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6) 1921년 자유시참변 본문

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6) 1921년 자유시참변

대야발 2025. 5. 9. 16:43

 

 

 

 

 

 

 

자유시참변은 외형적으로는 1921년 6월 28일,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간도와 연해주에서 자유시로 모인 1,900여 명의 한인무장부대의 지휘권을 다투는 중에 볼셰비키 적군과 한인자유보병대대가 불복하는 군인들의 무장해제를 감행하여 일으킨 독립운동사의 최대 참변으로 <독립신문>은 사망 36명, 도망 37명, 포로 900명으로 발표하였다. 같은 독립군끼리 총질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오늘까지도 성토해 마지않는다.

 

 

'자유시참변'처럼 참변 당한 기록 없을 것

오마이뉴스 이옥희기자 2020. 3. 7. 21:12
 
자유시참변 99주년에 즈음해.. 비극적인 사건에서 희망을 본다

 

 
▲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한 뒤 독립군들이 찍은 기념사진 북로군정서로 추정되는 독립군 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물리친 뒤 촬영한 기념사진
ⓒ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일본 예찬론자, 백작 이완용이 아직도 퍼렇게 살아 있다. 한국의 독립과 함께 반민특위의 역사적인 재판을 받고 해소되어야할 친일파 집단이 이승만의 야욕으로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그 후손들은 독재정권과 손을 잡아 전열을 재정비하고 지금도 역사를 욕보이며 자신들의 아성을 영구히 지키고자 국민들을 볼모삼아 보이지 않는 친일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그 후예들이 자유당 시절 학문 권력을 틀어잡고 시도한 역사 왜곡이 오늘도 우리 눈앞에 이념전쟁으로 펼쳐지고 있다. 친일파가 만든 이념 전쟁으로서의 역사 전쟁이 속히 극복되기를 기원하며 자유시참변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로서 희생된 우리 무명의 독립군 용사들에게 자유시참변 99년째 되는 해에 뜨거운 눈물과 감사를 담아 이 글을 바친다.

 

 

양반 관료가 아닌 상놈들이 생명 바친 독립운동

 

자유시참변이 있기까지 간도와 연해주가 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다. 왜 간도와 연해주가 독립운동의 주 무대가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다! 주목하지 않는다. 아니다! 알고도 주목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주목하면 고민해야 하고 고민하게 되면 쉽게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1860년대 조선 양반?관리들의 탐학과 자연재해로 인하여 살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도망친 빈민, 소작농, 천민들의 대대적인 탈출 이야기가 나와야 하고, 그로써 조선 멸망의 참되고 구체적인 원인, 양반?사대부?관료들의 죄악상이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921년까지 간도와 연해주에서 진행된 독립운동은 바로 조선을 탈출한 사람들의 운동이었고 그 상놈들의 저항이었다. 그 상놈들이 피땀 흘려 바친 애국금이 무기가 되었고 그 상놈들이 낳은 자식들이 독립군이 되었다. 그 상놈들의 고난과 헌신으로 용정의 3?13만세시위, 훈춘의 3?20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그 후에 만주일대에 30여 개에 달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그 결과로 수많은 국내진공작전,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가 일어난 것이지, 을사조약이나 한일늑탈, 3?1독립만세 운동 전후에 들어온 몇몇 양반, 관리들과 무관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간도와 연해주의 무장투쟁 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사 기록은 그 사실에 일체 침묵하며 그 상놈들의 생명 바친 독립운동을 뜻이 있어서 가산을 정리해서 망명했다고 하는 양반?관료, 무관 등등 몇몇 사람들의 독립운동으로 축소해서 정리해 버렸다.

 

 

독립운동의 첫 장을 연 그 상놈들은 연해주 4월 참변과 10월에 시작된 간도 참변으로 도륙을 당했다. 그리고 자유시참변을 기점으로 해서 독립운동의 무게 중심이 상해로 옮겨졌다. 이로써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망명 양반?관료 중심, 기호파 중심의 상해 독립운동의 외교론자들의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다.


