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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제국 (1) - “대한제국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근대국가 정신 이어졌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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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제국 (1) - “대한제국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근대국가 정신 이어졌다”

대야발 2021. 3. 2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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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근대국가 정신 이어졌다”

 

중앙일보
입력 2017.10.12 01:41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003406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 알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지적했다. [박종근 기자]

 

120년 전 오늘이었다. 고종 황제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國家)’라는 말보다 ‘민국(民國)’이란 용어를 더 즐겨 쓰던 군주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종이 나라를 지칭하며 ‘국가’ 대신 ‘민국’이라 부른 예가 70%나 된다. 당시 고종을 직접 인터뷰했던 선교사들이 남긴 글에는 ‘고종 황제는 나라에서 지식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신하들이 잘 모르는 게 있으면 군주를 찾아가 물어볼 정도였다. 고종 황제는 그 자리에서 즉답을 하거나 무슨 책을 찾아보라고 일러주었다’고 돼 있다.

 

우리가 알던 고종과 다르다. 흔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는 그저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만 알고 있다. 역사 시간에도 그렇게 배웠다. 25년째 대한제국 역사를 연구 중인 이태진(74)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건 철저히 일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우리도 모르게 거기에 젖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연구실에서 이 명예교수와 마주 앉았다. 그에게 ‘대한제국의 의미와 일제의 왜곡’에 대해 물었다.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나.“대한제국은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나라다. 1899년 이미 서울에 전차가 달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도쿄에는 전차가 없었다. 1902년에야 일본에 전차가 생겼다. 1900년대 초 러일전쟁을 위해 서울에 온 일본군이 서울 시내를 달리는 전차를 보고 신기해하는 자료 사진까지 있다. 고종 황제는 차관 도입을 추진하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력으로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국제사회로 진출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광산 개발과 철도 부설, 지폐 발행을 위한 중앙은행 설립, 전기와 전신 사업 등에도 엄청 애를 썼다.”
 
 대한제국을 일제는 왜 무능한 나라로 왜곡했나.“식민통치의 합리화를 위해서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자력으로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일제는 그걸 부인해야 했다. 조선이 괜찮은 나라였다면 식민지배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망국책임론’이란 프레임을 씌웠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고종 정부의 무능함, 둘째는 유교 사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것이다. 구시대 사상인 유교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는 야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게 식민주의 역사학의 가장 큰 굴레다.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대한제국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해 오지 않았나.”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인 고종의 사진 . [중앙포토]

 
고종 황제가 평소 ‘국가(國家)’ 대신 ‘민국(民國)’이라 지칭한 건 어떤 의미인가.“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정조가 ‘국가’ 대신 ‘민국’이란 용어를 먼저 썼다. 국가의 ‘가(家)’는 집안을 뜻한다. 고대 국가가 패밀리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왕조 시대의 패밀리가 누군가. 귀족가문, 다시 말해 사대부다. 정조가 ‘국가’ 대신 ‘민국’이라 부른 건 나라의 중심이 ‘왕과 사대부’가 아니라 ‘왕과 백성’이란 뜻이다. 정조는 만민의 왕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정조의 정신을 고종도 공유하고 있었다. 고종은 ‘적민(積民)이 국(國)이다(백성이 쌓이면 나라다)’는 말도 했다. 서구의 근대국가 개념과도 통하는 정신이다.”
 
 당시는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그걸 뚫고 나가는 고종의 전략은 무엇이었나.“조선의 근대화, 그리고 중립국 승인이었다. 당시는 일본과 청, 러시아와 영국 등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그걸 뚫고 가려면 덴마크나 벨기에, 스위스처럼 국제사회에서 중립국 승인을 받아야 했다. 우선 근대국가로서 위상을 갖추어야 했다. 1880년대 처음에 전기는 경복궁에만 들어왔다. 고종은 도시개조 사업을 통해 서울 시내에도 전깃불이 들어오게 했다. 전차를 시설할 때는 내탕금 2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근대화한 자주독립국가로 국제사회에 데뷔하고자 했다. 실제 고종의 중립국 승인 외교는 비밀리에 강하고 치밀하게 펼쳐졌고, 뒤늦게 이를 안 일제의 방해공작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대한제국’이란 국호도 고종 황제가 직접 지었다.”
 
