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조선(12) - 조선 개화기 본문

남국/조선

조선(12) - 조선 개화기

대야발 2024. 5. 30. 14:58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대원군, 세도정치 철폐 등 기득권 일소 성공…쇄국으로 세계질서와 열강 움직임 못 읽어

입력 2023.04.03 10:00 수정 2023.04.03 10:00 생글생글 795호
(136) 대원군의 개혁, 쇄국정책과 조선의 개항 (上)
미국이 처음 공격한 강화도의 초지진.
 
조선은 백성에게 가난과 질병, 부패와 공권력의 폭력을 안긴 불행한 체제였다. 조선은 정조의 죽음 이후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가 지속됐다. 소수 가문이 왕권을 능가하는 정치권력과 경제, 문화 등을 장악했고, 관직 매매 등 부패를 일상화했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은 죽거나 민란을 일으켰다. 일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만주에 정착했다. 1863년 이런 상황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역사에 등장했다.

그에게는 시대적인 과제와 사명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왕권 확립과 세도정치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과 실학 이후 신사상이 추구한 체제 변화였다. 대원군은 신속하게 중앙과 지방에 포진한 세도정치의 주역과 동조 세력을 숙청하고, 비변사를 폐지해 정치권과 군사권을 분리했다. 정치·문화 이데올로기의 산실이자 재산권 및 권력투쟁과 직결된 수많은 서원을 47개만 남겨두고 철폐했다. 양반들의 특권으로 병역 대신 부과했던 군포를 다시 거둬들였고, 사창제도 등을 시행해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런 개혁정책들은 구권력의 인적, 기득권의 물적 토대를 일소했고, 자신을 중심으로 신권력을 창출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백성도 환호했다.

하지만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 회복을 목적으로 추진한 경복궁 재건은 개혁을 좌초시켰다. 백성을 무리하게 징발했고, 재정 부족 때문에 발행한 당백전은 초기 단계에서 화폐경제의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세금을 걷는 데 차질이 생겼고, 백성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원납전을 부과해 관청과 지주들의 자진 기부를 유도했지만 결국 백성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대원군은 100년 가까이 성장한 실학자들의 존재와 연구, 정책 대안을 소홀히 했다. 오히려 천주교와 연관성이 있다는 점을 이용해 탄압하기까지 했다.

둘째는 천주교의 수용과 서양세력의 개항 요구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었다. 서학과 천주교는 병자호란 직후부터 영향을 끼쳤지만, 신앙과 학문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는 서양인이 탄 이양선이 해안에 출몰했고,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했던 조선은 쇄국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서양 지도에 기록됐고, 이는 이후 독도 갈등의 씨앗이 됐다. 서양인들이 동아시아의 질서 재편 작업을 구체적으로 시작한다는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조선을 둘러싼 세계 질서와 열강의 움직임은 어땠을까?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상륙했던 갑곶돈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면서 근대지향적인 나라로 탈바꿈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지식인과 하급 무사들은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홋카이도와 유구, 타이완, 조선 등을 점령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메이지유신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은 ‘정한론’을 주장했다. 군사력을 증강했고, 특히 서양의 해군력을 본 병부성은 20년에 걸쳐 군함 200척 및 운송선 20척을 건조하자는 계획을 건의했다. 이를 계기로 장갑함을 비롯한 수입품으로 무장한 근대 해군이 탄생했다. 1871년부터 신분해방령을 내리고 국민이 초등교육을 받도록 했고, 평민도 군인이 될 수 있는 징병령까지 만들었다. 1871년부터 1873년 사이 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 국비유학생을 대거 파견했는데, 그 비용이 1872~1873년 교육 예산의 약 10%였다.

청나라는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을 맺었고, 1844년에는 미국, 프랑스와도 동일한 조약을 맺었다. 러시아와는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어 헤이룽강 이북과 연해주 땅 100만㎢를 빼앗겼다. 일본과는 1871년 상호평등 관계로 전환되는 ‘청일수호조규’를 맺었다. 서양의 압력을 막으려면 일본과 연합해야 한다는 ‘연일제서(聯日制西)’ 논리 때문이었다.

이 시대 러시아는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나라였다. 일본과 1875년 5월 러·일 화친조약을 맺어 사할린을 영토로 인정받았다. 반면 일본은 쿠릴열도의 18개 섬 전체를 양도받았고, 홋카이도를 영토로 삼을 권리까지 얻었다. 이후 러시아는 동아시아 질서에 직접 영향을 끼쳤고, 조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러자 위협을 감지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와 신흥 태평양 세력인 미국은 대항마로서 일본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구도를 파악해 서구 열강을 이용했다.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흥선대원군에게는 시대적인 과제와 사명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는 왕권 확립과 세도정치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과 실학 이후 신사상이 추구한 체제 변화였다. 둘째는 천주교의 수용과 서양세력의 개항 요구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었다.(1)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두 번의 '양요' 거치며 쇄국정책 옳았다고 착각…4년 후 일본 공격 대비하는 교훈조차 못 얻어

입력 2023.04.10 10:00 수정 2023.04.10 10:00 생글생글 796호
(137) 대원군의 개혁, 쇄국정책과 조선의 개항(下)
어재연 장군 등이 혈전을 벌인 강화도 광성돈대.
 
