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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3) 1453년 계유정난, 7대 세조(1455년~1468년) 본문

남국/조선

1. 조선 (3) 1453년 계유정난, 7대 세조(1455년~1468년)

대야발 2021. 7. 5. 17:26

 

 

 

 

 

■ [역사줌인] 조선의 헌정질서를 뒤흔들다 '계유정난'

파이낸셜뉴스 최경식기자 2021. 5. 8. 00:05

 
 

<정변의 역사 ②>조선 왕조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버린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전말

 
 
세조 어진 초본

 

 


수양대군 "대감의 얼굴을 보면 일흔까지 장수할 상인데. 올해 춘추가 어찌 돼요"
김종서 "올해 일흔입니다"
수양대군 "제가 올해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김종서 "어떤 소원입니까"
수양대군 "왕이 되는 것이오"
김종서 "네 이놈, 네 무슨 수작이냐"
-영화 '관상' 中

 

 

 

조선 초기, 왕조 역사의 큰 물줄기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정변이 일어났다. 계유년(癸酉年)인 1453년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과 그 일파들이 여러 대신들 및 반대파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은 조선 초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후 조선 역사의 향방에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적장손 왕위 계승 등 조선의 헌정질서가 흔들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세종,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면서 자리를 잡아가던 유교적 헌정질서를 왕실 종친이 앞장서 무너뜨린 사건은 당대의 유학자는 물론 후대의 역사가들에게도 큰 충격을 줬다.

 

 

더욱이 계유정난을 계기로 조정에 '공신(功臣) 세력'이 득세하면서 태종 때처럼 왕권이 오롯이 서지 못하고 되레 공신 세력을 의식하는 모습이 나타났고, 조선 건국의 명분을 제공했던 고려 권문세족들의 부패한 특권 문화가 조선 공신 세력에게 고스란히 전수되는 상황도 발생했다. 이후 조선에서는 사화, 환국 등 유혈 정권교체가 있을 때마다 승리자의 자축 세리머니라고 할 수 있는 '공신 인플레이션'이 일반화 됐다. 태종 이방원과 정도전이 기필코 타파하고자 했던 문제점이 조선의 정치 및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비극의 씨앗, 문종의 죽음


1452년 5월, 세종대왕의 아들이자 단종의 아버지, 그리고 수양대군의 친형이었던 문종이 세상을 떠났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의 일이었다. 문종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는 한마디로 '준비된 왕'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과학, 천문, 병법, 무예, 음악, 음운 등 다방면에 통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세종 때 발명된 측우기와 화차(이동식 대포)는 문종이 제시한 생각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더욱이 외모도 매우 출중했다.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문종을 보고는 "이 나라는 산천이 아름답기 때문에 인물도 이렇게 아름다운가"라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세종대왕의 치세 마지막 7년 정도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종대왕 말기엔 문종이 대신 정사를 돌보기도 했다.

 

 

그러나 문종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건강이 좋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세종 말기 때 과도한 업무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연이은 3년상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군으로 칭송을 받았던 아버지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아버지를 능가할 수도 있었던 전도유망한 왕이 죽자 조정 대신들과 백성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실록은 "임금이 승하하자 이를 슬퍼하는 것이 선왕(세종) 때보다 더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문종의 뒤를 이어 그 아들인 단종(이홍위)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단종은 그 나이 만큼이나 정치적 기반도 취약했다. 보통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대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지만, 당시 단종 곁엔 수렴청정을 할 대비도 없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은 직후 산욕열로 죽었고,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들이지 않았다. 후궁으로 귀인 홍씨, 양씨만을 뒀다.

 

 

■조정의 세력구도


문종의 죽음과 단종의 즉위를 계기로 조정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세종이 일궜던 태평성대는 서서히 사라져갔고, 다시금 불길한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당시 조정의 세력구도를 보면 크게 고명대신파와 대군파로 나뉜다. 고명대신파는 왕의 유언을 받은 대신들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가 있었다. 문종은 죽기 전에 이들을 불러 단종을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좌의정 남지가 죽자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이 우의정으로 임명됐고, 김종서와 황보인 두 고명대신이 조정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반면, 다른 한쪽엔 단종의 숙부인 대군들이 있었다. 대군들은 총 7명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두드러졌다. 문인보단 무인의 기질이 엿보인 수양대군은 한명회와 권람 등을 책사로 두고 서서히 무인 중심으로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안평대군은 기본적으로 문인의 기질을 타고났다. 문학·예술 등에 능했고, 자연스레 이 방면의 인사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던 단종은 잠재적 대권주자가 될 수 있는 대군들보단 아버지 문종이 신뢰했던 최측근들인 고명대신들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 보니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서의 본래 임무를 넘어서는 듯한 모습도 나타났다.

