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한국 망친 역적을 쐈다”… 의거 후 첫 신문기록 공개

허윤희 기자2024. 8. 15. 05:01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 직후 안중근(1879~1910) 의사를 최초로 신문한 일본인 외교관의 친필 기록이 발견됐다. 국내 컬렉터인 최영호 82갤러리 대표는 “지난 3월 일본 경매에 나온 오노 모리에(大野守衛) 친필 원고와 사진 7점 등 일괄 자료를 구입했다”고 밝혔다. 당시 중국 랴오닝성 잉커우(營口)에서 영사관보로 근무한 오노 모리에는 1910년 3월 원고지에 친필로 쓴 기록 14장과 의거 ‘몇 분 전 촬영한 하얼빈역’ 사진 등을 남겼다.

안 의사는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의거 직후 러시아 영사관으로 압송돼 밀레르 검사가 신문했고, 이날 오후 10시쯤 안 의사의 신병과 취조 기록 원본을 일본 하얼빈 총영사관으로 넘겼다. 당시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하얼빈 총영사도 안 의사의 총탄에 맞아 입원했기 때문에 잉커우 영사관에서 오노 모리에가 하얼빈으로 파견됐다.

오노는 10월 27일 오후 하얼빈 총영사관에 도착해 30일 뤼순에서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사가 와서 신문을 시작하기 전까지 안 의사를 먼저 신문했다. 원고는 이듬해인 1910년 3월 쓴 것으로, ‘큰 별이 지다’라는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직후 안 의사를 최초로 신문한 오노 모리에가 쓴 친필 원고 일부. 이토를 저격한 이유를 묻자 안 의사가 “한국을 망친 역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대목이 보인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안 의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가 담배를 주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오노가 이토의 암살 동기를 묻자 안 의사는 “한국을 망친 역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또 새끼손가락(실제로는 약지) 절단 이유를 묻자 “나는 원래 북한 지역(황해도)의 산 사냥꾼이었는데, 그 당시 토끼를 요리할 때 실수로 손가락을 잘랐다”고 답했다. ‘단지동맹(斷指同盟)’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허위로 답한 것이다. 안 의사는 앞서 2월 7일 김기룡·황병길·백규삼 등 11명 동지와 함께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왼손 넷째손가락(무명지)을 끊었다. 오노 역시 “그 후 상당한 시일이 지났음에도 상처가 생생한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답변이 엉터리임을 알 수 있었다”고 썼다.

안중근 연구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미조부치 검사가 진행한 10월 30일 1차 신문은 자료가 남아 있는데 그 이전 오노의 취조는 처음 보는 내용”이라면서 “거사 직후인 27~29일의 공백을 메워주는 자료로 의미가 크다”고 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직전에 하얼빈역을 촬영한 사진. 오노 모리에가 소장하고 있던 사진으로, 친필로 '하얼빈 정거장 플랫폼(조난 수분전)'이라고 썼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안중근 의사 의거 당시 중국 잉커우(營口) 일본 영사관에서 근무했던 오노 모리에 영사관보는 의거 다음 날인 1909년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안 의사를 신문한 기록과 당시 정황을 ‘큰 별이 지다’라는 제목으로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으로 정리했다. 기록한 때는 이듬해 1910년 3월이었다.

오노는 10월 27일 오후 하얼빈 총영사관에 도착했다. 그는 “하얼빈시 일대에 주범 안중근의 동료들이 잠복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이 들어 전원 일망타진으로 체포해야겠다는 생각하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안중근을 러시아 관헌에서 인계받아 총영사관 지하 구치실에 감금했다”고 적었다.

하얼빈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 - 1909년 10월 26일 오전 이토 히로부미(점선)가 하얼빈역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리는 모습. 오노 모리에가 소장했던 사진 7점 중 하나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안 의사는 오노의 질문에 대부분 답하지 않았다. 오노는 “주범 안(安)이라는 자가 조선에서 어떻게 하얼빈으로 잠입해 왔는지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그가 입고 있던 복장과 구두 등을 세밀히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고 규명하려 물어도 묵묵부답으로 응하지 않았다”면서 “생생한 상흔을 드러낸 새끼손가락(실제는 약지)의 절단 이유와 그 밖의 질문에 일절 대답할 기색을 보이지 않아 허망하게 반나절이 지나갔다”고 기록했다.

오노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연기를 내뱉으며,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통역을 통해 ‘당신은 담배를 피우는가?’라고 안에게 묻자 ‘매우 좋아한다’며 비로소 입을 열었다”고 적었다. 오노는 이후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래픽=양인성

“(담배를) 좋아하면 한 대 주겠다 했더니 ‘만약 (담배를) 줄 생각이 있으면 쓸데없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주라’ 하므로 순간 부아가 나서 한 개비를 꺼내 집어 던졌는데 (안이) 받지 못해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안은 곧바로 몸을 구부려 수갑을 찬 채 담배를 주워, 궐련 담배 끝을 이빨로 잘라내며 불을 붙여 달라고도 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이를 씹기 시작하더니 ‘생큐’라고 한마디를 흘렸다. 그래서 ‘너는 영어를 할 줄 아냐?’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기에 ‘지금 네가 말한 한마디가 영어가 아닌가?’ 하자 ‘아니, 일본어’라고 한다. 그래서 그 말이 왜 일본어라고 생각하냐고 반문하자 ‘내가 예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박의 짐꾼으로 종사하고 있을 때, 동료 중에는 일본인도 많았는데 그들은 서로에게 사의를 표할 때 생큐라고 말했으므로 나는 이 말이 일본어라고 믿고 있다’고 했다.”

오노 모리에 친필 회고록. 원고지 14장 중 첫 장으로, '큰 별이 지다'라는 제목이 보인다. /최영호 82갤러리 대표

자료를 검토한 도진순 창원대 교수는 “안 의사는 일본어를 몰랐기 때문에 뤼순 감옥에서도 일본인 간수들과 필담으로 대화했다”면서 “냉철한 지식인 스타일이기보다는 전격적으로 반응하는 행동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 의사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고 했다.

오노 모리에의 기록에는 하얼빈 총영사관의 내부 구조도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하얼빈 제국총영사관은 신시가지 고지대에 있으며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된 멋진 서양식 대가옥”이라고 썼다. “1층은 사무실과 영사관에 딸린 경찰서가 있고 2층은 총영사의 사택이며, 3층에는 관원과 경찰관들이 거주하고 있다”며 “지하 증기기관실에 있는 가마솥은 전투함의 엔진룸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였다”고 썼다. 당시 하얼빈 총영사관은 현재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사진도 외관만 있어 당시 하얼빈 총영사관의 구체적인 내부 환경을 알 수 있는 자료로도 평가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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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 16년째인데 성과가 없다"

윤성효2024. 8. 15. 13:15
황기철 안중근의사찾기한중 민간상설위원회 이사장 ... "후손 도리이자 주권국가의 무한책임"

[윤성효 기자]

  뤼순감옥 수감 당시의 안중근 의사
ⓒ 눈빛출판사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은 미래에 우리 대한민국이 어려웠을 때, 또 다른 구국의 의지로 삼기 위한 그런 노력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발굴과 자료를 찾는 일은 안중근 의사 후손의 도리이자 주권국가의 무한책임이라고 생각한다."