  
자유시참변을 끝으로 간도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이 영영 사라졌는가? 아니다! 독립운동은 더 치열하게 일어났다. 문제는 그 땅이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들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에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이승만 정권 아래서 상해임시정부 민족주의자 계열의 독립운동만 취사선택되어 알려지게 되었고 그 나머지는 배제되거나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역사적인 사정으로 우리 독립운동사 중에 자유시참변처럼 참변을 당하고 있는 기록도 없을 것이다. 팩트에 대한 연구나 고민 없이 후대에 형성된 낡은 이념의 틀로 판단하고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우리민족의 당파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손꼽혀져서 민족성에 대하여 절망하며 정치에 무관심하고 부정적인 국민정서를 형성하기도 한다.

 

 

내년이면 자유시참변 100주년이 된다. 색깔논쟁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닫힌 미래를 열고 동북아 평화정착을 위하여 과연 자유시참변은 왜 일어났으며 무엇이며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미래의 시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같은 독립군끼리 총질

 

자유시참변은 외형적으로는 1921년 6월 28일,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간도와 연해주에서 자유시로 모인 1,900여 명의 한인무장부대의 지휘권을 다투는 중에 볼셰비키 적군과 한인자유보병대대가 불복하는 군인들의 무장해제를 감행하여 일으킨 독립운동사의 최대 참변으로 <독립신문>은 사망 36명, 도망 37명, 포로 900명으로 발표하였다. 같은 독립군끼리 총질이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오늘까지도 성토해 마지않는다.

 

 

당시 상해파를 지지하던 재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들은 사살 72명, 익사 37명, 탈진해서 죽은 자 200여 명, 행방불명 250명, 체포 917명이라고 발표하였다.

 

 

자유시참변에 대하여 당시 이르쿠츠크파는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군권쟁탈전에서 발생한 일이므로 유혈사태에 대한 책임은 대한의용군 사령부와 고려혁명군정회에 있으나 직접적인 책임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선동한 대한의용군측에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상해파는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군이 한자리에 모이도록 한 것은 상해파와 극동공화국 내 한인부의 노력이었는데 대한국민의회가 이르쿠츠크 공산당과 결합하여 군권 장악하고자 군정의회를 조직하여 유혈사태를 일으켰으므로 책임이 대한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에 있다 '고 주장하였다.

 

 

이렇듯이 자유시참변은 각각의 입장에 따라 사건해석과 평가가 다르지만 참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양파가 헤게모니 장악을 위하여 극동공화국 한인부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를 동원하며 극단적인 대립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양파 모두에 책임이 있다.

 

 

자유시참변의 주범은 한인무장부대들을 자유시로 집결시킨 자들이다. 그들을 자유시로 집결하게 만든 세 그룹이 있다.

 

첫 그룹은 극동공화국이다. 극동공화국 대통령 크라스노쇼코프는 소비에트정부를 대신하여 연해주에 있는 일본군 철수를 위해 협상을 진행시키는 중이었다. 그는 신생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성공을 위협하는 일본군의 철병을 위해 한인부대를 빠른 시간 내 집결시켜서 무장해제를 단행해야 했다. 이것은 적군과 함께 일본인들 대량학살에 참여하여 니콜라옙스크참변을 일으킨 한인무장부대에 대한 일본의 단호한 요구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혁명정부의 안전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모스크바의 뜻이기도 하였다.

 

 

둘째 그룹은 상해파로 불리는 한인사회당 그룹이다. 그들은 임정에서 탈퇴한 이후로 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코민테른에 한국의 유일한 공산당으로 인정받기 위해 총력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유시참변에 대한 성토문에서 4000여 명의 독립군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극동공화국 한인부와 한인사회당의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노선에서 무장투쟁론자인 그들은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한인부대 지휘권 쟁탈의 초강수를 두어 같은 독립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자유시참변을 일으켰다. 이들 배후에는 러시아 극동공화국 한인부와 극동공화국이 있었다.

