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1. 대한제국 (5) 1907년~1910년 정미의병 본문
‘친일파’ 영국기자도 치를 떤 일제 만행…역사적인 의병사진 남겼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유인석·이강년·허위·최익현·연기우·윤인순·허겸·노재훈…. 얼마 전 구한말 항일 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대표 의병장 및 독립투사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과 국가유산청이 일본에서 구입 환수한 자료는 항일 의병장 및 독립운동가가 작성한 친필 편지 등 13건 등이다. 일제 헌병 경찰이었던 아쿠타가와 나가하루(芥川長治)가 1939년 두루마리 형태로 묶어 보관한 문서들이다.
1907년 영국 데일리 메일 특파원인 프레더릭 아서 매킨지가 의병 항쟁의 현장인 경기 양평 등에서 찍은 의병 사진 두 장. 매킨지는 군대 해산 직후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항일 의병 투쟁의 현장을 직접 누볐다. 일제의 만행을 목도했고, 의병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항일투쟁을 종군한 유일한 기자가 매킨지였다. 의병 사진도 이 두 장이 유이(唯二)하다.|독립기념관 자료
■재현된 분서갱유
이중 유중교(1832~1893·유인석의 스승)와 최익현(1843~1906)의 편지 등 4건에 붙인 아쿠다가와의 주석이 눈길을 끈다.
즉 “…1918년 4월 의주헌병대가…국경을 넘어…<의암집>을 편집하는 곳을 급습하여 압수한 다수의 불온문서 중 일부”라 했다.
이를 두고 어윤적(1868~1935)의 <극재일기>는 “일본군이 서간도로 망명한 유인석·유중교 가문의 집을 습격해서 서책을 불태우고 <의암집> 50여 질을 탈취했다”면서 “분서갱유의 화를 오늘 다시 본다.”(1918년 음1월 20일)고 개탄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의 의병사진. 매킨지의 의병 사진을 재현했다.
군대해산 직후(1907~)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항일 의병 시기에 의병장들이 주고받은 ‘육필 편지’가 심금을 울린다.
13도 창의군의 제2대 총대장이었던 허위(1854~1908)가 경찰에 체포되자 세째형 허겸(1851~1939)은 “분통해서 죽고자 해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5월17일)고 토로했다. 그러나 허겸은 “힘을 더 쏟고…같은 마음으로 협력해야…국권을 회복하고 생령을 보전하며, 강토를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의병 부대의 단합을 강조했다. 노재훈도 “우리 대한의 일은 어찌 이에 이르도록 참혹하냐”고 가슴을 치면서도 “전국의 동지들이 각골명심하여 흥복(興復)의 희망을 일으켜야 한다”(5월24일)고 다짐했다.
항일의병 사진을 남긴 매킨지는 원래 극렬 친일파였다. 일본정부는 러일전쟁 종군을 신청한 다수의 서양기자 가운데 매킨지 등 2~3명에게만 취재증을 발부했다. 매킨지는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잇달아 송고함으로써 일왕의 훈장까지 받았다.|(1920년 12월 임시정부 파리위원회가 간행한 ‘구주의 우리사업-정의의 친우’에서)
이번에 환수·공개된 자료는 헌병(혹은 헌병경찰)을 지낸 아쿠타가와(혹은 그의 사주를 받은 부하들)가 1907~1909년에는 의병 탄압 과정에서, 1918년에는 만주의 <의암집> 간행 장소에서 각각 탈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환수 자료는 당대 내로라하는 의병장들이 친필로 주고 받은 문서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격문이나, 문집, 사서 등에 수록된 자료는 더러 있지만 유력한 의병장·독립투사들이 항일투쟁에 나서는 심경과 각오, 또한 격리·분산된 상황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 등을 이처럼 생생하게 써내려 간 문서는 보기 드물다.”(박민영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김상기 충남대 명예교수)
정미7조약의 각서 조항에 따라 군대가 해산되자(1907년 8월1일) 대한제국 서울시위대 제1연대 1대대장인 박승환 참령은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軍不能守國 臣不盡忠 萬死無惜)”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독립기념관 자료
■일제가 인정한 친일파 기자
필자는 106~115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의병 문서 자료를 보고, ‘한 장의 사진’을 떠올렸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항일 의병 사진의 모델이 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국 <데일리 메일> 특파원인 프레더릭 아서 매킨지(1869~1931)가 1907년 항일투쟁에 나선 의병을 현장에서 찍은 2장 중 한 장이다. 이 두 장의 사진 외에 남아있는 항일 의병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1869년 캐나다 퀘벡주에서 태어난 매킨지는 영국·스코틀랜드계 언론인이다. 영국 <데일리메일> 극동특파원이었던 매킨지는 러·일전쟁(1904~1905)의 종군기자로 한국에 왔다. 당시 영국은 일본의 맹방이었고, 매킨지 역시 대표적인 친일파 기자였다.
