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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를 찾아서

자유시참변은 외형적으로는 1921년 6월 28일,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간도와 연해주에서 자유시로 모인 1,900여 명의 한인무장부대의 지휘권을 다투는 중에 볼셰비키 적군과 한인자유보병대대가 불복하는 군인들의 무장해제를 감행하여 일으킨 독립운동사의 최대 참변으로 은 사망 36명, 도망 37명, 포로 900명으로 발표하였다. 같은 독립군끼리 총질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오늘까지도 성토해 마지않는다. '자유시참변'처럼 참변 당한 기록 없을 것오마이뉴스 이옥희기자 2020. 3. 7. 21:12 자유시참변 99주년에 즈음해.. 비극적인 사건에서 희망을 본다 ▲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독립군들이 찍은 기념사진 북로군정서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전투..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 동안 한국인 3469명이 간도에서 학살되었다. 일본군의 학살은 3, 4개월 계속되었으므로 통계도 잡히지 않은 실제 희생자는 그보다도 훨씬 많아 수 만 명이 될 것이다. 중국은 '난징 대학살'이 일어난 1937년 12월 13일을 국가 추념일로 정해 해마다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일본에 학살당한 '경신 참변'도, 러시아에 학살당한 '자유시 참변'도, 이승만 정권에 학살당한 보도연맹과 국민방위군 사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 것일까? 이러고도 '나라'인가? ■ 일제의 인간 이하 잔혹을 증언하는 경신참변오마이뉴스 정만진기자 2024. 11. 1. 13:30 [오늘의 독립운동가 53] 1920년 11월 전후 '수 만 명' 희생 ▲ ..

10월 21일 ‘백운평전투’에서 600여 명의 김좌진부대가 일본군 보병연대를 계곡으로 유인해 일본군 300여 명이 전사하는 대승을 거뒀다. 독립군 전사자는 20여 명이었다. 10월 22일 ‘천수평전투’에선 일본군 기마중대를 급습해 120여 명을 전멸시켰다. 같은 날 ‘어랑촌전투’에서 먼저 고지를 점령한 김좌진 군대 600여 명은 기병·포병·보병이 연합한 6배 이상의 일본군 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중과부적으로 고전하던 중 ‘완루구’에서 승리한 후 이동하던 홍범도부대가 지원에 나서 함께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일본군 전사자가 3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어 벌어진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에서 연이어 김좌진부대가 승리를 거두었고, 10월 26일 ‘천보산전투’에서 김좌진·홍범도..

홍범도 장군은 대표적인 평민 출신 독립군 지휘관으로, 평생을 대한민국 민주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대 친일 부역자들이 해방 후에도 군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민주 공화국 수호를 위해 싸웠던 독립군의 전통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독립군'은 이와 같은 홍범도 장군의 투쟁 역사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와 맞섰던 독립군의 면모를 재조명한다. 기존에 알려진 '의병'이나 '빨치산'의 모습이 아니라, 민주 공화국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싸운 '민주적인 군대'로서의 독립군을 강조하는 것이 영화의 목표다. ■ 尹 정부가 부정한 홍범도 장군, '독립군'으로 바로 세운다[현장EN:]CBS노컷뉴스 최영주 기자 2025. 1. 15. 13:48 광복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