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고종은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른 뒤,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지었다. 고종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근대화를 시도했지만, 대한제국은 단 13년을 버티다 1910년 8월(경술국치) 역사에서 사라졌다. 오늘날 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대한제국은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제국이 추진했던 중립국 외교를 일제 침략주의에 대항한 평화운동의 시원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12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대한제국의 산업근대화와 중립국 승인 외교’를 주제로 1900년 전후 대한제국이 펼친 외교 전략을 분석해 발표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의 모습. 한국문화재단 제공
이 명예교수는 20세기를 제국주의와 이를 억제하려는 국제평화운동이 병존했던 시기로 평가했다. 그는 “1900년 미국 철강왕 엔드류 카네기가 국제평화운동기금으로 4000만파운드를 내놓고, 1901년 노벨 평화상이 처음 시상되기 시작했다”며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고조돼 국제연맹이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대한제국이 만국우편조약, 적십자조약 등에 가입해 국제사회 속에 존재를 드러내고, 유럽의 중립국인 벨기에, 덴마크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한제국은 1902년 10월 각국의 특사를 초대해 고종의 즉위 40년 칭경(경축) 예식을 열고, 이 자리에서 중립국임을 승인받으려고 했다”며 “이 계획은 콜레라가 만연해 예식이 연기되면서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국제사회의 새 조류를 의식하고, 침략적 팽창주의를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명예교수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일본이 한반도를 보호하는 것이 곧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짓 선전을 했다”며 “대한제국은 이러한 기만행위의 반대편에서 맞서는 외교정략을 폈지만, 러일전쟁의 개전으로 모든 것이 중단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중립국 외교에 실질적 걸림돌로 작용한 사건은 제1차 영일동맹이었다. 영국과 일본은 1902년 1월 각각 청과 대한제국에서 정치적·상업적 이익을 상호 보장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이 명예교수는 “영일동맹에는 대한제국의 산업 근대화를 위한 외국 차관 교섭과 이와 병행한 중립국 승인 외교를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며 “중립국 외교는 일본의 방해와 저지 정책으로 모두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한반도를 보호하는 것이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거짓 선전해 영국과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을 농락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주권수호 및 회복원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며 “대한제국의 산업화 차관 교섭 및 중립국 승인 외교는 일제 침략주의에 대항한 평화운동의 시원으로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중앙일보 입력 2017.10.12 01:41

“대한제국 → 임시정부 → 대한민국 … 근대국가 정신 이어졌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인터뷰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를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 알고 있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고 지적했다. [박종근 기자]

 

120년 전 오늘이었다. 고종 황제는 근대국가의 시발점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는 ‘국가(國家)’라는 말보다 ‘민국(民國)’이란 용어를 더 즐겨 쓰던 군주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종이 나라를 지칭하며 ‘국가’ 대신 ‘민국’이라 부른 예가 70%나 된다. 당시 고종을 직접 인터뷰했던 선교사들이 남긴 글에는 ‘고종 황제는 나라에서 지식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신하들이 잘 모르는 게 있으면 군주를 찾아가 물어볼 정도였다. 고종 황제는 그 자리에서 즉답을 하거나 무슨 책을 찾아보라고 일러주었다’고 돼 있다.

 

우리가 알던 고종과 다르다. 흔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는 그저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만 알고 있다. 역사 시간에도 그렇게 배웠다. 25년째 대한제국 역사를 연구 중인 이태진(74)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건 철저히 일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우리도 모르게 거기에 젖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1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연구실에서 이 명예교수와 마주 앉았다. 그에게 ‘대한제국의 의미와 일제의 왜곡’에 대해 물었다.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였나.“대한제국은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나라다. 1899년 이미 서울에 전차가 달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도쿄에는 전차가 없었다. 1902년에야 일본에 전차가 생겼다. 1900년대 초 러일전쟁을 위해 서울에 온 일본군이 서울 시내를 달리는 전차를 보고 신기해하는 자료 사진까지 있다. 고종 황제는 차관 도입을 추진하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력으로 근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국제사회로 진출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광산 개발과 철도 부설, 지폐 발행을 위한 중앙은행 설립, 전기와 전신 사업 등에도 엄청 애를 썼다.”
 
 대한제국을 일제는 왜 무능한 나라로 왜곡했나.“식민통치의 합리화를 위해서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자력으로 이미 진행 중이었다. 일제는 그걸 부인해야 했다. 조선이 괜찮은 나라였다면 식민지배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래서 ‘망국책임론’이란 프레임을 씌웠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고종 정부의 무능함, 둘째는 유교 사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것이다. 구시대 사상인 유교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는 야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게 식민주의 역사학의 가장 큰 굴레다.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대한제국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해 오지 않았나.”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인 고종의 사진 . [중앙포토]

 
고종 황제가 평소 ‘국가(國家)’ 대신 ‘민국(民國)’이라 지칭한 건 어떤 의미인가.“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정조가 ‘국가’ 대신 ‘민국’이란 용어를 먼저 썼다. 국가의 ‘가(家)’는 집안을 뜻한다. 고대 국가가 패밀리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왕조 시대의 패밀리가 누군가. 귀족가문, 다시 말해 사대부다. 정조가 ‘국가’ 대신 ‘민국’이라 부른 건 나라의 중심이 ‘왕과 사대부’가 아니라 ‘왕과 백성’이란 뜻이다. 정조는 만민의 왕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런 정조의 정신을 고종도 공유하고 있었다. 고종은 ‘적민(積民)이 국(國)이다(백성이 쌓이면 나라다)’는 말도 했다. 서구의 근대국가 개념과도 통하는 정신이다.”
 
 당시는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그걸 뚫고 나가는 고종의 전략은 무엇이었나.“조선의 근대화, 그리고 중립국 승인이었다. 당시는 일본과 청, 러시아와 영국 등 열강의 각축장이었다. 그걸 뚫고 가려면 덴마크나 벨기에, 스위스처럼 국제사회에서 중립국 승인을 받아야 했다. 우선 근대국가로서 위상을 갖추어야 했다. 1880년대 처음에 전기는 경복궁에만 들어왔다. 고종은 도시개조 사업을 통해 서울 시내에도 전깃불이 들어오게 했다. 전차를 시설할 때는 내탕금 20만원을 선뜻 내놓았다. 근대화한 자주독립국가로 국제사회에 데뷔하고자 했다. 실제 고종의 중립국 승인 외교는 비밀리에 강하고 치밀하게 펼쳐졌고, 뒤늦게 이를 안 일제의 방해공작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대한제국’이란 국호도 고종 황제가 직접 지었다.”
 
 왜 ‘대한제국’이라 지었나.“고종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이란 나라 이름은 뜻이 아름답고 오랫동안 썼다. 그렇지만 국호를 지을 때 태조 대왕께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 ‘조선’과 ‘화령’이란 두 이름을 제시했다. 명나라 태조가 그걸 보고 ‘조선’을 골랐다. 이런 역사를 가진 국호를 가지고 자주국으로 국제사회에 나설 수는 없다. ‘조선’만큼 고대로부터 우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韓)’이라는 글자가 있다. 그 앞에 ‘대(大)’자를 붙이자. 그래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자.’ 그러자 신하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래도 대한제국은 망하지 않았나.“아니다. 그 역시 식민사학의 관점이다. 을사보호조약이나 병합은 군사강점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가원수는 끝까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1919년 고종이 독살되자 장례식 이틀 전에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정신이 상해임시정부로 이어졌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면서 대한제국을 승계했다. 1945년 일제 압제에서 벗어나 48년에 정부수립을 다시 한 것이다. 대한제국 바로 알기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문제이자 세계사 전체의 문제다.”
 

이태진 명예교수는 12일 오전 9시30분 서울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에서 대한제국의 외교전략을 분석해 발표한다.

◆이태진 교수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석·박사,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역임, 국사편찬위원장 역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저서로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 『끝나지 않은 역사』 『동경대생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글=백성호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vangogh@joongang.co.kr

 

 

 

김민수 근대역사칼럼  | 기사입력 2012/10/29 [19:44]

고구려-발해-고려 영토 일부를 계승한 대한제국: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역사=플러스코리아]김민수 역사칼럼= 중국(中國)의 진(秦),한(漢)은 오랑캐 흉노(匈奴)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였고 중국(中國)의 당(唐) 태종은 만리장성 북쪽의 이민족국가를 복속하고 세계 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져 만리장성 북쪽의 오랑캐 돌궐(突厥)을 침략하는 등 위협적이었으므로 고구려국(高句麗國)은 중국(中國)의 당(唐)과 유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고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했다.
 
중국이 고구려국(高句麗國)과 흉노(匈奴),돌궐(突厥) 등 북방 이민족국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처럼 고구려국(高句麗國)의 연개소문(淵蓋蘇文) 또한 중국(中國)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경인 요하(遼河)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조하였는데 북간도(北間島) 지역인 부여성(扶餘城:농안)에서 시작하여 서간도(西間島) 지역의 발해만(渤海灣)에 있는 비사성(卑沙城:대련)에 이르는 1000리가 되는 장성이다. 발해국(渤海國)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이 건국한 고구려국(高句麗國) 유민(遺民)들의 주도 아래 고구려국 장군 출신의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하여 옛 고구려국 영토를 회복한 나라이며 고구려인들이 권력을 잡고 문화도 고구려국 문화를 계승한 나라이다.
 
발해인들은 항상 고구려국(高句麗國) 계승자로 자처했으며 이웃 나라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무왕(武王) 대에 왜국(倭國)에 보낸 국서에 발해국(渤海國)은 고려국(高麗國:고구려국(高句麗國))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한민족(韓民族)의 선조들이 건국한 부여국(扶餘國) 이래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라고 썼으며 왜왕(倭王)의 답서에는 귀 국이 고구려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이전 고구려국 때와 같이 우리 왜국(倭國)과 국교를 가지게 된 데 대해 매우 축하하는 바이다라고 하여 서로 발해국(渤海國)이 고구려국(高句麗國)의 계승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국(渤海國) 문왕(文王) 대에 왜왕(倭王)에 보내는 국서와 왜왕의 답서에도 발해국 국왕을 고려국(高麗國:고구려국(高句麗國)) 왕으로 표기하였다. 신라국(新羅國) 학자 최치원의 글에도 고구려국이 지금은 발해국(渤海國)이 되었다라는 것이 보여 신라국(新羅國)도 발해국을 고구려국 계승 국가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역사책 중 발해국 멸망 후 처음으로 발해국 역사를 전반적으로 다룬 구당서(舊唐書) 발해전(渤海傳)에도 발해국(渤海國)을 옛 고구려국(高句麗國) 계승 국가로 기록하고 있다.

일연(一然)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궁예(弓裔)가 건국한 나라를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이라고 하여 궁예가 고구려국(高句麗國)을 계승하는 국가를 세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고려국(高麗國)이 고구려국(高句麗國)의 부흥을 표방한 후고구려국(後高句麗國)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서경(西京)을 중시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고려국 성종 12년 요국(遼國)의 대군이 침입하자 서희(徐熙) 장군은 요국(遼國) 소손녕(蕭孫寧) 장군과 회담을 하면서 "고려국이 고구려국(高句麗國)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나라 이름도 고려국이라고 하며 평양을 도읍지로 삼았다. 고구려국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요국(遼國)의 동경도 그 경계 안에 있다"고 반박하여 오히려 흥화(興化, 의주)·용주(龍州, 용천)·통주(通州, 선천)·철주(鐵州, 철산)·구주(龜州, 구성)·곽주(郭州, 곽산)의 강동 6주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고려국이 발해국 유민(遺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발해국이 고려국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국(高句麗國)을 계승한 국가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중국이 편찬한 송사(宋史)에서도 고려국은 본래 고구려국이라고 인식하여 고려열전(高麗列傳)을 서술하였으며 이는 고려국(高麗國)이 고구려국을 승계한 국가라고 인식한 당시 사람들의 역사인식이었으며 이러한 인식은 이후 명사(明史)에까지도 이어졌다. 고려국이 고구려국을 계승하였다고 하는 인식은 고려국(高麗國)이 동명왕에 대한 제사 봉행에서도 알 수 있는데 서경(西京)에 동명왕(東明王)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개경(開京)의 동신사(東神寺)에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어머니 하백녀(河伯女)를 동신성모(東神聖母) 로로 모셨다. 이는 고구려 국모신(國母神) 신앙과 제의(祭儀)를 고려국(高麗國)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봉행하고 초대 황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여 조선시대(1392-1897)에 이어 대한시대(1897- )가 시작됐다. 대한국(大韓國)은 한반도 간도(間島) 제주도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울릉도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하며 북으로는 말갈(靺鞨:북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받은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 영토를 통치했다.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하여 간도(間島)를 직접 관할,통치하였으며 1905년 11월 18일 대한국 조약체결권자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가 체결 비준하지 않아 불법 무효인 을사늑약 불법 늑결로 대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제국주의 통감부는 1909년 9월 4일 불법적으로 청과 간도협약(間島協約)을 맺고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동남쪽 대한국령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청(淸)에 불법 양도했다.대한국(大韓國)은 1910년 8월 경술늑약(庚戌勒約) 불법 늑결로 일본제국주의에 불법 병탄(倂呑)되었으며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한민족사 최초로 주권재민, 3권 분립을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되어 1945년 8월 15일 대한 광복까지 대한광복운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대한국(大韓國)의 주권(主權)과 영토(領土)를 되찾아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 늑결로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大韓國)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 광복(光復)을 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를 수립하였다. 간도(間島)가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영토이므로 대한민국의 대한제국 국호 및 영토 계승 및 청나라와 일본제국주의 통감부 간 불법 늑결한 간도협약의 불법 무효를 천명하고 간도(間島)의 영유권을 주장해야 하며 요하(遼河)의 고구려국(高句麗國) 천리장성(千里長城)과 중국 만리장성의 중간선을 한-중 국경으로 하는 국경조약을 중국 정부와 체결해야 한다.

조선국령 대마도(對馬島)는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6월 19일 거제도 남쪽에 있는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발해서 동래(東萊)의 부산포(富山浦) 앞 대마도로 향하여 정벌(征伐)하였으며 대마도 도주는 신하의 예로서 조선국(朝鮮國:1392-1897) 국왕을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慶尙道) 동래부(東萊府)의 일부로 편입(編入)을 청하였고 왜구(倭宼)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조선국 4대 국왕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동래(東萊)의 부산포(富山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 등 삼포(三浦)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주었다.계해조약(癸亥條約)은 1443년(세종 25) 조정을 대표하여 변효문(卞孝文) 등이 대마도(對馬島)에서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사다모리와 세견선(歲遣船)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이며 '계해약조'라고도 한다. 1419년 조선국 4대 국왕 세종이 대마도(對馬島)를 근거지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왜구(倭宼)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국(朝鮮國:1392-1897)·왜국(倭國) 사이의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다시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세견선(歲遣船)은 1년에 50척으로 하며 선원 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中船) 30명, 소선(小船) 20명으로 정하고 이들에게는 식량을 지급하고 삼포(三浦)에 머무르는 자의 날짜는 20일로 제한하는 구체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예(李藝)는 1443년(세종25)에는 왜구(倭寇)들이 변방에 도적질하여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가자 대마도체찰사(對馬島體察使)가 되어 포로 7인과 도적질한 왜구 14인을 잡아 왔다.

녹둔도(鹿屯島)는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조산리(造山里)에서 약 4㎞ 거리에 있는 섬이며 둘레는 약 8㎞이다. 1800년대 이후 두만강 상류의 모래가 유속(流速)에 밀려 내려와 녹둔도와 그 대안(對岸) 사이에 퇴적하여 육지와 연결되었다. 1990년대에는 100호의 인가가 있어 벼·조·옥수수·보리 등이 재배되었고 주변에서는 연어·붕어·황어·숭어 등이 주로 잡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국(朝鮮國:1392-1897) 세종 대에 6진(鎭)을 개척한 이래 여진족의 약탈을 막기 위하여 녹둔도(鹿屯島) 안에 길이 1,246척의 토성을 쌓고 높이 6척의 목책을 둘러 병사들이 방비하는 가운데 농민들이 배를 타고 섬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농민들은 상주가 금지되었고 춘경추수기에 한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다. 1587년(선조 20) 여진족의 습격을 받고 큰 피해를 당해 당시 책임자였던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그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 녹둔도(鹿屯島)가 1860년(철종 11) 청(淸)나라와 러시아의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어버린 것을 1889년 알고 청나라에 항의하고 녹둔도(鹿屯島)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는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5∼1905년경 두만강 어귀와 연해주 일대를 16년간 직접 답사하여 제작한 함경도 및 옛 고구려국(高句麗國),발해국(渤海國)지역 지도이다. 아국여지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대한제국시대의 전통적인 관방지도(關防地圖)라 할 수 있으며 고급 펄프지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린 회화식 지도로 20면으로 접혀져 있어서 펼치면 세로 길이가 3m나 된다. 맨 앞에 목록이 있고 지도 여백에 지역별 가구 수, 거주 인구 수, 물산, 군사관계, 인근 지역과의 거리 등의 정보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지도에서는 당시에 이미 1만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옛 고구려국(高句麗國),발해국(渤海國) 지역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지도를 보면 두만강 하류에 있던 러시아의 영토가 되어 있는 녹둔도(鹿屯島)는 당시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대한제국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녹둔도에는 113가구, 822명의 대한국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모두 대한제국의 풍습과 가르침을 높이 숭상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필자 김민수: 전 문화재청 고궁박물관 연구원>
 
(편집자 주) 필자는 고구리의 영토를 만주 일대로만 보는 반도사관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고구리를 계승하여 대조영이 세운 나라인 대진국(大震國)을 당나라가 일방적으로 부른 발해로 적고 있다. 고구리와 대진국은 대륙의 중원까지 지배했던 엄청난 나라였고, 물론 만주도 그 영토의 일부였음을 참고로 밝히는 바입니다.

 

 

[고종]

입력 2016. 3. 1. 03:55

고종황제 행차에 함께한 태극기

제97주년 3·1절을 맞아 광주시청 1층에서 열리는 ‘태극기 특별 기획전’에 프랑스파리외방선교회 신부들이 찍은 1885년 조선 고종황제의 행차 사진이 공개됐다. 사진에는 조선 관료 대열 가운데 높이 솟은 태극기의 4괘 표시(원 안)가 선명하다. 미공개 사진을 전시하는 기획전은 오는 7일까지 계속된다.

