

왕조시대엔 메뚜기(황충) 떼가 습격하면 ‘임금의 부덕’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그래서 중국 뿐 아니라 조선의 군주들도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나면 “모두가 내 책임”이라고 자책하면서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운 것이다. 때로는 인간 제사의 희생물을 자처한 적도 있다. 땅과 사람, 하늘을 소통시키는 군주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작금의 코로나 19 사태와 함께 새삼 메뚜기를 삼킨 당 태종, 제단의 희생양을 자처한 상 탕왕과 송 태종, 조선의 태종 임금을 떠올린다. 지금 코로나 19의 진원지인 중국의 최고지도자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행보가 도마 위에 올랐다. 다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재난과 맞닥뜨린 각국 최고지도자들은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이고 있는가.(6)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집현전 설치해 젊고 뛰어난 학자들 등용, 건국세력 대체…정치의 세대교체 추진했죠

입력 2022.03.21 10:00 수정 2022.03.22 10:00 생글생글 746호

(88) '역사적 천재'세종대왕(上)
서울 광화문광장에 위치한 세종대왕 동상.
 
역사에서 천재가 등장할 때 사회는 급변하고, 동시대 사람들은 그 덕분에 풍족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역사의 천재’란 어떤 성격과 능력을 갖췄을까. 이들은 머리가 좋고,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과 현상의 불확실성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졌다. 더불어 모든 사람을 아끼고, 시대와 자연까지 돌보는 마음씨를 지녀야 한다. 나아가 타인과 조직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단군, 고주몽, 김춘추, 왕건, 이순신 등은 우리 역사의 천재들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그런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세종대왕 이도(李)는 1397년 태어나 1418년 6월 갑자기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의 선택으로 두 달 만에 4대 임금이 됐다. 피비린내와 풋내를 벗지 못했던 조선은 세종대왕이 즉위한 1418년부터 과로와 당뇨병으로 운명한 1450년까지 32년 동안 질적으로 변신했다. 고려를 없앤 명분과 조선을 존속시킬 힘을 동시에 얻었다.

불가사의하다. 그의 업적을 보면 한 인물이, 한 시대에 이렇게 의미 깊고 다양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다. 그를 역사의 천재로 만들었을 시대 상황, 정책에 참여한 인물, 업적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본다.
 
세종대왕을 정치인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경기 여주시에 자리한 세종대왕릉. 한경 DB
 
첫째, 젊은 임금은 야망과 집권 의지를 가진 건국세력을 견제하면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정원을 강화하고, 도승지(비서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반대를 무릅쓰고 1420년 집현전을 설치해 젊고 실력이 뛰어난 학자들로 신권력집단을 양성했다.

둘째, 성리학을 활용해 ‘성(性)’과 ‘법’, ‘률’로 합리적인 국가 체제의 토대를 완성했다. 귀족, 무신, 권문세족 등 가문에 근거한 고려 후기에 대한 반동이었고,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한 건국세력을 견제하는 정책이었다.

셋째, 건국의 정당성을 세우고, 정치의 명분을 분명히 할 목적으로 이론을 정립하고, 역사서를 편찬했다. 말년인 1445년에는 질병의 고통을 무릅쓴 채 조선의 창업과 가계를 찬양할 목적으로 《용비어천가》 제작에 몰두했다. 《삼국사기》를 애독한 그는 우리 역사의 가치와 조상들의 소중함을 알고, 1443년엔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다. 죽음 직전까지 《고려사》를 편찬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또 1429년 7월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과 관련된 기록을 인용하고, 북부여 동부여 등의 역사를 서술한 것은 세종 시대의 인식과 결과물이다. 또 1444년에는 전통역(曆)과 원나라·명나라의 역, 정확한 이슬람역을 참고해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완성했다. 이는 천체의 운행을 정치 행위에 비유해 나라의 자의식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당시 명나라가 알면 심각한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미 즉위 2년인 1420년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1434년에는 갑인자를 제작해 이런 출판 사업들이 발전할 수 있었다.

넷째,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국제질서를 최대한 활용했고, 자주국방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무렵 명나라의 3대 영락제는 주변 국가를 군사적으로 정복했다. 1405년부터 환관인 정화를 지휘자로 7차에 걸쳐 해양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 때문에 명나라 중심의 질서에서 탈피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주성을 일부 양보하는 대신 정치적 보장과 무역상 실리를 선택했다.

세종은 무장인 태조와 태종의 유전 때문인지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군사력 증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432년(즉위 14년) 12월 여진족이 기마병으로 압록강을 넘어 약탈하자 분노한 세종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작전회의에 참여하면서 직접 전술까지 지시했다. 결국 두만강 유역에 6진, 압록강 유역에 4군을 설치해 발해 멸망 후 불안정했던 이 지역을 안정적인 영토로 삼았다.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땅을 개간하는 사민(徙民)정책까지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나 일부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비록 상왕인 태종의 정책이었지만, 즉위 해인 1419년엔 이종무를 파병해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어 1426년 삼포(부산, 창원, 울산)를 개항했고, 1443년에는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등 강온양면 정책을 구사했다.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432년(즉위 14년) 12월 여진족이 기마병으로 압록강을 넘어 약탈하자 분노한 세종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두만강 유역에 6진, 압록강 유역에 4군을 설치해 발해 멸망 후 불안정했던 이 지역을 안정적인 영토로 삼았다. 또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즉위 해인 1419년에는 이종무를 파병해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어 1426년 삼포(부산, 창원, 울산)를 개항했고, 1443년에는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등 강온양면 정책을 구사했다.(7)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정치의 근본은 '백성의 유복한 생활'임을 안 세종…농업 기술개발에 힘쓰고 세금 공평하게 내게 했죠

입력2022.03.28 10:00 수정2022.03.29 10:00 지면S12

(89)'역사적 천재'세종대왕 (下)
세종대왕이 만든 ‘혼천의’ ‘측우기’ ‘앙부일구’. 2020년 ‘발명의 날’을 기념해 서울 광화문광장에 설치했던 모습. /한경 DB
 
세종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장비를 만들고, 무기를 개량했다. 1448년 신기전이 발명됐는데, 한 번에 15발씩 연속으로 100발을 발사할 수 있고 사거리가 1000m 이상인 신병기였다. 수레 등으로 운반이 가능한 조립식 대포(총통 완구)를 만들고 화포 주조와 화약 사용 방법, 규격 등을 그린 《총통등록》도 발간했다. 해전을 위해 일본인과 유구인의 도움을 받아 개선한 선박을 한강에서 시험운행했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고 했던 태종의 평가처럼 뛰어난 전제군주라고 볼 수 있지만, 세종은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대지주인 신하들 반대 무릅쓰고 조세공평화

세종은 백성들의 생활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착취경제가 아닌, 생산경제의 도입을 시도했다. 정치의 근본은 백성들의 유복한 생활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인본주의자였다. 농법 개량에 노력을 기울여 1429년에는 농사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비록 통치기술로도 활용했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 강했다. 1433년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이듬해에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1442년부터는 측우기를 사용, 전국의 강수량을 골고루 측정해 농사에 도움을 줬다.

그는 조세를 감면하는 정책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전국의 토지를 풍흉(豊凶)에 따라 9등급(연분 9등법)으로, 비옥도를 검사해 6등급(전분육등법)으로 나눴고 20년마다 재측량했다. 이렇게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하는 일은 당연히 대지주인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7년 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즉위 25년째인 1443년에 시행했다.

 
 
그 밖에도 도량형을 정비하고, 조선통보라는 금속화폐도 주조했다. 만약 많이 사용됐다면 실물경제와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력도 신장됐을 것이다.

세종은 지성인들의 말과 성인들의 실천을 국가 정책으로 집행하려 노력한 정치가였다. 그는 백성을 시혜나 훈도의 대상을 넘어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삶의 주체가 돼 존재가치를 구현해야 하는 인간으로 봤다. 이 때문에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호(code)’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오랫동안 집현전 학자들과 협력해 연구한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성공했다. 3년간의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한 훈민정음의 해례에 ‘제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제작한다고 선언했다. 모든 백성이 기호를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500년 후 훈민정음의 가치 폭발적으로 빛나

실제로 소수의 백성과 여인들은 훈민정음 덕분에 제한적이지만 삶의 주체임을 자각했고, 자기 권리를 요구할 때도 큰 도움을 받았다. 500년이 지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훈민정음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빛을 발했다. 한글이 일상화된 덕분에 감성적이고, 추상적이며, 사변적인 한국 문화는 논리적 사고, 수리적 사고, 합리적인 행동에 기초한 사회 구조로 변했다. 교조성이 적어지고 실용성이 강해졌다.

한글은 표기방식의 효율성, 신속한 판단과 응용능력 향상에 적합한 기호로, 현대 한국을 세계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이 건국된 초기는 역동성, 자발적인 창조성을 발현하는 인재들의 시대였다. 세종은 인재를 발굴하고 키워 역사의 인물로 만든 인재 중의 인재인 ‘역사의 천재’였다. 난국에 처한 한국. 세종 같은 ‘역사의 천재’를 기다리기에는 시급한 상황이니, 그를 흉내 낼 정도의 지도자라도 출현하면 좋으련만.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세종은 후생복지 정책에 힘을 기울여 굶는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의창을 설치했고, 백성들의 건강과 치료를 위해 ‘혜민서’ ‘활인서’를 운영했으며,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의 의학서적도 펴냈다. 1430년에는 서열이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고가의 사유재산인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고, 매질하는 사형을 금하는 법까지 제정했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제군주와 양반들이 지배하는 서열사회의 근간을 흔든 성군이었다.(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580년 만에 ‘갑툭튀’한 장영실의 ‘신상정보’…새빨간 가짜뉴스일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4.01.09 05:00 수정 : 2024.01.09 19:44

2022년 5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의 현판, 궁중현판’ 특별전에 등장한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 그 현판에 천재과학자 ‘장영실’의 직위(호군)과 자(실보), 탄생연도(계유·1393), 본관(경주)가 적혀있었다.|국립고궁박물관·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연구사 자료

호군-장영실-실보-계유-경주인’. 2022년 5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의 현판, 궁중현판’ 특별전을 둘러보던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눈이 번쩍 뜨이는 현판 1점을 보았다.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이하 현판)이었다. 1857년(철종 8) 창경궁 화재로 불탄 주자소를 재건하면서(1858) 내건 현판이었다. 현판에는 계미자(1403)부터 경자자(1420)·갑인자(1434)·정유자(1777)·임인자(1782)·병진자(1796) 등을 주조한 선배들과 함께 무오자(1858) 담당 관원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은 ‘장영실’이었다. ‘호군(정4품) 장영실’과 함께 ‘자(字·다른 이름)=실보(實甫)’, ‘태어난 해=계유·1393)’와 ‘본관=경주’가 적혀 있었다. 단 12자에 불과한 장영실의 초간단 인적사항이었다.

‘활자 주조를 감독한 신하 명단을 새긴 현판’. 1857년(철종 8) 창경궁 화재로 불탄 주자소를 재건하면서(1858) 내건 현판이었다. 현판에는 계미자(1403)부터 경자자(1420)·갑인자(1434)·정유자(1777)·임인자(1782)·병진자(1796)·무오자(1858) 담당 관원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인 생몰연대

그러나 강민경 학예사는 이 12자에 ‘꽂혔다’. 장영실이 누구인가. 물시계인 자격루를 비롯해 일성정시의(해·별시계 겸용 시계), 해시계(앙부일구), 천문관측대(간의대) 등을 발명했거나 제작 및 실무를 책임진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장영실과 관련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출세 이후의 행적은 <세종실록>에 실려있지만, 전후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당연히 생몰연대도 미상(?~?)이다.

