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5. 12. 10. 19:46

조선 시대 임금의 얼굴 '용안'을 만나다 (daum.net)

국립고궁박물관 '어진과 진전'展

500년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후손들이 만든 드라마 속에 자주 불려나오는 인기 있는 임금이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태조를 연기하는 건 천호진이다.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정도전’에서는 유동근이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으나, 아들을 굶겨죽인 냉혈한이기도 했던 영조 역시 출연 빈도가 높은 군주다. 영화 ‘사도’의 송강호, 드라마 ‘비밀의 문’의 한석규가 영조를 연기했다. 사극 속 임금 하면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사도에서 소지섭이었고, 영화 ‘역린’에서는 현빈이 정조였다.

임금을 연기한 배우들은 빼어나게 잘생겼거나, 지금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실제 임금의 모습을 어땠을까. 태조와 영조는 “털끝 하나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초상화 제작의 원칙이 가장 충실하게 반영된 어진이 있다. 정조의 경우에는 표준영정이 있긴 하지만 현대적 상상의 산물이어서 실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어진이든 표준영정이든 임금의 얼굴에는 그들이 살아간 시대,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이 담기기 마련이다. 

 

◆“노년의 품격, 군주의 위용을 더한 태조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이 내년 2월까지 개최하는 특별전 ‘조선 왕실의 어진과 진전’에 가면 장년과 노년의 태조 얼굴을 친견할 수 있다. 노년상은 1872년에, 장년상은 1900년에 원본을 모사한 것이다. 노년상은 얼굴이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장년상은 1954년 화재로 거의 대부분이 훼손됐다. 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찍은 흑백사진을 토대로 훼손된 장년상을 복원했다.

복원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조선미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노년상은 위풍당당한 군주의 모습으로 노인임에도 눈에 정기가 가득차 있는데, 장년상보다는 부드러운 인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장년상과 노년상이 일견 인상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안면윤곽이나 이목구비가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평가했다. 조 교수는 다른 초상화의 장년상과 노년상은 윤곽선과 이목구비가 어느 정도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노년상은 장년상을 근거로 노년의 품격과 군주로서의 위용을 좀 더 가미해 그려낸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영조의 초상화는 ‘연잉군’으로 불린 왕자 시절 모습을 담은 예진과 재위 20년인 1744년 그린 어진 두 점이 있다. 예진 속 연잉군은 눈매가 날카롭고 수척하다 싶을 정도로 호리호리해 신경질적으로 보인다. “이복형인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의 극심한 대립 속에 불안한 생활을 했던” 당시의 처지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어진은 탁월하게 묘사된 수염이 인상적이다. 조 교수는 “우리나라 초상화에서 수염은 대단히 중시돼 화사들은 수염을 얼굴의 연장으로 본 듯하다”고 설명했다. 사도에서 송강호가 흰수염을 귀밑까지 덥수룩하게 분장한 것은 이 어진의 묘사 그대로다.

전시회에는 태조, 영조의 어진 외에 철종과 후대에 추존된 원종(인조의 생부), 문조(헌종의 생부)의 어진, 사진까지 전하는 고종, 순종의 어진이 전시되어 있다. 철종·문조·익종 어진은 얼굴의 일부가 훼손되어 있다. 문조 어진은 왼쪽 귀부분만 남아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상상의 산물 표준영정…역사성도 엄격히 심사

표준영정은 1호의 주인공인 이순신부터 고려의 외교관 서희까지 94점이 지정돼 있다. 이 중 12점이 임금의 영정이다. 태조, 영조, 철종 등의 영정은 현전하는 어진을 모사한 것이지만 세종대왕, 광개토대왕, 김수로왕, 태조 왕건 등의 영정은 창작품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주상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지정해 ‘표준’이라고 정해 놓은 그림을 작가의 상상에만 맡겨두지는 않는다. 얼굴은 물론 복식, 머리모양, 장식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해야 한다.

영정심의위원인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영정 제작은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생김새나, 복식, 기물 등은 사료와 대조해 구체화한다”며 “얼굴은 후손을 만나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을 추출해내 표현한다”고 말했다.

임금이 아니어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5만원권 주인공 신사임당의 영정은 제작과정에서 역사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다시 그리기도 했다. 신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 여성의 옷은 저고리춤이 길고 소맷자락이 널찍했다. 그러나 작가가 그린 영정은 짧은 저고리춤에 좁은 소맷자락으로 18세기 작품인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와 비슷한 모습이어서 다시 그려야 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 수정 2019-10-20 17:20 등록 2008-04-21 14:24

[블로그] 조선의 왕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hani.co.kr)

함흥 본궁에 있던 이성계의 장년 시절 초상 / 한겨레 블로그 도시인

오늘은 지난번에 이어 조선 시대 왕들의 초상(어진이 정확한 말이지만, 그냥 쉽게 초상이라고 하겠습니다)에 대해 한번 다뤄보려고 합니다. 지난번 글에서 다뤘듯 조선의 왕 가운데 생전의 모습을 담은 초상이 남아있는 사람은, 사진을 남긴 조선 말기의 고종과 순종을 제외하면 태조 이성계, 영조, 철종 등 세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남긴 초상은 모두 5장입니다. 왜냐하면 태조와 영조가 각각 2장의 초상을 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태조부터 한 사람씩 초상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조는 널리 알려진 늙은 시절의 초상이 전주의 경기전에 전해옵니다. 현재는 이성계의 본관인 전주시의 경기전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늙은 시절의 초상은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거니와 상당히 단정하고 안정감 있는 모습입니다.

 

전주 경기전에 있는 이성계의 노년 시절 초상

 

여기서 이성계의 모습은 앉은 품이 위엄이 있고, 당당한 보이지만, 얼굴에서 노인으로서의 노쇠함을 감추지는 못합니다. 얼굴이 갸름하고 눈이 작아서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작은 눈도 매서워 보이기보다는 조금 힘이 없어 보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이성계의 60대 이후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태조의 이 초상이 한반도의 변방, 또는 한반도 밖의 여진족 거주지 부근에서 태어나 무인으로 자란 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이성계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애초부터 제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이성계의 젊은 시절 초상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2006년 언론에 이성계의 젊은 시절 초상을 찍은 흑백 사진이 공개됐습니다. 유리원판 형태 사진으로 발견됐다고 하는데, 저는 이 흑백 초상을 보자마자 이것이 이성계의 진면목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공민왕(오른쪽)과 노국공주의 초상 / 한겨레 블로그 도시인

 

이 초상에서 이성계의 얼굴은 왕이라기보다는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눈이 늙은 시절 초상에서처럼 작지만, 여기서는 훨씬 더 매섭고 날카롭고 살아 있습니다. 더욱이 옆으로 툭 튀어나온 광대뼈나 움푹 패인 볼, 이를 악문 듯한 턱뼈의 모습 등에서 저는 최영과의 일생일대의 대결에서 승리한 그 강인한 승부근성을 봤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40~50대의 이성계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자이기 때문에 다른 왕들과 달리 초상이 전주 경기전, 함흥 본궁, 평양 숭녕전, 서울 선원전·영희전 등 8곳에 보관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말탄 초상까지 포함해 모두 25~26점이 있었다고 문화재청의 자료실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초상화로는 1점, 초상을 찍은 사진으로 1점 등 2점만 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초상 한 장 남기지 못한 다른 왕들에 비하면 그나마 이성계는 엄청난 행운아입니다.

이성계와 함께 2점의 모습을 전하는 또 한 사람은 영조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영조는 2장의 초상을 전하는 한국 역사상 단 한 사람의 왕입니다. 태조의 초상은 1점만 전하는 것이고, 하나는 초상을 찍은 사진일 뿐입니다. 고려 공민왕이나 세조와 같은 왕들의 초상이 전하기도 하지만, 이것들은 정식 초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세조의 초상 / 한겨레 블로그 도시인
영조의 장년 시절 초상 / 한겨레 블로그 도시인

 

영조의 어진은 이성계의 늙은 시절 어진과 마찬가지로 교과서에서 실려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초상은 이성계의 어진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면이 아니라, 약간 옆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전신상이 아니라, 반신상이라는 점입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라, 왜 영조의 초상이 전신상이 아니고 약간 옆모습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정면으로 전신을 그린 초상보다 약간 옆면으로 반신을 그린 초상이 좀더 세련된 조선 후기 형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연잉군 시절의 영조의 모습 / 한겨레 블로그 도시인

 

영조의 초상에서는 조선 때 가장 오래(52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영조의 성격적인 측면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영조는 얼굴이 길고 코도 긴 사람인데, 일반적으로 긴 얼굴과 코는 지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이 초상만 보면, 저는 영조가 상당히 지적이고 사려깊은, 그래서 아마도 정치력도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둘째로 영조는 매부리코를 가진 사람입니다. 매부리코를 가지려면 코가 크고 날카로워야 하는데, 그것은 이 사람이 가진 카리스마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영조는 탕평책과 균역법 시행, 청계천 준설, 신문고 설치 등 과단성 있는 개혁으로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서 굶어죽일 정도로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길고 날카롭게 위로 향한 눈도 그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영조는 조선 왕 가운데 유일하게 대군, 또는 왕세제 시절의 모습도 남기고 있습니다. 1950년 내전 당시 부산에서 조선 임금들의 초상이 불에 탈 때 간신히 건져낸 초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부가 타기는 했지만, 연잉군 때의 이 초상을 보면, 영조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 초상에서 영조의 표정을 보면, 어른이 된 다음의 모습보다 더 어두워 보입니다. 아마도 후궁의 아들로 태어나 노론과 소론의 틈바구니에서 왕세제가 됐다는 점이 그를 얼마간 힘들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코와 턱 밑의 작고 까만 수염은 귀엽습니다. 장년 시절의 초상과 마찬가지로 이 초상도 정면이 아니라, 약간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강화 도령 철종의 초상 / 한겨레 블로그 도시인

 

이 초상이 장년 때의 초상과 다른 점은 영조의 젊은 시절 영조의 얼굴이 그렇게 길지 않았고, 눈도 그렇게 위로 째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초상을 그린 사람이나 그린 각도에 따라 조금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저는 여기서 독특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왜냐면 보통 사람의 얼굴은 나이가 들면서 둥글어지고, 눈꼬리도 나이가 들수록 아래로 처지게 마련입니다. 살이 찌고 살갗이 처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조는 그 반대로 얼굴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영조는 나이가 들수록 기가 성하고(눈이 올라가고) 더 현명해진(얼굴이 길어진) 것일까요?

마지막으로 반쯤 타버린 철종의 초상을 보겠습니다. 저는 철종의 초상을 보면서 어쩌면 제가 상상한 모습과 이렇게 닮았을까 하고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애초에 저는 강화 도령이라는 별명처럼 철종이 되게 순박하고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초상을 보면, 철종은 얼굴이 동그란 편이고 눈이 크고 동그랗습니다. 사람이 좋고 착한, 나쁘게 말해서 조금 생각이 없고 맹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물론 얼굴이 둥글고 눈이 큰 사람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상이나 관상이 반드시 그 사람의 성격과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종의 불탄 초상을 복구한 초상 / 한겨레 블로그 도시인

 

이 초상에서 더욱 재미있는 것은 철종이 그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도 무장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오른손에 든 지휘봉(?)이나 옆에 세워둔 칼도 이 복장이 무장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무장한 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조정에서 업무를 볼 때의 모습은 아니고, 사냥이나 활쏘기에 나설 때의 모습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강화도에서 나무하며 시골뜨기로 살았던 철종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참 재미있습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불탄 부분을 복원한 초상이 나오던데, 이것도 참고로 붙입니다. 이 초상은 더 맹한 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이렇게 조선의 왕 세 사람의 초상을 살펴보았는데요. 사실 이렇게 글을 마칠 수밖에 없어서 참 아쉽습니다. 저는 조선 왕 가운데 태종 이방원에게 상당히 흥미를 갖고 있는데요. 불행히도 이방원의 초상은 전하지 않습니다. 그의 초상이 있다면, 제가 이 글의 첫머리에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아버지 이성계와 매우 닮았다고 합니다. 이성계의 아들이자 세종 이도의 아버지로 실질적인 조선의 건국자였던 이방원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이방원 역할로 나온 탤런트 유동근과 닮았을까요? 참으로 궁금한 노릇입니다. 허망한 생각이지만, 어느 박물관이나 수집가의 창고에서 갑자기 태종의 초상이나 초상을 찍은 사진이라도 발견된다면 좋겠습니다.

이번 글은 쓰고 나서도 사라진 왕들의 초상들에 대해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드는데요. 그러면 다음번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입력 2007-12-01 03:02업데이트 2009-09-26 02:38

◇ 제왕의 책/윤희진 지음/255쪽·1만3000원·황소자리

 

책과 권력의 관계는 늘 흥미로운 소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숨겨진 책 ‘시학 2권’에 대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시경’ 빈풍 편에 등장하는 시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이이화의 ‘영원한 제국’을 떠올려 보라.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무슨 책을 읽었다는 것이 화제가 되고 최고경영자(CEO)의 애독서 리스트가 기사가 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사 인물이야기’의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기록에서 고려 광종부터 조선 고종까지 주요 임금의 애독서를 찾아내고 당대 정치의 함수관계를 풀어냈다.

고려 광종이 애독한 책이 당 태종 시대 통치를 기록한 ‘정관정요’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광종은 고려 태조 왕건의 스물다섯 왕자 중 하나로 배다른 형(혜종)은 물론 친형(정종)까지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당 태종은 당 고조의 스물두 명의 아들 중 하나였으나 역시 친형과 친아우를 죽이고 아버지까지 유폐시킨 뒤 왕위에 올랐다. ‘나보다 더한 당 태종도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는데…’라는 오기를 느낄 수 있다.

광종을 닮은 조선 태종은 어떨까. 이복동생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뺏긴 뒤 울분에 잠긴 그에게 조준은 ‘대학연의’를 선물하며 “이 책을 읽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뼈 있는 말을 전한다. 대학연의는 남송 때 주자학파의 일원이었던 진덕수가 경서(經書)인 ‘대학’과 사서(史書)인 ‘자치통감강목’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제왕학의 교본으로 삼은 책이다. 한마디로 군주가 도덕수양을 닦으면 태평성대가 절로 열린다는‘무위이화(無爲而化)’의 경지를 찬미한 내용이다. 따라서 이후 무력으로 이룬 태종의 정권 탈환 과정과는 거리가 있는 책이다. 그러나 태종은 즉위 초부터 이 책을 끼고 사는 것을 만방에 과시한다. 자신의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는 수건으로 사용한 것이다.

조선시대 제왕의 애독서는 이 같은 이중성을 지닌 경우가 많다. 성종이 ‘소학’을 애독한 것은 한편으로 신진 사대부층인 사림세력을 포섭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폐비 윤씨 문제에 대한 윤리적 방패막이로 사용한 것이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전자는 사림의 종정인 김종직이 ‘소학’을 국가적 필독서로 삼을 것을 주창한 것을 말한다. 후자는 성종이 성인이 된 뒤 소학의 내용을 부쩍 강조한 것이 그가 폐비 문제를 들고 나온 집권 8년 이후라는 점에서 그렇다. 수신제가(修身齊家)를 강조하는 대학의 논리에 입각하면 가장인 성종의 부덕(不德)의 소치가 될 일을, 교화(敎化)를 강조하는 소학의 논리에 따라 부인 윤씨의 부덕(婦德)의 미비로 몰고 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후 조선 국왕들의 애독서는 철학서인 ‘경서’로 흐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는 신권(臣權)이 강화되면서 싫든 좋든 국왕의 내면적 덕성을 강조하는 책을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효종이 ‘심경’을 경연과목으로 처음 채택한 것이나 영조가 ‘예기’를 읽으면서 연출된 눈물을 흘린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예외는 무려 249권에 이르는 대하역사서 ‘자치통감’을 여러 차례 통독한 세종과 말년에 점술서 ‘주역’에 몰두한 선조 정도였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탐닉한 두 군주의 이유는 달랐다. 세종이 철학에 심취한 신하들의 좁은 식견을 뛰어넘기 위해 역사에서 답을 구했다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난세를 살았던 선조는 현실도피의 심정으로 점술서에 심취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이 책에서 다룬 책 중에 ‘제왕의 책’에 부합하는 서적은 드물다. 차라리 ‘한비자’나 ‘관자’를 읽었다면 어땠을까. ‘무위이화’의 경전으로 읽히던 ‘서경’에서 군주의 적극적 역할을 읽어낸 정조의 탁견이 새삼 돋보이는 이유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이성계는 몽골인? 漢字만이 아는 역사의 비밀! | Save Internet 뉴데일리 (newdaily.co.kr)

 

김필재 뉴데일리 논설위원

입력 2012-10-24 09:46  수정 2013-01-29 13:01

朝鮮의 開國공신: '쿠란투란티무르(李之蘭)' 이야기

漢字를 익히니 우리 歷史가 보인다.

