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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국/조선

조선(8) - 조선 후기

대야발 2024. 5. 30. 10:28

 

 

노론-식민사관 사대주의와 인맥 연결됐다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⑨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

  • 수정 2009-07-08 15:04 등록 2009-07-08 15:04
탑골(파고다)공원 전경. 조선 후기 이 일대에는 백탑파라 불렸던 박지원

 

한국 주류 사학계의 고대사 인식이 일본 식민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면 조선 후기사 인식은 노론사관에 깊게 경도되어 있다. 몸은 21세기에 살지만 역사관은 일제와 조선 후기 노론에 두고 있다는 뜻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이 같을 뿐만 아니라 인맥으로도 서로 연결된다. 노론의 뿌리는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이다.

일제 가담 노론 출신 일부 학자들조선사편수회 거쳐 사학계 주류로‘상공업 중심 개혁론=노론’ 왜곡 등조작된 국사교과서 바로잡을 필요

 

서인은 국왕 축출의 명분이 필요하자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진정한 임금인 명나라 황제를 배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쿠데타가 명 황제에 대한 충성이란 논리였다. 서인들은 인조반정 때 체제 내 야당으로 끌어들였던 남인들에게 뜻밖에도 2차 예송논쟁으로 정권을 넘겨주어야 했다.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으로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들은 남인들을 역모로 몰아 도륙했다. 죄 없는 남인들을 역모로 꾀어 죽인 정치공작에 반발한 서인 소장파가 소론이 되고, 당을 위한 행위라고 옹호한 서인 노장파가 노론이 된다. 노론은 경종 때 소론에 잠시 정권을 빼앗겼던 것을 제외하고는 조선 멸망 때까지 정권을 장악했다. 조선 말 노론 일부 세력은 외세에 맞서 성리학 사회를 수호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에 가담했지만 다른 일부는 일제에 협력해 망국에 가담했다. 이런 노론 출신 일부 학자들이 일제 때 조선사편수회를 거쳐 해방 후에도 한국 사학계 주류가 됨으로써 국민들은 여러 그릇된 역사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덕무 등의 지식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노론 뿌리 이이 ‘십만양병설’은 허구

 

몇 가지 예만 들어보겠다. 현재 국민적 상식 중의 하나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다. 한때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었고, 현재도 일부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다. 이는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이병도 박사가 1948년 발간한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에 싣고 그 제자들이 국사 교과서에 기재함으로써 국민적 상식이 된 내용이다. 그 요체는 ‘임란 전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창했으나 선조는 말이 없고 유성룡까지 반대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병도는 <조선사대관>에서 “양병십만론의 연월은 미상(未詳)하나 그의 문인 김장생(金長生) 소찬(所撰)의 율곡행장 중에 적혀 있으니 설령 그의 만년의 일이라 할지라도 임란 전 10년에 해당한다”고 서술했다. ‘연월이 미상한데’ 어떻게 ‘임란 전 10년’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을까? 십만양병설은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는 일언반구도 없다. 인조반정 후인 효종 8년(1657)에 서인들이 작성한 <선조수정실록> 15년 9월 1일자에 사관의 논평으로 “이이가 일찍이 경연에서” 이를 주장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1548~1631)의 행장을 보고 쓴 것이다. 십만양병설은 애초 연월 미상이었으나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율곡연보’에서 ‘선조 16년(1583) 4월’, 즉 임란 발생 10년 전의 일이라고 정확히 특정했다. 후대에 갈수록 날짜가 더 정확해지는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글에서 실제로 임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이문성(李文成: 이이)은 진실로 성인이다(眞聖人也)’라고 탄식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이란 시호를 받은 인조 2년(1624)은 유성룡이 사망(1607)한 지 이미 17년 후였다. 사후 17년 후에 생겼던 문성이란 시호를 유성룡이 사용했다는 기록 자체가 조작이라는 증거이다. 임란 10년 전인 선조 16년 4월 이이는 병조판서였다. 이이는 선조 16년 2월 “양민(養民)을 하지 않고서 양병(養兵)을 하였다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백성들이 군역과 공납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을 우려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힘든 군역과 수월한 군역을 맡은 자를 서로 교대시켜 도망을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성들이 군역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창할 수는 없었다.

십만양병설의 가장 큰 문제는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된 것처럼 기록한 데 있다. 서인 영수 이이의 선견지명을 남인 영수 유성룡이 반대해 전란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잠곡 김육이 쓴 ‘이순신 신도비’에는 이이와 유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이와 유성룡은 당파를 초월해 국사에 협력할 수 있는 사이였으나 당심(黨心)에 찌든 이이의 제자들이 십만양병설을 창조해 그 무산 혐의를 유성룡에게 뒤집어씌우고 둘 사이를 이간질했던 것이다.

김장생은 또 ‘정철 행록’에서 정여립의 옥사 때 ‘유성룡이 위관(委官: 수사책임자)을 맡아 이발의 노모와 어린아이를 죽였다’고 기록하면서 ‘정철이 유성룡에게 왜 노모와 아이까지 죽였느냐’고 따졌다고까지 적었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형벌을 받은 날짜는 선조 23년(1590) 5월 13일인데, 유성룡은 그해 4월부터 휴가를 얻어 안동에 내려갔다가 5월 20일에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를 군위에 장사지내고, 5월 29일에 우의정에 제수되어 6월에 서울로 올라와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죽을 때 유성룡은 서울에 있지도 않았다. 정여립의 옥사 때 위관을 맡은 인물은 유성룡이 아니라 정철이었다. 북인들이 편찬한 <선조실록>은 정여립의 옥사 자체를 서인 정철 등이 동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꾸민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실제 그랬는지는 더 연구해야 할 주제지만 정철이 정여립의 옥사 때 위관을 맡아 수많은 동인들을 죽인 것은 사실이다. 김장생은 정여립 사건으로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죽은 데 대한 비난 여론을 유성룡에게 전가하기 위해 사실을 날조했던 것이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다”(103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필자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년) 등의 저서는 차치하고라도 송시열이 효종의 정적이었음을 입증하는 사료는 너무나 많다. 효종 8년(1657) 올린 <봉사>(封事)에서 “전하께서 재위에 계신 8년 동안 세월만 지나갔을 뿐 한 자 한 치의 실효도 없었습니다…. 망할 위기가 조석에 다다랐습니다.”라고 효종의 치세를 전면 부인한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송준길은 사사건건 효종의 발목을 잡았던 효종의 정적이었음에도 국사 교과서는 효종의 충신이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송시열이 현종 말~숙종 초의 2차 예송논쟁으로 실각하자 사방에서 송시열이 효종의 역적이란 상소가 빗발쳤다. 급기야 송시열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횡행하자 예송논쟁 때 그와 맞섰던 판부사 허목은 ‘죄인에게 형을 더하는 것을 반대하는 차자’(請勿罪人加律箚)를 올려 송시열의 사형을 반대했다. 그러나 허목은 이 차자에서 송시열을 중종 때 사형당한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비교하면서 “효종을 마땅히 서지 못할 임금으로 여겨 지존을 헐뜯고 선왕을 비방했다”며 마땅히 죽어야 할 죄가 셋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다만 뒤늦게 형량을 가중해 사형시키는 것은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효종의 ‘정적’ 송시열 충신 탈바꿈

국사 교과서는 또 조선 후기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 주창자들에 대해 “서울의 노론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다”며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고 서술했다. 이 기술에 따르면 유수원은 노론 출신이 되지만 유수원은 노론은커녕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 사건 때 노론에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였다. 노론에 의해 능지처참 당하고 온 집안이 도륙 난 인물을 노론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것이 국사 교과서 서술 구조이다. 남인들이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주창한 데 맞서 ‘상공업 중심 개혁론’은 노론이 주창한 것으로 둔갑시키려 한 노론 후예 학자들의 조작이었다. 청나라를 배우자는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는 노론에서는 나올 수 없는 사상이었다. 그 주창자인 홍대용·박지원은 현실에서 소외되었던 양반 사대부였고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은 모두 서자들이었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노론’이란 서술에 대한 지적이 잇따랐는지 2007년도 국사 교과서부터는 ‘노론’이란 말을 삭제했다. 그러면서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남인들이 주창했다는 사실도 빼버렸다.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대부분 서울 부근의 경기 지방에서 활약한 남인 출신이었다”(2003년)는 내용을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2007)라는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을 노론이 주도했다는 거짓 서술이 문제가 되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남인들이 제기했다는 ‘맞는 사실’까지 빼버린 것이다. 남인들만 실학을 주창한 것으로 써줄 수는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이런 식으로 교과서를 서술하니 국사 교과서가 흐름을 알 수 없는 누더기 조각이 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다양성의 가치관을 형성해야 할 미래의 주역들이 언제까지 사대주의와 폐쇄적 획일주의 속에서 과거 퇴행을 지향했던 노론의 가치관을 학습해야 하겠는가? 언제까지 국사 교과서의 일부가 일제 식민사학과 노론 당론 교재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을 방치해야 하겠는가? 국사 교과서 서술 체제에 대한 전사회적인 논의의 틀이 필요한 시점이다.(1)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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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신하, 백성을 이렇게 죽게 한 임금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0.06.02 06:00 수정 : 2020.06.0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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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숙종 45)에 숙종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계첩(契帖). 원래 기소로는 ‘정2품 이상의 문관에 70세는 넘어야 입소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태조(이성계)께서도 60에 기로소에 들어갔다’는 이유를 대며 기로소 입소를 강행했다. 이 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 기념으로 기로신(70세 이상의 정 2품 이상의 문신) 10명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인 뒤 제작한 화첩이다. 1720년 완성됐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숙종대왕 호시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조선조 숙종의 서거 300주년을 맞아 6월28일까지 개최하는 테마 특별전의 제목이다. ‘호시절(好時節)’은 말 그대로 ‘좋은 때’이므로 숙종의 치세가 그만큼 편안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숙종(재위 1674~1720)은 영조(52년·1724~1776년)에 이어 두번째로 긴 만 46년(재위 1674~1720) 조선을 다스린 군주다. 숙종은 특별전에서 소개하듯 교과서적인 의미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대동법, 백두산정계비, 상평통보…

숙종은 새롭게 개발된 농토 등 변화상을 반영하는 토지대장을 작성해서 국가재정을 확충했다. 또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대동법의 범위를 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넓혔다. 대동법은 국가에 납부할 세금을 쌀(혹은 무명이나 면포)로 통일한 제도다. 대동법에 따라 쌀로 일괄 납부하다보니 국가는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사들였고, 그에따라 상품유통이 활발해졌다. 보다 편리한 유통을 위해 화폐가 필요했고, 1678년(숙종 4년) 상평통보를 찍어냈다. 북한산성을 새로 쌓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워(1712년·숙종 38년) 조선-청나라 양국 국경을 명문화한 것도 특기할만 하다. 또 울릉도를 조선의 실질적인 영토 관리영역으로 포함시켰다. 숙종대에 설정된 국토경계는 지금까지도 강역의 기본틀이 됐다.

그러한 점을 평가한 것일까. 이번 테마전에서는 태조를 ‘창업의 군주’로, 숙종을 ‘중흥의 군주’로 꼽았다. 전란(임진왜란~병자호란)의 후유증을 실질적으로 치유하고 시대적 변화를 이끌어 조선 후기 중흥의 시대를 연 임금이라는 것이다.

제갈량을 그린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 숙종은 1695년 중국의 명재상 제갈량(184~234)을 주제로한 ‘제갈무후도’를 그릴 것을 지시한 뒤 이 그림에 직접 글을 지었다. 숙종은 이 글에서 제갈량과 유비의 만남을 현신과 명군의 만남으로 묘사하면서 신하들에게 충성심을 독려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40만명이 떼죽음 당했다

그러나 숙종은 과연 중흥군주였으며, 숙종이 지배한 조선의 46년이 ‘호시절’이었을까. 필자는 못내 마음에 걸린다. 16세기부터 시작된 소빙하기는 17세기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끊임없이 백성들을 괴롭혔다.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71년)에 이어 숙종 연간인 1695(을해년)~1696년(병자년) 사이에 덮친 ‘을병대기근’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699년 전국의 인구는 577만 2300명으로 집계됐다. 계유년(1693년)과 비교하면 141만 6274명이 줄었다. 을해년(1695년) 이후 기근과 전염병이 참혹했기 때문이다.”(<숙종실록> 1699년 11월16일)

1695년부터 99년까지 4년간 조선 인구의 20% 정도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얘기다. 배가 고파 인육까지 먹는 비참한 상황이 연출됐다. 민심이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1697년(숙종 23년) 경기 광주의 백성 수백명이 점거폭력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광주 백성들이 대궐 앞서 관리들의 출근을 막고 ‘먹을 것을 달라’고 호소했다…수어사(남한산성을 지키는 관리) 이세화(1630~1701)의 집에서 밤샘 점거농성을 벌이며 군관을 집단구타하고….”(<숙종실록>)

1712년 숙종의 명에 따라 축성된 북한산성을 그린 ‘북한지’(1745년). 수도방위를 위해 도성 인근에 쌓은 성이다. 천혜의 요새라는 명성에 걸맞게 북한산 깊숙한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요승 여환, 장길산, 검계, 명화적까지

요승 여환과 장길산, 명화적(떼강도), 검계(폭력조직)이 나타났거나 극성을 부린 것도 숙종 때였다.

“요사스러온 자(여환)가 자칭 ‘신령(神靈)’이라 일컫고 도당(徒黨)을 모아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고 있는데….”(<숙종실록> 1688년 8월1일)

여환에 퍼뜨렸다는 괴서에는 “9~10월 쯤 군사를 일으켜 도성에 들어가면 대궐 가운데 앉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1697년(숙종 23년) 장길산이라는 도적이 중국인 승려 무리와 결탁해서 조선과 중국에서 반역을 일으킨다는 소문도 횡행했다.

“운부라는 중국인 중이 장길산의 무리와 결탁해서…조선과 중국을 평정하여 정씨 성(조선)과 최씨 성(중국으로 왕을 세우겠다고 했답니다.”(<숙종실록> 1697년)

폭력조직인 검계가 들끓었고, 그들 가운데는 포도청 수감 중 칼로 가슴을 베는 등 자해공갈의 패악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었다.(<숙종실록> 1684년) 지금의 떼강도 격인 명화적 때문에 “장사꾼의 발길조차 끊어졌다”(<숙종실록> 1703년)고 토로하는 기사도 여럿 등장한다.

특별전에서 ‘숙종의 치적’으로 지목한 북한산성 축조도 달리 봐야 한다. 숙종은 1712년(숙종 38년) 4월 북한산성 수축 후 “이제 도적과 비도(匪徒)가 감히 다가올 수 없다”는 내용의 시를 읊었다. 여기서 ‘도적’과 ‘비도’라는 표현이 심상치 않다. ‘외부의 적’ 보다는 ‘내부의 적’을 근심한 나머지 북한산성을 축조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도그럴 것이 당시 외침(外侵)의 우려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17세기 후반 청나라 강희제(재위 1661~1722)의 치세가 안정적이었고, 조선과도 우호관계도 유지했다. 그런 정세를 반영해서 1702년(숙종 28년) 좌의정 이세백(1635~1703)은 “지금 남북에 근심이 없지만 도적이 치성하고 있으며, 천재가 심해 흉년이 들어 민심이 불안하다”(<비변사등록>)고 언급했다. 이상이변과 전염병, 사람고기까지 먹어야 했던 굶주림, 점거 농성 폭력 시위, 폭력조직인 검계와 떼강도인 명화적, 그리고 장길산까지…. 단 4년 만(1695~99년)에 무려 140만명이 떼죽음을 당했으니 오히려 민란이 일어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였다.

1678년(숙종 4년) 주조한 상평통보. 늘 똑같은 가치를 지니라는 뜻에서 ‘상평통보(常平通寶)’라 이름 붙였다.

■3번의 친위쿠데타…죽어나간 관리·선비들

그렇다면 숙종의 정치술은 어떨까.

“주상(숙종)은 평소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나라의 화가 됨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이것은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현종비·1642~1683)가 중전(인현왕후·1667~1701)에게 귀띔해준 아들의 들쭉날쭉한 성격이다. 과연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걸핏하면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3번이나 정권을 바꿨으니 말이다. 요약하자면 1680년 경신환국(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교체)→1689년 기사환국(희빈 장씨의 중전 책봉과 남인정권 재등장)→1694년 갑술환국(인현왕후의 복위와 서인 정권 재등장) 등…. 이 3번의 친위쿠데타, 즉 ‘환국’ 정치를 두고 혹자는 숙종의 노련한 정치전략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명성왕후의 말마따나 ‘희로의 감정이 느닷없이 분출되는’ 죽끓는듯한 성격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학자·정치인·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는가. 과연 이 시대를 ‘호시절’이라 할 수 있을까.

1712년(숙종 38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명문화하면서 세운 백두산정계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놓고 부인 흉 본 못된 남편

그 뿐인가. 못된 남편(숙종) 때문에 부인들이 줄줄이 핍박 당했다. 남편 때문에 먼저 피눈물을 흘린 이는 인현왕후와 귀인 김씨(영빈 김씨·1669~1735)이다. 만 14살의 나이로 숙종의 두번째 정부인이 된 인현왕후 민씨(1667~1701)는 서인 민유중(1630~1687)의 딸이었다. 자연히 서인 정권의 후원을 받았다. 그런데 남편인 숙종이 궁인 장옥정(희빈 장씨·1659~1701)와 사이에 아들을 낳자 상황이 급변했다. 9년간 계속된 서인정권에 슬슬 염증을 느낀 차에 남인의 후원을 받던 장씨가 귀한 왕자를 생산했으니 시쳇말로 눈이 뒤집힌 것이다. 기사년인 1689년(숙종 15년) 새해 벽두부터 숙종은 갓 태어난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고 혈안이 됐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 등은 “정비(인현왕후)의 춘추가 아직 젊으니 더 기다려서 적자를 계승자로 삼아야 한다”고 반대했다. 숙종은 이때 정권을 서인에서 남인으로 전격 교체한다.

이 무렵 숙종은 군주의 자질을 의심케하는 언행을 일삼는다. 대놓고 부인을 흉본 것이다.

“희빈(장씨)이 처음 숙원(내명부 종4품)이 되자…중전(인현왕후)이 나에게 꿈 이야기를 말했다네. 꿈에 선왕(현종)과 선후(명성왕후)를 뵈었는데…두 분이 ‘숙원(장씨)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래 궁중에 두었다가는 반드시 경신년(1680년 경신환국) 뒤에 뜻을 잃은 사람(남인)들과 결탁해서 망측한 일을 만들어낼 것’이라 했다는군.”(<숙종실록> 1689년 4월21일)

숙종은 이어 “중전이 질투하는 마음에 나를 공갈하니…그 간교하고 앙큼함은 폐간(肺肝)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에 서인 정권을 쫓아내고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되찾은 남인계 신하들마저 숙종의 ‘부인 험담’에는 반기를 들었다. “부부의 불화를 자식같은 신하들에게 털어놓는 이유가 뭐냐” “중전께서 국모로 계신지 10년이 되도록 무슨 실덕(失德) 있었기에 이런 하교(험담)를 내리시느냐”는 것이었다.

1667년(현종 8년) 숙종을 왕세자로 임명할 때 제작한 옥인과 죽책, 죽책을 담은 함이다. 숙종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유일한 적장자로서 임금이 됐다. 숙종은 조선조 27명의 임금 가운데 적장자로 왕위를 이은 7명 중 한사람이다. 숙종은 이러한 완전한 정통성을 바탕으로 철권을 휘둘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버선발로 쫓겨난 부인

그러나 숙종은 중전과 가까운 귀인 김씨(서인 김수항의 종손녀·1690~1735)마저 ‘험담의 도마’에 올렸다.

“아 글쎄. 내가 대신들과 나눈 이야기를 적은 쪽지를 놓아두었는데, 귀인이 그것을 소매 속에 감추었다가 들켰다네. 내가 ‘왜 그랬냐’고 하니까 귀인이 ‘버리는 휴지인줄 알았다’고 변명하더라구.”

숙종은 “이번 일이 우연이 아니며 국가에 반드시 화난이 있을 것”이라고 침소봉대했다. 숙종은 일사천리로 중전의 폐위절차를 진행했다. 4월22일 중전과 친한 귀인 김씨를 우선 폐출시켰다. 마침 23일인 중전(인현왕후)의 탄신일이었는데, 숙종은 중궁전에 들어온 생일선물까지 “내치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루라도 국모의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페출 전교를 내렸다. 3일 뒤인 26일에는 날마다 중전에게 들이던 음식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굶으라는 얘기였다. 뭐 이런 박정한 남편이 있단 말인가.

1689년(숙종 14년) 5월4일 중전 민씨(인현왕후)가 친정으로 쫓겨났다. 민씨가 친정으로 돌아갈 때 유생 수백 명이 길 아래에 엎드려 통곡했다. 중전 민씨의 폐출 장면을 생생한 필치로 소개한 <인현왕후전>은 “상감이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흰 명주보로 덮은 보통의 가마가 서둘러 내전에 들어갔는데, 왕후께서 벌써 내려와 걸어왔다”고 기록했다. 가마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버선발로 부인을 내쫓은 못된 남편이었던 것이다. 숙종은 폐위교서에서 “왕비 민씨는 원래 화순한 성품이 부족하고 조신한 덕이 적었다”면서 “책봉되던 때부터 조심하고 삼가지 않았고, 질투하는 허물이 많았다”고 했다.

숙종이 북한산성을 짓기로 결정한 뒤 지은 시와 이듬해 북한산성에 행차하여 완성된 성곽을 둘러보며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북한산성은 숙종이 구상한 도성중심 방어체제의 핵심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남편 탓에 평생 속이 문드러진 인현왕후

폐비 민씨의 생활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1690년(숙종 16년) 9월 정언 송정규(1656~1710)는 상소문에서 폐서인이 되어 쫓겨난 인현왕후의 불쌍한 하루하루를 고발한다.

“폐비가 집으로 돌아간 뒤로 친척과 이웃에서도 감히 문안하고 왕래하지 못합니다. 문을 잠가서 뜰에 풀이 가득하고 적막하며 양식과 땔나무가 군색한 것은 참으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숙종실록>)

남인 정권의 실세들조차 “민씨를 별궁에 모시고, 달마다 녹봉 형식의 쌀을 주면 성상의 덕이 빛날 것”이라고 간청했다. 여기서 못된 남편의 면모가 다시 유감없이 발휘된다.

처음엔 “그러자”고 허락했다가 곧 그 명을 취소한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안되겠다. 죄악이 가득차서 폐출한 지 반 년도 안되는 폐비를 대우했다가는 뜻을 잃은 무리(서인)가…‘옳다구나’ 하면서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숙종실록> 1689년 9월24일, 10월18일)

이 정도로 박정한 남편이었으니 인현왕후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인현왕후는 폐위 5년 만인 1694년(숙종 20년)에 복위의 꿈을 이뤘지만, 변덕스런 남편을 향한 분노의 마음을 쉬이 풀지 않았다. 그해 4월9일 숙종은 폐출된 중궁(인현왕후)의 무죄를 밝히며 별궁으로 모시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숙종은 자신의 어찰을 인현왕후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죄인이 어찌 외부 사람을 만나 어찰을 받겠느냐” “죄를 지은 아내가 답장을 올릴 수 없다”면서 거듭 복위를 사양했다. 인현왕후가 고집을 꺾고 대궐로 돌아와 임금을 알현할 때도 “죄인이 무슨 낯으로 전하를 뵙겠느냐”고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다. 숙종이 친히 가마문을 열어 주렴을 걷은 뒤에야 왕후가 내려왔다. 왕후의 예절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달리보면 남편을 향한 분노감과 복수심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현왕후는 시름시름 앓다가 복위된지 7년 만에 승하하고 만다. <숙종실록>은 숙종의 말을 빌어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탓에 죽었다는 뉘앙스로 기록한다.

