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러시아·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병자호란´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청태종 송덕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며 “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황제 운운’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龍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良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돼지´에게 무릎을 꿇다
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降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황태극(皇太極)’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약조’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안추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비극’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IMF 외환위기’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무책임’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
●필자 한명기 교수는
▲1962년생
▲1985년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1997년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1998∼2001년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현재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역사비평’ 편집위원
▲논저‘임진왜란과 한중관계’(1999),‘광해군’(2000) 외 다수
●청태종 송덕비(위 사진)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1)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까지 조정에서는 청과의 관계를 복원할지, 그것과 관련하여 사신을 보낼지를 놓고 격심한 논란이 빚어졌다. 척화파는 명분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절교가 불가피하다고 했고, 주화파는 이렇다 할 준비 없이 전쟁을 벌이는 것의 위험성을 들어 끝까지 청을 기미(羈)해야 한다고 맞섰다. 사람들은 대체로 척화파의 논의가 높고 깨끗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높고 깨끗한 논의’만으로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전쟁은 결국 터지고 말았다.
●준비 없이 갈림길에 서다
당시 ‘명분’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던 조선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인물은 명 감군 황손무(黃孫茂)였다. 그가 귀국 길에 보낸 서한이 10월24일 조정에 도착했다. 그는 청천강과 압록강, 그리고 평안도의 험준한 지형은 하늘이 준 것이니 병사들을 조련하고 화약과 총포 등을 제대로 갖추면 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 신료들이 현실을 모른다고 야유했다.‘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것은 장차 이용(利用)하기 위한 것인데 나는 귀국의 학사와 대부들이 읽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經濟)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소. 뜻도 모르고 웅얼거리고 의관(衣冠)이나 갖추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국도(國都)를 건설하고 군현(郡縣)을 구획하며 군대를 강하게 만들고 세금을 경리하는 것은 과연 누가 담당한단 말이오?’
황손무의 비판은 신랄했고 진단은 냉정했다.‘귀국의 인심과 군비(軍備)를 볼 때, 저 강한 도적들을 감당하기란 결단코 어렵습니다. 일시적인 장유(奬諭)에 이끌려 그들과의 화친을 끊지 마십시오.’ 조선을 찬양하고 청과의 싸움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은 황제의 유시문을 들고 왔던 그였다. 조선을 다독여 청과 싸움을 붙이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지만, 황손무가 본 조선은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청 역시 마지막까지 조선의 본심을 떠보려고 시도했다. 역관 박인범(朴仁範) 등이 들어갔을 때, 용골대는 새로운 제안을 내밀었다. 자신들에게 협력하여 명을 공격하는 데 동참하고, 화친을 배척한 신하를 넘겨주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요구였다. 박인범 등은 반발했다. 그러자 용골대 등은 왕자와 척화신만 보내주면 청군이 비록 압록강에 이르더라도 침략을 당장 중지하고 두 나라가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제의했다. 박인범 등이 ‘예의의 나라로서 차마 들을 수 없고, 또 전달할 수 없는 말’이라고 거듭 반발하자 용골대 등은 돌아갔다. 좀처럼 좁히기 어려운 서로의 입장 차이를 다시 확인했던 것이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홍타이지, 침략 결심을 하늘에 고하다
1636년 11월25일 홍타이지는 신료들을 이끌고 환구에서 제사를 지냈다. 황천(皇天)과 후토(后土)를 향해 자신이 조선 정벌에 나서게 된 까닭을 고하는 자리였다. 홍타이지는 축문을 통해 조선이 ‘저지른’ 잘못들을 열거했다.1619년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한 것,1621년 이후 자신들이 요동을 차지했을 때 도망하는 한인들을 받아들여 명에 넘긴 것, 정묘년에 맹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누차 그것을 어긴 것, 후금으로 귀순하는 공유덕과 경중명 일행을 공격했던 것, 명에는 병선(兵船)을 제공했으면서도 그것을 빌려 달라는 자신들의 요구는 거부한 것, 인조가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에게 유시문을 보내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운운 한 것 등이었다.
조선에 대해 품었던 불만이 모두 나열되었다.‘청의 힘과 역량이 명 못지않게 커졌는데 조선은 명만 편들고 자신들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만의 요점이었다. 공유덕 등의 귀순을 저지하려 시도하고, 명에만 병선을 제공한 것에 대한 불만이 특히 도드라져 보였다. 홍타이지는 곧이어 누르하치의 신주를 모신 태묘(太廟)에도 나아가 자신의 결심을 고했다.
홍타이지는 11월29일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유시문을 내렸다. 조선을 정벌해야 하는 까닭을 다시 강조했다. 위에서 언급한 ‘허물’에 더하여 조선이 청에서 보낸 국서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도 추가했다. 조선 조정이 몽골 버일러들이 내민 편지를 퇴짜놓았던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홍타이지는 평안감사 홍명구에게도 ‘유시문’을 보냈다.‘조선이 패만하고 무례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의병(義兵)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병’들에게 조선에서의 행동 지침을 하달했다.‘인명을 함부로 살상하지 말 것, 대군이 통과하는 지역의 사묘(寺廟)를 파괴하지 말 것, 저항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 말 것, 항복한 자를 죽이지 말고 치발(髮)할 것, 망명해 오는 자를 받아들여 보호할 것, 사로잡은 백성들의 가족을 서로 이산시키지 말 것, 부녀를 폭행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었다.
12월1일 조선 원정에 동참할 몽골 버일러들이 병력을 이끌고 심양에 집합했다. 홍타이지는 이날, 정친왕(鄭親王) 지르가랑(濟爾哈朗)에게 심양에 남아 도성을 방어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아지게(阿濟格)를 우장(牛莊)에 배치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조선을 공격하는 와중에 혹시라도 명군이 배후에서 역습해 오는 상황을 우려한 조처였다. 우장은 압록강과 발해만으로 연결되는 전략 요충이었다. 당시 청은 명이 수군을 이용하여 발해만으로 들어와 내지에 상륙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나서면서도 여전히 명의 위협을 염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2월2일 오전 홍타이지는 대군을 출발시키기에 앞서 당자(堂子)에 나아가 삼배구궤두례(三拜九頭禮)를 행했다. 당자는 까치를 신성시하는 만주족 샤머니즘 신앙의 상징물이었다. 이어 팔기의 깃발들을 도열해 놓고 주악을 울리며 다시 배천례(拜天禮)를 행했다.
홍타이지는 이어 도도(多鐸)와 마부대 등에게 병력 1300명을 따로 주었다. 그들 가운데 300명은 상인으로 변장시켰다. 그들을 신속히 서울로 진격시켜 궁궐을 포위하려는 깜냥이었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 홍타이지의 생각이었다.
●무너진 통신체계
조선 침략에는 만주와 몽골군뿐 아니라 명에서 귀순한 한족 출신 장졸(-漢軍)들도 대거 동참했다. 공유덕, 경중명, 상가희(尙嘉喜)를 비롯하여 석정주(石廷柱), 마광원(馬光遠) 등 한군 지휘관들이 그들을 이끌었다. 청은 조선을 공략하기 위해 만몽한(滿蒙漢)의 모든 역량을 사실상 총동원했던 것이다. 한군들은 특히 홍이포(紅夷砲),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비롯한 중화기의 운용과 운반을 맡았다.
12월9일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몰려오는 상황을 인지했다.‘병자록’에 따르면 이미 12월6일부터 청군과 관련된 이상 징후를 알리는 봉화(烽火)가 여러 차례 올랐지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그 상황을 서울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그는 적이 겨울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또 봉화가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9일 적군이 이미 순안(順安)을 통과하여 안주를 향해 내달리는 상황에서야 김자점은 장계를 올렸다.