 왜 ‘대한제국’이라 지었나.“고종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이란 나라 이름은 뜻이 아름답고 오랫동안 썼다. 그렇지만 국호를 지을 때 태조 대왕께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선’과 ‘화령’이란 두 이름을 제시했다. 명나라 태조가 그걸 보고 ‘조선’을 골랐다. 이런 역사를 가진 국호를 가지고 자주국으로 국제사회에 나설 수는 없다. ‘조선’만큼 고대로부터 우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韓)’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 앞에 ‘대(大)’자를 붙이자. 그래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자.’ 그러자 신하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래도 대한제국은 망하지 않았나.“아니다. 그 역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을사보호조약이나 병합은 군사강점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가원수는 끝까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1919년 고종이 독살되자 장례식 이틀 전에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정신이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졌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면서 대한제국을 승계했다. 1945년 일제 압제에서 벗어나 48년에 정부수립을 다시 한 것이다. 대한제국 바로 알기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문제이자 세계사 전체의 문제다.”
 

이태진 명예교수는 12일 오전 9시30분 서울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전략을 분석해 발표한다.(3)

◆이태진 교수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역임, 국사편찬위원장 역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저서로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 『끝나지 않은 역사』 『동경대생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글=백성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vangogh@joongang.co.kr

 

 

 

 

 

고구려-발해-고려 영토 일부를 계승한 대한제국

김민수 근대역사칼럼  | 기사입력 2012/10/29 [19:44]

 

[역사=플러스코리아]김민수 역사칼럼= 중국(中國)의 진(秦),한(漢)은 오랑캐 흉노(匈奴)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였고 중국(中國)의 당(唐) 태종은 만리장성 북쪽의 이민족국가를 복속하고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져 만리장성 북쪽의 오랑캐 돌궐(突厥)을 침략하는 등 위협적이었으므로 고구려국(高句麗國)은 중국(中國)의 당(唐)과 유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고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했다.
 
중국이 고구려국(高句麗國)과 흉노(匈奴),돌궐(突厥) 등 북방 이민족국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처럼 고구려국(高句麗國)의 연개소문(淵蓋蘇文) 또한 중국(中國)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인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였는데 북간도(北間島) 지역인 부여성(扶餘城:농안)에서 시작하여 서간도(西間島) 지역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비사성(卑沙城:대련)에 이르는 1000리가 되는 장성이다. 발해국(渤海國)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이 건국한 고구려국(高句麗國) 유민(遺民)들의 주도 아래 고구려국 장군 출신의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하여 옛 고구려국 영토를 회복한 나라이며 고구려인들이 권력을 잡고 문화도 고구려국 문화를 계승한 나라이다.
 
발해인들은 항상 고구려국(高句麗國) 계승자로 자처했으며 이웃 나라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무왕(武王) 대에 왜국(倭國)에 보낸 국서에 발해국(渤海國)은 고려국(高麗國:고구려국(高句麗國))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한민족(韓民族)의 선조들이 건국한 부여국(扶餘國) 이래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라고 썼으며 왜왕(倭王)의 답서에는 귀 국이 고구려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이전 고구려국 때와 같이 우리 왜국(倭國)과 국교를 가지게 된 데 대해 매우 축하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서로 발해국(渤海國)이 고구려국(高句麗國)의 계승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국(渤海國) 문왕(文王) 대에 왜왕(倭王)에 보내는 국서와 왜왕의 답서에도 발해국 국왕을 고려국(高麗國:고구려국(高句麗國)) 왕으로 표기하였다. 신라국(新羅國) 학자 최치원의 글에도 고구려국이 지금은 발해국(渤海國)이 되었다라는 것이 보여 신라국(新羅國)도 발해국을 고구려국 계승 국가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역사책 중 발해국 멸망 후 처음으로 발해국 역사를 전반적으로 다룬 구당서(舊唐書) 발해전(渤海傳)에도 발해국(渤海國)을 옛 고구려국(高句麗國) 계승 국가로 기록하고 있다.