광주 연합뉴스

 

 

김민수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09/11/06 [01:13]

고구려 백제 신라 영토를 통일한 '고종황제':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여야 하며 고종황제 동상을 건립하여야"

 

▲  고종황제 어진

 

단군(檀君) 이래로 영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삼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을 통합(統合)하였다.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나라의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며 삼한(三韓)을 아우르는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대한국(大韓國)을 국호로 한다.북으로 말갈(靺鞨:간도)이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남으로 탐라(耽羅國:제주도)가 귤과 해산물을 공(貢)하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일통(一統)의 업(業)을 세우셨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백악(북악산)과 목멱(남산) 사이의 경운궁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호(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였다.1899년 8월 17일 반포된 대한국 최초의 헌법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으며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대한국 황제의 육해군 통수권,계엄령 발포권,법률 제정·반포권,문·무관 임명권,조약 체결·선전·강화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대한국(大韓國)은 고종황제가 한반도 간도 녹둔도 제주도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종은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고종황제는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天神)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지신(地神) 황지지(皇地祗)에 고하는 환구대제를 봉행한 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의자에 앉아 12장 곤면(袞冕)을 입고 새보(璽寶)를 받았다.

1873년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1887년 최초로 전등 점화하여 전기를 사용한 건청궁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한 고종은 대안문(大安門) 앞 환구단에서 자주 독립을 천명하고 대한국(大韓國)을 건국하였으며 한반도 간도 제주도 독도 대마도 녹둔도를 아우르는 4천리 영토를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와 애국가를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국(大韓國) 광복(光復)운동을 적극 지원한 고종황제를 고액권 화폐 도안 인물로 선정하고 경운궁 앞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여야 하며 고종황제 동상을 건립하여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2021.08.15 13:00 업데이트 2021.08.17 08:58

[더오래]고종이 친정 펴려고 사비로 지은 건청궁의 비극 | 중앙일보 (joongang.co.kr)

이향우구독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49)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에 경복궁 북쪽 끝자락에 지은 집으로, 건청궁이라는 이름을 보면 궁궐 안의 궁임을 알 수 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향원정 북쪽에 있는 건청궁(乾淸宮)은 ‘하늘이 맑다’는 의미의 집이다. 장안당(長安堂), 곤녕합(坤寧閤), 복수당(福綏堂) 등이 건청궁 영역 안에 일곽을 이루고 있다.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에 경복궁 북쪽 끝자락에 지은 집으로 건청궁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궁궐 안에 또 하나의 궁이 있는 셈이다. 우리가 광화문에서부터 출발하는 일반적인 관람 루트를 선택해 경복궁을 걷다 보면 건청궁은 맨 마지막 코스에 만날 수 있으니 대부분의 사람은 몹시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 이 집을 보게 된다. 끄트머리에 나타나는 목적지는 대부분 앞에서 천천히 보고 음미하던 것과는 달리 시간에 쫓길 수도 있고 신체적으로도 몹시 힘들어지니 대충 보거나 소홀하게 여겨 지나치게 된다.

특별히 건청궁만 보려고 작정하고 다른 곳을 지나쳐 이곳까지 직행하지 않는 한, 건청궁은 출발지로부터 너무 먼 북쪽에 있다. 따라서 건청궁을 여유 있게 제대로 보려면 신무문으로 들어와서 건청궁과 집옥재, 태원전 영역을 보고 거꾸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관람코스를 추천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펼쳐지는 건청궁의 테마는 사뭇 즐겁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하려 한다. 건청궁을 지을 무렵 고종이 생부 흥선 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할 것을 표명한 의지는 비장했다. 재위 10년이 된 청년 군주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근거지였으나 건청궁을 짓고 그곳에 살던 왕실에 닥친 비극은 조선왕조가 역사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시작을 알리는 처참한 현장이었다.

고종의 빛과 어둠 건청궁

건청궁 건물은 단청을 올리지 않은 백골집이지만 곳곳에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섬세한 치장으로 격조 있는 규모를 보인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경복궁 중건이 흥선대원군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건청궁은 고종이 주도하였다. 고종은 경복궁 서북쪽에 건청궁 공사를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건청궁 건립은 흥선 대원군의 정치적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고종의 자립을 위한 친정 의지의 표명이었다. 경복궁 중건 후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신료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고종은 공사비 조달은 임금의 사비인 내탕금(內帑金)으로 짓는다고 하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보관할 전각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건청궁을 지었으나, 그 뒤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하거나 외교관 접대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건청궁 건물은 단청을 올리지 않은 백골집이지만 곳곳에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섬세한 치장으로 격조 있는 규모를 보인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조로 구성했다. 건청궁은 연대 상으로는 경복궁의 전각 중에서 가장 나중에 건립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가장 먼저 사라진 전각이다.

그리고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가설된 장소였다.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것은 1879년 10월인데, 그로부터 불과 7년이 지난 1887년 1~3월 사이에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힌 것이다. 당시 건청궁의 전등 설치는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1882년(고종 19년) 5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듬해 9월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한 11명의 사절단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파견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공사 푸트가 내한하자 이에 대한 답례와 양국 간 친선을 위해 사절을 파견한 것이다. 고종이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은 미국 체류 기간 중 전깃불이 뉴욕과 보스턴의 밤거리를 비추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고종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보빙사의 강력한 주청으로 전기 도입을 서둘렀고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 측도 조선을 동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한 계획에서였다.

당시 에디슨 램프 사의 총지배인 프란시스 업튼이 1887년 4월 18일 자로 사장 에디슨에게 보낸 업무 연락서는 경복궁의 전등 시설은 에디슨 제품의 동양 판촉을 위해 시범케이스로 시공됐다면서 향후 일본 궁성에 설비될 시설과 함께 동양에서는 유일한 시설이라고 보고했다.

장안당(長安堂)

건청궁 서쪽 영역의 장안당은 왕의 거처로, 장안(長安)은 오래도록 평안하다는 뜻이다. [사진 이향우]

장안당의 남쪽 누각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서편에 누마루 형식으로 지은 집이다.[사진 이향우]

 

건청궁 서쪽 영역의 장안당은 왕의 거처로, 장안(長安)은 오래도록 평안하다는 뜻이다. 장안당 현판 오른쪽 상단에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 ‘어필(御筆)’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고, 왼쪽 하단에는 ‘주연지보(珠淵之寶)’, ‘만기지가(萬機之暇)’라는 낙관 두 개가 새겨져 있다. 주연지보는 고종의 낙관이다. 1864년 고종이 열두 살의 소년 군주로 즉위하던 해에 쓴 창덕궁 관물헌의 ‘집희(緝熙)’와는 그 필체에서 느껴지는 연륜이 다르다.

장안당(長安堂)은 당시 조선 사대부 상류 주택의 건축 양식 중에도 가장 격식을 갖춘 집이다. 왕이 소대(召對: 왕이 신하를 불러 만나는 것, 특히 낮에 경연관을 불러 정례의 경연 외에 따로 강론을 주고받는 것)를 행하거나 신하를 만나는 곳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편전의 용도로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를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를 처리했다.

장안당은 실내 복도각을 통해 곤녕합 서행각으로 연결되었다. 장안당의 남쪽 누각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서편에 누마루 형식으로 지은 집이다. ‘추수부용(秋水芙蓉)’은 가을 물 속의 연꽃이 바람에 몸을 맡겨 스스로 미소 짓는 모습이다. 추수부용루는 날아갈 듯 아름다운 추녀 곡선하며 사뿐히 올라앉은 누각의 모습이 그 이름처럼 어여쁜 한 송이 연꽃이다. 헌종의 거처였던 창덕궁 낙선재 누각과 그 형태와 구조에서 닮았다. 이 누각은 곤녕합의 사시향루(四時香樓)와 짝을 이룬다.

장안당 뒤편으로 한국 최초의 양관(洋館)이 있었는데 사바틴에 의해 지어진 관문각(觀文閣)은 서양식 건물로 궁궐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 건물이었다. 관문각은 원래 전통적 목조건물이었으나,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친의 설계 때문에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었다. 고종은 관문각에서 책을 읽고 외국인들을 맞이했다. 사바틴은 이곳에서 시위대 부대장으로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다.

곤녕합(坤寧閤)

곤녕합 옥호루. 옥호루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옥호빙(玉壺氷.옥병 안의 얼음)의 줄인 말인데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 한 말이다. [사진 이향우]

 

땅이 편안하다는 뜻의 곤녕합(坤寧閤)은 왕비의 덕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왕의 거처인 장안당의 동편에 있다. 곤녕합에 딸린 남쪽 누각 옥호루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옥호빙(玉壺氷.옥병 안의 얼음)의 줄인 말인데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 한 말이다. 옥호루의 동쪽 면에 있는 사시향루(四時香樓) 현판은 장안당의 추수부용루와 짝을 이루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서 여성적인 분위기가 한껏 느껴지는 ‘사시향(四時香)’은 네 계절 끊이지 않고 꽃향기가 풍긴다는 뜻이다. 마치 이곳에 머물던 주인, 명성황후를 그려낸 듯한 이름이다. 옥호루 누각을 통해 담장 너머 그린 듯 아름다운 향원정이 보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45세의 짧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1895년(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사건을 을미년의 변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건청궁은 1895년 을미사변 후 주인을 잃고 1909년경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려서 없어졌다가 98년 만에 관문각을 제외한 일대가 복원되어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입력 2007-12-18 03:02업데이트 2009-09-26 00:20

1896년 당시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진 돌담길과 작은 문(점선)의 모습.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이 길과 문을 통해 비밀리에 덕수궁을 다녀오곤 했다. 사진 제공 이돈수 명지대 교수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1년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을 비밀리에 오갈 때 이용했던 돌담길과 문을 찍은 사진이 처음 발견됐다.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지는 길의 모습이 처음 확인됨에 따라 이 일대 문화유적의 원형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명지대 이돈수 교수는 최근 미국 주간지 하퍼스위클리 1897년 7월 24일자에 실린 이 사진을 발견해 17일 공개했다. 미국의 유명 사진작가였던 윌리엄 헨리 잭슨(1843∼1942)이 한국을 찾았던 1896년에 찍은 것으로 ‘러시아공사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사진은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 바로 북쪽에서 러시아공사관의 동쪽을 바라보고 근접 촬영한 것이다. 사진에 나오는 돌담길과 작은 문은 당시 미국공사관의 북쪽, 덕수궁 선원전(璿源殿) 구역(역대 임금의 초상을 봉안한 곳으로, 현재 덕수궁 서북쪽 옛 경기여고 터)의 남쪽, 러시아공사관(현재 건물의 탑만 있다)의 동쪽이 서로 만나는 지역에 있다.

이 길과 문은 1900년대 초에 작성된 덕수궁 도면에도 나와 있다. 이 길과 문을 통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을 왕래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알려져 왔으나 실제 모습은 확인되지 않았고, 2003년에 돌담길이 있던 자리에서 초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경복궁에서 이 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견해도 있다.

사진을 살펴본 문화재위원 김정동(건축사) 목원대 교수는 “러시아공사관 동쪽 편과 바로 옆 덕수궁 돌담길이 매우 상세하게 나와 있어 덕수궁과 러시아공사관의 건물 연구 및 복원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김민수 홍보국장  | 기사입력 2008/10/07 [21:44]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상징은 '환구단':플러스 코리아(Plus Korea)

'대안문' '황궁우' 사이에 환구단을 복원하자!

 

▲ 환구단內 황궁우 정면 모습. 사진=권병주 기자     © 플러스코리아


1919년 9월 대한민국 상해정부가 국체를 계승한 대한제국은 광무 원년부터 고종황제가 한반도,간도와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 해양을 통치하였던 제국으로서 단군조선 건국 이래 한민족 고유의 영토,역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국호이므로 대한이라 하였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자주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국기,국가의 제정을 명령하여 태극기와 애국가를 제정하였고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다.

문화재청은 고도 서울의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시설 철거,기관 이전을 명령하고 경운궁 경복궁 광화문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왕릉 환구단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별궁 의정부 한성부 육조 삼군부 사헌부 종친부 사간원 규장각 국사당을 원형복원하여야 한다.

경성부청사를 철거하고 '황궁우'와 '대안문' 사이에 '환구단'을 원형복원하여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하며 환구단에서 천제를, 경운궁 태극전에서 고종황제 등극의례를 봉행하고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자.
 
대한제국은 광무 원년부터 고종황제가 한반도,간도와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 해양을 통치하였던 제국으로서 단군조선 건국 이래 한민족 고유의 영토,역사를 하나로 아우르는 국호이므로 대한이라 하였으며 제국주의 국가에 나라의 자주 독립이 크게 위협받게 되자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자주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국기,국가의 제정을 명령하여 태극기와 애국가를 제정하였고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다.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국국제는 황제의 군 통수권, 법률 제정·반포권, 문·무관 임명권, 외국과의 조약 체결 비준권 등을 규정하고 있으며 독립신문은 1897년 10월 16일자 신문 논설에 국명이 대한이 되었다고 기술했고 활빈당도 '시정개혁 13조목'을 발표하면서 "대한"이라는 국명을 사용했으며 '항일 논설'로 이름을 떨친 대한매일신보, 최초의 민족은행인 대한천일은행 등이 출현하였고 안중근 의사는 "조국 독립을 지키겠다"는 혈서에 "대한 독립"이라 하였으며 1919년 대한민국이 국체를 계승하였다.

일제는 1904년 2월 대한제국 영토의 군용지 강제수용을 주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고 1900년 고종황제 칙령 41호에 의거한 대한제국령 독도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하였고 1905년 미국과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고 대한제국 지배에 관한 제국주의 열강의 승인을 얻은 일제는 11월 을사오적을 매수하여 을사늑약을 강제하고 강탈한 외교권을 불법 행사하여 1909년 간도관리사가 관리한 대한제국령 간도를 만주 이권을 얻기 위해 청에 불법 양도하였다.

통감부,총독부,경성부는 왕궁,종묘,환구단,사직단,선농단,선잠단,왕릉,원묘,태실,별궁,행궁,관아,성문을 훼손하였으며 대한황실 궁내부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는 조선총독부,경성제국대학으로 불법 이관되고 국외로 불법 반출되어 연구기관,문화기관과 일본,프랑스,북한에서 소장중이며 미술공예품은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설립하여 일반에 공개되었고 경운궁 황실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가 총독부가 수집한 고적조사 수집품,도굴 매장문화재,구입 장물,사찰 기탁품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었다.

대한황실 궁내부,창경궁 제실박물관,경운궁 황실박물관,구황실사무청,구황실재산사무총국,문화재관리국을 계승한 문화재청은 국보급 전적 고문서 미술품을 중점보호하고 고도 상징 축과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시설 철거, 기관 이전을 명령하고 경운궁 선원전 인화문 대안문 경복궁 광화문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왕릉 환구단 사직단 선농단 선잠단 별궁 승정원 춘추관 의정부 삼군부 의금부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 규장각 소격서 종친부 기로소 한성부 육조 돈의문 숭례문 국사당을 원형복원하여야 한다.

문화재청은 제국주의 국가로 불법 반출 후 환수 또는 교육연구기관·정부기록기관·연구문화기관이 소장중인 실록·의궤·일기·등록·고지도·고문서 등 왕실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왕실문화재를 왕실역사박물관을 표방하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귀속하여야 하며 국립고궁박물관은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왕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귀속한 국보급 왕실문화재를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문화재 전문가 및 국내외 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왕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한민족운동단체연합 홍보국장 김민수]

 

 

입력 :2008-03-28 00:00ㅣ 수정 : 2008-03-28 00:00 

“고종은 존경심보다 연민 일으켜” | 서울신문 (seoul.co.kr)

하인리히 독일왕자 대한제국 방문 보고서 발견
1899년 동아시아함대 사령관 자격으로 대한제국을 국빈 방문했던 독일 하인리히 왕자(1862∼1929)가 고종을 “존경심보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묘사한 보고서가 발견됐다.
 


정상수 명지대 국제학연구소 교수는 27일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가 소장한 대한제국 관련 외교문서를 연구하던 중 하인리히가 대한제국 정치·경제·군사 상황을 파악해 친형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보고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1899년 6월29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작성된 20여쪽의 보고서에 따르면, 같은 달 8일 도이칠란드호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하인리히는 이튿날인 9일 궁궐을 방문해 고종과 황태자 순종을 만났다.

하인리히는 고종에 대해 “키가 작고 나이가 약 48세로 매우 친밀감이 있으며 재능이 없지 않았다.”면서 “존경심보다는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어 “내부 분열과 궁정 내 당파 싸움, 암살 시도, 불확실한 정치적 상황 등이 이 가엾은 왕을 의지할 곳 없는 처지로 몰아넣고 있다.”고 덧붙였다.

훗날 순종이 되는 황태자에 대해서는 “바보 같은 인상이고 언어 능력과 논리적 사고력이 거의 없다.”면서 “최근 독살 시도를 당해 체력이 완전히 소실돼 시종이 부축해야만 서 있을 수 있다.”고 썼다.

실제로 순종은 하인리히 방문 1년 전인 1898년 역관 김홍륙이 고종 독살을 목적으로 만든 독약 탄 커피를 잘못 마신 후 신체적·정신적으로 큰 후유증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김상운기자입력 2021. 2. 8. 17:12수정 2021. 2. 8. 20:36

미국 잡지 데모레스트 패밀리 매거진 1893년 7월호에 실린 미국 워싱턴의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 사진(위쪽 사진). 북쪽 벽에 태극기와 함께 구한말에 촬영한 광화문 사진이 걸려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복원 과정에서 광화문에 걸린 조선궁궐의 ‘문배도(門排圖)’ 실물이 처음 확인됐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 조선 후기 기록에 전하는 궁궐 문배도가 구한말 촬영사진을 통해 실체가 확인된 것이다. 문배도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아 문에 붙이는 그림으로, 우리 전통 세시풍속 중 하나다.

8일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미국 잡지 ‘데모레스트 패밀리 매거진’(Demorest‘s Family Magazine) 1893년 7월호에서 구한말 광화문을 촬영한 흑백사진이 발견됐다. 이 잡지는 그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를 찍었는데, 이때 북쪽 벽면에 태극기와 함께 걸린 광화문 사진이 촬영된 것. 재단은 이 ’사진 속 사진‘을 미국 디지털 아카이브 자료와 1년간 비교 조사해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원본 사진을 찾아냈다.

고종 재위 기간으로 조미수교가 체결된 1882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원본 사진은 광화문 앞에 군중들이 모여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중 광화문만 확대해보면 약 3m 길이의 흰색 종이에 부리부리한 눈에 험상궂은 얼굴의 장군상을 그린 그림이 문에 붙어있다. 마치 불교 신장(神將)상과 비슷한 모습의 ’금갑장군(金甲將軍·금빛 갑옷을 입은 장군)‘이다. 19세기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 “도화서(조선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관청)는 (연초에) 황금빛 갑옷을 입은 두 장군상을 그려 임금에게 바치는데 한 장군은 도끼를 들고, 다른 장군은 절(節)을 들었다. 이 그림을 모두 대궐문 양쪽에 붙인다”고 기록했다.