미국은 1847년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태평양에 진출했으며, 포경선들을 북태평양 어장으로 진출시켜 러시아와 부딪쳤다. 1853년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강행해 1854년에 미·일 화친조약을 맺었다. 1865년에는 남북전쟁을 종결시켰고, 1869년엔 대륙횡단철도를 완성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양양(兩洋)국가’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조선을 비롯해 청나라, 필리핀 등과 캄차카 반도, 쿠릴 열도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은 미국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 속에서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서해안의 모든 관청에 외국 선박과의 교섭 금지령을 내렸고, 프랑스 신부와 신도를 죽였다. 주청 프랑스 공사관은 이를 조선을 개항시키는 빌미로 활용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9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두 척의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목동 입구인 염창에 정박하고, 다음날 양화진(양화대교)까지 접근하자 도성은 공포에 휩싸였다. 곧 산둥으로 회항한 함대는 준비를 마친 뒤 10월 14일 군함 네 척으로 강화도에 진입해 갑곶진을 점령했다. 이어 벌어진 문수산성 전투에서 포수와 전국에서 동원된 보부상, 지역주민과 합동작전을 벌인 조선군과 싸우다가 퇴각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숱한 문화재를 약탈했다.

그 얼마 전인 음력 7월에는 ‘제너럴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평양에 정박했다가 정부와 백성들의 공격으로 배가 전소됐고, 선원은 몰살당했다. 미국은 5년이 지난 1871년 이 사건을 빌미로 나가사키항을 출항한 군함 다섯 척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의 초입인 초지진을 점령했고, 다음날에는 옆의 덕진진과 광성보를 공격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최소한 253명의 군인과 다수의 백성이 전사했다. 반면 미국은 단 3명 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국가와 군대가 백성에게 주는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대원군은 두 번의 ‘양요’에서 승리했다고 자처하면서 쇄국정책이 옳았음을 주장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하지만 조선은 전투에서 졌고, 다수의 백성이 죽었으며, 불과 4년 뒤 발생할 일본의 공격을 예방하는 교훈조차 얻지 못했다.

이 무렵 일본은 서양을 자기화하면서 주변 국가들을 침략했다. 1872년 류큐 왕국을 류큐 번으로 만들었고, 1874년 5월에는 대만을 침공했다. 1875년엔 류큐국을 점령해 1879년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만들었다. 다음 단계는 조선이었고, 열강들은 이를 예측했다. 하지만 물러난 대원군도, 고종과 명성황후의 친정체제도 무능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예고 없이 부산항에 입항했고, 운요호를 비롯한 함대 세 척이 강화 해안에 상륙해 조선군을 패배시켰다. 이어 ‘조선병탄론’ 등 시나리오대로 움직여 열강들에 외교전을 펼쳤고, 군함 세 척과 수송선 세 척에 전권대표와 해병대 등 800여 명을 태우고 강화도 연안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조선의 신정권은 최초의 근대조약이면서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사대교린 외교체제는 무너졌고, 조선은 청나라에서 벗어난 자주국으로 변신해 일본에 종속되기 편하게 변형됐다. 신정부는 자국책을 강구해 서양 세력과 근대조약을 맺으면서 개항과 또 다른 개혁을 선택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놓고 ‘조선의 멸망을 늦췄다’ ‘조선이 회생할 기회를 상실했다’ 등 상반된 평가가 난무한다. 그 무렵 조선은 외국 세력과 정면 대결할 수도,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와 질서 재편의 혼란기에는 우연이 존재하고, 약자의 도약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비록 실패할 확률이 높았어도 지연이라는 시차 작전과 강온 양면의 외교술을 발휘해볼 만한 여지는 있었다.

대원군의 역사적인 성격과 정책은 오늘 우리에게도 교훈을 준다. 사회 개혁은 사적인 경험과 교조적인 행동으로는 성사될 수 없다. 신념보다 자유심, 명분보다 필요성, 사심보다 공감이 더 효율성이 높다. 백성은 전 시대의 폭정에 반동적인 존재로 대원군을 지지했지만, 결국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해 절망한 백성은 국가 의식이 희박해졌고, 이는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에 보이듯 조선 멸망에 큰 요인이 됐다.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놓고 ‘조선의 멸망을 늦췄다’ ‘조선이 회생할 기회를 상실했다’ 등 상반된 평가가 난무한다. 그 무렵 조선은 외국 세력과 정면 대결할 수도,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와 질서 재편의 혼란기에는 우연이 존재하고, 약자의 도약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렇다면 비록 실패할 확률이 높았어도 지연이라는 시차 작전과 강온 양면의 외교술을 발휘해볼 만한 여지는 있었다.(2)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구독

