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9년(숙종 45)에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契帖). 원래 기소로는 ‘정2품 이상의 문관에 70세는 넘어야 입소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태조(이성계)께서도 60에 기로소에 들어갔다’는 이유를 대며 기로소 입소를 강행했다. 이 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 뒤 제작한 화첩이다. 1720년 완성됐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숙종대왕 호시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조선조 숙종의 서거 300주년을 맞아 6월28일까지 개최하는 테마 특별전의 제목이다. ‘호시절(好時節)’은 말 그대로 ‘좋은 때’이므로 숙종의 치세가 그만큼 편안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숙종(재위 1674~1720)은 영조(52년·1724~1776년)에 이어 두번째로 긴 만 46년(재위 1674~1720) 조선을 다스린 군주다. 숙종은 특별전에서 소개하듯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대동법, 백두산정계비, 상평통보…
숙종은 새롭게 개발된 농토 등 변화상을 반영하는 토지대장을 작성해서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또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대동법의 범위를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넓혔다. 대동법은 국가에 납부할 세금을 쌀(혹은 무명이나 면포)로 통일한 제도다. 대동법에 따라 쌀로 일괄 납부하다보니 국가는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사들였고, 그에따라 상품유통이 활발해졌다. 보다 편리한 유통을 위해 화폐가 필요했고, 1678년(숙종 4년) 상평통보를 찍어냈다. 북한산성을 새로 쌓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워(1712년·숙종 38년) 조선-청나라 양국 국경을 명문화한 것도 특기할만 하다. 또 울릉도를 조선의 실질적인 영토 관리영역으로 포함시켰다. 숙종대에 설정된 국토경계는 지금까지도 강역의 기본틀이 됐다.
그러한 점을 평가한 것일까. 이번 테마전에서는 태조를 ‘창업의 군주’로, 숙종을 ‘중흥의 군주’로 꼽았다. 전란(임진왜란~병자호란)의 후유증을 실질적으로 치유하고 시대적 변화를 이끌어 조선 후기 중흥의 시대를 연 임금이라는 것이다.
제갈량을 그린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 숙종은 1695년 중국의 명재상 제갈량(184~234)을 주제로한 ‘제갈무후도’를 그릴 것을 지시한 뒤 이 그림에 직접 글을 지었다. 숙종은 이 글에서 제갈량과 유비의 만남을 현신과 명군의 만남으로 묘사하면서 신하들에게 충성심을 독려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0만명이 떼죽음 당했다
그러나 숙종은 과연 중흥군주였으며, 숙종이 지배한 조선의 46년이 ‘호시절’이었을까. 필자는 못내 마음에 걸린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소빙하기는 17세기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끊임없이 백성들을 괴롭혔다.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71년)에 이어 숙종 연간인 1695(을해년)~1696년(병자년) 사이에 덮친 ‘을병대기근’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699년 전국의 인구는 577만 2300명으로 집계됐다. 계유년(1693년)과 비교하면 141만 6274명이 줄었다. 을해년(1695년) 이후 기근과 전염병이 참혹했기 때문이다.”(<숙종실록> 1699년 11월16일)
1695년부터 99년까지 4년간 조선 인구의 20% 정도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얘기다. 배가 고파 인육까지 먹는 비참한 상황이 연출됐다. 민심이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1697년(숙종 23년) 경기 광주의 백성 수백명이 점거폭력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광주 백성들이 대궐 앞서 관리들의 출근을 막고 ‘먹을 것을 달라’고 호소했다…수어사(남한산성을 지키는 관리) 이세화(1630~1701)의 집에서 밤샘 점거농성을 벌이며 군관을 집단구타하고….”(<숙종실록>)
1712년 숙종의 명에 따라 축성된 북한산성을 그린 ‘북한지’(1745년). 수도방위를 위해 도성 인근에 쌓은 성이다. 천혜의 요새라는 명성에 걸맞게 북한산 깊숙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요승 여환, 장길산, 검계, 명화적까지
요승 여환과 장길산, 명화적(떼강도), 검계(폭력조직)이 나타났거나 극성을 부린 것도 숙종 때였다.
“요사스러온 자(여환)가 자칭 ‘신령(神靈)’이라 일컫고 도당(徒黨)을 모아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고 있는데….”(<숙종실록> 1688년 8월1일)
여환에 퍼뜨렸다는 괴서에는 “9~10월 쯤 군사를 일으켜 도성에 들어가면 대궐 가운데 앉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1697년(숙종 23년) 장길산이라는 도적이 중국인 승려 무리와 결탁해서 조선과 중국에서 반역을 일으킨다는 소문도 횡행했다.
“운부라는 중국인 중이 장길산의 무리와 결탁해서…조선과 중국을 평정하여 정씨 성(조선)과 최씨 성(중국으로 왕을 세우겠다고 했답니다.”(<숙종실록> 1697년)
폭력조직인 검계가 들끓었고, 그들 가운데는 포도청 수감 중 칼로 가슴을 베는 등 자해공갈의 패악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었다.(<숙종실록> 1684년) 지금의 떼강도 격인 명화적 때문에 “장사꾼의 발길조차 끊어졌다”(<숙종실록> 1703년)고 토로하는 기사도 여럿 등장한다.