일연(一然)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궁예(弓裔)가 건국한 나라를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이라고 하여 궁예가 고구려국(高句麗國)을 계승하는 국가를 세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고려국(高麗國)이 고구려국(高句麗國)의 부흥을 표방한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서경(西京)을 중시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고려국 성종 12년 요국(遼國)의 대군이 침입하자 서희(徐熙) 장군은 요국(遼國) 소손녕(蕭孫寧) 장군과 회담을 하면서 "고려국이 고구려국(高句麗國)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나라 이름도 고려국이라고 하며 평양을 도읍지로 삼았다. 고구려국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요국(遼國)의 동경도 그 경계 안에 있다"고 반박하여 오히려 흥화(興化, 의주)·용주(龍州, 용천)·통주(通州, 선천)·철주(鐵州, 철산)·구주(龜州, 구성)·곽주(郭州, 곽산)의 강동 6주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고려국이 발해국 유민(遺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발해국이 고려국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국(高句麗國)을 계승한 국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중국이 편찬한 송사(宋史)에서도 고려국은 본래 고구려국이라고 인식하여 고려열전(高麗列傳)을 서술하였으며 이는 고려국(高麗國)이 고구려국을 승계한 국가라고 인식한 당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이후 명사(明史)에까지도 이어졌다. 고려국이 고구려국을 계승하였다고 하는 인식은 고려국(高麗國)이 동명왕에 대한 제사 봉행에서도 알 수 있는데 서경(西京)에 동명왕(東明王)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개경(開京)의 동신사(東神寺)에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어머니 하백녀(河伯女)를 동신성모(東神聖母) 로로 모셨다. 이는 고구려 국모신(國母神) 신앙과 제의(祭儀)를 고려국(高麗國)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봉행하고 초대 황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1392-1897)에 이어 대한시대(1897- )가 시작됐다. 대한국(大韓國)은 한반도 간도(間島) 제주도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울릉도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하며 북으로는 말갈(靺鞨:북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받은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 영토를 통치했다.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하여 간도(間島)를 직접 관할,통치하였으며 1905년 11월 18일 대한국 조약체결권자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체결 비준하지 않아 불법 무효인 을사늑약 불법 늑결로 대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제국주의 통감부는 1909년 9월 4일 불법적으로 청과 간도협약(間島協約)을 맺고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동남쪽 대한국령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청(淸)에 불법 양도했다.대한국(大韓國)은 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로 일본제국주의에 불법 병탄(倂呑)되었으며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한민족사 최초로 주권재민, 3권 분립을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되어 1945년 8월 15일 대한 광복까지 대한광복운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대한국(大韓國)의 주권(主權)과 영토(領土)를 되찾아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로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大韓國)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 광복(光復)을 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를 수립하였다. 간도(間島)가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영토이므로 대한민국의 대한제국 국호 및 영토 계승 및 청나라와 일본제국주의 통감부 간 불법 늑결한 간도협약의 불법 무효를 천명하고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주장해야 하며 요하(遼河)의 고구려국(高句麗國) 천리장성(千里長城)과 중국 만리장성의 중간선을 한-중 국경으로 하는 국경조약을 중국 정부와 체결해야 한다.

조선국령 대마도(對馬島)는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6월 19일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해서 동래(東萊)의 부산포(富山浦) 앞 대마도로 향하여 정벌(征伐)하였으며 대마도 도주는 신하의 예로서 조선국(朝鮮國:1392-1897) 국왕을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慶尙道) 동래부(東萊府)의 일부로 편입(編入)을 청하였고 왜구(倭宼)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조선국 4대 국왕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동래(東萊)의 부산포(富山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 등 삼포(三浦)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주었다.계해조약(癸亥條約)은 1443년(세종 25) 조정을 대표하여 변효문(卞孝文) 등이 대마도(對馬島)에서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사다모리와 세견선(歲遣船)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이며 '계해약조'라고도 한다. 1419년 조선국 4대 국왕 세종이 대마도(對馬島)를 근거지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왜구(倭宼)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국(朝鮮國:1392-1897)·왜국(倭國) 사이의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다시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세견선(歲遣船)은 1년에 50척으로 하며 선원 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中船) 30명, 소선(小船) 20명으로 정하고 이들에게는 식량을 지급하고 삼포(三浦)에 머무르는 자의 날짜는 20일로 제한하는 구체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예(李藝)는 1443년(세종25)에는 왜구(倭寇)들이 변방에 도적질하여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가자 대마도체찰사(對馬島體察使)가 되어 포로 7인과 도적질한 왜구 14인을 잡아 왔다.

