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고종 8) 6월 11일 광성보를 탈취한 미군이 어재연 장군의 지휘관기인 ‘수자기’를 노획한 뒤 콜로라도 함상에 걸고 있다. 찰스 브라운 상병, 휴 퍼비스 일병, 매클레인 틸톤 대위 등이 기립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임진왜란 등에서 벌어진 전투를 그린 그림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깃발이 보인다.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와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 ‘평양성탈환도’ 등을 보라. 성루에 큼지막한 깃발이 걸려있다. 그 깃발에는 ‘지휘관’을 뜻하는 ‘수(帥)’자가 대문짝만하게 쓰여있다. 그래서 이 깃발을 ‘수자기’라 한다. 그렇지만 ‘수자기’의 실물은 강화역사박물관에 딱 한 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깃발의 소유권은 미국이 갖고 있다.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 ‘평양성탈환도’ 등에 보이는 ‘수자기’. 수자기는 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가리킨다.|육군박물관·고려대박물관 소장
■미군의 전리품이 된 장군 깃발
1871년(고종 8년) 벌어진 신미양요 때 어재연(1823~1871)의 장군기였지만 미군이 빼앗아 갔다.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것을 2007년 10년 장기임대로 빌려왔다. 2017년 임대기간이 끝났지만 2년 단위로 재계약을 거듭하고 있다. 장기임대를 성사시킬 때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수자기 반환’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미해사박물관장은 “반환은 미국내법상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측이 ‘수자기’를 문화유물로 취급하지 않고, 승전 기념으로 노획한 전리품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1814년 ‘미 해군 전리품 깃발 수집(The United Stated Navy Trophy Flag Collection)’과 관련한 의회법을 제정했다. 또한 1849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재임 1845~1849)이 미 해군장관에게 “전쟁 중 적의 군기, 색상기 등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고 보관·보존·전시를 위해 미해군사관학교를 관리기관으로 정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에따라 미 해사 박물관은 미국이 200년간 전리품으로 획득한 다른 나라의 깃발 25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해사박물관장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수자기를 반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대여는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겨놓았기 때문에 상호접촉을 통해 장기대여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돌출변수가 생기기도 했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가로·세로가 각 4m(가로 413㎝×세로 430㎝)가 넘는 대형 깃발이다. 이 수자기의 오른쪽을 보면 잘려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군의 본영(광성보)을 빼앗은 미군들이 전리품으로 여겨 개인적으로 수자기의 천을 잘라 기념으로 가져갔다.|미 해사박물관 소장·강화역사박물관 임대전시
콜로라도주 출신 웨인 엘러드 상원의원이 이 ‘수자기’와 1968년 납북된 푸에블로호를 맞교환한다는 계획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푸에블로호 사건이 무엇인가. 1968년 1월23일 원산 앞바다를 정찰하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에게 납치된 사건을 지칭한다. 미국은 지루한 협상 끝에 북한 영해 침범 사실을 시인하고 말았다. 미 해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북한은 이 납치한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에 두었다가 1990년대부터는 대동강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대동강은 1866년(고종 3년) 평양 시민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곳이다. 북한은 ‘반미승전의 교재’로 제네럴셔먼호와 푸에블로호를 연결지어 마음껏 활용하고 있다.
엘러드 의원이 바로 이 점을 고려해서 ‘수자기’와 푸에블로호의 맞교환을 추진한 것이다. 미국 상원의원이 수자기를 가져간 강화도가 남한 땅인지 북한 땅인지 몰랐다는 말인가. 자다가 봉창두드릴 일이지만 어쩌랴. 미 국무부가 “불법 남북된 푸에블로호 문제를 두고 북한과 협상할 의사가 없다”고 최종 결정하면서 맥락없이 추진된 ‘수자기의 북한행’은 없었던 일로 끝났다.
1950년 ‘렉싱턴 헤럴드’지에 실린 미군의 ‘신미양요 노획물’. 신미양요 때 전사한 휴 맥키 중위의 유족이 트랜실베니아 컬리지에 기증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렉싱턴 공공도서관 전시 때 공개됐다. 노획물 중에는 화승총과 불랑기포, 깃발 등이 있다고 소개했다. 사진 뒤에 금고(金鼓·쇠북)이라고 한자로 쓴 깃발이 보인다. |토마스 듀버네이 영남대 교수의 논문에서
■어재연 장군의 모자 깃털까지 노획
우여곡절 국내 전시 중이지만 수자기의 신분이 여전히 미군의 전리품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가로 413㎝, 세로 430㎝가 넘는 대형 깃발인 수자기의 오른쪽을 보면 잘려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군 본영(광성보)을 빼앗은 미군들이 개인적 전리품으로 앞다퉈 깃발 일부분을 잘라간 것이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만 노획한 것이 아니었다. 참전 장교인 매클레인 틸톤 대위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틸톤의 ‘1871년 조선에서의 해병대수륙양면작전’ 보고서).