특별전에서 ‘숙종의 치적’으로 지목한 북한산성 축조도 달리 봐야 한다. 숙종은 1712년(숙종 38년) 4월 북한산성 수축 후 “이제 도적과 비도(匪徒)가 감히 다가올 수 없다”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 여기서 ‘도적’과 ‘비도’라는 표현이 심상치 않다. ‘외부의 적’ 보다는 ‘내부의 적’을 근심한 나머지 북한산성을 축조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도그럴 것이 당시 외침(外侵)의 우려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17세기 후반 청나라 강희제(재위 1661~1722)의 치세가 안정적이었고, 조선과도 우호관계도 유지했다. 그런 정세를 반영해서 1702년(숙종 28년) 좌의정 이세백(1635~1703)은 “지금 남북에 근심이 없지만 도적이 치성하고 있으며, 천재가 심해 흉년이 들어 민심이 불안하다”(<비변사등록>)고 언급했다. 이상이변과 전염병, 사람고기까지 먹어야 했던 굶주림, 점거 농성 폭력 시위, 폭력조직인 검계와 떼강도인 명화적, 그리고 장길산까지…. 단 4년 만(1695~99년)에 무려 140만명이 떼죽음을 당했으니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였다.
1678년(숙종 4년) 주조한 상평통보. 늘 똑같은 가치를 지니라는 뜻에서 ‘상평통보(常平通寶)’라 이름 붙였다.
■3번의 친위쿠데타…죽어나간 관리·선비들
그렇다면 숙종의 정치술은 어떨까.
“주상(숙종)은 평소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나라의 화가 됨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이것은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현종비·1642~1683)가 중전(인현왕후·1667~1701)에게 귀띔해준 아들의 들쭉날쭉한 성격이다. 과연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걸핏하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3번이나 정권을 바꿨으니 말이다. 요약하자면 1680년 경신환국(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교체)→1689년 기사환국(희빈 장씨의 중전 책봉과 남인정권 재등장)→1694년 갑술환국(인현왕후의 복위와 서인 정권 재등장) 등…. 이 3번의 친위쿠데타, 즉 ‘환국’ 정치를 두고 혹자는 숙종의 노련한 정치전략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명성왕후의 말마따나 ‘희로의 감정이 느닷없이 분출되는’ 죽끓는듯한 성격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학자·정치인·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는가. 과연 이 시대를 ‘호시절’이라 할 수 있을까.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명문화하면서 세운 백두산정계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놓고 부인 흉 본 못된 남편
그 뿐인가. 못된 남편(숙종) 때문에 부인들이 줄줄이 핍박 당했다. 남편 때문에 먼저 피눈물을 흘린 이는 인현왕후와 귀인 김씨(영빈 김씨·1669~1735)이다. 만 14살의 나이로 숙종의 두번째 정부인이 된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서인 민유중(1630~1687)의 딸이었다. 자연히 서인 정권의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남편인 숙종이 궁인 장옥정(희빈 장씨·1659~1701)와 사이에 아들을 낳자 상황이 급변했다. 9년간 계속된 서인정권에 슬슬 염증을 느낀 차에 남인의 후원을 받던 장씨가 귀한 왕자를 생산했으니 시쳇말로 눈이 뒤집힌 것이다. 기사년인 1689년(숙종 15년) 새해 벽두부터 숙종은 갓 태어난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고 혈안이 됐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 등은 “정비(인현왕후)의 춘추가 아직 젊으니 더 기다려서 적자를 계승자로 삼아야 한다”고 반대했다. 숙종은 이때 정권을 서인에서 남인으로 전격 교체한다.
이 무렵 숙종은 군주의 자질을 의심케하는 언행을 일삼는다. 대놓고 부인을 흉본 것이다.
“희빈(장씨)이 처음 숙원(내명부 종4품)이 되자…중전(인현왕후)이 나에게 꿈 이야기를 말했다네. 꿈에 선왕(현종)과 선후(명성왕후)를 뵈었는데…두 분이 ‘숙원(장씨)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래 궁중에 두었다가는 반드시 경신년(1680년 경신환국) 뒤에 뜻을 잃은 사람(남인)들과 결탁해서 망측한 일을 만들어낼 것’이라 했다는군.”(<숙종실록> 1689년 4월21일)
숙종은 이어 “중전이 질투하는 마음에 나를 공갈하니…그 간교하고 앙큼함은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에 서인 정권을 쫓아내고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되찾은 남인계 신하들마저 숙종의 ‘부인 험담’에는 반기를 들었다. “부부의 불화를 자식같은 신하들에게 털어놓는 이유가 뭐냐” “중전께서 국모로 계신지 10년이 되도록 무슨 실덕(失德) 있었기에 이런 하교(험담)를 내리시느냐”는 것이었다.
1667년(현종 8년) 숙종을 왕세자로 임명할 때 제작한 옥인과 죽책, 죽책을 담은 함이다.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유일한 적장자로서 임금이 됐다. 숙종은 조선조 27명의 임금 가운데 적장자로 왕위를 이은 7명 중 한사람이다. 숙종은 이러한 완전한 정통성을 바탕으로 철권을 휘둘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버선발로 쫓겨난 부인
그러나 숙종은 중전과 가까운 귀인 김씨(서인 김수항의 종손녀·1690~1735)마저 ‘험담의 도마’에 올렸다.
“아 글쎄. 내가 대신들과 나눈 이야기를 적은 쪽지를 놓아두었는데, 귀인이 그것을 소매 속에 감추었다가 들켰다네. 내가 ‘왜 그랬냐’고 하니까 귀인이 ‘버리는 휴지인줄 알았다’고 변명하더라구.”