金泌材   /조갑제닷컴  
 
조선(朝鮮)의 개국(開國)공신 이지란(李之蘭)의 원래 이름은 古論豆蘭帖木兒(고륜두란첩목아)라고 한다. 李之蘭은 그의 본명(本名)에서 알 수 있듯이 북방민족, 그 가운데서도 여진족(女眞族) 출신이다.

이지란(李之蘭)은 여진족의 천호(千戶)였던 阿羅不花(아라불화)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 집권 시기에 휘하의 부족들을 이끌고 고려에 귀화해 함경도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이(李)씨성과 청해(靑海)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지란(李之蘭)의 원래 이름인 古論豆蘭帖木兒는 ‘쿠란투란티무르’라는 여진족(女眞族) 이름을 한역(漢譯)한 것이다.

李之蘭의 아버지 이름도 매우 특이한데, 아라불화(阿羅不花)의 ‘아라(阿羅)’는 ‘화살’(arrow)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북방 민족 단어인 ‘아라(阿羅)’가 과거 훈족(匈奴族)이 서진(西進)하면서 그대로 영어(英語)발음으로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의 고대 국가인 가야(伽倻)연맹 왕국 중에도 아라가야(阿羅伽倻)가 있는데 ‘아라(阿羅)’가 화살을 의미한다면 가야(伽倻)도 신라(新羅)와 마찬가지로 활을 잘 쏘는 북방민족의 국가임을 알 수 있다. 

 

태조(太祖) 이성계 부친(父親)의 원래 이름은 ‘울르스불카’

 

李之蘭의 이름과 비슷한 여진족(女眞族)들은 조선(朝鮮) 건국 이후 대거 한반도 북부에 들어와 살았다.

《조선왕조실록》인터넷 홈페이지에서 ‘帖木兒’(첩목아: 여진 발음 ‘티무르’)가 들어가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총 343건이 검색됐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성계(李成桂)의 할아버지 이춘(李椿)의 원래 이름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원문: 度祖諱椿, 小字善來, 蒙古諱孛顔帖木兒, 受宣命襲職。

(해석: 도조(度祖)의 휘(諱)는 이춘(李椿)인데, 어렸을 적의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蒙古) 이름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이다. 선명(宣命)을 받아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재미삼아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 이름을 찾아 보았다.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원문: 桓祖諱子春, 蒙古諱吾魯思不花。 齠齕異凡兒, 稍長善騎射, 及其襲職, 士卒樂附。 咬住稍長, 桓祖欲以職事歸之, 咬住讓而不受。 咬住後從桓祖, 來見恭愍王, 王屬之亏多赤, 官至中順軍器尹。

(해석: 환조(桓祖)의 휘(諱)는 이자춘(李子春)이니,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다. 7, 8세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해지자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는데, 관직을 이어받으매 사졸(士卒)들이 즐거이 붙좇았다. 교주(咬住)가 점점 장성하매, 환조가 직사(職事)를 그에게 돌려주고자 하니,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교주가 뒤에 환조를 따라 공민왕(恭愍王)을 뵈오니, 왕이 우다치(亐多赤) 에 소속시켰다. 벼슬이 중순군기윤(中順軍器尹)에 이르렀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상이 모두 북방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부(祖父)의 이름에는 역시 ‘티무르’가 들어가 있었으며, 부친(父親)의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다. 중국 홈페이지에서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의 영어발음을 검색해 보니 ‘Ulus-Buqa’로 원래 발음은 ‘울르스불카’였음을 알 수 있다.

 

투르크語 ‘티무르-테무르’는 ‘쇠’(鐵: 철)를 의미

 

티무르(Timur)는 투르크계 단어로 '철'(鐵, iron)을 의미한다.

‘티무르’는 매우 흔한 북방민족의 이름이다. 중앙아시아 몽골 투르크계 군사 지도자였던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 이름이 바로 ‘티무르’(재위기간: 1370~1405년)였다. 북방 민족들은 고대로부터 철을 잘 다뤘는데, 투르크어(語) ‘티무르’ 또는 ‘테무르’가 바로 '쇠'(鐵: 철)라는 의미로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보르지기다이 에르데니 바타르’ 내몽골대학 교수는, 1392년 조선(朝鮮)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는 몇 대에 걸쳐 성장한 고려계 몽골 군벌 가문 출신으로 원(元)나라의 직할 통치기구인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서 거의 100년간 몽골 관직을 맡아 세력을 쌓았다고 설명한다.

바타르 교수는 이성계(李成桂) 가문은 직계 4대조까지 모두 북방 민족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성계 자신도 북방민족 계통의 원래 이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자(漢字)를 공부하니 우리 역사(歷史)가 보인다. 한글 전용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歷史를 배우기 위해서라도 漢字를 익히라 권하고 싶어 몇 자 적어 보았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김필재(金泌材) spooner1@hanmail.net

 

 

경향신문 선임기자입력 2021. 2. 15. 06:00수정 2021. 2. 16. 18:48

 

조선을 다스린 임금 27분 가운데 무려 262년간이나 ‘임금’ 대접을 받지못한 분이 계신다는 거 아십니까.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44곳 중 40곳) 중에 폐위된 연산군(10대·1494~1506)·광해군(15대·1608~1623)묘와 함께 그 임금 부부의 능(후릉)이 빠졌답니다. 그거야 그 부부의 능이 북한 땅(개성)에 묻혀있으니 불가피하다 칩시다. 태조의 정부인이자 태종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도 황해도 개풍에 묻혀있어서 제외되었으니 말입니다.

정종과 그의 부인 정안왕후가 묻힌 후릉. 현재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에 있다. 조선시대 땐 개성부가 관리했다. 능이 북한에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일단 빠졌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아들이 15명이나 되었는데…

아니 그런데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 조차도 그 분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답니다. 대체 어떤 분이기에 세종대왕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을까요. 자초지종을 풀어봅시다. 그 문제의 임금이 바로 조선의 제2대 임금인 정종(1357~1419·재위 1398~1400)입니다. 정종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아들인 영안대군 이방과인데요. 나름 고려 말에 왜구 토벌에 나름의 공적을 세웠답니다. 그러나 조선 왕조 창업에는 참여하지 않아서 태조의 꾸지람을 들었답니다. 사실 차남이었기에 왕위와도 거리가 멀었죠. 그런데 고려의 충신을 자처한 장남(이방우·1354~1393)이 술병으로 죽은 뒤 어쩔 수 없이 맏아들 노릇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천성이 권력하고는 거리가 멀었나 봅니다. 1398년(태조 7년) 정안대군 이방원(태종)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때는 황급히 성을 넘어 숨어버렸다는 일화도 있어요. 난이 수습되고, 세자 책봉 문제가 불거지자 이방과는 “조선 왕조가 개국하기 까지는 모두 정안군(5남 이방원)의 공이 크며 나는 세자가 될 수 없다”고 버텼는데요. 하지만 이방원이 굳이 사양하자 어쩔 수 없이 세자가 됐답니다.

결국 자식들 간 피바람에 염증을 느낀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양위로 임금이 됩니다. 그러나 허수아비 임금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398년(태조 7년) 11월7일 <태조실록>에 묘한 기사가 등장합니다. 정종이 사가에 있을 때 첩이던 류씨를 후궁으로 들이고 아들을 자처하는 ‘불노’라는 인물을 갑자기 원자로 삼은 겁니다. 사실 정종의 정부인은 정안왕후 김씨(1355~1412)였는데요. 부부 금슬은 매우 좋았지만 자식은 두지 못했습니다. 정종은 대신 8명(혹은 10명)의 첩에게서 15남 8녀의 자식을 두었는데요.

정종과 태종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제릉)도 역시 북한 개성(상도면 풍천리)에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빠졌다.|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동생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형’

그런데 정종은 어느날 갑자기 ‘불노’라는 아들을 ‘원자’로 삼았다는 겁니다. 원자가 무엇입니까. 아직 왕세자로 책봉은 되지 않았지만 임금의 맏아들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그러자 이방원의 측근들은 바싹 긴장했습니다. 자칫 ‘죽쒀서 개 줄 판’이었으니까요. 이방원의 최측근인 이숙번(1373~1440)은 “공신들이 목숨을 걸고 공(이방원)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데, 지금 ‘원자’라는 사람이 궁중이 있으니 화근이 될 것”이리고 경고했답니다. 남재(1351~1419)는 대궐 뜰에 나타나 큰소리로 “속히 정안군을 세자로 정해야 한다”고 외쳤고, 이방원의 책사인 하륜(1347~1417)도 2차 왕자의 난(1400년 1월27~28일) 직후 “하늘과 백성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정종을 겁박했습니다.

 

심상치않게 돌아가는 낌새를 눈치챈 정종은 당신이 원자로 삼은 불노를 두고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정종는 한술 더 떠 슬하의 아들 15명에게 “전원 출가하라”는 명까지 내립니다. 정종도 사람이어서 잠깐 권력욕심을 부렸다가 ‘앗 뜨거’ 싶었나봅니다. 정치, 아무나 하는 거 아니죠.

오죽하면 정종의 정부인인 정안왕후가 동생(이방원) 이야기만 나오면 부들부들 떠는 남편(정종)에게 “전하께서는 왜 동생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느냐, 빨리 양위해서 편히 사시라”고 간곡하게 청했다고 합니다.(<연려실기술>) 아닌게 아니라 이복 동생들을 무참히 죽이고, 동복 형(방간·미상~1421)까지 쫓아낸 이가 동생(이방원)이 아닙니까. 정종이 불노를 세자로 고집했다면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정종은 공식적으로 15남 8녀의 자식을 두었다. 정부인인 정안왕후와는 자식이 없었지만 후궁들에게서 많은 자식을 낳았다. 조선왕조에서 자식을 많이 둔 역대 임금 중 4위를 달린다.


■‘상왕’ 보직이 더 행복했던 임금

정종은 왕위를 동생에게 내주려 합니다. 원래는 동생을 후사로 책봉했으니 ‘왕세제’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종은 “지금 이 순간 과인은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고 선언하고 동생을 ‘왕세자’로 책립했습니다. 정종은 동생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삼아, 즉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한 거죠.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이방원의 입김이 작용했겠겠죠. 이방원으로서는 ‘두차례의 골육상쟁에 이어 형의 왕위까지 찬탈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는 없었겠죠. 가장 좋은 방법은 태조로부터 직접 왕통을 승계한 것으로 종통을 꾸몄던 겁니다. 정종은 그 해 11월(1400년) 동생 정안군에게 왕위를 물려줍니다. 상왕으로서 정종의 삶은 외려 행복했답니다. 격구와 사냥, 온천, 연회 등을 즐기면서 19년 간이나 살다가 1419년(세종 1년) 승하했습니다.

1398년11월7일자 실록. 정종에게 갑자기 ‘불노’라는 아들이 등장하고, 정종은 그 아들에게 ‘원자’의 칭호를 부여한다. ‘원자(元子)’는 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을 뜻한다. 그러자 이방원의 측근들이 거세게 반발한다.


■조선의 2대 임금은 ‘공정왕’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조선의 2대 임금을 ‘정종’이라 했죠. 그러나 정작 왕실이 공식적으로 올려주는 ‘정종’ 묘호를 받기까지 무려 262년이나 걸렸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기서 세종대왕(1418~1450)이 등장합니다. 세종은 정종 사후에 묘호를 내려야 할 때 매우 이상한 말을 남깁니다. 즉 “과인의 생각으로는 사시(賜諡·명나라가 내려주는 묘호)만이 허락될 뿐, 사시(私諡·조선 조정이 올리는 묘호)는 올릴 수 없을 것 같다”(<세종실록> 1419년 11월 29일)고 발언한 겁니다.

세종의 이 발언 때문에 정종은 명나라가 내려주는 ‘공정’의 묘호만 인정되고, 조선 조정이 공식적으로 내리는 묘호(정종이나 태종이나 세종과 같은)는 받지 못했답니다. 명나라가 내리는 묘호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겠지만 조선 왕실에서는 절대 정통으로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조선의 2대 임금은 ‘공정왕’이라고만 했답니다.

전통적으로 왕조의 창업주에게는 ‘태조’, 2대 황제(임금)에게는 ‘태종’의 묘호를 올렸다. ‘태종’은 태조의 적통인 제1대 종자(宗子·종가의 맏아들)에게 올리는 묘호였다.


■태조와 태종의 차이

세종은 왜 이런 각박한 결정을 내렸을까요. 한마디로 큰아버지인 공정왕을 조선의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의 속내는 어머니(태종의 정비·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승하 직후 능의 조성을 두고 논의를 벌이면서 드러납니다. 즉 세종은 “부왕(태종)의 승하하신 뒤에는 반드시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으실 것”(<세종실록> 1420년 7월17일)이라고 한겁니다. 이 무슨말일까요.

세종은 만약 부왕이 돌아가시면 그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밝힌 거죠. 이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로부터 창업군주에게는 주로 ‘태조’의 묘호를 붙였고, ‘태조’를 계승한 이를 ‘태종’이라 했거든요. 그래서 중국 송나라-요나라-금나라-원나라가 줄줄이 2대 황제를 태종이라 했답니다. 한마디로 ‘태종’은 태조의 적통인 제1대 종자(宗子)에게 올리는 묘호였던 겁니다.

그런 예법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은 2대 국왕, 즉 훗날 정종이 되는 공정왕의 묘호는 당연히 ‘태종’이어야 했죠. 하지만 정종은 ‘태종’은 커녕 묘호 조차 받지 못한채 ‘공정왕’의 이름을 얻는데 그쳤던 겁니다. 세종은 곧 “조선의 적통은 ‘태조-정종-태종’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태조-태종’으로 곧장 이어진다”는 것을 선언한 거죠.

월북화가 이여성(1901~?)의 ‘격구도’. 정종은 왕위를 동생 이방원에게 넘긴 뒤 격구와 사냥, 온천, 연회 등을 마음껏 즐기며 19년을 더 살다가 1419년 승하했다.|렛츠런파크서울말박물관 소장


■“원래 태종의 나라였다”

세종의 이러한 발언은 후대 임금들에게도 금과옥조가 됩니다. 공정왕의 묘호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양위를 받은 태종과, 예의범절이 지극한 세종이 공정왕에게 묘호를 내리지 않은 데는 ‘반드시 그 깊은 뜻이 있었을 것(必有深意)’”이라는 조정의 공론이 일었습니다. 그나마 1469년(예종 1년) 예종이 공정왕에게 ‘희종’이라는 묘호를 내리도록 결정했습니다.(<성종실록> 1475년 1월 15일)

그러나 예종이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답니다. 성종 때(1482년 7월 20일) 또다시 이 문제가 거론되자 일부 신료들이 ‘태종과 세종의 깊은 뜻(深意)’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답니다.

