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반도의 독자적 역사가 서기까지... 한반도 역사지리의 뿌리를 읽다 (daum.net)

김성호입력 2024. 1. 14. 17:12

한반도의 독자적 역사가 서기까지... 한반도 역사지리의 뿌리를 읽다 (daum.net)

[김성호의 독서만세 213] 박인호 지음 <실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어떻게 보았는가>

[김성호 기자]

한때는 역사란 그저 외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의 하나쯤으로 여겼을 때였다. 그 시절 역사는 간명했다. 책에 쓰인 옛 이야기였고, 그 책이란 교과서였다. 교과서는 언제나 명확했다.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와 철기를 거쳐 여러 나라가 일어서고 쇠망했다. 그로부터 반도체를 팔아 지구 반대편에서 에너지를 사오고 K-Pop 스타를 배출해내는 이 작지만 강한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편 끝자락에서 고조선부터 삼한, 삼국시대가 이어졌고, 고려와 조선, 나아가 오늘에 이르는 역동적인 이야기가 펼쳐졌다. 그 유구한 시간 속 기록해 마땅한 순간들이 내가 아는 역사였다.

 

언제쯤이었을까. 내가 배운 역사가 의심스러워진 순간이 있었다. 교과서를 두고서 편향논란이 제기되고, 심지어는 역사왜곡이냐 아니냐 열띤 토론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릴 때였다. 누군가는 역사교과서가 편향되었으므로 올바로 새로 써야 한다고 했고, 또 누구는 이 같은 발언이 치우쳤다며 일갈했다. 중국의 동북공정부터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이슈가 연달아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배워 아는 역사란 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였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속 저 유명한 문장,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가 무슨 뜻인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배운 역사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채택된 것일 터였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존재했던 모든 사실이 유의미한 역사가 되지는 못한다. 어느 것은 취해지고 어느 것은 버려진다. 이를 가르는 것은 학자들이다. 때로는 정치적 득실과 이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학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어떤 사실은 택하고 다른 사실은 버린다. 역사 또한 결국은 사람의 일인 것이다.

내가 아는 역사는 언제 역사가 되었을까. 시간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대신, 오늘을 사는 이들이 반드시 기억해 마땅한 과거의 사실이 된 건 언제부터인가 말인가. 문득 그 사연이 궁금하였다.

 
역사가 역사가 되기까지는
 
▲ 실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어떻게 보았는가 책 표지
ⓒ 동북아역사재단
 
<실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지리를 어떻게 보았는가>는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본래 그러했다'고 가벼이 지나치는 지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책이다. 박인호 교수가 지난 2021년 발표한 이 책은 저자가 과거 저술한 논문을 일반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게끔 정리한 교양도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조선 중후기 실학자들이 당대로서는 생소한 역사지리적 인식을 갖고 나름의 학문을 펼치는 과정을 정리해 나열했다. 16세기를 산 한백겸부터 대중에 널리 알려진 이익과 정약용을 거쳐 서구열강과 직접 맞닥뜨린 19세기 사람 이유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를 소환해 그들의 역사지리학적 성과를 풀어놓는다.
 

흔히 사람들은 역사와 지리가 별개의 영역이라 여긴다. 역사란 과거의 일과 그 의미를 배우는 학문이며, 지리는 인간이 살아가는 지표 위 공간을 이해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시간을 가로지르는 통시적인 것이고, 지리는 공간을 넘어 분석돼야 할 공시적인 것이어서, 둘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역사는 지리 가운데서 태동하고, 지리는 역사 가운데서 의미를 가진다. 지리의 영향 없이 발전하는 역사는 없고, 역사와 따로 떨어진 지리는 생동감을 잃는다. 따라서 둘을 서로 결합해 이해하는 건 앎을 넓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역사 속에서 지리를 이해하는 것, 말하자면 역사지리는 그래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물론 역사와 지리가 처음부터 함께 하는 건 아니다. 둘은 서로 다른 특성을 지녔고, 둘의 관련성을 한 번에 꿰뚫어보는 데는 나름의 공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선의 학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들이 역사 가운데 지리의 중요성을 알아가기까지는 긴 시간과 외래 학문의 도움이 필요했던 듯 보인다. 이전의 역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에 그쳤다. 국가와 사람, 업과 제도의 흥망성쇠가 주요한 대목을 이루었고, 지리는 그를 보조하며 필요한 경우 지명으로써만 등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마저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지역은 지명이나 실제 위치가 누락되고 혼동되기 십상이었다. 어느 사료에는 한반도 안에 있다 하는 것이 다른 사료에는 요동에 있다 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역사와 지리의 긴밀한 관계맺음

고증과 실측이 역사서술의 주된 방법론으로 등장하기 이전엔 저술의 의도에 따라 지리를 제멋대로 서술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후대 조선의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국 원나라 대의 사서 <요사>는 거란족의 역사를 요동 지역의 주류로 부각하려는 의도 아래 작성됐다. 한반도 일원에서 발호한 세력들을 요동 주변에서 일어난 것으로 표현한 것도 그래서였다. 삼한과 삼국의 옛 지명이 난 데 없이 요동 일원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됐고, 후대의 사서 중 상당수가 먼저 있었던 이 사료의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앞선 나라와 그 시대를 산 이가 이미 사라진 세상에서 후대가 이를 바로잡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다. 고대사 서술에선 이 같은 사례가 적지 않아 후대에서 고대 국가의 영토를 비정하는 건 까다로운 작업이 될 밖에 없었다.

 

책은 조선조 여러 학자가 남긴 저술을 통해 역사지리에 대한 인식과 기록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탐구한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를 살았던 실학자들, 모두 40명 가까운 학자들이 남긴 저서를 비교분석하여 기록할 만한 특징을 따로 떼어 실었다.

 

저자는 조선 학자 가운데 역사지리학을 독립적 학문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인물로 1615년 세상을 떠나는 한백겸을 이야기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해 완성돼 1640년 간행된 <동국지리지>가 최초로 역사지리에 대한 내용을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기초적인 논증을 거쳐 실었기 때문이다. 책이 나라 안 강역의 변화와 관방의 실태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쓰였기에 고대 국가의 흥망을 역사지리 안에서 담아내게 된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한백겸은 여기서 '남자남북자북'이란 논리로써 상고사를 살핀다. 조선이 계승하는 이 나라의 상고사는 남쪽과 북쪽으로 양분돼 별개로 발전해왔다는 이야기다. 또한 삼국이 마한, 진한, 변한으로부터 연결돼 나타났다는 이전의 해석에서 탈피해 삼한 모두 남북 중 남쪽의 역사로 구별한다. <요사>의 서술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시각을 뒤집는 획기적 관점으로 이후부터는 한백겸의 시각이 정설로 자리 잡게 된다.

17세기를 산 유형원 또한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그는 <동국여지지> 등의 책에서 고대 국가들의 영역을 한반도에서 벗어나 요동 지역까지 확장해 비정한다. 기자조선이 요하의 동쪽에 있었고, 진번 또한 요동에 있었다고 하는 식이다. 여전히 과거 여러 서적을 비교해 그중 합당하다 여겨지는 설을 취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는 공부이지만, 유형원은 생애 전반에 걸쳐 역사지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고대사의 무대를 합리적으로 정착시키려 노력한다.

 

진취와 경계 사이에서

성호 이익 또한 인상적이다. 저자는 이익의 역사지리 인식에 대해 '요동 땅에 대한 강한 복구의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자들인 성호학파의 여러 학자 또한 그러해서, 단군조선의 강역을 요동을 넘어 산동반도까지 확장하거나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에 두는 등 조선이 계승한 역사를 한반도 너머까지 넓히려는 일관된 의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해를 북국으로 지칭하며 계승할 역사 안에 받아들인 유득공의 <발해고> 또한 흥미롭다. 그는 발해를 우리 역사 안에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적은 관심으로 불명확한 지명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요사>와 <대청일통지> 등이 잘못 기록한 위치를 비평하고 바로잡는다.

 

반면 역사지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정약용은 한반도 고대 역사를 한반도 내로 끌어들인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만주 존재설을 부정하고 발해를 우리 역사 안에 끌어들이는 시도 또한 비판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요동 지역의 문화가 청에 의해 함몰되어가는 상황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정약용이 보인 여진과 말갈의 역사를 우리의 것과 철저히 구분하고 집요하게 역사서술의 영역을 한반도 내에 고정하려는 모습 안에 시대적 흐름과 이에 대응하려는 목적성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온다.

 

실학자들의 변화하는 역사지리학적 연구로부터 단순히 고증을 통해 사실에 다가서는 모습 이상을 읽게 된다는 점은 각별히 흥미롭다. 결국 역사란 시대 안에서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그로부터 더 낫거나 못한 미래에 가 닿게 된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역사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주변 상황 가운데 우리는 역사를 대하는 더 나은 태도를 요구받고 있으므로.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출처; 일본의 조선 추월, 조선이 버린 무기로 이뤄졌다[Deep&wide] (daum.net)

입력 2023. 12. 11. 04:31

편집자주
국내외 주요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리포트입니다

‘궁극에 도달하면 서로 만나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 특정 분야에서 성취를 이루고 나면 자연스레 인접 분야에 대해서도 혜안이 생긴다는 얘기지만, 요즘처럼 각 분야 전문성이 높아지면서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에서 지식경제부 장관을 지낸 최중경 한미협회 회장이 ‘잘못 쓰인 한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펴낸 건 보기 드문 반전이다.

1990년대 외환위기, 2000년대 금융위기 극복과정에 힘을 보탠 최 회장은 그 과정에서 체험한 ‘국가 경영전략’이라는 인식 틀을 과거 2,000년 한민족 역사에 투영했다. 최 회장은 “한민족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되고 분단상황까지 맞게 된 건 역사의 중요한 순간 우리 지배층이 중대한 실책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일본이 조선을 앞서게 된 건, 조선의 사장시킨 제련기술을 활용해 조선이 포기한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했다. 서울 통일로 한미협회 집무실에서 진행된 최 회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다.

최중경 한미협회장이 서울 중구 한미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_역사책을 쓰게 된 동기는.

"어릴 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역사는 승자의 왜곡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논리적 추론으로 왜곡의 여지를 탐색하고 추가 사료를 발굴해 왜곡을 시정해야 올바른 역사가 보인다. 역사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를 외면하고 선악 논리를 앞세워 인과관계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펼쳐진 은폐, 왜곡, 과장, 편견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서술과 역사교육도 은폐, 과장, 왜곡,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 매국노가 애국자가 되고 실패한 자를 성공한 자로 둔갑시키며 책임지는 자가 없는 기존의 역사 서술은 국민들이 공동의 목표와 가치를 위해 헌신할 의욕을 꺾는다."

 

_우리 역사 서술의 대표적 왜곡 사례를 꼽는다면.

"조선 고종이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고종에게 덧씌워진 독립 투사 이미지를 다시 봐야 한다. 동학군을 진압해 달라고 청군을 불러들여 일본군의 한반도 상륙 구실을 스스로 내준 이가 고종이다. 자신과 외척 민씨 가문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무분별하게 외세에 의존하려 했던 용렬한 군주다."

_우리 현대사를 결정지은 주요한 역사적 사건을 꼽아달라.

"현재 우리 민족은 만주를 잃고 한반도로 밀려난 뒤, 분단상황까지 맞고 있다. 이는 과거 4, 5개가량의 역사적 변곡점마다 지배층이 선택한 국가대전략이 주변국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거슬러 꼽아본다면 △고구려의 방관 속에 멸망한 백제 △만주 회복 기회를 걷어찬 위화도 회군(1388) △청과 협력해 만주에 진출할 수 있었던 병자호란(1636) △청의 속방을 자처했던 임오군란(1882) △상해 임시정부의 태평양전쟁 미참전이 그것이다.”

_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많이 다르다. 백강전투부터 설명해달라.

“고구려와 백제의 몰락으로 민족의 활동 무대가 축소되고 만주 대륙의 주도권이 흔들리는 상황을 초래한 건 신라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고구려 리더들이 최대 위험을 미리 인지해 642년 대야성 전투(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전사한 전투)의 결과를 놓고 백제에 강력히 경고하는 한편, 신라를 보듬어 더 이상의 군사적 위협이 없을 거라고 안심시켰다면 660년과 668년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신라의 배후 도움이 없었다면 당은 결코 고구려나 백제를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배우 박해일이 '인조' 역을 연기하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_위화도 회군과 병자호란은.

“14세기와 17세기 중국 왕조 교체기에 우리 민족은 다시 만주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다. 1388년 고려 우왕과 최영이 주도한 요동정벌은 공민왕 시절인 1370년 이미 점령한 바 있는 요동성에 다시 진출해 요동지배권을 확립하려는 군사작전이었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지만, 당시 요동에 대한 명의 지배권은 확고하지 않았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북으로 쫓겨간) 원나라가 고려와 합세해 명나라를 공격하는 시나리오가 가장 신경 쓰였을 것이다. 고려가 요동을 점령한 후 우리 옛땅을 되찾은 거라고 설명하고 명과 조공관계를 맺었더라도 주원장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명청교체기에도 조선이 청군과 연합해 명군을 공격했더라면 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광해군의 중립외교 노선을 버리고 명나라 편에 서서 청나라를 적대시함으로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화를 자초했다.”

 

_임오군란 전후 19세기말 아쉬운 대목이 있다면.

"19세기 후반 조선은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신미양요, 거문도 사건 등을 겪었다. 역사교과서는 신미양요는 서양 세력과의 무력충돌로 거문도 사건은 거의 다루지 않지만, 두 사건 은 조선의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처럼 영국, 미국과 가까워져 급성장할 기회를 놓쳤다. 1871년 신미양요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침몰사건의 책임을 묻는 목적보다는 조선을 개항해 교역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지만, 조선 조정이 오판해 선제포격을 하는 바람에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1885년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도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과 협력관계를 맺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영국의 국제적 위상과 러시아 견제정책을 파악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이 2년 점령 기간 중 적극적 교류를 시도하지 않은 실책을 저질렀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의 침공 위협에 놓였던 태국이 영국을 끌어들여 영ㆍ프의 중립지대로 남으며 독립을 보전했던 사례를 재연하지 못했다."

거문도에 상륙한 영국 해군 장병(왼쪽)과 거문도 앞 해상에 정박 중인 영국 전함 페가수스. 영국해군 자료사진

 

_상해 임시정부의 실책도 언급한 바 있다.

"상해 임시정부가 전략적으로 영민하게 대응했다면 한반도 분단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2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26개 연합국이 ‘중국 전구(戰區)’ 성립을 발표했다. 중국 전구 최고사령관에 장제스가 임명되고, 참모장은 미국 육군 중장 조셉 스틸웰이었다. 중일전쟁이 미국 통제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 상해 임시정부가 미국을 잘 설득했다면, 즉 장제스와 마오쩌둥 군대에서 일본과 싸우던 조선 청년들을 선발해 태평양 전선으로 보내겠다고 제의했다면 우리는 전후 승전국 지위를 얻고 남북 분단도 막을 수 있었다."

_근세 일본의 발전에 조선이 버린 기술이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조선 연산군 시절 함경도 단천 광산에서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은광석 제련에 획기적 기술이 발명되었다. 연산군이 기술자들을 왕궁으로 초대해 치하할 정도였다. 당시 유럽, 남아메리카, 중국을 잇는 삼각무역의 결제통화가 은이었기에, 은을 효율적으로 제련해 생산량을 늘리는 건 국가의 부강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세력은 단천광산을 폐쇄했다. 은이 많아지면 사치 풍조가 생긴다는 이유였다. 조선이 버린 기술은 일본으로 흘러갔다. 일본은 이 기술을 이와미 광산에 적용, 세계 은의 3분의 1을 생산하는 국가가 됐다. 당연히 일본이 국제무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졌다. 게다가 조선이 명나라를 본받아 해금정책을 취하는 바람에, 동아시아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진출해 아시아 무역의 중심에 서게 됐다."

_이런 잘못된 결정들에서 배우는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17세기 명청교체기 국가전략의 실패는 국제 안보문제를 국내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푸는 실책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인조반정 세력이 국내 정치적 이유로 시대역행적 친명반청 정책을 펴면서 국가적 위기를 자초했다. 대외 안보에서는 초당적이고 일관된 대응이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나토 창설 과정에서도 아서 반덴버그 미국 상원외교위원장은 반대 정파인 트루먼 대통령과 적극 협력했다. 그는 "국제 안보문제에 국내 정치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국제환경에서 조선과 일본이 취한 대응을 비교하면 국가 대전략의 품질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은 세도정치로 인해 경쟁이 없는 사회, 승자가 정해져 있는 사회였다. 그런 사회는 발전하기 어렵다. 또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폐쇄된 사회도 발전하기 어렵다. 인재 양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중경 한미협회장이 서울 중구 한미협회 사무실에서 한국일보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최중경: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하와이대 경제학 박사. 제22회 행정고시에 합격.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 국제금융국장, 세계은행 이사, 기획재정부 제1차관, 주 필리핀 대사,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 지식경제부 장관,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역임. 현재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 제8대 한미협회 회장. 저서로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청개구리 성공신화'가 있다.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

 

[경제]

청계천서 발견된 상평통보 600닢 꾸러미 (chosun.com)

문화재 야화 [19] 발굴하다 주운 돈
도성 ‘개구멍’ 드나들다 잃어버린 돈인듯

신형준 기자
입력 2007.11.01. 00:50업데이트 2007.11.01. 02:12
 
 

가장 많은 돈을 ‘주워 본’ 직업군에 고고학자들이 꼽힐 것이다. 특히 무덤을 팔 때 그렇다. 고인의 유족들이 ‘저승길 노잣돈’을 넣어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 역시 무덤에서 말고 일반 발굴터에서 돈을 뭉텅이로 ‘줍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돈을 일부러 흘리고 다니는 경우는 없다. 설사 그렇더라도 누군가가 줍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 땅에 그냥 묻히는 경우는 드물다.

명지대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는 지난 2004년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일명 ‘피맛길’ 일대 재개발지역 발굴을 했다. 이 중 공방을 겸한 어느 부엌은 불에 타 심하게 훼손된 채 발굴됐는데, 여기서 손으로 돌리는 자물쇠 장치만 남은 손금고가 나왔다. 금고에는 일제 강점기에 주조된 일본 동전이 385점 있었다. 총액은 2144전. 1943년에 주조된 동전도 있어서 부엌이 불에 탄 것은 1943년 이후~광복 직전으로 파악됐다. 그런데 이 돈은 당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었을까?

박기주 성신여대교수(경제사)는 “일제 강점기, 한국 원과 일본 엔은 1대 1로 교환됐다”며 “100전이 1원(엔)이었으므로 일본 동전 2144전은 21원(엔) 44전이었다”고 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중반은 인플레이션이 심했다. 예를 들어 1944년 쇠고기 1근(600g)은 1원 58전이었지만, 1945년에는 9원 32전으로 거의 6배가 뛰었다. 21원 44전으로는 1944년 쇠고기 14근 혹은 쌀 5말 정도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에는 쇠고기 두 근 반, 혹은 쌀 반 말을 살까 말까 했다.

불 타는 집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가지고 나올 만한 돈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중앙문화재연구원도 지난 2004년 3월, 청계천 오간수문(五間水門·청계천 물길이 도성 밖으로 빠질 수 있도록 서울성곽 아래에 다섯 개의 물길을 낸 수문)에서 19세기 초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600닢(개)이 넘는 상평통보 꾸러미를 발굴한 적이 있다.

당시 발굴을 맡았던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상평통보는 수문을 통해 몰래 도성을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쇠창살 아래 흙더미에서 한 꾸러미에 묶인 것처럼 나왔다”며 “출토 상태를 볼 때 물에 쓸려온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 오간수문의 ‘개구멍’으로 도성을 드나들다가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됐다”고 했다. 16세기 중엽 임꺽정도 옥에 갇힌 가족들을 구한 뒤 오간수문의 쇠창살을 깨고 탈출했다고 전해질 만큼, 오간수문은 불법적으로 한양을 출입할 때 애용되던 통로였다.

발굴된 상평통보를 살핀 한영달(韓榮達) 한국 고전(古錢)연구감정위원회 회장은 “동전의 종류로 볼 때 19세기 초반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렇다면 19세기 초, 이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손해를 본 것일까? 박기주 교수는 19세기 초, 상평통보 600닢으로 80kg 쌀 한 가마니나 닭 20마리, 혹은 청어 200마리를 각각 살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왕릉을 지키는 종9품 능참봉이 월급으로 쌀 10말과 황두 5말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상평통보 600닢은 능참봉 월급의 절반을 훨씬 넘는 액수였던 셈이다.

[사회]

입력 2019. 1. 17. 15:33

조선의 신분제 실상은 6등급제 왕족·문반·무반·중인·상민·천민 양반+상민=서, 양반+천민=얼 개똥이 등 노비 이름 기구한 운명 사노비, 양반 가문 지탱 핵심 노동력 중세 조선은 동족 노비로 움직여 공노비 해방서 폐지까지 100년 노비들의 장예원 방화서 300년 걸려

보물 제527호인 김홍도의 <벼타작> . 일하는 노비들과 놀고먹는 양반의 모습을 절묘하게 대비한 18세기 세태 풍자도이다.

종로구 장예원(掌隸院) 터를 찾아 세 번째 길을 떠난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응달, 노비 이야기의 마지막 회다. 장예원은 춤과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과 함께 ‘장○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비를 다루는 관청이다. 조선 지배층은 노비(奴婢)란 남자 종(奴), 여자 종(婢)일 뿐 노예(奴隸)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관아 이름에는 버젓이 ‘부릴 예(隸)’자를 썼다. 기자조선 때부터 삼한과 삼국·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3천 년 가까이 줄기차게 이어져온 노비제도의 본질은 노예제도 그 자체였다.

우리가 반상제(양반과 상민) 혹은 양천제(양인과 천인)라고 알고 있는 조선의 신분제는 실제로 왕족-문반-무반-중인-상민-천민의 6등급제였다. 서얼(庶孼)은 양반+상민의 자녀는 서(庶), 양반+천민의 자녀는 얼(孼)이라는 새로운 신분이었다. 양반도 상민도 아닌 서얼의 양산이 중인 신분으로 계층 분화했다. 게다가 천민은 팔천(八賤)이라고 하여 노비·기생·백정·광대·장이(대장장이·옹기장이)·승려·무당·상여꾼 등 8가지로 세분해 숨을 쉴 수 없도록 억눌렀다.

노비는 나라와 양반 가문의 궂은일을 도맡는 핵심 노동력이었다. 공노비는 왕실과 관아, 사노비는 양반가의 일꾼이자 몸종이었다. 내시와 궁녀는 궁궐과 왕실을 지탱했고, 관아를 뒷바라지하는 관기와 사환, 문무 잡직 모두 공노비였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이민족 노예가 인구의 30~40%에 이른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중세 조선은 동족 노비에 의해 돌아가는 구조였다. ‘공자 왈 맹자 왈’하면서 무위도식하는 양반 선비를 노비들이 온몸으로 지탱했다.

장예원은 노비 소송 업무의 주무관청이었다. 조선의 사법기관은 형조, 의금부, 사헌부, 한성부였다. 일반 백성 관련 민사와 형사 소송은 형조, 관리와 양반은 의금부, 재심은 사헌부, 토지와 가옥 관련 민사 소송은 한성부에서 주로 다뤘다.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물건처럼 매매·상속·증여가 가능했기에 사법기관이 아닌 장예원이 전담했다. 중국도 폐지한 노비제 유지책이었다.

장예원이라는 역사 한 귀퉁이에 등장할까 말까 한 관아가 광화문 육조거리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는 왕의 재산인 공노비, 양반의 사유물인 사노비를 증명하는 기록이 보관돼 있었다.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특수한 재산이기에 눈에 불을 켜고 지켜야 했다. 또 한 가지는 노비의 소유권과 신분을 다투는 소송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한양 거주자의 70~80%가 노비이고, 전국 노비 소유주의 대부분이 한양과 경기 지방에 살았으므로 이곳에 두는 게 편했다.

 

노비 소송의 증거 자료인 호적은 3년마다 갱신했다. 전국의 각 호구는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등 4조(四祖)를 기재한 호구단자를 관아에 제출했다. 관아는 보관 중인 호적과 대조해 변동 사항을 반영 기재한 뒤 돌려줬는데, 개인이 보관하는 호구단자와 관아가 소장한 호적이 신분 확인의 기본 자료였다.

모든 노비의 신원은 장예원의 천적(賤籍)에 기재돼 엄격하게 관리됐다. 노비 문서를 보관한 장예원 창고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각종 연구에 따르면 15~17세기 조선 인구 900만~1200만 명 중 노비 비중을 30~40%로 잡을 경우 270만~480만 명쯤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장예원의 조직은 조촐했다. 정3품 당상관인 판결사 1명, 정5품 사의 3명, 정6품 사평 4명이 해결했다.

1896년 박종숙이라는 양민이 빚 때문에 자신과 처첩 등 3명을 스스로 노비로 판 문서. 손을 붓으로 그려 증거로 삼았다.