청군은 질풍같이 내달렸다. 조선은 청군의 철기(鐵騎)와 야전에서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고 여겨 주로 산성에 들어가 방어하는 전술을 구상했다. 하지만 청군은 조선군이 대비하고 있는 산성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울로 돌격하는 전술을 택했다. 사실 의주 부근의 백마산성도, 평양 부근의 자모산성도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로에서 적 기병을 차단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나마 봉화마저 제때 올리지 않았고, 평안도 각지에서 올린 변보(邊報)는 청군 기마대에 의해 차단되었다. 그 같은 상황에서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는커녕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시간적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전쟁은 이렇게 시작부터 음울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2)
1636년 12월10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다. 그들은 곽산(郭山)과 정주(定州)에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 홍타이지는 투항해 온 곽산과 정주의 군민들을 해치지 말라고 유시하는 한편, 그들의 머리를 깎아 치발(髮)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버일러 두도(杜度)에게 정예병을 뽑아 철산(鐵山)과 가도, 운종도(雲從島) 일대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15년 동안 목에 걸린 가시처럼 청을 배후에서 위협했던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동요하는 조선 조정
청군이 이미 안주를 지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김자점의 장계가 조정에 들어온 것은 12월13일이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영의정 김류는 경기 일대의 군사를 빨리 불러모아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자고 촉구했다. 하지만 인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청군이 깊이 들어올 리가 없다며 좀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김류가 다시 재촉하자, 인조는 신하들 가운데 늙고 병든 사람들을 먼저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청군의 철기(鐵騎)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는 상황에서 인조의 판단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무슨 근거로 적이 깊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우선 청군의 침입 상황을 신속히 보고하지 않은 도원수 김자점의 책임이 컸다. 또 청군 침입 직전, 격렬하고 지루하게 이어졌던 척화·주화 논쟁을 거치면서 인조의 판단력이 흐려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튿날 청군 철기가 이미 개성을 지났다는 보고가 다시 날아들었다. 다급해진 인조는 원임 대신 윤방(尹昉)과 승지 한흥일(韓興一)을 시켜 종묘에 모셔진 역대 선왕들의 신주(神主)를 수습하고, 빈궁(嬪宮)과 왕자들을 호위하여 강화도로 들어가게 했다. 한성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삼아 강화도의 민정과 방어 문제를 책임지게 했다. 또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강화도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선박의 관리와 왕실 인척들의 배행(陪行)을 맡도록 조처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던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인조 일행이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청군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양철평은 지금의 은평구 녹번동 부근이다. 인조 일행이 당황하고 있을 때 마부대(馬夫臺)가 이끄는 청군 선봉은 이미 홍제원(弘濟院)을 지나고 있었다. 인조는 숭례문 문루로 올라가고 훈련대장 신경진(申 景 )을 시켜 모화관(慕華館)으로 나아가 적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청군이 코앞에 들이닥치자 도성은 그야말로 공황 상태로 빠져 들었다. 인조 이하 신료들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와중에 피난하려는 백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명길의 용기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청군 선봉이 시시각각 도성을 향해 옥죄어 오고 있는 데다 강화도로 이어지는 뱃길도 이미 차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절부터 유사시의 피난지로 점찍어 준비해 왔던 강화도였다. 상당한 양의 식량과 화약도 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조는 정작 가장 절실했던 순간,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허망한 일이었다. 당시 강화도까지 가려면 대략 이틀 정도가 걸렸다. 인조가 김자점의 장계를 받자마자 강화도행을 시도했으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면 전쟁의 양상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청은 병자호란을 도발하기 전부터 조선을 깊이 연구했다. 그들은 유사시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문룡(毛文龍)이 바로 자신들의 코앞에서 약을 올리고 있었음에도, 수군과 전함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정묘호란 당시에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맥이 빠져 버렸다. 이번에는 달랐다. 아예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길이 막혔다는 소식에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바로 그때 최명길이 나섰다. 자신이 청군 진영으로 나아가 담판을 벌이겠으니 그 틈을 타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최명길에게 강화(講和)를 청하면서 시간을 벌어 보라고 지시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 인조는 다시 주화론 쪽으로 돌아섰다.
적장을 만나 시간을 벌겠다고 자청했던 최명길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는 분명 전시(戰時) 상황이었다. 막 무악재를 넘어서려 하고 있던 마부대 일행에게 최명길의 출현은 ‘시간 끌기’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았다. 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최명길은 적진으로 나아갔고, 그가 마부대와 담판을 벌이는 사이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화친으로 나라를 망친 자’라고 매도당했던 최명길이지만, 위기의 순간 신하로서 그가 보인 용기와 충성심은 참으로 대단했다.
최명길은 마부대에게 청군이 깊숙이 침입한 까닭을 물었다. 마부대는 ‘조선이 까닭 없이 맹약을 어겼으므로 새로 화약을 맺기 위해 왔다.’고 둘러댔다. 조선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배후에서 홍타이지가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고 있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포석인지도 몰랐다.
한편 인조가 도성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처연했다.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는 것이 이괄의 난, 정묘호란의 뒤를 이어 벌써 세 번째였다. 구리재(銅峴)를 넘어 수구문(水口門)으로 이어지는 파천 길에는 어가 행렬과 백성들의 피난 행렬이 서로 뒤엉켰다. 인조를 호위하던 군사들부터 갈팡질팡하여 대오가 흩어졌다. 혼란의 와중에 가족과 떨어져버린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넘쳐났다. 빨리 적을 피해야만 하는 황망한 상황에서 말이 제대로 준비될 리 없었다. 신료들 가운데는 말이 없어서 도보로 수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기온은 더 떨어지고 남한산성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강화도로 가자는 논의가 다시 등장하다
인조 일행은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산성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영의정 김류는 인조에게 강화도로 가자고 다시 강청했다. 홍서봉(洪瑞鳳)과 이성구(李聖求)도 김류의 의견에 동조했고, 이홍주(李弘胄) 등은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김류는 강화도로 가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산성은 고립되어 양식과 말먹이가 부족하다. 강화도는 우리에게는 편리한 곳이나 저들에게는 침범하기 어려운 곳이다. 또 청의 본래 의도는 명을 치는 데 있으니 우리를 상대로 지구전(持久戰)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강화도로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김류는 청군이 공유덕(孔有德) 등의 귀순을 통해 수군과 함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청군이 함선을 갖고 있고, 수군을 지휘했던 경험이 있던 공유덕 등이 이 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화도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조는 김류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인조는 귓속말로 김류에게 어느 길로 갈 것인지를 물었다. 김류는 수행 인원을 단촐하게 줄여 과천과 금천(衿川·시흥)을 경유하면 강화도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대제학 이식(李植)은 일단 인천까지 가서 배를 타자고 했다. 병력과 군량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남한산성의 상황이 불안했던 것일까? 인조는 김류 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밀실에서 파천론이 다시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삼사의 언관들이 격렬히 반대했다.
1636년 12월15일 새벽,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향했다. 하지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고 비탈진 산길은 얼어붙었다. 말들이 미끄러지면서 어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길이 국왕을 알아 볼 리 없었다. 인조도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졌다. 신료들은 놀라 어가를 다시 돌렸다. 날씨마저 철저히 인조를 외면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3)
조선이 병자호란을 맞아 일방적으로 몰리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청군이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강적이었다는 점이다.청군은 병력의 수,무기 체계,전략과 전술,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군을 압도했다.그들은 교전 경험도 풍부했다.1618년 무순성(撫順城)을 점령했던 이래 수많은 공성전(攻城戰) 경험을 갖고 있었다.
복원된 남한산성의 행궁.행궁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머물던 ‘임시 조정’이었다.행궁의 복원을 맞아 병자호란이라는 ‘아픈 역사’에서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마음가짐도 함께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남한산성 공성은 1631년 홍타이지가 주도했던 대릉하(大凌河) 공략전과 흡사했다.대릉하전 당시 청군은 성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산해관 쪽에서 몰려오는 명 지원군의 접근을 차단했다.
남한산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판교와 광주 쪽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한 것과 똑같다.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성 내부의 식량이나 연료가 떨어지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수시로 투항을 권유하는 심리전을 폈던 것도 비슷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청이 이미 조선이 사용할 ‘카드’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다.그들은 조선 조정이 유사시 강화도로 들어갈 것이라는 점도 1627년 정묘호란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청군은 그 때문에 서울을 신속히 점령하고 인조를 사로잡는 것을 전략 목표로 삼았고,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군의 청야견벽 작전을 무시하고 서울로 치달리는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저지른 실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드러난다.우선 오랫동안 막대한 물력을 기울여 강화도를 정비했으면서도 정작 청군의 침입이 시작되자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명백한 과오였다.만약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전쟁의 양상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 해로를 통해 삼남 지방과 연결됨으로써 물자 조달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또 김경징 같은 용렬한 인물에게 섬의 방어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삼남 지역의 수군도 훨씬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청의 배후에는 엄연히 명이 있었다.청은 ‘뒤를 돌아보아야 할(後顧)위험’ 때문에 속전속결 전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만일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갔다면 조선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후금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그러면 설사 강화(講和)를 맺더라도 훨씬 완화된 조건으로 화약을 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이란 부질없는 것이다.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내몰린 것은 결국 인조와 조선 조정의 실책이었다.적은 나를 아는데,나는 적을 모르고 거기에 안일하기까지 했던 정황이 불러온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1623년 3월 김류가 이끄는 인조반정의 거사군이 창덕궁으로 들이닥쳤을 때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반문했다.“지금의 거사가 종사(宗社)의 미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영달을 위한 것인가?” 반정세력은 거사가 성공하던 당일에는 그 뜻을 잘 몰랐을 것이다.
인조반정은 분명 나름대로 명분과 정당성이 있는 정변이었다.그 주도 세력들이 광해군 집권기에 자행된 실정과 난맥상을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던 것도 인정할 수 있다.하지만 거기까지였다.반정공신들을 비롯한 주도 세력들은 집권 이후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광해군대의 부정과 비리’를 소리 높여 질타했으되,자신들 또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다.
반정 이후 영달한 공신들 가운데 최명길과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무능하고 문제가 많았다.나아가 공(公)과 사(私)를 제대로 분별하지 않았다.청군의 침략 소식을 제때 보고하지 않고 저항마저 포기함으로써 청군의 신속한 남하를 방조했던 김자점,강화도 검찰사라는 감투를 자기 집안의 식솔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남용했던 김류와 김경징 등의 행적은 그 상징이었다.
인조는 그럼에도 김류와 김자점 등 공신들을 끝까지 편애했다.종묘사직을 도탄에 빠뜨리고,수많은 생령들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들을 처벌하려 들지 않았다.청은 달랐다.그들은 전승국임에도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과거 청산’을 철저히 시도했다.조선의 전장에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태만했던 지휘관들을 가차없이 군율로 처벌했다.
사정(私情)에 눈이 멀어 공신들을 끝까지 비호한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훗날 인조 정권과 효종 정권을 뒤엎으려는 역모를 시도했던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이 모두 공신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너무 역설적이다.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7년의 병자호란을 돌아보면 오늘이 보인다.1627년은 상대하기 버거운 청의 전면 침략을 미봉책으로 잠시 멈춰 놓았던 해였다.