1909년 10월 26일 당시 대한의 32세 청년으로,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강점기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일본내각총리대신 겸 초대 한국통감을 저격 살해했던 안중근(1879~1910년) 의사의 유해 찾기를 벌이고 있는 황기철 안중근의사찾기 한-중 민간상설위원회 이사장이 광복절에 한 말이다.

해군참모총장과 국가보훈처장을 지낸 황기철 이사장은 15일 <MBC경남> 라디오(좋은아침)에 출연한 뒤 <오마이뉴스>와 별도 인터뷰를 통해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후 114년이 지났건만 아직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하얼빈 의거 115주년, 순국 114주년이 지났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한때 유해 찾기는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과 중국도 관심을 가졌다. 북한은 1970년 김일성 주석이 직접 명령을 내리고 1986년 대규모 유해 발굴단을 꾸려 조사했지만 실패했다.

2006년 남북공동조사단이 지목되어 2008년에 공동으로 유해 발굴 사업을 벌였지만 찾지 못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8년 8월 14일,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북한과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 공동 추진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 유해 매장지는 중국 뤼순감옥으로 추정된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 전에 "내가 죽거든 내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조국 땅에 묻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사후 114년이 지났지만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가보훈처장 재직 때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에 나서기도 했던 황기철 전 처장은 안중근의사찾기 한-중 민간상설위원회 이사장을 맡아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올해로 2년째이며, 지난해에 이어 지난 6월 29일 중국 상하이에서 국제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황기철 전 국가보훈처장.
ⓒ 윤성효
그동안 경과에 대해, 황 이사장은 "유해발굴은 1986년 북한, 2006년 남북한 안중근 유해발굴 위치 확인, 2008년 한중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2008년 중국 단독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진행했다. 올해로 16년째인데 아직 성과가 없다"라고 말했다.

유해 찾기 진행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황 이사장은 "정확한 안중근 의사 매장지 위치를 모른다"라며 "'안중근 본일 사형 집행, 유체 뤼순매장'이라고 된, 1910년 3월 26일 관동도독부 민정장관 대리 사토가 일본 외무성 외무차관인 이시이 기쿠치로에게 보낸 공문이 있다"라고 했다.

이어 "그러나 당시 감옥법 74조에는 가족이 원하면 유해를 반드시 돌려 주어야 했는데 일본이 감옥법을 어기면서 감옥소장 구리하라의 직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를 두 동생인 안정근·안공근에게 돌려주지 못한 원죄를 가지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황 이사장은 "2008년 한중 유해발굴 후 '선자료 후발굴', 즉 정확한 자료가 있어야만 발굴하겠다는 것이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의 입장이다"라며 "구체적인 사료로 특정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정부의 행위는 정치적, 외교적 부침을 가지고 있다. 한중관계나 한일관계, 즉 역사적 이해 관계에 따라 진행이 잘 되지 않고 있다"라고 했다.

'왜 모셔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그래도 안중근 의사 유해를 찾아 모셔와야 한다는 것이다. 황 이사장은 "혹자는 '이제 남은 건 뼈대밖에 없는데'라고 한다. 또 '가슴에다 묻자'라고 하기도 한다"라며 "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의 당위성이라고 표현을 해야 할 것 같다. '왜 모셔야 하는가'이다"라고 했다.

이어 "역사는 반복 된다고 한다. 100년 전에 우리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서 국권이 유린되고 우리나라가 주권을 상실하던 그런 역사가 반복이 될 수 있다고 한다"라며 "국가가 어려울 때 살신성인 하신 분들을 우리가 또는 국가가 나서서 그분들의 유해를 또 그분들의 노력을 기억해주고 유해를 찾아주지 않는다면 다시금 국가가 어려울 때 누가 국가를 위해서 노력할 수 있겠느냐"라고 덧붙였다.

"안중근 의사의 평화정신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 황기철 이사장은 "한중 학자들이 뤼순에서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한중 학자들, 민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기존의 안중근 의사 유해 관련 지역을 한중일 민간, 더 나아가 북한까지 머리를 맞대고, 사료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그는 "뤼순 감옥이 안중근 의사가 수감된 곳인데, 가보시면 이제 아파트가 전부 들어섰다"라며 "2001년 다롄시 문물관리 위원회에서 정식으로 지정한 '뤼순감옥 구지 옛터 묘지'이다. 면적은 660평 정도 된다"라고 했다.

이어 "이곳을 1986년에 북한 단독으로 발굴조사하기도 하였다. 1965년과 1971년 뤼순 감옥 개관 당시 묘지의 중간 부분에서 10여 구의 원통형 유해를 발굴하여 전시하기도 하였다"라며 "그나마 뤼순 감옥에서 2001년에 지정한 뤼순 감옥 공공묘지가 일부 발굴되었지만, 다른 사료적 위치가 특정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2008년에 발굴하였던 뤼순 감옥 전문가들도 주장하였듯이, 이곳을 발굴할 필요성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황기철 이사장은 "안중근 의사의 가르침은 동양평화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이다. 평화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우리 모두의 소중한 인류 추구의 대상이다"라며 "지금처럼 전쟁의 위기가 진행되는 시기에 안중근 의사의 평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신다"라고 강조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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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어디에 잠들어 계십니까

이이슬2023. 1. 8. 17:42
[이이슬의 돋보기]
1909년10월 하얼빈 의거
이듬해 3월26일 순국
일본 은폐로 유해 못 찾아
뤼순감옥 인근 둥산포 언덕 추정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

"현재 안중근의 시신은 일본에 의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매장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행방이 묘연하다. 안중근, 그는 아직도 독립을 이룬 그의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영화 '영웅'中)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순국에 이르기까지 그린 영화 '영웅'의 윤제균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 이같이 적었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왜 안중근 의사에 대해 알아야 할까. 안 의사는 누구일까. 순국한 지 112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고국에 잠들지 못하셨을까.

영화 '영웅' 한 장면. 사진=CJ ENM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조선총독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렸다. 의장대 사이로 번개같이 튀어나와 그를 향해 권총 방아쇠를 당긴 서른살 청년, 안중근 의사다. 저격에 성공한 후 하늘을 향해 '꼬레아 우라'(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친 후 순순히 체포됐다.

이후 안중근은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뤼순(旅順)감옥에 수감됐다. 세계 여러 열강의 관심이 쏠렸다. 하얼빈 이론 총영사관에서 일본 검사와 안중근이 마주 앉았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15가지 이유를 막힘없이 말했다.

하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둘,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셋,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넷,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다섯, 군대를 해산시킨 죄|여섯,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일곱,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여덟,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아홉,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열,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열하나,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열둘,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열셋,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열넷,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죄|열다섯,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대한제국 의병 참모중장 안중근은 재판 내내 '군인' 신분을 강조했다. 한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는 도중, 군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다 포로가 된 것이기에 만국공법과 국제공법으로 판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은 공정할 리 없었다. 일제 행정부는 사법부의 판결에 관여했다.