하지만 과연 희빈 장씨의 책임이 100%일까. <승정원 일기>등에 따르면 승하한 인현왕후의 병명은 옹저였다. <동의보감>은 “기가 막혀 생기는 옹저는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생기는 병”이라 풀이했다.

돌이켜보면 만 14살에 왕비가 된 이후 아들을 생산하지 못했고, 22살에 폐위됐으며 27살에 복위된 이후 불과 7년을 더 살았다. 궁궐로 들어온 14살 이후 20년 내내 느꼈을 불안감, 분노, 억울함 등이 겹쳐 발병했고, 그 때문에 승하한 것으로 여겨진다.

‘팔춘도첩’, 태조가 타던 말 여덟 마리를 그린 그림과 관련된 글을 모아 엮은 화첩이다. 숙종은 세종 대 안견이 그린 팔준도가 소실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새로 그리게 하고, 직접 글을 지어 태조의 업적을 되새겼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반대파들까지 “너무하십니다” 동정

그렇다면 희빈 장씨의 삶은 어떨까. 장씨는 인현왕후가 쫓겨난지 불과 4일만인 1689년(숙종 15년) 5월6일 꿈에 그리던 중전이 된다. 그러나 희빈 장씨, 즉 새로운 중전을 향한 숙종의 사랑은 5년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1693년(숙종 19년) 숙원 최씨(훗날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가 책봉된 것이다. 숙종의 마음은 이제 최씨 쪽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1694년(숙종 20년) 3월29일 숙종은 “중전 장씨의 오빠 장희재가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고변을 듣게 된다.(<숙종실록>) 숙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남인들을 쫓아내고 서인들을 복관시킨다. 이것이 남인정권에서 다시 서인정권으로 복귀시킨 이른바 ‘갑술환국’이다.

중전 장씨도 급전직하한다. 고변 사건(3월29일) 이후 10여 일이 지난 4월12일 사가로 쫓겨났던 인현왕후를 다시 중전의 자리로 복귀시킨다.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아무리 임금이 제멋대로 하는 지존이라지만 5년 전 본부인을 무자비하게 내쫓고 서둘러 중전으로 올린 여인을 불과 5년 만에 다시 내쫓다니….

“왕비 민씨는 단장(端莊)하여 예법을 지키고 정정(貞靜)하여 아름다움을 지녔다.”(<숙종실록> 1694년 6월1일)

인현왕후를 복위시킨 숙종의 반성문을 보면 기가 찬 노릇이다. 언제는 ‘부덕하고 질투심이 많은 칠거지악의 여인’이라며 쫓아냈다가 이제와서는 ‘예법을 잘 지키고 아름다움을 지닌 왕비’라고 치켜세우다니….

여기서 다시 숙종의 못된 버릇이 또 나온다. 5년전 인현왕후를 험담하던 숙종이 이번에는 희빈 장씨를 천하의 몹쓸 여자로 폄훼한 것이다. 1701년(숙종 27년) 9월 25일 숙종이 ‘희빈 장씨의 자진(自盡)’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렸다. 그러자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 중 대부분의 대소신료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결정한 뒤) 끝없는 후회가 있었는데 지금 전하의 처분도 순간적으로 격분한 감정에서 나온 명령이 아니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대부분의 신료들은 “세자의 어머니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역대 국왕의 글씨를 모은 <열성어필> 중 숙종의 어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희빈 장씨의 일갈, “정치 똑바로 하세요.”

그러자 숙종의 못된 버릇이 나온다. 이번에는 희빈 장씨의 흉을 보기 시작한다.

“이 사람(장씨)은 (희빈으로 강등된 후) 한번도 중전(인현왕후)에게 문안을 올리지 않았다네. 왕후에게 혹은 ‘민씨(閔氏)’, 혹은 ‘민가(閔哥)’, 혹은 ‘요사스런 사람’으로 일컫기도 했네.”

신료들은 “그렇다고 이런 깊은 밤중에 ‘종이 한 장’(비망기)으로 세자의 어머니(희반 장씨)를 죽이려 하느냐”고 ‘워~워~’를 당부했다. 그러나 숙종은 “그 뿐이냐.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할 목적으로) 신당(神堂)을 대궐 안팎에 몰래 설치하고 흉악한 물건들을 묻고는 2월부터 기도했다”고 험담을 이어간다.

어찌 그렇게 5년전 인현왕후의 폐출 때와 똑같은 장면이란 말인가. 그런데 인현왕후는 폐서인으로 끝났지만 희빈 장씨는 끝내 자진하고 만다. 인현왕후의 일대기인 <인현왕후전>을 보면 사약을 내동댕이 친 희빈 장씨에게 전 남편(숙종)의 한마디는 모질기 이를데 없었다.

“네 얼굴을 보기가 더러워 약을 보내니…. 이 약은 네게는 상인줄 알고….”

그러면서 숙종은 희빈의 입을 강제로 벌린 채 세 사발이나 되는 사약을 들어부었다. 숙종은 본부인마저 버선발로 쫓아내면서까지 그토록 사랑했던 새 부인(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먹이면서 이렇게 재촉했다.

“빨리 먹이라!”

희빈 장씨의 마지막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전하께서 밝은 정치를 펼치지 않으니 임금의 도리가 아닙니다.”

<인현왕후전>의 필자는 “장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불쌍한 감정을 갖게됐지만 주상(숙종)께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도 갖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참으로 비정한 남편이 아닌가,

■중전이 될 수 없었던 숙빈 최씨와 귀인 김씨

따지고보면 어디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뿐인가. 인현왕후와 함께 폐출됐다가 갑술환국으로 복위된 귀인 김씨(훗날 영빈 김씨) 역시 더는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는 “인현왕후가 승하하기 전 숙종에게 ‘내가 죽거든 희빈 장씨를 복위시키지 말고 귀인 김씨를 왕비로 세우라’는 청을 올렸다”고 전한다. 숙종의 총애를 얻어 연잉군(훗날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1670~1718) 역시 중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숙종이 희빈 장씨의 죄를 물으면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숙종실록> 1701년)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놓고는 1702년(숙종 28년) 당시 15살의 인원왕후(1687~1757)를 세번째 정부인으로 맞이했다. 이 무슨 억하심정인가. 숙종은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그리고 남편의 사랑을 차지하려 했던 여인들 모두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사실 문헌자료와 역사서의 한 부분만 보고 전체 역사를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국립고궁박물관의 태마전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전체 조선의 역사를 정리하는 측면이라면 숙종 치세의 평가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법 확대실시와 백두산정계비 등과 같은 숙종의 업적은 당연히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각종 문헌자료와 <숙종실록>에서 정리되지 않은 당대의 생생한 이야기들도 있다. 필자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쯤에서 다시한번 묻고싶다. 숙종은 조선의 중흥군주인가, 숙종의 치세는 호시절이었는가.(2)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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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피난처, 북한산성에 왜 금괴 매장설이 퍼졌을까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2.05.03 05:00 수정 : 2022.05.03 09:45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두 성을 잇는 탕춘대성까지 모두 표현된 <동국여도> 중 ‘도성연융북한합도’. 숙종은 1711년 6개월간의 공사 끝에 북한산성을 완성했다. 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은 1753년까지 축조됐다. 이로써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잇는 도성 방어체계가 완성됐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포인트가 있다. 도심에서 걸어서 오를 수 있는 산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전통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100여 년 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도 ‘도심 지척의 산’이 그렇게 신기했나보다.

“경성에서 서양인의 피크닉이라 하면 대개 북한산이 통념으로 되어 있었다…지게꾼들을 데려와서 말과 대나무 가마로 간다.”(<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 1934)

1894년 7월 관립법어(프랑스어)학교 교장으로 내한한 에밀 마르텔(1874~1949)의 회고이다.

대한제국 시절 궁내부 찬의관을 지낸 윌리엄 샌즈(1874~1946)는 한술 더 뜬다.

“한국땅을 벗어나 휴일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시의 옛 궁궐로 소풍을 가거나 산마루에 있는 북한산성으로 탐험을 즐긴다. 아름다운 곳이 헤아릴 수 없고, 모든 계절이 다 즐길 만 했다.”(<비외교적 비망록>, 1930년)

1745년(영조 21)에 북한산 중흥사에서 팔도도총섭으로 있었던 승려 성능이 편찬한 북한산성지리지인 <북한지>에 나오는 ‘북한도’의 연결지도. <북한지>를 편찬한 승려 성능은 북한산성의 축성 및 수성의 책임을 맡은 인물이다. 책머리에 지도를 붙이고 북한산성의 연혁과 현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숙종 때인 1711년 축조된 북한산성은 불과 6개월만에 완성됐다.|기호철의 <다시 읽는 북한지(해제·교감·역주)>에서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알렌(1858~1932)의 북한산 답사기도 흥미롭다.

“삐죽빼쭉하거나 반구형의 암석으로 된 바위투성이 봉우리들로 구성된 ‘국왕의 산성’(북한산성)…한폭의 비단 뭉치를 제멋대로 던져놓은 듯한 한강은 드문드문 솟아있는 산들 사이를 지나 바다까지 뻗어간다…”(‘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5년 6월호)

이를 보면 당대 서양인들의 ‘핫플’은 다름아닌 북한산(삼각산·해발 836.5m)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알렌의 표현 중에 북한산성을 ‘국왕의 산성’이라고 한 것이 의미심장하다. 알렌의 일기(1884년 12월 26일자) 중에 관련 내용이 들어있다. 알렌은 “주한 미국 공사관 소속 무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중위(1856~1893)가 고종의 청으로 국방시설인 북한산성을 탐방했다”면서 “이곳은 200명으로 1만 적군을 막아낼 수 있는 국왕의 산성”라고 소개했다.

<동국여도> 중 ‘북한산성도’. 북한산성은 백운대~인수봉~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한 총 둘레 11.6㎞의 산성이다. 산성의 전체면적은 여의도의 2배인 5.2㎢ 규모에 달한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북한산성 금괴의 소문

1939년 10월 28일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전설에는 북한산성의 행궁터에 70만원의 정제 금괴가 묻혀있다고는 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 산성 행궁터에 다량의 금괴를 묻혀있다는 소문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신문은 “(금괴는 아니지만) 연전에 이 부근 땅 속에서 막대한 암염과 목탄 수만관을 발굴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하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북한산성에 농성용 소금과 숯을 묻었다는 소문에 따라 헌병파견부대가 발굴한 결과 두 곳에서 소금 200석을 파냈다”(매일신보 1912년 8월30일자)는 기사가 보인다.

조선시대 정부재정과 군정내역을 모아 놓은 <만기요람> ‘총융청·군저’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있다.

“북한산성 안에 은 1만2250냥(460㎏ 정도)과 소금 50석(구운 소금 100덩이), 숯 2120석을 묻어두었다.”

아마 이런 ‘은의 북한산성 보관’ 기사가 훗날 ‘정제 금괴 매장설’로 둔갑했던 것 같다.

일각에서는 고종이 1905년 을사늑약 직후 황실소유의 금괴 85만냥을 항아리 12개에 담아 비밀장소에 매장했다는 소문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고종이 이 비밀자금으로 중국에서 망명정부를 세우려다가 실패했고, 이것이 일제에 의한 독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괴를 묻었다는 비밀장소는 어디일까. 조선에서 화폐대용으로 쓰인 은(銀)을 묻어둔 국고가 북한산성이었다면 어떤가. 고종 역시 북한산성을 최후의 보루로 여겨, 그곳에 대한제국의 운명이 달린 금괴를 숨겨놓지 않았을까. 바로 이런 막연한 믿음이 북한산성 금괴매장설을 낳게 했던 것 같다.

1911년 조선을 방문한 독일 신부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북한산에 올라 찍은 사진들. 베버 신부는 1911년과 1927년 한국에 두 차례 방문해 <고요한 아침의 나라>(1915)를 출간하고, 조선의 생활상을 무성영화로 남기기도 했다.|성 베네딕토 왜관 수도원 소장

■10명이면 수만명의 적을 막아낼 수 있다

이렇듯 100여 년 전부터 서양인들의 피크닉 명소였고, 지금도 서울·경기 지역 주민들의 ‘최애 탐방 및 등산코스’인 북한산이 이른바 ‘보장처’(임금과 조정의 도피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는 “1387~88년 우왕(1374~1388)과 최영(1316~1388)이 요동정벌을 위해 중흥산성(북한산성)을 수리한 뒤 세자인 창(왕)와 여러 왕비들을 피난시켰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던 선조는 1596년 1월28일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조치를 취하려 한다.

“전쟁이 10년 안에 그칠 가망이 없고, 또 100년 뒤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 삼각산 중흥동에 산성을 수축하라”는 명을 내린다. 병조판서 이덕형(1561~1613)은 북한산을 답사(3월3일)한 뒤 “삼각산의 산세가 높고 험절하여 단 10여명만 있어도 수만명의 적병이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전란 중에 도탄에 빠진 백성을 어떻게 대규모 동원할 수 있었겠는가.

북한산성의 관문인 대남문, 대서문, 대성문, 대동문. 성문은 대문 6곳을 포함, 모두 16곳을 조성했다.

북한산성 축조라는 ‘100년 대계’의 의지도 종전과 함께 퇴색되고 말았다.

그 사이 오욕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불과 3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624년(인조 2), 이번에는 내란이 일어났다. 이괄(1587~1624)의 난이었다. 인조는 할아버지처럼 도성을 버리고 충남 공주로 줄행랑쳤다. 다 쓰러져가던 명나라를 섬긴 대가를 톡톡히 치른 정묘호란(1627년) 때는 강화도로 도주했다. 병자호란(1636~37년) 때는 강화도로 피신하기도 전에 청나라군이 들이닥쳐 우왕좌왕하다 가까스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 역시 천혜의 요새라던 남한산성에서 50일 가까이 버텼지만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강화도 역시 청나라군에 의해 함락됐다. 그때까지 ‘조선의 2대 보장처’였던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조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1711년 험준한 지형을 활용해서 쌓은 북한산성이지만 서쪽이 취약지점이었다. 3년 뒤인 1714년 취약지점을 보강하는 중성을 쌓았다. |성베네딕토 왜관 수도원 소장

■더는 도성을 버릴 수 없다

외우(外憂)와 함께 내환(內患)도 더욱 골칫거리였다.

16~18세기 전세계를 강타한 소빙하기가 예외없이 조선에도 불어닥쳐 냉해와 가뭄, 홍수,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른바 ‘경신대기근’(1670~71년)과 ‘을병대기근’(1695~96년)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 사이 요승 여환이 “미륵의 세상이 와서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주관한다’는 등의 해괴한 소문을 퍼뜨렸다.(1688년) 장길산이 출몰했으며, 정씨 성이 국왕으로 등극해서 중국을 공격한 뒤 최씨 성을 왕으로 세운다는 요사스런 소문도 들렸다.(1697년) 떼강도(명화적)가 전국에 출몰했다.(1703년)

1711년 8월~1712년 5월까지 건설한 북한산성 행궁터. 2013년부터 2018년까지 6차례 시·발굴을 벌였다. 그 결과 임금이 거처하고 정사를 돌본 내·외전과 행랑, 왕실의 족보를 보관한 보각(추정)의 터를 찾아냈다. 행궁의 둘레는 392m, 현존길이는 250m 가량인 것으로 확인됐다.|경기문화재단 제공

만약 이런 외우내환 때문에 난리가 일어나면 국왕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임진왜란 때처럼 임금이 멀리 줄행랑 칠 수는 없었다. 숙종은 “(임진왜란 때처럼) 오늘날 인심이 결코 도성을 떠나 멀리 갈 형세가 될 수 없다”(<숙종실록> 1710년 12월1일)고 밝혔다. 그럴만도 했다. 기상이변에 따른 자연재해 때문에 대거 발생한 유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1648년(인조 26) 10만 명 남짓이던 서울의 인구는 69년 후인 1717년(숙종 43) 19만명으로 급증했다. 당시 서울은 대동법의 확대시행 등으로 서울로 들어오는 세곡의 물류량이 늘어서 상업도시로 변모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침과 내란이 일어난다고 도성을 비운다면 수십만 서울의 백성들은 어찌 되겠는가.

깎아지른 봉우리 사이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조성한 북한산성 행궁터. 이곳에는 임금의 거처하는 내전과 정사를 돌보는 외전 등이 조성되는 등 궁궐의 축소판이었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수도방위의 방법론

경신·을병대기근의 위기를 일단 넘긴 1703년(숙종 29)부터 ‘유사시의 대책’이 본격 논의된다.

초점은 ‘수도 방위’의 방법론이었다. ‘북한산성 축조론’과 ‘도성방위론’ 등 두가지 안에 격렬한 논쟁을 불었다.

숙종은 ‘북한산성 축조론자’였다. 숙종은 “도성민이 나의 적자(赤子·백성)인데 난리를 맞았다고 어찌 버리고 가겠느냐”(1710년 10월 20일)고 반문했다. 숙종은 “도성은 지키기 어려우므로 백성들과 함께 북한산성에 들어가 지킬 것(與民入守)”이라 했다.

이것을 ‘백성과 함께 지킨다’는 뜻에서 ‘여민공수(與民共守)’라 한다. ‘여민공수’는 도성을 지키되 여의치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배후의 산성에 들어가 최후항전을 벌인다는 일종의 청야전술이었다. 고조선·고구려 때부터 채택해온 전통의 전략·전술이었다.

구한말의 북한산성 행궁 모습. 국왕이 거처하는 내전과 정사를 돌보는 외전, 그리고 행정의 외삼문이 보이고, 주변으로는 행궁을 보호하는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수원 광교박물관 소장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과연 위급한 시기에 20만명에 육박하는 모든 도성민이 산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할 경우 도성의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모두 적에게 내어주는 격이 아닌가. 차라리 한양도성을 수축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하는게 아닌가.

더구나 경신·을병 대기근 등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행사직 이인엽은 “환난에 대비하려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킴으로써) 도리어 난만 부를까 걱정된다”(1703년 4월5일)고 반대했다. 반대론자들은 특히 병자호란을 끝내며 청나라와 맺은 항복조건(7항) 중 ‘새로운 성을 쌓거나 기존의 성을 수축하는 것을 일절 불허한다’는 조항을 상기시키며 반대했다.

7~8년간의 지루한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숙종이었다.(1711년 2월 9일) 숙종은 “여러분의 의견 수렴을 기다리다가 이미 적군이 강을 건너겠다”(<비변사등록>)고 짜증을 내면서 산성의 축조를 최종결정했다.

국왕이 정사를 돌보기 위해 건설된 행궁의 외전. 북한산성은 한일합병 직후 영국 성공회의 여름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성공회 신부와 수녀들이 피서를 행궁 내정전의 처마에 영국 국기가 걸려있다.

■12㎞ 성곽을 단 6개월만에 쌓은 비결

‘선조 때부터’ 끈질기게 이어온 북한산성 축조 논쟁이 종식된 것이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백운대~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 총 둘레 11.6㎞의 산성을 완성했다. 평지와 산지, 봉우리에 따라 온축, 반축, 반반축 등으로 쌓았다. 낮은 계곡부는 온축으로, 험준한 지점에서는 성벽 없이 여장만 조성한 곳도 있다. 산성의 전체 면적은 여의도의 2배인 5.2㎢ 규모에 달한다.

성곽공사가 1711년 4월부터 10월까지 단 6개월만에 끝났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군기가 바싹 든 삼군문(수도방위사령부) 병사들이 구간별로 사역했고, 승군들도 도왔다. 전국의 축성 장인이 총출동했고, 도성 주민이 노동자가 되어 거들었다.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산성에 오른 것으로 알려진 주한 미국 공사관 소속 무관인 조지 클레이턴 포크 중위(1856~1893)의 산영루 사진(1884년). 의료선교사이자 외교관인 호러스 알렌은 “포크는 고종의 청으로 국방시설인 북한산성을 탐방했다”면서 “이곳은 200명으로 1만 적군을 막아낼 수 있는 국왕의 산성”라고 소개했다.|미국 위스콘신대 밀워키 도서관 소장(이순우의 논문(‘근대시기 북한산성 관련 사진의 변천과 사료적 가치’)에서 인용,

취약지점인 산성의 서쪽을 보강하는 중성도 구축(1714년)했다. 성문은 16곳(대문 6곳) 마련했다. 임금의 거처인 행궁(124칸·1711년 8~1712년 5월)도 건설했다. 군량미 10만석을 쌓을 식량창고도 7곳 마련했다. 국왕 호위와 수도방위를 담당하는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의 지휘부 3곳이 들어섰다.

산성의 내부에 기존의 증흥사 외에 새로운 사찰 10곳과 암자 2곳을 세웠다. 산성을 지키는 이른바 ‘승영사찰’이었다. 정규군(삼군문)은 성곽의 주요진출입로와 창고를 방어하고, 승병들은 성곽의 암문 등 허점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산성 밑 평지에 비상시에 대비하여 7만석 규모의 군량창고를 설치한다. 이곳이 ‘평창(平倉)’이다. 이 ‘평창’이 있는 곳이 지세가 낮아 수비에 취약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동아일보 1939년 10월 28일자에는 “전설에는 북한산성의 행궁터에 70만원의 정제 금괴가 묻혀있다고는 하는데 믿기는 어렵다”면서도 “연전에 이 부근 땅속에서 헌병파견부대가 막대한 암염과 목탄 수만근을 발굴한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마지막 퍼즐은 탕춘대성

결국 한양도성~인왕산~북한산성을 잇는 또하나의 성이 축조되기 시작했다.(1715년) 이것이 탕춘대성이다.

탕춘대성의 축조공사는 숙종이 승하(1720년)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1753년(영조 29)까지 공사가 꾸준히 진행되어 북한산 향로봉~인왕산 동북쪽을 잇는 성곽이 축조됐다. 영조가 부왕의 북한산성 축조 프로젝트에서 마지막 퍼즐이었던 탕춘대성을 맞춘 것이다. 이로써 비상사태시 경복궁을 빠져나와 자하문(창의문)~탕춘대성~북한산성으로 통하는 국왕과 백성들의 피란길이 완성되었다. 이것은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잇는 도성 방어체계의 완성이기도 했다.

1712년(숙종 38) 4월 10일, 숙종이 막 축조가 마무리된 북한산성 행차에 나섰다. 숙종은 어가를 타고, 혹은 내관들의 등에 업혀 동장대(산성 지휘소)에 오른 뒤 감탄사를 연발하며 시 한수를 뽑아냈다.

