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持空·1300∼1363)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어서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양주 회암사지(출처; 국가유산포털)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습니다.
양주 회암사지(출처; 국가유산포털)
14세기의 대(大)여행가로 새롭게 주목받는 지공(持空·1300∼1363)의 부도는 그가 중창한 회암사가 있는 천보산 중턱에 법제자인 나옹과 무학의 부도와 나란히 세워졌습니다.
고려 불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지공은 본명이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提納薄陀)로 인도의 마가다국(摩竭提國) 출신입니다. 그는 히말라야산맥을 넘고 원나라 수도 연경을 거쳐 충숙왕 13년(1326년)에는 고려에 들어와 '환생한 부처'로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3년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지공선사(指空禪師 Great Master Jigong)는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 提納薄陀, 禪賢)이다. 8세 때 나란타사(Nallanda, 那爛陀寺) 율현(律賢)에게 출가해 19세에 졸업하고 인도 각 처와 원(元)의 수도인 대도(大都)를 거쳐 고려의 개경·금강산·회암사 등에 머물며 불법을 전파했다. 이 후 다시 원의 대도로 돌아가 법원사 (法源寺)에 머물렀다. 지공은 고려 말, 조선 초 불교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당시 불교의 정통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양주회암사지공선사부도비(출처; 국가유산포털)
『나옹선사(懶翁禪師 Great Master Naong, 1320∼1376)의 성은 아(牙)씨, 속명은 원혜(元惠), 휘는 혜근(慧勤)이다. 나옹과 강월헌(江月軒)은 호이고, 시호는 선각(先覺)이다. 충혜왕 1년(1340) 출가한 뒤 회암사에서 수도하며 깨달음을 얻고, 충목왕 3년(1346)부터 원의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에게 수학했다. 이후 15년의 유학생 활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와 주요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고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중창불사를 단행했다. 나옹은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을 바탕으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禪風)을 도입해 고려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했다.』(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나옹(懶翁)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 (출처; 국가유산포털)
"무학대사(無學大師 Great Master Muhak, 1327~1405)은 삼기(三岐: 합천 삼가면) 출신으로 속성은 박(朴)씨, 휘는 자초(自超),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충혜왕 5년(1344) 출가해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 불법을 배우고, 공민왕 2년(1353) 원의연경(燕京)으로 가 지공과 나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건국 후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 거처했다. 태조 6년(1397)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도 회암사는 무학이 주석함으로써, 최고의 왕실사찰로서 위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출처; 국가유산포털)
회암사지에서는 1997년부터 2024년까지 14차례 발굴 조사를 진행해 불상의 목이나 몸체에 걸치는 장신구인 영락(瓔珞) 장식, 불상, 청기와 등이 나왔습니다.
회암사의 존재와 남겨진 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14세기 동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불교 선종 문화의 번영을 보여주는 유산으로 가치가 큽니다.
양주 회암사지(출처; 국가유산포털)
양주 회암사지(출처; 국가유산포털)
양주 회암사지(출처; 국가유산포털)
양주 회암사지(출처; 국가유산포털)
양주 회암사지(출처; 국가유산포털)
특히 금속으로 제작돼 중심부에 호박까지 얹어진 영락 장식은 희귀한 유물로 분류됩니다.
‘양주 회암사지’ 출토 영락장식.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제공
출토된 청기와 또한 대부분 사찰보다 경복궁 등의 왕실 건물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돼 출토 당시 학계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양주 회암사지’ 출토 청기와.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제공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태조 이성계의 사찰에서 사지가 찢긴 불상이 널브러져 있었다'
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자리집고 있는 양주 회암사터 항공사진. 발굴결과 산 아래쪽 계곡에 차곡차곡 쌓은 8개의 석축 위에서 70여개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발굴 현장을 그대로 노출시켜 놓았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2000년 5월 회암사터의 6단지 보광전 네 모서리 중 두 모서리에서 출토된 명문 청동풍탁(풍경). 풍탁에서는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등의 명문이 보였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 풍탁(풍경)에 새겨진 명문 134자.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라는 내용이다.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는 환관인 ‘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신덕왕후 강씨가 위독해지자 이득분의 집에서 치료했으며, 그곳에서 승하했다. 이득분은 강씨와 강씨의 소생인 세자 이방석의 든든한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암사터에서는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높은 위상의 유물들이 출토된다. 청기와는 물론이고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이름을 새긴 수막새와 임금의 상징인 봉황문 수막새 등이 쏟아져 나왔다. 회암사가 또하나의 궁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양주 시랍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회암사터에서 확인된 높은 위상의 유물들. 궁궐 건물에 걸맞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회암사터에서 출토된 백자 인물상과 용문양 암막새. 사찰 건물이 궁궐의 위상에 걸맞은 규모를 자랑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경기문화재연구원·양주 시립 회암사지박물관 제공
회암사 보광전 모서리에서 청동금탁이 출토되는 순간. 회암사가 어느날 갑자기 폭삭 무너져 내렸음을 암시하고 있다.|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
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된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급제한 휴정과 유정대사. 두 분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보물). 1565년(명종 20) 중종 계비 문정왕후(1501~1565)가 명종의 만수무강과 왕비의 후손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한 400점의 불화 중 하나이다. 회암사의 낙성에 맞춰 조성된 것이다. 문정왕후가 발탁한 보우 스님이 쓴 화기(畵記)에 따르면 당시 석가약사·미륵·아미타불 등 모든 부처와 보살을 소재로 하여 금니화(金泥畵)와 채색화(彩色畵) 각 50점씩 조성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2024년 4월 16일, 일본강점기 때 유출되었다가 미국 보스턴박물관에서 보관해오던 가섭불과 정광불, 석가모니불 등 3여래와 지공선사와 나옹선사 등 2조사의 사리가 100년 만에 원래 있었던 양주 회암사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봉선사 주지 호산 스님이 19일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보스턴 미술관 소장 회암사 사리 이운 고불식에서 석가불 사리를 자리에 놓고 있다. 이번에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 반환된 사리는 가섭불, 정광불, 석가불, 지공선사, 나옹선사의 사리로, 사리구에 적혀있는 명문을 통해 여래와 역대 조사의 진신사리임이 확인됐다. 2024.4.19/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