“(왕자의 난 이후) 나라는 태종의 소유였는데, 다만 형제의 차례 때문에 공정왕에게 양보했습니다. 공정은 즉위 3년 만에 태종에게 도로 양위했는데….”

원래 태종의 나라였는데, 나이 때문에 잠시 형(공정)에게 맡겼고, 그것을 3년 만에 되찾았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정왕의 나라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태종은 처음부터 형을 ‘적통 임금’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이후에도 홀대는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정종의 신위는 제사 때도 철저히 무시됐는데요. 더욱이 정종의 신위는 성종 때 영녕전의 협실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제사 때도 무시 당했죠.

예컨대 1475년(성종 6년) 회간왕(1438~1457)의 부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공정왕이 종묘의 정실에서 협실로 쫓겨나는 일이 벌어집니다.(<성종실록> 1475년 9월16일) 즉 성종의 아버지이자 인수대비의 남편인 회간왕은 20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요. 회간왕이 덕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그 신위가 종묘로 옮겨 봉안하게 됐는데, 그 때 공정왕이 우선 순위에서 밀려 협실로 쫓겨난 거죠. 정식군주였는데도 추존왕에게 밀린 셈이니 얼마나 원통했겠습니까.

4개월간 숙의 끝에 숙종은 공정왕의 묘호를 ‘정종(定宗)’이라 결정한다. ‘백성을 편안하게(定) 한 임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무려 262년만의 복권이었다.|임민혁의 <왕의 이름, 묘호>, 문학동네, 2010년에서


■“그 분들도 불편했을 것”

공정왕의 한은 승하한 지 262년이 지난 숙종 7년(1681년)이 돼서야 풀립니다. 그해 5월18일 선원계보(왕실족보) 교정청이 어첩(왕실의 계보를 뽑아서 적은 접책)을 수정하던 중 열성조의 묘호 가운데 공정왕의 묘호가 빠진 것을 발견하고 숙종에게 보고한 겁니다. 숙종은 이후 4개월간이나 대신들의 자문을 받는데요. 결론은 공정왕의 묘호가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드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중추부사 송시열(1607~1689)의 상언이 재미있었죠. 즉 “태종이 평소 조용히 살고자 하는 공정왕의 뜻을 받들어 묘호를 올리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편치 않았을 것”(<숙종실록> 1681년 9월14일)이라 했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지만 뭐 어떻습니까. 숙종이 “당장 묘호를 올리라”는 명을 내리자 불과 4일 후인 9월18일 공정왕의 묘호를 ‘정종(定宗)’으로 정했답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定)’는 뜻을 담았습니다.

무려 262년만의 복권이었던 셈이죠.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종으로서는 임금 노릇 하고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요. 그나마 빨리 그 짐을 벗어던졌으니 발 쭉 뻗고 마음 편히 오래 산 것이 아닐른지요. 지금 정종과 정안왕후의 무덤(후릉)은 지금 북한에 뚝 떨어져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지도 못했지만 뭐 어떻습니까. 통일이 되거나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추가 등재될 수도 있겠죠. 그게 대수겠습니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unghyang.com

 

 

 

경향신문 선임기자입력 2021. 7. 27. 05:00수정 2021. 7. 27. 10:09

서울 공평동에서 확인된 ‘주전’은 세종 연간에 발명되어 흠경각에 설치된 자동물시계인 옥루의 부품일 가능성이 짙다. 주전은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가 방출해서 자동물시계의 시보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이다. 사진은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이 복원한 옥루의 주전 위치이다.


“아니 저건….” 2016년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 연구원 등 6개국 공동연구진은 칠레의 라스 캄파나스 천문대에서 전갈자리의 한 별을 둘러싼 가스 구름을 관측하다가 깜짝 놀랐다.

이 별의 움직인 방향과 속도를 계산하다가 지구 반대편, 그것도 579년 전인 조선의 <세종실록> 1437년(세종 19) 2월 5일(음력) 기록을 떠올린 것이다.

 

■네이처가 주목한 세종의 ‘객성’ 관측

 

“객성(客星·신성)이 미성(尾星·전갈자리)의 둘째 별과 셋째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셋째 별에 가깝기가 반 자 간격쯤 되었다.”(<세종실록>)

<세종실록>은 “특히 객성이 14일간이나 나타났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579년 후인 2016년 칠레 천문대에서 6개국 연구진이 관측한 별이 바로 조선의 천문관이 1437년 묘사한 바로 그 객성과 동일한 별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 별의 가스구름은 1437년 폭발한 신성(객성)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세종 시대의 관측기록이 579년 후 현대천문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된 셈이다. 2017년 8월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지금도 매우 드물게 관측되는 신성 관측 시점을 역사서에서 명시했다는 것을 평가해서 이 논문을 별도의 뉴스로 뽑아 소개했다.

그렇다면 세종 시대의 ‘신성(객성)’ 관측은 우연이었을까. 아니었다.

세종은 즉위 직후인 1420년(세종 2년) 첨성대(훗날 간의대)를 세워 별자리를 관측하도록 했다. 또 천문·지리·역법·측후·옥루(물시계) 등 사무를 관장하는 서운관(훗날 관상감)을 설립했다.

서운관의 총책임자는 영의정이었고, 2인의 장관급 관리가 보좌했으며 65명의 관리가 배속됐다.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가 천문대장과 기상청장을 겸한 것이다. 천문관측은 정교했다.

일·월식, 지진, 혜성, 신성 등의 천문 이변이 일어나면 출현시각, 모양과 정도, 위치, 변화 등을 매뉴얼에 따라 기록한 보고서(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를 4부씩 작성해서 올렸다. 서운관 관리들을 하루 밤낮을 5교대로 입직해서 관측해야 했다. 덕분에 1437년 ‘객성(신성)’을 관측할 수 있었다.

2007년 남문현 전 건국대교수가 복원한 자격루. 이번에 확인된 ‘주전’이 중종 때 설치한 보루각 자격루의 부품일 수도 있다.


■왕위를 내걸고 천문학에 ‘올인’

궁금증이 든다. 세종이 그렇게 하늘의 변화에 예민했던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단순히 천문학 발전을 위해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세종은 1420년(세종 2) 지진이 일어나고 혜성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 직접 첨성대에 올라가 관측한 다음 정사를 긴급 중단했다.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중지했으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지진과 혜성을 하늘의 꾸지람으로 여긴 것이다. <연려실기술>은 “이렇게 세종이 공구수성(恐懼修省·두려워하고 삼가 반성함)함으로써 일주일만에 혜성이 없어졌다”고 썼다. 물론 세종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하늘의 움직임이 심상치않고 기상 이변이 생길 때마다 임금들이 반성문을 쓰고 “내 잘못을 낱낱이 고하라”는 명을 내리는 기사가 줄을 잇는다.

아니 하늘의 변화가 대체 임금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다.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을 소통시키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다. 오죽하면 고대 부여에서는 기상이변으로 농사를 망치면 군주를 죽이거나 쫓아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세종을 비롯한 임금들이 천문학에 ‘왕위를 내걸고’ 올인할 수밖에 었었던 이유이다.

공평동에서 발굴된 일성정시의 부품.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으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다. 이 시계는 낮에 태양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항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조선의 발명품이다.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 제공


■“황제의 천문역법을 극복하자”

여기에 ‘애민정신의 끝판왕’인 세종 대왕이라면 어찌했겠는가. 세종에게 ‘만고의 성군’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는게 아니다. ‘오로지 백성을 위해’라는 슬로건을 내건 세종은 두가지의 금기를 깼다.

우선 예부터 천문과 역법은 중국 황제의 전유물이었다. 황제국이 하늘을 관찰해서 만든 역법을 제후는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관측자의 입장에서 볼 때 명나라의 하늘과 조선의 하늘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천문관측이 틀릴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가만 있지 않았다. 조선의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 현상과 북극고도 관측 등을 연구해서 조선실정에 맞는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했다. 세종은 1430년(세종 12) 8월 3일 “천문 계산에 있어…일월식과 별의 움직임 등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인데 당나라의 역법을 써서 착오가 많이 있었다”고 <칠정산> 편찬의 의미를 전했다. 세종은 간의대(천문대) 조성을 명하면서(1432년) “바다 밖에 있는 조선이 모든 (천문)시설을 중국의 제도에 따랐지만 자체로 하늘을 관찰하는 그릇에는 빠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성정시의는 낮에는 해시계로, 밤에는 별시계로 사용했다.|이용삼 교수 제공


■천재 임금에, 천재 세자, 천재 과학자들

그러나 과제가 생긴다. 하늘을 관측하는 도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가뜩이나 중국 황제의 눈을 피해 천문 역법을 자체적으로 연구해야 하는데…. 세종은 다소 무식한 방법을 쓴다. 동래 관노 출신인 장영실 등을 국비로 중국에 보낸다. 공식유학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귀띔한다.

“너희는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중국이 가르쳐 줄 리 만무하니 장영실 등에게 ‘눈대중으로 몰래 배워오라’는 특명을 내린 것이다. 임금의 이런 ‘무리한 명’을 받잡고 다녀와 각종 과학기구를 만든 과학자들도 참 인물은 인물이다.

세종은 장영실 등이 눈으로 배워온 실력으로 마침내 자격루를 제작하자 “원나라가 만든 자격루보다 훨씬 정교한 물시계를 만들었다”고 감탄했단다.

장영실은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의 역법인 <칠정산>을 편찬한 이순지(?~1465), 간의 등 숱한 천문과학기구와 금속활자(갑인자)를 제작 지휘한 이천(1376~1451), 간의대·보루각 조성에 공이 큰 김돈(1385~1440), <농사직설>을 편찬한 정초(?~1434) 등 손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 정초와 함께 각종 천문의기 설계에 간여한 정인지(1396~1478)도 빼놓을 수 없다.

2016년 6월 전갈자리 꼬리부분에서 관측된 신성의 흔적. 칠레에서 6개국 공동연구진이 관측했다. 1437년 폭발한 신성이다. <세종실록> 1437년 음2월5일자에 “객성(客星·신성)이 미성(尾星·전갈자리)의 둘째 별과 셋째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셋째 별에 가깝기가 반 자 간격쯤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그 객성(신성)의 흔적이 579년 뒤 6개국 공동연구진이 관측한 것이다.


거론한 인물들 중 정인지 등 상당수 인물은 순수 과학자라기보다는 문·무관 출신이다. 하기야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1450~1452)이 세자 시절 측우기를 제작했다는 <세종실록> 기록(1441년)도 있다.

그러고보면 과연 세종 연간에는 아들인 세자는 당연하고, 문·무신 등의 신료, 그리고 관노비까지 임금을 닮아 문과와 이과에 두루 능통한 천재들이 넘쳐났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런 분들이 의기투합한 결과물이 바로 당대 세계 최고의 천문과학가구들이다.

측우기와 혼천의(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 자격루(자동 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일정정시의(해·별시계 복합기능), 간의(천체 위치 측정), 규표(방위·절기·시각의 측정) 등 헤아릴 수 없다.

일본에서 간행된 과학사기술사사전을 토대로 집계한 ‘1400~1450년 사이 세계를 선도한 과학기술’은 조선이 29개였다. 반면 중국은 5개, 일본은 0개였다. 다른 지역을 다 합해봐야 28개였으니 참 대단한 일이다.

서울 공평동 유적에서 금속활자와 주전, 일성정시의 등이 출토된 지역. 16세기 문화층에서 확인됐다. 조선시대 때 이 지역에는 철물점이 있었다고 한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아날로그와 디지털 결합한 자동물시계

‘오로지 백성!’을 슬로건으로 건 세종이 깬 또하나의 금기가 ‘천문기구 발명’에 담겨있다.

무슨 말인가. ‘왕(王)’이라는 상형문자를 보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독점적인 존재(│)가 바로 임금이었다. <서경> ‘요전편’은 “임금 만이 하늘 땅과 소통한 뒤에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시간과 절기를 나누어 준다”고 했다. 거꾸로 말하면 천기는 군주의 몫이니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누구인가. 세종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民惟邦本)이며,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食爲民天) 존재”라고 여겼다. 그런 세종이기에 1438년(세종 20) 간의대 등의 기구를 서운관에게 맡기면서 ‘오로지 천기를 살펴 백성에게 절후(절기), 즉 농사 시기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 언급했다.

때마다 절기를 제 때 파악해야 했고, 하루에도 낮이나 밤이나 오차없이 시간을 측정해야 했다.

그래서 제작한 것이 자동물시계인 자격루(1434년)다. 이전까지는 시간을 사람이 알리다보니 번번이 착오가 생겼다. 농번기에 시각을 잘못 알려주면 어찌 되는가. 농사도 뒤죽박죽 되고, 시간을 잘못 알려준 자는 처벌을 받기 마련이었다. 세종은 두가지를 한번에 해결할 계책을 찾았다.

“시각을 알리는 자가 자주 착오가 일으킬 것을 걱정했다…시각을 알릴 목각인형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세종실록>)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20년 6월 미국의 한 경매에서 출품된 조선의 공중시계인 앙부일구를 구입환수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사람의 잘못을 원천적으로 피하면 되지 않은가. 세종이 생각해낸 ‘신의 한수’가 바로 ‘사람 대신 목각인형’이었다. 목각인형이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였던 것이다. 장영실 등이 제작한 자격루는 바로 물시계와 시보장치가 결합되어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 물시계’였다.

동아시아의 유압식 물시계와 아라비아식 자격장치를 조합시켜 스스로(自) 시간을 알려주는(擊) 최첨단 물시계(漏)였다. 물시계(아날로그)의 물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다시 일정한 시차로 구슬과 인형을 건드려 자격장치(디지털)를 작동하도록 설계됐다.

자동제어시스템에 의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변환기로 접속되는 디지털 시계를 발명한 것이다. 한마디로 백성의 수고없이 자동으로 작동되는 시계를 만든 것이다. 자격루는 조선의 국가표준시계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게 거창한 장치가 궁중에만 있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격루가 일러주는 시간을 널리 알리는데 한계가 있지 않은가.

자격루에 설치된 목각인형. 서운관(관상감) 관리의 복장을 하고 있다. 세종은 천문기상을 담당하는 서운관 관리가 시각을 잘못 알려주면 처벌을 받을까 걱정해서 사람대신 서운관 관리복장을 한 목각인형을 설치했다. 또한 물시계와 아라비아식 자격장치를 활용해서 자동으로 시각을 알려주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한자 대신 동물 그림으로

여기서 세종이 ‘천기를 누설’한다. 1434년(세종 16) 10월2일 “백성들을 위해 인적이 많은 대로변에 해시계(앙부일구·仰釜日晷)를 설치한다”고 선포했다. 설치장소는 혜정교(종로 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와 종묘 앞 등 두 곳이었다. ‘앙부일구’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시각을 재는 시계’라는 뜻이다.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다.

1434년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이었다. 아무리 공중시계를 설치해놓았다 해도 한자로 표시한 시각을 어찌 읽는단 말인가. 세종이 또한번 ‘신의 한수’를 쓴다.

바로 시각을 글자(한자)가 아닌 동물 그림(12지신)으로 표현한다는 것이었다. ‘자(子)·축(丑)·인(寅)·묘(卯)’ 대신 ‘쥐와 소, 호랑이, 토끼’ 등의 동물을 그리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세종은 “시각에 12지신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서 “해에 비쳐 세부시각이 뚜렷하게 보이고,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세종은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천기 누설 차원을 넘어 천기를 공유한 셈이다.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던 천문관측기. 1432년(세종 14) 예문관제학 정인지, 대제학 정초) 등이 왕명을 받아 고전을 조사하고, 중추원사 이천, 호군 장영실 등이 이듬해(1433년) 최초로 제작했다.