숙종은 “이번 일이 우연이 아니며 국가에 반드시 화난이 있을 것”이라고 침소봉대했다. 숙종은 일사천리로 중전의 폐위절차를 진행했다. 4월22일 중전과 친한 귀인 김씨를 우선 폐출시켰다. 마침 23일인 중전(인현왕후)의 탄신일이었는데, 숙종은 중궁전에 들어온 생일선물까지 “내치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라도 국모의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페출 전교를 내렸다. 3일 뒤인 26일에는 날마다 중전에게 들이던 음식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굶으라는 얘기였다. 뭐 이런 박정한 남편이 있단 말인가.
1689년(숙종 14년) 5월4일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친정으로 쫓겨났다. 민씨가 친정으로 돌아갈 때 유생 수백 명이 길 아래에 엎드려 통곡했다. 중전 민씨의 폐출 장면을 생생한 필치로 소개한 <인현왕후전>은 “상감이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흰 명주보로 덮은 보통의 가마가 서둘러 내전에 들어갔는데, 왕후께서 벌써 내려와 걸어왔다”고 기록했다. 가마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버선발로 부인을 내쫓은 못된 남편이었던 것이다. 숙종은 폐위교서에서 “왕비 민씨는 원래 화순한 성품이 부족하고 조신한 덕이 적었다”면서 “책봉되던 때부터 조심하고 삼가지 않았고, 질투하는 허물이 많았다”고 했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짓기로 결정한 뒤 지은 시와 이듬해 북한산성에 행차하여 완성된 성곽을 둘러보며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북한산성은 숙종이 구상한 도성중심 방어체제의 핵심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남편 탓에 평생 속이 문드러진 인현왕후
폐비 민씨의 생활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1690년(숙종 16년) 9월 정언 송정규(1656~1710)는 상소문에서 폐서인이 되어 쫓겨난 인현왕후의 불쌍한 하루하루를 고발한다.
“폐비가 집으로 돌아간 뒤로 친척과 이웃에서도 감히 문안하고 왕래하지 못합니다. 문을 잠가서 뜰에 풀이 가득하고 적막하며 양식과 땔나무가 군색한 것은 참으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숙종실록>)
남인 정권의 실세들조차 “민씨를 별궁에 모시고, 달마다 녹봉 형식의 쌀을 주면 성상의 덕이 빛날 것”이라고 간청했다. 여기서 못된 남편의 면모가 다시 유감없이 발휘된다.
처음엔 “그러자”고 허락했다가 곧 그 명을 취소한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안되겠다. 죄악이 가득차서 폐출한 지 반 년도 안되는 폐비를 대우했다가는 뜻을 잃은 무리(서인)가…‘옳다구나’ 하면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숙종실록> 1689년 9월24일, 10월18일)
이 정도로 박정한 남편이었으니 인현왕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인현왕후는 폐위 5년 만인 1694년(숙종 20년)에 복위의 꿈을 이뤘지만, 변덕스런 남편을 향한 분노의 마음을 쉬이 풀지 않았다. 그해 4월9일 숙종은 폐출된 중궁(인현왕후)의 무죄를 밝히며 별궁으로 모시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숙종은 자신의 어찰을 인현왕후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죄인이 어찌 외부 사람을 만나 어찰을 받겠느냐” “죄를 지은 아내가 답장을 올릴 수 없다”면서 거듭 복위를 사양했다. 인현왕후가 고집을 꺾고 대궐로 돌아와 임금을 알현할 때도 “죄인이 무슨 낯으로 전하를 뵙겠느냐”고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다. 숙종이 친히 가마문을 열어 주렴을 걷은 뒤에야 왕후가 내려왔다. 왕후의 예절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달리보면 남편을 향한 분노감과 복수심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현왕후는 시름시름 앓다가 복위된지 7년 만에 승하하고 만다. <숙종실록>은 숙종의 말을 빌어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탓에 죽었다는 뉘앙스로 기록한다.
하지만 과연 희빈 장씨의 책임이 100%일까. <승정원 일기>등에 따르면 승하한 인현왕후의 병명은 옹저였다. <동의보감>은 “기가 막혀 생기는 옹저는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생기는 병”이라 풀이했다.
돌이켜보면 만 14살에 왕비가 된 이후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고, 22살에 폐위됐으며 27살에 복위된 이후 불과 7년을 더 살았다. 궁궐로 들어온 14살 이후 20년 내내 느꼈을 불안감, 분노, 억울함 등이 겹쳐 발병했고, 그 때문에 승하한 것으로 여겨진다.
‘팔춘도첩’, 태조가 타던 말 여덟 마리를 그린 그림과 관련된 글을 모아 엮은 화첩이다. 숙종은 세종 대 안견이 그린 팔준도가 소실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그리게 하고, 직접 글을 지어 태조의 업적을 되새겼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반대파들까지 “너무하십니다” 동정
그렇다면 희빈 장씨의 삶은 어떨까. 장씨는 인현왕후가 쫓겨난지 불과 4일만인 1689년(숙종 15년) 5월6일 꿈에 그리던 중전이 된다. 그러나 희빈 장씨, 즉 새로운 중전을 향한 숙종의 사랑은 5년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1693년(숙종 19년) 숙원 최씨(훗날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책봉된 것이다. 숙종의 마음은 이제 최씨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694년(숙종 20년) 3월29일 숙종은 “중전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을 듣게 된다.(<숙종실록>) 숙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남인들을 쫓아내고 서인들을 복관시킨다. 이것이 남인정권에서 다시 서인정권으로 복귀시킨 이른바 ‘갑술환국’이다.