 

1910년 2월14일

안중근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 여사는 아들에게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는 뜻을 전한다. 안중근은 죽기 전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픽 문지원. 사진출처=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1910년 3월26일

안중근 의사는 처형됐다. 이후 일본이 뤼순감옥 북쪽 야산 어딘가에 유해를 묻었다는 당시 간수들의 증언이 나왔다. 1945년 해방 후 돌아온 백범 김구는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 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였고, 그 옆에 언젠가 안치될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만들었다. 1949년 암살당해 세상을 떠난 김구 선생도 이곳에 안장됐다.

 

2008년

남북 정부는 2008년 광복 이후 처음으로 1차 발굴 작업을 진행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안태근 안중근뼈대찾기사업회 회장은 "당시 정부가 발굴 작업을 진행했던 곳은 일본인 공공묘지로, 태평양전쟁 직전에 일본인들이 유해를 파서 본국으로 가져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발굴 작업을 벌였던 지점과 반대 방향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유해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현장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지난해 10월 의미 있는 사실이 전해졌다. 국가보훈처는 옛 만주 지역신문 성경시보의 기사를 사실로 확인했다.

"뤼순감독 형무소장이 하얼빈산 소나무로 만든 관에 안중근 의사 유해 안치하고 흰 천을 씌우도록 허락했다."(성경시보, 1910년3월30일자 기사)

국가보훈처가 지난해 10월 공개한 성경시보 기사. 사진=성경시보(국가보훈처)

전문가들은 여순 감옥 공동묘지가 인근 동산포 언덕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유언대로 고국에 돌아올 수 있을까.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기한 배우 정성화는 "영화 마지막 문구가 언젠가 사라질 날을 기다린다"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그는 "안중근의 하루빨리 고국에 돌아와 올곧은 정신과 철학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뭉치게 만들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마리아 여사로 분한 나문희는 "나쁜 사람들이 유해를 아무 데나 묻었다"며 숨을 내쉬었다. 이어 "유해보다 중요한 건 안중근의 정신과 혼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전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安重根義士遺墨-爲國獻身軍人本分)

안중근이 사형 집행 전 남긴 마지막 유묵(보물 제569-23호)이다. 이는 1910년 3월 뤼순감옥 경수계장 나카무라에게 써준 것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사형이 집행되자 안중근의 동생들은 형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다. 묘지가 항일운동의 성지가 될까 두려웠던 일본은 끝까지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왜 안중근을 기억해야 할까. 영화 '영웅' 개봉 소식을 접한 일부 일본 네티즌들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글을 게재했다. 테러리스트를 영화화했다며 황당한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서경덕 교수는 "일본 정부가 올바른 역사교육을 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라며 "K콘텐츠가 전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기에 자신들의 과오가 제대로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모양"이라고 비판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은 남겨진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회유와 협박이 이어지길 30년. 안중근 의사를 흉악한 살인범으로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다.

스가 요시히데 전 일본 총리는 "안중근에 대해 범죄자라는 입장을 한국 정부에 밝혀왔다"고 말했다. 세고 히로시게 전 일본 관방부 부장관도 "우리는 안중근을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판결을 받은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고 발언해 비판받았다.

우리는 2023년 일본인들이 안중근 의사를 왜곡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 그래서 더는 역사가 왜곡되는 일이 없도록. 강하게 맞서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3)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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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으로 지킨 나라인데… 애국지사 예우 ‘단절’ [다시, 골목 안 단지동맹]

이연우 기자2024. 8. 14. 06:01
안중근 필두 12명, 대한독립 쟁취 동맹...왼손 약지 관절 잘라 ‘대한독립’ 혈서
동맹 일원 중 독립운동 상훈 고작 3명...나머지 9명, 이름·생사·거주 등 불분명
조응순 선생 조카 조순호씨, 핏줄이지만 물증 없어 후손 인정 못받아
역사에 대한 관심·적극적 태도 취하고...독립운동가 사료 발굴에 힘써주길

잘린 손가락은 알아도 ‘단지동맹’은 모르는 게 현실이다.

항일투사 12명이 왼손 무명지(약지)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썼던 동의단지회를 기억하며, 현재 그 후손들의 발자취를 살펴봤다.

13일 국가보훈부 등에 따르면 ‘단지동맹’은 안중근을 필두로 강순기, 강창두, 김기룡, 김백춘, 김천화, 박봉석, 백규삼, 유치홍, 정원주, 조응순, 황병길(가나다 순) 등 12명의 독립운동가가 대한독립 쟁취를 위해 맺은 동맹을 말한다.

(왼쪽)안중근 단지 혈서 엽서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체포되자 미주 한인들이 재판비용을 후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엽서의 한 가운데에는 ‘대한독립’을 혈서로 쓴 태극기가 있고, 그 옆에는 단지동맹이 피로 쓴 글이라는 설명이 인쇄돼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결의 당시 스물다섯살이었던 조응순 선생은 증언을 통해 “12명의 단원이 각각 왼손 약지를 끊은 뒤에 그 피를 사발에 모아 솜에 적셔 태극기 전면에 ‘대한독립’이라고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외친 후 천지에 맹세하고 흩어졌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조 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1908년 단지동맹 맺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간 흐름으로는 이로부터 1년여 후인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하게 된다.

하얼빈 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 독립기념관 제공

현재 ‘단지동맹’ 일원 중 각종 독립운동으로 상훈(賞勳)을 받은 이들은 3명으로 추정된다.

구체적으로 ▲조응순(2017년) ▲황병길(1963년) 등 2명은 ‘건국훈장 독립장’에, ▲안중근(1962년)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각각 추서됐다.

여기서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된 ▲김기룡(2013년) ▲김백춘(2008년) ▲박봉석(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된 ▲백규삼(2008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된 ▲박봉석(1990년) 등 5명은 동명이인으로 추측되며, 동의단지회와는 무관할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9명 가량에겐 아직 아무런 상훈이 없는 상태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생사·거주·활동 기록 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후손의 유무도 불투명하지만, 후손이 있다 쳐도 1937년 소련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흩어져 국내에 머무는 수 자체가 적기 때문에 ‘추가 상훈’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안중근 의사의 외손(현 97세 추정)이 수원에서, 황병길 대장의 외손(87)이 시흥에서, 조응순 선생의 조카(70)가 충북에서 과거 거주했거나 현재 거주 중인 것만 전해진다.

독립운동가 조응순 선생의 조카 조순호씨가 가문의 숨겨진 역사를 공개하며 단지동맹 후손이 있다면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사진은 안중근 의사와 함께 ‘단지(斷指)동맹’을 맺고 일제강점기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조응순 선생(왼쪽)과 조카 조순호씨의 모습. 조주현기자

조응순 선생의 조카인 조순호씨는 “저희는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직계가족’임을 인정받은 건 아니다. 둘째큰아버지가 건국훈장을 받았던 것도 올해 4월 우연히 알았다”며 “핏줄이라고 해봤자 딱히 ‘물증’이랄 게 없어서 앞으로도 큰 기대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인터뷰에 나선 이유는, 저희 가족처럼 본인 가족이 독립운동가 후손인 것도 모르는 사람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그동안 관심받지 못하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료 등을 정부가 찾아줘서 우리 가족들이 우리 땅에 묻히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현 시점에서 그나마 긍정적으로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부분은 현재 정부가 독립운동유공자의 공적을 재평가하고 있다는 점이지만 결과는 미지수다.