그저 원나라(소주·항주) 출신 아버지와 동래현 관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관노라는 이력(<세종실록> 1433년 9월16일·1434년 7월1일)만이 남아있다. 말년의 행적도 묘연하다.

1442년(세종24) 세종이 타는 가마(안여)가 부서진 책임을 지고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마지막이다.

그간의 연구로는 장영실이 1385~90년 사이에 태어났고, 아산 장(蔣)씨로 추정했지만 분명한 근거는 없다.

그런데 ‘장영실의 탄생연도=1393년(계유)’이고, ‘출신=경주 장씨’라고 특정한 현판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사실 이 현판은 1999년 문화재청이 펴낸 도록(<궁중현판>)에도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장영실’에 주목한 이는 없었다.

장영실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저 원나라(소주·항주) 출신 아버지와 동래현 관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관노라는 이력(<세종실록> 1433년 9월16일·1434년 7월1일)만이 남아있다.

■왕자의 난, 인조반정을 기억하며…

강민경 학예사는 본격적으로 ‘장영실과 현판 사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현판에서 한가지 ‘남다른 무엇’이 읽혔다. 궁궐 또는 관청·관아에 걸기 위해 관원의 명단을 새긴 현판은 많다.

그러나 절대 다수는 생존 관원의 이름만 새긴다. 물론 예외는 있다. 1743년(영조 19) 5월7일 영조가 창의문에 올라 “계해년(1623년·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라”(<승정원일기>)는 명을 내린 바 있다.

영조는 “과거 태종의 헌릉 신도비에 개국(1392)·정사(1398·1차 왕자의 난)·좌명(1400·2차 왕자의 난) 공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과 같다”고 부연설명했다.

그럼 영조는 왜 창의문에 ‘120년전 인조반정의 공신 명단’을 새긴 현판을 걸라는 명을 내렸을까.

창의문은 1623년 3월12일 밤 인조반정군이 진입한 관문이다. 반란군이 이 문을 깨고 들어와 무혈입성했다.

태종 헌릉의 ‘신도비’나 ‘창의문 현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의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룬 사건에 공을 세운 과거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앞날의 사표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자격루가 완성되자 세종은 “원나라가 물시계를 만들었다지만 장영실의 정교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장영실은 만대에 이어질 기물을 만들었다”고 극찬했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선배들을 기억하라!

주자소 현판은 어떨까. 강민경 학예사는 이 현판의 원본은 조선의 중흥군주인 정조 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했다.

현판은 세종대(갑인자·1434)에서 340여년 뒤인 1777년(정조1) ‘정유자’ 주조 담당관의 이름으로 건너뛴다.

주자소 명칭은 잠시 ‘감인소’로 일컬어졌다가 1796년 다시 ‘주자소’로 되돌아간다.(<정조실록> 1796년 12월15일 등)

그렇다면 이 현판은 정조가 ‘감인소’를 ‘주자소’로 바꾼 1794~96년 사이에 제작되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때 제작된 현판을 이어받아 일부 사항을 보완해 1858년 재건된 주자소 건물에 내걸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긴 정조는 “세종을 동방 태평 만세 왕업의 터전을 닦으신 성군”(<정조실록> 1800년 1월20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정조는 또한 임진자(1772)·정유자(1777)의 주조나, <국조보감> 등의 완성과 같은 각종 문적 사업을 벌일 때 세종이 주자소에서 이룬 성과를 본받고자 했다. 그렇다면 이 현판은 정조가 역대 주자소 관리들의 공을 되새기고자 제작한게 아닐까. 태종이 상기시킨 ‘개국 및 1·2차 왕자의 난’의 공신과, 영조가 본받은 ‘인조반정’의 공신처럼….

장영실은 자격루를 비롯해 일성정시의(해·별시계 겸용 시계), 해시계(앙부일구), 천문관측대(간의대) 등을 발명했거나 제작 및 실무를 책임진 인물이었다.

■경주 장씨인가

그러한 역대 주자소 관리 명단에 ‘장영실’의 이름 석자가 빠질리 만무하다.

하나하나 현판에 새겨진 장영실 관련 내용을 짚어보자. 먼저 장영실의 벼슬인 ‘호군(護軍)’은 정4품의 꽤 높은 관직이다. 장영실이 ‘호군’을 역임한 것이 ‘1433년 9~1438년 1월’이다. 이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활자라는 ‘갑인자’가 제작된 1434년(세종 16), 바로 그 무렵이다. 현판은 또 장영실의 자, 즉 다른 이름을 ‘실보(實甫)’라 표기했다.

이 또한 다른 사서나 문헌에 없는 기록이다. 장영실의 ‘실보’처럼 자신의 이름을 딴 ‘자’는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무관(懋官)’처럼 드물지만 더러 보인다. ‘출생연도인 계유년(1393년)’은 어떠한가. 사실이라면 ‘미상(?~?)’으로 소개된 장영실의 생몰년 가운데 ‘생년’은 해결된다. 장영실의 가문은 어떠한가. 현판에서는 ‘본관=경주’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장영실의 가문은 ‘아산 장씨’로 알려져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도 경주 지역 성씨 중에 ‘장(蔣)’씨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장영실=경주 장씨’는 잘못 기록된 것일까. 그렇지 않을 수는 있다.

중국 원나라 출신인 장영실이나 그 아버지가 세종으로부터 ‘경주 장씨’ 성을 하사받았을 수도 있다.

위그르족 출신인 설장수(1341~1399)가 조선 건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조에게서 경주 설씨를 하사받은 경우가 있으니까….

만약 ‘장영실=경주 장씨’였다면 어찌된 일일까. 1442년 이후 장영실의 행적이 묘연해진 뒤 그 후손들이 ‘아산 장씨’에 기대어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문 관측 기구에 흠뻑 빠진 세종은 장영실 등에게 “너희는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으로 익혀와서’ 모방해서 만들라”는 밀명을 내린다.

■볼수록 금이 가는 신뢰감

뭐 여기까지는 논란은 좀 있을 수 있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현판과 각종 문헌·사료를 비교 검토하던 강민경 학예사는 갈수록 벽에 부딪힌다.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대목이 여럿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이 현판은 1858년 걸렸고, 그 원본은 1794~96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장영실이 활약한 1430년대와는 360~420년의 갭이 생긴다. 그런 유구한 세월이 흘렀으니 조선 초기 인물과 관련된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을 것이다. 비근한 예가 있다.

1729년(영조 5) 윤7월4일 영조는 세종조에 개발된 갑인자 활자 등을 두고 신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세종조에 금속활자를 주조했는데, 그 공효(공적과 효과)가 어떤가.”(영조)

“당시 호군 장영은 생각이 교묘하고 기기를 만드는데 뛰어나서 물시계(자격루) 등을 만들었는데…”(참찬관 신치운)

“(계미자와 경자자의 주조 발문을 쓴) 권근(1352~1409)·변계량(1369~1430)의 후손은 뭐하는가. 또 (갑인자 발을 쓴) 김빈(?~1455)은 어떤 사람인가.”(영조)

“권근의 자손은 많고, 희귀성인 변계량의 사대부 후손이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김빈은 잘 모릅니다.”(시독관 윤광익)

이 대목이 흥미롭다. 신치운(1700~1755)이 장영실의 공적을 한참 읊으면서 정작 이름은 ‘장영’이라 했다.

실록을 정서하는 과정에서 나온 오탈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치운이 장영실을 ‘장영’으로 잘못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또한 현판에 등장하는 ‘김빈’의 존재도 잘 모른다고 했다. 병조참판, 예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갑인자와 자격루 제작에도 간여한 문신 김빈도 ‘듣보’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자격루 등 각종 천문과학기구를 제작한 장영실을 두고 당대 사람들은 “장영실은 세종의 위대한 발명을 위해 태어난 인물”(<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등)로 평가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

■‘곳곳에서 허점’

그런 판국이니 300~400년전 인물들의 프로필이 정확하겠느냐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강민경 학예사는 현판의 등장인물 인적사항과 족보, 실록, 과거급제자 명단(<등과록> <국조문과방목>), <국조보감>, <해동명신록> 등을 비교해보았다. 그 결과 현판과는 상당부분 달랐다.

예컨대 조선 전기의 무신·과학자인 이천(1376~1451)의 경우를 보자. ‘예안’으로 알려진 이천의 본관이 현판에는 ‘계림(경주)’이라 했다. ‘밀양 변씨’이며, ‘1369년생’인 변계량을 두고도 현판에서는 ‘수성인이자 1346년(병술년)생’이라 했다. 변계량의 경우 ’자‘가 ‘거경’(<등과록>)으로 알려졌는데, 현판에는 ‘숙미’라 했다.

‘1362년생이자 성주 이씨’인 이직(1362~1431)의 경우 현판은 ‘1335년(을해년)생이자 연안 이씨’로 표기했다. 박석명(1370~1406)은 36년이나 빠른 1334년(무술년)생이라 했고, 순천인 본관을 밀성(밀양)이라 표기했다. 그러나 <태종실록>은 “박석명이 37살의 나이에 죽었다”(1406년 7월14일)고 밝혔다.

이밖에 1385년생인 집현전 직제학 김돈(1385~1440)의 경우 현판은 1393년(계유년)이라 했고, 본관도 ‘김해’라 했다. 그러나 <세종실록> 1440년 9월16일자는 “김돈은 안동부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정척(1390~1475)의 경우 현판은 ‘본관=동래, 자=‘등승’이라 했지만, 졸기(부음기사)는 “자=명지, 본관=진주”(<성종실록> 1475년 8월2일)라 했다.

장영실은 1442년 그가 감독제작한 안여(임금의 가마)가 무너지고 부러지면서 불경죄로 곤장 100대형을 받았다. 세종은 2등을 감경해주었지만 그의 직첩을 거두고 곤장 80대형을 집행하도록 허락한다. 이후 장영실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술이부작인데?’

이러니 현판에 등장하는 장영실의 인적사항도 믿기 힘든 상황이 됐다.

정조 연간에 현판의 원본을 지었을 때나, 혹은 1858년 현판을 내걸 때 엉터리 자료를 토대로 작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장영실을 비롯한 현판 등장 인물들의 출생연도, 자(다른 이름), 본관 등을 아무런 근거없이 새겨 넣었을까. 게다가 몇몇 이름 밑에 일부 항목(출생연대, 본관, 자)을 공란으로 남겨둔 것도 심상치 않다.

여기서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공자왈’이 떠오른다.

“서술 하되(述而) 지어내지 않는다(不作)”는 뜻이다. ‘전해지는 대로 쓸 뿐, 멋대로 창작·가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밖에 “의심스러운 것은 공백으로 남겨둔다”(<논어> ‘위령공편’)는 ‘공자왈’도 있다. 그렇다면 어떨까.

