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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1) 1392년 조선 건국

대야발 2021. 6. 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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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88년 위화도회군

 

고려 말은 원나라의 압박과 친원파의 발호, 그들과 결탁한 권문세족들의 부패로 인해 이미 붕괴가 많이 진행된 상황이었다. 체제 불안이 심각했고, 민란도 발생했다. 대다수가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했고, 명분도 충분했다. 이에 공민왕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문제는 외부상황이었다.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북원의 침략과 명나라의 간섭은 고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홍건적들이 대거 국경을 넘어 개경이 함락당하는 지경이었다.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들의 침입은 전 해안 지역에서 창궐했다. 국가의 안위가 심각한 수준이었으므로 최영, 이성계 같은 신흥 무인들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런데 국론과 국력, 자원의 통일이 절실한 상황 속에서 신진 사대부들은 조직적으로 개혁을 준비했다.

 

 

그런데 요동공격을 목표로 국경을 넘던 이성계의 5만 대병력이 1388년 ‘위화도 회군’이라는 군사정변을 일으켜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끌어내렸다. 이성계와 손잡은 개혁파들은 왕을 옹립해가면서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과전법을 추진해 토지의 재분배를 통해 자기 재산을 증식했다. 정변은 결과적으로 성공했지만, 안보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험이었다.

 

 

 

고려 신진사대부들의 산실인 성균관.

 



■ 개혁파의 분열과 1392년 조선의 건국

 

 

이성계,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들은 고려의 멸망과 새 나라의 건국을 추진했다. 반면에 정몽주·길재 등을 비롯한 온건 개혁파들은 외부상황과 고려에 대한 충성을 고수하느라 다른 주장을 펴고, 적대적인 행동을 했다. 결국 이방원(훗날 태종) 등 급진파는 반대파를 피로 숙청한 후 조선 건국에 성공했다. 

 

 

1392년 7월 16일 고려는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으로 멸망했고, ‘조선’이라는 신흥국가가 탄생했다. 이른바 무혈로 성공한 역성혁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안보위기를 감수하면서 과감하고 신속하게 추진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급진 개혁파의 정변 추진 배경으로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을 들 수 있다.

 

정도전을 비롯한 이들은 정책 경험들이 있고, 외교관으로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정변의 과정과 건국 직후에 조선의 국호 선택과 왕의 즉위 허락 등 명나라와 벌인 외교와 왜구 처리 과정을 보면 자신감도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성계는 요동 전투를 두 번 치른 명장으로 왜구와 명의 움직임을 전략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유사시 적을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정변을 추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정과 결과가 어떠하든, 정변은 백성들의 생존과 나라의 운명을 걸고 벌인 일들이었다. 만약 실패했다면 주도자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재들도 대거 희생됐을 것이다. 또한 정변에 관심도 없고, 결과에 책임도 없을 뿐 아니라, 큰 혜택도 받지 못할 백성들이 희생당했을 가능성도 크다. 역사를 살펴보면 혁명을 계획하고 주도한 부류들이 실제로 다수의 백성을 고려한 흔적들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개혁과 정변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들은 어떤 사회적 성분과 사상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을까.(1)

 
 
 

신진사대부는 성균관과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치른 학자적 관리들이다. 지적 능력이 뛰어나고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비판의식이 강한 이상주의자로, 야망을 실현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도전과 같이 신분이 한미하거나,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중소 토지만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기득권에 막혀 중간 관료에 머물렀다. 따라서 권문세족과 기존 질서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세력이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해 세력을 이룬 이들은 ‘내우외환’이라는 고려 사회의 위기를 통감했다. 따라서 개혁이라는 뜻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위기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과 학문적인 기반, 가계의 차이 등으로 점차 입장에 차이가 생겨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됐다.

 

 

위화도 회군이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서 최영이 죽고 우왕이 쫓겨나자 온건파의 위기감은 최대치로 증폭됐다. 결국 두 세력은 권력투쟁을 벌였고, 온건파의 대표였던 정몽주는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이색·길재 등을 비롯해 ‘두문동 72인’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다가 숙청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정도전 동상.
 
