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2. 대한제국의 강역 (1) 본문
"슬프다, 섬 오랑캐가 팔도를 삼켰다" 고종은 글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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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특강] 기록에 남은 구한말 군주의 절규
지도자, 그것도 국가 원수면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심성 도야를 앞세운 유교 왕정에서는 더욱 그렇다. 필자는 고종 시대를 공부하면서 군주 고종의 절규와 통곡을 세 번 만났다.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참지 못한 통곡들이었다.
(1) 1884년(고종 21) 10월 17일(음력) 밤 우정국 낙성식 연회에서 우영사(右營使) 민영익이 흉도들이 휘두른 칼에 크게 자상을 입었다. 가해 측의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창덕궁 궐내 왕의 침전으로 가서 변고를 알리고 이웃 경우궁(景祐宮, 현 현대그룹 사옥 자리)으로 거처를 옮기셔야 한다고 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도 김옥균의 연락을 받고 호위를 이유로 병사를 거느리고 이곳으로 왔다. (2) 이튿날 경우궁에서 김옥균 등이 사관생도와 장사들을 시켜 좌영사 이조연 등 대신 6명과 내시 유재현을 (대문 쪽) 앞 건물(前堂)에서 들어오는 대로 죽였다. 임금께서 “연거푸 죽이지 말라! 죽이지 말라!”라고 외쳤다.
좌영사 이조연, 후영사 윤태준, 전영사 한규직, 좌찬성 민태호, 지중추부사 조영하, 해방총관 민영목 등 6인은 거짓 왕명을 받고 입궐하다가 살해되었다. 1874년 고종은 친정에 나설 때부터 친위군 양성에 뜻을 두어 무위소(武衛所)를 세웠다. 무위소 군사들에 대한 우대는 기존 5군영 군사들에게 박탈감을 주어 1882년 6월 대원군이 그들을 충동하여 군란을 일으키고 무위소는 혁파했다. 고종은 갑신정변 두 달 전에 중앙 군영 전체를 재편성하여 4영(營) 체제로 만들었다. 4영 책임자 중 3명이 피살되고 1명이 죽을 뻔했다.
갑신정변, 개화·수구 대립은 일본 주장
지중추부사 조영하는 신정왕후 조대비의 조카로 조대비가 고종을 왕위계승자로 지명한 뜻을 받들어 조정에서 후견인 역할을 했다. 좌찬성 민태호, 해방총관 민영목 등은 우영사 민영익과 함께 왕비 민씨 측 사람들이다. 고종은 군란 후 왕권의 안정을 위해 왕비 집안 출신들도 중용하여 조대비 측 인사들과 연대토록 하였다. 어느 쪽이나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 설립 후 외국과의 교섭 업무 요직 담당자들이었다. 김옥균은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고, 일본공사관 측은 1개 중대 병력을 동원해 그를 도왔다. 무슨 목적일까? 갑신정변이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란 설명은 1910년 강제 병합 후에 일본 측이 만들어 낸 것이다. 피해자들도 모두 ‘개화’ 업무에 종사하였으니 ‘수구파’로 몰 수 없다.