■별의 움직임으로 물시계 오차 조정

‘오로지 백성!’을 외친 세종의 열정은 한이 없었다. 해시계(앙부일구)는 낮에만 소용되었다. 또 밤에는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었지만 중력 등의 요소 탓인지 물의 흐름이 일정치 않았다. 때문에 오차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완벽주의자’ 세종이 또하나의 발명품을 선보였는데, 그것이 ‘일성정시의’(1437년)이다,

‘일정정시의(日星定時儀)’는 말 그대로 낮에는 해, 밤에는 별자리의 운행으로 시각을 측정하는 천문시계다. 이 시계는 낮에 태양 뿐만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항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조선의 발명품이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는 세종의 노심초사가 묻어나는 독창적인 창조품이다.

또 있다. 1437~38년 사이 물의 부력으로 자격장치를 작동하는 자격루의 기법에서 한발 더 나아간 옥루를 개발했다. 옥루는 물의 부력만이 아니라 물레방아 모양의 수차를 돌리고, 수차가 기륜(기어장치)을 돌려 선녀와 무사, 12지신 등의 인형이 움직이는 방식을 쓴다. 여기에 태양의 모형까지 덧붙여 천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까지 구비됐고, 동지, 춘분, 하지, 추분까지 알려 주는 자동 종합물시계다.

종합자동 물시계인 흠경각 옥루를 발명한 뒤 그 내력을 밝힌 승지 김돈의 ‘흠경각기’. “임금이 반드시 역일(曆日)을 밝혀 백성에게 먼저 일할 때를 가르쳐 주었고, 그때를 가르쳐 주는 요체가 바로 하늘과 기후를 관찰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과문한 기자의 직무유기

지난 6월말 서울 도심 한복판인 공평동에서 획기적인 발굴성과가 쏟아져나왔다.

세종 연간에 주조된 ‘갑인자’를 포함해서 1600여점의 금속활자가 출토된 것이 첫번째이고, 세종 시대에 발명한 옥루(혹은 자격루)와 일성정시의의 부품 등 천문 과학기구가 확인된게 두번째였다.

그런데 활자쪽에 좀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세종이 계획한 국가적인 프로젝트에 따라 개발된 갑인자 등 금속활자들 모두 국보급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제작된 활자들이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께 확인된 옥루(혹은 자격루)와 일성정시의의 부품들 역시 한 점 한 점이 국보급이다. 왜냐면 15세기 세계 과학기술계를 선도했던 분이 다름아닌 세종대왕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때 발명한 천문 과학기구는 단 한 점, 아니 부품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랬으니 천문 분야에 과문한 필자도 공평동 출토 천문기구의 부품을 실견하자마자 ‘이건 보나마나 국보야!’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출토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먼저 여러 개의 원형 구멍을 뚫은 동판과, 원통형 동제품의 양쪽에 걸쇠와 갈고리가 결합된 구슬방출기구가 눈에 띈다. 이것이 <세종실록> 등이 설명한 ‘주전(籌箭)’, 즉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가 방출하는 자동물시계의 시보장치를 작동시키는 부품’이라는 내용과 부합된다.

자격루(혹은 옥루)는 물의 양이나 유속 등을 조절하는 ‘수량 제어 장치’와 이를 바탕으로 시간을 자동으로 알리는 ‘시보 장치’로 구성된다. 이번에 확인된 ‘주전’은 신호발생장치이자 동력전달장치라 할 수 있다. 결국 출토품은 자격루(옥루)의 부품인 ‘주전(籌箭)’이 확실하다.

따라서 이번에 확인된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 어느 것이 맞든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부품(‘주전’)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확인된 국보급 유물 중에는 ‘일성정시의’ 부품들도 있다. 주천도분환(원을 나누는 각도·365.25도로 등분), 일구백각환(하루를 100각으로 나눠 태양 관측 후 낮시간 측정), 성구백각환(하루를 100각으로 나눠 별 관측 후 밤시간 측정) 등 3개의 고리(環)가 확인됐다.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관측하여 시간을 가늠한 천문시계였다. 국가표준시계인 자격루(옥루)의 오차를 보완했기 때문에 엄청 중요시됐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7년(세종 19년) 4개를 제작해서 내정(궁궐 안)과 서운관, 함경도·평안도에 1개씩 설치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제작했다는 기록이 없다.

확인된 ‘일성정시의’ 부품들은 세종 연간에 제작된 4개 중 한 개가 분명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필자는 공평동 유적을 취재하면서 “금속활자도 중요하지만 천문기구도 그에 못지않다”는 이야기를 꽤나 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천문 분야에 문외한이다. 그러다보니 출토된 천문기구와 관련된 깊이있는 기사를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와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전시총괄과장의 도움말로 ‘초치기’ 공부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역부족이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천문기구의 원리와 하늘 관측은 필자에게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세종실록> 1437년 4월15일자. 세종의 명을 받은 승지 김돈이 ‘일성정시의’의 발명 이력을 글로 남겼다. 그런데 김돈은 “주상(세종)께서 직접 써준 글의 내용이 워낙 쉽고 상세해서 (내가) 감히 토씨 하나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실었다”고 감탄했다.


■“임금의 글을 토씨 하나 바꿀 수 없었다”

세종은 승지 김돈(1385~1440)에게 ‘일성정시의’ 발명의 내력을 글로 남기라는 명을 내렸다. 그래서 <세종실록> 1437년(세종 19) 4월15일자에 일성정시의의 원리와 제작 방법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해놓았다.

하지만 솔직히 필자와 같은 과문한 자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하다.

그런데 이 글을 지은 김돈이 실록에 아주 흥미로운 언급을 해놓았다.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를 주상(세종)께서 직접 지어 나(김돈)에게 주면서 ‘내 글을 토대로 해서 경들이 다듬고 보태라’고 하셨다. 그런데 임금이 직접 설명한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도 쉽고 상세해서 내(김돈)가 단 한 자도 고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글 머리와 끝만 살짝 보태 그대로 지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아니 대체 얼마나 공부를 하셨기에 우주의 원리까지 꿰뚫어 해시계와 물시계를 결합한 ‘일성정시의’의 제작 원리까지 글로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너무도 쉽고 상세하게 쓴’ 세종의 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 어리석은 자의 아둔함이여!

이렇게 580여 년 만에 도심 한복판에서 현현한 천문기구에는 백성을 위해 천기를 누설, 아니 공유하고자 한 천재이면서 성군인 세종의 따뜻한 체온이 녹아있다. 어찌 한 점 한 점이 국보가 아니겠는가.(이 기사를 쓰는데 윤용현 박사와 이용삼 교수 등의 도움말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경향신문 선임기자입력 2021. 4. 12. 06:01수정 2021. 4. 12. 06:51

 

https://youtu.be/5CcBQTaR8JY

 

얼마전에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국내에서는 전해지지 않는 15세기 금속활자본을 일본 도쿄(東京) 와세대대(早稻田大) 도서관에서 찾아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요. <이학지남>(吏學指南)이라는 책은 중국 원나라 때인 1301년에 편찬한 법률·제도 용어집이자 관리 지침서랍니다.

그러나 저는 <이학지남>이라는 책 자체에는 그리 관심이 없구요. 이 책이 1420년(세종 2년) 제작된 ‘경자자(庚子字)’라는 금속활자로 만들었다는 것에 눈길이 쏠렸습니다.

세종대왕 기념관에 전시된 ‘주자소도’. 태종과 세종 때 한문과 한글 금속활자를 만든 연구소이자 공장이었다. 1420년 주자소 관리들이 경자자를 개발하자 세종은 술 120병과 고기를 하사했다.


■신료들은 왜 금속활자를 반대했을까

1420년이라면 어떻습니까. 최초의 금속활자본이 <직지>(1377년)이든, 혹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758-2호·1239년 무렵)이든 43~181년이나 흘렀던 때입니다.

바로 그럴 때 조선의 태종과 세종은 양질의 금속활자를 개발해서 책을 대량인쇄하는 것을 국책사업으로 여기고 분투하고 있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태종(재위 1400~1418)은 1403년(태종 3년) 주자소를 만들면서 “국내에 책이 너무 적어서 유생(儒生)들이 공부할 수 없다”(2월13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태종이 주자소를 만들려 했을 때 신료들은 “소용없는 일”이라면서 한결같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답니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억지로 우겨서’ 주자소를 만들었습니다(<세종실록> 1434년 7월2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 와세대대(早稻田大) 도서관에서 찾아낸 <이학지남>(吏學指南). 중국 원나라 때인 1301년에 편찬한 법률·제도 용어집이자 관리 지침서이다. 이 책은 1420년(세종 2년)제작한 ‘경자자(庚子字)’라는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이다. 국내 유일본이다.|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왜 신료들이 입을 모아 반대했을까요. 고려·조선시대 금속활자의 주조 및 인쇄술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죠. 왜냐. 이때의 금속활자는 모래주형(주물사)에 따라 주조했습니다.

“부드러운 갯벌을 평평하게 편 인판(印板)에 나무에 새긴 활자를 찍으면 글자가 새겨진다. 인판이 말라 굳어지면 쇳물이 통할 구멍과 길을 만들어놓고 다른 판을 겹친 뒤 구리액을 구멍으로 쏟아붓는다. 그러면 구리액이 패인 곳에 들어가 하나하나 글자가 된다.”(성현의 <용재총화>)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주조기술이 부족했습니다. 초기의 금속활자를 보면 주조 때 생긴 쇳물찌꺼기와 같은 흠결이 보입니다. 인쇄할 때도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조한 활자들을 조판틀에 움직이지 않게 배열하고 먹을 묻힌 뒤 종이를 덮고 골고루 문질러야 인쇄가 되겠죠. 하지만 한 자 한 자 조판된 활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1434년 7월2일)을 보면 인쇄 때의 괴로움이 절절이 배어나옵니다.

“인쇄할 때 먼저 밀랍(蜜蠟·꿀 찌꺼기를 끓여서 짜낸 기름)을 조판틀 밑에 펴고 그 위에 글자를 차례로 맞추어 꽂는다.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밀랍의 성질이 원래 부드러우니 조판활자가 굳지 못했다. 겨우 두어 장만 인쇄하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져서 인쇄하는 자가 괴롭게 여겼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태종이 주자소를 만든다고 할 때 대소신료들이 “절대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반대한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죠. 태종이 온갖 어려움 끝에 계미자(1403년)를 보완한 ‘정해자’를 만들고(1407년) 그 뒤에도 3년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인 1410년(태종 10년) 인쇄본을 찍어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답니다.

① 주조기술의 부족으로 쇳물찌꺼기가 그대로 보이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758-2호)의 활자본 글자> ② 주조기술 부족으로 획이 탈락한 부분을 인위적으로 칠했다. ③초창기 금속활자는 주물기술 부족으로 점과 필획의 완성도가 떨어져 글자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이런 부분을 가필해서 보사한다. ④ 쇳물찌꺼기 때문에 판독이 어려우면 나중에 덧칠하지만 때로는 가필이 잘못 된 경우가 생긴다, ⑤주조과정에서 활자가 탈락되면 인위적으로 가필하기도 했는데, 틀리게 가필한 경우도 많았다.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의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김영사간), 2020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활자 발명

1418년 세종(재위 1418~1450)이 아버지(태종)가 이루지못한 과업의 바통을 이어받습니다. 1420년(세종 2년) 세종은 우선 당대의 과학자이자 공조참판인 이천(1376~1451)에게 “아무래도 (‘정해자’ 등 기존의) 글자 모양이 고르지 않으니 당신이 한번 새롭게 만들어보라”는 특명을 내립니다.

이천은 온갖 방법을 짜내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니 ‘경자자’입니다. 경자년(1420년)에 개발했다 해서 ‘경자자’가 된거죠. 이번에 와세대대 도서관에서 찾아낸 <이남지남>이 바로 이 경자자로 찍었다는 거죠.

어쨌든 <세종실록>은 “나름 정교하고 치밀했다는 ‘경자자’ 개발로 하루에 20여장 인쇄할 수 있었다”(1422년 10월29일)고 했습니다. 세종은 경자자를 개발한 주자소 관리들에게 “수고했다”면서 술 120병과 고기를 하사했습니다. 주자소에서는 1420년부터 2년간 <자치통감강목>을 찍어냈습니다.

①초창기 금속활자본을 보면 이중으로 인쇄된 흔적이 보인다. 조판된 활자가 움직인 경우, 종이가 말린 경우, 종이 놓인 위치가 바르지 않아 바로잡는 과정에서 이중 인출된다. ②조판된 활자를 인쇄할 때 활자의 기울기에 따라, 혹은 인쇄하는 사람의 힘 조절에 따라 인쇄상태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보인다. 어느 한쪽이 흐려지거나 진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박상국 교수의 단행본에서


그래도 뭔가 부족했습니다. 여전히 ‘인쇄 때 글자가 이리저리 쏠리고 비뚤어지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이죠. 다시 14년이 흐른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다시 이천을 호출합니다. 당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59세)였던 이천은 “할 수 없다”고 완곡히 사양했는데요. 세종이 누굽니까. “당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고 세종 본인의 표현대로 ‘강요’했습니다. 세종의 특명을 받은 이천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경자자’의 단점을 상당부분 보완합니다. <세종실록> 1434년 7월2일자를 볼까요.

 

“내(세종)가 ‘강요하자’ 경(이천)의 지혜로 밀랍을 쓰지 않고도 조판한 글자들이 흔들리지 않으니….”

신기하죠. 이천은 어떻게 밀랍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조판한 글자를 흔들리지 않게 만들었을까요.

“처음에는 글자를 조판하는 법을 몰라서 밀랍을 녹여서 글자와 글자 사이를 붙였다. 그러나 단단하게 굳지 않았다. 그 뒤에 대나무로 빈 곳를 메우는 재주를 써서 밀납을 녹이는 비용을 없앴다.”(<용재총화>)

즉 활자와 활자 사이의 빈곳에 대나무를 메워서 조판한 활자들을 고정시킨 겁니다.

이때, 즉 갑인년인 1434년(세종 16년) 개발한 이 활자에는 ‘갑인자’라는 이름이 붙었답니다. ‘갑인자’는 14년전에 개발한 ‘경자자’에 비하여 조금 크고 글자의 체가 매우 좋았습니다. ‘경자자’의 자체가 가늘고 빽빽해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개선한 거죠. 이 ‘갑인자’로 하루에 40여 장 인쇄하는데 성공할만큼 조판틀(활판)을 고정시키는 기술도 발전했습니다.

‘갑인자’로 찍어낸 책은 글자획에 필력(筆力)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가 여유있게 떨어져 있으며, 판면이 커서 늠름합니다. 또 먹물이 시커멓고 윤이 나서 한결 선명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 ‘갑인자’는 활자본의 백미로 일컬어집니다. 이로써 활자는 정해자(1407년)→경자자(1420년)→갑인자(1434년)로, 인쇄는 두어장(태종 때)→20여장(1420년)→40여장(1434년)으로 진보했답니다.

정해자(혹은 계미자)로 찍어낸 책들. 왼쪽이 ‘국보 제149-2호’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이고, 오른쪽 사진은 ‘국보 제148-1호’인 <십칠사찬고금통요>권16이다. 그러나 정해자(계미자)로 책을 찍어냈지만 조판 및 인쇄기술의 부족 때문에 한번에 겨우 2~3장 인쇄하는데 그쳤다.


■손수 한글로 지은 월인천강지곡

모처럼 만족할만한 활자(갑인자)를 20여 만 자를 주조했습니다. 그 활자로 평소 찍고 싶었던 책을 발행 보급합니다. 조선과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각 110명을 선정해서 삽화(그림)를 그리고, 그림 설명과 시(詩)까지 붙인 <삼강행실도>를 제작·배포합니다(1434년). 무지몽매 때문에 삼강오륜을 저버리는 범죄는 없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또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한 유학 수신서인 <소학>도 찍었고, 역사서인 <자치통감>까지 간행합니다. <세종실록>은 “이제 큰 활자(갑인자)를 주조했으니…<자치통감>을 인쇄하고 전국에 반포해서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한다. 종이 30만권만 준비하면 500~600질을 인쇄할 수 있다”고 뿌듯해 했답니다. 눈이 침침한 노인들도 책을 보게 하려고 활자가 큰 갑인자를 개발했다는 얘기잖습니까.