 
 
 

■ 정도전이 추진한 혁명의 내용과 성격

 

 

건국에 성공한 이들이 사회를 개혁시키는 혁명 과정과 권력투쟁이다.

급진 개혁파는 다시 두 부류로 분열됐다.

하나는 힘을 장악한 이성계 이방원 등의 무장과 조준 같은 학자들이었다.

또 하나는 왕조 창업의 실질적 주역이자 혁명 이론과 정책의 근본 틀을 다진 정도전 중심의 강성 개혁자들이었다.



정도전은 학식이 뛰어나고,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장량을 자처할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지니기도 했다. 자기 목표를 실현하는 야망에 이성계를 끌어들이고, 끝내 성공하게 한 사람이다. 개혁 추진 이전부터 혁명에 이르는 과정 내내 정책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사회 개혁의 핵심인 토지의 경작과 분배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정책을 제안하고 부분적으로 실천했다. 철저한 이론 무장으로 성리학을 정치와 정책에 활용해 권문세족을 공격하기도 했다. 《불씨잡변》을 집필해 기득권인 불교 세력을 붕괴시켰다. 외교관의 경험을 살려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명나라를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보였다.



반면 요동정벌의 필요성을 주장해 명의 황제인 주원장의 위협을 받았다. 결국엔 이방원에게 죽임당하는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진나라의 한비자처럼 법률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법치주의 사회의 정착을 도모했고 백성의 이익을 소중하게 여겼다. ‘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민(民)은 복종하지만 민(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민(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 그가 쓴 《조선경국전》에 나오는 글이다.

 

 

나아가 개인과 혈통에 중심을 두는 왕권보다는 조직과 능력을 중시하는 관료정치와 재상정치를 추진했다. 과거 제도가 활성화되고, 서당 등의 교육기관이 전국에 걸쳐 생겨나는 등 교육의 수혜 범위가 확대되기도 했다. 결국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임당했지만, 그가 추진한 많은 정책은 정적인 태종에 의해 수용됐다. 이후 세종 때 꽃을 활짝 피우면서 조선은 질적으로 변신했다.

 

 
 

정도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났던 이상주의 정치가이자 성공한 혁명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은 군사력을 동원한 권력쟁탈전을 넘어 이론과 실무능력을 겸비한 개혁세력이 청사진을 갖고 추진해 성공한 혁명으로 평가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정도전 등이 선택한 이론과 추진한 정책 등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왕권과 신권의 영원한 정치투쟁을 낳았고, 학자적인 관료들의 무능과 교조성, 성리학 중시로 인한 산업 억제와 자주성 상실 등이 심화됐다.

 

 

이런 폐해들은 조선 사회에 점점 암울한 기운을 드리웠고, 백성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지 혁명의 추진 세력이 그것까지 감당할 순 없는 것 아닌가.(2)

 

 

 

■ 1394년 한양 천도

 

 

 

경복궁 전경. 1395년 완공한 경복궁은 한양을 수도로 정한 정도전의 계획으로 건립됐다.

 

 

 

한양의 수도로서의 적합성?

 

 

‘해’의 존재를 높게 평가하고, 편서 계절풍 지역이며,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남만주와 한반도에는 풍수지리에 적합한 터들이 흔하다. 다만 산과 강의 방향과 배열, 각도 등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양은 둘레를 내사(四)산(낙산·인왕산·남산·북악)과 외사(四)산(용마산·덕양산·관악산·북한산)이 겹으로 에워싸고, 물길이 안으로는 청계천, 밖으로는 동쪽에서 서쪽 바다로 흐르는 한강이 싸고돈다.