김옥균은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훈련원(현 동대문운동장)에 주둔한 것을 보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찾아가 병력을 지원해주면 이들을 내쫓는 정변을 일으키겠다고 했다. 다케조에 공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1882년 현재 일본은 청국과 겨룰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김옥균은 1881년부터 일본을 왕래하면서 일본 지원을 받는 개화에 관심을 가졌다, 고종 정부가 비중을 둔 청국의 양무운동 모델의 근대화 사업이나, 1882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된 미국과의 수호 통상조약 체결 및 미국을 다녀오는 보빙 사행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김옥균은 일본 쪽에 서 있었다. 철종 부마 박영효는 1883년 수신사 왕래 경력으로 김옥균의 제안에 동조했다가 뒷날 크게 후회했다. 보빙사행 부사로 미국을 다녀온 홍영식은 정변 종반 국왕 호위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으나 와중에 사망했다. 1884년 현재 정부의 주 외교 노선 바깥에 처한 김옥균은 군란으로 어지러워진 정국에서 일본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아보려는 야망에 차 있었다.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1883년 미국 정부가 조선 보빙사를 극진히 우대한다는 보고를 받고 다케조에 공사를 소환해 김옥균에게 지금 전날 말한 대로 정변을 일으키면 도울 것을 약속하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조선에 우호국으로 자리 잡으면 저들의 ‘주변국 선점 정책’을 조선에 실현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을 우려했다. (중앙SUNDAY 2023.12.02.) 일본은 친청에서 친미로 전환하는 고종 정부의 외교정책 중심인물들을 제거하여 대미 외교에 타격을 가하고자 김옥균을 돕기로 했다. 일본은 1개 중대 병력 지원으로 목적을 달성 한 후 3일 만에 미련 없이 서울을 빠져나갔다. 김옥균 일당은 철저하게 일본에 이용당하였고 고종은 눈앞에서 6 대신을 살해한 김옥균을 끝까지 용서할 수 없었다.
황후는 나에게 대간(大奸)은 요순도 미리 알기 어려운 것으로 간사한 짓은 의심이 날 때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뒷날의 화를 키우는 것이 된다고 했다. 내가 황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찍 용단을 내려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 정병하 네 역적을 제때 처단하지 않아서 끝내 저들이 외국 군사를 불러들여 천하 만고에 없는 큰 변란을 당하고 말았다. 아~ 짐이 황후를 저버렸다. 짐은 황후의 몸을 궁 안에서 지키지 못했다. 아~ 내가 황후를 저버렸다. 지금 슬퍼하면서 지난 일을 생각하니 회한이 그치지 않는다.
처절한 통곡의 소리다.
세 번째는 1909년 3월 15일 고종이 태황제로서 내린 국권 이양 칙유(勅諭)이다. 고종황제는 1905년 11월 ‘보호조약’을 강제당한 뒤 그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3특사를 파견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통감 이토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고, 이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토는 유화정책으로 신 황제(순종)를 앞세워 기차로 지방 행차 곧 순행(巡幸)을 시행했다. 그러나 기차가 머무는 곳에 황제를 맞이하는 수만, 십만을 헤아리는 인파가 모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보호국 정책이 실패한 것을 자인했다. 2월 10일, 순행 종료 1주 만에 이토는 통감 사임을 결심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그동안 ‘병합’을 주장해온 군부에 한국 통치권을 넘기기 위해서였다. 그가 서울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인 3월 15일 고종은 태황제의 이름으로 ‘서북 간도와 부근 각지 민인(民人)이 있는 곳에 고함’이란 글을 내렸다. 고종은 이 글에서 “슬프다!”라는 말을 세 번 앞세웠다.
