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친서 원본.."을사늑약은 무효" 항일 활동

최효안 기자2016. 11. 17. 21:10
 

<앵커>

그런데 오늘(17일)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11년째 되는 날입니다.

당시 고종이 열강에 보낸 친서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고종의 항일 활동이 담겨 있는데, 고종 친서의 원본을 최효안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미 컬럼비아대 도서관 내의 희귀문서실.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담아 독일, 프랑스 등 9개국에 보낸 친서들입니다.

이 친서에서 고종은 을사늑약이 왜 무효인지를 명확하게 밝힙니다.

[일제가 위협해 강제로 이뤄진 것이며]

[나는 정부에 조인을 허가한 적이 없으며]

[이는 국제법을 위배한 것이므로 무효입니다.]

[신희숙/미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한국학사서 : 고종황제께서는 외국에 친서를 보낼 때는 (본명을) 쓰시는데, 고종황제 이름이 여기 나와 있고요.]

[탐 맥커천/미 컬럼비아대 희귀문서실 전문사서 : 이 친서의 영문은 아주 정중하고 공손하고 분명한 문체입니다. 주장하는 핵심을 아주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친서들은 고종의 비밀특사인 호머 헐버트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전달하려 했지만, 일본의 농간으로 회의가 1년 연기돼 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친서들은 일본의 역사학계 일각에서 여전히 고종이 앞장서서 늑약을 맺으려 했다는 식민사관을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1)

(영상취재 : 설민환, 영상편집 : 이재성, VJ : 박승연)     

▶ [취재파일] 을사늑약 111주년 -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선 무슨 일이?

최효안 기자hyoan@sbs.co.kr

 

 

경술국치 하루 전 ‘순종 문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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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업데이트 2009년 9월 26일 16시 37분 
 
경술국치 하루 전인 1910년 8월 28일 순종황제가 수여한 훈장증. 가운데 찍힌 대한국새(大韓國璽) 위에 일심(一心)을 변형한 순종황제의 수결이 뚜렷하다. 아래는 8월 22일 순종황제가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이완용에게 써 준 전권위임장. 붉은색 대한국새 위에 일본식으로 순종황제의 이름 척(척)이 서명됐다. 김재명 기자
 
일본식 서명대신 ‘一心’ 직접 수결

 

“병합조약 인정못해” 의지 드러내

한일강제병합조약 비준서 서명을 거부한 순종황제가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하루 전날 직접 수결(手決)한 훈장증서가 27일 발견됐다. 고종황제가 사용한 일심(一心) 수결을 조금 변형한 이 수결은 순종황제가 1907년 11월 18일 공식 즉위한 뒤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아 희귀 사례로 손꼽힌다.

교지(敎旨)연구가 김문웅(64) 전 국가안전보장회의 행정실장은 순종의 수결이 들어간 1910년 8월 28일자 훈장증을 공개했다. 이규상(李圭象)이란 경시(현재 경찰 직급으로 총경에 해당)에게 팔괘장(八卦章·8등급 훈장 중 6등급)을 수여한다는 이 증서에는 주로 외교관계 문서용으로 쓰이는 대한국새가 찍혀 있고 그 위에 순종황제의 일심 수결이 적혀 있다.

한일강제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데라우치 마사타게 통감의 서명을 거친 뒤 내각의 의결을 거쳤으나 그 비준서에는 순종의 서명 없이 대한국새만 날인됐다. 당시 순정황후 윤 씨가 치마폭에 감춰 둔 국새를 친일파였던 그 숙부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아 날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실장은 이 훈장증의 순종황제 수결에 대해 “황제가 강제병합조약 체결을 인정하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조약이 강제 공표되는 29일까지 통치권을 계속 행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고 설명했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순종황제가 공식 즉위한 뒤 대부분 공문서에 황제의 수결은 일본식으로 순종황제의 이름인 척(척) 서명으로 바뀌었다”며 “조약의 공표 일을 앞두고 마지막 황제권을 행사하는 순종황제가 정식 수결을 갖춘 문서를 통해 일제가 조작한 공문서의 부당성을 지적하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자료”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순종황제 시대 공문서의 황제 수결은 척(척) 서명으로 대체됐으며 일제가 이를 위조한 경우도 많았다.(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밀서 찾아낸 정상수 교수 “독일 문서보관소는 대한제국 자료의 보고”

 

중앙일보
입력 2008.02.20 04:44
업데이트 2008.02.20 08:26

“독일 역사가 대한제국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습니다.”
독일제국 빌헬름 2세 황제에게 보낸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발견한 정상수(44·사진) 명지대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는 발견 당시의 감동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독일 뒤셀도르프대에서 1897~1902년 시기 독일의 동아시아 제국주의 정책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떻게 고종의 밀서를 찾게 됐나.