금속활자를 그토록 개발하려 했던 세종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가 구구절절 배어나옵니다.

세종은 “‘갑인자’ 개발로 서적이 널리 인쇄되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화와 교육이 번성하고 세상의 도리가 높아질 것”이라 했습니다.

1420년 개발한 경자자로 찍어낸 책들. 왼쪽 사진은 중국 상하이(上海)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치통감 강목>. 오른쪽 사진은 국보 283호 <통감속편>(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그렇게 1434년(세종 16년) 한자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갑인자’를 제작한 세종은 9년 뒤(1443년) ‘훈민정음 창제’라는 불세출의 과업을 완수하죠. 그런 뒤에는 또하나의 과업을 시도합니다.

막 창제(1443년), 반포(1446년)한 한글의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종은 둘째아들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재위 1455~1468)에게 특명을 내리는데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해서 훈민정음 반포 7개월전 죽은 부인(소헌왕후·1395~1446)의 명복을 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헌왕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거든요.

이 명에 따라 수양대군은 <석보상절>을 편찬한 뒤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는데요(1447년). 세종은 이 <석보상절>을 꼼꼼이 읽고 각 2구절에 따라 막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한 찬불가 583곡을 손수 지었는데요. 그것이 <월인천강지곡>이죠.

1434년(세종 2년) 개발한 갑인자와 갑인자를 보완한 활자로 찍어낸 책들. 갑인자는 금속활자의 백미라는 찬사를 받는다. ①1448년(세종 30년) 갑인자로 찍어낸 <동국정운>(국보 71호)|간송미술관 소장 ② 1438년(세종 20년) 간행된 <자치통감강목> 권19(보물 552호).|아단문고 소장 ③1436년(세종 18)에 간행하여 배포한 <자치통감>(보물 1281-2호).|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최초의 한글활자는?

중요한 것은 이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등 두 책은 1434년 개발한 갑인자(한자 활자)와 함께 특별히 주조한 한글 금속활자를 조판해서 간행했다는 거죠. <석보상절>의 편찬이 1447년 9월에 완료·간행되었으니 한글활자도 이 무렵에 주조된 것으로 보이죠.

그러니까 두 책은 훈민정음 창제 후 1년 남짓 지났을 때 주조된,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최초의 한글금속활자로 간행된 겁니다. 그러나 이때 주조한 한글활자는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요.

지난해(2020년) 10월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후 주조한 최초의 한글금속활자를 최첨단 기술인 인공지능(AI)을 활용하여 분석·복원하는 기법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는데요. 정재영·최강선 한국기술교육대 연구팀이 4개월동안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해서 현존하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의 활자본을 분석한 뒤 세종대왕 당시의 한글금속활자를 복원하는 과정을 개발한 건데요.

정해자와 경자자, 갑인자본의 비교. ①1407년 정해자(혹은 계미자)로 찍어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국보 149-2호) ②경자자로 간행한 <자치통감 강목>. ③1438년(세종 20년) 갑인자 등으로 간행한 <자치통감강목> 권19(보물 552호).|아단문고 소장. 정해자(1407년) 및 경자자(1420년)와 비교할 때 갑인자(1434년)는 글자가 예쁘고 생동감이 넘치며 자간 거리도 떨어져 읽기 쉽다는 평을 받는다. 그래서 갑인자를 두고 ‘활자본의 백미’라 한다. 인쇄도 두 어 장(태종 때)→20여장(1420년)→40여장(1434년)으로 획기적으로 진보했다.


■천지인으로 만들었는데 어찌 삐침을?

그렇게 3D 기술로 복원한 한글금속활자는 일단 ‘월’, ‘인’, ‘천’, ‘강’, ‘지’, ‘곡’과 ‘니’, ‘텬’ 등 8자였는데요. 연구를 주도한 정재영 교수의 촌평이 인상깊더군요. 세종이 붓글씨만이 존재했던 당대에 ‘돋움체(고딕체)’의 한글을 창제한 것에 새삼 감탄했다는 거예요. ‘돋움체’는 서양에서 ‘획의 삐침이 없는 글씨체’를 뜻하는데요. 산세리프, 혹은 고딕체로도 하는데요. 이 글씨체는 18~19세기 사이에 유행한 글꼴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러나 그보다 300~400년 전 조선의 세종이 다양한 획과 굵기로 쓰는 한자 붓글씨 사회에서 점과 선 만을 이용한 ‘돋움체’의 글자, 즉 한글을 창제할 생각을 한 거죠.

①세종의 특명을 받은 수양대군은 1447년 <석보상절>(보물 523호) 을 편찬한 뒤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②세종은 이 <석보상절>을 꼼꼼이 읽고 각 2구절에 따라 막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한 찬불가 583곡을 손수 지었다. 이것이 <월인천강지곡>(국보 320호)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정재영 교수는 그것을 훈민정음 창제 원리와 연결짓는데요. 즉 세종은 한글의 첫음(자음)은 발성기관의 모양을 본떴고, 가운데 소리(모음)는 하늘(·)과 땅(ㅡ), 사람(ㅣ)을 뜻하는 천지인을 바탕으로 만들었는데요. 사람의 발성기관을 본떴고, 자연 및 인간의 섭리를 담은 천지인을 떠올려 가장 간단한 점(·)과 선(ㅡㅣ)만으로 표현했는데 어떻게 흘림체나 삐침을 허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극히 간단하지만 심오한 뜻을 품고 있는 ‘돋움체’로 표현했다는 거죠.

인공지능으로 복원해본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한글활자. 1447년(세종 29년) 무렵 한자 활자(갑인자)와 함께 막 창제한 한글의 동활자로 찍어낸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토대로 복원해봤다.|한국기술교육대 연구팀 제공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서양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와 동년배라는 겁니다. 세종이 1397년생이고, 구텐베르크 역시 1397년에서 1400년 사이 태어났다고 하거든요.

세종이 가장 아름다운 금속활자라는 ‘갑인자’를 개발한 1434년이면 어떨까요.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의 걸음마도 떼지 못했거나 막 내딛었던 때였답니다. 또 1447~48년 무렵이라면 어떨까요. 구텐베르크는 이제야 금속활자술을 터득하고 고향인 마인츠로 돌아오던 때였습니다. 이 무렵 세종은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쉬운 글자를 창제하고 이를 곧바로 금속활자로 찍어내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었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조선은 ‘바둑 왕국’… 세종도 푹 빠져 | 중앙일보 (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08.01.11 05:32

업데이트 2008.01.11 08:27

 
 고대 사서에 만 가지 놀이의 제왕으로 기록된 바둑.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 21세기에 이르러 한국이 세계 최강의 실력으로 우뚝 서게 된 바둑. 그 바둑의 역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소설가이자 한학자인 이청(48·사진)씨가 『한국 바둑사』를 처음 펴냈다. 중국의 수많은 역사서,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실록에다 아직 정리가 안 된 승정원일기까지 뒤져 한국 바둑에 관한 기록을 시대별로 정리했다. 조선실록의 바둑에 대한 기록은 380건, 승정원일기는 260건. 비변사 등록원 등에서 찾은 기록이 1000건이 넘는다. 4년여에 걸친 작업이다.

 책에 따르면 조선은 바둑의 유토피아였다. 조선의 바둑은 당대 제일의 기예이자 왕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으며 그 인기는 500년 내내 식을 줄 몰랐다. 태종의 친위세력들은 거의 바둑을 즐겼고 세종은 고수 조순생을 아예 관원으로 발탁했다. 세조는 ‘바둑왕’으로 꼽힐 만한 인물. 정무가 끝나면 상금을 걸고 측근들의 바둑 시합을 구경하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세조 때에 오면 바둑은 궁녀·환관·내의원에까지 미친다. 여자가 바둑으로 남자를 유혹하고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교자 안에서 바둑을 두다가 고변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조선시대는 왕과 사대부는 물론 시골 아전이나 기생들조차 바둑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바둑 고수를 외교전에 동원한 예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사진은 단원 김홍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둑 그림.

 
임진왜란 때는 조선의 선조·이순신·유성룡,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토 기요마사, 명나라의 심유경 등 3국의 수뇌부가 모두 바둑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병법과 정책 등을 말할 때 바둑은 약방의 감초가 된다.

일례로 명장 진유격은 선조에게 왜군의 휴전 요청을 받아들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은 한 판의 바둑입니다. 이 정도에서 판을 거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는 인조 이후 바둑은 왕궁 등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하지만 영·정조 시대는 오히려 숱한 고수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다시 국기(國棋)·도기(道棋)·군기(群棋) 등으로 나뉠 정도로 극성을 보이게 된다. 당연히 반대자도 많았다. 정조는 조선 왕 중에서 유일하게 바둑을 두지 않았고 실학자 이익은 바둑의 폐해를 규탄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책은 조선의 최고수로 숙종 때의 장문익과 영조 때의 한대수를 꼽는다. 조선 국수들의 계보를 시대별로 정리한 것도 이 책의 성과로 보인다.

 고대 기자조선과 더불어 한반도에 바둑이 유입되고 마한에서 한국의 바둑사가 시작된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삼국이 다 바둑을 즐겼지만 백제에서 특히 성행했다. 고려에 와서는 금기서화(琴棋書畵)라는 하나의 문화 트렌드로 귀족 사회에 확고히 자리 잡는다. 이것이 조선에 와서 전국적인 융성을 보인다는 기본 축은 기존의 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몇 가지 새로운 논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우리 고유의 바둑 양식으로 여겨온 순장바둑의 원형이 인도의 시킴식 바둑이라는 것. 고구려 승려 도림이 바둑으로 백제의 개로왕을 망하게 했다는 고대 바둑의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삼국유사)를 소설적 과장으로 치부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청씨는 청동기 시대인 3000년 전의 갑골문자집에서 당시에 이미 바둑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재미있는 자료도 찾아냈다.

중국과 일본은 바둑사가 그런 대로 충실하다. 한국은 바둑사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것은 없었고 야사나 인물사뿐이었는데 재야에서 먼저 한국 바둑사를 정색을 하고 쓰는 바람에 학계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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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 2007-12-28 20:42 등록 2007-12-28 20:42

세종은 독재자였다, 착하고 인내심 많은 (hani.co.kr)

기자전진식
세종은 독재자였다

〈나는 조선이다〉
이한 지음/청아출판사·1만2000원

셋째아들로 권력기반 없이 왕위 올라해박한 지식·열린 귀로 ‘선량한 독재’온갖 풍파·병고 이겨낸 힘은 ‘인내심’

한 아이가 있었다. 총명했고 부지런했으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두 형들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다. 맏형은 끊임없이 ‘사고’를 쳤으나 부모는 한없이 관대했다. 그 관대함의 의미를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둘째 형은 조용했지만 완고해 감히 다가가기도 어려웠다. 결국 아이가 선택한 것은 ‘자기 내부로의 망명’이었다. 한번 잡은 책은 100번 넘게 읽어 통째로 외웠다. 편집증에 가까운 독서는 평생 아이를 괴롭힌 눈병의 싹을 틔웠다. 부모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애초에 시작도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의 살가운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눈길은 오로지 맏형에게만 쏠려 있었던 것이다. 야속했다. ‘나도 엄연히 이 집안의 아들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는 그러지 못했다. 참았다. 그래야만 했다. 아버지는 엄했고 어머니는 무관심했다. 소년은 그렇게 인내심을 벼리며 10대를 통과했다. 21살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한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느닷없는 일이었지만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조선조 4대 임금인 세종은 그렇게 옥좌에 올랐다. 아버지 태종은 세종의 형들인 양녕·효령대군을 제치고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렸다. 아버지를 상왕으로 모시고 세종은 4년을 ‘인턴 왕’으로 지낸다. 자신을 응원해줄 관료도, 옥새를 받을 명분도 없었던 세종의 초기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만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아무런 권력 기반 없이 왕이 되었지만 재위 32년 동안 그가 이룬 성취는 이후 400여년 조선을 지탱한 들보요 기둥이 된다. 세종을 ‘인턴 왕’에서 성공한 군주로 이끈 ‘비밀의 문’은 무엇일까?

세종은 ‘선량한 독재자’였다. 〈나는 조선이다〉의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세종의 카리스마는 강력하게 윽박지르거나 화를 냄 없이도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조선은 세종이라는 심장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착하고 인내심 많은

세종은 신하들이 범접하지 못할 만큼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으면서도 독단에 빠지지 않았다. 관료들의 말을 성실히 경청하고 자신의 판단을 수정할 줄 알았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발의하는 몫을 도맡았지만 인재를 중용해 그들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당을 든든히 지켜주는 후원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은 동시에 ‘불행한 남자’였다. 아버지 태종은 그의 처가를 풍비박산냈던 것이다. 역모를 꾀했다는 명분을 들어 장인 심온을 주살했으며 나머지 가솔들을 나락으로 내몰았다. 세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침묵’뿐이었다. 게다가 세종의 육신은 ‘종합병동’이었다. 눈병에서 당뇨, 임질, 풍질에 이르기까지 그의 건강기록부는 참담했다.

이 모든 괴로움을 이겨낸 것은 그의 놀라운 인내심이었다. 세종은 ‘인내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의 남자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백리요 명재상의 표상인 황희는 부정축재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었으며 맹사성은 우유부단의 전형이었다. 도승지 안숭선은 다혈질의 불같은 성격이 흠이었다. 세종은 한없이 넓은 곤룡포로 그들을 감싸주었다. 전문가의 중요성을 그가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600년 전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사람이었다”는 지은이의 평대로 세종은 허례허식을 배격한 현실주의자였다.

독재자(dictator)는 그 어원이 ‘혼자 말하는 사람’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최고권력자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세종도 혼자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정당했고 실천을 담보한 것이었다. 중구난방을 믿지 않았으므로 뭇사람의 의견을 막지 않고 들었으되, 결단은 단호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그를 ‘선량한 독재자’라 이르는 것이다. ‘인턴 왕’을 ‘대왕’으로 이끈 그의 인내심을 배우고 싶은 이, 귓불 때리는 칼바람을 견디는 일부터 연습해도 좋을 일이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 2008.03.06 12:08
 
조선을 주름잡은 8명의 '킹메이커'를 통해 21세기형 참모의 모습을 재조명한 책이 나왔다.

'조선의 킹메이커:8인8색 참모들의 리더십'(역사의아침 펴냄)은 빼어난 감각과 탁월한 결단력으로 군주를 성군의 길로 인도한 8명의 참모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 군주와 함께, 때로는 군주를 리드하며 새로운 왕조를 연 정도전
△ 스스로 선택한 군주를 결코 넘어서지 않으면서도 군주의 의지를 잘 살펴 보좌한 하륜
△ 치밀하고 때로는 의심 많은 완벽주의자 세종을 잘 섬기며 완급을 잘 조절한 황희
△ 세조의 문화적이고 외교적인 왕재를 발견해 이를 성취하도록 만든 신숙주
△ 중종을 군주로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조광조
△ 투정이 심하고 겁도 많은 임금을 보필하며 처참한 난국을 극복해낸 유성룡
△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악역을 자처한 최명길
△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정조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어주고 군주를 위해 영의정 자리마저 초개처럼 내던진 채제공 등 8명이다.

 

저자는 이들의 시대정신과 리더십을 통해 21세기형 킹메이커의 모습을 제시한다. 각 인물들의 지혜와 경륜, 처세술도 흥미를 끄는 부분이다.

저자는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지상 최대의 부자 군주 솔로몬의 말처럼 지나간 역사에서 우리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지난 1년간 8명의 삶을 기록한 사료와 책자에 파묻혀 시간 여행을 즐긴 저자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교훈과 21세기형 참모의 모습,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처세의 철학을 만나보자.

