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정철훈의 [월담] 비화 '홍범도 일지'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정철훈의 [월담] 비화 '홍범도 일지'

등록 2019.11.08 14:00:00수정 2019.11.25 17:43:12

북만주 항카호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 속 드리마

입말 살아있는 '홍범도 일지' 판소리 대본으로 제격

총과 꽃, 전쟁과 평화를 동시에 수행한 노장의 숭고한 영혼

홍범도 루트야말로 한민족의 미래 지향적 DNA

【서울=뉴시스】북만주 항카호에서의 홍범도, 왼쪽부터 홍범도, 이인복이 데려온 손녀 예카테리나,  새 부인 이인복.

 
【서울=뉴시스】정철훈 문화부장 = 1.내가 <홍범도 일지>를 처음 접한 것은 1993년 봄, 모스크바에서였다. <일지>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중 모스크바 세레메치예보 공항 근처의 한 아파트에 사는 고려인 작가 김세일(세르게이 표도로비치) 선생이 <일지>를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했다. 빈손으로 찾아갈 수 없어 준비한 게 야생화 꽃다발이었다. 연금생활자 노인들이 푼돈이라도 벌려고 근교 들판에서 꺾어온 야생화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쥔 채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 입구에 서 있기 일쑤였다.

 봄이었지만 간간히 눈발이 떨어지는 꽃샘추위의 어느 봄날, 김세일 선생에게 꽃다발을 안기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을 때 선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인이 차를 끓이는 동안 그는 서가 깊숙이 보관하고 있던 <홍범도 일지>를 꺼내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1950년 대 중반, 고려인 노(老)혁명가 이인섭 선생이 건네준 <일지>의 복사본이라오.”
  선생이 내게 보여준 <일지>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고려극장 배우 리함덕이 극장 수위로 말년을 보내고 있던 홍범도로부터 구술을 받아 쓴 이른바 ‘리함덕판 일지’였다.

홍범도(1868~1943)는 1937년 연해주를 떠나 그해 11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야니쿠르간 사나리크촌으로 이주했고 이듬해 5월 중순 크질오르다로 다시 이주했는데 그에게 주어진 연금은 생활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마침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에서 연출 겸 희곡작가로 일하던 태장춘의 주선으로 극장의 수위장을 맡아 보게 되게 된다.

  70세에 이른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자신의 항일무장투쟁활동을 메모 식으로 기록한 ‘목필책’을 갖고 있었고, 이를 기초로 태장춘이 자신의 아내 리함덕에게 홍범도의 구술 증언을 받게 하여 정리한 것이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홍범도 일지>의 원형이다.
 
  태장춘은 이 <일지>를 바탕으로 희곡 ‘홍범도’를 완성했고 1941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고려극장에서 채영 연출로 ‘홍범도’가 공연되었다. 연극을 직접 관람한 홍범도는 소감을 묻는 고려극장 배우들에게 “나를 너무 추켜올렸다”며 계면쩍어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도 그의 인간적 체취를 맡을 수 있다. 이후 고려극장의 배우이자 책임자였던 김진이 우즈베키스탄 안지잔에 거주하고 있던 항일혁명가 출신 이인섭의 부탁을 받고 1958년 4월16일 <리함덕판 일지>를 이인섭에게 전달한다. 이인섭은 홍범도, 이동휘, 김알렉산드라 등 항일영웅들의 전기 집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진이 보내준 <일지>를 깔끔하게 정리해 <저명한 조선의병대장 홍범도 수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리함덕판 일지>는 다시 고려인 작가 김기철 씨가 이인섭에게서 빌려갔으나 김 씨의 부인이 <일지>가 들어있는 남편의 옷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함으로써 유실되고 만다. 다만 이인섭이 원본 유실 전에 베껴 쓴 필사본이 남아 있어서 오늘날 홍범도의 생애와 행적을 어림할 수 있는 건 다행스런 일이다.
 
 애초에 홍범도는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무학에 가깝다. 그래서 이인섭 필사본에는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 많이 눈에 띄고 함경도 지방의 방언이나 속어, 틀린 용어나 한자어 등도 상당수 발견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런 점이 <홍범도 일지>가 갖는 사료적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서투르고 때로는 어눌하기도 한 홍범도 장군의 어투와 육성이 DNA처럼 묻어 있는 <일지>를 소리 내어 읽어보면 뜻밖에도 판소리 대본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그만큼 입말이 살아 있는 홍범도의 육성이 들리는 것 같다.

2.
 제2차 세계대전 와중인 1942년 4월 홍범도는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우스토베로 옮겨가자 수위를 그만두고 공장노동자로 일했으며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홍범도 장군이 한국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력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말년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일지>로 돌아가면, 1993년 봄, <일지>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 펼치던 중, 갈피에 끼어있던 사진 한 장이 툭 떨어졌다. 그건 홍범도 장군이 새 부인 이인복과 이인복이 데려온 손녀 예카테리나와 함께 1929년 연해주 중-러 접경지대인 항카 호숫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은 헬싱키 대학 고송무 교수(작고)가 1990년 국내에서 출간한 저서 <쏘련의 한인들>에 수록한 것으로, 고 교수가 김세일 선생을 방문하면서 전달한 것이었다.

  1929년이면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둔지 9년 후이다. 과연 사진을 찍은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라는 의문과 동시에 관심을 끈 것은 평범한 농사꾼의 얼굴을 한 홍범도 장군의 친근한 인상과 허리춤에 찬 권총이었다. 이 권총이 1921년 레닌을 만났을 때 받았다는 은제 권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이며 꽃가지를 손에 꺾어든 새 부인과 손녀에게서 인간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짐작컨대 이 꽃은 홍범도 자신이 사진을 찍기 전, 항가 호숫가에서 꺾어 새 부인과 손녀의 손에 쥐어 주었을 것이다.
 
  ‘권총과 꽃’이라는 이미지는 전쟁과 평화만큼이나 대조적이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의 비범함은 이 대조적인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은 저항과 복수와 전쟁의 상징이지만 꽃은 사랑과 아름다움과 평화의 상징이 아니던가. 홍범도 장군의 순수하고도 강인한 정신은 이항대립의 두 사물 사이에 존재한다.

  어떤 일은 100년이 걸리기도 하고 혹은 30년이 걸리기도 한다. 내가 항카 호수변의 도시 당벽진에 발을 디딘 건 세일 선생으로부터 <일지>를 건네받은 지 무려 27년이 지난 2019년 8월의 일이다. 
 
 항카 호는 만주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중국에서 칭하이 호 다음으로 큰 호수이다. 크기는 약 4300㎢에 달하며 이는 동아시아 전체로 봐도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위치는 동경 132도 25분, 북위 45도 0분으로 북한의 함경북도 위에 있다. 러시아 연해주 지방과 중국 흑룡강성을 분할하는 국경이 이 호수 가운데를 지난다. 

부채꼴 모양의 담수호인 항카 호는 평균 수심은 4.5미터, 최대 수심은 10.6미터이며 수원의 대부분은 아무르 강에서 유입된다. 담수호라는 점 때문에 선사 시대부터 인간의 거주지 가운데 하나로, 근방에서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한다. 퉁구스계 유목민인 숙신족과 한민족의 조상 격인 예맥족과도 관련이 깊으며, 전성기 고조선의 북동쪽 국경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발해 시절엔 주현을 설치하고 다스린 영토의 일부로, 15부의 하나인 동평부에 속했고 이때는‘미타호’로 불렸다. 호수 동쪽에 미주, 서쪽에 타주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잡히는 잉어가 동평부의 특산물이었으니 발해 사람들은 이 잉어를 일본까지 수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 사람이면 중국식 ‘흥개호’나 러시아식 ‘항카호’ 대신 ‘미타호’라는 지명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다시 홍범도로 돌아오면 홍범도의 첫 부인은 이 씨다. 일부 학자는 이 씨 부인의 이름이 옥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뚜렷한 증빙이 발견되기까지는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 씨 부인은.처녀 때 비구니였다. 함남 북청 출신인 그는 일찍이 친정을 떠나 금강산 깊은 산속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에서 승려의 길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24살 홍범도는 금강산 신계사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 있었다. 평양 주둔 조선군 친군서영 제1대대 군인 출신인 홍범도는 제지 수공업자로 일할 때 부당한 대우와 체불임금에 항의해 공장주를 살해한 혐의로 쫓기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금강산 깊은 산속에서 어떤 가슴 설레는 과정을 거쳐 연인이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머잖아 젊은 여승은 임신하기에 이른다. 큰아들 홍양순을 잉태한 것이다. 두 사람은 승복을 벗고 하산하기로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이 정착한 곳은 이씨 부인의 친정이 있는 북청 안산사 노은리 인필골 마을이었다. 북청에서 갑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후치령 고개 바로 아래였다. 그곳에서 부부는 짧으나마 단란한 가정생활을 꾸린다. 아들 둘을 얻었으니 큰아들 양순과 작은아들 용환이다.
 