신미양요 때 빼앗긴 '수자기’…“반환 불가능한 미군의 전리품”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1.06.01 05:00 수정 : 2021.06.10 10:42

1871년(고종 8) 6월 11일 광성보를 탈취한 미군이 어재연 장군의 지휘관기인 ‘수자기’를 노획한 뒤 콜로라도 함상에 걸고 있다. 찰스 브라운 상병, 휴 퍼비스 일병, 매클레인 틸톤 대위 등이 기립했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임진왜란 등에서 벌어진 전투를 그린 그림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깃발이 보인다.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와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 ‘평양성탈환도’ 등을 보라. 성루에 큼지막한 깃발이 걸려있다. 그 깃발에는 ‘지휘관’을 뜻하는 ‘수(帥)’자가 대문짝만하게 쓰여있다. 그래서 이 깃발을 ‘수자기’라 한다. 그렇지만 ‘수자기’의 실물은 강화역사박물관에 딱 한 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깃발의 소유권은 미국이 갖고 있다.

‘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 ‘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 ‘평양성탈환도’ 등에 보이는 ‘수자기’. 수자기는 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가리킨다.|육군박물관·고려대박물관 소장

■미군의 전리품이 된 장군 깃발

1871년(고종 8년) 벌어진 신미양요 때 어재연(1823~1871)의 장군기였지만 미군이 빼앗아 갔다.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것을 2007년 10년 장기임대로 빌려왔다. 2017년 임대기간이 끝났지만 2년 단위로 재계약을 거듭하고 있다. 장기임대를 성사시킬 때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수자기 반환’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미해사박물관장은 “반환은 미국내법상 불가능하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측이 ‘수자기’를 문화유물로 취급하지 않고, 승전 기념으로 노획한 전리품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1814년 ‘미 해군 전리품 깃발 수집(The United Stated Navy Trophy Flag Collection)’과 관련한 의회법을 제정했다. 또한 1849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재임 1845~1849)이 미 해군장관에게 “전쟁 중 적의 군기, 색상기 등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고 보관·보존·전시를 위해 미해군사관학교를 관리기관으로 정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에따라 미 해사 박물관은 미국이 200년간 전리품으로 획득한 다른 나라의 깃발 25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미해사박물관장은 바로 이 점을 들어 “수자기를 반환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대여는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겨놓았기 때문에 상호접촉을 통해 장기대여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돌출변수가 생기기도 했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가로·세로가 각 4m(가로 413㎝×세로 430㎝)가 넘는 대형 깃발이다. 이 수자기의 오른쪽을 보면 잘려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군의 본영(광성보)을 빼앗은 미군들이 전리품으로 여겨 개인적으로 수자기의 천을 잘라 기념으로 가져갔다.|미 해사박물관 소장·강화역사박물관 임대전시

콜로라도주 출신 웨인 엘러드 상원의원이 이 ‘수자기’와 1968년 납북된 푸에블로호를 맞교환한다는 계획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푸에블로호 사건이 무엇인가. 1968년 1월23일 원산 앞바다를 정찰하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에게 납치된 사건을 지칭한다. 미국은 지루한 협상 끝에 북한 영해 침범 사실을 시인하고 말았다. 미 해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북한은 이 납치한 푸에블로호를 원산항에 두었다가 1990년대부터는 대동강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대동강은 1866년(고종 3년) 평양 시민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곳이다. 북한은 ‘반미승전의 교재’로 제네럴셔먼호와 푸에블로호를 연결지어 마음껏 활용하고 있다.

엘러드 의원이 바로 이 점을 고려해서 ‘수자기’와 푸에블로호의 맞교환을 추진한 것이다. 미국 상원의원이 수자기를 가져간 강화도가 남한 땅인지 북한 땅인지 몰랐다는 말인가. 자다가 봉창두드릴 일이지만 어쩌랴. 미 국무부가 “불법 남북된 푸에블로호 문제를 두고 북한과 협상할 의사가 없다”고 최종 결정하면서 맥락없이 추진된 ‘수자기의 북한행’은 없었던 일로 끝났다.

1950년 ‘렉싱턴 헤럴드’지에 실린 미군의 ‘신미양요 노획물’. 신미양요 때 전사한 휴 맥키 중위의 유족이 트랜실베니아 컬리지에 기증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렉싱턴 공공도서관 전시 때 공개됐다. 노획물 중에는 화승총과 불랑기포, 깃발 등이 있다고 소개했다. 사진 뒤에 금고(金鼓·쇠북)이라고 한자로 쓴 깃발이 보인다. |토마스 듀버네이 영남대 교수의 논문에서

■어재연 장군의 모자 깃털까지 노획

우여곡절 국내 전시 중이지만 수자기의 신분이 여전히 미군의 전리품이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가로 413㎝, 세로 430㎝가 넘는 대형 깃발인 수자기의 오른쪽을 보면 잘려 나간 흔적이 역력하다. 조선군 본영(광성보)을 빼앗은 미군들이 개인적 전리품으로 앞다퉈 깃발 일부분을 잘라간 것이다.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만 노획한 것이 아니었다. 참전 장교인 매클레인 틸톤 대위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틸톤의 ‘1871년 조선에서의 해병대수륙양면작전’ 보고서).