고종 재위 기간인 1882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화문 촬영 사진(위쪽 사진)을 확대해보면 흰색 종이에 그려진 부리부리한 눈의 ‘금갑장군’ 문배도를 확인할 수 있다(아래).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원본 사진에서 광화문에 붙은 금갑장군 그림은 위쪽 3분의 1만 온전하고 나머지 아랫부분은 찢겨진 상태다. 김윤정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문배도는 풀에 발라 문 위에 붙이는 게 보통”이라며 “비바람이 들이쳐 그림이 찢겨나가도 중간에 떼지 않았음을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풍산 류씨 본가(화경당)에 소장돼 있는 ‘문배도’. 사가(私家)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문배도 중 유일한 완본이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광화문 촬영사진을 태극기와 함께 북쪽 벽에 걸어놓은 것도 인상적인 대목이다. 재단 관계자는 “북쪽은 왕을 상징한다. 워싱턴에 파견된 대한제국 관료들이 고종이 머무는 광화문 사진과 국가 상징인 태극기를 향해 예를 갖췄을 것”이라고 말했다.

궁궐에서 그리던 문배도는 조선후기 들어 민간에도 널리 퍼졌다. 이에 따라 사가(私家)에서 그린 금갑장군 문배도 1점이 경북 안동시 하회마을 풍산 류씨 본가(화경당)에 소장돼 있다. 현존하는 문배도 가운데 유일한 완본이다.

문화재청은 미 의회도서관 소장 사진과 화경당 문배도를 바탕으로 고증 재현한 궁궐 문배도를 설 연휴(11~14일) 광화문에 붙여놓기로 했다. 조선시대 척사의 의미를 살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의 염원을 담겠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문배도는 제거 시 훼손 가능성을 감안해 종이가 아닌 현수막 형태로 제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상운기자 sukim@donga.com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4-06 17:28

19세기말 조선 개방정책은 고종이 주도했다 (hani.co.kr)

강상규씨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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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약한 개화파의 버팀목 역할
천주교 탄압도 반대파 무마용

 

대원군은 처음부터 천주교를 탄압한 쇄국론자였나? 1880년 통리기무아문 설치 이후 진행된 조선 지배층의 개화정책은 개화파가 주도했나? 그리고 그것은 권력 유지를 위한 몰주체적 외세의존적 개혁 시도에 지나지 않았던가?

이런 물음에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논형 펴냄)는 모두 ‘아니다’라는 답을 내놓는다. 지난해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일본>에 이어 이 책을 쓴 저자 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사상사)씨는 대원군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대원군의 부인인 민 부대부인은 천주교 교리문답을 배웠으며, 자신의 아들이 왕(고종)이 되자 감사 미사를 올리기도 했다. 고종을 키운 유모 박씨 부인도 마르타라는 세례명을 지닌 천주교 신자였다. 뿐만 아니라 대원군은 남하하는 러시아에 대적하기 위해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려 했고, 이를 위해 조선에서 비밀리에 선교활동 중이던 베르뇌(장경일) 주교 등 프랑스 천주교인들과 접촉했다. 그런 사실은 샤를 달레의 <베르뇌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갑작스런 천주교 탄압(1866년 병인박해)은 오히려 그런 대원군을 문제삼을지도 모를 조정 안팎 전통세력의 거센 반발로부터 국왕의 아버지를 비호하기 위해 당시 조선왕실 최고어른인 대왕대비(효명세자비=익종비) 쪽이 취한 고단수의 정치적 조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외국과의 교섭(외교)·통상·군사 전담기구로, 의정부와 동급인 정1품아문 통리기무아문의 설치는 ‘배외’와 ‘척사’ 정책 위주였던 기존 정부방침을 개혁·개방 쪽으로 돌리려던 획기적인 방향전환이었고, 그것을 주도한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 개화파가 아니라 바로 고종이었다. 저자는 당시 개화파들이 통리기무아문 설치나 일본시찰단 및 영선사 파견 등을 주도했다는 기존 연구(신용하의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에 대해 당시 조정의 핵심 관직에 개화파로 지칭될 만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으며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던 개화파가 의정부와 동급의 핵심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는 주장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그 4년 뒤인 1884년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5인방(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의 평균 연령이 26살에 지나지 않았던 사실을 떠올리며 당시의 유교적 정치지형에서 어린 그들이 어떻게 거사를 감행하고 ‘3일천하’를 누릴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군주라는 강력한 배후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저자는 또 19세기 말 조선 조정의 문호개방 정책과 관련해 ‘1880년대 초반에 이뤄진 지배층의 개화정책은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외세의존적이고 몰주체적인 성격이 강하다’(강만길 <고쳐 쓴 한국근대사>)고 보는 일반적 관점을 폄훼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울러 일반적으로 개화파의 ‘기수’ ‘선구자’로만 알려져 있는 박규수가 효명세자의 절친한 벗이었고 대왕대비와 고종의 ‘선생’이자 특별한 정치적 관계를 지닌 측근이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이는 고종이 성리학적 (봉건)군주라는 이유로 그가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19세기 조선을 개화 대 수구, 진보 대 보수 식의 단순 대립관계로 파악하는 이분법적 시각을 경계하고 아울러 한반도 및 동아시아사를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 전환으로 보는 서구 발전사관, 결정론적 시각 역시 문제가 많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생은 모순에 가득 찬 것이며 중층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더더욱 그렇다.”

국가간 관계가 ‘예의 관념’에 근거한 중화질서로부터 부국강병과 국가평등 관념에 입각한 근대 국제질서로, 조공책봉 관계에서 수평적이고 독립적인 무정부적 관계로 변한 패러다임 전환기인 19세기의 역동적인 조선정치사에 대한 기존의 박제화된 이해를 극복하려면 먼저 우리 사고의 박제화부터 깨뜨려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인 것 같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중앙일보 입력 2020.03.02 05:00 업데이트 2020.03.02 11:32

[시크릿 대사관] 고종은 비자금 절반 쏟았다···워싱턴 벽돌집 스민 망국의 한 | 중앙일보 (joongang.co.kr)

한국인이 갈 수 없는 한국 땅인 외국 대사관을 소개하는 ‘시크릿 대사관.’ 이번엔 3ㆍ1절 주간을 맞아 준비한 번외편입니다. 태평양 건너 미국의 수도 워싱턴DC로 여러분을 모십니다. 왜 워싱턴이냐고요? 19세기 말 격랑의 시기를 겪던 조선의 고종에게 답이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ㆍ러시아 등 외세 속에서 고뇌하던 고종은 미국에 대사관을 열기로 합니다. 1889년, 대한제국 황실의 비자금 격인 내탕금을 쏟아부어 워싱턴 중심가 아이오와 서클(현 로건 서클) 소재 약 50평(150.98㎡)의 지상 3층 지하 1층짜리 빨간 벽돌집을 사들인 겁니다. 외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내탕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지난달 26일 기자가 직접 이곳에서 백악관까지 걸어봤더니, 빠른 걸음으로 약 25분이면 닿더군요. 고종이 결단을 내릴만한 노른자위 땅, 맞았습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기념관 외관. 지금도 태극기가 힘차게 나부낀다. 워싱턴=전수진 기자

 

그렇게 마련한 화성돈(華盛頓ㆍ워싱턴의 한자 음차)의 로건 서클 15번지의 공사관. 현관문엔 대한제국의 문양을 조각해 넣었습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임을 알리는 표시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대형 태극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먼저 전경 사진과 내부의 대형 태극기 사진 보고 가시지요. 1월 26일 찾아간 공사관엔 이른 봄꽃이 화사했습니다. 내부 정경은 아래 영상에서 상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에 들어서자마자 걸려 있는 대형 태극기. 옆으로 손님을 맞고 식사를 하던 식당이 보인다. 워싱턴=전수진 기자

 

중국은 그때도 미국을 심히 견제했습니다. 처음엔 조선이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하는 것 자체를 반대했죠. 그래도 고종이 밀고 나가자 “조선의 공사는 미국 대통령이 아닌 주미 중국 공사에게 먼저 인사를 하러 오라”는 압력을 넣습니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인상을 주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고종이 첫 주미 공사로 택한 박정양 공사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장장 2주가 넘는 시간을 꼬박 배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박 공사가 뭍에 발을 딛자마자 향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주미 중국 공사관이 아닌 백악관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에게 고종으로부터 받은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서였죠.

복장은 한복 예복 그대로였습니다. 미국인들의 눈엔 새로웠겠죠? 해당 장면을 묘사한 아래의 펜화 그림은 당시 미국의 다수 매체에 등장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에서 제일 오른쪽에 있는 인물, 누구인 것 같으신지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입니다.

박정양 공사가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백악관에서 대기 중인 모습을 그린 펜화.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은 이완용으로 추정된다. 박정양 공사는 바로 그 뒤에 서 있는 인물. 워싱턴=전수진 기자

 

미국은 대한제국의 공사 일행에겐 낯선 땅이었습니다. 박 공사는 매일 일기를 적고 이를 『미행일기(美行日記)』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남겼습니다. 미국의 개화 문물에 대한 인상 등을 소상히 기록한 것이죠. 처음 박 공사에겐 모든 게 생소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처음 탔을 당시, 박 공사 일행이 “우리를 이런 상자 안에 몰아넣고 충격을 주다니 미국이 우리를 이렇게 박대해도 되는가”라며 화를 냈다는 기록도 있다는군요.

또 백악관에서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 대기하면서는 “미국의 왕은 언제 나오는 것이냐”라고 묻기도 했다지요. 대통령은 복장이 뭔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참모들과 같은 양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기념관으로 관리되고 있는 공사관 측의 설명입니다.

워싱턴의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기념관의 현관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는 객당. 응접실 역할을 했던 곳이다. 태극기 문양의 쿠션에 눈길이 간다. 옛모습 그대로 문화재 전문가들이 재현해냈다고 한다. 워싱턴=전수진 기자

 

참고로, 누구나 기념관을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현재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소관으로, 김상엽 관장을 비롯해 약 5명의 전문가가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 공사관의 사진. 오른쪽 상단에 보면 '대조선 주미국 대사관'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워싱턴의 주미 공사관이 자주외교의 전초기지였음을 보여준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제공]

 

박 공사는 1호 주미대사이자 한ㆍ미 동맹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죠. 1889년부터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약 16년간,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조선의 자주외교를 위한 최전선이었습니다.

외교관만 외교를 하는 건 아닙니다. 외교관의 배우자도 중요한 민간 외교관이죠. 이역만리 워싱턴의 조선 외교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 공사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이채연 공사의 부인 배씨 부인의 활약은 특히 눈부셨습니다. 재색을 겸비했다고 하는 배씨 부인의 사진 보시겠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분입니다. 한복이 참 곱지요? 워싱턴에서도 되도록 한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서였겠지요. 이 사진은 미국 현지 매체에도 실렸다고 하네요.

이채연 공사의 부인 배씨 부인(오른쪽)의 한복 차림 사진.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제공]

 

잠깐, 왼쪽의 인물은 누굴까요? 현재 공사관의 지킴이 역을 하는 한종수 큐레이터의 설명에 따르면 이완용의 부인이라고 합니다.

다시 배씨 부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배씨 부인은 영어와 서양 에티켓을 먼저 익혔다고 합니다. 현지 교회에도 나가서 워싱턴의 유력 인사들과 교분도 쌓았습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부인 프랜시스 여사와도 곧 절친 사이가 됐다고 합니다. 실제로 프랜시스 여사와 미국의 다른 국가 대사의 부인들을 이곳 공사관으로 초청해 다과회를 자주 열었다고 합니다. 현지 신문에서도 배씨 부인은 사교계 소식의 단골 소재였다고 하네요.

 배씨 부인은 현지에서 출산까지 했습니다. 아들이었는데요, 워싱턴을 부르던 이름인 ‘화성돈’을 활용해 ‘이화손(李華孫)’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하네요. ‘화성돈에서 태어난 자손’이라는 의미랍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출생 시민권자인 셈이겠죠. 그런데 이 아기는 안타깝게도 생후 2달, 병사하고 맙니다. 습진 합병증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아이는 당시 국무부 차관이었던 세블론 브라운의 가족묘에 안장됐습니다. 지금도 묘지는 보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노력에도 불구,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조선은 일본에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은 워싱턴의 이 공사관을 단돈 5달러에 사들인 뒤 같은 날 10달러에 되팔지요. 교민들은 당시 공사관 위에 태극기를 크게 그려 넣은 엽서를 인쇄해 나눠 가지며 독립을 향한 열망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워싱턴 교민들이 나눠가진 엽서. 태극기를 유독 크게 그려넣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제공]

 

공사관의 운명은 기구했습니다. 광복됐지만 아무도 대한제국 공사관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죠. 결국 공사관은 돌고 돌아 미국인 변호사인 티모시 젠킨스의 소유가 됩니다. 젠킨스 변호사는 “안에 태극기 등이 있는 것을 보고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해 큰 공사를 하지 않고 보존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곡절 끝에 2012년, 정부는 젠킨스 씨에게 이 건물을 매입합니다. 이후 2018년 5월, 기념관으로 다시 문을 열게 됐죠. 당시엔 문재인 대통령과 공사관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다과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5월 22일 오후(현지시간) 워싱턴 공사관을 찾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공사관의 김상엽 관장은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한ㆍ미 동맹의 시작이면서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며 “한국인뿐 아니라 미국 현지인들도 자주 찾아와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고 전했습니다.

공사관의 건물에서 내려다보이는 로건 서클은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이 즐비해 있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 정경을 바라보는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나라의 독립이 얼마나 소중한지, 3ㆍ1절 101주년을 보내며 되새겨 봅니다.

워싱턴=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영상=전수진ㆍ우수진ㆍ황수빈 기자

 

 

입력 2019.01.30. 03:22

"현미경으로 문짝 보니 페인트칠만 13겹… 한켜한켜 벗겨내자 130년前 문짝 나오더라"

[3·1운동, 임시정부 100년 - 1부]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
공사관 복원한 김종헌 교수 "당시 사진·신문기사 찾아보며 가구·소품 위치까지 그대로 재현"
김상윤 기자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복원은 김종헌(57·사진) 배재대 건축학부 교수가 총괄했다. 건축사학자인 그는 덕수궁 석조전과 명동성당 보수를 맡았던 근대건축 복원 전문가다. 최근 서울 정동에서 만난 그는 "곧 출간할 복원 사업 보고서 준비가 한창"이라고 했다. "단순히 건물 한 채를 복원하는 걸 넘어서 잊힌 역사를 불러온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서양에 설치된 우리나라 첫 공관이었고 외교활동의 중심이었어요. 대한민국 근대사를 회복하는 공간을 의도했습니다."

그는 공사 기간 2년 동안 워싱턴에 머물렀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땐 새벽 5시에 일어나 일대를 돌아다녔어요. 130년 전, 외교로 돌파구를 찾아야 할 시기 미국 땅을 밟은 공관원이 무슨 심정이었을지 상상했습니다. 북·미·중·일 사이에서 잘 풀어나가야 하는 오늘날 대한민국과도 겹쳐 보였고요." 그는 "건물을 처음 보고 '당당하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미국 빅토리아 양식인데, 외관부터 주위 건물과 차별화돼 돋보이는 건물이에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빛이 동향 창문을 통해 강하게 비치고 있었지요."

사진과 신문 기사 등 각종 사료를 발굴하며 철저히 조사했다. 특히 1층 입구와 객당(客堂)은 당시 사진을 찾아내 가구와 소품 위치 하나하나 그대로 옮겼다. 커튼, 벽지, 카펫 무늬와 미묘한 색감까지 되살리려 했다. "사진이 흑백이라 색과 세세한 무늬까지 알긴 어려웠어요. 그러다 1893년 시카고박람회를 위해 찍은 사진에 카펫이 아주 자세히 나온 걸 발견했고, 일간지 '워싱턴스타'에 실렸던 기사에서 벽지를 묘사한 문장을 찾아냈죠."

자료가 부족한 곳은 상상력을 동원했다. 이재순 석장(石匠)을 비롯한 한국과 미국 장인들이 도왔다. "정원 바닥을 어떻게 꾸밀지 고민하다 큼지막하고 시원시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재순 석장이 '그래야 아기자기한 일본풍과 구분된다'고 조언했어요. 서양식 건물에 한국적 요소를 녹여낸 듯해 만족스러웠습니다." 김 교수는 "문화재 복원은 사람으로 치면 수술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문짝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 페인트 13겹이 칠해져 있었습니다. 한켜 한켜 다 벗겨 내 130년 전 문짝으로 돌려놨는데 나무 상태가 너무나 완벽한 거예요.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끝내 민족성을 지켜낸 것과 같지 않을까요. '잠은 죽음의 모습을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에게 이 책을 바친다'던 호머 헐버트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입력 2019.01.30. 03:25

100년前 미국 거리엔 '조선은 독립국' 엽서가 뿌려졌다 (chosun.com)

[3·1운동, 임시정부 100년 - 1부]
[우리가 잘 몰랐던 이야기] [6] 주미대한제국 공사관 130년

 

적갈색 벽돌집 3층 꼭대기에 걸린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였다. 미국 수도 워싱턴 DC 로건 서클 15번지. 옛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이다. 미국 대통령 관저 백악관에서 북동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 지난 26일(현지 시각)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에서 걸으니 20분쯤 걸려 도착했다.

나라 운명이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리던 때였다. 1882년 5월 22일 대조선국은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는다. 서양 국가와 최초로 맺은 외교 관계였다. 이후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와 잇달아 조약을 맺었다. 서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자주독립을 훼손하려는 청과 일본의 침투로부터 벗어나려는 힘겨운 몸짓이었다. 대군주 고종은 1888년 1월 17일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1841~1904)을 파견해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국서를 전하고 이듬해 2월 13일 이 공사관을 마련한다. 내달 130주년을 맞는다. 고종은 1891년 12월 1일 2만5000달러를 들여 건물을 아예 사들였다. 당시 왕실 예산(내탕금) 절반에 이르는 돈이었다. 주미 공사관은 1897년 황제 나라를 선포한 대한제국이 외국에 설치한 공사관 중 유일하게 원형대로 남아 있는 건물이다.

건물 외벽에 영문 'Old Korean Legation'과 함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란 한글을 금빛 글씨로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중앙 계단을 올라가니 대형 태극기가 보인다. 130년 전 모습대로 재현했다. 흑백사진 2점이 남아 있어 복원이 가능했다. 박정양 문집인 '죽천고', 본국에 보낸 보고서 등 사료를 발굴해 고증했다.

