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조선(10) - 실학자들 본문
[박석무의 실학산책] 성호 이익의 간쟁론
고전을 읽으면 현재도 보이고 미래도 예측할 수가 있다. 현재나 미래와 무관한 옛날의 책을 모두 고전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세상일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풀리지 않는 일로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을 떨칠 수 없을 때에는, 고전을 읽어서 옛날·현재·미래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고전을 자주 들여다보고 있다. 까맣게 잊어버린 내용들을 다시 기억해내면서 다시 읽는 고전의 재미는 쏠쏠하다.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인 반계·성호·연암·다산 등의 대학자들의 저술은 대부분 고전인데, 그런 책을 읽으면서 오늘의 난제들을 풀어보는 지혜를 얻고 싶은 심정에서 출발한다. 『반계수록』이나 『반계유고』에는 유형원의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견해를 알아볼 수 있고, 『성호사설』이나 『열하일기』를 통해 뛰어난 사상가이자 경세가들인 이익·박지원의 생각도 접할 수 있다. 다산의 고전을 읽는 일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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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주 임금이 패망한 건
충신 간언 듣지 않아서”
“아첨무리에 둘러싸이면
나라도, 임금도 파멸해”
」
성호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은 조선 실학을 대표하는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얻은 지 오래다.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도 성호의 유저를 16세에 읽고 큰 학자가 되었으니, 성호를 계승한 다산에게 『성호사설』이 미친 영향은 대단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다산은 자신의 큰 꿈이 성호선생을 사숙하여 배우던 가운데서 깨닫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 정도의 큰 영향을 미친 책이 바로 『성호사설』이었다.
성호는 책에서 ‘간직(諫職)’이나 ‘간관참정(諫官參政)’, ‘간관불상견(諫官不相見)’, ‘직언극간(直言極諫)’, ‘직언이국(直言利國)’ 등의 여러 항목을 두고서 임금에게 바른말로 간(諫)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했다. 반드시 간언하기를 꺼리지 않는 신하가 많이 있어야 하고, 간언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임금이 있을 때에만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임금은 직언하는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임금이라고 하면서 천하의 폭군 대표자로 중국 고대의 걸(桀)과 주(紂) 두 임금을 들었다. 그 시절에 관용봉(關龍逄)이나 비간(比干) 같은 충신들이 있었지만 죽음을 무릅쓴 그들의 간언을 듣지 않아 끝내 패망했다고 하였다. 성호의 해설은 참 쉽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머거리이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소경인데, 귀머거리나 소경이야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선천적인 것이지만, 보여주어도 보지 못하고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는 임금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되어지는 귀머거리이자 소경이라고 평했다.
『성호사설』등 국정 전반의 개혁에 관한 방대한 저술은 후학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상적인 신체로 본인의 의지에 의해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걸(桀)이나 주(紂)는 어느 때나 있기 마련이다. 본인도 멸망하고 나라까지 망하게 하여 온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마는 것은 고금에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호는 간쟁(諫諍)의 문제를 상세히 거론하여 간(諫)하는 신하의 충언을 들어주느냐 여부에 따라 나라의 치란이 결정된다고 여겨, 간하는 신하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간하는 신하의 간언을 제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비행을 시정하는 임금이 선정을 베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간언하는 일은 어렵다. 사람의 마음은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고 곧은 말을 싫어하며, 곧은 말을 하면 반드시 불리해지고 아첨하는 말은 이익이 따른다. 곧은 말이 용납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첨하는 말로 죄를 받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누가 자기의 이익을 저버리고 위험한 데로 나아가기를 바라겠는가. 이래서 간언하는 일이 어렵다고 성호는 설명했다.
다산 정약용도 말했다. “아첨을 잘하는 사람은 충성스럽지 못하고 간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배반하지 않는다.善諛者不忠 好諫者不偝 :
「用人」
)” 그래서 이 점을 안다면 실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 아첨하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다가는 나라도 망하고 자신도 파멸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고대 중국의 요순시대나 우리 조선의 세종시대나 정조시대가 그래도 제대로 정치가 이룩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첨하는 사람을 물리치고 간쟁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중용하였기 때문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정권을 잡은 새 정부는 어떤가를 눈여겨보고 있다. 과연 간쟁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으며, 대통령은 간언을 재대로 들어주고 있는가도 지켜보고 있다. 성호나 다산의 지혜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잘하는 정치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1)
박석무 다산학자, 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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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거두 반계 류형원이 꿈꾼 세상은'…반계수록 재조명 학술대회
(부안=뉴스1) 박제철 기자 = 전북자치도 부안군이 한국실학학회와 함께 6일 부안예술회관 다목적강당에서 ‘반계 류형원과 한국 실학의 다층성’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인 반계 류형원의 저술과 사회 개혁론 연구를 통해 다층적인 한국 실학의 모습을 재조명하기 위한 자리로 그가 남긴 실학의 면모를 전문가들의 분석과 함께 종합적으로 조망해 본다.
실학 사상은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 속에서 나타난 실용주의적 학문으로 특히 부안 우반동은 실학 거두인 반계 류형원이 20년간 거주하면서 그의 개혁 사상이 집약된 '반계수록'을 저술한 곳으로 한국 실학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다.
학술대회는 1·2부로 나눠 총 5편의 주제발표와 종합토론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1부에서는 윤석호 부산대 교수의 '류형원 경세론의 신유학적 연원과 특징', 서울대 소진형 연구원의 '사회개혁론과 국방론을 통해 본 류형원의 국가인식', 2부에서는 △ 유현재 경상대 교수의 '류형원의 화폐유통론', 함영대 경상대 교수의 '18~19세기 조선학인들의 반계수록에 대한 반향', 임영길 단국대 교수의 '류형원의 문학과 현실인식' 순으로 주제발표가 진행된다.
이어 단국대학교 김문식 교수를 좌장으로 다산연구소 김태희 대표, 문경득 전주대 교수, 이민정 서울대 강사, 신진혜 광주과학기술원 조교수, 김보성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참석해 학술대회 주제와 관련한 토론이 이어진다.
권익현 군수는 “부안은 반계 선생의 실학사상이 완성된 곳으로, 이번 학술대회가 한국 실학사에서 부안이 갖는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고, 더 나아가 부안군 반계 기념관 건립 필요성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증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2)
jc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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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실학 대중화·보급 위해 ‘실학, 고전으로 만나다 열하일기’ 발간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이 실학의 대중화를 위해 실학고전총서 ‘실학, 고전으로 만나다’ 시리즈의 제1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출간했다.
‘열하일기’는 18세기를 대표하는 북학파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1780년(정조 4)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청나라에 다녀오며 지은 책이다. 특히 박지원의 실학사상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조선의 모습과 비교하고 조선 사대부를 비판하는 등 박지원의 사상과 당시 사회상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실학박물관이 출간한 ‘열하일기’의 평역·출간 작업엔 이승수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이 교수는 전체 열하일기 이야기 중 재미있고 박지원의 사상이 잘 드러난 편을 뽑아 쉽고 재미있는 문체로 재해석해 번역했다. 번역문, 원문과 함께 이 교수의 상상력과 문학적 지식을 녹여낸 ‘평어’의 순서로 구성해 읽는 재미를 더했다.
앞서 실학박물관은 지난 2009년 개관 이후 15년간 실학인물총서, 실학교양총서, 실학연구총서 등 실학을 알리기 위해 여러 기획도서 시리즈를 발간해왔다. 이번 실학고전총서 시리즈 ‘실학, 고전으로 만나다’는 실학 고전에 수록된 재미있는 글들을 엄선해 현대어로 번역한 시리즈로, 실학 스토리텔링을 위한 원천자료를 확보하고 ‘실학 고전’을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다.
실학박물관은 ‘열하일기’를 도서관과 실학 유관기관에 배포하고, 실학박물관 뮤지엄숍에서 한정 판매한다.(3)
김보람 기자 kbr13@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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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같은 문체… 연암은 조선의 셰익스피어
업데이트 2009년 9월 26일 21시 34분
“그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의 검푸른빛이
누님 시집가는 날 쪽찐 머리
같았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그 뒤 나이 들어 우환과
가난을 늘 근심하다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형제와 함께 지낸 날은
어찌 그리도 짧은지.”
―‘큰누님 박씨 묘지명’ 중에서
닭 우는 소리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訴)를
제기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엄격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는 것 같고,
닭 우는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것을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비의 목소리 같았다.”
―‘술에 취해 운종교를 밟던 일을 적은 글’ 중에서
사마천의 마음
“앞다리는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는
손가락을 ‘Y’(아)자 모양으로
하여 살금살금 다가가
잡을까 말까 주저하는 순간,
나비는 그만 싹
날아가 버리외다.