“나는 당신(부인)에게 줄 깃털 장식과 적·황색 말털을 입수했소. 내가 조선장수(어재연)의 전립(戰笠·군복의 갓)에서 떼어낸 장식품이오.”

북한은 1968년 1월 나포한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대동강변에 전시하고 반미승전의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 대동강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네럴셔먼호가 불에 타 선원 24명 전원이 몰살한 곳이다.

틸톤은 “노획한 장식품을 쳐다보며 즐기고 있다”면서 “이것은 당신(부인)과 나만이 알고 있는 것으로 해두자”고 했다. 미군은 이렇게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유품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이 뿐이 아니다. 미군은 47기의 조선군 깃발과 182문의 포, 481문의 화승총을 노획했다고 자랑스레 기록했다.

인명피해는 또 어떤가. 미군은 3명 사망과 10여명 부상에 그쳤지만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포함, 350여명이 전사(조선 추산 57명)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시간 동안 조선군 200명을 죽인 것 같소…시체 더미를 보았는데 떼죽음을 당한 돼지 떼 같았소. 동료가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조선군의 머리를 총으로 쏘아서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소. 나는 ‘그건 살인 행위이니 그냥 두라’고 말했소.”(틸톤의 보고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 제독(1812~1882)은 1871년 5월 중순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수·해병 1230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선다. 미군은 5월30일 작약도에 정박한 뒤 “해변을 탐색하고 연안 수심을 측량하고자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 활동을 강행했다.

■아시아 함대의 출병

150년 전 벌어진 신미양요가 어떻게 전개됐기에 그런 참담한 결과를 나왔을까.

신미양요 발발 5년 전인 1866년 8월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배가 전소하고 승무원 24명이 익사 또는 살해된다. 하지만 조선이 쇄국정책 탓에 외국배를 그렇게 무참하게 처단한 것은 아니었다.

1855년(철종 6년) 6월 미국 포경선 투브라더즈호의 강원도 통천, 1866년 5월 역시 미국상선 서프라이즈호의 평안도 철산 표착이 잇따랐다. 조선 조정은 두차례 모두 인도적인 차원에서 선원들을 구조한 뒤 무사히 송환시켰다. 전통적인 ‘유원지의(柔遠之意·낯선 사람을 잘 대접한다)’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1871년 6월10일 미군의 공격으로 속절없이 무너진 초지진의 현재모습(왼쪽 사진). 고성능 총기와 화포, 그리고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숙달된 병사들로 무장한 미군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야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미 해병 800여명의 2시간 동안 맹공을 펼쳤고, 조선군은 변변한 응사도 못 한 채 전멸했다. 조선군의 시신과 불랑기 포가 보인다.

그러나 제너럴셔면호는 ‘조선은 국법으로 통상·교역을 금하고 있고, 외국배의 내강 항행(內江航行)은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는 지역관리의 경고에도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 장수를 억류하고 주민 12명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조선은 화공작전을 펼쳐 제너럴셔면호를 불에 태워 격침시켰다.

5년 뒤인 1871년(고종 8)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을 밝혀 강력제재한다’는 구실로 조선원정에 나선다. 하지만 미국의 숨은 뜻은 군사적 원정을 빌미로 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있었다.

미국은 마침 남북전쟁(1861~1865년)을 끝내고 국내가 안정됨에 따라 아시아함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세계제국의 길로 향하고 있었다. 5월 중순 미국의 아시아함대는 군함 5척, 함재대포 85문, 수·해병 1230명의 군대를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선다. 1853년 이른바 ‘포함외교’로 일본을 겁박해서 이듬해(1854년) 수교를 이끌어낸 것을 상상했을 게 틀림없다.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덕진진을 손쉽게 점령했다. 미군이 덕진진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수심 측량은 엄연한 도발

5월30일 인천 작약도에 닻을 내린 미군은 “해변을 탐색하고 연안 수심을 측량하고자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6월1일 강화해협의 탐측 활동을 강행했다. 하늘길이 열리지 않았고, 도로가 정비되지 않은 시대에 남의 나라 영해의 수로를 측량한다는 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바닷길로 침략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으니까…. 항해를 강행한 미군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강화 연안의 조선군 포대가 불을 뿜는다. 미군 함대도 발포했다. 조·미간 최초로 벌어진 군사적 충돌이었다. 그러나 미군측은 포격행위에 대한 사과와 손해배상, 협상을 요구하면서 “요구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 보복상륙장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했다. ‘적반하장’이었다. 먼저 남의 영해에 함부로 들어와 도발한 자들이 ‘사과를 촉구하다니….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이하응·1820~1898)은 “외국과 관계를 맺지 않은 것은 조선의 500년 전통”이라면서 “동·서방을 막론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살면 될 일이지 만날 필요가 있겠느냐”고 점잖게 일축했다(<고종실록> 1871년 6월3일). 그러면서 ‘먼 곳에서 온 손님을 대접한다’는 차원에서 송아지 3마리와 닭 50마리, 달걀 1000개 등을 뗏목에 실어 보냈다. 그러나 미군은 이 선물을 돌려보냈다.

