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2)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대통령 이승만(1919년~1925년) 본문
대한민국임시정부(대일항쟁기) (22)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대통령 이승만(1919년~1925년)
대야발 2025. 5. 8. 16:51

■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
이른바 '가(假) 정부' 수립을 논의해 온 일군의 명명 독립운동가들이 이국땅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민주 공화제 정부를 수립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帝國)이 사라진 지 3147일 만에 '대한민국(民國)'은 삼천만 동포의 새로운 희망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이날 구성된 임시정부 각료는 모두 7명이다. 국무총리제를 택해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이 임시정부를 이끌어 갈 소임을 맡은 것이다.
<독립신문> 주필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했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한 죄로 복역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외교독립론자로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1875~1965, 1949 대한민국장)이나, 도산 안창호(1878~1938, 1962 대한민국장) 선생이야 모르는 이가 따로 없겠다. 그러나 나머지 각료들은 이름은 귀에 익은 듯하지만 그리 알려진 이가 아니다. (관련 글 : '민족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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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원 각료들. 이때 체제는국무총리제였다. |
ⓒ 장호철 |
외무총장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은 김구와 함께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며 통일 자주 국가를 지향했고 중도 노선을 추구한 정치가였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꿈을 접어야 했지만, 그는 남북 모두에서 존경받은 민족지도자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관련 글 : 남북 모두가 존경한 독립운동가)
법무총장 이시영(1868~1953)은 이른바 '우당 이회영의 6형제' 가운데 다섯째다. 막대한 가산은 물론 목숨마저 조국의 독립에 바쳐 그의 일가는 모두 10명이 독립 유공 서훈을 받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완성한 집안이다. 1949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관련 글 : 재산, 목숨 모두 걸고 항일투쟁 나선 이시영 선생, 광복 73년, 허은·이은숙 여사도 마침내 서훈 받다)
재무총장 최재형(1860~1920)은 일제 강점기 연해주에서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고 러시아에 망명한 한인 의병을 규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다. 아홉 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하여 귀화한 이래 경제력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노령(露領)을 근거로 계속 활약하였다. 그는 이듬해 4월 일제가 시베리아로 쳐들어오자, 한인 의병을 모아 시가전을 벌이던 중 잡혀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군무총장 이동휘(1873~1935)는 육군 참령(參領) 출신으로 신민회 간부와 뒤에 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다. 1915년경 러시아로 망명하여 조직한 한인사회당을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그는 반일 민족 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가'였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교통총장 문창범(1870~1934)은 일찍이 러시아로 망명하여 1910년 이후 이상설·유인석 등과 항일 구국 운동을 전개하고 대한국민의회(國民議會)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임시정부에서는 재로한인사회(在露韓人社會)의 대표로 교통총장에 추대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3일 동생 문창락에게 노령과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자를 동원하여 항일 무력전을 감행하도록 하고, 노령에 군관학교를 창설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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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구성 |
ⓒ 장호철 |
정부 수립에 이어 입법기관도 출범시켰다. 조소앙의 제안대로 기구의 명칭은 '임시의정원'. 무기명 투표로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칠이 각각 뽑혔다.
석오 이동녕(1869~1940)은 일제 강점기 신흥무관학교 소장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1918년 조소앙·조완구·김좌진 등 민족 대표와 함께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에 참여했고, 임정 수립 이후 초대와 11대 의정원 의정을 지냈다. 뒤에 임정의 주석을 두 차례나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부의장 손정도(1872~1931)는 감리교 목사로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을 지냈다. 1920년 의용단(義勇團)을 조직,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1922년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이광수(1892~1950)는 익히 아는 소설가, 춘원이다. 임시의정원 서기가 되었을 때 그는 27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1938년부터 전향하여 친일부역에 앞장섰다. 백남칠(1892~1959)은 임시의정원 서기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임정 구미(歐美)위원부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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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해방 뒤 환국을 앞둔 임시정부 요인들의 기념촬영(1945.11.3.) |
ⓒ 백범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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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의 이동 |
ⓒ 장호철 |
임시정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백범 김구(1876~1949)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그는 국무위원이 아닌 초대 경무국장이었다. 그는 내무총장(1923), 국무총리 대리(1924)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함으로써 임시정부에서 처음으로 수반이 된다.
이후 백범은 4대 국무령(1930~1933), 7·8·9대(1940~1947) 주석을 지냈지만 독립 조국에는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다. 미국이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던 시기는 1932년 5월까지 약 13년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이후 일제의 압박이 가중되면서 임정과 요인들은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루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에 충칭(重慶)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숱한 이합집산, 생사를 오가는 시련의 시기를 거쳐 요인들은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다.
임시정부라는 이름만 세웠을 뿐, 그를 뒷받침하는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망명정부를 지키면서 요인들은 20세기를 19세기의 방식으로 살아야 했다. 적어도 이국땅에서의 독립운동을 말할 때 '풍찬노숙(風餐露宿)'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그들의 실제 삶이었다.
그리고 그들 간난의 삶이 지키고 가꾼 민주공화 정부가 1948년 독립 조국의 정부수립으로 이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1948년 건국'을 강변하는 보수 세력이 우러러 마지않는 이승만마저 공언한 우리 모두의 역사였다.(1)
■ 필라델피아 간 이승만, 美 독립 성지서 '한인의회'.. 상하이로 건너간 김구 "임정의 문지기를 하겠소"
1919년 3·1운동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김구는 마지막 주석으로 임시정부의 처음과 끝을 함께했다. 이 기간 둘은 줄곧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신뢰했다. 독립한 나라를 만들고자 두 사람은 1945년 해방 때까지 미국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부에서 둘을 대립 관계로 규정하는 것은 과거 역사를 현재 정치에 이용하는 '역사 정치'일 뿐이다. 오는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워싱턴·하와이·필라델피아, 상하이·항저우·충칭 등 두 거인(巨人)의 활동 근거지를 찾아 대한민국을 만들기까지 겪은 고난과 역경을 되돌아본다.