조선 시대 소송은 노비 소송과 조상 무덤을 둘러싼 산송(山訟)으로 크게 나뉜다. 조선 초 노비 소송은 지방일수록 격렬했다. 민사 소송 대부분이 노비 소송이었다. 노비들은 면천해 양인이 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1400년대 100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소송 건수가 600건이 넘었다. 심지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문고에 노비에 관한 청원만 계속 올라오자, 노비 문제로는 신문고를 울리지 못하도록 했으나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세종 때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종모법을 시행한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1596년(선조29) 3월13일 전라도 나주에서 보기 드문 노비 소송이 벌어졌다. 피고는 여든 살의 노파 다물사리였는데 “어머니가 성균관 소속 관비인 공노비였으므로 자신도 공노비”라고 주장했다. 원고인 양반 이지도는 “다물사리는 집안의 사노비와 결혼한 양인”이라고 반박했다. 증거 조사에 나서 한 달여 동안 호적단자와 관청의 천민 명단을 조사한 이후 나주목사 학봉 김성일은 “다물사리는 양인”이라고 판정했다. 공노비로 신분을 세탁, 자식도 공노비로 만들어서 처우 개선을 노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는 달리 대부분의 노비 소송은 노비가 양인으로 신분을 바꾸려고 다투는 양상이었다. 양란 이후 노비 문서가 불타버렸거나 다른 문서와 섞이는 혼란을 틈탄 소송이 많았다. 관찰사·부사·목사·현령 등 지방 수령의 업무 중 재판이 70%를 차지했다.

하급 공무원 노릇을 한 공노비가 팔천(여덟 종류 천민계층) 중 최상의 대우를 받은 반면 사노비는 최악의 피지배 계층이었다. 사노비는 상전(주인)집 행랑채나 담 너머 집에 기거하면서 24시간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의식주를 제공받는 솔거노비와 따로 독립해 농사를 짓는 대신 1년에 면포 1.5~2필 정도의 몸값을 바치는 외거노비로 나뉜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의 농사와 길쌈, 심부름,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외거노비는 기회가 생기면 서해안 섬, 이북 오지, 강원도 산간으로 도주했다. 청지기나 집사 역을 맡은 수노는 ‘마름’이라고 했는데 위세가 당당한 우두머리 사노비였다.

여자 종은 출처에 따라 윗대서부터 전해 내려온 전래비, 당대에 사들인 매득비, 안주인이 시집올 때 데려온 교전비로 나뉜다. 임무에 따라 정월 초하룻날 안주인을 대신해서 친척에게 세배하는 문안비, 초상이 나면 곡을 해주는 곡비, 문 앞을 지키는 직비, 안주인과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유모비가 있다.

노비의 이름은 기구한 운명의 흔적이다. 성이 없는 이름은 십중팔구 노비 이름이었다. 동물이나 식물, 얼굴, 성격, 시간 등에 빗대 흔하고 천하게 지었다. 영화나 사극의 단골 이름인 갑돌이와 갑순이, 돌쇠, 마당쇠, 언년이, 간난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개똥이(갓동이·실동이), 개떡이, 강아지, 똥개, 도야지, 두꺼비 같은 동물 이름은 물론 어린놈, 작은년, 뒷간이, 개부리, 소부리, 개노미, 개조지 같은 막말 이름을 붙였다.

태어난 순서대로 일○, 이○, 삼○을 넣거나, 마지막이나 끝을 의미하는 막동이나 끝동이, 끝순이라고 불렀다. 물 긷는 물담사리, 소 기르는 쇠담사리, 똥 푸는 똥담사리, 붙어산다는 더부사리, 집 담에 붙어 있다는 담사리, 청소 전담 빗자리, 아무개를 지칭하는 거시기…식이었다.

이름만으로 식별이 가능하고, 저항 의지를 갖지 못하도록 열등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는 뜻의 다물살이나 이쁜이, 꽃분이, 곱단이, 바우 같은 긍정적 이름도 있었다. 요즘 우리말 이름 짓기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실감한다.

스웨덴 신문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1905년 전후의 대한제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찍은 140여 장의 사진 중 한 컷. 노비들은 신분에서는 해방됐지만 농촌에서는 머슴, 도시에서는 빈민으로 살았다. 노주석 제공

 

1801년 1월28일자 <순조실록>에서 순조는 “임금으로서 백성을 대하게 되면 귀천도 없고…노나 비라고 하면서 구별해서야 어찌 동포라 할 수 있겠는가…내노비 3만6974구와 사노비 2만9093구를 모두 양민이 되게 하라…아, 내 어찌 감히 은혜를 베푼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동족을 노예로 부린 왕조의 잘못을 뉘우쳤다.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노비의 피를 절반 이어받은 21대 영조 이후 22대 정조와 23대 순조 3대에 걸쳐 노비 신분의 대물림을 끊은 것이 공교롭다.

노비를 사람으로 본 영조는 ‘노비의 어버이’라고 칭할 만하다. 장예원을 ‘보민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노비 소송 업무를 형조로 이관했다. 정조는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노비추쇄도감을 없앴고, 서얼 차별과 노비제 폐지를 진행하다가 급서했다. 왕위를 이어받은 순조가 1801년 공노비를 해방했으나 1894년 완전한 철폐가 이뤄지기까지 또다시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노비들 스스로 장예원의 노비 문서를 불태운 뒤 신분 해방까지 300년이 꼬박 걸렸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 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등록 2019.02.11 14:35:11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서 공개

스님들이 만든 두부 먹는 모임 '연포회' 인기

궁궐서 임금·신하가 함께 고기 굽는 '난로회'도

영조, 많은 사회문제 일으키자 '연포회' 금지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숯불을 피운 화로 곁에 둘러앉아 고기를 먹는 모습을 그린 19세기 화가 성협의 '고기굽기'(출처=국립중앙박물관). 2019.02.11 photo@newsis.com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조선시대 양반들의 식도락 문화는 어떠했을까.

11일 한국국학진흥원이 '양반의 식도락'을 소재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2월호를 발행했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적 환경과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산과 평야가 어우러진 지리적 환경 덕분에 우리나라 먹거리는 예로부터 다양하고 풍성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조선시대 양반들은 계절과 날씨, 분위기 등에 따라 그에 어울리는 음식을 찾아 즐겼다.

양반들은 보통 하루에 5끼를 먹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간단한 죽 같은 것을 먹고 오전 10시께 정식 아침밥을 먹었다.

낮 12시와 오후 1시 사이에 국수 같은 가벼운 점심을, 오후 5시께는 제일 화려한 저녁밥을 먹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간식 같은 가벼운 음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양반들의 식탁에는 기본 밥과 국, 육류, 생선류, 탕, 찌개, 전, 구이, 나물류, 김치류 등이 다채롭게 차려졌다. 하인들은 다섯 끼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동트기 전 이른 새벽부터 깜깜한 밤까지 꼬박 수고를 쏟아야 했다.

한반도에서 콩은 벼보다도 먼저 재배되기 시작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인들이 장을 잘 담근다는 기록이 있다.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수운잡방' 2019.02.11 (사진=한국국학진흥원 제공) photo@newsis.com

두부(豆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고려 말 원나라에서 두부 제조법이 전해졌다. 이후 우리 선현들의 두부에 대한 애정은 매우 특별했다.

고려 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두부를 소재로 많은 시를 남겼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두부' 기록도 많다.

'계암일록'의 저자 김령(金坽 1577~1641)도 두부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그 중 하나는 할아버지 김유(金綏 1491~1555)와 함께 저술한 한문 요리책 '수운잡방(需雲雜方)'이다. 김령은 이 책에서 두부 조리법을 상세히 기술했다.

김령은 연포회(軟泡會)에 대한 기록도 일기를 통해 상세히 소개했다.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왕릉에서 쓰는 제사용 두부를 만드는 사찰인 조포사(造泡寺)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암사'에 가서 연포회(軟泡會)를 연다.

김령이 벗들과 함께한 연포회는 산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절에서 스님들이 요리한 따끈한 연두부탕을 함께 먹는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며 시를 읊조리는 즐거운 모임이었다.

큰 인기를 끌었던 연포회는 점차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16세기만 해도 연포회는 담백한 음식인 소식(素食)을 먹는 선비들이 산사에서 학문을 논하는 일종의 워크숍이었다.

새우젓으로만 간을 했다. 이후 연포회가 크게 유행하면서 닭을 재료로 쓴다. 사찰의 승려들이 살생을 할 수 없어 연포회에 참석한 젊은 선비들이 닭을 잡는 상황도 벌어졌다.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산 속의 '연포회'와 승려들의 불만(그림=정용연). 2019.02.11 photo@newsis.com

연포회를 빙자해 업무를 방기한 채 산사나 능원에서 며칠씩 노는 관리들이 있어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찰의 승려들 입장에서는 놀고먹는 선비들을 위해 연포탕 끓이는 일이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의 '인재일록(忍齋日錄)'에는 사찰의 승려들이 두부 만들기를 거부해 연포회가 열리지 못할 뻔한 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7세기 후반들어 사적 결사 모임인 계를 조직하고 세력을 모으려는 파벌의 우두머리들이 생겨나게 됐다. 그 결과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쇠고기가 연포회 국물에 들어갔다. 사찰의 승려들을 겁박해 연포탕을 끓이게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마침내 1754년 음력 윤4월 7일 영조는 신하들과 사찰의 연포회 문제를 거론하면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지시를 내린다.

'연포회' 외에도 함께 모여서 고기를 구워 먹는 모임 '난로회'가 있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난로회' 풍속은 조선 후기 급속도로 퍼졌다. 심지어 궐 안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고기를 구워 먹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다.

이번 달 편집장을 맡은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는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 여유를 가진 양반들이었기에 즐길 수 있었던 식도락 문화였다"며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당대에도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kjh9326@newsis.com

 

 

  • 문화일보
  • 입력 2008-04-18 13:47
박물관에 전시된 조상의 역사 기록 2건이 최근 세상에 알려지면서 후손들에게 뼈아픈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 기록은 조선시대 군과 관련된 것으로 하나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부터, 또 하나는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우선 국립고궁박물관의 역사 기록부터 보자. 1870년 6월11일. 강화도 곳곳에는 몰살당한 조선군 시체가 널려 있었다.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한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날이다. 미군은 이날 새벽 맹렬한 함포 사격으로 덕진진(德津鎭)을 초토화시키고 정오쯤에는 조선 장수 깃발인 ‘수자기(帥字旗)’를 끌어내리고 성조기를 내걸었다. 당시 광성보(廣城堡)를 사수하던 어재연 장군 등 조선군 350여명이 몰살당한 반면 미군 전사자와 부상자는 각 10명에 불과했다.

당시 전투 장비와 화력 등의 현격한 차이로 애초부터 전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미군은 군함 5척에 최신식 대포 85문을 탑재한 데다 승리의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종군사진기자까지 동원했다. 조선군의 참상조차도 그 사진기자에 의해 생생히 남아 있다. 미군이 처음으로 점령한 강화도 초지진(草芝鎭) 사진을 보면 처참하게 숨진 조선군은 여름철임에도 하나같이 솜이불이나 다름없는 두꺼운 면옷을 입고 있었다. 이는 솜으로 누빈 갑옷이라는 ‘면갑(綿甲)’인데 자그마치 30겹이나 되는 면을 누벼 만든 것이다.

더욱 딱한 것은 조선군은 그 면갑이 자신을 보호해줄 것으로 믿었겠지만 남북전쟁을 막 끝낸 세계 최정예 미군의 화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면갑은 대원군의 명령으로, 총탄이 면 30겹을 뚫기 어렵다는 실험까지를 거쳐 특별히 제작된 제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실험 대상은 조선군이 사용하던 조총이었다. 당시 위정자들이 국제정세에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면갑을 입고 애국심 하나로 버티다 숨져갔을 선조들의 운명이 더 없이 애통하다.

또 하나 2세기를 거슬러 올라 토지박물관의 역사 기록도 깊이 되새길 만하다. 박물관은 17세기 무렵 충청도 지역 병적(兵籍)기록부인 속오군적(束伍軍籍) 3책을 최근 전산입력하면서 모두 4213명의 군적 자료를 정리했다. 그 중에서도 유독 2명이 눈길을 잡는다. 말을 돌보는 마정(馬丁)을 맡은 열살배기 ‘종남’이라는 사내 종과 오늘의 취사병인 화병(火兵)의 임무를 맡은 69세의 ‘박소선’이라는 인물이 그들이다.

10세 코흘리개 군인과 칠순을 앞둔 노병. 조선시대 대표적 부정부패인 이른바 삼정문란(三政紊亂) 중 하나인 군정(軍政) 문란의 현장을 보는 듯싶다. 당시의 국가기강과 함께 힘 없고 돈 없는 백성들의 고초가 어떠했는지를 쉽게 가늠케 한다.

근대화 이전 한 국가의 군사력과 군 조직은 국제경쟁력과 국가기강 등을 재는 척도이기도 하다. 세계 최강의 미군에 맞서 솜이불 같은 면갑을 껴입고 전투에 나섰다가 떼죽음 당하는 조선군. 당시 조선 위정자의 국제경쟁력과 그 무능함이 백성에게 미치는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또한 신체 멀쩡한 권문세가의 자녀 대신 열살짜리 코흘리개와 노인까지 군적에 버젓이 올리는 그런 수준의 국가기강이라면 이미 망국의 길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이처럼 우매하고도 딱한 역사의 그림자가 아직도 후진적 정치 행태와 국정에서 제대로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부문이 유독 한국의 국제경쟁력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국제사회의 평가인데다 병역비리 의혹 역시 위정자 등 사회지도층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대선도, 총선도 끝났다. 위정자와 고위공직자들은 아직도 ‘갑옷 아닌 면갑’을 껴입고, 또 그것을 국민에게 강요하면서 국제화·세계화를 소리 높이 외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또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5월5일까지 136년 만에 미국으로부터 귀환한 신미양요 비극의 상징인 ‘수자기’와 함께 조선병사들이 죽으면서 입었던 면 30겹의 면갑도 전시한다.
[[김영호 / 논설위원]]

 

 

“서울, 17C 후반부터 근대 움직임 있었다” (hani.co.kr)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펴낸 고동환 교수

  • 수정 2007-11-14 19:46
  • 등록 2007-11-14 19:46

고동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한국사)는 1998년 <조선후기 서울 상업발달사 연구>를 펴내면서 앞으로는 도시사로 연구 방향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기존 연구 분야인 조선 후기 상업사에서 도시사로 눈길을 돌린 이유는 “조선시대 사회 경제사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 단계 비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가 집중된) 농업과 향촌 중심으로 보면 조선 사회가 장기 안정 추세라고 하지만 도시사를 들여다 보면 ‘동적인 움직임’이 엿보입니다.” 즉 조선 후기 한국 사회가 내재적으로 근대로 향하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포착하기 위해선 도시사 연구가 유용하다고 보는 것이다.

상업인구 전체 90% 차지…탈중세적·탈신분적 사회로한양이 지닌 내부적 발전론 펴며 식민근대화론에 반기

그는 ‘내재적 발전론’의 비판적 지지자다. 조선 후기 사회 모순과 대립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동력을 사회가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내부 동력 부재론을 펴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과 견해과 다르다.

“일제 초기 근대 학문이 도입되면서 역사학은 민족주의, 마르크스주의, 실증주의 등 세가지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민족이나 국가를 당연한 전제로 하는 일국사의 관점이죠. 시간과 인간에 공간을 포함해 역사 연구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최근 거세지고 있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10여 년의 연구 끝에 펴낸 <조선시대 서울도시사>(태학사)는 도시사의 관점에서 한양을 파고 든 우리 학계의 첫 저작이다. 이 책은 특히 한양이 조선 후기 급격히 상업도시가 되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당시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 추세를 부각시키고 있다.

“조선 초기 한양에는 주로 관료나 왕실 관련 인구들이 많았으나 17세기 후반에는 인구의 90%가 상업 관련 인구였습니다.” 일제때 일본 학자 사카다는 “조선의 도시는 농촌적 경제활동에 의존하면서 정치적 군사적 기구를 그 위에 얹어놓은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으나 이미 17세기 후반 한양은 “돈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는” 탈중세적 탈신분적 사회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한양의 이런 변모에는 농업생산력 발달과, 공물을 쌀과 면포 등 현물화폐로 내도록 하는 대동법 실시 등이 크게 기여했다. “(이런 배경으로) 18세기 이후 서울에서 노동력 상품화가 진전되면서 특정한 재산이나 기술 없이도 품만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 한양이라는 도시 공간을 통해 차별이 관철되는 방식도 추적했다. “신라의 도성인 경주에는 귀족만 살 수 있었습니다.” 고대 시대에는 신분에 대한 공간적 차별이 강력히 관철됐으나 한양에서는 이런 차별이 “희미하게 잔존했다”고 그는 지적했다.

조선 초기 한양 주민은 방역의 의무만 지고 있었으나, 도성밖 주민은 향촌민이 부담하는 전세와 군역, 공납의 의무까지 부담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런 도성 주민의 특혜는 한양 천도 80년이 지난 1473년(성종 4) 해소되었다.

그는 또 18세기 이후 “서울 주민이 중세적 방민에서 점차 자유로운 도시민으로 변모”했다면서, 17세기 이후 등장한 최말단 행정조직 ‘계’를 통해 설명했다. 설치 당시에만 해도 계는 소속 주민집단의 동질성을 전제로 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주거 공간의 동일성이 중시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 시기에 이르러 한성부 주민은 균질한 집단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조선 초기 한양 천도가 풍수지리설보다는 유교적 혁명론과 교통운수의 편리성을 중시하는 경제적 합리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논지를 폈다. 태종의 한양환도 과정에서 풍수설이 적극 배척되었다는 게 이런 주장의 근거다.

“조선시대 개성은 특이한 도시입니다. 조선은 상업억제 정책을 펼쳤으나 개성만은 상업을 권장했죠.”

이미 개성 연구에 착수했으며 평양과 강경 등에 대한 연구도 이어갈 것이라는 고 교수는 “도시학은 학제적 연구”라고 했다. 지금까지 자신은 인접학문을 교양 수준에서 연구했으나 앞으로는 “역사와 사회, 심리, 조경, 도시계획학 등이 합쳐져서 도시의 역사·문화·도심지 등에 대해 깊이 있는 학제적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숙종시대 군인 18%가 마맛자국”

입력 :2008-03-13 00:00ㅣ 수정 : 2008-03-13 00:00 

충청지역 병역자료 ‘속오군적’ 공개

조선시대에 군역에 동원되는 나이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따라 16∼60세로 알려졌다. 특히 지방방어군이라고 할 수 있는 속오군(束伍軍)은 창설 시기인 임진왜란 당시 15∼50세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작성된 군적(軍籍)에 따르면 평균 나이는 34.4세였지만, 불과 10세의 사내아이 종과 밥짓고 가축을 돌보는 69세의 노(老) 화병(火兵)도 있었다.

평균 34세… 군 편제 소상히 기록

이런 사실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지난해 11월 공개한 조선시대 충청지역 병적기록부인 속오군적에 나타난 병사들의 신상을 전산입력해 분석한 결과 밝혀낼 수 있었다.

이 군적은 충청도 관찰사 휘하 군인들의 개인신상 정보를 수록한 3책으로,2책은 작성 시기는 각각 숙종 5년(1679)과 숙종 23년(1697)이며 나머지 1책은 앞장이 떨어져 나가 작성연대를 알 수 없었다.

명부에 오른 사람은 모두 4213명으로, 구체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던 사람은 3883명이었다. 나이가 기록된 3541명 가운데 16세 미만은 65명이었고,60세가 넘은 병사는 9명이었다. 나이가 가장 적은 직책은 일종의 사환병사인 수솔(隨率)로 26.5세이고, 나이가 가장 많은 직책은 오늘날의 하사관이라고 할 수 있는 기총(旗摠)으로 41.9세였다.

얼굴의 특징이 기록된 사람은 2260명으로, 천연두를 앓으면 나타나는 마맛자국이 있는 사람이 전체의 17.7%에 이르는 402명이었다.

마맛자국은 대단히 심하게 얽은 박(縛)에서부터 잠박(暫縛), 마(麻), 잠마(暫麻), 철(鐵) 등으로 구분했다. 서애 류성룡 집안에 전하는 1596년의 평안도 군적에는 552명의 병사 가운데 27%인 150명의 얼굴에 마맛자국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임진왜란 이후 천연두 발병률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혼란스럽게 만든 대목은 4.00척(尺)으로 산출된 평균신장이다.

천민 24%·상민이 74% 차지

김성갑 토지박물관 주임은 “이 시대는 황종척(34.48㎝)이 통용되었고, 실제 이를 적용해 제주 속오군적에 오른 인물들의 평균신장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46.54㎝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수치가 나온다.”면서 “그러나 똑같은 척도를 적용할 때 충청도의 군인들은 평균키가 137.9㎝밖에 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고 말했다. 토지박물관은 직접 자를 대고 키를 잰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기입해 넣은 데서 비롯된 문제로 보고 있다.

군적에 나타난 인물을 신분별로 보면 24%인 929명이 사노나 궁노(宮奴), 내노(內奴)와 같은 천민이었고, 양인(良人)과 한량(閑良), 업무(業武) 등 상민이 74%인 2946명을 차지했다. 군적은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에는 군대로 징발할 수 있는 명단이라는 실용적인 측면이 강했으나, 조선후기에는 군포(軍布)라고 하는 일종의 국방세금을 거두기 위한 기초자료로 주로 활용됐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이기환 선임기자입력 2020. 6. 4. 09:00수정 2020. 8. 20. 08:05

177년 된 섬마을 폐가의 벽지에서 발견된 19세기 군적부. 군역의 의무가 있던 장정 명단과 특징을 적은 공문서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응? 상량문이 보이네. 저건 ‘수군(水軍)’이라는 글자네”. 지난 4월 21일 충남 태안 신진도에 근무중인 정동환 산림청 산림수련관 시설관리인(45)은 연수원 근방의 숲을 답사하다가 다 쓰러져가는 폐가를 발견한다. 사람들 눈길에 닿지 않은 곳에 숨어있었던 폐가였지만 왠지 들어가 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전날 밤 평소 좋아하던 고향 어르신을 만나뵙는 꿈을 꾸었던 터라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폐가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서 산림청 차원에서 활용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도광 23년’이라고 쓰여진 상량문.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재위 1820~1850)의 연호이며, ‘도광 23년’은 1843년(헌종 9년)을 가리킨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겉보기에 다 쓰러져가는 집 같았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정동환씨의 눈에 상량문(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이 보였다. 또한 뜯겨져 노출된채 바람에 흩날리던 벽지 사이에서 한자로 된 글씨들이 보였다. 얼핏보니 ‘수군(水軍)’자였다. 정동환씨는 곧바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에 신고했다. 고향이 백제 고도인 부여인지라 문화유산에 조예가 남달랐기에 신속한 후속조치를 취한 것이다.

신고를 받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전문가들과 함께 상량문을 읽어보니 ‘도광(道光) 23년 7월 16일’이었다.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道光帝·1820~1850) 연호인데, 도광 23년은 1843년(헌종 9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폐가는 무려 177년 된 집이었던 것이다. 연구소의 추적 조사 결과 이 집은 1970년대 말 주인이 바뀐 후 50년 가까이 방치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벽지에서 확인된 글씨 역시 심상치 않았다.

 
폐가의 벽지에서 확인된 한시. ‘새로 잔치를 베풀어 열었다는 소문으로 사방에 선비들이 많이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수군(水軍) 김아지, 나이 정해생 15세, 키 4척, 거주지 내맹면, 아버지 윤희’ ‘보인(保人) 박복현, 나이 임오생 18세, 키 4척, 거주지 고산면, 아버지 성산’….

즉 이 명문은 19세기 안흥진성을 지키던 수군의 군적부, 즉 군인 명단이었다. 이 군적부는 안흥진 소속 60여 명의 군역 의무자를 전투 군인인 수군(水軍)과 보조적 역할을 하는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이름, 주소, 출생연도, 나이, 신장을 부친의 이름과 함께 적어두었다. 수군의 출신지는 모두 당진현(唐津縣)이었고, 당진 현감 직인과 수결(手決·자필서명)이 확인됐다.

진호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연구관은 4일 “수군 1인에 보인 1인으로 편성된 체제로 16세기 이후 수군편성 체계를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서”라고 밝혔다. 명문 중 ‘보인’은 직접 군복무를 하는 사람의 남은 가족을 재정적으로 돕는 비번자를 가리킨다.

177년된 폐가. 1970년대 이후 방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산림청 산림연수원 소속 시설관리인이 발견했다.|정동환씨 제공


문경호 공주대교수(역사교육과)는 “작성 형식이나 시기로 미루어 수군의 징발보다는 군포(軍布·군복무 직접 하지 않은 병역의무자가 대가로 납부하던 삼베나 무명)를 거두어 모으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곳 안흥량(태안 앞바다) 일대의 수군은 고려 후기부터 들끓었던 왜구의 침입을 막고, 유사시에는 한양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군 역할을 했다. 특히 안흥량은 물살이 매우 빨라서 조운선의 난파사고가 잦았던 곳이다. 손태옥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실무관은 “따라서 이곳 수군은 조선 최악의 험조처(지세가 가파르거나 험하여 막히거나 끊어진 곳)인 안흥량을 통행하는 조운선의 사고방지와 통제를 주요 임무로 삼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폐가에서는 판독이 가능한 한시(漢詩) 3편도 발견됐다.