프랑스 ‘르 프티 주르날’지의 한국군 봉기(1907년 8월1일) 그림. 박승환 참령의 자결 순국 소식에 봉기한 한국군은 무기고를 탈취해 총검과 탄약으로 무장했다. 한국군인들은 병영을 장악했고 3시간여의 치열한 접전 끝에 성문을 빠져나가 각 지방의 의병과 합세한다.
다수의 서양기자들이 러·일전쟁의 종군을 신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매킨지 등 2~3명에게만 종군을 허락했다.
“…일본 신문들은 일본군을 칭찬하는 매킨지의 기사를 매일 받아 썼다. 일본의 조야가 매킨지를 환영했고, 마침내 일왕의 훈장까지 받았다.”(1920년 12월 임시정부 파리위원회가 간행한 ‘구주의 우리사업-정의의 친우’에서)
매킨지는 ‘러시아 전쟁포로들을 관대하고 다루고, 규율마저 확실한 일본군’을 극찬하는 글을 계속 실었다.
그런데 러·일 전쟁 후 귀국했던 매킨지가 1906년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울을 탈출, 각 지방으로 내려간 한국 군대는 그곳 의병들과 합세해서 일본군과 경찰 지소를 공격했다. 그와 같은 봉기 소식은 대표적인 항일신문인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알려졌다. 더러는 지방에서 올라온 의병들이 전투 소식을 전했다.
■군대 해산과 박승환 참령의 자결
매킨지가 친일파에서 항일 투사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1907년 일어났다,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고(7월20일) 정미7조약(7월24일)에 따라 한국 군대가 해산됐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8월1일 오전 8시였다. 항전의 방아쇠를 당긴 이는 서울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1869~1907)이었다. 대대장실에서 대성통곡한 박참령은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軍不能守國 臣不盡忠 萬死無惜)”는 유서를 남긴 뒤 권총으로 자결 순국했다.
전국 곳곳에서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패주한 일본 진압군이 온 마을을 유린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이야기가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매킨지는 믿을 수 없었다. 매킨지는 “러·일 전쟁 때 만난 일본군은 자제력과 군기가 훌륭했다”면서 그같은 사실을 믿지 않았다.|사진은 독립기념관 자료. 기사는 ‘매킨지의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서
당번병의 “대대장 자문(大隊長 自刎·자결)!” 외침이 도화선이 됐다. 연병장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무기고 문을 부수고 무장했다. 삽시간에 병영을 장악한 한국군은 일본군과 3시간 가까이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이날 전투로 일본군 40여명이 사상했고, 한국군은 사상자 170여명(전사 70여명, 부상 104명), 포로 600명에 달했다.(조선주차군사령부 편, <조선폭도토벌지>·1913) 성벽을 넘어 탈출한 부대원들은 지방으로 속속 내려가 그곳 의병들과 합세했다.
매킨지는 갈수록 의병 관련 소식이 이어지고 지방에서 항전을 외치는 격문이 서울로 전달되자 기자적인 호기심이 발동된다. 게다가 하세가와 요시미치 일본 주둔군 사령관이 가혹한 처벌을 예고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종군’을 결심힌다.|매킨지의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서
■‘의병봉기, 일본군 학살’의 진실?
어찌됐든 군대는 해산되었고, 서울은 평온을 되찾는 듯했다. 매킨지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서울 시민들은…무기력한 그들은 조국을 빼앗기는 꼴을 보고도 감히 한마디 반항도 하지 못했다.…일본군이 거리를 누볐고, 백의민족은 발걸음 조차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분위기가 수상해졌다.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패주한 일본 진압군이 온 마을을 유린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이야기가 흘러들어왔다. 매킨지는 믿을 수 없었다.
의병 전쟁 현장을 찾아가던 매킨지는 일본군에 의해 마을 전체가 소실되어 폐허가 된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매킨지 촬영 사진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무척 의심스러웠다…나는 러·일 전쟁 때 일본군에 종군했을 때 일본 군인들의 자제력과 군기가 훌륭한 것에 감탄했다. 그들은…난폭한 행위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갈수록 의병 관련 언론 보도가 봇물처럼 이어지고, 항전을 외치는 온갖 격문이 서울로 전달되었다. 급기야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가 지방 폭도들의 소탕을 공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마을 주민들은 매킨지에게 그들이 겪은 끔찍한 이야기를 증언했다. “일본군은 집을 불태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노인을 쏘아 죽였다. 한 임산부는 해산이 가까워 집에 누워있다가 참변을 당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명색이 기자, 그것도 한국 특파원이었던 매킨지는 가만 앉아있을 수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꽤 심각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 전투를 직접 보기로 결심했다.”
쉽지 않았다. 통감부는 ‘신변 안전’을 이유로 통행권 발부를 거부했고, 영국 정부까지 동원해 매킨지의 종군을 막으려 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 모두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다. 그럼에도 매킨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말 두 필 및 당나귀 한 필, 그리고 수행일꾼 4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충주와 제천 사이의 마을 중 5분의 4가 불에 탔다. 미처 피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이 불에 타 죽었다. 총칼을 든 일본군이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부인을 능욕했다. 심지어 10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총을 쏴 죽인 천인공노할 아낙의 증언도 들었다.