녹둔도(鹿屯島)는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조산리(造山里)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이며 둘레는 약 8㎞이다. 1800년대 이후 두만강 상류의 모래가 유속(流速)에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대안(對岸) 사이에 퇴적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1990년대에는 100호의 인가가 있어 벼·조·옥수수·보리 등이 재배되었고 주변에서는 연어·붕어·황어·숭어 등이 주로 잡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국(朝鮮國:1392-1897) 세종 대에 6진(鎭)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녹둔도(鹿屯島)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책임자였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녹둔도(鹿屯島)가 1860년(철종 11) 청(淸)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린 것을 1889년 알고 청나라에 항의하고 녹둔도(鹿屯島)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는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5∼1905년경 두만강 어귀와 연해주 일대를 16년간 직접 답사하여 제작한 함경도 및 옛 고구려국(高句麗國),발해국(渤海國)지역 지도이다. 아국여지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대한제국시대의 전통적인 관방지도(關防地圖)라 할 수 있으며 고급 펄프지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린 회화식 지도로 20면으로 접혀져 있어서 펼치면 세로 길이가 3m나 된다. 맨 앞에 목록이 있고 지도 여백에 지역별 가구 수, 거주 인구 수, 물산, 군사관계, 인근 지역과의 거리 등의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는 당시에 이미 1만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옛 고구려국(高句麗國),발해국(渤海國) 지역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지도를 보면 두만강 하류에 있던 러시아의 영토가 되어 있는 녹둔도(鹿屯島)는 당시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대한제국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녹둔도에는 113가구, 822명의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의 풍습과 가르침을 높이 숭상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 김민수: 전 문화재청 고궁박물관 연구원>
 
(편집자 주) 필자는 고구리의 영토를 만주 일대로만 보는 반도사관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고구리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세운 나라인 대진국(大震國)을 당나라가 일방적으로 부른 발해로 적고 있다. 고구리와 대진국은 대륙의 중원까지 지배했던 엄청난 나라였고, 물론 만주도 그 영토의 일부였음을 참고로 밝히는 바입니다.(4)

 

 

이태진 교수 “대한제국 중립국 외교는 일제에 맞선 평화운동”

관련이슈디지털기획

입력 : 2017-10-14 10:31:17 수정 : 2017-10-14 10:31:17

 
1897년 고종은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른 뒤,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지었다. 고종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대한제국은 단 13년을 버티다 1910년 8월(경술국치) 역사에서 사라졌다. 오늘날 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대한제국은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제국이 추진했던 중립국 외교를 일제 침략주의에 대항한 평화운동의 시원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12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대한제국의 산업근대화와 중립국 승인 외교’를 주제로 1900년 전후 대한제국이 펼친 외교 전략을 분석해 발표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의 모습. 한국문화재단 제공
이 명예교수는 20세기를 제국주의와 이를 억제하려는 국제평화운동이 병존했던 시기로 평가했다. 그는 “1900년 미국 철강왕 엔드류 카네기가 국제평화운동기금으로 4000만파운드를 내놓고, 1901년 노벨 평화상이 처음 시상되기 시작했다”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고조돼 국제연맹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대한제국이 만국우편조약, 적십자조약 등에 가입해 국제사회 속에 존재를 드러내고, 유럽의 중립국인 벨기에, 덴마크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한제국은 1902년 10월 각국의 특사를 초대해 고종의 즉위 40년 칭경(경축) 예식을 열고, 이 자리에서 중립국임을 승인받으려고 했다”며 “이 계획은 콜레라가 만연해 예식이 연기되면서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국제사회의 새 조류를 의식하고, 침략적 팽창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명예교수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일본이 한반도를 보호하는 것이 곧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짓 선전을 했다”며 “대한제국은 이러한 기만행위의 반대편에서 맞서는 외교정략을 폈지만, 러일전쟁의 개전으로 모든 것이 중단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중립국 외교에 실질적 걸림돌로 작용한 사건은 제1차 영일동맹이었다. 영국과 일본은 1902년 1월 각각 청과 대한제국에서 정치적·상업적 이익을 상호 보장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이 명예교수는 “영일동맹에는 대한제국의 산업 근대화를 위한 외국 차관 교섭과 이와 병행한 중립국 승인 외교를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며 “중립국 외교는 일본의 방해와 저지 정책으로 모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한반도를 보호하는 것이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거짓 선전해 영국과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을 농락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주권수호 및 회복원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며 “대한제국의 산업화 차관 교섭 및 중립국 승인 외교는 일제 침략주의에 대항한 평화운동의 시원으로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는 의견을 밝혔다.(5)
권구성 기자 ks@segye.com