“독일에서 독일사를 연구하던 1994~95년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에서 1년 동안 방문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한국 관련 사료가 예상 외로 많아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예를 들면 대한제국 선포를 축하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영문 축사가 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었다. 어쩌면 고종의 친서도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지나치듯이 생각해 봤는데 마침 지도교수도 다음 연구 과제로 대한제국의 외교문서를 연구해 볼 것을 추천해 줬다. 그때 계획을 세웠지만 생업에 쫓기면서 미루다가 10년 만에 첫 단추를 끼우게 된 것이다.”

-문서 복사가 가능했나.

“200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한국 관련 독일 외교문서를 번역·해석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때 독일 외교문서의 소재지와 소장 문서 목록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는 보고서를 썼다. 편찬위는 그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국 외교부의 협조를 얻어 베를린 정치문서보관소에서 1만5000여 장 분량의 외교문서를 복사해 왔다.”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는.

“2007년 ‘한국 관련 독일 외교문서 수집정리’라는 주제로 연구 과제를 신청해 학술진흥재단 기초 연구에 선정돼 문서를 뒤질 수 있었다.”

-당시 독일 문서에는 어떻게 소개됐나.

“고종의 측근이었던 프랑스인 정무 고문 트레믈러가 1906년 5월 초 독일 외교부에 전달해 외교부 중앙국 담당 관리들이 이 문서를 검토했다. 중앙국에선 정부 비밀자문관인 포르케 교수의 자문과 감정을 거쳐 보고서를 작성했다. ”

-독일 외교부는 왜 황제에게 이 친서를 보고하지 않았나.

“1905년 3월 빌헴름 2세가 모로코를 방문해 모로코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이 불씨가 돼 이듬해 4월 알헤시라스 국제회담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열강들이 프랑스의 모로코 지배를 인정했다. 이 때문에 독일은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고종의 친서는 이런 미묘한 국제 정세 속에서 전달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3)
정용환 기자

[J-Hot]

▶ 고종 '을사늑약 밀서' 1906년 獨 황제에게도 보냈다

▶ 어새 위에 한자는 고종의 이름 '경'

▶ 고종의 밀서 어떻게 찾아냈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3046953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나라가 망했는데 한사람쯤은 따라 죽어야지"…경술국치 '순국'의 변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3.08.15 05:00 수정 : 2023.08.15 09:09

조선 말기의 화가인 채용신(1850~1941)이 그린 매천 황현(1855~1910)의 초상화(보물). 매천은 “국가가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한 날을 당해 한 사람도…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는 유언을 남긴 뒤 자결 순국했다.|매천 황현 선생 후손 소장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순절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1910년 9월6일이었다. 경술국치(8월26일) 소식이 뒤늦게 매천 황현(1855~1910)이 은거하던 전남 구례에 전해졌다.

이때 동생(황원·1870~1944)은 형(매천)에게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나라가 망했는데, 왜 ‘아무개 공(某公)’ 같이 인망(人望)이 두터운 분이 죽지 않고 있는거냐”고 책망했다. 매천이 씩 웃었다.

“나는 그러지 못하면서 남이 죽지 않는다고 뭐라 해서 되겠느냐. 나라가 망한 날에는 사람마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틀 뒤인 9월9일 새벽 매천은 홀연히 붓을 들어 ‘절명시’ 4편과, 유서(‘순국의 변’) 등을 써내려갔다.

매천 황현의 절명시 4수. ‘…몇번이나 목숨 끊으려다가 이루지 못했다(幾合捐生却未然)’는 내용과 ‘…나라가 망했는데(槿花世界已沈淪)…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기만 하다(難作人間識字人)’는 한탄, ‘(자결순국은) 살신성인 그 뿐이지 충성은 아니다(只是成仁不是忠)’라는 내용이 눈에 띈다.|황현 선생 후손 소장

■내가 죽어야할 의리는 없지만…

우선 ‘순국의 변’을 보라.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한 날을 당해 한 사람도…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느냐.”(<매천집>)

그렇다. 매천은 56살이 되도록 벼슬에 나간 적 없는 선비 신분이었다. 따라서 ‘포의의 선비로서 굳이 죽을 의리는 없다’고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곧 천고의 명언이 나온다. “500년 지속된 나라가 망했는데, 따라죽는 선비가 단 한 명도 없다면 얼마나 통탄스럽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위로 하늘에서 받은 떳떳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평소 읽은 책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너희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매천이 남긴 절명시 4편은 어떠한가.

