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는 1932년 금강산에서 출토되었는데요, 고고학적인 발굴이라기 보다는 발견이라고 보아야 될 것 같습니다.
1932년 10월 6일 강원도 준양군 장양면 장연리 금강산 월출봉(1580m)에서 산불 저지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사 중이던 인부들이 돌 상자를 발견했는데요, 그 속에 사리를 잘 모셔두기 위한 '사리장엄구'가 들어 있었습니다.
[서울=뉴시스] 보물 제1925호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중 은제금도금라마탑형사리기와 유리제사리병(가운데)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5.26. photo@newsis.com
사리장엄구는 사리를 불탑에 안치할 때 사용하는 용기나 함께 봉안되는 공양물을 통틀어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식에 맞추어 사리를 봉안하는 데 필요한 기구를 빠짐없이 갖추어 둔것이라는 뜻에서 ‘사리갖춤’이라고도 합니다.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는 이성계와 두 번째 부인 강씨 등이 조선 건국 직전인 1390년과 1391년에 발원(發願·신에게 소원을 빎)한 것입니다. 이성계는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건국의 염원을 담아 영산(靈山) 금강산에 사리장엄구를 모신 것입니다.
[서울=뉴시스] 보물 제1925호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고려 1390~1391년, 금강산 출토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5.26. photo@newsis.com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유행한 라마불교의 탑 양식으로 만든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15.5㎝),
은제도금 팔각당형 사리기(19.8㎝),
유리제 사리병(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에 안치, 높이 9.3㎝, 지름1.2㎝, 무게는 31g)
백자향로(12㎝),
백자대발(白磁大鉢) 4개,
청동사발,
은제숫가락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사리병은 은제금도금판에 원통형 유리를 끼우고 위에 은제금도금 마개로 막혀있습니다. 안에는 은제도금 사리받침대가 들어있습니다.
[서울=뉴시스] 보물 제1925호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중 유리제 사리병 정밀 컴퓨터단층촬영(nano-CT)(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진 속 검은 점이 유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생긴 공기 구멍. 2021.05.26. photo@newsis.com
국립중앙박물관은 2021년 5월 6일부터 21일까지 금강산 출토 보물 제1925호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중 유리제 사리병을 보존처리했습니다. 박물관은 이번 보존처리를 통해 유리제 사리병의 일부 파손된 부분을 접합하고. 결손난 부분을 복원해 원형을 회복했습니다.
보물 제1925호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중 유리제 사리병이 조선 건국 당시 최고급 유리인 '석영 유리'로 제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보존처리 과정에서 분석한 사리병의 주성분은 이산화규소(SiO2)가 98%가 넘고 비중은 2.57로 석영유리에 가깝게 나타났습니다. 일반 유리는 주원료로 규소가 사용되고 녹는 온도를 낮추기 위한 용융제로 나트륨, 칼륨, 납이, 안정제로는 산화칼슘이 사용되기 때문에 1000℃ 미만에서 제작됩니다.
반면 순수 석영유리는 열에 아주 강하여 1500℃ 이상 가열하지 않으면 녹일 수 없고 강도가 일반 유리의 2배 정도여서 일반 유리의 제작과정에 비해 큰 노력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서울=뉴시스] 보물 제1925호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일괄 중 보존처리한 유리제 사리병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5.26. photo@newsis.com
박물관은 "유리제 사리병을 순도가 높은 석영유리로 제작하고 내부에 은제금도금 사리받침대를 세웠으며 이를 다시 은제도금라마형사리기와 은제도금팔각당형사리기에 이중으로 봉안했다는 점은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가 당시 최고급 재료와 기술로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며 "석영유리로 제작된 완형의 사리병으로 14세기 우리나라 유리 제작기술을 보여주는 국내 첫 사례"라고 밝혔습니다.
보물 제1925호 금강산 출토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 /사진제공=문화재청
1932년 10월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견된 사리갖춤. 1391년 5월 이성계가 마련한 사리봉안 행사였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런데 이 사리장엄구가 어떻게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구'인지 알 수 있었을까요?
사리를 넣은 원통형 은판의 표면을 비롯한 유물 곳곳에 명문, 즉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마탑형 사리기를 품은 것은 은제금도금 팔각당형 사리기일 것입니다. 팔각당형 사리기도 라마탑형 사리기처럼 연화형 대좌와 팔각형 은판, 팔각당형 뚜껑 등 각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한 형태입니다.
팔각형 은판의 표면에는 종서(縱書)와 횡서(橫書)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庚午년(1390년, 공민왕 2) 3월에 사리탑을 조성하여 모신다는 내용과 발원자들의 이름이 보입니다.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 이씨(李氏), 낙안군부인(樂安郡夫人) 김씨(金氏)(혹은 전씨(全氏)) 등 상류층 여성 신도들과 함께 발원에 참여한 사람들 중 주목되는 것은 승려 월암(月菴)과 영삼사사(領三司事) 홍영통(洪永通), 동지밀직(同知密直) 황희석(黃希碩), 그리고 박자청(朴子靑)입니다.