이후 10년은 당연히 ‘외양간을 고쳐야 했던’ 시간들이었다.하지만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와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총론’의 목소리는 높았다.그러나 그들의 침략을 막아낼 방도에 대한 ‘각론’은 존재하지 않았다.그 귀결이 처참한 항복이었고 수많은 환향녀와 ‘안추원’,‘안단 ’ 등을 만들어 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역사에서 제대로 교훈을 얻고 있을까? 1997년 혹심한 외환위기를 겪었음에도 10년 만에 경제가 휘청대는 상황을 다시 맞은 것을 보면 도무지 그런 것 같지 않다.
1627년과 1637년,1997년과 2008년.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 숫자들을 보면서 생각해야 한다.“역사를 두려워하고,역사 앞에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추위와 굶주림 속에 절망과 슬픔을 곱씹으며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던 수많은 선인들의 고통을 추념(追念)하며 글을 마친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
■“지금의 경제위기도 10년 전 IMF 원인 규명 미흡했기 때문” 연재 마치는 한명기 교수의 소회
“병자호란(1636)은 10년 앞서 일어난 정묘호란(1627) 당시 조선에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뼈아픈 결과입니다.지금의 경제난국도 10년 전 IMF 외환위기 때 책임 소재와 원인에 대한 규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되풀이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
한명기(46) 명지대 사학과 교수가 서울신문에 매주 연재한 기획시리즈 ‘아픈 역사에서 배운다-병자호란 다시 읽기’가 31일자로 마침표를 찍었다.2007년 1월11일 첫 회를 시작으로 꼬박 2년간 모두 104회에 걸쳐 철저히 사료에 입각해 병자호란에 얽힌 이야기를 꼼꼼히 풀어낸 한 교수는 “비극의 역사인 병자호란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잘못을 뿌리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위기는 언제든 반복된다는 교훈을 새삼 되새겼다.”고 소회를 밝혔다.
한 교수는 수많은 민초의 죽음과 10만명이 넘는 포로를 발생시킨 병자호란의 원인이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무책임에 있다고 지적한다.정묘호란의 굴욕을 겪고도 이들은 명·청 교체기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히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기는커녕 책임 회피에만 급급했다.위정자들의 이같은 안이한 태도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인조는 청태종에게 세 번 큰절을 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잘못된 정책 판단으로 환란을 자초한 정책담당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은 소홀히 했다.일례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김류는 아들 김경징의 안일한 처신으로 강화도가 함락돼 비난이 들끓는데도 자리를 보전했다.
반면 백성들의 고통은 극심했다.청으로 끌려갔다 탈출한 포로들은 다시 청으로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을 당했다.안추원과 안단은 무려 28년,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지만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조선으로 되돌아온 포로 여자들(환향녀)은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았다.
한 교수는 “청에 항복한 이후에도 오랑캐라고 혐오하기만 했지 왜 당해야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위기의 원인을 찾아 철저히 반성하고,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결여됐던 것이 조선이 동아시아 3국 가운데 근대화가 가장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라고 분석했다.그러면서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확실히 극복하는 DNA가 부족한 것 아닌지 자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병자호란의 전말을 학술논문이 아닌 대중적인 글로 집대성해서 풀어쓴 사례는 드물다.한 교수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본으로 병자호란에 관한 모든 자료를 취합해서 철저히 사료에 근거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임진왜란과 한중관계’‘광해군’ 등의 저서를 쓴 한 교수는 앞으로 임진왜란에 관한 대중서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했던 조선의 운명은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때문에 현재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을 다시 읽는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길이라고 한 교수는 강조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이언탁기자 utl@seoul.co.kr(4)
이정훈
“조선은 청나라 속국…” 중국의 역사공작 ‘신청사(新淸史)’를 고발한다
이정훈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13-04-19 17:51:00
동북공정으로 고조선-고구려-발해사를 삼키려 했던 중국이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묘사할 가능성이 높은 정사(正史) ‘신청사’를 만들고 있다. 중국은 정사로 인정되지 않은 ‘청사고’에 속국전(屬國傳)을 만들고 조선을 여기에 포함시킨 전력이 있다.
중화민족을 앞세우고 ‘통일된 다민족국’을 만들기 위해 만주족 역사를 정통으로 인정하려는 중국의 역사 공작 전모를 공개한다.
북경의 자금성. 만주족은 자금성 주변에 강력한 부대인 팔기를 포진시켜 한족 관료들을 감시·통제했다.
‘신동아’는 2003년 9월호에 중국 ‘광명일보(光明日報)’에 실린 ‘고구려사 역사 연구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론’을 공개해, 중국이 준비해온 동북공정을 알림으로써 반(反)동북공정 열풍을 일으킨 바 있다. ‘신동아’는 중국이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 공작의 실체를 고발하고자 한다. 이름하여 ‘청사공정(淸史工程)’이 그것이다. 청사공정은 청나라에 대한 공인된 역사서인 ‘신청사(新淸史)’를 만드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신청사’를 출간할 예정이었으나 내부 사정 때문인지 올해나 내년으로 발간 시기를 미뤘다.
중국이 자기네 역사서를 만들겠다는 데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청사’에 ‘조선은 청의 속국(屬國)이었다’고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중국 정부가 공인한 정사(正史)에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표기한다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이니 한중 관계가 경색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독도 영유권을 넘보는 일본에 이어 민족자존 문제를 놓고 중국과 날선 대립을 해야 한다.
중국에는 한 나라가 망하면 다음 나라가 앞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전통이 있다. 이를 ‘나라(代)가 바뀌면(易) 앞 나라의 역사(史)를 편찬한다(修)’고 하여, ‘역대수사(易代修史)’라고 한다. 역대수사의 전통에 따라 중국은 25종의 정사를 만들어왔다(약칭 25사). 정사가 꼭 시대 순으로 편찬되진 않았다. 한참 후에 들어선 나라가 오래전에 사라진 나라의 정사를 만들기도 했다. 한 나라에 대한 정사가 꼭 하나인 것도 아니다.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식으로 두 가지인 경우도 있다.
한족(漢族)은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간주한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워 자신을 지배한 데 대해 강한 적개심을 품었다. 원을 무너뜨린 명(明)은 역대수사 전통에 따라 정사인 ‘원사’를 편찬했지만, 성의 없이 몇 달 만에 제작했다. 이 때문에 내용이 엉성하고 빠진 것이 너무 많아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나 반원(反元) 감정 때문인지 미루고 미루다가 중화민국(북양정부) 시절에야 257권의 ‘신원사’를 편찬했다. 이를 1919년 중화민국 5대 총통인 쉬스창(徐世昌)이 공인함으로써 청나라가 펴낸 ‘명사’보다 늦게 나온 ‘신원사’가 25번째 정사가 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공인’이다. 중국은 왕이나 황제 또는 그에 준하는 국가지도자가 승인한 것을 ‘공인’으로 본다. 전문 학자들이 검토해 승인하는 게 아니라 최고지도자의 인정으로 결정되니 정사를 정치적으로 만들 수 있다. 중국이 청사공정으로 만들려고 하는 정사를 ‘신청사’로 한 것은 과거에 제작됐으나 공인받지 못한 청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고지도자의 공인 여부는 정사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중국의 최고지도부는 9명(현재)의 상무위원으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의 상무위원회다. 청사공정은 2002년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주룽지(朱鎔基), 리란칭(李嵐淸) 4명의 상무위원이 비준함으로써 시작됐다. 이에 따라 2003년 중국 런민(人民)대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청사공정’으로 약칭되는 국가청사찬수공정(國家淸史纂修工程) 사업이 시작됐다. 이 사업을 통해 ‘신청사’가 완성되면 다시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들의 비준(공인)을 받아 정사로 인정될 예정이다.
‘신청사’가 조선을 속국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명사(明史)’와 뒤에서 자세히 설명할 ‘청사고’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명사’는 명이 무너진 후 중국을 장악한 청이 역대수사의 전통에 따라 편찬한 명나라 정사다. 중국 정사는 기전체(紀傳體)로 기록한다. ‘기’는 황제의 일대기와 정치활동을 적은 본기(本紀), ‘전’은 황제를 제외한 그 시대의 주요 인물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가리킨다. 열전 편에 외국에 대한 기록을 함께 넣었다. 조선에 대한 것은 ‘조선전’, 일본에 대한 것은 ‘일본전’으로 정리하는데, 이를 통칭 ‘외국전’이라고 한다.
우리의 정사인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의 역사만 기록해놓았다. 삼국 이전의 우리나라 기록은 없다. 중국의 네 번째 정사로 꼽히는 ‘삼국지’ 위지의 동이전은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대의 중국은 우리를 동이(東夷)로 칭했다. 동이전은 극히 중국 중심적으로 기술됐다. 이런 까닭에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동이전을 참고하면서도 매우 불편해하고 있다.
‘조선은 속국 또는 번국’
삼국지를 비롯한 고대 중국 정사에서 우리를 ‘동이’라고 한 것은 속국이라고 일컬은 것과 진배없는 멸시의 표현이다. 중국은 주변국을 동서남북에 있는 오랑캐라며 ‘사이(四夷)’로 부르고, 그에 대한 기록을 ‘사이전(四夷傳)’ 또는 ‘사이록(四夷錄)’으로 통칭해왔다. 사이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사방의 오랑캐를 가리킨다. 동이전이 바로 사이전 중 하나였다.
