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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6) - 이순신장군 본문

남국/조선

조선(6) - 이순신장군

대야발 2021. 7. 16. 17:46

 

 

 

서울시, 북-러와 '북방의 이순신' 흔적 찾는다

권영은2019. 12. 8. 15:57
남북 관계 해빙 역할도 주목
이순신장군 북방 유적 발굴지역. 그래픽=송정근 기자

 

서울시가 북한, 러시아와 함께 이순신 장군 북방유적 발굴에 나선다. ‘해전의 신’으로 불리는 이순신 장군은 녹둔도 둔전관 시절 막강한 여진족을 물리칠 만큼 육지 전투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이 장군의 첫 북방유적 발굴이 경색된 남북 관계 국면에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울시는 민간단체인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이하 역협)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러시아 협조를 얻어 이순신 장군이 활약한 북방 유적지에 대한 남북 동시 발굴에 최초로 나선다고 8일 밝혔다. 해당 지역은 현재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 하산군(옛 녹둔도)과 북한 내 함경북도 나선시 일대다.

 

이번 발굴은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조명한다는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뜻 깊은 한편 러시아와 남북을 철도로 잇는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배후 기반 조성에도 큰 진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남북관계 개선 시 ‘경협 재개 1호 사업’으로 꼽힌다.

서울시 주도로 이뤄지는 이번 발굴은 러시아가 남북 사이에서 다리를 놓으면서 지난 8월 가시화됐다. 이순신 장군의 유적 발굴로 민족 정기와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공감대가 남북간 이뤄졌다는 게 서울시 측 설명이다. 북측에서는 우리 문화재청과 같은 역할을 하는 민족유산보호지도국이, 러시아에서는 극동연방대학과 공공기관인 러시아군사역사협회가 참여한다.

다만 현재 남북 교류가 답보 상태에 놓여있는 상황을 감안해 ‘한러 분과’와 ‘북러 분과’로 구분해 진행한다. 발굴은 공동 추진하되 남북이 직접 만나지는 않으면서 한국과 러시아, 북한과 러시아가 구역을 나눠 발굴하는 식이다.

발굴 작업은 내년 3월 옛 녹둔도 일대부터 시작한다. 북한 영토 내 나선시 일대 발굴은 그 이후 단계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출입 허가를 받아 녹둔도 발굴부터 먼저 시작한다”며 “나선시의 경우 남북 정세가 좋아져 동시에 발굴을 진행하면 좋겠지만 일단 녹둔도 다음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선시에는 1587년 조산보(나선시)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을 물리치고 세운 공적비(‘승전대비’)와 이순신 사령부가 있던 조산진성이 현존한다. 옛 녹둔도 지역에도 전투 현장인 녹둔토성이 존재한다는 기록이 여러 고문서에 남아있다.

발굴 조사를 위한 준비 단계로 남북과 러시아는 사전 조사와 현장답사, 국제학술회의를 모두 마쳤다. 이달 1일과 6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러시아 측은 지난해와 올해 녹둔도 사전 조사에서 발굴한 조선 시대 백자 조각 등 출토 유물들을 전시했다. 남측은 출토 유물을 3차원으로 스캔해 내년 발굴조사 착수 전까지 국내 조선 시대 유물들과 비교 분석하기로 했다.

 

시는 이번 녹둔도 유적 발굴 사업을 위해 역협에 총 8억4,000만원을 지원한다. 전액 250억원 규모로 조성된 남북교류협력기금에서 충당한다.

황방열 시 남북협력추진단장은 “이순신 장군의 북방유적 조사를 위한 국제학술회의가 남ㆍ북ㆍ러 참여로 개최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며 “대내외 정세가 개선돼 빠른 시일 내 남북이 공동으로 나선과 녹둔도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발굴조사를 추진하는 날이 오길 희망한다”고 말했다.(1)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이순신 장군 승전지 순례길…꼭 찾고 싶은 'K-순례길'로 만든다

경남CBS 최호영 기자2024. 8. 9. 08:33
승전지 순례길 12개 테마 노선 지정·백의종군길 관광명소화
이순신 장군 승전지 순례길 관광상품. 경남도청 제공


경상남도가 이순신 장군 승전지 순례길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K-순례길'로 만든다.

이를 위해 도는 지난해 11월부터 이순신 장군 승전지 순례길 조성 개발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을 진행 중이라고 9일 밝혔다.

순례길의 기본구상과 개발계획, 테마순례길 노선, 관광 확충과 상품화 방안 등을 수립하고자 (사)한국관광개발연구원이 맡아 수행한다.

 

이번 용역은 '위대한 영웅'이 지켜낸 '위대한 자연'에서 '위대한 경험'을 체험하도록 승전지 주변 관광 자원을 개발해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K-순례길'로 만드는 게 목표다.

창원·통영 등 6개 시군의 순례길로 지정될 12개 테마 노선을 문화체육관광부의 코리아 둘레길(남파랑길)과 연결해 챌린지 순례길로 활용한다.

또, 내륙의 진주·하동 등 4개 시군에 걸친 백의종군길은 장군이 유숙했던 장소를 중심으로 명소화한다.

테마 노선은 지역 마을 통과, 승전지 중심의 핵심 관광자원 연결, 대중교통 이용 가능, 주차 공간 활용 가능한 시종점, 다양한 걷기 난이도 등을 고려해 지정한다.

이와 함께 이순신 장군 승전지 순례길을 브랜드화한다.

BI(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자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25개 공모작을 신청받았다. 4100여 명의 지역 주민·공무원·전문가 등의 의견을 수렴해 후보군을 선정했고, 이를 전남·부산과 협의할 예정이다.

한편, 도는 남해안 관광 1호 사업으로 '이순신 장군 승전지 순례길 프로젝트'를 전남·부산과 협력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중 이순신 순례길을 제주 올레길,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국내외 대표적인 순례길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순신 장군은 영국 넬슨 제독을 능가하는 세계 해전사에 손꼽는 명장으로, 남해안은 충무공이 7년 동안 23전 23승의 무패 신화를 만든 곳이다.

경남에는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한산대첩과 노량해전의 역사가 있고, 부산의 부산포해전, 전남의 명량해전 등 이순신 장군의 얼이 서려 있는 승전지 순례길은 경남·부산·전남을 잇는 대표적 협력 과제로 남해안 관광 대표성이 높다.

경남도 신대호 균형발전본부장은 "이순신 장군 승전지 순례길은 걷기 여행 사업으로 생활인구 유입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모두 충족하는 사업"이라며 "순례길을 남해안의 공통된 브랜드로 구축하고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만들겠다"고 말했다.(2)

경남CBS 최호영 기자 isaac0421@cbs.co.kr

Copyright © 노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순신 장군 태어난 서울 중구에 '이순신 기념관' 조성…2027년 개관

이재은 기자2024. 6. 11. 16:51
서울시, 459억 들여 7600㎡ 규모로 건립
남산골한옥마을로 결정…생가터와 800m
[서울=뉴시스] 김선웅 기자 = 지난 4월1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 관계자들이 봄을 맞아 이순신장군 동상을 세척하고 있다. 2024.04.17. mangusta@newsis.com

 

[서울=뉴시스] 이재은 기자 = 서울시가 중구 남산골한옥마을에 이순신 기념관을 조성한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고 유년기를 보낸 서울 중구에 건립하는 첫 공식 기념관이다.

11일 서울시에 따르면 시는 남산골 한옥마을 내 소나무 숲 대지 7100㎡에 이순신 기념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산은 총 459억원을 소요하고, 지하 1층∼지상 2층, 연면적 7600㎡ 규모를 짓는다.

시는 그동안 이순신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다. 중구 인현동 생가터, 남산골한옥마을, 남산청사(중부공원 녹지사업소), 소방재난본부청사, 종로구 세종로 공원용지와 옛 기상청 부지 등 후보지 6곳에 대해 타당성 조사를 한 결과, 남산골한옥마을로 최종 결정했다.

시유지인데다 생가터와 800m 정도 떨어진 인근인데다 남산골한옥마을 전체 터가 6만3159㎡로, 개발 가능한 공간이 충분하고 접근성도 좋다는 이유다.

시는 행안부 중앙 투자심사, 시의회 의결, 설계 공모 등을 거쳐 2026년 착공해 2027년에 개관할 예정이다.(3)

☞공감언론 뉴시스 lj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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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이순신 장군 가장 '존경'했다…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은 [한국갤럽]

한지혜2024. 6. 12. 20:11
2024년 한국갤럽 조사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 순위. 사진 한국갤럽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은 이순신 장군,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12일 나왔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이 지난 3월 22일부터 4월 5일까지 전국(제주 제외) 만 13세 이상 1777명을 대상으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과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이라는 주제로 조사를 진행했다.

먼저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주제의 조사 결과에선 '이순신 장군'이 14%로 1위를 차지했다. 이순신 장군은 지난 2014년, 2019년 갤럽 조사에 이어 2024년에도 1위를 기록했다.

 

2위는 조선조 4대 임금 '세종대왕'(10%), 그 뒤로 '박정희 전 대통령'(7%), '노무현 전 대통령'(4.5%), '김대중 전 대통령'(4.4%) 등 순이었다.

10위 권 중 기업인은 한 명(정주영 현대그룹 설립자), 독립운동가가 세 명(김구, 안중근, 유관순)으로 집계됐다.

특히 이번 조사결과에서 '부모님'(4.3%)이라는 답변이 처음으로 7위에 오른 점이 눈길을 끈다.

이외 1% 이상 응답한 존경하는 인물은 전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2.9%), '신사임당'(2.1%), 전 UN사무총장 '반기문'(1.6%), 19대 대통령 '문재인',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이상 1.1%),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1.0%) 등이다.

2024년 한국갤럽 조사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 순위. 사진 한국갤럽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이라는 주제로 진행한 여론 조사 결과에선 노 전 대통령(31%)이 가장 많이 꼽혔다. 그 뒤로 박정희 전 대통령(24%), 김대중 전 대통령(15%) 순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9%, 윤석열 대통령은 2.9%, 이승만 전 대통령은 2.7%, 박근혜 전 대통령은 2.4%, 이명박 전 대통령은 1.6%, 김영삼 전 대통령은 1.2%, 노태우 전 대통령은 0.4%로 나타났다. 응답자 가운데 9.8%는 특별히 좋아하는 대통령이 없다고 답했다.

연령별로 보면 20~50대의 40% 안팎이 노 전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꼽았지만, 60대 이상에서는 49%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가장 좋아한다고 답했다.

이번 조사는 층화 집락 확률 비례 표본 추출 방식을 사용, 면접조사원 인터뷰 방식(CAPI)으로 진행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3%포인트, 응답률은 27.7%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4)

한지혜 기자 han.jeehye@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드론으로 내려다보듯 입체적 작전, 백전불패 신화 이뤄

2024. 4. 20. 00:41

윤동한의 ‘충무공 경영학’ ④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속 학익진의 한 장면. 이순신 장군은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지상전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해전에 처음 적용, 일본 수군을 대파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이순신은 수군 3대첩(한산대첩·명량대첩·노량대첩)에서 전대미문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노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혼을 담아 출전한 순국 장면이라 다시 다루기로 하고, 이번 글에서는 한산대첩과 명량대첩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순신이 ‘무패 신화’를 어떻게 펼칠 수 있었는지 그 배경과 승리 요인을 분석해 보자.