 

 

[시크릿 대사관] 고종은 비자금 절반 쏟았다···워싱턴 벽돌집 스민 망국의 한


중앙일보
입력 2020.03.02 05:00
업데이트 2020.03.02 11:32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719343

 

한국인이 갈 수 없는 한국 땅인 외국 대사관을 소개하는 ‘시크릿 대사관.’ 이번엔 3ㆍ1절 주간을 맞아 준비한 번외편입니다. 태평양 건너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로 여러분을 모십니다. 왜 워싱턴이냐고요? 19세기 말 격랑의 시기를 겪던 조선의 고종에게 답이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ㆍ러시아 등 외세 속에서 고뇌하던 고종은 미국에 대사관을 열기로 합니다. 1889년, 대한제국 황실의 비자금 격인 내탕금을 쏟아부어 워싱턴 중심가 아이오와 서클(현 로건 서클) 소재 약 50평(150.98㎡)의 지상 3층 지하 1층짜리 빨간 벽돌집을 사들인 겁니다. 외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내탕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지난달 26일 기자가 직접 이곳에서 백악관까지 걸어봤더니, 빠른 걸음으로 약 25분이면 닿더군요. 고종이 결단을 내릴만한 노른자위 땅, 맞았습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기념관 외관. 지금도 태극기가 힘차게 나부낀다. 워싱턴=전수진 기자

 

그렇게 마련한 화성돈(華盛頓ㆍ워싱턴의 한자 음차)의 로건 서클 15번지의 공사관. 현관문엔 대한제국의 문양을 조각해 넣었습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임을 알리는 표시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대형 태극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먼저 전경 사진과 내부의 대형 태극기 사진 보고 가시지요. 1월 26일 찾아간 공사관엔 이른 봄꽃이 화사했습니다. 내부 정경은 아래 영상에서 상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에 들어서자마자 걸려 있는 대형 태극기. 옆으로 손님을 맞고 식사를 하던 식당이 보인다. 워싱턴=전수진 기자

 

중국은 그때도 미국을 심히 견제했습니다. 처음엔 조선이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죠. 그래도 고종이 밀고 나가자 “조선의 공사는 미국 대통령이 아닌 주미 중국 공사에게 먼저 인사를 하러 오라”는 압력을 넣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인상을 주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고종이 첫 주미 공사로 택한 박정양 공사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장장 2주가 넘는 시간을 꼬박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박 공사가 뭍에 발을 딛자마자 향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주미 중국 공사관이 아닌 백악관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에게 고종으로부터 받은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서였죠.

복장은 한복 예복 그대로였습니다. 미국인들의 눈엔 새로웠겠죠? 해당 장면을 묘사한 아래의 펜화 그림은 당시 미국의 다수 매체에 등장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에서 제일 오른쪽에 있는 인물, 누구인 것 같으신지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입니다.

박정양 공사가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에서 대기 중인 모습을 그린 펜화.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이완용으로 추정된다. 박정양 공사는 바로 그 뒤에 서 있는 인물. 워싱턴=전수진 기자

 

미국은 대한제국의 공사 일행에겐 낯선 땅이었습니다. 박 공사는 매일 일기를 적고 이를 『미행일기(美行日記)』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남겼습니다. 미국의 개화 문물에 대한 인상 등을 소상히 기록한 것이죠. 처음 박 공사에겐 모든 게 생소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처음 탔을 당시, 박 공사 일행이 “우리를 이런 상자 안에 몰아넣고 충격을 주다니 미국이 우리를 이렇게 박대해도 되는가”라며 화를 냈다는 기록도 있다는군요.