앞서 지난해 7월 국가보훈부는 공적심사위원회를 2심제에서 3심제로 확대해 심사의 공정성을 강화하겠다고 발표하고, 올해 4월 독립운동에 기여한 외국인 등 그동안 공적 심사에서 비중 있게 검토되지 못했던 영역을 재조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내년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미래 세대에 독립운동의 기억이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올해 하반기부터 세부 방안 마련을 위한 학계 전문가 연구를 거쳐 심사기준 마련 및 재심사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해외에 안장된 독립유공자 유해의 국내 봉환, 독립운동 사료 수집·학술연구 활성화, 독립운동 교육 강화 등을 함께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만일 이 과정에서 ‘단지동맹’ 관련 자료 등이 모인다면 향후 동의단지회에 대한 추가 상훈 여부를 기다려 볼 만하지만 아직은 ‘글쎄’다. 중요한 건 관심과 의지다.

윤원태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게 ‘단지동맹’인데도 (단지회 일원에게) 서훈을 전부 하지 못했다면, 그간 발굴되지 않은 독립운동가는 얼마나 많겠는가”라고 반문하며 “훌륭하신 선열 중 국가에게 외면당한 ‘버려진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이번 광복절을 맞아 국민 99%가 모르는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하면서 정부도 적절한 움직임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신운용 안중근평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단지동맹 이후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 인물이 많아서 추적이 힘든 상태다. 특히 최근 독립운동사 연구가 완전히 침체된 상황이어서 개별 인물(독립운동가)에 대해 파악하는 게 간단치 않은 문제”라며 “단지동맹에 대한 관심은 중요하다. 그만큼 다른 독립운동가도 중요하다. 국가 차원에서 역사를 부정하고 소극적으로 나온다면 앞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므로 지금부터 당장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함경남도 갑산 태생인 조응순 선생은 정부가 진행하는 ‘묘소 찾기’ 사업의 대상자로, 국가보훈부가 후손을 찾고 있는 상태다.

단지동맹의 주축이던 안중근 의사도 ‘국권이 회복되면 유해를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순국 114주기인 올해까지 그의 유해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4)

이연우 기자 27yw@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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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뮤지컬‧서적…안중근 열풍의 이유는?

최이현 기자2023. 1. 13. 18:34
 

[EBS 뉴스]

최근 문화계의 화두는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입니다.

 

영화부터 뮤지컬, 문학에 이르기까지 안 의사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 잇따라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지금, 우리 사회에 부는 안중근 열풍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영상 보고 오시겠습니다. 

 

[VCR]

 

이토 히로부미 사살 '안중근' 

일본 법정에서 사형으로 순국

 

안중근 삶 재조명 영화 '영웅' 

관객 수 200만 명 돌파

 

인터뷰: 윤제균 감독 / 영화 '영웅'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잘 몰랐던 마지막 1년에 대한 이야기가 이 영화를 보시면 좀 더 알 수 있으니까, 공연에서 느끼셨던 거리보다 훨씬 더 가깝고 훨씬 더 멀고 이러한 생생함 웅장함을 영화에서 느끼실 수 있다."

 

"피고 안중근, 피고 안중근은 사형에 처한다."

"모두들 똑똑히 보시오!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누가 죄인인가> 뮤지컬 '영웅' 넘버 中-

 

2009년 초연 뮤지컬 영웅 

3년 만의 귀환 

 

소설 '하얼빈' 2022년 베스트셀러 2위

올해도 10위권 안착

 

문학, 뮤지컬, 영화까지 

문화계 달군 '안중근 열풍'…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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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아 앵커 

대한민국 홍보 전문가로도 불리죠.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 자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서경덕 교수 / 성신여대 

반갑습니다. 

 

서현아 앵커

요즘 문화계가 정말 안중근 열풍입니다. 

 

소설부터 영화 뮤지컬까지 안중근 의사의 삶을 재해석한 작품이 쏟아지고 있는데 배경이 뭐라고 보십니까?

 

서경덕 교수 / 성신여대 

가장 큰 이유는요.

 

오랫동안 지속된 어떤 코로나 사태라든지 경제 불황, 사회 전반적인 어떤 어려움들이 지속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누구에게 또 기대고 싶은 마음 어떤 또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통해 영웅을 한 번 이렇게 소환하는 그런 현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고요.

 

무엇보다도 요즘 일본의 어떤 역사 왜곡, 강제징용이라든지 독도에 관련된 문제도 지속적인 지금 왜곡을 하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또 그리고 중국에서도 역시 문화 왜곡, 김치라든지 한복이라든지 탈춤이라든지 이런 부분에 대한 어떤 문화동 공정이 지속되다 보니까 한일 그 다음에 한중 관계가 굉장히 안 좋은 상황에서 동양 평화로 인하는 어떤 콘텐츠가 다시금 재소환되는 그런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때가 우리의 영웅들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서현아 앵커 

우리의 영웅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일본에서도 아마 이 소식을 들었나 봅니다. 

 

일본에서는 그런데 일부 네티즌들이 오히려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까지 규정을 하면서 온라인에서 비난을 쏟아내는 일까지 있다고요?

 

서경덕 교수 / 성신여대 

그렇습니다.

 

현재 영화 영웅이 국내에서도 굉장히 화제가 되다보니까 기사가 일본 측에서도 굉장히 많이 나왔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일본 우익 단체나 우익 개개인들이 트위터나 이런 SNS를 통해서 안중근은 영웅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다 그다음에 테러리스트를 영화화한 한국이다, 그러면서 심지어 안중근의 어떤 부분을 바로 오사마 빈라덴에 비유를 해서 그러한 글들이 지금 퍼지고 있는 게 굉장히 어이없는 상황이고요.

 

그런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일본이 올바른 역사 교육을 하지 않았다라는 또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고요.

 

또 한 가지 또 덧붙여서 말씀 드리고 싶은 거는 전 일본 총리였죠. 

 

스가 요시히데 총리, 전 총리가 2014년에 중국 하얼빈의 하얼빈 역에 안중근 기념관이 오픈을 했을 때 그때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는 망언을 쏟아내서 그러한 잔상들이 지금 일본 우익에게 남아 있지 않나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서현아 앵커 

네,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돌아보는 역사 교육이 중요하다라는 지적이셨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께서는 꾸준히 안중근 바로알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계시는데요. 

 

어떤 내용입니까?

 

서경덕 교수 / 성신여대 

지난 한 십여 년 동안 꾸준히 안중근 바로알리기 캠페인을 국내외로 저희가 함께 진행을 해왔었구요. 