흔히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23전 23승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학자마다 다르고 어떻게 헤아리는가에 따라 주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제장명 교수(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는 “임진왜란 시기 해전 횟수는 총 47회이며, 이중 이순신이 참가한 해전은 43회”라고 밝히고 있다. 어쨌거나 이 43회 전투에서 이순신은 패전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점이 놀라운 것이다.

 

임진왜란 전체를 볼 때 이순신이 참여한 전투 중 조선·명나라·일본 삼국 전황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해전은 순서상으로 한산해전, 명량해전, 그리고 노량해전이다. 노량해전은 다음에 다루기로 했으니 한산해전과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전투 경영 능력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학자마다 분석이 다르지만, 필자는 전투현장과 주변 환경을 바라보는 장군의 경영적 시각에 승전의 가장 큰 요인이 담겨있다고 본다. 이름하여 ‘bird’s-eye view(조감도·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전경) 전략’이다.

이순신 장군은 수륙을 통괄해 전황을 살필 수 있는 예리한 시각을 가진 리더였다. 그것도 평면적이 아니라 조감도적인 아주 특별한 시각을 가졌다. 조감도(鳥瞰圖) 경영전략은 한 마디로 입체적 전략전술이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입체적인 조망과 분석 대비가 가능한 것이 승리 요인의 하나라는 것이다. bird’s-eye view는 주로 건축·미술·항공우주 분야 등에 쓰는 단어지만 한 차원 높은 곳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 바라본다는 비유로도 쓰인다.

 

[한산대첩] 새의 눈으로 적 움직임 꿰뚫어

이순신은 늘 당면한 문제를 눈앞에서 즉시 해결하려 하기보다 더 새롭고 더 높은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육지에선 파죽지세로 일본군이 승리하며 올라왔지만 해전에선 달랐다. 조선 수군은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에서의 승리를 시작으로 그해 6월 7일 율포해전까지 모두 일곱 차례 해전에서 일본수군에 완승을 거두었다. 이에 일본 수군은 전선 73척을 동원해 조선 수군과의 결전을 시도했다.

그 사이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은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군과 7월 4일 좌수영에서 합류하고 남해의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 합류한다. 경상도 전라도의 합동 함대가 결성된 것이다. 조선 함대의 전선은 총 58척이었는데, 이중 거북선 2척도 참전했다. 7월 7일 동풍으로 항해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 무렵 당포에 이르렀다. 그때 미륵도의 목동 김천손이 ‘일본군선 70여 척이 오후 2시쯤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전쟁은 곧 정보전이다.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7월 8일 아침 일찍 일본함대가 있다는 곳으로 출발해 견내량 근처 바다에 이르러 일본의 척후선을 발견했다. 이들을 추격하자 과연 대소 73척의 함대가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견내량은 경남 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다.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이순신은 이곳에선 수심이 낮고 암초가 많아 무거운 판옥선으로 전투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육지도 가까워 일본 수군이 상륙해버리면 공략이 어렵기에 전선 5~6척을 투입해 짐짓 패한 척 물러 나오라고 지시했다. 유인작전에 걸려든 일본군이 돛을 펴고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일시에 선회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형성, 일본 수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학익진은 육전에서는 심심찮게 사용되었는데 이순신이 수군에 적용해 승전을 이끌어낸 것이다. 거북선이 앞장서고 여러 총통을 발사, 선봉에 선 2~3척을 격파하자 일본 수군은 주춤 물러나려 했다. 조선 수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시에 포위 공격하여 격멸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 등 59척이 격침 또는 나포됐고 나머지 14척 만이 겨우 돌아갔다. 이 해전에서 일본 수군은 전선과 병사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반면 조선 수군은 단 1척도 잃지 않았다. 완승이었다. 이후 일본 수군은 포구에 깊숙이 박혀 외해로 나오지 않는 전략을 구사했다. 나아가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의 야욕이 꺾이며 북진 전략과 명나라 침공의 꿈 자체가 실패로 돌아갔다.

 

한산 전투는 실전에 앞서 섬과 육지를 연결하고 물때와 조류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이순신에게 있었기에 가능했다. 왜군을 추격하되 무조건 죽이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육지로 올라간 적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예측하고 그들의 동선을 수륙 양면에서 고려했다. 함상의 장수로서 이 전투 상황을 드론의 카메라처럼 내려다보듯 살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경이롭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지도가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난중일기 1595년 8월 25일 기록을 보면 이미 이순신은 지도를 보고 적정을 살피는 데 익숙했다.

“25일 맑았다. 일찍 식사를 한 뒤, 체찰(이원익)과 부사(부체찰사 김륵), 종사관(남이공)이 함께 내가 탄 배에 탔다. 아침 8시에 배를 띄우고 같이 탔다. 함께 서서 크고 작은 섬과 진(鎭)이 설치된 곳, 진을 합칠 곳, 맞붙어 싸웠던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내내 논의하며 이야기했다. 곡포는 평산포로 합치고, 상주포는 미조항으로 합치고, 적량은 삼천으로 합치고...(생략)”

 

[명량대첩] 바둑 포석처럼 맥점 장악해 완승

 
그래픽=김이랑 기자 kim.yirang@joins.com
 
지도를 보며 전투 현장의 유불리를 이원익과 함께 고민하던 장면이다.

1597년 9월 16일 이른 아침에 망군이 보고하기를 ‘수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격해 온다’고 했다. 이에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군령을 하달한 후 정박해 있던 배들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 이순신은 배설이 남긴 12척을 포함해 13척의 전선으로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기다렸다.

명량해협의 폭은 가장 좁은 부분이 293m, 사리(大潮) 때의 유속이 11.5노트, 수심은 19m다. 이 점을 사전에 파악해 둔 이가 바로 이순신이다. 그는 1597년 9월 16일 어란포(於蘭浦)를 출발한 왜선 133척을 맞아 단 13척의 전선으로 목숨을 건 전투를 벌여야 했다. 이날 전투에서 이순신은 30여 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적의 함대를 물러나게 한 기적의 승전을 거두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세력은 전선 13척에 초탐선 32척 정도. 후방에 교란작전으로 피난선 100여 척을 배치한 것이 신묘한 계책이었다. 이순신은 13척의 전선 중 12척을 명량해협을 가로질러 세워놓고 자신은 맨 앞에 나서 적의 공포를 자극했다. 최선봉에 선 이순신은 솔선수범 목숨을 건 전투를 하며 130여 척의 일본 수군과 맞붙었던 것이다.

전투가 치열해진 상황에서 일본군 장수 한 명이 바다에 빠졌다. 그를 건져 올려 효수하여 적에게 들이밀자 일본 수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마침내 오후 1시 30분경에는 조류가 남동류로 바뀌면서 조류가 최강류로 흘렀다. 북풍도 강하게 불어와 조선 수군에 한층 유리하게 전개됐고 마침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전선은 1척도 침몰되지 않은 완승이었다.

명량 앞바다의 승전으로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이 한강유역으로 침입하는 길목을 차단했고, 해전의 기세를 꺾어 전쟁을 유리한 국면으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이순신은 전쟁의 판세를 읽는 눈을 갖고 있어 불리한 전세 속에서도 지형과 물길을 이용해 남해 제해권을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무릇 전쟁의 승리는 치열한 준비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전투현장을 설계하면서 경영학에서 개념설계를 하듯, 바둑판에서 포석하듯 적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국면을 끌어내기 위해 섬과 육지의 지형을 숙지하고 아군을 어떻게 배치하며 화력을 어느 쪽으로 집중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정탐을 세워 적정을 파악하고 물길과 바람을 이용, 적을 몰아붙이며 진격과 후퇴를 적시에 지시하고 자신은 최전방에서 적을 밀어내는 용감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서울여해재단 이사장. 1990년 단 3명의 직원과 함께 화장품 제조업체 한국콜마를 창업해 연간 3조원 매출의 K뷰티 중추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연구에 열정을 쏟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난중일기’‘장계’ 등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집대성한 『이충무공전서』의 한글 번역 사업을 총괄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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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중 조선 수군의 유일한 패전 [역사&오늘]

김정한 기자2024. 8. 27. 05:00
8월 27일, 칠전량 해전 발발
칠전량 해전. (출처: 작자 미상, 회본태합기,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597년 8월 27일, 칠전량 해전이 시작됐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 수군은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왜군을 압도하며 승승장구했으나,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중 유일한 조선 수군의 해상전 참패였다.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된 후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의 이간책으로 인해 이순신 장군이 해임된 후 새롭게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승전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상황의 불리함을 깨닫고 종전의 입장을 바꿔 왜군 공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조정은 원균에게 출정을 종용했고, 이에 원균은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다 오히려 기습을 당했다.

 

칠천량은 좁은 해협으로 둘러싸여 있고, 조류가 빠르게 흘러 함대 운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왜군은 이러한 지리적 특징을 이용하고 조선 수군의 동태를 파악해 공격을 감행했다. 조선 수군은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 장수들이 전사했다. 원균은 거제도로 도망쳤다가 왜적의 칼에 맞고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 판옥선을 이끌고 무단으로 전선을 이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배들이 훗날 이순신 장군이 복귀해 명량해전을 치를 때 일본 수군 함선 133여 척을 격퇴하게 된 13척의 배 중 12척의 배가 된다.

칠천량 해전 패배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 3척, 판옥선 140여 척, 그리고 수군 2만 명을 잃고 남해 제해권을 상실했다. 기세가 오른 왜군은 전라도를 침입해 유린했다. 조선 조정은 급히 이순신을 복권시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했다. 선조가 수군을 아예 폐지하려 하자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고 고하며 비장한 결의를 표하고 궤멸된 수군의 재정비에 나섰다.(6)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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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전투에서 승리하고 죽은 이순신의 노량해전

이병록2023. 12. 26. 14:54
연합 작전에서 전작권 없는 한계 그리지 못한 아쉬움

[이병록 기자]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해군사관학교 시절에 어떤 상급생은 "군인은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하고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많은 특출한 장군들이 최후 전투까지 승리한 경우는 드물다. 한니발과 나폴레옹도 마지막 전투에서 졌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이겼다. 그러고는 돌아가셨다.

더 불행한 것은 용맹한 장군들이 중도에 잘리거나 모함 등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 백제계 장군 흑치상지, 백제 부흥군 복신과 도침, 송나라 장군 악비는 모함을 받고 죽거나 정쟁으로 죽었다. 이순신 장군도 정탁의 구명이 없었으면 그런 길을 갈 수 있었다.