정동환씨가 발견한 177년된 폐가. 겉은 허물어졌지만 골격은 대부분 남아있었다.|정동환씨 제공

 

“물품은 진진하여 이같이 많고(物物陳陳如此多) 사방 선비들은 서로 다투어 오네(四方士士爭相來). 요순 세월 같은 앞바다 섬에는(堯舜日月近海島) 전해지는 유풍이 이때까지 성하구나(自來遺風此時盛)”.

“오직 우리는 본시 산 구름 속에 은거하였으니(惟吾本是隱山雲) 벗이 있으나 여러 해 찾아오기는 적었네(有友多年來到少)”.

“이르는 곳마다 이 강산 이 푸른 나무에(到處江山是綠樹)…조각조각 금빛 □ 제일로 빛나고(片〃金□第一光) 소리마다 좋은 속삭임 무한히 좋구나(聲聲好語無限好)”.

군적부는 안흥진 소속 60여 명의 군역 의무자를 전투 군인인 수군(水軍)과 보조적 역할을 하는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이름, 주소, 출생연도, 나이, 신장을 부친의 이름과 함께 적어두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시는 당시 조선 수군이거나 학식을 갖춘 당대인이 바닷가를 배경으로 수군진촌(水軍鎭村)의 풍경과 일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진도 수군진촌에 자리한 능허대 백운정은 예부터 안흥팔경의 하나인 ‘능허추월(凌虛秋月)’이라 했다. 중국의 능허대와 모습이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사신들이 안흥 앞바다에 체류할 때 이곳을 ‘소능허대’라 칭했다. 또한 전국의 시객들이 몰려들어 시를 짓던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장은 “이번 발견은 전략적인 요충지였던 안흥량 일대에 분포한 수군진 유적과 객관(客館·사신 영접 관청) 유적의 연구와 복원 및 활용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145년 전 “모이세요, 어르신들” 어색한 찰칵|동아일보 (donga.com)

 
입력 2008-02-22 02:56업데이트 2009-09-25 15:00
 
 
1863년 淸방문 연행사 일행 모습 英런던대 보관

박주석 명지대 교수 “사진 발명 23년만에 찍은것”

현존하는 사진 가운데 한국인을 모델로 한 최초의 사진 5점이 처음 공개됐다.

1863년 음력 1월 중국 방문 사절단인 조선 연행사(燕行使) 일행이 청의 수도 베이징(北京)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러시아 사진가에게 의뢰해 자신들을 촬영한 사진으로, 한국인과 사진의 첫 만남을 보여 주는 사료다.

박주석(사진학) 명지대 교수는 최근 한국사진학회 학술지 ‘아우라(AURA)’에 발표한 논문 ‘사진과의 첫 만남-1863년 연행사 이의익 일행의 사진 발굴’을 통해 당시 사진들을 공개했다.

이들이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은 1999년 최인진 전 한국사진사연구소장이 쓴 ‘한국사진사’와 박태근 명지대 LG연암문고 연구원의 조사에 의해 처음 알려졌지만, 사진 실물은 2006년 1점만 공개됐을 뿐 나머지 5장을 포함해 6장 전체가 모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조선 정부 관리였던 이의익 등 당시 연행사 일행의 행적을 기록한 ‘연행일기(燕行日記)’엔 1862년 연행사로 출발한 일행이 이듬해인 1863년 음력 1월 베이징에 있는 아라사관(俄羅斯館·러시아 공사관)에서 사진을 찍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외국인이 찍은 최초의 한국인 사진으로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영국인 사진가 펠릭스 비아토가 인천 강화도 광성보 전투 장면을 촬영한 사진과 같은 해 프랑스 사진가가 역관 오경석을 촬영한 사진 등으로 알려져 왔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1861∼64년 베이징에서 의료 선교활동을 했던 영국인 윌리엄 로크하트(1811∼1896)가 수집해 영국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는 1892년 이 사진들을 런던선교회에 기증했고 현재 런던대 동양 및 아프리카 연구학교(SOAS)가 위탁 보관 중이다.

박 교수와 명지대 LG연암문고는 최근 런던대의 한국학 교수인 마르티나 도히힐러 씨에게서 사진을 입수해 ‘연행일기’의 기록 등과 비교 연구한 결과, 연행일기에 나오는 사진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박 교수는 “당시 사진 행위의 주체는 사진을 찍는 사람(photographer)이라기보다 사진 찍히는 사람, 즉 사진 촬영을 주문하고 의자에 앉은 사람(sitter)”이라면서 “1840년 사진이 발명된 지 불과 23년 만에 조선인들이 외국 땅의 외국 공사관에서 적극적으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은 한국 사진사는 물론 당시의 생활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 전 소장은 당시 연행사 일행의 중국 방문 경로를 답사하고 베이징의 러시아 공사관 위치 등을 추적해 그 과정을 사진으로 담아 1863년 연행사 일행 사진과 함께 사진전을 개최할 계획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19세기 ‘촛불집회’

1898년 3월10일 한양 종로 거리에 1만명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당시 한양 인구가 20만명 전후인 사실을 감안하면 대단한 인파였다. 육주비전의 하나였던 백목전(白木廛) 앞에 모인 군중은 평민과 소상공인, 학생 등 당시 사회의 주류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사람은 관리도, 지식인도 아닌 쌀장수 현덕호였다. 이들은 러시아를 규탄하며 러시아의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 조차를 요구하고, 한·러은행을 개설하는 등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강요하고 있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민초들이 먼저 일어선 것이다.

이 집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정치운동으로 평가되는 제1차 만민공동회다. 그전까지만 해도 민란의 형태로 표출됐던 민의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시위라는 근대적 방식으로 진화했다. 비록 독립협회가 주최하긴 했지만 신분을 초월한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만민공동회는 자주독립권 수호를 위한 한국 민중의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하는 자리가 됐다.

러시아공사를 비롯한 외국 공·영사들은 한국 민중의 성숙된 정치의식에 큰 충격을 받고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12일에는 독립협회와 관계없이 서울 남촌에 거주하는 평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만민공동회가 이어졌다. 이 대회에는 이틀 전보다 더 많은 서울 시민 수만명이 운집했다.

결국 한국 민중의 위세에 눌린 러시아는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을 철수했고, 절영도 조차 요구도 철회했다. 외세에 질질 끌려가던 정부가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서 민중들이 스스로 나서 쟁취한 귀중한 승리였다.

만민공동회는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민중운동으로 성장해갔다. 그해 10월29일에 열린 집회에선 해방된 천민 백정 박성춘이 개막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 고비 땐 늘 그랬듯이 보수반동이 민의를 짓밟고 말았다. 수구파의 모략에 넘어간 광무황제가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폭력을 동원해 강제 해산했고, 그와 함께 자생적 민주주의의 싹도 꺾이고 말았다.

1898년 3월10일에 시작해 12월 말까지 지속된 만민공동회는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그가 뿌린 소중한 씨알은 살아남았다. 지난해 촛불집회는 국가 이익과 자존권을 스스로 지켜내려는 민중들의 의지는 언제든지 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인물]

입력 2007-09-15 03:00업데이트 2009-09-26 13:48

[문학예술]김시습에서 정약용까지…‘신화가 된 천재들’|동아일보 (donga.com)

 
◇신화가 된 천재들/윤채근 지음/299쪽·1만 원·랜덤하우스

 

이 책은 지난해 이맘때 출간된 ‘거문고 줄 꽂아놓고’(돌베개)를 떠올리게 한다. ‘거문고…’가 우리 옛사람 12쌍의 돈독한 우정이 빚어낸 고고한 내면 풍경을 그들이 남긴 글을 통해서 그려냈다면 이 책은 신라 최치원부터 조선 정약용까지 우리 문인 17명의 작품에 새겨진 영혼의 낙관(落款)을 읽어낸다.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인 저자는 최치원의 시에서 당나라 유학을 떠나는 12세 아들에게 “10년 안에 급제 못하면 내 자식이 아니다”라는 독한 말을 남긴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찾아낸다. 반면 서포 김만중의 작품에선 유복자였던 자신과 다섯 살 터울의 형 만기 그리고 어머니 해평 윤씨 세 모자를 운명의 동아줄로 묶어 놓은 ‘자궁 가족’의 징후를 발견한다.

조선시대 고고한 저항정신의 상징 김시습과 혁명적 풍운아를 대표하는 허균에 대한 독법은 현대작가론을 뺨칠 만큼 독창적이다.

세조의 쿠데타에 맞서 출사의 길을 포기한 김시습의 인생행로는 고심에 찬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 아니라 한때의 우발적이고 조건반사적인 행동이 낳은 파문을 자신의 운명으로 감내해야 했던 사내가 택한 니체의 ‘아모르파티(운명에 대한 사랑)’적 변주다. 그래서 김시습은 “인생을 건 한판 도박에 심취했던 얄궂은 운명의 천재였으며 그 서툴게 시작한 도박이 일파만파로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삶 자체까지 분쇄해 버린 고독한 시간의 산책자”이자 “시간과 싸운 승부사”로 포착된다.

시에 대한 절필 선언을 한 1612년을 전후로 기행을 일삼던 시인에서 마키아벨리적 정치인으로 변신한 허균이 꿈꾼 것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예술과 현실을 일치시키려 한 내면의 혁명이었다. 아버지와 맏형이 죽고 절친했던 시인 권필마저 필화(筆禍)로 숨진 절대 고독의 시간, 허균은 시를 살해한 뒤 서사공간으로 비월한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정중한 은유를 견디지 못해 세계의 진정한 서사가(정치가)로 변신하려는 무모한 도박이었다. 그래서 “이 조급증의 사내는 살과 뼈의 세계를 본 자였지만 서정을 버린 대가로 생명을 바쳐야 했다”.

이처럼 우리 고전작가를 그 시대의 윤리적 세계관을 비껴서 읽어내는 저자의 독해는 현대 전위 예술가들의 작가론을 펼친 수전 손태그의 ‘우울한 열정’에 가깝다. 텍스트를 통해 그들 삶의 정수를 읽어낸다는 것은 자칫 ‘관념적 유희’라고 치부될 수 있다. 손태그는 그나마 풍성한 텍스트를 쥐고 있었지만 이 책의 저자에겐 단편적 텍스트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저자는 특정 장면을 통해 전체 풍경을 상상해 내도록 하는 영화적 몽타주 기법을 차용한다. 문인 17명의 삶에서 자신의 주제의식과 부응하는 극적인 장면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그들 삶을 관통한 주제의식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그런 영화적 기법이 가장 빛을 발한 부분은 아마도 황진이 편일 것이다. 이사종과 약속한 6년의 동거생활이 끝나자 “이제 시간이 됐군요”라고 단호하게 이별을 선고하는 황진이. 반면 한 달만 살고 헤어질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 소세양과 약속한 이별의 순간 단 한 편의 시로 그를 무너뜨린 황진이. 그리고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 베어내었다 임 오는 밤 굽이굽이 펼치리라’라는 황진이의 그 유명한 시조. 저자는 띄엄띄엄 이어진 이 장면들을 단 한 구절로 꿰뚫어 버린다. “남성은 시간을 계산하고 여성은 시간을 훔친다.”

시간을 정복하려다 시간의 노예가 된 남자들의 시계를 ‘달리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으로 줄였다 늘이는 것이야말로 황진이의 필살기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진이의 이불은 시간을 가두었다 내뿜는 풀무”가 되고 “황진이의 사랑은 주름 없이 펼쳐지는 융단”이 된다는 저자의 통찰에 절로 무릎을 치게 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이, 김시습, 유성룡, 이덕형, 이가환 등 3~4세에 글 깨우쳐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순) 율곡 이이·매월당 김시습·한음 이덕형·서애 유성룡

 

역사에는 가끔 그 시대의 수준을 뛰어넘는 천재가 등장한다. 보는 시험마다 모두 장원해 9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린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천재성은 유명하다. 그러나 ‘역사’라는 수식어가 붙는 천재는 머리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역사 속의 천재는 그 시대에 가장 머리가 좋거나 각종 시험에 탁월한 성적을 낸 사람이 아니다. 역사 속의 천재는 특유의 혜안으로 시대를 앞서 보고 그 길을 걸어간 사람을 뜻한다.

조선의 천재는 율곡 이이를 비롯해 매월당 김시습, 읍취헌 박은, 북창 정렴, 서애 유성룡, 아계 이산해, 하서 김인후, 한음 이덕형, 청장관 이덕무, 정헌 이가환 등을 꼽는데, 이들 모두 3~4세 때 글을 깨우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시습은 5세 때 정승 허조가 “내가 늙었으니 노(老) 자를 가지고 시를 지으라”고 하자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라고 지었고, 허정승이 무릎을 치면서 “이 아이는 이른바 신동이다”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패관잡기’에 전한다. 세종은 5살이 된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 박이창에게 명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짓게 했다. 김시습은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來時襁湺金時習)’이라고 대답했고,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키면서는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小亨舟宅何人在)’라고 지었다. 세종이 비단 30필을 내리자 그 끝을 서로 이어서 끌고 가 김오세(金五世)라고 불렸다. 그러나 단종을 내쫓고 즉위한 세조를 인정할 수 없던 김시습은 스스로 승려가 되어 불우하게 생을 마쳤다. 세상과 불화한 천재였는데, 박은 역시 갑자사화 때 26세의 나이로 사형당했다.

특유의 혜안으로 시대를 앞서 보다
당대 제일의 지식인이면서 서자라는 이유로 불우하게 지낸 천재가 이덕무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어서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린 이덕무는 ‘이목구심서’에서 “내 작은 초가가 너무 추워서 밤중에 일어나 ‘한서’ 1질을 이불 위에 죽 덮어서 추위를 조금 막았다”라고 쓸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서자들의 처지를 동정했던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용하면서 한 시대를 주름잡는다.

다산 정약용이 “질문한 사람마다 깜짝 놀라서 귀신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라고 말한 희대의 천재가 이가환이었다. 정약용은 “그의 기억력은 고금에 뛰어나 한 차례 눈으로 보기만 한 것은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면서 “무릇 글자로 된 것은 한 번 건드리기만 하면 물 쏟아지듯 막힌 데가 없었으며, 모두 정밀히 연구하고 알맹이를 파내서 한결같이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 같았다”라고 설명한다.

정조 시대에 공조판서까지 오른 이가환은 정조 사후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와 노론에 의해 천주교도라는 혐의를 받고 사형당했다. 그 역시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였다. 그런 천재를 죽인 것은 비단 그 한 사람만의 불행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불행이었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책 1억번 읽은 '조선의 둔재'..세종도 무릎 꿇은 '독서왕'이 됐다 [이기환의 Hi-story] (daum.net)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입력 2021. 4. 27. 06:02수정 2021. 4. 27. 06:05
[경향신문]

https://youtu.be/pK2QEeH6KhE

 

최근 충북 증평군에서 색다른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독서왕김득신문학관’이 준비한 ‘느리지만 끝내 이루었던 길 독서왕 김득신’ 특별전인데요. 김득신의 유물인 <백곡집>과 <임인증광별시방목>이 충북도지정문화재가 된 것을 기념해서 7월11일까지 열립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김득신은 ‘야묘도추’ 등을 그린 풍속화가 김득신(1754~1822)이 아닙니다. 그 분과 동명이인이자 조선 중기의 시인인 백곡 김득신(1604~1684)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백곡 김득신은 천하의 책벌레로 알려진 세종대왕(재위 1418~1450)도 울고 갈 지독한 독서왕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더욱이 김득신은 어려서부터 둔재로 소문났던 사람입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세종을 능가하는’ 독서왕이 됐을까요.

조선 중기의 시인인 백곡 김득신(왼쪽 동상)은 소문난 책벌레였던 세종대왕(오른쪽 동상)을 능가하는 독서왕이었다.


■세종의 ‘자뻑’…나보다 책 좋아하는 사람 나와봐

먼저 세종대왕을 알아볼까요. 세종의 독서열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책을 100번씩 반복해서 읽는 것은 기본이었구요. <좌전>과 <초사> 같은 책들은 200번 읽었다고 합니다. 몸이 아파도 독서에 몰입하니 하루는 아버지 태종(1400~1418)이 환관을 시켜 책을 다 거두어갔답니다. 그러나 환관의 실수로 <구소수간(歐蘇手簡·구양수와 소식의 편지 모음집)>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습니다. 세종은 이 책을 1100번이나 읽었다고 합니다.(<<연려실기술> ‘세종조고사본말’·<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 등)

김득신은 자신이 평생 읽은 책의 편수를 기록한 ‘독수기’에서 1만번 이상 읽은 고문 36편을 열거해놓았다. 1만번 이하 읽은 것은 읽은 축에도 넣지 않았다.|독서왕김득신문학관 제공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나보다 책 많이 읽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고 자화자찬했다는 겁니다. 요즘 말로 ‘자뻑’이나요. 그것도 정사인 <세종실록>에 버젓이 등장하는데요. 즉 1423년(세종 5년) 경연(임금에게 유학 경전을 강론하는 일)에 나선 세종이 남송 주희(1130~1200)의 역사서인 <통감강목>을 강독한 뒤 “내가 그 어렵다는 <통감강목>을 20~30번을 읽었다”면서 은근슬쩍 자랑합니다. <통감강목>은 북송 사마광(1019~1086)이 편찬한 <자치통감>을 주희가 공자가 지은 <춘추>의 체제에 따라 재편찬한 역사서인데요.

하지만 편수가 너무 많고 난삽해서 전체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엄청 어려웠지만 나는 그래도 20~30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은근슬쩍 자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읽었는데 자네들은 읽어봤냐”는 겁니다. 아닌게 아니라 <세종실록>은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임금의 독서열을 침이 마르도록 상찬합니다.

충북 괴산의 괴강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김득신의 누정. 김득신이 만년에 책을 읽고 시를 지었던 곳이다. <사기> ‘백이열전’을 1억번 읽었다고 해서 ‘억만재’라 했다. 지금은 ‘취묵당’(충북도문화재자료 61호) 이라 한다.


■사람 얼굴 이름 외우기 천재인 세종

세종은 독서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자랑했는데요. 예를 들면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는가. 없지 않은가.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거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말야. 책을 본 뒤에 잊어버리는 것이 없었어!”라고 한껏 자랑합니다. 이 대목에서 <세종실록>의 필자는 세종의 비범함에 강조점을 찍습니다.

“임금이 한번 읽은 서적을 기억해내는 재주만 있는게 아니다. 수많은 신하들의 이름과 그 사람의 이력은 물론 그 사람의 가계도까지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았다. 한번 신하의 얼굴을 보면 여러 해가 지났다 해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아무게야!’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한다.”

세종의 끊임없는 ‘자뻑’ 내용을 알고싶다면 <세종실록> 1423년 12월23일자를 읽어보십시요.

왼쪽 사진은 ‘왕세자 공부도’(세종대왕기념관 소장). 세종은 왕세자 시절부터 공부벌레로 유명했다. <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자는 세종이 그 어렵다는 <통감강목>을 3년에 걸쳐 20~30번씩 반복해서 독파했다고 은근슬쩍 자랑하고 있다.

■<사기> ‘백이·숙제 열전’은 1억번 이상 읽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다독’하면 천하의 세종대왕도 무릎을 꿇을만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백곡 김득신입니다. 김득신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1554~1592)장군의 손자인데요. 먼저 김득신 본인이 평생 읽은 책을 기록한 ‘독수기(讀數記)’를 볼까요.

“<사기> ‘백이전’은 1억1만1000번, ‘능허대기’는 2만500번, ‘노자전’ ‘분왕’ ‘벽력금’ 등은 2만번, ‘제책’ ‘귀신장’…등은 1만8000번 등 모두 37편….”(<백곡집>)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사기> 중 ‘열전·백이열전’ 편을 1억번 이상 읽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1만4000번 이상 읽은 책의 편수가 36편이랍니다. 무엇보다 “읽은 회수가 1만번이 넘지 않은 <장자>와 <사기>, <대학> 등은 기록에서 뺀다”고 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1만번 이상 읽지 않은 책은 ‘읽은 축’에도 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죽하면 서재 이름을 ‘억만재’라 지었겠습니까.

이 대목에서 ‘에이 거짓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무리 책을 억만번 읽었을까요. 맞습니다. 예전의 억(億)은 ‘많은 수’ 혹은 지금의 10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김득신은 <사기> ‘백이열전’을 11만3000번 읽었다는 얘기죠.

서계 박세당(1629~1703)은 “김득신은 시 한 글자를 지을 때도 1000번을 숙고하느라 끙끙 댔다. 노새에 앉아 길을 갈 적에는 ‘길을 비키라’는 관졸들의 고함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그림 출처:독서왕김득신문학관 제공)


■1억번 이상 읽은 책도 기억못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세종과 달리 조선 최고의 독서왕 김득신은 손꼽히는 둔재였다는 사실입니다.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머리가 아둔해졌다는 겁니다. ‘노둔한(미련하고 둔한)’ 김득신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단적인 예로 김득신은 머리가 나빠 그렇게 1억번 이상 읽은 책을 제대로 외우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김득신은 1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깨우쳤는데요. 그 때 배운 <십구사략>의 첫단락은 겨우 26자에 불과했는데요. 그런데 사흘을 배우고도 구두조차 떼지 못했답니다.

홍한주(1798~1866)의 <지수염필>이 전하는 김득신과 관련된 ‘웃픈’ 사연이 하나 있네요.

김득신이 말을 타고 어느 집을 지나다가 글읽는 소리를 듣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답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글귀인데…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그러자 김득신의 말고삐를 끌던 하인이 씩 웃으며 말했답니다.

“아니 저 글귀는 ‘부학자 재적극박’(夫學者 載籍極博·무릇 학식있는 사람은 전적이 극히 많지만…) 어쩌구 하는 말이잖아요. 나으리가 평생 읽으신 글귀잖아요. 저도 (지겹도록 들어서) 외었는데 나으리만 모르겠다는 겁니까.”

김득신은 1661년(현종 2년) 환갑을 바라보는 59살의 나이에 당당히 문화증광시에 합격했다. 지금으로 치면 59살에 행정고시에 급제했다는 얘기다,. 대기만성의 끝판왕의 모습이다.|독서왕김득신문학관 제공


김득신은 그제서야 자신이 1억1만1000번(실제로는 11만1000번) 읽었다는 <사기> ‘백이열전’의 글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김득신=둔재’ 일화가 정사인 <숙종실록>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움직일 수 없는 ‘팩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숙종실록> 1684년(숙종 10년) 10월9일자는 “김득신은 젊어서부터 늙어서까지 부지런히 글을 읽었지만 사람됨이 오활(세상물정에 어두운)해서 쓰임받지 못했다”는 인물평이 나옵니다.

순암 안정복(1712~1791) 역시 <순암집>에서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했지만(性糊塗魯質)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김득신을 향한 평가는 ‘나쁜 머리에도 들입다 책만 파는’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습니다.

비록 세인들의 평가에 비아냥이 섞이긴 했어도 책읽기와 시짓기를 향한 김득신의 열정과 집념에 찬사를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김득신은 글을 수만번, 십수만번을 읽으면서 글의 맥락이 담긴 부분에는 밀줄 쫙, 둥근 점을 잇대어 놓았고, 핵심의미가 있는 곳에는 흘려쓴 글씨로 각주를 달았다고 합니다.

시를 지을 때는 턱수염을 배배 꼬고, 괴롭게 읊조리는 버릇이 있었답니다. 한번은 아내가 점심상을 차리면서 상추쌈을 얹어놓고는 양념장은 올리지 않았는데, 김득신은 그냥 싱거운 상추쌈을 먹었다고 합니다. 아내가 “싱겁지 않냐”고 묻자 “응 잊어버렸어!”라 ‘쿨’하게 대꾸했답니다.(하겸진(1870~1946)의 <동시화>)

충북 증평 율리에 있는 김득신 묘소. 묘비에는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 짓지 마라. 재주가 부족하거든 한가지에 정성을 쏟으라. 이것저것해서 이름이 얻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는 김득신의 말이 새겨져 있다.|증평군청 제공


■59세에 ‘과거급제’

그러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김득신에게 제격인 속담 같습니다.

“책 1만 권을 읽으면 붓 끝에 신기가 어린 듯(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하며, “글을 1000번 읽으면 의미가 저절로 나타난다(讀書千遍 其義自見)”(<두소릉시집>)는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의 언급 그대로였으니까요. 당시 효종(재위 1649~59)은 김득신의 시를 “당나라 시와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라고 칭찬했습니다. 김득신을 ‘멍청한 둔재’라 평한 안정복도 “밤낮으로 책을 읽은 김득신은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박세당(1629~1703) 역시 김득신의 치열한 삶을 상찬하는데요.

“공은 시 한 자를 짓는데 1000번이나 단련했다. 시짓는 일에 골몰하면…타고 가던 조랑말이…나아가지 못했다”(<백곡집> ‘서’)고 상찬했습니다.

7월11일까지 충북 증평군 독서왕김득신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는 ‘독서왕 김득신’ 특별전. 조선의 독서 끝판왕 김득신을 다룬 전시회이다.|독서왕김득신문학관 제공


이렇게 노력한 끝에 김득신은 경치를 묘사할 때 ‘시중유화(詩中有畵·시 속의 그림)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았구요. 정두경(1597~1673)·임유후(1601~1673)·홍석기(1606~1680)·권항(1575~?)·김진표(1614~1671)·이일상(1612~1666)·홍만종(1643~1725) 등과 함께 17세기 시단을 이끌었답니다.