중전 장씨도 급전직하한다. 고변 사건(3월29일) 이후 10여 일이 지난 4월12일 사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의 자리로 복귀시킨다.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아무리 임금이 제멋대로 하는 지존이라지만 5년 전 본부인을 무자비하게 내쫓고 서둘러 중전으로 올린 여인을 불과 5년 만에 다시 내쫓다니….
“왕비 민씨는 단장(端莊)하여 예법을 지키고 정정(貞靜)하여 아름다움을 지녔다.”(<숙종실록> 1694년 6월1일)
인현왕후를 복위시킨 숙종의 반성문을 보면 기가 찬 노릇이다. 언제는 ‘부덕하고 질투심이 많은 칠거지악의 여인’이라며 쫓아냈다가 이제와서는 ‘예법을 잘 지키고 아름다움을 지닌 왕비’라고 치켜세우다니….
여기서 다시 숙종의 못된 버릇이 또 나온다. 5년전 인현왕후를 험담하던 숙종이 이번에는 희빈 장씨를 천하의 몹쓸 여자로 폄훼한 것이다. 1701년(숙종 27년) 9월 25일 숙종이 ‘희빈 장씨의 자진(自盡)’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그러자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 중 대부분의 대소신료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결정한 뒤) 끝없는 후회가 있었는데 지금 전하의 처분도 순간적으로 격분한 감정에서 나온 명령이 아니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대부분의 신료들은 “세자의 어머니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역대 국왕의 글씨를 모은 <열성어필> 중 숙종의 어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희빈 장씨의 일갈, “정치 똑바로 하세요.”
그러자 숙종의 못된 버릇이 나온다. 이번에는 희빈 장씨의 흉을 보기 시작한다.
“이 사람(장씨)은 (희빈으로 강등된 후) 한번도 중전(인현왕후)에게 문안을 올리지 않았다네. 왕후에게 혹은 ‘민씨(閔氏)’, 혹은 ‘민가(閔哥)’, 혹은 ‘요사스런 사람’으로 일컫기도 했네.”
신료들은 “그렇다고 이런 깊은 밤중에 ‘종이 한 장’(비망기)으로 세자의 어머니(희반 장씨)를 죽이려 하느냐”고 ‘워~워~’를 당부했다. 그러나 숙종은 “그 뿐이냐.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할 목적으로) 신당(神堂)을 대궐 안팎에 몰래 설치하고 흉악한 물건들을 묻고는 2월부터 기도했다”고 험담을 이어간다.
어찌 그렇게 5년전 인현왕후의 폐출 때와 똑같은 장면이란 말인가. 그런데 인현왕후는 폐서인으로 끝났지만 희빈 장씨는 끝내 자진하고 만다. 인현왕후의 일대기인 <인현왕후전>을 보면 사약을 내동댕이 친 희빈 장씨에게 전 남편(숙종)의 한마디는 모질기 이를데 없었다.
“네 얼굴을 보기가 더러워 약을 보내니…. 이 약은 네게는 상인줄 알고….”
그러면서 숙종은 희빈의 입을 강제로 벌린 채 세 사발이나 되는 사약을 들어부었다. 숙종은 본부인마저 버선발로 쫓아내면서까지 그토록 사랑했던 새 부인(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이면서 이렇게 재촉했다.
“빨리 먹이라!”
희빈 장씨의 마지막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전하께서 밝은 정치를 펼치지 않으니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인현왕후전>의 필자는 “장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불쌍한 감정을 갖게됐지만 주상(숙종)께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도 갖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참으로 비정한 남편이 아닌가,
■중전이 될 수 없었던 숙빈 최씨와 귀인 김씨
따지고보면 어디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뿐인가. 인현왕후와 함께 폐출됐다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된 귀인 김씨(훗날 영빈 김씨) 역시 더는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는 “인현왕후가 승하하기 전 숙종에게 ‘내가 죽거든 희빈 장씨를 복위시키지 말고 귀인 김씨를 왕비로 세우라’는 청을 올렸다”고 전한다. 숙종의 총애를 얻어 연잉군(훗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1670~1718) 역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죄를 물으면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숙종실록> 1701년)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놓고는 1702년(숙종 28년) 당시 15살의 인원왕후(1687~1757)를 세번째 정부인으로 맞이했다. 이 무슨 억하심정인가. 숙종은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려 했던 여인들 모두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사실 문헌자료와 역사서의 한 부분만 보고 전체 역사를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국립고궁박물관의 태마전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전체 조선의 역사를 정리하는 측면이라면 숙종 치세의 평가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법 확대실시와 백두산정계비 등과 같은 숙종의 업적은 당연히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각종 문헌자료와 <숙종실록>에서 정리되지 않은 당대의 생생한 이야기들도 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쯤에서 다시한번 묻고싶다. 숙종은 조선의 중흥군주인가, 숙종의 치세는 호시절이었는가.(2)
역사 스토리텔러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두 성을 잇는 탕춘대성까지 모두 표현된 <동국여도> 중 ‘도성연융북한합도’. 숙종은 1711년 6개월간의 공사 끝에 북한산성을 완성했다. 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은 1753년까지 축조됐다. 이로써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잇는 도성 방어체계가 완성됐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포인트가 있다. 도심에서 걸어서 오를 수 있는 산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전통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100여 년 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도 ‘도심 지척의 산’이 그렇게 신기했나보다.