■속속 드러나는 진실
매킨지는 취재길에 잿더미가 된 고을과, 주민들의 일관된 ‘일본군 만행’ 증언을 접하며 충격에 빠진다.
“(경기) 이천으로 향하는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70~80가구 정도의 마을은 기둥 하나도 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벽안의 기자’(매킨지)을 찾아와 그들이 겪은 끔찍한 이야기를 당당하게 증언했다.
“일본군은 집을 불태우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노인을 쏘아 죽였다. 한 임산부는 해산이 가까워 집에 누워있다가 참변을 당했다…또 어떤 청년은 불타는 집에 뛰어들어가 가문의 족보를 구하려다가 일본군이 쏜 총에….”
의병이 출몰한다는 경기 양근(양평)에 도착한 매킨지는 마을 곳곳에 10여개의 적십자 깃발이 달린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 매킨지는 남루한 차림의 항일 의병들을 만났다. 6명의 총이 제각기 달랐는데,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매킨지의 <대한제국의 비극>(1908년)에서
충북 제천과 충주의 상황도 끔찍했다. 매킨지는 “충주와 제천 사이의 마을 중 5분의 4가 불에 탔다”고 전했다. 이 와중에 미처 피하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뿐이랴. 총칼을 든 일본군이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부인을 능욕했다. 심지어 10살짜리 여자아이에게 총을 쏴 죽인 천인공노할 증언도 들었다.
항일 의병의 발걸음을 뒤쫓던 매킨지는 권총 습격을 가까스로 피하기도 했다. “강원도 원주…옥수수 밭 주위에 서있는 소나무 뒤에서 어떤 남자가 무언가 만지작 거리다가…잠시 후 ‘핑’하는 소리가 내 귓전을 스치고 지났다.”
매킨지는 “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고 했다. 의병들은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겠지만,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다.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
매킨지 일행은 의병 출몰이 예상된다는 ‘경기 양근(양평)’으로 들어섰다.
10여개의 적십자 깃발이 마을 곳곳에 걸려있었다. 일본군이 적십자 깃발을 단 집은 불태우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아 집집마다 걸어두었다는 것이다. 매킨지는 양근의 한옥 뜰에 숙소를 정했다.
그날 오후 마침내 매킨지의 바람이 이뤄졌다.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했던 의병 5~6명이 나타나 매킨지 앞에 도열해 인사했다.
“18~26세 사이의 청년들이었다. 준수하고 훤칠한 청년은 구식 군대 제복 입고 있었다. 다른 두사람은 군복 바지, 두사람은 초라한 누더기 한복 차림이었다…여섯 명의 총이 제각기 달랐는데 녹까지 슬어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의병장은 매킨지에게 “…제발 무기 좀 구해달라.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매킨지는 “기자의 직업윤리상 그럴 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매킨지는 대신 밤이 새도록 부상 의병들을 치료해주고, 그들의 옷도 빨아주었으며 음식도 먹여주었다.
매킨지는 이들을 보고 “희망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이 사람들이 매우 측은하게만 보였다”고 했다. 이런 무장으로 일본 정규군과 싸우다니…. 그러나 매킨지는 곧 “의병의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고 그들의 애국심을 보았다”고 했다.
“그들은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라 했다.”
매킨지는 “그들을 가엾게 여겼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그들은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고 밝혔다. 밤중에 의병대장이 매킨지를 찾아왔다. 의병장은 매킨지에게 “…제발 무기 좀 구해달라.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매킨지는 “기자라는 직업윤리상 그럴 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다.
양근(양평)에서 의병들과 헤어진 매킨지는 강변에서 다시 일군의 의병을 만난다. 매킨지는 의병들을 모아 놓고 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의병’ 사진이다.|매킨지의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서
■그가 만난 의병장은?
매킨지가 만난 의병장은 누구일까. 매킨지가 방문한 1907년 8~10월 사이에 양근(양평)에서 활약한 의병부대를 꼽아 보면 어떨까. 우선 1907년 8월3일 지평분파소와 관사 등을 공격한 조인환 의병장(1878~1909)이 우선 떠오른다. 그의 뒤를 이은 퇴역병 출신의 신창현(1881~?)과 해산군인 등 19명을 거느리고 활약한 김영준(1868~1910) 등도 있다. 이밖에 김현규·김현벽·최태평·김춘수(이상 생몰년 미상) 의병장 등도 있다. 그 분들 중 주인공이 있을까.
어찌되었던 매킨지는 “그날 밤이 새도록 부상병을 치료해주고, 그들의 누더기 옷을 빨아주었다…음식도 먹여주었다”고 썼다. 다음날 의병들은 만날 때의 그 ‘보잘것 없는 장비와 열악한 차림으로’ 열지어 떠났다. 매킨지는 “의병들이 우리 일행이 소지했던 무기들을 가져갔을까 잠깐 의심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의병들은 아무리 처지가 궁하다 해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무례한 짓은 자행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항일 의병 사진을 찍은 매킨지는 돌아오는 길에 의병 중상자 2명이 일본군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되었다는 마을 주민의 증언을 듣고 몸서리쳤다.|매킨지 촬영 사진
■역사적인 사진 ‘찰칵’
그날 숙소를 빠져 나온 매킨지 일행이 강변에서 닿았을 때였다.