송나라는 거란이 세운 요(遼)나라의 공격을 받아 북경을 포함한 16개 주(연운 16주)를 떼어주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 항복을 ‘전연맹약(淵盟約)’이라고 하는데, 전연맹약 후 중국 정사에서는 주변국에 대한 기록을 외국전으로 격상했다. 이에 따라 ‘명사’는 조선전을 만들었으나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표현을 넣었다. ‘조선은 중국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번국(藩國)이다’라고 한 후 ‘조선을 속국으로 일컬으니 (명의) 경계 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적은 것이다.
‘울타리 번(藩)’자를 쓰는 ‘번국’은 ‘번부(藩部)’와 같은 말로, 중국 외곽에 있는 이민족 자치구역을 가리킨다. 지금 중국은 변방에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 시짱(西藏)티베트 자치구,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등을 두고 있는데 이것이 ‘번부’나 ‘번국’이었다. 중국은 외곽의 이민족을 복속시켜 1차로는 중국을 지키게 하는 울타리로 삼고, 2차로는 중국 정치 영역에 붙잡아둠으로써 중국 영토를 넓히는 전략을 구사했다.
책봉과 明軍 파병
청나라 때의 변발. 만주족은 그들의 풍습인 변발을 전 중국인에게 적용시켰다.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책과 함께, 2004)에서
중국은 영토가 넓다보니 내지(內地)에도 이민족 거주지를 두게 됐다. 내지에 있는 이민족 자치구역은 ‘토사(土司)’라고 했다. 중국 정사는 토사와 번부는 외국전으로 정리하지 않았다. 본기나 열전 등을 기술할 때 번부와 토사에 대한 기록을 넣었는데, 이는 중국의 일부인 속국으로 본다는 뜻이다.
번부가 바로 과거의 사이(四夷)다. 전연맹약 덕분에 동이는 번부에서 빠져나왔지만, 서융(西戎)과 북적(北狄)은 계속 번부로 규정돼, 지금은 중국의 일부가 돼버렸다. 중국은 중국 중심의 역사 기록을 남김으로써 외국을 삼킨 것이다.
그런데 ‘명사’는 조선전을 따로 만들어놓고도 조선전에서 ‘조선을 번부 또는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했다. 체재만 외국으로 분류했지만 내용은 중국의 일부로 본 것이다. 청나라가 이런 내용의 ‘명사’를 출간할 때 조선은 힘이 없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명사’가 조선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표현한 것은 조선의 지나친 사대(事大)와 임진왜란 때 명군의 지원을 받은 것 때문인 듯하다.
조선이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고 책봉(冊封)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황실은 천하의 중심을 자처했기에 외국에서 무역을 하자며 선물을 보낸 것도 ‘조공’으로 표기했다. 그러니 조공을 했다고 해서 외국이 중국을 사대했다고 볼 수는 없다. 중국도 이를 잘 아는지라 조공만으로는 속국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봉은 다르다. 책봉에도 여러 유형이 있다. 고려는 요(遼)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이는 외교상 의례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명에 대한 조선의 책봉은 그 내용이 심각했다.
조선은 유구(琉球·지금의 오키나와)와 더불어 새 임금이 들어서면 무조건 중국 황실로부터 책봉을 받아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는 명이 책봉을 해줄 때까지 왕이란 칭호를 못 쓰고 ‘권지국사(權知國事)’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유구는 한술 더 떴다. 유구의 어느 왕은 명이 혼란에 빠져 책봉해줄 사신을 못 보내자 평생 세자 신분으로 있다가 죽었다. 그러나 일본 왕은 책봉을 받은 적이 없기에 중국은 일본을 속국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청에 두 번 항복한 조선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는 참으로 무능하고 한심한 임금이었다. 왜군에 쫓겨 의주까지 도주한 그는 중신들의 거센 만류에도 명에 ‘나의 망명을 받아달라’ ‘명나라 군대를 보내달라’고 거듭 간청했다. 명은 선조의 망명은 불허한 대신 명나라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계의 피가 흐르는 이여송이 병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에 들어온 명군은 행패가 심했지만 조선은 이들을 ‘천군(天軍)’이라 칭하며 환대했다.
명군 참전 후 전쟁은 정전(停戰)을 하는 등 답보를 거듭하다 명-왜 간의 협상으로 왜군이 철수하면서 끝났다. 외적을 자국의 힘으로 물리치지 못하고 외국 군대가 와서 협상으로 물러나게 했으니, 조선은 명에 더욱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명에 이어 중국을 통치하게 된 청은 조선을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다(정묘호란). 이 전쟁에서 이긴 청(당시는 후금)은 자신이 형, 조선이 동생이라는 형제지국(兄弟之國) 관계를 맺고 물러났다. 그런데도 조선은 명에 심각하게 의존한 기억 때문에 청을 무시했다.
그러자 1636년 다시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남한산성으로 도주한 인조를 붙잡았다(병자호란). 인조는 삼전도에서 황제에게 올리는 만주식 예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는데,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림)를 하며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된다”고 약속했다. ‘군신지국(君臣之國)’을 조건으로 항복한 것이다. ‘명사’는 이러한 청이 만든 것이니 조선을 외국전에 넣긴 했어도 속국과 다를 바 없었다고 쓴 듯하다. 이러한 청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 ‘청사고’이니 청사고에는 더 심각한 내용이 들어갔다.
조선을 두 번이나 항복시킨 청은 말기인 1885년, 26세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 파견했다. 위안스카이는 조선 조정을 마음대로 주물러, 식민지를 통치하는 총독(總督)과 비슷한 뜻의 ‘감국(監國)대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때문에 ‘청사고’는 과거의 정사에는 없던 ‘속국전(屬國傳)’을 만들고, 그 안에 조선을 집어 넣었다.
청나라는 1911년 쑨원(孫文)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쓰러졌다. 새로 들어선 중화민국은 극심한 혼란 탓에 쑨원이 아니라 당대의 실력자인 위안스카이를 총통에 추대했다. 위안스카이는 1914년 역대수사 전통에 따라 청사관(淸史館)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청사를 만들게 했다. 청사관 학자들은 대부분 청나라 과거에 급제한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청 실록과 공문서 등을 근거로 청사를 편찬했기에 청나라적 시각이 많이 반영됐다.
위안스카이는 총통에 만족하지 않고 중화민국을 중화제국으로 바꿔 황제가 되려 했다. 그러다 역풍을 맞아 실각하고 쉬스창(徐世昌) 같은 군벌(軍閥)의 대표가 총통에 올랐다. 그때의 중화민국은 일본 등 열강의 공격을 받고 있는 데다 내분까지 심한 내우외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공인 못 받은 ‘청사고’
중국은 발해와 황해를 ‘북양(北洋)’이라 통칭한다.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북양에 면한 지역만 지배하고, 양자강 남쪽은 국민당 정권이 장악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 중화민국 정부를 ‘북양정부’로 부른다. 북양정부 시절인 1928년 청사가 완성됐다.
그런데 청사는 공인을 받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청나라적 시각이었다. 신해혁명으로 청을 무너뜨린 세력을 역적으로 표기한 것이 문제가 됐다. 명나라가 몽골족의 원나라를 배척했던 것처럼 중화민국을 세운 한족 엘리트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매우 싫어했다. 쑨원은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일으키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 구호를 내걸고 신해혁명을 성공시켰을 정도다.
당시 세계적으로는 반(反)봉건, 반(反)제국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한족 엘리트는 청대(代)를 한족이 만주족으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한 시기로 이해했다. 청나라는 한족을 철저히 차별하는 ‘기인(旗人)통치’로 중국을 지배했다. 쑨원을 필두로 한 한족 엘리트는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한족을 해방시키자며 혁명을 일으켰으니, 청나라는 이들을 역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청사는 이런 시각으로 작성되었다.
힘없는 북양정부라 해도 ‘멸만흥한’ 정신만큼은 공유하고 있었으니 이 청사를 공인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고는 나온 마당이라 ‘원고 고(稿)’ 자를 붙여 ‘청사고’로 이름 짓고 서고에 집어 넣었다. 이러한 ‘청사고’가 소량 인쇄돼 세상에 나온 적이 있는데, 여기에 조선에 대한 내용이 속국전에 포함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 ‘청사고’는 과거 정사에는 없었던 속국전을 만들어 조선, 유구, 베트남을 집어 넣었다.
‘청사고’를 만들 때 조선은 일본,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유구는 그 이전에 일본에 병합됐다. ‘청사고’ 편찬자들은 청의 강력한 영향권에 있었던 조선, 유구, 베트남을 빼앗긴 게 억울한 나머지, 속국전을 만들어 세 나라 기록을 정리한 듯하다. 우리에겐 치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청사고’가 공인받지 못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북양정부 총통이 ‘청사는 청나라 처지에서 쓴 역사이니 신해혁명 세력을 역적으로 볼 수도 있다’며 승인했다면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는 항변도 못하고 앉아서 당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은 G2 반열에 올랐으니 세계는 ‘청사고’ 기록을 정설로 수용했을 것이다.