정조 때나 철종 때 현판의 내용을 짓는 자가 과연 ‘없거나 혹은 사실과 다른 내용’을 검증없이 새겨넣었을까. ‘공자왈’을 좇아 ‘의심스러운 부분을 공란으로 남겨두는’ 센스까지 발휘했는데…. 분명 이 현판을 제작할 때 보고쓴 자료가 있었을 터인데…. 혹시 주자소에 대대로 내려오는 ‘주자소 선생안(역대 관리 명부)’ 같은 자료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

임금이 타고 가던 가교. 가마채를 말의 안장에 연결하여 두 마리의 말이 앞뒤에서 끌고가는 가마이다. 임금이나 왕실 웃어른의 장거리 행차 때 이용했다. 조선조 정조이 화성행차 시에 사용했던 정가교(正駕轎)가 이것과 같은 형태였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과학천재

이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해도 회의감이 들기는 한다. 잘못된 자료로 괜한 호들갑을 떤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장영실이 누구인지 안다면 그 12자의 인적사항이 얼마나 알토란 같은 신상정보인지 알 수 있다.

장영실은 중국인(원나라) 아버지와 조선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가정’ 출신이었다.

다만 노비출신 어머니 때문에 그 역시 동래현의 관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태종께서도 보호했고 나(세종)도 역시 아꼈다”(<세종실록> 1433년 9월16일)는 언급에서 보듯 두 임금(태·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천문 관측 기구에 흠뻑 빠진 세종은 장영실 등에게 “너희는 원나라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으로 익혀와서’ 모방해서 만들라”는 밀명을 내린다. 장영실 등은 순전히 눈으로 배워온 실력으로 자격루를 발명해낸다.

세종은 완성된 자격루를 보고 “원나라가 만든 물시계보다 훨씬 정교한 자격루를 만들었다”고 감탄했다. 세종은 이런 성과를 거둔 장영실에게 호군(정4품)의 관직을 내려주었다.(<세종실록> 1433년 9월16일)

이후 장영실은 일성정시의(해·별시계 겸용 시계), 해시계(앙부일구) 등 세종 연간에 선을 보인 각종 천문기기를 발명했다.

그 덕분에 “장영실은 세종의 위대한 발명을 위해 태어난 인물”(<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 등)로 꼽혔다.

그림은 세종대왕기념관이 소장한 ‘주자소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현판에 등장하는 역대 주자소 관리들의 인적사항과, 실록, 등과록 등 사서 및 문헌자료를 비교해보니 다소 차이가 있었다.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자료

■미궁에 빠진 장영실의 급퇴장

이후 대호군(종3품)으로 승진한 장영실의 ‘급퇴장’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1442년(세종 24) 장영실이 책임지고 제작한 안여(국왕 전용 가마)가 부러지고 허물어져서 곤장 100대의 형벌에 처해졌다”(<세종실록> 3월16·4월27일)는 기사가 잇따른다. 죄목은 ‘불경죄’였다. 그래도 장영실이 아닌가.

그동안의 공적을 감안한다면 사면해주던지, 아니면 아주 가벼운 형벌로 경감해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세종은 2등을 감형하라는 명을 내린다. 곤장 100대에서 80대로 겨우 20대 줄여준 것이다. 무슨 곡절이 있었을까.

세종은 ‘당대의 태평성대를 위해 태어났다’는 평을 들은 장영실을 왜 그리도 헌신짝 버리듯 버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후 장영실은 자격루 등을 제작한 불세출의 과학자가 아니라 악기 제조에 능력을 발휘한 기술자(장공·匠工)나 악사(樂師)로 소개될 뿐이었다.(<중종실록> 1519년 2월2일·7월7일)

영조 때인 1743년 천문기기 제작에 공을 세운 인물 중에 꼽히기는 했지만 ’장영실’이 아닌 ‘장영’으로 잘려 언급되었다.

왼쪽 사진은 2018년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고에서 발굴된 비격진천뢰 11발. 비격진천뢰는 1591년(선조 24) 화포장 이장손이 개발한 최첨단 무기였다. 무쇠 내부에 설치된 발화 장치가 신관(발화) 역할을 했다. 이 발화장치가 폭발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화포발사가 가능했다. |사진은 호남문화재연구원·개념자료는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비격진천뢰 이장손의 경우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선조 24) 비격진천뢰를 발명한 이장손이다.

비격진천뢰는 동서양을 통틀어 처음 제작된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무쇠 내부에 설치된 발화 장치(죽통과 나선형 나무에 감은 심지)가 신관(발화) 역할을 한다. 이 발화장치가 폭발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화포발사가 가능했다. 단순 폭발이 아니라 날아가 적진에 도달할 때 쯤 폭발하는 작열포였다.

폭발음이 주는 공포감도 대단했고, 파편인 마름쇠가 흩어져 터지니 그 위력도 어마어마했다.

왜군은 조선의 비밀병기인 ‘비격진천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다.

일본측 기록인 <정한위략>은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그 ‘비격진천뢰’를 발명한 이장손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이장손의 존재는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년) 9월 1일에 경주성 전투를 설명하는 말미에, 그것도 실록을 쓴 사관의 부연설명에 겨우 ‘괄호 열고 닫고()’ 형식으로 등장한다. 아주 작은 글씨로….

“(비격진천뢰는 화포장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를 대포로 발사하면 500~600보 날아가 떨어진다.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다.)”

달랑 이 내용 뿐이다. 독자기술로 최첨단 무기를 개발한 이장손의 생몰연도도, 가문도, 이력도 ‘?’로 남았을 뿐이다.

그 흔한 ‘졸기’조차 없는 지독한 홀대…. 어쩌면 그렇게 장영실과 같은 대접을 받았는지….

이번 현판에 등장하는 ‘장영실 인적사항’이 잘못 새겨진 것일지도 모른다. ‘가짜뉴스’를 두고 공연히 호들갑 떤다고 흉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00% 아니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 현판 내용을 입증할 새로운 자료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런 기회에 조선을 위해 ‘쓰임’ 받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장영실이나, 혹은 이장손 같은 분들을 한번이라도 더 언급할 수 있으니 좋지 않은가.(이 기사는 강민경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활자주조를 감독한 신하명단을 새긴 현판의 역사적 가치, <고궁문화> 제16호, 2023년’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강 학예사와 김충배 전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9)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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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너'라 한 정인지, 임금의 '팔'을 꺾은 신숙주…취중 실수의 끝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0.05.19 06:00 수정 : 2020.05.21 09:35

당대 풍류남아들이 즐겨 읊었다는 ‘장진주’ 시를 새긴 ‘청자상감 장진주시명 매죽양류문 매병(보물 제 1389호)’. 매병에 새겨진 시는 당나라 시대 시인인 이하(791~817)의 장진주다. ‘그대에게 권하노니 종일토록 마시고 양껏 취하자꾸나, 이 술이 유령(죽림7현의 한사람. 술을 즐겼다고 함)의 무덤에까지 가지는 않을테니…’로 끝난다. 그러나 군주와 신하의 술자리는 때때로 ‘무덤’까지 가는 불상사로 번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난날의 성현들은 모두 사라지고 술 잘 하던 사람만이 이름을 남겼네…그대와 함께 마시면서 만고의 시름을 녹여 버리리라.”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장진주(將進酒)’ 중 한 대목이다. ‘인생이란 뜻을 얻었을 때 즐겨야 하므로…마셨다 하면 300잔은 마셔야 한다’면서 풍류남아의 호방한 기백을 토해냈다. 그러나 한자 ‘술잔 치(巵)’는 ‘위태로울 위(危)’와 비슷하고, ‘취할 취(醉)’에는 ‘술 유(酉)’ 변에 ‘죽을 졸(卒)’자가 붙어있다. 술잔에 위태로움이 있고, 술에 죽음이 따른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임금과 신하들의 술자리라면 어떨까. 심심찮게 죽음의 향연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술자리에서 ‘역린’을 건드려 군주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변해서 평소에도 파악하기 어려운 ‘군주의 역린’을 어떻게 취중에 구별할 수 있단 말인가.

 

■“신정승! 구정승!” 아재개그로 재상들을 골탕먹인 세조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아 술자리를 싫어한다”면서 소주 한 잔 정도만 겨우 마셨던(<세종실록> 1422년 5월26일) 세종 같은 군주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군신간 술자리는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예컨대 세조는 계유정난(1453년)의 공신들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을 불러 수시로 주연을 베풀었다.

<신윤복필 풍속도화첩>(국보 제135호) 중 ‘유곽쟁웅(遊廓爭雄)’. 유흥가에서 만취한 사내들의 몸싸움을 그린 신윤복의 풍속화다. 싸움의 당사자들은 갓을 벗어던지고 옷까지 풀어헤친 채 한바탕 주먹다짐을 했고, 별감이 가운데에서 이를 말리고 있다. 화면오른쪽 아래에는 두 동강이 난 갓을 챙기며 난감해 하는 이가 보인다. 유곽 앞에 서 있는 기녀는 장죽을 물고 팔장을 낀 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싸움을 구경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서거정(1420~1488)의 <필원잡기>에 등장하는 세조와 신숙주·구치관의 술자리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1463년(세조 9년) 세조는 영의정이던 신숙주(1417~1475)와 새롭게 우의정이 된 구치관(1406~1470), 두 사람을 내전에 마련된 술자리에 불렀다.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 세조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내리겠다”면서 운을 떼면서 “신정승!”하고 불렀다. 이에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틀렸다. 나는 새로 임명된 신정승(新政丞·구치관)을 부른 것”이라며 커다란 잔으로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이번에는 ‘구정승!’이라 했다. 이에 구치관이 “예”라고 답하자 세조는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으면서 “틀렸다. 나는 옛 구(舊)자 구정승(신숙주)을 불렀다”면서 역시 구치관에게도 벌주를 내렸다. 세조가 다시 ‘구정승’을 부르자 이번에는 신숙주가 “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틀렸다, 이번에는 내가 구정승(구치관)을 불렀다”면서 다시 신숙주에게 벌주를 하사했다. 이어 세조가 ‘신정승’ ‘구정승’을 교대로 불렀지만 이번에는 신숙주와 구치관이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조는 “임금이 불러도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짐짓 꾸짖으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벌주를 내렸다. 이렇게 종일토록 벌주를 마셔 두 정승이 만취하자 세조는 크게 웃었다. 세조가 싱겁기 이를데없는 ‘아재개그’로 정승들을 곯린 것이다.

송강 정철(1536~1593년)의 은 술잔. 선조가 정철에게 직접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술 때문에 탄핵을 받은 정철을 선조가 딱하게 여겨, 소주잔 같이 작은 은잔을 주며 ‘앞으로 하루에 이 잔으로 딱 석 잔만 마시거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잔 석 잔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정철이, 이 잔을 두드려 펴 늘려 사발 같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임금이 내린 하사품을 함부로 두드려 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정인지의 ‘너’ 사건

세조의 술자리 일화 중 백미는 역시 정인지(1396~1478)의 ‘너’ 사건일 것이다. 정인지가 누구인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세종~문종 대에는 문화 발전에, 단종~성종 대에는 정치 안정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인지의 한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술만 마시면 하늘같은 임금에게 막말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임금(세조·1417년생) 보다 21살 연상이었다고 해도 용납될 수 없는 하극상이었다.

1458년(세조 4년) 9월 15일 취중 막말 사건이 터진다. 정인지가 왕세자와 종친, 의정부, 육조 판서 이상이 참여한 양로연에서 세조 임금에게 ‘너’라고 지칭한 것이다. 17일자 <세조실록>은 정인지의 막말을 직접 들은 세조의 증언을 생생하게 전한다.

“아 글쎄, 정인지가 ‘나(予)’를 ‘너(汝)’라고 칭하고는(麟趾與予稱爾汝曰) ‘(네가) 그같이 하는 것을 나는 모두 취하지 않겠다(若之所爲 皆吾不取)고 했네”.