 

 

셋째 그룹은 이르쿠츠크파와 대한국민의회와 자유보병대대이다. 문창범은 청산리전투 이후, 해산된 독립군들에게 자유시로 결집할 것을 촉구하였고 오하묵은 이만에서 부대들과 만나 그들을 설득하여 무장해제를 시킨 후에 자유시로 인도했다. 이르쿠츠크파는 부르주아 상해임정과 협력하고 모스크바자금을 사사롭게 착복한 기회주의자인 상해파에 전로 한인공산당 지도권을 내줄 수 없었다. 그들 배후에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있었다.

 

 

상해임시정부가 한인무장부대를 자유시로 집결시키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상해임시정부에 자파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약속대로 임시의정원을 해체하지 않았고 항의하는 대한국민의회의 의견을 묵살하고 협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주도권 싸움을 야기하였으며 임정의 고질적인 분열의 단초를 만들었다.

 

 

또한 양반?관료의 습관으로 독립군들에게 임정 봉대를 요청하였으면서 위기에 빠진 독립군들을 위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고 그들이 러시아로 떠나도록 만든 것이 그들의 큰 죄다.

 

 

당시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들의 무장해제는 일본의 압력으로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부대끼리 최소한 인명 살상은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파국으로 치달으며 수많은 청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관료적인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동북아 정세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부족했으며 특히 러시아와 일본의 역학관계에 무지하였고, 조국독립이라는 대의를 잊고 독립군끼리 경쟁하며 탐욕적인 파벌싸움에 주도하였고, 독립운동이야 어찌되든지 간에 자기파의 권력 강화를 위해 외국세력과 손을 잡고 동족을 죽음의 길로 내몰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청년들이 죽어가며 이루고자 했던 건 조국 독립

 

자유시참변이 동족상잔의 비극이요, 한국독립운동계를 좌우로 분열시킨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지만 참변의 이름으로 더 이상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와 불신, 선입관과 편견을 확대 재생산하는 일은 멈추어야 한다.

 

 

자유시참변의 권력다툼은 지도자들이 벌인 게임이었고 참변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실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해주에서, 서북간도에서 일본군과 생명 걸고 싸우던 청년 투사들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이 1860년대 부패한 양반?관료들의 등쌀에 고향산천을 등져야 했던 가난한 천민과 소작인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러나 그 청년들이 독립전쟁 일선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이 "조국 독립"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유시참변에서 희망을 본다.

 

그들은 자유시 하늘 아래서 몸뚱이로 조국광복의 불을 밝힌 촛불들이었다. 독립운동사에 이름 석 자 없는 숱한 무명의 상놈투사들이 있어서 우리의 하늘이 어둡지 않다.(1)

 

 

 

■ [팩트체크] '자유시 참변'은 일본의 사주로 일어났다?

연합뉴스 이웅기자 2023. 9. 9. 07:05
 
 
 

상해임시정부, 소비에트러시아 지원 속 항일무장부대 통합 추진
한인 사회주의 양대 세력 갈등…통합부대 주도권 다툼 유혈 사태로
"홍범도 장군은 중립 지켰으나 높은 명성 때문에 파쟁에 이용"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이 때아닌 이념 논쟁을 불러왔다.

 