또다른 의병들에게 포위됐다. 꼭 쏠 것 같았다. 매킨지는 큰 소리로 “난 영국인이오!”라 외쳤다. 다가온 20여명의 의병 중 신식 제복을 입은 청년이 지휘관이었다.
“그중 못생긴 의병이…말했다. ‘당신이 소리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소. 막 당신을 쏠 참이었소’라고….”
일본군이 작성한 <조선폭도토벌지> 등에 따르면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8~1908년 12월 사이 전사한 항일 의병수가 무려 1만5000여명 달한다.
14~16세 정도 밖에 안 된 소년도 있었다. 매킨지가 불쑥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나는 그들을 한 곳에 서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이 사진을 보면 그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매킨지가 이때 천고에 길이 남을 의병 사진을 찍은 것이다. 그들과 역사적인 만남을 끝낸 매킨지는 전날 항일 의병과 일본군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마을에 도착했다. 그 전투에서 의병 5명이 부상을 당했는데, 그중 3명은 매킨지가 새벽까지 치료해준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2명은 일본군에게 붙잡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 끔찍했다.
“일본군이 총검으로 중상자 두 명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찌르고 또 찔렀습니다. 그들의 몸을 조각조각을 냈습니다. 주민들이 시체를 주워 모아 묻어 주었습니다.”
매킨지의 항일 의병 현장기사는 물론 영국신문에 실리지 못했다. 그러나 매킨지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대한매일신보에 간접적으로 현장분위기를 전했다. 기사에 등장하는 ‘한국의 내륙을 방문하고 돌아온 외국기자’는 바로 매킨지를 가리킨다.
■학살의 생생 증언
사실 한말 의병 투쟁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자가 나왔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본군의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군대해산 직후인 1907년 8~1908년 12월 사이 전사한 항일 의병수가 1만5189명에 달한다. 그것은 일본군 자료일 뿐이다.
“희생된 항일 의병의 수가 10만명이 넘고, 양민 피살자는 독립 후가 아니고서는 그 통계를 구할 수조차 없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기록도 있다. 안중근 의사(1879~1910) 역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15가지 죄상 중 9번째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의병과 그 가족의 희생자가 10만명에 이르게 한 죄’를 꼽았다.
매킨지는 의병과의 인터뷰 등 항일 전쟁의 생생 취재기를 담은 <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을 펴냈다. 유명한 의병 사진은 그 책에 실은 것이다.|독립기념관 자료
또한 대한매일신보와 <한국통사>, <매천야록> 등 여러 사료에서도 의병 및 양민 학살 기록은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제3자, 그것도 서양 기자가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누비며 기록한 생생자료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상당수가 과장 혹은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치부되었을 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매킨지의 발품 기사와 사진은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객관적인 사료가 되는 것이다. 천고에 빛나는….
매킨지는 1920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친한단체인 ‘한국친우회(Friends of Korea)’의 창립을 주도한다.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창립식에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 귀족과 각계 인사 총 62명이 참석했다. 매킨지는 이 자리에서 일제의 잔학성을 조목조목 따지며, 한국의 독립을 촉구했다.
항일 의병 현장을 몸소 경험한 매킨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물론 의병의 봉기와 일본군의 만행 등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는 매킨지의 기사는 영국 신문(데일리 메일)에 실리지 못했다. 매킨지는 다른 창구를 찾았다. 항일의 기치를 세우며 투쟁한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의 대한매일신보였다.
“한국의 내륙을 목격하고 귀국한 사람의 목격담인데…‘어느 날 저녁 의병 10명을 만났다…의병들은 민족을 구하지 않으면 중도에 죽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은 약탈하고 능욕하고 살인하고 있었다. 이 강도만도 못한 무리를…. 그들은 왜 그렇게 악하고 미친듯한 정책을 실시하는가….”(대한매일신보 영문판 ‘코리아데일리뉴스’ 1907년 9월24일)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한국의 내륙 상황을 전한 사람’이 바로 ‘매킨지’이다. 그것에 만족할 매킨지가 아니었다.
그때의 생생 취재기를 담은 <한국의 비극(Tragedy of Korea)>(1908)을 펴냈다. 유명한 의병 사진은 그 책에 실은 것이다.
한국친우회 칭립식에서 참석자들은 한국인의 정의 옹호와 자유회복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결을 채택했다. 매킨지는 창립촣회에서 간사로 선출됐다.
■친일파가 항일투사로
항일 투사로 변신한 매킨리는 1919년 3·1운동사를 중심으로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1920년)을 발간한다.