  1908년 북청에 주둔한 일본군 야마모토 대좌는 ‘홍범도 폭도 무리’들의 귀순공작을 강화키로 하고 홍범도의 늙은 장모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살고 있는 인필골을 급습한다.
  홍범도의 아내와 17살 맏아들 홍양순은 주둔지로 압송되었다. 이 씨 부인은 거센 강압을 받았다. 산중으로 피신한 남편 앞으로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거였다. 아예 문안까지 일러줬다. 저들은 이 씨 부인이 글을 깨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응하지 않으면 모진 고초를 각오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씨 부인은 거절의 뜻을 단호히 표명했다.
 
  “계집이나 사나이나, 영웅호걸이라도 실 끝 같은 목숨이 없어지면 그뿐이다. 내가 설혹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아니 쓴다.”
  이 씨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노년의 홍범도는 <일지>에 적었다. 
 
  이 씨 부인은 혹독한 보복을 당했다. 무지비한 고문이었다. 이씨 부인은 스스로 혀를 끊어 고문에 맞섰다고 한다. 벙어리가 된 그는 갑산 읍내로 이송돼 옥에 갇혔으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30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40살에 아내를 잃은 홍범도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혼자 살았다. 새 아내를 얻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새 아내 이인복을 맞아들인 것은 20년이 지난 61세 노년의 일이었다.

 1929년 홍범도가 새 부인과 함께 사진을 찍은 곳이 러시아 연해주 항카호수인지, 중국 당벽진 쪽 흥개호수인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홍범도는 항카호에도 흥개호에도 있었고 블라디보스톡에도 있었고 크즐오르다에도 있었다. 북만주와 연해주와 카자흐스탄의 모든 곳이 홍범도의 활동무대였다. 나는 오래 전 김세일 선생에게 건넨 것과 같은 야생화 한 다발을 당벽진 쪽 흥개호, 아니 미타호에 띄워놓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4.
  홍범도 장군의 보다 진한 인간적인 체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지>에 투영된 그의 문체이다. 원문 그대로 한 대목을 소개해본다.
 
 “그날 밤으로 도망하여 박말령 영상에 당한즉 해가 산등에 올라오니 일본 놈 세 놈이 나를 붓뜰려고 왓던 놈이 원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몰수히 다 잡앗습니다. 그 총 세대를 아사서 두 대는 따에다 뭇고 철 삼백 개, 그 놈들 먹는 과자, 쌀 둘추어 바랑에 거더넣고  지경산 꼭뚜에 올나 한돈하고 덕원 무달싸에 와서 산속에서 자고 덕원읍시 좌수로 있는 전성준 놈에 집에 야밤에 달려들어 일본돈 팔천사백십원을 달내 가지고 무달싸 어귀에서 전성준 놈을 쏘고 평양도 양덕으로 넘어가서 양덕으로 성천으로 여원으로 단니면서 산간으로 준삼년을 혼자 의병을 하다가 철없고 의포 없고 신발없고 그상하다 못하여 그만 변성명 하엿던 것을 버리고 제 홍범도로 부르면서 함경도 북청 단양리가에서 세방들어 팔년을 농사하여 먹다가 일본놈과 노시야와 전쟁할 때 갑진년에(1904)…. 또 내가 다시 구월 초 팔일에 다시 나섯습니다.”

  나는 이게 판소리의 대본이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평안도 사투리에 묻어있는 토속적 투박함은 물론이고 <일지>를 따라 읽다보면 저절로 신명이 나고 어깨가 들썩거리기 마련이다. 실은 홍범도 장군이 갖고 있었다는 목필책이 그가 직접 쓴 것인지, 아니면 부대원 가운데 글줄이나 쓰는 서기(書記) 비슷한 사람이 홍범도가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아 산중에 은거하던 시간에 틈틈이 구술을 받은 것인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지>의 모든 팩트는 홍범도 자신의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홍범도 장군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지>의 첫 문장을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확연하다.

“1868년 고려 평양 서문안 문열사 앞에서 탄생하여 모친은 칠 일만에 죽고 아버지 품에서 여러분의 유즙(젖 : 필자)을 얻어먹고 자라 초 구세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니 남의 집으로 다니며 머슴살이로 고생하면서 십오 세가 되므로 나이 두 살을 올려 평양 중국의 보단(步段)으로 호병정(胡兵丁) 설(設)할 때 우영(右營) 제 일대대에서 코코수(나팔수:필자)로 사연을 있다가(복무하다가: 필자) 사연을 치고 도망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 종이뜨는 지막 제지소에 와서 종이뜨기를 배워 삼년을 뜨다가 그때는 어느 때인고 하니 병술(丙戌:1886년) 정해(丁亥:1887년)쯤 되었다.”

 그렇다면 <일지>엔 어떤 내용 담겨 있을까. 연구자에 따르면 <일지>에서 홍범도가 자신의 유년과 청∙장년기를 서술하고 있는 분량은 단지 1쪽을 약간 넘고 있다. 이는 전체 분량의 3.5% 비중이다. 그러나 홍범도의 의병항쟁을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약 12쪽 반으로서 전체의 43.9%를 차지한다. 그리고 재기 도모시기의 비중은 3쪽 반으로 전체의 12.3% 정도, 가장 중요한 시기인 간도에서의 독립전쟁 시기는 5쪽 반 분량으로 19.3%이다.

  소련에 온 이후의 만년에 해당하는 시기의 비중은 약 6쪽으로 거의 21%의 비중이다. 집필 비중을 분석해 보면 분량이 가장 많은 부분이 의병투쟁시기로서 전체의 절반에 가깝다.
  결국 우리는 홍범도가 의병투쟁에 관한 부분을 가장 구체적으로, 그리고 상세하게 회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이러한 서술을 초래한 배경에는 어쩌면 태장춘의 요구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궁극적으로 만년의 홍범도가 자신의 생애 가운데 자신 있게, 확실히 기억하고 있던 시기는 의병투쟁기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또한 소련 연해주에서의 노년기에 대한 서술 내용이 두 번째로 많은 이유는 <일지>를 구술한 시기와 근접한 때에 일어났던 사건과 행적을 기억하기 쉬웠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1908년) 5월 초 2일 구름물령(일명 雲波嶺) 넘어오다가 일병 32명이 오는 것을 목잡고 기다리다가 일시에 쏘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다 죽이고 총 30개, 군도 두 개, 탄환 300개, 단총 네 개 빼앗아 가지고 갑산 청지평 싸움에서 의병 11명 죽고 일병 90명을 즉살시켰다”라는 승전 사실에 대한 세세한 기억 등은 독립에 대한 염원이 그만큼 컸음을 우회적으로 반증한다.
 