“…무수한 봉우리 깎아지른듯 구름에 접했네. 도적과 외적이 다가올 수 없고, 원숭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을까… 도성 지척에 금성탕지(철옹성) 있으니 내 어찌 우리 백성 수호하는 도성 버리랴.(何棄吾民守漢州)”(숙종 어제시 ‘북한산성 열성어제’)

북한산성 금괴매장설은 사실이 아니겠지만 <만기요람>은 “북한산성에 은 1만냥(460㎏ 정도)과 소금 50석(구운 소금 100덩이), 숯 2120석을 묻어두었다”다고 기록했다. 매일신보 1912년 8월30일자는 “북한산성에 농성용 소금과 숯을 묻었다는 소문에 따라 헌병파견부대가 발굴한 결과 두 곳에서 소금 200석을 파냈다”고 보도했다. 아마 은과 소금, 숯 매장사실이 금괴매장설로 둔갑한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자격은?

최근들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이 한양도성과 연계되어 새삼 주목받고 있다.

경기도와 서울시가 3개의 성을 ‘조선시대 도성의 방어체계(가칭)’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한양도성’ 하나만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지만 2017년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로부터 ‘등재 불가’ 판정을 받았다. 이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는 한양도성 한 곳이 아니라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연계해서 재도전하라고 권고했다.

경기도 또한 북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등재를 추진하고 있었다.

북한산성의 경우 경기도(고양시)가 69%(374,631㎡·8,008m), 서울시가 31%(140,594㎡·3,592m) 정도를 나눠 관리하고 있다.

경기도 관할 구역의 경우 경기문화재단이 산성 4차례(2013~2017), 행궁 5차례(2013~2018)에 걸쳐 발굴조사를 펼친 바 있다. 산성 발굴에서는 고려 때 축조된 중흥산성의 존재를 밝혀내는 수확을 거뒀고, 성벽의 축조수법과 관련시설 등의 구조를 확인했다. 행궁 발굴에서는 임금이 거처하고 정사를 돌본 내·외전과 행랑, 왕실의 족보를 보관한 보각(추정)의 터를 찾아냈다.

북한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서 쌓았다. 계곡부의 평지에는 성벽을 온전히 쌓았고, 봉우리에 따라 반축, 반반축 등으로 축조했다. 험준한 지점에서는 성벽 없이 여장만 조성한 곳도 있다.

행궁의 둘레는 392m, 현존길이는 250m 가량인 것으로 확인됐다.

필자는 얼마전 1시간 30분의 발걸음 끝에 행궁에 올랐는데, 출입금지를 알리는 금줄 때문에 먼발치에서만 바라보았다.

조사단(경기문화재단)에 문의하니 발굴조사는 완전히 마무리 됐고, 정비 복원계획이 수립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신명종 재단 학예연구사는 “건물까지 복원할 지, 아니면 터만 남겨둘 지, 또 담장을 세울지 말지, 세운다면 어느 정도의 높이로 세울 지, 일반에 출입을 어디까지 허용할 지 등 정비·복원과 개방 계획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자가 행궁터를 답사하고 돌아온 뒤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서울시가 탕춘대성의 조사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는 지난 3월 북한산성의 보국문과 대동문의 전면 해체공사를 시작한 바 있다.

18세기 <해동지도>를 토대로 그려본 숙종의 북한산성 행차코스. 숙종은 1711년 성곽을 완성시킨 뒤 연잉군(영조)의 손을 잡고 북한산성에 올랐다. 원래는 도성 북쪽의 직선로를 따라 올라야 했지만, 길이 험해 서북쪽 길로 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대동문을 통해 수유리쪽으로 길을 잡았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기 위한 행차였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여민공수의 정신만큼은

그렇다면 한양도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추진되는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세계유산감’이 되는가.

우선 북한산성이나 탕춘대성 모두 1711년 축조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산성의 측량결과가 1711년 축성 당시의 연혁과 현황을 기록한 <북한지>의 내용과 일치한다.

또 북한산성이 해발고도 88.5m에서 최고높이 836.5m까지 험준한 산악 지형에 맞춰가며 다양한 축성법을 써서 완성한 17세기 최고의 단일 군사 유산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자연환경을 활용함으로써 불과 6개월만에 축성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국왕과 20만 백성 모두 함께 들어가서 장기항전을 한다는 목표아래 조성된 군사도시의 성격도 갖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기준인 완전성과 진정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1712년 4월30일 막 축조된 북한산성에 행차한 숙종은 산성의 지휘소인 동장대에 올라 감격에 겨운 어제시를 지었다. 숙종은 “…무수한 봉우리 깎아지른듯 구름에 접했네. 도적과 외적이 다가올 수 없고, 원숭이라도 기어오를 수 있을까… 도성 지척에 금성탕지(철옹성) 있으니 내 어찌 우리 백성 수호하는 도성 버리랴.(何棄吾民守漢州)”고 읊었다. 유사시에 임금과 백성이 힘을 모아 도성을 수호할 것이라고 다짐한 것이다.

필자는 46년간 장기집권하면서 3번의 친위쿠데타(경신·기사·갑술환국)로 피의 숙청을 일삼고, 그 과정에서 애꿎은 부인(희빈 장씨·1659~1701)까지 죽인 숙종을 ‘극혐’한다. 그러나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더는 나의 적자(赤子·백성)들을 두고 도망갈 수 없다. 이제 임금과 백성이 함께 지킬 것이다”라고 다짐한 ‘여민공수(與民供守)’의 정신 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참, 필자는 행궁터를 발굴한 경기문화재연구원 박현욱 선임연구원에게 재미삼아 한가지 물어본 내용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거액의 정제 금괴가 실려있다는 소문이 보도됐고, 또 <만기요람> 등에 실제로 은 1만2250냥(460㎏ 정도)을 보관했다는 내용이 있던데요.”(필자) “글쎄요. 실제 발굴에서는 금괴는 물론이고, 은(銀)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추가발굴이 필요할 것 같네요.(웃음)”(박현욱 선임연구원)(3)

<참고자료>

경기문화재연구원, <고양 북한행궁지 1~5차 발굴조사보고서>, 2014·2015·2016·2017·2019

이순우, ‘근대시기 북한산성 관련 사진의 변천과 사료적 가치’,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1권(고지도·고사진 모음집),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장상훈, ‘조선후기 지도 속의 북한산성’,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1권(고지도·고사진 모음집),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고양시·경기문화재연구원, <사적 162호 북한산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등재신청을 위한 학술조사연구총서>(학술총서 2책), 2017

황보경, ‘북한산성과 행궁지의 조사 및 연구성과 재고’, <백산학보> 119호, 백산학회, 2019

기호철, ‘다시 읽는 북한지(해제·교감·역주)’, <북한산성 사료총서> 제2권, 경기도·경기문화재단, 2018

허미형, ‘북한산성 행궁 정비 및 복원 계획안’,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경기문화재단, 2011

박현욱, ‘북한산성의 군사경관’, <북한산성의 가치 재조명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경기문화재단, 2017

김성태, ‘삼국시대 북한산성과 고려시대 중흥산성에 대한 검토’, <북한산성 연구보존 및 활성화 연구총서>, 경기문화재연구원, 2017

조윤민, <성(城)과 왕국>, 경기문화재단 펴냄, 주류성, 2013

이근호, <18세기 전반의 수도방위론>, ‘군사(軍史)’, 국방부, 1998

 

 


“숙종시대 군인 18%가 마맛자국”
:2008-03-13 

충청지역 병역자료 ‘속오군적’ 공개

조선시대에 군역에 동원되는 나이는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따라 16∼60세로 알려졌다. 특히 지방방어군이라고 할 수 있는 속오군(束伍軍)은 창설 시기인 임진왜란 당시 15∼50세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작성된 군적(軍籍)에 따르면 평균 나이는 34.4세였지만, 불과 10세의 사내아이 종과 밥짓고 가축을 돌보는 69세의 노(老) 화병(火兵)도 있었다.

평균 34세… 군 편제 소상히 기록

이런 사실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지난해 11월 공개한 조선시대 충청지역 병적기록부인 속오군적에 나타난 병사들의 신상을 전산입력해 분석한 결과 밝혀낼 수 있었다.

이 군적은 충청도 관찰사 휘하 군인들의 개인신상 정보를 수록한 3책으로,2책은 작성 시기는 각각 숙종 5년(1679)과 숙종 23년(1697)이며 나머지 1책은 앞장이 떨어져 나가 작성연대를 알 수 없었다.

명부에 오른 사람은 모두 4213명으로, 구체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던 사람은 3883명이었다. 나이가 기록된 3541명 가운데 16세 미만은 65명이었고,60세가 넘은 병사는 9명이었다. 나이가 가장 적은 직책은 일종의 사환병사인 수솔(隨率)로 26.5세이고, 나이가 가장 많은 직책은 오늘날의 하사관이라고 할 수 있는 기총(旗摠)으로 41.9세였다.

얼굴의 특징이 기록된 사람은 2260명으로, 천연두를 앓으면 나타나는 마맛자국이 있는 사람이 전체의 17.7%에 이르는 402명이었다.

마맛자국은 대단히 심하게 얽은 박(縛)에서부터 잠박(暫縛), 마(麻), 잠마(暫麻), 철(鐵) 등으로 구분했다. 서애 류성룡 집안에 전하는 1596년의 평안도 군적에는 552명의 병사 가운데 27%인 150명의 얼굴에 마맛자국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만큼 임진왜란 이후 천연두 발병률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

혼란스럽게 만든 대목은 4.00척(尺)으로 산출된 평균신장이다.

천민 24%·상민이 74% 차지

김성갑 토지박물관 주임은 “이 시대는 황종척(34.48㎝)이 통용되었고, 실제 이를 적용해 제주 속오군적에 오른 인물들의 평균신장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46.54㎝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수치가 나온다.”면서 “그러나 똑같은 척도를 적용할 때 충청도의 군인들은 평균키가 137.9㎝밖에 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고 말했다. 토지박물관은 직접 자를 대고 키를 잰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기입해 넣은 데서 비롯된 문제로 보고 있다.

군적에 나타난 인물을 신분별로 보면 24%인 929명이 사노나 궁노(宮奴), 내노(內奴)와 같은 천민이었고, 양인(良人)과 한량(閑良), 업무(業武) 등 상민이 74%인 2946명을 차지했다. 군적은 임진왜란 이전 조선 전기에는 군대로 징발할 수 있는 명단이라는 실용적인 측면이 강했으나, 조선후기에는 군포(軍布)라고 하는 일종의 국방세금을 거두기 위한 기초자료로 주로 활용됐다.(4)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사관 ‘심환지, 정조 독살 의혹 어의 비호했다’ 기록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⑩ 정조독살설 진실과 거짓

  • 수정 2009-07-15 15:36 등록 2009-07-15 15:36
‘정조 환어행렬도’(부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의 현륭원으로 천장하고 자주 행차하여 효도를 과시하고 노론의 견제로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조선 후기에는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이 적지 않다. 여기에는 일정한 구조적 문제가 있다.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치구조이다. 이 구조에 주목한 것은 청의 강희제였다. 그는 효종에 이어 서른넷의 현종이 사망하자 “임금의 수명이 길지 못하다”, “신하의 제재를 받아 정치를 펼치지 못한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숙종 12년(1686) 윤4월에는 “조선은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해서 우리 조정(청)의 보호가 없다면 몇 번이나 왕위를 도둑질 당할지 알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편지 나눌 정도로 친해 독살 안했다?박정희 암살한 건 측근 김재규 부장심환지, 죽은 정조 정책·인물들 말살정말로 친했다면 왜 그렇게 했겠나

 

국왕 독살설은 국왕의 인위적 제거로 생길 수 있는 권력 공백을 자당의 이익으로 전환시킬 힘을 가진 거대 정당의 존재가 기본조건이다. 그래서 국왕이 거대 여당인 서인·노론과 갈등하다가 급서하고 이들 정당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필자의 <조선왕 독살사건>은 조선 왕조의 이런 권력구조를 추적한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일부 세력에는 조선 후기의 노론 권력구조가 일정 부분 반영되어 있다. 그 한 예가 2009년 5월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공개되면서 발생한 소동이다. 어찰을 공개한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정조와 심환지가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정조는 독살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 정당하다는 노론 벽파의 당론(임오의리)이 유지되는 한 양자의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본질적 구조는 무시하고 편지라는 현상만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들은 이런 견지에서 ‘정조 독살설은 시골에서나 떠돌던 야담’이라거나 정조 사망 한 달 전의 ‘오회연교’가 노론 벽파를 중용하려는 뜻이었다거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독살설이 나오지 않는 것이 독살설 허구의 증거라는 희한한 주장까지 나왔다. 어찰의 성격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마땅한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결정적 사료라는 단일 주장을 펼친 것이다.

 

그간 한국사에서 정조는 존재 자체가 없었다. 정조는 ‘영·정조 시대’라는 틀에 묶여 영조의 부속 임금인 것처럼 도매금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근래 정조의 진면목이 집중 조명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조는 영조의 부속 임금이 아니라 영조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한 군주로 새롭게 조명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정조 개혁정치의 발목을 잡고 정조를 독살한 것이 노론이란 사고가 형성되었다. 그러자 정조 어찰을 노론 벽파를 옹호하는 사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먼저 둘이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으므로 독살했을 리 없다는 주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인물이 중정부장 김재규라는 사례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정조가 재위 24년(1800) 6월 15일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와병 사실을 전한 것이 유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정조실록>은 하루 전인 6월 14일 정조의 진찰 기록을 전하고 있어서 이미 공개된 병세임을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정조의 병인 ‘뱃속의 화기(火氣)’는 3년 전인 정조 21년(1797) 1월 사헌부 집의 이명연이 ‘근래 성상께서 가슴 사이에 치밀어 오르는 기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오랜 지병이었다. 이것이 유서라면 정조는 훨씬 전에 저세상으로 갔어야 했다. 정조 독살설이 시골에서만 떠돌던 야담이란 주장은 어떤가? 정조가 급서하자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조정의 최고 엘리트인 삼사(三司)였다. 정조 사망과 동시에 정순왕후와 심환지의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대사간 유한녕은 순조 즉위년 7월 13일 정순왕후와 심환지가 비호하던 어의 심인을 흉적(凶賊)으로 지칭하며 공격했다. 어의 심인 비호에 대한 비난이 들끓자 정순왕후는 7월 20일 “인심의 분노는 막기 어려워서 물정이 점점 격렬하여지니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는 전교를 내리고 8월 10일 사형시켰다. 문제는 국문 요청을 거부하고 사형시킴으로써 그 진상까지 파묻혔다는 점이다.

 

 
어의는 심환지 지휘받던 친족

 

심인의 사형을 기록한 <순조실록>의 사관은 “대신 심환지는 심인의 소원한 친족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호하려고 했다”면서 어의를 지휘하는 내의원 제조 심환지가 심인의 배후라는 사실을 밝혔다. 서울은 조용했다는 주장은 머릿속 환상일 뿐이다. 정조와 심환지가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으니 독살했을 리 없다는 가설이 성립하려면 노론 벽파와 심환지는 정조 사후에도 정조의 정치노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야 한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자마자 심환지는 정조의 24년 치세를 깡그리 부인했다. 정조를 땅에 묻고 돌아온 다음날인 11월 18일부터 노론 벽파의 공격이 시작되어 이듬해까지 계속되는데 심환지의 ‘졸기’는 “경신년(순조 즉위년)·신유년(순조 1년) 사이에 목을 베고 능지처참하고 귀양 보내는 여러 큰 형정(刑政)을 심환지가 결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순조실록> 2년 10월 18일)고 전하고 있다. 이때 사형당한 이가환·이승훈·권철신·정약종 등과 유배 간 정약용 형제 등은 대부분 정조가 아끼던 인재들이었다. 이로써 노론 일당독재가 재연되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엄금되었다. 노론 벽파에서 시파로 정권이 넘어가는 순조 6년(1806)의 병인경화(丙寅更化) 때 정조 독살설이 벽파 공격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그나마 정조 독살설을 부인하는 그럴듯한 학문적 근거였다. 그러나 이는 기초 사료인 실록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태만한 주장에 불과하다. 순조 6년(1806) 3월 사간원 정언 박영재는 노론 벽파 김달순의 소굴이 심환지라면서, “역적 심인을 추천하여 (어의로) 진출시킨 것이 (심환지의) 첫 번째 죄”라고 공격했다. 정조 독살의 배후가 심환지라는 공개적 폭로에 다름 아니다. 박영재는 또 ‘심환지가 장용영을 혁파하고 혈당(血黨)들을 지휘하여 선왕의 유언을 고쳤다’고 공격했다. 정조가 재위 17년(1793) 하나의 군영으로 독립시킨 장용영을 심환지는 순조 2년(1802) 없애버렸다. 정조 같은 국왕이 부활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순조는 박영재도 귀양 보내지만 김달순은 사형시키고 이미 죽은 심환지도 관작을 추탈하고 자식들은 유배 보냈다.

 
노론 일당독재 재연…사상 통제

 

순조 6년(1806) 4월 1일 삼사는 “(심환지가) 선조(정조)의 망극한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선왕께서 선향(仙鄕: 저승)으로 멀리 떠나가시던 당일로 선왕의 은혜를 저버리고 선왕을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심환지가 정조의 모든 정책을 뒤집은 주역이란 사실은 조선 후기사 인식의 기본상식이다. 오회연교가 노론 벽파를 중용하려는 뜻이었다는 주장을 보자. 정조는 오회연교에서 “모년의 의리를 범한 것”을 질책하는데 모년은 노론 벽파가 사도세자를 죽인 해이다. 정조는 이 연교에서 을미년(영조 51) 노론 벽파에서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한 것과 병신년(정조 즉위년)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것, 그리고 정유년(정조 1) 자신을 암살하려고 자객을 보낸 사실을 비판했다. 정조는 그러면서도 반성하면 노론 벽파를 내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오회연교가 노론 벽파를 중용하려는 뜻이라는 주장은 유신 시절의 긴급조치가 민주화를 위한 조치였다는 해석과 마찬가지다. 오회연교는 거꾸로 남인 중용의 뜻이었다. 정약용의 행장인 <사암선생연보>는 정조가 6월 12일 밤 정약용에게 규장각 아전을 보내 “그믐께면 조정에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오회연교가 남인 등용의 뜻이라는 증거이다. 규장각 아전은 정조의 “안색과 어조가 모두 평안했다”고 말했는데 이는 정조가 그달 말 세상을 떠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조가 6월 28일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시상(時相: 심환지)이 역의(逆醫) 심인을 천거하여 독약을 올리게 시켰다”라는 ‘고금도 장씨녀에 대한 기사’를 남겼다. <한중록>에 독살설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보자.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목적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했다는 이유로 정조 즉위 초 몰락한 친정을 신원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쓰는 책에 선왕 독살설을 기재해 초점을 흐릴 만큼 혜경궁 홍씨의 정치 감각이 무디지 않았다. 또한 조선에는 반좌율(反坐律)이 있었다. 남을 공격한 내용이 무고로 밝혀지면 그 죄를 대신 받는 것이다. 상대를 사형죄로 공격했다가 무고로 밝혀지면 자신이 사형당해야 했다. 선왕 독살은 삼족이 멸함을 당할 중죄로서 물증 없이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심환지의 졸기는 “수렴청정 초기에 영의정에 특배되어 나라의 정권을 전적으로 위임받았으나 본바탕이 아둔하고 재능이 없어 아무 공적이 없고 오직 같은 당은 등용하고 다른 당은 공격하는 것(黨同伐異)을 일로 삼았다”(<순조실록> 2년 10월 18일)고 비난하고 있다. 이런 심환지가 21세기에 느닷없이 정조의 막역한 지우로 등장할 줄은 심환지도 몰랐을 것이다. 정조 어찰을 둘러싼 소동은 조선 후기의 잘못된 권력구조의 일부가 현재까지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우리 사회의 병든 현주소를 말해준다. 정상적으로 사고한다면 정조 어찰은 심환지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는 정조의 죽음에 더 깊숙이 관련되었다는 증거로 삼아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 사회는 200년 전 노론의 당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휘둘려야 하는가.(5)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영조는 '어느 개가 짖어!' 했고, 정조는 '탕탕평평평평탕탕!' 외쳤다[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 기자2023. 12. 25. 08:00
 
 

‘탕탕평평…’. 국립중앙박물관이 영조 즉위 300주년을 맞아 개최 중인 특별전의 제목이 좀 ‘쨍’ 합니다.

영조(재위 1724~1776)와 손자 정조(1776~1800)가 ‘탕탕’하고 ‘평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펼친 ‘탕평’과 관련된 특별전입니다. 영·정조가 탕평책을 쓰면서 글과 그림을 통해 소통했던 방식을 한번 들여다보자는 것이라 합니다.

이 특별전을 보면서 두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삽살개’가 등장하는 특별전 포스터가 그것입니다.

또 하나는 특별전 제목인 ‘탕탕평평’인데요.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탕탕평평’도 모자라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이라고 새긴 정조의 장서인(규장각 소장)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개인소장·국립중앙박물관 제공)에 쓴 영조의 어제시(아래 그림). 이 어제시는 사납게 짖는 삽살개가 제 본분을 잊고 자기 당의 이익만을 위해 떠드는 붕당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정조의 장서인 중 ‘탕탕평평평탕탕’(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은 사력을 다해 탕평책을 썼던 정조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어느 개가 짖어!”

‘삽살개’ 그림을 살펴볼까요. 영조가 화원 김두량(1696~1763)의 ‘삽살개’ 그림에 직접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밤에 사립문을 지키는 게 너의 소임이거늘(柴門夜直 是爾之任) 어찌하여 대낮에 길에서 이렇게 짖고 있느냐(如何途上 晝亦若此)’는 내용입니다. 과연 화면 가득 그려진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짓고 있습니다.

전시기획자는 “영조가 탕평을 반대하는 무리에게 ‘주제를 모르고 나서지 말고 네 본분을 지키라’고 비판했다”고 해석했어요. 이것이 혹시 아전인수의 해석이 아닐까요. 마침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을 다룬 논문이 있네요.

삽살개는 원래 래원주인을 지키고 온갖 삿된 존재를 물리치는 충견으로 알려졌죠.

그러나 그런 삽살개가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위협한다면 그 개는 주인을 무는 맹견일 따름입니다.

김두량의 ‘삽살개’. 영조의 ‘어제시’가 유명하지만 그림 또한 생동감 넘친다.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삽살개가 눈앞에서 사납게 짖어대는 듯하다.

 

영조는 ‘계해(1743년) 6월 초하루 다음날(2일)’ 김두량의 그림에 어제시를 남겼습니다.

그러고보면 화가 김두량도 대단한 분이죠. ‘삽살개’ 뿐 아니라 김두량의 ‘사계산수도’에도 영조의 어제글이 보입니다. 김두량의 <고사몽룡도>에는 “먹을 쓰는 법이 기고(奇古·기이하고 고아)하여…주상(영조)께서 ‘남리’라는 호를 하사했다”는 표암 강세황(1713~1791)의 발문이 남아있습니다. 그만큼 영조의 사랑을 받은 화가였습니다.

그러한 김두량의 ‘삽살개’ 그림을 보면 참 생동감 넘치게도 그렸습니다. 짖는 입과 혀의 모양, 그리고 옆으로 누운 귀, 바짝 곤두선 털, 치켜든 꼬리…. 얼마나 사납게 짖어댑니까. 다른 개 그림은 어떨까요.