◇ 조선의 킹메이커/박기현 지음/역사의아침 펴냄/288쪽/1만2000원
 
 
 
  • 수정 2008-01-14 19:30 등록 2008-01-14 19:30

‘밀어주는’ 세종-‘끌고가는’ 정조 (hani.co.kr)

박현모 교수 글 ‘리더십 비교’

기자강성만


세종 “충분한 토론 거쳐 업무 위임”
정조 “국정목표 설정 뒤 동참 설득”

 

세종과 정조는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君師)’로 칭송받고 있다. 군사란 임금이 곧 스승이란 의미다. 마침 이들을 다룬 사극이 방송 전파를 타고 있다. 드라마 제작에 발맞춰 두 군주의 삶과 정치를 다룬 책들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세종과 정조, 이들이 국가를 통치하는 방식의 닮은 꼴과 다른 꼴은 무엇일까?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는 동양철학 비평·리뷰지인 <오늘의 동양사상> 제17호에 투고한 글 <세종과 정조의 리더십 스타일 비교>에서 이 문제를 검토했다. 박 교수는 둘의 리더십 차이를 결론적으로 이렇게 규정했다. “세종이 ‘뒤에서 미는’ 방식의 지도력을 발휘했다면, 정조는 ‘앞에서 끄는’ 방식의 지도자였다.” 즉 세종은 충분한 찬반토론을 거쳐 정책의 장단점을 드러나게 한 다음, 그 일을 주관할 사람에게 전적으로 맡긴 반면, 정조는 국정의 목표를 설정해 놓고 신하들에게 그 길에 동참하도록 설득하거나 위협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회의를 이끌어 가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고 지은이는 밝혔다. 세종은 “어전회의를 국가 운영의 핵심적 과정으로 부각시키”려고 했다. 태조와 태종 때 23회와 80회에 불과했던 어전회의인 경연을 세종은 무려 1898회 열었다는 것이다. 세종은 경연에서 말끝마다 “경들의 의견을 말해 보라”고 하여 신료들의 토론 참여를 적극 유도했다고 박 교수는 적었다. 세종의 회의 활성화 전략에는 ‘자신의 약점 드러내기’도 포함된다. 그는 계속되는 가뭄에 “죄는 실로 나에게 있다. 마음이 아프고 낯이 없어서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반면 정조는 자신이 직접 나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개혁한다는 혐의’를 두려워 하는 개혁 반대론자들에게 “현상 유지의 폐해가 훨씬 심각하다”면서 개혁의 정당성을 강하게 피력했다는 것이다. 송나라때 개혁을 시도했던 왕안석과 같은 인물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도 정조의 개혁 전략 가운데 하나였다고 박 교수는 지적했다. “정조는 경연에서 왕안석을 재평가함으로써 개혁 부정론과 소극적 국왕론을 동시에 극복하려고 했다. 재위 15년의 ‘중용강의’가 그 예다.” 중용 강의에서 좌의정 채제공이 “한 자의 글을 읽는 것보다 한 치의 실천이 낫다”고 하자 정조는 이에 공감하며 “용의 고기가 어떻다고 하는 것보다는 돼지고기라도 먹는 것이 낫다”고 했다는 것이다. 도가 행해지지 않는 까닭을 실천이 아니라 앎의 문제로 보는 당시 보수적 노론 신하들의 견해를 경연에서 정면 반박한 것이다.

말투와 성격도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이라고 했다. 정조의 말 첫머리에는 “그렇지 않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경들이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고 했다. 반면 세종은 “일단 긍정하면서 대화를 시작하는 스타일”이다. 예컨대 “네 말이 아름답다” “경들이 말을 합하여 간하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고 말한 뒤 “그러나 말을 따를 수는 없다”고 하는 식이다.

“세종이 ‘정치적 리더십’에서 뛰어났다면 정조는 ‘지적 리더십’에서 역사에 기여했다.” 박 교수는 세종 시대 배출된 100여 명의 집현전 학사가 조선 전기의 기틀을 닦은 정치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정약용이나 박지원과 같은 걸출한 학자로 성장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정조의 ‘가르치기 좋아하는’ 회의 방식이 정약용 박제가 등의 왕성한 학문적 결실로 이어진 점을 긍정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평가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 수정 2007-12-28 21:12 등록 2007-12-28 21:12

“사화는 선비 대립 아닌 삼사 둘러싼 권력투쟁”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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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와 반정의 시대〉

 

인터뷰 / ‘사화와 반정의 시대’ 펴낸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언론감찰 세 기관으로 구성된 ‘삼사’국왕·대신과의 정치적 견제구도 형성이를 깨려는 시도들이 피바람 일으켜“단순히 사림-훈구 갈등으로 봐선 안돼”

사극의 단골 메뉴로 곧잘 등장하는 조선시대 사화(士禍)는 흔히 폭군 연산의 출생비밀과 패륜이 오버랩되는 궁중 치정·암투극, 또는 고루한 훈구파와 개혁적 사림파간 싸움 쯤으로 상투화돼 있다. 김범(37)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자신의 첫 책 <사화와 반정의 시대>(역사비평사)에서 그리는 사화는 그런 모습과는 좀 다르다. 예컨대 첫 사화인 무오사화를 폭군의 패륜으론 설명할 수 없다. “연산군은 그때까지만 해도 광포한 폭군적 면모를 보이지 않았고 방법상으로도 나름의 정합성을 갖고 있었다. 무오사화의 진정한 의도는 김종직 일파를 처벌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삼사(3司)의 언론활동을 경고하려는 데 있었다고 판단된다.”

고작 ‘삼사의 언론활동’을 규제하려고 그런 피바람을 일으켰단 말인가? ‘고작’이 아니다. 이 삼사의 언론활동 규제를 둘러싼 권력투쟁이야말로 조선시대 500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키워드의 하나라는 게 김씨의 주장이다. <사화와 반정의 시대>의 핵심적 주제가 바로 “삼사라는 중요한 관서가 그 기능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과 결과를 살피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다. 그럴려면 선대인 9대 성종(재위기간 1469~1494) 치세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하고, 10대 연산군(1494~1506)과 그가 폭정 끝에 쫓겨난 반정 이후의 11대 중종조(1506~1544) 연간까지 살펴야 한다. 그 기간에 3번의 사화가 일어났고 첫 반정이 감행됐다. “조선시대를 임진난을 중심으로 전·후기로 나눌 경우 경국대전이 완성되고 진통 끝에 국왕-대신-삼사의 정립구도가 자리잡은 건국 1백여년 뒤의 이 3대 75년간의 치세가 조선후기까지 관통하는 제도의 토대를 놓은 시기다.” 김씨는 바로 이 제도에 천착하는 제도사적 접근자세를 취한다. “제도의 골격을 일단 파악하고 나면 현실의 수많은 복잡한 모습들은 한결 체계있게 정리될 수 있다.”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로 19살 때 요절한 의경세자의 둘째 자산군. 세조비 정희왕후가 형 월산군을 제치고 13살 나이의 그를 보위에 앉힌 뒤 수렴청정을 했다. 장인 한명회로 상징되듯 그 시절은 세조대에 양산된 수많은 훈구공신들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승정원(국왕 비서실)의 재상’들을 가리키는 ‘원상’ 지배체제이기도 했다. 성종이 수렴청정과 원상제를 물리치고 친정을 시작한 것은 재위 7년(1476)부터였고, 그 이후 그는 훈구대신들의 전횡을 꺾기 위한 장치로 대간, 곧 신하들을 감찰하는 사헌부와 국왕에 대한 간언과 잘잘못을 논박하는 사간원을 키웠다. 대간은 훈구세력을 밀어내고 성종시대를 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곧 비대해진 대간이 왕권을 제약하자 성종은 원래 학문을 담당한 홍문관의 언론기능을 강화해 대간들을 견제토록 했다. 삼사란 바로 대간에 홍문관이 가세한 언론·감찰기관이다. “조선은 절대왕정체제이긴 하나 왕이 마음대로 전횡할 수 있는 전제체제는 아니었다. 신권이 강했다. 삼사는 왕권과 신권에 대한 중요한 견제장치였는데, 중국엔 삼사가 약했다. 조선에서 환관의 발호가 거의 없었던 것은 삼사 덕이다. 삼사가 약했던 중국에선 환관의 힘이 셌다.”

 

삼사가 겨냥하는 주표적은 대신들. 대신은 최고관서로 영의정 등이 포진한 의정부와 이·호·예·병·형·공의 판서와 참판들이 포진한 육조(6曹), 즉 집행기관 고관들을 가리킨다. 성종은 대신과 삼사를 상호견제케 했고 삼사가 비대해지자 홍문관을 강화해 내부견제토록 했다. 이는 국왕-대신-삼사라는 조선조 특유의 정치정립구도의 토대가 됐으나 항상 제대로 작동한 건 아니었다. 말년에 성종은 “대신과 대간이라는 두 마리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19살 나이에 왕이 된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삼사의 약진에 눌려 있던 대신들과 공모해 삼사를 친 게 무오사화였다. 훨씬 더 처참했던 갑자사화는 무오사화 이후 강화된 왕권을 자의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한 연산군에게 대신과 삼사가 합세해 견제에 나서자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 못한 채 자제력을 잃은 연산군이 훈구, 사림 구분없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른 결과다. 결국 조야 모두로부터 원한을 산 연산군은 재위 12년만에 쫓겨나는데 그게 중종반정이다. 중종 14년(1519)에 조광조 등을 숙청한 기묘사화 역시 반정공신들이 주축이 된 대신의 전횡을 삼사 강화로 견제했다가 그 삼사가 왕권마저 위태롭게 한다고 느낀 중종이 이번엔 대신들과 짜고 삼사를 친 사건이라는 게 김범씨가 내린 결론이다.

“사화를 출신배경이 다른 훈구파-사람파 단순 선악대립구도의 이분법으로 봐서는 안 된다. 조선사회는 혈통과 가문 등이 공고하게 짜여진, 상상을 초월하는 인맥사회였다. 사림파 거두로 알려진 조광조나 김종직도 명문거족 출신이었고 훈구파 거두 양성지와 후손들은 사림파로 분류될 수도 있다. 훈구와 사림은 서로 얽혀 있었다.”

김씨는 국사편찬위에서 <승정원 일기>(실록보다 몇배나 더 방대한 기록이나 임진란 때 불타 인조 이후 기록만 남았다) 디지털화 작업을 하면서 지난해 타계한 미국의 한국학 연구분야 거두 제임스 팔레의 반계 유형원론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있다. 해외 한국연구는 내부시각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수준높은 일급의 연구들에 대해서는 시각이 다르더라도 “감정적 대응보다는 공부에는 공부로 대응하는 실체적 접근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때가 됐다”고 그는 말했다.

 

◎ 사화란= 사화(士禍)는 말 그대로 선비(사대부)들이 입은 참화다. 조선시대 4대 사화라면 연산군 4년(1498년) 때의 무오사화, 10년 때의 갑자사화, 중종조의 기묘사화, 13대 명종(재위 1545~1567)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를 가리킨다. 무오사화는 사림(‘사대부의 숲’이라는 뜻)파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춘추관 사관으로 있을 때 훈구대신 이극돈 등의 비행을 사초에 넣고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삽입한 게 발단이 됐다. 김종직 일파와 대립했던 이극돈, 유자광 등이 <성종실록> 편찬 때 조의제문이 단종한테서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며 연산군에 고하고 처벌을 부추겼다.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한 연산군의 무차별 보복극, 기묘사화는 유교적 도덕정치를 지향한 조광조 등이 남발된 훈구대신들의 공훈 삭제를 감행한 데 대한 대신과 국왕의 반격 모양새를 띠고 있다. 을사사화는 대윤, 소윤으로 갈라진 문정왕후 외척간의 권력투쟁이었다. 수십, 수백명에 이르는 피화자들은 다수가 사사, 주살 등의 형태로 사형당하거나 고문당하고 유배됐으며, 무덤에서 주검을 꺼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도 드물지 않았고 가족, 친척, 친구, 제자들도 연루돼 맞아죽거나 노비가 되고, 유배당하는 참혹한 화를 당했다. 반정(反正)은 정통이나 정도를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다. 조선시대에 두 번의 반정이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과 15대 광해군(재위 1608~1623)을 쫓아낸 16대 인조(1623~1649)반정이다.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비사건을 구실로 삼은 인조반정은 나름대로 치적을 쌓은 광해군의 치세와도 관련해 명분없는 궁정쿠데타였다는 지적이 많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입력 2007-11-27 02:52업데이트 2009-09-26 03:16

김미옥 기자
 
신동준 21세기 정치연구소장 새 저서에서 주장

 

“세상 물정 모르는 학자가 정계와 학계로 진출하는 한국 정치의 현실은 정치의 요체가 부국강병에 있음을 망각하고 신권정치를 추구한 조선시대의 산물입니다. 통치학의 기본을 모르고 사변적 철학만 하던 서생들이 정치에 나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학자의 정치 참여를 긍정해 온 한국 전통의 정치관을 매섭게 비판하고 나선 학자가 등장했다. 고대 유학 정치사상의 원형을 추적한 ‘공자와 그의 제자들’(전 2권·한길사)과 그 유학 이념에 입각해 세워진 조선의 정치가 공자의 본뜻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한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살림)를 1주일 새 나란히 내놓은 신동준(51·사진) 21세기 정치연구소장.

10년간의 기자 생활을 거쳐 1998년 서울대에서 ‘선진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 소장은 10년 동안 번역서를 포함해 30여 권의 책을 펴낸 동양정치사상 분야의 독보적 필자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태동고전연구소에서 배운 한학 실력을 토대로 주로 ‘도학(道學)’의 관점으로 조명되던 유교사상을 ‘사실(史實)’에 의거해 재구성해 왔다.

좌구명의 ‘춘추좌전’, 사마광의 ‘자치통감’, 사마천의 ‘사기’ 등 3권의 역사서에서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뽑아 지난해 10월에 펴낸 3권 분량의 ‘열국지’는 그 전환점이 됐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이를 토대로 ‘논어’와 ‘맹자’ ‘순자’와 같은 동양 경전에 대한 기존 해석의 잘잘못을 꼼꼼히 가려낸 저술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공자의 학문(孔學)’이 개인의 도덕성 함양을 강조한 수제학(修齊學)과 제왕의 통치학으로서 치평학(治平學)을 양 날개로 삼았음에도 맹자와 주자가 이를 수제학 중심으로 왜곡한 실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공자가 역할 모델로 삼았던 자산(子産)은 약소국 정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덕치가 아닌 법치를 펼친 인물이었습니다. 그처럼 공자의 치평학은 신권 중심의 왕도(王道)와 왕권 중심의 패도(覇道)를 병용해 부국교민(富國敎民)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치평학의 관점에서 중왕경패(重王輕覇)의 공자, 숭왕척패(崇王斥覇)의 맹자, 선왕후패(先王後覇)의 순자, 중패경왕(重覇輕王)의 한비자로 나눠놨을 때 공자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순자입니다. 그런데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가 법가(法家)를 확립해 진나라의 이데올로그가 되면서 순자까지 통째로 부인된 것입니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이런 맥락에서 조선이 ‘공자의 나라’가 아닌 ‘맹자와 주자의 나라’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평화 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신 소장은 조선조에서 신권 강화와 왕권 약화를 초래한 핵심기관으로 성종 때 설치된 최고 학술기관인 ‘홍문관’을 꼽았다.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3사(三司)로 꼽히는 홍문관을 거쳐야 비로소 3사의 관원과 조정의 요직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홍문관이야말로 통치학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도학자들만 양성하던 곳이었으니 조선의 정치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강력한 왕권을 추진했던 정조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도 지나치게 학문에 매달려 정치의 본질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무릇 임금의 도(君道)는 인재를 알아보는 것(知人)에 있고 신하의 도(臣道)는 사물에 정통한 것(知事)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신하들과 지식을 다투는 쟁지(爭知)에 빠져 정작 신하를 쓰는 용인(用人)의 묘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 역시 치평의 묘를 터득하지 못한 주자학자에 머물렀던 것이지요.”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 2008. 4. 21. 14:26수정 2008. 4. 21. 14:26

[CBS문화부 정재훈 기자]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는 선조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에 대한 보존처리 및 복원이 완료됨에 따라 오는 23일부터 3개월간 충남 아산시 현충사 유물전시관에서 공개한다.