“경성에서 서양인의 피크닉이라 하면 대개 북한산이 통념으로 되어 있었다…지게꾼들을 데려와서 말과 대나무 가마로 간다.”(<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 1934)
1894년 7월 관립법어(프랑스어)학교 교장으로 내한한 에밀 마르텔(1874~1949)의 회고이다.
대한제국 시절 궁내부 찬의관을 지낸 윌리엄 샌즈(1874~1946)는 한술 더 뜬다.
“한국땅을 벗어나 휴일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시의 옛 궁궐로 소풍을 가거나 산마루에 있는 북한산성으로 탐험을 즐긴다. 아름다운 곳이 헤아릴 수 없고, 모든 계절이 다 즐길 만 했다.”(<비외교적 비망록>, 1930년)
1745년(영조 21)에 북한산 중흥사에서 팔도도총섭으로 있었던 승려 성능이 편찬한 북한산성지리지인 <북한지>에 나오는 ‘북한도’의 연결지도. <북한지>를 편찬한 승려 성능은 북한산성의 축성 및 수성의 책임을 맡은 인물이다. 책머리에 지도를 붙이고 북한산성의 연혁과 현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숙종 때인 1711년 축조된 북한산성은 불과 6개월만에 완성됐다.|기호철의 <다시 읽는 북한지(해제·교감·역주)>에서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알렌(1858~1932)의 북한산 답사기도 흥미롭다.
“삐죽빼쭉하거나 반구형의 암석으로 된 바위투성이 봉우리들로 구성된 ‘국왕의 산성’(북한산성)…한폭의 비단 뭉치를 제멋대로 던져놓은 듯한 한강은 드문드문 솟아있는 산들 사이를 지나 바다까지 뻗어간다…”(‘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5년 6월호)
이를 보면 당대 서양인들의 ‘핫플’은 다름아닌 북한산(삼각산·해발 836.5m)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알렌의 표현 중에 북한산성을 ‘국왕의 산성’이라고 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알렌의 일기(1884년 12월 26일자) 중에 관련 내용이 들어있다. 알렌은 “주한 미국 공사관 소속 무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중위(1856~1893)가 고종의 청으로 국방시설인 북한산성을 탐방했다”면서 “이곳은 200명으로 1만 적군을 막아낼 수 있는 국왕의 산성”라고 소개했다.
<동국여도> 중 ‘북한산성도’. 북한산성은 백운대~인수봉~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한 총 둘레 11.6㎞의 산성이다. 산성의 전체면적은 여의도의 2배인 5.2㎢ 규모에 달한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북한산성 금괴의 소문
1939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전설에는 북한산성의 행궁터에 70만원의 정제 금괴가 묻혀있다고는 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 산성 행궁터에 다량의 금괴를 묻혀있다는 소문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신문은 “(금괴는 아니지만) 연전에 이 부근 땅 속에서 막대한 암염과 목탄 수만관을 발굴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북한산성에 농성용 소금과 숯을 묻었다는 소문에 따라 헌병파견부대가 발굴한 결과 두 곳에서 소금 200석을 파냈다”(매일신보 1912년 8월30일자)는 기사가 보인다.
조선시대 정부재정과 군정내역을 모아 놓은 <만기요람> ‘총융청·군저’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다.
“북한산성 안에 은 1만2250냥(460㎏ 정도)과 소금 50석(구운 소금 100덩이), 숯 2120석을 묻어두었다.”
아마 이런 ‘은의 북한산성 보관’ 기사가 훗날 ‘정제 금괴 매장설’로 둔갑했던 것 같다.
일각에서는 고종이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황실소유의 금괴 85만냥을 항아리 12개에 담아 비밀장소에 매장했다는 소문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고종이 이 비밀자금으로 중국에서 망명정부를 세우려다가 실패했고, 이것이 일제에 의한 독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괴를 묻었다는 비밀장소는 어디일까. 조선에서 화폐대용으로 쓰인 은(銀)을 묻어둔 국고가 북한산성이었다면 어떤가. 고종 역시 북한산성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 그곳에 대한제국의 운명이 달린 금괴를 숨겨놓지 않았을까. 바로 이런 막연한 믿음이 북한산성 금괴매장설을 낳게 했던 것 같다.
1911년 조선을 방문한 독일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북한산에 올라 찍은 사진들. 베버 신부는 1911년과 1927년 한국에 두 차례 방문해 <고요한 아침의 나라>(1915)를 출간하고, 조선의 생활상을 무성영화로 남기기도 했다.|성 베네딕토 왜관 수도원 소장
■10명이면 수만명의 적을 막아낼 수 있다
이렇듯 100여 년 전부터 서양인들의 피크닉 명소였고, 지금도 서울·경기 지역 주민들의 ‘최애 탐방 및 등산코스’인 북한산이 이른바 ‘보장처’(임금과 조정의 도피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는 “1387~88년 우왕(1374~1388)과 최영(1316~1388)이 요동정벌을 위해 중흥산성(북한산성)을 수리한 뒤 세자인 창(왕)와 여러 왕비들을 피난시켰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던 선조는 1596년 1월28일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조치를 취하려 한다.
“전쟁이 10년 안에 그칠 가망이 없고, 또 100년 뒤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삼각산 중흥동에 산성을 수축하라”는 명을 내린다. 병조판서 이덕형(1561~1613)은 북한산을 답사(3월3일)한 뒤 “삼각산의 산세가 높고 험절하여 단 10여명만 있어도 수만명의 적병이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전란 중에 도탄에 빠진 백성을 어떻게 대규모 동원할 수 있었겠는가.