같은 김두량의 ‘흑구도’에 표현된 개는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습니다. 노곤한 모습이죠. 이암(1499~?)의 ‘모견도’ 등 다른 작품에도 ‘삽살개’처럼 사납개 짖는 그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김두량에게 ‘짖는 개 좀 그려’하고 명하고는 ‘(신하의) 본분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붕당의 다툼’을 꼬집었다는 해석이 나온 겁니다.

정조의 ‘탕탕평평평평탕탕’ 장서인. 얼핏보면 ‘탕평평탕’ 글자만 새겨져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탕’자 밑에 ‘〃’, ‘평’자 밑에 ‘〃(땡땡)’ 부호가 보인다. 반복부호이다. 그러니 이 ‘탕평평탕’ 장서인은 ‘탕탕평평평평탕탕’을 새겨넣은 것이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

이제 ‘탕탕평평평평탕탕’ 등을 새긴 정조의 ‘장서인’을 봅시다. 워낙 책벌레였던 정조였으니 소장본에 여러가지 인장(장서인)을 찍은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중 ‘뜻을 크게 갖고 정진하라’는 뜻이면서 정조의 별호이기도 한 ‘홍재(弘齋)’가 우선 눈에 띄고요. ‘…만기(萬機)…’라는 장서인도 유독 많아요. 예부터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일일만기(一日萬機)’(<서경> ‘고요모’)라 했습니다. ‘만기친람’이 여기서 유래됐죠.

‘탕평’ 관련 장서인 중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있어요. “세상에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뜻인데요.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거죠.

김두량의 또다른 개그림인 ‘검은개(흑구도)’. 풀밭에 쪼그리고 앉아 뒷다리로 가려운 몸통을 긁고 있는 검은 개의 노회한 표정과 동작이 자연스럽고도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러나 모든 장서인 중 ‘고갱이’는 ‘탕탕평평평평탕탕(蕩蕩平平平平蕩蕩)’입니다.

이 장서인을 얼핏보면 아무리봐도 ‘탕평평탕’으로만 보입니다. 도대체 뭘 보고 ‘탕탕평평평평탕탕’이라 할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죠. 그런데 서화연구자가 단번에 알려주더라구요. “‘탕’자 밑에 ‘〃’, ‘평’자 밑에 ‘〃’을 보라”는 겁니다.

그 ‘〃(땡땡)’이 반복부호라는 겁니다. 아! 그렇게 해서 읽으니까 ‘탕탕평평평평탕탕’이 됩니다.

 

얼마나 ‘탕평’을 갈구했으면 이렇게 ‘탕탕평평평평탕탕’을 반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요.

그 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당신의 침전 이름도 ‘탕탕평평실’로 지었습니다.

“나는…침전에 특별히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 글자를 크게 써서 창문 위에다 걸어 두었다. 아침 저녁 눈여겨 보면서 끝없는 교훈으로 삼아오고 있다.”(<정조실록> 1792년 11월6일)

‘정구팔황 호월일가’는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다’는 다짐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겁니다.

개그림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이암의 ‘모견도’ 등 다른 작가들의 그림에서도 개가 사납게 짖는 모습은 좀체 표현되지 않았다.

 

■약을 조제하듯 탕평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홍범’은 ‘홍범구주’의 준말이고요. 하나라 우왕이 하늘의 뜻에 따라 정한 ‘9개 조목(九疇·구주)의 큰 법(洪範·홍범)’을 가리킵니다. 그중 5번째 조목인 ‘황극(皇極)’에 ‘탕탕평평’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탕탕평평’의 핵심조건이 있습니다.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룬다’는 겁니다. 조선의 탕평책 이념은 17세기 후반 소론의 영수 박세채(1631~1695)가 구체화했습니다.

“황극의 도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같이 크고…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하는 것처럼 서민부터 군자에 이르기까지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못할 근심이 없게 됩니다.”(<숙종실록> 1683년 2월4일)

정조의 ‘장서인’ 중에는 ‘만기(萬機)’가 많다. ‘만기’는 “천자(군주)는 하루에 만가지 일을 처리한다(일일만기·一日萬機)’(<서경> ‘고요모’)는데서 유래됐다. ‘만기친람’이 여기서 나왔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결국 박세채가 씨앗을 뿌려 영·정조 때 실행된 탕평책은 북극성과 뭇별의 관계처럼 임금이 표준을 세워 이뤄가는 이른바 ‘황극 탕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왕권 강화’의 방편이었습니다.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더라도 다른 정파의 ‘쓸만한 인물도 기용한다’는 ‘조제론’이 황극탕평의 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을 조제하는 이치와 같은 겁니다. 물론 약의 처방은 군주의 몫인 겁니다. 이것은 어떤 당파가 정권을 잡으면 반대당이 깡그리 일소되는 ‘환국’과는 다른 입장이죠. ‘승자독식’과 ‘패자일소’의 구태에서 벗어나야 망국적인 당파싸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임금이 중심이 되어 화해와 공존, 경쟁’을 펼치는 정치를 추구한 겁니다.

‘탕평’ 관련 장서인 중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 있다. “세상에 다양한 물(만천)이 있지만 달(군주)은 그 형태에 따라 똑같이 비춘다”는 뜻이다. 즉 세상의 주인인 군주는 백성의 다양한 능력을 골고루 활용하는 존재라는 것이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경종의 석연치않은 죽음에 연루?

영조의 탕평책을 보죠.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그와 같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랐죠.

당시 소론은 경종(1720~1724)의 편에 서 있었고요. 노론은 경종을 압박해서 그들이 지지한 연잉군(영조)를 왕세제로 올렸습니다. 그런데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는 과정에서 왕세제가 연루된 ‘시해음모설’과 ‘독살설’이 그럴싸하게 퍼집니다. 즉 왕세제(영조)가 경종의 와병 중에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올렸고, 막판에는 의사의 처방없이는 절대 같이 먹어서는 안될 인삼과 부자를 드시도록 고집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1724년 8월21·24일)

왕세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는데요. 겨우 왕대비인 인원왕후(숙종의 계비·1687~1757)와 왕세제에 우호적이었던 소론 온건파의 도움으로 겨우 왕위에 오르죠.(1724) 하지만 마지막 고비가 남아있었습니다. 영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은 이인좌(1695~1728) 등이 반란을 일으킵니다.(1728) 무려 20만명이 반란에 가담했는데요. 이 반란은 소론 온건파 오명항(1673~1728) 등의 활약으로 천신만고 끝에 진압됩니다.

정조는 자신의 침전에 ‘탕탕평평실’ 현판을 걸어두었다. ‘정구팔황(庭衢八荒) 호월일가(胡越一家)’ 글자를 써서 창문 위에 걸어 두었다. ‘변방도, 오랑캐도 앞뜨락이나 한 집안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지역이나 당색에 따른 차별은 절대 없다’는 다짐을 잠자리에서까지 되새긴 것이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난 게장을 올리지 않았어”

이후 영조는 상처입은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고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갖가지 소통방안을 마련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책의 편찬이었습니다. 이인좌의 난(1728)를 평정한 내용을 담은 <감란록>이 눈길을 끄는데요.

영조는 서문에서 “반란의 뿌리는 붕당에 있다”고 못박았습니다. 영조는 소론이 경종을, 노론이 왕세제(영조 자신)를 밀었기 때문에 죽기살기식 싸움이 벌어졌다는 겁니다.(<영조실록> 1729년 8월18일자) 신하가 임금 후보자를 미는 형세이니 패배자측이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영조는 경종 승하와 관련된 각종 의혹을 강력 부인하고 당신의 입장을 밝힌 <어제대훈>을 펴냅니다. 영조는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 뿐이며, 신축년(1721년) 경종의 명으로 왕세제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힙니다.

‘탕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王道)가 탕탕하고, 평평하다”는 <서경>(‘주서·홍범’)에서 유래됐다. ‘탕평’의 핵심조건은 ‘임금이 표준을 세워 탕평을 이루는 황극탕평’이다. ‘마치 북극성(임금)을 여러 별이 옹위하여 공평함을 이룬다’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자료

 

이어 경종독살설 관련, 최대 의혹사건인 ‘게장 사건’ 등을 해명하는 <천의소감>도 펴냈습니다. 영조는 “황형(경종)께서 드신 게장은 (과인이 아니라) 수랏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정통성 문제를 설득으로, 힘으로 해결한 영조는 본격적으로 ‘황극탕평’을 이뤄나가는데요.

1742년 성균관에 세운 ‘탕평비’에 ‘탕평의 의지’를 담았습니다. “두루 사귀고 치우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치우치고 두루 사귀지 않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탕평비)이라고 했죠.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승정원일기> 1764년 5월14일)고 재차 훈계했습니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 이복형인 경종을 죽이려 했다는 의혹의 중심에 서있었다. 와병중인 경종에게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생감을 함께 올리고 막판에는 의사의 처방없이 먹어서는 안되는 인삼과 부자를 올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인사위원회에 참석한 정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어땠을까요. 정조는 임금이 세운 큰 의리에 각 정파가 참여하는 이른바 ‘의리 탕평’을 펼쳐갑니다.학문이 신하들보다 뛰어난 정조는 ‘군사(君師·만백성의 어버이이자 신하들의 아버지)’를 자처했죠. 그랬기에 임금이 주도하는 ‘의리탕평’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인사행정도 온전히 왕에게 넘어갑니다.

1785년(정조9) 12월 창덕궁 중희당에서 열린 친림 도목정사를 그린 ‘을사친정계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도목정사(都目政事)’는 해마다 2~4차례 관리들의 인사고과를 토대로 승진·삭탈·자리 이동 등을 결정하는 일종의 인사위원회입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1728)’을 진압한 뒤 “반란의 뿌리가 바로 당쟁”이라고 규정하고 “효종-현종-숙종의 혈통을 잇는 이는 경종과 과인(영조) 뿐이며, 신축년(1721년) 경종의 명으로 왕세제가 된 것”이라고 굳이 밝힌다. 또 ‘게장 사건’과 관련해서 “황형(경종)께서 드신 게장은 (과인이 아니라) 수랏간에서 올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림을 보면 ‘인사위’에 참석한 정조가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좌 앞에 ‘3배수 후보자 명단(망단자)’이 보이고요. 임명장에 찍을 옥새가 전각 밖 붉은 탁자 위에 놓여있습니다.

특히 규장각 관원의 위상이 눈에 띕니다. 규장각 관원이 승지들과 함께 내시와 사관 다음에 앉아 있습니다.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당상은 툇마루에, 이조와 병조낭관은 전각 밖에 있는데 말이죠. 정조가 규장각 관원 등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했음을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영조는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우고 “절대 당색에 빠져 공정한 마음을 잃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만약 당을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과거장에 들어오지 마라”고 명했다.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이번 특별전에서 정조는 즉위 300주년을 맞이한 영조에 주연자리를 비워주고 ‘주조연’으로 내려 앉아야겠죠.

그래도 신하들과 격의없이 주고받은 편지정치와 관련해서는 그냥 넘길 수가 없겠습니다.

정조가 재상인 심환지(1730~1802)에게 보낸 편지가 특히 눈에 띄는데요. 심환지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1735~1762)의 죽임이 정당했다고 주장한 노론 벽파의 영수였죠. 그래서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인물로 알려졌는데요.

그런데 2009년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주고받는 내밀한 편지가 공개되었답니다. 이 중 정조가 심환지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라”는 사주하는 편지가 눈길을 끕니다. 그중 1798년(정조 22) 1월11일 밤에 보낸 편지를 볼까요.

1785년(정조9) 12월 정조는 인사고과를 토대로 승진·삭탈·자리 이동 등을 결정하는 인사위원회(도목정사) 에 직접 참여했다. 규장각 관원이 승지들과 함께 내시와 사관 다음에 앉아 있다. 반면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당상은 툇마루에, 이조와 병조낭관은 전각 밖에 엎드려 있다. 정조가 규장각 관원 등 측근세력을 기반으로 왕권 강화를 모색했음을 알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의 본직은 함께 물러난다는 의리로 사퇴명분을 삼는게 좋겠다. 내일 안으로 사직하고 임금의 답을 기다려라….”

정조의 편지에 따라 이틀 뒤(13일) 심환지가 사직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짐짓 “함께 물러나겠다고 경이 고집하는데 옳지는 않지만 허락하겠다”고 사표를 수리해버립니다. 또 1798년 4월6일 편지에서는 “…계속 궁궐에 들어오라는 임금의 명을 어기도록 하라. 사직상소는 초고를 지은 뒤 반드시 보여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결국 심환지는 임금의 명에 따라 4번이나 “궁궐에 들어오라”는 명을 어겼고요. 미리 사직상소의 초고까지 본 정조는 편지의 각본대로 심환지를 해임했답니다.

정조가 69세의 노정승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정조가 심환지에게 “사직상소를 올리라”는 사주하는 편지가 눈길을 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뿐이 아닙니다. 정조는 ‘비밀편지’에서 육두문자에 가까운 거친 언사로 심환지를 다그치는데요.

“나는 경(심환지)을 이처럼 격의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조심 하지 않는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 매양 입조심 하지 않으니 경은 생각없는 늙은이(無算之수)라 하겠다.”(1797년 4월10일)

이밖에 “과연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乃敢鼓吻耶)”라든지 “이 사람은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다.(可謂眞胡種子)”는 등의 욕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47세의 정조가 69세의 노재상을 쥐락펴락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왜 입조심 하지 않으냐.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다. ‘이 떡이나 먹고 말 좀 전하지 마라’는 속담을 명심하라”는 등 막말을 내뱉기도 했다.

 

■“우리나라엔 왜 그리 당명이 많은가”

이번 특별전을 보면서 한가지 드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정조의 탕평책으로 조선이 확 바뀌었을까요?

1772년이면 영조가 즉위한지 48년이 지난 때였는데요. 그런데 영조는 당파를 개탄하는 포고문을 발표합니다.(8월11일)

“아! 5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은 탕평인데…우리나라의 당명은 어찌 그리 많은가? 처음에는 동서가 있었고, 다음엔 대북·소북이 있었으며, 또 남서가 있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다시 노론·소론이라 하고, 지금은 청(淸)·명(名)이라 한다.”

정조는 신하들을 두고 ‘주둥아리’니 ‘호로자식’이니 하는 막말로 호칭하는 등 신하들을 완전히 틀어잡았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보다 15년전인 1755년(영조 31) 영조를 극렬하게 비난하는 내용을 걸리거나(나주 벽서사건), 그런 내용을 답안지로 제출한(과거시험장 사건) 등이 일어났는데요. 영조는 ‘이인좌의 잔적’이라면서 소론 500여명을 소탕했습니다.

그러고보면 영·정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이 아니고요. 강력한 왕권으로 정파간의 극렬한 다툼을 억누른 것에 불과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하자 곧 세도정치라는 더욱 파행적인 정치 형태를 낳게 되었다는 겁니다.

영조의 가장 큰 치적은 균역법과 준천(하천 준설사업)이었다. 1751년 9월 시행된 균역법에 따라 양인이 군복무 대신 해마다 부담해야 할 세금이 포2필에서 1필로 줄어들었다. 또한 물 흐름이 자주 막혀 범람하기 일쑤였던 도성내 하천의 준설공사도 펼쳤다. |국립중앙박물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뜻은 이뤄진다”

그렇다고 ‘탕탕평평’을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왕권강화든 뭐든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면 그것은 업적이 아닙니까. 탕평으로 붕당의 갈등을 줄인 영조는 백성의 삶을 보듬는 정책을 펼쳤죠. 그 분의 가장 큰 업적은 균역법이었습니다. 1751년(영조 27) 양인(16~60세)이 군복무 대신 부담해야 할 세금을 포 2필에서 1필로 감해준 겁니다. 짓눌린 백성들의 어깨를 한결 덜어줬죠.

영조는 준설공사 후 제작한 <준천첩>에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有志竟成)’이라는 고사를 써놓았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또한 준천, 즉 하천 정비작업도 펼쳤습니다.(1760) 정비된 지 오래되어 물 흐름이 막히거나 넘치는 일이 번번했던 서울의 하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죠. 여러차례 현장지도에 나선 영조는 공역이 마무리 된 후 <준천첩>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배포했습니다. 이 첩에는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뤄진다(有志竟成)’이라는 고사가 담여있습니다. ‘꿈은 이뤄진다’는 2002년 월드컵 구호가 연상되죠. 영조가 <서경>과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쓰고 그린 바위그림이 심금을 울립니다.

영조가 <시경>과 <서경> 구절을 인용하며 쓰고 그린 ‘바위 그림’.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못하면 안된다(유석암암)”는 것과 “백성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외민암)”는 의미가 담겨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석암암(維石巖巖)은 <시경>에 실려있다네(詩經攸載)’, ‘고외민암(顧畏民巖)은 <서경>의 훈계라네(書傳訓戒)’라는 글귀를 담은 그림인데요. ‘유석암암’은 <시경> ‘절남산’, ‘고외민암’은 <서경> ‘소고’의 구절입니다. 요컨대 이런 내용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못하면 안되네.(유석암암)”

“백성의 어려움을 돌아보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네.(고외민암)”

영·정조의 ‘탕탕평평’은 기본적으로 백성을 향한 마음씨의 발로였다는 사실만큼은 잊지말아야 할 것 같아요.

 

(이 기사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수경 학예연구관·허문행 학예연구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주었습니다. 이근호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와 이정은 국립해양박물관 선임학예사가 자문을 해주었습니다.)(6)

<참고자료>

이수경·허문행·명세라·이현숙, <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특별전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2023

이근호, <조선후기 탕평파와 국정운영>, 민속원, 2016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2002

김영진·박철상·백승호, ‘정조의 장서인’, <규장각> 45집,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5

이정은, ‘영조 어제로 본 김두량 삽살개 연구’, <문물연구> 30권 30호, 동아시아문물연구학술재단, 2016

백승호·장유승·박철상·진재교·안대회·이상하·김문식·임형택, <정조어찰집>, 성균관대 출판부, 2009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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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코로나가 돌던 그때, '디테일' 세종의 전염병 대처법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0.03.10 06:00 수정 : 2020.03.12 10:00

예전엔 천연두와 같은 전염병을 호구신(戶口神)이라 했다. 집집마다 돌면서 일으키는 역병이라는 뜻이다. ‘호구거리’는 천연두를 몰고 오는 ‘호구’가 탈 부리지 못하게 하는 굿이다. 천연두가 순하게 지나가길 기원하는 축원한다.|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서

1432년(세종 14년) 4월 21~22일 세종대왕이 화들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다. 마침 극심한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신음하자 “대규모 인력이 동원되는 토목·건설공사를 중단하라”는 명을 내린 터였다. 그것이 그치지 않았다. 세종은 관리들이 제대로 환자들을 구호하는지 혹 생명이 위태로운 자가 있는지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 한마디로 감찰단을 파견하여 관리들의 전염병 대책에 잘못이 있는지 낱낱이 파악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격전(도교 주관의 제사 관장 부서)을 살피던 감찰단원의 보고가 세종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소격전 소속 여종 복덕은 시각장애인인데,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복덕은 아이까지 안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세종은 소격전과 한성부 북부지역(북부령) 책임자 등 관리 2명을 문책하여 형조에서 심문하도록 하고 복덕에게는 쌀과 콩 각 1석(石)을 하사했다. 세종의 지시는 일회성에서 끝나지 않았다. 세종은 “복덕이 내가 내린 쌀을 다 먹은 뒤에는 또 굶을 것 아니냐”면서 “앞으로 복덕과 같은 백성은 그의 족친에게 맡기거나, 족친마저 없다면 해당 관청(소격전)이 끝까지 책임지고 구호해야 한다”는 명을 내렸다.

 

■‘디테일’ 세종의 전염병 대책

이처럼 전염병과 같은 재난에 맞선 세종은 시쳇말로 ‘디테일 세종’ 소리를 들을만 했다. 건국초여서 제도가 확립되기 전인데다 워낙 명철한 성군이었기에 만기친람, 그 자체였다. 예컨대 1434년(세종 16년) 전국에 전염병이 돌자 세종은 처방문까지 일일이 써서 전국에 내려주었다.

“내가 의서에 써있는 처방과 약방을 뽑아 적어 내린다. 수령들이 집마다 찾아다니며 알려주고 정성껏 치료해주라.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과인의 뜻을 저버리지 마라.”(<세종실록>)

세종이 내린 처방문 중에는 별의별 요법이 다 등장한다. 그 중에는 발효시킨 콩씨와 불기운 받은 아궁이 흙, 그리고 어린아이 소변을 섞어 마시는 처방이 있다. 세종은 또 “복숭아나무 가지 잎사귀와 백지(구릿대 뿌리 말린 약재), 백엽(측백나무 잎)을 찧어 가루를 내고 탕을 끓여 목욕을 하면 좋다”고도 했다. 이밖에 ‘복숭아 나무 속 벌레똥’을 가루로 곱게 갈아 물에 타먹는 것도 세종의 처방문에 포함되어 있다. 이 뿐인가. 세종은 요즘의 코로나 19와 같은 급성전염성 질환이 번질 때의 대비책도 빼놓지 않았다.

“급성전염병이가 도질 때 한 자리에 거처하는 경우에도 감염되지 않는 처방이 있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와 밤에 자리에 누울 때 참기름을 코 안에 바른다. 전염병 확산이 너무 빨라 약을 구할 수 없으면 급한대로 종이 심지를 말아서 콧구멍에 넣어 재채기 하는 것이 좋다.”

<영조실록> 1750년에 기록된 ‘월별 사망자수’. 매달 28~29일 월별 사망자를 집계했다. 10월 이후의 통계는 보이지 않지만 9월까지의 그해 누적 사망자는 22만3000여명에 달한다.

■죽을 각오로 백성들을 관리하라

세종은 전염병으로 죽을 처지에 빠진 백성들을 직접 구휼했다. 1434~35년 사이 전염병으로 죽은 함경도 백성이 3262명에 이른다는 보고를 받고는 면포 5000필을 급히 나눠주었다. 1437년(세종 19년)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한성부 내 두 곳에 마련된 진제장(굶주린 자들의 무료급식소)마다 1000여명씩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한 두 곳에 집단수용 했던 것이 화를 불렀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면서 전염병이 이 급식소에 모인 백성들을 휩쓸었고, 이곳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세종은 가슴을 치면서 “대체 지금 이곳에서 사망자가 왜 속출했는지 그 사유를 낱낱이 기록하라”는 명을 내렸다. 7년 후인 1444년(세종 26년)에도 전염병이 휩쓸자 굶주린 백성들을 한 두 곳에 집단 수용하는 문제를 심사숙고했다. 세종은 “7년 전의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백성들을 분산 수용하고 질병을 얻은 자는 다른 사람과 섞여 살게 하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세종은 분산 수용소의 관리를 중앙 및 서울의 5개 관청 공무원들에게 맡겼다.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세종은 “백성들을 나눠 관리하도록 하는데, 만약 백성 한사람이라도 죽게되면 관리책임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죽을 각오로 백성들을 관리하라는 뜻이었다.