그해(1920년) 10월에는 영국에서 친한단체인 한국친우회(Friends of Korea)가 발족을 주도한다.
영국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창립식에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 귀족과 각계 인사 총 62명이 참석했다. 창립식에서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면서 한국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한국인의 자유 회복을 위한 지원 등을 결의했다. 매킨지는 ‘한국친우회’의 간사로 활약했다.
매킨지는 <대한제국의 비극>(1908)과 <한국의 독립운동>(1920)에서 “일본에서 군부가 독재하면…만주를 침략하고 중국에까지 확대되어 끝내는 커다란 분쟁을 야기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면서 “극동에서 전재잉 나면 대부분의 짐을 미국이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며 언론활동을 벌이던 매킨지는 1931년 네덜란드 제이스트에서 타계했다. 매킨지는 1908년 <대한제국의 비극>을 쓰면서 소름끼치는 예언을 했다.
“일본에서 군부가 독재하면…만주를 침략하고 중국에까지 확대되어 끝내는 커다란 분쟁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매킨지는 “한국민에게 기회만 주어지면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지 보여줄 것”이라고 무한 신뢰를 보냈다.|매킨지의 <한국의 독립운덩>(1920)에서
매킨지는 “나는 ‘군국주의파가 일본 정책을 장악하고 있다’고 본다. 이 주장을 ‘반일적’이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반일의 피고가 되겠다”고 했다. 그 예언은 20여년 뒤 현실로 다가왔다. 매킨지의 또다른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이 민족(한국인)에게 기회만 주어지면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보여줄 것이다.”(<한국의 독립운동>·1920)
제2, 제3의 친일파가 곳곳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매킨지 같은 분 보기에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매킨지의 사진이 담긴 그 의병들의 눈도 바라보기도 두렵다. (이 기사를 위해 김상기 충남대 명예교수, 박민영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강혜승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유통조사부장, 정나리 토지주택박물관장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김상기, ‘한말 일제의 침략과 의병 학살’, <역사와 담론> 52, 호서사학회, 2009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심철기, ‘<대한제국의 비극>에 나타난 1907년 의병전쟁과 의병’, <한국민족사연구> 103권, 한국민족사학회, 2020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의병 전술의 변화 과정’,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권45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토지주택박물관 편, <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ⅠⅡⅢ), 20
조선주차군사령부 편, <조선폭도토벌지>, 1913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1904~1911), 한양대 박사논문, 2002
조동걸, <한말의병연구>, 독립운동사교양총서2, 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1)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전쟁을 선포하다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들꽃> 해제 |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돼지감자꽃으로, 예쁜 꽃과는 달리 그 뿌리에는 돼지코처럼 못생긴 감자가 달려 있다. 그래서 '뚱단지'라는 별명이 붙었나 보다. |
ⓒ 박도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1905년 고종 황제(광무황제)는 을사늑약을 끝내 재가하지 않았다. 고종 황제는 이 늑약에 대해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했고, 국제사회에 호소해 이 조약이 무효임을 알리고자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3인의 밀사를 파견했다.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예심판사 이준, 전 주러시아공사관 이위종 3인이었다.
이들 세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조선 정부(대한제국)가 믿었던 러시아마저도 일본 측에 고종 황제의 밀사 파견을 밀고하고, 만국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에게 전문을 보내 밀사들의 참가신청을 거절케 했다. 국제관계는 그제나 이제나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냉혹한 힘의 논리와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그때그때 적과 동지 관계로 흘러갔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른 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케 했다. 이 한일신협약은 조선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1907년 7월 24일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체결·조인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까지 확실하게 장악한 뒤, 곧이어 조선의 군대까지 해산 시켰다.
▲구한말 의병들로, 대부분 농사꾼, 유생, 포수들이었다. |
ⓒ 눈빛출판사 제공 |
의병 연합전선
일제 강압에 따른 고종 황제 퇴위, '한일신협약' 체결, 군대 해산 등은 조선 백성들의 성난 민심에 불을 붙였다. 을미사변 이후 그동안 줄기차게 이어져 온 의병투쟁은 마침내 대폭발해 의병전쟁으로 치달았다. 이전부터 의병투쟁에 나섰던 농민들과 유생에, 군대해산으로 해산 군인들이 새로 참여해 의병의 전투력은 대폭 강화됐다. 여기에 '총포 및 화약단속법'의 제정으로 생업을 잃은 포수들과, 금광이나 철도건설 공사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도 집단으로 의병활동에 참여해 기존 의병부대는 천군만마의 원병을 얻었다.