씩 웃고 나서 부끄럽기도 하고
분이 나기도 하나니,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이외다.”
―‘경지에게 보낸 답장 3’ 중에서》
“연암은 조선의 셰익스피어입니다.”
2002년부터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의 한문 산문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그 아름다움을 함께 알리는 작업에 주력하는 박희병(51·국문학) 서울대 교수의 지론이다.
어떤 이는 이 말에 무릎을 치겠지만 어떤 이는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교과서에 실린 ‘열하일기’나 ‘허생전’을 통해 연암의 글을 조금씩은 읽어 봤다. 그러나 그 글을 읽으면서 미학적 희열을 맛본 이는 드물다. 과연 연암을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수 있을까.
“연암에 대한 학사 논문을 쓰면서 비로소 연암의 비범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한학의 대가인 우전 신호열(‘연압집’의 공동역자) 선생 밑에서 연암의 글을 배웠지만 너무 어려워 묘미를 깨치기 힘들었습니다. 연암의 글은 한자의 미묘한 의미를 고도로 압축해 사용하기 때문에 한학 전공자에게도 난해하기 그지없습니다.”
박 교수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2002년부터 5년째 10여 명의 제자와 함께 연암의 글을 한 땀 한 땀 단아한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해 왔다.
“상을 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매주 수요일 저녁에 모여 연암 강독회를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명절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첫 성과물이 지난해 박 교수의 이름으로 출간된 ‘연암을 읽는다’였다. 이 책은 연암의 산문 소품 중에서 22편을 골라내 한문 원문에 그에 대한 섬세한 한글 번역과 꼼꼼한 주, 그리고 저자의 풍부한 비평을 곁들인 독특한 책이었다.
누님의 상여를 실은 배가 떠나는 새벽 산과 강물, 초승달의 풍광에서 시집가던 날 누님의 쪽 찐 머리, 거울, 눈썹을 포착하는 심물합일(心物合一)의 상상력. 대나무에 미친 양호맹(梁浩孟)이란 사내의 풍모에서 거꾸로 대나무의 형상을 읽어내는 역발상. ‘사기’를 쓸 때 사마천의 심정을 간발의 차로 나비를 놓친 동심으로 형상화한 절묘한 묘사력….
이 책은 연암 문학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암의 글을 그대로 영역하면 그 미묘한 아름다움을 전할 수 없기에 ‘연암을 읽는다’를 통째로 번역해야 한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그 박 교수가 이번엔 ‘연암을 읽는다’에 실린 산문 22편의 번역문과 이를 대조할 수 있도록 기존 번역문 일체 그리고 조선시대 문인들의 비평문까지 집대성한 ‘연암산문정독’을 펴냈다. 이번엔 개인적 비평을 빼고 후학 6명과 공동명의로 냈다. 왜 비슷한 책 2권을 별도로 출간한 것일까.
“연암의 글에는 대중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사유의 심오함과 예술적 심미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걸 쉽게 풀어내기 위해선 탄탄한 학문적 엄밀성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적인 ‘연암을 읽는다’와 학술적인 ‘연암산문정독’을 나란히 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박 교수는 소설을 포함해 100여 편의 연암 산문의 정수를 대중판과 학술판으로 나눠 2010년까지 각각 5권으로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하겠다고 밝혔다.
“연암의 글을 대중화하려는 것은 그를 통해 오늘날 삭막해진 우리 심성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암의 글에는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친화적 감수성이 있고 현대인의 단순한 사고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사유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박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구 사양해 왔다. 학자가 명성을 탐해선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자들과 함께한 연구의 성과를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취지에 밀려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을 찾아온 기자를 맞이했고 끈질긴 설득 끝에 사진 촬영도 허락했다. 깡마르면서도 꼿꼿하고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유연한 그의 풍모를 카메라에 담으며 대나무에 대한 글은 결코 쓰지 않겠다던 연암이 대나무를 닮은 그 풍모에 반해 글을 지어 줬다는 양호맹이 떠올랐다.(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10년 산고끝에… 정약용의 시 134편, 영문판으로 태어나다
네덜란드 국제학술출판사서 펴내
한형조 교수-홍진휘 번역가등 협업
“조선 한시 매력 알리는 계기 됐으면”
“영문책 출간을 계기로 영미권에서 독특하고 개성 있는 조선의 한시들이 많이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한시를 모아 영문으로 번역한 시선집 ‘유학자 다산 정약용의 자서전(A Confucian Autobiography of Tasan Chong Yagyong·사진)’의 저자 홍진휘 번역가(61)는 이렇게 말했다. 다산이 결혼하러 한양 가는 배를 타던 1776년부터 75세가 된 1836년까지 60여 년 동안 그가 쓴 시 중 수작 134편을 골라 담았다. 번역된 한시 원문은 1817행, 한자 수는 총 1만4408자에 달한다.
이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 고전 100선 영문 번역 사업’(현 한국학술번역사업) 지원을 받아 올 4월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국제학술출판사 ‘브릴(BRILL)’에서 출판됐다. 전근대 한국 문학을 통틀어 한 인물의 시를 모아 영문으로 번역한 단행본이 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보와 도연명 등 중국 유명 문인들의 한시는 이미 영미 문화권에서 널리 번역돼 읽혀 온 것과 달리 한국은 영역된 인물 시선집이 없었다. 홍 번역가는 “한시 영역이 워낙 까다로워 연구자가 많지 않은 데다 한국 한문학의 위상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이번 출간을 계기로 영미권 연구자들이 다산의 한시를 기존 중국 한시 연구들과 비교해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홍진휘단순 영역본은 약 3년 만에 완성됐지만, 해외 출판사 측의 “시에 해설을 붙여 완성도를 높여 달라”는 요구를 반영하느라 실제 출판까지 시간이 더 걸렸다. 홍 번역가는 ‘다산의 자서전’이라는 콘셉트를 잡고 시의 의미는 물론이고 다산의 일생을 다루는 해설을 붙여 수년간 책을 보강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다산과 관계 있는 인물 리스트도 책에 포함됐다.
책에는 다산의 인간적인 면이 많이 등장한다. 19세 때 쓴 시 ‘두치진(豆巵津)’에선 다산이 술과 고기, 생선 등 온갖 특산품이 몰려드는 장터를 보고 감탄하면서도 ‘이익을 좇는 세태’를 탓하는 이중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34세에 쓴 시 ‘탄빈(歎貧)’에선 안빈낙도(安貧樂道)에 만족하지 못하는 복잡한 심사를 읽을 수 있다. 홍 번역가는 “그동안 민족주의 시각에 의해 ‘구국(救國)’의 실학자로만 알려진 이미지를 잠시 뒤로 하고 다산의 소소한 삶을 제대로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5)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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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두물머리에 흐르는 '인간 다산'의 향기
[서울신문]다산 정약용(그림·1762~1836)은 강진 유배 10년째를 맞은 1810년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당부하는 말을 적어 보낸다. 부인 홍씨가 보내온 치마를 자른 천에 가르침을 적은 ‘하피첩’(霞?帖)이다. 자식들을 곁에서 이끌어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두 아들은 그동안 28세, 25세로 장성했고 장손 대림도 태어났다.
수종사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 오른쪽 멀리 반도처럼 내민 마재가 보인다. 수종사는 다산 형제가 일찍부터 성리학을 바탕으로 유불선(儒佛仙)을 탐구하던 곳이다. 다산은 강진 유배 시절에도 그 시절 꿈이 어린 수종사를 몹시 그리워했다고 한다.
‘하피첩’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 따르면 서첩에 쓰인 비단에는 바느질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3첩 가운데 한 첩은 모두 비단을 썼지만, 나머지는 비단과 종이를 섞어 썼다. 두 첩에 을(乙)과 정(丁)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으니 애초 4첩이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태종 17년(1417) 전라도의 도강(道康)현과 탐진(耽津)현을 통합했다. 강진(康津)이라는 땅이름은 짐작처럼 두 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그럼에도 치소(治所)가 자리잡고 있던 고을은 여전히 탐진으로 불렀다. 다산이 강진이 아니라 탐진이라고 하는 이유다.
“내가 탐진에 유배 중인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쳤다. 시집 올 때 입었던 결혼 예복이다. 홍색은 바래고 황색도 옅어져서, 서첩으로 만들기에 꼭 맞다. 재단하여 작은 첩을 만들어, 경계하는 말을 붓 가는 대로 써서 두 아들에게 물려준다.…‘하피첩’이라고 한 것은 ‘붉은 치마’(紅裙)라는 말을 숨기고 바꾼 것이다’
‘하피첩’의 머리글이다. 하피란 어깨에 두르는 일종의 겉옷이라고 한다. 부인 홍씨가 혼인 때 입었던 치마를 보낸 것을 두고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남편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다짐이라는 해석이 많지만, “초심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겼다는 주장도 있다. 객지에서 한눈팔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라는 것이다.