  한국소설사에서 18~19세기는 한 마디로 소설의 시대라 할 만큼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이야기꾼이 전문적 직업적인 예능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이들은 성격상 대개 강담사(講談師), 강독사(講讀師), 강창사(講唱師)로 구분했다. 이 중 이야기책이나 소설을 청중에게 낭독하던 강독사에 대한 이야기는 조수삼(1762~1847)의 『기이(紀異)』에 실려 있다. 우리가 전기수(傳奇叟)’라고 알고 있는 이야기꾼이 그것이다. 홍범도가 리함덕에게 <일지>를 직접 구술할 때 전기수와 마찬가지로 음성의 고조는 물론 표정의 변화, 구수한 음색이 저절로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일지>의 입말에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국악인은 물론 누구라도 <홍범도 일지>를 판소리 대본으로 삼은 창(唱)을 읊조려 보시라고. <홍범도 일지>는 두 동강 난 한반도에 갇혀 신음하는 민족의 미래를 홍범도의 DNA가 배어있는 중앙아시아까지 연장시킬 소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5.
2019년 4월 21일 카자흐스탄을 국빈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고려인 애국지사 계봉우와 황운정 유해의 고국 송환을 약속한데 이어 홍범도 유해 송환도 추진하겠다고 했으나 현지 고려인들의 존치 여론이 높아 실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홍범도 장군의 묘소는 현재 크즐오르다공동묘지에 있다. 고려인들이 돈을 모아 흉상을 제작하고 비석을 세운 묘소이다. 홍범도는 그만큼 고려인들의 자존심이자 자존감의 상징적 인물이다.

한반도 북쪽 평양 근처에서 태어나 북만주와 연해주를 전전하다가 레닌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은제 권총을 선물로 받은 항일 영웅 홍범도의 DNA가 묻혀있는 땅이 중앙아시아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그의 유해가 남한으로 돌아올 명분은 약하다.

홍범도가 묻힌 그 자리는 그 자신이 온 몸을 다해 밀고 나간 생애의 마지막 지점이자 우리 민족의 육체성이 지구의 배꼽이라할 중앙아시아에 다다른 도저한 상징성이 있다. 굳이 유해송환이라는 아젠다를 꺼내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를 흔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홍범도는 남한에도 북한에도 속하지 않은 세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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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홍범도 장군


【서울=뉴시스】고려인 전기작가 이인섭이 필사한 '홍범도 일지'


【서울=뉴시스】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홍범도' 한 장면


【중국 당벽진=뉴시스】정철훈기자=북만주 당벽진 거리. 중-러 접경지역이어서 러시아풍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당벽진=뉴시스】정철훈기자=북만주 당벽진에서 접근한 항카호수. 홍범도 장군과 그 일행은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이 호수를 건너 중국과 러시아를 오갔다.

 

 

출처; 이회영기념관 개관 2주년·신흥무관학교 개교 113주년 기념 <나는 이은숙이다> 행사 개최 (siminilbo.co.kr)

이회영기념관 개관 2주년·신흥무관학교 개교 113주년 기념 <나는 이은숙이다> 행사 개최

이창훈 기자 / issue@siminilbo.co.kr / 기사승인 : 2023-06-09 10:05:49
(사)우당이회영기념사업회는(이사장 이종걸)은 6월 9일(금) 16시에 ‘이회영기념관 개관 2주년’과 ‘신흥무관학교 개교 113주년’을 맞이하여 독립운동이야기<나는 이은숙이다> 행사를 개최한다.

2021년 신흥무관학교 개교일(6.10)에 맞춰 남산예장공원과 함께 문을 연 후, 약 2만1천여 명의 시민이 다녀갔다.

이회영기념관은 온 집안이 전 재산을 들여 독립운동에 나섰던 우당 이회영과 6형제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지난해 2021년 서울시가 조성하여 (사)우당이회영기념사업회가 위탁 운영 중이다.

상설전시로 이회영이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그린 묵란(墨蘭) 등 이회영과 6형제의 독립운동 여정을 다루고 있으며, 개관 2주년 기념 행사명과 같은 제목의 '나는 이은숙이다' 특별전 또한 진행 중이다. 이회영의 아내이자 동지였던 여성독립운동가 이은숙이 남긴 항일독립운동 기록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 육필원고 등을 비롯하여 이은숙 선생이 단순히 남편의 조력자가 아닌 주체적 존재였음을 밝히는 전시다.

개관 2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는 독립운동이야기 <나는 이은숙이다>행사는 이회영기념관 유튜브 채널에서 6월 9일(금) 16시 부터 약 90분간 생중계된다.

관련 활동으로 ‘이은숙 선생에게 편지쓰기’, ‘개관 2주년 축하메시지 보내기’ 등 비대면 온라인 봉사활동이 진행되며, 이는 1365자원봉사포털을 통해 신청할 수 있다.

당일 방문한 관람객에겐 ‘묵란 책갈피’를 증정한다.
 

이 행사는 여성독립운동가 이은숙 선생의 삶과 그녀가 독립투쟁 일상의 삶을 담담히 기록한 <서간도시종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기억해야 할지 함께 논의해보고자 마련했다.

서울과 서간도, 베이징 등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이은숙 선생은 집요한 일제의 감시에 맞서면서 활동해야 했고, 총에 맞아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국경을 넘을 때는 임신한 몸이었다. 또 그는 침략자와 밀정을 처단하는 다물단 투사의 어머니였다. 서울에서 선생은 낮에는 고무신공장 노동자로 저녁에는 삯바느질로 독립운동 밑천을 마련했다. 정부는 이은숙 선생에게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서간도시종기>는 여성독립운동가 중에서 독립운동 기록을 육필로 남긴 유일한 경우로, 신흥무관학교 성립과 활동 등 독립투쟁사 한 영역을 구체적으로 회복하는데 결정적 이바지를 한 수기다. 장한 영웅담이나 호방한 후일담이 아닌, 독립투쟁 일상의 삶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또한 이은숙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어떤 교육도 받지 않았고 일본말 영향도 달리 받지 않았기에 한국 전통 고유 문체를 구사하고 있어 당대의 생활언어를 알 수 있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회영기념관 특별전 ‘나는 이은숙이다’ 전시 기획을 한 서해성 감독의 진행으로 한국사 길잡이로 활동하고 있는 큰별쌤 최태성 강사, 사회학자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 이회영·이은숙 선생의 손자 이종걸 관장이 이야기꾼으로 참여한다.

이 행사를 기획한 서해성 감독은 "지금까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아내’로 한계를 짓거나 ‘여성’이라는 구실이 따로 있는 양 언급하고 취급한 경우가 많았다. ‘나는 이은숙이다’라는 제목은 이은숙 선생의 삶과 선택이 주체적이었음을 분명히 말하는 뜻이자 여러 여성독립운동가들 또한 새로운 시각에서 온전히 평가 받길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종걸 관장은 “현재 이은숙 선생의 '서간도시종기' 원문은 기념관 홈페이지를 통해 전자책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시민들이 더욱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풀이한 해석본과 함께, 외국인들에게도 소개할 수 있도록 영문으로 번역하는 것도 준비하고 있다" 며 "이는 이은숙·이회영 선생의 삶의 가치를 잊지 않고 널리 전파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고 전했다.