“나는 당신(부인)에게 줄 깃털 장식과 적·황색 말털을 입수했소. 내가 조선장수(어재연)의 전립(戰笠·군복의 갓)에서 떼어낸 장식품이오.”
북한은 1968년 1월 나포한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대동강변에 전시하고 반미승전의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 대동강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럴셔먼호가 불에 타 선원 24명 전원이 몰살한 곳이다.
틸톤은 “노획한 장식품을 쳐다보며 즐기고 있다”면서 “이것은 당신(부인)과 나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해두자”고 했다. 미군은 이렇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유품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이 뿐이 아니다. 미군은 47기의 조선군 깃발과 182문의 포, 481문의 화승총을 노획했다고 자랑스레 기록했다.
인명피해는 또 어떤가. 미군은 3명 사망과 10여명 부상에 그쳤지만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포함, 350여명이 전사(조선 추산 57명)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시간 동안 조선군 200명을 죽인 것 같소…시체 더미를 보았는데 떼죽음을 당한 돼지 떼 같았소. 동료가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조선군의 머리를 총으로 쏘아서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소. 나는 ‘그건 살인 행위이니 그냥 두라’고 말했소.”(틸톤의 보고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 제독(1812~1882)은 1871년 5월 중순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수·해병 1230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선다. 미군은 5월30일 작약도에 정박한 뒤 “해변을 탐색하고 연안 수심을 측량하고자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 활동을 강행했다.
■아시아 함대의 출병
150년 전 벌어진 신미양요가 어떻게 전개됐기에 그런 참담한 결과를 나왔을까.
신미양요 발발 5년 전인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배가 전소하고 승무원 24명이 익사 또는 살해된다. 하지만 조선이 쇄국정책 탓에 외국배를 그렇게 무참하게 처단한 것은 아니었다.
1855년(철종 6년) 6월 미국 포경선 투브라더즈호의 강원도 통천, 1866년 5월 역시 미국상선 서프라이즈호의 평안도 철산 표착이 잇따랐다. 조선 조정은 두차례 모두 인도적인 차원에서 선원들을 구조한 뒤 무사히 송환시켰다. 전통적인 ‘유원지의(柔遠之意·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1871년 6월10일 미군의 공격으로 속절없이 무너진 초지진의 현재모습(왼쪽 사진). 고성능 총기와 화포, 그리고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숙달된 병사들로 무장한 미군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야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미 해병 800여명의 2시간 동안 맹공을 펼쳤고, 조선군은 변변한 응사도 못 한 채 전멸했다. 조선군의 시신과 불랑기 포가 보인다.
그러나 제너럴셔면호는 ‘조선은 국법으로 통상·교역을 금하고 있고, 외국배의 내강 항행(內江航行)은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는 지역관리의 경고에도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 장수를 억류하고 주민 12명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조선은 화공작전을 펼쳐 제너럴셔면호를 불에 태워 격침시켰다.
5년 뒤인 1871년(고종 8)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밝혀 강력제재한다’는 구실로 조선원정에 나선다. 하지만 미국의 숨은 뜻은 군사적 원정을 빌미로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있었다.
미국은 마침 남북전쟁(1861~1865년)을 끝내고 국내가 안정됨에 따라 아시아함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세계제국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5월 중순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수·해병 1230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선다. 1853년 이른바 ‘포함외교’로 일본을 겁박해서 이듬해(1854년) 수교를 이끌어낸 것을 상상했을 게 틀림없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덕진진을 손쉽게 점령했다. 미군이 덕진진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수심 측량은 엄연한 도발
5월30일 인천 작약도에 닻을 내린 미군은 “해변을 탐색하고 연안 수심을 측량하고자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6월1일 강화해협의 탐측 활동을 강행했다. 하늘길이 열리지 않았고,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시대에 남의 나라 영해의 수로를 측량한다는 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바닷길로 침략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으니까…. 항해를 강행한 미군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강화 연안의 조선군 포대가 불을 뿜는다. 미군 함대도 발포했다. 조·미간 최초로 벌어진 군사적 충돌이었다. 그러나 미군측은 포격행위에 대한 사과와 손해배상, 협상을 요구하면서 “요구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 보복상륙장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적반하장’이었다. 먼저 남의 영해에 함부로 들어와 도발한 자들이 ‘사과를 촉구하다니….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이하응·1820~1898)은 “외국과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은 조선의 500년 전통”이라면서 “동·서방을 막론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살면 될 일이지 만날 필요가 있겠느냐”고 점잖게 일축했다(<고종실록> 1871년 6월3일). 그러면서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대접한다’는 차원에서 송아지 3마리와 닭 50마리, 달걀 1000개 등을 뗏목에 실어 보냈다. 그러나 미군은 이 선물을 돌려보냈다.