북한산성의 관문인 대남문, 대서문, 대성문, 대동문. 성문은 대문 6곳을 포함, 모두 16곳을 조성했다.
북한산성 축조라는 ‘100년 대계’의 의지도 종전과 함께 퇴색되고 말았다.
그 사이 오욕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624년(인조 2), 이번에는 내란이 일어났다. 이괄(1587~1624)의 난이었다. 인조는 할아버지처럼 도성을 버리고 충남 공주로 줄행랑쳤다.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를 섬긴 대가를 톡톡히 치른 정묘호란(1627년) 때는 강화도로 도주했다. 병자호란(1636~37년) 때는 강화도로 피신하기도 전에 청나라군이 들이닥쳐 우왕좌왕하다 가까스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 역시 천혜의 요새라던 남한산성에서 50일 가까이 버텼지만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강화도 역시 청나라군에 의해 함락됐다. 그때까지 ‘조선의 2대 보장처’였던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조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1711년 험준한 지형을 활용해서 쌓은 북한산성이지만 서쪽이 취약지점이었다. 3년 뒤인 1714년 취약지점을 보강하는 중성을 쌓았다. |성베네딕토 왜관 수도원 소장
■더는 도성을 버릴 수 없다
외우(外憂)와 함께 내환(內患)도 더욱 골칫거리였다.
16~18세기 전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가 예외없이 조선에도 불어닥쳐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른바 ‘경신대기근’(1670~71년)과 ‘을병대기근’(1695~96년)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 사이 요승 여환이 “미륵의 세상이 와서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주관한다’는 등의 해괴한 소문을 퍼뜨렸다.(1688년) 장길산이 출몰했으며, 정씨 성이 국왕으로 등극해서 중국을 공격한 뒤 최씨 성을 왕으로 세운다는 요사스런 소문도 들렸다.(1697년) 떼강도(명화적)가 전국에 출몰했다.(1703년)
1711년 8월~1712년 5월까지 건설한 북한산성 행궁터. 2013년부터 2018년까지 6차례 시·발굴을 벌였다. 그 결과 임금이 거처하고 정사를 돌본 내·외전과 행랑, 왕실의 족보를 보관한 보각(추정)의 터를 찾아냈다. 행궁의 둘레는 392m, 현존길이는 250m 가량인 것으로 확인됐다.|경기문화재단 제공
만약 이런 외우내환 때문에 난리가 일어나면 국왕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임진왜란 때처럼 임금이 멀리 줄행랑 칠 수는 없었다. 숙종은 “(임진왜란 때처럼) 오늘날 인심이 결코 도성을 떠나 멀리 갈 형세가 될 수 없다”(<숙종실록> 1710년 12월1일)고 밝혔다. 그럴만도 했다. 기상이변에 따른 자연재해 때문에 대거 발생한 유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1648년(인조 26) 10만 명 남짓이던 서울의 인구는 69년 후인 1717년(숙종 43) 19만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서울은 대동법의 확대시행 등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늘어서 상업도시로 변모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침과 내란이 일어난다고 도성을 비운다면 수십만 서울의 백성들은 어찌 되겠는가.
깎아지른 봉우리 사이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조성한 북한산성 행궁터. 이곳에는 임금의 거처하는 내전과 정사를 돌보는 외전 등이 조성되는 등 궁궐의 축소판이었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수도방위의 방법론
경신·을병대기근의 위기를 일단 넘긴 1703년(숙종 29)부터 ‘유사시의 대책’이 본격 논의된다.
초점은 ‘수도 방위’의 방법론이었다. ‘북한산성 축조론’과 ‘도성방위론’ 등 두가지 안에 격렬한 논쟁을 불었다.
숙종은 ‘북한산성 축조론자’였다. 숙종은 “도성민이 나의 적자(赤子·백성)인데 난리를 맞았다고 어찌 버리고 가겠느냐”(1710년 10월 20일)고 반문했다. 숙종은 “도성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백성들과 함께 북한산성에 들어가 지킬 것(與民入守)”이라 했다.
이것을 ‘백성과 함께 지킨다’는 뜻에서 ‘여민공수(與民共守)’라 한다. ‘여민공수’는 도성을 지키되 여의치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배후의 산성에 들어가 최후항전을 벌인다는 일종의 청야전술이었다. 고조선·고구려 때부터 채택해온 전통의 전략·전술이었다.
구한말의 북한산성 행궁 모습. 국왕이 거처하는 내전과 정사를 돌보는 외전, 그리고 행정의 외삼문이 보이고, 주변으로는 행궁을 보호하는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수원 광교박물관 소장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과연 위급한 시기에 20만명에 육박하는 모든 도성민이 산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할 경우 도성의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모두 적에게 내어주는 격이 아닌가. 차라리 한양도성을 수축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하는게 아닌가.
더구나 경신·을병 대기근 등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행사직 이인엽은 “환난에 대비하려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킴으로써) 도리어 난만 부를까 걱정된다”(1703년 4월5일)고 반대했다. 반대론자들은 특히 병자호란을 끝내며 청나라와 맺은 항복조건(7항) 중 ‘새로운 성을 쌓거나 기존의 성을 수축하는 것을 일절 불허한다’는 조항을 상기시키며 반대했다.
7~8년간의 지루한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숙종이었다.(1711년 2월 9일) 숙종은 “여러분의 의견 수렴을 기다리다가 이미 적군이 강을 건너겠다”(<비변사등록>)고 짜증을 내면서 산성의 축조를 최종결정했다.