이순신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그동안 연속극이나 영화에서 수없이 다루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영화 제작을 만류했을 것 같은데, 이순신 영화 3부작이 모두 성공했다. 노량은 이제 시작했지만 예매율 1위에 벌써 이백만 명 넘게 봤다고 한다.

 

김한민 감독은 영화 순서, 배역, 전쟁 장면 등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었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며 자신이 만든 함대 대부분이 사라지고 기세가 등등한 적에 맞서 승산이 없던 전투를 치르는 명량 해전의 이순신은 최민식이 맡았다. 연전연승의 자신감과 패기에 찬 한산도 해전은 박해일이 맡았다. 최후 전투는 김윤석이 맡았다.
  
최초 명량 해전을 만들 때 김한민 감독이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다. 공식적으로 요청하면 국방부나 해군에서 지원할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명량해전에서 고뇌하는 이순신을 그리라고 얘기했다. 

김 감독의 작품 <최종 병기 활>에서 호랑이의 역할이 너무 컸다, 위기에서만 구해주고 나머지는 주인공의 활약에 맡겼다면 더 좋았을 거라 말했더니, 감독은 같은 지적을 많이 당했다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명량>의 회오리 물줄기나 <한산>의 거북선이 호랑이 역할을 그대로 하였다. 위기만 구하는 식으로 비중을 낮췄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노량>에서 호랑이 역할을 뭐가 하나 궁금했는데 다행히도 없었다.

<한산>에서 아쉬운 점은 한니발의 칸네 전투처럼 유인과 매복, 조선 선박의 빠른 회전 능력 등 기동전을 부각해야 했다. <노량>에서 보인 기동성이 <한산>에서 나왔으면 더 좋았겠다는 뜻이다. <노량>에서 아들 죽음 장면은 너무 길고, 연합 작전에서 작전권이 없는 조선군 지휘관으로서 한계를 느끼는 내용이 나오길 바랐다. 발포 만호 때 상관이 오동나무를 베어 오라던 명령을 거부했던 강직한 이순신이 진린 포섭에 많은 공을 들인 부분이 아쉽게도 없다.

영화 시작에서 선조가 '재조지은'을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병들이 열심히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고 명나라가 선조를 위해서 군대를 보냈기 때문에 이겼다는 논리이다. 선조가 도망갈 때 옆을 지키며 호종하면서 따라갔던 120명이 공신이 되었고,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공을 세운 선무공신은 겨우 18명이다. 당시 선무일등공신이 권율, 이순신, 원균이다. 2등 공신으로 올라온 원균을 선조가 1등 공신으로 올렸다.

영화 마지막에 상 지내는 모습이 나오고 이어서 선조가 이순신 죽음 소식에 슬퍼하지 않고 (그런 하찮은 보고를 밤늦게 하지 말고) 내일 보고하라고 무시하는 장면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왕보다 백성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순신이고, 유성룡이 자리를 물러나자마자 그를 죽이라는 상소까지 난무한 상황에서 전쟁에서 살아남은 들 그 후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죽었다는 설이 남아있다.

 

일본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왜군은 수륙병진에 실패해 보급과 후속 증원이 없는 상태에서 싸워야 했다. 둘째가 왕이 성을 버리고 도망친 상황이다. 서울은 몰라도 평양성에서는 싸워볼 만했으나 도망치면서 군량미와 화약을 적에게 넘기고 말았다. 셋째가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후방을 교란하고 전장에서 함께 싸웠다.

명량 해전에서 시작하여 노량 해전까지 영화 세 편, 서울의 봄에서 시작하여 나폴레옹과 노량 해전까지 세 편을 마치면서 한 해를 마무리한다. 성탄 연휴에 순천 왜성에서 여수 좌수영까지 걷고 여수에서 영화를 보려고 하였으나 감기와 추위 때문에 포기한다. 최후 전투에서 최후 죽음을 얘기하던 그 상급생은 전투 병과를 택하지 않고 지원병과를 택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병록은 예비역 해군 제독으로 정치학 박사이자 덕파통일안보연구소장입니다. 전) 서울시안보정책자문위원, 전)합동참모본부발전연구위원을 지냈으며 저서로 <관군에서 의병으로>가 있습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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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의 어록을 통해 이순신의 정신을 재조명하다

노승석2024. 2. 14. 14:30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자세를 강조

[노승석 기자]

  문화재청이 현충사관리소에 소장 중인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에서 새로 찾았다고 발표한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 일부.
ⓒ 연합뉴스
 
이순신의 백전백승의 전략과 전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유학(儒學)을 기반으로 한 인격수양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위해 이순신은 항상 독서를 했고 거기서 얻은 어록을 <난중일기>에 적었다. 택당 이식(李植)은 <시장(諡狀)>에서 "이순신은 독서를 통해 큰 뜻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중국 촉한의 정치가 제갈량이 "지혜로운 자는 옛 것을 스승으로 삼는다[智者師古]"고 했듯이 이순신은 자신에게 도움되는 어록을 별도로 기록하여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일기 이외에 교훈이 되는 한시와 어록, 자작한 한시와 산문 등 별도로 적은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이순신이 평소 가졌던 생각과 다짐을 살펴볼 수가 있다. 특히 이순신이 중국고전에서 인용한 어록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교훈이 되어 준다. 그 내용들은 정확한 이해를 위해 저자와 출전을 밝히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함에도 이것이 최근에 와서야 고증이 이루어졌는데, 그만큼 옛 고전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이순신이 어록을 집중적으로 적은 시기는 계사년 1593년부터다. 이해 3월 이후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이 일본과 강화 협상을 시작하고, 그후 조선군이 남하한 일본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벌이지만, 명나라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6월에는 일본군이 웅천·제포·안골포 등지에 주둔하고 서방의 진입을 준비하자, 이순신은 해상의 요충인 견내량과 한산도 바다를 중심으로 봉쇄 작전을 세운다. 8월에는 통제영이 설치되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삼도수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후 이순신은 계사년 9월 15일자 이후에 <난중일기>에 일기 외에 별도로 어록들을 기록했는데, 그 중에 특별한 의미가 담긴 두 글귀가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홍기문과 이은상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 글의 출전에 대한 고증은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① "출전하여 만 번 죽을지라도 한 번 살려는 계책을 돌아보지 않으니 분한 마음이 그지없다.[出萬死不顧一生之計 憤憤不已]"

② 국가를 편안히 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이를 따르리라[安國家定社稷 盡忠竭力 死生以之]
-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노승석 역주)

위 글에는 위기에 놓인 나라의 운명을 만회하기 위해 전쟁하는 데는 자신의 죽음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의지가 담겨 있다. ①번은 유성룡의 <서애집> 〈정충록발(精忠錄跋)〉에서 확인되므로, 이의 저자는 유성룡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출만사불고일생지계(出萬死不顧一生之計)"구는 이미 2천 년 전부터 중국의 고전에서 관용적인 용어로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에 보면, "장군이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치며 출전하여 만 번 죽을지라도 한 번 살려는 계책을 돌아보지 않고 천하를 위해 잔악한 적을 제거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유성룡이 이 글귀를 인용하면서 뒤에 "분분불이(憤憤不已)"를 붙인 것이다.

 

②번은 비슷한 문장이 실록 등에 나오지만,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통감절요> 〈후한기〉의 희평(熹平) 원년조에 나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송나라의 묵재(黙齋) 채정손(蔡正孫)이 말하기를, "대신이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어 천하가 위기에 처하면 마땅히 국가를 편안히 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서 충성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이에 따르는 것이 옳다.(當以安國家定社稷 爲己任 盡忠竭力 死生以之可也)"고 하였다.

<춘추좌씨전>의 소공 원년조에도 "자산(子產)이 말하기를, 진실로 사직에 이로우면 죽으나 사나 이에 따르리라(苟利社稷 死生以之)"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사생이지(死生以之)"는 "죽든지 살든지 간에 그것을 따른다"는 복종의 뜻으로 풀이된다.

위의 두 어록에 대해 그 당시 전쟁 상황으로 살펴보면, 이순신이 계사년에 견내량의 해상 봉쇄 작전을 세우고 호남으로 수륙 진격하려는 일본군을 방어하는 전쟁에서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자세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다짐하며 적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이순신이 국난극복에 대한 자신의 강한 염원을 대변해줄 수 있는 고전의 글귀로 채택하여 별도로 기록한 것인 만큼 의미가 매우 간절하고 심장하다. 위의 글은 친필 원본 <난중일기> 초고본에 적혀 있어 일부 번역한 난중일기 초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난중일기>는 물론 전형적인 일기체 형식을 갖추고 이순신의 활약상과 그 당시의 전황이 상세히 적혀 있어 전쟁문학의 백미로 손꼽는다. 이 사실에 더해 그 안에 들어 있는 이순신의 개인적인 심정이 담긴 별도의 어록도 인간 이순신을 조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충성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이를 따르리라[盡忠竭力 死生以之]"는 글귀는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일이라면 어떤 상황이든 죽고 삶에 얽매이지 않고 대의를 실천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담긴 점에서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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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현충사 '박정희 현판'과 완물상지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18.02.08 09:48 수정 : 2018.02.08 10:03

“노인을 봉양하는 연회를 베풀면 어떻겠사옵니까.”

1771년(영조 47년) 20살이 된 세손(훗날 정조)이 임금(영조)에게 ‘노인봉양잔치’를 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런데 할아버지 영조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상소문의 내용보다는 먼저 “세손의 글씨가 어떠냐”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자 이번에는 “문체가 어떠냐”고 하문했다. 대신들이 “아주 훌륭하다”고 하자 그제서야 “세손의 뜻대로 양로잔치를 베풀라”고 했다. 영조의 다음 한마디가 의미심장했다.

“세가지 기쁜 일이 있다. 세손이 양로연을 청한 것이 하나이고, 글을 잘 지은 것이 하나이며, 글씨를 잘 쓴 것이 하나이다.”(<영조실록>)

영조는 훌륭한 왕재로 성장한 세손(정조)의 글씨를 특별히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성역화 사업을 펼쳐 새로운 현충사 본전을 만든 뒤 자신이 직접 써서 내걸도록 한 ‘현충사 현판(위)’. 이에따라 1707년 숙종이 현충사를 위해 하사한 ‘현충사’ 현판. 당대 최고의 명필인 숙종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힘찬 필치가 돋보인다. 그러나 박정희 현판에 밀려 옛 현충사 본전에 걸리는 신세가 됐다.

■“글씨 참 잘 썼다”고 칭찬받은 정조

그럴만 했다. 당나라 고종 때인 669년부터 시행해온 인재선발의 기준이 무엇인가. 바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다.

풍후하고 큰 신체(身)와 바르고 분명한 말(言), 굳세고 아름다운 글씨(書)와 뛰어난 판단력(判) 등 4가지 기준으로 인재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신당서>)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은 ‘서·판’이었고, 이 서·판 시험이 끝나야 비로소 신·언 전형으로 넘어갔다.

똘똘한 신하를 뽑는데도 이렇게 엄정한 잣대를 들이댔는데, 하물며 만백성의 어버이인 군주는 어떤 인물이어야 했겠는가.