초지진-덕진진을 잇달아 차지한 뒤 어재연 장군의 본영이 있는 광성보까지 쉽게 차지했다. 사진은 포연이 아직 걷히지 않은 광성보 손돌목 돈대 장면.
■수자기가 탈취되다
조선 조정은 어재연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삼아 급파했다. 6월10일 미군의 공격이 시작된다.
강화해협의 첫 번째 관문인 초지진이 속절없이 함락된다. 고성능 총기와 화포, 그리고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숙달된 병사들로 무장한 미군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야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미 해병 800여명이 2시간 동안 맹공을 펼쳤다. 조선군은 변변한 응사도 못 한 채 전멸했다. 초지진에서 하룻밤을 야영한 미군은 그곳에서 2.2㎞ 떨어진 덕진진을 공격했다. 역시 점령은 ‘식은 죽 먹기’였다.
미군은 덕진진에서 다시 2.2㎞ 떨어진 광성보로 진격했다. 어재연 장군이 1000명의 경군을 이끌고 있던 강화도 방위의 총사령부였다. 광성보는 높이 150피트(45.70m)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수륙 양면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광성보 역시 눈깜짝할 사이에 함락됐다. 이때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가 하강되어 탈취되는 수모를 당했다.
조선군 본영이 주둔하고 있던 광성보의 현재 모습(왼쪽). 광성보는 높이 150피트(45.70m)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였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수륙 양면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맨손으로 싸운 조선군
일방적인 패배였지만 조선군의 분투는 눈물겨웠다. 특히 무명천을 12~13겹 겹쳐 만든 이른바 ‘면갑옷’을 입고 싸웠다. 그러나 이 면갑은 화승총 같은 무기에는 나름 효과적이었지만 최신식 서양 무기 앞에서는 별무신통이었다. 한여름에 착용하기는 너무 더웠고, 또한 불에 약하여 뜨거운 납탄을 맞으면 쉽게 불타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조선 병사들이 그 불을 끄려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대부분 무기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고 아군(미군)의 눈에 모래를 뿌렸다. 수십명은 총탄을 맞아 강물에 나뒹굴었고, 어떤 자는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근대적인 총기 한 자루 없이 노후화한 무기로 미국 총포에 대항했던 조선군….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W S 슐레이 소령의 <기함에서의 45년>, 1904년)
조선군은 무명천을 12~13겹 겹쳐 만든 ‘면갑옷’을 입고 싸웠다. 이 면갑은 화승총 같은 무기에는 나름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최신식 서양 무기 앞에서는 별무신통이었다. 한여름에 착용하기는 너무 더웠고, 또한 불에 약하여 뜨거운 납탄을 맞으면 쉽게 불타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미군은 조선 조정을 향해 “빨리 협상단을 보내라”고 겁박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무시하면서 항전의지를 불태웠다. 미국무부는 결국 아시아 함대에게 전문을 보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거든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결국 미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철수하고 만다(7월3일).
당시 미국내 여론은 신미양요를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했다.
“조선-미국간 소규모 전쟁은 미국의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이 사건은 열강인 미국의 국제적 체면을 손상시켰다. 조선의 개항을 더욱 희박하게 만들었다.”(‘뉴욕데일리 트리뷴’)
1878년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 해군문제위원장인 애런 사전트 상원의원은 미 의회에서 “조선군이 미국 침략군에게 발포한 것은 정당방어였다”고 규정했다.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나라라도 미국해역에 들어와 제임스 강을 측량하고 탐사한다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비수교국인 조선해역에 들어가 탐측한 미군 함대의 짓은 명백한 침략행위라 규정할 수 있다.”
신미양요를 다룬 미국의 주간지 ‘하퍼 위클리’ 1871년 9월9일자. 뉴욕에서 발행됐다. 미국은 신미양요를 ‘Corean War’라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수교후 얼굴 바꾼 미국
미국은 그렇게 당초의 목적(조선 개항)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지만 9년 뒤(1882년) 가장 먼저 조선과 통상 조약을 맺은 서양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청나라를 오가며 지극정성 공을 들인 끝에 마침내 조선개항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곧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짐은 있었다.