정작 다산은 그렇게 ‘깊은 뜻’을 부여하지는 않은 듯하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사제의 연을 맺은 시골 아전 황상에게 건넨 서첩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은 1814년 28조각의 천에 가르침을 적어 애제자에서 보냈는데 크기도, 빛이 바랜 정도도 모두 제각각이었다고 한다.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을 유배지의 다산은 부인의 치마, 자신의 낡은 옷자락을 잘라 종이 대신 썼던 것 같다. 빛바랜 천에 쓴 글은 사정을 이해하고도 남을 가족이나 제자에게만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하피첩’을 넘기면서 ‘서울을 떠나지 말라’는 글에 눈길이 갔다. “중국은 문명이 훌륭한 풍속을 이루어 궁벽한 시골에서도 성인이나 현인이 되는데 장애가 없지만, 우리는 도성에서 수십리만 떨어져도 인간의 법도에 눈뜨지 못한 동네”라고 했다. 그러니 벼슬이 끊어지면 바로 서울에 살 곳을 정하여 세련된 문화적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그림·1762~1836)
다산은 자식들에게 “지금은 너희를 물러나 살게 하고 있지만, 훗날 계획은 도성 십리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왕십리(往十里)라는 서울 동대문 밖 땅이름도 혹시 옛사람의 이런 인식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다. 다산은 그러면서도 “고가(古家)와 세족(世族)은 저마다 상류의 명승을 점거하고 있다”며 옛 터전을 굳게 지키라고 당부했다.
마현(馬峴), 곧 마재는 다산이 태어나 살던 곳이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머리에서 합류한 한강이 마재에 이르면 다시 용인과 광주에서 흘러드는 소내와 만난다. 소내 혹은 우천(牛川)은 이제 경안천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다. 마재에서 육로로는 도성까지 하루가 넘지만, 뱃길로는 순식간이다. 다산의 인식처럼 ‘한다 하는 집안’들이 한강 상류에 터를 잡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여유당(與猶堂) 편액.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노자의 말에서 따왔다.
마현의 지명 유래는 정약용이 ‘다산시문집‘에 자세히 적어 놓았다. 마을 어르신 사이에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산천의 정기를 누르고자 쇠말(鐵馬)을 만들어 묻어 놓았고, 이후 주민들이 콩과 보리를 삶아 제사를 지내 마현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런 구전이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왜구가 산천의 정기를 누른 것을 알았으면 뽑아내 폐기하거나 식칼로 만들어 버리는 게 정상인데 하물며 제사를 지내느냐는 것이다.
지금 철마산(鐵馬山)은 마재 북쪽으로 20㎞도 넘게 떨어져 있다. 다산이 언급한 철마산은 멀지 않은 예빈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팔당댐은 북쪽의 예빈산과 강 건너 남쪽의 검단산 자락을 가로질러 막은 것이다. 이웃마을에 역참(驛站)이 있어 말이 넘어다니던 고개여서 마재라 이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다산설(說)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다산유적지의 실학박물관. 마침 ‘하피첩의 귀향’ 특별기획전이 26일까지 열리고 있다.
다산의 집안 시조는 고려 유민으로 조선 개국 이래 황해도 배천에 은거한 정윤종이다. 나주 정씨 집안에서 벼슬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다산의 12대조인 정자급부터인데, 이후 9대가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대과(大科)라는 별칭처럼 고급관리를 뽑는 시험이다. 그런데 서울을 중심으로 기반을 쌓아가던 나주 정씨는 정쟁이 치열해지면서 숙종 무렵 뿔뿔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섰다. 정시윤이 마재에 정착한 것도 이때라고 한다.
다산은 5대조인 정시윤의 마재 정착 과정을 역시 ‘시문집’에 남겼다. ‘공은 만년에 소내 북쪽에 오래 머물러 살 곳을 찾아 초가 몇 칸을 짓고 임청정(臨淸亭)이라 이름했다.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소요하고 한가히 지내며, 깨끗한 마음을 지켜 당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임청정기’(臨淸亭記)에는 ‘공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동쪽에는 큰아들이, 서쪽에는 둘째 아들이 살고, 막내에게는 이 정자를 주었다. 유산(酉山) 아래 조그마한 집을 지어 측실에서 낳은 자제를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유산 아래 집은 훗날 여유당(與猶堂)으로 불리는 다산의 집이 됐고, 유산은 그의 무덤이 됐다.
마재성지의 한복 입은 성모마리아.
마재에 가 보면 다산의 설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산 유적지는 오늘날 그의 위상만큼이나 매우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넓게 둘러친 담장 안에 무덤과 살던 집, 사당인 문도사(文度祠)와 다산문화관, 다산기념관이 규모 있게 배치된 모습이다. 문도는 다산의 시호(諡號)다. 다산 유적 앞에는 경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실학박물관이 보인다. 물론 한 사람을 위한 박물관은 아니지만 다산이라는 인물의 상징성 때문에 이곳에 자리잡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산유적 기행은 마을 서쪽의 마재성지(聖地)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마재 정씨 집안의 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 가운데 약현을 제외한 3형제는 천주학에 깊이 공감했다. 정약종은 아우구스티노, 정약용은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신유박해 당시 정약종과 부인 유조이, 큰아들 철상, 작은아들 하상, 딸 정혜는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다. 정약전이 흑산도,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것도 이 때문이다. 천주교는 정씨 형제의 생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정씨 형제는 또 한국 천주교 역사에 진한 흔적을 남겼다.(6)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경쟁사회’ 다산과 신작을 돌아보라
- 수정 2007-12-07 17:43등록 2007-12-07 17:43
고금변증설 /
청의 고증학은 18세기 후반 조선학계에 전해진다. 고증학은 ‘이’ ‘기’ ‘심’ ‘성’ 등 극도로 추상적인 관념어를 조작하는 성리학에 대한 일대 반격이었다. 고증학은 구체적인 언어를 다룸으로써, 텍스트와 사실의 진위를 판정하려 하였다. 조선학계는 충격을 받았고, 고증학적 연구방법이 일시에 유행했다. 무오류의 성현의 말씀으로 여겨졌던 사서오경 역시 진위의 심판대에 올랐다.
조선의 고증학은 곧 성과를 낳는다. 하지만 여기서 모두 말할 수는 없고, 단지 두 분의 성과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 사람은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알다시피 1801년 해남으로 귀양을 가고, 1808년 강진의 초당(곧 답사객들이 즐겨 찾는 다산초당)으로 옮긴다. 여기서 그의 학문이 찬란하게 개화한다. 다산의 학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지만, 중심은 역시 경학이다. 다산의 경학 중 단연 손꼽히는 성과는 <서경>의 진위를 논한 <매씨서평>이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오자 그의 저술이 서울 학계에 읽혔던 모양이다.
이 시기 정계와 학계의 정점에 있었던 홍석주가 <매씨서평>을 읽어보니 탁월한 업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연구성과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청의 염약거(1636-1704)가 저술한 <상서고문소증>은 <서경>의 절반이 위작이라는 것을 논증한 고증학적 저술이다. <서경>의 고증학적 연구를 촉발시킨, 빼어난 저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이 책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홍석주는 다산에게 책을 보낸다. 읽어보니, 자신의 주장은 이미 염약거가 다 말한 것이 아닌가. 순간 절망했지만, 다산이 또 누군가. 다시 마음을 챙겨 <상서고문소증>을 꼼꼼히 검토한 뒤 자신의 저작에 수렴하여 1834년 드디어 <매씨서평> 완성본을 내놓는다. <서경>의 25편이 가짜일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1783년 연구를 시작한 이래, 52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또 소개할 분은 신작이다. 다산이 <서경>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면, 신작은 <시경>을 대상으로 삼았다. <시경> 역시 온갖 주장과 학설이 난무하는 텍스트다. 신작은 그 무수한 주장과 학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제시한 저술 <시차고>를 내놓는다. <매씨서평>에서 다산이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면, <시차고>에서 신작은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지 않고 각종 주장과 학설을 요령 있게 정리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역시 중요한 저술 형태다. 자, 여기에 서로 대립하거나, 유사한 학설들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독자가 읽어보고 판단하시라. 신작 역시 엄밀한 고증학적 태도를 견지한 것이다.