허준이 편찬한 <신찬벽온방>. 광해군때 전염병이 돌자 왕명을 받들어 두달 여 만에 편찬해서 전국에 배포했다. 전국 각 수령과 백성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만든 일종의 ‘전염병 매뉴얼’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소빙하기, 조선은 전염병의 시대

그러나 세종(재위 1418~1450)은 운이 억세게 좋은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임금들에 비해 전염병 창궐 횟수(5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전염병 발생횟수를 임금별로 보면 숙종 연간(재위 1674~1720)에 25회로 가장 많았고, 영조(1724~1776·19회)와 현종(1659~1674·13회) 때가 뒤를 이었다. 전염병은 성종(재위 1469~1494·2회)까지 드문드문 했다가 연산군(재위 1494~1506·9회)부터 증가한다. 폭군의 시대에 하늘도 노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 무렵부터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에 접어든다.

소빙하기는 16세기부터 시작되어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의 기온저하는 조선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였다. 중국의 경우 소빙하기가 절정을 이룬 17세기(명나라 말기) 기온이 지금보다 최하 1.5~2도도 떨어졌다는 연구도 있다. 이에따라 가뭄·홍수 등 기상이변이 빈발했다. 겨울에도 천둥 번개가 치고, 5~6월까지 서리와 눈이 내리기도 했다. 겨울추위가 혹독해졌지만, 한편으로는 겨울철인데도 갑자기 봄날처럼 따뜻해져 꽃이 피기도 했다. 기상이변은 굶주림과 위생불량을 낳았고, 이것은 곧 면역력의 저하를 부추겨 전염병 창궐로 이어졌다.

1392년부터 1917년까지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전염병 발병을 햇수로 따지면 320년에 달하고 연평균 2.73회 발생했다는 연구가 있다. 전염병 기사는 1455건이나 된다. 가히 ‘전염병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염병 유행 빈도는 3월(12.3%), 2월(12%), 4월(10.4%) 등 봄철(34.7%)이 가장 많았다. 코로나19 사태가 겨울에 시작해서 봄철에 확산되는 추세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보 제28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모든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했다. 약사불상은 서기 800년 무렵부터 집중적으로 조성되는데 <삼국사기> 등을 보면 이때부터 질병기사가 많이 나타난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인구가 142만명이나 준 대기근, 전염병의 여파

특히 현종(13회)-숙종(25회)-영조(19회) 등이 전염병의 절정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구자들은 현종-숙종 시대가 소빙하기가 극에 달한 17세기라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1670년(경술년·현종 11년)과 1671년(신해년·현종 12년)에 걸쳐 조선을 덮친 이른바 ‘경신대기근’과, 1695년(을해년·숙종 21년)과 1696년(병자년·숙종 22년) 시작된 ‘을병대기근’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전세계를 강타한 이상저온이 조선에도 닥쳐 냉해와 가뭄, 홍수가 이어졌다. 현종은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이냐”(<현종실록> 1670년 5월)고 하늘을 원망할 뿐이었다. <숙종실록>은 1678년(숙종 4년) 9월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 기근과 전염병으로 10만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25년 뒤인 1695(을해년)~96년(병자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을병대기근’은 가뜩이나 도탄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을병대기근’으로만 140만명이 넘는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서울과 지방을 통틀어 호수는 129만 3083호이고 인구는 577만 2300명으로 집계됐다. 계유년(1693년)과 비교하면 호수로는 25만 3391호가, 인구로는 141만 6274명이 각각 줄었다. 을해년(1695년) 이후 기근과 전염병이 참혹했기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숙종실록> 1699년 11월16일)

1695년부터 99년까지 4년간 조선 인구의 20% 정도가 기근과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했다는 얘기다.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의사 처방전 목간. 열을 제거하고 장내 불순물을 신속하게 제거하는 약재가 포함되어 있다.|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제공

■영조 치세의 어두운 얼굴

흔히들 52년간이나 재위한 영조를 두고 조선 중흥의 기틀을 다진 임금으로 치켜세운다. 하지만 <영조실록>을 찬찬히 뜯어보면 영조 시대의 어두운 얼굴을 볼 수 있다. 이 무렵 역시 전세계에 불어닥친 소빙하기의 끝자락이었다. 1731년(703명), 1733년(2081명), 1741년(3700명)의 전염병 희생자수는 약과였다. 1749년(영조 25년) 12월4일 <영조실록>은 심상치않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여역(전염병)으로 인한 민간의 사망자가 거의 50만~60만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1750년(영조 26년) 1월5일 <영조실록>은 전국 8도에 전연병 때문에 사망한 백성이 즐비하자 그저 “시신을 묻어주는 것이 왕정(王政)의 큰 일”이라고 했다. 전염병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다. 두 달 뒤인 3월23일 “전염병 사망자가 전국적으로 10만명이 넘었다”(3월23일)고 했다. 영조는 안간힘을 다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5월10일 영조는 “지금 전염병은 전쟁보다 심하다”면서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 죽게 생겼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영조는 “아! 저 백성의 죽음이 줄을 이어도 그 임금 된 자가 부덕해서 구해내지 못한다”면서 “이는 하늘의 저버림”이라고 한탄한다.

왕조시대엔 이와같은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나면 신하들이 벌떼처럼 나서 “임금이 모자란 탓이니 마땅히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반성하여 하늘의 징계를 두려워 해야 한다”고 다그치기 일쑤였다. 이를 ‘공구구성(恐懼修省)’이라 했다. 그러나 영조는 이것이 못마땅했다. 아무리 ‘임금이 곧 하늘’인 왕조시대지만 모든 잘못을 군주에게만 돌리는 신하들의 버릇도 역시 문제라고 본 것이다.

“일을 맡은 신하들은 임금의 부덕이라고만 말하지 말라. 백성들을 진휼하는데 심혈을 기울여라. 백성들에게 빌려준 곡식은 가을 추수 때까지 미뤄라. 이 모두가 백성의 고혈(膏血)이다.”

‘호구별성’. 호구와 별성이 서로 결합된 신명(神名)이다. 호구는 마마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천연두를 앓고 죽은 신격을 말한다. 별성은 ‘객성(客星)’을 의미한다. ‘호구별성’은 집집마다 방문하며 천연두를 옮기는 신을 뜻한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월별로 기록한 전염병 사망자수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5일 후인 5월15일 <영조실록>은 “각도의 장계를 미뤄보면 역질로 사망한 이가 12만4000명에 이르고 원적지 밖에서 떠돌다 죽은 이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30만명은 될 것”이라고 했다. 이 해 <영조실록>은 1월부터 월별로 전염병으로 사망한 백성들의 수를 집계해놓았다.

그에 따르면 1월 전국적으로 1만1692명의 사망자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2월 6233명, 3월 3만7581명, 4월 2만5547명, 5월 1만9849명, 6월 3만300명, 7월 2만2261명, 8월 2246명씩 사망했다. 월별 사망자수 집계는 9월 6만7869명이라는 숫자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10월 이후의 사망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다. 9월 한달간 7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그 다음달인 10월부터 사망자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등장하는 9월까지의 월별 사망자수가 맞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1750년 한 해 전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수는 22만3578명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영조에 이어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칭송을 받는 정조의 시대는 어땠을까. 예외가 없었다. 12만8000명에 이르는 전염병 사망자가 나온 해(1799년·정조 23년)가 있었다. 정조는 “굶주린 자와 죽어서도 장사조차 치를 수 없는 자들을 돕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고, “각 지방에서 전염병이 가장 번성한 곳을 골라 여제(려祭·전염병 돌 때 올리는 제사)를 드리라”고 지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염병 매뉴얼까지 전국에 배포했지만…

전염병이 창궐하면 세종처럼 군주가 직접 나서 처방문을 뽑아 각 지방에 내려보낸 경우도 있지만 지방 수령이나 백성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일종의 ‘전염병 매뉴얼’을 편찬해서 배포한 케이스도 있었다. 중종(재위 1506~1544) 연간에 나온 <간이벽온방>과 광해군 연간(재위 1608~1623)에 편찬된 <신찬벽온방>이 그것이다. 특히 1612년(광해군 4년) 12월 함경도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강원도를 거쳐 전국으로 급속히 퍼지자 광해군(1608~1623)은 “전염병 재앙은 과언의 허물 탓”이라고 자인하면서 “그러니 과인이 책임지고 퇴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광해군은 어의인 허준(1539~1615)에게 명해 ‘전염병 매뉴얼’ 격인 <신찬벽온방>을 편찬토록 했다.(1613년 2월) 전염병 발생 두어달 안에 편찬과 배포까지 마무리했으니 그 시대 기준으로는 참으로 발빠른 대처라 할 수 있다. 한문 4대가 중 한 사람인 이정구(1564~1635)은 “<신찬벽온방> 편찬으로 누추한 시골의 후미진 골목이라도 다 처방문을 의지하여 구해 살게 되었다”고 했다.

■기상이변 같은 자연의 질서가 무너지면…

하지만 18세기 들어서야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1749~1823년)가 천연두의 근대적인 예방법인 종두법을 최초로 개발하지 않았던가. 또 ‘전염병의 원인=병원성 미생물’이라는 학설은 19세기가 되서야 ‘미생물학의 아버지’라는 루이 파스퇴르(1822~1895)가 완성했다지 않은가. 그랬으니 그 이전에는 원인불명의 돌림병이 돌면 곧 역귀의 조화로 여기기 일쑤였다. 또 세종의 처방에도 들어있듯 참기름을 코에 바르거나 종이 심지를 말아서 콧구멍에 넣어 재채기 하는 방법 같은 민간요법도 ‘전염병 매뉴얼’에 들어있었다.

“뭐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이 어디있냐”는 실소가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생물에 의한 전염 원리를 몰랐던 그 조선시대에도 병의 전염 원인을 나름대로 이해한 대목을 읽을 수 있다.

예컨대 허준의 <신찬벽온방>은 ‘운기(運氣)의 부조화’를 전염병 창궐의 원인으로 꼽기도 했다. 인간의 신체도 기의 균형이 깨지면 병이 나듯 자연의 기운도 조화를 잃으면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허준은 ‘운기의 부조화’를 두고 ‘따뜻해야 할 봄이 춥거나 더워야 하는 여름이 서늘하거나 서늘해야 하는 가을이 덥거나 추워야 하는 겨울이 따뜻하거나 하는 경우’라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16~18세기 전세계를 강타했던 소빙하기의 기상이변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기상이변으로 멸망을 재촉한 명나라

그러나 그 어떤 대책도 전염병을 옮기는 미생물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한 시대였던만큼 전염병을 잡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그것은 어떤 나라 어떤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단적인 예로 지금보다 기온이 1.5~2도나 낮았다는 중국 명나라 말기(1600~1640년) 중국 경제의 중심지였던 양쯔강(揚子江) 이남 지역을 강타한 자연재해와 뒤이은 전염병은 ‘사람 고기를 먹을 만큼’ 심각해졌다. 1641년 이자성(1606~1645)의 반란군이 인구의 70%의 이상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소멸된 황허(黃河) 이남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

20세기 이후 항생제가 개발되면서 세균성 전염병은 상당부분 정복된다. 하지만 또하나 변수가 생겼으니 바로 바이러스였다. 바이러스는 항생제로 치료되는 세균과 달리 변이가 쉬워 생길 때마다 백신을 개발해야 하고, 2차 감염까지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인류가 대처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도 RNA를 기반으로 하는 바이러스는 그 유전적 전달구조가 완벽하지 않기에 돌연변이가 많이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2000년대 이후 코로나 바이러스(사람과 동물에서 나타나는 호흡기 바이러스 중 하나)는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이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와 코로나19의 형태로 쉽게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김준근의 <기산풍속화첩>에 실린 마마배송굿. 천형으로 일컬어지던 천연두는 18세기 영국 의사 제너가 종두법을 개발하고 나서야 퇴치의 길로 접어들었다.

■코로나19가 마지막인가

그런데 ‘코로나19’가 마지막이 아닐 것이라는 걱정이 든다. 이준호의 논문(‘조선시대 기후변동과 전염병 발생이 미친 영향’)은 “1511~1560년과 1641~1740년, 1781~1890년 사이의 전염병 창궐은 소빙하기 징후로 인한 이상기후가 주된 원인”이라고 보았다. 논문은 “한반도의 경우 2100년 쯤 기온이 평균 1.4도 이상 상승한다”고 예측한 IPCC(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의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전혀 새로운 전염병과 전염매개층의 창궐, 감염성 질환의 증가 등을 걱정하고 있다. 2012년 파리기후변화협약의 핵심은 국제사회가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1850~1900)보다 2도 이내로 제한하고, 1.5도가 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설혹 ‘1.5도 상승’ 목표가 지켜져도 지금까지의 역사기록을 감안한다면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다. 동북아 온도가 1.5~2도 떨어진 소빙하기의 명나라와 조선의 예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각설하고 ‘사회적 거리 2m’를 강조한 작금의 ‘코로나19’ 대책을 보면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언급을 떠올린다. “전염병은 콧구멍으로 그 병기운을 들이마셨기 때문에 생긴다. 전염병을 피하려면 마땅히 그 병기운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환자과 일정한 거리를 지켜야 한다. 환자를 문병할 때는 바람을 등지고 서야 한다.”(<목민심서> ‘관질’)(7)

<참고자료>

이준호, ‘조선시대 기후변동이 전염병 발생에 미친 영향’, <한국지역지리학회지> 25권 102호, 한국지역지리학회, 2019

강상순, ‘조선시대 역병인식과 신이적 상상세계’, <일본학연구> 46권 46호, 단국대일본연구소, 2015

조원준, ‘조선시대 벽역의서에 나타난 질병예방법’, <대한예방한의학회지>, 제12권 제2호, 대한예방한의학회, 2008

김영환, ‘조선시대 역병발생기록에 관한 분석연구’, <보건과학논집> 제27권 2호, 2001

김문기,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재해와 기근’, <이화사학연구>43권 43호, 이화여대 사학연구소, 2011

김호, ‘1612년 온역발생과 허준의 <신찬벽온방>’, <조선시대사학보> 74, 조선시대사학회, 2015

조영현, ‘17세기 위기론과 중국의 사회변화-명조 멸망에 대한 지구사적 검토’,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2014

유근자, ‘통일신라 약사불상의 연구’, <미술사학연구> 203권 203호, 한국미술사학회, 1994

 

 

177년된 태안 섬마을 폐가의 벽지에서 조선시대 군인명부 쏟아졌다

이기환 선임기자2020. 6. 4. 09:00

[경향신문]

177년 된 섬마을 폐가의 벽지에서 발견된 19세기 군적부. 군역의 의무가 있던 장정 명단과 특징을 적은 공문서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응? 상량문이 보이네. 저건 ‘수군(水軍)’이라는 글자네”. 지난 4월 21일 충남 태안 신진도에 근무중인 정동환 산림청 산림수련관 시설관리인(45)은 연수원 근방의 숲을 답사하다가 다 쓰러져가는 폐가를 발견한다. 사람들 눈길에 닿지 않은 곳에 숨어있었던 폐가였지만 왠지 들어가 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전날 밤 평소 좋아하던 고향 어르신을 만나뵙는 꿈을 꾸었던 터라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폐가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서 산림청 차원에서 활용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도광 23년’이라고 쓰여진 상량문.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재위 1820~1850)의 연호이며, ‘도광 23년’은 1843년(헌종 9년)을 가리킨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겉보기에 다 쓰러져가는 집 같았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정동환씨의 눈에 상량문(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이 보였다. 또한 뜯겨져 노출된채 바람에 흩날리던 벽지 사이에서 한자로 된 글씨들이 보였다. 얼핏보니 ‘수군(水軍)’자였다. 정동환씨는 곧바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에 신고했다. 고향이 백제 고도인 부여인지라 문화유산에 조예가 남달랐기에 신속한 후속조치를 취한 것이다.

신고를 받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전문가들과 함께 상량문을 읽어보니 ‘도광(道光) 23년 7월 16일’이었다.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道光帝·1820~1850) 연호인데, 도광 23년은 1843년(헌종 9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폐가는 무려 177년 된 집이었던 것이다. 연구소의 추적 조사 결과 이 집은 1970년대 말 주인이 바뀐 후 50년 가까이 방치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벽지에서 확인된 글씨 역시 심상치 않았다.

 
폐가의 벽지에서 확인된 한시. ‘새로 잔치를 베풀어 열었다는 소문으로 사방에 선비들이 많이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수군(水軍) 김아지, 나이 정해생 15세, 키 4척, 거주지 내맹면, 아버지 윤희’ ‘보인(保人) 박복현, 나이 임오생 18세, 키 4척, 거주지 고산면, 아버지 성산’….

즉 이 명문은 19세기 안흥진성을 지키던 수군의 군적부, 즉 군인 명단이었다. 이 군적부는 안흥진 소속 60여 명의 군역 의무자를 전투 군인인 수군(水軍)과 보조적 역할을 하는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이름, 주소, 출생연도, 나이, 신장을 부친의 이름과 함께 적어두었다. 수군의 출신지는 모두 당진현(唐津縣)이었고, 당진 현감 직인과 수결(手決·자필서명)이 확인됐다.

진호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연구관은 4일 “수군 1인에 보인 1인으로 편성된 체제로 16세기 이후 수군편성 체계를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서”라고 밝혔다. 명문 중 ‘보인’은 직접 군복무를 하는 사람의 남은 가족을 재정적으로 돕는 비번자를 가리킨다.

177년된 폐가. 1970년대 이후 방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산림청 산림연수원 소속 시설관리인이 발견했다.|정동환씨 제공


문경호 공주대교수(역사교육과)는 “작성 형식이나 시기로 미루어 수군의 징발보다는 군포(軍布·군복무 직접 하지 않은 병역의무자가 대가로 납부하던 삼베나 무명)를 거두어 모으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곳 안흥량(태안 앞바다) 일대의 수군은 고려 후기부터 들끓었던 왜구의 침입을 막고, 유사시에는 한양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군 역할을 했다. 특히 안흥량은 물살이 매우 빨라서 조운선의 난파사고가 잦았던 곳이다. 손태옥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실무관은 “따라서 이곳 수군은 조선 최악의 험조처(지세가 가파르거나 험하여 막히거나 끊어진 곳)인 안흥량을 통행하는 조운선의 사고방지와 통제를 주요 임무로 삼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폐가에서는 판독이 가능한 한시(漢詩) 3편도 발견됐다.

정동환씨가 발견한 177년된 폐가. 겉은 허물어졌지만 골격은 대부분 남아있었다.|정동환씨 제공

 

“물품은 진진하여 이같이 많고(物物陳陳如此多) 사방 선비들은 서로 다투어 오네(四方士士爭相來). 요순 세월 같은 앞바다 섬에는(堯舜日月近海島) 전해지는 유풍이 이때까지 성하구나(自來遺風此時盛)”.

“오직 우리는 본시 산 구름 속에 은거하였으니(惟吾本是隱山雲) 벗이 있으나 여러 해 찾아오기는 적었네(有友多年來到少)”.

“이르는 곳마다 이 강산 이 푸른 나무에(到處江山是綠樹)…조각조각 금빛 □ 제일로 빛나고(片〃金□第一光) 소리마다 좋은 속삭임 무한히 좋구나(聲聲好語無限好)”.

군적부는 안흥진 소속 60여 명의 군역 의무자를 전투 군인인 수군(水軍)과 보조적 역할을 하는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이름, 주소, 출생연도, 나이, 신장을 부친의 이름과 함께 적어두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시는 당시 조선 수군이거나 학식을 갖춘 당대인이 바닷가를 배경으로 수군진촌(水軍鎭村)의 풍경과 일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진도 수군진촌에 자리한 능허대 백운정은 예부터 안흥팔경의 하나인 ‘능허추월(凌虛秋月)’이라 했다. 중국의 능허대와 모습이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사신들이 안흥 앞바다에 체류할 때 이곳을 ‘소능허대’라 칭했다. 또한 전국의 시객들이 몰려들어 시를 짓던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장은 “이번 발견은 전략적인 요충지였던 안흥량 일대에 분포한 수군진 유적과 객관(客館·사신 영접 관청) 유적의 연구와 복원 및 활용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8)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200년 조선의 패션리더 ‘별감’, 서울을 ‘붉은 옷’으로 물들였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23.10.24 05:00 수정 : 2023.10.25 11:36

19세기 서울의 풍물을 묘사한 장편 가사 ‘한양가’ 등과 조선 후기 풍속도를 토대로 검증해본 200년전 패션리더 ‘별감’들의 옷차림새. 혜원 신윤복의 ‘야금모행’과 혜산 유숙의 ‘대쾌도’에 붉은색의 돋보이는 옷차림의 별감들이 보인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사진설명은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한국연구소 연구원 제공

200년전 서울과 서울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려볼 수 있을까.

사실 100년전이면 신문·잡지가 발행된 시기였고, 사진 기록까지 다수 남아있으니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200년전은?’ 하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다. 다행히 단원 김홍도(1745~?)와 혜원 신윤복(1758~?) 같은 이들의 풍속화로 200년전의 ‘이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신윤복의 ‘유곽쟁웅’속 별감의 패션. 멀리서도 유독 돋보이는 붉은 색 옷이 별감의 ‘시그니처’ 패션이었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이민주 연구원 설명

■껌씹고 침 좀 뱉은 200년전 양아치

또 놓쳐서는 안될 자료가 있다. 18세기말~19세기초의 서울 풍물을 시로 묘사한 ‘성시전도시’ 몇 편이다. 그중 초정 박제가(1750~1806)의 시가 눈길을 끈다.

“물가 주막엔 술지게미 산더미네…눈먼 장님 호통치니 아이놈들 깔깔 거리고…개백정이 옷 갈아 입으면 사람들은 몰라뵈도, 개는 쫓아가 짖어대고 성을 내며 노려본다.”

별감과 함께 조선의 패션피플이었던 기녀들의 옷차림새. ‘전모를 쓴 여인’은 마치 패션쇼의 ‘런웨이’를 걷고 있는 패션모델같다. 신윤복의 미인도는 조선의 모나리자라는 평을 듣고 있다.|간송미술문화재단·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박제가는 또 ‘아전배들은 허리로 인사하고, 시정잡배들은 이빨 사이로 침을 뱉어낸다’고 묘사했다. ‘쓰읍~’하고 이빨 사이로 침을 갈기고, ‘쫙~쫙’ 소리내며 껌 좀 씹는 영락없는 뒷골목 양아치들의 모습이다.

이학규(1770~1835) 등의 ‘성시전도시’도 공감각적이다. “생선가게에선 비린내 살살 풍기고…누더기 사내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어린 계집종은 정수리에 동이 이고~쏟아지려 하자 머리를 치켜든다.”고 했다.

신택권(1722~1801)의 시는 당대의 담배열풍을 고발한다. “위로 정승판서부터 아래로 가마꾼까지, 안으로 규방서부터 외방고을의 기생까지 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가 (담배를) 즐기지 않겠느냐.”고 했다.

신택권의 시에는 당대 부동산 거래의 허와 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

“집주름(家儈·부동산 중개업자)이 1000냥을 매매하고 100냥을 값으로 받으니 동쪽 집 사람에게 서쪽 집을 가리킨다.”