[1919년 4월 美 필라델피아의 이승만]
동포 150여명 모여 '대한공화국 수립' 알리는 결의문
가랑비 흩뿌리던 날, 독립기념관까지 2㎞ 시가 행진
3·1운동 소식이 미국 한인들에게 전해진 때는 1919년 3월 9일. 이승만은 당시 동부 필라델피아에 있었다. 6년 전부터 5000명 교민이 사는 하와이에서 교육·언론 활동을 하다 두 달 전 본토로 건너갔다. 한국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는 길이었다. 이승만은 독립 호소가 힘을 얻으려면 한인이 먼저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의회(Korean Congress)를 열어 독립을 선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여 전이다.
필라델피아는 '독립'을 상징하는 곳이다. 미국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을 제정한 독립기념관이 이곳에 있다. 이승만은 시내 작은 극장을 빌렸다. 리틀 시어터(Little Theater). 지금도 저녁마다 연극 공연이 열린다. 현재는 '플레이스 앤드 플레이어스(PLAYS AND PLAYERS)'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난 1월 23일 오후 2시쯤 찾았을 때 극장 문은 닫혀 있었다. 건물 사진을 찍는데 관리인이 쪽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1층 250석, 2층 50석 규모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한인의회는 1919년 4월 14~16일 열렸다. 사흘간 150명이 모였다. 서재필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여러 결의문을 채택했다. 대한공화국이 수립됐다는 것, 미국은 한국의 영토 보전과 독립을 약속한 1882년 맹약(조·미수호조약)의 당사국이라는 내용 등이다.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과 파리 회의 등에 보냈다. 참가자들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기념관까지 행진했다. 가랑비가 흩뿌리는 날이었다.
리틀 시어터에서 독립기념관까지 거리는 약 2㎞. 100년 전처럼, 인디펜던트호텔과 뮤지컬펀드홀을 거쳐 워싱턴스퀘어로 이어지는 로쿠스트 거리를 따라 걸었다. 필라델피아 한인교회 황준석(71) 목사가 동행했다. 45년째 필라델피아에서 사는 황 목사는 "독립기념관으로 행진한다면 이 길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이승만은 독립기념관 앞에서 영어로 번역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참석자와 함께 '대한공화국 만세' '미 합중국 만세'를 삼창했다. 일행과 함께 기념관에 들어가 1787년 조지 워싱턴이 미국 헌법 선포 때 앉았던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황 목사와 찾았을 때 기념관 문은 닫혀 있었다. 경비원은 "연방 정부 셧다운(일시 폐쇄)으로 휴관 중"이라고 했다. 100년 전 이승만이 앉았던 의자는 여전히 전시하고 있다 한다.
[1919년 4월 中 상하이의 김구]
임정, 4월11일 대한민국 국호 정하고 이승만 총리 선출
이틀 뒤 도착한 백범, 경무국장 맡아 임정 통합에 기여
김구가 상하이에 도착한 때는 1919년 4월 13일.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모여들고 있었다. 3·1운동 이전 100명이었던 상하이 한인 수는 500명으로 늘어났다. 김구는 3·1운동 때 황해도 안악 청년들의 만세운동 참여 권유를 사양했다. 일제 감시를 피해 망명하려는 뜻이 있었다. 3월 29일 기차를 타고 중국 안동(현 단둥)으로 넘어갔다. 7일간 머물다 배를 타고 4일 항해 끝에 상하이 푸둥(浦東)에 도착했다.
지금 푸둥 지역은 글로벌 도시 상하이를 상징한다. 동방명주, 금융센터 같은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김구가 도착한 1919년 4월은 푸둥 맞은편 와이탄(外灘)에 유럽식 건물이 막 생기던 때였다.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된 와이탄의 서양식 건물엔 '우수 역사 건축' 표지가 붙어 있다. 지난달 27일 거리를 걸으며 조사해보니 김구가 도착한 이후인 1920년대 건물이 더 많았다. 오성홍기가 건물마다 휘날리고 있었다.