동북아재단의 추적
2003년 동북공정에 분노한 한국은 2004년 고구려역사재단을 만들고, 2006년 독도 영유권 문제를 포함시켜 다룰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학준)으로 확대 재편했다. 이 재단은 중국이 ‘신청사’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 예의 주시해 왔다. 재단에 따르면 중국은 ‘신청사’에 속국전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명사’에서처럼 ‘신청사’에 ‘조선은 청의 속국이었다’ 또는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쓰면 그만인지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중국은 속국전이 공인받지 못한 ‘청사고’에만 있는 체재(體裁)라, ‘신청사’엔 싣지 않기로 한 것 같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여러 요소가 변화했기에 ‘신청사’를 과거의 정사와는 다른 체재로 만들기로 했다. 과거의 정사는 기전체를 채택했지만 ‘신청사’는 창신체(創新體)를 취하기로 한 것. 이유는 중국의 문화와 철학이 혁명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겪은 가장 큰 변화는 한자를 정자 대신 간체자(簡體字)로 쓰게 된 것이다. 문장도 고대와 다른 백화문(白話文)으로 쓰게 됐다. 간체자로 백화문을 쓰는 현대 중국인들은 순수 한문으로 된 고대 자료를 술술 읽고 쓰지 못한다. ‘청사고’를 낼 때까지는 과거와 같은 한문 문장으로 역사서를 만들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한문을 구사할 수 있는 학자가 드물다.
그래서 ‘신청사’는 간체자-백화문으로 편찬하기로 결정했다. 기전체는 한문 문장에 적합하지, 간체자-백화문에는 맞지 않다. 현대의 중국 학자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장과 절로 나눠 글을 쓰는 장절체(章節體)에 익숙하다. 따라서 ‘신청사’는 기전체적 요소를 가미한 장절체로 쓰기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창신체다.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도 쑨원이 세운 중화민국을 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봉건과 반제국주의 정신을 받아들여 황제의 일대기와 황제의 통치를 주내용으로 한 본기는 봉건적이라 보고 ‘신청사’에 담지 않기로 했다. 대신 ‘통기(通紀)’를 만들기로 했다. 통기는 황제의 일대기 중심이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기록한다. 도판도 많이 삽입하기로 했다. 과거의 정사는 글로만 채워졌으나, ‘신청사’에는 많은 사진과 그림을 덧붙여 시각적으로 청대사를 보여주기로 했다. 또한 외국전을 없애고 이웃 나라(邦)와 교류(交)한 것을 적는 ‘방교지(邦交志)’를 만들기로 했다. 조선에 대한 기록은 방교지에 넣기로 했다.
청나라 사신 일행으로 북경을 다녀온 많은 조선 선비가 ‘연행록(燕行錄)’으로 통칭되는 기행문을 남겼다[과거에는 북경을 연경(燕京)이라고 했기에 그 기행문을 연행록이라 했다]. 가장 유명한 연행록이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중국은 조선 방교지의 객관성을 갖추기 위해 한국에서 간행된 연행록을 몽땅 가져가 분석했다. 이러한 연행록에는 조선실록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공 사신으로 갔다’ ‘책봉을 받았다’는 등의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 때문에 중국이 조선 방교지에 어떤 내용을 담을까 염려하는 학자가 많다.
중국은 과거엔 번부였고 지금은 중국의 일부로 있는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등은 중국 내지에 대한 기록인 ‘지리지(地理志)’에 담기로 했다. 여기에도 변화를 줬다. 과거엔 이들을 만이(蠻夷) 융적(戎狄) 견융(犬戎) 같은 경멸적 용어로 표기했으나, ‘신청사’에선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기로 했다.
중국은 철저하게 자료에 근거해 방교지와 지리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으나 조선은 청에 두 번 항복했고 조공과 책봉을 했으니 조선 방교지에 속국과 다를 바 없다고 기록할 수도 있다. ‘신청사’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한국과 베트남 등은 자존심이 상해 격분하고, 티베트와 위구르족은 “과거에는 청의 일부가 아니었는데 일부로 적었다”며 격렬한 독립투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
해양굴기 잇는 역사굴기
최근 중국은 도련(島鍊)정책의 일환으로 남중국해의 남사군도와 서사군도, 동중국해의 조어도 영유권을 주장해, 인접국들과 큰 마찰을 빚었다. ‘해양굴기(海洋·#54366;起)’가 중국의 1차 팽창이라면, ‘신청사’ 출간은 동북아를 뒤흔드는 중국의 2차 확장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중국이 정치적 배경을 갖고 ‘신청사’를 편찬한다는 사실이다. ‘신청사’는 중국의 국가기관이 아닌 런민대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만들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베이징대도 아니고 런민대가 주도하게 된 것은, 다이이(戴逸)라는 이 대학의 노(老)역사학자 때문이다. 다이이는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가까운 학자로 수십 년간 ‘신청사’ 편찬을 주장해 관철해냈다.
1940년대에 베이징대 사학과를 다닌 다이이는 공산주의에 매료돼 학업을 중단하고 연안(延安)으로 도주해 있던 중국 공산당군을 찾아갔다. 역사를 공부하는 젊은 엘리트가 연안에 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1949년 공산당군이 중국을 장악하자 그는 일약 역사학계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중국은 ‘나라가 강성해졌을 때 이전 역사를 만든다’는 ‘성세수사(盛世修史)’를 강조한다. 다이이는 성세수사를 들먹이며 여러 실력자에게 ‘신청사’ 편찬을 거론했다. 그러나 당시의 실력자들은 청나라를 ‘한족을 지배한 식민지배 세력이자 공산혁명으로 극복했어야 할 봉건세력’으로 인식했기에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족을 꼼짝 못하게 한 기인 통치
청을 세운 만주족은 한족을 가혹하게 통제했다. 만주족은 ‘팔기(八旗)’라고 하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다. 팔기는 8개의 기병부대를 가리키는데, 각각의 기는 7500여 명으로 편성됐으니 팔기는 6만여 명의 기마부대가 된다. 만주족으로 구성된 팔기를 ‘팔기만주(八旗滿洲)’라 했다.
만주족은 왕비가 몽골족에서 나오는 조건으로 몽골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중국을 통치해, ‘만몽(滿蒙)동맹’으로 불렸다. 청나라는 강력한 동맹인 몽골족으로 ‘팔기몽고(八旗蒙古)’를 만들었다. 중국을 정복한 다음에는 한족으로 ‘팔기한군(八旗漢軍)’도 구성했다.
청은 한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팔기만주를 주요 성(城)에 보내 주둔하게 했다. 반란을 막기(防) 위해 주요 성에 주둔(駐)한 팔기가 ‘주방팔기(駐防八旗)’다. 주방팔기는 각 성 안에 ‘만성(滿城)’이라는 작은 성을 짓고 그 안에서 가족들과 생활하며 한인들을 지배했다. 청나라 수도인 북경성에선 황궁인 자금성 주변에서 생활했다.
청나라는 원과 달리 한족 엘리트를 관료로 고용했다. 그러면서도 팔기를 동원해 철저히 감시했다. 팔기에 속한 사람을 기인(旗人)이라 했기에, 팔기를 통한 한족 지배를 ‘기인통치’라 한다. 청나라는 그들의 풍습인 변발을 강요해 한족들도 변발을 하게 됐다. 기인통치와 변발 강요는 만주족의 핵심 지배술이었다.
기인들은 자금성 주변인 북쪽의 부유한 곳에 살았고, 한족 관료들은 남쪽의 빈한한 곳에서 거주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베이징에선 자금성 주변이 부촌이고, 그 남쪽은 서민 지역이다. 지금 중국 실력자들이 거주하는 중난하이(中南海)도 기인들이 살던 곳이다. 기인통치 덕분에 100만 명도 안 되는 만주족은 100배가 넘는 1억 인구의 한족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었다. 청나라 중기 이후에는 중국 인구가 3억으로 증가했으니 300배가 넘는 한족을 통제한 것이다.
청나라 말기 청의 지배력과 경제력이 약해졌을 때를 빼면 한족들은 거의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으켜도 전부 제압당했다. 청은 한족들이 어쩌지 못했던 티베트족과 위구르족, 몽골족까지 제압해 번국으로 삼았다. 그러던 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처음으로 패하면서 몰락의 길에 빠져들었다. 그때 쑨원을 필두로 한 세력이 ‘멸만흥한’과 변발 거부로 혁명을 일으켜 쇠퇴한 청을 무너뜨렸다.
중국 건국기에는 만주족에 대한 반감 때문에 다이이 교수의 주장은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시야가 달라지는 게 역사다. 청은 중국의 어떤 왕조보다 넓은 영토를 만들었다. 몽골족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지만, 일한국(一汗國) 등 여러 나라로 쪼개졌다. 중국을 통치한 원의 강역은 청보다 좁았다. 중국은 대만을 빼고는 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았다(조선, 베트남, 유구는 제외).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한족은 만주족에 단단히 신세를 진 셈이 된다. 중국의 엘리트들이 이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康乾盛世’에 주목하다
둥비우(董必武)는 청년 시절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에 가담한 뒤 일본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돌아와 변호사가 됐다. 그러다 공산주의에 심취해 연안의 공산당군에 가담했다. 공산군이 대륙을 석권한 직후 그는 정무원 부총리 등을 맡았다. 둥비우는 공산군이 중국을 장악한 것은 대단한 일이고 성세(盛世)를 만든 것으로 보고, ‘청사고’를 대체할 ‘신청사’를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도 같은 주장을 폈다.