그럼에도 김득신은 과거 급제의 꿈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54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내가 아둔하여 어머니께 불효를 저질렀다”면서 계속 과거에 도전했는데요. 급기야 59살이 된 1661년(현종 2년) 문과 증광시에 당당히 합격했답니다. 지금으로 치면 59살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니까 얼마나 대단한 분입니까.김득신이 자신의 묘비에 남긴 한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 짓지 마라. 재주가 부족하거든 한가지에 정성을 쏟으라. 이것저것해서 이름이 얻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정여립의 부정적 기록은 후대에 날조 된 것” (hani.co.kr)

학벌 설움 딛고 독학 매진한 재야학자
모든 기록 말살된 모반사건 20여년 추적
정여립의 진보적 개혁사상 재조명
“반란 성공했다면 새 역사 열렸을 것

기자김봉규
  • 수정 2007-10-12 19:51
  • 등록 2007-10-12 19:51
문화사학자 신정일씨

인터뷰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펴낸 문화사학자 신정일씨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선조 22년) 10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1천여명이 처형당하거나 고문받다가 또는 귀양 중에 숨지고 투옥당하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무오·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기축옥사는 당시 인구 500만이던 조선 전토를 참화 속에 몰아넣었다. 뒤이은 임진년 왜란조차 기축옥사의 황폐가 부른 재앙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사태는 참혹했다. 그 중심에 정6품 홍문관 수찬에 올랐던 당대의 귀재 정여립(1546~1589) 모반사건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은 바로 정여립 모반사건의 시대적 배경과 연루된 인물들을 종횡으로 추적한다. “조선왕조는 정여립 사건 이후 300년을 더 버텼다. 하지만 영·정조 때 잠깐 불꽃을 피워올렸을 뿐 지리멸렬했다. 그때가 개국한 지 200년이었는데, 한 왕조의 수명은 200년 정도면 족하다는 얘기들이 많다. 그때 차라리 정여립이 반란에 성공했거나 다른 왕조가 시작됐더라면 이후 우리에겐 새 역사가 전개됐을 것이다.” 전주 황토현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서울에 사무실을 둔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대표도 맡고 있는 ‘문화사학자’ 신정일(53)씨. “1980년대 말부터 정여립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니 20여년간 공부해온 셈이다.”

정여립은 정말 반란을 꾀했을까? 실은 이 기초적인 사실조차 규명돼 있지 않다. 사건조사기록 <기축옥안>은 임진란에 불탔고, 남아 있는 얘기들은 당파에 따라 극단으로 엇갈려 어느쪽이 진실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정여립은 행적이 모두 말살돼 남들이 전하는 얘기 외에 그가 쓴 문서 하나 남은 게 없다. 유혈낭자했던 그 ‘최대의 역모사건’은 애초부터 시비를 가릴 아무런 물증도 없었다. 동서 ‘붕당’의 파벌전쟁 속에 고변과 음해, 아비규환의 고문과 자백만으로 엮어낸 대숙청극이었다. 그래서 완전한 날조극이라는 주장이 예부터 있었다.

지은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정여립이 모반을 꿈꾸고 준비를 한 것은 사실이다. 50%가 날조된 옥사이고 50%가 정여립의 역모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인 김지하씨는 정여립을 “(세상 뒤엎기를) 하다 만 사람”이라 평했다. 사건은 발생 초기 선조(1552~1608)마저 거의 뜬소문으로 여길만큼 첩보조차 구체성이 없었다. 조정은 정여립이 붙잡혀 와 자초지종을 고하기만 해도 해소될 별볼일 없는 무고사건 정도로 여겼으나 첫 비밀장계가 뜬 지 닷새 뒤 정여립이 도주했다는 장계가 떴고 곧 다시 그가 자살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가 도망쳐서 자살했다는 것은 곧 실제 반역을 꾀했다는 얘기가 된다.” 지은이는 이를 당시 정권에서 소외돼 있던 서인들이 정권 재탈환을 위해 정여립 일당을 이용한 모략극으로 본다. “기축옥사 최고 지휘관이 정철이었다면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은 송익필이었다.” 토정 이지함이 율곡 이이, 성혼과 더불어 시대의 스승으로 꼽았던 서인 송익필은 조선중기 8대 문장가에 들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나 아버지 송사련이 기묘사화 때 사건을 날조해 좌의정 안당 가문에 멸문지화를 안긴 과거사 때문에 동인의 핵심 제거대상이 됐고 마침내 동인 이발 등이 나서 송익필의 조모가 원래 안씨 가문 노비였던 걸 들춰내 송씨 일가를 모두 노비신분으로 ‘환천’시켜버렸다.

 

가문 몰락의 한을 품고 보복의 기회만 노리던 송익필은 낙향한 뒤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 반왕조적 대동사상에 빠져 이상사회를 꿈꾸던 정여립의 대동계를 반격의 고리로 활용했다. 신씨는 <동소만록>에 나오는 “정여립이 진안 죽도로 단풍놀이 삼아 놀러 갔는데 선전관과 진안현감이 죽인 후 자결한 것으로 했다”는 기록을 믿는다. 정여립이 고변으로 역모가 들통나자 도망친 것이 아니라 서인 쪽이 미리 심어놓은 진안현감 민인백 등이 단풍놀이 가자며 정여립을 죽도로 유인한 뒤 죽여버리고는 도망치다 자살했다고 보고함으로써 역모사건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건조사 총책임자가 된 서인의 행동대장 정철은 보고가 올라오기도 전에 정여립이 도망갔을 것이라 발설했다. 사전에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신씨는 단재 신채호도 “동양의 위인”이라 칭송한 “당대의 인물” 정여립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기록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얘기가 세월 갈수록 그에겐 더욱 깊게 와 닿는다. 하지만 ‘정여립이 억울하게 당했다’며 그의 누명 벗기기에 골몰하는 역모사건 날조설엔 부정적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해서는 영국의 크롬웰보다 50년이나 더 앞선 공화주의자였던 정여립의 진보적 개혁사상을 재조명할 수도 없고, 역사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축기사>에는 정여립 남겼다는 몇 마디 말이 기록돼 있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유비의 촉한이 아니라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것은 참으로 직필이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유하혜는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는데….” 가히 혁명적이다.

신씨는 “정여립의 대동사상이 허균의 호민론으로, 그리고 다산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으며 근대의 동학사상과 강증산의 화엄적 후천개벽사상, 미륵신앙도 그 줄기로 엮여져 있다”고 본다. 민중은 새 세상을 염원했다.

<한국사의 변혁을 꿈꾼 사람들>, <섬진강 따라걷기>, <다시 쓰는 택리지>, 그리고 이번 책까지 33권의 책을 써낸 신씨는 그 자신이 학위날조로 얼룩진 요즘 세태에 대한 하나의 ‘모반’이요 ‘풍자’처럼 보인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그는 진안 백운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 중·고교 모두 검정고시로 넘었고 대학은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옛문서들을 웬만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도 오직 독학한 덕”이다. “학벌 없어 당한 설움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이젠 그게 오히려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야말로 학맥 학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통합적으로 쓸 수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글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율곡의 책문 가운데 도적책(盜賊策)편 원문. 율곡은 조정을 향해 “온 나라가 염치를 숭상하는 풍속을 이뤄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도록 올바른 정치를 펴 달라”고 당부했다.
◇율곡문답/김태완 지음/584쪽·2만5000원·역사비평사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은 오늘날의 논술시험과 비슷한 형태였다.

정치 사회 현안과 관련해 왕이 제시하는 문제에 응시생들이 답하는 것이다. 왕이 내는 문제를 책문(策問)이라 불렀고, 답을 대책(對策)이라 했다.

이 책은 율곡 이이가 쓴 책문과 대책 17편을 수록했다. 율곡의 책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율곡이 과거에 17번 응시했을 리는 없으므로 책문의 형식으로 정치적 견해를 제시하거나 철학적 사유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율곡의 활동기인 16세기는 사회 전반에 걸쳐 갖가지 모순이 발생하던 시기였다. 기득권층과 신흥 신료집단의 권력 다툼, 왕권과 신권의 갈등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졌다. 변방에선 여진족과 오랑캐가 활개를 쳤다. 내우외환의 상황에서도 오랜 문치(文治)에 젖어 허약해진 학자 관료들은 개혁에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선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낡은 집’이라고 했던 율곡은 자나 깨나 나라 걱정이었다. 율곡은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왕과 관료들에 대한 충고 등을 책문과 대책의 형태로 썼다.

‘문책(文策)’편에서 그는 “과거(科擧)의 글은 규격이 있어서 아무리 훌륭한 글이라도 규격에 맞지 않으면 내침을 당하므로 과거는 진정한 인재를 뽑기에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며 과거의 폐단을 지적한다.

‘문무책(文武策)’에서 그는 학문도, 국방도 튼튼하지 못한 조선의 현실을 비판한다. 율곡은 왕의 실천과 인도가 중요하다며 “도덕적으로 인륜의 표준이 되시고, 군대를 움직임은 하늘의 명령에 따라 하신다면 문무가 조화롭게 이뤄질 것”이라고 충고한다.

율곡은 단순히 교훈적인 문장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학식을 동원해 한 무제, 당 태종 등의 치적을 열거하거나 고사를 인용하고, 역사 속에서 벤치마킹할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도적책(盜賊策)’에선 정치가 소통하지 않는 현실이 도적을 만든다면서 이를 막을 방법을 제시한다.

“임금이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간악한 풍속이 끊어지고, 임금이 산업을 다스리는 도리를 잃으면 억센 도적이 많아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도적을 멈추게 하려면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인정(仁政)보다 시급한 것이 없다.”

율곡은 ‘천도인사책(天道人事策)’에서 하늘과 사람 사이에 선과 악이 서로 교감하는 이치가 무엇인지를 따지고, ‘성책(誠策)’에선 “정성을 다하면 결국엔 효험을 거둔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군정책(軍政策)’의 요지는 ‘훌륭한 지휘자 선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고, ‘의약책(醫藥策)’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국가도 병이 드는데 윗사람이 백성을 교화하고, 관직을 바로잡으면 나라의 병은 다스려진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사회 현실에 대한 글만 있는 건 아니다. 17편 가운데 절반 정도는 하늘의 이치, 우주의 질서, 삶과 죽음,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 등 율곡의 생각이 담겨 있다.

책을 덮으면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 떠오른다. 율곡이 살고 있다면 어떤 자문과 자답을 할까.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방패 베고 병사와 한솥밥 먹은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daum.net)

김준태입력 2018. 6. 10. 07:02수정 2018. 6. 21. 17:57
 
[더,오래] 김준태의 후반전(9)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역사 속에 수많은 명재상이 있었지만, 이원익(李元翼, 1547~1634)만큼 완벽함에 가까웠던 인물은 드물다.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그는 능력과 인품, 청렴한 삶으로 온 나라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직후 이원익이 한양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민심이 안정됐다는 전설 같은 실화가 전해올 정도다.

이원익이 주목을 받은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다. 평안도 관찰사를 맡아 후방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우의정 겸 4도(강원·충청·경상·전라) 도체찰사로서 최전선을 지휘했다. 특히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는데, 평안도 백성들은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그의 선정(善政)에 감사했다고 한다. 이를 민망하게 여긴 이원익이 사당을 허물도록 하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세웠다.

 

선조가 남부 전선에 있던 그를 다시 평안도로 복귀시키려 하자 신하들이 한사코 만류하기도 했다. “오직 이원익만을 의지하고 있는 민심이 무너져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다(선조 29년 11월 9일의 실록기사, 이하 날짜만 표시). “비록 전쟁을 겪었지만, 이원익 덕분에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선조 27년 6월 24일)는 평가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이원익, ‘항상 보이는 지도자’로 백성의 신뢰받아
이처럼 이원익이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항상 보이는 지도자(visible leader)’였기 때문이다. 그는 방패를 베고 군막에서 잠들었으며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밥을 먹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 백성이 고통받는 현장을 지키며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진정성을 백성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조 국가에서 임금이 아닌 신하에게 민심의 지지가 쏠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왕의 의심을 사고 심지어 제거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원익이 모신 임금은 하나같이 그를 아끼고 중용했다. 그중에서도 인조는 남달랐는데 “경이 조정에 없으면 단 하루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인조 4년 8월 16일), “과인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보듯 경을 바라본다”(인조 4년 12월 7일), “경이 머물러만 준다면 나라의 광영일 것이다”(인조 9년 4월 4일)라고 말할 정도다.

 
이원익( 李元翼 )의 종가 옆에 있는 충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옛 문서들. [중앙포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원익이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줬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인조 때 그의 나이는 이미 팔십 대였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조정의 최고 원로로서 그저 가만히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은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어찌 나라를 위한 일에 감히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며 자신이 반란을 진압하러 평안도로 가겠다고 자원했다(인조 2년 1월 24일).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4도 도체찰사를 맡아 후방지원을 총괄하고 소현세자의 분조(分朝,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책임졌다(인조 5년 1월 17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원익은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제일 먼저 달려왔다. 한번은 오랑캐가 국경을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85세의 나이에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 출사했는데(인조 9년 3월 28일), 이런 모습에 인조가 크게 감동했고 신하들은 “이원익이 어제 서울에 들어왔으므로 조야가 모두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요컨대 위기 앞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자원해 떠맡는 이원익의 행동이 백성뿐 아니라 동료 신하들, 나아가 임금의 신뢰를 끌어내게 된 것이다. 임금과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이 곧 쓰러져 죽기 직전의 상황이어도 행동에 옮기는 이원익에게 그의 진심을 의심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의미한 일이었다.

더욱이 인조 대에 이원익이 보여준 처신에서는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이원익은 인조가 왕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간청하고, 때로는 강권하는데도 불구하고 조정에 나서질 않았다. 인조 초기 잠시 영의정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면 향리에서 움직이질 않는다. 나라에 큰일이 생겨 잠시 조정에 나오더라도 그날로 돌아가 버렸다. 조정 일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자문을 구해도 “노신의 정신이 혼미하여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인조 9년 4월 4일).


물러나 있다가 위기 닥치면 앞장선 진정한 어른
이는 그의 정신과 기력이 쇠약해져서거나 조정 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라의 큰 공신이자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최고 원로, 그것도 왕이 깍듯이 모시는 80대 노인이 조정에 나와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해보라.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시시콜콜 잔소리하고 가르쳐 들어보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도 잘하지 못하면서 후배들에게 부담만 줄 뿐이다.

뒤로 물러나 있되 위기가 닥치면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준 사람, 입을 다물고 간섭하지 않되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지가 되어준 사람, 이원익은 그렇게 진정한 어른으로 남았다.

김준태 동양철학자 역사칼럼니스트 akademie@naver.com

Copyright©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곽병찬의 향원익청] 가부장 앞에서 길 잃은 시의 혼, 옥봉 (hani.co.kr)

곽병찬의 향원익청

  • 수정 2016-08-02 18:37
  • 등록 2016-08-02 18:37
옥봉은 조선 왕실의 자손인 자운 이봉의 서녀로 태어났다. 첩의 자식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자존심이 강했다. 길쌈, 바느질에는 관심 없이, 글공부와 시 짓기에 열중했다. 10대의 옥봉은 이미 인근에 잘 알려진 여류시인이었다.

‘강물에 노니는 갈매기의 꿈은 드넓고(江涵鷗夢闊), 하늘 멀리 나는 기러기의 수심은 아득하구나(天入雁愁長)’ 그의 시혼은 갈매기 꿈처럼 드넓었으나, 가부장 사회에서 그가 가야 할 길은 기러기의 북행처럼 멀고 고단했다.

일러스트 이림니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승지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로대신으로부터 시집 한 권을 받는다. 놀랍게도 이옥봉 시집이었다. 옥봉은 부친 조원의 첩. 대신이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40여년 전 바닷가에 괴이한 주검이 떠돌아, 사람을 시켜 건져 올리도록 했다. 주검은 종이로 수백 겹 말려 있었고, 안쪽 종이엔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시가 빼어나 책으로 엮었다. 말미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화다. 그러나 ‘햇빛에 바래면 역사요, 달빛에 바래면 신화가 된다’(소설가 이병주)고 했던가. 못난 정인에게 버림받아 불행하게 죽어간 여인 이옥봉의 ‘시혼’을, 당대의 여인들은 달빛에 물들이고 또 다듬어 그런 신화를 빚어낸 것이었다.

조원의 셋째 아들인 조희일은 명나라 사신으로 간 일이 없었다. 다만 1606년 허균과 함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 일행을 맞이했다. 종사관은 중국 사신이 조선 땅에 발 디딜 때부터 이들을 수행하며 접대하는 직책. 단순히 향응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문장으로 나라의 자존심을 세우는 역할도 했다. 1652년 중국에서 간행된 <열조시집>에 이달(36수), 옥봉(11수), 허균(10수), 허봉(4수) 등 조선 시인들의 시가 실린 것은 그 결과물일 것이다. 이달은 허균의 스승이고 허봉은 허균의 형이다. 옥봉은 허균이 제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당시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꼽았던 인물이다.

달빛에 바랜 옥봉의 신화는 더 있다. 남도소리 하면 ‘육자배기’요 서도소리 하면 ‘수심가’라 했다. 80여 소절로 이루어진 수심가를 여는 사설은 이렇다. “약사몽혼(若使夢魂)으로 행유적(行有跡)이면, 문전석로(門前石路)가 반성사(半成沙)로다, 생각을 허니 님의 화용이 그리워 나 어이할까.” ‘꿈속 내 혼이 자취를 남겼다면, 님의 집 앞 돌길은 이미 모래가 되었을 것이오’라는 뜻이다. 옥봉의 ‘자술’(自述, 내 마음을 술회함) 또는 ‘몽혼’(夢魂)의 전구와 결구다. 기구와 승구는 이렇다. “묻노니, 임께서는 요즘 어찌 지내시나요, 사창엔 달빛이 가득한데 이내 가슴엔 한만 가득합니다.” 현실에선 갈 수 없는 그곳을 꿈속에서 얼마나 오갔으면 길에 깔린 돌이 모래가 되었을까. ‘수심가’엔 옥봉의 시 또 한 편이 스며 있다. “님 떠날 내일 밤이야 짧고 짧아도, 님과 함께하는 오늘 밤은 길고 길었으면. 닭의 홰치는 소리 새벽을 재촉하니, 천 가닥 눈물 두 눈에서 흐르네.”(‘별한’, 別恨) 옥봉은 조선 왕실의 자손인 자운 이봉의 서녀로, 이봉이 옥천 군수를 지낼 때 태어났다. 비록 첩의 자식이었지만, 어려서부터 그는 자존심이 강했다. 길쌈, 바느질 등 가사에는 관심 없이, 글공부와 시 짓기에 열중했다. 10대의 옥봉은 이미 인근에 잘 알려진 여류시인이었다.

서녀인 그는 서얼금고법에 따라 양반가에 정실로 시집갈 수 없었다. ‘가봤자 첩인데…’, 그는 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짝으로 삼으리라 각오했다. 마침 그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운강 조원. 이조판서를 지낸 신암 이준민의 사위였다. 부친은 그 뜻을 알고, 조원을 찾아가 사정을 했다. 조원은 거절했다. 이봉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그의 장인에게 사정했다. 빼어난 시문과 아름다운 자태에 감복한 이준민은 사위를 설득했다. 조원이 진사시험에 장원한 1564년 옥봉은 그의 첩이 되었다.

짝을 맺는 건 힘들었지만, 버림당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1589년부터 1592년 사이의 일이었다. 조씨 집안의 먼 친척으로 선산을 지키던 이가 소도둑으로 몰려 잡혀갔다. 옥봉은 그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 글 한 편을 써 줬다. 이 호소문을 본 형조의 당상관들은 문장에 감탄하며 피의자를 풀어주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원은 불같이 화를 냈다. “어찌하여 소백정의 아내에게 그런 글을 써 주어, 남들의 귀와 눈을 번거롭게 하는가? 이것은 크게 몹쓸 짓이니 집에서 나가라.”

당쟁의 와중에 빌미가 잡혀 출셋길이 막힐까 걱정했던 것이다. 당시 조정은 김효원과 심의겸을 우두머리로 한 동서 붕당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는 이조좌랑 시절 서인의 총대를 메고 심충겸(심의겸의 동생)을 동인 김효원 후임으로 이조정랑에 추천했다가 동인의 지탄을 받아 괴산군수로 좌천된 바 있었다.

그렇다고 사대부가 향리의 토색질에 희생당한 산지기의 억울함을 모른 척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문장가를 자처하는 자임에랴…. 옥봉의 호소문은 과연 명문이었다.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물을 기름 삼아 머리를 빗질한 뒤 쓰옵니다/ 신첩이 직녀가 아닐진대/ 어찌 낭군이 견우(소를 훔친 사람이라는 은유)가 되리이까.”

일각에선 옥봉이 첩이 되는 조건으로 절필을 약속했으며, 이 약속을 어긴 것이 소박의 이유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조원은 함께 살면서 옥봉의 문장에 크게 기댔다. 어느 날 한 선비가 책력 한 부를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조원은 고민하다가 옥봉에게 답장을 부탁했다. “어찌 남산의 스님에게 빗을 빌려 달라 하지 않으십니까.”

조원이 삼척부사 시절 쓴 옥봉의 ‘추사’(秋思)는 외직으로 전전하던 남편 구명용이었다. “서리 내려 나무에 진주가 달렸으니, 성안엔 벌써 가을이 가득하겠네, 마음은 임금 곁에 있지만, 몸은 바닷가 끝에서 일에 매였네….” 조원의 부탁으로 함경병마절도사 신립에게 보낸 것도 있다. “…북소리 울리자 쇠피리 함께 울고, 달이 창해에 잠기니 어룡도 춤을 추네.”(증병사)

1589년 조원은 성주부사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던 중 상주 관아에서 하루 묵었다. 친구인 윤국형 상주목사가 술자리를 베풀자, 조원은 옥봉에게 시 한 수 지어 답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옥봉은 즉석에서 시를 읊고, 조원이 받아 적었다. 윤국형은 그때 그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목소리가 맑고 처절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문소만록>)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애오라지 제 출세만 생각하던 조원은 옥봉을 버렸다. “문명은 있었지만, 국량과 식견이 좁아 사류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조원에 대한 일부의 평가였다. 그는 권력 주변을 서성이다가 임진왜란 중인 1595년 죽었다.

조원은 옥봉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고손자 조정만이 1704년 부친의 명을 받아 고조부터 조부까지 3대의 문집 <가림세고>를 엮으면서 부록에 ‘옥봉집’을 실었다. 중국의 <열조시집>에도 올라 있으니 그제야 옥봉 시를 가문의 자랑으로 삼으려 했던가 보다. 말미엔 이런 반성적 평가가 붙어 있다. “그 삶은 불행했으나, 그 죽음은 불후하였다.”

옥봉은 소박당한 뒤에도 애걸복걸하지 않았다. 조원에게 보낸 두 편의 시 가운데 하나인 ‘만여증랑’은 이런 투다. “…기다리다 여윈 얼굴, 님에게 보이기 민망해, 매화 핀 창가에 앉아 반달눈썹 그리네.” 정한은 쌓여 병이 되었지만, 그저 속으로 삭였다. “이불 속에서 흘린 눈물, 얼음장 밑 흐르는 물 같아, 밤낮 이불을 적신들, 그 누가 알겠습니까.”(‘규정’, 閨情) 속좁은 남자가 어찌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옥봉의 시가 정한에만 매여 있는 건 아니었다. 허균은 시평집 <학산초담>에서 옥봉의 시를 두고 “맑고 굳세어 지분(화장)의 태가 전혀 없다”고 극찬했다. 특히 그는 ‘비’와 ‘영월도중’을 높이 평가했다. “흩어지는 구름 사이로, 햇살 쏟아지니, 은빛 대나무 하늘 가득, 강을 가로질러 흐르네.”(‘비’)

곽병찬 대기자

조선 말 최고의 문장가인 신흠은 <청창연담>에서 단 열 자에 불과한 ‘죽서루’를 조선 최고의 시로 꼽았다. ‘강물에 노니는 갈매기의 꿈은 드넓고(江涵鷗夢闊), 하늘 멀리 나는 기러기의 수심은 아득하구나(天入雁愁長)’ “고금의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자가 아직 없었다.”

옥봉, 그의 시혼은 갈매기 꿈처럼 드넓었으나, 가부장 사회에서 그가 가야 할 길은 기러기의 북행처럼 멀고 고단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26년 나이 차에도 논쟁이 가능하다니 (daum.net)

이돈삼입력 2015. 7. 3. 21:24수정 2015. 7. 14. 00:37
 
퇴계 이황과 8년 동안 사단칠정 논했던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

[오마이뉴스 이돈삼 기자]

 

 고봉서원의 빙월당. 서원의 주강당이다.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하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 이돈삼
광주유니버시아드가 시작됐다. 세계 대학생들의 스포츠 축제가 열리고 있는 '빛고을' 광주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지역과 세대의 차이를 뛰어넘어서 경북 안동에 사는 퇴계 이황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성리학을 논했던 고봉 기대승을 만날 수 있는 월봉서원으로 간다. 지난 2일이다.