허위는 1907년 9월, 연천, 적성, 양주, 개성, 삭녕, 안협, 토산, 이천(伊川) 등 경기 북부와 황해 남부, 그리고 강원 동북부 일대를 근거지로 의병 활동을 폭넓게 펼쳤다. 허위는 이 일대를 누비면서 새로운 의병을 모집해 전력을 강화하는 한편, 이들 지역 의병대를 통솔하여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며, 또 한편으로는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했다. 허위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이 지역을 활동무대로 특별히 선택한 것은 서울과 근접한 곳이기에 군사와 정치면에서 일제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고, 서울에는 각국 영사관이 많아 대외적으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허위는 다수의 해산군인들을 받아들이거나 이들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펼치며 전력을 극대화 시켰다. 강화 진위대 소속으로 동료들과 봉기한 연기우(延基羽) 해산의병부대,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규식(金奎植) 의병부대 등을 포섭한 것은 장차 전국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결성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밖에도 허위의 의병부대는 여주, 이천(利川), 양평, 양주, 포천 등 경기도 일대와 원주 등 강원도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이인영(李麟榮)과 이은찬(李殷贊) 의병부대와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구미 임은동의 왕산 허위 선생 기념공원 |
ⓒ 손현희 기자 제공 |
의대조(衣帶詔)
허위는 의병투쟁과 함께 양면작전으로 정치외교활동도 펼쳤다. 1907년 10월 하순에는 전국의 백성들과 각국 영사관에 격문이나 선언문 등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열성적인 활동으로 허위는 경기도 의병의 총수로 부상했다.
1909년 11월 하순, 허위와 연계된 각 지역 대표 의병장은 평안도·황해도 지방의 박기섭(朴箕燮), 장단 지역의 김수민(金秀敏), 철원의 김규식, 지평과 가평 일대의 이인영, 충청도 제천의 이강년(李康年), 원주의 민긍호(閔肯鎬)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막강한 허위, 이인영 두 의병부대를 주축으로 전국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13도 창의군은 서울 진공에 앞서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어 의병 항일전의 합법성을 국내외에 공포하였다. 허위는 이 선언문에서 의병전쟁은 고종 황제의 칙령 따른 조선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의당 국제법상 교전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근거는 허위는 이미(1907.4.) 고종황제로부터 의대조(衣帶詔 ; 임금이나 황제가 옷에다 써서 내린 명령)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의대조에는 '거의(擧義)'두 글자만 쓰여 있었다.
또 13도 창의총대장 이인영은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보냈다. 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일제를 몰아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밝히고 있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조국에 몸을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야만 일본인의 잔혹한 만행과 불법행위를 전 세계에 호소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여 진보와 인간성의 적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일본인과 그 주구들과 야만적인 그들 군대를 격멸하는 데 힘을 모야야 할 것입니다. …"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각 |
ⓒ 박도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부분은 안동대학교박물관 발행 <왕산 허위의 나라사랑과 의병전쟁>, 금오공과대학 선주문화연구소 발행 <왕산 허위의 사상과 구국의병항쟁> 등을 참고로 하여 썼음을 밝힙니다.스마트하게 오마이뉴스를 이용하는 방법!☞ 오마이뉴스 공식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오마이뉴스 모바일 앱 [ 아이폰] [ 안드로이드](2)
죽창으로 무장한 의병군,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다
[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들꽃> 해제 |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쑥부쟁이꽃, 이 꽃은 흔히 '들국화'로 부르는데, 식용과 약용으로 가난한 백성들 고된 삶의 애환이 담긴 꽃이다. |
ⓒ 박도 |
강화도조약
조선은 1876년 일본의 강압에 따른 강화도조약으로 개항한 이후 계속 비틀거렸다.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에 이어 그 이듬해 을미사변, 단발령, 1896년은 아관파천으로 국난을 맞았다.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국호 명칭으로는 대영제국이나 대일본제국과 동렬에 서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그 이름에 걸맞은 자주국이 되지 못하고 한낱 강대국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그것은 이름뿐, 부국강병의 나라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항 이래 가장 집요하게 침략의 마수를 뻗친 나라는 다름 아닌 이웃 일본으로, 그들은 '동양평화'니 '보호'니 하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세우며 계속 조선 조정에 잽을 마구 날렸다. 1905년 을사년에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조정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압적으로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이 되었다. 통감부는 조선의 외교권뿐 아니라, 조선의 내정도 관장하여 조선(대한제국)은 껍데기로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907년 7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켰다. 그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숨통을 죄기 위해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 행정권 및 일본 관리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압으로 체결한 뒤 대한제국 군대까지 모두 해산시켜 버렸다. 그제부터 조선은 식물인간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죽는 날만 기다리는 꼴이었다.
이런 가운데 나라의 정세를 읽은 을사오적을 비롯한 지배계층들은 비틀거리는 조선왕조에 비수를 꽂고 매국노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되살리겠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흰옷 입은 백성들은 화승총, 죽창, 칼과 낫을 들고 다시 일어섰다. 그들은 갑오, 을사 전기의병에 이은 후기 의병들로 을사, 정미의병들이었다.
▲서울 망우리 소재 '13도 창의군탑' |
ⓒ 박도 |
십삼도창의대진소
1907년 11월, 허위·이인영 두 의병 지도자는 전국 각지 의병장들에게 의병부대를 통합해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한 다음 서울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발송했다.