왕조시대 군주는 땅에서는 민심을, 하늘에서는 천심을 꿰뚫는 완전무결한 지존이 되어야 했다. 군주가 될 이는 3살부터 왕재(王才)가 되기 위한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용모나 몸집은 타고난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글씨(서)와 말(언), 판단력(판)은 어렸을 때부터 키워야 했다.

이중 서예는 임금 될 자가 반드시 배워야 할 기본과목이었다.

국왕은 그 시기에 가장 뛰어난 서예가 중 한사람이 되었고, 또한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그런 지존의 자리에 있는 국왕의 글씨가 ‘고양이 발이나 개의 발’을 일컫는 괴발개발이라면 어떨까.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이다.

■한결같이 명필이었던 조선 임금들

성역화한 현충사의 중심축선에서 밀린 옛 현충사 본전.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한 놓치기 쉽다.

아닌게 아니라 코흘리개 세자 시절부터 서예교육을 받았던 조선의 임금들은 예외없이 명필이었다.

조선 전기의 임금들은 주로 송설체를 즐겼다. 원나라 서예가인 조맹부(1254~1322)의 서재 이름(송설재)을 딴 송설체는 법도와 품격, 힘이 있는 글씨체다.

세종의 왕자인 문종(재위 1450~1452)과 세조(재위 1455~1468) 등은 대표적인 송설체 서예가들이다. 문종의 경우 “굳세고 생동하는 진기(眞氣)가 오묘한 경지를 넘어섰다”는 평가(김안로)가 있다. 세조는 근엄하고 힘찬 필치를 자랑했고, 세조의 손자인 성종(재위 1469~1494)은 안평대군의 글씨와 쉬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다고 한다. 김안로(1481~1537)는 성종의 글씨를 두고 “아리땁고 단중하여 조용히 조맹부의 법도를 따랐다”고 평했다.

‘임진왜란을 초래한 암군(暗君)’이라는 악평을 듣는 선조(재위 1567~1608)는 서예에서 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특히 명필인 석봉 한호(1543~1605)를 발탁했으며, 한호의 글씨체인 석봉체로 <해서천자문>을 제작하여 전국 서당에 보급시켰다. 선조의 글씨도 명필이었다. 한호의 글씨처럼 강한 필치로 대담하게 휘두른 붓 맛이 일품이

1966년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 끝에 새로 마련한 현충사 본전. 콘크리트 구조물에 한옥을 얹혔다.

었다. 숙종(재위 1674~1720)부터 필치가 다시 부드럽게 변한다. 영조(재위 1724~1776)는 유연하면서도 필획의 변화가 큰 화려한 ‘조선풍 송설체’를 표현했다.

할아버지 영조에게서 “글씨 잘 쓴다”는 칭찬을 들었던 정조(재위 1776~1800)는 굵고 시원한 필치로 당당한 인상의 글씨를 썼다. 순조(재위·1800~1834) 역시 아버지(정조)의 글씨를 본받은 명필이었다. 순조가 불과 5살 때(1795년) 쓴 글씨 ‘구오복 팔천세(九五福八千歲·복을 누리며 오래 살기를 기원한다)’는 어떤 명필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서예에 안목이 없는 필자 같은 비전문가가 봐도 조선 국왕의 글씨, 즉 어필(御筆)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작품이라 할만큼 멋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씨는 천한 기예입니다.’

그런데 각 문헌을 살펴보면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군신을 막론하고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린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다. 예컨대 강희안(1417~1464)은 안견·최경과 함께 시와

현충사의 위치도. 숙종의 현판이 걸린 옛 현충사는 충무문-홍살문-현충사로 이어지는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다.

그림, 글씨에 뛰어난 ‘3절(絶)’로 통했다.글씨는 전서 뿐 아니라 예·해·초서를 막론하고 통달했다. 그림의 신묘함은 당대 최고였다. 그러나 강희안의 작품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사람들이 강희안의 서화를 구하러 오면 단칼에 거절했으니까….

“글씨와 그림은 천한 재주(賤技)이니 후세에 전해진다면 내 이름만 욕되게 할 뿐입니다.”(<해동잡록>)

조선시대이니 그림은 또 그렇다치지만 강희안은 글씨, 즉 서예마저도 왜 ‘천한 재주’라고 스스로 폄하했을까.

■‘작문은 배우, 서예는 시간낭비’

이 대목에서 강희안과 같은 조선의 문인학자가 즐겨 인용한 도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북송의 정이(程頤·1033~1107)다.

정이는 <서경>의 ‘완물상지(玩物喪志)’ 성어를 인용하면서 “글 짓는 작문은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배우(俳優)와 다를 바 없고, 글씨 쓰기는 시간낭비일뿐”이라고 비판했다. 완물상지는 “어떤 것에 지나치게 탐닉하면 본래의 뜻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다. 정이는 작문을 ‘남의 이목을 즐겁게 하는 배우의 재주’, 서예를 ‘시간낭비’라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시·서·화에 능했던 강희안이 넘치는 천부적인 끼를 감추지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천한 기예를 후대에 알리고 싶지 않다

현충사가 일본인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유적보전회가 결성되고,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2만여명이 1만6000원을 모았다. 성금을 보내온 사람들의 명단과 사연을 소개한 동아일보 1931년 6월 26일자.

’고 부끄러워한 이유였다. 군주는 더했다. ‘완물상지’는 후대의 모든 군주가 가슴 속 깊이 간직해야 할 금과옥조가 됐다.

■면박 당한 임금들…. “글씨 잘 쓰는 거 자랑하면 안됩니다”

왕조시대 신하들은 군주가 혹여 쓸데없는 분야에 빠져 정사에 돌보지 않을까 끊임없이 ‘완물상지 하지마라’고 다그쳤다.

특히 군주가 서예솜씨를 자랑하면 ‘못난 임금’ 소리를 들었다.

예컨대 1405년(태종 5년) 세자(양녕대군)가 스승(성석린)에게 자기가 쓴 글씨 40여자를 보여주자 성석린은 “매우 잘 쓴 글씨”라며 ‘엄지척’ 했다.

그러자 세자가 의기양양해서 “예전의 국왕 중에는 누가 글씨를 잘 썼느냐”고 되물었다. 성석린은 “당 태종과 송 휘종이 잘 썼다”고 하면서도 핀잔을 준다.

“그러나 당태종은 참덕(慙德)이 있고, 송 휘종은 천하를 잃었습니다. 서찰(書札)은 군왕이 그렇게 중하게 여길 바는 못됩니다.”

당 태종(재위 626~649)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만고의 성군이다. 그러나 맏형(건성)과 동생(원길)을 죽이고 황제가 됐다. 그것이 ‘당태종의 참덕(잘못)’이다. 시·서·화에 능했던 송 휘종(재위 1100~1125)은 풍류천자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반격에 사직을 잃은 망국의 군주였다. 성석린은 서예와 그림 같은 잡기에 능하다고 다 옳은 군주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성석린에게 한 수 배운 양녕대군은 훗날 조카인 세조 임금에게 똑같이 가르쳐주었다. 1459년 세조가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또한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은근히 자랑하자 양녕대군이 면전에서 면박을 준다.

1932년 6월7일 동아일보 화보. 조선 백성들의 성금을 바탕으로 현충사를 중건한 기념으로 이순신 장군의 영정 봉안식을 열었다. 그 소식을 전면화보로 소개했다.

“군주가 비록 몇사람을 당해 낼 만한 재주가 있다고 해도 제 자랑을 해서는 안됩니다.”(<세조실록>)

■‘그래도 서화솜씨는 내가 제일 잘나가!’ 자랑한 성종

성종처럼 ‘완물상지 하지 말라’는 신하들의 집요한 지적질에 몸서리를 친 임금은 없을 것이다.

성종에게는 두가지 취미가 있었다. 활쏘기와 서화였다.

특히 서화는 성종 스스로 ‘내가 제일 잘 나가!’라며 자화자찬한 취미활동이었다. 대사헌 이세좌는 성종의 서예와 그림솜씨를 극찬했다.

“전하의 글씨는 난새(鸞·전설상의 새)가 놀라고 봉황이 되돌아올 정도입니다. 그림솜씨는 대자연의 이치와 그 신묘함을 견줄 수 있습니다.”(<성종실록>)

성종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성종은 생존하고 있던 정희왕후(세조비)와 소혜왕후(성종의 어머니) 안순왕후(예종비)를 모시려고 창경궁을 지었다. 그러면서 성종은 창경궁 내간(부녀자가 거처하는 방)의 전각 현판은 과인이 직접 쓰고 싶은데 괜찮냐”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원래 궁궐의 전각이나 문의 현판은 임금이 쓰는 것이 아니었다. 임금이 임명한 서사관이 써야 했다.

그렇지만 글씨에 자신이 있던 성종은 “그래도 내간의 현판 정도는 내 글씨를 걸어도 좋지않느냐”고 운을 뗀 것이다. 상당수 신하들은 “만세에 전하는 현판글씨인데 어필(임금의 글씨)이라면 더 좋을 것”이라고 반색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신료들은 “어필로 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실록기사를 쓴 사관은 “몇몇 신하들은 임금이 친히 하찮은 일, 즉 현판 글씨를 쓰도록 권했다”면서 “이것은 기예를 좋아하는 임금의 뜻에 부응했다”고 꼬집었다.(<성종실록>)

■“글씨 자랑은 임금이 할 일이 아닙니다”

성종 임금의 그림과 글씨가 시중에 떠돌았다는 것이 당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지금 시중에는 어찰(임금의 편지)를 얻어 한껏 치장해서 병풍이나 족자를 만드는 풍조가 일고 있습니다.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세좌는 “임금이 고작 문장의 수식에 정신이 팔리고, 서예와 그림 같은 서생의 하찮은 기예를 자랑하니 이게 될 말이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조선 임금들은 3살 때부터 혹독한 영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순조가 5살 때 썼다는 ‘구오복 팔천세’ 글씨

성종은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는 본래 그림은 잘 그리지 못한다.”고 발뺌했다. “대체 경들은 어디서 보았다는 거냐”고 모른척 한다. 그러나 이세좌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필 서화는 신(이세좌) 등이 신승선·윤은로·윤여림의 집에서 똑똑히 보았다”고 성종을 다그친다.

이세좌는 “예부터 임금이 뭐든지 지나치게 좋아하면 성덕에 누가 된다’고 했다”고 성종 임금을 추궁했다.

그러나 성종의 글씨와 그림은 시중에 널리 퍼졌던 것은 사실이다.

“성종의 필적을 얻은 이는 그것을 완상하고 신줏단지 모시듯 보관해두었다. 큰 구슬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김안로의 <희락당고>)

군왕이 서예에 관심을 두면 ‘잡기말예(雜技末藝)’니, ‘완물상지(玩物喪志)’니 하면서 득달같이 나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친 것이 조선시대였다. 이유는 분명했다. 군주가 서예와 같은 한가지 일에 집착하면 정사에 소홀할까 걱정한 것이다. 신하들은 ‘무엇이든 너무 지나치거나 자랑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군주를 사정없이 다그쳤던 것이다.