 

 

출처; [책&생각] 무장항일투쟁 산실 신흥무관학교의 기록 (hani.co.kr)

[책&생각] 무장항일투쟁 산실 신흥무관학교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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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23-08-18 17:57 등록 2023-08-18 05:01


신흥무관학교 교관 원병상 회고록
원병상 지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엮음 l 민족문제연구소 l 4만원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웠다. 1911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봉오동·청산리대첩 등 무장항일투쟁의 주축에 섰던 독립군 3500여명을 배출한 핵심 기관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기록을 잘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는 후세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이곳 교관까지 역임한 원병상(1895~1973)은 수기 두 편과 회고록 한 권을 남겨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원병상 회고록’은 유족 원건희(손자)씨가 2014년 민족문제연구소에 기증한 기록을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교주(校註)해 펴낸 책이다. 강원도 평해군 출신 원병상은 항일사상에 호응한 부모와 함께 서간도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4기로 졸업했고, 교관으로 복무하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회고록에는 그 개인뿐 아니라 “무변광야”였던 만주를 벼농사가 가능한 “양전옥토”로 개간해내고, 경신참변 등 만주에까지 뻗친 일제의 폭압, 만보산 사건 등 마적당과 중국 군경의 횡포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갔던 당시 동포들의 치열했던 삶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1945년 일본 패전 뒤 원병상은 진공상태의 만주를 접수한 공산 세력이 민족사상자·토지소유자를 대상으로 벌인 탄압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친일 잔재와 이념 대립으로 혼란했던 해방공간에서 그는 53살 늦은 나이로 육군에 입대했고, 일군 출신들이 요직을 꿰찬 가운데 하급 장교로서 한국전쟁도 치렀다. “민족정기의 상징이었던 (신흥무관학교) 명의까지도 물가고 말살되고 만 것은 천추에 여한”이라 써둔 것이 눈에 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출처; ‘윤봉길 의사 물통폭탄 던졌다’ (hani.co.kr)

‘윤봉길 의사 물통폭탄 던졌다’

17일 순국 75주기 추모식

기자손원제
  • 수정 2007-12-18 18:51 등록 2007-12-18 18:51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순국 75주기 추모식이 19일 오전 11시 서울 효창공원의 윤 의사 묘 앞에서 열린다고 국가보훈처가 18일 밝혔다.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회장 이명박) 주관으로 열리는 추모식은 김정복 보훈처장, 황의선 광복회 부회장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사·헌화·분향 차례로 진행된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윤 의사는 1929년 월진회를 조직해 농민운동에 헌신하다 중국으로 건너가 백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32년 4월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의 수뇌부를 폭사시켰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 체포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12월19일 순국했다.

한편, ‘윤봉길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윤 의사가 홍커우 의거 때 실제 사용한 폭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도시락 폭탄’이 아닌 ‘물통 폭탄’이라고 밝혔다. 윤 의사는 홍커우 공원에 저격용 물통 모양 폭탄과 자결용 도시락 모양 폭탄을 가져갔으며, 물통 폭탄을 던진 뒤 체포됐다고 사업회는 설명했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출처; 이봉창 의사, 일왕에게 수류탄 던져 - 굿모닝충청 (goodmorningcc.com)

이봉창 의사, 일왕에게 수류탄 던져
  •  윤용 시민기자
  •  승인 2024.01.08 09:40

 

[굿모닝충청 윤용 기자] 

출처: 국가보훈부

1월은 조국 독립을 위한 선열들의 의거가 많은 시기다. 김지섭 의거(1월 5일), 이봉창 의거(1월 8일), 김상옥 의거(1월 12일)가 있었다. 빼앗긴 봄을 되찾기 위한 열사들의 겨울은 그만큼 뜨거웠다.

1932년 1월 8일, 92년 전 오늘은 이봉창 의사가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던 날이다. 

이 의사는 처음엔 식민지 차별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서른 즈음에 조국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게 된다.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1930년 10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떠난다.

<백범일지>에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0년 동안 육신의 쾌락을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라며 이 의사가 임시정부를 찾아온 이유가 기록돼 있다.

백범은 1931년 12월 6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일왕 폭살 계획을 보고하고, 13일 이봉창 의사의 ‘제1호 한인애국단 입단식과 선서식’을 연다. 이 의사는 12월 17일 수류탄 2개와 거사 자금(300달러)을 들고 상하이를 떠나 22일 일본 도쿄에 도착한다.

1932년 1월 8일 이 의사는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던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고 만다. 

재판 기록에는 이 의사가 “범인은 언어가 명석하여 일본인과 다름이 없고 태도는 태연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띠고 이런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는 관념은 털끝만큼도 없다.”라고 서술돼 있어 조선인으로서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 의사는 법정에서도 “죽을 각오로 일왕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준비했지만, 폭탄의 위력이 부족해 실패해서 유감이다.”라며 당당하게 진술했다. 

이 의사처럼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뒤로 하고 자신을 희생했다. 이러한 선열들의 헌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가르침을 준다. 지난해 말 군(軍) 교재에 ‘독도는 영토분쟁 중’이라는 표현에 모든 국민이 분개했던 것도 같은 까닭이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9월 30일 선고공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10일만인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유해는 1946년 국내로 봉환돼 서울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출처; [단독]독립운동 사상 최다 8624명 참여 ‘성명회 선언서’ 발견|동아일보 (donga.com)

[단독]독립운동 사상 최다 8624명 참여 ‘성명회 선언서’ 발견

정양환 기자 , 유원모 기자 
입력 2017-11-13 03:00업데이트 2017-11-13 03:00
 
이상설 주도 1910년 작성, 美로 보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성명회 선언서’ 원본. 김광만 PD 제공
“대한국민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다.”

‘헤이그 특사’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사진) 주도로 1910년 세계에 독립 의지를 천명했던 ‘성명회(聲明會) 선언서’ 원본이 107년 만에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석형)는 12일 “지난달 근대사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의 김광만 PD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당시 미국에 보내진 성명회 선언서 전체를 찾았다”며 “기록과 입소문으로만 전해졌던 선언서의 실제 모습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이 선언서는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인 8624명이 서명해 ‘3·1독립선언서’급 가치를 지닌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된 성명회는 이상설과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유인석을 비롯해 이범윤 김학만 등이 함께 뜻을 모은 독립운동단체다. 총 118장의 선언서는 유인석이 성명회장 명의로 친필 사인을 남긴 선언서 6장과 8624명이 자신의 이름을 써넣은 서명록 112장으로 이뤄져 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따로 첨부한 표지 서류엔 ‘1910년 10월 미 국무장관 앞으로 도착한 자료’라는 내용의 짤막한 설명이 붙어 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성명회 선언서는 독립운동 역사의 초창기 사료로 3·1독립선언서나 6·10만세운동 선언서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며 “당시 8000명이 넘게 가담했다는 건 현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지도자를 포함한 민초(民草) 대다수가 한마음으로 참여한 위대한 독립운동이라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정양환 ray@donga.com·유원모 기자

 

 

출처; 24人의 독립투사들, 남북이 함께 기린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선데이 입력 2007.07.29 01:51

24人의 독립투사들, 남북이 함께 기린다 | 중앙일보 (joongang.co.kr)

 
평양 대성산 주작봉 정상에 조성된 혁명 열사릉 전경.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인물 중 간부급 160명이 묻혀 있다. 북한은 일제시기독립운동사를 김일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혁명 열사릉은 그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대표적 상징조작물이다. 평양=김형수 기자

 

양세봉 열사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독립유공자로 기리는 대표적 인물이다. 1920년대와 34년 순국 때까지 남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특히 32년부터는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활동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남한에서는 62년 독립장이 추서됐고, 북한에서는 86년 애국열사릉이 설치되면서 이곳에 안장됐다.

혁명열사릉에 있는 최효일 열사 묘비

 

양세봉 열사처럼 남북한이 함께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기리는 선열이 24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표 참조> 이 같은 사실은 중앙일보 특별취재단이 남한의 독립유공자 명단 1만185명과 북한의 3대 국립묘지인 혁명열사릉, 애국열사릉, 재북인사묘 안장자 명단 883명을 대조해 밝혀냈다.

24명 가운데 일제시대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한 사람이 10명이고, 임정 창립에 참여하거나 자금을 지원한 관련 인물이 2명이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임정 요인 후손들이 추석 성묘차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 명단이 알려졌다. 그러나 24명 전체의 명단과 묘역별 위치가 모두 파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주백 서울대 교수는 “북한 국립묘지를 방문한 학자들의 전언으로 우리 독립유공자가 북한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이 일부 알려져 있으나 상세한 안장 현황은 알려진 바 없다”며 “특히 최효일 열사, 오화영(북한에선 오하영으로 기록)·강제하·허영호 선생이 묻혀 있다는 사실은 처음으로 알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공동 독립유공자 현황

 

이번에 찾아낸 24명 중 남한에 묘소가 있는 사람은 양세봉 열사와 정인보 선생뿐이다. 그러나 두 분의 남쪽 묘소는 가묘다. 양세봉 열사는 부인과 아들이 해방 이후 중국에 있던 무덤을 평양 으로 옮겼고, 납북돼 북한에서 숨진 정인보 선생은 국립현충원에는 위패가, 충북 청원군의 선산에는 가묘가 설치돼 있다. 또 국립현충원 내 무후 선열(후손이 없는 순국선열) 제단에 위패가 모셔진 16명 중 14명이 북한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정인보 선생 포함). 그 밖에 강제하·김상덕·김의한·장현식·최덕신·허영호 선생과 장철호·최윤구·최효일 열사는 남쪽에는 기록만 있고 묘소나 위패 등 추모 시설은 설치돼 있지 않다.