‘나(정인지)는 네(세조)가 한 말을 모두 듣지 않겠다’는 것이니 임금을 능멸한 죄, 즉 불경죄에 해당됐다. 세조는 “술에 취하면 본성이 드러난다는 옛말이 있지 않느냐”면서 “정인지의 말이 너무 방자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발맞춰 종친과 의정부, 육조는 물론 대간들이 벌떼처럼 나서 “정인지의 불경스러운 언사는 (단종 복위 사건 때 세조를 ‘나으리’라 지칭한) 성삼문과 다를 바 없는 역신(逆臣)의 막말”이라고 탄핵했다. 하지만 세조는 “정인지가 취중(醉中)에 한 말은 모두 고구(故舊·옛 친구)의 정을 잊지 못하고 한 말이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라면서 “정인지는 지금 나라 일을 맡아 보는 대신도 아니고 노쇠하고 쓸모없는 일개 유생일 뿐”이라고 두둔해주었다.

그러나 정인지의 취중 막말은 한번이 아니었다. 1458년(세조 4년) 2월12일 열린 공신연에서도 세조를 향한 불경한 취중발언으로 물의를 빚었고, ‘너’ 사건이 일어난 4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459년(세조 5년) 1월19일의 연회와, 다시 7개월 뒤인 8월 1일의 내전 술자리에서도 ‘임금에게 불경한 언사’를 일삼았다는 이유로 탄핵됐다. 세조는 그때마다 “그게 정인지의 술버릇인데 어찌 문책하겠느냐”고 역성을 들어주었다.

1719년(숙종 45년) 숙종(재위 1674~1720)이 기로소에 입소한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베푼 연회를 그린 <기사계첩도> 중 ‘경연당석연도’. 임금들은 군신간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로 연회를 베풀었지만 때때로 충성의 시험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금의 팔 비튼 신숙주

비교적 이렇게 술자리 실수에 너그러웠던 세조에게도 ‘역린’은 있었다. 세조 역시 때때로 마음을 풀어놓는 술자리를 신료들의 충성을 시험하는 자리로 여겼다. 그러니 임금과의 술자리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살얼음판 같은 자리였다. 예컨대 세조는 틈만 나면 신숙주를 역대 이상적인 군신의 상징인 ‘제 환공의 관중, 한 고조의 장량, 촉 선주(유비)의 제갈공명, 당태종의 위징’이라 칭했다. 군신관계를 떠나서도 두 사람은 ‘1417년 닭띠’ 동갑내기였다.

어느날 연회에서 술에 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잡고 술을 마시면서 “경(신숙주)도 내 팔을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 역시 인사불성이 된 신숙주는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 세조의 팔을 힘껏 잡았다. 너무 세게 잡아당겨 비튼 셈이 됐다. 세조가 “아파! 아파!”하고 비명을 지르자 곁에 있던 세자(예종)의 안색이 변했다. 세조가 예종에게 “괜찮다”면서 흥을 깨지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명회(1415~1487)는 술자리가 파한 뒤 신숙주의 집에 청지기를 보내 신신당부했다.

“범옹(신숙주의 자)! 자네는 평소 만취해도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등불을 켜고 책을 본 뒤 잠자리에 드는 습성이 있지. 그러나 오늘은 절대 그래서는 안되네. 곧바로 불끄고 잠자리에 들게.”

과연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책을 들춰보던 신숙주는 한명회의 전언을 듣고는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과연 세조가 한밤중에 넌지시 내시를 불러 “신숙주의 집에 가보라”고 지시했다.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침수에 들었다.(<소문쇄록>) 세조는 신숙주가 술에 취한 척하며 일부러 임금의 팔을 비튼게 아니냐고 의심한 것이다.

■‘오래 해먹었느니 그만 물러나라’는 공신

이런 판국인데 술자리에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면 무사했겠는가. 1466년(세조 12년) 6월8일 세조는 평안도절제사로 근무하다가 돌아온 양정(?~1466년)을 위한 위로연을 베풀었다. 양정은 계유정난(1453년)의 공신이었지만 주로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했던터라 인사불만이 컸다. 연회에서 술에 취한 양정은 “전하는 이제 편히 쉬셔야 할 때”라고 폭탄선언했다. 세조가 재차삼차 “나보고 물러나라는 거냐”고 물었지만 양정은 “신의 마음도, 민심도 그렇다”고 했다. 세조가 다시 “내가 죽고, 신숙주와 한명회는 물론이고, 경(卿·양정)도 죽는다면 나랏일은 누가 다스리겠느냐”고 묻자 양정은 “차차(次次·차례차례)로 있게 될 것입니다”라 꼬박꼬박 말대답했다. 세조가 “어서 상서원(어보 담당관청)에서 옥새를 가져와 세자에게 전하라”고 양위소동을 벌이자 대소 신료가 벌벌 떨며 어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양정은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상탑) 아래 꼿꼿이 앉아 “왜 어명을 받들지 않느냐. 승지들은 빨리 옥새를 가져오라”고 재촉했다. 이쯤되면 취중진담이었다. 결국 양정은 임금에게 “물러나라”고 강요했다는 죄로 참수됐다.

광주 이씨 가문이 소장한 ‘승정원 일기 사초’. 술자리에서 술잔을 떨어뜨린 실수 때문에 가문이 멸문의 지경에 빠졌다가 중종반정 이후 겨우 회복됐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술 취해 소매 속 귤을 떨어뜨린 신하

성종은 증조할아버지(세종)를 빼닮아 학문을 워낙 좋아했다. <용재총화>는 “성종은 홍문관에서 숙직하던 선비들을 불러 학문을 토론하고 편복(평상복)으로 마주 앉아 촛불 하나만을 켠채 술잔을 나누며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했다. 성종과 성희안(1461~1513)의 일화가 유명하다.

성종과 술을 마시던 홍문관 정자(정9품) 성희안은 술상에 올려져있던 감자(柑子·밀감) 10여개를 소매 속에 넣고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다. 내시가 성희안을 업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과일이 떨어졌다. 어전에서 과일이 이리저리 흩어지져 터지고…. 시쳇말로 ‘갑분싸’였다. 그러나 성종은 이튿날 밀감 한 쟁반을 홍문관에 내리면서 “어제 성희안이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과일이 쏟아졌으니 지금 다시 내려준다”고 했다. 죽을 죄를 졌다고 여긴 성희안은 “이 은혜를 죽음으로 갚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성종은 큰 술잔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차천로(1556~1615)의 <오산설림>은 “종실 중 한 사람이 술을 마신 뒤에 큰 술잔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 춤추다가 거짓으로 땅바닥에 넘어져 산산조각 냈다”고 전한다. <오산설림>은 “이런 종실의 행동은 성종이 지나치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은연 중 간하는 뜻이었고, 임금 또한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했다.

허엽(1517~1580)의 <전언왕행록>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연회를 즐겨 베풀었다”고 기록하면서 일침을 놓았다.

“혹자는 ‘태평성대라면 모르되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산군이 아버지를 닮아 술자리를 즐겼고, 그 때문에 정사를 그르쳤다는 논평이다.

‘봉사조선창화시권’(보물 제1404호).1450년(세종 32년) 정인지와 신숙주 등이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 예겸과 치열한 시문 대결을 펼친 뒤 시문의 내용을 두루마리로 엮은 것이다. 이중 정인지는 세종~성종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는데, 세조와의 술자리에서 세조에게 ‘너’라고 부르는 등 여러차례 불경죄를 저질렀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취중 발령을 그대로 실행한 연산군

물론 연산군도 나름 화기애애한 술자리를 즐긴 적이 있다. 1503년(연산군 9년) 11월 21일 창경궁 내전에서 연산군과 대신들이 군신의 예를 잊고 광란의 술자리를 벌였다. 연산군은 이날 스스로 북을 쳐 노래하고, 더러는 손으로 대신들의 사모를 벗겨 머리털을 움켜쥐고 희롱하며 욕보이기도 했다. 영의정 성준(1436~1504)과 좌의정 이극균(1437~1504)에게 어의(御衣)까지 하사하여 직접 입혔고, 참의 한형윤(1470~1532)에게는 신발까지 벗어주면서 “너를 이조참판으로 삼는다”고 약속했다. 또 김감(1466~1509)에게도 “너에게 지성균관사(성균관의 정2품)를 시켜준다”고 했다. 이때 좌의정 이극균은 연산군에 하사한 어의에 ‘오바이트’까지 하는 불상사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어제 과음해서 취한 뒤의 일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취중실수를 탓했다. “임금의 패덕이 이보다 더할 수 없고 역사를 더럽힌 것이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면서 “대신들 보기 부끄럽다”고 자책했다. 연산군은 그러면서 “내가 어제 한형윤, 김감에게 낸 취중발령을 그대로 시행한다”고 약속까지 했다. <연산군일기>는 “(어젯밤 광란의 파티에서 일어난 불상사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대죄를 청하던) 영의정 성준과 좌의정 이극균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했다.

신숙주와 중국사신 예겸이 나눈 시문. 신숙주는 세조가 ‘촉 선주의 제갈공명이자, 당 태종의 위징’이라 일컬을만큼 세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런 신숙주도 술자리에서는 때때로 충성을 시험받는 신하에 불과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술잔을 떨어뜨린 예조판서

이 대목에 이르러 필자는 군주, 아니 연산군의 죽 끓는듯한 변덕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연산군은 분명 1503년 11월 군신간 벌인 질탕한 광란의 파티를 두고 ‘임금인 나의 패덕’이라 했다. 그런데 그보다 두 달 전인 9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베푼 양로연에서 일어난 사건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슨 사건인가. 9월11일의 양로연에서 연산군과 신료들이 잔을 돌리며 술을 마실 때 예조판서 이세좌(1445~1504)가 그만 술잔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양로연이 끝난 뒤 연산군은 “오늘 이세좌가 과인에게 올리던 술잔을 떨어뜨려 내 옷까지 적셨다”면서 “이세좌를 국문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연산군은 “내 옷은 물론이고 어좌 위에도 흘러 오래도록 마르지 않았다”느니, “예를 관장하는 예조판서가 그럴 수 있냐”느니 하며 트집을 잡았다. 술자리 실수 치고는 도가 지나친 처사였다. 이세좌는 곧 파직됐다.(15일) 이때만 해도 이세좌와 그의 동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세좌는 의금부에서 “몸이 뚱뚱하고 행동이 느려서 너무 조심하다가 술잔을 엎지르는 것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원로 재상들도 이세좌를 적극 변호했다.

“이세좌는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성상의 위엄이 황공스러워 자기 딴에는 빨리 마시려다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이세좌가 연회가 끝난 뒤 “내가 평상시 술을 못마시는데 오늘은 성상께서 돌리는 술잔을 다 받아 마셨다”고 자랑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들이 “다 웃었다”는 것이었다. 원로 재상들은 “이세좌가 일부러 엎질렀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했겠냐”고 해명해주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의정부와 육조, 한성부 당상들이 불러 “(59살인 이세좌가) 나이 늙은 대신이 어린 임금(28살 연산군)이라고 우습게 여긴 것”이라면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낸다.

“대간이나 조정대신들이 이세좌의 위세가 두려워 아무도 탄핵하지 않는다. 이는 이세좌의 아들 이수의가 한림이고, 이수정이 홍문관원이기 때문에 무서워 말하지 않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연산군의 명분은 군색하기 이를데 없었다. 아무렴 대간이나 조정대신들이 한림(예문관 검열 정9품)과 홍문관 수찬(정6품) 따위가 무서워 그 아비(이세좌)의 죄를 거론하지 않았겠는가.