동생 황원(1870~1944·독립운동가)이 전한 매천 황현의 자결순국 이야기. 동생이 극약을 마신 형의 목숨을 구하려고 해독제를 쓰려했지만 매천은 “세상일이 이쯤되면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한다”고 약사발을 엎어버렸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몇번이나 목숨 끊으려다가 이루지 못했네.(幾合捐生却未然) 이제 더는 어쩔 수 없으니(今日眞成無可奈)….”(1수) “…(황제의) 조칙은 더는 없으리니(詔勅從今無復有) 종이 한 장 채우는데 천줄기 눈물이라(琳琅一紙淚千絲).”(2수) “…무궁화 세상은 망하고 말았네.(槿花世界已沈淪)…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기만 하구나.(難作人間識字人)”(3수) “짧은 서까래만큼도 지탱한 공 없었으니(曾無支厦半橡功) 살신성인 그뿐이지 충성은 아니라네(只是成仁不是忠)….”(4수)

이중 ‘지식인(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 어렵다’와 ‘(자결 순국은) 살신성인 그 뿐이지 충성은 아니다’라는 구절이 눈에 띈다. 유서의 내용과 함께 절명시의 이 구절이 핵심이다.

매천 황현은 “독약을 마실 때 입을 대었다 뗐다 세 번이나 주저했다”면서 “내가 이렇게 어리석었단 말이냐”고 웃었다.

■선비의 ‘처변삼사’

매천의 자결순국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죽지않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면 어땠을까.

이 대목에서 잠깐…. 유학자이자 항일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당대의 지식인(선비)이 국가의 파국에 맞서 대처하는 세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을 ‘처변삼사(處變三事)’라 한다.

“처변삼사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는 것(거의소청·擧義掃淸)과, 은둔·망명해서 유교의 도를 지키는 것(거지수구·去之守舊), 그리고 목숨을 끊어 지조를 지키는 것(자정수지·自靖遂志)이다.”(유인석의 <의암집>)

매천은 세가지 중 ‘자정수지’, 즉 ‘자결순국’을 택했다. 책을 읽은 지식인으로서 망국의 책임을 짊어진 것이다.

또 무명 선비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무슨 거창한 ‘충성’을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유학을 공부한 선비의 최고 가치인 ‘인(仁)’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택했다고 했다.

유학자이자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은 ‘당대의 지식인(선비)이 국가의 파국에 맞서 대처하는 세가지 방법’(처변삼사·處變三事)’을 제시했다.

■“죽는게 쉬운 일은 아닌가보다”

그러나 ‘자결 순국’이 그렇게 쉬운 일인가.

새벽까지 절명시와 유서를 남긴 매천은 지병(疝症·하복부 통증) 치료를 위해 썼던 아편을 더덕소주 한 병에 타서 마셨다.

그러나 금방 절명하지 않았다. 장남(황암현·1880~1946)의 급보를 들은 동생(황원)이 뒤늦게 달려와 매천의 입에 해독제를 넣으려 했다. 매천은 동생의 손길을 뿌리치며 약그릇을 엎어버렸다.

“세상 일이 이쯤되면 선비는 의당 죽어야 한다. 오늘 죽지 않으면 앞으로 날마다 듣고 보는 것들이 모두 마음에 거슬려 바싹 말라서 극도로 쇠약해질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사느니 빨리 죽는게 편안하다.”

매천은 혼수상태에 빠지면서도 웃으면서 순간 죽음을 두려워한 스스로를 책망했다.

“죽는 일이란 쉽지 않은가 보다. 독약을 마실 때에 세번이나 입을 대었다 떼었다 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었단 말이냐.”

결국 매천은 음독한지 꼬박 하루만인 10일 새벽 56살의 춘추로 운명하고 말았다.

매천 황현의 다양한 저작물. 매천은 순국지사이기도 하지만 한말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역사가이다.|매천 황현 선생 후손 소장

■“우리 애기 마음이 약해졌나보다”

절명시 가운데 “몇번이고 목숨을 끊으려했다‘는 구절이 눈에 밟힌다.