■현충사를 둘러싼 논쟁

왕조시대가 종막을 고한지 100년도 넘은 이때, 왕조시대 임금도 아닌 대통령의 글씨가 뜨거운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다른 곳도 아닌 이순신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 즉 충남 아산 현충사의 현판을 둘러싼 논쟁이다.

‘난중일기’(국보 76호) ‘이순신 장군 장검’(보물 326호) 등 이순신 유물의 소유권자인 종부 최모씨는 “현충사에 걸려있는 박정희 현판을 떼고 숙종의 어필 현판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난중일기’의 현충사 전시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최씨는 왜 이런 주장을 할까. 먼저 현충사가 모두 왜색으로 물들어있다는 것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전대통령의 필적이 왜적과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어긋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일본신사와 비슷한 양식으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또 지금의 현충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색채가 너무 진하다는 것이다. 현충사 하면 ‘충무공 이순신’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박정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펼치면서 자신의 정치색을 너무도 짙게 덧칠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정희 친필현판은 바로 그 정치색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다른 의견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사업도 그 자체로 역사라는 것이다. 왜색이 문제가 된다고 일제시대

선조의 어필. 선조는 임진왜란을 초래한 암군으로 평가되지만 석봉 한호를 발탁해서 천자문을 보급하는 등의 업적도 남겼다. 선조 본인도 명필이었다.|국립중앙박물관

때 깔아놓은 철도와 도로를 깔아뭉개야 하느냐는 주장도 나온다. 또한 옛 본존에 걸려있는 숙종의 ‘현충사’ 현판은 겉만 한옥이지 콘크리트로 지은 지금의 본전 건물과는 구색이 맞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또한 일리 있는 의견이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친회와 15대 종부의 해묵은 갈등도 사태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문화재청은 오는 21일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박정희 현판 문제를 다룬다. 어떤 결론이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숙종이 하사한 현판

이 논쟁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될 본질이 있다. 어떤 경우든 ‘현충사’의 역사성을 훼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현충사(사적 155호)가 어떤 곳인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유서 또한 깊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 임금이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를 허락했다. 3년 뒤인 1707년 숙종

글씨와 그림에 능했다는 성종. 성종 임금의 글씨와 그림이 시중에 떠돌자 신하들은 “자고로 임금은 하찮은 서예실력을 자랑하면 절대 안된다”고 다그쳤다.

은 직접 ‘현충사(顯忠祠)’ 글씨를 쓴 현판을 하사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을 위한 제문을 함께 내렸는데 그 내용이 심금을 울린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거니와 제몸 죽여 나라를 건진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이때 숙종이 표현한 ‘신망국활(身亡國活) 시견사인(始見斯人)’, 즉 ‘제 몸 죽여 나라를 구한 이는 이 분에게서 처음 본다’는 말은 충무공을 향한 최고의 찬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현충사 재건에 뜻을 모은 조선민중 2만명

그후 현충사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868년(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을 겸했던 현충사도 문을 닫았다. 일제강점기에 충무공의 묘소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이충무공유적보전회가 설립되어 모금운동을 펼쳤다. 1931년 6월26일 동아일보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달된 성금내역을 1면을 털어 게재했다.

‘정열(情熱)이! 단성(丹誠·뜨거운 정성)이!’를 제목으로 성금을 보내온 사연들을 전한 기사를 보면 눈물겹다.

조선 본토가 아닌 중국 단둥에 거주하던 동포들은 “먹을 것을 위해 조국을 버리고 타국에서 공장생활을 하면서 근근히 지내오다 충무공 유적 보존 소식을 듣고 20전씩 모았다”면서 성금을 보냈다. 심지어는 나병(한센병)에 걸려 대구 나병원에 수용된 환자 148명이 성금을 모아 보냈다는 기사도 실렸다. 9살 된 코흘리개 학생은 “성금모금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한테 받은 10전을 보낸다”면서 “이 적은 돈이라도 보태 충무공의 묘소를 보전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사연을 보냈다.

원래 4000원을 모금하려 했지만 성금이 쇄도하는 바람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2만여명이 참여한 성금의 액수는 무려 1만6000원에 달했다.

이렇게 국내는 물론 해외동포까지 보낸 성금을 바탕으로 현충사가 중건된 것은 1932년 6월5일이었다.

정조의 어필. 할아버지 영조가 대신들에게 ‘우리 손자가 얼마나 글씨를 잘 쓰냐’고 극찬했다.

■구석으로 몰린 숙종의 ‘현충사’

그러다가 1966년 4월1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현충사 성역화 계획에 따라 지금과 같은 규모로 확장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성역화 기념으로 새로 건립한 현충사의 본전에 한글현판 ‘현충사’를 내걸었다. 이외에도 현충사의 정문에는 ‘충무문’, 본전의 정문에는 ‘충의문’ 현판을 걸었다.

그러니까 박대통령이 현충사에 건 현판은 ‘현충사’ ‘충무문’ ‘충의문’ 등 3개인 것이다.

이 와중에 당대 최고의 명필인 숙종 임금이 쓴 ‘현충사(顯忠祠)’ 현판이 뒷전으로 밀렸다는 것이다.

사실 직접 찾아보지 않고는 실감할 수 없다. 필자는 얼마전 실로 오랜만에 다시 잘 정돈된 현충사를 찾아갔다.

1966년 성역화에 따라 확정 정비된 현충사의 중심축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무문-충의문-현충사’ 친필 현판이 줄을 이었다.

그렇다면 숙종의 어필 현판은? 정문에서 현충사로 들어가는 중간의 왼쪽에 다소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는 옛 본전에 걸려있다.

옛 본전은 1966년 성역화 작업 때 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것이다.

■현충사에 한번 가서 직접 느껴보라

만약 아무런 사전정보없이 현충사를 찾아 중심축선으로만 걷는다면 십중팔구 놓치고 말 것이다.

결국 충청도 유생의 애끊는 상소와 숙종의 ‘현충사’ 현판, 그리고 일제강점기 2만여 민중의 정성이 담겨있던 그 유서깊은 옛 현충사 본전은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긴채 조연으로 전락한 셈이다.

필자는 한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누구든 현충사 현판 논쟁에 가세하여 이런저런 의견을 내려한다면 반드시 현충사를 한번 방문해보라. 찾아가서 성역화 이후의 웅장한 현충사와, 지금은 한편의 구석에 서있는 옛 현충사 건물을 비교해보라. 물론 박정희 현판과 숙종의 현판도 한번쯤 살펴보라. 지금의 현충사는 과연 누구의 현충사인가.

필자는 현충사를 다녀와 옛 자료를 뒤져보았다. 2005년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문화재에 걸린 역대 대통령의 글씨는 모두 37곳(43건)이었는데, 그중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는 28곳(34건)에 달했다. 지금은 교체되었지만 한글 현판인 ‘광화문’(사적 117호)을 비롯해 영릉·녕릉(사적 195호), 행주산성(사적 56호), 매헌 윤봉길의사 사적지(사적 229호),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사적 113호) 등 내로라하는 사적의 현판이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다. 이중에는 율곡 이이 선생의 유허인 화석정(파주시유형문화재 61호)와 오죽헌(보물 165호)까지 포함돼 있다. 18년이나 집권한 탓도 있겠지만 역대 대통령 그 누구보다도 서예를 통치에 활용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지나치면 본뜻을 잃는다’는 ‘완물상지론’으로 임금을 다그친 조선시대 신료들의 아우성을 떠올린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었고, 숙종이 심금을 울리는 제문과 함께 현판을 하사한 현충사보다는 박정희가 성역화한 현충사 이미지가 더 부각된다면 어떨까.

이것이야말로 ‘본뜻을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은 임금도 아니다. 누군가 “숙종도 임금이면 박정희도 임금이 아니냐”고 했다는데 사실이 아닌 인터뷰이기를 바란다.(9)

<참고자료>

이민식, ‘영조어필비’, <영조어필비>,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도록. 2015

이동국, ‘퇴계 이황 서예 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2004

양영술, ‘정조어필의 유가미학적 고찰’, 성균관대 석사논문, 2010

장학진, ‘역대 대통령들의 묵적 연구’, 원광대 석사논문, 2017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왕실의 묵향-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왕실 서예> 테마전 도록, 2006

서울서예미술관, <조선왕실어필>, 한국서예사특별전 22 도록, 예술의전당, 2002

현충사관리소, <충무공 이순신과 현충사>, 1999

 

 

 

충무공 탄신 472주년..이상한 현충사

김석2017. 4. 30. 23:57

 

 

tv.kakao.com/v/v02f9sKK7L1KXZfXG176Ak1@my

 

 

왜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처참하게 유린당할 때,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왜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지켜낸 민족의 영웅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생 472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후손들은 충무공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고 있을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연마하며 구국의 역량을 기르던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혼을 기리는 사당, 현충사입니다.

 

호국의 성지이자 항일의 구심점인 현충사는 과연 민족의 영웅을 기리는 공간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현충사의 현주소를 들여다 봤습니다.

현충사 정문을 지나 앞으로 곧장 걸어 올라가면, 커다란 붉은 문이 관람객을 맞습니다.

능이나 묘, 사당 입구에 세우는 '홍살문'입니다.

신성한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관문으로, 예로부터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나무 같지만 '시멘트'입니다.

곳곳에 시멘트를 덧바른 흔적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아담하고 운치 있는 한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았던 유서 깊은 집입니다.

벽이며 천장 할 것 없이 온통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았습니다.

부서져 떨어져 나간 곳들도 그대로 방치돼 있습니다.

황토 대신 시멘트로 메운 이름뿐인 이순신 옛집인 겁니다.

 

<인터뷰> 박소영(서울시 강동구) : "보기는 안 좋네요. 이렇게 시멘트로 원래 되어 있는 게 아니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도 미관상이라든지 역사적인 장소에 대한 예의를 생각했을 때 더 좋은 것 같아요."

1968년 현충사에선 대대적인 성역화 공사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무로 복원됐어야 할 주요 건물들이 전부 콘크리트로 지어졌습니다.

그 뒤로 반 세기.

현충사는 여전히 차가운 콘크리트에 갇혀 있습니다.

<인터뷰> 김준혁(한신대 교수) : "거대한 시멘트 건물로 만들어진 전혀 이질적인, 겉모습은 우리의 옛 모습인 것 같지만 실제로 전혀 우리의 모습이 아닌 그런 공간이 바로 현충사죠."

진작부터 이런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던 문화재청.

이제야 단계적으로 콘크리트 건물을 목조로 바꿔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올해와 내년에 걸쳐서 지금 사당 앞에 있는 홍살문 같은 경우도 시멘트로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들도 고쳐나갈 계획이 있고, 그런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충사를 찾은 사람들이 사당에 예를 올립니다.

참배객들을 맞는 건 사당 안에 모셔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

이 영정을 그린 화가는, 근대 한국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월전 장우성 화백입니다.