세조의 어필. 계유정난 등으로 정권을 잡은 세조는 공신들과 유난히 술자리를 즐겼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술자리 실수가 멸문의 지경까지

연산군은 왜 ‘이세좌 가문의 세력’ 운운했을까. 이유가 있다. 당대의 인물인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는 “문벌이 번성하기로는 광주 이씨(廣州 李氏)가 으뜸”이라고 했다. 이세좌의 ‘광주 이씨’ 가문은 세조~성종까지 ‘팔극조정(八克朝廷)’이라고 할만큼 번성했다. 8명의 광주 이씨 ‘극’자 돌림이 영의정에서 장차관 벼슬에 올라 조정회의를 쥐락펴락했다는 것이다. 이극배(영의정·1422~1495)·극감(형조판서·1423~1465)·극증(영의정·1431~1494)·극돈(이조판서·1435~1503)·극균(좌의정·1437~1504), 극규(대사간·?~?), 극기(예공조참판·대사헌·?~1489)·극견(좌통례공) 등이다. 당시 의정부 사인(정4품) 이수형(?~1504)과 홍문관 수찬(정6품) 이수정(1477~1504), 예문관 검열(정 9품) 이수의(?~1504) 등은 이극감의 아들인 이세좌의 자녀들이었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술자리 실수를 빌미삼아 광주 이씨 가문을 손볼 생각을 했다.

결국 이세좌와 그 자녀들은 물론 유일하게 남아있던 ‘극’ 자 돌림의 좌의정 이극균도 “조카(이세좌)의 죄는 ‘큰 불경(大不敬)’은 아닌 ‘불경’이라고 변호했다”는 이유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일기> 1504년 5월6일자는 “연산군은 (이씨) 종친이 강성한 것을 근심하여 모두 없애 종자도 남기지 않으려 했다”고 기록했다. 이세좌와 그의 자식은 물론 가문까지 씨를 말리려 했던 의도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물론 이세좌가 연산군에게 찍혀 죽임을 당한 다른 이유도 있다.

성종의 글씨.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성종은 기생과 음악이 따르는 술자리를 즐겼는데, 혹자는 “아들인 연산군이 향락에 빠진 것은 아버지 성종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된 것이다. 이세좌는 1482년(성종 13년) 연산군의 생모 윤비(?~1482)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했다는 이유로 자결의 명을 받았다. 술자리 실수에서 비롯된 이세좌와 가문의 수난은 극에 달한다. 갑자사화가 마무리된 뒤 1년 6개월이 지난 뒤인 1505년(연산군 11년) 10월7일 연산군은 이세좌에게는 ‘간흉의 괴수로서 임금을 능멸했고(魁兇陵君)’, 이극균에게는 ‘포악하고 간사하여 임금을 능멸했다(桀힐陵君)’는 죄목을 달았다.

연산군은 이세좌의 시신을 파내어 토막내어 사방에 돌리고 그 머리에 ‘찌’(요즘의 포스트잇)를 써붙였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이세좌는 물론 삼촌인 이극균의 시신을 다시 파내어 해골을 분쇄한 뒤 그 형적을 없애게 하는 이른바 쇄골표풍(碎骨飄風)의 형벌까지 내렸다.

■술에 취하면 황제도 없다지만…

어떤가. 불과 두 달 사이에 벌어진 같은 임금의 술자리가 아닌가. 그런데 어떤 술자리(1503년 9월 11일)에서는 실수로 술잔을 엎은 신료는 물론 그 일족까지 임금을 능멸한 역적으로 몰아붙여 급기야 그 해골까지 가루내어 바람에 날리고, 또 어떤 술자리(11월21일)에서는 취중실수는 모두 임금이 패덕한 탓이라고 자책하고 참석자들에게 선물까지 내리고…. 극과 극을 오가는 군주의 변덕을 어쩌란 말인가.

새삼 1791년(정조 15년) 7월 취중 살인사건을 판결하던 정조 임금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대체로 술 취한 사람에게는 비록 천자(天子·황제)라도 안중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취중에도 역시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다.”

군주가 생각하기에 따라 신하들의 취중언행은 얼마든지 대역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제기로도 쓰인 꽃무늬 은잔. 성종 같은 임금은 큰 술잔으로 신하들과 대작하고 기생을 동반하고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아들(연산군)인 연산군이 아버지에게서 이런 술 취향을 배워 향락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필자는 술맛도 모르면서 부어라 마셔라 했던 예전의 술자리를 돌이켜본다. 생각해보니 스트레스를 푼다는 이유로 벌였던 술판이었는데, 다음날 일어나보면 거의 대부분 ‘후회막급’이었다. 술김에 하는 얘기라며 남에게 상처주는 이야기를 했거나, 혹은 거꾸로 술김에 나에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를 들었거나….

공자의 그 유명한 ‘고불고 고재고재(觚不觚 觚哉觚哉)’(<논어> ‘옹야’). ‘모난 술잔이 모가 없으면 모난 술잔이겠는가. 모난 술잔이겠는가’라고 해석된다. 청나라 고전학자인 모기령(1623~1716)도 ‘고불고는 술주정을 경계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술그릇의 이름인 ‘고(고)’는 원래 두 되 정도 담을 적은 양의 술잔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술 마시는 양을 3되를 적당하다고 하고, 5되를 과하다고 했으며, 2되를 적다고 했다는 것. 그런데 공자의 시대에 과음의 풍조가 퍼지자, 공자가 ‘어찌 고를 고라고 하겠는가’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금과옥조인 것 같다.(10)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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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화장품)과 바늘 보내오"…조선시대 '츤데레' 군인 남편이 보낸 선물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3.01.10 05:00 수정 : 2023.01.10 18:50

최근 보물로 지정예고된 ‘나신걸 한글편지’는 함경도 경성으로 발령받아 떠나는 군관 나신걸(1461~1524)이 1490년(성종 21) 무렵 회덕(대전)의 아내 신창 맹씨에게 보낸 사연을 담고 있다. 그중 “분(화장품)과 바늘 6개를 사서 선물로 보낸다”면서 “집에 가고싶어도 갈 수 없으니 이런 민망한 일이 또 어디 있겠냐”고 하소연한다.|대전시립박물관 제공

“분(화장품)하고 바늘 6개를 사서 보내네…” 최근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예고한 ‘나신걸 한글편지’의 내용 중 한 구절이다.

이 편지(1490년 무렵 작성)는 훈민정음이 반포(1446년)된지 40여년 만에 쓰여진, 가장 오래된 한글편지라는 점에서 일단 ‘보물’로 지정하고자 한 것이다. 어려운 원문을 최초로 판독·연구한 배영환 제주대 교수와, 최근 한글편지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백두현 경북대 명예교수의 도움말로 풀어본다.

■남편이 보낸 ‘분과 바늘’

이 편지는 함경도에서 하급 군관으로 군무 중이던 나신걸(1461~1524)이 1490년(성종 21) 무렵 회덕(대전)의 아내 신창 맹씨에게 보낸 사연을 담고 있다. 편지는 함경도 군관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떠나는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면서 시작된다.

“영안도(함경도) 경성의 군관이 되어 간다네…이제는 가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네. 만약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탈영병으로 처리되어) 병조(국방부)가 붙잡아 귀양 보낸다네….”

이렇게 잔뜩 신세한탄을 한 남편은 “(함경도) 경성으로 (인편으로) 내 겹저고리와 겹철릭(군복)을 보내달라”고 당부한다.

여기까지는 무미건조한 내용만 한가득이다. 그런데 두번째 편지에서 흥미로운 구절이 눈에 밟힌다.

“분(粉·화장품)과 바늘 6개를 사서 보내네. 내가 집에 다녀가지 못하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 있을꼬. 울고 가네. 어머님과 아기 모시고 다들 좋이(별탈 없이) 계시오. 난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 다산의 부인이 유배중인 남편에게 혼인 때 입었던 다홍치마를 보냈다. 다산은 빛바랜 다홍치마가 “글 쓰기에 훌륭하다”면서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국립민속박물관 제공

필자는 남편(나신걸)이 부인(신창 맹씨)에게 보냈다는 ‘화장품과 바늘’이 어떤 의미인지 간과했다. 그런데 배영환·백두현 두 연구자가 “매우 흥미로운 의미가 담겨있다”고 힌트를 주었다.

백두현 교수가 단적인 사례를 들었다. 즉 17세기 초(1602~1652년) 사이의 자료인 ‘현풍 곽씨 한글편지’(혹은 진주 하씨묘 출토 한글편지)였다. 그 중 딸이 친정 어머니(진주 하씨)에게 보내는 편지에 ‘분과 바늘’ 이야기가 등장한다.

“서울 갔던 사람(남편)이 바늘 하나, 분 한 통 사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친정 어머니에게 남편을 뒷담화하고 있다.

“(아내를 위한 선물인) 분과 바늘은커녕 남편이 너무 오래 서울에 머무는 바람에 군색해져셔 버선까지 팔아먹고 왔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사실 분(화장품)이야 조선시대 여성들이 받고 싶어했던 선물 중 하나였다.

1989년 현풍 곽씨 문중이 경북 달성군에 있는 12대 조모인 진주 하씨의 묘를 이장하다가 발견한 한글편지 중 한 통. 딸이 친정 어머니(진주 하씨)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울 갔던 남편이 바늘 하나, 분 한 통 사지 않고 돌아왔다”고 뒷담화하는 내용이 담겨있다.|국립대구박물관·백두현 경북대 명예교수 제공

■조선시대의 ‘잇 아이템’

그럼 바늘 선물은 어떤 의미일까. 백두현 교수는 이 대목에서 교과서에서도 배웠던 ‘조침문’을 떠올린다.

‘조침문(弔針文)’은 한마디로 ‘부러진 바늘에게 바침’이다.

조선 순조 연간(1800~1834)에 유씨 부인이 27년간 쓰다가 부러진 바늘을 의인화해서 쓴 제문이다. 유씨 부인은 이 바늘은 동지사(사절단)의 일원으로 청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온 시삼촌이 사온 선물이라 했다.

그러면서 “인간 부녀의 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늘을 27년 만에 부러뜨렸으니 오호통재!”하며 슬퍼한다.

“아깝다 바늘이여, 어여쁘다 바늘이여…부녀의 노리개라. 밥 먹을 적 만져 보고 잠잘 적 만져 보아 더불어 벗이 되어…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릴 때에 겹실을 꿰었으니….”

유씨 부인은 “바늘이 부러지자 혼절할 정도였다”면서 “한 팔을 베어낸 듯, 한 다리를 베어낸 듯, 아깝다 바늘이여!”라고 애닯아 한다. 그러면서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 평생 함께 살고, 같은 날짜에 같이 죽자”고 기원한다.

절세의 명문장으로 꼽히는 ‘조침문’은 이렇게 ‘바늘=조선 여인의 평생 애장품’ 임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여인들이 왜 바늘을 그렇게 애지중지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쟁기, 가래, 괭이, 낫, 호미 등은 쉽게 제작할 수 있는 도구죠. 그러나 바늘은 어떻습니까. 다양한 크기로 만들면서도 되도록 가늘게, 뾰족하게 만드는 기술이 필요했겠죠. 난이도가 높은, 당대 최첨단 기술을 요했을 겁니다.”(백두현 교수)

조침문에서도 “시삼촌이 중국에서 사온 바늘 여러 쌈을 여기저기에 선물을 보냈고, 또 (나도) 썼지만 무수히 부러뜨리고 너만 남았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느냐”는 내용이 나온다.