“슬프다! 짐이 지워진 짐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렇게 낭떠러지에 떨어졌다. 나 한 사람의 죄로 후회해도 다할 수가 없다. 짐이 참으로 부덕하니 너희 만성(萬姓)이 누가 나를 믿고 따르겠는가? --- 슬프다! 짐의 상심이 심하여 차마 말을 못 하겠다. 꿈틀거리던 섬 오랑캐가 긴 뱀이 되고 큰 멧돼지가 되어 우리 팔도를 삼키고 또 흉도가 이들에 붙어 너희 만성을 짓밟고 으깨어 절단하였다. 슬프다! 짐의 얼굴이 두껍고 겸연쩍다. 짐이 제왕이 아니던가. --- 망했다고 말하지 말자. 너희 만성이 있느니라. --- 이 나라는 나 한 사람의 대한이 아니라 너희 만성의 대한이다. 독립이라야 나라(國)며, 자유라야 민(民)이다. 나라는 곧 민이 쌓인 것이며 민은 선한 무리(善群)다. 오호라! 너희는 지금 하나가 되어 심력을 우리 대한 광복에 써서 자손 만세가 영원히 의지토록 하라. 너희 몸을 튼튼히 하고, 너희 피를 뜨겁게 하고, 너희 배움을 닦아 그 그릇이 차거든 때를 기다려 움직이라. 함부로 덤비지 말고, 게을리 늘어지지 말며, 너무 나서지도 뒤지지도 말고, 기회를 적중시키되 반드시 도전하면서 --- 마지막에 큰 공훈을 세워라. 오호라! 어찌 내가 너희를 일깨운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짐은 참으로 부덕하다. 개국 517년 3월 15일 태황제” (현대문으로 옮김)
국가원수로서 국권 상실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면서 여러분이 국민으로서 덕·체·지의 3양(養) 교육을 닦아 국권을 되찾아 달라는 간절한 호소다. 대한제국은 ‘대한민국’이 되고 있었으며 그 ‘국민’은 1919년 3월 1일 고종의 국장 예행 날, 전 국민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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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고종 때 광화문 걸린 '조선궁궐 문배도' 실물 첫 확인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복원 과정에서 광화문에 걸린 조선궁궐의 ‘문배도(門排圖)’ 실물이 처음 확인됐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 조선 후기 기록에 전하는 궁궐 문배도가 구한말 촬영사진을 통해 실체가 확인된 것이다. 문배도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아 문에 붙이는 그림으로, 우리 전통 세시풍속 중 하나다.
8일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미국 잡지 ‘데모레스트 패밀리 매거진’(Demorest‘s Family Magazine) 1893년 7월호에서 구한말 광화문을 촬영한 흑백사진이 발견됐다. 이 잡지는 그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를 찍었는데, 이때 북쪽 벽면에 태극기와 함께 걸린 광화문 사진이 촬영된 것. 재단은 이 ’사진 속 사진‘을 미국 디지털 아카이브 자료와 1년간 비교 조사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원본 사진을 찾아냈다.
고종 재위 기간으로 조미수교가 체결된 1882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본 사진은 광화문 앞에 군중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중 광화문만 확대해보면 약 3m 길이의 흰색 종이에 부리부리한 눈에 험상궂은 얼굴의 장군상을 그린 그림이 문에 붙어있다. 마치 불교 신장(神將)상과 비슷한 모습의 ’금갑장군(金甲將軍·금빛 갑옷을 입은 장군)‘이다. 19세기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 “도화서(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관청)는 (연초에) 황금빛 갑옷을 입은 두 장군상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는데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다른 장군은 절(節)을 들었다. 이 그림을 모두 대궐문 양쪽에 붙인다”고 기록했다.
고종 재위 기간인 1882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문 촬영 사진(위쪽 사진)을 확대해보면 흰색 종이에 그려진 부리부리한 눈의 ‘금갑장군’ 문배도를 확인할 수 있다(아래).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원본 사진에서 광화문에 붙은 금갑장군 그림은 위쪽 3분의 1만 온전하고 나머지 아랫부분은 찢겨진 상태다. 김윤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문배도는 풀에 발라 문 위에 붙이는 게 보통”이라며 “비바람이 들이쳐 그림이 찢겨나가도 중간에 떼지 않았음을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풍산 류씨 본가(화경당)에 소장돼 있는 ‘문배도’. 사가(私家)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문배도 중 유일한 완본이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광화문 촬영사진을 태극기와 함께 북쪽 벽에 걸어놓은 것도 인상적인 대목이다. 재단 관계자는 “북쪽은 왕을 상징한다. 워싱턴에 파견된 대한제국 관료들이 고종이 머무는 광화문 사진과 국가 상징인 태극기를 향해 예를 갖췄을 것”이라고 말했다.
궁궐에서 그리던 문배도는 조선후기 들어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사가(私家)에서 그린 금갑장군 문배도 1점이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풍산 류씨 본가(화경당)에 소장돼 있다. 현존하는 문배도 가운데 유일한 완본이다.