 

 

이는 추후에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키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고명대신들이 야심을 품고 권력을 넘보거나 국정을 농단하려 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단종의 신임을 받은 김종서 등 고명대신들은 특별히 혈기왕성한 수양대군을 경계했고, 수양대군 역시 고명대신들 및 안평대군의 세력화를 경계하며 상호 간 세력경쟁 양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수양대군의 야심


당초 수양대군은 왕위를 꿈꿀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친형인 문종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수양대군은 상대적으로 가려진 존재였었고, 단종이 즉위한 이후엔 고명대신파 및 다른 형제들의 견제가 심화됐다. 아울러 왕조 국가에서 왕의 형제들은 숨죽이고 살아야만 하는 비운(悲運)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향한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단종이 즉위한 후 2개월이 지나 수양대군은 자신의 집에서 권람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정국 현황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논했고, 이후 야심을 갖고 권람,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만들었다. 특히 한명회는 추후 계유정난 및 세조 치세의 설계자가 된다.

 

 

왕권을 향한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1453년 4월부터다. 이는 수양대군이 단종의 즉위를 알리는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를 갔다 온 직후다.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로 가기 전 권람 등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김종서 등이 수양대군파에 대한 제거를 획책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웃으면서 "김종서 등은 그럴만한 호걸이 아니다"라며 명나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실제로 수양대군이 부재할 때 고명대신파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수양대군은 한편으론 고명대신파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던 신숙주 등 집현전 출신 문인들을 끌어들이고, 또 다른 한편으론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며 거사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 거사 직전 수양대군 휘하엔 30여 명에 이르는 정예 무인들이 모여있었다.

 

 

■계유정난


1453년 10월 10일 밤, 마침내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조선 왕조 역사의 큰 물줄기가 변화되는 밤이었다. 우선 수양대군은 삼정승 가운데 가장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김종서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양정, 임어을운 등을 대동한 채 돈의문 밖 김종서의 집으로 향했다.

 

 

수양대군이 방문하자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가 직접 맞이했다. 김종서와 정면으로 마주한 수양대군은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뜸 "사모(紗帽)의 각이 떨어졌으니 좌상의 것을 빌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는 김종서 부자의 경계를 느슨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런 다음 수양대군은 청이 있다면서 김종서에게 편지 한통을 건넸고, 김종서는 달빛에 편지를 비춰봤다. 그 순간 임어을운의 철퇴가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동시에 양정의 칼날이 김승규를 베었다. 미처 반격할 틈을 갖지 못한 채 세종 시절 천하를 호령했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가 쓰러졌다.

 

 

9부 능선이었던 김종서 제거에 성공하자 수양대군과 정예 무인들은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은 곧바로 단종이 있는 궁궐로 쳐들어갔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단종 앞에서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난을 일으켜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했기에 김종서를 척살했다는 거짓보고를 올렸다.

 

 

뒤이어 수양대군은 왕명을 빙자해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시키도록 했다. 한명회는 '살생부(殺生簿)'를 들고 입궐하는 대신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사전에 배치한 군사들에게 '살조(殺條)'로 분류된 대신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했다. 이때 대표적인 수양대군 반대파들인 황보인과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한편, 불의의 기습을 당한 김종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철퇴를 맞고 쓰러진 김종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고, 수양대군의 모반 사실을 인지한 후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마에 올랐다. 단종을 지키기 위해 궁궐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양대군 세력에게 포섭된 숭례문, 돈의문, 서소문 등의 수문장들은 모두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진입로가 막힌 김종서는 사돈집에 숨어 있다가 이튿날 수양대군이 급파한 군사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공신 득세, 단종의 비극


하룻밤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조정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던 고명대신파 등은 온데간데 없고, 수양대군 및 그 일파들이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영집현전사·영경연사·영춘추관사·영서운관사·겸판이병조·내외병마도통사 등 다양한 요직을 겸하면서 정권과 병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그리고 거사에 직간접적으로 공을 세운 한명회, 권람, 정인지, 양정 등 43인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했다. 앞으로 이들은 오랜 기간 세조 주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비극적인 피바람은 계속 휘몰아쳤다. 안평대군은 붕당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를 당했고, 정분, 조수량, 안완경 등 수양대군 반대파들도 귀양을 간 후 교살당했다.

 

 

든든한 우군들이 사라진 단종은 그야말로 '사상누각'과 같은 존재가 됐다. 수양대군 세력에 대한 공포감을 못이긴 단종은 2년 뒤 수양대군에게 선위(禪位)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단종은 상왕 자리에서도 오래 머물러 있지 못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대신들(사육신)과 일부 무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됐다. (단종이 거처했던 영월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육로는 험준한 절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런데 유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된 수양대군에게 있어 단종은 지속적인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단종이 살아있는 한 정통성 시비는 끊임없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았다. 더욱이 단종 복위운동이 또 다시 일어나면서 수양대군의 위기감은 높아져 갔다. 결국, 수양대군은 강원도 영월에 사람을 보내 단종을 죽이라고 명했다.