조선 고증학의 두 대가인 다산은 ‘매씨서평’을 52년만에, 신작은 ‘시차고’를 28년만에 완성했다. 이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의 최고로 평가받았다. 얼마 전 유명대학의 총장이 교수들을 상대로 1,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으라고 하자 매스컴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타율적 강제로 이뤄지는 경쟁은 단기간의 성과는 있겠으나 다산과 신작처럼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힘들 터다.
신작의 고심참담한 저술은 어느 날 발생한 화재로 한 줌 재가 되고 말았다. <시차고>는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 목적을 상실한 삶은 곧 넋이 나간 삶이다. 사람들은 신작을 보고 넋이 달아난 껍데기 인간이라 불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으랴. 다산을 순간 절망케 한 것이 <상서고문소증>이었다면, 신작을 절망시킨 것은 화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산이 다시 시작했던 것처럼 신작 역시 다시 시작한다.
요즘이야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온갖 자료를 책상에 앉아 검색할 수 있고 따올 수 있지만, 다산과 신작의 시대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도서관이라야 궁궐 속의 규장각, 홍문관뿐이다. 민간의 학자는 집안의 서적을 이용하거나, 북경(베이징)에서 구입하거나, 수소문하여 빌려야 한다. 또 일일이 손으로 자료를 베낀다. 원고가 완성되어도 복사기가 없으니, 다시 손으로 베껴 부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특히 고증학은 대량의 자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자료를 구득하고 해독하고 정리하고 저작하는 과정은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고된 노동이다. 그 노동을 신작은 두 번 거쳤던 것이다. 신작이 <시차고>의 저술에 착수한 것은 28살(1787) 때였고, 1차 완성본이 소실된 것은 39살(1798) 때였다. 마음을 추슬러 최종 원고를 완성한 것은 55살(1814) 때다. 시작부터 완성까지 28년이 걸린 것이다. 다산과 신작의 저술은 당시 동아시아 학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이 저작들로 인해 동아시아 학계의 주류에서 조선은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유명한 대학의 총장님이 자기 대학의 승진 심사의 엄격함을 말하면서 1, 2년 안에 세계적인 업적을 내놓지 않으면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날 것이라 말하자, 신문과 방송은 이구동성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 총장님과 매스컴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한 마디 ‘경쟁’이다.
인간사회에서 경쟁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하지만 경쟁이 만사는 아니다.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협동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또 단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고, 장기적 경쟁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경쟁이 필요하다면, 그 경쟁의 공정성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또 경쟁의 결과 승자가 얼마를 차지하는가, 혹은 패자는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들이 반드시 논의되고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한데 우리 사회에는 그런 논의 과정이 전무하다. 오직 ‘경쟁’이란 말만 있을 뿐이다. 특히 그 문제를 따져야 할 대학에서조차 대학 안팎의 관료들이 강요하는 경쟁의 논리만 횡행할 뿐이다. 타율적 강제로 이루어지는 경쟁은 짧은 기간 동안은 분명 성과를 낼 것이다. 하지만 다산과 신작의 연구처럼 장기간에 걸쳐 학문적 난제에 답을 찾는, 자율성에 의해 창조되는 성과는 얻기 어려울 것이다. 슬픈 일이다. 덧붙여 하나만 물어보자.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직장생활까지 만사가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우리는 왜 경쟁의 일방적 강요에 대해 한 마디도 못하는 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인가.(7)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박물관서 흑산도 바다생물 탐구 체험…실학박물관, ‘~자산어보’ 특별전
어린이·가족 단위 큰 호응…“관람객 5만명 돌파”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들이다. 공교롭게도 정약전(1760~1816)·정약용(1762~1836) 형제는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신유박해)으로 모두 유배를 떠나야 했다. 정약전은 완도 인근 신지도와 신안 우이도를 거쳐 흑산도로, 정약용은 포항 장기에 이어 전남 강진이다.
이들 형제는 힘든 유배생활 중에도 여러 책을 집필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정약용의 ‘목민심서’ 등이 대표적이다. 직접 확인·실험·연구한 객관적 사실로 진실을 탐구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강조한 실사구시의 실학 정신, 또 그런 학문 태도를 지닌 실학자들 다운 성과다.
‘그림으로 다시 쓰는 자산어보’ 특별전 전시장에 영상 작품과 함께 전시된 ‘자산어보’(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복제품, 왼쪽)와 ‘자산어보’의 세부 모습. 실학박물관 제공특히 영화나 소설로도 잘 알려진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첫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다. 정약전은 유배지인 흑산도(정약전은 흑산도를 ‘자산’으로 부름) 앞바다에 살고 있는 바다 동식물의 생김새, 특성, 잡는 법, 실생활에서의 활용법 등을 ‘자산어보’로 정리했다. 모두 155종 220여 가지에 이른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의 책에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의 추가 설명이 덧붙여져 1814년 완성됐다. ‘자산어보’는 기록유산의 가치와 더불어 섬사람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실학 정신의 대표적 사례다.
‘자산어보’를 흥미롭게 전시로 풀어낸 ‘그림으로 다시 쓰는 자산어보’ 특별전이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경기 남양주시)에서 열리고 있다.
실학박물관 개관 15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인 전시는 관람객 중심의 체험형 전시로의 기획과 구성, 퀴즈·색칠하기·퍼즐 맞추기 등 다양한 체험, 멀티미디어와 인공지능(AI) 활용, 예술가들의 협업을 통해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다채로운 전시 체험,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각종 전시기법으로 가족 관람객들의 큰 호응을 얻는 것이다.
실학박물관 특별기획전의 다양한 체험 전시물(왼쪽)과 어린이 관람객들. 도재기 선임기자, 실학박물관 제공실학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은 입소문을 타면서 인근 지역은 물론 서울 지역 가족단위 관람객들까지 많이 찾아 관람객 5만 4000명을 돌파했다(7월말 기준)”고 31일 밝혔다. 박물관 측은 “‘자산어보’의 집필 과정과 내용을 통해 바다생물에 대한 체험과 이해, 호기심 충족, 나아가 실사구시 정신의 실학을 이해하는 특별한 경험이 호응을 얻는 것같다”며 “방학동안 어린이와 가족 관람객 증가가 더 기대된다”고 밝혔다.
전시는 ‘자산어보’의 내용을 기반으로 ‘자산어보’의 소개(1부)부터 바다생물들의 분류, 특성 알아보기, 이름 짓기, 쓰임 찾아보기, 그리고 발달장애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바다생물 그림 등 모두 6부로 구성됐다.
실학자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집필하면서 해삼, 낙지 등 흑산도 앞 바다생물들을 아주 꼼꼼하게 관찰, 탐구했다. 사진은 해삼의 특성을 보여주며 구멍을 통해 내장까지 살펴볼 수 있게한 전시장 전시물. 도재기 선임기자전시장에서 관람객은 ‘자산어보’의 물고기 분류법에 따른 바다생물들을 살펴본 후 정약전이 생물의 특성을 알아낸 관찰·탐구의 과정과 내용을 멀티미디어, 체험 등으로 이해하게 된다. 낙지·해파리·바다거북·가마우지·고등어·문어·날치·꽃게·전복 등의 특성을 쉽고 재미나게 확인하는 것이다.
또 정약전이 131가지 바다생물의 생김새·습성에 따라 이름을 지어준 방식을 알아보고, 상상력을 발휘해 직접 이름을 지어볼 수도 있다. ‘자산어보’에 실린 상처 치료나 조리법 등 삶에 도움이 되는 바다생물의 활용방법도 체험 전시물로 살펴본다. 이어 ‘자산어보’에 있는 생물들의 그림을 직접 그려보거나, 발달장애 예술가 30여명이 상상력·예술성으로 표현한 작품들, 인공지능(AI)이 그린 그림까지 살펴본다. 실학박물관은 “‘자산어보’에는 생물의 그림이 없다”며 “이번 전시는 관람객, 예술가들의 참여로 이 시대의 자산어보를 완성하는 셈이어서 전시명도 ‘그림으로 다시 쓰는 자산어보’”라고 설명했다.
이번 특별전은 기존의 유물 중심이 아니라 관람객 중심, 수동적 전시공간이 아니라 특별한 경험이 가능한 능동적 문화공간으로써의 박물관 변신이 두드러진다. 관람객의 참여와 소통, 적극적 경험으로 전시 주제를 보다 흥미롭게 이해하는 것이다. 어린이 눈높이를 맞춘 전시물, 멀티미디어의 적극적 활용도 돋보인다.