문화재청은 미 의회도서관 소장 사진과 화경당 문배도를 바탕으로 고증 재현한 궁궐 문배도를 설 연휴(11~14일) 광화문에 붙여놓기로 했다. 조선시대 척사의 의미를 살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의 염원을 담겠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문배도는 제거 시 훼손 가능성을 감안해 종이가 아닌 현수막 형태로 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2)
[더오래]고종이 친정 펴려고 사비로 지은 건청궁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2021.08.15 13:00
업데이트 2021.08.17 08:58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28137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49)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에 경복궁 북쪽 끝자락에 지은 집으로, 건청궁이라는 이름을 보면 궁궐 안의 궁임을 알 수 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향원정 북쪽에 있는 건청궁(乾淸宮)은 ‘하늘이 맑다’는 의미의 집이다. 장안당(長安堂), 곤녕합(坤寧閤), 복수당(福綏堂) 등이 건청궁 영역 안에 일곽을 이루고 있다.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에 경복궁 북쪽 끝자락에 지은 집으로 건청궁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궁궐 안에 또 하나의 궁이 있는 셈이다. 우리가 광화문에서부터 출발하는 일반적인 관람 루트를 선택해 경복궁을 걷다 보면 건청궁은 맨 마지막 코스에 만날 수 있으니 대부분의 사람은 몹시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 이 집을 보게 된다. 끄트머리에 나타나는 목적지는 대부분 앞에서 천천히 보고 음미하던 것과는 달리 시간에 쫓길 수도 있고 신체적으로도 몹시 힘들어지니 대충 보거나 소홀하게 여겨 지나치게 된다.
특별히 건청궁만 보려고 작정하고 다른 곳을 지나쳐 이곳까지 직행하지 않는 한, 건청궁은 출발지로부터 너무 먼 북쪽에 있다. 따라서 건청궁을 여유 있게 제대로 보려면 신무문으로 들어와서 건청궁과 집옥재, 태원전 영역을 보고 거꾸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관람코스를 추천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펼쳐지는 건청궁의 테마는 사뭇 즐겁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하려 한다. 건청궁을 지을 무렵 고종이 생부 흥선 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할 것을 표명한 의지는 비장했다. 재위 10년이 된 청년 군주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근거지였으나 건청궁을 짓고 그곳에 살던 왕실에 닥친 비극은 조선왕조가 역사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시작을 알리는 처참한 현장이었다.
고종의 빛과 어둠 건청궁
건청궁 건물은 단청을 올리지 않은 백골집이지만 곳곳에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섬세한 치장으로 격조 있는 규모를 보인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경복궁 중건이 흥선대원군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건청궁은 고종이 주도하였다. 고종은 경복궁 서북쪽에 건청궁 공사를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건청궁 건립은 흥선 대원군의 정치적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고종의 자립을 위한 친정 의지의 표명이었다. 경복궁 중건 후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신료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고종은 공사비 조달은 임금의 사비인 내탕금(內帑金)으로 짓는다고 하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보관할 전각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건청궁을 지었으나, 그 뒤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하거나 외교관 접대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건청궁 건물은 단청을 올리지 않은 백골집이지만 곳곳에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섬세한 치장으로 격조 있는 규모를 보인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조로 구성했다. 건청궁은 연대 상으로는 경복궁의 전각 중에서 가장 나중에 건립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가장 먼저 사라진 전각이다.
그리고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가설된 장소였다.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것은 1879년 10월인데, 그로부터 불과 7년이 지난 1887년 1~3월 사이에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힌 것이다. 당시 건청궁의 전등 설치는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1882년(고종 19년) 5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듬해 9월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한 11명의 사절단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파견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공사 푸트가 내한하자 이에 대한 답례와 양국 간 친선을 위해 사절을 파견한 것이다. 고종이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은 미국 체류 기간 중 전깃불이 뉴욕과 보스턴의 밤거리를 비추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고종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보빙사의 강력한 주청으로 전기 도입을 서둘렀고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 측도 조선을 동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한 계획에서였다.
당시 에디슨 램프 사의 총지배인 프란시스 업튼이 1887년 4월 18일 자로 사장 에디슨에게 보낸 업무 연락서는 경복궁의 전등 시설은 에디슨 제품의 동양 판촉을 위해 시범케이스로 시공됐다면서 향후 일본 궁성에 설비될 시설과 함께 동양에서는 유일한 시설이라고 보고했다.