 

예를 들어서 안중근 하면 세상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 단지동맹, 안중근의 어떤 손바닥 도장을 저희가 전국을 넘어서 해외를 다니면서 세계인들과 함께 안중근의 어떤 정신을 한번 되새겨보자는 의미에서 한 3만여 명이 동참한 바로 안중근 대형 걸개그림을 제작해서 광화문의 전시를 통해서 국내외, 특히 이제 외신을 통해서도 안중근의 어떤 정신을 널리 알릴 수 있었고요.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가 안중근에 관련된 부분을 좀 더 알릴 수 있는 부분 중에 이런 안중근 가문에 대한 얘기들, 안중근 뿐만이 아니라 조마리아 여사라든지 어머님이시죠, 그리고 또 여동생인 안성녀 여사의 독립운동에 관련된 부분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을 우리가 좀 더 재조명하는 일도 중요하다 싶어서 그런 SNS에 저희가 카드뉴스나 영상을 통해서 각 분야의 어떤 셀럽들과 함께 저희가 국내외에 알리는 캠페인을 펼치게 됩니다. 

 

특히 요즘은 지금 방금 화면에서 보셨던 것처럼 바로 영화 '영웅' 팀과 의기 투합을 해서요. 

 

주인공이신 배우 정성화 씨와 함께 지금 한국어 영상을 통해서 제대로 된 안중근 역사를 알리는 그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구요. 

 

그 다음에 또 방금 전에 인터뷰를 하셨던 윤재균 감독님과는 함께 지금 직접적으로 우리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토크 콘서트를 통해서 안중근의 어떤 숨은 역사를 알리는 그런 일들을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서현아 앵커 

문화 콘텐츠가 어떤 역사 교육의 소재로까지 활용이 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안중근 의사는 역사 속에 영웅으로 남아 있지만 유해가 아직 우리 땅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교도관 기록이 공개되기도 했는데 이 유해 송환을 위한 노력이 어떤 진전이 있었습니까?

 

서경덕 교수 / 성신여대 

유해에 관련돼서도 참 아직까지 우리가 찾아오지 못했다라는 건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구요. 

 

잘 아시는 것처럼 안중근 의사의 유언이었죠. 

 

자신이 죽거든 하얼빈 공원에 잠깐 묻어뒀다가 이제 국권이 회복되고 나서는 고국으로 옮겨달라고 했었는데 우리가 아직도 그 점을 못 지키고 있는 게 제일 안타까운 부분이고요.

 

하지만 작년에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정부 기관에서 만주 지역의 한 지역 신문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뤼순 감옥 형무소장이 하얼빈산 나무로 만든 관에 

안치를 했고요.

 

그리고 흰색 천으로 둘렀다라는 기사가 발견하게 됩니다. 

 

그 부분은 어떻게 보면 또 찾을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어떤 이런 정부의 노력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 국민들이 이런 안중근 의사에 관련된 정신을 계속 기억하고 그리고 유해를 찾겠다는 어떠한 의지를 국내외로 표출할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현아 앵커 

네, 국권이 회복되면 꼭 독립된 나라로 돌아와서 편히 쉬고 싶다는 게 의사의 마지막 소망이었습니다. 

 

이 소망이 꼭 이루어지는 날이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서경덕 교수 / 성신여대 

고맙습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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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영화·뮤지컬… 대한민국은 지금 ‘안중근 열풍’

부산/박돈규 기자2022. 10. 11. 03:05

김훈 작가의 ‘하얼빈’ 9주째 1위
윤제균 감독 영화 ‘영웅’ 12월 개봉
뮤지컬과 함께 더블 흥행 기대돼

 
2022년 문화계 키워드 중 하나는 안중근이다. 오른쪽 사진은 오는 12월 개봉하는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 배우 정성화. /CJ ENM

 

김훈이 지은 소설 ‘하얼빈’이 9주 연속 종합 1위(교보문고)를 질주하고 있다. 인쇄량은 8쇄 22만부. 작가는 “안중근 심문 조서와 공판 기록에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다”며 “시대 전체와 맞서는 그 고압전류를 옮기고 싶었다”고 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이 소설은 다른 베스트셀러에 비해 40~60대 남성층에서 인기가 많다. 독자들 사이에서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됐고 한편으론 부끄러웠다”는 감상평을 받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1426만 관객을 모은 윤제균 감독은 오는 12월 뮤지컬 영화 ‘영웅’으로 돌아온다. 하얼빈 의거 직전부터 순국까지 안중근(1879~1910)의 마지막 1년을 담았다.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뮤지컬 ‘영웅’도 12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개막한다. 올해 하반기 문화계 키워드를 안중근이 예약한 셈이다. “한국 사회가 경제 불황과 사회적 위기에 둘러싸여 있어 대중이 안중근에게 공감과 위로를 얻는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훈은 '하얼빈'에서 역사 소설의 장인다운 면모를 또 보여준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탄 6발을 쐈다. 러시아 헌병들이 덮칠 때 "코레아 후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탄창 안에는 쏘지 못한 한 발이 남아 있었다.

◇영화 ‘영웅’은 어머니를 그린 이야기

윤제균 감독에게 ‘영웅’은 8년 만의 복귀작이다. 그는 지난 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기자들을 만나 “영화 ‘영웅’을 12월 21일 개봉한다”고 발표했다. 영화 속 블라디보스토크의 모습은 라트비아에서 촬영했고 하얼빈은 합천과 평창의 세트에서 재현한 뒤 시각특수효과(VFX)로 구현했다.

“투자자들은 정성화가 안중근을 연기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이 작품을 가장 잘 아는 배우이고 노래 실력은 대체 불가능하다’고 설득했다. ‘국제시장’이 아버지의 이야기였다면 ‘영웅’은 어머니를 그린 이야기다. 안중근과 조마리아 여사(나문희), 모자 관계가 핵심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애절하다. 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영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날 자리에는 주연 배우 정성화·김고은·이현우·박진주 등과 투자배급사 CJ ENM이 함께했다. 노래는 대부분 라이브로 녹음했고, ‘그날을 기약하며’ ‘누가 죄인인가’ ‘장부가’ 등 원작 뮤지컬의 삽입곡 외에 조선의 마지막 궁녀이자 독립군 정보원 설희(김고은)가 부르는 한 곡이 추가됐다. 윤제균 감독은 “김고은의 노래 실력은 가수 소찬휘급”이라고 말했다. 정성화는 “미래를 바꿔줄 영웅을 기다리면서 정작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영웅은 잊고 산다”며 “보면 가슴이 뜨거워질 영화”라고 했다.

뮤지컬 '영웅'의 하얼빈 의거 장면. 이 뮤지컬은 하얼빈역에 실제 기차가 들어오는 것처럼 표현한 무대미술로도 유명하다. /에이콤

◇뮤지컬도 발레도 ‘안중근 열풍’

뮤지컬 ‘영웅’은 마곡으로 이사간 LG아트센터 서울에서 12월 21일 개막한다. 영화 ‘영웅’과 뮤지컬 ‘영웅’이 같은 날 관객을 만나며 동반 흥행하는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 LG아트센터 서울 관계자는 ‘영웅’을 첫 뮤지컬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안중근 의거 100주년인 2009년에 LG아트센터에서 초연해 좋은 평가를 받은 창작 뮤지컬”이라며 “남녀노소 다양한 관객이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6월 대한민국발레축제 개막작은 M발레단의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안무 문병남)이었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까지 들려오면 나는 기꺼이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오”라는 안중근의 유언에서 출발한 드라마 발레. 이동훈이 안중근, 김지영이 김아려, 김순정이 조마리아로 춤췄다.