매천은 1905년 을사늑약 직후부터 자결순국을 결심했던 것 같다.

<매천야록>은 을사늑약 직후 순국 자결한 이들을 비분강개하며 소개한다.

예컨대 전 참판 홍만식(1842~1905)은 경기 여주 여막(주막)에서 을사늑약 소식을 들었다.

홍만식이 의관을 갖추자 낌새를 알아차린 자식들이 울며 “상소문이라도 올려보면 어떠냐”고 만류했다.

그러나 “지금 어떤 충언도 소용없다. 말만 많아봐야 어찌하겠느냐”면서 음독 순국했다.

이어 1905년 11월4일 충정공 민영환(1861~1905)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순국했다.

<매천야록>은 이 대목에서 눈물겨운 일화를 전한다.

매천 황현의 문방구류와 생활유물(등록문화재). 매천은 20대에 1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또한 황현은 심한 근시에 오른눈이 사시여서 20대 중반부터 안경을 썼다. 안경은 매천의 트레이드 마크이다.|매천 황현 선생 후손 소장

즉 자결순국을 결심한 민영환이 어머니(서씨)의 뺨을 마주대고 비비면서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십대 중반을 넘긴 아들이 어리광을 피우자 어머니가 씩 웃으면서 “우리 애기가 마음이 약해졌나 보다. 그만 가서 자라”고 다독거렸다.

어머니 방에서 나온 민영환은 세아이와, 임신 중인 아내가 있는 방에 들어갔다. 민영환은 아내에게 “관상가가 자식 다섯을 둘 것이라 했는데, 부인은 지금 쌍둥이를 가졌구려!”라 했다. 부인은 무슨 뜻인지 몰라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렇게 가족과 이별한 민영환은 섬돌을 내려가면서 홀연히 대성통곡했다. 민영환이 남긴 ‘국민에게 고하는 유서’를 보라.

“국가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민영환은 한번 죽어서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합니다…영환은 죽되 죽지않고 구천지하에서 여러분을 도울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매천의 ‘죽음의 변’과 비슷한가. 굳이 죽을 의리도(매천 황현), 굳이 사죄할 이유도(민영환) 없는 두 분이 지식인으로서, 혹은 정치인으로서 책임을 짊어지고 가겠다고 했다.

을사늑약 후 매천이 남긴 ‘오애시(五哀詩)’. 을사늑약 직후에 자결순국한 민영환·홍만식·조병세 등 3인과, 이미 작고한 우국지사 이건창(1852~1898), 아직 순국하기 전인 유학자·의병장 최익현(1833~1907) 등 2인까지 5명을 읊은 애도시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어찌 훗날 민영환을 대하겠는가.”

특진관 조병세(1827~1905)가 민영환의 뒤를 따랐다

“조병세가 민영환의 부음을 듣고 ‘나도 죽어야 옳다’고 탄식했다. 손님들이 말렸지만 조병세는 ‘내가 죽지 않으면, 죽는 날 어찌 문약(文若·민영환의 자)을 대하겠느냐’면서 아편을 삼켰다.”(<매천야록>)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인들이 의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그때 조병세의 사위인 이용직(1852~1932)이 “대한의 대신이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어찌 너희(일본인)가 참견하느냐. 죽어서도 모욕을 주려는 것이냐”고 윽박질러 쫓아냈다.

조병세가 각국 공사관에 전달하려고 순국하면서 작성한 투서가 눈물겹다.

“공사 여러분께서는…약소국을 불쌍히 여기시어…우리의 독립권을 회복해 주소서. 조병세는 죽어서도 결초보은하겠습니다. 정신이 어지럽고 숨이 차서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의 사진. 대한제국 원수부 총장을 맡았던 1904년을 즈음하여 찍은 사진이다. 서구식 예복에 칼을 차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대체 국록을 먹는 관리들은 뭐합니까”

매천은 홍만식·민영환·조병세의 자결 순국 기사를 써내려가면서 본인 스스로도 그들의 뒤를 따를 결심을 한 것 같다.