100년前 엽서와 복원된 공사관 - 전시관으로 재개관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내부 ‘객당(客堂)’. 손님을 맞는 접견실로 사용한 공간이다. 1893년 당시 내부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이를 바탕으로 재현했다. 왼쪽 위 사진은 1910년대 미주 한인들이 발행한 공사관 사진엽서. 한국이 독립국임을 알리는 의도로 제작했다. 아래 사진은 현재 공사관의 외관.

 

왼쪽 첫 방은 손님 맞는 접견실인 '객당(客堂)'. 샹들리에 조명과 의자·탁자 등은 고가구점에서 가장 비슷한 모양을 찾았다. 커튼·벽지·카펫 무늬도 가장 비슷하게 재현했다. 맞은편 태극기가 걸려 있는 쪽 방은 식사하거나 파티를 열었던 '식당(食堂)'. 붙박이 가구에 여러 차례 덧칠한 페인트를 조심스럽게 벗겨내자 130년 전 옛 색깔이 나왔다고 한다.

공사관이 문을 연 기간은 16년에 불과하다.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공사관에 걸린 태극기를 끌어내렸다. 강제 병합 사흘 후인 1910년 9월 1일 건물을 5달러에 강제 매입한 후 미국인에게 팔아버렸다. 태극기는 사라졌지만 공사관 건물은 미주 지역 한인들에게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미주 한인들은 공사관 꼭대기에 커다란 태극기를 그린 사진엽서를 만들어 한인과 미국인에게 나눠주면서 한국이 독립국이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지금 공사관 3층 전시실에는 재현한 엽서를 비치해놓고 관람객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은 오랜 기간 잊힌 존재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옛 역사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을 맞아 '공사관 매입' 여론이 일었지만 또 시간이 지나갔다. 공사관 건물은 그동안 미군 휴양소, 화물운수노조 사무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1977년부터 티머시 젱킨스 부부가 사들여 거주했다.

우리 손에 다시 돌아온 때는 7년 전. 문화재청은 2012년 10월 18일 젱킨스 부부에게 350만달러(약 39억5000만원)를 주고 건물을 사들였다. 이후 5년여간 보수·복원 공사를 거쳐 지난해 5월 22일 전시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주미 공사관 초대 서기관이었던 월남 이상재(1850~ 1927) 선생의 증손자 이상구씨가 재개관 행사에서 태극기를 게양했다. 113년 만에 다시 내건 태극기였다. 이날도 파란 워싱턴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시게 펄럭였다.

 

 

 

입력 2018-05-15 11:53

다시 문 여는 自主외교의 상징 1889년 미국 워싱턴에 세워졌다가 최근 복원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외관(왼쪽 사진)과 접견실(오른쪽) 모습. 복원이 완료된 대한제국 공사관은 오는 22일 개관식을 갖고 일반에 개방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제공


- 22일 美 워싱턴서 재개관

日帝, 1905년 외교권 강탈해
1910년 단돈 10달러에 처분
문화재청, 2012년 되찾은 뒤
6년간 원형 그대로 고증·복원

韓美 수교 136주년 맞춰 오픈
이위종 특사 어릴적 사진 첫공개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이 한·미 수교 136주년인 오는 22일 다시 문을 연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폐쇄됐던 공사관에 태극기도 113년 만에 다시 걸리게 됐다.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측은 “오는 22일 오전 10시 30분 공사관이 위치한 워싱턴 로건 서클의 역사지구 공원에서 김종진 문화재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공사관 개관식 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14일 밝혔다. 행사에서는 국기 게양식도 함께 열리는데, 1889년 개관 당시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독립유공자 월남 이상재 선생의 증손이 참여할 예정이다. 공사관은 1877년 남북전쟁에도 참전했던 정치인 세스 펠프스가 자택으로 건립했던 건물로, 대한제국은 1889년 2월 2만5000달러에 매입한 뒤 구한말 대미 외교의 본거지로 집중 활용해 왔다. 하지만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뒤 폐쇄됐고, 1910년 한일 합병 직후 일제가 단돈 5달러에 강제 매입해 미국인에게 10달러에 처분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잊혔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공사관 건물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03년 한국인의 미국 이민 100년을 계기로 한인 사회에서 공사관 매입 움직임이 일어나면서부터다. 이에 문화재청은 정부 차원의 매입 필요성을 느끼고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을 통해 2012년 10월 당시 소유자였던 변호사 티머시 젱킨스로부터 350만 달러(39억5000만 원)에 매입한 뒤 6년간 고증·복원 작업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빅토리아 양식에 걸맞게 책상·의자·침실 등 각종 집기와 꽃무늬 카펫, 벽지까지 특별 주문했다. 고증·복원 비용도 총 100억 원에 달할 정도였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오수동 미국사무소 소장은 “철저한 복원을 위해 한국 규장각뿐 아니라 미국 언론의 마이크로필름까지 뒤졌다”고 말했다.

특히 공사관에는 초대 공사였던 박정양, 최초의 주러시아 공사를 지내기도 했던 이범진 등의 외교활동 사진도 진열돼 있다. 또 1907년 고종이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비밀 파견했던 ‘헤이그 특사’ 3인방 중 한 명인 독립운동가 이위종 선생의 어린 시절 사진도 처음으로 발굴돼 전시돼 있다. 이위종 선생은 이범진 공사의 차남으로, 영어·러시아어에 능통해 ‘헤이그 특사’의 통역을 도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종수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미국사무소 차장은 “이채연 공사의 경우 귀국 뒤 한성(서울) 부시장을 하면서 공사관 앞 로건 서클에 착안해 서울시청 앞에도 유사한 서클을 만들었을 정도로, 공사관의 역사가 한국 근대사와 많이 엮여 있다”고 말했다.

공사관 1층은 객당(접객실)과 식당, 2층은 공사 집무실과 침실, 서재 등으로 구성돼 있다. 침실이나 연회장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3층은 공사관 및 한·미 관계 역사를 홍보하는 전시실로 탈바꿈했다. 공사관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에게 공개되며, 관람료는 무료다.

워싱턴 = 신보영 특파원 boyoung22@,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속 大韓帝國|신동아 (donga.com)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속 大韓帝國

[‘덕후’ 사진관] 한국 관련 외국 문헌 수집가 김홍석

  • 홍중식 기자
  • 입력2023-02-16 10:00:02
  • free7402@donga.com
 
 


1897년 조선은 황제국을 선포하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1900년 열린 파리만국박람회는 대한제국이 독립적 전시관을 세워 참여한 첫 박람회다. 대한제국의 권위와 위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국가적 기획이었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가 탄생한 계기가 됐다는 것.

당시 한국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일하던 샤를 알레베크는 파리만국박람회 한국 측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 서울에서 찍은 사진 등을 이용해 파리에서 48종의 사진엽서를 제작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로서 대한제국관의 공식 기념품으로 판매됐다.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 신생 제국 대한제국은 파리만국박람회를 통해 세계와 마주했다. 개화기 한국 관련 외국 문헌 수집가 김홍석의 수집품을 통해 당시 대한제국을 만나보자.


1900년 12월 16일(일요일)자 타블로이드판형 프랑스 주간지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내용 중 한 면 전체에 걸쳐 실린 박람회의 대한제국관에 관한 삽화(왼쪽)와 그 표지(오른쪽). 삽화 속 건물은 실제 박람회장에 설치된 경복궁 근정전을 축소해 만든 건물이다.

박람회에 관한 폴 제르(Paul Gers)의 저서 ‘1900년에’(En Coree, 1900년 발행). 대한제국을 소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1900년 박람회 공식 카탈로그 표지.

1900년 박람회 공식 카탈로그에 실린 대한제국관의 위치. 대한제국관은 L951로서 박람회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슈프렌(Sufren)가에 위치했다.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이 박람회 즈음에 펴낸 한국 소개 책자 ‘서울의 추억(Souvenir de Seoul)’ 표지. 앞면 왼쪽 위에 1900년 박람회에서 대한제국이 1개의 그랑프리, 2개의 금메달, 10개의 은메달, 5개의 동메달, 3개의 가작까지 총 21개의 상을 수상했다고 적혀 있다.

(왼쪽부터)대한제국 시기 서울의 관립 프랑스어학교 교사이던 샤를 알레베크의 초상. 한국 최초 사진엽서 시리즈를 만든 주인공이다. 1900년 당시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대한제국이 박람회에 참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람회 대한제국 대표 민영찬의 초상. 충정공 민영환의 동생이다. 박람회 대한제국 위원 중 한 명인 이인영의 초상.

알레베크가 제작한 48장의 엽서를 순서대로 늘어놓은 사진.

 

 

 

중앙일보 입력 2008.02.23 04:40 업데이트 2008.02.23 09:26

고종, 1905년 유럽 공관에 훈령 | 중앙일보 (joongang.co.kr)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사진)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년 11월)을 저지하기 위해 그해 12월 유럽 주재 공관들에 훈령을 내린 사실이 22일 밝혀졌다. 고종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본지 2월 20일자 1면) ▶서구 열강의 정상에게 보낸 국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 밀사 파견에 앞서, 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 입체적인 총력 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특히 고종은 이 훈령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한편 전면 문호개방과 함께 일본에 부여한 것과 똑같은 특권을 주겠다는 뜻을 전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훈령에는 “이 나라가 번영을 되찾으려면 우리는 과거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고종의 처절한 현실 인식이 담겨 있다. 고종은 이어 “미국과 다른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일본인과 같은 권리와 특권을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훈령은 이용익 전 군부대신, 주독일 공사 민철훈,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 주프랑스 공사 민영찬 앞으로 보냈다.

이 같은 사실은 고종이 1906년 1월 독일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의 전달자였던 고종의 프랑스인 정무 고문 알퐁스 트레믈레의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트레믈레가 고종의 밀서를 황제에게 전달하기 위해 외무부 차관 앞으로 보낸 편지 형식의 글에 동봉돼 있었다.

이 문서는 독일 외무부 정치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었는데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가 2003년 복사해서 보관하고 있었다(수집번호 051200762). 대한제국 시기의 외교문서를 번역·해설 작업 중인 명지대 정상수 연구교수가 발견했다.

1906년 5월 19일 베를린에서 프랑스어로 쓴 이 문서는 ▶인사글 ▶훈령(프랑스어로 번역) ▶대한제국 상황 등 모두 8장으로 구성됐다.

서울대 이태진(국사학) 교수는 “고종이 을사늑약에 대응하기 위해 해외 공관에 훈령을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고종의 전방위 외교 노력이 윤곽을 드러냈다” 고 평가했다.

고종은 을사늑약 이후 훈령(1905년 12월)-빌헬름 2세 밀서(1906년 1월)-국서(1월)-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1906년 6월), 프랑스 대통령 등 9개국 정상에게 보낸 친서(6월)-헤이그 밀사(1907년 6월) 순으로 필사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던 사실이 이 자료로 확인된 것이다.

이 편지는 “고종의 지시에 의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고 대한제국의 전면 문호 개방 계획을 담은 공문이 대한제국의 공사를 통해 1906년 12월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며 주독일 공사 민철훈에게 훈령을 보낸 사실을 적고 있다.

정용환 기자

[J-Hot] "문호 개방" 고종, 1905년 유럽 공관에 훈령

[J-Hot] "밀서 고종 친필 맞다"…고종 왜 직접 썼나

 

 

김건주입력 2020. 12. 22. 11:48

"나는 죽을지라도.. 한국 동포를 구하라" 어느 영국인의 유언 (daum.net)

키워드로 보는 외국인 독립유공자, '어니스트 베델'

 

[김건주 기자]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다.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다."

구한말 애국 계몽 운동가 위창 오세창이 한 말이다. 요컨대, '높은 문화의 힘'이 나라를 지킨다는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민족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국가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민족의 얼과 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민족만의 노력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해 힘쓴 외국인들도 있다.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은 한국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아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그는 왜 머나먼 영국에서 한국까지 왔으며, 어떻게 독립유공자가 됐을까.

 

키워드 1. #대한매일신보
 
  어니스트 베델(좌)과 대한매일신보(우) / 사진 제공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국립중앙도서관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 국립중앙도서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 서른둘이라는 나이에 베델은 영국 신문사 <데일리 클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세계의 관심사였던 러일전쟁의 취재를 위해 입국했지만, 베델은 일본이 한국에 저지르는 만행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친일 기사를 원했으나, 베델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일본의 행동에 분노해 '덕수궁 화재는 일본이 저지른 일일 가능성이 크다'라는 의견의 기사를 게재했다. 베델은 이후 <데일리 클로니클>에서 해고됐다.

해고 후 그는 한국에 영자신문이 없다는 점을 알고 한국에서 영자신문 사업을 계획했다. 그는 미국 생활 경험이 있고 영어에 능통한 독립협회 회원 양기탁과 <코리아 데일리 뉴스> 창간을 준비하며 국민을 위한 신문도 준비했다.

 

1904년 7월 18일, 민족 계몽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양기탁, 박은식 등과 함께 구한말 대표 정론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그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했다.

영국인들은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에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의 중심 언론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베델을 신문을 통해 일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도우며 비밀 항일 단체 '신민회'의 본부가 되기도 했다.

 

키워드 2. #경천사십층석탑
   
그의 언론활동은 눈뜨고 빼앗길 뻔한 우리 문화재도 지켜냈다.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뺏기고 2년이 지난 1907년 3월, 문화재 약탈자 다나카 미쓰아키 일본 궁내 대신은 한 무리의 일본인들을 보내 "고종황제가 기념으로 나에게 하사했다"라는 거짓말로 고려 시대의 유물 '경천사 십층 석탑'을 해체해 도쿄로 반출했다.

이 사기 행각을 들은 베델은 <대한매일신보>에 기사를 실었다.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 지역에 있는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층 높이로 세운 수백 년 된 유물이다. 그런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 군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사적으로 맹세했다고 한다."

1907년 3월 12일 자 <대한매일신보>

이 사건을 세계에 보도함으로써 일본의 국내·외 여론은 불리해졌다. 다나카 미쓰아키는 약탈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일부 일본인들조차 탑의 반환을 요구했다. 계속된 반환 요구 끝에 1918년, 경천사 십층 석탑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어니스트 베델은 우리나라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경천사 십층 석탑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 베델과 같이 탑의 반환을 도운 이가 헤이그 특사와 3·1운동을 지원한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다.

현재 경천사 십층 석탑은 10년의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의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눈에 띄는 높은 탑이 있다. 높이가 박물관 3층까지 이어져 있지만 균형 잡힌 모습으로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 탑 벽마다 중국 고전 <서유기>의 내용이 양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연꽃, 나한, 법회 장면, 합장한 불좌상까지 다양한 그림이 새겨진 이 아름다운 탑이 바로 경천사 십층 석탑이다.
 
▲ 국보 86호 경천사 십층 석탑  1348년 고려, 경기도 개풍(현 황해북도 개풍) 경천사에 세워졌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위치
ⓒ 김건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86호 경천사 십층 석탑. 양각의 무늬가 수놓여 있다.
ⓒ 김건주
키워드 3.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베델 묘역
ⓒ 김건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베델 묘역
ⓒ 김건주
한국에선 의인이지만 일제의 눈에는 빨리 처리해 버리고 싶은 애물단지였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외무성과 온갖 방법을 동원해 베델의 추방과 <대한매일신보>의 폐간을 모략했다. 일본은 끈질기게 외교 공세를 펼쳤다. 결국 베델은 재판에 회부됐다. 영국 영사관 고등법원은 그에게 6개월 근신형과 3주간의 금고형을 내렸다. 

이후에는 상하이로 끌려가, 3주간 금고형을 산 후 서울로 돌아왔다. 베델은 두 차례의 재판을 받으며 쌓인 스트레스와 과로로 심신이 약해졌다. 1909년 5월 1일, 서른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심장비대증 등으로 한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국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많은 한국인들의 슬픔 속에 그의 시신은 서울에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국 땅에서 그곳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거는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가 이 외국인이 한국의 독립유공자라는 데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을까.

수많은 외국인들의 묘비가 모인 선교사 묘역을 둘러보면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어니스트 베델의 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한국을 생각했다. 그의 유언은 베델이 한국을 위했던 일들이 얼마나 진심 어린 행동이었는지를 잘 나타낸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 문화재청, <수난의 문화재>

 

 

 

수정 2007-11-15 19:06 등록 2007-11-15 19:06

‘조선 최초 항명 검사 1호’ 아시나요? (hani.co.kr)

대검찰청 ‘이준 열사 흉상·검사 임명식 재현 동판’ 제막식

기자김남일
  •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은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사람들을 사면자 명단에 넣어야 한다.”

이준 검사는 1906년 이근택 등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돼 복역 중이던 기산도(1878∼1928) 선생 등의 사면을 주장한다. 상관들의 반발에 부딪힌 이 검사는 결국 기소·파면되고 만다. 사실상 첫 ‘항명 검사’라는 ‘명예’를 안게 된 이는 우리에게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특사로 활동하다 순국한 것으로 알려진 이준(1859~1907) 열사다. 그는 1896년 현재의 사법연수원에 해당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법률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가 배출한 우리나라 ‘1호 검사’이기도 하다. 여섯달 동안의 교육을 마치고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됐지만 1주일 뒤 아관파천으로 인해 일본 망명길에 오른다. 1897년 와세다대 법과에 들어간 이준 열사는 귀국 뒤 10여년만에 평리원 검사로 임명되지만 ‘항명 파동’으로 결국 파면됐다.

대검찰청은 15일 오후 5시 서울 서초동 대검 본관 4층 자료실에서 정상명 검찰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1호 검사’인 이준 열사 순국 100돌을 맞아 ‘이준 열사 흉상 및 검사 임명장 재현 동판’ 제막식을 가졌다. 이준 열사의 흉상과 동판은 부산대 법대 문준영 교수 등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쳐 재현됐다. 대검은 지난 2006년 이준 열사를 ‘자랑스런 검찰인’으로 선정해 관련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준 열사의 검사 임명장 재현 동판은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에도 전달될 예정이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을사늑약]

최효안 기자입력 2016. 11. 17. 21:10수정 2016. 11. 17. 22:20
 

<앵커>

그런데 오늘(17일)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11년째 되는 날입니다.

당시 고종이 열강에 보낸 친서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고종의 항일 활동이 담겨 있는데, 고종 친서의 원본을 최효안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미 컬럼비아대 도서관 내의 희귀문서실.

고종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담아 독일, 프랑스 등 9개국에 보낸 친서들입니다.