‘나신걸 편지’와 ‘현풍 곽씨 편지’에서 보듯 조선시대 여성을 위한 선물 중 ‘넘버 1’은 ‘바늘과 분(화장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도 차이는 있다. ‘현풍 곽씨 편지’에서는 당대의 ‘잇 아이템’을 받지못한 여성의 하소연이 쟁쟁하다.

반면 ‘나신걸 편지’에서는 ‘분과 바늘’을 선물로 보낸 이야기가 담겨있다. 무슨 ‘보고 싶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무심한듯 아내를 챙겨주는 ‘츤데레 남편’의 향기가 풍기는 대목이다.

분(화장품)과 바늘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평생 간직하고 싶었던 ‘잇 아이템’이었다.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이나 서울을 다녀온 남자들이 들고온 단골 선물이었다.|국립고궁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츤데레 남편’?

곰곰이 따져보면 조선시대에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그리움’이나 ‘사랑’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찾기 쉽지 않다.

그 예가 있다. “어찌하여 나를 두고 먼저 가셨냐”고 애달파한 ‘조선판 사랑과 영혼’의 편지가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먼저 죽은 남편(이응태·1566~1588)를 향한 부인(원이 엄마)의 추모글이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도 시쳇말로 ‘멋 없는 남편’이었다. 1806년(순조 6) 부인(홍혜완·1761~1838)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중인 남편(다산)에게 그리움을 가득담은 편지 한통과 함께 시집 올때 입고 온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냈다. 편지내용은 이랬다.

“등불 아래 한 많은 여인은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그대와 이별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네.”

이런 편지를 받았다면 남편은 어떤 리액션을 했어야 할까. 당연히 사랑을 가득 담은 편지를 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다산은 어찌했을까. 이 빛바랜 다홍치마를 5조각으로 잘라 각 폭마다 자식들에게 훈계하는 글을 지어 보냈다.

시쳇말로 ‘너무 합니다’가 아닐까. ‘날 잊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보낸 부인의 치마를 ‘자식 훈계용’으로 써버렸다니….

물론 부인을 그리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느날 아내를 만나는 꿈을 꾸고는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으니 말이다.

“그리워 말아야지. 그리워 말아야지. 서글픈 꿈 속에서 본 그의 얼굴….”(‘꿈속에서 본 아내에게’)

부인이 보낸 다홍치마에 이런 감정을 담아 직접 보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까 언급한 ‘현풍 곽씨 한글편지’에도 ‘츤데레’ 남편의 면모가 보이는 글이 있다.

주인공인 곽주(1569∼1617)가 만삭의 몸으로 출산을 위해 친정에 간 부인(하씨)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신 몸만 건강하면 되니 또 딸을 낳아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아들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들 걱정할 필요없다. 당신 몸이 최고다’라고 아내를 안심시키는 남편이라니….

‘나신걸 편지’에도 남편이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잔뜩 담아놓으면서 슬쩍 ‘분과 바늘’ 선물 건을 얹어놓았다.

함경도 군관으로 발령받아 떠나는 나신걸이 충청도 회덕에 있던 부인 맹씨에게 보낸 한글편지는 1490년 무렵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성종실록>과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함경도는 1470년(성종 1) 영안도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498년(연산군 4) 다시 함경도로 회귀된다. 그외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편지는 149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대전시립박물관·배영환 제주대 교수 제공

■“당신이 직접 농사짓지 마세요”

해독하기 어려운 훈민정음 초기의 고어로 가득찬 ‘나신걸 편지’에는 의외로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특히 외지 근무 때문에 집에 갈 수 없는 남편의 고향집을 향한 ‘노심초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남편은 ‘내년까지 돌아올 수 없다’고 했는데요. 아내가 지켜야 할 고향집이 걱정되었을 겁니다. 농사는 직접 짓지말고 반드시 소작을 주라고 하고, 소작을 짓는 집에 구체적으로 어떤 어떤 곡식의 씨를, 얼마큼 주라고 일일이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관아에 세금을 내는 일도 똑똑한 노비 누구누구에게 시키라는 내용도 있어요.”(배영환 교수)

백두현 교수는 편지 내용 중 ‘피 씨’에 주목했다. 즉 지주인 나신걸 집안에서 소작인들에게 나눠 줄 종자(씨)의 분량을 거론하면서 ‘논에 뿌릴 볍씨’와 ‘밭에 뿌릴 피씨’를 구별했다는 것이다. ‘피’는 농경 초기부터 재배되어온 벼과 작물이다.

좋지 않은 환경에도 자라는 힘이 강해 구황작물로 애용됐다. 요즘도 ‘피죽 한그릇도 먹지 못했다’는 표현이 있지 않은가.

‘나신걸 편지’에서 보듯 1490년대의 조선에서 피농사가 여전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신걸 편지’에는 외지 근무 때문에 집에 갈 수 없는 남편의 고향집을 향한 ‘노심초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농사는 직접 짓지말고 반드시 소작을 주라고 하고, 소작을 짓는 집에 구체적으로 어떤 어떤 곡식의 씨를, 얼만큼”고 일일이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또 “관아에 세금을 내는 일도 똑똑한 노비 누구누구에게 시키라는 내용도 있다.|대전시립박물관 제공

■훈민정음 반포 40여년 만에 쓰여진 한글편지

그런데 이 편지는 어떻게 훈민정음 반포 직후인 1490년대의 것으로 추정될까. 이 편지는 2011년 5월 3일 대전 유성구 금고동의 안정 나씨 문중의 묘역이 집단 이장 과정에서 확인됐다.

이곳에 제2쓰레기 매집장이 조성됨에 따라 진행된 이장이었다. 이중 조선 초기 무관 출신인 나신걸의 부인(신창 맹씨) 목관에서 미라 상태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편지는 피장자(맹씨)의 머리맡에서 여러번 접은 모습으로 두 장이 놓여 있었다.

벽돌처럼 단단하게 밀봉되어 산소가 통하지 않은 회다짐묘(석회:모래:황토=3:1:1)였기에 편지의 원형을 간직할 수 있었다.

배영환 교수의 판독 결과는 놀라웠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순천 김씨묘 출토 언간(한글편지)’(1555년)보다 65년 정도 앞선 1490년 무렵의 한글 편지로 추정됐다.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우선 편지에 등장하는 ‘영안도’(함경도)에 주목했다. <성종실록>과 <연산군일기> 등에 따르면 함경도는 1470년(성종 1) 영안도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498년(연산군 4) 다시 함경도로 회귀된다. 따라서 이 편지는 1470~98년 사이에 작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단서가 있다. 편지 중에는 남편(나신걸)이 ‘집에 가서 어머니와 아기를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는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신걸의 아버지(나연종)은 1488년에 사망한다.

그렇다면 1488~98년 사이로 좁혀진다. 더 좁혀보자. 1461년생인 남편 나신걸이 하급 군관으로 발령받은 나이라면 어떨까. 서른 살 안팎 정도였을 것이다. 뭐 이런 저런 방증자료를 토대로 이 편지가 쓰여진 연대를 1490년대로 추정할 수 있었다.

필자가 사족으로 사료를 하나 더 인용하자면 1504년(연산군 10) 7월19~20일자 <연산군일기>이다.

이때 “임금(연산군)이 신하를 파리 죽이듯 죽인다”는 한글익명서가 궁중에 돌자 연산군이 “한글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나신걸’ 편지는 2011년 5월 3일 대전 유성구 금고동의 안정 나씨 문중의 묘역이 집단 이장 과정에서 확인됐다. 이곳에 제2쓰레기 매집장이 조성됨에 따라 진행된 이장이었다. 이중 조선 초기 무관 출신인 나신걸의 부인(신창 맹씨) 목관에서 미라 상태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편지는 피장자(맹씨)의 머리맡에서 여러번 접은 모습으로 두 장이 놓여 있었다. |대전시립박물관 제공

■한글창제 후 서울거리에서는…

1490년대에 주고받은 이 편지의 사료적인 가치는 천정부지로 뛸 수밖에 없다.

1490년대라면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불과 40여년 뒤에, 그것도 지방에서, 그것도 부부가 주고받은 한글편지이기 때문이다.

삼척동자가 다 알지만 만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세종실록> 1446년 9월29일)이라 했다,

그래서 예조판서 정인지(1396~1478)의 언급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배우기 쉬운 문자’를 창제했다. 한마디로 훈민정음의 핵심가치는 임금-백성, 양반-백성, 남-여, 노-소의 ‘소통’이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백성 스스로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훈민정음 반포 불과 3년만인 1449년(세종 31) 10월5일 기념비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누군가 74살의 나이에 영의정부사가 된 하연(1376~1453)을 겨냥해 “하 정승아! 정사를 망령되게 처리하지 마라”는 내용의 한글벽서를 붙인 것이다. 전임자인 황희(1363~1452)가 86살의 고령에 은퇴했는데, 그 자리에 다시 74살의 하연을 기용한 세종의 인사정책을 지적하는 벽보가 아니었을까.

1485년(성종 16) 7월17일 종로거리에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난다. 즉 ‘종로 시전(시장)의 이전 방침’에 상인들이 거부 농성을 벌였다. 상인들은 이때 판서·정승 등 고관대작의 비위를 고발하는 한글 투서를 던졌다. 이 투서에는 (신숙주 아들인) 신정(?~1482)과 영의정 윤필상(1427~1504) 등 고관대작의 이름까지 적시됐다. 훈민정음 창제·반포 후 40년도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미 서울에서는 임금의 인사정책과 고관대작의 비리를 고발하는 투서와 벽보가 거리에 붙을 정도였다.

회곽묘에서 발견된 한글편지. 편지는 피장자(맹씨)의 머리맡에서 여러번 접은 모습으로 두 장이 놓여 있었다. 벽돌처럼 단단하게 밀봉되어 산소가 통하지 않은 회다짐묘(석회:모래:황토=3:1:1)였기에 편지의 원형을 간직할 수 있었다. |대전시립박물관 제공

■“소주 막고 확!”…딸에게 보낸 친정엄마의 편지

지방은 어땠을까. 이번에 보물로 지정예고된 나신걸 한글편지가 단서를 제공해준다. 훈민정음 창제 후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가던 한글열풍을 증거할 자료가 될 것이다. 생각해보라.

편지의 언급처럼 함경도 경성에서 충청도 회덕까지는 ‘한달거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머나먼 곳에 떨어져 있던 남편이 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있다. 그것도 한글로….

투서니 벽서니 뭐 이런 무시무시한 고발이나 고변도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는 ‘나신걸 한글편지’보다 60여년 늦게 주고받은 ‘순천 김씨묘 출토 언간(한글편지)’를 떠올린다.

모두 192점에 달하는 한글편지는 1555년(명종 10) 전후에 주고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1977년 충북 청주 비행장 조성을 위한 순천 김씨 묘의 이장과정에서 출토된 한글편지. 순천 김씨 가족들이 주고받은 편지이다. 이 가운데 늘그막에 첩을 둔 남편을 원망하며 시집간 딸에게 하소연하는 편지들이 눈길을 끈다.|충북대 박물관 소장

그중 시집간 딸에게, 늘그막에 첩을 둔 남편을 원망하는 친정 엄마의 편지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하물며) 재상도 첩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예순에 맨 끝 찰방(종 6품)된 사람(남편)도 첩을 얻으니…내가 서러워서…”

예순이 다 된 나이에 겨우 말직(찰방)에 오른 남편이 첩을 두고 본처를 홀대하니 서럽다는 내용이다.