 

 

약간의 비보만 더하면 이론적, 수리적, 도형적으로 거의 완벽하다. 신지배층인 성리학자들에게는 미학적으로 뛰어나고, 성리학적인 논리에 알맞아 이상을 실천하기에 적합한 ‘터’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양은 경관이 수려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했다는 관념적인 찬사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수도 선택의 우선순위는 백성의 안위와 생활을 보장해주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조건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도(京都)는 지세의 훌륭함은 동방의 으뜸이요, 천연의 요새지다”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한양은 북방 국경선에서 멀리 떨어졌고, 내륙에 위치해 해양 공격에도 방어시간에 여유가 있었으며, 산들이 겹겹으로 막아서 비교적 안전한 환경이다. 태조가 후보 지역인 무악(신촌 일대), 한양(서울 사대문 안), 도라산(판문점 근처)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을 때, 조준 등은 한양이 “사방으로 도로의 거리가 균평(均平)하고 수륙의 교통이 잘 되는 곳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라고 평가했다.(3)



 
 
 
 
 
 

<자료출처>

 

 

(1) https://www.hankyung.com/article/2022021823611

 

 

(2)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022588541

 

 

(3)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030437511

 

 

 

<참고자료>

 

 

조선(朝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Joseon - Wikipedia

 

 

 

https://sgsg.hankyung.com/article/2022021166331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조선의 설계자 핵심 브레인 정도전…성리학 중시하며 산업 억제정책 펼쳤죠 | 생글생글 (hankyung.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정도전 집에 웬 ‘말(馬) 운동 트랙’?…‘왕실마구간’ 드러난 종로구청터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산 메뚜기 삼킨 당태종, 제단 오른 조선 태종'···작금엔 "내 탓이오" 지도자가 없다 - 경향신문 (khan.co.kr)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집현전 설치해 젊고 뛰어난 학자들 등용 건국세력 대체…정치의 세대교체 추진했죠 | 생글생글 (hankyung.com)

 

 

정치의 근본은 백성의 유복한 생활임을 안 세종…농업 기술개발에 힘쓰고 세금 공평하게 내게 했죠 | 한국경제 (hankyung.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580년 만에 ‘갑툭튀’한 장영실의 ‘신상정보’…새빨간 가짜뉴스일까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임금을 '너'라 한 정인지, 임금의 '팔'을 꺾은 신숙주…취중 실수의 끝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분(화장품)과 바늘 보내오"…조선시대 '츤데레' 군인 남편이 보낸 선물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전하! 제 하소연 좀!"…북악산은 조선시대 고공농성장이었다 - 경향신문 (khan.co.kr)

 

 

https://v.daum.net/v/20201208063009755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500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600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700 - Wikipedia

 

 

 

 

 

이성계는 몽골인? 漢字만이 아는 역사의 비밀! | Save Internet 뉴데일리 (newdaily.co.kr)2012-10-24

 

 

 

[블로그] 조선의 왕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hani.co.kr)2019-10-20

 

 

 

 

 

"조선 후기 수렴청정한 대비 권한, 왕권 능가하지 못해" | 연합뉴스 (yna.co.kr)2018-04-15 

 

 
 

 

 

https://v.daum.net/v/20240719050340641

 

 

 

https://v.daum.net/v/20240221073901176

 

 

 

https://v.daum.net/v/20240822153300426

 

 

 

26년 나이 차에도 논쟁이 가능하다니 (daum.net)2015. 7. 3. 

 

 

 

[문학예술]김시습에서 정약용까지…‘신화가 된 천재들’|동아일보 (donga.com) 2007-09-15

 

 

 

[커버스토리]조선시대의 신동, 특별한 게 있었다 - 주간경향 (khan.co.kr)뉴스메이커 785호2008.07.29

 

 

 

https://v.daum.net/v/20240831070007722

 

 

 

[인문사회]“백성을 편하게 만드는 仁政이 가장 급하옵니다”|동아일보 (donga.com)2008-06-07 

 

 

 

https://v.daum.net/v/20210102093300318

 

 

 

책 1억번 읽은 '조선의 둔재'..세종도 무릎 꿇은 '독서왕'이 됐다 [이기환의 Hi-story] (daum.net)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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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daum.net/v/2024090614515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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