실학박물관은 경기도어린이박물관과의 협력으로 전시 연계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사진은 연계프로그램 포스터(왼쪽)와 발달장애 예술가들의 작품이 있는 전시장 전경 일부. 도재기 선임기자, 실학박물관 제공전시와 연계한 초등생 대상의 교육프로그램도 진행된다. 경기도어린이박물관과 협력으로 ‘자산어보’의 바다생물을 주제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보는 것인데 생성형 AI 도 활용한다. 참여 방법 등은 실학박물관 누리집(www.silhak.ggcf.kr)을 참조할 수있다. 이번 전시는 전남 강진군 다산박물관에서 순회 전시도 예정되어 있다. 실학박물관 김필국 관장은 “이번 특별전이 흥미로운 전시 체험을 통해 ‘자산어보’와 정약전, 실학자, 실학 정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실학박물관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와 묘·문화관 등이 있는 ‘정약용 유적지’(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팔당호를 끼고 있는 수변 공원 다산생태공원과 붙어 있어 역사문화 체험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시는 10월 27일까지다.(8)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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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추사박물관 특별기획전 '영남을 찾아간 추사’
[과천=뉴시스] 박석희 기자 = 경기 과천시 추사박물관은 ‘영남을 찾아간 추사’를 주제로 특별기획전을 여는 가운데 오는 11일 기획전 개막식을 연다고 5일 전했다. 오후 2시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진행한다.
이날 개막식을 시작으로 오는 11월30일까지 30점의 작품이 전시되는 가운데 총 3부로 구성됐다. 주제에 걸맞게 글씨·현판·서화 등을 통해 추사 가문과 김정희 선생이 영남 지역과 어떠한 관계를 맺었는지를 살피는 데 목적을 둔다.
이와 함께 제1부 ‘영남과 추사 가문’에서는 추사의 생부인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한 시기(1816.11.~1818.12.)의 작품들이 주로 전시된다.
대표적으로 '추사 삼형제의 서첩', 포항 내연산 바위에 새겨진 '순사 김노경'의 탁본, '부인 예안 이씨에게 쓴 한글 편지', 경북 안동에 있는 상촌 김자수 비각에 쓴 '상촌 선생 비각 기사' 등이 전시된다.
제2부 ‘영남과 추사 김정희’에서는 영남 지역의 가문과 불교와의 교류를 조명한다. 1839년 화재로 추사가 다시 쓴 ‘옥산서원 현판’ 원본과 '단계 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의 ‘단연죽로시옥(端硯竹爐詩屋"을 만난다.
또 경북 영천의 은해사 ‘대웅전’ 현판과 '불광(佛光)’ 현판 탁본, 쌍계사, 통도사의 현판 탁본, 북청 유배 시절의 ‘화피옥 시고’, 대구 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 세거지의 ‘쾌활(快活)’ 현판도 볼 수 있다.
제3부 ‘근대 추사 서화의 계승’에서는 19세기 말부터 활동한 석재 서병오(徐丙五, 1862~1935)의 작품을 감상한다. ‘대호쾌활(大好快活)’과 ‘산호 보수’는 석재가 얼마나 추사를 염두에 두고 작품에 임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석재의 ‘묵죽도’, ‘묵란도’, ‘합죽선’ 등에서 대구를 중심으로 한 서병오의 교남시서화연구회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연구회는 대구 지역 서화계의 교류와 교육을 위해 개설한 기관이다.
한편, 10월12일 오후 2시에는 ‘영남과 추사 가문’을 주제로 전시 연계 학술 강연회가 열린다. 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박철상·전일 줄전일주·진복규·이인숙 등 4명의 전문가가 열띤 강연에 나선다.
신계용 시장은 “추사 가문의 뿌리는 경주 김씨이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한 추사 선생의 발자취가 영남 곳곳에 남아 있다"며 "이번 특별전을 통해 추사 가문의 묵향을 맡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김정희는 추사체를 창안한 조선 후기 북학파의 실학자. 본관은 경주, 호는 추사, 완당이며 조선의 실학과 청의 학풍을 융화시켜 경학·금석학·불교학 등 다방면에 걸친 학문 체계를 수립한 문인으로 서예에도 능하여 추사체를 창안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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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 최한기 저서 ‘통경’ 실물 첫 발견
그림 250개 담겨… 오늘 성과 발표회
“유교 모든 분야 이해할 수 있게 구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부여 함양 박씨 종가가 기탁한 고문헌 자료를 연구하다가 통경을 발견했다고 25일 밝혔다. 최한기는 유교와 서구 문명의 통합을 구상하며 ‘농정회요(農政會要)’ ‘심기도설(心器圖說)’ 등 1000권 이상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지만 대부분 유실됐다. 통경은 논어, 맹자, 시경, 서경 등 유교 핵심 경전인 십삼경(十三經)을 주제별로 분류해 해설한 책이다. 20책 53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최한기가 28세 무렵 저술한 초기작으로 추정된다. 장원석 장서각 책임연구원은 “십삼경 전체를 다루는 방대한 저술은 동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최한기는 통경에서 십삼경의 내용을 학부(學部)·사물부(事物部)·의절부(儀節部)로 구분하고, 각 부 밑에 조목(條目) 271개를 넣었다. 또 십삼경 각각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찾을 수 있는 색인과 시각적 이해를 위한 250개의 그림도 있다. 통경을 발견한 이창일 책임연구원은 “통경은 유교의 모든 분야를 이해할 수 있도록 정밀하게 구성돼 있다”며 “유교 지식을 정리하는 차원을 넘은 독창적 방식”이라고 말했다.
한중연 장서각은 책을 발견한 뒤 수개월간 분석했다. 저자명이 적혀 있지 않아 최한기가 쓴 책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분석 결과 기존에 알려진 서문 내용과 책의 일부 내용이 같고, 최한기의 주요 사상과도 일맥상통한 점이 확인됐다. 한중연은 이번 발견 성과를 알리는 온라인 발표회를 26일 개최한다.(10)
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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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지전설 수용한 실학자 홍대용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조선후기의 실학자들 중에 가장 독특한 인물이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라고 할 수 있다. 홍대용은 지동설이 조선에 유입되기 전에 이미 이를 받아들여 지전설을 주장하고 우주무한론을 주장하며 천문학과 자연과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와 아울러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배척했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홍대용이 처음이었다.(이수광, <공부에 미친 16인의 조선선비들>)
홍대용(1731~1783)은 충청도 청원군 수신면 장수리에서 아버지 홍역과 어머니 청풍 김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군수를 지낸 김방의 딸이고, 아버지는 그가 14살일 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문경현감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고학(古學)에 뜻을 두고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의문을 가졌다. 예의범절에는 구구절절한데 농사짓고 장사하는 내용은 없다는 의문이었다. 그러다보니 과거 공부보다 실용적인 학문. 특히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면서 박지원·유득공·이덕무 등 실학자들과 널리 교분을 나누었다.
이와 같은 성향을 지켜 본 아버지가 전라도 나주 목사로 부임하여 그 지역의 숨은 과학자 나경적에게 아들을 소개시켰다. 29살의 젊어서의 일이다. "이 두사람의 만남이 한국 과학사에 귀중한 발자취를 남기는 초석이 되었으며, 이때 나경적의 나이가 일흔 살이 넘었다고 했다. 그의 방 책상 위에는 자명종 시계가 시간을 알리는데 어김이 없었다고 하며, 이로써 또한 서구의 과학지식을 탐구하여 이 기계를 완성한 노 선생의 지식이 깊었음을 확인시켜준다."(김태준, <홍대용>)
홍대용은 세속의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이른바 '잡학'이라는 과학에 빠져들었다. 30살이 되는 1760년 스승(나경적)을 아버지가 일하는 아문으로 모셔다가 자명종과 천문시계 혼천의(渾天儀) 등의 제작에 들어갔다. 이듬해 혼천의가 이루어졌으나 기계가 너무 크고 복잡하여 이를 다시 간단하고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1762년 두 대의 혼천의와 자명종이 완성되어 고향 마을에 옮겨 설치했다. 적지 않은 비용은 아버지가 댔다.
35살이 되는 1765년 서장관이 된 작은 아버지의 수행원으로 연경에 갔다. 중국 연경은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현지에서 중화사상의 실체와 서양에서 받아들인 과학문명의 실상을 알아보고자 해서였다.
그는 연경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필담을 통해 그들의 학문을 알아보고 서양 선교사들과 만나 천주교와 천문학에 대해 토론하면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기초가 되는 수학을 수용했다.