 

 

단종의 최후를 기록한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한) 송현수가 교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한 나머지 스스로 자결했다고 나와있다. 이어 세조는 단종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며 그 시신을 후하게 장사 지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선조실록'에는 단종이 사사(賜死)된 것으로 나와있고, 정황 상 그 시신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사'에 따르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세조의 명으로 사약을 들고 단종을 찾아왔는데, 왕방연은 차마 단종에게 사약을 건네지 못했고 그저 말없이 엎드려 통곡을 했다.

 

 

이를 본 단종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자결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때 단종은 자신의 목에 줄을 매고는 줄을 방 밖으로 빼내 하인에게 힘껏 당기게 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강원도 영월에서 한 많은 삶을 살던 어린 왕은 비정한 권력의 피비린내 앞에서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후 단종은 200년도 더 지난 1698년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복권될 수 있었다.(1)

 

 

 

 

수양대군으로 더 많이 알려진 조선 7대 임금 세조. 수양(首陽)은 중국 고대사에서 충절의 상징인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首陽山)과 한자가 같다. 단종의 비극을 예견했던 걸까. 그의 이름을 수양으로 바꾼 건 부왕 세종이었다. 하지만 세조는 동생(안평대군)은 물론 어린 조카(단종)의 목숨마저 빼앗으며 기어이 왕에 올랐다.

 

그의 치세는 숙청과 탄압이 끊이지 않았던 철권통치로 점철됐다. 하지만 동시에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고 각종 법전과 역사서를 편찬하는 등 문물제도 정비에 힘쓰기도 했다. 권력을 좇은 냉혈한 왕에서 치적군주까지 양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이유다. 교과서와 각종 사료, 언론이 기술한 세조에 대해 알아봤다.

 

 

■ 단종 몰아낸 세조 .. 권력욕의 화신이었나, 왕권 강화 결단이었나

중앙일보 글=정현진 기자 자문=최미정 중동고 역사 교사 2014. 11. 26. 00:06

 

역사NIE (18) 세조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

 

정변(政變)을 통해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에 오른 조선 7대 임금. 한명회·권람 등과 함께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세조는 단종을 보필하던 김종서·황보인은 물론 동생 안평대군에게까지 역모 혐의를 씌워 죽이고 영의정에 올라 정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정적을 모조리 제거한 후 1455년(단종 3년) 단종을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에 올랐다. 단종은 17세 나이에 강원도 영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다.

 

 

피로 새긴 왕의 길이었지만 치적군주라는 전혀 다른 평가도 받는다. 전·현직 관료에게 무분별하게 수조권(토지에 대한 조세 징수권)을 지급했던 과전법을 개혁해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는 직전법을 실시했다. 또 호적·호패법 강화로 정확한 인구조사를 해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했다. 외적 침입에 허약한 변방 방어체제를 정비하는 등 전국적으로 일원화한 국방체제를 구축했다. 여진족을 토벌해 북방을 안정시키는 한편 평안도 등으로 이주정책을 실시해 국토의 균형 발전을 도모하기도 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학문 기관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왕과 신하 간 학문·정책 토론의 장인 경연을 폐지했지만, 병법서·역사서·법전 등 서적 편찬과 간행에 큰 힘을 쏟기도 했다. 특히 『경제육전』 『속육전』 등 기존 법전은 물론 왕명과 조례를 한데 묶어 조선 기본 법전으로 발전시킨 『경국대전』 편찬을 주도한 일은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법화경』 『금강경』 등 불경을 간행해 전파하는 등 불교를 우대하기도 했다.

 

 

 

쿠데타로 왕위 찬탈

 

세조는 조선 초 통치 체제 정비라는 치적을 남겼지만 후세의 평가는 권력을 좇은 비정한 왕이라는 데 모아진다. 쿠데타를 통한 왕위 찬탈이라는 세조 정권의 정통성을 문제삼는 거다. 교과서 8종 모두 "수양대군(세조)이 정변을 일으켜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은 효와 충을 근본 이념으로 삼는 유교국가 조선의 성리학자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충행위였다. 사육신이 대표적이다. 세조 즉위 이듬해 집현전 출신 성삼문·박팽년·유성원·하위지·이개·유응부 등은 단종복위를 꾀한다. 이들은 명나라 사신을 맞는 자리에서 세조 일파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려 했으나 거사 계획이 들통나면서 역모죄로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들이 바로 충절의 상징으로 알려진 사육신이다. 사육신은 모진 고문과 팔다리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종복위 계획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지만 정계 진출을 거부하고 은거하며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이도 있었다. 바로 김시습·남효온·성담수·원호·이맹전·조려 등 생육신이다.