김구는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미 발족해 있었다. 현순·손정도·신익희·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광수·신석우·조완구·여운형·김동삼 등 임시의정원 29명은 4월 10일부터 밤샘 회의를 거쳐 신석우 발의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무기명 투표로 이승만을 정부 수반인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이튿날인 4월 11일 오전 10시 만세 삼창을 부르고 해산했다.
임시정부가 탄생한 곳은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양옥집이다. 현재 서금이로에 해당한다.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1919년 8월부터 10월까지 사용한 두 번째 청사는 서금이로와 십자 방향으로 만나는 회해중로(옛 하비로)에 있었다. 상하이 지하철 13호선 회해중로역 1번 출구 건너편에 있는 의류 매장 'H&M' 건물이 청사 자리였다.
김구는 이 청사에서 경무국장에 취임했다. 8월 12일이었다.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임정의 문지기를 하겠소" 했더니 준 직함이었다. 임정 통합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임정을 주도하던 안창호는 "상해 임시정부와 동시에 한성 임시정부가 발표되어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 민족에 두 개 정부의 존재를 의심케 한다"며 통합을 강조했다. 임시의정원은 회의를 거쳐 9월 11일 한성 정부를 기본으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한성 정부의 집정관총재이자 상하이 정부의 국무총리 이승만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2)
■ 100년 전에도 탄핵된 대통령이 있었다 [삶과 문화]

1919년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이었다. 임시 의정원이라는 기구가 의회 역할을 했고,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선출했다. 초대 대통령은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루겠다는 이상을 가졌지만, 자주적인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과 충돌하면서 임시정부는 많은 갈등을 겪었다. 이에 임시 의정원은 그가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임시정부의 정체성과 원칙을 훼손했다고 판단해, 지금의 헌법재판소 역할을 하는 '탄핵심판위원회'를 설치하고 1925년 3월 23일 대통령을 탄핵·면직하는 결정을 내렸다. 정확히 100년 전의 일이다.
불명예스럽게 임시정부를 떠났던 대통령은 1945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미군정 치하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승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두 곳 모두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화려한 이력을 얻게 되었다.(3)
■ 청남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수반 여덟분 동상 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우당 이승만 동상. 사진제공=충북도