초지진-덕진진을 잇달아 차지한 뒤 어재연 장군의 본영이 있는 광성보까지 쉽게 차지했다. 사진은 포연이 아직 걷히지 않은 광성보 손돌목 돈대 장면.

■수자기가 탈취되다

조선 조정은 어재연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삼아 급파했다. 6월10일 미군의 공격이 시작된다.

강화해협의 첫 번째 관문인 초지진이 속절없이 함락된다. 고성능 총기와 화포, 그리고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숙달된 병사들로 무장한 미군의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야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미 해병 800여명이 2시간 동안 맹공을 펼쳤다. 조선군은 변변한 응사도 못 한 채 전멸했다. 초지진에서 하룻밤을 야영한 미군은 그곳에서 2.2㎞ 떨어진 덕진진을 공격했다. 역시 점령은 ‘식은 죽 먹기’였다.

미군은 덕진진에서 다시 2.2㎞ 떨어진 광성보로 진격했다. 어재연 장군이 1000명의 경군을 이끌고 있던 강화도 방위의 총사령부였다. 광성보는 높이 150피트(45.70m)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수륙 양면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광성보 역시 눈깜짝할 사이에 함락됐다. 이때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가 하강되어 탈취되는 수모를 당했다.

조선군 본영이 주둔하고 있던 광성보의 현재 모습(왼쪽). 광성보는 높이 150피트(45.70m)의 가파른 절벽 위에 자리잡은 천혜의 요새였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한 미군의 수륙 양면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맨손으로 싸운 조선군

일방적인 패배였지만 조선군의 분투는 눈물겨웠다. 특히 무명천을 12~13겹 겹쳐 만든 이른바 ‘면갑옷’을 입고 싸웠다. 그러나 이 면갑은 화승총 같은 무기에는 나름 효과적이었지만 최신식 서양 무기 앞에서는 별무신통이었다. 한여름에 착용하기는 너무 더웠고, 또한 불에 약하여 뜨거운 납탄을 맞으면 쉽게 불타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조선 병사들이 그 불을 끄려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대부분 무기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고 아군(미군)의 눈에 모래를 뿌렸다. 수십명은 총탄을 맞아 강물에 나뒹굴었고, 어떤 자는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근대적인 총기 한 자루 없이 노후화한 무기로 미국 총포에 대항했던 조선군….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W S 슐레이 소령의 <기함에서의 45년>, 1904년)

조선군은 무명천을 12~13겹 겹쳐 만든 ‘면갑옷’을 입고 싸웠다. 이 면갑은 화승총 같은 무기에는 나름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최신식 서양 무기 앞에서는 별무신통이었다. 한여름에 착용하기는 너무 더웠고, 또한 불에 약하여 뜨거운 납탄을 맞으면 쉽게 불타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미군은 조선 조정을 향해 “빨리 협상단을 보내라”고 겁박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무시하면서 항전의지를 불태웠다. 미국무부는 결국 아시아 함대에게 전문을 보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거든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결국 미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철수하고 만다(7월3일).

당시 미국내 여론은 신미양요를 ‘실패한 전쟁’으로 규정했다.

“조선-미국간 소규모 전쟁은 미국의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이 사건은 열강인 미국의 국제적 체면을 손상시켰다. 조선의 개항을 더욱 희박하게 만들었다.”(‘뉴욕데일리 트리뷴’)

1878년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 해군문제위원장인 애런 사전트 상원의원은 미 의회에서 “조선군이 미국 침략군에게 발포한 것은 정당방어였다”고 규정했다.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나라라도 미국해역에 들어와 제임스 강을 측량하고 탐사한다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비수교국인 조선해역에 들어가 탐측한 미군 함대의 짓은 명백한 침략행위라 규정할 수 있다.”

신미양요를 다룬 미국의 주간지 ‘하퍼 위클리’ 1871년 9월9일자. 뉴욕에서 발행됐다. 미국은 신미양요를 ‘Corean War’라 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수교후 얼굴 바꾼 미국

미국은 그렇게 당초의 목적(조선 개항)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지만 9년 뒤(1882년) 가장 먼저 조선과 통상 조약을 맺은 서양국가가 되었다. 일본과 청나라를 오가며 지극정성 공을 들인 끝에 마침내 조선개항을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곧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짐은 있었다.

즉 통상 조약을 위한 미국전권대표인 로버트 슈펠트(1822~1895)가 교섭 과정에서 “조선은 가난한 나라다. 현재로 보나 미래로 보나 상업적인 이해관계는 미미하다”고 토로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조선과 수교하려 했을까. 슈펠트는 “조선이 여러 나라로 가는 대양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미국은 극동에서 기항지(寄港地)를 얻기 위해 조선과의 수교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곧 바뀌었다. 선박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일본을 경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게 됐다. 일본의 간교한 외교도 한몫했다.