이 친서에서 고종은 을사늑약이 왜 무효인지를 명확하게 밝힙니다.

[일제가 위협해 강제로 이뤄진 것이며]

[나는 정부에 조인을 허가한 적이 없으며]

[이는 국제법을 위배한 것이므로 무효입니다.]

[신희숙/미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한국학사서 : 고종황제께서는 외국에 친서를 보낼 때는 (본명을) 쓰시는데, 고종황제 이름이 여기 나와 있고요.]

[탐 맥커천/미 컬럼비아대 희귀문서실 전문사서 : 이 친서의 영문은 아주 정중하고 공손하고 분명한 문체입니다. 주장하는 핵심을 아주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친서들은 고종의 비밀특사인 호머 헐버트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전달하려 했지만, 일본의 농간으로 회의가 1년 연기돼 빛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친서들은 일본의 역사학계 일각에서 여전히 고종이 앞장서서 늑약을 맺으려 했다는 식민사관을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영상취재 : 설민환, 영상편집 : 이재성, VJ : 박승연)     

▶ [취재파일] 을사늑약 111주년 - 1905년 11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선 무슨 일이?
최효안 기자hyoan@sbs.co.kr

 

 

입력 2008-04-05 02:55업데이트 2009-09-25 08:35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국제법 위반을 알리기 위해 최초로 외국에 보낸 전보의 독일어 번역본. 사진 제공 정상수 명지대 교수
 
민철훈 독일공사관에 보낸 전보 번역본

정상수 교수 “국제법상 무효 입증할 근거”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국제법 위반을 외국에 알린 최초의 문서(긴급 전보)가 확인됐다.

이 전보는 을사늑약 강제 체결 3일 뒤인 1905년 11월 20일경 독일에 도착한 것으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외국 정부의 도움을 요청한 대한제국 최초의 문서로 평가된다.

그동안엔 고종 황제가 1905년 11월 26일 알렌 전 주한 미국공사에게 보낸 긴급전문이 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첫 문서로 알려져 왔다.

정상수 명지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는 4일 “국사편찬위원회가 복사한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외교 문서를 판독하는 과정에서 고종이 당시 베를린 주재 공사관이었던 민철훈에게 보낸 전보의 독일어 번역본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전보의 우리 원본의 소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정 교수는 “민철훈이 ‘대한제국 황제가 보내 오늘 본인이 받은 전보 번역본을 외교부에 전달한다’는 편지를 남긴 점, 전보의 독일어 번역본에 당시 독일 외교부 하급 관리와 외교부 차관이 1905년 11월 20일과 23일 전보를 각각 확인했다는 자필 서명이 전보의 독일어 번역본에 남아 있다는 점 등으로 보아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 직후 이 전보를 보낸 것이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고종 황제는 이 전보에서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후작을 조선 통감으로 임명하도록 짐을 압박하고 있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넘겨받으려고 한다. 이것은 국제법적 관점에서 용납이 안 된다”며 “귀하(민철훈)는 촌각을 다퉈 이러한 급박한 위기에서 황실과 대한제국이 시급히 벗어나 독립이 보장되고 국제법이 상실되지 않도록 독일 정부에 도움을 요청해 달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국제법상 조약 체결 직후 항의나 반대의사를 표시하면 조약의 무효가 성립된다는 게 국제법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라며 “을사늑약이 국제법상 무효임을 주장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번역본을 살펴본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을사늑약의 국제법상 무효를 고종 황제가 처음 제기한 문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큰 사료”라면서 “특히 그 첫 문서를 미국이 아니라 독일에 보냈다는 것은 고종이 일본과 외교 관계를 맺은 미국보다 러시아와 가까운 독일이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중앙일보 입력 2008.02.20 04:42 업데이트 2008.02.20 08:26

고종의 “을사늑약 원천 무효” 밀서 | 중앙일보 (joongang.co.kr)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고종 황제의 외교 발자취를 입증하는 사료다.”

고종의 친서를 연구해온 서울대 이태진(국사학·사진) 교수는 고종이 을사늑약 이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보낸 밀서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교수는 ‘고종의 밀서가 1906년 1월 30일로 예정된 일제의 통감부 설치를 앞두고 구국을 위한 외교 노력을 펼쳤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을사늑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한 고종의 친서는 ▶1906년 1월 29일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 22일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 22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왜 독일 황제에게 보냈나.

“황제 어새가 찍힌 이 친서는 1906년 1월 유럽 각국 정부에 보낸 국서와 짝을 이루는 문서다. 두 문서는 고종의 외교 노력이 입체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서에서 고종은 일제의 강점을 피하기 위해 서구 열강의 5년 기한 공동보호도 수용하겠다는 카드를 던졌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의 수교국이었던 독일의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 지원을 호소한 것이다. 문서를 읽어보면 국권 침탈의 벼랑 끝에서 몸부림친 군주의 고뇌가 읽힌다.”

-국서에는 어떤 도장이 찍혔나.

“대한제국 황실의 공식 국새인 ‘대한국새’가 찍혀 문서의 내용이 황제의 뜻이라는 것을 공인했다.”

-어새 위에 적힌 한자는 무엇인가.

“고종의 이름이다. 경이라고 읽는다.”

-어새가 찍힌 문서의 성격은.

“어새가 찍힌 문서는 지금까지 6개가 발굴됐다. 이번에 한 건이 더 추가된 것이다. 어새는 주로 밀서에 찍혔다.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비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조·러 연합작전을 제안하는 등 특급 국가기밀을 다룬 문서에만 찍힌다. 어새와 함께 ‘한성에서 이경’ 또는 ‘경운궁에서 이경’ 이런 사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서도 같은 형식을 취했다.”

-또 다른 고종의 친서가 나올 가능성은.

“국서가 영국 기자에게 전달됐다는 점에서 당시 유럽 수교국이었던 프랑스·벨기에에도 친서가 보내지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는 조선 정부가 추진한 중립국의 모델이었다.” 

정용환 기자

◇을사늑약(乙巳勒約)=1905년 11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고종과 정부 대신을 위협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쌍방의 조건이 대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힘 있는 강자의 강요에 의해 체결됐기 때문에 ‘늑약’이라고 부른다.

◇헤이그 밀사 사건=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1907년 고종이 이준 열사 등에게 친서와 신임장을 주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한 사건.

[J-Hot]

▶ 고종 '을사늑약 밀서' 1906년 獨 황제에게도 보냈다

▶ 어새 위에 한자는 고종의 이름 '경'

▶ 고종의 밀서 어떻게 찾아냈나

 

 

한국고대사 | 을사늑약이 강제였다는 것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밀서)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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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입력 2022.10.11. 03:00업데이트 2023.11.10. 11:10

소설·영화·뮤지컬… 대한민국은 지금 ‘안중근 열풍’ (chosun.com)

김훈 작가의 ‘하얼빈’ 9주째 1위
윤제균 감독 영화 ‘영웅’ 12월 개봉
뮤지컬과 함께 더블 흥행 기대돼

 
2022년 문화계 키워드 중 하나는 안중근이다. 오른쪽 사진은 오는 12월 개봉하는 영화 ‘영웅’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기하는 배우 정성화. /CJ ENM

 

김훈이 지은 소설 ‘하얼빈’이 9주 연속 종합 1위(교보문고)를 질주하고 있다. 인쇄량은 8쇄 22만부. 작가는 “안중근 심문 조서와 공판 기록에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다”며 “시대 전체와 맞서는 그 고압전류를 옮기고 싶었다”고 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이 소설은 다른 베스트셀러에 비해 40~60대 남성층에서 인기가 많다. 독자들 사이에서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를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됐고 한편으론 부끄러웠다”는 감상평을 받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1426만 관객을 모은 윤제균 감독은 오는 12월 뮤지컬 영화 ‘영웅’으로 돌아온다. 하얼빈 의거 직전부터 순국까지 안중근(1879~1910)의 마지막 1년을 담았다.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뮤지컬 ‘영웅’도 12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개막한다. 올해 하반기 문화계 키워드를 안중근이 예약한 셈이다. “한국 사회가 경제 불황과 사회적 위기에 둘러싸여 있어 대중이 안중근에게 공감과 위로를 얻는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훈은 '하얼빈'에서 역사 소설의 장인다운 면모를 또 보여준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탄 6발을 쐈다. 러시아 헌병들이 덮칠 때 "코레아 후라(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탄창 안에는 쏘지 못한 한 발이 남아 있었다.

◇영화 ‘영웅’은 어머니를 그린 이야기

윤제균 감독에게 ‘영웅’은 8년 만의 복귀작이다. 그는 지난 7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기자들을 만나 “영화 ‘영웅’을 12월 21일 개봉한다”고 발표했다. 영화 속 블라디보스토크의 모습은 라트비아에서 촬영했고 하얼빈은 합천과 평창의 세트에서 재현한 뒤 시각특수효과(VFX)로 구현했다.

“투자자들은 정성화가 안중근을 연기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이 작품을 가장 잘 아는 배우이고 노래 실력은 대체 불가능하다’고 설득했다. ‘국제시장’이 아버지의 이야기였다면 ‘영웅’은 어머니를 그린 이야기다. 안중근과 조마리아 여사(나문희), 모자 관계가 핵심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애절하다. 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영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날 자리에는 주연 배우 정성화·김고은·이현우·박진주 등과 투자배급사 CJ ENM이 함께했다. 노래는 대부분 라이브로 녹음했고, ‘그날을 기약하며’ ‘누가 죄인인가’ ‘장부가’ 등 원작 뮤지컬의 삽입곡 외에 조선의 마지막 궁녀이자 독립군 정보원 설희(김고은)가 부르는 한 곡이 추가됐다. 윤제균 감독은 “김고은의 노래 실력은 가수 소찬휘급”이라고 말했다. 정성화는 “미래를 바꿔줄 영웅을 기다리면서 정작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영웅은 잊고 산다”며 “보면 가슴이 뜨거워질 영화”라고 했다.

뮤지컬 '영웅'의 하얼빈 의거 장면. 이 뮤지컬은 하얼빈역에 실제 기차가 들어오는 것처럼 표현한 무대미술로도 유명하다. /에이콤

◇뮤지컬도 발레도 ‘안중근 열풍’

뮤지컬 ‘영웅’은 마곡으로 이사간 LG아트센터 서울에서 12월 21일 개막한다. 영화 ‘영웅’과 뮤지컬 ‘영웅’이 같은 날 관객을 만나며 동반 흥행하는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다. LG아트센터 서울 관계자는 ‘영웅’을 첫 뮤지컬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안중근 의거 100주년인 2009년에 LG아트센터에서 초연해 좋은 평가를 받은 창작 뮤지컬”이라며 “남녀노소 다양한 관객이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6월 대한민국발레축제 개막작은 M발레단의 ‘안중근, 천국에서의 춤’(안무 문병남)이었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까지 들려오면 나는 기꺼이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오”라는 안중근의 유언에서 출발한 드라마 발레. 이동훈이 안중근, 김지영이 김아려, 김순정이 조마리아로 춤췄다.

뮤지컬 '영웅'의 법정 장면. 배우 정성화는 2009년 초연부터 10년 넘게 주인공 안중근으로 출연했다. /에이콤

◇지금 왜 안중근을 부르나?

그는 이순신과 함께 국민 모두가 흠모하는 영웅이다. 김훈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외쳤던 두 개의 이슈, 약육강식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과 동양 평화는 (최근 대만과 중국 갈등을 보면) 여전히 유효한 외침”이라고 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일제강점기나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는 코로나 사태와 경제 불황, 물가 상승이 최대의 위기”라며 “안중근 의사는 역사 속에 박제된 영웅이 아니라 이렇게 어려울 때 불려나와 우리에게 긍지와 위로, 자극을 준다”고 해석했다.

오는 10월 26일은 하얼빈 의거일. 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김황식)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하얼빈 의거 113주년 기념식’을 연다. 유해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지만 온 나라가 안중근을 부르고 있다. 영화와 뮤지컬에서 안중근이 노래하는 ‘장부가’는 이렇게 흘러간다.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본다~”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학생들이 참배하고 있다. 오는 26일 ‘하얼빈 의거 113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뉴스1

 

 

 

중앙선데이 입력 2021.10.30 00:20 업데이트 2021.10.30 01:56

안중근 의거 직후 하얼빈의 기록 | 중앙일보 (joongang.co.kr)

배영대 기자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
한국역사연구원 편
태학사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외무성을 대책 본부로 삼고, 정무국장 구라치 데스기치를 하얼빈 현지로 급파했다. 이후 외무성은 만주 일원을 비롯한 전 세계 18개국 약 80개 기관과 1778건의 보고문 · 훈령 등을 주고받는다. 그 기록이 일본 외무성 산하 외교사료관에 ‘이토 공작 만주 시찰 일건(伊藤公爵滿洲視察一件)’이란 제목으로 보관돼 있었다.

이 자료집을 한국역사연구원(원장 이태진)이 『그들이 기록한 안중근 하얼빈 의거』라는 이름으로 국내 출간했다. 이 사건의 혐의자 및 연루자 색출, 재판 절차, 변호인단 동향 파악, 한인 반일운동가들 감시, 각국의 반응,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장례 절차 등을 망라하고 있다. 모든 보고문과 훈령 등에 제목을 붙여 목록을 만들었고, 원문은 별도의 DVD로 제공한다. 하얼빈 의거 연구의 새로운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주요 자료 24건을 선별하여 간략한 해설과 번역문을 실었다. 주요 자료 중 첫 번째로 실린 것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에게 1909년 12월 6일 보낸 수사 방법 보고 및 특별비 지출 방안 품청에 관한 2건이다. ‘한국인 밀정’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일본 외무성 산하 각 영사관이 한국인을 밀정으로 매수해 활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신문인 ‘대동공보’ 사장이자 변호사인 미하일로프가 영국 변호사 더글러스와 함께 안중근 변호 약정을 했다가 좌절되었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도 포함돼 있다. 또 ‘한국 황제(韓皇)의 밀사 송(宋) 모에 관한 건’이란 자료도 흥미롭다. 이태진(서울대 명예교수) 원장에 따르면, 안중근의 신병이 일본 법정으로 넘어가자 국제변호인단 구성에 소요되는 비용, 안중근 가족의 생계를 위한 비용 등을 마련하기 위한 ‘안중근 구제회’ 관련 자료로 보인다. 이 원장은 “안중근 관련 자료는 아직 조사해서 보급해야 할 것이 많다. 어쩌면 가장 긴요한 것이 빠진 상태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배영대 학술전문기자 balance@joongang.co.kr

 

 

 

수정 2008-03-25 20:43 등록 2008-03-25 20:43

사형 4분전 “일본도 평화기원 삼창 함께 하자” (hani.co.kr)

“3월25일 죽여달라”…순종 생일 겹쳐 하루 미뤄져
두 동생과 최후의 면회 “노모와 아들 잘 부탁한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의연하게 ‘이슬’로

3월8~10일 안 의사에게 영세를 준 홍석구 신부(안 의사 맞은편 뒷모습)와 안 의사의 두 동생(맨 왼쪽·정근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땅 여순(뤼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지 꼭 98년 되는 날이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교수형이 집행되고 10시15분 감옥의는 그의 죽음을 확인한다. 1879년생이니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모친 조마리아는 안 의사에게 사람을 죽였으니 당당히 죽음을 맞이하라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항소를 포기한 그는 형 집행의 날로 3월25일을 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며 종교적 구원의 과정으로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안 의사는 25일 동생들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

안중근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의 자료는 2월14일 사형선고에서 죽음을 맞는 3월26일까지 안 의사의 마지막 행적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동안 안 의사의 최후의 순간, 홍석구 신부의 안 의사 고해성사, 동생들의 면회 등이 소개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번 자료는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고 일부 잘못 알려준 내용도 바로잡아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마침 25일부터 여순감옥 뒷산에서는 안 의사 유해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뒤늦게나마 국권이 회복되는 날 유해를 반장해 달라는 그의 유지가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안중근 98주기 ‘최후의 날들’ 재구성
공근)이 사형 집행을 앞둔 안 의사를 여순감옥 관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면회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통감부 통역 소노키 스에키다. 최서면 한국국제연구원 원장 제공

 

 

■ 사형 선고받다=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30분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불과 일주일 동안 불과 여섯번의 공판 끝에 안 의사에게는 사형이, 공범인 우덕순 징역3년, 조동하·채동순은 각각 1년 3개월의 형이 내려졌다. 안 의사는 사형이 선고된 뒤 일본 당국의 특별 허가를 얻어 프랑스인 서울주교 구스타프 뮤텔에게 보낸 전보에서 신부를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다.

 

■ 사형집행일로 3월25일 희망=2월17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면회해 사형선고 판결 등 재판과정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 한 행동을 살인범으로 몰아 심리한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안 의사는 “이또 히로부미가 살아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해할 뿐이다. 동양의 한 사람인 내가 이런 나쁜 자를 제거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세례를 준 홍석구(프랑스 이름 조셉 빌렘) 신부가 곧 이곳에 오는데 천주교 신도로서 기념스러운 3월 25일(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 처형해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 3년 만의 만남=3월7일 여러곡절 끝에 홍 신부가 도착했다. 그는 재판부가 안 의사의 고해성사를 허락한 데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그러나 고해성사가 신부와 신자 사이에만 이뤄지는 비밀행사이며 이 때문에 모든 일이 당국의 입회 아래 이뤄져야 한다는 형무소법과 충돌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최서면 국제연구원 원장은 입회는 하돼 멀리서 고해성사는 듣지 않는 것으로 절충했다고 설명했다). 8일 오후 2시 홍 신부는 두 동생과 함께 법원 당국의 양해 하에 오후 형무소를 찾아 3년만에 안 의사를 다시 만났다. 홍 신부는 죽음을 앞둔 신자로서 해야 할 바를 알려주고 다음날 고해성사를 하기로 하고 돌아갔다. 홍 신부는 위로의 인사를 하고 서서히 자기가 온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내가 이 만주 여순에 오기까지는 많은 비판과 장애가 많았다. 네가 아는 대로 너와 나는 사제관계에 있어서, 또 이번 거사는 내가 시킨 것처럼 어떤 신문에 와전됐기 때문에 적지 않은 의심을 받아 이번에 오는 것도 어떤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일반에게 전달되어 비상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홍 신부는 이어 “몇번이고 여기 오는 것을 주저했으나 너와 두 동생의 간절한 부탁으로 나는 여순 법원의 특별 면회허가가 났다는 전보를 받고 여러차례 반복해 고려한 끝에 원래 선교사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천명을 받들 나는 국가나 정치에는 전혀 관계가 없고 공명정대한 것만을 생각하여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걸 느끼고 만난을 제치고 여기 오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 면회의 목적은 세가지가 있는데 나는 내 아들인 신앙의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목숨을 잃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다. 둘째 나는 이번 너의 거행이 살인이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셋째 너의 고국의 동포와 교우들은 너의 이 큰 죄로 도저히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어느나라 국법에도 반드시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하며 네가 깨끗히 죽음에 임하는 것이 그 죄를 씻는다는 걸 원하고 있기 때문에 너의 모친과 교우의 위촉을 받아 네가 죽기 전에 일순간이라도 좋은 교우로서 죽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홍 신부는 “3년전 일시 흥분에 쏠려 국가를 위해서 한다고 싸워야 한다고 하고 블라디보스톡에 가려고 할 적에 너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오늘이 올 것을 알고서 가지 말 것을 타일렀다”고 말했다. 또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중략) 감옥장의 후의에 의하여 신부에게 차와 담배를 제공하고 안중근에게도 담배를 주니 홍신부가 대죄인한테 이런 대우를 한다고 고맙다고 하니 형무소 온 이래 법원과 감옥소의 취급은 매우 관대하여 파격적인 걸 미처 생각지도 못한바 특별한 급여를 하고 매일 두번 흡연실에서 차 과자 담배를 제공받았다고 하니, 홍 신부는 새삼스럽게 놀라며 평소 일본의 문명이 들은바 이렇구나 하고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교우들도 이 관대함에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하였다”고 돼 있다. 홍신부는 “당국의 허가를 얻었으니 고행성사를 올려 하루속히 죄의 사함을 청하면 하느님은 반드시 네 큰 죄를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고 4시20분 안 의사에게 기도를 하고 떠났다. 면회 중 홍 신부는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껴안는 것 같은 태도로 안을 대하고 안 의사는 어디까지나 경모하는 기분으로 시종일관 말을 들었다고 보고서는 적고 있다.