하지만 장 화백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

때문에 표준영정을 바꾸자는 요구가 그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순신 장군이 입고 있는 관복의 고증이 잘못됐다는 점.

영정 전문가를 찾아가 면밀하게 고증해보기로 했습니다.

이순신 영정만 20년 가까이 연구하며 국내 최고의 영정 화가로 꼽히는 권오창 화백.

전국의 박물관을 누비며 자료를 모으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16세기 무신 권응수 장군의 초상을 찾았습니다.

두 초상의 옷차림을 비교해 봤습니다.

먼저, 머리에 쓰는 관모.

16세기 초상화에 비해 이순신 영정의 관모가 훨씬 더 높고, 관모와 이마의 경계선도 이순신 영정 쪽이 훨씬 둥급니다.

다음은 목의 깃 부분.

권응수 초상은 목의 깃이 얕아 목 가까이 바짝 붙어 있지만, 이순신 초상은 목의 깃이 한참 아래로 내려와 있습니다.

이번엔 소매.

권응수 초상에 비해 이순신 영정의 소매는 아래로 흘러내릴 만큼 품이 넓습니다.

다음은 '흉배'라 불리는 가슴 장식.

당시 같은 종 2품 무관이었던 권응수 초상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만 그려져 있는데, 이순신 영정은 좌우로 두 마리.

조선시대 흉배 가운데 호랑이를 좌우로 배치한 사례는 없습니다.

<인터뷰> 권오창(영정 전문 화가) : "어디를 봐도 조선 말기에 봐도 두 마리가 이렇게 돼 있는 건 없습니다. 제가 무슨 문헌이라든가 유물이라도 발견됐으면 아,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그렸구나 하겠는데 어디를 봐도 그런 거는 못 봤거든요."

실제로 장우성 화백이 그린 유관순 열사 영정은 영정 속 얼굴이 실제와 다르다는 이의가 받아들여져 2006년 다른 그림으로 교체됐습니다.

<인터뷰> 권오창(영정 전문 화가) : "복식이 맞아야 시대상을 알고 당대의 신분을 알기 때문에 그게 미흡하면 두 번, 세 번 다시 반복해서 그리고 고증을 확인하고 하는 절차가 필요한 게 바로 표준영정 제작이거든요. (바꿔야 되는 거죠?) 네, 바꿔야 됩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면 사당 건물 양쪽에 솥 모양의 장식물이 보입니다.

'정'이라고 불리는 이 조형물은 정통 왕조,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 장식물입니다.

때문에 궁궐 가운데서도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중화전 두 곳에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궐 유물이 왜 사당 앞에 있는 걸까?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최초 설치 시기라든가 그게 왜 설치됐는지 경위라든가 이런 자료는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저희들이 확인을 못 했는데요. 현충사 연혁지 자료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1967년 4월경에 현재 위치에 설치돼 있는 걸로 나타나고 있어요."

현충사에선 해마다 충무공 탄신일 기념행사 때 이곳에 향을 피웁니다.

하지만 취재진이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정은 국권,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현충사엔 맞지 않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녹취> 궁궐 의례 전문가(음성변조) : "향로는 한 개를 놔야 되지 않습니까. 향로로 쓰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예법이 발달했던 조선시대 때 그런 사례가 없잖아요."

현충사는 한때 곳곳에 얼룩진 일제 잔재로도 신음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현충사 연못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일본 교토의 니노마루 연못과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현충사 연못은 마침내 올해 반듯한 우리 연못으로 복원됐습니다.

하지만 일제 잔재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현충사 사당 왼쪽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일본을 대표하는 '금송'입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이 나무는 조선총독부 관저를 건립했을 때 일본 군인들이 총독 관저 건립 기념으로 심었던 나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 청와대에 계속 살아 있었던 그 나무를 현충사를 지으면서 이곳에 이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연못은 바꾸라고 한 문화재위원회가 유독 금송만은 2010년과 2015년 두 차례 모두 제자리에 두라고 결정합니다.

전직 대통령이 심어 시대성과 역사성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금송 이전 문제가 처음 불거진 건 지난 1991년.

당시 현충사를 찾은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문화재청이 금송을 사당 밖으로 옮긴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문화재청은 금송을 사적지에 부적합한 수종으로 분류까지 해놓고 왜 옮기지 않았을까?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그 당시는 문화재 관리국 시절인데 예산확보가 안 됐어요. 그때 외래수종 다 정비하는 데 한 20여억 원, 21억 정도 되는데요. 그때 예산 확보가 안 되다보니까 정비가 안 됐고."

이후 위치만이라도 옮기자는 요구가 계속됐지만 문화재 당국은 여전히 묵묵부답.

현충사뿐만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7백 의사의 유골을 안치한 항일 유적지 칠백의총.

이곳에도 사당 바로 옆에 버젓이 금송이 자라고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가 한국을 대표하는 항일 유적지 곁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인터뷰> 박상진(나무 고고학자/경북대 명예교수) : "위치만 조금 옮기면 기념식수라는 의미도 살릴 수 있고 또 현충사가 갖고 있는 뜻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올해도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린 호국의 성지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현충사를 찾는 방문객은 연간 100만 명에 이릅니다.(10)

김석기자 (stone21@kbs.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명량 발굴 ‘소소승자총통’…소총부대장 출신 이순신과는 어떤 관계?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4.06.11 05:00 수정 : 2024.06.13 13:09

명량 발굴 ‘소소승자총통’, 소총부대장 출신 이순신과는 어떤 관계?

명량 발굴 ‘소소승자총통’…소총부대장 출신 이순신과는 어떤 관계?

‘40억원대 고려청자 1억원에 팔려던 잠수부 도굴단 덜미…’. 2011년 11월18일 기막힌 문화유산 도굴범 기사가 각 언론에 실렸다. 도굴범들은 해삼·어패류를 채집하던 잠수부들이었다. 이들이 불법 인양한 문화유산 30여점 가운데는 13~14세기 보물급 유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도굴범들이 덜미가 잡힌 이유가 어이없었다. 보통 바닷속에서 인양되는 유물에는 이끼류와 패각류 등이 붙어있기 마련이다. 이 경우 ‘아주 묽게 희석시킨 염산’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야 한다.

1588년판 ‘개인화기’

2012년 명량대첩 해역인 전남 진도 고군면 앞바다에서 인양된 조선시대 총통 3점에는 ‘소소증자총통’이라는 명칭과 함께 1588년 4월 전라 좌수영에서 장인 윤덕수가 제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염산을 들이 부었다

하지만 조급했던 도굴범들은 묽게 희석시키지 않은 강염산으로 유물을 마구 닦아댔다. 그러자 청자 본연의 미가 퇴색되었고, 표면에 바른 유약까지 벗겨져 나갔다. 이게 문제가 되었다. 밀거래 과정에서 가격이 뚝 떨어졌고, 도굴범과 거간꾼, 구매자 간 갈등이 빚어졌다. 덕분에 문화유산 사범단속반이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거래 현장을 잡을 수 있었다.

이들이 암약한 곳은 명량대첩의 현장인 울돌목(명량)에서 4.3㎞ 정도 떨어진 전남 진도 고군면 일대 해역이었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도굴범들이 지목한 지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중발굴조사에 들어갔다.(2012년 9월)

예상대로 12~13세기 강진 및 해남산 고려청자가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2% 부족했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물이 혹시 보이지 않을까.

염산 뿌린 도굴범들

2011년 명량대첩 해역에서 잠수부 도굴단에 의해 불법 인양된 13~14세기 청자들. 도굴범들은 불법 인양된 유물에 붙은 패각류와 이끼류를 염산으로 닦아냈다. 그 바람에 청자 표면의 유약이 벗겨나가고, 청자 본연의 멋을 일었다. 이들이 덜미가 잡히는 바람에 도굴지점이 특정됐고, 국립해양유산연구소의 정식 발굴 끝에 소소승자총통이 확인됐다.|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윤덕수의 1588년 작 개인소총

긴급 발굴이 시작된지 두 달 여가 지난 2012년 11월12일 아침이었다.

조사해역은 울돌목의 거센 조류에 갯펄이 물에 뒤엉켜 시야가 10~20㎝ 정도가 될 정도로 확보되지 않는 곳이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해저를 더듬어가며 청자통형잔을 수습한 잠수사들이 불쑥 솟아오르는 물체 하나를 잡았다. 잠수사들이 배(씨뮤즈호)에 올려놓은 물체는 청동 총통(조선시대 화약무기) 이 분명했다.

손잡이 부분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총통 인양 지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다. 19일과 21일에도 같은 종류의 명문 총통이 인양되었다. 분석 결과는 놀라웠다.

이순신 장군의 해역

소소승자총통이 인양된 곳은 명량대첩(1597년 9월16일)의 현장인 울돌목(명량)에서 4.3㎞ 정도 떨어진 전남 진도 고군면 일대 해역이었다. 또한 명량대첩의 전초전인 벽파진 해전(9월7일)의 현정이기도 하다.|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3점의 총통은 길이(57.3~57.8㎝), 무게(1920~2020g), 총구 내경(1.3㎝)이 거의 일정했다.

‘만력 무자년(1588년·선조 21) 4월 (전라) 좌수영에서 만든 소소승자총통…장인 윤덕수(萬曆戊子 四月日左營 造小〃勝字…匠尹德水)’라는 명문내용은 같았다. 3점의 총통 안에 흙과 종이, 화약 등이 확인됐다.

종이(지환)는 화약에 불을 잘 붙게 만들고 화약을 다져주기 위해 넣는 물질이다. 흙은 무엇일까. 폭발가스의 누출을 막으려 약실과 총열 사이의 틈을 메워준 진흙(토격)의 잔재일 수 있다. 이 총통 3점은 발사 직전에 바다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총통 외에도 임진왜란 당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돌탄환(석환·石丸)도 6점 확인됐다. 지름 8.5~9.8㎝ 정도인 석환은 크기로 보아 대형화포 중 하나인 지자총통(地字銃筒)에서 쏜 것으로 추정된다. 지지대를 갖춘 기계식활(쇠뇌)의 부속품인 방아쇠(노기)도 인양되었다.

해전의 추억

임진왜란 당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돌탄환(석환·石丸)도 6점 확인됐다. 지름 8.5~9.8㎝ 정도인 석환은 대형화포 중 하나인 지자총통(地字銃筒)에서 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지지대를 갖춘 기계식활(쇠뇌)의 부속품인 방아쇠(노기)도 인양되었다.|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승자총통 개발자 ‘김지’

인양된 소소승자 총통은 조선시대 휴대용 개인화기인 ‘승자총통’ 계열의 무기다.