미군은 전투에서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조선을 개항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아무런 소득없이 철수했다. 흥선대원군(1820~1898)은 전국 각지에 ‘서양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을 의미하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洋夷侵犯 非戰즉和 主和賣國)’이라는 척화비를 세웠다.

■미국을 짝사랑한 결과는?

반면 조선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결사항전 의지로 전쟁까지 벌이며 문을 닫아 걸었던 10여년전과 달리 조선은 미국을 ‘메시아’로 여겼다. 1882년(고종 19년) 맺은 조미 통상조약의 제1조가 다름아닌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는 ‘거중조정 조항’이었다. 조선이 남의 나라로부터 간섭이나 침략을 받을 때는 미국이 적극 나선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적국에서 ‘아름다울 미(美)자’ 미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대인배의 나라’라던 미국은 조선을 위해 한번도 나서주지 않았다. 청·일전쟁(1894~95)과 러·일전쟁(1904~05)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일본을 지지함으로써 조선(대한제국)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수호통상조약문. 제1조는 3국이 조선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키면 미국이 자동개입해서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결국 1905년 7월29일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가쓰라-테프트 조약까지 맺는다. 그로부터 넉달도 안된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교 단절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당시 고종의 특사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미국을 방문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가 분통을 터뜨린다. “미국은 한국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제일 먼저 저버렸다.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삿말도 없이….”

꼭 150년 전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 300여 명이 피를 흘렸던 강화도에서 내려지고, 결국 미군의 전리품이 된 ‘수자기’에는 이러한 우여곡절이 담겨있다.

1905년 7월 29일 미국 국방장관 월리엄 태프트(오른쪽)가 일본수상 가쓰라 타로(桂太郞·왼쪽)와 이른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맺었다. 밀약은 ‘미국과 일본 양국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각각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넉달도 안된 11월17일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다. 그런데 가장 먼저 주한공사관을 철수한 국교 단절 국가가 바로 미국이었다.

신미양요 150주년을 맞아 한·미관계를 돌이켜본다. 전쟁까지 치렀다가(1871년) 어느 날 간이라도 빼 줄 것같은 우방이 되었지만(1882년) 또 갑자기 언제 보았냐는듯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갔다가(1905년), 다시 구세주처럼 나타나 혈맹이 됐다(1950년).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고, 자국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외교가 아닌가. 어떤 나라를 상대하든 지나친 일변도 외교나 짝사랑 외교는 금물이라는 교훈을 다시 얻게 된다.

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때 빼앗긴 ‘수자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들이 반환 대상 한국문화재가 아니라 미군의 ‘전리품’ 목록에 올라있다는 것이다. ‘수자기’ 등이 미군의 전리품으로 규정되는 한 150년 전 미국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흑역사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미국이 빼앗아간 수자기가 과연 전쟁으로 얻은 전리품이 맞냐는 본질적인 질문이 나올 수 있다. 1871년 6월 벌어진 조선과 미국간의 충돌을 ‘신미양요’라 하지 않던가. ‘양요(洋擾)’는 문자 그대로 서양인의 침입으로 일어난 소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 입장에서 수자기 등은 소요를 일으킨 미국인들이 가져간 약탈품으로 처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사 작성에 김병연 문화재청 국제교류과 행정사무관과, 2007년 장기대여 때 실무를 담당한 최종덕 당시 문화재청 국제교류과장의 도움이 컸습니다.)(3)

<참고자료>

국립고궁박물관, ‘수자기-136년만의 귀환’(특별전 도록), 2008

신복룡, ‘신미양요의 전개와 역사적 의미’, <어재연 장군과 신미양요의 재조명>(어재연 장군 순국 및 신미양요 150주년기념 학술회의), 전쟁기념관.어재연장군 추모 및 신미양요 기념사업회, 2021

토머스 듀버네이, ‘신미양요-1871년 조선에서의 미국 군사행동’,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2021

강신엽,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 형제와 참전군 연구’,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2021

박제광, ‘신미양요 당시 조선의 강화도 방어체제와 무기’, 신미양요 150주년 학술대회, 2021

김병연, ‘전쟁으로부터 문화재 보호의 게으르지 않은 역사’, 6·25전쟁과 문화유산 보존’ 학술심포지엄, 국립고궁박물관, 2020

김원모편, ‘틸톤의 강화도참전수기’, <동방학지> 31권, 연세대국학연구원, 1982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개화세력은 일본을 조선 발전의 모델로 선택…문명개화·자주독립 명분으로 군사정변 시도

입력 2023.05.01 10:00 수정 2023.05.01 10:00 생글생글 799호
(140) 미완의 혁명 갑신정변 (上)
갑신정변이 첫 발생한 우정총국 건물.
 