즉 통상 조약을 위한 미국전권대표인 로버트 슈펠트(1822~1895)가 교섭 과정에서 “조선은 가난한 나라다. 현재로 보나 미래로 보나 상업적인 이해관계는 미미하다”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조선과 수교하려 했을까. 슈펠트는 “조선이 여러 나라로 가는 대양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미국은 극동에서 기항지(寄港地)를 얻기 위해 조선과의 수교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곧 바뀌었다. 선박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일본을 경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게 됐다. 일본의 간교한 외교도 한몫했다.
미군은 전투에서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조선을 개항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아무런 소득없이 철수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전국 각지에 ‘서양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을 의미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洋夷侵犯 非戰즉和 主和賣國)’이라는 척화비를 세웠다.
■미국을 짝사랑한 결과는?
반면 조선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결사항전 의지로 전쟁까지 벌이며 문을 닫아 걸었던 10여년전과 달리 조선은 미국을 ‘메시아’로 여겼다. 1882년(고종 19년) 맺은 조미 통상조약의 제1조가 다름아닌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는 ‘거중조정 조항’이었다. 조선이 남의 나라로부터 간섭이나 침략을 받을 때는 미국이 적극 나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적국에서 ‘아름다울 미(美)자’ 미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대인배의 나라’라던 미국은 조선을 위해 한번도 나서주지 않았다.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05)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일본을 지지함으로써 조선(대한제국)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수호통상조약문. 제1조는 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결국 1905년 7월29일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가쓰라-테프트 조약까지 맺는다. 그로부터 넉달도 안된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교 단절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당시 고종의 특사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미국을 방문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가 분통을 터뜨린다.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저버렸다.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삿말도 없이….”
꼭 150년 전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 300여 명이 피를 흘렸던 강화도에서 내려지고, 결국 미군의 전리품이 된 ‘수자기’에는 이러한 우여곡절이 담겨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국방장관 월리엄 태프트(오른쪽)가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왼쪽)와 이른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다. 밀약은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넉달도 안된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교 단절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신미양요 150주년을 맞아 한·미관계를 돌이켜본다. 전쟁까지 치렀다가(1871년) 어느 날 간이라도 빼 줄 것같은 우방이 되었지만(1882년) 또 갑자기 언제 보았냐는듯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갔다가(1905년), 다시 구세주처럼 나타나 혈맹이 됐다(1950년).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고, 자국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외교가 아닌가. 어떤 나라를 상대하든 지나친 일변도 외교나 짝사랑 외교는 금물이라는 교훈을 다시 얻게 된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때 빼앗긴 ‘수자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들이 반환 대상 한국문화재가 아니라 미군의 ‘전리품’ 목록에 올라있다는 것이다. ‘수자기’ 등이 미군의 전리품으로 규정되는 한 150년 전 미국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흑역사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미국이 빼앗아간 수자기가 과연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이 맞냐는 본질적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1871년 6월 벌어진 조선과 미국간의 충돌을 ‘신미양요’라 하지 않던가. ‘양요(洋擾)’는 문자 그대로 서양인의 침입으로 일어난 소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 입장에서 수자기 등은 소요를 일으킨 미국인들이 가져간 약탈품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사 작성에 김병연 문화재청 국제교류과 행정사무관과, 2007년 장기대여 때 실무를 담당한 최종덕 당시 문화재청 국제교류과장의 도움이 컸습니다.)(3)
<참고자료>
국립고궁박물관, ‘수자기-136년만의 귀환’(특별전 도록), 2008
신복룡, ‘신미양요의 전개와 역사적 의미’, <어재연 장군과 신미양요의 재조명>(어재연 장군 순국 및 신미양요 150주년기념 학술회의), 전쟁기념관.어재연장군 추모 및 신미양요 기념사업회, 2021
토머스 듀버네이, ‘신미양요-1871년 조선에서의 미국 군사행동’,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2021
강신엽,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형제와 참전군 연구’,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2021
박제광, ‘신미양요 당시 조선의 강화도 방어체제와 무기’,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2021
김병연, ‘전쟁으로부터 문화재 보호의 게으르지 않은 역사’, 6·25전쟁과 문화유산 보존’ 학술심포지엄, 국립고궁박물관, 2020
김원모편, ‘틸톤의 강화도참전수기’, <동방학지> 31권, 연세대국학연구원,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