1906년 6월 매천의 절친이자 독립운동가 박항래(1853~1933)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순절한 분 들 외에…그 밖의 대소 관료 중에는 한 사람도…자신의 의지를 표한 자가 없었습니다. 금사(錦士·박항래의 호)도 그랬는데 그 밖의 용렬한 관리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매천은 자성부사와 구례군수, 여산군수를 지낸 박항래에게 “국록을 먹고 있는 관원이 왜 자결하지 않으냐”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할 관리들조차 수수방관하고 있는 상황을 안타까워 한 것이다.

매천은 아무리 목청을 돋운다 해도 민영환·조병세·홍만식 같은 우국지사가 더 나올리 없다고 판단 것 같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7월17일자.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순국한 후 피묻은 옷과 칼은 민영환 집 뒷방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방문을 잠가둔 지 7개월이 지난 1906년 7월 어느날 가족이 문을 열어보니 4줄기, 9가지, 48잎사귀가 돋은 푸른 대나무가 마루바닥 틈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대나무는 민영환의 피에서 자라났다고 ‘혈죽(血竹)’으로 명명됐다.

■아직 죽지 않은 인물을 순절자로 표시

을사늑약 후 매천이 남긴 ‘오애시(五哀詩)’가 그러한 조바심을 반영한다.

‘오애시’는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의 팔애시(八哀詩·당대 현신 8명의 애도시)를 모방해서 지은 시이다.

을사늑약 직후에 자결순국한 민영환·홍만식·조병세 등 3인과, 이미 작고한 우국지사 이건창(1852~1898), 아직 순국하기 전인 유학자·의병장 최익현(1833~1906) 등 2인까지 5명을 읊은 애도시이다.

민영환·홍만식·조병세 등 세 분은 그렇다치지만 왜 이건창·최익현 두 분을 포함시켰을까.

“…애도시를 지으면서 최익현을 언급한 것은 그에게도 바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지금 인물들이 너무 보잘것없어 (이미 죽은) 이건창을 추모한 것이다.”(<매천집> ‘을사고·오애시’)

매천은 국록을 먹는 관리들의 순절을 더는 기대하기 힘들다고 본 것일까. 그래서 이미 죽은 이건창을 포함시킨 것 같다.

앞으로는 어떨까. 다만 면암 최익현 정도가 가능성 있다. 그래서 그 분의 이름 석자를 포함시킨 것이다.

과연 면암 최익현은 74살의 고령에도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뒤 대마도 유배생활 도중 순국했다.

매천의 예상대로였다. 매천이 최익현을 위해 지은 시(‘면암 선생을 곡하다·哭勉菴先生)’는 절창(絶唱)으로 꼽힌다.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만 푸르니(故國有山虛影碧) 아! 가련하다. 어디에 님의 뼈를 묻으리오.(可憐埋骨向何方)”

원로대신 조병세의 순국 사실을 알린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2일자. 5일자에는 조병세 선생의 유서를 1면 머리로 보도했다.

■경술국치 최초의 순국자

이제 최익현마저 떠났으니, 이젠 누가 남았을까. 그것은 다름아닌 매천 황현, 그 자신이었다.

평생 벼슬 한번 한 적 없지만, 그저 공부한 선비라는 이유로 망국의 책임을 짊어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매천은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다. 매천처럼 ‘나라가 망한 날에 단 한사람 죽는 자가 없어서야 말이 되느냐’면서 자결 순절을 택한 이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절친인 김택영(1850~1927)이 1911년 매천의 시문을 모아 펴낸 <매천집>은 경술국치 직후에 황현을 전후로 자결순국한 15명을 언급했다. 그 중 최초의 순국자는 금산군수 홍범식(1871~1910)이었다.

전 참판 홍만식(1842~1905)은 경기 여주 여막(주막)에서 을사늑약 소식을 들었다. 자식들이 울며 “상소문이라도 올려보면 어떠냐”고 만류했지만 홍만식은 “지금 어떤 충언도 소용없다. 말만 많아봐야 어찌하겠느냐”면서 음독 순국했다.|국가보훈부 제공

홍범식은 망국의 비보가 전해진 8월29일 자결 순국했다. 홍범식은 을사늑약 이후 늘 “민충정공(민영환)이 잘 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가족 모두에게 유서를 남긴 홍범식은 벽에 ‘국파군망 불사하위(國破君亡 不死何爲·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없어졌으니 죽지 않고 무엇 하리오)’라는 여덟 글자를 써붙였다고 한다.