24명 중 최윤구·최효일 열사는 북한에서 최고로 치는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는 특별한 사례다. 혁명열사릉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을 했거나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160명이 묻혀 있는 곳.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 김정숙과 김책 전 부수상, 김일 전 부주석 등 북한의 최고위 간부들도 묻혀 있다.

최윤구 열사는 양세봉 열사가 총사령으로 활동한 조선혁명군에서 30년대 초반 중대장, 제1연대장, 제2사령 등을 역임했다. 최 열사는 양세봉 열사가 순국한 34년 3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김일성 등 북한 정권의 중심 세력들이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했고 38년 12월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했다.

최효일 열사는 북한이 펴낸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28년 김일성의 숙부인 김형권 휘하에서 활동하던 중 30년 일제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32년 처형된 것으로 기록돼 있고 75년 처음 설치된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 산하 부대에서 활동하며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돼 32년 처형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33인의 일원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간부로 활동한 오화영 선생이나 20년대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정의부 등에서 활동한 강제하 선생은 북한 애국열사릉에 각각 ‘반일애국지사’와 ‘애국지사’로 비문이 적혀 있다. 허영호 선생은 부산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했으며 평양의 재북인사묘에 아무런 명칭 없이 안장돼 있다.

남과 북에서 모두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이들 24명은 20년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통합해 29년 만주에서 결성된 국민부와 그 산하 무장단체였던 조선혁명군, 또는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서 독립운동사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면서 앞으로 남북이 함께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남한 역사학계에는 이미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도 독립운동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이것이 2005년의 독립유공 서훈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해 3월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등이 서훈을 받았고 8월에는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1905~38),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사회주의 이론가 한위건 등 47명이 대규모로 독립유공 서훈을 받았다. 지난해 8월에도 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한 이재유(1905~44), 오산세(1907~32) 선생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과 애국장이 각각 추서됐다. 최근 서훈 인물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조선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한 최윤구 열사다.

그는 남한에서는 조선혁명군 활동 경력으로 독립장 서훈을 받았고 북한에서는 조선혁명군이 해체된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해 김일성과 함께 활동한 경력으로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민족주의 계열 무장단체와 사회주의 계열 무장단체에서 모두 활동한 경력으로 인해 논란이 빚어진 흔치 않은 사례다.

이와 관련, 그의 서훈 심사에 참여했던 한 학자는 “동북항일연군에 참여한 경력 때문에 논란이 있었지만 그가 조선혁명군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을 평가해 유공자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또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사회주의 활동을 했더라도 해방 이전으로 한정돼 있고 독립운동의 성격이 강하면 포상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 역사학계도 90년대를 거치면서 과거에는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2005년 완간된 『항일무장투쟁사』 1~9권이 그 같은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 연구서는 남한과 중국·러시아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일부 반영하고 있다. 특히 과거 역사서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상해림시정부’ ‘조선의용군(중국 공산당 산하 8로군과 함께 활동했던 조선인 부대)’ 등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띈다.

독립운동사에 대한 북한 학계의 이런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북한은 일제 시기 독립운동사를 민족주의 계열을 포함한 다양한 갈래의 활동을 배제하고 김일성 전 주석의 활동만을 중심으로 서술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골격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는 노력 가운데 과거에는 철저하게 배제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관심을 끈다.

북한이 중국 각 지역에서 활동했던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를 전면 재평가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외부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고 남한 학계의 주장을 반박함으로써 앞으로 남북 간 토론과 비판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북한의 독립운동사 서술의 변화는 의미가 있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만주 지역의 다양한 항일 무장투쟁 조직들을 통합해 만든 단체. 중국인과 조선인의 합동 부대였다. 김일성·최현·김책·최용건 등 북한 정권 수립의 핵심 세력은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정치·군사간부로 활동했다. 동북항일연군은 40년대 초반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소련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뒤부터는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42년 7월 소련군이 조선인·중국인들을 묶어 새로 부대를 편성한 뒤에는 ‘88여단’으로 불렸다.

특별취재단 강영진·이철희·정용수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자문위원=유영구·정창현

 

 

출처;  [김효순칼럼] 모스크바에서 잠자는 문서들 (hani.co.kr)

[김효순칼럼] 모스크바에서 잠자는 문서들

김효순칼럼

  • 수정 2008-05-27 19:42 등록 2008-05-27 19:42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로부터 ‘난감한’ 선물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출간된 <코민테른과 조선>이라는 자료집이다. 색인 인명약전 등을 포함해서 81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러시아어로 돼 있어 상당한 러시아어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할 수가 없다.

코민테른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도해 만든 국제 공산주의 조직으로 제3인터내셔널로 불리기도 한다. 당시만 해도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빈부격차 확대 등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극심하게 나타나던 때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적극 지원한다는 코민테른의 선전은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호소력이 컸다.

코민테른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해체됐으나 관련 문서들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 문서관으로 옮겨져 오랫동안 햇볕을 보지 못했다. 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코민테른에 관한 연구가 시작돼 나라별로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자료가 간행되고 있다. 자료집을 내려면 문서를 관리하는 ‘러시아국립 사회정치사문서관’과 정식 계약을 맺고 편찬작업을 공동진행해야 한다. 일본 관련 문서들을 수록한 791쪽의 <코민테른과 일본>은 2001년 간행됐다. 와다 교수가 이끄는 일본역사가기금과 문서관이 맺은 협정에 따라 나온 것이다.

<코민테른과 조선>은 일본편보다 6년 늦게 마무리됐다. 자료 수집과 선택, 해제 작성에 러시아와 일본 학자, 그리고 일본 와코대학의 유호종 교수가 관여했다. 1918년부터 41년 사이의 사료 256점이 수록돼 있는데, 대부분이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의 방침, 결정 과정을 보여주는 각종 회의의 기록과 테제 등이 거의 수록돼 있고, 조선인 활동가가 제출한 활동보고, 의견서, 편지 등이 포함돼 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41년 하바롭스크 근방에서 ‘친치천’이란 중국 이름으로 쓴 중국공산당 활동보고서와 그것에 대한 코민테른의 만주 빨치산 운동에 대한 총괄 평가서도 나온다. 와다 교수는 문서로만 보면 코민테른 활동가들 사이에 김일성이 조선인이라는 인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료집에는 이동휘·조동호·김단야 등의 사진이 수록돼 있는데, 초기 한인사회당 결성에 주도적 구실을 한 박진순의 사진이 처음 나온 것도 의미 있다는 것이 와다 교수의 지적이다.

이 자료집에는 20세기 전반부의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사료들이 들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남과 북 어디에서도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좌파 진영의 독립운동을 김일성 계열의 활동으로 일원화한 북한에서 처형된 박헌영의 30년대 활동자료를 들여다볼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자료집 간행에 돈을 댄 쪽은 한철문화재단(이전의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이다. 파친코 사업으로 큰돈을 번 한창우씨가 한국 문화와 한-일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지원한다며 90년 일본에서 세운 재단이다. 초기 사회주의 운동과 코민테른의 관계에 정통한 임경석 교수(성균관대)는 “요즘 분위기에서 이런 자료의 입수 간행에 관심을 보일 정부기관이나 재단이 어디 있겠느냐”며 “대부분의 현대사 연구자들이 자료집 출간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는 만큼 빨리 번역이라도 돼 널리 읽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었다는 남쪽에서 박은식 선생의 <독립운동지혈사>가 국역된 것은 일본보다 한참 뒤였다. 우리 역사를 일본을 통해, 일본보다 늦게 알게 되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김효순 대기자hyoskim@hani.co.kr

 

 

 출처; 연해주는 무장독립투쟁의 기지 - 아시아투데이 (asiatoday.co.kr)

연해주는 무장독립투쟁의 기지

기사승인 2014. 08. 13. 07:11
 
안중근 장군, 연해주 '동의회' 소속으로 단원 12명과 왼손 무명지 끊고 결의
 
블라디보스토크시 전경,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극동의 군사기지며 연해주 지방의 행정중심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사진=최영재

 

 

한민족 독립운동사 논의와 연구에서 상하이(上海)·하와이·북미주가 중심무대로 정설화돼 있지만 사실 그 발원지와 핵심 활동 지역은 러시아 연해주였다. 특히 1910년을 전후해 무장독립운동의 활동 기지는 이곳이었다.

