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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4)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 본문

코리아시대/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4)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

대야발 2025. 5. 9. 11:14

 

 

 

 

 

 

 

10월 21일 ‘백운평전투’에서 600여 명의 김좌진부대가 일본군 보병연대를 계곡으로 유인해 일본군 300여 명이 전사하는 대승을 거뒀다. 독립군 전사자는 20여 명이었다.

 

10월 22일 ‘천수평전투’에선 일본군 기마중대를 급습해 120여 명을 전멸시켰다. 같은 날 ‘어랑촌전투’에서 먼저 고지를 점령한 김좌진 군대 600여 명은 기병·포병·보병이 연합한 6배 이상의 일본군 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중과부적으로 고전하던 중 ‘완루구’에서 승리한 후 이동하던 홍범도부대가 지원에 나서 함께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일본군 전사자가 3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어 벌어진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에서 연이어 김좌진부대가 승리를 거두었고, 10월 26일 ‘천보산전투’에서 김좌진·홍범도부대가 연합해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 대첩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 명,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이었다.

 

 

■ 별명은 만주벌 호랑이, 청산리대첩 이끈 항일투쟁 영웅

2025. 1. 25. 00:06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⑬ 백야 김좌진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남 홍주(현 홍성)에서 명문가이자 부호인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집안으로 갑신정변의 김옥균도 문중 인물이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형도 양자로 떠나 장자 역할을 했던 어린 김좌진은 타고난 강골로 말 타기, 활쏘기 등 병정놀이를 즐겨했다.

 

유년시절 한학을 배웠고 계몽운동가, 의병운동가로부터 신학문을 접하고 시국과 민족문제에 눈뜨게 된다. 1905년 경 10대 가장 김좌진은 집안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민족운동에 나서면서 일가와 함께 홍성의 호명학교(현 갈산초등학교)를 설립했다. 1907년 경 서울로 가 계몽운동단체 신민회 회원들과 교류했고 기호흥학회에도 참여했다.

 

 

청산리대첩 일본군 사상 3300여 명 달해

 

‘청산리대첩’의 영웅이자 무장항일투쟁을 이끈 김좌진 장군. 장군은 무장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쳤다. [사진 김좌진 장군 기념관]

 
 
 
 

1910년 경술국치 후 김좌진은 동지를 규합해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 행동에 나선다. 연락거점으로 이창양행 등을 설립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1911년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출옥 후 1915년 박상진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김좌진이 자금모집활동 중 일제의 추적을 받게 되자 광복회는 그를 사관학교 설치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설치한 만주본부를 책임지는 부사령으로 임명한다.

 

1918년 사령관 박상진을 비롯한 간부회원들이 일제에 체포되어 광복회가 와해된 후 김좌진은 길림에서 1919년 2월, 독립운동가 39인이 독립전쟁을 선포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데 참여했다.

 
 

3·1운동 이후 무장독립군단체들이 활동하는데 서간도 지역의 서로군정서, 북간도 지역의 대한정의단(후에 대한군정서, 통칭 북로군정서)이 대표적이다. 김좌진은 서일 총재의 초빙으로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대한정의단에 참여한다. 사령부의 사령관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나서 사관양성소 소장을 겸임하면서 300여 명의 생도들을 교육했고 일반병사들로 구성된 보병대도 조직했다. 김좌진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의 무기를 구입토록 해 대한군정서군은 총 4개 대대 1600여 명이 총기 800정, 기관총 4정, 야포 2문, 수류탄 2000여 개로 무장하고 만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독립군 세력으로 성장했다.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은 유격전으로 국내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고 일본군은 국경을 넘어 독립군 근거지로 공격해왔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연합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500명에 달하는 대승을 거두는 등 독립군단체들은 곳곳에서 활약했다. 그해 8월 일제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해 서·북간도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당시 중국 측이 독립운동단체들의 근거지 이동을 요구해 대한군정서군은 의견대립 끝에 총재 서일은 북만주로, 총사령관 김좌진은 서쪽의 화룡현 청산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즈음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연합부대를 편성한 독립군부대들이 청산리에 집결해 있었고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군이 도착해 2000여 병력이 모여 작전을 함께 협의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은 2만여 병력으로 독립군을 포위해 화룡현으로 진격해왔고,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에서 북간도 독립군부대가 일본군과 10여 차례 전투에서 대승한 것이 바로 ‘청산리대첩’이다.