고봉 기대승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면서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20살에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30대에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퇴계 이황과 8년 동안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면서 한국철학사 정립에 기여했다. 성균관 대사성과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지만, 4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봉이 퇴계의 사단칠정 논쟁, '사칠논변'이라고도 한다. 당시 사단과 칠정은 유교에서 중요한 개념이었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마리가 되는 인간의 네 가지 마음, 사람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네 가지 덕목을 가리킨다.

 

 고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너브실마을 전경. 임곡에서 황룡 방면의 도로에서 본 풍경이다.
ⓒ 이돈삼
 고봉서원으로 가는 길. 돌담 기와에 능소화가 요염하게 피어 있다.
ⓒ 이돈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 겸손하게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시비지심)이다. 칠정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 즉 기쁨과 화남,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 등이다.

사단과 칠정을 주제로 한 고봉과 퇴계 논쟁의 쟁점은 주기론과 주리론이었다. 당시 성리학은 우주의 근원과 질서, 그리고 인간의 심성을 '이(理)'와 '기(氣)' 두 가지로 생각하고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고봉은 사단칠정이 모두 정이라는 주기설을 주장하며 퇴계의 주리론과 맞섰다.

퇴계의 주리론은 경험이나 현실보다는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중요시한 이론이었다. 영남학파를 형성했다. 상대적으로 주기론은 현실 세계를 중요시하면서도 도덕세계를 존중하는 철학 체계를 수립했다.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고봉도 주기론을 강하게 주장했다.

 

 고봉서원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백우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고봉서원 앞 풍경. 말끔하게 단장된 물길과 어우러져 있다.
ⓒ 이돈삼
논제도 논제지만, 퇴계와 고봉의 나이 차이도 상당했다. 사단칠정 논쟁을 시작하던 당시 퇴계의 나이는 58살, 고봉은 32살이었다. 26년 차이였다. 퇴계가 1501년, 고봉은 1527년에 태어났다. 당시를 감안하면 할아버지와 손자뻘이 됐을 것이다. 직위 차이도 컸다. 당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 지금의 서울대학교 총장 격이었다.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선비였을 뿐이다.

퇴계의 인품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받아주지 않으면 논쟁이 성립될 수 없을 텐데, 다 받아줬다. 지금 같으면 나이와 서열을 따졌을 텐데, 퇴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퇴계의 입장에서는 시쳇말로 '잘 해야 본전'일 텐데도, 그렇게 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대단했다.

퇴계와 고봉은 나이와 직위를 떠난 벗이었다. 멘토와 멘티 관계였다. 이렇게 무려 13년 동안, 그것도 광주와 안동에 살면서 114통의 장문의 서신을 주고받았다. 1559년부터 1566년까지 8년 동안은 사칠논변을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마주한 건 평생 네 번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신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교류는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논쟁으로 동시대 사람들은 물론, 후대에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고봉서원 빙월당 전경. 맑은 달과 투명한 얼음처럼 청렴한 마음을 가진 고봉 기대승의 사람됨을 닮았다.
ⓒ 이돈삼
 고봉서원을 감싸고 있는 백우산의 숲길. 이 길을 따라 서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다.
ⓒ 이돈삼
월봉서원은 고봉의 장남 기효증이 세웠다. 선조 10년, 1607년이었다.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헐렸다. 1941년에 고봉의 후손들이 지금의 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지었다. 사당과 장판각 등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복원됐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머물렀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그리고 선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이뤄져 있다. 월봉서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망천문(望川門)으로 들어가면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는 동쪽에 있는 기숙사, 서재는 서쪽의 기숙사다. 동재는 명성재(明誠齋), 서재는 존성재(存省齋)라 이름 붙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축물이 빙월당(氷月堂)이다. 맑은 달과 투명한 얼음처럼 청렴한 마음을 기려 정조임금이 하사했다. 고봉의 올곧고 투명한 사람됨을 담은 이름이다. 이 빙월당이 고봉서원의 주강당이다. 당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하고, 토론하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광주시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숭덕사는 고봉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여기서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장판각은 오늘날의 인쇄소와 비슷하다. 여기에는 고봉집(高峯集), 논사록(論思錄) 등의 목판 474개가 보존돼 있다. 

 

 고봉 기대승의 시조비. 고봉서원을 감싸고 있는 숲길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고봉 기대승의 묘. 백우산 자락에서도 앞이 탁 트여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월봉서원은 백우산이 감싸고 있다. 산속 숲길을 따라 서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볼 수도 있다. 숲길도 다소곳하다. 숲길을 따라가면 고봉의 시조비를 만난다. 고봉의 묘소도 여기에 있다. 앞이 탁 트여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 두 기의 봉분 가운데 왼쪽이 고봉이고, 오른쪽은 그의 부인이 모셔져 있다.

서원 아래에 고봉학술원도 있다. 고봉의 사상을 연구하는 공간이다. 고봉의 13대손인 기세훈씨가 주축이 돼서 설립했다. 학술원 안에 별당 애일당(愛日堂)이 있다. 고봉의 6대손 기언복이 연로한 어머니를 위해 숙종 때 세운 집이다.

 

 윤상원과 박기순의 얼굴이 새겨진 기념비. 윤상원 열사의 생가에 설치돼 있다.
ⓒ 이돈삼
 윤상원 열사의 생가. 몇 해 전 화재로 없어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열사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사진과 일기, 비품 등이 전시돼 있다.
ⓒ 이돈삼
고봉서원에서 가까운 데에 윤상원 열사 생가도 있다. 윤상원 열사는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산화했다. 윤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맺은 박기순씨의 얼굴을 함께 새겨진 기념비가 있다. 박기순은 광주 광천동에 들불야학을 창립해 노동자 야학을 하다가 1978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1982년 2월 망월묘역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헌정된 노래가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생가의 전시관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악보를 만날 수 있다. 열사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사진과 일기, 비품 등이 전시돼 있다.

고찰 양림사와 한말 의병활동의 본거지였던 용진정사도 가깝다. 고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임곡은 또 장성군 황룡면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황룡으로 가면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는 필암서원이 있다. 홍길동 테마파크, 청백리 박수량 선생의 백비도 있다. 편백숲이 아름다운 축령산 자연휴양림도 있다.

 

 대숲을 품은 너브실마을의 길. 애일당과 고봉학술원의 뒷편 풍경이다.
ⓒ 이돈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월봉서원 찾아가는 길 월봉서원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너브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호남고속국도 광산나들목에서 하남산단 9번도로를 타고 임곡 방면으로 간다. 연동삼거리에서 우회전, 임곡 소재지를 지나 장성 황룡 방면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월봉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사의 아웃사이더/이이화 지음/360쪽·1만3000원·김영사

◇잡인열전/이수광 지음/316쪽·1만2000원·바우하우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주로 주류의 역사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거나 시대에 저항한 인물들, 양반 아닌 평민의 역사는 많이 기록되지 못했고 잘 알지 못한다.

기록되지 못한 비주류의 역사 이야기를 인물 중심으로 풀어낸 책이 잇따라 나왔다.

‘한국사의 아웃사이더’는 역사가 이이화 씨가 한반도 밖에서 걸출한 활약을 벌였으나 잊혀진 인물들, 시대에 맞서 변혁을 꿈꿨으나 역적으로만 기억된 사람들, 신분 사회의 한계를 딛고 과학 분야에서 족적을 남긴 이들 30명을 재조명한 인물 열전이다.

이 중엔 왕인, 장보고, 신돈, 홍경래, 허준 등 유명한 인물도 포함돼 있고,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

고구려 유민으로 서역을 개척한 고선지(?∼755)도 그런 인물이다. 당나라 절도사 자리에 오른 그는 다양한 지략으로 서역 땅 가는 실크로드를 개척했다. 당나라의 국익에 공헌했지만 결과적으로 한반도와 일본의 동서교류에까지 이바지한 것이다. 저자는 오랑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면서도 특유의 아량과 지혜로 오히려 무지한 상대를 감복시킨 고선지의 면모를 부각시킨다.

조선 중기의 역신으로만 알려진 정여립(1546∼1589)을, 임금을 백성의 의지로 바꿀 수 있다며 민권을 중심 사상에 두고 통치술을 주장한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평하고 19세기 진천 진주 문경 등지에서 봉기를 일으킨 몰락 양반 출신의 이필제(1826∼1871)에게서 사대질서에 반기를 든 자주 정신을 찾는다.

‘잡인열전’은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평민, 그들 가운데서도 유별나고 특별하게 살았던 ‘잡인’ 24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본받아야 할 위인들은 아니지만 당시 저잣거리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 등 역사서를 집필해 온 저자는 ‘어우야담’ ‘역옹패설’ 등 야사 기록을 뒤졌다.

우의정에 이른 문신 원인손(1721∼1774). 그의 젊은 시절은 놀랍게도 한양 거리의 투전꾼들이 우러러 볼 정도의 ‘신의 손’이었다. 원인손은 투전판에서 돈을 잃고 싸우다 죽는 중인의 모습을 보고 학문에 전념한다.

조선 중종 때 세 번 개가하며 난봉녀로 기록된 김씨 부인, 조선 시대 100여 번이나 대리시험을 본 유광억 등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인천 강화군에 있는 영재 이건창의 묘. 비석 하나 없이 외롭게 있어 잊혀진 명문장가의 삶이 더 애처롭게 느껴진다. 사진 제공 글항아리
 
◇ 조선의 마지막 문장/이건창 지음·송희준 옮김/408쪽·1만6000원·글항아리

 

《“주된 뜻(주의·主意)이 있으면 반드시 여기에 대적하는 뜻(적의·敵意)이 있어야 합니다. 문장을 별도로 만들어 적의로 주의를 공격해야 합니다. 주된 뜻은 갑옷처럼 방어하고 대적하는 뜻은 병기처럼 공격하니 갑옷이 견고하면 병기는 저절로 꺾일 것이고 누차 공격해 여러 번 꺾이면 주된 뜻이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면 곧바로 대적의 뜻을 거둬 포로를 잡아들임으로써 주된 뜻이 더욱 높이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 (17, 18쪽· ‘글을 어떻게 지어야 훌륭한 문장이 될까?’ 중에서)》

좋은 글은 초상화와 같다

 

눈 코 입 평범한 묘사보다

 

수염처럼 특징을 부각하라

고서를 번역한 책으로 400여 쪽에 이르는데 술술 읽힌다. 촌철살인 문장이 날카롭다가 깊은 성찰이 드러나고 인간을 향한 따뜻한 애정이 느껴진다. 때로는 문장은 숨 가쁘게 차오르다가 차분하게 숨을 고르기도 한다.

원문 저자가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글보다 아름다운 리듬이 있는 글이 조화로운 글”이라고 말했는데 스스로 그 본보기를 제시한 셈이다.

저자는 영재 이건창(1852∼1898). 낯선 이름이지만 세속적 글쓰기를 멀리하고 순수하고 강건한 체의 고문을 추구한 19세기 명문장가다.

이 책은 이건창의 당호를 딴 문집 ‘명미당(明美堂)집’을 처음 완역해 총 180여 편의 산문 가운데 50여 편을 뽑은 것이다. 글마다 붙은 옮긴이의 해설이 본뜻의 이해를 돕는다.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한 조언, 논설과 평론, 충정과 절의(節義)에 대한 매서운 글부터 가족을 향한 애틋한 심정, 민초들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한데 담겼다.

문장 이론이 유독 눈에 띈다. 이건창은 창강 김택영(1850∼1927), 매천 황현(1855∼1910)과 함께 대한제국 때 3대 문장가로 불린다. 김택영은 고려 및 조선시대 뛰어난 고문가(古文家) 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건창을 꼽을 정도다.

자신의 글에 자부심이 대단했던 이건창. 글을 어떻게 지어야 훌륭한 문장이 되는지 물어온 학자 여규형(1848∼1922)에게 답을 보낸다.

“무릇 글을 지으려면 반드시 먼저 뜻을 얽어야 한다.”

처음, 끝, 중간으로 뜻의 뼈대가 갖춰지면 이 뜻이 연속하고 관통하게, 분명하고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붓을 놀려 써내려 간다는 것.

“어조사 따위의 쓸데없는 말을 구사할 겨를이 없으며 속어 사용을 꺼릴 겨를이 없다.” 그 다음 “언어를 다듬어야 한다”.

언어를 다듬을 때는 “한 글자를 놓는 데 전전긍긍해 마치 짧은 율시 한 편을 짓듯 해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백미는 그 다음이다. “주된 뜻에 대적하는 뜻이 있어야 한다.”

주제를 돋보이게 하려면 반론을 함께 제기하고 이 반론이 설득력 없음을 보이라는 것이다. 주된 뜻과 대적하는 뜻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없으면 훌륭한 글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긴 것은 짧게 하고 짧은 것은 길게 하며 엉성한 것은 긴밀하게 하고 긴밀한 것은 엉성하게 해야 한다. 느슨한 것은 촉급하게 하고 촉급한 것은 느슨하게 하며 드러나는 것은 숨기고 숨은 것은 드러나게 해야 한다.” 수없이 고쳐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창은 글을 쓴 뒤 2, 3일 보지 않고 마음에도 두지 않았다가 다시 보고 남의 글 보듯 엄정하게 봐야 그제야 글을 제대로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좋은 문장은 초상화 그리는 것과 같아 눈, 코, 입 같은 평범한 사실을 나열하지 말고 눈썹과 뺨의 수염처럼 그 사람만의 특징을 집중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일갈한다.

실제로 이건창은 알아줄 사람 없는 백성들의 행적을 수십 편 전기로 남겼는데 가계와 생애는 최대한 줄이고 특징적인 면을 부각했다.

문집에 실린 유 씨 노인 이야기가 그렇다. 유 씨 노인은 남의집살이하며 평생 짚신을 삼다 일흔 살에 죽었다. 이건창은 이웃집 유 씨 노인의 평범한 삶을 성현에 잇는다.

“성현의 학업이 후세에 전해지듯 그가 만든 짚신을 세상 사람들이 신고 다닌다. 성현은 그들이 만든 도를 세상 사람들이 행하지 않아 근심했지만 유 씨 노인의 짚신은 뜻대로 모두 신고 다니니 걱정이 없다.”

스물두 살에 세상을 떠난 첫 부인을 그리워하는 글에서는 꼿꼿한 선비답지 않은 고독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침실은 고요해 적막하고 화장대에는 먼지가 보얗게 앉았네. 낮에 생각하면 도움 주는 친구 없어진 것을 한스러워하고 밤에 꿈꾸면 상스럽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네. 아! 슬프다. 봄바람이 때맞춰 불어와 만물이 생기가 나는데, 어찌하여 반짝반짝하던 눈동자는 다시 볼 수 없고 다정한 말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는가?”

이 책의 명문장들은 원문을 간결, 명료하게 우리말로 풀어쓴 옮긴이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 옮긴이는 30년간 한문 공부하며 서당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묵향 사랑 꽃피운 사대부의 육아일기 (hani.co.kr)

기자한광덕
  • 수정 2019-10-19 11:23
  • 등록 2008-04-18 19:33
당시 돌잔치는 살아남은 아이에 대한 축하 의례였다. 돌잡이를 하는 손자가 첫번째로 붓과 벼루를 집자 이문건은 내심 흐뭇했다.

 

〈선비의 육아일기를 읽다〉
김찬웅 지음/글항아리·1만5000원

비운의 선비 이문건 유배지서 손자 키운 ‘양아록’“병든 아비 죽자 우는 아이…눈에 핏방울 맺힌다”17년 내리사랑 책 건네 손자 앞길 하늘에서 인도

조선 최초의 육아일기. 게다가 남자가, 더구나 할아버지가 썼다. 그렇다고 일기의 내용이 특별하진 않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우리 부모들의 손자 양육기를 연상하면 된다. 관심은 왜 그 고통스런 체험을 굳이 기록했느냐에 있다.

일기장의 주인은 이문건(1494~1567)이라는 사대부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귀양살이 중 <다정가>를 읊조린 고려 후기 명재상 이조년이 그의 8대조다. 이조년 앞에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5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한 이름대로 ‘영겁’의 집안이다.

이문건과 두 형님도 과거에 급제했지만 그 인생은 지독히도 고단했다. 이문건의 시대적 삶은 사화와 당쟁의 희생양 그 자체였다. 중종 14년 기묘사화의 후폭풍으로 20대 나이에 유배됐고 명종 때 다시 을사사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50대에 귀양을 갔다. 23년간의 유배생활 도중에 생을 마감했다. 가족적 삶은 더 비극적이었다. 8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두 형도 한꺼번에 죽었다. 여섯 자식 중 성인까지 살아남은 것은 아들 온 하나뿐이었다. 그마저 아들은 어릴 때 열병을 앓아 몸과 정신이 성치 않았다.

 

이문건은 책과 담을 쌓은 손자를 직접 가르쳤다. 때론 손자가 가르침에 감히 토를 달고 논쟁을 벌여 화가 나 매질을 하기도 했다.

 

아들이 죽기 전에 손자를 낳았으니 그때 58살이었던 그의 관심은 온통 손자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다. 손자를 당당한 사대부가 되도록 가르치고 가문의 맥을 잇도록 하는 게 유배기간 중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유배지 성주에서 탯줄을 끊으면서 시작된 양육기는 이문건이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이어진 유배일기이기도 하다.

지은이 김찬웅씨는 마흔에 첫아이를 얻어 어떻게 길러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 일기책을 만났다고 한다. 한시로 쓰인 일기 <양아록>(養兒錄)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내면서 원문과 한자풀이를 부록으로 담았다. 고사에 얽힌 인물과 역사상식도 재미있다.

할아비는 손자 숙길의 연약한 몸을 물어뜯는 벼룩과 이를 증오했다. “젖먹이가 속으로는 괴로워도 어찌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게로 오라.” 살아남았음을 기뻐해 치르는 돌잔치에서 할아비는 “첫 번째로 붓과 먹을 집었으니 훗날 진실로 문장을 업으로 삼을 듯하다”며 흐뭇해했다. 육아일기는 병치레 일기에 가까웠다. 세 돌에 찾아온 학질과 같은 질병의 연례행사를 치르면서 할아비는 늙어갔다.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라 차마 보고 들을 수 없다.” 괴로움은 자책으로 이어진다. “나의 운명에 액운이 깃들어 자손들이 모두 병을 앓게 되니….”

가끔 감동도 있다. “젖을 떼게 하고 내 잠자리로 불렀더니 품에 안겨 가슴을 만지고 달라붙는다.” 할아비는 손자에게 “아름다운 품성 온전히 지켜 어른이 되어서도 저버리지 마라”고 당부한다.

 

아들이 나이 마흔에 숨을 거둘 때 손자 나이는 7살. “병든 아비 죽자 그 옆에서 곡을 한다. 두 눈에 핏방울이 맺힌다. …훗날까지 아버지 얼굴 자세히 기억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숙길은 아비를 잃은 다음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초조했을까? 할아버지는 자신의 강박증을 손자에게 투영한다. 책은 안 읽고 종일 그네만 타자 “칼을 휘둘러 그네를 끊어버렸다.” 고서를 해석해주는데 손자가 두 차례나 반론을 펼치자 “화를 내고 책을 밀쳐버렸다. 말채찍 손잡이로 종아리를 30대 때렸다.” 여기까진 부모 눈높이에서 공부만 강요하는 요즘 가정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할아비의 난폭함을 진심으로 경계한다”고 반성한 뒤 훌륭한 문장가가 돼주길 원한 할아비의 욕심을 접고 손자의 건강과 품성에만 신경을 쏟는다.

할아버지의 회초리가 전혀 아프지 않게 느껴질 무렵 무거운 이별의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지은이는 손자와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상상했다. 17살 청년이 된 손자에게 책자를 내밀었다. “이 책자를 ‘나’라고 생각하고 간직할 수 있겠느냐?” <양아록>을 한장 한장 넘겨보던 손자는 울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실제로 이문건은 일기 머리말에 “손자가 커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아들 온과 자신이 죽은 뒤에도 손자가 어긋나지 않길 바라는 뜻에서 일기를 쓴 것이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 손자는 어떻게 됐을까? 과거엔 못 붙었지만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4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지만 대를 이을 아들 둘을 낳아 할아버지를 편히 잠들게 했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외교관’ 사명대사 아시나요?|동아일보 (donga.com)

 
입력 2007-09-12 03:01업데이트 2009-09-26 14:16
 
사명대사(1544∼1610·영정 사진)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호국 불교’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왔다. 하지만 사명대사의 참모습은 전쟁이 끝난 뒤 당시 일본 집권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회담을 통해 포로 송환 등 전후처리를 마무리 짓고 평화외교의 틀을 구축한 데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가 적지 않다.

사명당기념사업회(회장 오재희 전 주일대사)가 8일 일본 오사카(大阪) 민단본부 대회의장에서 개최한 국제심포지엄 ‘사명대사의 도일(渡日)과 전후처리 평화외교’(동북아역사재단 등 후원)는 한국과 일본 학자들이 사명대사의 업적과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자리였다. 참석자들은 사명대사의 평화외교 정신이 역사문제에서 마찰을 빚고 있는 두 나라의 화해를 앞당기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대 명예교수는 기조 강연에서 “사명대사는 결사항쟁의 결의에 투철한 의승장과 전후 강화협상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각오를 다진 외교관의 면모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며 “그의 주도면밀한 언행과 협상에 힘입어 조선 왕조와 도쿠가와 막부가 국교 회복에 합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중세 한일 문화교류의 꽃을 피운 조선통신사도 당시 선조의 특사로 일본을 찾은 사명대사의 협상력 덕택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송운(松雲)대사로 알려진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중에도 당시 일본 지휘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4차례 협상을 하고 왜군의 철수 조건 등을 협의했다. 조영록 동국대 명예교수는 “이 과정에서 일본 수뇌부의 한반도 분할 구상을 간파하고 왜군 내부의 이간책을 시도해 협상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오사카 부(府)와 오사카 시, 아사히신문 오사카본사가 후원하는 등 일본 사회가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일본에서 사명대사가 재조명되는 것은 전쟁으로 헝클어진 양국 관계를 정상화한 사명대사의 정신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게 사명당기념사업회 측의 설명이다.

오 회장은 “일본인들이 20세기에 한국을 강점한 역사는 비교적 잘 알지만 400여 년 전 조선을 침략한 데 대해서는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며 “사명대사 관련 사업을 통해 자연스럽게 임진왜란에 대해 역사 교육을 시키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사명당기념사업회는 1997년 발족된 이후 한국과 일본에 있는 사명대사의 유적지 및 자료 발굴과 서적 발간, 학술회의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오사카=박원재 기자 parkwj@donga.com

 

조선시대 불상제작 스님 942명 발굴|동아일보 (donga.com)

 
입력 2007-12-12 03:01업데이트 2009-09-26 01:04
 
조선시대에 불상을 제작한 스님들은 과연 몇 명이었을까.

이 흥미로운 질문에 답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 최선일 씨가 3년간의 조사 연구 끝에 최근 출간한 ‘조선후기 승장(僧匠) 인명사전’(양사재).

조선후기(1600∼1910년) 전국 사찰에 봉안할 불상을 제작하거나 불상을 수리 또는 개금(改金)한 승려 장인들의 명단을 최초로 밝혀낸 것이다. 최 씨는 불상의 발원문(發願文), 불화(佛畵)의 화기(畵記), 사찰의 사적기(寺蹟記)와 각종 비문 등 300여 건의 기록을 통해 승려 장인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렇게 확인한 승려 장인은 942명. 그들의 이름과 약력을 한데 모아 정리하고 승장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수화승(首畵僧)으로 활동한 118명을 별도로 표시해 놓았다. 수화승은 불상을 제작하는 승려들로 이뤄진 팀의 책임자를 말한다.

최 씨는 “15세기까지는 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16세기부터 조사했다”며 “이 연구 결과, 하나의 불상을 만드는 데 두세 명부터 예닐곱 명이 참여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책은 단순한 인명사전이 아니라 역사 속에 감춰졌던 승려 장인들을 찾아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불교미술 연구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兩宋의 글씨 조선혼 꿈틀|동아일보 (donga.com)

 
입력 2007-12-26 02:58업데이트 2009-09-25 23:23
 
서울 서예박물관 내년 2월까지 전시

17세기 조선 서예의 힘과 매력!

이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과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1606∼1672)이다.

평생 지기(知己)이던 이들은 당시 조선의 대표적 도학자(道學者)이고 북벌(北伐)을 주창한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또한 17세기 최고 서예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상은 두 송 씨의 서예를 놓고 양송체(兩宋體)라고 칭한다.

그 유명한 양송체의 서예는 어떠했을까. 한 시대를 풍미한 도학자에게 서예라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그 전모를 가까이에서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내년 2월 24일까지 열리는 ‘동춘당·우암-직필(直筆)’전. 두 사람의 각종 서예 작품을 비롯해 탁본과 문집, 송시열을 그린 초상화(얼굴), 송준길 송시열과 연관된 인물들의 서예 회화 등 모두 100여 점을 전시한다. 그동안 선보이지 않았던 미공개작도 다수 포함돼 있다.