다이이 교수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런민대에 청사편찬위원회를 만들려 했는데,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불발됐다. 중국은 문화혁명의 잔재가 정리된 1978년부터 다시 학문을 할 수 있게 됐다. 다이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사학자들이 성세수사를 강조하며 ‘신청사’ 편찬을 다시 주장한 것.
이러한 다이이를 밀어준 이가 당대의 실력자인 리란칭 상무위원이다. 그는 ‘신청사’ 편찬을 중국 공산당이 명실상부하게 중국을 장악했다는 증표로 이해했다. 그때부터 중국 지도자들은 만주족이 한족과 이민족을 지배한 것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만주족이 100~300배에 달하는 한족을 지배한 것은, 1000만도 안 되는 당원을 가진 공산당이 10억이 넘는 중국을 지배해야 하는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청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번영한 나라를 만들었다.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115년간이 극성기였다. 그 시기를 강희의 ‘강’과 건륭의 ‘건’을 따서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중국은 당나라 태종 때 중국이 융성했다며, 당 태종의 연호를 따서 이를 ‘정관지치(貞觀之治)’라고 한다. 정관지치는 한족 중심으로 통치하며 변수가 적었을 때 이룬 것이지만, 강건성세는 많은 이민족과 넓은 영토를 관리하며 만든 것이라 훨씬 더 복잡한 통치술이 필요했다. 중국 지배층은 만주족이 한족 외에 55개 소수민족을 다스리면서 번영된 강건성세를 이룬 것에 주목했다.
1999~2003년 중국 CCTV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주인공으로 한 대하드라마를 연속으로 제작해 방영했다. 이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청나라는 한족이 만주족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게 아니라, 위대한 중국을 만든 시기’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그 무렵 중국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있어 전 중국인을 하나로 뭉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만든 조어가 ‘중화민족’이다. 중화민족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모두를 가리킨다. 그리고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며, 소수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합치는 역사 공작을 시작했다.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가 조선족이고, 중국 영토 안에 조선족의 선조가 만든 고구려가 있었으니, 고구려는 중국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동북공정을 본격화했다. 만주족도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니 만주족 선조가 만든 금(金)과 청도 중국 역사에 포함된다는 것 또한 동북공정의 핵심 논리였다. 중국은 번국인 위구르족 역사를 통합하기 위해 서북(西北)공정, 티베트족 역사를 흡수하기 위해 서남(西南)공정을 펼쳤다.
한족 대신 중화민족 내세워
항주의 악왕묘에 있는 무릎꿇은 진회 부부상. 벽에 ‘가래침을 뱉지 말라’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청사공정은 중화민족을 내세워 만주족이 만든 청나라를 토대로 강력한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역사 공작의 종합편이다. 여기에 성세수사(盛世修史)를 강조해 덧붙임으로써 ‘중국은 태평성대이니 중국 인민과 소수민족은 중국 공산당의 일당 통치를 받아들이라’는 강력한 암시를 보내게 되었다. 다이이를 중심으로 한 중국 역사학자와 리란청을 중심으로 한 중국 지도부는 이러한 생각으로 청사공정과 동북공정 등을 추진한 것이다.
중국이 ‘신청사’와 동북공정 등을 통해 중화민족을 앞세우게 된 것은 중국을 ‘통일된 다민족국가’로 만들기 위해서다. 통일된 다민족국가 건설은 중국의 국시(國是)다. 중국 헌법 전문(前文)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전국의 여러 민족과 인민이 공동으로 창건한 통일된 다민족국가이다. (…) 민족단결을 유지하는 투쟁 중에는 대민족(大民族)주의, 특히 대한족(大漢族)주의에 반대해야 하고, 지방민족주의에도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청사공정과 동북공정은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추진되는 국가사업이다. 이는 중국 역사학계가 중국 정치에 철저히 종속돼 있다는 뜻이다. 중국은 청사공정을 위해 6억 위안(약 1000억 원)을 쏟아붓고 있다. 필자는 입찰을 통해 선발하기에 선발된 필자들은 중국 정부의 지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작은 반드시 모순을 초래한다. 좋은 예가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다. 악비는 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했을 때 최선을 다해 싸운 송의 명장이다. 그러자 진회(秦檜)로 대표되는 굴종파가 구실을 만들어 그를 체포해 처형하고 조건부 항복을 했다. 중국인들은 ‘송사’ 열전에 악비를 충신으로 묘사했다. 항주에 진회 부부가 무릎을 꿇고 악비에게 비는 조형물을 갖춘 악비사당(악왕묘)을 만들고, 진회 부부상(像)을 향해 욕을 하고 가래침을 뱉는 전통을 만들었다. 그런데 중화민족과 통일된 다민족국가 건설을 추구하면서 중국은, 금나라와 타협한 진회를 영웅, 악비를 분열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정사에 있는 판단을 바꿔버린 것이다.
역사는 객관적이어야 하지만 악비 사례에서처럼 해석은 필요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현대 국가들은 국가가 공인하는 정사를 만들지 않는다. 공인된 정사 편찬은 독재국가, 봉건국가의 산물로 이해한다.
하지만 중국은 ‘마이웨이’를 고집한다. 따라서 ‘신청사’가 나오는 날 중국은 안팎에서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신청사’를 만든 목적인 ‘통일된 다민족 국가 건설’이 오히려 위협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우려 때문에 중국 내에서도 ‘신청사’를 내는 것이 무슨 실익이 있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한중 역사전쟁은 어떻게 전개 될 것인가.(5)
사마천의 ‘사기(史記)’로 시작된 25史
중국의 정사는 대개 국가나 왕실이 편찬했다. 그러나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와 ‘신오대사’ ‘남사’ ‘북사’ 등은 개인 저술이다. ‘사기’는 전한(前漢) 무제 때의 사마천(司馬遷)이 사고(史庫)와 집 안에 모아놓은 여러 사료를 토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정사는 국가에서 내는 관찬사(官撰史)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정사는 여러 왕조를 기록한 통사(通史)와 한 왕조나 나라의 일을 기록한 단대사(斷代史)로 나뉘기도 한다. ‘사기’는 황제로 대표되는 3황5제 시대를 시작으로 하-상-주-춘추전국-진-한(전한)에 이르는 약 3000년의 역사를 서술했기에 통사(通史)로 분류된다. 진수의 ‘삼국지’와 5대10국의 역사를 기록한 ‘신·구 오대사(五代史)’ 등도 통사다. 반면 한서 당서 송사 명사 신청사 등은 단대사가 된다.
사찬(私撰)임에도 최초의 정사가 된 ‘사기’를 만든 사마천은 전한의 무제로부터 남성을 거세당하는 치욕적인 궁형을 당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통제해 객관적으로 ‘사기’를 편찬했다. 사마천은 원한을 버리고 이미 나와 있는 자료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추려 정리하는 식으로 ‘사기’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중국은 정사는, 만드는(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기술(述)해야 한다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강조했다. 신청사는 술이부작의 전통을 이어갈 것인가.
명말·청초 조선외교 ‘현장보고서’
이문영 기자
입력2008-03-13 00:00
업데이트2008-03-13 00:00
소현세자의 ‘심양장계’ 번역 출간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본국에 써 보낸 ‘심양장계’(瀋陽狀啓, 소현세자 시강원 지음, 이화여대 국문과 고전번역팀 옮김, 창비 펴냄)가 번역·출간됐다.
▲ 수어장대(守禦將臺).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청 태종의 군대에 맞서 싸운 곳이다.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심양장계는 신하가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 형식의 글이다. 세자를 수행한 시강원(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관청으로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갈 때 따라감) 관리가 장계를 작성해 승정원으로 보내면 승지가 국왕에게 전달했다. 본국에 보내기 전에 세자의 재가를 거쳤다는 점에서 세자가 임금에게 보낸 글이라 봐도 무방하다.
소현세자 일행은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이듬해인 1637년 4월 심양에 도착(당시 세자 나이 26세)한 뒤부터 귀국을 허락받은 1644년 8월에 이르기까지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세자는 자신을 수행해간 남이웅, 박로, 박황 등 시강원 관료들을 통해 본국 승정원에 장계를 올렸다.
●정치상황·청나라 궁실 생활상 자세히
심양장계는 명말 청초의 조선 외교사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자료 중 하나로 꼽힌다. 책엔 청나라 건국 초기의 정치상황과 궁실의 내부 사정, 만주 귀족들의 생활상까지 상세히 기술돼 있다. 당시 조선과 명·청 3국의 외교관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조선이 몰락하는 명나라와 흥성하는 청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시강원 관리는 심양의 세자와 대군 이하 종신들의 동정 외에도 청나라 관아의 모습, 심양의 정치·경제·사회 상황, 청나라와 명나라의 관계까지 탐문해 보고했다. 특히 국경 지역에서 벌어진 담배와 종이 등의 교역에 관한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본국에서는 장계 내용을 토대로 적절한 대책을 세우고 지시를 내렸다.
장계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풀어야 할 시급한 외교 현안은 요동 일대를 장악한 청나라가 명의 본토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요청한 군대 파병 문제였다. 세자는 조선과 청 사이에서 양국의 의견을 조율했고, 조선군을 향한 청군의 각종 항의를 무마시키기도 했다.