논란은 지난달 말 육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사관생도를 양성하는 곳에 소련공산당 가입 전력이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두는 게 적절치 않다는 문제 제기에 따라 독립기념관으로 흉상 이전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야당과 보훈단체들은 6·25전쟁과 냉전체제 이전에 살았던 항일 독립 영웅까지 공산주의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며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여권 일각에서도 이념 논쟁으로 번지는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국방부는 입장문을 통해 홍범도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행적에 대해선 다른 평가가 있다며 흉상 이전 방침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언론에선 자유시 참변을 일본과 결탁한 러시아공산당이 한인 무장단체를 제거해 달라는 일본 측 요구로 일으킨 독립군 학살 사건인데 홍범도 장군이 여기에 연루됐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 같은 보도 내용은 근거가 있을까? 이를 판단하려면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배경과 사건의 전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방부, 홍범도 흉상 이전 검토 (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2023.8.28 yatoya@yna.co.kr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1921년은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막 건립돼 독립운동 열기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시기이자, 러시아 볼셰비키혁명(1917년)과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의 종식으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던 세계사적 격변기였다.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 등을 보면, 당시 국내외에선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전후 처리 원칙으로 천명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돼 외교적 교섭과 세계 여론 조성으로 독립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 파리강화회의에선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에 대해선 민족자결권이 적용되지 않았고, 뒤이은 국제연맹회의와 워싱턴 태평양회의에서도 미국 등 열강들은 한국문제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1919년 후반부터는 서구 열강에 기댄 '외교론' 대신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이 부상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 중심의 독립 청원 외교가 힘을 잃고, 1919년 11월 사회주의 계열의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독립전쟁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임시정부 국무원은 무장독립전쟁 노선을 시정방침으로 정한 뒤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삼고,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흩어져 싸우던 100개 가까운 항일무장부대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식민지 종속국들의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를 약속한 신생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외교에도 힘을 쏟았다.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하례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발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17년 발간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 따르면,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20년 4월 레닌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에 특사(한형권)를 파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자금 지원 등 4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한 뒤 양 정부 간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을 체결하기로 합의하고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당시 일본 언론 보도와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6개 조항으로 된 공수동맹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독립군단을 설치해 시베리아 지방에 주둔시키고 러시아 총사령관의 지휘받도록 하며, 시베리아를 침략한 일본과 싸울 때 러시아를 원조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볼셰비키 혁명 후 열강들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 세력(백군)과 내전 중이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적군)는 항일 투쟁을 벌이던 상해임시정부와 한국 사회주의자들을 적극 지원하며 협력했다. 영토 야심이 컸던 일본이 열강 중 가장 많은 7만여명의 병력을 시베리아와 극동지역으로 출병하며 백군을 지원하자, 한인 부대들은 적군 편에서 맞서 싸웠다.

 

 

소비에트러시아는 열강의 간섭을 약화하기 위해 1920년 4월 아무르주, 자바이칼주, 사할린주, 연해주 등 극동지역에 완충국으로 불리는 '극동공화국'을 수립하고 일본 군대를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도 진행했다.

 

 

[표] 대일한로공수동맹

[자료=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발췌]

 

 

 

3·1운동을 전후해 한국 독립운동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선 러시아, 중국, 일본을 거쳐 들어온 사회주의 사상이 크게 확산했다.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임경석)에 따르면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모태가 됐다. 학계에선 이동휘를 비롯한 신민회 좌파들이 일제 탄압으로 망명한 뒤 1918년 4월 러시아 극동지역 한인 사회에서 조직한 '한인사회당'을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로 본다.

 

 

이와 별개로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1920년 7월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를 결성해 한인사회당 그룹과 경쟁했다. 한인사회당은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근거지를 중국 상하이로 옮겨와 '상해파 공산당'으로 불리게 됐으며, 전로한인공산당은 러시아령 한인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와 연합하면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으로 불렸다.

 

 

두 그룹은 혁명론과 정치노선에서 차이를 보였는데, 상해파는 당면 과제를 민족해방혁명으로 보고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한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즉각적인 사회주의혁명을 내세우며 대립했다.

 

 

 

러시아 극동지역 일람도 2009년 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윤상원) 발췌

 

 

 

1921년 6월 극동공화국 영내인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일어난 유혈 사태인 자유시 참변은 이 같은 배경 위에서 일어났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군 부대들은 부대 통합을 위해 1920년 10월부터 자유시로 집결했다.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등을 보면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소비에트러시아가 합의한 공수동맹이 부대 통합의 토대가 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집결한 부대는 2천~3천명 규모로 추산되는데 크게 세 부류였다. 하나는 자유시에 주둔해 있던 한인자유보병대대(자유대대)였고, 나머지는 백군, 일본군과 싸웠던 연해주 부대들과 북간도 지역에서 온 독립군 부대들이었다.