이들 승자계열의 총통이 개발된 것은 16세기 후반이었다. 남으로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고, 북으로 여진의 위협이 가시화하자 신무기 개발을 고심하게 되었다. 이때 전라·경상 병사를 지낸 김지(1540~?)가 제작한 신무기가 바로 ‘승자총통’이다,

“작고한 병사 김지가 새로 만든 승자총통이 북방의 사변에서 적을 물리칠 때 많은 힘이 되고 있다. 상(선조)이 김지에게 증직을 명하고 그의 아들에게 관직을 제수했다.”(<선조실록> 1583년 6월11일)

조선시대 소총

발굴 인양된 소소승자총통 3점은 길이, 구경, 무게가 거의 같았다. 특히 총구의 내경은 1.3cm로 같았다.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김지가 언제 승자총통을 개발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실물 유물 중 1575·1577년에 제작된 승자 및 소승자 총통이 보인다. 최소한 1570년대에 만든 무기임을 알 수 있다. 개발된 승자총통이 위력을 발한 전투가 1583년 1~8월 이어진 ‘니탕개의 난’이다. 귀화 여진인인 니탕개 등이 이끄는 여진족 3만여명이 함경도 북부를 침입했다.

“오랑캐 무리가 종성부성을 포위했다…성 위에 있던 아군이 몸을 숨기고 있을 때 오랑캐가 성 아래로 몰려왔다. 아군은 그 틈을 이용하여 총(승자총통)을 난사하여 철환을 비오듯 퍼부으니 오랑캐들이 패주했다.”(<선조실록>1583년 5월17일)

또 1588년 여진전 정벌을 주도한 북병사 이일(1538~1601)도 “적을 제압하는데 승자총통 만한 것은 없다”고 극찬했다.

아녀자용 총?

세종 연간에 개발된 조선판 ‘권총’인 세총통. 길이 13cm에 구경은 0.9cm에 불과했다. 철흠자라는 집게를 손잡이로 사용했다. 새총 같기도 하다. <세종실록>은 ‘아녀자도 쏠 수 있다’고 설명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다연발 화살총

김지의 ‘승자총통’은 과연 어떤 무기였을까. 사실 조선은 개국초부터 개인 화약 무기 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세종 연간에는 다양한 소형화기를 제작했다. 화약 추진체로 화살 2개, 4개, 8개를 한꺼번에 쏘는 쌍전·사전·팔전총통 등 일발다전 총통을 개발했다. 그중 길이 13㎝, 구경 0.9㎝에 불과한 ‘세총통’은 ‘조선판 권총’이었다.

조선판 다연장로켓포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 연간(1451년) 개발된 신무기도 있었다. 화약 추진으로 화살 100발을 한번에 쏠 수 있는 다연장 로켓발사기(신기전기 화차)와 사전총통 50개 이상을 장착해서 화살 200개를 동시에 발사하는 사전총통기 화차가 그것이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세종실록>은 “1437년(세종 19) 군기감이 만든 세총통(細銃筒)은 (적정을 살피는 정탐꾼은 몰라도) 말 위에서 싸우는 기병에게 매우 편하고, 위급 시 어린아이나 여성들도 쏠 수 있다”(6월27일)고 설명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 연간(1451년) 개발된 신무기도 있었다. 화살 100발을 한꺼번에 쏠 수 있는 다연장 로켓발사기(신기전기 화차)와 사전총통 50개 이상을 장착해서 화살 200개 이상을 동시에 발사하는 시전총통기 화차가 그것이었다. 또 이시애의 난(1467) 이후 개발한 신제총통과 복전총통, 육총통, 주자총통, 측자총통 등이 있다.

‘화살전용’ 화약무기

조선은 개국초부나 개인화약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화약 추진체로 화살 2개, 4개, 8개를 한꺼번에 쏘는 쌍전·사전·팔전총통 등 일발다전 총통을 개발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나무 대신 진흙 사용

그런데 조선 전기에 개발된 개인화기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화살용’이라는 것이다.

‘화약의 추진력으로 화살을 한꺼번에 정확하게 많이, 멀리 쏘는 것’이 무기개발의 목표였다.

그러나 김지의 승자총통은 달랐다. 화살보다는 쇠탄환(혹은 납탄환)을 쏘기 위해 제작된 개인소총이었다.

화살추진 원리

조선 전기의 개인화기는 화살전용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화약의 추진력으로 화살을 한꺼번에 정확하게 많이, 멀리 쏘는 것’이 무기개발의 목표였다.

‘승자총통’은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고 손으로 화약선에 불씨를 붙여 최다 15발에 달하는 쇠탄환(혹은 납탄환)을 발사하는 구조였다. 기존의 화살 총통에서는 터지는 화약이 새어 나가지 않고, 발사하는 힘을 몰아주고 위해 격목(나무 장치)을 끼워넣었다. 그러나 승자총통에는 격목 대신 토격(진흙)과 종이를 쇠탄환과 함께 다져넣었다.

승자총통의 개발

1570~80년대 전라·경상 병사를 지낸 김지(1540~?)가 개발한 신무기인 ‘승자총통’. 개발되지마자 1583년 1~8월 이어진 ‘니탕개의 난’에서 큰 효험을 보았다. 조선군은 성문 앞으로 몰여오는 여진족에게 승자총통 세례를 퍼부어 패주시켰다.

이렇게 발사 보조장치를 바꾼 의미는 컸다. 발사 때마다 규격에 맞는 격목을 구하고 다시 끼우느라 낭비했던 시간과 정력이 대폭 줄어들었다. 구하기 쉬운 진흙을 다져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게다가 폭발하는 화약이 새지 않게 밀폐시키는 효과도 컸다. 그러니 장전시간이 한결 빨라지게 되었다. 총신도 기존 총통보다 2~3배 길어졌다. 그러니 사거리도, 정확도도 개선됐다. ‘승자총통’의 경우 화약 1냥으로 쇠탄환 15개를 발사하는데, 사거리가 600보(1보 : 125cm)에 달했다.(<화포식언해>) 승자총통으로 여진족의 소요를 막는데 큰 효험을 본 조선 조정은 다양한 승자총통 계열의 무기를 개발제작했다. 그 종류도 차승자·소승자·중승자·대승자·별승자 총통 등으로 분화한다.

‘쇠탄환’ 위주의 개인소총

‘승자총통’은 화약과 탄환을 장전하고 손으로 화약선에 불씨를 붙여 3~15발에 달하는 돌 및 쇠탄환을 발사하는 구조였다. |국립진주박물관 설명자료

■지향사격으로 난사

이 중 가늠자와 가늠쇠, 고리장치가 달려있는 소승자총통이 눈길을 끈다. 승자총통은 기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불을 붙인 심지가 타들어가 화약이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왜군의 주력화기는 사수가 방아쇠를 당겨 불심지를 화약에 점화하는 조총이었다. ‘조준사격’이 가능했던 조총에 비해 승자총통은 ‘지향사격’만 할 수 있었다.

진흙 장전장치

조선 전기의 ‘화살전용’ 총통에는 화살추진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화약과 화살 사이에 격목(나무)을 끼워넣었다. 그러나 김지가 개발한 승자총통에서는 격목 대신 진흙과 종이 등을 탄환과 함께 채워넣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소승자총통은 그러한 승자총통의 한계를 나름대로 극복하기 위해 ‘조총의 장점’을 도입한 개량무기였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설치되어 있고, 총받침대(일종의 개머리판)를 달아 나름 조준사격을 꾀하려 했던….

그렇다고 격발시점을 나름대로 조절할 수 있던 조총의 성능은 따라가지 못했다. 하지만 승자총통의 장점도 있었다.

나무 대신 진흙

조선전기 삼총통에 쓰인 격목. 승자총통의 개발과 함께 격목 대신 진흙을 사용하자 발사 대마다 격목을 구하고 다시 끼우느라 낭비한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한번에 적게는 3발에서 많게는 15발씩 난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몰려드는 적군을 방어하는 수성전에서 효용가치가 있었다. 1583년 벌어진 ‘니탕개의 난’ 때 종성부성을 공격하던 여진군이 승자총통의 난사를 받아 전멸된 사례가 그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대표적인 승첩인 행주대첩(1593년 2월12일) 때도 그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1만여명의 왜군 기병이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돌격했다…우리 군사들이 대·중·소 승자총통과 진천뢰 등 각종 화기를 쏘자 왜군의 전사자가 130여 명, 부상자가 100여 명 되었다…”(<선조실록>)

기중 새롭게 개발된 소승자총통은 비록 작아진 구경(1.3~1.7㎝) 때문에 쏘는 탄환도 2~3개로 줄었지만 정확도와 비거리는 더욱 향상되었다.

조준사격 가능한 조총

승자총통은 기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불을 붙인 심지가 타들어가 화약이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왜군의 주력화기는 사수가 방아쇠를 당겨 불심지를 화약에 점화하는 조총이었다. 사수가 발사 시점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었기에 조준사격이 가능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문헌에도 없는 소소승자총통

2012년 인양된 ‘소소승자 총통’은 명칭으로 보아 소승자 계열의 총통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소소승자 총통’과 관련된 문헌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소승자 총통’에서 관찰되는 가늠쇠와 가늠자, 개머리판 부착장치 등도 없다.

그렇다면 1570년대 개발한 ‘소승자총통’보다 1588년 제작된 ‘소소승자총통’의 질이 되레 떨어진 것일까.

조총의 장점 도입

‘조총의 장점’을 도입한 개량무기가 소승자총통이었다. 가늠자와 가늠쇠가 설치되어 있고, 총받침대(개머리판)을 달아 나름 조준사격을 꾀하려 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당대의 무기 제작자들은 여러 전투상황에 맞게 다양한 승자총통을 개발했다. 조총의 장점을 도입한 ‘소승자총통’이 전가의 보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는 조총처럼 방아쇠를 갖춘 격발장치가 개발되지 못한 때였으니까…. 아무리 정교한 소승자총통을 만들어봐야 조준사격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1588년 윤덕수 장인은 가늠자와 가늠쇠, 개머리판 설치장치 등을 없애 무게를 빼고 구경도 줄인 새로운 총통(소소승자)을 개발했을 것이다.

소소승자 총통은 현재까지 알려진 승자계총통 중에서도 구경(1.3㎝)이 가장 작다. 발사하는 탄환 수를 단발(1발)에 가깝게 줄이면서 정확도를 향상시키기 위함이었다.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소소승자총통을 위한 별도의 고정장치도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단다.

조총, 소승자총, 소소승자총의 차이

조선의 무기 제작자들은 여러 전투상황에 맞게 다양한 승자총통을 개발했다. 1588년 윤덕수 장인은 가늠자와 가늠쇠, 개머리판 설치장치 등을 없애 무게를 빼고 구경도 줄인 새로운 총통(소소승자)을 개발했을 것이다.

■소총부대장 이순신

여담이지만 이순신 장군 하면 먼저 해군이 떠오르고 삼도수군통제사의 직함이 눈에 아른거린다.

장군이 한때 소총부대, 즉 승자총통 부대의 소대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즉 이순신은 1587년(선조 20) 10월 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장형을 받은 뒤 첫번째 백의종군의 명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군이 1588년(선조 21) 1월27일 두만강 상류 녹둔도를 점거한 여진의 시전부락을 토벌할 때였다. 이순신은 이때 승자총통 등으로 무장한 소대를 이끌고 참전해 공을 세웠다. 당시의 시전부락 토벌내용을 그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에는 ‘우화열장’ 직함의 이순신 이름이 적혀있다.