●세자가 양국 의견 조율·청군 항의 무마
시급한 현안을 놓고 급하게 쓰인 글인 만큼 심양장계는 정통 한문 문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조선식의 이두가 섞여 있고 부정확한 표현들도 적지 않아 해독이 쉽지만은 않다. 미묘한 국제관계를 다룬 탓에 조선왕조 기간엔 대외유출이 철저하게 금지됐고, 규장각에 국가 기밀자료로 보관된 채 왕실 친인척에게도 공개되지 않았다. 심양장계에 가장 먼저 주목한 건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명말 청초의 조선 외교관계를 파악하고 조선 식민지화 구실을 찾기 위해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고서번각위원회’가 1932년 ‘규장각총서’ 제1책으로 간행했다.
이번 번역본은 이화여대 국문과 고전번역팀이 이강로 한글학회 이사의 감수를 받아 수년간 공동작업 끝에 완성한 완역주석본으로 경성대 판본에 기초했다. 학술적 목적으로 이화여대 팀과 비슷한 시기에 직역 위주로 옮긴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번역본에 비해,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썼다는 것이 번역팀의 설명이다.(6)
노형석
‘삼전도의 굴욕’ 안긴 청 태종 칼…한국에 볼모처럼 남은 이유는?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고궁박물관 ‘청 황실의 아침’전 심양고궁박물원 전시품 가져와 중국 1급 국가문물 ‘황태극도’ 등 청나라 황실 역사 유물 선보여
‘삼전도 항복’ 강요한 홍타이지 유물 중국발 코로나19 전쟁 탓 383년 전 속국에 발 묶인 처지로
조선 인조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겼던 청 태종의 칼이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장에 나왔다. 생전 전장에서 썼던 보검으로 전해지고 있어 병자호란 당시 그가 차고 다녔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국보 격인 1급 국가문물이다. 전시의 대표적인 출품작 가운데 하나다.
역사도, 인생도 무상하다.
383년 전 ‘삼전도의 굴욕’을 안기며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었던 청나라 2대 황제 태종 홍타이지(황태극). 그의 칼이 옛 속국 왕실 박물관에 일개 전시품으로 들어온 풍경은 야릇한 감회를 안긴다. 지금 서울 경복궁 경내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 안쪽 진열장엔 청 태종이 썼던 ‘황태극도’(皇太極刀)가 그가 썼던 큰 활과 나란히 전시 중이다.
청나라 2대 황제 태종 홍타이지를 그린 초상화.
칼은 중국 동북지방 선양(심양)에 자리한 고궁박물원의 청 황실 컬렉션의 일부다. 선양고궁박물원과 국립고궁박물관이 지난 연말부터 함께 연 교류전 ‘청 황실의 아침, 심양 고궁’에 전시된 것이다. 선양의 청대 고궁에서 수백년 보관된 보검은 중국 국보 격인 1급 국가 문물이다. 전체 길이 94.5㎝. 상어 가죽으로 감싼 표면에 현란한 무늬의 금동장식 테를 네개나 두른, 우아하게 휘어진 소나무칼집이 먼저 눈길을 끈다. 칼집 속 칼은 정교한 꽃무늬가 가득 새겨진 손잡이와 손잡이에 테처럼 두른 칼코 등의 장식이 품격을 과시한다. 칼집에 달린 흰 가죽엔 만주 글자와 한자로 ‘태종문황제의 어용 요도 한자루가 성경(선양)에서 귀중하게 보관됐다’는 글귀도 쓰여 있다. 전쟁터에서 썼다고 전해지는 터라 병자호란 때 차고 다녔을 가능성도 있다고 박물관 쪽은 귀띔했다.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 한쪽에 마련된 청 태종 홍타이지의 전시 공간. 그의 초상과 생전 입었던 옷, 차고 다닌 칼 등이 진열된 모습이 보인다.
선양은 청의 첫 수도지만 우리 겨레엔 쓰라린 기억으로 남은 도시다. 병자호란 뒤 왕족과 사대부의 자제와 여인들, 평민들이 볼모로 끌려가 비참한 이역살이를 했다. 수난을 당하고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라며 박대했던 모질고 슬픈 역사도 잊을 수 없다. 여진족 후예로 1616년 후금을 건국한 칸(추장) 출신의 청 태조 누르하치가 1625년 도읍으로 삼았고,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6년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에 오른 뒤 조선을 침공해 신하국으로 삼았다.
17세기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룩한 성조 강희제의 어머니 효장문황후의 옥제 시보와 시보를 담은 용, 봉황 무늬가 새겨진 금칠함.
교류전은 역사적 질곡을 의식한 자리는 아니다. 누르하치와 황후들의 시호를 새긴 인장인 옥제 시보와 이를 담은 시함, 화려한 용무늬가 새겨진 황금빛 용포 등 궁중 활옷, 금속 유약인 법랑을 쓴 궁중 공예장식품을 통해 청 황실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소개할 뿐이다. 하지만 민족 사상 최대 굴욕인 삼전도 항복을 강요한 청 태종의 옷과 무기, 초상 등이 나왔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선양에 얽힌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까지 떠올리게 한다.
청의 시조이자 후금을 건국한 태조 누르하치의 시호를 새긴 옥도장 ‘시보’. 용이 웅크린 모양으로 손잡이를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 코로나19 확산이 이 전시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참으로 얄궂다. 다음달 1일 전시가 끝나는 대로 모든 유물은 중국으로 돌려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여파로 당분간 국내에 볼모처럼 남는 처지가 됐다. 유물 호송을 맡을 한·중 전문가의 출입국이 현재로선 난망하기 때문이다. 유물이 귀환하려면 선양고궁박물원 관계자가 호송관으로 한국에 들어와야 한다. 한국 고궁박물관 쪽 역시 전문가가 중국 관계자와 함께 유물을 비행기에 싣고 선양 현지로 가서 수장고에 입고시키는 절차까지 입회해야 한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상대국에 입국하기가 꺼림칙한 상황이 됐다. 지병목 관장은 “중국 쪽과 전시를 한달 정도 연장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다른 대안이 없는데, 사태가 장기화하면 출품 유물을 어떻게 관리할지도 고민”이라고 말했다.
청나라 황실 여인들이 입었던 화려한 일상복도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남색 비단 바탕에 복숭아 꽃나무 가지와 나비 등이 들어간 협포와 붉고 검은 비단 바탕에 수복을 상징하는 글자 문양이 들어간 협포 등이 내걸렸다.
전염병 사태로 국내에 들어온 외국 문화유산의 발이 묶인 건 사상 처음이다. 17세기 병자호란 뒤 숱한 조선인을 볼모로 끌고 가 고초를 겪게 했던 청 제국 황실의 보물이 300여년이 지난 21세기, 중국발 바이러스에 막혀 옛 속국에 볼모로 남는 상황이 벌어질 참이다. 기구하다면 기구한 역사의 반전이 아닐 수 없다.(7)
항복 후에 조선은 청나라의 군수품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다 바쳤고, 멀리 제주도의 진주부터 조선의 여자들까지 모두 다 바쳐야만 했다. 그때 열댓 살 된 앳된 딸들을 청나라의 하녀 또는 군사들의 성적인 노리개 감으로 다 갖다 바쳤다.
그 어린 딸들이 오랑캐라 불리던 청나라의 노리개로 끌려갔을 때 그 부모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딸들을 빼앗긴 어머니는 통곡하다가 기절을 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고, 목매달아 죽는 등 그때 조선 백성의 삶은 완전히 삶이 아니었다.
국가가 힘이 없고 약해지면 그리고 정신을 못 차리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 수모를 받을 때 ‘동방예의지국’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후 끌려간 백성들을 다시 돌려받을 수 없겠느냐고 외교교섭을 계속한 끝에 10년이 지나서야 돈을 내고 그 중 5만 명을 돌려받았다. (양반들은 100냥, 군수 딸은 50냥, 일반 백성들은 5냥)
그렇게 돌아온 5만 명 중에서 2만 명이 1년 안에 다 자살을 했는데, 왜 자살했을까.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자들을 청나라 군사들하고 놀아난 여자들이다 하여 이빨에 빨간 칠 까만 칠을 해서 하늘과 사람들을 똑바로 보고 살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사람들을 고향에 돌아온 여자들이라 해서 환향녀(還鄕女)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화냥년이란 욕으로 변한 것이다. 청나라에 끌려가 그 수모를 당하고, 돌아와서는 그 몸으로 살아 돌아왔다고 손가락질 해대니 어떻게 살수가 있었겠는가? 누가 환향녀가 되게 했나?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위정자들은 고향에 돌아온 환향녀들에게 부끄러워하며 반성을 할 줄 모르고, 오히려 짓밟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6만 명은 돈이 없어서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성적인 노리개로 하인으로 실컷 부리다가 병들고 힘이 없어지면 더욱 사람대접을 못 받으면서, 청나라 군사들의 활받이로 일생을 마쳤는데 화살이 정통으로 맞으면 차라리 다행이고 다른 곳에 맞으면 꽂힌 화살을 뽑아서 또 갖다 바쳐야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지금 중국이 티베트에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바라보라고 환향녀는 말한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강요하여 삼전도비를 세웠다.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 져 있다.(8)
버려진 조선의 공주.. 묘까지 이렇게 방치하다니요
변영숙2021. 4. 15. 17:12
청나라로 강제 시집 가 비운의 삶을 살고 떠난 의순공주.. 묘소 관리가 시급합니다
의정부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무덤 하나가 있다. 기구한 삶을 살다가 간 조선 여인의 무덤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족두리 묘'로 회자되는 의순공주묘이다.