송준길은 자질이 온후 순수하고 예법과 태도가 탁 트인 반면 송시열은 국상의 형식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논쟁을 벌인 예송(禮訟)논쟁 등 파란만장한 삶을 헤쳐 갔던 인물답게 매우 고집스럽고 매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세상은 송준길을 빙옥(氷玉)에, 송시열을 태산에 비유하곤 한다.

이들의 글씨엔 이 같은 각자의 성정(性情)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송준길의 글씨는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고 단정한 편이다. ‘陽氣發處(양기발처)’처럼 그 획이 자신감 넘치고 거침없으면서도 그 안엔 정제된 질서가 교묘히 숨어 있다.

이에 비해 송시열의 글씨는 좀 더 대담하고 자유분방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각고(刻苦)’라는 작품. 공부하는 제자들에게 당부의 뜻을 전하기 위해 써 준 글씨로, 크기가 164×82cm에 이른다. 장중하고 힘이 넘치는 획 하나하나에서 우암의 성향과 내면을 한눈에 읽어 낼 수 있다. “글씨는 곧 정신”이라는 옛말이 실감난다.

송시열을 그린 초상화 9점도 매력적이다. 대부분 노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유학자의 고집과 매서움이 얼굴에 그대로 배어난다. 하지만 송준길의 초상은 전하는 것이 없어 전시에 소개되지 못했다.

전시 기간에 일반인을 위한 특강이 마련된다. 내년 1월 12일 오후 2시엔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1월 19일 오후 2시엔 송시열의 후손인 송준호 연세대 명예교수, 2월 2일 오후 2시엔 예송논쟁 전공자인 오석원 성균관대 교수가 특강을 맡는다. 02-580-1284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조선 후기 학자·관료들의 백가쟁명 '國富증진 프로젝트' (daum.net)

입력 2007. 12. 7. 18:14수정 2007. 12. 7. 18:14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 / 한정주 지음 / 다산초당 발행ㆍ329쪽ㆍ1만3,000원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학문은 시대적 현상과 모순을 설명하고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유독 경제학만큼은 서양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르카르도의 '비교우위론'에 대해서는 한 마디씩 하면서도 정작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경제학자와 이론을 꼽으라고 하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곤 한다.

<조선을 구한 13인의 경제학자들>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그 명맥이 단절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와 그들의 이론을 복원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경제학이 봉건체제에서 근대경제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사회상을 설명하는 것처럼, 이 책은 17~18세기 조선 사회의 불치병이랄 수 있는 다양한 경제적 모순들을 몸소 겪으며 개혁하려 했던 13인의 경제학자들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큰 줄기는 토지공유와 경자유전(농사를 짓는 백성이 농지를 소유한다)의 이념아래 토지개혁을 통해 양반계층의 기득권을 없애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려는 이상을 가졌던 중농주의 학파와 오랑캐로 취급 받는 청의 문물을 수용해서라도 교역과 상업활동을 하는 것만이 부국강병의 길이라고 외쳤던 중상주의 학파들의 시대적 고민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을 딱딱한 경제ㆍ경영서로 취급하는 건 큰 오해다. 정작 저자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경제학자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이다. '왜 그들이 그런 이론을 펼칠 수 밖에 없었는지' 를 인물 중심의 스토리를 통해 전달하고 있어 역사소설을 읽는 박진감을 준다.

가령 조선 유일의 여성 실학자로 꼽히는 빙허각 이씨가 가문의 몰락으로 직접 생계를 꾸리다 보니 생활경제 백과사전격인 <규합총서>를 쓰게 됐다는 대목이나 <택리지>의 이중환이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 돼 방방곡곡을 떠돌 수 밖에 없었다는 대목은 저자의 꼼꼼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특히 이들 경제학자들이 벌이는 가상좌담회는 FTA를 둘러싼 작금의 논쟁과 너무도 닮아 있어 조선시대의 경제이론이 죽은 사상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숨쉬는 사상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준다. 또 체제공의 금난전권(시전상인의 독점권) 철폐나 수원 화성 건립 등은 최근 집중 조명 받고 있는 개혁 군주 정조와 관련된 부분들이라 색다른 재미를 준다.

안형영 기자 prometheus@hk.co.kr

 

 

 
◇ 베스트셀러의 저자들/노대환 신병주 외 지음/255쪽·1만 원·동녘

전설적인 승려이자 사회개혁가 도선의 예언을 담은 ‘도선비기’, 위대한 영웅의 출현에 대한 기대감이 담겨 있는 이규보의 ‘동명왕편’,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준 이지함의 ‘토정비결’, 새로운 글쓰기와 시대에 대한 통찰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개항기 신지식의 갈증을 풀어준 유길준의 ‘서유견문’.

모두 장구한 세월 동안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저작물이다. 저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 글을 썼고 이것들은 어떻게 해서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이 책을 읽으면 궁금증이 풀린다. 특히 저자들의 삶과 사상,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저작물의 의미와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게 된 배경을 흥미롭게 추적했다. 동양대 노대환 교수,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신병주 학예연구사 등 한국사 전공자 5명이 필자로 참여했다. 이 책은 ‘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의 첫 권으로, ‘이미 우리가 된 이방인들’도 함께 나왔다.

가장 관심이 가는 책은 ‘토정비결’. 지금도 수많은 ‘운명철학관’에 몇 권씩 비치돼 있고 연말연시에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이 책은 어쩌면 대한민국 최고의 베스트셀러일지도 모른다.

필자인 신병주 학예연구사는 먼저 우리가 잘 몰랐던 16세기 토정 이지함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한다. 이지함은 다양하고 개방적인 학문을 추구한 16세기의 지식인으로, 명예와 재물과 여색(女色)에 초연했으며 천문 지리 의학에 달통했다. 국제 무역을 주장했던 경제학자였고 백성들의 삶을 위해 팔도를 누빈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용하다고 필자는 강조한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이 책을 정말로 이지함이 지었을까’ 하는 신 연구사의 의문이다. 그는 이지함이 살았던 시대와 ‘토정비결’이 유행했던 시대의 차이를 근거로 이지함의 저작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8세기 이후에 이지함을 쏙 빼닮은 누군가가 이미 신화가 된 이지함의 이름을 빌려 ‘토정비결’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 연구사는 “이지함의 저작은 아니지만 이지함의 정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며 “그렇기에 불멸의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열하일기’와 박지원 이야기도 재미있다. 필자인 노대환 교수는 한낱 여행기에 불과한 ‘열하일기’가 어떻게 출판 당시부터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를 살펴봤다.

노 교수는 우선 독특한 제목이 큰 몫을 했다고 분석한다. 당시 중국 기행서는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을 다녀왔다는 의미에서 ‘연행록(燕行錄)’ ‘연행일기’라는 제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은 이전 사람들이 거의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 ‘열하’를 제목으로 내세워 눈길을 잡았다. 연암은 이처럼 관행을 벗어나 새로움을 추구했던 인물이었고 그 과감한 도전정신이 베스트셀러의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입력 :2007-11-24 00:00ㅣ 수정 : 2007-11-24 00:00 
“지조는 선비의 것이다. 장사꾼과 창녀에게 지조를 바랄 수 없듯, 선비와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장사꾼과 창녀에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조지훈,‘지조론’중에서)



청빈과 지조를 추구하는 선비정신을 본격 재조명하는 소설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올들어 최인호의 ‘유림’(전6권, 열림원 펴냄)과 한승원의 ‘추사’(전2권, 열림원 펴냄)에 이어 정찬주의 장편 ‘하늘의 도’(전3권, 뿔 펴냄)가 최근 출간됐다.

천민자본주의 공세에 밀려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선비정신이 새삼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머니(돈), 머니해도 머니’라는 천박한 세태어가 회자되는 요즘, 무엇이 아쉬워 ‘퇴물’ 취급을 받아온 선비정신이 다시 주목받고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일신의 안락을 좇아 변절을 밥 먹듯 하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풍조, 부정부패가 판치는 시대상황 때문일 것이다.

조선 선비의 표상 조광조(‘하늘의 도’)와 세도정치에 당당히 맞선 김정희(‘추사’), 겸양과 군자의 미덕을 가르쳐준 거유(巨儒) 이황(‘유림’)을 중심에 세운 소설들은 바로 이런 시대를 향해 준엄하게 꾸짖는다.

개혁 선봉 조광조의 삶 그려

장편 ‘하늘의 도’는 군자에 도달하기 위해 간단없이 학문에 정진한 옛 선비들의 모습과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곧은 절개를 생생히 담아낸다. 이야기를 이끄는 핵심은 조광조. 서른네살에 관직의 길로 들어선 그가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정치를 펴다 끝내 중종의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나는 굵직한 삶을 극적으로 그린다.

“순정한 마음으로 개혁의 씨를 뿌렸으니 뒷사람들이 반드시 열매를 거둘 것이오.”(조광조,3권 325쪽)

후세 사가들은 조광조를 당파 싸움 속에서 무리하게 개혁정치를 추구하다 실패한 정치가라든가, 조선 유교 사상을 주도한 선비의 정신적 지주가 된 사상가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연산군을 폐위시킨 훈구파들의 권력 농단에 맞서 개혁의 선봉에 선 조광조는 선비의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식·김정·박상·기준·양팽손 등 청류사림(淸流士林)들을 재조명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교훈 삼아 가르침 깨달아야

소설 ‘추사’는 비운의 생을 산 추사 김정희의 거대한 족적을 유려한 필치로 그려낸다. 말년의 삶을 중심으로 세도정치와 당당히 맞선 참 선비, 천재 예술가, 북학파의 선구자, 양반과 서얼 자식을 둔 고뇌하는 아버지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소설은 세도정치에 항거하다 유배길에 오른 추사가 모든 욕망을 버리고,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일에만 매진. 신필(神筆)의 경지에 이르는 삶을 가감없이 다룬다.

‘유림’은 2500년 유교 역사를 소설로 그려낸 한편의 대하 서사극. 유교의 비조 공자부터 완성자인 조선 퇴계에 이르는 유교의 본류를 시공을 뛰어넘어 21세기로 이끌어낸다. 소설에 등장하는 선비 가운데 특히 주목할 인물은 조선 유학을 완성한 퇴계 이황이다. 소설을 읽으며 이 불세출의 선비에게서 가르침을 얻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한 줄기 빛을 찾고 싶다.”는 작가 최인호의 말은 곧 우리의 심정을 대변한 말이 아닐까.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추사 김정희, 어떻게 조선 금석학 개창자 되었나 (brainmedia.co.kr)

[신간]'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

 
2015년 07월 30일 (목) 13:30
 
조선시대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을 연구한 책이 나왔다. 박철상 씨가 펴낸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추사 김정희의 금석학』(너머북스 간)은 조선시대 출판과 장서 문화, 간찰, 금석문, 연행 등의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으며, 『세한도』(2010) 『서재에 살다』(2014)를 출간하며 고수의 내공을 선보인 저자 박철상이 그의 20년 추사 김정희 공부의 독보적인 성과를 담은 책이다. 김정희가 쓴 대련 중에 “호고유시수단갈好古有時搜斷碣, 연경누일파음시硏經婁日罷吟詩”가 있다. “옛것을 좋아하여 때로는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고, 경전을 연구하느라 여러 날 시 읊기도 그만뒀다”는 뜻이다.  책 제목은 여기서 따왔다.   

 김정희를 빼놓고 19세기 학문과 예술 세계를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박철상은 "김정희 학문의 본령이 고증학이고, 금석학이 그 중심에 있었다. 금석학이야말로 추사체가 탄생한 까닭이자, 추사가 이룩한 최고의 업적"이라 하며 금석학을 통해 김정희를 보아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박철상의 김정희 연구에서 2002년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그 기폭제는 유홍준의 『완당평전』 출간과 김정희 금석학 연구 저작 『해동비고』의 발굴이었다. 200군데가 넘은 오류를 지적한 박철상의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논문은 당시에 큰 화제였다. “후지쓰카 지카시라는 일본 학자의 연구 성과는 유홍준의 연구 성과로 바뀌어 있었고, 고증 없는 서술로 일관되어 있었다.”라 평한 박철상의 문제의식은 김정희란 인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앞의 논문을 발표한 다음날, 절묘한 인연으로 인사동 고서점가에서 김정희의『해동비고』를 찾은 것이다. 『해동비고』는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이 글에서도 후술하겠지만 김정희 사후 150년 동안 이제까지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새로운 내용이었다. 저자는 『완당평전』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동비고』의 발굴에 이르기까지 누군가 김정희의 학문과 연구 세계로 잡아끄는 듯 했다고 소회한다.

 저자는 조선시대 금석학 자료들을 정리하며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조선 시대 금석문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시기에 따른 흐름을 살펴본다조선시대에 처음부터 금석학이 학문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서법 수련의 전범으로서, 그리고 감상의 대상으로 점차 발전하였다.  금석학이 학문으로  맹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북학파 지식인들이 금석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김정희 금석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금석학자로 영재 유득공에 주목한다. 유득공이 조선 금석학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한객건연집' '이십일도회고시' '발해고'등 유득공의 저작에는 언제나 고대사에 관한 깊은 이해가 깔려 있는데 그가 사료로 연구한 것은 금석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석문(釋文)을 작성하고 본격적으로 내용을 분석한 첫 번째 학자가 된 것이다.

 저자는 19세기를 '연행을 통한 북학의 시대’라는 배경을 펼쳐놓고 추사 김정희가 금석학자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김정희가 젊은 시절 연행을 갔다가 옹방강(翁方綱) 옹수곤(翁樹崐) 부자와 완원(阮元) 등 대가와 교유하는 장면은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이다. 옹방강은 청나라 고증학을 수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완원은 추사체 탄생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과의 교유는 김정희 금석학 탄생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옹수곤은 조선 학자들을 통해 조선 금석문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 중심에 김정희가 있었다. 김정희는 자신과 친분 있는 인물들이 연행 갈 때면 옹방강 부자에게 편지를 써서 소개해주었고, 옹방강 부자는 김정희를 통해 신분을 확인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문사들과 교유하게 된다. 김정희가 금석학을 학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옹수곤과 편지로 교유하면서부터였다. 옹수곤은 금석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의문점을 김정희에게 물었고, 김정희는 그 과정에서 금석문의 연구 방법론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1815년 옹수곤이 요절하자, 옹방강은 옹수곤의 금석학 연구 자료를 김정희에게 전달한다. 이것이 김정희의 금석학 성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아이가 대아(大雅, 김정희)의 정성스럽고 간절한 가르침과 사랑을 자주 받았으니 더욱 고마울 뿐입니다. 이 아이는 일찍부터 친구가 적었고, 오직 존형과의 우정을 일찍부터 마음으로 맹세한 바이니, 존형이 이 소식을 들으면 너무도 슬퍼할 것입니다.[...] 몇 년 동안 오형이 멀리서 보낸 고비(古碑)의 탁본들을 받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변석하면서 얻은 것이 꽤 있습니다. 그 아이는 또 모방(摹仿), 향탑(響搨), 구록, 전랍 등의 방법을 세밀한 데까지 파고들어 이 아이가 지은 금석문을 연구한 여러 건은 대아에게 한두 가지 자료가 될 만한 게 있을 것입니다."-(123~124쪽, 옹방강이 추사에게 옹수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 중에서)

이후 김정희는 본격적으로 조선 금석문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1816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다.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일은 탁본과 함께 중국에도 알려졌다. 김정희는 일약 조선 금석문 연구의 선두 주자가 되었고, 이후 김정희는 금석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817년 고적 답사를 위해 경주로 떠난다. 주요 목적은 금석문을 찾는 것이었다.

 김정희는 답사를 통해 우리 금석문 연구사에 획을 그을 만한 성과를 거둔다. 대표적으로 진흥왕릉과 다른 세 왕릉의 위치를 고증한 '진흥왕릉고' 와 '화정국사비' '문무왕비' '무장사비'등의 비석을 발굴하고 고증한 일이었다. 답사의 요체는 탁본과 책을 통해서만 보고 연구했던 내용을 실사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15일 여행은 그의 연구 업적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이후 한양에 돌아온 김정희는 금석학 연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김경연의 기록은 당시 김정희가 금석학 연구에 얼마나 몰두했었는지 알려준다. 이렇게 김정희는 명실상부한 조선 금석학의 개창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진흥왕릉' '화정국사비''문무왕비''무장사비'등 조선 역사상 최고의 비문들을 김정희가 발견하고 그 탁본들이 청나라로 전해지자, 청나라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인연을 맺기 위해 모든 인맥을 동원했다. 하지만 김정희는 그들 중 누구와도 쉽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연경의 친구들이 철저히 검증한 문사들과 선별적으로 교유할 뿐이었다. 조선 금석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청나라 문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선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저자 박철상은, 추사 김정희를 최근의 ‘연예 한류’에 비견할 만한 ‘학예의 조류(朝流)’를 만들어낸 한류 스타에 비견한다. 김정희의 한마디 한마디에 청조 문사들은 귀 기울였고, 김정희와 인연을 맺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예당금석과안록』의 서명에 문제를 제기한다. 『예당금석과안록』은 김정희의 대표 저서로 우리에게 인식되어왔다. 북한산과 황초령에 있던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 2종을 연구한 추사의 논문으로 일찍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왔고, 조선 금석학의 개창자로서 추사 김정희의 위치를 확인시켜준 명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철상은 『예당금석과안록』에  문제를 제기한다. 김정희 문집 『완당선생전집』에는 『예당금석과안록』이 실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대신 '진흥이비고'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확인해 보니 동일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예당금석과안록'은 "김정희가 본 금석문을 기록한 책"는 뜻인데, 저자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예당금석과안록』이라는 서명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낸다. 그 이유는 첫째, 진흥왕순수비 2기의 비석에 관한 논문을 싣고 과연 추사가 거창한 제목을 달았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석문만 있고 금문(金文)이 없으며, 셋째, 김정희는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기록을 남기면서 ‘금석과안록’이란 명칭 대신 ‘비고(碑攷)’(비석과 비문에 대한 고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처럼 치밀한 고증을 거친 저자의 주장은 『예당금석과안록』은 이 책을 처음 발견한 일본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예당금석과안록』에 수록된 글은 분명 추사의 저작이지만, 서명은 추사가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  박철상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예당금석과안록』에는 과연 어떤 이름이 붙어야 했을까? 김정희의 금석학 저작이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것뿐이었을까? 그렇다면 조선 금석학의 비조라는 명성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추사는 과연 진흥왕순수비 이외에는 연구한 금석문이 없었을까? 이런 의문에 해답을 준 김정희 금석학 연구 저작이 앞서 언급한『해동비고』의 출현이었다.

『해동비고』에는 「평백제비」「당유인원비」「경주문무왕비」「진주진감선사비」「문경지증대사비」「진경대사비」「경주무장사비」등 모두 7종의 비문에 관한 김정희의 연구 논문이 실려 있다.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금석학 연구서다. 이는 『예당금석과안록』(『진흥이비고』)에 수록된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논문 역시 『해동비고』에 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진흥이비고』가 『해동비고』에 실리지 못한 것은 1816년부터 시작된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연구 초고가 1834년에 이르러서야 완결되기 때문이다. 반면 『해동비고』에 실린 7편의 논문은 그 이전에 완성되었다.

저자는 박철상은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의 8장에서 ‘해동비고’의 주요 내용을 톺아보며 추사 금석학의 핵심을 간결히 드러낸다. 특히 '평백제비' '당유인원비'의 경우처럼 중국과 조선의 선행 연구 성과를 기초로 한 것도 있지만 '문무왕비' '무장사비'처럼 김정희가 직접 발굴하여 고증한 내용도 실려 있다. 여기에는 현재까지의 연구 내용을 재검토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항들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김정희는 '문무왕비'의 건립 연대를 687년으로 고증했다. 이는 유희해의 681년, 이마니시 류의 682년 등 기존 학설과 다른 결과이다. 또한 현재 학계의 통설인 682년 건립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 책의 저자 박철상은 김정희의 고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해동비고』는 한국 금석문 연구사의 이정표이자, 추사 금석학의 정수를 밝혀주는 저작이다.

한편 이 책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추사체의 정체란 그가 젊은 시절 그토록 몰두했던 금석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금석학이 역사와 경전의 고증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서법(書法)의 고증에서도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김정희가 비록 서법 고증에 관한 별도의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추사체’ 자체가 살아 있는 논문이자 그의 서법 고증 금석학 연구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김정희 말년 제자인 조면호(趙冕鎬)의 글을 통해 윤곽을 잡아 추사체가 김정희 서법 고증의 정수임을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에 부처 “내년이면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지 200년이 된다. 조선에 금석학이 태동한지 2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책이 김정희의 학예를 기리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 한다.

 글. 정유철 기자 npns@naver.com   사진. 너머북스.

 
 

 

조선 실학자 유수원을 아시나요 (hani.co.kr)

한영우 교수, 연구서 펴내…신분·상공업중심 개혁 주창

  • 수정 2007-10-17 19:28
  • 등록 2007-10-17 19:28

〈우서〉(迂書)는 18세기 초 조선 실학자 농암 유수원(1694~1755)이 지은 유일한 저서다. 책의 뜻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에둘러서 실제와는 거리가 먼 책’이라는 의미가 된다. 어떤 내용을 담았길래 지은이조차 실현 가능성에 고개를 흔들었을까?

원로 사학자인 한영우 한림대 특임교수가 이 책과 유수원을 본격 조명하는 연구서를 펴냈다. 〈꿈과 반역의 실학자-유수원〉(지식산업사).

성호 이익(1681~1763)과 함께 당대 대표적인 개혁사상가였던 농암은 〈우서〉에서 양반문벌 혁파와 상공업 중심 개혁을 강조한다.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사민(四民) 분업에 따른 신분개혁안을 제시했다. 토지 재분배에 몰두했던 성호와는 달리, 상공업 육성에 큰 관심을 보임으로써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북학파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게 한 교수의 평가다.

청각장애인이었던 농암은 백성이 가난한 근본 원인을 사·농·공·상의 직업적 전문화가 이뤄지지 못한 데서 찾았다. 유수원에게 진정한 사(士)는 “학교에 적을 두고 공부하는 학생”을 말한다. 하지만 학생이든 아니든 자칭 타칭으로 사로 불리는 ‘가칭 양반’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농·공·상은 군역의 부담까지 져야 하기 때문에 피해갈 묘수만 찾았다. 유수원은 송나라 이후부터 양인과 문벌사족의 구별이 없어진 중국을 신분개혁의 모델로 삼았다. 즉 양반과 양인을 신분상 동질화시키는 신분체제 개혁으로 사민체제의 안정을 꾀하자는 것이다.

농암은 또 국부민안을 위한 상공업 개혁론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소상인과 대상인이 자본 혹은 자본과 노동력의 형태로 결합하는 상업의 대형화와 협동화, 지방 상설시장과 도시 형성 그리고 임노동자층의 확대를 개혁안으로 제시했다. 농암은 영조 31년 62살에 소론 급진파의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 교수는 영조가 양반들에게 군역의 의무를 지운 군역법을 시행한 데는 〈우서〉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짐작한다면서 유수원 개혁 사상의 중심축을 이루는 관제·재정·부세 개혁안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강성만 기자

 

조선시대 생물대백과 사전 | 서울신문 (seoul.co.kr)

입력 :2007-08-17 00:00ㅣ 수정 : 2007-08-17 00:00 
‘시경(詩經)’은 기원전 11세기 서주 초기부터 기원전 6세기 동주 중기에 이르는 500년 동안 중국 북방 지역의 운문(韻文) 305편을 모은 일종의 노래책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사람이 ‘시경’을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마주보고 서 있는 것과 같다.”고 중요성을 역설했다. 제자들에게는 ‘시경’을 읽으면 “날짐승과 들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에서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多識於鳥獸草木之名)”고 충고했다.

실제로 ‘시경’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시에는 예외가 없을 만큼 온갖 동물과 식물의 이름이 언급돼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시경’을 공부하는 이들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동식물의 출현에 혼란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청대에 새로운 학풍으로 자리잡은 고증학은 공자의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 결과 ‘시경’에 나오는 물명(物名·사물의 이름)을 풀이한 연구서가 줄지어 나왔고, 이런 분위기는 조선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명다식(詩名多識)’(정학유 지음, 허경진·김형태 옮김, 한길사 펴냄)은 바로 ‘시경’에 등장하는 생물의 정체성을 규명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한 저술이다. 쉽게 말해, 시경에 이름이 나오는 동식물을 망라한 ‘생물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지은이 운포 정학유(1786∼1855)는 다산 정약용의 아들이다.‘시명다식’은 그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올곧게 이어받았음을 증명한다.

‘다식(多識)’은 제자들에 대한 공자의 충고에서 따왔다. 그러니 ‘시명다식’이란 ‘시경에 나오는 동식물의 이름에서 배울 수 있는 많은 지식’쯤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정학유는 주자의 ‘시전(詩傳)’을 비롯해 육기의 ‘모시초목조수충어소(毛詩草木獸蟲魚疏)’,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 곽박의 ‘이아주(爾雅注)’ 등 매우 다양한 자료를 인용했다. 본문은 식물 170종, 동물 156종 등 326가지 생물을 ▲풀(識草) ▲곡식(識穀) ▲나무(識木) ▲푸성귀(食菜) ▲날짐승(識鳥) ▲길짐승(識獸) ▲벌레(識蟲) ▲물고기(識魚)의 8개 항목으로 나눈 뒤 각각 이름을 제시하고 설명했다. 자료 사이에 혼란이 있을 때는 자신의 생각을 마지막에 적어 넣었다.3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지구 세계.’