이 지역은 20세기 초반 20만명이 넘는 재외 한민족의 최대 거주 지역이자 민족사회가 형성된 곳이었다. 만주 군벌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당국이 한국 독립운동을 묵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들이 모여들었다.

◇연추의 항일 결사, 동의회

특히 1908년 4월 최재형·이범윤·이위종 등은 연추(현재의 크라스키노)에서 의병 단체인 ‘동의회’를 결성했다. 연추는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던 의병들의 근거지였다.

1909년, 동의회 소속인 안중근 장군은 단원 12명과 함께 비밀결사체 ‘동의 단지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독립의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연추의 카리에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었다. 이들이 남긴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의 혈서가 오늘날까지 또렷하게 남아 있다.

◇성명회와 13도 의군

1910년 의병부대인 13도 의군이 조직됐다. 이들의 목표는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해 일제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13도 의군은 산하에 창의군과 장의군 등 2개 부대를 뒀다. 창의군 총재는 이범윤이 맡고, 장의군 총재는 이남기가 맡았다. 이 부대들은 도총재 유인석의 직접 지휘로 전투 훈련에 매진했다.

13도 의군의 유인석·이범윤·이상설 등은 ‘합병조약’ 무효선언을 위해 성명회를 조직했다. 선언서에는 8624명의 서명을 첨부해 독립의지를 선포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솔빈 강변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이상설 의사 기념비. 11일 오전 국제한민족재단과 아시아투데이의 유라시아 시베리아 횡단 대장정 기행단이 이곳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사진=최영재

 

◇권업회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본부를 둔 ‘권업회’가 창설됐다. 초대 회장은 최재형, 부회장은 홍범도였다. 권업회의 목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군을 양성하고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권업회는 북만주에 ‘대전학교’라는 사관학교를 세우고 1914년에는 마침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한다. 대한광복군정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삼아 설립된 망명정부였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의 이상설·이동휘·이종호·정재관 등을 주축으로 흩어져 있는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정부를 수립한 것이었다.
대한광복군 정부의 초대 대통령에는 이상설, 부통령에는 이동휘가 선출됐다. 그러나 권업회는 제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제와 제휴한 러시아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대한국민의회의 성립과 활동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월 17일 항일독립대회를 갖고 이어 3월 21일 최초로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했다. 블라디보스토크·니콜스크·우수리스크 등 연해주 일대는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다.

연해주에 근거를 둔 독립군단들은 1920년 10월 만주 봉오동과 청산리 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 사상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연해주 지역의 무장독립투쟁은 경신참변(1920년)과 자유시참변(1921년)으로 수 많은 한인과 독립군이 학살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연해주 지역의 무장독립투쟁은 거의 괴멸되고 말았다.
 
 
 

발해의 옛터, 항일무장독립운동의 기지 연해주

기사승인 2014. 08. 13. 07:11
 
1863년 시작된 한인 이주,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이후까지 계속
 
러시아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역/사진=최영재 기자
 
국제한민족재단과 아시아투데이의 유라시아 시베리아 횡단 대장정 기행단(이하 기행단)은 10일 저녁 10시께 시베리아 횡단철도 편으로 우수리스크역에 도착했다.

지난 7일 저녁 9시 20분(현지시각) 이르쿠츠크역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동진하기 시작한 기행단은 8~10일까지 꼬박 나흘 밤낮 동안 3674km를 달려 우수리스크역에 도착했다. 열차는 6시간 이상 연착했다. 그러나 안내역 설명으로는 총연장 9000km가 넘는 시베리아횡단철도에서 이 정도 연착은 예사라고 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런 연착에도 ‘이따 라시아(이것이 러시아다)’라며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트크 일대는 연해주로 불리는 곳으로 고조선에서 고구려·발해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와 긴밀하게 함께 하고 있다.

나흘 밤낮을 좁은 기차 객차 안에서 지새운 기행단은 우수리스크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다음날 11일 오전부터 전세버스편으로 연해주 일대 탐방을 시작했다.

연해주는 조선 후기인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이주하면서 고려인의 이주 역사가 본격 시작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 항일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고려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촌락도 생겼다. 특히 신한촌은 당시 규모가 가장 큰 한인 주거지로 1910년대 항일의 구심이 됐다.
연해주의 한인 거주지역 자료.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기념관의 전시시설을 촬영했다/사진=최영재 기자
 
◇한인 연해주 이주사

제1기(1863년~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의 우호적 태도에 힘입어 한인의 이주가 계속된다.

제2기(1884년~1893년) 일제의 조선침략이 본격화된 시기다. 한인의 이주가 급격히 증가하자 러시아의 제한정책이 시작된다.

제3기(1893년~1910년)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전후 독립운동을 위해 애국지사들의 망명 이주가 크게 늘어났다.

제4기(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일제에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주 초기의 한인 마을들

지신허는 이주 후 처음 만들어진 한인 마을이었다. 대표적인 이주 지역은 바닷가에 위치한 포시에트 촌이었다. 정착한 한인들은 이곳을 ‘목허우’라고 불렀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기 전까지 지신허는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연추(얀치혜)와 더불어 대규모 마을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자취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기념비석이 쓸쓸히 당시 역사를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마을인 개척리. 한인들은 꿈과 희망을 모아 이곳을 일구었다. 그러나 콜레라가 창궐하자 러시아 정부는 시 외곽으로 이들을 강제 이주시킨다.

새로 만들어진 신개척리라고 불렀는데 한인들은 ‘신한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새로운 한인촌’이라는 뜻의 신한촌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존재하면서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근거지였다.

◇연해주 한인촌의 몰락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한 볼셰비키는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제국을 계승한 소비에트 연방을 제국화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1925년에 새롭게 형성된 국제 관계와 소비에트 정책으로 소련의 소수민족, 특히 한인에 대한 정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소련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인들의 독립운동이 연해주를 무대로 전개되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따라 1925년부터 한인들의 항일무장조직이 전면 금지되고 민족운동과 관련된 모든 활동이 통제와 제약을 받게 됐다.

이후 연해주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이후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연해주 땅에 세워진 독립운동의 기지였던 한인사회는 붕괴되고 말았다.
 
 
 

연해주 한인들의 교육과 언론을 통한 구국 운동

기사승인 2014. 08. 13. 07:12
 
한인신문 <대동공보> 이토 히로부미 저격모의, 안중근 의사 대동공보 통신원
 
연해주 한인 신문들의 민족 계몽과 항일운동을 설명한 자료.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 기념관 전시 자료 /사진=최영재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은 교육과 언론을 통해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권업회’와 ‘대한인회 시베리아 지방총회’가 가장 손꼽을 만한 당시 항일조직이다.

이 조직들은 지방회를 조직해 학교를 설립하고 교원을 키웠으며 신문을 발행해 교육계몽에 앞장섰다.

이들이 운영한 학교 중 ‘한민학교’가 시설과 규모가 켰고, 근대 학문과 민족주의 교육을 통해 항일 애국운동의 구심이 됐다.

◇한인 신문의 민족 계몽과 항일 운동

연해주에는 민족과 독립을 기치로 내걸었던 한인 언론들이 다수 있었다. 그 첫 장을 연 신문은 구한말의 해조신문과 대동공보다.