뮤지컬 '영웅'의 법정 장면. 배우 정성화는 2009년 초연부터 10년 넘게 주인공 안중근으로 출연했다. /에이콤

◇지금 왜 안중근을 부르나?

그는 이순신과 함께 국민 모두가 흠모하는 영웅이다. 김훈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외쳤던 두 개의 이슈, 약육강식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과 동양 평화는 (최근 대만과 중국 갈등을 보면) 여전히 유효한 외침”이라고 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일제강점기나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코로나 사태와 경제 불황, 물가 상승이 최대의 위기”라며 “안중근 의사는 역사 속에 박제된 영웅이 아니라 이렇게 어려울 때 불려나와 우리에게 긍지와 위로, 자극을 준다”고 해석했다.

오는 10월 26일은 하얼빈 의거일. 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김황식)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하얼빈 의거 113주년 기념식’을 연다.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지만 온 나라가 안중근을 부르고 있다. 영화와 뮤지컬에서 안중근이 노래하는 ‘장부가’는 이렇게 흘러간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본다~”(6)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학생들이 참배하고 있다. 오는 26일 ‘하얼빈 의거 113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뉴스1

 

 

 

안중근 의거 직후 하얼빈의 기록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30 00:20 업데이트 2021.10.30 01:56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19425

배영대 기자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
한국역사연구원 편
태학사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외무성을 대책 본부로 삼고, 정무국장 구라치 데스기치를 하얼빈 현지로 급파했다. 이후 외무성은 만주 일원을 비롯한 전 세계 18개국 약 80개 기관과 1778건의 보고문 · 훈령 등을 주고받는다. 그 기록이 일본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에 ‘이토 공작 만주 시찰 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이란 제목으로 보관돼 있었다.

이 자료집을 한국역사연구원(원장 이태진)이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라는 이름으로 국내 출간했다. 이 사건의 혐의자 및 연루자 색출, 재판 절차, 변호인단 동향 파악, 한인 반일운동가들 감시, 각국의 반응,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장례 절차 등을 망라하고 있다. 모든 보고문과 훈령 등에 제목을 붙여 목록을 만들었고, 원문은 별도의 DVD로 제공한다. 하얼빈 의거 연구의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주요 자료 24건을 선별하여 간략한 해설과 번역문을 실었다. 주요 자료 중 첫 번째로 실린 것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1909년 12월 6일 보낸 수사 방법 보고 및 특별비 지출 방안 품청에 관한 2건이다. ‘한국인 밀정’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일본 외무성 산하 각 영사관이 한국인을 밀정으로 매수해 활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신문인 ‘대동공보’ 사장이자 변호사인 미하일로프가 영국 변호사 더글러스와 함께 안중근 변호 약정을 했다가 좌절되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도 포함돼 있다. 또 ‘한국 황제(韓皇)의 밀사 송(宋) 모에 관한 건’이란 자료도 흥미롭다. 이태진(서울대 명예교수) 원장에 따르면, 안중근의 신병이 일본 법정으로 넘어가자 국제변호인단 구성에 소요되는 비용, 안중근 가족의 생계를 위한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한 ‘안중근 구제회’ 관련 자료로 보인다. 이 원장은 “안중근 관련 자료는 아직 조사해서 보급해야 할 것이 많다. 어쩌면 가장 긴요한 것이 빠진 상태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7)

배영대 학술전문기자 balance@joongang.co.kr

 
 

사형 4분전 “일본도 평화기원 삼창 함께 하자”

“3월25일 죽여달라”…순종 생일 겹쳐 하루 미뤄져
두 동생과 최후의 면회 “노모와 아들 잘 부탁한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의연하게 ‘이슬’로

기자강태호
  • 수정 2008-03-25 20:43 등록 2008-03-25 20:43
3월8~10일 안 의사에게 영세를 준 홍석구 신부(안 의사 맞은편 뒷모습)와 안 의사의 두 동생(맨 왼쪽·정근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땅 여순(뤼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지 꼭 98년 되는 날이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교수형이 집행되고 10시15분 감옥의는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1879년생이니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모친 조마리아는 안 의사에게 사람을 죽였으니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항소를 포기한 그는 형 집행의 날로 3월25일을 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며 종교적 구원의 과정으로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안 의사는 25일 동생들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의 자료는 2월14일 사형선고에서 죽음을 맞는 3월26일까지 안 의사의 마지막 행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동안 안 의사의 최후의 순간, 홍석구 신부의 안 의사 고해성사, 동생들의 면회 등이 소개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번 자료는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고 일부 잘못 알려준 내용도 바로잡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마침 25일부터 여순감옥 뒷산에서는 안 의사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뒤늦게나마 국권이 회복되는 날 유해를 반장해 달라는 그의 유지가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안중근 98주기 ‘최후의 날들’ 재구성
공근)이 사형 집행을 앞둔 안 의사를 여순감옥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면회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통감부 통역 소노키 스에키다. 최서면 한국국제연구원 원장 제공

 

 