 

■ 고해성사와 미사=3월9일 오후 2시 안 의사는 홍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 고해성사는 백지 20장에 걸쳐서 적은 내용을 읽어가며 20분간 진행됐다. 홍 신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았고, 안 의사도 신부의 귀에 입을 대고 고해성사를 했다. 너무 목소리가 작아 신부 외에는 누구도 들을 수 없었다. 홍 신부는 그렇게 진지하고 생생하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안 의사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고 밝혔다. 일본관리들이 고해성사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라고 물었으나 홍 신부는 일체의 내용을 밝히길 거부했다.

홍 신부는 “안 의사의 사형집행이 25일이라고 하는데 혹은 27일 이라는 설도 있어 분명치 않으나 25일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이므로 만일 그날 저녁 6시에 형이 집행된다면, 천주교 신자가 죽는 데 있어서 이처럼 좋은 날은 없겠지만 27일은 예수가 부활한 날이어서 모든 신자들이 가장 중요한 날로 부활절에 사형당하는 일은 없으므로 만일 27일 사형이 집행된다면 고의로 나쁜 날을 택한 것이 되어 세계여론을 두려워 하여 이날을 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3월 10일 형무소 교회당에서 홍 신부에 의한 미사집전이 있었다. 미사에 참여한 신자는 안 의사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 신문들은 교회당 안에는 지켜보는 사람들로 가득찼으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참가자들도 미사집행의 엄숙함에 감동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 동생들의 뜻밖의 면회=3월 25일로 예정됐던 사형집행일은 순종의 생신인 건원절이었다. 국제적으로 크리스마스와 정월 초하루 국왕탄신일에 사형집행하는 일이 없고 한국에선 의병투쟁이 심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는 대한황제의 생일에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국제 국내적으로 곤란한 일이 야기되므로 피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따라 사형집행은 25일에서 26일로 연기된다. 이를 모른 안중근은 25일 간수가 문을 여니 사형집행인줄 알고 나왔는데 뜻밖에도 동생 둘이 면회를 와 있었다. 25일 오후 12시 40분 감옥에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나카무라 간수장 소노키 스에키 통역 입회아래 미즈노, 가마타 두 변호사와 안중근의 두동생 정근 공근의 마지막 면회였다. 소노키 통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일본외무성과 통감부에 보냈다.

안중근은 우선 정근 공근 두동생에 대해서 고향에서 오는 부탁한 한복이 왔느냐고 묻자 두 동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고 만일 때를 맞추지 못하면 이곳에서 양복을 조달해 드릴테니 걱정마시라고 하였다. 근데 안중근은 미즈노 변호사가 있는 것에 놀라고 어찌된 일이냐고 했더니 미즈노 변호사가 홍 신부가 지난번 여순에 왔을때 병이 나서 오려던 것이 못왔기 때문에 오늘 두동생이 최후에 면회를 한다는 걸 알고 변호사였던 인연으로 만사를 제쳐놓고 위문차 왔다고 하자 안중근은 그렇게도 나에게 동정을 베풀어주니 감사하다고 말하고 두 동생에게는 오늘이 최후의 면회라고 하니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으므로 그런 생각에서 말을 할테니 빠짐 없이 잘 들어달라고 하였다. 그는 우선 노모의 안부에 대하여 두 동생에게 부탁하며 평소에 아들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효도를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번 사건으로 매우 심려를 끼친 불효의 죄를 용서해주도록 말씀 여쭈어 달라고 부탁하고, 또 다시 이미 애기한 한대로 장남 분도를 장래에 신부로 되도록 길러달라고 하였다. 실은 차남이 중병이 걸렸을 적에 뜻밖에도 하느님의 가호로 회생한 것을 생각하여 차남을 신부로 되게 하려고 생각했었으나 몸이 약해 이에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장남을 신부로 만들어달라고 하였다.

또한 정근에겐 너는 장래 공업에 종사하라 한국은 공업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금 돈 밖에 모르는 세상이 되었지만, 실업을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말은 꼭 공업에만 종사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무 심는) 식림 같은 일은 한국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이므로 혹은 식림에 종사하여도 좋다. 결론적으로 국익을 증진시키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곧 우리 집안의 도움이 되는 것이다. 공근에게는 학문에 종사하여 노모와 노모가 살아계시는 고향에서 잘 모시기 바란다. 두 동생은 땅이 넓으니 불편하면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살테니 어머님은 별로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더라.

안중근은 두 동생에 대해서 먼저 말한대로 하얼빈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 왔느냐 물으니 두 동생은 아직 받지 못했지만 귀국하면 시베리아로 이주할 작정이므로 그때 이것을 찾겠다고 대답하였다.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만일 시베리아로 가면 먼저 말한 대로 장봉금으로부터 5천원을 받을 것이 있는데 그 돈은 동의해의 돈이므로 갚으라고 당부하고 다음은 이치권의 아직 갚지 못한 숙박료가 있다고 하고 그 집에 내 가방과 의류와 기타 단지동맹때 자른 손가락을 돌려받아라, 또 두 동생에 대하여 금번 의거에 대하여 각국 신문지상의 논평이 어떻냐고 물으니 두 동생은 한국에서는 의거를 게재하는 일이 용서되지 않고 있으며 일반 국민들은 좋다고도 하고 나쁘다고도 하여 할 수 없다고 했다.

안중근은 “실로 불가사의 한 일이 있다. 내가 연초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을 때 미국의 신문지상에 풍자화가 실려 있었는데 내가 의거하려는 것과 일치되는 것이 있어서 당시 감동받은 바가 있다. 한 한국 미인이 서 있는 옆에 일본 사관이 많이 줄 서 있었는데 미인의 소지품을 약탈하려고 하는 한 일본 사관이 사법권과 외교권이라는 물품을 가져가자 그 뒤에 많은 조선인이 총을 들고 그 사관을 쏘려고 하는 걸 그린 것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무엇인가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느끼고 크게 웃었다”고 말했다.

입회한 감옥장(전옥)이 면회시간에 제한이 있으니 유언할 게 있으면 그걸 먼저 말하고 여담을 말하라고 당부했으나 귀관들은 목숨이 길고 나는 목숨이 단석에 이르니 이 면회를 좀더 연장해주길 바란다고 하고 두 동생에게 다시 “나는 내 의무를 다하였다. 미리 각오하고 한 일이므로 내가 죽은 뒤의 일에 관해서는 하등 남길 말이 없다. 단 이때까지의 면회에서 이미 말한대로 더 말할 것은 없다”고 말했다. 노모에 대해서는 “자기에 대신해서 효도를 다해줄것을 당부한다. 집안이 화평하게 지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숙부 홍신부 민 주교 안명근, 형수에게는 편지를 써놨으니 이것을 전달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시에 동생들은 할말이 없냐고 물으니 “아무 것도 드릴 말씀이 없고 형이 분부하신 사회 일에 관해서는 동생들이 서로 협력하여 잘 되도록 노력할 것이니 걱정말고 형의 길을 따르시길 바라며 천당에 오르시도록 희망한다”고 하였다. 안중근은 ”사람은 한번은 반드시 죽는 것이므로 죽음을 일부러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인생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미즈노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동정(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킨 당신의 뜻이 길이 세상에 전해지길 바라며 나도 될 수 있는대로 그 뜻을 전하려고 노력하겠다. 그러니 깨끗히 형에 따르고 빨리 천국에 가시기를 바란다. 천국에서는 언어에 지장이 없을테니 나도 뒤에 천국에 가면 당신과 손을 잡고 정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안중근은 “귀하의 동정과 이해에 매우 감사할 따름이다. 귀하가 이처럼 동정하고 이해해 주시니 감사하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것은 외국에 가는 것과 같아서 일정한 법이 있다. 모름지기 천주교 교도가 되어 천국에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떠냐. 그렇다면 천국에서 같이 손을 잡고 서로 정을 나눌 수 있다”고 기독교 신앙을 권유했다. 가마다 변호사도 “나도 귀하에 대한 동정과 이해는 미즈노 변호사와 같으니 이번 사건과 같은 일이 다시 없도록 노력할 것이니 이해해달라”고 말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나도 “당신에게 감사하는 것은 미즈노 변호사에 대해 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세상사로 얘기가 옮겨지자 안중근은 내가 언제까지 끝없이 얘기할 것이 아니니 두 동생보고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간수에 대하여 이제 더 할말이 없다고 하니, 감옥장은 마지막 악수와 기도를 허락한다고 하여 안중근과 두 동생은 기뻐하여 손을 잡고 악수한 뒤 무릅꿇고 기도하고 돌아갔다. 오후 3시 30분의 일이다. 이날 안중근의 태도는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나 역시 마지막 면회는 서로의 작별의 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 형장의 마지막 순간=소노키 세이키 통역은 안중근의 사형집행을 다음과 기록하고 외무성과 통감부에 보고하였다.

살인 피고인 안중근에 대한 사형은 3월26일 오전 10시 감옥소 안의 사형장에서 집행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오전 10시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과 소관 등이 사형장 검시실에 앉고 안중근을 불러들여 사형집행의 뜻을 전하고 유언의 유무를 물은 데 대해 안중근은 별로 유언할 것이 없으나 자기의 이번 행동은 오직 동양의 평화와 평화를 도모하는 성의에서 나온 것이므로 바라건데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 각의도 나의 뜻을 이해하고 피차의 구별 없이 합심하여 동양의 평화를 기할 것을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에 동양평화의 삼창을 하도록 허가해줄 것을 제의했는데 전옥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을 설명하고 간수로 하여금 명령하여 백지와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특별히 기도를 드릴 것을 허가하니 안중근은 2분여 묵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간수가 데리고 계단으로 교수대에 올라 태연하게 형의 집행을 받았다. 때는 10시를 조금 넘은 4분이며 15분에 이르러 감옥의가 시체를 검사하고 절명하였다는 보고를 하기에 이르러 이에 집행을 끝내고 일동 퇴장하였다.

10시20분 안의 시체는 특별히 감옥에서 새로 만든 침관에 담아 흰 천을 덮고 교회당으로 옮긴 뒤 공범자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의 세 명을 끌어내 특별히 예배를 하게끔 하였다. 오후 1시 감옥의 장지에 이것을 매장하였다. 이날 안중근의 복장은 어제밤 늦게 고향에서 온 명주로, 한복 저고리는 흰색 바지는 흑색을 입고 가슴에 십자가를 달았다. 그 태도는 매우 침착하고 안색 언어에 이르기까지 평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종용 자약 떳떳하게 그 죽음에 이르렀다. 또한 형무소에 쓴 유고 전기는 완전히 끝냈으나 동양평화론은 총론과 각론의 일부에 끝나고 전부의 탈고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이렇게 보고 합니다.

강태호 남북관계전문기자 kankan1@hani.co.kr

 

 

입력 2008. 6. 8. 20:23수정 2008. 6. 8. 20:23

조선 총독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 집행 전까지 옥중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벼루(사진)가 발견돼 일본 미야기(宮城)현 구리하라(栗原)시 와카야나기초(若柳町)의 사찰 다이린지(大林寺)에 봉납됐다고 아사히신문이 6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치과의사이자 역사연구가인 일본인 히로세 다메히토(廣瀨爲人·71)는 올 들어 이 벼루를 입수해 전문가의 감정 결과 진품인 것으로 보인다는 판정을 받자 이를 안중근 의사와 관련이 깊은 곳에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따라 그는 안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 수감돼 있을 당시 담당 간수로서 안 의사의 유문(遺文)을 갖고 일본에 돌아왔던 지바 도치시(千葉十七)의 위패가 있는 다이린지에 벼루를 봉납했다.

 

넓이 7.5㎝, 길이 13.3㎝ 크기의 벼루 뒷면에는 '경술3월 어여순옥 안중근(庚戌三月 於旅順獄 安重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벼루는 경술년(1910년) 일본에 의해 교수형이 집행될 때까지 안 의사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이토 다이켄(齋藤泰彦) 다이린지 주지는 "한일 양국의 친선을 위해 벼루를 한국에 반환하는 것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도쿄=정승욱 특파원

 

 

[고종 어떻게 볼까  ‘고종은 개혁군주인가’ - 우리시대 지식논쟁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8-04-11 17:57

근대화 의지 투철…대한제국은 무능치 않았다 (hani.co.kr)

고종 어떻게 볼까

개혁군주였다면 개혁의지는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관건적인 문제다. 이태진 교수는 고종이 확고한 개혁·개화 의지를 지닌 군주였다고 역설한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개혁군주다

지난 5주 동안 네 명의 학자가 참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 논쟁에 이어 이번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펼쳐진다.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출발점을 이해하는 데 관건적 문제다. 고종의 퍼스낼리티나 정책 방향, 시대인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으로 비로소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제3의 대안세력이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어느 정도의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지 따져보는 데도 고종은 하나의 준거가 된다. 그동안 고종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이에 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이런 기존 인식이 고종의 개혁 의지와 개혁 방향을 과소평가한 데 따른 것이라며 ‘고종 재평가’를 가장 선도적으로 주장해 온 학자다. 이번 글에서도 이 교수는 고종이 “청년 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한다. 이 교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고종의 근대화 정책에 일본이 위협을 느낀 결과라고 해석한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논지다. 다음주에는 하원오 동국대 연구교수가 고종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최근 ‘뉴라이트 교과서’로 지칭되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가 무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근대사 서술에서 최근 학계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반면, 일본 의존의 갑신 ‘개화파’와 식민지 시기 경제성장론을 줄기로 삼은 것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식민지 시기를 근대 문명학습 또는 실천기로 평가하면서 경제 발전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강조한 것이 물의를 일으켰다. 이런 역사 서술로 과연 대한민국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자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마저 빚어졌다.

나는 2004년에 이미 이런 식의 역사인식과 반년에 걸친 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교수신문>을 통해 벌인 이 논쟁은 한국 논쟁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 아래 <고종황제역사청문회>란 책자로 출판되기까지 했다. 백 번의 대결을 불사했던 나에게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다시 논하라는 주문이 들어온 순간, 뒤늦게 피로감을 느꼈다. 넘어야 할 산이 이렇게 첩첩인가. ‘대안교과서’는 4년 전 논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고려해 좀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던가.

달포 전, 어느 일간지에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실효를 저지하고자 프랑스인 고문을 독일에 보내 우리 공사관들이 현지에서 철수하지 말 것을 훈령하고 또 독일 황제에게 일본의 조약강제의 만행을 알리면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기보다 차라리 서구 열강국들의 시한부 공동보호를 받겠다고 제안하는 친서가 공개되었다. 그 내용의 절박성과 절절함이 국민적 감동을 자아냈는데 이번 ‘대안교과서’의 서술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않은 역사 서술이다. 내가 보기에 ‘대안교과서’가 개화파 주도의 근대화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두 가지로 우리 근대사를 엮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극우 역사관과 너무 많이 닮았다. 대한제국의 자력 근대화노력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조선총독부 지도 하의 ‘근대문명 학습’을 홍보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을사늑약부당” 독일에 보낸 친서고종의 구국의지 여실히 드러내뉴라이트, 자력 근대화 노력 폄하시대적 분위기 감지 못한 것

1919년 3월1일에 만세 시위운동이 있은 뒤 9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조선공화국이란 새 국호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대의원회의에서 긴급동의가 나왔다. 곧 반 년 전 대한문 앞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죽음에 대한 애도요 충성의 소리인 만큼 그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 인식은 이렇게 대한제국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종은 청년 시절 개방ㆍ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ㆍ미국ㆍ영국ㆍ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고자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하였다. 수교 조약을 맺은 뒤에 미국 정부에 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미국 회사들과 계약하여 왕궁에 먼저 전기를 시설하고, 통신과 우편제도를 도입하고, 광산 개발 준비도 하였다. 이런 개화 노선에 대해 아버지 대원군이 불필요하게 임오군란을 일으켜 이를 빌미로 청국이 개입하여 속방화정책을 폄으로써 군주의 개화정책은 위기를 맞았다. 그의 근대화 정책은 그 뒤 일본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아 청일전쟁 직전에 왕궁을 침범당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왕비가 시해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만약 군주와 그의 정부가 어리석고 무능하기만 했다면 일본이 왜 국제적 비난을 사기 마련인 이런 만행을 저질렀겠는가?

고종의 개화정책은 왕비를 잃고 대한제국을 세운 뒤에 탄탄대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일시 침략의 방향을 대만으로 돌린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눈부시다 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금광ㆍ석탄 개발을 중요 사안으로 한 국토개발 계획이 세워진 상태에서 철도 부설과 광산 개발이 진행되고 서울에서는 워싱턴 디시를 모델로 한 도시 개조사업이 착수되었다. 오늘날 시청 앞 광장과 방사상 도로체계는 이때 처음 틀을 잡은 것이다. 곧 미국의 대통령궁(백악관)처럼 왕궁(현 덕수궁)을 도심에 새로 짓고 대안문(대한문) 앞을 방사상 도로의 중심으로 삼고, 기존의 종로, 남대문로를 확장하여 연결시켜 전차를 달리게 하였다.