홍범식 자결 순국의 파급 효과를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홍범식의 유서를 아들(홍명희)에게 전달한 이는 금산재판소 서기였던 김지섭(1885~1928)이었다. 훗날 의열단원이 된 김지섭은 도쿄(東京)의 일왕 거주지 입구인 니주바시(二重橋) 폭탄 투척 사건(1924 1월)의 주인공이다. 홍범식의 자결을 목도한 송철(1894~1968)은 미주지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홍범식의 아들은 소설 <임꺽정>의 작가인 벽초 홍명희(1888~1968)이다. 홍범식의 유서는 심금을 울린다.

“내 아들아…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날 욕되게 하지 말아라.”

매천이 그토록 강조했던 ‘국록을 먹은 이의 순절’이란 다름아닌 홍범식이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 1905년12월8일자는 을사늑약 직후 순절한 민영환·조병세·홍만식·김봉학·이상철 등을 거론하며 옥황상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제재했다. 이중 평양진위대 소속 상등병으로 복무 중이던 김봉학은 을사늑약 후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계획했다가 누설되자 자결 순국의 길을 택했다. 학부주사 이상철은 을사늑약 체결후 통곡하다가 자결 순국했다.

■대로에서 할복자결순국한 내시

형조판서를 지낸 김석진(1843~1910) 역시 음독 자결 순국했다. 경술국치 후 일제는 76명의 관료 및 유학자들에게 작위를 주고 은사금을 주는 포섭책을 펼쳤다. 김석진은 일제의 은전을 단호히 거부하고 이미 마련한 극약을 먹고 자결 순국했다.

김석진의 순국은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공사들과 상인들도 ‘오로지 충신은 김석진 뿐’라고 칭송했다.

공조참의를 지낸 이만도(1842~1910)는 경술국치 후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했다. 이만도는 절명시에서 “나 자신 속인 데다 남 속였더니…아직 목숨 붙어 있나니…”라며 국치 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무력감을 토로했다. 단식 20일이 지나자 “내일이면 옥황황제를 만날 터이니…수척한 몸 처마 아래 나가 앉으매…절로 마음 편하다”고 초연해졌다.

병조참의·동부승지 등을 지낸 장태수(1841~1910)는 세 아들이 일본 헌병들에게 세 아들이 붙잡혀 가는 것을 보고 단식 순국했다. 전 사헌부 지평 정재건(1843~1910)과 전 우승지 이재윤(1849~1911), 유생 김지수(1845~1911), 전 첨정 정동식(?~1910), 유생 이학순(1843~1910), 의관 송익면(1847~?), 유생 오강표(1843~1910), 유생 이근주(1860~1910), 유생 김영상(1836~1910), 유생 조장하(1847~1910) 등도 있다.

매천이 이미 죽은 이건창()과 함께 ‘오애시’에 포함시킨 면암 최익현은 대마도(對馬島·쓰시마)로 유배를 떠난 뒤 1907년 1월1일(음력 1906년 11월17일) 순국했다.

김택영이 <매천집>에서 자결순국자로 거혼한 마지막 인물은 이름없이 성만 밝힌 ‘반성(潘姓)’이다.

‘반성’은 내시 반하경(?~1910)을 가리킨다. 반하경은 고종 연간에 승전색(왕과 왕비의 최측근에서 말을 전하는 내시부의 정·종 4품관직)을 지낸 인물이다. 반하경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스스로 사퇴한 뒤 경기 파주에 은거했다. 그는 경술국치를 맞아 “비록 내시의 신분이지만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면서 대로변에서 할복 자결했다.

배웠다는 유생과, 국록을 먹은 관리에 평소 천대받았던 내시까지…. 매천 황현의 ‘순국길’이 그렇게 외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매천집>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의병장 김도현(1852~1914)은 1914년 어머니의 사망 후 경북 영해의 관어대로 나가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투신했다.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도해(蹈海) 순국’의 길을 택한 것이다.

“…나라잃고 흘린 눈물 그대로인데 부모마저 가시니…희디흰 저 천길되는 저 물속이 내 한몸 간직하기 꼭 알맞네.”

매천의 절친 김택영이 엮은 <매천집>에는 경술국치 후 황현과 함께 자결 순국한 인물들을 거론했다. 금산 군수 홍범식, 판서 김석진, 참판 이만도·장태수, 정언 정재건, 승지 이재윤, 의관(議官) 송익면, 감역 김지수, 무인(첨정) 정동식, 유생 이학순· 오강표·이근주·김영상·조장하, 환자(내관) 반성(반하성) 등이다. 그러나 <매천집>에 거론된 인물을 포함, 모두 55~90명이 자결순국한 것으로 집계된다.