 

요즘이야 세계화라는 말이 낯설지 않지만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빗장을 굳게 걸었던 120여 년 전 이미 이런 표현을 쓴 조선의 사상가가 있다. 개화기 대표적 정치가이자 조선 최초의 국비 유학생 유길준(1856∼1914)이었다.

이 표현은 유길준이 1895년 4월 1일 간행한 ‘서유견문’에 나온다. ‘서유견문’은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 등 서양의 근대 문명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이다. 모두 20편에 걸친 글에서 세계 지리, 나라의 권리, 국민 교육, 정부제도, 교육, 서양 학문의 내력, 문화와 풍속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선발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883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공부했고, 그때 유럽의 여러 나라를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 그는 1885년 귀국하자마자 갑신정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 박영효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돼 7년간 연금 상태에 묶였다. ‘서유견문’은 이때 완성됐다.

‘서유견문’은 단순한 서양 기행문이 아니다. 유길준은 보고 들은 서양의 근대 문물을 어떻게 받아들여 조선의 근대화를 완성할지 고민했다.

그는 당시 조선의 발을 묶었던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대체할 근대적 국가 관계를 꿈꿨다. 그는 ‘서유견문’에서 “커다란 나라도 한 나라이고 작은 나라도 한 나라다. 한 나라가 나라 되는 권리는 피차 동등하고 지위도 털끝만 한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조선이 작고 약해 중국에 조공을 바치더라도 근대적 정치체제에 따르면 세계 속 여러 주권 독립국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이 같은 정신을 바탕으로 조선중립론을 내세웠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 사이에서 중립을 인정받으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유길준은 서구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발전을 꾀하자는 생각으로 ‘서유견문’을 썼지만 무조건 나라를 여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 있는 개방을 강조했다. 다음의 말은 오늘날에도 되새길 만하다.

“개화를 주장하여 힘써 행하는 자는 개화의 주인이요, 개화를 선망하여 배우고 취하기를 즐겨하는 자는 개화의 빈객이요, 개화를 두려워하되 부득이 이에 따르는 자는 개화의 노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문화일보
  • 입력 2007-10-25 15:19
‘연애(戀愛)’란 말은 언제부터 쓰였을까. 서양의 ‘러브(Love)’에 해당하는 연애라는 말은 1912년 무렵 소설에서 처음 나온다. 매일신보에 연재된 조중환의 번안소설 ‘쌍옥루(雙玉淚)’에서 젊은 남녀의 연애를 ‘매우 신성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상협이 쓴 ‘눈물’에선 연애를 순결·신성 따위의 수식어와 함께 썼다. 1920년대 들어 연애라는 말은 젊은이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대중적인 말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한반도의 근대는 숱한 신조어 및 새로운 사회풍조와 함께 시작됐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의 실상을 전면적으로 재조명한 책 ‘근대를 보는 창 20’(최규진 엮음, 서해문집·사진)이 최근 출간됐다. 책에선 의식주에서부터 연애, 교육, 여성문제에 이르기까지 20가지 주제로 근대 한국의 생활상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이중 눈길을 끄는 대목을 소개한다.

◆ 서양 옷은 언제 들어왔나 = 우리나라 의생활에서 서양 복식을 처음 받아들인 것은 별기군이다. 1881년에 창설한 별기군은 신식 무기를 갖추고 근대식 훈련을 받으면서 복식도 서양식으로 바꿨다. 처음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으로 갔던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었다. 1884년 갑신 의제개혁, 1894년 갑오 의제개혁, 1895년 을미 의제개혁 등을 통해 군복과 관복 등에서 ‘거추장스러운 옷을 간편한 옷으로 바꾸도록’ 조치했다. 1900년에는 관리들의 관복을 양복으로 바꾸고, 일반인이 양복을 입는 것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1920년대가 되면 양복이 의생활 문화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며 차츰 일반인들에게 퍼져 간다. 이어 1930년대에는 유학생들이 들어오면서 양복이 크게 번졌다. 조선인 엘리트들은 두루마기 대신 양복에 스프링코트와 오버코트를 입었으며, 셔츠 넥타이 모자 구두 지팡이 회중시계 넥타이핀 등의 장신구를 갖췄다.

◆ 서양 음식이 밀려들어오다 = 개화기에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 음식은 차츰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독일 여성 손탁은 1902년 고종에게서 하사 받은 서울 중구 정동 땅에 2층 양옥을 지어 ‘손탁 호텔’을 열었다. 이곳이 서양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이 땅의 첫 레스토랑이었다. 그 뒤 충무로에 양식 전문점인 청목당이 들어섰다.

중국 음식점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중국 군인과 함께 중국 상인이 들어오면서 따라 들어왔다.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면서 1899년 무렵 화교들은 자장면을 기본으로 한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중국 음식점은 중국 사람이 많이 사는 서울 중구 북창동 일대를 비롯, 인천·평양 같은 곳에 많이 들어섰다. 일제 말기 조선에 사는 화교는 6만5000명이었고, 중국 음식점은 300개 남짓이었다.

음식 문화에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 가운데 화학조미료를 빼놓을 수 없다. 일제 시대 음식에 ‘감칠 맛’을 내는 아지노모토는 서구식 문화생활의 상징이 됐다. 서양 문명의 상징처럼 여겼던 커피는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 맛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커피는 왕족과 귀족 사이에서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

◆서양식 주거문화와 일본주택 = 개항 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외교 활동을 위한 공간을 짓고, 새로운 숙박시설인 호텔도 만들었다. 근대 교육제도를 도입하면서 옛 서당과는 다른 새로운 교육시설을 짓고, 교회·성당 등 종교시설을 세우면서 이와 관련된 건축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884년 인천에 세운 세창양행 사택은 독일인 회사의 숙소로 쓰려고 지은 집인데, 우리나라에 들어선 맨 처음 양옥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부산 인천과 같은 도시에서 일본인 비율이 늘면서 일본식 집도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항장에 일본식 주택이 들어서면서 일부 도시는 마치 일본의 작은 도시 같은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 들어온 일본인이 대부분 상인이어서 그들의 집은 상업을 겸한 주상복합 건물이 많았다.

1920년대 초반부터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 서구식 주택이 들어서면서 이를 문화주택이라고 불렀다. 홀을 중심으로 거실과 침실이 있는 방갈로식 문화주택은 잠깐 유행하고 말았지만, 1930년대엔 서양과 일본식, 재래식을 절충한 문화주택이 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박지원]

‘조선의 노마드’ 박지원 따라 중국유람 (hani.co.kr)

기자김경애
  • 수정 2019-10-19 11:23
  • 등록 2008-03-21 21:02
기이한 동물

〈세계 최고의 여행기-열하일기 상, 하〉
박지원 지음·고미숙·길진숙·김풍기 엮고 옮김

옮긴이들 “연암 읽히지 않는 건 죄악” 5년 걸쳐 ‘열하일기’ 알기 쉽게 편역삽화·현재 사진 덧붙여 사실감 더해

때는 1780년, 요즘 드라마 〈이산〉에서처럼 정조가 신난고초 끝에 왕위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해다.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 기골까지 장대했던 ‘당대의 천재’ 연암 박지원은 스스로 부도 명예도 버린 채, 울울한 심정으로 마흔두 살을 맞고 있었다. 정조를 옹위한 ‘일등공신’ 홍국영의 세도에 밀려 개성 부근의 연암골에서 은둔하고 있던 그에게 중원 대륙을 유람할 필생의 기회가 찾아왔다. 팔촌형이자 화평옹주(영조의 딸이자 화완옹주의 언니)의 부마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 황제의 만수절(70살 생일) 사절로 갈 때 비공식 수행원으로 따라가게 된 것이다. 그해 5월25일 떠나 10월27일 돌아오는, 장장 6개월의 대장정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애초 목적지인 수도 연경(북경)까지는 2300여 리, 연암 일행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벌을 지나 성경(심양), 산해관을 통과하기까지 한여름 무더위를 이겨내야 했고 변덕스런 일기 탓에 죽을 고비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그곳에 황제는 없었다. 여름 궁전인 열하의 ‘피서산장’에 머물고 있었던 것. 열하까지는 북동쪽으로 다시 700리길. 연암은 ‘형님의 빽’으로 온 까닭에 반드시 가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조선인으로서 첫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권유에 이끌려 합류한다. 서둘러 오라는 황제의 닦달에 일행은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무박나흘’ 만에 열하에 당도한다.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을 〈열하일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또 한 권의 〈열하일기〉가 나왔다. “조선 왕조 오백년을 통틀어서, 아니 동서고금의 여행기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선택하라면 이 책을 꼽을 것이다.” 2003년 리라이팅 북시리즈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펴내며 ‘열하일기 폐인이자 전령사’를 자처하고 있는 고미숙씨를 비롯한 옮긴이들은 당당히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는 수식어까지 내걸었다.

 

화려한 불꽃놀이

 

열하는 중국인들이 ‘천하의 두뇌’로 여긴 곳, 두뇌를 누르고 있으면 오랑캐인 몽골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셈이라 해서 황제들이 자주 머문 ‘제2의 황성’이었다. 몽골·위구르·티베트 등 변방의 이민족들, 코끼리·낙타 등 기이한 동물, 화려한 불꽃놀이와 연회, 요술 퍼레이드 등등 이질적인 문화의 도가니를 종횡무진 누빈 연암은 밤마다 관사를 몰래 빠져나와 한족 재야 선비들과 비밀 회합을 즐긴다. 중국말을 몰라 필담으로 나눈 고담준론을 통해 그는 천하의 형세, 주자학과 불교의 관계, 서학과 지동설 등등 신문물을 익혀 ‘북학파의 원조’로서 우뚝 서게 된다. 황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티베트 법왕 판첸라마를 친견하라는 명령에, 사신단이 조선의 국시인 성리학에 어긋난다며 ‘꼬장’ 부리다 6일 만에 쫓겨나지 않았다면 〈열하일기〉는 한층 풍성해졌을 것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선후배 사이인 옮긴이들이 ‘고문의 고루함을 비웃어 정조의 문체반정까지 낳은 장본인인 연암의 글이 읽히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며 쉬운 편역서를 내걸고 5년 꼬박 정성을 들인 만큼 책은 ‘친절한 편집’이 돋보인다. 이김천 화백의 시원한 삽화, 당시와 현재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실사 사진, 연암의 글대로 묘사한 갖가지 도해와 그림 등이 더해져 마치 연암과 함께 2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간 듯 실감을 안겨준다. ‘연암체’의 묘미를 최대한 살리고자 희곡 형식으로 처리한 중국인들과의 밤샘 필담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이질적 존재들의 시끌벅적한 향연을 즐긴 건 에피쿠로스를 닮았고,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우정의 정치학을 설파한 건 스피노자를 닮았으며, 웃음이야말로 삶과 사유의 동력임을 보여준 것은 니체를 닮았으며, ‘투창과 비수’의 아포리즘으로 통념의 기반을 가차 없이 뒤흔든 건 루쉰을 닮았구나!”

고미숙씨가 연암의 묘비명으로 바치고 싶다는 헌사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박지원은 진정한 자유정신, 노마드(유목민)였다’가 되겠다. 무엇보다 그가 연암을 통해 이 시대 청소년들에게 하고픈 얘기가 있다. “네 멋대로 좀 해라!”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벼락같은 문체… 연암은 조선의 셰익스피어|동아일보 (donga.com)

 
입력 2007-07-24 03:02업데이트 2009-09-26 21:34
 
누님의 상여

“그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의 검푸른빛이

누님 시집가는 날 쪽찐 머리

같았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그 뒤 나이 들어 우환과

가난을 늘 근심하다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형제와 함께 지낸 날은

어찌 그리도 짧은지.”

―‘큰누님 박씨 묘지명’ 중에서

닭 우는 소리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訴)를

제기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엄격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는 것 같고,

닭 우는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것을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비의 목소리 같았다.”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던 일을 적은 글’ 중에서

사마천의 마음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는

손가락을 ‘Y’(아)자 모양으로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

잡을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나비는 그만 싹

날아가 버리외다.

씩 웃고 나서 부끄럽기도 하고

분이 나기도 하나니,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이외다.”

―‘경지에게 보낸 답장 3’ 중에서》

“연암은 조선의 셰익스피어입니다.”

2002년부터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의 한문 산문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그 아름다움을 함께 알리는 작업에 주력하는 박희병(51·국문학) 서울대 교수의 지론이다.

어떤 이는 이 말에 무릎을 치겠지만 어떤 이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교과서에 실린 ‘열하일기’나 ‘허생전’을 통해 연암의 글을 조금씩은 읽어 봤다. 그러나 그 글을 읽으면서 미학적 희열을 맛본 이는 드물다. 과연 연암을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수 있을까.

“연암에 대한 학사 논문을 쓰면서 비로소 연암의 비범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한학의 대가인 우전 신호열(‘연압집’의 공동역자) 선생 밑에서 연암의 글을 배웠지만 너무 어려워 묘미를 깨치기 힘들었습니다. 연암의 글은 한자의 미묘한 의미를 고도로 압축해 사용하기 때문에 한학 전공자에게도 난해하기 그지없습니다.”

박 교수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2002년부터 5년째 10여 명의 제자와 함께 연암의 글을 한 땀 한 땀 단아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해 왔다.

“상을 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매주 수요일 저녁에 모여 연암 강독회를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명절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첫 성과물이 지난해 박 교수의 이름으로 출간된 ‘연암을 읽는다’였다. 이 책은 연암의 산문 소품 중에서 22편을 골라내 한문 원문에 그에 대한 섬세한 한글 번역과 꼼꼼한 주, 그리고 저자의 풍부한 비평을 곁들인 독특한 책이었다.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가 떠나는 새벽 산과 강물, 초승달의 풍광에서 시집가던 날 누님의 쪽 찐 머리, 거울, 눈썹을 포착하는 심물합일(心物合一)의 상상력. 대나무에 미친 양호맹(梁浩孟)이란 사내의 풍모에서 거꾸로 대나무의 형상을 읽어내는 역발상. ‘사기’를 쓸 때 사마천의 심정을 간발의 차로 나비를 놓친 동심으로 형상화한 절묘한 묘사력….

이 책은 연암 문학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암의 글을 그대로 영역하면 그 미묘한 아름다움을 전할 수 없기에 ‘연암을 읽는다’를 통째로 번역해야 한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그 박 교수가 이번엔 ‘연암을 읽는다’에 실린 산문 22편의 번역문과 이를 대조할 수 있도록 기존 번역문 일체 그리고 조선시대 문인들의 비평문까지 집대성한 ‘연암산문정독’을 펴냈다. 이번엔 개인적 비평을 빼고 후학 6명과 공동명의로 냈다. 왜 비슷한 책 2권을 별도로 출간한 것일까.

“연암의 글에는 대중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사유의 심오함과 예술적 심미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걸 쉽게 풀어내기 위해선 탄탄한 학문적 엄밀성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적인 ‘연암을 읽는다’와 학술적인 ‘연암산문정독’을 나란히 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박 교수는 소설을 포함해 100여 편의 연암 산문의 정수를 대중판과 학술판으로 나눠 2010년까지 각각 5권으로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하겠다고 밝혔다.

“연암의 글을 대중화하려는 것은 그를 통해 오늘날 삭막해진 우리 심성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암의 글에는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친화적 감수성이 있고 현대인의 단순한 사고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사유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박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구 사양해 왔다. 학자가 명성을 탐해선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자들과 함께한 연구의 성과를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에 밀려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을 찾아온 기자를 맞이했고 끈질긴 설득 끝에 사진 촬영도 허락했다. 깡마르면서도 꼿꼿하고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유연한 그의 풍모를 카메라에 담으며 대나무에 대한 글은 결코 쓰지 않겠다던 연암이 대나무를 닮은 그 풍모에 반해 글을 지어 줬다는 양호맹이 떠올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정약용]

18년간 경·문집 500권 쏟아낸 다산의 ‘다산’ 비결 (hani.co.kr)

틈만 나면 정리…카드작업·교정·제본·필사인력 풀가동

  • 수정 2019-10-20 17:20
  • 등록 2006-11-30 23:30
김영사 펴냄. 2만5000원

 

소학보전, 삼창고훈, 이아술, 기해방례변, 아학편훈의, 주역사전, 단궁잠오, 상례외편, 예의문답, 제례고정, 다산문답, 가례작의, 상례사전, 시경강의, 시경강의보, 상서고훈수략, 매씨서평, 소학주천, 아방강역고, 상서지원록, 민보의, 춘추고징, 역학서언,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공의, 중용자잠, 중용강의보, 대동수경, 소학지언, 심경밀험, 악서고존, 상의절요, 경세유표, 목민심서, 국조전례고.

강진유배기(1801~1818)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저술·편집한 서목이다. 경집 232권, 문집 260여권. 한해 평균 두 가지의 책을 지은 셈이다. 그저 베껴쓰는데도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이란다.

그저 베껴쓰는데만 수십 년 걸릴 일…1년에 동시에 아홉 가지 작업하기

거기다가 한 가지 책을 두고 적게는 1년, 길게는 10년간 씨름했음을 감안하면 동시에 대여섯 가지 작업을 병행했음을 알 수 있다. 1810년에는 무려 아홉 가지를 동시에 진행해 마무리했다.(464~465, 56쪽) 조선 후기 학술계의 기적으로까지 일컫는 이러한 작업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낮에는 구름 그림자와 하늘빛, 밤에는 벌레소리와 대바람소리만 들리는 유배지 생활이어서였을까?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은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한시미학산책>,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꽃들의 웃음판>, <초월의 상상>,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내가 사랑하는 삶>, <죽비소리>, <돌위에 새긴 생각>,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글쟁이 정민 교수 다산 지식경영법 원용해 분석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경집 232권

 

1996년부터 10년에 걸쳐 11권의 책을 써낸 한양대 정민 교수(국문과)가 다산의 지식경영법을 원용하여 다산의 각종 저술을 분석함으로써 정리해낸 공부법이 10강 50목 200결이다. 2005년 8월부터 딱 1년동안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도서관에 머물면서 다산과 씨름한 결과다. 유배와 진배없는 시간, 다산처럼 복사뼈에 세번 구멍이 나지는 않았을 테지만 다산의 고통이 어떠했으리라는 상상은 충분했으리라.

지은이의 학교 연구실에는 둥그런 의료차트 보관대가 있다. 수백 개의 차트를 꽂아두고 빙빙 돌려가면서 꺼내볼 수 있게 돼 있다. 차트집 하나가 책 한 권의 기획안 모양을 갖추면 여기에 꽂아놓고 추가할 것이 있을 때마다 꺼내서 보충한다. 그가 ‘씨앗창고’라고 부르는 보관대는 이미 수백개 파일로 가득 차 있다. (18도, 한국의 글쟁이 ⑫ 정민)

지은이가 귀띔하는 이 책 저술과정. <다산시문집>(민족문화추진회) 9책을 몇 차례 통독하다가 떠오른 메모를 책상 앞에 따로 붙여두었다. 정보를 조직화한다, 겉만 보지 않고 의미화한다, 집체작업으로 시간을 효율화한다 등 9개 항목이다. 카드작업을 계속하면서 문목의 대강을 세웠다. 요긴한 대목을 발췌해서 초록했다. 1차 초서작업이 끝난 뒤 항목들을 재배열했다. 항목별 집필 과정에서 관련 내용이 많고적음에 따라 덜고 더하는 작업을 하고 문목을 변경하거나 추가하기도 했다.(145~147쪽)

한 수레 넘치는 보고서, 정조 명 받고 도표 1장으로 딱!

지은이가 다산시문집에서 다산의 지식경영법을 읽어낸 것은 다산이 <서경>이라는 텍스트를 고대의 인사고과와 논공행상하던 자취를 정리한 책으로 이해한 것과 흡사하다.

지은이가 초록한 카드에는 이런 내용도 분명 들어있을 테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립에 착수한 뒤 수원, 광주, 용인, 과천, 남양 등 여덟 고을에 명해 나무를 지속적으로 심도록 했다. 1789~1795년 7년동안 여덟 고을에서 나무를 심을 때마다 보고문이 계속 올라와 수레에 가득 싣고도 남을 지경이 됐다.

서류가 하도 많고 복잡해서 어느 고을이 무슨 나무를 심었는지 알 수가 없고 심은 나무의 총수도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정조의 명에 따라 다산은 그 자료를 정리하고 파악하는 작업을 했다. 가로는 한해 열두 달 열두 칸, 세로는 여덟 고을 여덟 칸의 도표를 만들어 칸마다 그 수량을 적었다.

도표아래 나무 종류별 그루수를 따로 적었다. 이렇게 총수를 헤아려보니 소나무와 상수리 나무 등 나무가 모두 12,009,772그루였다. 결과를 보고받고 정조는 입이 딱 벌어졌다. 소 한마리가 땀을 흘릴 만한 분량을 한 장의 도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올라온 것이다. 지은이는 다산식 지식경영이 거둔 성과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고 말한다.(125~127쪽)

초고 정리 뒤 초본 만들고 수정 첨삭 거듭해 중간본 거쳐 최종본으로

다산은 끊임없이 초서하고 틈만 나면 정리했다. 열흘쯤에 한번씩 집안에 쌓여있는 서찰을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 만한 것이 있거든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워버리고, 덜한 것은 노를 꼬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표지로 만들어 정신을 산뜻하게 해야한다고 말한다.(461쪽)

다산은 초고를 쓰면 빈 공책에 정리해서 초본을 만들었다. 그 초본에 수정과 첨삭을 거듭해 잘못된 것은 지우고 새로운 생각은 여백에 채워넣고 그래도 부족하면 별지를 붙였다. 너무 어지러워 지저분해지면 중간본을 만든다. 그러고 나서도 계속 질정하고 수렴해서 최종본을 만든다. <주역심전> <마과회통>은 다섯번 고쳐 초고본을 완성했다.(196쪽)

문집 260여권을 집필한 다산 정약용. 그 왕성한 생산성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외부와 절연된 유배지라는 특수성이나 복사뼈가 세번 구멍이 났다는 끈기 등의 대답으로 만족하지 못한 정민 교수가 다산시문집을 중심으로 다산의 내밀한 지식경영법을 재구해냈다. 사진은 다산의 산실이었던 다산초당. 김영사 제공


다산의 다작에는 또 다른 비밀이 있다. 다산초당은 일년내내 풀가동됐다. 제자들은 역량에 따라 카드작업을 하는 사람, 베껴쓰는 사람, 교정보는 사람, 제본하는 사람 등으로 역할을 나눠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했다. 작업목표가 정해지면 가장 먼저 관련정보를 수집하고 정보가 모이며 각각의 정보를 교차대조했다. 정보의 우열과 정오를 판단하고 스승이 내려준 구체적이고 상세한 지침에 따라 분량을 나눠 작업했다. 일단 이들의 1차작업이 끝나면 다산이 이를 총괄하여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잘못된 곳을 수정 검토했다.(430~431쪽)

다산이 살아돌아와 봤다면 “어, 나하고 비슷하네” 할 판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에서 다산을 정민으로 대체해 제목을 삼아도 무방할 만큼 다산과 정민은 뒤섞여 일체화돼 있다. 다만, 30권30책으로 남은 이익의 <성호사설>을 두고 자신이 정리하면 7~8책이면 충분하다고 말한 다산이 살아와 후학이 정리한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을 보면 “엇비슷해 구별되지 않는 항목이 눈에 띈다”는 말을 하지는 않을까.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두물머리에 흐르는 '인간 다산'의 향기 (daum.net)

입력 2017. 3. 18. 03:36
 
<3>남양주 마재 정약용 유적 기행

[서울신문]다산 정약용(그림·1762~1836)은 강진 유배 10년째를 맞은 1810년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당부하는 말을 적어 보낸다. 부인 홍씨가 보내온 치마를 자른 천에 가르침을 적은 ‘하피첩’(霞?帖)이다. 자식들을 곁에서 이끌어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두 아들은 그동안 28세, 25세로 장성했고 장손 대림도 태어났다.

수종사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 오른쪽 멀리 반도처럼 내민 마재가 보인다. 수종사는 다산 형제가 일찍부터 성리학을 바탕으로 유불선(儒佛仙)을 탐구하던 곳이다. 다산은 강진 유배 시절에도 그 시절 꿈이 어린 수종사를 몹시 그리워했다고 한다.

‘하피첩’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 따르면 서첩에 쓰인 비단에는 바느질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3첩 가운데 한 첩은 모두 비단을 썼지만, 나머지는 비단과 종이를 섞어 썼다. 두 첩에 을(乙)과 정(丁)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으니 애초 4첩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태종 17년(1417) 전라도의 도강(道康)현과 탐진(耽津)현을 통합했다. 강진(康津)이라는 땅이름은 짐작처럼 두 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그럼에도 치소(治所)가 자리잡고 있던 고을은 여전히 탐진으로 불렀다. 다산이 강진이 아니라 탐진이라고 하는 이유다.