또 백악관에서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 대기하면서는 “미국의 왕은 언제 나오는 것이냐”라고 묻기도 했다지요. 대통령은 복장이 뭔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참모들과 같은 양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기념관으로 관리되고 있는 공사관 측의 설명입니다.

워싱턴의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기념관의 현관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는 객당. 응접실 역할을 했던 곳이다. 태극기 문양의 쿠션에 눈길이 간다. 옛모습 그대로 문화재 전문가들이 재현해냈다고 한다. 워싱턴=전수진 기자

 

참고로, 누구나 기념관을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소관으로, 김상엽 관장을 비롯해 약 5명의 전문가가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 공사관의 사진. 오른쪽 상단에 보면 '대조선 주미국 대사관'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워싱턴의 주미 공사관이 자주외교의 전초기지였음을 보여준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제공]

 

박 공사는 1호 주미대사이자 한ㆍ미 동맹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죠. 1889년부터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약 16년간,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조선의 자주외교를 위한 최전선이었습니다.

외교관만 외교를 하는 건 아닙니다. 외교관의 배우자도 중요한 민간 외교관이죠. 이역만리 워싱턴의 조선 외교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 공사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이채연 공사의 부인 배씨 부인의 활약은 특히 눈부셨습니다. 재색을 겸비했다고 하는 배씨 부인의 사진 보시겠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분입니다. 한복이 참 곱지요? 워싱턴에서도 되도록 한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서였겠지요. 이 사진은 미국 현지 매체에도 실렸다고 하네요.

이채연 공사의 부인 배씨 부인(오른쪽)의 한복 차림 사진.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제공]

 

잠깐, 왼쪽의 인물은 누굴까요? 현재 공사관의 지킴이 역을 하는 한종수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이완용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다시 배씨 부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배씨 부인은 영어와 서양 에티켓을 먼저 익혔다고 합니다. 현지 교회에도 나가서 워싱턴의 유력 인사들과 교분도 쌓았습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부인 프랜시스 여사와도 곧 절친 사이가 됐다고 합니다. 실제로 프랜시스 여사와 미국의 다른 국가 대사의 부인들을 이곳 공사관으로 초청해 다과회를 자주 열었다고 합니다. 현지 신문에서도 배씨 부인은 사교계 소식의 단골 소재였다고 하네요.

 배씨 부인은 현지에서 출산까지 했습니다. 아들이었는데요, 워싱턴을 부르던 이름인 ‘화성돈’을 활용해 ‘이화손(李華孫)’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네요. ‘화성돈에서 태어난 자손’이라는 의미랍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출생 시민권자인 셈이겠죠. 그런데 이 아기는 안타깝게도 생후 2달, 병사하고 맙니다. 습진 합병증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아이는 당시 국무부 차관이었던 세블론 브라운의 가족묘에 안장됐습니다. 지금도 묘지는 보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노력에도 불구,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일본에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은 워싱턴의 이 공사관을 단돈 5달러에 사들인 뒤 같은 날 10달러에 되팔지요. 교민들은 당시 공사관 위에 태극기를 크게 그려 넣은 엽서를 인쇄해 나눠 가지며 독립을 향한 열망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워싱턴 교민들이 나눠가진 엽서. 태극기를 유독 크게 그려넣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제공]

 

공사관의 운명은 기구했습니다. 광복됐지만 아무도 대한제국 공사관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죠. 결국 공사관은 돌고 돌아 미국인 변호사인 티모시 젠킨스의 소유가 됩니다. 젠킨스 변호사는 “안에 태극기 등이 있는 것을 보고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해 큰 공사를 하지 않고 보존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곡절 끝에 2012년, 정부는 젠킨스 씨에게 이 건물을 매입합니다. 이후 2018년 5월, 기념관으로 다시 문을 열게 됐죠. 당시엔 문재인 대통령과 공사관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다과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5월 22일 오후(현지시간) 워싱턴 공사관을 찾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공사관의 김상엽 관장은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한ㆍ미 동맹의 시작이면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며 “한국인뿐 아니라 미국 현지인들도 자주 찾아와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고 전했습니다.