1908년 2월 26일 창간된 해조신문은 연해주 최초의 한인 신문으로 재러 한인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전달돼 민족 의식을 높이고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1908년 11월 18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대동공보는 친러시아적 입장에서 민족계몽과 항일 정신 고취에 힘썼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모의가 이뤄진 곳이 바로 대동공보의 사무실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이 신문의 통신원이었다.

연해주 지역의 항일영웅 59인,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기념관의 자료를 촬영했다/사진=최영재

 

 

그리고 1910년대의 권업신문과 대한인졍교보가 이어진다. 이들은 민족은 의식을 높여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렸다. 특히 신채호·이상설·장도빈이 활약한 권업신문은 105인 사건, 의병 운동 등 항일 이슈를 전하는데 앞장섰다. 권업신문은 권업회 기관지로 1912년 창간돼 1914년 8월까지 약 2년 반 동안 총 126호가 간행됐다.

또 1917년 7월 5일 우스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청구신보(靑邱新報)는 귀화한 한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매주 발행됐다.

이어 한인신보(韓人新報)는 신한촌 민회의 기관지로 1917년 7월 8일 창간, 매주 1회 한글로 발행됐다. 이 신문은 재러 한인의 계몽과 간도 및 러시아 한인 사회의 동향을 자세히 기록해 역사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아울러 동아공산, 붉은 기, 선봉, 연해주어부 등 1917년 러시아 혁명 전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신문도 등장했다.

그 중 1923년에 창간된 선봉은 구소련의 몰락 후 고려일보라는 제호로 지금까지 발행되고 있다. 선봉은 사회주의 계열의 신문으로 창간 무렵에는 ‘3월 1일’이라는 상징적인 이름으로 발행되다가 4호부터 선봉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이 신문은 1937년 강제 이주 직전까지 매주 1~2회씩 발행됐다.
 

 

 

출처;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 서울신문 (seoul.co.kr)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입력 :2019-10-14 17:38ㅣ 수정 : 2019-10-15 16:34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13> 압록강 넘어와 일제 응징한 독립군사령관 오동진 선생

▲ 오동진 선생

 
“그분을 상면하니 저런 분이 어찌 왜놈의 군인과 맞서 선두 지휘를 하시며 혈전을 하셨나 할 정도로 외모가 잘생기셨고 그 풍채가 관후 유덕하시며 인자한 풍기가 주위 사람에게 호감을 주실 뿐 아니라 인정이 철철 넘쳐 흐른다. 그분이 무기형을 받고 마포로 수감된 후 왜놈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나 불허하므로 단식투쟁을 선포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처음 15일간은 물도 한 잔 안 먹었다. 소장이 병동에다 수감하고 왜놈 간수에게 감시를 하게 하고 조선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매일 변기를 검사하였다. 물 한 모금도 안 먹었으니 소변인들 나올 리가 없었다.”

독립운동가 이규창(이회영의 아들)은 회고록에서 서울 마포형무소(경성감옥)에서 같이 수감 생활을 한 오동진 선생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계의 3대 맹장으로 평가받는 오동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건국훈장 다섯 가지 가운데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모두 30명인데 오동진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독립운동사에서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에 필적할 만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변변한 연구 논문 한 편 없다. 옥중에서 선생은 일제에 저항해 여러 번 단식투쟁을 했다. 마포형무소에서 한 단식 기간은 무려 48일로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악랄한 일본인 형무소장도 그런 선생에게는 예를 갖추고 인사를 했으며 ‘가미사마’(神)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 659에서 태어난 선생은 생후 반년 만에 생모를 잃고 후모(後母) 백씨의 손에 자랐다. 어릴 때부터 온후하고 정의감이 남다르게 강했던 선생은 기쁨과 슬픔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19세에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선생은 고향에 일신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 서울 국립현충원에 모셔져 있는 선생의 위패.

 
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선생의 인생 행로를 바꾸었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3월 18일 중국 관전현 안자구(安子溝)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평생 온몸을 내던진 선생의 무장독립투쟁이 시작됐다. 선생은 비밀결사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하는 한편 의용대를 편성해 군자금을 모금했다. 이듬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에 이탁을 파견해 광복군총영을 조직했는데 선생은 총영장(總營長)이 됐다.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에서 장총 240여정과 탄약을 입수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마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상원의원 일행이 1920년 8월 14일 서울에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총영은 결사대원을 평양·신의주·선천·서울로 보내어 미 의원단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파괴 공작을 펴 이목을 끌기로 했다. 안경신 일행은 안주경찰서의 일제 경찰과 친일 조선인 경찰을 사살했으며 평양의 경찰서 신축 건물을 폭파했다. 신의주 철도호텔에 폭탄을 투척했고 선천경찰서도 파괴했다. 이 사건 이후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느라 혈안이 됐다.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의 동삼성(東三省) 독립운동단체 통합 제안으로 발족한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이 돼 독립군을 지휘하며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4년에는 대한통의부 와해 후 새로 통합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출범했는데 선생은 군사위원장과 총사령을 겸임했다.

선생이 이끌던 무장 독립군은 국내에 침투해 일제와 싸워 큰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군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며 압록강 일대 삭주, 벽동, 후창, 초산, 무산 등의 경찰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했다. 독립군 결사대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일제 평북경찰부의 통계에 따르면 선생은 1927년까지 부하 1만 4149명을 지휘해 일제 관공서를 143회 습격하고, 일제 관리 149명과 밀정 765명을 살상했다.

▲ 1935년 무렵 서울 공덕동 경의선 철교에서 바라본 마포로. 전찻길이 있는 도로의 오른쪽 먼 곳에 마포형무소가 있다. 왼쪽 멀리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이 겹쳐서 보인다(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그러나 무장 항쟁을 이끌던 선생은 밀정의 덫에 걸려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독립군 부하들의 양식 조달을 위해 지린에 농업공사를 만들었는데 운영난으로 그와 부하들은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이를 본 옛 동지 김종원이 선생에게 “삼성(三成) 금광주인 최창학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을 믿은 선생은 1927년 12월 16일 창춘 시내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일제가 파 놓은 함정이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변신한 김에게 유인당한 선생은 잠복해 있던 신의주 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김덕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취조에 자신이 지휘한 무장 투쟁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고문을 당하면서도 부하들의 이름은 발설하지 않았다. 선생의 활동만큼 일제가 붙인 죄목은 방대했고 수사·재판 기록은 쌓아두었을 때 높이가 5m가 넘어 3·1운동 이후의 만주 독립운동사와 같았다.

선생은 광인(狂人) 행세를 하고 1929년 11월부터 33일이나 단식을 하는 등 재판에 협조하지 않았다. 또 “한번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나 개인의 집안일을 돌보고 걱정하고 그리워할 수는 없다”며 아내는 물론 어떤 면회도 거절했다. 부인과 아들은 옥 밖에서 통곡을 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1928년 4월에는 부하 2명이 선생을 구하려고 경찰서로 잠입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 선생이 마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1939년에 작성된 수형카드.

 
재판이 열린 신의주 지방법원 법정에는 선생의 모습을 보려는 방청객들이 쇄도했다. 선생은 그들 앞에서 큰 소리로 “독립만세”라고 외치거나 노래를 불렀다. 또 “하느님의 명령”이라면서 재판을 거부했다. 선생의 광적인 행동은 일부러 미친 척함으로써 일제와 일인(日人)의 재판에 저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인 의사는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였다. 하지만 선생은 정신을 차려서는 “내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기에 징역살이를 하며 또한 설혹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조선 사람이니까 너희 일본놈의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32년 3월 9일 선생은 구형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 선고도 무기징역이었다. 선생은 상고를 포기했으며 장기수를 수감하던 마포형무소로 이감됐다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던 공주형무소로 다시 옮겨졌다. 한 달이 넘는 단식도 이겨냈던 선생은 17년이 넘는 세월의 모진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광복을 1년도 채 남겨 놓지 않은 그해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55세였다.