1844년 무렵의 서울의 풍물을 묘사한 장편 가사 <한양가>. ‘천지개벽하여(1구) 일월이 생겼어라(2구)…’로 시작하는 가사는 1600여구(목판본)까지 이어진다.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각종 의례 및 행사, 놀이, 공연 등을 풀이해주고 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부동산 중개업자가 이사를 유도하고 중개수수료(1할)를 챙기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예전엔 조용하고 외진 곳을 좋아했으나 지금은 시끄럽고 낮은 데를 탐낸다”는 표현도 있다. 요즘의 강남 선호 현상을 가리키는 말인가. 그러나 “서민들은 외진 골목에 팔짱끼고 살자니 생계가 어려워 빈촌에 둥지 틀어 시장 가까이 산다”고 했다. 200년이 지난 요즘과 다르지 않다. 또 김희순(1757~1821)의 ‘성시전도시’에 아주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협객을 사모하는 풍모가 남아…문득 의기투합하는 자를 만나면 술집과 찻집에서 손바닥을 부딪히네.(酒樓茶肆掌一抵)”

다음 구절도 걸작이다. “취한 뒤엔 고담준론, 공자들을 압도하며 한평생 호화로움 언제나 자신한다”(<산목헌집>)는 것이다. 만나면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허세를 부리고, 술에 취하면 큰소리 뻥뻥 치면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해대고….

<한양가>는 ‘서울은 하늘이 내린 왕도이자 해동의 으뜸’이라면서 “외관도 화려하고 문물도 가득하다’고도 한다. 또 “한강에 조운선이 끝없이 드나들고, 세금을 가득실은 수레 행렬이 궁궐(첫머리)~한강(끝머리)까지 이어졌다. 나라창고에 10년 곡식을 비축했다”고도 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00년전 풍물기행

이 ‘성시전도시’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

서울의 뒷골목 풍경을 생생하게 표현했다지만 작자들은 거개가 사대부 출신이었다. 게다가 ‘성시전도시’는 한문시다.

사대부가 아니라 서울의 뒷골목을 직접 누빈 것으로 추정되는 중인계층이 쓴 200년전 서울풍물지가 있다.

무엇보다 순한글로 된 가사집이다. 그것이 1844년(헌종 10) ‘한산거사’(중인 추정)라는 인물이 쓴 <한양가>이다.

<한양가>는 서울의 저잣거리 풍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점포엔 몽골산 무명 및 고약(곪을 때 바르는 약), 감투모자 회회포(중앙 아시아산 베)…민강(생강을 설탕물에 조린 과자), 사탕·오화당(오색사탕)·연환당·옥춘당(쌀가루 사탕)… 등 수입산 잡화를 늘어놓았다”고 했다. 요즘으로 치면 ‘삐끼’의 모습도 보인다. ‘여립군(여리꾼)이다. 행인을 끌어들여 물건을 사게 하고 수고료를 받는 자들을 가리킨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그런데 이 ‘한양가’는 요즘의 3분짜리 노래 한 곡이 아니다. 대작이다.

‘천지개벽하여(1구) 일월이 생겼어라(2구)…’로 시작하는 가사는 1600여구까지 이어지는 장편이다.

<한양가>는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지는 각종 의례 및 행사, 놀이, 공연 등을 풀이해주고 있다.

마침 국립한글박물관이 대작 한글가사인 <한양가>에 담겨있는 200년전 서울 풍경을 소개하는 특별전(‘서울구경 가자스라, 한양가>)을 2024년 2월12일까지 열고 있다.

19세기 한양의 뒷골목에 늘어선 노점들. 시정잡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행사에 발맞춰 <한양가> 학술대회까지 열렸으니 이 기회에 <한양가>를 한번 소개해보고자 한다. 사실 <한양가>는 한글 가사라지만 워낙 고어체인 탓에 일반인들은 여전히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해제를 토대로 감상해보면 200년 전의 서울 풍물을 주제로 들을 수 있는 ‘해설을 곁들인 라이브 중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양가>는 우선 ‘한양(서울)은 하늘이 내린 왕도이자 해동의 으뜸’이라고 소개한다.

‘외관도 화려하고 문물도 가득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낙관적인 분위기로 관람객들을 궁궐로 이끈다.

“…전각마다 한가운데 3층 보탑(임금 자리) 높이 두고…한편의 보불(임금의 예복에 수놓은 도끼와 ‘亞’자 문양) 병풍에 엄위(위풍당당)한 그린 도끼…제간거흉(간악함을 흉함을 제거)하는 기상, 제왕의 위엄이요.”

얼마나 친절한 설명인가. 병풍의 도끼 그림은 간사하고 흉함을 제거하려는 군주의 기상이자 위엄이라고 한다.

<한양가>에는 1843년(헌종 9) 헌종이 건릉(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릉)과 헌릉원(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 묘)을 행차한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판 ‘삐끼’

<한양가>가 그리는 시장(시전)의 모습도 자못 생생하다.

“청포전(점포의 일종)에 당물화(중국 수입물품)을 진열했다…몽골산 무명 및 고약(곪을 때 바르는 약), 감투모자 회회포(중앙 아시아산 베)…민강(생강을 설탕물에 조린 과자), 사탕·오화당(오색사탕)·연환당·옥춘당(쌀가루 사탕)….”

직물은 물론 약과 군것질 거리 등 중국 수입 잡화의 이름은 오로지 <한양가>에서만 보이는 자료이다.

‘여립군(列立軍·여리꾼)’의 모습도 보인다.

“큰 광통교 넘어서니 육의전 여기로다. 일 아닌 여립군과 물화맡은 전시정은…사람 불러 흥정할제 경박하기 측량없다.:

여립군, 혹은 여리꾼은 시쳇말로 ‘삐끼’이다. 가게 앞에 서있는 사람을 끌어들여 물건을 사게 하고 주인에게서 수고료를 받는 자이다. ‘여리꾼’ 이야기는 <한양가>에서만 보인다.

<한양가>에는 1843년(헌종 9) 헌종이 건릉(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릉)과 헌릉원(사도세자와 부인 혜경궁 홍씨 묘)을 행차한 장면도 묘사되어 있다. 또 능행에서 돌아온 헌종이 과거시험을 치르는 모습도 들어있다.

<한양가>에 등장하는 과거부정행위. 과거시험장인 창경궁 춘당대 궁궐문이 열리자마자 ‘오픈런’으로 자리를 차지한 뒤 응시자는 가만 있고, 문장담당인 ‘거벽’이 읊어내는 답안을 글씨담당인 ‘사수’가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뒤 제출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과거시험장의 ‘오픈런’

그 중 부정행위가 난무한 과거장의 모습을 생생한 필치로 그려낸게 눈길을 끈다.

<한양가>는 ‘밤중에 궁궐 문을 여니…각색의 등불이 들어왔다. 마치 새벽별 흐르는듯 기세는 백전일세, 쏜살 같이 빠르다’고 했다. 궁궐 앞에서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면 ‘와!’하고 달려가 자리를 맡아두었다는 이야기다. 왜 ‘오픈런’으로 자리싸움을 벌였을까.

요즘처럼 수험번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 먼저 들어가서 현제판(懸題板·시험문제를 내거는 널판지)에 게시되는 문제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판뷰’라고나 할까.

단원 김홍도의 ‘공원춘효도’에 나타난 과거시험장 모습. 수험생(거자)는 가만히 앉아 있다. 문장담당인 ‘거벽’과 글씨 감당인 ‘사수’가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다.|안산시 소장

그렇게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였으니 시험은 정상적으로 치렀을까. <한양가>는 “문제를 받아들고 각자의 자리에서 (예상문제지 및 답안지, 참고서적 등을 담은) 책행담(책가방)을 열어 답을 풍우처럼 지어낸다”고 했다.

그렇다면 별문제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답안을 작성하는 자가 응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옆에 앉아있던 거벽(문장 담당)이 구구절절 답안을 읊어대고, 사수(글씨 담당)가 일필휘지로 써내려간다.”(<한양가>)

즉 ‘거벽’이 책가방에 숨겨온 예상답안지나 참고서를 꺼내 답안을 지어내면 ‘사수’는 촌각의 지체없이 글씨를 써서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럼 수험생(거자)은 무엇을 했을까. 가만 앉아있기만 했다.

<한양가>에 묘사된 부정행위는 김홍도의 ‘공원춘효도’에도 100% 똑같이 그려져 있다.

오로지 <한양가>에서만 보이는 ‘승전놀음’. 북일영(경희궁 북쪽 훈련도감 분영)에서 열린 ‘승전놀음’에는 당직근무를 끝낸 100여명의 별감이 공연을 관람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국립한글박물관 자료제공

■별감 100명을 위한 대규모 공연

그런데 연구자들은 <한양가>의 으뜸은 전체 분량의 17%에 달하는 ‘승전놀음’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이 ‘승전놀음’은 오로지 이 <한양가>에만 소개되지 다른 자료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승전(承傳)’은 ‘왕명을 전달하는’ 하급관리를 뜻한다. 궁궐에서 액정서 소속의 잡직에 해당하는 ‘별감’들이다.

액정서는 바로 왕명의 전달과 알현, 그리고 왕의 붓과 벼루, 궁궐문의 열고 닫음, 궁궐의 설비 등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그렇다면 ‘승전놀음’은 궁중의 별감들을 위한 공연이라 할 수 있다.

‘구경가자 구경가자’로 시작되는 <한양가>의 ‘승전놀음’은 북일영(경희궁 북쪽 훈련도감 분영)의 정자에서 열렸다.

‘눈빛같이 흰 휘장에 구름 같은 높은 햇볕 가리개(차단막)’ 등으로 화려한 무대를 꾸며놓고 본격적인 공연을 펼친다.

별감 100여명이 관람한 ‘승전놀음’ 공연에는 내로라나는 연주자와 가수는 물론 장안의 기녀들이 총출동했다. <한양가>는 이 초대형 공연에 출연한 연주자와 가수, 기녀들 이름까지 일일이 열거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금객(거문고 연주자) 가객(가수) 다 모였구나. 거문고 임종철이, 노래에 양사길이, 계면(슬픈 곡조)에 공득이…생황, 퉁소, 죽장고, 피리, 해금…각색의 기생 들어온다…내의녀, 침선비, 공조 계집종(기녀 역할), 혜민서 의녀(기녀 역할)…늙은 기생, 젊은 기생, 어린 기생…”

장안의 내로라는 연주자·가수는 물론 추월·관산월·연앵·부용·영산홍·채봉·금옥·초선·매향 등 기녀들까지 총출동했다.

“차례로 늘어앉아 놀음(공연)을 재촉한다…어린 기생…우조(남성적이고 씩씩한 소리)라 계면(단조)이며…‘춘면곡’과 ‘처사가’, ‘어부사’, ‘상사별곡’, ‘황계타령’, ‘매화타령’ 등이 듣기 좋다…”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 다양한 악기 연주자들의 음악에 맞춰 기녀들이 검무를 추고 있는 모습이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이중 ‘춘면곡’은 임을 여의고 괴로워하는 남자의 감정을 읊었다. ‘상사별곡’은 이별한 연인의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했다. ‘황계타령’은 하루아침에 임과 이별한 후의 마음을 전했다. ‘매화타령’은 기녀들의 복잡한 마음을 노래한 곡이다.

“기생들은…(영산회상곡의) 웃영산·중영산·잔영산 입춤(춤꾼의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추는 춤)추니…배따라기 춤이며 대무(마주 서서 추는 춤), 남무(기생이 쪽빛 창의 입고 추는 춤) 다 춘 후에…허리를 잔뜩 매고 상모 단 노는 칼을….”

노래와 연주, 춤까지 삼위 일체가 어우러진 대규모 공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속에 등장하는 ‘별감’. 기방에서 일어난 취중난투극을 말리는 등 기방 을 관리하는 이른바 ‘기부’로 표현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별감=기방의 기둥서방

그런데 <한양가>를 보면 흥미로운 구절이 보인다. 이 공연에 ‘난번 별감(당직근무를 마친 별감) 100여명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궁금하다. 왜 이날 공연이 별감들을 위한 페스티벌로 치러졌을까.

이들의 독특한 신분 때문이다. 별감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그리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임금(혹은 왕비나 왕세자)을 지근거리에서 모셨기에 그 위세는 어지간한 양반 못지 않았다.

문필로 출세할 수 없었던 이들은 종종 조선의 밤과 뒷골목을 넘나드는 ‘유흥가의 황제’로 군림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특별한 배경이 있었다. 18세기초 대동법의 확대시행으로 각 지방에서 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쌀(혹은 베와 동전)로 통일하게 됐다. 그러자 변화가 일었다. 각 지방에서 올라오는 쌀이 한강의 포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오게 되면서 물류량이 급증한다. 조정은 거둬들인 쌀을 팔아 필요한 물품을 시장에서 사서 쓰게 되었다.

<한양가>는 “기생들의 치장이 평소에도 화려한데 하물며 승전 놀음, 별감의 놀음인데 평범하게 치장하랴”고 반문한다. <한양가>는 온갖 수식어로 공연장에 입장하는 기녀들의 행색을 소개한 뒤 “…(온갖 몸단장을 한 기녀들이) 백만 교태 다 피우고 모양 좋게 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시장이 발달했다.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받아 생산하는 민영수공업도 활발해졌다.

서울에는 다양한 물화가 넘쳤고, 저잣거리에는 유흥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다.

예전 관리가 기생의 집에 조용히 찾아 하룻밤 머물렀던 공간이던 기방 문화도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에는 없었던 업종이 생긴 것이다. 그것이 기방의 ‘기부(妓夫·기둥서방) 제도’였다.

당시 서울의 궁중연회에 동원된 지방출신 기생들은 관으로부터 별도의 여비를 받지 않았다. ‘각자도생’이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숙소와 생활비가 큰 문제였다. 이때 기녀들의 의·식·주를 주선하면서 기방영업도 시킨 자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기부(妓夫)였다. 조정은 아예 기부가 될 수 있는 직업군을 정해놓았다.

왼쪽은 국립도쿄박물관 소장 ‘미인도’(작자미상). 오른쪽은 신윤복의 ‘청금상련’. 기녀는 물론이고 의녀들까지 행사에 동원된 모습이다.

즉 서울의 경우 궁궐의 별감, 포도청 군관, 승정원의 사령, 의금부 나장, 궁가나 외척의 겸인(청지기), 그리고 무사 등이었다. 그중 왕과 왕비, 세자의 호위를 맡는 등 힘깨나 썼던 무예별감은 더더욱 ‘유흥가의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랬으니 <한양가>에 등장하는 대규모 공연은 어땠을까 짐작할 수 있다.

장안의 유흥계를 장악했던 별감이 100명 넘게 모이는 행사가 아닌가.

당대 내로라하는 유명가수와 연주자. 그리고 서울에서 활동했던 모든 예능 기녀들이 총동원되었을 것이다.

<한양가>는 당대 최고의 패션리더 ‘별감’들을 두고 “맵시도 좋거니와 치장도 놀랍다”고 소개한 뒤 그들의 패션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백만 교태’ 피우고 입장한 기생들

별감의 위상과 관련해서 <한양가>의 한 구절이 주목을 끈다. 공연장에 들어서는 기생들의 모습이다.

“각색 기생 들어온다. 예사로운 놀음에도 치장이 놀라운데 하물며 승전 놀음, 별감의 놀음인데 평범하게 치장하랴.”

공연 기녀들의 몸치장은 평소에도 화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들을 관리하는 별감, 즉 일종의 기획사가 주최한 행사이니 얼마나 멋들어지게 몸단장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얼음 같은 누런 전모(햇빛 가리개) 자지갑사(자줏빛 고급 비단) 끈 달고 구름 같은 허튼머리 반달같은 쌍얼레빗으로 솰솰 빗겨 고이 빗겨 조각달 좋게 땋고….”

<한양가>는 온갖 수식어로 공연장에 입장하는 기녀들의 행색을 소개한 뒤 그 모습을 한마디로 정리한다.

“…(온갖 몸단장을 한 기녀들이) 백만 교태 다 피우고 모양 좋게 들어온다.”

박제가의 <성시전도시>. 조선의 수도 한양의 풍물을 적나라하게 전달했다. 박제가의 시는 정조가 실시한 시험에서 2등을 차지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 제공

■조선의 패션리더 ‘별감’

그런 멋쟁이 기녀들을 관리하는 별감들은 어떻겠는가. 그와 관련해서 <한양가>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보인다.

‘별감들 거동보소. 난번별감(당직 끝난 별감) 100여명이 맵시도 있거니와 치장도 놀라옵사…’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랬다. 별감은 짝궁인 기녀와 함께 당대 조선의 패션리더였다. 무엇보다 왕와 왕비, 세자를 지근거리에서 지킨 이들이었으니 거개가 헌헌장부(軒軒丈夫)였을 것이다. 게다가 별감의 ‘시그니처’는 멀리서도 돋보이는 홍의(붉은 옷)였다.

홍의는 다홍색 생초(삶지 않는 명주실로 짠 비단)로 만든다. 신윤복(1758~?)의 풍속도 ‘유곽쟁웅’과 ‘주사거배’, ‘야금모행’, 유숙(1827~1873)의 ‘대쾌도’에는 한눈에도 도드라진 빨간 패션의 별감이 보인다.

박제가의 <성시전도시>. 조선의 수도 한양의 풍물을 적나라하게 전달했다. 박제가의 시는 정조가 실시한 시험에서 2등을 차지했다. |안대회 교수 제공

<한양가>는 이 멋쟁이 패션리더인 별감의 옷차림새를 한참 설명한다.

“편월(조각달 모양) 상투…곱게 뜬 평양 망건, 외점박이 대모(거북등껍질) 관자(망건 줄 꿰어매는 작은 고리)…. 상의원(궁궐 옷제조 관청) 자지팔사(8가닥으로 꼰 자줏빛 노끈) 초립 밑에…”(머리치장)

“다홍 생초(삶지않은 명주실로 짠 비단) 홍의(붉은 옷) 숙초 창의(삶은 명주실로 짠 비단) 받쳐입고 보라누비 저고리며 외올뜨기 누비바지….”(몸치장)

옷은 남들의 눈에 띄는 붉은 색을 입고 그 속에 다양한 옷을 겹쳐 입는 ‘레이어드 룩’(여러 단을 연결한 패션)이다.

“…오색 비단 괴불줌치(주머니 끈 끝에 차는 노리개) 향 주머니 섞어 차고…삼승 버선(성글고 굵은 베로 만든 버선) 수눅(버선의 가운데 바느질선) 파서 맵시있게 하여 신고….”(허리 및 발치장)

<한양가> 목판. 200년전의 서울 풍물을 한글로 자세하게 표현해놓은 대작 ‘가사’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국립한글박물관 제공

■19세기가 태평성대인가

<한양가>에는 다소 의아한 대목이 보인다. 전국에서 거둔 세금을 한강에서 궁궐로 실어나르는 모습을 묘사했다.

“한강에 조운선이 끝없이 드나들고, 세금을 가득실은 수레 행렬이 궁궐(첫머리)~한강(끝머리)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게다가 “나라창고에 10년 곡식을 비축했다”고도 했다. 이 대목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국립한글박물관은 대작 한글가사인 <한양가>에 담겨있는 200년전 서울 풍경을 소개하는 특별전(‘서울구경 가자스라, 한양가>를 2024년 2월12일까지 열고 있다.|국립한글박물관 제공

때는 바야흐로 19세기 중반인 1844년 즈음의 일이다. 조선 개국 후 450년이 흘러 갖가지 모순이 폭발되는 시기였다.

이른바 삼정(전정·군정·환정 또는 환곡)의 문란으로 홍경래의 난(1811)과 진주농민봉기(1861)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여기에 세도정치의 심화로 국정이 특정 세력에 의해 농단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10년 곡식을 비축했다’니….

그러니 <한양가>는 당대의 현실을 외면한 ‘찬양가’로 여겨질만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러한 이상향을 갈구하는 작자의 소망을 반영한 가사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반어법으로…. 한편으로는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어지럽고 혼란한 정치·사회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은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일상의 삶이라는 것을…. 역사란 일면만 보면 안된다는 것을 <한양가>가 증거해준다.(이 기사를 위해 강명관 부산대 교수,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통한국연구소 연구원, 고은숙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관, 정은진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9)

<참고자료>

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강명관, <한양가>, 신구문화사, 2008

고은숙·강명관·홍순민·김지영·유재빈·노경희, <한양가로 그려낸 조선후기 한양>(학술대회 발표집), 국립한글박물관, 2023

송지원, ‘19세기 <한양가>에서 노래한 조선의 음악 문화’, <한양가로 그려낸 조선후기 한양>, 국립한글박물관, 2023

양보경, ‘한양가에 비친 조선 후기 서울의 모습’, <토지연구> 5,4, 한국토지개발공사, 1994

이민주, ‘<한양가>를 통해 본 조선 후기 패션 리더, 별감과 기생’, <한양가로 그려낸 조선후기 한양>, 국립한글박물관, 2023

조재희, ‘조선후기 서울 기생의 기업 활동’, 이화여대 석사논문, 2005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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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재벌들의 돈버는 법 베푸는 법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19.08.01 14:19

조선 영조시기에 식니당 이재운이 쓴 <해동화식전>. 이재운은 부를 경시하고 가난을 미덕으로 삼던 조선사회에서 ‘부는 미덕이고, 가난은 악덕’이라고 주장했다. |안대회 교수 제공

“이진욱의 장례를 치르는 날… 멀거나 가까운 사이를 따질 것 없이 다들 부의금을 보내고 찾아와 조문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빈털터리 고아로 태어나 큰돈을 번 18세기 부자 이진욱의 장례식 풍경입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을 보기 어렵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진욱의 장례식을 보면 그 어떤 재상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추구한 조선 사회의 도덕 기준으로 본다면 이진욱의 삶을 좋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집안의 살림살이는 어찌되는지 살피지 않았다”든가, “생업에 힘쓰지 않았다”든가 하는 것은 당대 조선사회의 미덕이었으니까요. 이것을 그럴듯한 말로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시대에 오히려 ‘가난이 악덕이고, 부는 미덕’이라고 주장한 이진욱 같은 사람을 ‘존경받아야 할 인물’로 평가한 이가 있었습니다. 18세기 문인 이재운(1721~1782)입니다. 이재운은 “군자는 상인이 세 곱절의 이익을 남기며 장사하는 것을 안다”라는 <시경>의 구절을 들어 양반도 상인처럼 상행위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최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가 발굴한 이재운의 <해동화식전>은 바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경제통념을 뒤집는 이론과 사례를 정리한 조선시대 재테크책이자 조선경제의 실체를 파헤치고 다양한 경영방법을 안내한 경제·경영전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1750년 무렵 쓴 것으로 짐작되는 이 책은 조선의 뿌리깊은 경제관념을 뒤엎고 ‘잘난 체 하지말고 돈 좀 벌라’고 강조하고 있답니다.

“부유하면 덕이 모여들고 가난하면 악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덕과 악은 복과 벌의 뿌리요. 가난함과 부유함은 또 악행과 덕행의 근본이다.”

이재운은 ‘부자는 나쁘고 빈자는 착하다’는 조선사회의 통념을 배격하고 오히려 ‘부는 미덕이고, 가난은 악덕’이라고 단언합니다. 이재운은 또 “진정 뛰어난 선비는 계획을 세워 부유한 집안을 만든 뒤 인품도. 학문도 사회적인 명망도 얻으려 시도했다”고 주장합니다.

“1년 생활비로 100만전(1만냥)을 쓰는 수십명의 부호가 있다. 그의 부와 명예, 권력은 삼정승도 저리 가라는 수준이다. 영의정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이 국무총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재운은 “또 자수성가로 부를 쌓은 이들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구체적인 사례를 듭니다.