어떤 편지는 부부간 나눈 생생한 대화를 딸에게 일러바치고 있다.

“내가 ‘첩 두기를 그만 두라’고 하자 남편은 ‘내 이년(첩)이 밉지 않으니 첩으로 삼겠다. 잡말마라’고 했다. 더 무슨 말을 하랴.”

친정 엄마는 “하물며 아들까지도 ‘엄마가 샘을 낸다’고 하니 서럽기만 하다” “소주를 맵게 먹고 죽고 싶다”는 등 여러차례 괴로움을 토로했다. 생각해보면 이 친정 엄마가 한글 편지가 없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늘그막에 첩을 둔 남편 때문에 속이 문드러졌을 여인이 한글을 도구로 삼아 남편 흉을 보고 한껏 욕을 해대며 가슴 속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들의 한풀이 수단, 그것도 역시 한글의 역할이었다. 백성과 양반, 백성과 임금 간 언로를 풀어주는 가교 기능, 뭐 이런 거창한 역할이 아니더라도….(이 기사를 위해 배영환 제주대 교수, 백두현 경북대 명예교수, 김은선 대전시청 학예연구사, 김기범 대전시립박물관 학예 연구사·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원 학예연구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11)

<참고자료>

배영환, ‘현존 최고의 신창맹씨묘출토언간에 대한 국어학적인 연구’, <국어사연구> 제15호, 국어사학회, 2012

백두현, <한글 고문서와 한글편지 강독>, 역락, 2024년 출간 예정

백두현, <한글생활사 연구>, 역락, 2021

노경자, ‘순천김씨묘 출토 언간 연구’, 부산대 석사논문, 2010

문화재청, ‘나신걸 한글편지 문화재위원회 보물지정 자료, 2022

토지주택박물관, <옛문서에 담긴 사랑이야기>(개관 20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 2017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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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제 하소연 좀!"…북악산은 조선시대 고공농성장이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2.07.12 05:00 수정 : 2022.07.12 07:01

국기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서울 백악산(북악산) 일원’. 북악산은 수려한 자연과 역사 문화적인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이유로 명승으로 지정됐다.|‘대통령 경호처의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 2019년에서’

어릴적 청운동 산동네에 살던 기자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북악산(백악산)의 이미지가 몇 장면 있다.

북악산 바위 옆 계곡에서 빨래를 하던 어머니, 어지간히 많았던 송충이, 해마다 5월 쯤이면 단맛을 봤던 아카시아 꽃, 10월이면 부암동 산기슭 과수원에서 한 두 대야씩 사서 먹었던 씨알 작은 능금….

그러나 1968년 1월21일 밤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오고, 다음날부터 며칠간 헬리콥터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간첩은 자수하라!”고 선무방송 하며 산 주위를 하루종일 선회했다. ‘북한군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1·21 사태)이었다.

이후 북악산은 얼굴을 바꿨다. 군사분계선처럼 철책을 쳤고, 곧 금단의 산으로 변했다.

경복궁이 내려 다보이는 북악산 동쪽 사면. 조선시대 때 억울함을 하소연 할 때 없는 하층민들이 이곳에 올라와 징과 꽹과리를 치고, 깃발을 흔들며 ‘고공농성’을 벌였다. 북악산은 조선시대판 고공농성의 무대였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인왕산은 통행금지에서 풀렸지만 북악산의 개방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청와대 뒷산이었기 때문이다. 2006년이 되어서야 성곽로가 개방되었고, 14년이 지난 2020년 북측 둘레길까지 열렸다. 급기야 올해 5월초 청와대 뒤쪽 북악산 남측면까지 완전 개방됐다.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기자는 북악산에 관한 한 남보다 조금은 더 알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다른 이들에게 “북악산의 동쪽 사면에 사람의 눈코입이 보이지 않느냐. 저 얼굴이 청와대를 외면하는 형상이라는 것”이라고 아는 체 했다. 고려의 남경터가 이렇고, 조선초 회맹터가 저렇다. 정도전이 어쩌구, 무학대사가 저쩌구 하는 등의 ‘썰’도 풀었다.

며칠전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가 2021년 10월 펴낸 <백악산의 자연유산과 역사문화종합학술보고서>를 보면서도 시큰둥 했다.

1902년(광무 6) 캐나다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1863~1937)이 서양에 소개한 서울지도. 한자와 함께 한글이름도 병기해놓았다.|영국 왕립아세아협회 소장

■그들은 왜 북악산에 올랐을까

그런데 보고서를 대충 훑어보던 필자의 시선에 한 곳에 꽂혔다. ‘격쟁의 장소였던 백악산’(하일식 연세대 교수)이라는 대목이었다. “1465년(세조 11) 6월 28일 세조가 궁궐 후원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는데, 어떤 사람이 백악산 기슭에 올라가 나무 끝에 종이를 매어 휘두르고 있었다. 임금 앞에 세웠더니 그는 전라도 광주에서 서울로 뽑아올린 종이었다. 옷이 남루하고 얼굴이 굶주렸다. 그는 ‘아침 저녁을 걸식하였고, 주인의 구박을 받아 말씀을 올리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고 호소했다.”

또다른 사례가 있다. “한 사찰(장의사)의 종 윤산이 그 절의 주지가 입은 피해를 호소하려고 백악산에 올라가 징을 치고 옷을 휘둘렀다”(<예종실록> 1469년 10월 29일)는 구절이다.

북악산에서 보이는 삼각산(북한산)의 봉우리들. 삼각산~북악산이 이어져 있다. 이 능선을 타고 호랑이와 범이 북악산을 너머 경복궁까지 자주 출몰했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한 달 여 뒤인 11월18일에도 “경기 고양 출신의 윤계종이 백악산 위에 올라가 통곡하고 옷을 휘둘렀다”는 실록기사가 보인다. “내(윤계종)가 군역에 복무하려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 틈에 마을 사람이 ‘빚을 받아간다’면서 가산을 빼앗아갔다”는 것이었다.

윤계종은 “이런 내용을 형조와 사헌부에 잇달아 고소했는데 소용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백악산에 올라갔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의 농성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세조는 북악산에 올랐던 광주 노비에게 사옹(궁중 요리사)이 차린 음식을 제공하고, 면포로 만든 옷과 함께 양식까지 두둑하게 주어 돌려 보냈다.

사찰의 분쟁 건은 사찰 승려인 돈성이라는 자가 비리를 저지르고 주지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것으로 밝혀졌다.

형조의 수사결과 승려 돈성에게 곤장 100대 및 자자형(얼굴에 문신 새기는 형벌)과 함께 강제 환속의 처벌을 내림으로써 마무리됐다. 세번째 윤계종의 경우 임금이 사헌부와 형조의 관리를 불러 사정을 들은 뒤 후속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 북악산이 조선 개국 후 나라를 지키는 산이라는 뜻에서 ‘호국백(護國伯)’의 관작을 받았다. 이곳에서 도성공사와 천재지변, 이상기후가 있을 때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 곳은 백악신사라는 사당이었다. 지금 북악산 정상에서 조선시대 기와편이 확인되곤 한다. 백악신사가 이곳 어디엔가 존재했을 것이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들은 북악산에서 징과 꽹과리를 쳤다

북악산은 경복궁을 내려다보고 있는 산이다. 때문에 왕실에서는 암자가 들어서거나 민간인이 올라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일례로 “경복궁이 내려다 보이는 사찰·암자를 모두 철거하고, 백악산 인근의 민가 뒤에 담을 쌓아 오르지 못하도록 한다”(<연산군일기> 1503년 11월9일)는 기사가 보인다. 연산군은 “경수소(경비초소)를 두어 단속하라”(11월 11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악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은 남의 이목을 피해 경복궁이 잘 보이는 북악산 동쪽 사면에 올라 징과 꽹과리를 치고, 깃발을 휘두르며 “임금님, 제발 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했을 것이다. 청와대, 아니 요즘이라면 용산의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고공농성을 벌인 격이다.

조선 후기 화가인 김윤겸(1711~1775)과 엄치욱(생몰년 미상)이 그린 백악산(북악산) 그림. 커다란 바위가 노출된 북악의 모습과 부아암, 능선을 따라 한양 도성 눈에 띤다. 아래쪽에는 우거진 송림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 소장

사실 격쟁은 신문고와 함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옳지 못한 것과 잘못을 따지는 수단으로 인정됐던 제도였다.

즉 중국의 성인군주인 요임금은 신문고와 유사한 감간지고(敢諫之鼓·감히 간하는 북)를 설치했다.

우임금은 대표적인 타악기인 종과 북, 경, 목탁, 땡땡이(도고·도鼓) 등을 사안에 맞게 의견을 개진하는 공론수렴제도를 만들었다. “정치 관련 청원은 북(鼓), 민생은 종(鐘), 행정은 목탁, 반역사건 등의 고발은 경(磬), 소송은 땡땡이(도鼓)를 사용했다”(<명종실록 1566년 9월4일)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1401년(태종 1) 7월18일 “고할 데 없는 백성들이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치라”는 신문고를 매달았다.

그러나 신문고는 서울의 문무관원들이 청원·상소의 도구로 주로 이용됐다. 일반 하층민과 지방민들에게는 문턱이 너무 높았다.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백악산(북악산) 그림. ‘독락정’은 부아암 아래쪽의 계곡 주변에 위치해 있다. ‘창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조성된 문이다. ‘취미대’는 삼청동 계곡 중턱에서 경복궁 북쪽 궁장과 저멀리 남산을 조망한. ‘청송당’은 북악산의 서남쪽 자락인 현재 칠궁의 후면부 주변이다. 북악산의 특징인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 소장

이때 구중궁궐에 있는 국왕에게 직접 구구절절한 사연을 전달하는 방법을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징과 꽹과리 등을 사용한 격쟁이었다. 그들은 국왕이 궐밖으로 나서는 때를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궁궐 안까지 난입해서 징·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군인인 김수의가 야밤에 궁궐 문 밖 나무에 올라가 격쟁했다. 임금이 ‘빨리 잡아오라’는 명을 내렸지만 김수의는 날이 새도록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김수의는 장 100대의 처벌과 함께 변방 고을의 종으로 예속되었다.”(<성종실록> 1481년 9월21일)

실록은 김수의라는 병사가 왜 나무에 올라가 밤새도록 고공농성을 벌였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이 뿐이 아니다. “1560년(명종 15) 5월2일 경기 장단의 일반 백성이 군복으로 변장하고 칼까지 찬채 몰래 궁궐 안까지 들어와 격쟁을 한 일로 병조와 도총부 관리들이 줄줄이 문책됐다”(<명종실록>)는 기사가 보인다.

겸재 정선이 3점이나 그린 ‘대은암’ 그림. 대은암은 중종 때의 권신인 남곤의 집 근처에 있는 바위를 지칭했다. 조선후가 서울의 명소가 되었지만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일단 맞고 시작하라

이렇게 궁궐을 시끄럽게 하는 일이 잦아지자 조정에서는 격쟁을 제한하는 규정을 만든다.

격쟁하는 사람을 일단 피의자로 간주하여 우선 곤장 등을 친 다음 억울한 내용을 구두로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임금이 타는 말을 놀라게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궁궐에 소란을 일으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직접 글을 지어 올리는 ‘상언’ 제도도 있었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하층민들은 ‘일단 맞고 시작하더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여과없이 국왕에게 전할 수 있는 격쟁을 선호했다. 하지만 ‘일단 맞고 시작하는’ 절차에 큰 문제가 있었다.