이제 서양의 법을 산수로서 근본을 삼고 의기(儀器:천체기구)로써 창작하며 온갖 형상을 관측하므로, 무릇 천하의 멀고 가까움, 높고 깊음, 크고 작음, 가볍고 무거운 것들을 모두 눈앞에 집중시켜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하니, '한·당 이후 없던 것이라' 함은 망령된 말이 아니리라.(홍대용, <유포문답(劉鮑問答)>)
그는 실학과 과학을 연구하면서 당호를 담헌(湛軒)이라 지은 데 대해 "담 자가 허명(虛名)하고 소광(昭曠)하여 외물(外物)의 누가 없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것은 텅 비고 맑으며, 밝고 넓은 집으로, 숨은 선비의 뜻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향 청원군 수촌에 마련한 집과 이곳에 설치한 사설 천문대 농수각과 혼천의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준비해 가지고 간 <농수각과 혼천의 기사>를 소개하였다.(김태준, 앞의 책, 재인용)
가까이 지냈던 실학자 이덕무가 어느 날 연암 박지원과 홍대용의 집을 방문했다. "연암 선생과 함께 남산 아래 선생 댁을 찾아갔다. 정갈한 방 안에 들어가니 벽에 비스듬히 세워 놓은 거문고와 들보 위의 서양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어지럽고 복잡한 천문도가 걸려 있어, 여느 선비의 방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안소영,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1774년 동궁인 정조의 시강이 되어 뒤늦게 관직에 나아갔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헌부감찰, 이듬해 태인현감, 1780년 연천군수를 역임했다. 그동안 시집 <해동시선>, 철학소설 <의산문답>과 수학책 <주해수용> 등을 저술하였다. <의산문답>의 한 대목이다.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다.(…) <춘추(春秋)>는 주나라 책이니, 내외의 구분이 엄한 것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공자가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가 살았다면 중화(中華)로 이적(夷狄)을 변화시키고 주나라의 도를 주나라 밖에 일으키는 것이니, 마땅히 내외의 구분과 존양의 뜻을 갖춘 주나라 밖의 춘추가 있었을 것이다.
홍대용은 성리학 체제에서 벗어난 선비였다. 탐구하는 영역이 과학 분야였지만, 낡은 중화주의와 구조주의적인 성리학의 틀에서 벗어나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고 합리적인 사고와 실행을 담보로 하는 순정한 학인이었다.
그의 글 '선비의 도'의 한 대목이다.
인의는 깊이 생각하고 예법을 조용히 행하여 천하의 부귀도 그의 뜻을 음탕하게 못 하고 누항의 곤궁함도 그의 악(樂)을 고치지 못하며, 천자도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도 감히 친구로 삼지 못하며 출세하되 도를 행한다면 혜택이 사해에 펴지고, 벼슬을 않고 숨는다면 도를 천재에 밝힐 수 있는 자라야 내가 이른바 선비일 것이니, 이런 자야말로 참된 선비라 할 수 있는 것이다.(<홍백농에게 주는 설>, <국역 담헌서>)
관리보다 학인이었던 그는 1783년(53살) 어머니의 병을 핑게로 영천군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0월 22일 중풍으로 상반신 마비를 일으켜 사망하였다.
하늘이 줄 보답을 믿으며, 하늘이 낸 벼슬인 선비의 길을 걸었던 그의 53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조선 선비의 한 모범을 보였고, 그는 자기의 학문으로 조선의 18세기를 동아시아 문화사의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8세기의 실학은 그가 지도한 북학파를 거치면서 조선의 18세기를 빛나는 세기로 발돋움하게 했다.(김태준, 앞의 책)(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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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저널] 열린 세계 지향한 박제가와 ‘북학의’
백성과 경제 강조한 사상 되새겨야
‘북학의’는 박제가가 청나라 사행 경험을 바탕으로 견문한 주요 내용을 조선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내편에는 수레, 배, 성(城), 벽돌, 수고(水庫), 기와, 자기, 소, 말, 철, 골동품과 서화에 관한 내용이, 외편에는 밭, 거름, 과일, 농업과 잠업에 관한 내용과 함께 과거제도, 관직과 녹봉, 재부론(財富論), 중국 강남의 절강 상선(商船)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 병론(兵論), 북학변(北學辨) 등 북학 사상을 추구한 논설을 정리한 내용을 다수 수록하였다. 이들 글에서 박제가는 ‘북학’은 ‘생활과 백성에 직결된 학문’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는 방안으로 수레의 사용과 벽돌 이용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수레는 상업의 발달에 따른 유통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기구로 인식했으며, 중국에는 벽돌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사용되어 주택, 성벽, 창고 등이 견고함을 지적하고 우리도 이것을 도입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박제가는 몸소 벽돌 만드는 기술을 연구하여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농기구의 수입과 수차 및 비료의 사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병론에서는 군비(軍費)가 백성들의 생활과 직결되어야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백성 생활과 연결해 군비를 충당할 것을 강조하였다.
박제가는 무엇보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농본억말’(農本抑末: 농사를 근본으로 하고, 상업과 같은 말업을 억제함) 정책에 반대하고, 상업의 장려와 생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경제란 우물과 같은 것이니 이를 줄곧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는 발언이나, “쓸 줄을 모르면 만들 줄을 모르고, 만들 줄을 모르면 민생이 날로 빈곤해진다”는 주장에는 상업과 수공업, 경제의 중요성이 압축되어 있다. 생산된 것이 소비되어야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논리로서, 적극적인 소비 활동을 통해 생산을 증대하자는 사상은 근대 경제학의 이론과도 흡사하다. 박제가는 해외 통상론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우선 청나라와 통상한 후 국력을 길러 해외 여러 나라와도 통상할 것을 주장하였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타율적으로 조선이 개항되었음을 볼 때 박제가의 주장은 시대를 앞서 나간 탁견이었음이 분명하다. 최근에 발견된 친필 초고본이 주요한 계기가 되어, 열린 세계를 지향한 박제가의 북학 사상과 ‘북학의’가 현재에 가지는 의미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12)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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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밥상' 김훈 작가, "서유구 선생, 굶주린 백성 위해 고구마 보급"
‘한국인의 밥상’ 김훈 작가와 신창호 한식셰프가 출연했다.
28일 방송된 KBS1 ‘한국인의 밥상’은 10주년 특집 네 번째 이야기가 그려졌다.
이날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 등을 집필한 김훈 작가가 10주년 특집으로 출격했다. 특히 김훈 작가는 “최근 18세기의 한 사내가 쓴 책을 관심 있게 읽고 있다”고 밝혀 이목을 끌었다. 바로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쓴 113권의 방대한 실용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 중에서 일곱 권의 ‘정조지’라고.
무엇보다 한자로 저술돼서 태생적 한계에 가로막혀 그간 빛을 보지 못했던 ‘정조지’가 17여 년의 길고 집요한 번역 과정을 거쳐 최근에 완역됐다. 이에 김훈과 최불암이 ‘정조지’ 속의 음식들을 복원해온 요리복원가 곽미경, 곽유경 소장 자매의 연구를 방문했다. 역사를 전공한 언니 미경 씨의 시작에 동생 유경 씨도 합류해 정조지 요리복원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최불암과 김훈이 연구소에 도착하자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잘 익은 고구마. 이에 김훈이 고구마에 대한 중요한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선조 임금 때, 서유구 선생이 고구마를 보급했다. 굶주린 백성들의 기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고 전했다.
이에 최불암이 “수은잡방, 산가요록은 들어봤지만, 정조지는 전혀 몰랐다”고 놀라워했다. 이에 김훈 작가도 “저도 최근에 알았다”고 겸손한 면모를 보였다. 김훈 작가는 “정조지란 솥 정(鼎), 도마 조(俎)라는 뜻으로 필수적인 주방용품을 합쳐서 책 이름을 만든 것”이라고 전했다.
신창호 한식셰프도 이런 ‘정조지’에 푹 빠졌다며 김훈, 최불암과 함께 연구소를 찾아왔다. ‘정조지’ 완역 소식을 접하고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빠져들게 됐다는 것. 그는 “한식 관련 책은 그동안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조지는 좀 다르더라. 읽고서 되게 놀랐다”고 감탄했다. 이에 김훈 작가가 “정조지에 수많은 식재료가 나온다. 상상도 못한 식재료들이 많다”고 응수했다.
한편,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은 지역 대표 음식들의 숨겨진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음식문화 등을 아름다운 영상과 깊이 있는 취재를 통해 매주 한편의 '푸드멘터리'로 꾸며내는 프로그램으로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40분에 방송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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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은둔 천재 실학자 류희의 삶·업적 '집대성'
(용인=뉴스1) 김평석 기자 = 서파(西陂) 류희(柳僖·1773~1837)는 조선 후기 재야를 대표하는 실학자다. 오늘날 국어학 연구의 보배로 꼽히는 '언문지'(諺文志)와 '물명고'(物名考),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100여권의 백과사전적 저작 '문통'(文通)과 1500여 편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류희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태어난 용인현 모현촌(현 경기 용인시 모현읍) 일대에 은둔해 살면서 평생 학문에만 매진했던 탓이다.