“부자는 나라에 세금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는 충성됨이다…집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혀 화목하게 만든다. 이는 효성과 우애의 자애로움이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으니 이는 인자함과 의리와 신의이다. 관혼상제 예식에 신경을 쏟으니 이는 예절바름이다…공경대부들도 부자를 앞다투어 알아주니 관직에 진출하지 않아도 현달한 지위에 오른다. 이는 귀함이다.”

반면 가난한 자들은 어떻습니까. 이재운은 “가난 때문에 굴욕과 수모를 당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 무슨 말을 더 보태겠느냐”고 ‘디스’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어떤가. 세금이나 환곡도 제 때 내지 못한다. 이는 불충이다. 육친을 돌볼 수 없다. 이는 불효다…벼슬을 구하려 권세있는 자에게 애걸해도 누구하나 받아주지 않는다. 이는 천함이다.”

이재운은 자수성가한 부자 9명의 일대기인 ‘거부열전’을 썼는데요. 이들은 숙종·영조 시대에 실존한 인물들입니다. 이재운은 열전에서 부자가 되는 법을 5가지로 설명하고 그 5가지 경영법의 전형적인 모델로 5명의 부자를 차례로 등장시켰습니다.

먼저 이 글의 모두에 인용한 이진욱은 ‘재물을 크게 불리는 법’에 등장하는 한양의 고아출신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러나 매우 성실했답니다. 그런 이진욱을 눈여겨본 이웃집 부자가 은전 1000냥을 주고 “자네 이 돈으로 돈을 불려보게”라고 했습니다. 이진욱은 이 돈을 가지고 동래 왜관에 가서 생면부지인 왜인 머슴을 동업자로 발탁해서 그에게 돈을 맡겼답니다. 이웃집 부자가 자신을 알아본 것처럼 이진욱도 똑같은 방법으로 왜인 머슴을 믿은 것입니다. 생면부지인 조선인에게 거금을 받은 왜인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왜인은 그 돈을 받아 일본에 가서 장사해서 세곱절로 재산을 불렸답니다. 이진욱은 그렇게 돈을 벌어서 국제무역 종사하는 이들, 심지어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도 20%의 이자를 받고 자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 이진욱이 떼돈을 번 계기가 있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3만냥을 털어 서북 지역의 인삼을 매점매석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전국적으로 인삼이 품귀현상을 빚었습니다. 이진욱은 거둬들인 인삼 중 3분의 1을 왜인 머슴에게 주면서 “일본으로 가져가서 조선통신사를 기다리라”고 했답니다. 한편 조선 조정은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가져가야 할 인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진욱은 이때 “제가 어떻게든 구해보겠다. 통신사는 그냥 일본으로 떠나라”고 했답니다. 조정에서는 반신반의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어 인삼 구할 돈을 모두 이진욱에게 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자 왜인 머슴은 인삼을 떡하니 안겨주었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진욱이 얼마나 예뻤겠습니까.

조선 팔도에서 없었던 인삼이 거짓말처럼 일본에 당도해있었으니까요. 조정은 이진욱에게 통정대부의 품계(정3품)를 내렸습니다. 인삼 매점매석으로 재산을 10곱절 불렸고, 당상관의 품계까지 받았으니 이런 광영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진욱은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양의 화류계를 장악하고 권력자들을 웃도는 위세를 과시했답니다. 한 예가 있습니다. 언젠가 의금부 당상관이 이진욱 집에 나졸을 보내서 “당신집에 기거하는 미장이 좀 보내달라”고 청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미장이는 이미 주인 이진욱의 명을 받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진욱이 거절하자 나졸이 “의금부를 뭘로 아느냐”고 협박하며 미장이를 강제로 대려가려 했답니다. 그러자 이진욱은 그 나졸을 반쯤 죽여놓았답니다. 나졸이 간신히 몸을 추스려 상관(의금부 당상관)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보고했더니 의금부 당상관은 외려 “감히 누구네 집에서 행패를 부렸느냐”고 나졸을 꾸짖으면서 해직시켰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습니다. 이진욱은 몰래 돈 50냥에 베 10필을 나졸에게 보냈답니다. 나졸이 쫓겨날 줄 알았다는 거죠. 나졸은 그런 이진욱을 원망하기는커녕 고마워했답니다. 이진욱은 이후에도 품계가 올라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직했습니다. 정2품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야말로 정승 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진욱의 매력이 또 있었답니다. 수하 사람하고 하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는 겁니다. 가난한 친지와 친구들의 생활비와 경조사비를 대주고 그가 부리던 행상꾼들의 가족을 돌봤답니다. 이진욱의 돈을 받아 전국을 돌며 장사를 했던 행상꾼 중 손해보는 이들을 내치기는커녕 변함없이 보살폈답니다.

매점매석과 고리대금업으로 떼돈을 벌었지만, 즉 개처럼 벌었지만 정승처럼 베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랬으니 이진욱이 죽자 장례식장이 문전성시를 이뤘던 것입니다. 정승집 개가 아니라 정승(이진욱)이 죽었는데도…. 심지어 이진욱의 자금을 빌려 쓴 중국과 일본 상인까지 부의금을 보냈답니다.

또하나 비결이 있으니 바로 신용입니다. 처음에 이웃집 부자로부터 1000냥을 받은 것도, 자기가 왜인 머슴에게 거금을 준 것도 신용이 없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신용이 18세기 치부의 덕목이라는 얘기겠지요.

이밖에도 이 책은 다양한 방법으로 떼돈을 번 부자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짚어갑니다. 그러나 때때로 치부방법은 바람직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진욱처럼 매점매석하고, 고리대금을 일삼고…. 하지만 이들에게 공통적인 덕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용, 그리고 나눔의 실천이었습니다.

‘고생을 참고 근면하게 일하는 방법’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한양 청파동에 사는 과부 안씨이다. 안씨는 가세가 기울자 늙은 종에게 치부를 전담시켰다. 늙은 종은 결국 10년만에 큰 돈을 벌어 주인 안씨에게 바쳤다. 결국 안씨와 늙은 종 집안 모두 큰 부자가 되었다.|안대회 교수 제공

한양 청파동에 사는 과부 안씨는 집안의 늙은 종을 끝까지 믿고 치부를 맡겼습니다. 그 늙은 종 역시 객지를 전전하면서도 주인의 신뢰를 배신하지 않고 돈을 벌어 돌아와 주인에게 번 돈 13만냥을 모두 바쳤습니다. 그런 늙은 종이 죽자 주인 안씨는 그 가족을 면천시키고 3만 냥을 주었습니다.

‘흉년에 기민을 구제하고 큰 부를 일군 방법’에 등장하는 한양 선비 최생은 나눔의 실천으로 유명했습니다. 명문가 후손인 최생은 가세가 기울고 과거에 떨어지자 재산을 팔아 충청도 청주로 내려갔습니다. 최생은 노비들에게 “10년 동안 돈을 벌어 큰 부자가 되어서 자네들과 나누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최생은 곡식을 차곡차곡 창고에 쌓아두고 흉년 때 고을의 기민 500가구 1300명에게 빌려주었습니다. 다행히 이듬해 큰 풍년이 들었고, 최생의 도움받은 마을 사람들은 6만 냥에 해당하는 6만 섬으로 갚았답니다. 최생은 그 돈으로 쌀을 사고팔아서 나중에는 18만 냥의 거부가 됐고, 그 돈을 자금으로 이웃들에게 행상할 자본을 대주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만에 거부가 된 최생은 애초의 약속대로 노비들에게 전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최생의 예는 진정한 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이것은 7월4일자 출고한 ‘가난은 악덕, 부는 미덕’ 기사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용으로 재정리한 것입니다.)(10)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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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동자' 효명세자는 궁중공연의 총괄프로듀서였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입력 : 2019.06.27 09:00 수정 : 2019.06.27 09:01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를 그린 어진. 조선시대 국왕의 어진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가 있었는데, 1954년 12월에 난 대형화재로 거의 대부분이 소실됐다. 익종어진도 화면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다.|국립 고궁박물관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어렸을 적 달달 외웠듯 조선의 임금은 총 27명이다. 그러나 살아 생전에는 임금이 아니었지만 사후에 임금으로 모신 이른바 ‘추존왕’이 9명 있다.

이 추존왕 9인을 정식 임금으로 쳐주지 않지만 그래도 그중 1명은 ‘국왕대우’로 대접받아야 할 것 같다. 왜냐면 그 이는 정식으로 등극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 조선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바로 순조(재위 1800~1834)의 맏아들인 ‘추존왕’ 익종(고종 때 다시 문조로 추존)이자 효명세자(1809~1830)이다. 2016년 방영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박보검 탤런트가 연기한 주인공(효명세자), 바로 그이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하라”는 순조의 명에 따라 1827년 2월 18일부터 22살의 나이로 요절한 1830년 5월 6일까지 ‘국왕 대리’로서 조선을 직접 다스렸다. 무엇보다 효명세자의 저술이 <열성어제>에 실렸다. <열성어제>는 조선조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은 책(태조~철종)이다. 추존왕 중에 <열성어제>에 저술이 포함된 예는 효명세자가 유일하다. 따라서 효명세자를 익종(재위 1827~1830)이라 해서 ‘정순(익)헌철고순’이라 외어도 딴죽을 거는 이는 많지않을 듯 싶다.

 

■‘꽃미남 세자’

효명세자는 태어날 때부터 할아버지인 정조 임금을 빼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세자는 이마가 솟은 귀한 상이었고, 용의 눈동자(龍睛)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궁내의 모든 이들이 ‘장효왕(정조)과 흡사하다’고 입을 모았다.”(<순조실록>)

<순조실록>은 세자의 비범함을 증거하는 일례를 든다. 즉 세자로 책봉된 4살 때(1812년) 홍경래(1771~1812)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젖을 먹고 있던 세자가 웃으면서 ‘쾌(快)하고 좋구려!’라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유모가 ‘무엇 때문이냐’고 묻자 세자는 ‘도둑이 벌써 잡혔으니 어찌 쾌하고 좋지 않겠느냐’고 대꾸했다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밥을 먹다가 밥알을 떨어뜨리면 반드시 주워서 삼키면서 “하늘이 내려 준 것을 소홀하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세손(헌종)이 비단 때때옷을 입자 “나도 입지않는 비단옷을 입히느냐. 빨리 고치도록 하라”고 꾸짖었다는 일화가 인구에 회자됐다.

<왕세자 입학도첩>. 효명세자가 8살 때 성균관에 나아가 스승에게 수업을 받는 의식을 그린 도첩. 흑단령으로 갈아입은 스승이 높은 지위를 뜻하는 동쪽에 앉아있고, 효명세자는 왼쪽 노란 그림 안에 엎드려서 가르침을 받고 있다. 세자의 그림은 역시 그리지 않았다. 세자에게는 책상도 없었다. 학생의 자세로 배우라는 의미였다. 세자 뒤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은 시강관들이다. 성균관 유생들이 명륜당 앞에 서있고 역시 세자의 시종들은 명륜당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시간문제였던 대리청정

그렇게 15년간 차기 대권 수업을 받은 효명세자는 19살 때인 1827년(순조 27년) 대리청정에 나선다. 아마도 순조와 신료들 사이에 사전조율을 끝냈을 것이다. 순조는 이미 4년 전인 1823년(순조 23년) 5월부터는 궁중의 공식행사와 신하와의 접견 자리에 세자를 배석시켰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순조의 나이는 38살에 불과했다.

순조는 왜 그런 창창한 나이에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했을까. 권력은 부자지간이라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데…. 우선 건강을 들 수 있다. 순조는 시쳇말로 ‘국민 약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두-홍역-천연두 등 전염병이란 전염병은 모두 앓고 지나갔다. 게다가 11살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마자 서슬퍼런 증조할머니(정순왕후·영조의 계비·1745~1805)의 3년 수렴청정으로 주눅이 들었고, 이후에는 처가인 김조순(1765~1832)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기를 펴지 못했다. 순조는 불면증, 식욕부진, 사지무력, 피로, 현기증 등 신경쇠약 및 소화불량 증상을 호소했다.

1827년 2월18일부터 1830년 5월6일까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때의 기록을 일기형식으로 엮은 <대청시일록>|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게다가 당시 조선 사회는 어수선했다. 잇단 흉년과 가뭄으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홍경래의 난(1811~12년)이 진압됐지만 여전히 ‘홍경래 불사론’까지 떠돌만큼 민심이 흉흉했다.

순조로서는 이런 난국에 세자의 처가인 풍양 조씨 세력을 등장시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견제하고 추락한 왕권을 강화하려고 대리청정이라는 극약처방을 썼을 가능성이 짙다.

순조는 1827년(순조 27년) 2월18일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내리면서 “병형(군권과 형벌권)의 긴요한 일이 아니면 세자가 모두 처리하라”고 일러둔다. ‘대리청정’을 명해도 임금은 인사권, 군권, 형벌권 만큼은 놓치 않는데 원칙인데, 순조는 인사권까지 효명세자에게 준 것이다.

1829년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의 즉위 30년과 40회 탄신을 맞이 베푼 궁중연회를 기록한 <진찬의궤>. 효명세자는 효를 내세워 통해 위로는 부왕을 섬기고 아래로는 신하들에게 충성을 이끌어 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실추될대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는 기회로 삼았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피 안묻히고 안동 김씨 세력을 쫓아내다

효명세자는 과연 아버지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대리청정을 시작한지 불과 3일만인 2월21일 세자의 하례식 의례에 착오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안동 김씨계의 전 이조판서 이의갑과 김재창은 물론 현 이조판서 김이교를 감봉 징계했다. 한 달 여 뒤인 3월30일에는 안동 김씨 계열인 우의정 심상규를 삭탈관직한다.

순조가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 영의정·좌의정 없는 조정을 이끌던 우의정 심상규가 마땅히 ‘대리청정은 아니되옵니다’라고 되돌려야 했는데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조순의 아들이자 순원왕후 김씨(순조비)의 오빠인 김유근(1785~1840)과, 김유근의 종질(사촌형제의 아들)인 김교근도 중앙무대에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효명세자는 자신이 직접 피를 묻히기 보다는 소외된 소론·남인·북인 세력을 사헌부나 사간원의 언관으로 배치하고 이들로 하여금 안동 김씨의 사치와 권위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공론에 따라 축출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효명세자는 그 빈자리를 친위 관료 세력으로 채웠다. 외척정치에 반대하고 청의(淸議)를 기치로 내건 김로(1783~?)·이인부·홍기섭(1776~1831)·김노경(1766~1837) 등이었다. 이들은 훗날 ‘효명세자의 4간신’으로 지목된다. 김노경의 아들인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권돈인(1783~1859) 등도 정치적 입장을 함께 했다. 김로와 서준보(1770~1856)·서희순(1793~1857)·김정집(1808~1859)은 ‘익종(효명세자)의 4각신’으로 일컬어진다. 김로와 서준보는 문무의 인사권을 담당했다. 여기에 세자의 처가였던 풍양 조씨 가문의 조만영(1776~1846)·조종영(1771~1829)·조인영(1782~1850) 등이 안동 김씨를 견제하고 세자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는 세력이 됐다.

‘익종간첩’. 효명세자가 여동생 명온공주와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모은 첩이다. 한시에 음을 병기하고 한글 번역과 주석을 달았다. 편지글에서 한글로 문자 생활을 한 공주에 대한 배려와 남매간의 우애를 확인할 수 있다.|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전국의 260만명을 구휼하다

효명세자가 국정을 총괄한 기간은 불과 3년3개월이었다. 지금의 국회의원 임기보다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나름 국정개혁을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선 서울의 소수 가문의 자제를 주로 뽑는 과거의 폐단을 개혁하고 신진세력을 널리 등용했다. 중앙 및 지방 관료의 시험인 응제(임시 과거)와 강(사서오경 시험), 제술(백성 다스리는 방책을 시험) 등의 횟수를 급격하게 늘렸다.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1827년(순조 27년) 8월8일 홍문관 부수찬(종 6품) 강태중이 “대체 저하께서 대리 청정하신 뒤에 품계가 올라간 자가 몇 사람이며 발탁된 자가 몇 사람이냐”고 ‘시험 남발’을 비판했다. 그러나 세자는 강태중에게 “대리청정한지 몇달이 지났는데 당신 같이 직언하는 이는 없었다”면서 오히려 대사간(정 3품)에 임명했다. 직언한 신하를 벌주기는커녕 종6품 홍문관 부수찬을 언관의 꽃이라는 사간원의, 그것도 당상관인 정3품 수장으로 발탁한 파격인사였다. 자신감 넘치는 지도자의 면모가 아닐 수 없다.

효명세자가 각 지방의 실정을 파악하는 방법은 암행어사 파견이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29일자 <순조실록>은 전라도 감사를 비롯한 수령들의 불법탐학을 고발한 암행어사 유성환(1788~?)의 보고서를 싣고 있다.

“전 전라도 감사 서경보(1771~1839)는 10개월 재임동안 제대로 처리한 일이 없었고…자색이 있는 기녀들을 불러들여…뭇백성들은 뼈가 으스러지도록 하소연했지만 모두 내쫓기고 구타당하니…”

효명세자와 여동생인 명온공주가 주고받은 편지. 명온공주가 자신의 시를 오빠에게 보내 “틀린 곳 좀 잡아달라”고 하면 오빠는 몇가지 지적사항을 언급하고는 ‘보고싶은 마음’을 전했다.|국립한글박물관

효명세자는 그해 5월 29일 함경도와 영남·호서·호남 등에서 모두 260만명에 달하는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 및 각종 구호 물자를 내려보냈다.(<순조실록>) 세자는 또 경기 일원의 역대 임금 능원을 여러차례 참배했는데, 그것을 민심파악의 기회로 삼았다. 특히 사민의 상언·격쟁을 장려했다.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은 사회 전반적인 문제를 다룬 상소(上疏)와는 성격이 다르다. 백성들이 민원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합법적인 소원수리제도다.

상언은 양반과 중인이 문서로 올렸지만 글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가리를 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효명세자는 올라온 상언과 격쟁 중에 시행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철저하게 가려 보고토록 하고 그 양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이 먼저 열람한 뒤 해당 관사에 회부하여 처리토록 했다. 효명세자는 또한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대형궁궐 그림인 동궐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궁중잔치를 기록한 의궤인 ‘무자진작의궤’. 1828년(순조 28년) 순원왕후의 사순(40세)을 기념하여 2월 자경전에서 거행된 진작과 6월 연경당에서 거행된 진작의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_

■누이동생을 향한 끔찍한 사랑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효명세자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화 군주의 면모’이다.

효명세자는 역대 국왕 중 가장 문학적 성취가 높은 ‘국왕 대우’였다. 세자는 무려 400여제의 시를 남겼다.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정조의 시가 200제를 넘지 않았으니 22살에 요절한 효명세자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뛰어났는 지를 알 수 있다. 효명세자의 시 중에는 누이를 그리워하는 것이 매우 많은게 특징이다. 아닌게 아니라 세자는 여동생 명온공주(1810~1832)와 복온공주(1818~1832), 덕온공주(1822∼1844)를 ‘지나칠 정도로’ 예뻐했다.

특히 1살 어린 명온공주에게는 사흘 간격으로 시를 보냈다. 동생을 그리워하는 운자를 ‘사(思)’로 하여 그리움의 뜻을 듬뿍 담아낸 ‘사매시(思妹氏)’도 그런 예다. 규장각에 소장된 <익종간첩>은 동생에게 보낸 친필시가 수록됐는데 남매간 우의를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동생에게 보내는 친필시는 한시를 원문으로 적고 다시 한글음을 병기했으며 그 번역문까지 첨부했다. 제목 역시 번역했는데, 어려운 어구는 한글로 주석까지 달아놓았다. 한글로 문자생활을 했던 누이를 위한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효명세자의 시문을 모아둔 <학석집>. 세자의 글은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아둔 <열성어제>에도 포함돼있다. 효명세자를 ‘국왕대우’로 일컫는 이유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수레를 보낸지 이미 삼일이 되니 암암리에 내 마음이 생각하는도다. 슬퍼함에 저녁산을 대하니 나무에 가득한 매미가 울 때로다.(送송車거已이三삼日일 暗암暗암我아心심思사 초초창창對대山산夕석 滿만樹수蟬선鳴명時시)”(기寄매妹씨氏)

누이를 사가로 보낸지 사흘이 지나자 그리운 마음에 먼산만 바라보는 세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지은 시 좀 고쳐달라”는 여동생(명온공주)의 편지와 그 편지에 자상하게 응답한 오빠의 답장을 보라.

“…이 글은 소인이 지었사오니 감상하시고 어떠한지 보아주십시요. ‘늦가을 서리에 밤은 깊은데(九秋霜夜長) 홀로 등잔꽃 밝은 것을 대하였도다(獨對玉燭明) 머리숙여 멀리 형(오라버니) 생각하니(低頭遙想兄) 창을 사이에 두고 기러기 소리 들었어라.(隔유聞鴻鳴)”(명온공주가 오빠에게)

오빠 효명세자는 이에 공주의 시구절 일부를 고쳐준 뒤 다음과 같은 애틋한 내용을 적어보냈다.

“(너의)글씨를 보고 든든하며 잘 지었는데, 두 어 곳 고쳐 보내니 보아라. 그리고 ‘머리 숙여 멀리 형을 생각한다(저두요상형)’는 시구는 나를 생각한 것인가. 그윽히 감사하노라…이 글이 또 너를 생각함이로다.”

마치 애인 사이에 주고받는 연애편지 같다.

효명세자가 4살 때인 1812년(순조 12년)세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어보다.|국립고궁박물관

왜 이렇게 오빠 동생사이에 ‘오글거리는 편지’를 나눴을까. 하기야 여염집 남매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구중궁궐에 마음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누이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남매간 정분이 유달랐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효명세자를 비롯해 순조의 자녀들은 모두 요절했다. 효명세자가 22살의 젊은 나이에 서거했고(1830년), 둘째동생 복온공주와 첫째동생 명온공주는 각각 15살과 23살에 한달 사이를 두고 차례로 세상을 떠났으며(1832년), 막내동생인 덕온공주는 18살의 나이(1844년)에 죽었다. 누이들을 그토록 사랑했던 오빠의 요절이 여동생들의 가슴에 치유할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궁중공연의 업적

그러나 효명세자의 혁혁한 업적 중에서도 으뜸이 있다. 바로 세자가 궁중예술의 꽃인 ‘정재(呈才)의 황금기’를 이뤘다는 것이다. ‘정재’는 궁중의 연회에서 여령(女伶·공연에 출연한 여자연예인)과 무동 등 당대 연예인들이 공연했던 춤과 노래이다. 대리청정에 임한 효명세자는 3년3개월의 재임기간 중 세차례에 걸쳐 대규모 궁중연회를 개최했다. 대리청정 직후인 1827년 9월9일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린 뒤 베푼 ‘자경전진작정례의’와, 1828년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한 ‘무자진작의’, 그리고 1829년 순조의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린 ‘기축진찬의’가 그것이다. 솔직히 말해 당시 시대상황은 좋지 않았다.