 

 

10월 21일 ‘백운평전투’에서 600여 명의 김좌진부대가 일본군 보병연대를 계곡으로 유인해 일본군 300여 명이 전사하는 대승을 거뒀다. 독립군 전사자는 20여 명이었다. 10월 22일 ‘천수평전투’에선 일본군 기마중대를 급습해 120여 명을 전멸시켰다. 같은 날 ‘어랑촌전투’에서 먼저 고지를 점령한 김좌진 군대 600여 명은 기병·포병·보병이 연합한 6배 이상의 일본군 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중과부적으로 고전하던 중 ‘완루구’에서 승리한 후 이동하던 홍범도부대가 지원에 나서 함께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일본군 전사자가 3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어 벌어진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에서 연이어 김좌진부대가 승리를 거두었고, 10월 26일 ‘천보산전투’에서 김좌진·홍범도부대가 연합해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 대첩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 명,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중국 길림성 해림현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순국 장소. 장군은 이곳에서 공산주의자의 흉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사진 김석동]
 
 
 


훈련된 정예 무장독립군들의 항전의지, 김좌진의 탁월한 지도력, 홍범도부대의 지원 등이 있었지만 오랜 기간 자금과 군수지원은 물론 숙식을 제공하며 첩보활동까지 담당한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역사였다.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 그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일본군은 북간도에서 잔혹한 보복·압박을 계속했고 경신참변(간도참변)으로 학살된 동포가 3600여 명에 달했다. 청산리대첩 후 일본군이 본격 공격해오자 독립군세력은 연해주로 건너가 장기항전 하기 위해 중·러국경 밀산에 집결해 러시아 이만으로 이동했고 김좌진부대, 홍범도 연합부대, 서로군정서군 등 3000여 명의 독립군이 집결했다. 독립군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 참모부장에 김좌진을 선출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극동공화국 측에서는 독립군부대가 북쪽 자유시로 옮기도록 하고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무장해제된 독립군부대들은 내부 갈등 끝에 러시아 적군 측 공격으로 최대 500여 명이 사망하는 ‘자유시참변’을 당하게 된다. 무장해제를 반대한 김좌진이 일부 대한군정서군을 이끌고 북만주로 돌아간 후였다. 자유시참변 후 서일 총재가 자결 순국했고, 김좌진은 대한군정서를 이끌고 1922년 북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들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해 이범윤이 총재를 맡고 김좌진은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군사부문을 책임지게 된다.

 

 

일본의 만주출병과 만주군벌과의 협력 등의 상황이 전개되자 독립운동단체들은 통합을 모색한다. 압록강 인근에는 참의부로, 남만주 지역에는 정의부로 독립운동세력들이 통합되자 김좌진도 1925년 북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신민부를 창립하게 된다. 임정은 김좌진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1920년 청산리대첩 승전 사진. 청산리에 집결한 독립군부대들과 김좌진 장군의 대한군정서군은 일본군과 10여 차례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사진 위키백과]
 
 
 

신민부는 북만주 최고의 독립운동단체로 자리 잡아갔지만 1927년 일제와 중국경찰이 본부를 급습해 간부들을 체포하자 민정파와 군정파로 분열되고 김좌진은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군정파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강제 모병·모금 등에 대한 동포사회의 반발, 공산세력의 확산 등으로 신민부에 대한 지지는 크게 약화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주의를 지향하며 무장투쟁을 추진해 온 김좌진은 개인의 자유, 동포의 생활개선 등을 추구하는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하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연맹’과 연합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장이 된다. 이후 동포들의 자치조직결성, 생활개선, 영농지원, 교육 등을 지원하고 이를 토대로 공산주의에 대응하며 무장투쟁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1930년 1월 24일 독립투쟁에 매진하던 김좌진은 뜻밖에 동포지원을 위해 운영하던 해림의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의 흉탄에 맞아 숨진다. 청산리대첩의 영웅이자 무장항일투쟁을 이끌었던 대표적 지도자, 만주벌 호랑이 김좌진은 이렇게 순국했다. 암살배경에는 공산세력과의 갈등 외에 일제가 배후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국내외에서 10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해 사회장이 거행됐고 인근에 안장되었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이어지자 1934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유해를 고향 충남 홍성으로 옮겼고, 1958년 아들 김두한이 충남 보령으로 이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홍성에는 추념비, 동상이 세워지고 생가지가 복원됐다. 1999년 순국지인 해림에도 자택과 정미소가 복원되었다.(1)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쯤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 백운평. 북로군정서 제2제대 600명이 숨을 죽이며 매복하고 있었다. 드디어 일본군이 나타났다. 제2제대장 철기(鐵驥) 이범석의 총성에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고꾸라졌다. 독립군 600여 명은 일제사격을 시작했다. 26일까지 청산리 계곡 곳곳에서 벌어진 청산리 전투의 시작이었다.