국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건설된 행궁의 외전. 북한산성은 한일합병 직후 영국 성공회의 여름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성공회 신부와 수녀들이 피서를 행궁 내정전의 처마에 영국 국기가 걸려있다.
■12㎞ 성곽을 단 6개월만에 쌓은 비결
‘선조 때부터’ 끈질기게 이어온 북한산성 축조 논쟁이 종식된 것이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백운대~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 총 둘레 11.6㎞의 산성을 완성했다. 평지와 산지, 봉우리에 따라 온축, 반축, 반반축 등으로 쌓았다. 낮은 계곡부는 온축으로, 험준한 지점에서는 성벽 없이 여장만 조성한 곳도 있다. 산성의 전체 면적은 여의도의 2배인 5.2㎢ 규모에 달한다.
성곽공사가 1711년 4월부터 10월까지 단 6개월만에 끝났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군기가 바싹 든 삼군문(수도방위사령부) 병사들이 구간별로 사역했고, 승군들도 도왔다. 전국의 축성 장인이 총출동했고, 도성 주민이 노동자가 되어 거들었다.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산성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주한 미국 공사관 소속 무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중위(1856~1893)의 산영루 사진(1884년).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알렌은 “포크는 고종의 청으로 국방시설인 북한산성을 탐방했다”면서 “이곳은 200명으로 1만 적군을 막아낼 수 있는 국왕의 산성”라고 소개했다.|미국 위스콘신대 밀워키 도서관 소장(이순우의 논문(‘근대시기 북한산성 관련 사진의 변천과 사료적 가치’)에서 인용,
취약지점인 산성의 서쪽을 보강하는 중성도 구축(1714년)했다. 성문은 16곳(대문 6곳) 마련했다. 임금의 거처인 행궁(124칸·1711년 8~1712년 5월)도 건설했다. 군량미 10만석을 쌓을 식량창고도 7곳 마련했다. 국왕 호위와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의 지휘부 3곳이 들어섰다.
산성의 내부에 기존의 증흥사 외에 새로운 사찰 10곳과 암자 2곳을 세웠다. 산성을 지키는 이른바 ‘승영사찰’이었다. 정규군(삼군문)은 성곽의 주요진출입로와 창고를 방어하고, 승병들은 성곽의 암문 등 허점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산성 밑 평지에 비상시에 대비하여 7만석 규모의 군량창고를 설치한다. 이곳이 ‘평창(平倉)’이다. 이 ‘평창’이 있는 곳이 지세가 낮아 수비에 취약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아일보 1939년 10월 28일자에는 “전설에는 북한산성의 행궁터에 70만원의 정제 금괴가 묻혀있다고는 하는데 믿기는 어렵다”면서도 “연전에 이 부근 땅속에서 헌병파견부대가 막대한 암염과 목탄 수만근을 발굴한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마지막 퍼즐은 탕춘대성
결국 한양도성~인왕산~북한산성을 잇는 또하나의 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1715년) 이것이 탕춘대성이다.
탕춘대성의 축조공사는 숙종이 승하(1720년)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1753년(영조 29)까지 공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북한산 향로봉~인왕산 동북쪽을 잇는 성곽이 축조됐다. 영조가 부왕의 북한산성 축조 프로젝트에서 마지막 퍼즐이었던 탕춘대성을 맞춘 것이다. 이로써 비상사태시 경복궁을 빠져나와 자하문(창의문)~탕춘대성~북한산성으로 통하는 국왕과 백성들의 피란길이 완성되었다. 이것은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잇는 도성 방어체계의 완성이기도 했다.
1712년(숙종 38) 4월 10일, 숙종이 막 축조가 마무리된 북한산성 행차에 나섰다. 숙종은 어가를 타고, 혹은 내관들의 등에 업혀 동장대(산성 지휘소)에 오른 뒤 감탄사를 연발하며 시 한수를 뽑아냈다.
“…무수한 봉우리 깎아지른듯 구름에 접했네. 도적과 외적이 다가올 수 없고, 원숭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을까… 도성 지척에 금성탕지(철옹성) 있으니 내 어찌 우리 백성 수호하는 도성 버리랴.(何棄吾民守漢州)”(숙종 어제시 ‘북한산성 열성어제’)
북한산성 금괴매장설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만기요람>은 “북한산성에 은 1만냥(460㎏ 정도)과 소금 50석(구운 소금 100덩이), 숯 2120석을 묻어두었다”다고 기록했다. 매일신보 1912년 8월30일자는 “북한산성에 농성용 소금과 숯을 묻었다는 소문에 따라 헌병파견부대가 발굴한 결과 두 곳에서 소금 200석을 파냈다”고 보도했다. 아마 은과 소금, 숯 매장사실이 금괴매장설로 둔갑한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자격은?
최근들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이 한양도성과 연계되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경기도와 서울시가 3개의 성을 ‘조선시대 도성의 방어체계(가칭)’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한양도성’ 하나만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지만 2017년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로부터 ‘등재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는 한양도성 한 곳이 아니라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연계해서 재도전하라고 권고했다.
경기도 또한 북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재를 추진하고 있었다.