이 격문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로부터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로 속속 집결키로 했다. 총 48진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그 내역을 보면 강원도 민긍호 의병부대 2천명. 이인영 부대 1천 명을 비롯하여 약 6천 명이었고, 경기도 허위 부대 약 2천 명, 충청도 이강년 부대가 5백 명, 황해도 권중희(權重熙) 의병부대가 5백 명, 평안도 방인관(方仁寬) 의병부대가 80명, 함경도 정봉준(鄭鳳俊) 의병부대가 80명, 전라도 문태수(文泰守) 의병부대가 약 1백 명 등이었다.
양주에 집결한 전국 의병장들은 12월에 회의를 열어 통합의병부대로서 십삼도창의 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만들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에 추대한 뒤 전체적인 편제를 갖추었다.
십심도창의총대장 이인영
전라창의대장(전라도) 문태수
호서창의대장(충청도) 이강년
교남(嶠南)창의대장(경상도) 신돌석(申乭石)
진동(鎭東)창의대장(경기, 황해도) 허위
관동창의대장(강원도) 민긍호
관서창의대장(평안도) 방인관
관북창의대장(함경도) 정봉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약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로 이들은 서울진공작전 개시 직전에 개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진공작전
▲전라창의대장 문태수 의병장 흉상(경남 함양, 사상중고 앞) |
ⓒ 박도 |
십삼도창의대진소는 전체적인 편제를 정한 직후부터 즉시 서울진공작전에 돌입하였다. 이때 허위는 휘하의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밖에 집결하도록 조치한 뒤, 스스로 3백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일제 통감부를 깨부수고자 1908년 1월말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선발대는 후속 대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정규 일본군의 선세 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구식무기로 무장한 의병대들은 기관총 등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뚫을 수가 없었다.
이 명재경각의 급박한 상황에서 후발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인영은 아버지의 집상을 위해 문경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수가 적진 앞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귀향하는 일은 그 당시 유생으로서 허용될 일로 여길 수 있으나, 이런 점은 바로 국난을 타개치 못한 근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허위는 이인영으로부터 전권을 물려받았지만 일본군에게 사전 정부 누출로 그들은 오래 전부터 서울 외곽의 철저한 방비, 한강 선박 운행 금지 등으로 후속 의병부대의 서울진공 참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허위의 서울진공 선발대 3백 명은 전력의 열세로 끝내 패퇴하고 말았다. 이 작전은 전술적으로 실패하였다. 화승총이나 죽창으로 무장한 위 의병이 정규 일본군과 대적하기에는 당랑거철(螳螂拒轍)과 같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전술적으로 보면 당시 의병들은 일본군과 맞선 대응보다 게릴라전과 같은 유격전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병들의 그 기개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 서울진공 연합작전 실패에도 신돌석, 전해산(全海山) 등, 각 지방 의병부대의 항전은 망국의 그날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칠 줄 몰랐다.
▲허위가 의병활동을 했던 경기도 임진강 유역 |
ⓒ 박도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스마트하게 오마이뉴스를 이용하는 방법!☞ 오마이뉴스 공식 SNS [ 페이스북] [ 트위터]☞ 오마이뉴스 모바일 앱 [ 아이폰] [ 안드로이드]
정미의병(丁未義兵)은 1907년 (융희 1년 )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칠조약 강제 체결, 군대 해산 등을 계기로 1907~1910년 사이 발생한 항일구국적 근대 의병봉기다.
배경
1905년(광무 10) 통감부 설치 후 조선 병합(경술국치)을 서두르던 일제는 1907년 6월 일어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폐위하고 아들 이척을 순종으로 즉위시켜 허수아비로 삼는다. 그 후 정미칠조약으로 한국 통치권의 대부분을 빼앗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해산시켜 대한제국을 완벽히 무력화시킨다. 1907년 8월 1일 강제해산 당일,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그 일을 계기로 해산군인들이 서울, 원주, 강화 진위대 등지에서 무장봉기하여 각지의 의병부대에 합류한다. 1906년경에 수그러들었던 을사의병이 규모면•전력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성장을 한 것이다.
구성
- 대한제국군
- 유생
- 농민
전개
시작
정미의병의 본격적인 확산은 8월 2일, 원주진위대의 봉기로 시작된다. 8월 2일 원주진위대 군인들이 일제히 무기고를 점령한 뒤 그곳 민병과 합세하여 원주시를 장악하고. 여주 주대 군인들도 이튿날 본대에 합류하였다. 다음으로 강화분견대 군인들이 8월 10일 대일항전에 나서 한때 강화성을 장악했지만 일본군의 맹공을 받고 와해되었다. 홍주분견대는 집단탈영을 시도하여 의병대에 합류를 시도하였고, 진주진위대도 봉기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각처에서 봉기한 해산군인들은 이후 각자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일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지역별 활동
경기,강원도
민긍호, 박준성, 손재규 등 원주진위대 해산군인들은 각자 의병진을 편성하여 경기,충청,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고, 이강년, 신돌석 등도 경상, 강원도 일대에서 일본 군대가 조선지형에 어두운것을 이용해 각각 항일유격전을 펼쳤다. 경기도에서는 허위가 강화분견대 군인들을 포섭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하며 강력한 항전기반을 형성하였다.