소총부대장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첫 번 째 백의종군 때 벌어진 여진의 시전부락 토벌전(1588)에서 승자총통 등으로 무장한 소대를 이끌고 참전해 공을 세웠다.|육군박물관 제공

■벽파진 해전에서?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넋이 서린 명량해역에서 인양된 소소승자총통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수장된 것일까.

그렇다면 1597년 9월7일 벌어진 벽파진 해전을 떠올릴 수 있다. 벽파진 해전은 칠천량 패전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 장군이 벌인 두번째 전투이다. 또한 9일 뒤에 발발한 명량대첩의 전초전 성격으로 치러진 전투이기도 했다.

벽파진 해전일까

2012년 출토된 소소승자 총통은 언제 수장된 것일까. 먼저 인근해역에서 벌어진 벽파진 해전을 떠올릴 수 있다, 벽파진 해전은 9일 뒤인 16일 발발한 명량대첩의 전초전 성격으로 치러진 전투이기도 했다.

“9월7일 우리 배가 접근해오는 적선 13척을 공격했다. 달아나는 적선을 쫓은 뒤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밤 10시 적선이 포를 쏘며 공격했다. 나(이순신)는 ‘겁먹지 마라’는 엄명을 내렸고, 내가 탄 배가 적선 앞에서 포를 쏘자 적선이 물러났다.”

2012년 인양된 소소승자총통과 석환(돌탄환), 그리고 쇠뇌의 부속품(노기·방아쇠)이 이 벽파진 해전 당시 수장된 것일 수 있다. 또한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 직전(9월14일)까지 이곳 벽파진에 주둔하고 있었다. 주둔 중, 혹은 이동간 해저에 묻힌 유물일 가능성도 있다.

명량해전의 증언

1597년 9월16일 왜선 130여척이 명량해협을 향해 진군하자 단 13척으로 무장한 조선 수군도 즉각 반격에 나선다. 이순신 장군은 급히 노를 저어 돌진하면서 지자포와 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댔다. <난중일기> 1597년 9월16일자는 “마치 총통이 발사되는 광경이 바람과 우뢰 같았다. 우리 군사들이 배 위에서 빽빽하게 서서 빗발치듯 쏘아대니 적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고 썼다.

■명량해전에서?

발굴 인양지점에서 4.3㎞ 떨어진 울돌목(명량)은 어떨까.

9월16일 왜군이 130여척을 이끌고 울돌목으로 진격하자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13척도 맞서 나갔다.

이미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다”고 선언한 장군은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死卽生)살기를 도모하면 죽는다(生卽死)”고 외쳤다. 장군은 솔선수범, 급히 노를 저어 돌진하면서 지자포와 현자포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아댔다. <난중일기> 1597년 9월16일자는 “마치 총통이 발사되는 광경이 바람과 우뢰 같았다. 우리 군사들이 배 위에서 빽빽하게 서서 빗발치듯 쏘아대니 적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고 썼다. 장군이 앞장 서자 다른 장수들이 앞다퉈 나섰다.

13척의 배로…

조선군은 왜군을 향해 총통을 빗발치듯 쏘아댔고, 아군을 공격하던 적선 3척이 모조리 전복됐다. 왜군은 결국 133척 가운데 30여척을 잃고 패주하고 말았다. 그후 다시는 조선군 진영을 넘보지 못했다.

“적선 3척에 탄 왜적들이 거제현령 안위(1563~?)의 배에 매달려 서로 올라가려 했다…안위 군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웠고…나(이순신)는 배를 돌려 곧장 반격해서 각종 총통을 빗발치듯 쏘았다. 그러자 적선 3척이 모조리 전복됐다.”

결국 왜군은 출전한 133척 가운데 30여척을 잃고 패주하고 만다. 이후 왜군은 다시 조선 수군을 넘보지 못했다. 13척의 배가 이룬 실로 역사적인 승전보였다. 그렇다면 소소승자 총통과 석환, 노기 등도 격전의 와중에 해저로 빨려들어간 유물이 아닐까. 물론 인양 지점이 명량해전이 벌어진 울돌목과 다소 떨어져 있다는 것이 적극적인 해석을 주저하게 만든다.

하지만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 유적은 여러 유물이 서로 뒤엉켜 발견된다는 특징이 있다. 빠른 물살과, 그에 따라 생기는 소용돌이 현상 때문이다.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울돌목에서?

소소승자 총통과 석환, 노기 등도 명량해전의 와중에 해저로 빨려들어갔거나 이동간에 빠진 유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이 빠른 유속을 타고 벽파진 부근까지 밀려갔을 수도 있다.

■진품의 확증, 코어받침대

2021년 국립해양유산연구소는 ‘발굴 인양한 소소승자총통 3점을 보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심의기구인 문화재위원회가 두 번이나 ‘보류’ 판정을 내렸다. 한번은 ‘과학적인 조사의 필요성’ 때문에(2023년 7월), 또 한 번은 ‘총통의 제작 체계와 제작과정, 명문 등의 내용 보완 및 검토 필요성’(2024년 2월) 등을 이유로 내세웠다.

그중 첫번째 보류 이유로 꼽은 과학적인 조사는 지난해 말(2023년 12월) 완료됐다.

총통제작의 열쇠

소형총통은 주조할 때 코어가 한 가운데 정확하게 서있지 않으면 총신이 비뚤어진다. 이것을 막기 위해 코어를 정확하게 고정시켜주는 맞물림 코어받침대를 설치한다.|허일권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소형총통은 거푸집을 반으로 나누어 제작하고, 총구 내부를 만들기 위해 코어(내형)를 사용한다. 그런 다음 거푸집과 코어 사이에 쇳물을 부어 총구가 난 총통을 제작한다. 그런데 주조 때 코어가 한 가운데 정확하게 서있지 않으면 총신이 비뚤어진다. 이것을 막기 위해 코어를 정확하게 고정시켜주는 맞물림 쇠(M, L자형)를 설치한다. 코어받침쇠(채플릿)이다.

그런데 주조 때 이 코어받침쇠가 설치된 채로 쇳물을 붓기 때문에 총통의 몸체 내부에 그 흔적이 남는다.(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총의 길이가 길어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소형 총통에 예외없이 관찰되는 흔적이다.

그런데 CT(컴퓨터단층촬영) 조가셜과 인양된 소소승차 총통 3점에게도 그런 코어 받침쇠가 비슷한 위치에서 예외없이 보였다. 가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조의 흔적

주조 때 이 코어받침쇠가 설치된 채로 쇳물을 붓기 때문에 총통의 기벽 속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다. 총의 길이가 길어지는 조선 중기 이후의 소형 총통에 예외없이 보이는 흔적이다.|허일권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설명

■가짜 총통의 망령

또 승자계열의 총통 유물 가운데 해저에서 발굴 인양된 케이스는 딱 한군데 였다.

1994년 해군충무공해전유물발굴단이 전남 여수 신덕동 백도 근해에서 인양한 별양자 총통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보물지정이 계속 보류된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소소승자 총통과 관련된 문헌자료가 없고, 심화연구가 필요한 측면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마도 1992~1996년 세상을 들썩거리게 만든 ‘가짜 총통’ 사건의 악령 때문이리라.

1992년 8월 당시 한산도 앞바다에서 인양했다는 ‘귀함별황자 총통’은 일사천리로 국보(제274호)로 지정됐다.

진품 인정

2012년 인양된 소소승자총통에도 다른 소승자총통에서 확인되는 코어받침쇠의 흔적이 보였다. 진품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허일권 학예사 제공

‘거북선에 장착한 화포가 발견됐다’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었으니 국보 중 국보로 평가받을 만했다. 그러나 이 총통은 어이없게도 4년 만(1996)에 국보에서 전격 해제된다. 승진에 눈이 먼 이충무공 해전유물발굴단장(대령)이 가짜총통을 바다에 밀어넣고는 이를 인양한 것처럼 속인 사실이 적발됐다. 그런데 이 사건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이 여파 탓일까. 국립기관(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이 직접 발굴하고, 과학조사까지 마쳐 진품으로 확인된 소소승자총통의 보물지정이 늦어지고 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국내 수중 발굴의 염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이나, 혹은 판옥선이라도 해저에서 건져내는 것이다. 그런 숙원을 위해 오늘도 해저발굴에 나선다.

(이 기사를 위해 허일권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노영구 국방대 교수, 양순석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유물과학팀장, 이규훈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수중발굴과장, 최영창 국가유산진흥원장, 장한울 육군박물관 학예담당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11)

<참고자료>

문화유산청, <2024년 문화재위원회 1차 회의록>, 2023년 2월

국립해양문화유산연구소, <진도 명량대첩로 해역 수중발굴조사보고서, 2015

국립진주박물관, <조선무기 조사연구보고서:소형화약무기>, 2019

최영창, ‘화약무기의 기원과 발전’, <조선무기 조사연구보고서:소형화약무기), 국립진주박물관, 2019

허일권·김해솔, ‘국내 소형총통류의 형태변화와 제작기술’, <조선무기 조사연구보고서:소형화약무기), 국립진주박물관, 2019

국립진주박물관, <화력조선>(조선무기 특별전 전시도록), 2021

노영구, ‘조선전기 화약무기의 추이’, <화력조선>, 국립진주박물관, 2021

박제광, ‘임진왜란기 조선 수군의 화약병기’, <진도명량대첩로 해역 수중발굴조사보고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2015

허일권, ‘조선 청동제 소형 총통의 제작 기술’, 공주대 박사논문, 2021

 

<주>

 

 

 

(1) 서울시, 북-러와 '북방의 이순신' 흔적 찾는다 (daum.net)  2019. 12. 8. 

 

 

(2) https://v.daum.net/v/20240809083300316

 

 

(3) https://v.daum.net/v/20240611165156646

 

 

(4) https://v.daum.net/v/20240612201126220

 

 

(5) https://v.daum.net/v/20240420004138002

 

 

(6) https://v.daum.net/v/20240827050021883

 

 

(7) https://v.daum.net/v/20231226145401435

 

 

(8) https://v.daum.net/v/20240214143001836

 

 

 

(9)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802080948001

 

 

 

(10) 충무공 탄신 472주년..이상한 현충사 (daum.net) 2017.04.30. 

                       

 

 

(11)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406110500001

 

 

 

<참고자료>

 

 

 

 

충무공에 군수물자 댄 현건·현덕승, 오간 편지들 국보 지정 (daum.net) 2021. 4. 27.

 

 

 

이순신, 원균을 ‘흉악한 도적’에 비유 (hani.co.kr)2019-10-19

 

 

 

[단독] 이순신 종가 "현충사에 박정희 현판 내려라" (daum.net)2017.09.14. 

 

 

 

거북선 이번엔 찾을까 (hani.co.kr)200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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