고종 청년시절 서구와 수교 맺고미국과 밀착외교로 문명수입 시도일 ‘왕비 시해’ 위협 속에서도개화·개방정책으로 근대화 밑그림

한편, 서울ㆍ개성ㆍ인천 등지의 자산가들 힘으로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란 국고 은행을 세우고 1902년에는 지폐 발행을 위해 중앙은행 발족 준비를 마쳤을뿐더러 1899년 한청조약을 체결하여 청국과 대등한 독립국의 위상을 세우고, 바로 이어 헌법 전문(前文)에 해당하는 국제(國制)를 반포하여 황제국을 자처하였다. 이를 두고 군주전제정치로의 회귀란 비판은 한쪽 눈으로만 보는 역사다. 천황권의 신성성까지 표방한 명치 일본제국 헌법은 고대로의 회귀란 말인가. 근대국가 수립에서 군주권의 절대성 표방은 보편적 현상인데 굳이 대한제국만 예외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고종이 청년 시절에 어떻게 해서 선진문명 수용의 개방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최근에서야 잡았다. 지난가을,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열하(북경 북방 600여㎞ 지점)를 찾으려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에는 벽돌ㆍ수레 등의 사용을 주장하는 이용후생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지만 더 중요한 대목은 열하에 도착하여 건륭제가 티베트 라마불교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평등례로 대우하는 광경을 목도한 부분이다. 청국은 몽고족의 위협을 제어하기 위해 대부분의 몽고족이 믿고 있는 라마불교의 지도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그런 우대 정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바깥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조선은 대명의리의 북벌론에 빠져 있는 것이 너무도 개탄스러웠다. <열하일기>는 이렇게 세계정세에 대해 눈뜨기를 외친 역사 교훈서로 큰 의미가 있다.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나는 여기서 고종의 선진문명 수용 개방주의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금방 깨달았다. 청년 군주의 곁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있기도 하였지만, 직접 정치를 선언하면서 새로 지은 집무실 겸 서재(집옥재ㆍ集玉齋)를 벽돌로 지은 사연도 알 수 있었다. 아들 순종 황제가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기 사흘 전 박지원을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이 일세에 탁월하였다”는 사유로 좌천성에 추증한 사실은 비감하기까지 했다. 순종 황제는 아버지ㆍ어머니가 연암 박지원을 높이 받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망의 순간에 이 사실을 밝혀두고 싶었던 것이다. 박지원의 북학파 실학은 개화 군주 고종의 자력 근대화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고종의 개혁정치는 이제 우리 민족사의 본류로서 깊이 천착ㆍ음미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이태진 교수는 1943년 경북 영일 출생이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사회사연구>, <조선유교사회사론>,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이 있다.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8-04-18 18:39

근대화 아닌 왕권 집착하다 국권 잃어 (hani.co.kr)

고종 어떻게 볼까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지나친 미화는 곤란

지난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시작됐다. 고종이 개혁군주였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준거 가운데 하나다. 첫 번째 필자로 참여한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 작업의 선두에 선 학자답게 고종의 개혁의지, 개혁실천을 강조했다. 이 글에서 그는 고종이 “청년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달아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했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는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고종이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개혁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주목했다. 고종이 진정한 근대화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개혁적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의 진입에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다음주에는 조선정치사상사를 전공한 강상규(도쿄대 박사)씨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그동안 고종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아버지인 대원군의 등에 업혀 있거나 마누라인 민비의 치마폭 밑에 있다가 결국은 나라 망해 먹은 왕이라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고종이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고종의 평가도 많이 달라졌는데, 그동안의 대중적 이미지나 학계의 고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력히 비판하고 고종이야말로 한국의 현실에 맞는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고 마지막까지 국가를 지키려던 ‘우리의 황제’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치력이란 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고종의 행위가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라는 것이 미화하는 쪽의 입장이다. 왕과 국가가 하나로 묶여 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왕권이 곧 국권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어느 학자의 주장대로 고종이 아무리 18세기의 ‘영명한 영정조의 이념을 계승’했다고 하더라도 시대가 다르다.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데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개항 이후 초기 개화정책을 수행한 쪽은 김옥균 등 개화파라는 것이 교과서적 상식이지만, 고종이나 민비도 개화에는 관심이 많았다. 부국강병하자는 데야 권력의 핵심들이 싫어할 리도 없었고 그래서 민씨 일족도 이에 가세하고 있었다. 근대화하자는 큰 논리에는 고종, 민비, 민씨 척족들도 다들 인정하고 있었으나 정치적 행위는 오히려 대원군 이전 세도정권의 부패상을 그대로 잇고 있었다.

 

근대화에 정치력 발휘했지만개혁은 권력 강화의 도구였을 뿐왕권-국권 혼동하며 부패 일삼아‘구국의 인물’ 재해석은 시대착오적

권력의 부패는 민중의 저항을 야기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는 죽을 위기를 넘겨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 덕분에 권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된 고종이나 민비의 입장에서는 이 현상을 타개할 묘안을 찾아야 했고, 민비는 은밀한 서한을 고종에게 보냈다. 청나라 군대의 파병 요청이 그것이었다.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국내의 권력다툼을 해결하고자 했던 장본인이 바로 이 고종과 민비였고, 그 뒤 외세가 툭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우리를 협박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청나라 군대 때문에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 고종과 민씨 척족들이 한동안 친일적이던 외교정책을 친청으로 바꿀 것은 당연했다. 갑신정변 실패 뒤 청국은 원세개를 보내 조선을 속국처럼 다루었다. 아무리 고종이 청나라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는 처지지만 청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미국을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 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나름대로 자주적 외교정책을 내세웠다는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자주적 외교정책은 국권의 확보를 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조선에서 고종 자신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청과 감국으로 파견된 원세개에 대한 반발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에 대한 외세의 침해가 일차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농민전쟁에 대응하는 고종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청나라 병사로 막아내자.”

고종이 1893년 동학 농민군이 보은집회를 할 때부터 한 말이다. 외교정책의 반청적 성향과 국내에서의 민중봉기에 청군을 끌어들여 해결하려는 이중성의 배후에는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는 고종의 전근대적 인식이 있었던 것이고 이 이중성도 왕권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농민전쟁 때 고종이 지키려던 것은 분명히 왕권이지 국권이 아니다. 덕분에 왕자리는 보존했지만 그 통에 국가는 결딴이 나고 식민지로의 길도 가속화되고 말았다.

 

대원군·민중 견제엔 청 군대 이용청 견제엔 서구 끌어들이려는 시도권력 지키려다 외세간섭 빌미 줘개혁도 못한 채 패망·식민지 가속화

일본인들에게 민비가 죽고 난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했다가 환궁하고 나라 이름을 바꿔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독립협회도 만들어져서 활동하는데 독립협회 초창기에는 고종도 호의적이었지만 의회개설운동을 벌이자 보부상을 동원해 해산하고 전제황권을 강화했다. 이 독립협회의 평가는 학자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어느 학자는 의회개설 운동이 “독립협회에 잠복한 친일분자들의 황제권 약화운동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황제권의 강화가 이 시대의 대안이었다는 이야긴데 실제로 황실 중심으로 개혁을 시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 그것이다.

제도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인 광무양전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상회사, 은행, 근대적 생산공장의 설립과 광산 개발, 철도 부설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광무개혁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곳은 군사력 강화다. 국가 재정의 40%가 이 비용이었다. 강병을 하지 못해 농민전쟁 때도 외국군을 끌어들인 나라 사정을 생각하면 고종으로서 가장 공을 들일 것은 당연했다.

군사력 강화의 목적은 당연히 국가 주권의 수호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군사력 강화로 지키려던 것은 왕권 쪽에 더 가까웠다. 이미 1880년대에 경기와 호서, 황해도 지역 연해를 방어해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던 기연해방연을 왕실 경호를 주임무로 하도록 바꾸어 농민군마저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군사력을 약화시켰던 고종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군사력 증강의 주목표를 왕실을 지키는 데 두었다.

근대국민국가가 수립된 뒤의 군사제도는 국민군제다. 국민적 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는 대외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대내적으로 강력한 군주제를 바랐던 고종의 군대는 왕에게 충성하는 용병제일 뿐이었다. 러일전쟁이 현실화되는 1903년께 가서야 비로소 고종은 징병제 실시를 위한 조칙을 내렸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 등으로 확산되고 있던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운동을 억누르고 전제군주제를 강화하려 했던 고종으로서는 국민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인 징병제를 실행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개혁은 실패하고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객관성을 잃은 역사의 미화는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일제의 강압이라는 외적 요인에만 두지 않고 우리 내부의 문제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근 뉴라이트 쪽에서 쓴 ‘대안교과서’의 대한제국 평가는 대한제국의 전체상을 그리기보다 경제 쪽에 치중해 부정적 평가를 한다. 이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대한제국의 경제적 근대화의 한계가 바로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과론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역사의 객관성을 잃은 평가다.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hwh2000@hitel.net


하원호 교수

1954년 생이며 고려대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분야는 ‘동아시아사와 한국근대 사회사상의 변동’입니다. 주요 저작으로 <한국근대경제사>(1997), <근대의 진통>(2006), <한말일제하 나주지역의 사회변동 연구>( 2008)가 있습니다.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8-04-25 19:16

근대화 의지,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hani.co.kr)

고종 어떻게 볼까

근대 국제법에 입각한 자주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다”고 평가한다. 〈한겨레〉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당시 정세 복합적 고려를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진행중인 논쟁이 열기를 더하고 있다.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보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주장이 대립하는 국면이다. 고종 재평가 작업을 선두에서 이끌어왔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첫 번째 필자로 나와 고종의 개혁의지가 충만했으며, 개혁실천에 힘썼음을 강조했다. 이어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교수는 고종에게 개혁성이 있었음이 실증적으로 입증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더 강조했다.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논지였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논자로 참여한 강상규 박사는 이태진 교수의 견해에 더 가까운 입장에서 고종의 개혁군주적 모습에 방점을 찍는다. 강 박사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고종을 정확히 알려면 고종이라는 실존적 인물을 둘러싼 복잡한 권력그물을 아울러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왕을 둘러싼 복합적인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거대한 전환기의 조선 정치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강 박사는 고종의 개혁 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강 박사는 고종이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으며 왕권 수호에 급급한 인물이었다는 하원호 교수의 주장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그 근거를 밝힌다. 다음주에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가 고종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종은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일컬을 만한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이 시대는 동아시아가 막강한 물리력을 앞세운 서양 제국과 마주해야 했던 시기이며 아울러 고유한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이질적인 패러다임과 전면적으로 부딪치는 과정이었다.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문명의 세계가 야만으로 전락하고 금수들의 세계가 문명세계로 둔갑하는’ 것과 같은 혼돈의 상황으로 인식하였다. 상이한 문명이 충돌하게 되면서 ‘문명기준’이 뒤바뀌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열두 살 소년이 왕위에 오른 것은 이러한 위기와 혼돈의 파고가 조선에 막 밀려들기 시작하는 상황에서였다.

왕위에 오른 뒤 유교적 민본의식을 몸에 익혀 나가던 고종은 신미양요(1871)를 치른 이후 대외 정세에 점차 눈을 뜨게 된다. 측근인 박규수를 비롯한 연행사절들을 통해 서양의 제국이 강력하며 서양화된 일본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고 중국이 이를 맘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은 대원군이 주도하는 조선의 배외정책이 현실적으로 조선을 고립시키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 판단은 친정선언으로 이어지고 조선의 대외정책을 전환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고종의 고민을 정책으로 담아내는 데는 많은 정치적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공론에 의거한 정치 운영의 전통,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 구조, 대원군 세력의 광범위한 정치적 영향력, 조야에 팽배한 화이론적 명분론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비전과 정책을 현실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까?

 

신미양요 뒤 개화·개방 눈떴지만정책화까진 현실적 장벽 너무 높아내부선 대원군·보수세력 부딪히고외세 간섭으로 자주근대화 좌절

고종의 개혁이 현실화된 것은 1880년을 전후해서이다. 외교, 국방, 통상, 재정, 무기제조, 인재 선발 등을 담당하는 기구로서 기존의 의정부와 동급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세우고, 일본과 중국에 대규모 시찰단을 비밀리에 보내 개방과 개혁의 추진을 위한 탐색과 함께 미국 등 서구 열강과 ‘조약’관계를 추진해 나간다. “중국이 우리와 힘을 합하자고 하지만 이를 어찌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 역시 부강책을 시행해야만 한다”, “천하의 대세를 두고 볼 때 옛 도리만을 지킬 수 없다”는 고종의 지시나, 일본 쪽 외교관들이 “시찰단은 처음부터 국왕의 결단에서 나온 일”이며,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도록 국왕의 지시를 받은 이들 일행이 조선의 개화의 기본을 다지게 될 것”이라고 본국에 보고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고종은 개방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세력을 달래가면서 극소수의 개화세력을 보호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버팀목 구실을 했으며, 중국과 일본의 개혁모델을 비교하고 절충해 가면서 사대교린 질서를 청산하고 만국공법(근대 국제법)에 입각한 ‘자주’국가를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상에 주목하고 달라진 무대 환경에 새롭게 적응하려는 모습은 국내외의 다양한 비판과 견제에 부딪히게 된다.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은 그중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두 사건은 정반대의 방향을 지향하는 세력이 주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유구(류큐·오키나와)병합(1879) 이후 ‘조선문제’가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 핵심이슈로 부상하던 민감한 상황에서 발생함으로써 주도세력의 의도와는 다르게 중국과 일본의 군사적 간섭과 갈등을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두 사건은 고종이 주도하는 개화 자강정책을 너무 과격하고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층과 너무도 온건한 것이라고 생각한 세력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사건들로 말미암아 우리 손에 의한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은 사실상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권력정치의 현장인 제국의 시대는 조선을 더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후 갑신정변의 여파로 인한 강렬한 보수 회귀의 분위기 속에서 청국의 종주권 획책이 본격화하면서 청의 외압이 가중되었으며, 국왕에 대한 견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동학 농민봉기라는 아래로부터 개혁 요구와 이를 계기로 한 열강들 사이의 전쟁이 나타난 것은 이 와중에서였다.

고종의 왕권 집착은 사실과 달라일 ‘황실 보호’회유에 목숨건 저항외부 탓하며 내부비판 외면 안돼도분리 생각땐 되레 역사왜곡 우려

고종이 왕권과 국권을 혼동했으며, 왕권 수호에 급급한 인물이라는 지적(하원호 교수)은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청의 외압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고종이 자주의식에 잘못 빠져들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하였으며, “이 어리석은 군주를 폐위시키자”고 건의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장악한 상황에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황실을 특별히 보호해 주겠다고 하면서 고종을 회유하려 할 때 “죽을지언정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하면서 망명을 시도하기도 했고, 목숨을 걸고 밀사외교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최근 신문지상에 고종이 친히 밀서를 작성해서 보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은 국왕의 이러한 고뇌를 담은 흔적 중의 일부이다.

19세기 서구의 아시아 인식은 ‘동양적 전제주의론’과 ‘정체(停滯)사회론’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적 실증사학은 이를 토대로 조선의 ‘타율적이고 정체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사관 때문에 조선의 국왕 고종은 역사적으로 정체된 조선을 상징하는 인물로 묘사되었고, 그 후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고종은 시대착오적이고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외세의 압력만을 들먹이면서 우리 내부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식민사관이 저지른 역사 왜곡을 극복하려는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객관성을 상실하고 역사를 미화’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지적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내부와 외부의 문제가 긴밀히 맞물려 있어 형식상 나누어서 생각해보는 것은 가능하지만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서 이해해서는 오히려 구체적인 상황을 왜곡할 소지가 크다. 실증주의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사실과 가치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호구성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고종에 대한 논의 수준이 깊어져야 하는 이유는 단지 왜곡된 고종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당시 한반도 내부의 복잡한 인간관계의 그물 한가운데 서 있는 존재였다. 국왕을 둘러싼 복합적인 정치적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 거대한 전환기의 조선 정치를 논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고종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19세기 조선의 정치 공간과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며 모색하던 인물들에게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다가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 및 사상사입니다.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8-05-02 19:38

근대화 내세워 백성 울린 ‘세도정권의 수장’ (hani.co.kr)

고종 어떻게 볼까

이것을 고려하여 전차 노선을 서대문~홍릉으로 택했다. 순종의 승용차로 쓰인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에서 제작한 캐딜락.(아래)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왕권 수호에 올인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삼아 진행 중인 지상논쟁이 지난 3주 동안 벌어졌다.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할 수 있느냐, 개혁군주라면 어느 정도의 개혁성과 실행력을 지니고 있었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등판한 하원호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하다고 해도 그 한계에 더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고종은 왕권 강화가 궁극적 목적이었을 뿐 진정한 근대화에 큰 관심은 없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주장이었다. 세 번째로 글을 쓴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군주적 모습에 더 주목했다. 강 박사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고종의 개혁·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네 번째 논자로 나선 이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다. 박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견지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는 “고종은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며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고 말한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주에는 김도형 연세대 교수가 다섯 번째 논자로 등장해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인간들이 그들의 역사를 창조하지만 원하는 대로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미 존재해 온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든다.” 마르크스의 이 지적대로 역사에서 지도자 개인의 구실이 결정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미하지도 않다. 지도자 한 명이 역사의 대세를 돌이킬 수야 없지만, 그가 이끄는 집단이 역사 대세를 수용하는 방법은 그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고종이 혼자 힘으로 조선을 망칠 수도 살릴 수도 없었겠지만, 그의 일련의 전략적 선택들은 조선 독립 보존과 근대적 전환에 디딤돌보다 차라리 걸림돌이 됐다.

구한말 위기의 세계사적 본질은 중국 중심 동아시아적 국제 질서의 약화와 몰락이었다. 일본이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한 것과 달리 조선이 제국 일본의 피해자가 된 데 대해 얼마든지 한탄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서 일본과 조선의 위치가 맞바뀌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조선과 비교될 것 없이 일본은 중국 중심의 대륙적 질서와 매우 느슨한 관계에 있었으면서 네덜란드 등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 폭은 넓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위시한 근대 일본의 1세대 계몽주의자들이 이미 에도 시대 말기에 국내에서 네덜란드어를 익혀 ‘신세계’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을 수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일본의 개항이 조선에 비해 20여년 더 빨랐던 것은 ‘시간과의 경쟁’이라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일본의 강요로 조선이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체결의 배경은 3만2777명의 장병과 군함 19척의 일본 육해군을 조선으로서 현실적으로 대항해내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힘의 열세였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서는 비록 성인현철이 왕이 되더라도 국운의 융성을 기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오랜 세도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해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경제적 활동을 파탄에 빠뜨렸던 고종의 측근인 민씨 족벌은 온 나라의 증오 대상이었다. ‘민족’(閔族)이라 불렀던 그들의 족벌에 대한 원한이 하도 높았기에 부정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대원군마저도 ‘반민’(反閔)의 명분만으로 일부 개화파나 동학 농민 지도자 사이의 상당한 기대를 모을 정도였다. 민심 이반에다 불가항의 외적 위협까지 겹치니 고종의 고민이란 태산 같았을 것이다.