 

“내가 탐진에 유배 중인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쳤다. 시집 올 때 입었던 결혼 예복이다. 홍색은 바래고 황색도 옅어져서, 서첩으로 만들기에 꼭 맞다. 재단하여 작은 첩을 만들어, 경계하는 말을 붓 가는 대로 써서 두 아들에게 물려준다.…‘하피첩’이라고 한 것은 ‘붉은 치마’(紅裙)라는 말을 숨기고 바꾼 것이다’

‘하피첩’의 머리글이다. 하피란 어깨에 두르는 일종의 겉옷이라고 한다. 부인 홍씨가 혼인 때 입었던 치마를 보낸 것을 두고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남편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다짐이라는 해석이 많지만, “초심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겼다는 주장도 있다. 객지에서 한눈팔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라는 것이다.

정작 다산은 그렇게 ‘깊은 뜻’을 부여하지는 않은 듯하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사제의 연을 맺은 시골 아전 황상에게 건넨 서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은 1814년 28조각의 천에 가르침을 적어 애제자에서 보냈는데 크기도, 빛이 바랜 정도도 모두 제각각이었다고 한다.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을 유배지의 다산은 부인의 치마, 자신의 낡은 옷자락을 잘라 종이 대신 썼던 것 같다. 빛바랜 천에 쓴 글은 사정을 이해하고도 남을 가족이나 제자에게만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하피첩’을 넘기면서 ‘서울을 떠나지 말라’는 글에 눈길이 갔다. “중국은 문명이 훌륭한 풍속을 이루어 궁벽한 시골에서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데 장애가 없지만, 우리는 도성에서 수십리만 떨어져도 인간의 법도에 눈뜨지 못한 동네”라고 했다. 그러니 벼슬이 끊어지면 바로 서울에 살 곳을 정하여 세련된 문화적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그림·1762~1836)

 

다산은 자식들에게 “지금은 너희를 물러나 살게 하고 있지만, 훗날 계획은 도성 십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왕십리(往十里)라는 서울 동대문 밖 땅이름도 혹시 옛사람의 이런 인식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다산은 그러면서도 “고가(古家)와 세족(世族)은 저마다 상류의 명승을 점거하고 있다”며 옛 터전을 굳게 지키라고 당부했다.

마현(馬峴), 곧 마재는 다산이 태어나 살던 곳이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류한 한강이 마재에 이르면 다시 용인과 광주에서 흘러드는 소내와 만난다. 소내 혹은 우천(牛川)은 이제 경안천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다. 마재에서 육로로는 도성까지 하루가 넘지만, 뱃길로는 순식간이다. 다산의 인식처럼 ‘한다 하는 집안’들이 한강 상류에 터를 잡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여유당(與猶堂) 편액.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노자의 말에서 따왔다.

 

마현의 지명 유래는 정약용이 ‘다산시문집‘에 자세히 적어 놓았다. 마을 어르신 사이에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산천의 정기를 누르고자 쇠말(鐵馬)을 만들어 묻어 놓았고, 이후 주민들이 콩과 보리를 삶아 제사를 지내 마현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런 구전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왜구가 산천의 정기를 누른 것을 알았으면 뽑아내 폐기하거나 식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정상인데 하물며 제사를 지내느냐는 것이다.

지금 철마산(鐵馬山)은 마재 북쪽으로 20㎞도 넘게 떨어져 있다. 다산이 언급한 철마산은 멀지 않은 예빈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팔당댐은 북쪽의 예빈산과 강 건너 남쪽의 검단산 자락을 가로질러 막은 것이다. 이웃마을에 역참(驛站)이 있어 말이 넘어다니던 고개여서 마재라 이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다산설(說)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다산유적지의 실학박물관. 마침 ‘하피첩의 귀향’ 특별기획전이 26일까지 열리고 있다.

 

다산의 집안 시조는 고려 유민으로 조선 개국 이래 황해도 배천에 은거한 정윤종이다. 나주 정씨 집안에서 벼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다산의 12대조인 정자급부터인데, 이후 9대가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대과(大科)라는 별칭처럼 고급관리를 뽑는 시험이다. 그런데 서울을 중심으로 기반을 쌓아가던 나주 정씨는 정쟁이 치열해지면서 숙종 무렵 뿔뿔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섰다. 정시윤이 마재에 정착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다산은 5대조인 정시윤의 마재 정착 과정을 역시 ‘시문집’에 남겼다. ‘공은 만년에 소내 북쪽에 오래 머물러 살 곳을 찾아 초가 몇 칸을 짓고 임청정(臨淸亭)이라 이름했다.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소요하고 한가히 지내며, 깨끗한 마음을 지켜 당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임청정기’(臨淸亭記)에는 ‘공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동쪽에는 큰아들이, 서쪽에는 둘째 아들이 살고, 막내에게는 이 정자를 주었다. 유산(酉山) 아래 조그마한 집을 지어 측실에서 낳은 자제를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산 아래 집은 훗날 여유당(與猶堂)으로 불리는 다산의 집이 됐고, 유산은 그의 무덤이 됐다.

마재성지의 한복 입은 성모마리아.

 

마재에 가 보면 다산의 설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산 유적지는 오늘날 그의 위상만큼이나 매우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넓게 둘러친 담장 안에 무덤과 살던 집, 사당인 문도사(文度祠)와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이 규모 있게 배치된 모습이다. 문도는 다산의 시호(諡號)다. 다산 유적 앞에는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실학박물관이 보인다. 물론 한 사람을 위한 박물관은 아니지만 다산이라는 인물의 상징성 때문에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산유적 기행은 마을 서쪽의 마재성지(聖地)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마재 정씨 집안의 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 가운데 약현을 제외한 3형제는 천주학에 깊이 공감했다. 정약종은 아우구스티노, 정약용은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신유박해 당시 정약종과 부인 유조이, 큰아들 철상, 작은아들 하상, 딸 정혜는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다. 정약전이 흑산도,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것도 이 때문이다. 천주교는 정씨 형제의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정씨 형제는 또 한국 천주교 역사에 진한 흔적을 남겼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경쟁사회’ 다산과 신작을 돌아보라 (hani.co.kr)

  • 수정 2007-12-07 17:43
  • 등록 2007-12-07 17:43
강명관의 고금변증설

고금변증설 /

청의 고증학은 18세기 후반 조선학계에 전해진다. 고증학은 ‘이’ ‘기’ ‘심’ ‘성’ 등 극도로 추상적인 관념어를 조작하는 성리학에 대한 일대 반격이었다. 고증학은 구체적인 언어를 다룸으로써, 텍스트와 사실의 진위를 판정하려 하였다. 조선학계는 충격을 받았고, 고증학적 연구방법이 일시에 유행했다. 무오류의 성현의 말씀으로 여겨졌던 사서오경 역시 진위의 심판대에 올랐다.

조선의 고증학은 곧 성과를 낳는다. 하지만 여기서 모두 말할 수는 없고, 단지 두 분의 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알다시피 1801년 해남으로 귀양을 가고, 1808년 강진의 초당(곧 답사객들이 즐겨 찾는 다산초당)으로 옮긴다. 여기서 그의 학문이 찬란하게 개화한다. 다산의 학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지만, 중심은 역시 경학이다. 다산의 경학 중 단연 손꼽히는 성과는 <서경>의 진위를 논한 <매씨서평>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오자 그의 저술이 서울 학계에 읽혔던 모양이다.

이 시기 정계와 학계의 정점에 있었던 홍석주가 <매씨서평>을 읽어보니 탁월한 업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청의 염약거(1636-1704)가 저술한 <상서고문소증>은 <서경>의 절반이 위작이라는 것을 논증한 고증학적 저술이다. <서경>의 고증학적 연구를 촉발시킨, 빼어난 저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이 책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홍석주는 다산에게 책을 보낸다. 읽어보니, 자신의 주장은 이미 염약거가 다 말한 것이 아닌가. 순간 절망했지만, 다산이 또 누군가. 다시 마음을 챙겨 <상서고문소증>을 꼼꼼히 검토한 뒤 자신의 저작에 수렴하여 1834년 드디어 <매씨서평> 완성본을 내놓는다. <서경>의 25편이 가짜일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1783년 연구를 시작한 이래, 52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또 소개할 분은 신작이다. 다산이 <서경>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신작은 <시경>을 대상으로 삼았다. <시경> 역시 온갖 주장과 학설이 난무하는 텍스트다. 신작은 그 무수한 주장과 학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제시한 저술 <시차고>를 내놓는다. <매씨서평>에서 다산이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면, <시차고>에서 신작은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지 않고 각종 주장과 학설을 요령 있게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역시 중요한 저술 형태다. 자, 여기에 서로 대립하거나, 유사한 학설들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독자가 읽어보고 판단하시라. 신작 역시 엄밀한 고증학적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조선 고증학의 두 대가인 다산은 ‘매씨서평’을 52년만에, 신작은 ‘시차고’를 28년만에 완성했다. 이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의 최고로 평가받았다. 얼마 전 유명대학의 총장이 교수들을 상대로 1,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으라고 하자 매스컴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타율적 강제로 이뤄지는 경쟁은 단기간의 성과는 있겠으나 다산과 신작처럼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힘들 터다.

신작의 고심참담한 저술은 어느 날 발생한 화재로 한 줌 재가 되고 말았다. <시차고>는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 목적을 상실한 삶은 곧 넋이 나간 삶이다. 사람들은 신작을 보고 넋이 달아난 껍데기 인간이라 불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으랴. 다산을 순간 절망케 한 것이 <상서고문소증>이었다면, 신작을 절망시킨 것은 화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산이 다시 시작했던 것처럼 신작 역시 다시 시작한다.

요즘이야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온갖 자료를 책상에 앉아 검색할 수 있고 따올 수 있지만, 다산과 신작의 시대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도서관이라야 궁궐 속의 규장각, 홍문관뿐이다. 민간의 학자는 집안의 서적을 이용하거나, 북경(베이징)에서 구입하거나, 수소문하여 빌려야 한다. 또 일일이 손으로 자료를 베낀다. 원고가 완성되어도 복사기가 없으니, 다시 손으로 베껴 부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특히 고증학은 대량의 자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자료를 구득하고 해독하고 정리하고 저작하는 과정은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고된 노동이다. 그 노동을 신작은 두 번 거쳤던 것이다. 신작이 <시차고>의 저술에 착수한 것은 28살(1787) 때였고, 1차 완성본이 소실된 것은 39살(1798) 때였다. 마음을 추슬러 최종 원고를 완성한 것은 55살(1814) 때다. 시작부터 완성까지 28년이 걸린 것이다. 다산과 신작의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이 저작들로 인해 동아시아 학계의 주류에서 조선은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유명한 대학의 총장님이 자기 대학의 승진 심사의 엄격함을 말하면서 1, 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지 않으면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날 것이라 말하자, 신문과 방송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 총장님과 매스컴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한 마디 ‘경쟁’이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하지만 경쟁이 만사는 아니다.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협동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또 단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고, 장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경쟁이 필요하다면, 그 경쟁의 공정성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또 경쟁의 결과 승자가 얼마를 차지하는가, 혹은 패자는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반드시 논의되고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한데 우리 사회에는 그런 논의 과정이 전무하다. 오직 ‘경쟁’이란 말만 있을 뿐이다. 특히 그 문제를 따져야 할 대학에서조차 대학 안팎의 관료들이 강요하는 경쟁의 논리만 횡행할 뿐이다. 타율적 강제로 이루어지는 경쟁은 짧은 기간 동안은 분명 성과를 낼 것이다. 하지만 다산과 신작의 연구처럼 장기간에 걸쳐 학문적 난제에 답을 찾는,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어려울 것이다. 슬픈 일이다. 덧붙여 하나만 물어보자.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까지 만사가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우리는 왜 경쟁의 일방적 강요에 대해 한 마디도 못하는 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인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단독]"조선판 국방백서 '비어고' 실제 저자는 정약용"

입력 2017. 9. 15. 03:01수정 2017. 9. 15. 10:59
 
정민 한양대 교수 논문서 주장

[동아일보]

그동안 조선 후기 무신이었던 이중협과 정주응이 쓴 것으로 각각 알려졌던 ‘비어고’(위 사진)와 ‘미산총서’. 하지만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두 저서 모두 실제 저자는 다산일 수밖에 없는 흔적이 다수 발견됐다”며 “조선판 ‘국방백서’에 해당할 만큼 국방 관련 내용이 총망라돼 있다”고 말했다. 정민 한양대 교수 제공
“무사라면 비어고를 읽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무과시험에서 비어고의 한 대목을 뽑아 조목조목 대답하게 해야 한다.”(경세유표·經世遺表 중)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저서 ‘경세유표’에는 이 같은 내용이 나온다. 다산은 이 책에서 “비어고는 내가 쓴 책이다. 동방의 전쟁을 모아서 한 책으로 만들고, 관방(關防·국경의 요새)과 기용(器用·무기 사용법)에 관한 여러 주장을 살폈으며, 군사제도의 연혁을 밝혔다”고 덧붙였다.

비어고(備禦考)는 방비(사전대비)와 방어에 관한 책이란 뜻으로,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전쟁사와 실제 전쟁에서 수행할 병력 운용·군수 보급 방법 등이 자세하게 수록돼 ‘조선판 국방백서’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다산의 언급과 달리 ‘비어고’에는 그의 친구이자 조선 후기 하급 무관이었던 이중협이 저자로 표기돼 있어 논란이 됐다.

최근 ‘비어고’의 실제 저자가 다산임을 입증하는 연구가 나왔다. 또 다산의 제자였던 정주응의 ‘미산총서’도 ‘비어고’의 일부분이라는 내용도 함께 제기됐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사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 ‘다산 비어고의 행방’을 15일 열리는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정 교수는 “학문적 성과가 뛰어나지 않은 이중협과 정주응의 저서로만 알려져 있어 그동안 학계에선 관련 연구가 거의 없었다”며 “두 저서에선 다산이 저자일 수밖에 없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밝혔다.

실제 ‘비어고’를 보면 송풍암(松風菴)이라는 저자가 편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송풍암은 다산이 자주 사용한 별칭 중의 하나였다. 정 교수는 “이중협은 다산이 전남 강진에 유배됐을 당시 자주 찾아올 정도로 막역했던 동갑내기 친구”라며 “책에 군사기밀을 다룬 내용이 많아 유배를 겪었던 다산이 현직 무관인 친구의 이름으로 책을 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미산총서에는 다산의 흔적이 더욱 짙다. 이 책에는 “관련 자료는 내 외가의 서고 속에서 얻은 내용이다. 외가는 해남에 있는데 5대 외조부의 휘가 윤선도이고, 호는 고산이다”라고 적혀 있다. 다산과 윤선도는 이종 친척 관계다. 또 다산의 18제자 중 수제자로 꼽히는 이강회와 이정의 안설(해설)이 곳곳에 달려 있다. 정 교수는 “미산총서를 정주응이 썼다면 불과 14세 때 이처럼 방대한 국방 관련 책을 썼다는 뜻인데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책에는 전국의 400여 개 산성의 특성과 전쟁 시 공격·수비에 적합한 무기 목록 등 각종 국방 매뉴얼이 담겨 있다. 특히 중국(여진·청나라)과 일본은 각 나라의 풍속과 음식 문화 등 실생활과 관련한 내용까지 빼곡히 기록해 적의 상황을 미리 파악하려고 했던 의도도 엿보인다. 정 교수는 “한중일 역사 분쟁은 유사 이래 계속돼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방어와 방책이 가장 중요하다고 다산은 바라봤다”라며 “다산의 비어고에 대한 후속 연구가 심도 깊게 이뤄진다면 동아시아 안보위기를 겪는 현재에 큰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강진=권경안 기자
입력 2007.10.27. 00:26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현 동문밖 주막집. 강진으로 유배온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을 받아주는 집은 없었다. 그나마 그를 받아준 사람이 주막집 노파였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글로 남겼다. ‘흩날리는 눈처럼 북풍에 날리어, 남으로 강진 땅 주막집에 밀려왔네…수심 많으니 밤마다 술만 느는구나.’

그 노파는 당대 학문의 최고봉인 다산에게 물었다. “부모의 은혜는 다 같지만 어머니는 더욱 노고가 많은데, 어머니를 왜 가볍게 여겨,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하는가.” 다산은 옛 책에 따라 추상적으로 답변하고 나서, 크게 깨달은 바 있었다. 다산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깨닫고 두려워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일었다’고 글을 남겼다.

그 주막집이 26일 옛 모습대로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동문샘 옆)에 복원됐다. 사의재(四宜齋). 동문 밖 노파가 다산이 묵을 수 있도록 내준 집이었다. 그 집은 다산이 강진유배시절 초기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묵직해야 하는 동작’ 등 선비가 마땅히 해야 할 4가지 뜻(四宜之齋)으로 이름 짓고 강진의 학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강진군은 6억4000만원을 들여 주막채와 사의재, 바깥채, 초정(草亭) 등을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군은 또 1950년대 후반 기와로 복원돼 원형을 잃은 다산초당(茶山草堂)도 옛모습으로 다시 세우기로 했다.

 

 

[실학]

경기일보입력 2023. 10. 5. 14:23

실학박물관은 실학 관련 유물과 자료를 수집·보존, 연구·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실학’은 조선후기의 개혁적·실천적 학풍을 의미한다. 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지금이야말로 실학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첨단과학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점을 보고 가짜 뉴스에 휘둘린다. 지식은 늘어나도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지혜는 부족하다. 고급 정보와 부는 소수가 독점하고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여전히 벌어지는 것일까? 왜란과 호란을 겪었지만 백성들의 삶과는 무관한 예송논쟁에 몰두하던 17세기 조선의 답답한 정치가 연상된다. 이러한 풍토를 개탄하며 백성들의 살림을 늘리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책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들이 추구한 학문을 ‘실학’이라 부른다. 남양주 두물머리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곁에 자리한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관장 김필국)은 실학을 주제로 한 국내 유일의 박물관이다.

윤원규기자

 

■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들의 숨결을 만나다

2층 상설전시실에서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들의 뜨거운 숨결을 만난다. 담헌 홍대용, 혜강 최한기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며 시대를 앞서간 학자들의 고민을 떠올려본다. 잠곡 김육, 포저 조익, 연암 박지원과 환재 박규수, 혜강 최한기 같은 실학자들의 유물은 이를 소중히 간직했던 가문에서 기증한 것들이기에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역시 그림이 먼저 눈길을 끈다. ‘송하한유도’는 얼핏 보면 동양화의 한 폭 같다. 사실 소나무 밑에 서 있는 사람은 대동법을 확대하는데 온 정성을 쏟은 김육이다. 인물보다 소나무를 더 크게 그린 이 독특한 구도의 초상화는 중국 화가의 작품이다. 그의 손자도 대동법 시행에 앞장섰는데 독특한 눈썹을 가진 김석주의 초상화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다.

 

특별한 초상화가 또 있다. ‘양주팔괴’로 불리는 청나라의 화가 나빙이 그린 초정 박제가의 초상화 역시 강렬하다. 키는 작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박제가의 당당한 풍모를 잘 표현한 이 초상화가 실사구시를 주창한 추사 김정희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박제가의 초상화는 김정희를 통해 청나라의 선진문물이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전달됐다는 사실을 밝힌 일본 학자 후지즈카 치카시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다.

19세기의 실학자 최한기의 유물도 빼놓을 수 없다. 최한기는 지구의를 만들고 세계지도와 ‘지구전후도’를 그렸으며, 세계의 자연·인문지리에 관한 책 ‘지구전요’를 저술한 만능학자였다. 1861년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대동여지도’만큼 주목해야할 지도가 또 있다. 그것은 대동여지도보다 100년 전인 1755~1757년 무렵에 제작된 ‘동국대전도’다. 그렇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백리척을 적용해 정밀한 지도를 제작한 정상기‧정항령 부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에 전래된 세계지도는 어떤 것이 있을까? 페르비스트가 1674년에 제작한 ‘곤여전도’를 보면서 서양의 힘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바다를 개척한데서 비롯됐던 사실을 보여준다.

혼천시계(渾天時計)란 조선 현종 때에 송이영이 제작한 천문시계로 혼천의와 각종 부속으로 이뤄져 있다. 혼천의 모습. 윤원규기자

 

송이영이 천체를 측정하기 위해 1669년 만든 ‘혼천의’도 주목되는 유물이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개화파를 길어낸 인물로만 알려졌으나 별자리의 위치를 통해 시간과 계절을 측정하는 ‘평혼의’와 천문관측기구 ‘간평의’를 제작한 과학자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번 전시에서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들이 가장 주목한 유물은 무엇일까? 바로 실학자 유금이 1787년 만든 아라비아식 천문시계, ‘아스트로라브’이다. 유금의 조카는 ‘발해고’를 지은 역사가 유득공이다.

경기문화재단과 실학박물관이 진행하는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이 제3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관람객들이 ‘1787 :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감상하고 있다. 윤원규기자

 

■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

실학박물관 제3전시실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펼쳐진다. 9월12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은 전통시대의 과학문화재를 첨단의 기술과 전시기법을 동원해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립박물관·미술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 사업에 선정돼 마련된 이번 체험전은 실학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곤여만국전도’, ‘혼천시계’와 ‘혼개통헌의’ 같은 과학 문화재를 실감 나는 영상으로 감상하다 보면 미지의 세계와 정확한 시간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관심과 지혜에 새삼 놀라게 된다.

경기문화재단과 실학박물관이 진행하는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이 제3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윤원규기자

 

특히 360도 원형의 대형 LED스크린에서 파노라마처럼 상영되는 ‘1787: 스페이스 오디세이’ 영상은 환상적이다.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것 같은 신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를 찧는 전설의 달부터 우주를 향한 꿈과 희망을 담은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에 이르기까지 과학 발전의 발자취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측우기’와 ‘앙부일구’처럼 독창적인 발명품을 제작한 힘이 세종의 열린 태도였음을 감탄하게 된다.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을 구가한 세종시대는 물론 문화를 꽃피운 영정조시대의 실학도 만날 수 있다. 실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혼개통헌의’를 비롯한 실학시대 과학문화재는 이 시대의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체험 콘텐츠 ‘AR-혼천시계’는 국보 혼천시계를 증강현실로 만나게 한다.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디지털 퍼즐게임을 즐기면서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 인식을 배우는 미디어테이블이다. ‘AR-혼천시계’는 박물관에 전시된 혼천시계의 형태와 세부 구조를 참고해 3D 데이터로 제작한 것이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에 설치된 태블릿으로 유물 위에 증강된 혼천시계를 감상할 수 있다. 전자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성인들도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혼천시계의 구조와 작동원리가 궁금하다. 쥐부터 돼지까지 열두 동물의 ‘십이간지’ 캐릭터, 혼천의 주변에 펼쳐지는 우주를 연출하는 효과도 대단하다.

특히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곤여만국전도를 3가지 체험 활동으로 재구성한다. 곤여만국전도에 숨겨진 사실을 알아보는 ‘곤여만국전도 알아보기’, 곤여만국전도에 그려진 대륙과 동물 퍼즐을 맞춰보는 ‘곤여만국전도 퍼즐’, 곤여만국전도를 지구본에 입혀 입체감 있게 만든 ‘빙글빙글 곤여만국전도’가 있다. 입체 지구모형을 돌려보면서 움직이는 동물과 배를 감상하고 현재의 지도와 고지도를 비교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과학기술과 관련 문화재가 생각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6~17세기 조선시대의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두된 실학의 생성 및 발전 과정이 전시되고 있는 '실학의 형성' 1전시장. 윤원규기자

 

■ 실학의 관심사는 사람과 우주로 뻗어 있다

그동안 진행한 특별전과 기획전을 살펴보면 실학박물관의 관심사와 지향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달력, 시간의 자취’, ‘유배지의 제자들, 다산학단’, ‘실학청연(實學淸緣), 벗과 사제의 인연을 그리다’, ‘반계수록, 공정한 나라를 기획하다’, ‘18~19세기 국화 열풍과 실학자의 국화 애호’, ‘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하다’ 등 다양한 인물과 폭 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전시와 연계한 학술회의도 주목된다.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기념 학술대회 ‘다산 사상과 서학(西學)’과 2013년 성호 이익 서세 250주년 기념 특별전 ‘새로 보는 하늘 땅, 세계–성호 이익의 실학’ 같은 규모가 큰 학술대외가 잇달아 열렸다. 또 실학박물관과 파주시가 공동주최한 학술대회 ‘율곡학과 경기실학’이나 가평군과 공동으로 주최한 ‘대동법 시행으로 조선을 살린, 잠곡 김육과 가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도내의 시‧군과도 협력해 실학정신을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을 대상으로 ‘밭으로 간 실학자’는 옷감을 생산하는 목화를 키우면서 실학의 실용적 가치를 몸으로 배우는 농사 체험프로그램이다. ‘생생! 실학여행’과 ‘실학자와 유물 하나’는 쉽고 재미있게 아이들이 실학적 자세를 터득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관람객들도 참여할 수 있는 주말 상설 프로그램 ‘실~하게 놀자~!’는 홍대용의 혼천의, 박지원의 수레, 정약용의 거중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가을은 사색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실학박물관을 찾아 시대를 앞서 고민했던 반계나 성호, 다산 같은 실학자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배우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

경기일보 webmaster@kyeonggi.com

'남국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1)  (0) 2021.07.16
조선(2)  (0) 2021.07.05
조선 영토  (0) 2021.07.05
조선 고고학  (0) 2021.06.04
조선 문화유산  (0) 2021.06.0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