'선무공신(宣武功臣)'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7년(1604년) 전쟁에 공훈이 있는 장수 18명(1등 이순신, 권율, 원균 등 3명, 2등 5명, 3등 10명)에게 내린 공신 칭호로서 '선무공신교서'는 이들 선무공신 개인의 공적과 수여하는 상급(賞給)을 기록했다.

 

충무공에 대한 '선무공신교서'는 지난해 7월 충무공 덕수 이씨 후손인 이재왕씨로부터 기증받아 보존처리 및 복원을 마쳤으며, 지난 10일 문화재위원회(동산문화재분과)의 국가지정문화재 지정 심의를 거쳐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 현충사 관리소 ☎ 041)539-4615

이와 함께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아산시에서 열리는 제47회 성웅이순신축제 기간동안 '한국의 배, 세계의 배'라는 주제로 축제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이동박물관'을 25일부터 30일까지 운영할 예정이다.floyd@cbs.co.kr

 

 

입력 2021. 4. 27. 08:10

신분 구분 없이 모두 참여한 민주자치 450년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영암 연주현씨 사직공파의 현건(1572~1656), 현덕승(1555~1627)은 민간의 리더로서 충무공 부대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군수 업무를 자발적으로 도맡았다.

충무공의 인척이기도 했기에, 집안살림을 쾌척하는 것은 물론 대동계의 리더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지역공동체의 수군 지원 조달캠페인을 이끌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영암 연주현씨 사직공파 종가 입구에 세워진 충무공의 ‘약무호남 시무국자’ 표석

 

이들은 충무공과 수많은 편지 소통을 했는데, 이순신장군의 친필 편지를 모은 ‘서간첩’은 국보 76로 지정돼 있다. 현씨 가문에서 장군을 후손에게 전해준 이 편지모음은 현재 현충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편지중에는 그 유명한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서지 못한다)’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종가는 이 글귀를 종택 입구에 큰 표석으로 세웠다.

영암 연주현씨 사직공파 회사정. 구림 대동계의 중심 시설로서 구국과 지역발전을 위한 크고 작은 회합과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남도일보]

 

영암 상대포와 구림마을은 이 고을을 대표하는 찬란한 문명의 국제 전파, 더불어 함께 잘 잘기 위한 대동계의 표상이다.

영암 구림에 입향한 현윤명의 증손자 현건(1572~1656)은 먼저 살고 있던 다른 가문이 창립한 구림 대동계가 전쟁의 혼란 등으로 힘겨워지자, 이를 재건해 동장으로 추대됐다.

상대포구의 상대정. 왕인박사,도선국사, 충무공의 자취가 남은 곳이다. 국제무역 중심, 청해진 관문이기도 했다. 배는 왕인 박사 일행이 일본에 문물을 전하기 위해 타고갔던 배 모형. [남도일보]

 

종가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전쟁 물자를 공급했으며, 전후에는 주민의 ‘화민성속(化民成俗·백성을 교화하여 좋은 풍속을 이룸)’과 교육에 힘썼다. ‘연주현씨 사직공파 종가’는 전남 영암군 군서면의 구림마을에 뿌리내려 이웃과 400년 동고동락했다.

연주현씨는 조위총의 난을 평정한 평안도 영변의 호족 현담윤을 시조로 삼으며, 12대손 현윤명(1420~?)은 1450년경 천안에서 영암 구림으로 내려와 3대 현감 집안 난포박씨와 혼맥을 맺으면서 사직공파 종가를 열었다.

영암 연주현씨 사직공파 종가 모습

 

당시 구림마을은 진도·완도·제주로 가는 바닷길목이자 일본·중국으로 통하는 국제 포구였던 ‘상대포’를 끼고, 도예 가마터 등 산업단지를 품었다.

‘낭주골 처녀’ 노래에 나오는 낭주최씨를 비롯, 죽정서원의 함양박씨, 서호사의 창녕조씨, 동계정의 해주최씨 등 성씨들이 부락을 이루었는데, 그 중 나주목사를 지낸 선산 임씨 임구령이 입향해 간척으로 조성한 ‘지남들’ 농토가 마을의 경제기반이 된다. 선산임씨 장남 임호(1522~1592)와 함양박씨 박규정(1498~1580) 등이 중심이 돼 1565년 구림대동계를 창립한다.

영암 연주현씨 사직공파의 죽림정. 숙종이 하사한 회화나무가 있다. [남도일보]

 

현건이 동장을 맡던 전쟁 후의 구림대동계는 달라진다. 1609년(광해군 원년)에서 1747년 사이에 작성한 구림동헌(鳩林洞憲)과 동계(洞契) 문서를 보면, 동계규약은 도로 보수·산림 보호·교량 건설 등 전후 복구와 마을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구림대동계는 사대부의 ‘향규’와 하층민의 ‘촌계’를 일원화해 지역사회 구성원 전원을 참여시켰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이같은 민주적 자치체제의 정신은 450여년 지속되고 있다.

현건의 손자로서 광릉참봉을 지낸 현징(1629~1702)은 왕인박사가 배웠다는 ‘문산재’ 서당을 복원하고 학당을 열고 전라도 서남권 인재들을 가르쳤다. 내동리에 있던 취음정을 옮겨지었는데 1678년 영의정 김수항이 ‘죽림정’이라 이름짓고 중림정기를 남겼다.

구국과 나눔의 뜻이 서린 ‘백성와 화합하고 풍속을 발전시키라’는 의미의 구림대동계의 교훈 표석이 연주현씨 종가에 세워져 있다.

 

종택 입구에는 수령 250년된 팽나무 두그루가 대문을 대신하고 대나무, 소나무, 벽오동, 동백나무, 회화나무 등이 죽림정을 포근하게 감싼다.

abc@heraldcorp.com

 

 

[단독] 이순신 종가 "현충사에 박정희 현판 내려라" (daum.net)

CBS노컷뉴스 송영훈 · 스마트뉴스팀 김세준 기자 

입력 2017.09.14. 06:04 수정 2017.09.14. 07:17 댓글 3127                     

왕실과 충무공 의미퇴색.. 종가 "난중일기 전시 중단하겠다" 경고

youtu.be/uQJD1vxSmOo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 철거 문제로 시끄럽다.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 재위시절 이순신의 공적을 기려 현충사에 직접 현판을 사액했지만 현재 현충사에는 숙종이 아닌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순신 종가는 현판 원상복구를 요구하며 난중일기 전시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 숙종 밀어낸 '박정희 현판'… 왕실현판은 화장실 옆에

 

1707년, 숙종은 이순신의 공적을 기려 충남 아산 현충사에 현판을 사액했다. 조선시대 임금의 사액을 받은 사당이나 서원은 그 권위를 인정받음과 동시에 왕실의 보호를 받는 존재로 여겨졌다.

충무공의 충성을 기린다는 뜻의 '현충(顯忠)'이라는 현판을 임금이 직접 내리면서 현충사는 성역으로 거듭났고 오늘날까지도 초임 군 장교나 경찰공무원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CBS 취재진이 방문한 현충사에는 숙종의 현판이 아닌 다른 이의 현판이 본전을 차지하고 있었다. 친필현판의 주인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현충사 본전에 걸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현판. (사진=김세준 기자)
 
정작 숙종의 사액현판은 현충사와는 도보로 15분여 떨어진 인적 드문 모퉁이로 밀려났다. 그나마 그 옆에 위치한 공용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한 관람객들의 발걸음만 이어질 뿐이었다.

1707년 숙종이 사액한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 일제(日帝)의 이순신 가문 탄압도 모두 견뎌내며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1932년에는 조선인들이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지켜내기도 했다.

하지만 1966년 박 전 대통령이 '현충사 성역화작업'을 진행하면서 숙종 현판은 현충사 본전자리를 대통령 친필현판에 내줘야 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충무공의 영정과 위패는 숙종이 아닌 박 전 대통령의 현판과 함께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다.

1706년 숙종이 사액한 현판은 박 전 대통령의 친필현판에 밀려 인적이 드문 모퉁이에 전시됐다. (사진=김세준 기자)
 
◇ 이순신 종가 "朴 현판 철거하라"… 난중일기 전시중단

충무공의 '명량대첩 승전 420주 년'을 맞은 올해 이순신 종가는 방치된 숙종 현판을 다시 원상 복구할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며 난중일기 전시를 중단하겠다고 13일 밝혔다. 현재 난중일기 원본은 현충사 내 박물관에 소장돼 전시 중이지만 종부 소유의 물품으로 언제든 전시를 철회할 수 있는 상황이다.

종부 최순선 씨는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숙종 사액 현판을 복구할 때까지 난중일기의 전시를 영구 중단할 예정"이라며 "현충사가 올바른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설명했다.

종부는 현판 원상복구는 물론 연말까지 충무공의 사당 앞에 심어진 일본의 국민나무 금송(일본명 고야마키)도 조속히 제거해줄 것을 요구하며 문화재청에 14일 진정서를 접수할 계획이다.
(관련기사 : CBS 노컷뉴스 17. 8. 13 이순신 장군 사당에 日 국민나무 '고야마키')

이에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역사가 더 깊은 왕실현판으로 교체하는 것에 공감한다"면서도 "그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숙종 현판의 규격이 현재 현판보다 작아 교체할 경우 잘 안 보일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박 전 대통령이 다시 세운 이순신 현충사에는 박 전 대통령의 친필현판과 기념수가 심어졌다. (사진=김세준 기자)
 
◇ '이순신'은 없고 '박정희'만 있는 현충사

현충사는 1966년 성역화작업을 거치면서 거대한 규모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17만여 평의 현충사가 정작 충무공보다는 박 전 대통령을 드러내는 용도로 쓰였다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노태우 전 대통령도 교정작업을 지시했을 만큼 일본식으로 지어져 양식과 의미 모두 변질됐다"며 "성역화작업으로 현충사는 목조건물이 아닌 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등 박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5년에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조차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같은 곳"이라 발언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당시 거센 항의로 유 전 청장이 공식사과하기도 했지만 문화재를 관리하는 당국에서조차 현충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제로도 현충사 본전을 가기 위해 지나는 '충의문' 현판 역시 박 전 대통령의 친필로 제작됐다. 본전에 들어서서도 왼편엔 '박정희 대통령 각하'라 적힌 기념석과 함께 그가 직접 헌수한 일본나무 금송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현충사 외에도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권율 장군을 모신 경기도 충장사에도 박 전 대통령의 친필현판이 걸려있다.

종부 최 씨는 "현충사는 사실상 박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곳 같다"며 "충무공의 의미를 퇴색한 현충사에 난중일기를 더 이상 전시할 수 없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CBS노컷뉴스 송영훈 · 스마트뉴스팀 김세준 기자] 0hoon@cbs.co.kr

 

 

충무공 탄신 472주년..이상한 현충사 (daum.net)

김석 입력 2017.04.30. 23:57 댓글 40                         

tv.kakao.com/v/v02f9sKK7L1KXZfXG176Ak1@my

 

 

왜군의 침략으로 전 국토가 처참하게 유린당할 때,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왜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지켜낸 민족의 영웅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생 472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후손들은 충무공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고 있을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무예를 연마하며 구국의 역량을 기르던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혼을 기리는 사당, 현충사입니다.

 

호국의 성지이자 항일의 구심점인 현충사는 과연 민족의 영웅을 기리는 공간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현충사의 현주소를 들여다 봤습니다.

현충사 정문을 지나 앞으로 곧장 걸어 올라가면, 커다란 붉은 문이 관람객을 맞습니다.

능이나 묘, 사당 입구에 세우는 '홍살문'입니다.

신성한 공간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관문으로, 예로부터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나무 같지만 '시멘트'입니다.

곳곳에 시멘트를 덧바른 흔적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아담하고 운치 있는 한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았던 유서 깊은 집입니다.

벽이며 천장 할 것 없이 온통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았습니다.

부서져 떨어져 나간 곳들도 그대로 방치돼 있습니다.

황토 대신 시멘트로 메운 이름뿐인 이순신 옛집인 겁니다.

 

<인터뷰> 박소영(서울시 강동구) : "보기는 안 좋네요. 이렇게 시멘트로 원래 되어 있는 게 아니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도 미관상이라든지 역사적인 장소에 대한 예의를 생각했을 때 더 좋은 것 같아요."

1968년 현충사에선 대대적인 성역화 공사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나무로 복원됐어야 할 주요 건물들이 전부 콘크리트로 지어졌습니다.

그 뒤로 반 세기.

현충사는 여전히 차가운 콘크리트에 갇혀 있습니다.

<인터뷰> 김준혁(한신대 교수) : "거대한 시멘트 건물로 만들어진 전혀 이질적인, 겉모습은 우리의 옛 모습인 것 같지만 실제로 전혀 우리의 모습이 아닌 그런 공간이 바로 현충사죠."

진작부터 이런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었던 문화재청.

이제야 단계적으로 콘크리트 건물을 목조로 바꿔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올해와 내년에 걸쳐서 지금 사당 앞에 있는 홍살문 같은 경우도 시멘트로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들도 고쳐나갈 계획이 있고, 그런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충사를 찾은 사람들이 사당에 예를 올립니다.

참배객들을 맞는 건 사당 안에 모셔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

이 영정을 그린 화가는, 근대 한국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월전 장우성 화백입니다.

하지만 장 화백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

때문에 표준영정을 바꾸자는 요구가 그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순신 장군이 입고 있는 관복의 고증이 잘못됐다는 점.

영정 전문가를 찾아가 면밀하게 고증해보기로 했습니다.

이순신 영정만 20년 가까이 연구하며 국내 최고의 영정 화가로 꼽히는 권오창 화백.

전국의 박물관을 누비며 자료를 모으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16세기 무신 권응수 장군의 초상을 찾았습니다.

두 초상의 옷차림을 비교해 봤습니다.

먼저, 머리에 쓰는 관모.

16세기 초상화에 비해 이순신 영정의 관모가 훨씬 더 높고, 관모와 이마의 경계선도 이순신 영정 쪽이 훨씬 둥급니다.

다음은 목의 깃 부분.

권응수 초상은 목의 깃이 얕아 목 가까이 바짝 붙어 있지만, 이순신 초상은 목의 깃이 한참 아래로 내려와 있습니다.

이번엔 소매.

권응수 초상에 비해 이순신 영정의 소매는 아래로 흘러내릴 만큼 품이 넓습니다.

다음은 '흉배'라 불리는 가슴 장식.

당시 같은 종 2품 무관이었던 권응수 초상에는 호랑이가 한 마리만 그려져 있는데, 이순신 영정은 좌우로 두 마리.

조선시대 흉배 가운데 호랑이를 좌우로 배치한 사례는 없습니다.

<인터뷰> 권오창(영정 전문 화가) : "어디를 봐도 조선 말기에 봐도 두 마리가 이렇게 돼 있는 건 없습니다. 제가 무슨 문헌이라든가 유물이라도 발견됐으면 아,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그렸구나 하겠는데 어디를 봐도 그런 거는 못 봤거든요."

실제로 장우성 화백이 그린 유관순 열사 영정은 영정 속 얼굴이 실제와 다르다는 이의가 받아들여져 2006년 다른 그림으로 교체됐습니다.