민씨 일종 부패로 민심 등돌리고제국 일본 등 외적위협까지구한말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고종 ‘나라’ 위한 개혁의지 안보여

고종에게 이와 같은 역경을 헤쳐나갈 만한 전략적 선택은 있었을까? 그가 만약 자신의 권력이 아닌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면 이 나라의 대다수 주민들이 바랐던 사항부터 이행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요구에서 잘 반영된 민중의 희망은 무명잡세 혁파와 징세 관련 비리 척결 등 조세 제도의 합리화와 관료들의 토색질을 낳는 매관매직의 엄금 등이었다. 거기에다가 해방적인 의미의 근대적 조처-예컨대 노비 해방과 비(非)양반 인재 등용, 근대 교육의 보급-등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적어도 ‘국민 통합’ 효과라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구한말에 ‘나라’를 위한 개혁의 열매를 거둔 일이 언제 있었는가?

갑오경장 때 고질적인 지방관 세금 관련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때 징세 업무를 일반 행정과 분리시켜 독립적 기관으로서의 징세서(세무서)를 전국에 설립하여 탁지부로 하여금 총괄케 했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폐지하여 지방관이 징세 업무를 보는 옛날 제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옛 제도의 폐단들이 다 그대로 남은데다가 국가에서 지세를 계속 올리기만 했다. 1900년에 3분의 2나 인상하고 1902년에 다시 5분의 3을 인상하는 조처들이 농민의 불만을 크게 자아내 민란의 도화선이 됐다. 광업·홍삼 등 알짜 사업의 징세를 황실이 장악한데다 역둔토라는 이름의 26만 두락 이상의 광활한 관유지까지 소득원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토지를 경작했던 소작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악질화돼 갔다. 종전의 2~3할 정도의 도조율(소작료)이 1900년대 초기에 3~4할로 오른데다 1904년 이후로는 5할로 고착화돼 수많은 작인들의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의 재정 정책은 ‘근대화’의 미명 아래 국가의 부담을 백성에게 전가했을 뿐이었다. 이 정책을 집행했던 관료들이 임용을 따내고자 뇌물을 바치고, 임용된 뒤에 무자비한 가렴주구로 본전을 뽑고 이윤을 올리는 일도 고종이 실권을 내놓기 전까지 계속됐다. 고종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영국 여성 탐험가 비숍마저도 그 당시 조선 국가의 본질을 한마디로 ‘제도적 약탈’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백성들에게서 빼앗았던 혈세를 고종이 어떻게 썼던가? 진정 교육 보급과 같은 근대화 정책을 위해서 썼다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았다. 1905년 정부 예산에서는 교육과 위생 관련 예산은 1.05%에 불과했던 반면, 황실비는 7.6%나 됐다. 고종은 말로는 ‘교육 입국’을 외쳤지만, 1906년에 이르러 전국의 57개의 근대식 소학교에 1924명의 아동만 다니고 있었다. 대한제국 정부보다 외국 선교사들이 몇 배나 더 많은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도일 유학생 파견, 원칙상 신분과 무관한 근대 교육 이수자의 관직 임명 등 혁신 조처들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수혜자는 대개 양반 출신들이나 소수의 부유한 중인 계층들이었다. 갑오경장 때 노비 제도가 형식적으로 혁파되고 그 뒤에 인신매매를 엄금하는 법률이 제정되긴 했지만 향촌사회에서 그대로 실존했던 노비 소유 관계의 해체를 위해 국가가 이렇다 할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고종 시대의 국가가 유일하게 진정한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민란 진압용으로 군대와 경찰 기구를 키우는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의 국가예산에서 군사·경찰 비용은 보통 40% 정도 또는 그 이상을 차지했다.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세금으로근대교육 보급·신분제 혁파 대신‘민란 진압용’ 군 강화에만 골몰조선 몰락에 대한 중대책임 물어야

민심을 무시하고 수탈의 강화에 혈안이 된 고종 시대 국가의 생존 방식은 외세 사이의 ‘줄타기’였다. 물론 여러 열강들이 조선을 둘러싼 대립을 벌였던 상황에서는 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는 그 나름의 효과가 따랐다. 예컨대 아관파천과 그 뒤 8년 동안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의 노련한 외교로 고종 정권은 사실상 일본에 의한 식민화를 당분간 미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벌게 된 시간은 결국 허비되고 말았다. 교육 진흥이나 근대적 공업의 진흥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무기 공장 하나 세우지도 못해 총탄 공급까지도 일본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대한제국호가 곧 침몰했다. 고종이 10여 차례에 걸쳐 밀사를 파견하여 열강에 호소도 다 해보고 의병장들에게 밀지를 주어 의병을 일으키는 일도 은밀히 지원했지만 근대적 경제나 교육체계,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다 허사였다. 조선이 처한 최악의 상황에서는 돌파구 찾기란 지난한 과제였겠지만, 고종은 그 해결에 거의 제대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고종을 ‘계몽군주’라고 높여 일컫는 사학자들도 있지만, 그는 사실 차라리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하다가 요즘에는 19세기 말 이후의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 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2001), <나를 배반한 역사>(2003), 〈우승열패의 신화〉(2005), <박노자의 만감일기>(2008) 등이 있습니다.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8-05-09 20:47

‘자신의’ 나라 위한 ‘보수적’ 개혁 실패로 (hani.co.kr)

고종 어떻게 볼까

김도형 연세대 교수·국사학 교수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황권 강화·근대화 동시에

‘고종은 개혁군주였다’는 주장과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지난 4주 동안 팽팽한 대치 전선을 이루었다. 첫 논자였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가장 선명하게 강조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보다는 한계에 더 주목했다. 세 번째 논자였던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 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이 있었음도 아울러 강조했다. 네 번째 논자 박노자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입장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고종이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가까운 입장을 밝힌다.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평가다. 김 교수는 또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며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마지막 논쟁이 될 다음주에는 강상규 박사가 고종을 둘러싼 엇갈린 평가에 대한 견해를 다시 밝힐 예정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학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명성황후’ 뮤지컬이나, 대원군과 명성왕후를 소재로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또는 <한반도> 같은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 항상 등장하는 문제였다. 여기에 최근의 <대안교과서>처럼 김옥균 등의 개화파를 부각시키게 되면 더없이 복잡한 논쟁이 된다. 이 논쟁은 결국 한국 근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근대화 개혁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고종이 독일 정부에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린 문서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고, 헤이그 밀사 사건(1907. 6) 이전에 이미 이런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나 일부 학자가 언급하듯이, 이것을 고종의 능력과 개혁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고종의 태도는 애매하였다. 군대를 동원한 일본의 위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종은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원임대신의 의견을 들어야 하므로 자의로 결정할 수 없다”고 하였고, 정작 이 문제를 다루는 어전회의에는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을 강요하자 고종은 “상의할 일이 있으면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하여,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였다. 강압적 분위기에서 고종의 간접적 반대 의사를 인정하더라도, 고종은 ‘대한국국제’에 명시된 황제의 대외적 권한을 포기한 것이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에 임하는 군주의 태도로 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 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된 뒤에도 고종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는 정말 무능한 군주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외교 활동을 하고 밀지를 보내 의병을 독려했다고 그의 유능과 개혁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종묘와 사직’을 책임지고 있던 군주로서는 최소한 해야 할 일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모호한 태도 일관일 위협 고려해도 분명한 책임 방기밀서 등 뒤늦은 ‘무효화’ 시도능력·개혁성의 증거라 볼 수 없어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하면서 흔히 대한제국 이전으로 소급하는 경우도 있다. 친정(親政) 이후, 더러 고종의 정치적 의사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정치를 주도하던 민씨 세력에 비해 특별하게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기술 문명을 수용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집권세력과 동일하였다. 모든 정책이 고종의 재가를 받은 것이긴 하지만, 고종의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의사에 따라 정책이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정치적 역할은 아관파천 이후, 더 정확하게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씨 세력이 상대적으로 정권에서 약해진 이후였다. 고종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때, 대한제국기였다. 고종의 개혁성 여부는 결국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제국에서는 당시의 사회문제, 곧 농민층의 항쟁을 해결하면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고,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고종의 정치는 이런 점에서 시작되었다. 고종은 가장 먼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황실을 높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개혁을 광범하게 추진하였다. 서양의 문명을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수용하여, 서울의 근대적 도시로의 정비, 전기의 보급, 철도 부설, 근대적 교육의 확산 등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점만 본다면 고종은 매우 개혁적인 군주였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은 개항 이후 정부 차원에서 전개하던 근대화 사업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왕권을 약화시킨 몇몇의 조처를 빼고는 나머지 많은 부분은 그 직전에 실시했던 갑오개혁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개혁의 원칙과 내용은 철저하게 지배층, 지주층의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광무개혁에서 국가재정 확충을 위해 가장 힘을 들였던 양전지계사업도 그런 원칙에서 추진하였다. 따라서 농민층의 요구는 외면하였다. 고종의 개혁사업을 이끌던 내장원의 운영도 이런 점을 잘 보여 주었다. 내장원에서는 방대한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관리하면서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다. 농민층에 대한 소작료를 올리고, 소유권이 모호한 경우에는 소유권도 빼앗았다. 이에 불만을 가진 농민층의 항쟁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내장원 중심의 정치는 국가재정의 부실화를 수반하였다. 홍삼, 어장 등 각종 전매권을 독점하면서 왕실 재정을 확충하였지만, 정작 정부의 재정은 부족하게 되어, 탁지부가 내장원에 조세 수취권을 넘겨주고 돈을 차용하는 일도 일어났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행한 고종의 개혁은 정부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농민층을 수탈하면서 행해진 것이었다.

황실·지배층 위한 ‘보수정치’ 틀에서근대문물 수용 등 ‘개방외교’ 펼쳐농민층 외면으로 국내 세력결집 실패격변의 국제정세 속 나라도 못지켜

19세기 말은 격변의 시기였다. 고종은 이런 격변 속에서 국권을 유지하고, 동시에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이 개혁 군주였는지 여부는 단편적인 몇 가지 사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가적, 사회적 과제를 고종이 어떤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기에 전제적인 황권을 바탕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여 자주적 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점은 문호를 개방할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이 점은 전통적, 유교적 조선 왕조에 비해서 개혁적이었다. 고종을 ‘계몽군주’로 평가해도 좋을 대목이다. 그러나 고종의 개혁은 농민층의 동력을 결집하지 못하였고, 또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

 

고종의 정치는 유교적 변통론에 따라 폐단을 고치되 이를 통해 체제의 안정을 꾀한 전통적인 조선 왕조의 대책과 노선이 다르지 않았다. 곧 ‘보수적 개혁’, 바로 그것이었다. 고종이 보수적 차원에서 개혁을 전개한 것은 ‘종사’(宗社)로 대표되는 자신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 아래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이 추진하던 다양한 개혁은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근대사회로 변용되어 갔다. 김도형/연세대 교수·국사학


김도형 교수는 1953년생이며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이기도 합니다. 한국 근대사상사와 민족운동사가 관심 연구 분야입니다. 저서로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 연구>(1994)가 있습니다.

 

 

  • 수정 2019-10-19 20:29 등록 2008-05-16 19:17

‘개화의 주인’이고자 했던 ‘망국의 군주’ (hani.co.kr)

고종 어떻게 볼까

박정양(가운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⑥ 강상규씨의 재반론

고종은 개혁군주였나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지난 5주 동안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찬성쪽 입장에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가장 명확한 목소리로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했다. 이어 강상규 박사가 고종의 개혁 의지를 긍정하면서도 그 개혁이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외적 상황에 주목했다. 이에 대해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한계가 더 크다는 점을 강조했고, 박노자 교수도 “고종이 조선을 단독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김 교수는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낮게 평가했다.

이렇게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마지막 여섯 번째 논자로 고종의 개혁성을 긍정하는 쪽에 선 강상규 박사가 다시 등판해 견해를 밝혔다. 강 박사는 앞선 논자들의 고종 비판이 구조적·역사적 요인들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단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는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져선 안 되며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차원의 검토가 동반돼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음주부터는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 슬라보예 지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논쟁이 벌어진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싸고 민심이 흉흉하다. 현 정부는 과연 ‘세계화’ 시대의 산적한 현안들을 대화와 타협, 그리고 온 국민이 동의할 만한 비전의 제시를 통해 지혜롭게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인가. 19세기 한반도 역시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보다 훨씬 더 풀기 힘든 난제였다. 현재 한반도가 직면한 문제는 적어도 우리가 속한 문명세계 ‘내부’의 성격 변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인 반면, 19세기의 당면 과제는 ‘외부’의 이질적인 세계로부터의 충격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충격과 혼돈의 정도는 더욱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당대의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19세기를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 같고’, ‘한몸으로 두 인생을 겪는 것과 같은’ 충격적인 시대라고 진단했다.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이 고종이 살았던 시기에 심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패러다임(뜨거운 불)과 새로운 서양의 패러다임(차디찬 물)이 격렬하게 부딪쳤던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이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이처럼 고종 시대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이 어려운 만큼 고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손쉬운 것일 수 있었다. 그가 다름 아닌 망국의 군주라는 사실은 바로 그의 정치적 무능을 입증하는 명백한 자료로 간주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정치책임’론은 현실정치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앞서 다른 논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고종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틀림없는 비판이라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몇 가지 이유만 들어보자. 우선 정치가 고종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고종에게 주어진 정치적 선택의 폭이 사실상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동화 속의 영웅이나 바보가 아닌 현실 정치가로서 고종을 고찰하려면, 그가 어떠한 현실 정치적인 제약 위에서 해법을 고민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들어가야 한다.

 

조선정치의 특징과 상황 고려 없이고종에 대한 비판은 옳지 않아지배층-피지배층·개화파-수구파 등이분법적 사고로는 본질 접근 어려워

두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500여년의 강고한 전통을 지닌 조선정치에 대한 구조적·역사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조선의 왕권, 군신관계, 정국운영방식은 물론, 19세기의 위정자들과 지식인의 사유방식의 특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전환기 한반도의 정치상황에 대한 논의는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조선 전통과의 단절된 해석은 필연적으로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한 몰이해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군신간의 ‘상호의존적 긴장관계’와 공론(公論)에 의거한 역동적인 정치운영은 조선왕조 특유의 ‘견제와 균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500년을 지속하게 한 힘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적인 힘이 19세기 후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환의 시대에 오히려 변화를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동하게 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어야 이 시대 정치사가 비로소 온전히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이해 없이 죽음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한 것처럼, 조선의 생명력에 대한 이해가 없는, 조선의 사망에 관한 설명이란 공허한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19세기를 둘러싼 논의가 지배세력 대 피지배 민중의 각축, 혹은 개화세력 대 수구세력의 갈등이라는 축 위에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의 방식은 지배세력 내부의 다양한 차이가 간과되고 소위 지배세력을 싸잡아서 비판하는 방식에 머무를 소지가 크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결정론적이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 역시 거대하게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위정자, 지식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를 개화 혹은 수구라는 어느 한쪽에 끼워 맞춤으로써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에 대한 도식화된 논의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 이분법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난번 글(4월25일치)을 통해, 고종이 여러 현실적인 제약이 있음에도 1880년대 들어 일련의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주국가를 세우려고 서구열강과 외교관계를 맺어 나가게 된 경위들을 짚었다. 아울러 조선의 개방 개혁정책의 추진이 여러 차례 반대에 부딪혔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히 개혁을 원하던 개화세력의 정변으로 사실상 조선은 자기 손에 의한 개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정책의 속도와 범위, 방법과 아울러 개혁의 주도세력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민씨 세력’ 혹은 ‘개화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어정쩡한 개혁이라고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면 조선 개화사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당분간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19세기 말 한반도는 엇박자의 연속군신간 공론 따르던 정치운영마저개화 발목잡고 외세 위협 불러고종의 선택 균형적 성찰 필요

미국 외교관의 통역관으로서 조선 왕실의 근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문명개화의 꿈을 키워가던 청년 윤치호는 갑신정변 전후의 정황을 자신의 일기(음력 1884년 12월30일자)에 남기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조정에는 나라를 지탱할 만한 신하가 없고 백성에게는 떨쳐 일어서려는 기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밝은 지혜를 가진 군주가 여러 나라의 문명과 기술을 살피려 노력함으로써 여러 방면에서 바라는 바를 조금씩 이루게 되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김옥균 등의 과격한 행위는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청국의 억압은 과거의 배가 되었다. 개화를 일컫는 자는 나라의 적으로 간주되며 개화에 관한 논의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간신배들이 밖으로 청의 세력을 끼고 군주를 위협하며 나라 일을 그르치고 있으니 실로 통탄스럽다.”

이 시대 정치사는 끊임없는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소통에 입각한 절충과 조정의 시도는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말미암아 곧바로 외세의 압력으로 이어졌고 우리의 선택 폭은 더욱 좁아져 갔다. 한반도의 정치가 국제관계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종을 둘러싼 19세기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전환기적 상황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예측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정치 공간에서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내고 국내외의 광범위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음을 절감할 수 있다. 따라서 고종을 비롯한 당대의 정치가가 개화를 지향했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보다, 성숙한 ‘개화의 주인’이 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경주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강상규씨

고종의 개혁군주 여부 논의는 성급하게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종의 정치적 선택과 실패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비극적인 엇박자에 대한 역사적 함의가 균형 있게 성찰될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조선정치사가 다루는 내용들은 우리의 의식과 현재의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의 미래로 남아 있을 의미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강상규/도쿄대 박사·정치학


강상규씨는 1965년생이며,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도쿄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조선의 유교적 정치지형과 문명사적 전환기의 위기>(2005)이며, 저서로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제국 일본>(2007), <19세기 동아시아의 패러다임 변환과 한반도>(2008)가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근대 동아시아 정치외교사와 사상사입니다.

 

 

 

<참고자료>

 

대한제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환구단 - Wikiwand

 

 

환구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900 - Wikipedia

 

 

태극기의 기원과 역사적 맥락 - Daum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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