충북도 청남대관리사업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수반 여덟분 청남대에서 모신다’란 주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수반 8인의 역사기록화와 동상을 11일 온라인(유튜브)으로 공개한다고 10일 밝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국내에서 유일하게 임시정부 행정수반을 한 자리에 모셨다.
행정수반은 이승만·박은식 대통령,
이상룡·홍진 국무령,
이동녕·송병조·양기탁·김구 주석이다.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 지난 4월 11일 동상과 역사기록화 제막 행사를 열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확산으로 연기하고 대한국민의회·상하이 임시정부·한성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된 9월 11일에 맞춰 온라인으로 개장식을 가진다.
행정수반 여덟 분의 동상과 업적을 담은 역사 기록화를 소개하고 특히, 여덟 분의 특징을 표현해 특별 제작한 오리지널 연극 ‘대한민국을 만든 사람들’ 공연도 영상에 담았다.
코로나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의 예술인들과 함께 호흡함으로써 의미를 더했다.
이시종 충북도지사는 기념사에서 “행정수반 여덟 분을 함께 모시게 된 것은 대한민국 헌정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대한민국 탄생의 역사적 뿌리를 담은 영원한 국민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충북도는 2022년 임시정부 역사기념관이 완공되면 청남대가 역대 대통령과 임시정부 행정수반을 주제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수놓은 최고지도자들의 정신과 얼을 본받는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설호 청남대관리사업소장은 “청남대가 전국 최고의 대통령 테마 관광지는 물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행정수반의 위업과 애국정신을 기리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거듭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4)
■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사 전시회, 중국 상하이에서 열려
3월 26일~5월 4일 주상하이한국문화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거대한 뿌리' 전시회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유물 67점 전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1919년 4월 11일) 105주년을 맞아 임시정부가 수립된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
국가보훈부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26일부터 5월 4일까지 주상하이한국문화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거대한 뿌리’라는 주제로 순회전시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휴관일인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관람료는 무료다.
문화체육관광부 주상하이한국문화원과 공동으로 개최하는 이번 전시회는 상하이에서의 임시정부 수립과 활동,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과정,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 환영대회 및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정부 계승과 관련한 유물 67점을 전시한다.
전시는 총 5부로 구성된다. 우선 1부 ‘승리하고 돌아가리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역대 수반들의 활동과 함께 1940년대 임시정부의 외교 및 군사 활동을 전시한다.
주요 전시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소개한 ‘독립신문’ 89호(1921),
2대 국무령 홍진 선생을 소개한 ‘독립신문’ 192호(1926),
김구 주석의 취임 선서(194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對日)선전성명서(1941),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 선언(1943) 등이다.

2부 ‘가자, 조국으로!’에서는 광복 이후 귀국을 선언한 임시정부가 중국 및 미국과의 협상 끝에 조국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소개한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에 서명한 ‘일본항복문서’와 그다음 날인 9월 3일 임시정부가 발표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 등을 선보인다.
3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하다’는 1945년 12월 당시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제작됐던 개선문과 꽃 전차 구조물을 통해 전 국민이 환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의 모습을 재현한다. 주요 전시물로는 감사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장 약도 등이 있다.
4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억하다’는 중국 내에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 및 여러 유적지와 함께 현재까지 남아있는 상하이와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모형을 통해 소개한다. 또한 2022년 3월 1일 개관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의 모습을 알린다.

5부 ‘대한민국 정부, 임시정부를 계승하다’는 대한민국 관보 제1호와 국가등록문화재인 한중 영문 중국판 한국애국가 악보, 광복군 서명 태극기 등 헌법과 인물, 기념일과 상징물 등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정부 계승 의지를 소개한다.(5)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190411163002322
(2) https://v.daum.net/v/20190322032559968
(3) https://v.daum.net/v/20250223180004138
(4) https://v.daum.net/v/20200910173841834
(5) https://v.daum.net/v/20240325110344219
<참고자료>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4d334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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