■글 읽은 사람의 도리는 책임감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겪는 동안 자결순국으로 의리를 세운 분들의 숫자를 헤아리기는 어렵다.

57명의 구체적인 이름을 적시하며 소개한 연구가 있었고, 90여 명에 이른다는 논문도 보았다.

필자의 부족한 깜냥으로 모든 분의 이야기를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새삼 두 분의 유언이 심장을 때린다.

“나라가 망한 날, 한 사람도…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느냐.”(매천 황현)

“민영환은 한번 죽어서…우리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한다…”(충정공 민영환)

이것이 매천의 말씀처럼 ‘글 읽은 자가 사람 구실을 하기위해’ 순국했다는 말씀이다.(참 을사늑약 후 매천으로부터 “뭐하고 있냐”는 타박을 들었던 박창래는 전남 순천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뒤 옥중순국했다.)

(이 기사를 위해 박동욱 한양대 교수와 오제호 국가보훈부 홍보담당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6)

<참고자료>

김영붕, <매천 황현 시와 사상>, 보고사, 2017

박동욱, ‘일제강점기 순국 절명시의 의미와 전변’, <어문연구> 45권1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7

박민영, ‘의암 유인석의 위정척사운동:<소의신편>을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부속대학원 석사논문, 1986

심경호, ‘매천 황현의 삶과 한시연구’, <한국한시연구> 30호, 한국한시학회, 2022

허경진, ‘매천의 죽음과 문학적 성과’, <애산학보> 46, 애산학회, 2019

황현, 이장희 역, <매천야록>(상·중·하), 명문당, 2008

 

 

구한말 조선 묘사한 사진 등 희귀자료 담은 저서 러시아서 발간

송고시간2020-02-17 19:10

유철종기자

제정러시아 탐험대가 수집한 자료 고려인 역사학자가 편저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19세기 말~20세기 초 구한말 조선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희귀 사진과 자료 등을 담은 저서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간됐다.

러시아의 동물학자이자 어류학자, 여행가인 표트르 슈미트(1872~1949)가 구한말 한반도 지역 등을 탐험하며 수집한 자료를 모스크바의 고려인 역사학자 벨라 박 박사(러시아 동방학연구소 연구원)가 현지 고문서보관소들에서 찾아내 정리한 책이다.

올해 한-러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발간됐다.

 

'표트르 슈미트의 조선-사할린 탐험. 1899~1901년. 조선 여행'이란 제목의 책에는 제정러시아지리협회의 주문으로 3년 동안 동해와 오호츠크해, 사할린, 한국, 일본 등을 연구목적으로 여행한 슈미트 탐험대가 직접 제작하거나 수집한 자료가 실렸다.

벨라 박이 제정시절 수도였던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지리협회 고문서보관소'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고문서보관소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부' 등에 소장된 자료들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것들이다.

슈미트 탐험대는 1900년 6월부터 10월까지 원산에서 부산까지 약 850km에 걸친 해안지대를 살펴보고, 뒤이어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로로 이동하며 조선인의 신체적 특징, 풍습, 제도, 신앙, 동식물계 등을 상세히 묘사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직접 사진을 찍거나 관련 사진들을 수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고문서보관소들에 소장돼 있던 이 희귀 자료들이 벨라 박 박사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돼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다.

저서에는 특히 구한말 조선의 도시와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150여장의 귀중한 사진 자료들이 포함됐다. 슈미트 탐험대가 직접 찍거나 여러 경로를 통해 확보한 사진들이다.

소박한 흰색 한복을 입은 평민들, 궁중 예복이나 제복을 차려입은 고위관리나 양반 계급 남녀, 초가집이 펼쳐진 시골과 나루터 풍경, 불교 사찰과 궁궐 모습, 심지어 고종 황제의 초상 등을 담은 사진과 당시의 전통 장례식 모습을 담은 사진 등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들이다.

벨라 박은 지난 11일 열린 출판 기념식에서 "지금까지 대중에 공개된 바 없는 귀중한 자료들이 책에 담겼다"면서 "구한말 조선의 정치, 사회·경제 상황, 문화 등의 연구를 위한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5)

'조선 여행' 책 표지.