선생을 체포하고 옥사하게 한 김덕기는 노덕술, 하판락과 함께 조선인 3대 악질 형사였다. 김은 16년 동안 일제 경찰로 일했고 평북경찰부 고등형사과장 자리에 올라 수많은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그가 검거해 송치한 독립군이 1000명이 넘었고 그중 20%가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광복 후 김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반민족 행위자로서는 처음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반민특위 해체로 감형된 뒤 6·25전쟁 중에 횡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 충남 공주 공산성 주차장에 있는 선생의 추모비.

 
오동진이 숨을 거둔 땅 충남 공주의 공산성 주차장 한쪽에 선생의 추모비가 덩그렇게 서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는 순국선열 중 유해를 찾지 못한 130분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데 선생의 위패도 있다. 선생의 묘소가 없는 것은 아니고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다.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한 선생의 유해가 왜 북한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선생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린 나이에 만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부인의 행적도 알 길이 없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출처;

서울신문 검색 (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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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대만서 떨친 23세 청년의 항일투쟁이역만리 대만에서 일왕의 장인이자 육군대장을 척살(刺殺)하려 했던 독립운동가다..... 고집불통이라 평판을 듣 풍이었다고 한다.....독립운..2020. 09. 08 (화) | 서울신문

몽골에 ‘항일 병원’ 개원… 독립운동자금·의열단 지원한 애국지사여동생 김순애 동행했데 김순애 후일 이태준과 몽골로 함께 간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결혼한다.....독립운동가들이 묵기도 한 연락처 겸 거점이었다..2020. 08. 11 (화) | 서울신문

독립운동 좌우통합 앞장… 의회정치 주춧돌 놓은 ‘임정의 산파’상하이임시정부 논의 끝에 한성정부를 인정하지 않 결론을 내렸다...‘통분과 절망’이라 글을 독립신문에 실어 새 길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2020. 07. 14 (화) | 서울신문

신흥무관학교 재원 조달, 독립군 양성… 만주 독립운동의 ‘숨은 공신’.. 객주업에 종사했 독립군의 연..3·1운동 이후 일본군들은 1920년 간도로 출병해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체포·학살하 만행을 저질렀다...2020. 06. 16 (화) | 서울신문

3·1만세운동·일제 만행, 사진·글로 전 세계에 알린 ‘34번째 민족대표’스코필드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에 앞서 잊어서 안 될 독립운동가다..... 찍으려고 일본인이 운영하 과자점에 들어갔다..2020. 05. 19 (화) | 서울신문

목숨 걸고 광복군에 무기 공급… 항일투쟁 중 사료 모아 독립사 집필..독립단에서 활약하고 독립신문 사장과 참의부 참.. 독립운동가들이 반발해서 이듬해 독립운동사 편찬자인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도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2020. 04. 21 (화) | 서울신문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마적은 밤낮을 리지 않고 민를 습격해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납치했다... 이 전투 시베리아 내전에서 장 위대한 전투라 극찬을 받다...2020. 03. 24 (화) | 서울신문

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 3·1만세 시위… 평생 독립 위해 싸운 ‘열사’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 3·1만세 시위… 평생 독립 위해 싸운 ..“열사 평생 독립운동을 했고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원”이라면서 ..2020. 02. 25 (화) | 서울신문

 

美서 독립군 지휘관 양성… 변절 누명 썼던 ‘이승만의 정적’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 자금을 마련할 목적이었다.●작년 .. 그 후에 누 시신을 거뒀 알 수 없고 묘소도 없다”고 말했다. ..2020. 01. 28 (화) | 서울신문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정의부, 북만주에 신민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족을 살해하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2019. 12. 24 (화) | 서울신문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정의부, 북만주에 신민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족을 살해하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2019. 12. 24 (화) | 서울신문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 데.. 일제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에 줄지어 오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 등 조문을 방해했다. ..2019. 11. 19 (화) | 서울신문

땅 195만평 등 재산 뺏기고… 후손들은 가난의 대물림“무슨 놈의 애국지사 일본 사람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 동포를 죽이 애국투사 있겠는가..... 안중근 의사 등의 독립..2019. 11. 19 (화) | 서울신문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 데.. 일제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에 줄지어 오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 등 조문을 방해했다. ..2019. 11. 19 (화) | 서울신문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계의 3대 맹장으로 평 오동진을 아 사람은 드물다..... 검거해 송치한 독립군이 1000명이 넘었고 ..2019. 10. 15 (화) | 서울신문

‘남편을 스승처럼’… 빈곤과 싸우며 독립운동 헌신한 사대부 집 여인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 남편을 스승처럼 극진히 섬겼다..“선생님 진지 쌀을 사다 해 드리고 우리는 짜도미 밥도 좋으니 그것을 먹겠소”라고 말했다. ..2019. 09. 10 (화) | 서울신문

명동성당 앞에서 비수로 거사… 공범 묻자 “2000만 동포가 도왔다”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독립운동가 정도라도 알고 있 사람이 드물다... 홍살문은 나무 삭아 홍살이 떨어져 뒹굴고 있고 마당에 잡초 무성..2019. 08. 06 (화) | 서울신문

순종 조문 온 총독 노렸던 ‘금호문 의거’… 6·10 만세 자극제로.. 사망했고 총독으로 오인받은 사토 중상..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 것만은  알고 있다...2019. 07. 02 (화) | 서울신문

 

여성해방 진두지휘, 6·10만세운동 주도…파란만장했던 ‘최고 미인’여성해방운동가.” 주세죽의 일생은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이다.....독립운동과 사회.. 그러나 아직도 복권되지 못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많다...2019. 05. 28 (화) | 서울신문

“광복 위해 죽는 날까지 싸우겠다”… 임정 자금 대고 발해농장 개척백산의 조국독립 방략은 무력 저항보다 실력 양성, 계몽운동이었다. ..“국민을 교육하 일이 급선무인데 우리가 난해서 어렵습니다.......2019. 04. 23 (화) | 서울신문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독립운동을 돕던 그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모의한 것은 당연했다..... ..“우리가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죄 는가”라고 부르짖었다...2019. 04. 02 (화) | 서울신문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김 의사 두루마리로 된 독립선언문을 펴 낭독했고 유관순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독립을 찾겠다고 만세를 부르 것도 죄 되느냐”고 울부짖..2019. 02. 12 (화) | 서울신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부산의 윤봉길’[손성진의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과 싱포르를 오며 무..2018. 12. 25 (화) | 서울신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왼팔 잘린 채 오른팔로 든 태극기…‘남도의 유관순’ 초인적 항일[손성진의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왼팔 ..2018. 11. 20 (화) | 서울신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서간도 독립운동 선구자…반일 군사항전 이끌었던 거목[손성진의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서간도 독립운동 선구자…반일 군사항전 이끌었던 거목 ....독립운동가의 생로서 관리 상태 좋지 않았다...2018. 10. 16 (화) | 서울신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손성진의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여성 항일투쟁의 선봉… 김원봉만큼 조국 사랑했던 그녀 ....독립운동가의 묘소로 너무 초라했다.....가는..2018. 09. 04 (화) | 서울신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만주로 러시아로 쫓겨난 ‘독립운동 일가’ 후손들은 대한민국 국적 회복 퇴짜 맞아[손성진의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만주로 러시아로 쫓겨난 ....독립운동 일..2018. 08. 07 (화) | 서울신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손성진의 우리가  모르는 독립운동가]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1908년 10월 21일 정오..... 우리나라를 ..2018. 08. 07 (화) | 서울신문

 

 

 

 

[한민족 시원, 만주] 시대와 함께 한 조선의 청년(1)

[역사특강] 신주백, 항일운동사(#5-1)

https://tv.kakao.com/v/52498819

 

출처; 한겨레tv

http://www.hanitv.com/index.php?category=10386&document_srl=12829&page=1

 

 

[한민족 시원, 만주] 시대와 함께 한 조선의 청년(2)

[역사특강] 신주백, 만주 항일운동사편(#5-2)

 

 

출처; 한겨레tv

http://www.hanitv.com/index.php?category=10386&document_srl=13261&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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