장안당(長安堂)
건청궁 서쪽 영역의 장안당은 왕의 거처로, 장안(長安)은 오래도록 평안하다는 뜻이다. [사진 이향우]
장안당의 남쪽 누각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서편에 누마루 형식으로 지은 집이다.[사진 이향우]
건청궁 서쪽 영역의 장안당은 왕의 거처로, 장안(長安)은 오래도록 평안하다는 뜻이다. 장안당 현판 오른쪽 상단에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 ‘어필(御筆)’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고, 왼쪽 하단에는 ‘주연지보(珠淵之寶)’, ‘만기지가(萬機之暇)’라는 낙관 두 개가 새겨져 있다. 주연지보는 고종의 낙관이다. 1864년 고종이 열두 살의 소년 군주로 즉위하던 해에 쓴 창덕궁 관물헌의 ‘집희(緝熙)’와는 그 필체에서 느껴지는 연륜이 다르다.
장안당(長安堂)은 당시 조선 사대부 상류 주택의 건축 양식 중에도 가장 격식을 갖춘 집이다. 왕이 소대(召對: 왕이 신하를 불러 만나는 것, 특히 낮에 경연관을 불러 정례의 경연 외에 따로 강론을 주고받는 것)를 행하거나 신하를 만나는 곳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편전의 용도로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를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를 처리했다.
장안당은 실내 복도각을 통해 곤녕합 서행각으로 연결되었다. 장안당의 남쪽 누각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서편에 누마루 형식으로 지은 집이다. ‘추수부용(秋水芙蓉)’은 가을 물 속의 연꽃이 바람에 몸을 맡겨 스스로 미소 짓는 모습이다. 추수부용루는 날아갈 듯 아름다운 추녀 곡선하며 사뿐히 올라앉은 누각의 모습이 그 이름처럼 어여쁜 한 송이 연꽃이다. 헌종의 거처였던 창덕궁 낙선재 누각과 그 형태와 구조에서 닮았다. 이 누각은 곤녕합의 사시향루(四時香樓)와 짝을 이룬다.
장안당 뒤편으로 한국 최초의 양관(洋館)이 있었는데 사바틴에 의해 지어진 관문각(觀文閣)은 서양식 건물로 궁궐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 건물이었다. 관문각은 원래 전통적 목조건물이었으나,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친의 설계 때문에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었다. 고종은 관문각에서 책을 읽고 외국인들을 맞이했다. 사바틴은 이곳에서 시위대 부대장으로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다.
곤녕합(坤寧閤)
곤녕합 옥호루. 옥호루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옥호빙(玉壺氷.옥병 안의 얼음)의 줄인 말인데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 한 말이다. [사진 이향우]
땅이 편안하다는 뜻의 곤녕합(坤寧閤)은 왕비의 덕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왕의 거처인 장안당의 동편에 있다. 곤녕합에 딸린 남쪽 누각 옥호루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옥호빙(玉壺氷.옥병 안의 얼음)의 줄인 말인데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 한 말이다. 옥호루의 동쪽 면에 있는 사시향루(四時香樓) 현판은 장안당의 추수부용루와 짝을 이루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서 여성적인 분위기가 한껏 느껴지는 ‘사시향(四時香)’은 네 계절 끊이지 않고 꽃향기가 풍긴다는 뜻이다. 마치 이곳에 머물던 주인, 명성황후를 그려낸 듯한 이름이다. 옥호루 누각을 통해 담장 너머 그린 듯 아름다운 향원정이 보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45세의 짧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1895년(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사건을 을미년의 변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건청궁은 1895년 을미사변 후 주인을 잃고 1909년경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려서 없어졌다가 98년 만에 관문각을 제외한 일대가 복원되어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3)
고종황제 행차에 함께한 태극기
[서울신문]
고종황제 행차에 함께한 태극기제97주년 3·1절을 맞아 광주시청 1층에서 열리는 ‘태극기 특별 기획전’에 프랑스파리외방선교회 신부들이 찍은 1885년 조선 고종황제의 행차 사진이 공개됐다. 사진에는 조선 관료 대열 가운데 높이 솟은 태극기의 4괘 표시(원 안)가 선명하다. 미공개 사진을 전시하는 기획전은 오는 7일까지 계속된다.(4)
광주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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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비밀의 문’…러 공사관~덕수궁 돌담길 사진 발견
- 업데이트 2009년 9월 26일 00시 20분