▲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떼가 벗겨지고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 변영숙
의순공주는 전주 이씨 종친 금림군 이개윤의 딸로 본명은 애숙이다. 청나라 구왕의 계비로 시집 보내기 위해 효종의 양녀로 입적됐다. 청나라 순칠제의 섭정왕이자 계부였던 도르곤(구왕)의 계비로 대복진이었다.
1650년(효종 1) 구왕(도르곤)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이자 부하장수인 친왕 보로에게 재가하였으나 그 역시 1652년 사망하고 홀로 이국땅에서 홀로 쓸쓸하게 지내게 된다. 청나라 사신으로 간 부친 금림군의 간청으로 조선으로 돌아와 한 많은 삶을 살다가 1662년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온 지 6년 만이었다. 의순공주에 대한 짧은 설명이다.
의순공주의 기구한 삶
족두리묘를 찾아 가는 길은 말 없이 의순공주의 기구한 삶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빌라가 빽빽이 들어선 주택가에서 내비가 목적지 도착을 알리며 안내를 종료했다. 생전 처음 와 본 천보산 자락 낯선 산 밑 동네에서 한동안 서성였다. 의순공주묘는 어디에 있을까 하면서.
그때 마침 집 밖으로 나온 동네 주민에게 물어 겨우 묘를 찾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야산 입구로 들어서자 빌라 건물의 그림자에 가려진 익숙한 석물의 두상이 삐죽이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떼가 벗겨지고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 변영숙
천보산 등산로 입구 골짜기 옆 야산, 빌라 뒤편에 버려진 묘처럼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는 족두리묘의 광경은 처참했다. 반쯤 무너져 내린 봉분은 떼도 다 벗겨져 메마른 흙이 드러나 있었고 군데군데 이끼가 두텁게 덮여 있었다. 상석은 깨져 나갔고 묘비석도 없었다. 내 눈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무덤처럼 보였다.
묘 앞에 의정부 문화원 명의의 안내판이 없었다면 누가 이곳을 조선 공주의 묘라고 할까. 비록 양녀라 하더라도 말이다. 살아서도 기구했던 그녀는 죽어서도 이렇게 내팽개쳐져 있었다. 이러려면 차라리 무덤이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족두리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의순공주의 아버지 금림군의 묘가 있다. 의순공주묘에 비하면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주민들 말로는 일 년에 두 차례 빠짐없이 후손들이 와서 묘역 관리를 한다고 한다. 지척에 있는 의순공주는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눈길 조차 주지 않는 것일까.
의순공주의 한 많은 삶
갑자기 역사의 질곡 속으로 속절 없이 던져지는 삶이 있다. 의순공주의 삶이 그렇다.
▲ 의순공주묘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 천보산 자락에 위치한 의순공주묘. 떼가 벗겨지고 반쯤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 변영숙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조선 여인의 수가 최소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전쟁이 끝나고 조선땅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들은 '환향녀'라며 조롱과 멸시를 당했으며, '더럽다'며 혼인 무효를 요구당하거나 심지어는 자결을 강요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요구를 하는 남자들이 숱하게 많아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청나라는 조선의 여인들을 조공으로 바치라는 요구는 그치지 않았는데 심지어 조선의 왕녀나 대신의 딸까지도 요구했다.
위키백과나 한민족사전 등에 따르면, 효종1 년(1650) 청나라 섭정왕 구왕(도르곤)은 부인이 사망하자 사신을 통해 조선의 공녀를 계비로 맞이하겠다는 구혼칙서를 보내 온다. 당시 효종에게는 혼인을 가능한 딸과 조카딸이 있었지만 그녀들이 아직 모두 어리다고 속인 후 은밀히 혼례를 치뤄서 청나라로 보내지 않았다. 조정의 다른 대신이라는 자들 역시 자기 딸들을 숨겼다. 그때 종친 금림군이 자신의 딸을 보내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 의순공주 아버지 금림군의 묘 금오동 일대에는 금림군 일가의 묘역이 있다.
ⓒ 변영숙
금림군 이개윤의 딸 애숙은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효종의 딸 숙안공주와 동갑이었다. 효종은 숙을 양녀로 삼고 '대의에 순순히 따랐다'는 뜻으로 '의순'이라는 공주 작위를 내렸다.
한편 도르곤은 혼인 예물로 말 600필, 금 500냥, 은 1000냥을 보내왔으며, 청나라의 혼인 관례에 따라 6만여 명의 수행인을 대동하고 산해관 부근의 연산으로 마중 나와 혼인을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1650년 12월 31일 구왕(도르곤)이 돌연 사망하여 의순공주는 과부가 되었다. 그리고 곧 그의 형 친왕 보로에게 재가했으나 보로 역시 1652년 2월에 사망하였다. 게다가 도로곤은 사후에 역모죄로 몰려 부관참시까지 당했으니 청나라에서 과부 의순공주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1656년 청나라 연경(오늘날의 북경)에 사신으로 온 아버지 이개윤이 딸이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청나라 황제에게 딸의 귀국을 간청하니 청 황제가 이를 허락하여 의순공주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효종은 돌아온 의순공주에게 매달 쌀을 내려 평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금림군 부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오랑캐에게 정조를 바치고 두 번이나 재가를 했다'며 비난했으며, 조정과 상의도 없이 딸을 귀국시켰다는 죄로 이개윤을 삭탈관작하였다(효종 실록 16권, 효종 7년 윤 5월 10일). 또 효종이 죽고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공주의 작위를 빼앗아 이개윤의 딸로 격하시켰다.
의순공주는 어린 나이에 조선 왕실의 안위를 위해 오랑캐 나라로 시집을 갔다. 또 엄연히 첩이 아닌 정비 즉, 대복진의 신분이었음에도 '환향녀'라는 업신과 멸시 속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6년 후 스물 일곱이라는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아버지 금림군은 왜 자진해서 애숙을 청나라로 보냈을까라는 점이다. 후에 이긍익이 쓴 야사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것처럼 금품과 출세와 왕의 환심을 바라고 딸을 판 것인가. 그런 성정이라면 딸을 다시 조선으로 데리고 오지는 못하지는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들 부녀의 삶이 곧 나라를 빼앗긴 모든 조선 백성의 삶이었을 것이다. 이토록 애달프니, 소설과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는 것이리라.
실록과 다른 금오동 족두리묘 전설
금오동에는 실록과 다른 전설이 전해져 온다. 다음은 의정부문화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족두리 산소와 정주당놀이'에 대한 안내판 내용이다.
"... 의순 공주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 오랑캐 나라의 구왕에게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생각하여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에 수행하던 노복들이 시신은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건져와 금오동 선영의 아버지 묘 밑에 장사를 지냈고 그때부터 이곳을 '족두리 산소'라 부르고 있다.
한편, 나라에서는 의순 공주의 충효 정신을 기리기 위해 천보산에 큰당, 작은당, 각시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략) 이후 마을 주민들이 이른 봄, 비명에 간 왕족 여인의 넋을 위안하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를 지낸 다음 농악대를 앞세우고 천보산의 큰당과 작은당 등을 왕복하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때부터 '정주당놀이'가 우리 고장의 민속놀이 겸 동제로 전승되어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큰당과 작은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속놀이나 동제의 전통이 끊긴 지 오래다.
족두리묘 보호가 시급하다
▲ 의순공주묘, 일명 족두리묘 족두리묘 에 대한 보호조치가 시급하다.
ⓒ 변영숙
의순공주묘 옆 빈터에 마을 주민들이 나와 있길래 의순공주묘나 동제 등에 대해 이것저것 여쭤보았다. 한두 분 정도만 '족두리묘'의 존재에 대해 알 뿐 의순공주나 정주당 놀이, 동제 등에 아는 분은 없었다.
10년 이상 금오동에 거주한다는 주민에 따르면, 과거 금오동 일대는 점집과 굿당이 많아서 절골이라 불렸다고한다. 이후 일대 정비 사업으로 굿당들은 이전하거나 철거되었고 당시 꽃동네로 불릴 정도로 많았던 꽃농원도 모두 사라졌다.
"도로공사로 족두리묘도 곧 없어질 거예요." 한 주민의 말했다. 그 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의순공주묘 혹은 족두리묘는 묘역 정비나 문화재 지정 등 어떤 보호관리 조치 없이 방치되어 온 듯 보였다. 묘역 건너편에는 대규모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 의순공주묘역 의순공주묘는 트럭 너머 야산의 비탈길에 옹색하게 위치해 있다.
ⓒ 변영숙
의순공주의 묘에 진짜 의순공주가 묻혀 있는지, 아니면 민간에서 전해 오는 대로 족두리만 묻혀 있는 빈 무덤인지에 대한 좀 더 세밀한 고증이 필요해보인다.
현재까지 의순공주묘는 묘역 정비나 문화재 지정 등 어떤 보호관리 조치 없이 방치되어 온 듯 보였다. 묘역 건너편에는 대규모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주민의 말대로라면 의순공주묘는 곧 사라질 터였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역사의 흔적을 찾아 의순공주묘를 방문한다. 의정부시는 의순공주묘와 금림군의 묘에 대해 조속히 전문가들로 구성된 공청회나 조사위원회 등을 개최하여 문화재로서의 가치 여부 확인 및 보호 조치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무런 조치 없이 훼손되게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