서파 류희의 '언문지' 저술 2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학문을 돌아보는 '서파 류희의 삶과 학문 이야기'가 용인신문 대표 김종경·박숙현 부부 공저로 도서출판 별꽃에서 나왔다. 이들은 지난 2011년 용인에서 이사주당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서파 류희와 그의 어머니 이사주당의 삶과 학문을 기리는 선양 사업을 하고 있다.
류희는 한글을 '언문'이라며 낮춰 부르고 선비들이 한글을 외면하던 조선시대 책에 당당하게 '언문지'란 제목을 붙였다. 류희는 표음문자인 한글의 우수성과 문자 구조의 정교함을 연구해 한글 연구의 단서를 제공한 조선 최고의 음운학자, 언어학자, 국어학자로 불린다.
그가 펴낸 '물명고' 역시 방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한 조선 최고의 어휘 사전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문통'이 2005년 후손들에 의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되면서 류희는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반열의 대실학자로 단숨에 뛰어올라 학계가 들썩이기도 했다. '문통'은 경학, 문학, 음운학, 어휘학, 춘추학, 수학, 천문학, 역학, 의학, 음악, 농어충수, 측량학 등 전통 시대 학문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서파 류희의 삶과 학문 이야기'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들며 학문을 섭렵하고 그 근본을 꿰뚫었던 류희의 학문적 성과를 보여준다.
저자는 "어쩌면 그가 진정 위대한 건 입신양명을 포기한 채 은둔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을 받아들이고 고독과 울분의 감정을 다스리며 누가 봐주었는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학문을 스스로 채찍질하며 죽을 때까지 평정심을 유지하며 정진한 것인지 모른다"며 "책은 초인의 힘으로 거친 세상을 살며 거대한 학문적 결실을 본 류희의 고단하고 치열했던 삶을 돌아보게 해 준다"고 전했다.
이 책은 류희의 어린 시절과 그의 집안 환경, 그를 키우는 데 모든 것을 집중했던 부모의 교육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류희가 어린 시절부터 범상치 않음을 알아본 어머니 이사주당(국내 최초 태교 서적 '태교신기' 저자)은 100글자를 묶어 돌쟁이였던 류희에게 가르쳤다. 류희는 돌이 되기 전에 글자를 뗐고, 2세 땐 사자성구, 4세 땐 문장을 짓고 편지를 썼으며 5세엔 성리대전을 통독했다고 한다.
류희는 또 수학과 의학에 뛰어났던 아버지 류한규의 가르침에 따라 천문, 역학, 공학 등 이과계열에서도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류희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보여주는 1500여 수의 시를 짓고, 15권의 시집을 엮은 시인이기도 하다.
저자는 "'서파 류희의 삶과 학문 이야기'는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는 현대인들에게 희망의 좌표를 세울 수 있는 훌륭한 멘토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전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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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0.남양주 실학박물관
지금이야말로 실학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첨단과학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점을 보고 가짜 뉴스에 휘둘린다. 지식은 늘어나도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지혜는 부족하다. 고급 정보와 부는 소수가 독점하고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여전히 벌어지는 것일까? 왜란과 호란을 겪었지만 백성들의 삶과는 무관한 예송논쟁에 몰두하던 17세기 조선의 답답한 정치가 연상된다. 이러한 풍토를 개탄하며 백성들의 살림을 늘리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책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들이 추구한 학문을 ‘실학’이라 부른다. 남양주 두물머리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곁에 자리한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관장 김필국)은 실학을 주제로 한 국내 유일의 박물관이다.
윤원규기자
■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들의 숨결을 만나다
2층 상설전시실에서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들의 뜨거운 숨결을 만난다. 담헌 홍대용, 혜강 최한기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며 시대를 앞서간 학자들의 고민을 떠올려본다. 잠곡 김육, 포저 조익, 연암 박지원과 환재 박규수, 혜강 최한기 같은 실학자들의 유물은 이를 소중히 간직했던 가문에서 기증한 것들이기에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역시 그림이 먼저 눈길을 끈다. ‘송하한유도’는 얼핏 보면 동양화의 한 폭 같다. 사실 소나무 밑에 서 있는 사람은 대동법을 확대하는데 온 정성을 쏟은 김육이다. 인물보다 소나무를 더 크게 그린 이 독특한 구도의 초상화는 중국 화가의 작품이다. 그의 손자도 대동법 시행에 앞장섰는데 독특한 눈썹을 가진 김석주의 초상화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다.
특별한 초상화가 또 있다. ‘양주팔괴’로 불리는 청나라의 화가 나빙이 그린 초정 박제가의 초상화 역시 강렬하다. 키는 작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박제가의 당당한 풍모를 잘 표현한 이 초상화가 실사구시를 주창한 추사 김정희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박제가의 초상화는 김정희를 통해 청나라의 선진문물이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전달됐다는 사실을 밝힌 일본 학자 후지즈카 치카시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다.
19세기의 실학자 최한기의 유물도 빼놓을 수 없다. 최한기는 지구의를 만들고 세계지도와 ‘지구전후도’를 그렸으며, 세계의 자연·인문지리에 관한 책 ‘지구전요’를 저술한 만능학자였다. 1861년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대동여지도’만큼 주목해야할 지도가 또 있다. 그것은 대동여지도보다 100년 전인 1755~1757년 무렵에 제작된 ‘동국대전도’다. 그렇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백리척을 적용해 정밀한 지도를 제작한 정상기‧정항령 부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에 전래된 세계지도는 어떤 것이 있을까? 페르비스트가 1674년에 제작한 ‘곤여전도’를 보면서 서양의 힘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바다를 개척한데서 비롯됐던 사실을 보여준다.
혼천시계(渾天時計)란 조선 현종 때에 송이영이 제작한 천문시계로 혼천의와 각종 부속으로 이뤄져 있다. 혼천의 모습. 윤원규기자
송이영이 천체를 측정하기 위해 1669년 만든 ‘혼천의’도 주목되는 유물이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개화파를 길어낸 인물로만 알려졌으나 별자리의 위치를 통해 시간과 계절을 측정하는 ‘평혼의’와 천문관측기구 ‘간평의’를 제작한 과학자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번 전시에서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들이 가장 주목한 유물은 무엇일까? 바로 실학자 유금이 1787년 만든 아라비아식 천문시계, ‘아스트로라브’이다. 유금의 조카는 ‘발해고’를 지은 역사가 유득공이다.
경기문화재단과 실학박물관이 진행하는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이 제3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관람객들이 ‘1787 :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감상하고 있다. 윤원규기자
■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
실학박물관 제3전시실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펼쳐진다. 9월12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은 전통시대의 과학문화재를 첨단의 기술과 전시기법을 동원해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립박물관·미술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 사업에 선정돼 마련된 이번 체험전은 실학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곤여만국전도’, ‘혼천시계’와 ‘혼개통헌의’ 같은 과학 문화재를 실감 나는 영상으로 감상하다 보면 미지의 세계와 정확한 시간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관심과 지혜에 새삼 놀라게 된다.
경기문화재단과 실학박물관이 진행하는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이 제3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윤원규기자
특히 360도 원형의 대형 LED스크린에서 파노라마처럼 상영되는 ‘1787: 스페이스 오디세이’ 영상은 환상적이다.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것 같은 신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를 찧는 전설의 달부터 우주를 향한 꿈과 희망을 담은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에 이르기까지 과학 발전의 발자취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측우기’와 ‘앙부일구’처럼 독창적인 발명품을 제작한 힘이 세종의 열린 태도였음을 감탄하게 된다.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을 구가한 세종시대는 물론 문화를 꽃피운 영정조시대의 실학도 만날 수 있다. 실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혼개통헌의’를 비롯한 실학시대 과학문화재는 이 시대의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체험 콘텐츠 ‘AR-혼천시계’는 국보 혼천시계를 증강현실로 만나게 한다.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디지털 퍼즐게임을 즐기면서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 인식을 배우는 미디어테이블이다. ‘AR-혼천시계’는 박물관에 전시된 혼천시계의 형태와 세부 구조를 참고해 3D 데이터로 제작한 것이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에 설치된 태블릿으로 유물 위에 증강된 혼천시계를 감상할 수 있다. 전자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성인들도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혼천시계의 구조와 작동원리가 궁금하다. 쥐부터 돼지까지 열두 동물의 ‘십이간지’ 캐릭터, 혼천의 주변에 펼쳐지는 우주를 연출하는 효과도 대단하다.