1896년 당시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진 돌담길과 작은 문(점선)의 모습.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이 길과 문을 통해 비밀리에 덕수궁을 다녀오곤 했다. 사진 제공 이돈수 명지대 교수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1년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을 비밀리에 오갈 때 이용했던 돌담길과 문을 찍은 사진이 처음 발견됐다.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지는 길의 모습이 처음 확인됨에 따라 이 일대 문화유적의 원형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명지대 이돈수 교수는 최근 미국 주간지 하퍼스위클리 1897년 7월 24일자에 실린 이 사진을 발견해 17일 공개했다. 미국의 유명 사진작가였던 윌리엄 헨리 잭슨(1843∼1942)이 한국을 찾았던 1896년에 찍은 것으로 ‘러시아공사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사진은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 바로 북쪽에서 러시아공사관의 동쪽을 바라보고 근접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 나오는 돌담길과 작은 문은 당시 미국공사관의 북쪽, 덕수궁 선원전(璿源殿) 구역(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한 곳으로, 현재 덕수궁 서북쪽 옛 경기여고 터)의 남쪽, 러시아공사관(현재 건물의 탑만 있다)의 동쪽이 서로 만나는 지역에 있다.
이 길과 문은 1900년대 초에 작성된 덕수궁 도면에도 나와 있다. 이 길과 문을 통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을 왕래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알려져 왔으나 실제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고, 2003년에 돌담길이 있던 자리에서 초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경복궁에서 이 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견해도 있다.
사진을 살펴본 문화재위원 김정동(건축사) 목원대 교수는 “러시아공사관 동쪽 편과 바로 옆 덕수궁 돌담길이 매우 상세하게 나와 있어 덕수궁과 러시아공사관의 건물 연구 및 복원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5)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은 '환구단'
'대안문' '황궁우' 사이에 환구단을 복원하자!
1919년 9월 대한민국 상해정부가 국체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광무 원년부터 고종황제가 한반도,간도와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 해양을 통치하였던 제국으로서 단군조선 건국 이래 한민족 고유의 영토,역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국호이므로 대한이라 하였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자주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국기,국가의 제정을 명령하여 태극기와 애국가를 제정하였고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다.
문화재청은 고도 서울의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시설 철거,기관 이전을 명령하고 경운궁 경복궁 광화문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왕릉 환구단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별궁 의정부 한성부 육조 삼군부 사헌부 종친부 사간원 규장각 국사당을 원형복원하여야 한다.
경성부청사를 철거하고 '황궁우'와 '대안문' 사이에 '환구단'을 원형복원하여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하며 환구단에서 천제를, 경운궁 태극전에서 고종황제 등극의례를 봉행하고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자.
대한제국은 광무 원년부터 고종황제가 한반도,간도와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 해양을 통치하였던 제국으로서 단군조선 건국 이래 한민족 고유의 영토,역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국호이므로 대한이라 하였으며 제국주의 국가에 나라의 자주 독립이 크게 위협받게 되자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자주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국기,국가의 제정을 명령하여 태극기와 애국가를 제정하였고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다.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국국제는 황제의 군 통수권, 법률 제정·반포권, 문·무관 임명권, 외국과의 조약 체결 비준권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 독립신문은 1897년 10월 16일자 신문 논설에 국명이 대한이 되었다고 기술했고 활빈당도 '시정개혁 13조목'을 발표하면서 "대한"이라는 국명을 사용했으며 '항일 논설'로 이름을 떨친 대한매일신보, 최초의 민족은행인 대한천일은행 등이 출현하였고 안중근 의사는 "조국 독립을 지키겠다"는 혈서에 "대한 독립"이라 하였으며 1919년 대한민국이 국체를 계승하였다.