천주교 탄압과 외척의 정권개입, 뇌물 수수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신분질서의 와해로 사회혼란이 가중되었던 시기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크고작은 천재지변이 일어났고, 전염병이 번져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효명세자는 익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가 1902년(광무 2년) 문조 익황제의 전호를 다시받았다. 그때 받은 옥책이다. |국립고궁박물관

효명세자가 존호를 받으라고 하자 순조가 그나마 양심의 가책은 있었던지 “재위 30년 동안 백성은 곤궁해지고, 법도는 실추됐고 병을 요양하느라 세자에게 청정을 시키고 있는 처지”라고 거듭 사양했다. 효명세자는 그런 순조에게 “존호를 받으시라”고 5번이나 독촉한 끝에 결국 관철시켰다. 그러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그 어려운 상황에서 궁중잔치를 벌였던 효명세자를 곱게 볼 수 있을까.

■안동 김씨를 무릎 꿇린 궁중잔치 및 공연

그러나 왕조시대에서 잔치는 단순한 ‘놀자판’이 아니다. 성리학에서 예악을 다스리는 군주야말로 성군으로 칭송받았다. 공자는 “악(樂)은 천지의 조화이고 예(禮)는 천지의 질서이니…정치가 안정되면 예를 만들고 공이 이뤄지면 악을 지었다”고 했다. <예기> ‘악기’는 “군왕이 음악을 만든 것은 천지의 이치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려고 했기 때문”이라고까지 했다. 효명세자가 그 어려운 시기에 세번이나 궁중잔치를 벌인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가라도 궁중잔치에 참석하면 군왕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충성을 서약하며, 만세무강을 비는 치사를 낭독해야 했다. 효명세자의 궁중잔치는 효를 내세워 위로는 부왕을 섬기고 아래로는 신하들에게 충성을 이끌어 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실추될대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는 좋은 기회였다.

효명세자가 쓴 시의 초고본(<경헌시초>). 효명세자의 시 작품을 모아 엮은 책이고 39장 1책의 필사본이다. 본문에는여러 곳에 관주(貫珠·시문가운데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쳤던 동그라미 표시)가 표시되어 있다. 일부 수정하고 고쳐 적은 부분도 발견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당신이 한번 해볼래?”

젊은 ‘군왕 대우’가 내로라한 신료들을 ‘예약’으로 다스린 단적인 예가 있다.

1829년(순조 29년) 1월10일 세자가 궁중잔치를 위한 리허설을 직접 관장하고 화려한 복장을 한 기녀들이 궁궐을 드나드는 꼴이 보기싫었던 대사헌 박기수(1774~1845)가 “신성한 궁궐 안에서 이게 무슨 꼴이냐”고 반대하고 나섰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조치가 이상했다. “함부로 한게 아니라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대꾸한 뒤 박기수를 아예 예조참판으로 임명하고 잔치를 총괄하는 진찬소 당상으로 삼았다. 무슨 뜻이었을까.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소리야. 네가 한번 맡아서 해보라’, 뭐 이런 소리였다. 졸지에 예조참판으로 잔치를 관장하게 된 박기수가 예법을 검토한 결과 효명세자가 맞다는 것을 깨닫고는 “죽을 죄를 졌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예조의 업무일지인 <등록> 등을 보니 연회의 예행연습은 모두 궁궐 내에서 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신이 그것도 모르고 함부로 망령된 말을 하였습니다. 죽고싶습니다.”

효명세자는 그런 박기수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이제 20살 안팎에 불과했던 효명세자였지만 다름아닌 군주를 위한 궁중예법을 무기로 내로라하는 대소신료들을 쥐락펴락했던 것이다.

1829년 궁중잔치를 그린 병풍인 ‘기축진찬도병’. 1829년 순조의 사순(40세)과 즉위 30주년을 기념한 잔치의 모습을 그린 병풍이다|삼성미술관 리움

■궁중 연회및 공연의 총감독

효명세자는 단순히 궁중잔치 및 공연을 치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때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다.

해마다 열린 세차례의 궁중잔치 및 공연의 세부내용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관장했다. 효명세자는 이를테면 궁중잔치 및 공연의 총연출자(총감독)을 맡았던 것이다. 이 뿐이 아니었다. 당대의 정재, 즉 궁중연회 때의 공연은 창사(노래)와 춤, 반주 등 가·무·악의 3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공연된 정재는 모두 40종목인데 그중 17종목은 예부터 전승된 것이며, 새로 등장한 것은 모두 23종목이었다.

이중 효명세자가 가사를 직접 지은 것은 모두 20종이다. 이중 17종은 순수한 창작품이고, 3종목은 종래부터 전승되어온 정재의 가사와 곡조, 춤의 구성 등을 그 시대에 맞게 바꾼 것이다. 단순한 ‘노가바’(노래 가사바꿔 부르기)나 편곡의 차원을 넘어선 재창작이라 할 수 있다.

세자는 또 ‘가사’라 제목한 국문 악장(궁중행사에서 불린 노래가사)도 제작했는데, ‘목멱산’과 ‘한강’, ‘춘당대’ 등이 있었다. 또 효명세자가 남긴 시조가 9수나 되는데 이것들은 아마도 1927~29년 열린 궁중공연에서 가창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또 공연작품 중에는 당나라 시인 이백이 고구려 춤을 보고 읊은 시를 노래가사로 차용해서 새로운 춤으로 재창작한 ‘고구려무’와 신라시대 화량들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사선무’ 등도 역사 속에서 소재를 택했다는 점에서 주목거리이다.

효명세자가 창작한 1인독무 <춘앵전>. 돗자리 위에서 추는 춤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효명세자의 작품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조선의 정재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1인 무용이다. 그 이름은 ‘춘앵전’과 ‘무산향’이다. 이중 ‘춘앵전’은 1828년 6월1일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축하 연회인 ‘연경당 진작’에서 처음 연주됐다. 창사 가사는 세자가 직접 썼는데, 1인 무용으로 구성된 독무 정재의 첫 등장이다. 기존의 정재는 대부분 대형중심이었다. 그러나 ‘춘앵전’은 한마리 꾀꼬리인듯한 댄서 1인이 돗자리라는 아주 작은 무대공간에서 나아갔다가 물러나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었다.

“아름다운 미인 달빛 아래 걸어나오니(빙정月下步) 비단 옷소매 춤은 바람에 하늘거리네.(羅袖舞風輕) 꽃 앞의 자태 가장 아끼나니(最愛花前態) 이 청춘 스스로 님의 정에 맡기네.(靑春自任情)”

또다른 독무곡인 ‘무산향’은 설치해놓은 대모반(침상처럼 행긴 이동무대)에 댄서 1인이 올라가 추는 춤곡이다.

이 작품 역시 효명세자가 직접 창작한 곡이다. 1인 독무인 ‘춘앵전’과 ‘무산향’의 등장은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인 이때가 궁중 무용의 전성기였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초연을 공연한 연예인은 김형식이었다. 3차례의 대규모 궁중공연에서는 장악원 소속의 악공인 가차비 외에도 민간 소속의 가수인 양천호·정수경·임성창·김수익 등이 초청되어 공연했다. 이중 정수경은 청구영언에 2수의 시조 작품을 남긴 유명가수이다.

정재를 출 때 여령(여자연예인)이 입었던 몽두리. 앞뒤가 트인 4자락의 옷이고, 밀화단추로 여몄다. 허리에는 허리띠인 대대를 둘렀다. 한삼은 소매 끝에 끼웠으며 춤을 출 때 손동작을 더욱 강조하였다.|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

■조선시대판 방시혁?

물론 이 모든 창작·안무·연출 등을 효명세자 1인이 북치고 장구치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함화진(1884~1948)의 <악인열전>을 보면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바로 그해(1827년) 전악(조선시대 장악원에서 음악업무를 맡은 정6품 잡직)의 자리에 오른 김창하라는 인물이 눈에 띈다.

“김창하는 익종(효명세자)의 총애를 받아 음악인 중 실력이 좋은 이들을 선발해서 악단을 조직하고 궁중에 주야로 머물게 해서 시시 때때로 연주하게 했다. 이 악단을 구관(九官)이라 했고 선생은 구감관이라 일컬었다.”

함화진은 이때 “김창하는 세자를 보좌해서 다수의 정재를 창작했다”고 소개했다.

효명세자의 관례(성년식)을 기록한 수교도(受敎圖).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순조실록>에는 “1827년(순조 27년) 3월11일 효명세자가 장악원 소속의 대년악생(待年樂生) 72명에게 봉급을 주어 춤을 연습하도록 명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요즘으로 치면 기획사에서 연습생을 키웠다는 의미가 아닐까.

효명세자는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궁중에 ‘구관’이라는 기획사를 차려놓고 김창하와 함께 연습생들을 기르고, 훈련시킨 뒤 궁중음악을 창작·편곡·연출한 총괄 프로듀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BTS를 키운 방시혁 프로듀서라 표현하면 과장일까. 결국 효명세자는 아버지(순조)와 어머니(순원왕후)를 위한 궁중잔치(예·禮)와 그 궁중잔치를 위한 공연(악·樂) 등 전체 의례를 진두지휘, 총연출, 총감독한 것이다.

■각혈로 쓰러진 22살 군왕의 꿈

그러나 노래와 춤을 무기로 실추된 왕권을 되살리겠다는 효명세자의 꿈은 불과 3년3개월만에 산산조각난다.

1830년(순조 30년) 윤 4월22일 <순조실록>은 “효명세자가 각혈 때문에 약을 먹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증세인 것 같았지만 갈수록 회복되지 못했다. 효명세자는 5월6일 급서하고 만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백성들은 “하늘이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하려고 하느냐”고 울부짖었다. 효명세자가 죽자 그의 흔적은 부인되고, 지워지기 시작했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 중 대사헌·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던 김로는 “언행에 분수가 없고 국왕의 존엄을 돌보지 않았으며, 조정의 신하들을 위협하고 문무관의 인사권을 장악하여 자기 세력을 모았다”는 등의 공격을 받았다. 이인부와 홍기섭, 김노경 등도 탄핵됐다. 이후 조선은 4년간의 순조 친정기를 더 보냈고, 8살에 즉위한 헌종(재위 1834~1849)과 강화도령 철종시대(1849~1863(를 맞아 급격히 몰락했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하나 든다. 효명세자는 누가봐도 훌륭한 국왕의 자질과 능력을 지녔다는 평을 듣는다.

만약 효명세자가 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오롯이 다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효명세자가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지녔던들 기울어져가는 조선을 과연 일으켜 세울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알량한 예악정치로 당대의 어지러운 사회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었겠느냐는 회의감도 든다. 효명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었어도 조선은 어느 드라마의 언급처럼 좀 늦게 망하는 길로 접어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역사에 가정법이 없다지만 그건 너무 비관적인 평이 아닐까. 군주의 수업을 받은, 현명한 효명세자였기에 그래도 휘청거리던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울 비책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아무렴 헌종-철종-고종-순종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겠지.

28일부터 9월22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을 주제로 특별전이 열린다. 세자의 성장과정과 교육, 문예적 재능을 조명하고, 세자가 국정의 최고지도자로서 조선을 다스리는 동안 궁중 잔치와 공연, 궁궐도 제작 등에서 이룩한 업적을 되돌아볼 기회가 될 것이다. (이 기사를 위해 이종묵 서울대 교수와 김문식 단국대 교수, 조경아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심승구 한체대 교수 등이 도움말을 주었습니다.)(11)

<참고자료>

이종묵, ‘효명세자의 저술과 문학’, <한국한시연구> 10, 한국한시학회, 2002

김문식,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문헌과 해석> 56권, 태학사, 2011

조경아, ‘순조대 효명세자 대리청정시 정재의 계승과 변화’, <민족무용> 제5호, 세계민족무용연구소, 2004

심승구, ‘효명세자의 삶과 예술’, <한국무용연구> 제36권 4호, 한국무용연구학회, 2018

신경숙, ‘19세기 가객과 가곡의 추이’, <한국시가연구> 2, 한국시가학회, 1997

한지영, ‘효명세자 대청시 창작정재연구’, 한양대석사논문, 2008

김거부, ‘효명세자 에제 정재명과 악곡명에 대한 연구’, <아시아민족조형학보> 19, 아시아민족조형학회, 2018

이상각, <효명세자>, 서해문집, 2013

 

 

[한겨레] 종로구 장예원 下

조선의 신분제 실상은 6등급제 왕족·문반·무반·중인·상민·천민 양반+상민=서, 양반+천민=얼 개똥이 등 노비 이름 기구한 운명 사노비, 양반 가문 지탱 핵심 노동력 중세 조선은 동족 노비로 움직여 공노비 해방서 폐지까지 100년 노비들의 장예원 방화서 300년 걸려

보물 제527호인 김홍도의 <벼타작> . 일하는 노비들과 놀고먹는 양반의 모습을 절묘하게 대비한 18세기 세태 풍자도이다.

 

종로구 장예원(掌隸院) 터를 찾아 세 번째 길을 떠난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응달, 노비 이야기의 마지막 회다. 장예원은 춤과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과 함께 ‘장○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비를 다루는 관청이다. 조선 지배층은 노비(奴婢)란 남자 종(奴), 여자 종(婢)일 뿐 노예(奴隸)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관아 이름에는 버젓이 ‘부릴 예(隸)’자를 썼다. 기자조선 때부터 삼한과 삼국·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3천 년 가까이 줄기차게 이어져온 노비제도의 본질은 노예제도 그 자체였다.

우리가 반상제(양반과 상민) 혹은 양천제(양인과 천인)라고 알고 있는 조선의 신분제는 실제로 왕족-문반-무반-중인-상민-천민의 6등급제였다. 서얼(庶孼)은 양반+상민의 자녀는 서(庶), 양반+천민의 자녀는 얼(孼)이라는 새로운 신분이었다. 양반도 상민도 아닌 서얼의 양산이 중인 신분으로 계층 분화했다. 게다가 천민은 팔천(八賤)이라고 하여 노비·기생·백정·광대·장이(대장장이·옹기장이)·승려·무당·상여꾼 등 8가지로 세분해 숨을 쉴 수 없도록 억눌렀다.

노비는 나라와 양반 가문의 궂은일을 도맡는 핵심 노동력이었다. 공노비는 왕실과 관아, 사노비는 양반가의 일꾼이자 몸종이었다. 내시와 궁녀는 궁궐과 왕실을 지탱했고, 관아를 뒷바라지하는 관기와 사환, 문무 잡직 모두 공노비였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이민족 노예가 인구의 30~40%에 이른 고대 그리스나 로마처럼 중세 조선은 동족 노비에 의해 돌아가는 구조였다. ‘공자 왈 맹자 왈’하면서 무위도식하는 양반 선비를 노비들이 온몸으로 지탱했다.

장예원은 노비 소송 업무의 주무관청이었다. 조선의 사법기관은 형조, 의금부, 사헌부, 한성부였다. 일반 백성 관련 민사와 형사 소송은 형조, 관리와 양반은 의금부, 재심은 사헌부, 토지와 가옥 관련 민사 소송은 한성부에서 주로 다뤘다. 노비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나 물건처럼 매매·상속·증여가 가능했기에 사법기관이 아닌 장예원이 전담했다. 중국도 폐지한 노비제 유지책이었다.

장예원이라는 역사 한 귀퉁이에 등장할까 말까 한 관아가 광화문 육조거리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까닭은 두 가지다. 첫째는 왕의 재산인 공노비, 양반의 사유물인 사노비를 증명하는 기록이 보관돼 있었다.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특수한 재산이기에 눈에 불을 켜고 지켜야 했다. 또 한 가지는 노비의 소유권과 신분을 다투는 소송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한양 거주자의 70~80%가 노비이고, 전국 노비 소유주의 대부분이 한양과 경기 지방에 살았으므로 이곳에 두는 게 편했다.

 

노비 소송의 증거 자료인 호적은 3년마다 갱신했다. 전국의 각 호구는 아버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등 4조(四祖)를 기재한 호구단자를 관아에 제출했다. 관아는 보관 중인 호적과 대조해 변동 사항을 반영 기재한 뒤 돌려줬는데, 개인이 보관하는 호구단자와 관아가 소장한 호적이 신분 확인의 기본 자료였다.

모든 노비의 신원은 장예원의 천적(賤籍)에 기재돼 엄격하게 관리됐다. 노비 문서를 보관한 장예원 창고의 규모는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각종 연구에 따르면 15~17세기 조선 인구 900만~1200만 명 중 노비 비중을 30~40%로 잡을 경우 270만~480만 명쯤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장예원의 조직은 조촐했다. 정3품 당상관인 판결사 1명, 정5품 사의 3명, 정6품 사평 4명이 해결했다.

1896년 박종숙이라는 양민이 빚 때문에 자신과 처첩 등 3명을 스스로 노비로 판 문서. 손을 붓으로 그려 증거로 삼았다.

조선 시대 소송은 노비 소송과 조상 무덤을 둘러싼 산송(山訟)으로 크게 나뉜다. 조선 초 노비 소송은 지방일수록 격렬했다. 민사 소송 대부분이 노비 소송이었다. 노비들은 면천해 양인이 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1400년대 100년간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소송 건수가 600건이 넘었다. 심지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신문고에 노비에 관한 청원만 계속 올라오자, 노비 문제로는 신문고를 울리지 못하도록 했으나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태종실록>에 남아 있을 정도였다. 세종 때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소생은 무조건 노비가 되는 종모법을 시행한 이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1596년(선조29) 3월13일 전라도 나주에서 보기 드문 노비 소송이 벌어졌다. 피고는 여든 살의 노파 다물사리였는데 “어머니가 성균관 소속 관비인 공노비였으므로 자신도 공노비”라고 주장했다. 원고인 양반 이지도는 “다물사리는 집안의 사노비와 결혼한 양인”이라고 반박했다. 증거 조사에 나서 한 달여 동안 호적단자와 관청의 천민 명단을 조사한 이후 나주목사 학봉 김성일은 “다물사리는 양인”이라고 판정했다. 공노비로 신분을 세탁, 자식도 공노비로 만들어서 처우 개선을 노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는 달리 대부분의 노비 소송은 노비가 양인으로 신분을 바꾸려고 다투는 양상이었다. 양란 이후 노비 문서가 불타버렸거나 다른 문서와 섞이는 혼란을 틈탄 소송이 많았다. 관찰사·부사·목사·현령 등 지방 수령의 업무 중 재판이 70%를 차지했다.

하급 공무원 노릇을 한 공노비가 팔천(여덟 종류 천민계층) 중 최상의 대우를 받은 반면 사노비는 최악의 피지배 계층이었다. 사노비는 상전(주인)집 행랑채나 담 너머 집에 기거하면서 24시간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의식주를 제공받는 솔거노비와 따로 독립해 농사를 짓는 대신 1년에 면포 1.5~2필 정도의 몸값을 바치는 외거노비로 나뉜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의 농사와 길쌈, 심부름,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외거노비는 기회가 생기면 서해안 섬, 이북 오지, 강원도 산간으로 도주했다. 청지기나 집사 역을 맡은 수노는 ‘마름’이라고 했는데 위세가 당당한 우두머리 사노비였다.

여자 종은 출처에 따라 윗대서부터 전해 내려온 전래비, 당대에 사들인 매득비, 안주인이 시집올 때 데려온 교전비로 나뉜다. 임무에 따라 정월 초하룻날 안주인을 대신해서 친척에게 세배하는 문안비, 초상이 나면 곡을 해주는 곡비, 문 앞을 지키는 직비, 안주인과 비슷한 시기에 출산한 유모비가 있다.

노비의 이름은 기구한 운명의 흔적이다. 성이 없는 이름은 십중팔구 노비 이름이었다. 동물이나 식물, 얼굴, 성격, 시간 등에 빗대 흔하고 천하게 지었다. 영화나 사극의 단골 이름인 갑돌이와 갑순이, 돌쇠, 마당쇠, 언년이, 간난이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개똥이(갓동이·실동이), 개떡이, 강아지, 똥개, 도야지, 두꺼비 같은 동물 이름은 물론 어린놈, 작은년, 뒷간이, 개부리, 소부리, 개노미, 개조지 같은 막말 이름을 붙였다.

태어난 순서대로 일○, 이○, 삼○을 넣거나, 마지막이나 끝을 의미하는 막동이나 끝동이, 끝순이라고 불렀다. 물 긷는 물담사리, 소 기르는 쇠담사리, 똥 푸는 똥담사리, 붙어산다는 더부사리, 집 담에 붙어 있다는 담사리, 청소 전담 빗자리, 아무개를 지칭하는 거시기…식이었다.

이름만으로 식별이 가능하고, 저항 의지를 갖지 못하도록 열등의 정체성을 부여했다.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는 뜻의 다물살이나 이쁜이, 꽃분이, 곱단이, 바우 같은 긍정적 이름도 있었다. 요즘 우리말 이름 짓기가 유행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실감한다.

스웨덴 신문기자 아손 그렙스트가 1905년 전후의 대한제국 곳곳을 여행하면서 찍은 140여 장의 사진 중 한 컷. 노비들은 신분에서는 해방됐지만 농촌에서는 머슴, 도시에서는 빈민으로 살았다. 노주석 제공

 

1801년 1월28일자 <순조실록>에서 순조는 “임금으로서 백성을 대하게 되면 귀천도 없고…노나 비라고 하면서 구별해서야 어찌 동포라 할 수 있겠는가…내노비 3만6974구와 사노비 2만9093구를 모두 양민이 되게 하라…아, 내 어찌 감히 은혜를 베푼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동족을 노예로 부린 왕조의 잘못을 뉘우쳤다.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노비의 피를 절반 이어받은 21대 영조 이후 22대 정조와 23대 순조 3대에 걸쳐 노비 신분의 대물림을 끊은 것이 공교롭다.

노비를 사람으로 본 영조는 ‘노비의 어버이’라고 칭할 만하다. 장예원을 ‘보민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노비 소송 업무를 형조로 이관했다. 정조는 도망간 노비를 잡아들이는 노비추쇄도감을 없앴고, 서얼 차별과 노비제 폐지를 진행하다가 급서했다. 왕위를 이어받은 순조가 1801년 공노비를 해방했으나 1894년 완전한 철폐가 이뤄지기까지 또다시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노비들 스스로 장예원의 노비 문서를 불태운 뒤 신분 해방까지 300년이 꼬박 걸렸다.(12)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 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주>

 

 

(1) 노론-식민사관 사대주의와 인맥 연결됐다 (hani.co.kr)

 

 

(2)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6020600001

 

 

(3)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5030500001

 

 

(4) “숙종시대 군인 18%가 마맛자국”:2008-03-13 

 

 

(5) 사관 ‘심환지, 정조 독살 의혹 어의 비호했다’ 기록 (hani.co.kr)

 

 

(6) 영조는 '어느 개가 짖어!' 했고, 정조는 '탕탕평평평평탕탕!' 외쳤다[이기환의 Hi-story] (daum.net) 이기환 기자입력 2023. 12. 25. 08:00수정 2023. 12. 25. 08:04

 

 

(7)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003100600001

 

 

(8) 177년된 태안 섬마을 폐가의 벽지에서 조선시대 군인명부 쏟아졌다 (daum.net)  2020. 6. 4. 

 

 

 

(9)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310240500001

 

 

(10)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8011419001

 

 

(11)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6270900001

 

 

(12) 3천 년 이어온 노비제도의 본질은 노예제 그 자체 (daum.net)  2019.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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