특히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곤여만국전도를 3가지 체험 활동으로 재구성한다. 곤여만국전도에 숨겨진 사실을 알아보는 ‘곤여만국전도 알아보기’, 곤여만국전도에 그려진 대륙과 동물 퍼즐을 맞춰보는 ‘곤여만국전도 퍼즐’, 곤여만국전도를 지구본에 입혀 입체감 있게 만든 ‘빙글빙글 곤여만국전도’가 있다. 입체 지구모형을 돌려보면서 움직이는 동물과 배를 감상하고 현재의 지도와 고지도를 비교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과학기술과 관련 문화재가 생각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6~17세기 조선시대의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두된 실학의 생성 및 발전 과정이 전시되고 있는 '실학의 형성' 1전시장. 윤원규기자
■ 실학의 관심사는 사람과 우주로 뻗어 있다
그동안 진행한 특별전과 기획전을 살펴보면 실학박물관의 관심사와 지향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달력, 시간의 자취’, ‘유배지의 제자들, 다산학단’, ‘실학청연(實學淸緣), 벗과 사제의 인연을 그리다’, ‘반계수록, 공정한 나라를 기획하다’, ‘18~19세기 국화 열풍과 실학자의 국화 애호’, ‘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하다’ 등 다양한 인물과 폭 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전시와 연계한 학술회의도 주목된다.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기념 학술대회 ‘다산 사상과 서학(西學)’과 2013년 성호 이익 서세 250주년 기념 특별전 ‘새로 보는 하늘 땅, 세계–성호 이익의 실학’ 같은 규모가 큰 학술대외가 잇달아 열렸다. 또 실학박물관과 파주시가 공동주최한 학술대회 ‘율곡학과 경기실학’이나 가평군과 공동으로 주최한 ‘대동법 시행으로 조선을 살린, 잠곡 김육과 가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도내의 시‧군과도 협력해 실학정신을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을 대상으로 ‘밭으로 간 실학자’는 옷감을 생산하는 목화를 키우면서 실학의 실용적 가치를 몸으로 배우는 농사 체험프로그램이다. ‘생생! 실학여행’과 ‘실학자와 유물 하나’는 쉽고 재미있게 아이들이 실학적 자세를 터득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관람객들도 참여할 수 있는 주말 상설 프로그램 ‘실~하게 놀자~!’는 홍대용의 혼천의, 박지원의 수레, 정약용의 거중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가을은 사색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실학박물관을 찾아 시대를 앞서 고민했던 반계나 성호, 다산 같은 실학자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배우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15)
<주>
(1) https://v.daum.net/v/20221103003939414
(2) https://v.daum.net/v/20240903163840135
(3) https://v.daum.net/v/20240904155720668
(5) https://v.daum.net/v/20240830030424623
(6)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두물머리에 흐르는 '인간 다산'의 향기 (daum.net)2017. 3. 18.
(7) ‘경쟁사회’ 다산과 신작을 돌아보라 (hani.co.kr)2007-12-07
(9) https://v.daum.net/v/20240905070013437
(10) https://v.daum.net/v/20240326030513496
(11) https://v.daum.net/v/20240115073301358
(12) https://v.daum.net/v/20230303224334975
(13) https://v.daum.net/v/20210128200903795
(14) https://v.daum.net/v/20240528144252758
(15) [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0.남양주 실학박물관 (daum.net)경기일보 2023. 10. 5.
<참고자료>
강진에 되살아난 ‘다산의 향기’ (chosun.com)2007.10.27.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현 동문밖 주막집. 강진으로 유배온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을 받아주는 집은 없었다. 그나마 그를 받아준 사람이 주막집 노파였다. 그는 이때의 심정을 글로 남겼다. ‘흩날리는 눈처럼 북풍에 날리어, 남으로 강진 땅 주막집에 밀려왔네…수심 많으니 밤마다 술만 느는구나.’
그 노파는 당대 학문의 최고봉인 다산에게 물었다. “부모의 은혜는 다 같지만 어머니는 더욱 노고가 많은데, 어머니를 왜 가볍게 여겨,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하는가.” 다산은 옛 책에 따라 추상적으로 답변하고 나서, 크게 깨달은 바 있었다. 다산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깨닫고 두려워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일었다’고 글을 남겼다.
그 주막집이 26일 옛 모습대로 전남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동문샘 옆)에 복원됐다. 사의재(四宜齋). 동문 밖 노파가 다산이 묵을 수 있도록 내준 집이었다. 그 집은 다산이 강진유배시절 초기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묵직해야 하는 동작’ 등 선비가 마땅히 해야 할 4가지 뜻(四宜之齋)으로 이름 짓고 강진의 학동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강진군은 6억4000만원을 들여 주막채와 사의재, 바깥채, 초정(草亭) 등을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군은 또 1950년대 후반 기와로 복원돼 원형을 잃은 다산초당(茶山草堂)도 옛모습으로 다시 세우기로 했다.
[단독]“조선판 국방백서 ‘비어고’ 실제 저자는 정약용” (naver.com)2017. 9. 15.
[동아일보]
그동안 조선 후기 무신이었던 이중협과 정주응이 쓴 것으로 각각 알려졌던 ‘비어고’(위 사진)와 ‘미산총서’. 하지만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두 저서 모두 실제 저자는 다산일 수밖에 없는 흔적이 다수 발견됐다”며 “조선판 ‘국방백서’에 해당할 만큼 국방 관련 내용이 총망라돼 있다”고 말했다. 정민 한양대 교수 제공 |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저서 ‘경세유표’에는 이 같은 내용이 나온다. 다산은 이 책에서 “비어고는 내가 쓴 책이다. 동방의 전쟁을 모아서 한 책으로 만들고, 관방(關防·국경의 요새)과 기용(器用·무기 사용법)에 관한 여러 주장을 살폈으며, 군사제도의 연혁을 밝혔다”고 덧붙였다.
비어고(備禦考)는 방비(사전대비)와 방어에 관한 책이란 뜻으로,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전쟁사와 실제 전쟁에서 수행할 병력 운용·군수 보급 방법 등이 자세하게 수록돼 ‘조선판 국방백서’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다산의 언급과 달리 ‘비어고’에는 그의 친구이자 조선 후기 하급 무관이었던 이중협이 저자로 표기돼 있어 논란이 됐다.
최근 ‘비어고’의 실제 저자가 다산임을 입증하는 연구가 나왔다. 또 다산의 제자였던 정주응의 ‘미산총서’도 ‘비어고’의 일부분이라는 내용도 함께 제기됐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사진)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논문 ‘다산 비어고의 행방’을 15일 열리는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정 교수는 “학문적 성과가 뛰어나지 않은 이중협과 정주응의 저서로만 알려져 있어 그동안 학계에선 관련 연구가 거의 없었다”며 “두 저서에선 다산이 저자일 수밖에 없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밝혔다.
실제 ‘비어고’를 보면 송풍암(松風菴)이라는 저자가 편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송풍암은 다산이 자주 사용한 별칭 중의 하나였다. 정 교수는 “이중협은 다산이 전남 강진에 유배됐을 당시 자주 찾아올 정도로 막역했던 동갑내기 친구”라며 “책에 군사기밀을 다룬 내용이 많아 유배를 겪었던 다산이 현직 무관인 친구의 이름으로 책을 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미산총서에는 다산의 흔적이 더욱 짙다. 이 책에는 “관련 자료는 내 외가의 서고 속에서 얻은 내용이다. 외가는 해남에 있는데 5대 외조부의 휘가 윤선도이고, 호는 고산이다”라고 적혀 있다. 다산과 윤선도는 이종 친척 관계다. 또 다산의 18제자 중 수제자로 꼽히는 이강회와 이정의 안설(해설)이 곳곳에 달려 있다. 정 교수는 “미산총서를 정주응이 썼다면 불과 14세 때 이처럼 방대한 국방 관련 책을 썼다는 뜻인데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책에는 전국의 400여 개 산성의 특성과 전쟁 시 공격·수비에 적합한 무기 목록 등 각종 국방 매뉴얼이 담겨 있다. 특히 중국(여진·청나라)과 일본은 각 나라의 풍속과 음식 문화 등 실생활과 관련한 내용까지 빼곡히 기록해 적의 상황을 미리 파악하려고 했던 의도도 엿보인다. 정 교수는 “한중일 역사 분쟁은 유사 이래 계속돼 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방어와 방책이 가장 중요하다고 다산은 바라봤다”라며 “다산의 비어고에 대한 후속 연구가 심도 깊게 이뤄진다면 동아시아 안보위기를 겪는 현재에 큰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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