북한산성의 경우 경기도(고양시)가 69%(374,631㎡·8,008m), 서울시가 31%(140,594㎡·3,592m) 정도를 나눠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관할 구역의 경우 경기문화재단이 산성 4차례(2013~2017), 행궁 5차례(2013~2018)에 걸쳐 발굴조사를 펼친 바 있다. 산성 발굴에서는 고려 때 축조된 중흥산성의 존재를 밝혀내는 수확을 거뒀고, 성벽의 축조수법과 관련시설 등의 구조를 확인했다. 행궁 발굴에서는 임금이 거처하고 정사를 돌본 내·외전과 행랑, 왕실의 족보를 보관한 보각(추정)의 터를 찾아냈다.
북한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서 쌓았다. 계곡부의 평지에는 성벽을 온전히 쌓았고, 봉우리에 따라 반축, 반반축 등으로 축조했다. 험준한 지점에서는 성벽 없이 여장만 조성한 곳도 있다.
행궁의 둘레는 392m, 현존길이는 250m 가량인 것으로 확인됐다.
필자는 얼마전 1시간 30분의 발걸음 끝에 행궁에 올랐는데, 출입금지를 알리는 금줄 때문에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았다.
조사단(경기문화재단)에 문의하니 발굴조사는 완전히 마무리 됐고, 정비 복원계획이 수립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신명종 재단 학예연구사는 “건물까지 복원할 지, 아니면 터만 남겨둘 지, 또 담장을 세울지 말지, 세운다면 어느 정도의 높이로 세울 지, 일반에 출입을 어디까지 허용할 지 등 정비·복원과 개방 계획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자가 행궁터를 답사하고 돌아온 뒤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서울시가 탕춘대성의 조사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는 지난 3월 북한산성의 보국문과 대동문의 전면 해체공사를 시작한 바 있다.
18세기 <해동지도>를 토대로 그려본 숙종의 북한산성 행차코스. 숙종은 1711년 성곽을 완성시킨 뒤 연잉군(영조)의 손을 잡고 북한산성에 올랐다. 원래는 도성 북쪽의 직선로를 따라 올라야 했지만, 길이 험해 서북쪽 길로 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대동문을 통해 수유리쪽으로 길을 잡았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기 위한 행차였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여민공수의 정신만큼은
그렇다면 한양도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되는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세계유산감’이 되는가.
우선 북한산성이나 탕춘대성 모두 1711년 축조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산성의 측량결과가 1711년 축성 당시의 연혁과 현황을 기록한 <북한지>의 내용과 일치한다.
또 북한산성이 해발고도 88.5m에서 최고높이 836.5m까지 험준한 산악 지형에 맞춰가며 다양한 축성법을 써서 완성한 17세기 최고의 단일 군사 유산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자연환경을 활용함으로써 불과 6개월만에 축성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국왕과 20만 백성 모두 함께 들어가서 장기항전을 한다는 목표아래 조성된 군사도시의 성격도 갖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기준인 완전성과 진정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1712년 4월30일 막 축조된 북한산성에 행차한 숙종은 산성의 지휘소인 동장대에 올라 감격에 겨운 어제시를 지었다. 숙종은 “…무수한 봉우리 깎아지른듯 구름에 접했네. 도적과 외적이 다가올 수 없고, 원숭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을까… 도성 지척에 금성탕지(철옹성) 있으니 내 어찌 우리 백성 수호하는 도성 버리랴.(何棄吾民守漢州)”고 읊었다. 유사시에 임금과 백성이 힘을 모아 도성을 수호할 것이라고 다짐한 것이다.
필자는 46년간 장기집권하면서 3번의 친위쿠데타(경신·기사·갑술환국)로 피의 숙청을 일삼고, 그 과정에서 애꿎은 부인(희빈 장씨·1659~1701)까지 죽인 숙종을 ‘극혐’한다. 그러나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더는 나의 적자(赤子·백성)들을 두고 도망갈 수 없다. 이제 임금과 백성이 함께 지킬 것이다”라고 다짐한 ‘여민공수(與民供守)’의 정신 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참, 필자는 행궁터를 발굴한 경기문화재연구원 박현욱 선임연구원에게 재미삼아 한가지 물어본 내용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거액의 정제 금괴가 실려있다는 소문이 보도됐고, 또 <만기요람> 등에 실제로 은 1만2250냥(460㎏ 정도)을 보관했다는 내용이 있던데요.”(필자) “글쎄요. 실제 발굴에서는 금괴는 물론이고, 은(銀)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추가발굴이 필요할 것 같네요.(웃음)”(박현욱 선임연구원)(3)
<참고자료>
경기문화재연구원, <고양 북한행궁지 1~5차 발굴조사보고서>, 2014·2015·2016·2017·2019
이순우, ‘근대시기 북한산성 관련 사진의 변천과 사료적 가치’,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1권(고지도·고사진 모음집),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장상훈, ‘조선후기 지도 속의 북한산성’,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1권(고지도·고사진 모음집),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고양시·경기문화재연구원, <사적 162호 북한산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등재신청을 위한 학술조사연구총서>(학술총서 2책), 2017
황보경, ‘북한산성과 행궁지의 조사 및 연구성과 재고’, <백산학보> 119호, 백산학회, 2019
기호철, ‘다시 읽는 북한지(해제·교감·역주)’,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2권, 경기도·경기문화재단, 2018
허미형, ‘북한산성 행궁 정비 및 복원 계획안’,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경기문화재단, 2011
박현욱, ‘북한산성의 군사경관’, <북한산성의 가치 재조명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경기문화재단, 2017
김성태, ‘삼국시대 북한산성과 고려시대 중흥산성에 대한 검토’, <북한산성 연구보존 및 활성화 연구총서>,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조윤민, <성(城)과 왕국>, 경기문화재단 펴냄, 주류성,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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