■ 사형 선고받다=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30분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불과 일주일 동안 불과 여섯번의 공판 끝에 안 의사에게는 사형이, 공범인 우덕순 징역3년, 조동하·채동순은 각각 1년 3개월의 형이 내려졌다. 안 의사는 사형이 선고된 뒤 일본 당국의 특별 허가를 얻어 프랑스인 서울주교 구스타프 뮤텔에게 보낸 전보에서 신부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 사형집행일로 3월25일 희망=2월17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면회해 사형선고 판결 등 재판과정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 한 행동을 살인범으로 몰아 심리한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안 의사는 “이또 히로부미가 살아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해할 뿐이다. 동양의 한 사람인 내가 이런 나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세례를 준 홍석구(프랑스 이름 조셉 빌렘) 신부가 곧 이곳에 오는데 천주교 신도로서 기념스러운 3월 25일(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 처형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 3년 만의 만남=3월7일 여러곡절 끝에 홍 신부가 도착했다. 그는 재판부가 안 의사의 고해성사를 허락한 데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그러나 고해성사가 신부와 신자 사이에만 이뤄지는 비밀행사이며 이 때문에 모든 일이 당국의 입회 아래 이뤄져야 한다는 형무소법과 충돌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최서면 국제연구원 원장은 입회는 하돼 멀리서 고해성사는 듣지 않는 것으로 절충했다고 설명했다). 8일 오후 2시 홍 신부는 두 동생과 함께 법원 당국의 양해 하에 오후 형무소를 찾아 3년만에 안 의사를 다시 만났다. 홍 신부는 죽음을 앞둔 신자로서 해야 할 바를 알려주고 다음날 고해성사를 하기로 하고 돌아갔다. 홍 신부는 위로의 인사를 하고 서서히 자기가 온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내가 이 만주 여순에 오기까지는 많은 비판과 장애가 많았다. 네가 아는 대로 너와 나는 사제관계에 있어서, 또 이번 거사는 내가 시킨 것처럼 어떤 신문에 와전됐기 때문에 적지 않은 의심을 받아 이번에 오는 것도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일반에게 전달되어 비상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홍 신부는 이어 “몇번이고 여기 오는 것을 주저했으나 너와 두 동생의 간절한 부탁으로 나는 여순 법원의 특별 면회허가가 났다는 전보를 받고 여러차례 반복해 고려한 끝에 원래 선교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천명을 받들 나는 국가나 정치에는 전혀 관계가 없고 공명정대한 것만을 생각하여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걸 느끼고 만난을 제치고 여기 오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 면회의 목적은 세가지가 있는데 나는 내 아들인 신앙의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목숨을 잃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다. 둘째 나는 이번 너의 거행이 살인이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셋째 너의 고국의 동포와 교우들은 너의 이 큰 죄로 도저히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어느나라 국법에도 반드시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하며 네가 깨끗히 죽음에 임하는 것이 그 죄를 씻는다는 걸 원하고 있기 때문에 너의 모친과 교우의 위촉을 받아 네가 죽기 전에 일순간이라도 좋은 교우로서 죽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홍 신부는 “3년전 일시 흥분에 쏠려 국가를 위해서 한다고 싸워야 한다고 하고 블라디보스톡에 가려고 할 적에 너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오늘이 올 것을 알고서 가지 말 것을 타일렀다”고 말했다. 또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중략) 감옥장의 후의에 의하여 신부에게 차와 담배를 제공하고 안중근에게도 담배를 주니 홍신부가 대죄인한테 이런 대우를 한다고 고맙다고 하니 형무소 온 이래 법원과 감옥소의 취급은 매우 관대하여 파격적인 걸 미처 생각지도 못한바 특별한 급여를 하고 매일 두번 흡연실에서 차 과자 담배를 제공받았다고 하니, 홍 신부는 새삼스럽게 놀라며 평소 일본의 문명이 들은바 이렇구나 하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교우들도 이 관대함에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하였다”고 돼 있다. 홍신부는 “당국의 허가를 얻었으니 고행성사를 올려 하루속히 죄의 사함을 청하면 하느님은 반드시 네 큰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고 4시20분 안 의사에게 기도를 하고 떠났다. 면회 중 홍 신부는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껴안는 것 같은 태도로 안을 대하고 안 의사는 어디까지나 경모하는 기분으로 시종일관 말을 들었다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 고해성사와 미사=3월9일 오후 2시 안 의사는 홍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고해성사는 백지 20장에 걸쳐서 적은 내용을 읽어가며 20분간 진행됐다. 홍 신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았고, 안 의사도 신부의 귀에 입을 대고 고해성사를 했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 신부 외에는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홍 신부는 그렇게 진지하고 생생하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안 의사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밝혔다. 일본관리들이 고해성사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라고 물었으나 홍 신부는 일체의 내용을 밝히길 거부했다.

홍 신부는 “안 의사의 사형집행이 25일이라고 하는데 혹은 27일 이라는 설도 있어 분명치 않으나 25일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이므로 만일 그날 저녁 6시에 형이 집행된다면, 천주교 신자가 죽는 데 있어서 이처럼 좋은 날은 없겠지만 27일은 예수가 부활한 날이어서 모든 신자들이 가장 중요한 날로 부활절에 사형당하는 일은 없으므로 만일 27일 사형이 집행된다면 고의로 나쁜 날을 택한 것이 되어 세계여론을 두려워 하여 이날을 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3월 10일 형무소 교회당에서 홍 신부에 의한 미사집전이 있었다. 미사에 참여한 신자는 안 의사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은 교회당 안에는 지켜보는 사람들로 가득찼으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참가자들도 미사집행의 엄숙함에 감동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생들의 뜻밖의 면회=3월 25일로 예정됐던 사형집행일은 순종의 생신인 건원절이었다. 국제적으로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국왕탄신일에 사형집행하는 일이 없고 한국에선 의병투쟁이 심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는 대한황제의 생일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국제 국내적으로 곤란한 일이 야기되므로 피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따라 사형집행은 25일에서 26일로 연기된다. 이를 모른 안중근은 25일 간수가 문을 여니 사형집행인줄 알고 나왔는데 뜻밖에도 동생 둘이 면회를 와 있었다. 25일 오후 12시 40분 감옥에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나카무라 간수장 소노키 스에키 통역 입회아래 미즈노, 가마타 두 변호사와 안중근의 두동생 정근 공근의 마지막 면회였다. 소노키 통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일본외무성과 통감부에 보냈다.

안중근은 우선 정근 공근 두동생에 대해서 고향에서 오는 부탁한 한복이 왔느냐고 묻자 두 동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고 만일 때를 맞추지 못하면 이곳에서 양복을 조달해 드릴테니 걱정마시라고 하였다. 근데 안중근은 미즈노 변호사가 있는 것에 놀라고 어찌된 일이냐고 했더니 미즈노 변호사가 홍 신부가 지난번 여순에 왔을때 병이 나서 오려던 것이 못왔기 때문에 오늘 두동생이 최후에 면회를 한다는 걸 알고 변호사였던 인연으로 만사를 제쳐놓고 위문차 왔다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게도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주니 감사하다고 말하고 두 동생에게는 오늘이 최후의 면회라고 하니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으므로 그런 생각에서 말을 할테니 빠짐 없이 잘 들어달라고 하였다. 그는 우선 노모의 안부에 대하여 두 동생에게 부탁하며 평소에 아들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효도를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번 사건으로 매우 심려를 끼친 불효의 죄를 용서해주도록 말씀 여쭈어 달라고 부탁하고, 또 다시 이미 애기한 한대로 장남 분도를 장래에 신부로 되도록 길러달라고 하였다. 실은 차남이 중병이 걸렸을 적에 뜻밖에도 하느님의 가호로 회생한 것을 생각하여 차남을 신부로 되게 하려고 생각했었으나 몸이 약해 이에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장남을 신부로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또한 정근에겐 너는 장래 공업에 종사하라 한국은 공업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돈 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었지만, 실업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말은 꼭 공업에만 종사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무 심는) 식림 같은 일은 한국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이므로 혹은 식림에 종사하여도 좋다. 결론적으로 국익을 증진시키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곧 우리 집안의 도움이 되는 것이다. 공근에게는 학문에 종사하여 노모와 노모가 살아계시는 고향에서 잘 모시기 바란다. 두 동생은 땅이 넓으니 불편하면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살테니 어머님은 별로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더라.

안중근은 두 동생에 대해서 먼저 말한대로 하얼빈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 왔느냐 물으니 두 동생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귀국하면 시베리아로 이주할 작정이므로 그때 이것을 찾겠다고 대답하였다.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만일 시베리아로 가면 먼저 말한 대로 장봉금으로부터 5천원을 받을 것이 있는데 그 돈은 동의해의 돈이므로 갚으라고 당부하고 다음은 이치권의 아직 갚지 못한 숙박료가 있다고 하고 그 집에 내 가방과 의류와 기타 단지동맹때 자른 손가락을 돌려받아라, 또 두 동생에 대하여 금번 의거에 대하여 각국 신문지상의 논평이 어떻냐고 물으니 두 동생은 한국에서는 의거를 게재하는 일이 용서되지 않고 있으며 일반 국민들은 좋다고도 하고 나쁘다고도 하여 할 수 없다고 했다.