공사관의 건물에서 내려다보이는 로건 서클은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이 즐비해 있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 정경을 바라보는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나라의 독립이 얼마나 소중한지, 3ㆍ1절 101주년을 보내며 되새겨 봅니다.(6)

워싱턴=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영상=전수진ㆍ우수진ㆍ황수빈 기자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속 大韓帝國

[‘덕후’ 사진관] 한국 관련 외국 문헌 수집가 김홍석

  • 홍중식 기자 free7402@donga.com
  • 입력2023-02-16 10:00:02

1897년 조선은 황제국을 선포하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1900년 열린 파리만국박람회는 대한제국이 독립적 전시관을 세워 참여한 첫 박람회다. 대한제국의 권위와 위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국가적 기획이었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가 탄생한 계기가 됐다는 것.

당시 한국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일하던 샤를 알레베크는 파리만국박람회 한국 측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 서울에서 찍은 사진 등을 이용해 파리에서 48종의 사진엽서를 제작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로서 대한제국관의 공식 기념품으로 판매됐다.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 신생 제국 대한제국은 파리만국박람회를 통해 세계와 마주했다. 개화기 한국 관련 외국 문헌 수집가 김홍석의 수집품을 통해 당시 대한제국을 만나보자.


1900년 12월 16일(일요일)자 타블로이드판형 프랑스 주간지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내용 중 한 면 전체에 걸쳐 실린 박람회의 대한제국관에 관한 삽화(왼쪽)와 그 표지(오른쪽). 삽화 속 건물은 실제 박람회장에 설치된 경복궁 근정전을 축소해 만든 건물이다.

박람회에 관한 폴 제르(Paul Gers)의 저서 ‘1900년에’(En Coree, 1900년 발행). 대한제국을 소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00년 박람회 공식 카탈로그 표지.

1900년 박람회 공식 카탈로그에 실린 대한제국관의 위치. 대한제국관은 L951로서 박람회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슈프렌(Sufren)가에 위치했다.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박람회 즈음에 펴낸 한국 소개 책자 ‘서울의 추억(Souvenir de Seoul)’ 표지. 앞면 왼쪽 위에 1900년 박람회에서 대한제국이 1개의 그랑프리, 2개의 금메달, 10개의 은메달, 5개의 동메달, 3개의 가작까지 총 21개의 상을 수상했다고 적혀 있다.

(왼쪽부터)대한제국 시기 서울의 관립 프랑스어학교 교사이던 샤를 알레베크의 초상. 한국 최초 사진엽서 시리즈를 만든 주인공이다. 1900년 당시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대한제국이 박람회에 참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람회 대한제국 대표 민영찬의 초상.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이다. 박람회 대한제국 위원 중 한 명인 이인영의 초상.

알레베크가 제작한 48장의 엽서를 순서대로 늘어놓은 사진.(7)

 

 

 

 

 

<주>

 

 

 

(1) “대한제국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근대국가 정신 이어졌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2017.10.12 

 

 

(2) 고구려-발해-고려 영토 일부를 계승한 대한제국:플러스 코리아(Plus Korea)2012/10/29 

 

 

(3) 이태진 교수 “대한제국 중립국 외교는 일제에 맞선 평화운동” | 세계일보 (segye.com)2017-10-14 

 

 

(4) [시크릿 대사관] 고종은 비자금 절반 쏟았다···워싱턴 벽돌집 스민 망국의 한 | 중앙일보 (joongang.co.kr)  2020.03.02 

 

 

(5)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속 大韓帝國 ['덕후'사진관]한국 관련 외국 문헌 수집가 김홍석|신동아 (donga.com)2023-02-16

 

 

 

<참고자료>

 

 

 

대한제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900 - Wikipedia

 

 

 

태극기의 기원과 역사적 맥락 - Daum 백과

 

 

 

[동아플래시100]"8대 죄악 저지른 이완용 응징해야" 뒤늦게 전한 이유는? (daum.net)  2021. 04. 27. 

 

 

 

"현미경으로 문짝 보니 페인트칠만 13겹… 한켜한켜 벗겨내자 130년前 문짝 나오더라" 입력 2019.01.30. 03:22

 

 

 

 

 

 

"나는 죽을지라도.. 한국 동포를 구하라" 어느 영국인의 유언 (daum.net)  2020. 12. 22. 

 

 

 

‘조선 최초 항명 검사 1호’ 아시나요? (hani.co.kr) 200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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