 

 

■'김좌진=청산리전투', 어떻게 만들어졌나

하성환기자 2021. 5. 10. 16:12
 
[봉오동전투를 다시 생각한다③]

 

이 글을 쓴 하성환 시민기자는 논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신화, 그 왜곡된 집단기억'(밀양문학 제33집)을 썼습니다. 이 글은 해당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편집자말>

 

 

 

▲ 독립전쟁의 두 영웅 홍범도(왼쪽)와 김좌진(오른쪽)  고등학교 미래앤 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286쪽에 독립전쟁의 두 영웅이라는 해설과 함께 <봉오동전투=홍범도>, <청산리전투=김좌진>을 연상시키는 개인영웅사관에 기초한 역사서술이 눈에 띈다
ⓒ 하성환
 
 
 

'봉오동전투=홍범도'가 신화이듯이 '청산리전투=김좌진' 역시 대중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신화이다. 청산리전투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단독으로 성취한 전투가 아님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송우혜님(시인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의 조카)은 이미 1991년 권위 있는 학술지 <역사비평>에 청산리전투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따라서 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이 점을 반영하여 홍범도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부대가 공동으로 승리한 전투로 기술돼 있다. 그럼에도 '청산리전투=김좌진'이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크게 두 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김좌진의 오른팔 이범석 장군이 쓴 두 권의 책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범석은 본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김좌진의 초빙을 받아 북로군정서로 영입된 인물이다. 

 

 

그는 중국 백화문으로 쓴 <韓國的 憤怒(한국적 분노)>(1941)에서 청산리 전투를 '대첩'으로 표현했다. 이 책은 해방 후 1947년 <한국의 분노>로 번역돼 출간되었다. 이범석은 이승만 정권에서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내무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그러다 일제관헌 문서를 압수해 간 미국에서 1960년대 말 기밀문서를 해제하였다. 그러자 1970년 국회도서관장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청산리전투에 대한 역사자료를 입수했다. 이에 이범석 역시 발 빠르게 1971년에 <우둥불>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우둥불>은 <한국의 분노>보다 분량이 무려 4배나 많다.

 

 

청산리전투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단독이 아니라 홍범도 부대, 안무 부대, 최진동 부대 등을 언급하면서 최초로 연합부대의 존재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초점은 북로군정서와 이범석 자신에게 맞추고 있는 책이다. 특히 <우둥불>에서 일본군 2만 병력을 5만 명으로 과장하고 있는 것이나 일본군 기병소대를 공격해 전멸시킨 것을 기병중대를 전멸시킨 것으로 표현한 것은 과장의 정도가 눈에 띌 정도이다.

 

 

문제가 있는 대목은 홍범도 부대를 비롯해 최진동 도독부, 안무 국민회군 등이 일본군 총공세에 미리 지레 겁먹고 새벽에 야반도주했다고 기술한 부분이다. 게다가 천수평 전투에서 홍범도 부대가 고립돼 구출해 주었는데 함께 싸우지 않고 홍범도 부대가 줄행랑을 친 것처럼 기술한 부분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가 어랑촌 전투에서 일본군에 포위됐을 때 이를 구출해 준 부대가 용맹스러운 홍범도 부대였다. 실제로 일본군이 가장 피하고 싶어 했던 부대로 홍범도 부대를 꼽았다. 그만큼 홍범도 부대는 용맹스러웠고 빨치산 투쟁 경험이 풍부해 전술에 능했다.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대는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 그리고 최진동 부대와 안무 부대 등 여러 연합부대의 연합작전의 승리였다. 특히 홍범도 부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 대한광복회 부사령이자 만주 책임자, 북로군정서 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은 아나키스트였다. 대한광복회가 북로군정서로 확대 발전되면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무관들과 함께 1920년 청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29년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해 주석에 취임했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국가보훈처
 
 
 

다음으로 해방 후 남북 분단과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 경직된 채 역사 사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사례로 표출되었다. 그중에 하나가 아나키스트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이다. 아나키스트 김좌진 장군을 살해한 자는 코뮤니스트 박상실이란 청년이다. 그는 30년대 동북항일연군으로 참가해 일본군과 교전 중 장렬히 전사했다.

 
 
 

항일전쟁 시기,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의 충돌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일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고 그런 잔혹함을 경쟁적으로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나키스트 백야 김좌진의 죽음이나 김좌진의 사촌동생 시야 김종진의 죽음에는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의 해묵은 충돌이 깊숙이 개입돼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노선상의 차이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의 대결과 충돌은 빈발했다. 항일독립군들끼리 살상행위를 자행한 자유시 참변(1921)은 군지휘권을 두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갈등에서 빚어진 참극이었다. 

 

 

심지어 같은 민족주의 계열 항일독립지사들끼리도 살육전이 존재했다. 복벽주의 항일지사 전덕원은 공화주의 계열 통의부 선전국장 김창의를 살해했다. 통의부가 참의부로 분열되는 과정에서도 비극은 발생했다. 백서농장 학감을 지냈고 통의부 1중대장 백광운과 5중대장 김명봉은 통의부 6중대장 문학빈에게 피살됐다.

