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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덕수궁에 다녀왔습니다.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었습니다.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입니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
1897년 고종 황제가 황제 즉위식을 하고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지은 환구단(또는 원구단)에 다녀왔습니다. 1896년 2월 경복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1년여간 생활한 고종은 1897년 2월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하였습니다. 1897년 8월 14일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정하고,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아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가운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등극했습니다. 이때 조선의 국호를 ‘대한’으로 고쳐 대한제국의 탄생을 국내외에 선포했습니다.다음 날 고종황제는 외국 공사들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초청해 대한제국 선포를 알렸습니다.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올리며 대한제국을 선포한 과정은 ‘고종실록’에 ..
고종황제는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고종실록》에 대한제국의 영토가 4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록강, 두만강 넘어 만주 땅까지 우리 영토였다는 사실입니다. 중국 주재 미국 외교관으로 활동한 윌리엄스 웰스(Williams S. Wells)가 1884년 뉴욕에서 발간한 중국지도는 당시 조선과 중국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보다 훨씬 북쪽에다가 붉은 선으로 표시했다.이처럼 간도를 조선 영토로 간주한 이 지도는 붉은 색으로 두텁게 칠한 국경선 일대를 중국과 한국의 중립지대(Neutral Territory between China and Corea)로 명기하기도 했다.(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1053..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008년 2월 22일 밝혀졌습니다. 고종, 1905년 유럽 공관에 훈령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사진)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2일 밝혀졌다. 고종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본지 2월 20일자 1면) ▶서구 열강의 정상에게 보낸 국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 밀사 파견에 앞서, 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 입체적인 총력 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특히 고종은 이 훈령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전면 문호개방..
광무개혁(光武改革)은 1897년부터 1904년까지 고종이 시행한 개혁을 말한다. 광무개혁은 대한제국을 서구화하고 근대하기 위한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대한제국은 산업 혁명의 후발주자로 참여하였다. 대한제국이 1897년 최초로 반포한 무게 및 측량에 관한 법에 따라 당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무게와 측량의 기준이 하나로 표준화되었다.[8] 같은 해 대한제국 정부는 지적조사를 개시하여 소유지 체계를 서구식으로 근대화하고자 했다. 이 개혁은 토지세 개혁과 연관이 있었으며 대한민국의 화폐 제도의 개혁을 담당했던 이용익이 토지세 개혁을 맡았다. 지적조사를 실시한 이후 토지를 정확하게 측정한 지계가 발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토지 개혁은 러일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다.대한제국 정부는 도시의 산업기반시설도 갖추기 위해..
■ 만민공동회 관리(官)와 백성(民)이 머리를 맞대고 국가의 장래와 개혁의 방향을 논의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지 5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대신들과 시민들은 관민공동회에서 국정개혁안 '헌의6조'를 의결했습니다. 서희경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한국 역사상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의 이행의 역사는 1989년 만민공동회(관민공동회)로부터 시작된다면서 "이를 통해 백성이 비로소 정치적 주체로 떠오르고 자각되었으며 근대적 정치 주체인 '국민'이 탄생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관민공동회에서 의결된 '헌의6조'가 한국 근대 헌법의 뿌리가 됐다고 주장했습니다. 1898년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로 조선인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
[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1-2]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대한의 고유한 판도’로 바꿔라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입력 2019-03-12 08:00근세 세계 모든 문헌과 지도는 말한다. ‘만주는 한국땅’이라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초 임시헌법의 ‘구한국(Old Korea)의 판도’가 최종 임시헌법 ‘대한(Great Korea)의 고유한 판도’로 해상도와 배율이 더욱 뚜렷해지고 확대된 배경과 취지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뇌부들의 국토인식이 한반도와 간도를 아우르는 ‘큰 한국, 대한(大韓)’일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다음 여덟 부문으로 요약해본다.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토는 삼천리 한반도뿐만 아니라 사천리 만주까지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제국을 이어받은 것은 국호뿐만 아니다. 대한제국의 사천리 ..
흔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는 그저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25년째 대한제국 역사를 연구 중인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건 철저히 일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우리도 모르게 거기에 젖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대한제국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근대국가 정신 이어졌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 알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지적했다. [박종근 기자] 120년 전 오늘이었다(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國家)’라는 말보다 ‘민국(民國)’이란 용어를 더 즐겨 쓰던 군주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종이 나라를 지칭하며 ‘국가’ 대신 ..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셨습니다. 당시 68세였던 고종은 평소 지병이 없고 건강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독살설 등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소문들이 퍼져나갔습니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경술국치 이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 전화벨이 가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든 순종은 안색이 백지장처럼 변했다. "부왕(父王)이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황급히 덕수궁으로 달려간 순종이 함녕전에 들어섰을 때 이미 고종은 흰 천을 쓰고 누워 있었다. 향년 68세, 1863년부터 1907년까지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던 고종은 망국(亡國) 9년 뒤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전국으로 번진 '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