전근대 한국은 내부 모순이 폭발 직전까지 축적됐어도 혁명을 유발할 요인은 부족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릴 능력을 갖춘 자연 재앙과 외부 침략이 거의 없었다. 구성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조직적으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도시는 부족했고, 혈연 중심의 향촌 공동체로 구성됐다. 특히 조선은 체제 유지를 절대가치로 표방한 성리학과 모든 권력을 그물망처럼 장악한 유림 집단 때문에 혁명의 발생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근대로 들어오는 개화기의 제2단계 과정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훗날 혁명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 임시정부는 이 정변을 ‘갑신혁명당의 난’으로 정의하면서 ‘혁명’으로 평가했다.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지금 종로의 조계사 옆인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연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소수 개화당원이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요청과 ‘자주독립’을 명분으로 군사정변을 시도한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선언하고, 강령 등 실천 방법까지 선포한 갑신정변은 청나라의 군사력에 패배해 ‘삼일천하’로 끝났다. 주도자들과 참여자들은 살해, 망명, 처형, 투옥, 유배를 당하고, 가족은 노비로 전락했다. 무려 500~600여 명이 참혹하게 희생당한 사건이다.

역사학자로서 궁금하고, 한 인간으로서 의아한 생각이 든다. 그들은 왜, 무엇을 위해 실패 위험성과 가족의 희생을 무릅쓰면서 ‘정변’을 계획했을까. 어떻게 학습하고 이론을 확립하고, 세력을 규합하며 훈련했을까. 왜 미숙했다고 비판받은 방식으로 추진하고 참혹한 실패를 겪었을까.

먼저 그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자각시킨 조선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은 2번에 걸친 ‘양요(프랑스 및 미국 군함의 침공)’를 거친 뒤 1876년 일본과 최초의 근대 조약을 맺으면서 비자발적으로 개항했다. 이어 심해지는 내부 모순과 개화 과정의 혼란 속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했고, 결국 청나라 및 서양과 불평등한 근대조약을 맺으면서 타율적으로 세계 체제의 일원으로 편입됐다. 중국 중심의 책봉 체제와 중화론에 안주하던 조선은 질서의 근간이 흔들렸고, 서양 문물을 우위로 한 신세계의 도래는 불가피했다. 그런데도 조선 사회엔 자주가 위협당하고, 혼란이 도래한다는 위기의식이 약한 듯했다. 개화파는 서양 문물을 이해했으므로 개방에 적극적이었으며, 내부 모순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했고 개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갑신정변으로 표방된 그들의 개혁 목표는 김옥균이 집필한 <갑신일록>에 기록된 14개 조항에서 추측할 수 있다. 문벌 폐지와 인민의 평등권, 능력 중시의 관리 선발, 토지세금법 개혁, 간악한 부패 관리들의 근절, 곡식 대여제도의 영구 폐지 등은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사회제도, 부패 등의 내부 모순을 해결하는 사회개혁이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에 눈뜨고, 새 세상의 구현이라는 사명감을 자각한 이상주의자들은 어떤 과정과 계기를 통해 이런 세계관과 사회의식을 갖게 됐고, 현실에 관철하려 했을까.

개화파는 북학파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1876년 직후부터 일본에 파견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일본은 개항 후 30년 만에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에 성공한 근대국가였다.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뒤 입헌체제를 구상했고, 1870년부터 평민도 성을 허용했다. 1871년에 신분 해방령을 선포했고, 1872년에는 국민이 초등교육을 받게 했으며, 1873년에는 징병령을 발표해 평민의 입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1877년 유신의 반동세력인 무사 출신과 서남 전쟁을 치른 뒤에는 자유민권 운동도 활발해졌다. 또한 영국에서 차관을 도입해 도쿄에서 요코하마 구간에 철도를 건설했고, 각종 분야에서 근대산업을 발전시켰다. 이 무렵인 1871년 11월 신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유럽 사절단은 1년10개월 동안 12개 나라를 순방하고 1873년 9월 귀국해 국가 개조에 필수적인 대규모 보고서를 제출했다. 일본의 개화파는 근대 서구 국가를 모델로 삼고, ‘탈아론(脫亞論)’을 바탕으로 ‘문명개화’ ‘부국강병’을 성공시켰다(성희엽 <조용한 혁명>). 따라서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박영호·서광범·서재필 등의 개화 세력은 일본을 조선 발전의 모델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개화파는 북학파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1876년 직후부터 일본에 파견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일본은 개항 후 30년 만에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에 성공한 근대국가였다. 일본의 개화파는 근대 서구 국가를 모델로 삼고, ‘탈아론(脫亞論)’을 바탕으로 ‘문명개화’ ‘부국강병’을 성공시켰다. 따라서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박영호·서광범·서재필 등의 개화 세력은 일본을 조선 발전의 모델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4)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일본과 협력해 일으킨 정변 '삼일천하'로 끝나…근대 사상의 탄생·근대인의 출현에 공헌 평가

입력 2023.05.08 10:00 수정 2023.05.08 10:00 생글생글 800호
(141) 미완의 혁명 갑신정변(下)
갑신정변 직전 개항지인 제물포에 1884년 11월 14일 세워진 우체국 건물. 한경DB
 
개화파는 학습, 견학, 이론 구축, 정책 제정과 실천 등 많은 작업을 단기간에 추진했다. 주역인 김옥균은 1875년 전후부터 개화 세력을 규합했다. 1879년에는 개화승인 이동인을 일본에 파견해 근대화 상황을 관찰하게 했고,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주선했다. 1881년 음력 12월에는 일본을 방문해 개혁정치의 과정과 결과들을 참관하고, 실력 있는 정치가들과 접촉했다. 이때 ‘탈아론’의 주창자인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 생각을 교류하면서 정보를 구하고 조언을 받는다.