 

 

백범 김구는 1920년대 초반 국제정세에 가장 탁월했던 항일독립지사 김립을 얼굴과 가슴에 무려 12발을 쏘아 현장에서 즉사시켰다. 백범 김구의 지시를 받고 김립을 직접 살해한 인물 역시 김구의 제자 오면직이다. 오면직 역시 아나키스트 열혈 항일독립지사로서 일제에 피검돼 국내로 압송된 후 해주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1938년 처형됐다.

 

 

김좌진 장군을 공산주의자가 암살했다는 사실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부각시킨 것에는 남북한 이념 대립과 체제 경쟁에서 비롯된 측면이 컸다. 김좌진 장군을 살해한 인물이 공산주의자인 탓에 독재권력이 김좌진의 죽음을 크게 증폭시키고 정치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국민 다수는 김좌진 장군이 아나키스트였음을 잘 모른다.

 

 

마치 신채호 선생이 항일독립운동 당시 아나키스트로서 활약했고 아나키스트로서 피검되고 감옥에서 죽어갔음에도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 항일독립운동가였음을 학교교육을 통해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던 것과 같은 논리이다.

 

모두 냉전시대 이념의 논리에 휘둘린 탓이다. 어떤 사실은 애써 감추고 어떤 사실은 집중적으로 크게 조명함으로써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흐리게 했다. 청산리전투 역시 홍범도 장군의 위용과 함께 통합부대의 승리였음을 사실에 기초해 서술해야 할 것이다.(2)

 

 

 

■ 문학적으로 풀어쓴 홍범도 평전…“청산리전투 재조명 받아야”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2023. 2. 28. 17:10

 

 

‘민족의 장군 홍범도’ 집필한 이동순 시인
홍범도 연구 40여년, 소설 형식 재구성해
장군출생부터 2021년 유해봉환까지 다뤄

 
 
 
 
 
 
 

“축소된 청산리전투에서의 활약은 다시 정리되어야 합니다.”

 

 

40년 넘게 홍범도(1868~1943)를 연구한 이동순 시인은 홍범도 장군에 대해 재평가 돼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시인에 따르면 분단이라는 현실 때문에 그의 업적에 견줘 그동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시인은 그의 일대기를 평전으로 쓴 ‘민족의 장군 홍범도’를 출판사 한길사에서 3월1일 출간한다. 올해 홍범도 순국 80주기(10월25일)를 맞아 한길사가 지난해 그에게 평전을 제안하면서 작업한 결과물이다. 2003년 서사시로 썼던 홍범도의 생애에 사료들을 추가해 소설 형식 평전으로 재구성했다. 홍범도의 출생, 그가 성장하고 결의를 다지며 첫 봉기를 일으키고 아내와 두 아들을 잃는 이야기를 소설처럼 풀어썼고, 2021년 유해 봉환까지 다뤘다. 출판사는 이번 책에 대해 “홍 장군의 생애를 문학적으로 재조명하고 부활시킨 기념비적인 평전”이라고 소개했다.

 

 

시인 이동순이 28일 서울 중구 순화동천에서 평전 ‘민족의 장군 홍범도’ 출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민족의 장군 홍범도’은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를 맞아 홍범도 장군을 42년간 연구해온 이동순 시인이 그의 생애를 문학적으로 재조명한 평전이다(사진=뉴시스).

 
 
 
 

홍 장군은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기록한 후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이끈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일제의 핍박 속에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간 후 카자흐스탄에서 숨을 거뒀다. 고국을 떠난 지 100년 만인 2021년 그의 유해가 국내에 돌아왔다.

 
 
 

이 시인은 그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홍 장군은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했다. 머슴 생활, 제지공장 노동자 등 힘겨운 삶을 전전하다 의병에 뛰어들었고, 장군으로서 큰 공을 쌓았지만 김좌진의 빛에 가려 명성을 크게 얻지도 못했다. 

 

 

이 시인은 “청산리 전투를 김좌진 장군과 북로군정서의 전과로만 풀이하는 등 한때 김좌진 장군을 너무 부각시키느라 홍 장군의 존재가 고의로 지워지기도 했는데, 홍 장군의 공로가 가장 컸다”며 “유튜브를 보면 홍 장군에 대한 수많은 왜곡과 편견이 있는데, 그런 잘못된 서술을 바로잡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홍범도 장군의 삶은 무수한 고난과 난관을 돌파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동안 그의 삶은 너무 소외되어 왔기에 앞으로 홍 장군의 위업과 정신을 기리는 사업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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