 

 

홍범도 장군 부대를 비롯한 간도 독립군들은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에 밀려 퇴각해온 상황이었다.

 

 

이들은 부대 통합의 대의에 공감했으나 성격은 이질적이었다. 자유대대는 대한국민의회(이르쿠츠크파)의 정치적 지도를 받은 반면 연해주와 간도 부대들은 한인사회당(상해파)과 연계돼 있었다. 처음에는 연해주 부대를 중심으로 부대가 통합돼 극동공화국 국방부 산하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로 편제됐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간도 부대들도 여기에 포함됐다. 그러나 자유대대가 반기를 들면서 갈등을 빚었다.

 

 

 

[표]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의 차이

[자료=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발췌 부분 수정]

 

 

 

그러다 1921년 1월 이르쿠츠크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 극동비서부가 설립되면서 주도권은 자유대대로 넘어갔다. 극동비서부는 이르쿠츠크파의 의견대로 통합 부대를 자유대대 중심의 '고려혁명군'으로 재편했다.

 

 

하지만 이번엔 대한의용군 측의 반발에 부딪혔다. 대한의용군 측은 부대 통합의 조건으로 백군 가담 전력이 있는 고려혁명군 간부들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며 대치했으나 설득과 중재 끝에 타협이 이뤄졌다. 그러나 통합 부대의 편제 문제를 놓고 다시 불거진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고려혁명군이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결정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2009년 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윤상원) 등에는 자유시 참변의 전말이 당시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상세히 기술돼 있다. 참사 당일(6월28일) 무장해제를 위한 고려혁명군의 공격이 있었지만 가급적 교전을 피하려는 양측의 노력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고려혁명군의 전면적인 공격은 30분 정도에 그쳤고 대한의용군은 내내 거의 응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혁명군은 전체 사망자 36명, 포로 864명으로 밝힌 반면 대한의용군은 행방불명을 포함한 사망자가 400~600명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시 참변 희생자 기리는 비석 (스보보드니<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스보보드니 소베스킷 마을에 자유시 참변 희생자를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2018.1.31 photo@yna.co.kr

 

 

 

홍범도 장군은 무력 충돌이 있기 한 달 전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통합부대 재편 결정이 내려지자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다른 간도 부대들과 함께 대한의용군 주둔지에서 고려혁명군 쪽으로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자서전 격인 '홍범도 일지'를 소개한 책 '홍범도 장군'(반병률)에는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 장군이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이 있다.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뒤 대한의용군 포로들에 대한 재판에 3명의 재판위원 중 1명으로 참여했다.

 

 

이와 관련해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책에서 "홍범도는 사건(자유시 참변) 당시 중립을 지켰으나 참변 이후 군사지휘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측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파쟁에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윤상원 교수도 홍범도 장군의 재판 참여가 명망과 권위 때문이었다고 봤다.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 [반병률 교수 제공]

 

 

 

자유시 참변은 해외 한인 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이후 항일무장투쟁에 큰 짐을 지웠다. 자유시 참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독립군 부대 간의 주도권 다툼이었지만, 이면에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뿌리 깊은 반목과 갈등이 있었다.

 

 

러시아공산당의 일관성 없는 정책과 내부 알력도 자유시 참변의 한 원인으로 봐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상해파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의 지지를 받은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과 연결돼 있었다.