책에 실린 고종 황제 사진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구한말 시골 여성들의 모습 ['조선 여행' 책 사진]

cjyou@yna.co.kr

 

 

대한제국 국악 담은 희귀음반 무더기 발견

이윤정2015. 11. 23. 09:46
'2015 하반기 국악학 전국대회' 논문발표 중'황실대취타' '국거리' 등 11장 새롭게 발견
 

송만갑 명창의 판소리 흥보가 중 박 타는 대목 음반(왼쪽)과 대한제국 황실 악공 9인 연주의 ‘황실대취타’ 음반(사진=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구한말 미국 음반사가 우리 국악을 녹음한 음반이 대거 발굴됐다. 또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궁중음악, 삼현육각(민간 기악음악)이 발견돼 한국 전통음악 복원과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국악학회는 지난 2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국립예술자료관에서 열린 ‘2015년 하반기 국악학 전국대회’에서 ‘20세기 초 유성기음반 녹음 연구-1906년 녹음 미국 콜럼비아와 빅터 레코드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됐다고 밝혔다.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의 배연형 소장과 석지훈(연세대 사학과 석사과정)씨가 발표한 이번 연구는 대한제국 시절이었던 1900년대 초 미국 빅터사가 녹음한 국악 음반 중 11장의 실물을 새롭게 확인했다. 기존에 알려진 빅터사의 국악 녹음 음반이 11장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확인된 음반의 수가 2배로 늘어난 셈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대한제국 황실 악공 9명이 연주한 ‘황실대취타’와 ‘국거리’, ‘별가락’ 등이 새롭게 발견됐다. 이 녹음들은 모두 어가 행차 등에 쓰인 행진곡들로 대한제국 황실 악공이 연주한 녹음으로는 유일하다. 이밖에도 지금은 거의 전승이 끊어진 전통 기악 음악인 삼현육각을 담은 음반 3장도 새롭게 발굴됐다. 관청 풍류연회음악인 ‘육각거상’과 ‘육각향단교주’, 민간 풍류음악인 ‘영산도드리’가 이들 음반이다. 이 가운데 육각거상과 육각향단교주는 20세기 초까지 전승되던 궁중·관청에서의 연회 음악이며 영산도드리는 부산 동래 지역의 민간 음악가들이 녹음한 것으로 당시 사대부 사회의 풍류를 잘 보여주는 음반으로 평가된다.

근대 판소리 5명창 가운데 한명인 송만갑(1866~1939)의 ‘흥보가’ 중 ‘박타는 대목’도 새롭게 발굴됐다. 판소리를 담은 음반으로는 최초의 녹음이며 송만갑 명창의 젊은 시절 육성을 들을 수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역사타령’, ‘노인가’, ‘장님경’ 등 기존에 알려지지 않았던 민속음악을 담은 음반도 발견됐다.

연구에 따르면 이들 음반은 1906년 12월 미국인 녹음 기사 윌리엄 가이스버그가 대한제국을 방문해 서울에서 녹음한 것으로 당시 미국 빅터 사를 통해 총 96장이 발매됐다. 이중 1960년대 이래 학계에 총 11장이 보고됐으나 그 제작과 유통 경로 등 전모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진은 빅터 사의 음반대장에 기록된 한국음반 목록을 발굴해 이같은 면모를 밝혀냈다. 또한 연구진은 미국 하와이주립대학교 한국학 연구소를 비롯한 해외 다수의 소장처에서 추가로 11장의 음반을 발굴했다고 설명했다.(6)

이윤정 (younsim2@edaily.co.kr)

 

 

 

<주>

 

 

(1) 고종 친서 원본.."을사늑약은 무효" 항일 활동 (daum.net)2016. 11. 17. 

 

 

(2) 경술국치 하루 전 ‘순종 문서’ 발견 (donga.com)동아일보 2007년 8월 28일 

 

 

(3) 밀서 찾아낸 정상수 교수 “독일 문서보관소는 대한제국 자료의 보고” | 중앙일보 (joongang.co.kr)2008.02.20

 

 

(4)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8150500001

 

(5) 구한말 조선 묘사한 사진 등 희귀자료 담은 저서 러시아서 발간 | 연합뉴스 (yna.co.kr)2020-02-17 1

 

 

(6) 대한제국 국악 담은 희귀음반 무더기 발견 (daum.net) 이데일리 | 2015.11.23

 

 

 

<참고자료>

 

 

 

한국고대사 | 을사늑약이 강제였다는 것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밀서)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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