<인터뷰> 권오창(영정 전문 화가) : "복식이 맞아야 시대상을 알고 당대의 신분을 알기 때문에 그게 미흡하면 두 번, 세 번 다시 반복해서 그리고 고증을 확인하고 하는 절차가 필요한 게 바로 표준영정 제작이거든요. (바꿔야 되는 거죠?) 네, 바꿔야 됩니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면 사당 건물 양쪽에 솥 모양의 장식물이 보입니다.

'정'이라고 불리는 이 조형물은 정통 왕조,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 장식물입니다.

때문에 궁궐 가운데서도 조선왕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 근정전과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 중화전 두 곳에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궐 유물이 왜 사당 앞에 있는 걸까?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최초 설치 시기라든가 그게 왜 설치됐는지 경위라든가 이런 자료는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저희들이 확인을 못 했는데요. 현충사 연혁지 자료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1967년 4월경에 현재 위치에 설치돼 있는 걸로 나타나고 있어요."

현충사에선 해마다 충무공 탄신일 기념행사 때 이곳에 향을 피웁니다.

하지만 취재진이 여러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정은 국권,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현충사엔 맞지 않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녹취> 궁궐 의례 전문가(음성변조) : "향로는 한 개를 놔야 되지 않습니까. 향로로 쓰는 것은 기본적으로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예법이 발달했던 조선시대 때 그런 사례가 없잖아요."

현충사는 한때 곳곳에 얼룩진 일제 잔재로도 신음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현충사 연못입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일본 교토의 니노마루 연못과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현충사 연못은 마침내 올해 반듯한 우리 연못으로 복원됐습니다.

하지만 일제 잔재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현충사 사당 왼쪽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일본을 대표하는 '금송'입니다.

<인터뷰> 혜문(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 "이 나무는 조선총독부 관저를 건립했을 때 일본 군인들이 총독 관저 건립 기념으로 심었던 나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 청와대에 계속 살아 있었던 그 나무를 현충사를 지으면서 이곳에 이식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연못은 바꾸라고 한 문화재위원회가 유독 금송만은 2010년과 2015년 두 차례 모두 제자리에 두라고 결정합니다.

전직 대통령이 심어 시대성과 역사성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금송 이전 문제가 처음 불거진 건 지난 1991년.

당시 현충사를 찾은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문화재청이 금송을 사당 밖으로 옮긴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지만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문화재청은 금송을 사적지에 부적합한 수종으로 분류까지 해놓고 왜 옮기지 않았을까?

<인터뷰> 원성규(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장) : "그 당시는 문화재 관리국 시절인데 예산확보가 안 됐어요. 그때 외래수종 다 정비하는 데 한 20여억 원, 21억 정도 되는데요. 그때 예산 확보가 안 되다보니까 정비가 안 됐고."

이후 위치만이라도 옮기자는 요구가 계속됐지만 문화재 당국은 여전히 묵묵부답.

현충사뿐만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7백 의사의 유골을 안치한 항일 유적지 칠백의총.

이곳에도 사당 바로 옆에 버젓이 금송이 자라고 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나무가 한국을 대표하는 항일 유적지 곁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인터뷰> 박상진(나무 고고학자/경북대 명예교수) : "위치만 조금 옮기면 기념식수라는 의미도 살릴 수 있고 또 현충사가 갖고 있는 뜻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을 맞아 올해도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린 호국의 성지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업적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현충사를 찾는 방문객은 연간 100만 명에 이릅니다.

김석기자 (stone21@kbs.co.kr)

 

 

  • 수정 2008-06-02 22:10 등록 2008-06-02 22:10

거북선 이번엔 찾을까 (hani.co.kr)

경남, 조선 수군 참패한 ‘칠전량’ 1년간 조사

기자최상원
  •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7년(선조 30년) 음력 7월15일 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장군은 거북선 7~8척을 포함해 170여척에 이르는 조선 수군의 모든 함선을 이끌고 거제도 앞 칠천량의 좁은 바다를 통과하다가 왜군의 기습공격을 당했다. 16일 새벽 조선 수군 1만명과 150척 이상의 함선이 왜군에 괴멸당했다.

당시 조선 수군과 함선들이 수장당한 칠천량 바다에서 거북선 찾기 사업이 벌어진다. 경남도는 2일 거제시 공설운동장에서 출항식을 열고, 내년 5월 말까지 ㈜한국해양과학기술 등 3개 탐사업체와 함께 거제시 칠천도 해역 1584만㎡에서 거북선 찾기에 나선다고 밝혔다. 전체 예산 11억7천만원 가운데 8억원을 경남지역의 4개 조선업체가 분담한다.

7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해군, 문화재관리국 발굴조사단, 한국해양연구소 등 여러 기관이 네 차례 거북선 찾기에 나섰으나, 아무도 단서를 찾지 못했다. 1996년에는 이충무공 해저유물발굴단장이 가짜 별황자총통을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 빠뜨렸다가 건져낸 사실이 드러나 처벌되기도 했다.

해군교육사령부 충무공리더십센터 제장명 교수는 “칠천량 해전 이후 거북선 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점을 볼 때 칠천도 앞바다에 거북선이 가라앉았을 가능성이 높다”면서도 “너무 긴 시간이 흘렀고 임진왜란 당시 배를 불태운 경우가 많아 거북선을 찾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 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8-04-02 19:12

이순신, 원균을 ‘흉악한 도적’에 비유 (hani.co.kr)

충무공 일기 32일치 새로 찾아
문화재청 ‘충무공유사’ 판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쓴 일기 <난중일기> 가운데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던 32일치가 새롭게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2일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에 의뢰해 현충사에 소장된 충무공 관련 자료를 정리한 17세기 책 <충무공유사>를 판독, 번역한 결과 지금 전해지고 있는 <난중일기> 초고본 등에 없었던 32일치 분량의 일기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충무공에 대한 자료를 필사한 <충무공유사>는 <난중일기>와 함께 충무공 종가에서 내려온 책으로 1670년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보 76호인 <난중일기> 초고본에는 을미년(1595년)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데, <충무공유사> 중 <난중일기>의 일기 내용을 뽑아 쓴 ‘일기초’ 부분에 325일치 일기가 들어 있고, 이 가운데 을미년을 중심으로 한 32일치가 새롭게 발견됐다.

문화재청이 이날 공개한 32일치 일기의 번역 자료를 보면 충무공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흐트러짐이 없는 강직하고 꼿꼿한 면모, 백성과 군사를 아끼는 자상함 등을 엿볼 수 있다. 충무공은 1595년 정월 12일에는 “삼경에 꿈을 꾸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오셔서…, (중략) 완전히 평소와도 같은 모습이어서 이를 생각하며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고 적었다. 11월4일치에선 “우리나라의 병사들이 쇠잔하고 피폐한데 이를 어찌하랴”는 대목이 나온다.

또 동료 장수에 대한 언급도 자주 나오는데 특히 원균에 대한 불만이 많은 점이 눈길을 끈다. 11월1일치를 보면 “김희번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영의정의 편지와 조보 및 원흉적(元兇賊=원균)의 답서를 가져와 바치니…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천지 사이에는 이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권율에 대한 비판도 등장한다. 1595년 4월30일치에는 “아침에 원수(권율)의 계본(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의 일종)과 기·이씨 두사람의 공초(죄인의 진술)초안을 보니 원수가 근거 없이 망령되게 고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반드시 실수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데도 원수의 지위에 둘 수 있는 것인가. 괴이하다”고 적었다.

<충무공유사>를 판독, 번역한 노승석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대우교수는 “<충무공유사>의 일기에는 초고본 <난중일기>에서 확인이 어려웠거나 빠져있는 글자들이 적혀 있는 경우가 있고, 새로운 내용도 있어 <난중일기>의 해독과 보완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 문화일보
  • 입력 2007-12-11 13:44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설명과 함께 국내는 물론 미국 워싱턴 전쟁기념관 등 세계 각지 역사기념관에 모형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다.

역사저술가 박은봉씨가 최근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에서 거북선은 나무판에 송곳을 꽂아 넣은 배라고 지적한 것. 그는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남긴 ‘이순신행록’ 등 국내 사료에 거북선에 철갑을 둘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고 ‘두꺼운 판(板)을 덮고 그 위에 칼과 송곳을 꽂았다’는 기록만 있으며 여기서 판은 나무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썼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그 말이 맞는 듯싶다. 이순신이 1592년 6월4일에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는 거북선의 구조와 기능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철갑에 대한 글은 없고 ‘등에 쇠송곳을 심었다’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거북선이 어떻게 철갑선으로 알려졌을까.

임진왜란 당시 왜장 도노오카는 1592년 7월28일 부산포에서 작성한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라는 기록문을 남겨 한산대첩과 안골포 해전의 실전상황과 거북선에 관해 본 대로 적고 있다.

‘8일 안골포의 오도항에 들어갔다. 그리하였더니 9일 진시부터 적의 대선 58척과 소선 50척 가량이 공격해 왔다. 대선 중의 3척은 맹선(盲船·거북선)이며, 철(鐵)로 요해(要害)하여…유시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쏘아대어….’ 여기에 나온 ‘철로 요해하여’라는 대목이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연결지을 수 있는 최초의 언급이다.

신동원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도 ‘역사비평’ 겨울호에서 1831년 일본의 정한위록(征韓偉錄)이 고려선전기를 인용해 이순신에게 당한 패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부풀린 것 같다고 했다.

거북선을 세계최초의 철갑선이라고 한 국내 첫 기록은 유길준의 서유견문록(1895년)인데 신 교수는 유길준이 일본에서 정한위록을 보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추정했다. 단재 신채호도 ‘대한의 희망’(1908년)에서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했다가 ‘조선상고사’(1930년)에서는 부인하고 있다. 거북선이 철갑선으로 굳어진 것은 이순신을 신격화한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라는 게 최근의 중론이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세계 최초’는 이렇듯 바로잡아야 할 과거사의 또 한줄기가 되고 있다.

[[이동윤 / 논설위원]]

 

 

거북선 ‘후속 모델’ 해골선 (chosun.com)

조선 후기의 수군 전함… 도면 처음으로 공개돼

입력 2007.12.02. 23:59업데이트 2007.12.03. 10:28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보다 150년 뒤에 만들어진 조선 수군의 전함은 비둘기처럼 생겼다?

조선 후기의 전함이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해골선의 모습을 그린 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해골’이란 바다(海)의 비둘기 또는 '송골매'란 뜻이다. 고창석 전 한국고서협회 회장은 최근 발간한 ‘조선 수군과 해양유물 도록’(장보고 刊)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해골선도’를 공개했다.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도면은 ‘해골선’이라는 제목 아래, 배 앞부분이 새의 머리처럼 돼 있고 새의 깃털이 배 위를 뒤덮은 형상의 전함을 그렸다. 그 밑에 “본판(本板·바닥)의 길이는 7파(把·1파는 10척) 5척, 윗부분의 길이는 9파 3척, 너비는 2파 5척, 높이는 2파 1척이다. 정묘년(1747년으로 추정) 3월 ○일에 쇠못을 박아 새로 만들었고 가격은 쌀 80석(石) 6두(斗) 5합(合)”이라고 적었으며 전라우도의 관인이 찍혀 있다.

1747년 3월 전라우수영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에 수록된 조선 수군의 전함 해골선의 그림.

 

‘조선왕조실록’ 영조 16년(1740년) 윤6월 18일조에는 “전라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해골선을 만들었는데, 몸체는 작지만 가볍고 빨라서 바람을 두려워할 걱정이 없었다” “(임금은) 통영과 여러 도(道)의 수영(水營)에 해골선을 만들라고 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정조 때 나온 ‘전라우수영지’에 의하면 이 배에는 모두 56명이 탑승할 수 있었다. 학계에선 임진왜란 때의 판옥선보다 선체가 작으면서도 운용하기 편리한 중소형 군선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이 배의 모습을 그린 당시의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100여 년이 지난 1855년에 편찬된 ‘무비요람(武備要覽)’에 중국의 ‘무비지(武備志)’를 보고 그린 것으로 보이는 해골선 그림이 있지만 이번 자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정진술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기획실장은 “문서의 출처와 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선 후기의 주요 함선이었던 해골선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고 말했다. ‘조선 수군과 해양유물 도록’은 이 밖에 고창석씨가 소장한 ‘충무공 장계’ ‘조선사공명부’ ‘해동제국기’ 등의 자료를 수록했다.

 

 

권영은입력 2019. 12. 8. 15:57수정 2019. 12. 9. 09:47

이순신장군 북방 유적 발굴지역. 그래픽=송정근 기자

 

서울시가 북한, 러시아와 함께 이순신 장군 북방유적 발굴에 나선다. ‘해전의 신’으로 불리는 이순신 장군은 녹둔도 둔전관 시절 막강한 여진족을 물리칠 만큼 육지 전투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이 장군의 첫 북방유적 발굴이 경색된 남북 관계 국면에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울시는 민간단체인 남북역사학자협의회(이하 역협)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러시아 협조를 얻어 이순신 장군이 활약한 북방 유적지에 대한 남북 동시 발굴에 최초로 나선다고 8일 밝혔다. 해당 지역은 현재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 하산군(옛 녹둔도)과 북한 내 함경북도 나선시 일대다.

 

이번 발굴은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조명한다는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뜻 깊은 한편 러시아와 남북을 철도로 잇는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배후 기반 조성에도 큰 진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남북관계 개선 시 ‘경협 재개 1호 사업’으로 꼽힌다.

서울시 주도로 이뤄지는 이번 발굴은 러시아가 남북 사이에서 다리를 놓으면서 지난 8월 가시화됐다. 이순신 장군의 유적 발굴로 민족 정기와 동질성을 회복하자는 공감대가 남북간 이뤄졌다는 게 서울시 측 설명이다. 북측에서는 우리 문화재청과 같은 역할을 하는 민족유산보호지도국이, 러시아에서는 극동연방대학과 공공기관인 러시아군사역사협회가 참여한다.

다만 현재 남북 교류가 답보 상태에 놓여있는 상황을 감안해 ‘한러 분과’와 ‘북러 분과’로 구분해 진행한다. 발굴은 공동 추진하되 남북이 직접 만나지는 않으면서 한국과 러시아, 북한과 러시아가 구역을 나눠 발굴하는 식이다.

발굴 작업은 내년 3월 옛 녹둔도 일대부터 시작한다. 북한 영토 내 나선시 일대 발굴은 그 이후 단계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출입 허가를 받아 녹둔도 발굴부터 먼저 시작한다”며 “나선시의 경우 남북 정세가 좋아져 동시에 발굴을 진행하면 좋겠지만 일단 녹둔도 다음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선시에는 1587년 조산보(나선시)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부임한 이순신 장군이 여진족을 물리치고 세운 공적비(‘승전대비’)와 이순신 사령부가 있던 조산진성이 현존한다. 옛 녹둔도 지역에도 전투 현장인 녹둔토성이 존재한다는 기록이 여러 고문서에 남아있다.

발굴 조사를 위한 준비 단계로 남북과 러시아는 사전 조사와 현장답사, 국제학술회의를 모두 마쳤다. 이달 1일과 6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러시아 측은 지난해와 올해 녹둔도 사전 조사에서 발굴한 조선 시대 백자 조각 등 출토 유물들을 전시했다. 남측은 출토 유물을 3차원으로 스캔해 내년 발굴조사 착수 전까지 국내 조선 시대 유물들과 비교 분석하기로 했다.

 

시는 이번 녹둔도 유적 발굴 사업을 위해 역협에 총 8억4,000만원을 지원한다. 전액 250억원 규모로 조성된 남북교류협력기금에서 충당한다.

황방열 시 남북협력추진단장은 “이순신 장군의 북방유적 조사를 위한 국제학술회의가 남ㆍ북ㆍ러 참여로 개최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며 “대내외 정세가 개선돼 빠른 시일 내 남북이 공동으로 나선과 녹둔도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발굴조사를 추진하는 날이 오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참고자료>

 

조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조선(朝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Joseon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500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600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700 - Wikipedia

 

List of countries by population in 1800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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