귀국 도중인 7월 시모노세키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한 사실을 들었던 그는 중요한 관직에 진출하면서 개화파 세력을 꾸준히 확장했다. 박영효는 임오군란 직후인 1882년 8월 3차 수신사로 파견되면서 개화파인 서광범 등을 대동했다.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영향력 있는 정치인, 서양 외교관들을 만나면서 조선의 문명개화를 결심했다. 이때 김옥균도 일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체류하면서 <치도약론(治道略論)>을 저술했다. 또 조선 유학생들을 파견하게 해서 일본 학교에 입학시켰다.

김옥균은 1883년 3월 귀국한 뒤 프랑스를 모델로 삼아 박영효 등과 적극적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신분제 폐지 등의 사회제도 대개혁과 산업 발전, 학교 설립과 국방 및 경찰력의 증강과 정비, 신앙의 자유 등의 ‘대경장개혁’을 목표로 삼았고, 조선의 중립화라는 국가 정체까지 제시했다. 하지만 임오군란은 결국 개혁파들의 주장 실현과 정책 구현을 방해했다.

청국은 정권 장악 후 조선의 속방화 작업을 추진하면서 친일적이며, 자주성을 표방한 개화 세력을 적으로 간주하고 개혁을 방해했다. 또 척결의 대상인 민씨 수구파는 물론이고, 발전 모델을 청나라의 양무운동으로 설정한 온건 개화파도 적대관계로 변해갔다. 일본에 국채를 모집하러 갔다가 실패한 뒤 1884년 4월 귀국한 김옥균과 개화파는 결국 ‘위로부터의 대개혁’이라는 명분을 갖고 거사 즉 혁명을 준비했다.

때마침 1884년 봄부터 프랑스가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자 청나라와 프랑스 간에는 전쟁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5월 23일 청나라는 1500명의 병력만 남기고 철수했다. 이어 8월 들어 청나라가 패배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자 개화당은 청국이 군사행동을 못할 것으로 추정, 9월(음력 8월)을 거사 시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10월 30일 귀환한 일본공사에 거사 계획을 알리면서 공동작전을 제의했다. 공사관 병력 150명과 300만엔을 빌려주겠다는 구두약속을 받았으며, 일본은 군사행동에만 협력하며 수구파 제거와 내정 개혁 등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동의까지 얻었다.

조선 최초의 우체국 총판을 지냈고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정변 당시 사망한 홍영식의 동상.
 
12월 4일. 개화당은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장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고종의 신병을 확보한 뒤 곳곳에서 수구파의 거물들을 처단하고, 다음날인 5일에는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당 요인과 고종의 종형인 이재원 등 종친이 참여한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외교관을 불러 신정부의 수립을 알리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의사를 전달했다.

또한 정강을 제정하고 6일 오전 9시경 이를 한양의 요소에 붙였고, 오후 3시에는 고종이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이 시각 청군은 1500명으로 궁궐을 공격했고,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된 개혁군과 일본군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홍영식·박영교 등은 청군에 살해됐다.

개화당과 갑신정변은 모델로 삼았던 일본의 침략과 일부 인사의 친일행위로 인해 오해받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관직·토지·사상 등을 지키려는 유림(위정 척사파), 토지와 일상의 삶을 고수하는 백성(농민)과 달리 기득권과 가족까지 포기하면서 전체를 위한 개혁과 개화를 실천한 이상주의자였다. 또 갑신정변은 근대 사상의 탄생, 근대인의 출현에 공헌이 큰 미완의 혁명이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 번에 성공한 혁명도 없지만, 재시도되지 않은 혁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을 규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 기억해주세요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12월 4일. 개화당은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의 낙성식 축하장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고종의 신병을 확보한 뒤 곳곳에서 수구파의 거물들을 처단하고, 다음날인 5일에는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당 요인과 고종의 종형인 이재원 등 종친이 참여한 신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외교관을 불러 신정부의 수립을 알리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의사를 전달했다. 또한 정강을 제정하고 6일 오전 9시경 이를 한양의 요소에 붙였고, 오후 3시에는 고종이 정강의 실시를 선언하는 조서를 내렸다. 하지만 이 시각 청군은 1500명으로 궁궐을 공격했고,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된 개혁군과 일본군은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다.(5)
 
 
 
 
 
 
 
 
<주>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