전라,경상도
현 남한 지역에서는 전라,경상도에서의 활동이 가장 큰 듯 하다. 전라도에서는 기삼연이 장성에서, 전해산이 나주에서, 김태원, 심남일은 함평에서, 문태수는 무주에서, 이석용은 임실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경상도에서의 문태수, 이석용 의병진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경상남도 내륙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한,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접경지를 중심으로 한 공주·회덕·연산·진잠 등지에서는 김동신이 유력한 의병진을 편성, 활약하였다.
현재 북한지역(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에서는 박정빈·이진룡이 평산에서 봉기하였고, 평민출신 김수민 의병진이 경기도, 황해도 일대에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평안도의 경우에는 김여석 의병장이 덕천·맹산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채응언은 함경도·평안도 접경지대에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함경도 의병항일전은 홍범도·차도선 등이 삼수·갑산 등지에서 산포수 와 광산노동자들을 규합하여 강력한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최재형은 경원에서 이범윤·엄인섭·안중근 등과 함께 의병진을 편성, 일본군과 신아산 근교에서 교전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3도 창의군 편성
1907년 9월 강원도 원주에서 의병군을 모아 활동하던 이은찬·이구재 등이 경북 문경의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각도의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11월에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모인 각도의 의병부대는 이인영을 13도창의군 대장으로 추대하고 전국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서울진공작전에는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관동의병대장 민긍호, 호서의병대장 이강년, 교남의병대장 박정빈, 경기·황해·진동 의병대장 권중희, 관서의병대장 방인관, 관북의병대장 정봉준,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등였다. 총병력은 10,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 가운데는 해산된 군인 3,000명도 포함되었다. 1908년 1월 이인영은 먼저 각국 공관에 의병부대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보내는 한편, 군사장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발대가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후속부대의 지원이 없어 퇴각하고 말았다. 이때 부친의 부음을 받은 총대장 이인영은 지휘권을 허위에게 맡기고 귀향해버렸다. 이후 의병들이 여러차례 이인영을 찾아가 복귀를 권유하였으나 아버지 3년상 때문에 이를 거절하였다. 결국 이들은 서울진공에 실패하고 총대장이 없는 연합군은 다시 전국으로 흩어졌다.
일제에 의한 진압
항일의병이 계속 확산되자 위험을 느낀 일제는 남한 대토벌작전을 실행한다.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간 일본군은 남한지역(전라남도) 의병에 대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개시한다. 당시 한반도 북부지방에 있던 의병들은 합방을 전후하여 만주와 연해주 등 국외로 옮겨갔지만, 남한의 의병들은 남도에서 크게 활약하고 있었다. 한일합방을 앞둔 일본은 가장 강력한 무력저항세력인 의병부대들을 제거하기 위해 보병 2개 대대와 해군함정까지 동원, 조직적이고도 대규모적인 작전을 실시했다. 이들은 포위작전을 통해 마을을 수색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모두 죽였다. 또한 민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전국을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어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잡아갔다. 이로 인해 의병들은 국외로 이동하여 훗날 독립전쟁에 참여하지만 남한지역에서의 의병은 자취를 감추었다.[1]
의의
정미의병은 이전 의병운동(을사의병,을미의병 등)에 비해 다음과 같은 뚜렷한 특징이 있다.
첫째, 의병진 성원이 다양해진 점이다. 유생 이외에도 해산군인·평민·천민의병장 등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인·공인·노동자·농민 등 전 계층이 의병항일전에 동참함으로써 전면항일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둘째, 해산군인이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무기와 편제가 정예화되어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의병 주도계층이 다양해짐에 따라 의병진이 점차 소규모화, 다원화되어 산간지대를 근거로 하는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넷째, 1910년 경술국치 때까지 명맥을 이어오던 정미의병은 남한 대토벌작전에 의해 점차 북상하여 남북만주·연해주 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항전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갔다. 그 후 1920년대의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의병들은 독립군으로 계승되어 발전하였다. 조선시대 의병과 대한제국군 등이 독립군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독립군은(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중국군 등과 함께 항일전쟁을 지속한다.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40905050005675
(2) https://v.daum.net/v/20141030151505026 오마이뉴스. 2014. 10. 30.
(3) https://v.daum.net/v/20141103094502325 오마이뉴스. 2014. 11. 3.
'남국 > 대한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대한제국 문화유산 (1)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 환구단 (141) | 2024.11.26 |
---|---|
2. 대한제국의 강역 (1) 대한제국의 북계 (46) | 2024.11.08 |
1. 대한제국 (4) 1905년 을사늑약 (21) | 2024.09.07 |
1. 대한제국 (3) 1897년~1904년 광무개혁 (0) | 2024.05.30 |
1. 대한제국 (2) 1898년 만민공동회, 1896년~1898년 독립협회 (1) | 2024.05.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