‘우선 맞고 시작하는 절차에서’ 너무 심하게 때려서 격쟁인을 죽음에 이르도록 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효종실록>은 “1658년 8월26일 경남 고령에 사는 배순룡이 격쟁을 한 뒤 형조에서 곤장을 맞아 죽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실록은 “미약한 백성이 머나먼 서울까지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불쌍한 일이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으려 했다.

그 이들에게 경복궁이 빤히 보이는 북악산이 ‘마지막 희망산’이었을 것이다. 혹여 이 ‘북악산 고공농성’을 본 임금님의 선처를 받을 수 있을까, 그렇게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북악산 부아암(負兒岩). 서로 포개진 두 개의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정선의 그림에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공극산은 아니다

‘북악산 고공농성’ 자료를 공부하며 종합보고서를 읽어보니 그동안 ‘띄엄띄엄’ 알았던 북악산 스토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전면개방도 되었으니 북악산과 관련된 핵심만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북악산의 명칭은 어떨까. 백악, 북악, 면악, 공극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서울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 북악산이라는 이름이 보편적이었다.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통칭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산이 사람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면악(面嶽)’이라는 이름으로도 통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백악산이라 했다. 백악산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좀 아는척 하는 이들이 ‘공극산(拱極山)’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 이름은 적당치 않다.

1537년(중종 32) 3월14일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이 북악산의 이름을 ‘공극산(拱極山)’이라 붙였다. 중국 사신은 “이 산이 서울의 북쪽에 있어서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하지만 ‘공극’은 ‘공신(拱辰)’과 비슷한 말로 ‘여러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처럼 사방의 백성들이 덕정을 펼치는 중국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다’(<논어> ‘위정편’)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 아는 척한다고 굳이 북악 혹은 백악산을 ‘공극산’이라 일컬을 필요는 없다. 문화재청은 2009년 명승으로 지정할 때 공식 명칭을 ‘서울 백악산 일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대문’ ‘숭례문’ 처럼 혼용해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지금의 청와대터에는 조선시대부터는 임금과 공신들이 모여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인 회맹식을 열었던 ‘회맹단’이 있었다. 지금의 청와대 본관 쪽이다. 경복궁 신무문 밖에 있었다.

■북악산은 왜 골산일까

북악산의 또다른 특징은 거대한 바위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흙이 적고 뼈가 드러난 골산’(무학대사·1327~1405의 언급)이라는 혹평도 들었다. 이유가 있다.

선캠브리아기(46억년~5억년전) 편마암 밑에 마그마가 뚫고 들어간 뒤에 1억년이 넘는 동안의 지각변동과 침식을 거쳐 지하 깊이 있던 화강암이 드러나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특히 10㎞나 되는 두꺼운 피복층이 중생대 백악기~신생대를 거치면서 침식과 풍화를 받아 사라지면서 다양한 화강암 풍화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급경사에 모암(母巖)이 곳곳에 노출된 돌산, 바위산의 모습이다.

이번 종합보고서에서 자연식생 부문을 담당한 연구자(이선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곳곳에서 군락을 이루는 소나무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특히 촛대바위 부근의 소나무 군락이 인상깊었던 것 같다. 서울 도심에서 이렇게 넓은 면적으로 군락을 이룬 소나무 숲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북악산 동쪽 6~7부 능선의 계곡 중턱에 있는 약수터 위 바위에는 ‘만세동방(萬世東方) 성수남극(聖壽南極)’이라는 각자가 적혀있다. ‘임금의 수명이 삼천갑자를 사는 동방삭과, 무병장수의 별인 남극의 노인성 같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누군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이 재임시절(1948~1960) 이 약수를 먹었다고 전해진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예부터 ‘소나무는 백목(百木)의 장(長)으로 황제의 궁전을 수호하는 나무’(사마천의 <사기>)로 꼽혔다. 그런만큼 조정에서는 북악산 등의 소나무 식재에 무척 신경을 썼다. 해마다 군대를 동원해서 대대적인 소나무 식재작전을 펼친 것(<비변사등록> 1797년 2월)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북악산에서는 돌 하나라도 캐낼 수 없었다. <세종실록> 1431년 3월 19일자는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공용으로 쓴다 해도 백악산의 돌은 채취하지 말 것이며, 이미 채취한 것이라도 가져오지 말도록 했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인왕산과 북악산에 출몰했다는 호랑이 이야기는 진실일까.

1463년(세조 12) 12월9일 경복궁의 후원(취로정) 연못가까지 출현한 호랑이를 추격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1467년(세조 16) 11월 19일 북악산에 출몰한 호랑이를 찾아 세조 임금이 추격대를 이끌고 직접 나서서 골짜기에 숨어있던 호랑이를 쏘아 죽인 일도 있었다. 이밖에도 호랑이와 범 이야기는 실록의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다.

숙정문 북서쪽 약 400m 지점에 있는 촛대바위. 일제강점기에 이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다. 해방후 쇠말뚝을 빼고 촛대를 세우며 이름을 ‘촛대바위’라 했다. 지금 쇠말뚝을 제거한 부분은 콘크리트 기둥으로 마감되어 있다.(출처:‘<청와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 2019년’에서

■북악산 밑에 세운 남경

북악산과 관련해서 중요한 핵심스토리는 뭐니뭐니해도 이 산 밑에 조성했다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야기다.

풍수지리에 빠진 고려왕조는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예언할 수 있다는 도참사상을 받아들였다. 왕실의 영속성을 위해 도읍지(개경)외에 서경(평양)과 남경(서울)을 설치한 것은 바로 이 풍수지리의 영향이다.

1101년(고려 숙종 6) 그 남경의 궁궐터로 낙점된 곳이 바로 면악, 즉 북악산 남쪽 땅이었다.

이듬해인 1102년(숙종 7) 중서문하성이 마련한 남경의 도시계획도에 따르면 동쪽으로 대봉(낙산), 남쪽으로 사리(용산 한강대교 부근 사평도), 서쪽으로 기봉(무악재), 북쪽으로 면악(북악)에 이르렀다. 약 3년간의 공사 끝에 궁궐이 완공됐다.

1104년(숙종 9년) 임금은 대신·내관들을 대동하고 남경을 친히 찾아와 10여일 머물렀다. 그러나 정식천도는 하지 않았다.

“임금이 해마다 해마다 중경(개경)과 서경(평양), 그리고 남경(서울)에서 4개월씩 머물면 36국이 조회할 것”(<고려사>)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숙종은 남경을 건설한 뒤 완전 천도하지 않고 ‘순주(巡駐)하는’ 도읍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남경의 궁궐터가 바로 북악산 남쪽, 즉 지금의 청와대 부근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있다.

조선개국 후 천도를 위해 한양을 둘러본 권중화(1322~1408)·정도전(1342~1398)·심덕부(1328~1401) 등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394년(태조 3년) 전조(고려) 숙종 때 경영했던 궁궐의 옛터가 너무 좁아 그 남쪽에…궁궐터(경복궁)를 정했다”(<태조실록>)

는 기록이 그것이다.

탐방로 주변 숲속에는 멧돼지와 노루, 사슴이 서식하고 있다. 조사단의 답사 도중 사슴 2마리가 탐방로를 가로지르는 모습이 포착됐다. 인공적으로 방사한 것으로 보인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호국백의 작위가 붙은 지체높은 산

또 북악산이 ‘호국백’(護國伯·나라를 지키는 산)이라는 작위를 받은 지체높은 산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물다.(<태조실록> 1393년) 1월21일) 이후 북악산에서는 도성공사와 천재지변, 이상기후가 있을 때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 곳은 백악신사라는 사당이었다. 지금 북악산 정상에서 조선시대 기와편이 확인되곤 한다. 백악신사가 이곳 어디엔가 존재했을 것이다.

멀리서봐도 도드라지는 바위가 있으니, 그것이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부아암’이다.

‘부아암(負兒岩)’은 두 개의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해태 바위’라고도 한다. 정도전이 “불의 형상인 관악산의 화마가 걱정된다”는 무학대사의 주장에 “‘백악의 해태바위(부아암)가 물을 상징하고, 앞에 한강이 흐르니 화마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는 속설을 간직하고 있다.

정선의 그림 중에는 ‘대은암’도 있다. 권신 남곤(1471~1517)의 집 근처에 있던 바위이다. 어숙권(생몰년 미상)의 <패관잡기>는 “박은(1479~1504)이 공무로 바빠서 만나주지 않았던 술친구(남곤)를 겨냥해서 붙인 바위 이름을 ‘대은(大隱)’이었다”고 전했다.

엄청 큰 데도 잘 보이지 않는 바위와, 좀체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술친구를 ‘대은(大隱)’이라 풍자한 것이다. 대은암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도 모른다.

촛대바위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일제가 바위 상단부에 쇠말뚝을 박았다. 광복 후 쇠말뚝을 빼내고 나라의 발전을 기원하는 촛대를 세우며 이름도 ‘촛대바위’라 했다.

이밖에 북악산 동쪽 6~7부 능선의 계곡 중턱에 있는 약수터 위 바위에는 ‘만세동방(萬世東方) 성수남극(聖壽南極)’이라는 각자가 적혀있다. ‘임금의 수명이 삼천갑자를 사는 동방삭과, 무병장수의 별인 남극의 노인성 같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누군가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1875~1965)이 재임시절(1948~1960) 이 약수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제 북악산은 금단의 산이 아닌 이상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해발 342m 정도의 동네 뒷산이 되버렸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북악산은 수려한 자연과 역사 문화적인 요소를 두루 갖췄다는 이유로 국가지정문화유산(명승)으로 지정된 곳이다. 이곳에 사는 풀 한포기와 나무 한그루, 이곳에서 밟히는 흙 한 줌, 돌 한 점, 그리고 우뚝 서있는 바위 하나에도 옛 사람들의 채취가 남아있다. 동네 뒷산처럼 오르내리더라도 북악에 담긴 역사적인 함의 만큼은 기억해두고 싶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의 <백악산(북악산) 종합보고서>는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하일식(연세대)·이선(한국전통문화대)·김문식(단국대)·홍태한(전북대)·류성룡(고려대)·최태선(중앙승가대)·방병선(고려대)·김윤정(고려대) 교수 등이 집필했습니다.)(12)

 

 

 

 

<주>

 

 

(1)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106150500001

 

 

(2)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9200500001

 

 

(3)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8090500001

 

 

(4)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조선의 설계자 핵심 브레인 정도전…성리학 중시하며 산업 억제정책 펼쳤죠 | 생글생글 (hankyung.com)

 

 

(5)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405140500001

 

 

(6)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2210600001

 

 

 

(7)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집현전 설치해 젊고 뛰어난 학자들 등용 건국세력 대체…정치의 세대교체 추진했죠 | 생글생글 (hankyung.com)

 

 

(8) 정치의 근본은 백성의 유복한 생활임을 안 세종…농업 기술개발에 힘쓰고 세금 공평하게 내게 했죠 | 한국경제 (hankyung.com)

 

 

(9)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401090500001

 

 

(10)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5190600001

 

 

(11)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1100500001

 

 

(12)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7120500001

 

 

 

 

<참고자료>

 

 

 

조선(朝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Joseon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500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600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700 - Wikipedia

 

 

 

 

 

[블로그] 조선의 왕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hani.co.kr)2019-10-20

 

 
 

"조선 후기 수렴청정한 대비 권한, 왕권 능가하지 못해" | 연합뉴스 (yna.co.kr)201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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