안중근은 “실로 불가사의 한 일이 있다. 내가 연초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미국의 신문지상에 풍자화가 실려 있었는데 내가 의거하려는 것과 일치되는 것이 있어서 당시 감동받은 바가 있다. 한 한국 미인이 서 있는 옆에 일본 사관이 많이 줄 서 있었는데 미인의 소지품을 약탈하려고 하는 한 일본 사관이 사법권과 외교권이라는 물품을 가져가자 그 뒤에 많은 조선인이 총을 들고 그 사관을 쏘려고 하는 걸 그린 것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무엇인가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느끼고 크게 웃었다”고 말했다.

입회한 감옥장(전옥)이 면회시간에 제한이 있으니 유언할 게 있으면 그걸 먼저 말하고 여담을 말하라고 당부했으나 귀관들은 목숨이 길고 나는 목숨이 단석에 이르니 이 면회를 좀더 연장해주길 바란다고 하고 두 동생에게 다시 “나는 내 의무를 다하였다. 미리 각오하고 한 일이므로 내가 죽은 뒤의 일에 관해서는 하등 남길 말이 없다. 단 이때까지의 면회에서 이미 말한대로 더 말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노모에 대해서는 “자기에 대신해서 효도를 다해줄것을 당부한다. 집안이 화평하게 지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숙부 홍신부 민 주교 안명근, 형수에게는 편지를 써놨으니 이것을 전달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시에 동생들은 할말이 없냐고 물으니 “아무 것도 드릴 말씀이 없고 형이 분부하신 사회 일에 관해서는 동생들이 서로 협력하여 잘 되도록 노력할 것이니 걱정말고 형의 길을 따르시길 바라며 천당에 오르시도록 희망한다”고 하였다. 안중근은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미즈노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동정(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 당신의 뜻이 길이 세상에 전해지길 바라며 나도 될 수 있는대로 그 뜻을 전하려고 노력하겠다. 그러니 깨끗히 형에 따르고 빨리 천국에 가시기를 바란다. 천국에서는 언어에 지장이 없을테니 나도 뒤에 천국에 가면 당신과 손을 잡고 정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안중근은 “귀하의 동정과 이해에 매우 감사할 따름이다. 귀하가 이처럼 동정하고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것은 외국에 가는 것과 같아서 일정한 법이 있다. 모름지기 천주교 교도가 되어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떠냐. 그렇다면 천국에서 같이 손을 잡고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다”고 기독교 신앙을 권유했다. 가마다 변호사도 “나도 귀하에 대한 동정과 이해는 미즈노 변호사와 같으니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없도록 노력할 것이니 이해해달라”고 말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나도 “당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미즈노 변호사에 대해 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세상사로 얘기가 옮겨지자 안중근은 내가 언제까지 끝없이 얘기할 것이 아니니 두 동생보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간수에 대하여 이제 더 할말이 없다고 하니, 감옥장은 마지막 악수와 기도를 허락한다고 하여 안중근과 두 동생은 기뻐하여 손을 잡고 악수한 뒤 무릅꿇고 기도하고 돌아갔다. 오후 3시 30분의 일이다. 이날 안중근의 태도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나 역시 마지막 면회는 서로의 작별의 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 형장의 마지막 순간=소노키 세이키 통역은 안중근의 사형집행을 다음과 기록하고 외무성과 통감부에 보고하였다.

살인 피고인 안중근에 대한 사형은 3월26일 오전 10시 감옥소 안의 사형장에서 집행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오전 10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과 소관 등이 사형장 검시실에 앉고 안중근을 불러들여 사형집행의 뜻을 전하고 유언의 유무를 물은 데 대해 안중근은 별로 유언할 것이 없으나 자기의 이번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와 평화를 도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라건데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 각의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에 동양평화의 삼창을 하도록 허가해줄 것을 제의했는데 전옥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을 설명하고 간수로 하여금 명령하여 백지와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특별히 기도를 드릴 것을 허가하니 안중근은 2분여 묵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간수가 데리고 계단으로 교수대에 올라 태연하게 형의 집행을 받았다. 때는 10시를 조금 넘은 4분이며 15분에 이르러 감옥의가 시체를 검사하고 절명하였다는 보고를 하기에 이르러 이에 집행을 끝내고 일동 퇴장하였다.

10시20분 안의 시체는 특별히 감옥에서 새로 만든 침관에 담아 흰 천을 덮고 교회당으로 옮긴 뒤 공범자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의 세 명을 끌어내 특별히 예배를 하게끔 하였다. 오후 1시 감옥의 장지에 이것을 매장하였다. 이날 안중근의 복장은 어제밤 늦게 고향에서 온 명주로, 한복 저고리는 흰색 바지는 흑색을 입고 가슴에 십자가를 달았다. 그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종용 자약 떳떳하게 그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형무소에 쓴 유고 전기는 완전히 끝냈으나 동양평화론은 총론과 각론의 일부에 끝나고 전부의 탈고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렇게 보고 합니다.(8)

강태호 남북관계전문기자 kankan1@hani.co.kr

 

 

안중근 의사 '옥중 벼루' 日서 보관

2008. 6. 8. 20:23

조선 총독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 전까지 옥중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벼루(사진)가 발견돼 일본 미야기(宮城)현 구리하라(栗原)시 와카야나기초(若柳町)의 사찰 다이린지(大林寺)에 봉납됐다고 아사히신문이 6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치과의사이자 역사연구가인 일본인 히로세 다메히토(廣瀨爲人·71)는 올 들어 이 벼루를 입수해 전문가의 감정 결과 진품인 것으로 보인다는 판정을 받자 이를 안중근 의사와 관련이 깊은 곳에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따라 그는 안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 수감돼 있을 당시 담당 간수로서 안 의사의 유문(遺文)을 갖고 일본에 돌아왔던 지바 도치시(千葉十七)의 위패가 있는 다이린지에 벼루를 봉납했다.

 

넓이 7.5㎝, 길이 13.3㎝ 크기의 벼루 뒷면에는 '경술3월 어여순옥 안중근(庚戌三月 於旅順獄 安重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벼루는 경술년(1910년) 일본에 의해 교수형이 집행될 때까지 안 의사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이토 다이켄(齋藤泰彦) 다이린지 주지는 "한일 양국의 친선을 위해 벼루를 한국에 반환하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9)

도쿄=정승욱 특파원

 
 
 

<주>

 

 

(1) https://v.daum.net/v/20240815050136809

 

 

(2) https://v.daum.net/v/20240815131502868

 

 

(3) https://v.daum.net/v/20230108174238336

 

 

(4) https://v.daum.net/v/20240814060136140

 

 

(5) https://v.daum.net/v/20230113183427992

 

 

(6) 소설·영화·뮤지컬… 대한민국은 지금 ‘안중근 열풍’ (chosun.com)2022.10.11. 

 

 

(7) 안중근 의거 직후 하얼빈의 기록 | 중앙일보 (joongang.co.kr)중앙선데이  2021.10.30 

 

 

(8) 사형 4분전 “일본도 평화기원 삼창 함께 하자” (hani.co.kr)2008-03-25 

 

 

(9) 안중근 의사 '옥중 벼루' 日서 보관 (daum.net)2008. 6. 8.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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