일제는 1904년 2월 대한제국 영토의 군용지 강제수용을 주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고 1900년 고종황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하였고 1905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은 일제는 11월 을사오적을 매수하여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1909년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제국령 간도를 만주 이권을 얻기 위해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통감부,총독부,경성부는 왕궁,종묘,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왕릉,원묘,태실,별궁,행궁,관아,성문을 훼손하였으며 대한황실 궁내부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는 조선총독부,경성제국대학으로 불법 이관되고 국외로 불법 반출되어 연구기관,문화기관과 일본,프랑스,북한에서 소장중이며 미술공예품은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설립하여 일반에 공개되었고 경운궁 황실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가 총독부가 수집한 고적조사 수집품,도굴 매장문화재,구입 장물,사찰 기탁품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었다.
대한황실 궁내부,창경궁 제실박물관,경운궁 황실박물관,구황실사무청,구황실재산사무총국,문화재관리국을 계승한 문화재청은 국보급 전적 고문서 미술품을 중점보호하고 고도 상징 축과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시설 철거, 기관 이전을 명령하고 경운궁 선원전 인화문 대안문 경복궁 광화문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왕릉 환구단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별궁 승정원 춘추관 의정부 삼군부 의금부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 규장각 소격서 종친부 기로소 한성부 육조 돈의문 숭례문 국사당을 원형복원하여야 한다.
문화재청은 제국주의 국가로 불법 반출 후 환수 또는 교육연구기관·정부기록기관·연구문화기관이 소장중인 실록·의궤·일기·등록·고지도·고문서 등 왕실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왕실문화재를 왕실역사박물관을 표방하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귀속하여야 하며 국립고궁박물관은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왕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귀속한 국보급 왕실문화재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문화재 전문가 및 국내외 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왕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6)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김민수]
“고종은 존경심보다 연민 일으켜”
정상수 명지대 국제학연구소 교수는 27일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가 소장한 대한제국 관련 외교문서를 연구하던 중 하인리히가 대한제국 정치·경제·군사 상황을 파악해 친형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보고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1899년 6월29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작성된 20여쪽의 보고서에 따르면, 같은 달 8일 도이칠란드호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하인리히는 이튿날인 9일 궁궐을 방문해 고종과 황태자 순종을 만났다.
하인리히는 고종에 대해 “키가 작고 나이가 약 48세로 매우 친밀감이 있으며 재능이 없지 않았다.”면서 “존경심보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어 “내부 분열과 궁정 내 당파 싸움, 암살 시도, 불확실한 정치적 상황 등이 이 가엾은 왕을 의지할 곳 없는 처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덧붙였다.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에 대해서는 “바보 같은 인상이고 언어 능력과 논리적 사고력이 거의 없다.”면서 “최근 독살 시도를 당해 체력이 완전히 소실돼 시종이 부축해야만 서 있을 수 있다.”고 썼다.
실제로 순종은 하인리히 방문 1년 전인 1898년 역관 김홍륙이 고종 독살을 목적으로 만든 독약 탄 커피를 잘못 마신 후 신체적·정신적으로 큰 후유증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7)
<주>
(1) https://v.daum.net/v/20240817003056371
(2) [단독]고종 때 광화문 걸린 '조선궁궐 문배도' 실물 첫 확인 (daum.net) 2021. 2. 8.
(3) [더오래]고종이 친정 펴려고 사비로 지은 건청궁의 비극 | 중앙일보 (joongang.co.kr)2021.08.15
(4) 고종황제 행차에 함께한 태극기 (daum.net) 2016. 3. 1.
(5) 고종과 ‘비밀의 문’…러 공사관~덕수궁 돌담길 사진 발견|동아일보 (donga.com) 2007-12-18
(6)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은 '환구단':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2008/10/07
(7) “고종은 존경심보다 연민 일으켜” | 서울신문 (seoul.co.kr)2008-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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