 

 

1457년(세조 3년)에도 세조 동생 금성대군이 또다시 단종복위를 추진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금성대군 등 관련자 모두 처형당한다. 세조는 두 차례의 단종복위사건을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으로 해결했다.

 

 

왕권강화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가

 

세조의 정변을 이해하려는 시각도 있다. 계유정난으로 시작된 세조의 쿠데타를 왕권과 신(臣)권의 대립으로 보는 관점이다. 김종서·황보인 등 소수 대신의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신권이 어린 단종의 왕권을 위협했고, 이런 상황이 세조의 쿠데타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단종 즉위는 매우 복잡한 정치지형을 만들었다. 세종은 즉위 전 4년, 문종은 5년 대리청정하며 미리 정사를 경험하고 정치적 역량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단종은 달랐다. 12세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왕에 올랐다. 황보인·김종서 등 일부 대신은 섭정에 가까운 권력을 휘두르며 정사를 주관했다. 왕권 약화, 즉 신권 강화로 비춰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던 세조(당시 수양대군)는 이런 상황을 왕실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세조는 "비대해진 신권을 바로잡고 왕실 권위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정적 안평대군과 김종서·황보인 등을 역모로 엮어 축출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훗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죽음으로 항거했던 성삼문 등 사육신도 계유정난 시기까지는 세조 손을 들어줬다는 점이다. 이들은 왕권과 신권, 어느 한쪽이 비대해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유교적 여론정치를 지향했다. 사육신도 일부 대신의 비대해진 권한에 반발했다.

 

성삼문은 "안평대군 아들 이우직을 마땅히 베어야 합니다. 무릇 역적은 수종(首從)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까지 베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라는 상소문을 단종에게 올리며 안평대군 측근의 탄핵을 강력하게 주장한다(단종실록 1년 11월 26일). 세조 입장에 서서 안평대군과 김종서·황보인 등을 역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하지만 세조가 단종 왕권을 노골적으로 넘보자 사육신 등은 죽음을 불사하며 세조에 대항했다.

  

 

세조는 집권 내내 신권을 견제하며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다. 미래엔은 "수양대군(세조)이 정변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다시 6조 직계제를 실시하고 종친을 등용했으며, 집현전과 경연을 폐지해 언론 활동을 제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고 적었다.

 

 

태종과 세조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고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는 점에서 태종(이방원)과 세조는 닮았다. 하지만 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다르다. 태종도 수많은 정적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자신을 도왔던 개국공신은 물론 외척까지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정치집단이 생기는 걸 막았다. 이는 안정된 왕권으로 이어졌고 세종의 태평성대를 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천재교육은 "세종은 태종이 다진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모범적인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고 태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세조에 대해선 평가가 다르다. 세조는 왕권 강화를 목표로 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왕권에 가장 큰 위협이 된 훈구세력을 양산했다. 훈구세력은 한명회·권람 등 세조 집권을 도와 공신에 오른 사대부들이다. 이들은 세조 집권을 도우면서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관직을 독점하며 거대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했다. 공신에 책봉돼 관직을 받고 후손에게도 죄를 묻지 않는 면책권 등 각종 특권을 약속받았다.

 

 

세조는 자신을 도운 측근들을 정난공신·좌익공신·적개공신 등으로 세 차례에 나눠 공신으로 정하며 그들을 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수를 늘려갔다. 미래엔은 "중앙 정치는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공을 세운 훈구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세를 이용해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상업 활동에도 관여해 재산을 축적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각종 비리와 부정을 저질러 백성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고 적었다.

 

 

언론도 세조 집권 후 훈구세력을 견제하지 못했던 점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세조 후반으로 갈수록 공신들의 권한은 더욱 강해져 재위 14년(1468) 3월에는…공신들은 관직매매까지 허용받는다. 잘못된 쿠데타의 유산은 이렇게 국가의 기본적인 공적 체제마저 무너뜨렸다."(중앙선데이 2009년 9월 20일 '공신과 밀착한 세조, 왕권 위의 특권층을 남기다')

 

 

세조 때 형성된 훈구세력과 신진사대부 사림 간의 대립과 갈등은 이후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기묘사화(1519)·을사사화(1545)를 낳으며 조선 조정을 피비린내나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는다. 왕권 강화를 내세운 세조의 손에서 조선 내 정치집단 간 정쟁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자료출처>

 

(1) https://v.daum.net/v/20210508000502860

 

 

(2) https://v.daum.net/v/20141126000604390

 

 

<참고자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임금을 '너'라 한 정인지, 임금의 '팔'을 꺾은 신숙주…취중 실수의 끝 - 경향신문 (khan.co.kr)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전하! 제 하소연 좀!"…북악산은 조선시대 고공농성장이었다 - 경향신문 (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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