 

 

2020년 논문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초기 한인사회주의 세력의 갈등'(오세호)에선 "해당 연구들은 통합한인부대의 지휘권을 둘러싸고 발생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정치적 갈등을 자유시 사변의 주요 원인으로 보았다"며 "그러나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갈등만으로는 그 발생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 이를 둘러싼 소비에트러시아의 정책, 그리고 한인부대 통합 과정에서의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자유시사변이 발생한 것으로 보는 선행 연구들의 시각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자유시 참변 현장 (스보보드니=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러시아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의 급수탑. 1921년 6월 28일 독립군 간 무력 충돌로 유혈 참극을 빚었던 현장이다. 2018.1.29 heeyong@yna.co.kr

 

 

 

이에 비춰보면 일부 언론 보도처럼 자유시 참변을 일본과 결탁한 러시아공산당이 한인 독립군 부대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볼 수는 없다.

 

자유시 참변은 모스크바의 공산당 수뇌부에서도 심각한 문제로 다뤘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1921년 11월 이르쿠츠크파의 반발에도 '한국위원회'를 구성해 자유시 참변의 진상을 조사한 뒤 피해자들의 원상회복과 양 세력의 통합 추진 결정으로 상해파의 손을 들어줬다.

 

 

러시아공산당과 극동공화국은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백군 격퇴에 집중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으며, 이를 위해 극동공화국 영내 일본군에 적대적인 군대의 주둔을 금지하라는 일본 측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한인 독립군도 극동공화국 내에 공공연히 주둔할 수 없었지만 협력은 지속됐다. 간도 독립군이 자유시로 이동할 때 일시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한 것과 자유시에 주둔한 한인 부대들을 러시아혁명군 산하 부대로 편성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자유시에서 결성된 1천700여명의 고려혁명군은 당초 바로 만주로 출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21년 8월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극동공화국과 일본의 협상인 '대련회담'이 열리면서 이르쿠츠크로 회군하게 됐다. 이는 정세 변화에 따른 대응으로 러시아공산당과 일본의 결탁이라고 하긴 어렵다.

 

 

대련회담이 결렬되기 전인 1921년 10월 일본군과 백군이 총공세로 극동 하바롭스크를 재점령하면서 러시아 내전의 최후 단계인 연해주해방전쟁이 시작됐으며, 한인 부대들은 적군 편에서 격전을 벌였다. 전투와 대치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러시아공산당이 일본의 요구로 한인 독립군들을 자유시에서 몰살했다고 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일본군이 1922년 10월에서야 철병 조약을 맺고 연해주에서 물러나면서 5년에 걸친 러시아 내전은 끝이 났다.

 

 

1951년 홍범도 장군 묘지를 참배하는 '레닌기치사' 직원들 (서울=연합뉴스) 1951년 홍범도 장군 묘지를 참배하는 고려인 한글신문 '레닌기치사' 직원들. 2019.4.23 [광주고려인마을 인문사회연구소 제공] photo@yna.co.kr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을 보면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치른 시기는 3·1운동 이후 사회주의가 한국에서 새로운 사조로 크게 유행하던 때였다.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진 청년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 당국은 이런 사회주의를 식민 지배를 위협하는 불온사상으로 간주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손잡은 좌우합작 정부로 출범해 다양한 사상과 세력들이 경쟁하면서도 독립이란 대의를 두고 협력했다.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이 사회주의자 이동휘와 함께 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의병 활동을 하다 1908년 연해주로 넘어와 주요 활동무대로 삼은 홍범도 장군에게 사회주의는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환경이자 항일무장투쟁의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 맞선 러시아령 한인들에게 러시아 내전 기간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 대신 적군 편에 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홍범도 장군은 은퇴 후 연해주 이만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1927년 59세에 소련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이렇다 할 활동 없이 평범한 여생을 보내다 강제 이주된 카자흐스탄에서 1943년 75세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정부는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의 공을 기리기 위해 박정희 정권 때인 1962년 건국훈장을 수여했으며, 1994년 김영삼 정부부터 추진해온 카자흐스탄에서의 유해 봉환이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 결실을 거둬 대전현충원에 유해를 안장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가입 전력이 논란이 되고 있으나 당시 시대 상황을 무시한 채 지금의 정치적 잣대로 평가하는 게 타당한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2)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00307211201249

 

 

(2) https://v.daum.net/v/20230909070513984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v082mc331a6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