은제도금 팔각당형 사리기, 고려 1390년, 전체 높이 19.8cm. 〈출처:『국립춘천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20쪽.〉
라마탑형 사리기와 팔각당형 사리기를 봉안한 것은 청동발입니다. 구연부 바깥 면에 ‘洪武二十四年辛未二月日造舍利盒施主信堅妙明朴竜’이라는 명문이 점각(點刻)으로 새겨져 있어서, 신미년(1391년) 2월 어느 날, 신견(信堅), 묘명(妙明), 박룡(朴竜) 등 3인이 시주하여 사리합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뚜껑과 한 세트를 이루어 합의 형태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견과 묘명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1379년))에도 그 이름이 보여서 나옹의 문도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끝에 기록된 박룡은 발을 만든 장인인 듯하지만, 분명치 않습니다. 발의 안팎 면에 동심원으로 가질한 흔적이 있어 고려 말의 보기 드문 기년명 방짜유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청동발, 고려 1391년, 높이 11.9cm. 〈출처:『국립춘천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21쪽.〉
백자발1, 고려 1391년, 높이 19.5cm. 〈출처:『국립춘천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21쪽.〉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의 발원자와 발원 내용, 제작 시기, 사리갖춤 봉안 장소 등 불사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를 보여주는 것은 백자발1과 백자발2에 새긴 명문들입니다.
백자발1의 바깥 면에는 앞의 팔각당형 사리기에서 본 월암과 이성계(송헌시중(松軒侍中)에서 송헌은 이성계의 호이다), 그리고 만여 명의 사람들이 1391년(공양왕 3) 4월, 장차 미륵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발원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이 발은 뒤에 볼 백자발2와 겹쳐지기 힘든 크기, 함께 발견된 백자 향로와의 관계, 당시 유행한 매향(埋香) 풍습과 미륵 신앙 등을 감안할 때 사리 봉안을 위한 용기라기보다 향목(香木) 봉안용 향합(香盒)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백자그릇에는 이성계와 그 부인 강씨, 그리고 1만명이 사리를 모셨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한편 앞서 본 청동발을 봉안한 것은 백자발2일 것입니다. 백자발2는 굽 부분에 “辛未四月日防山砂器匠 沈竜 同發願比丘 信寬”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미(辛未)년(1391년) 4월에 방산의 사기장 심룡이 그릇을 만들고 승려 신관이 함께 발원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방산이란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으로, 근래에 이곳 장평리, 송현리, 금악리 일대에서 이 발과 태토, 유약, 번조 방식이 공통되는 14∼15세기경의 백자편들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백자그릇에 새겨진 명문
그런데 이 백자발2에는 또 하나의 명문이 그릇 안쪽 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金剛山毘盧峯舍利安遊記’로 시작하는, 앞서 본 팔각당형 사리기의 명문과 백자발1의 명문을 한 데 섞은 놓은 내용의 것인데, 신미년(1391년) 5월에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갖춤을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명문 일부가 망실되었고, 유약으로 덮여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도 있지만, 그릇의 크기나 ‘金剛山毘盧峯舍利安遊記’라는 제목 성격의 글이 있는 점에서, 사리갖춤 가운데 가장 바깥쪽 용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1 백자발2, 고려 1391년, 높이 17.5cm. 〈출처:주경미, 앞의 논문, 49쪽 도12, 구연부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2 백자발2(안쪽 면). 〈출처:『국립춘천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19쪽.〉 3 백자발2(굽 부분). 〈출처:주경미, 앞의 논문, 49쪽 도13.〉
백자발1과 백자발2는 뒤에 볼 백자발3과 백자발4 및 백자향로와 함께 도자사적인 의미가 큽니다. 고려백자와는 다른 새로운 백자로서, 현재까지 확인된 기년명 경질백자(硬質白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까닭입니다. 푸른빛 감도는 유약이라든가 태토 사용 등에서 아직 질적으로 그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경질백자의 선행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생산한 방산 지역의 중요성 또한 높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앞서 살핀 5점의 명문 유물 외에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에는 명문이 없는 4점의 유물이 더 있습니다. 백자발3과 백자발4, 백자향로 1점, 그리고 은제이소(銀製耳搔) 1점이 그것입니다.
백자발3과 백자발4는 각기 백자발1, 백자발2와 한 세트로서 뚜껑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도자기를 마주 포개어 합(盒)을 이루게 한 예는 일찍이 11세기경의 영암 청풍사지 오층석탑 출토 청자사리합에서도 보입니다.
1 백자발3, 고려 1391년, 높이 13.6cm. 〈출처:『국립춘천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18쪽 중에서.〉 2 백자발4, 고려 1391년, 높이 9.8cm. 〈출처:『국립춘천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18쪽 중에서.〉 3 청자사리합, 영암 청풍사지 오층석탑 출토, 고려 11세기, 높이 8.5cm, 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佛舍利莊嚴』(국립중앙박물관, 1991년), 76쪽.〉
백자향로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향완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나팔형의 기대(器臺) 대신 굽이 달린 독특한 형식을 보여줍니다. 은제이소는 얇고 긴 은판을 두드려 만든 것으로 모양이 귀이개를 닮았다 하여 이소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실제로는 사리를 옮기는 도구일 것입니다.
1 백자향로, 고려 1391년, 높이 13.6cm. 〈출처:『국립춘천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18쪽 중에서.〉 2 은제이소, 고려 1390∼1391년, 길이 15.5cm.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표준유물시스템.〉
금강산 비로봉
1389년 토지대장을 불태우고, 1391년 과전법을 마련한 그해, 조선을 개국하기 직전인 1391년 5월 이성계는 두 번째 부인 강씨, 승려 월암, 황희석, 홍영통, 박자청 등 그의 측근들 그리고 1만여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금강산 비로봉에서 성대한 봉안식을 거행한 것입니다.
이성계는 고려 말 혼탁한 세상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자 불교의 불사리 장엄의식과 민간의 매향의식이 지닌 형식과 내용을 빌려왔습니다.
결국 그는 고려 태조가 금강산 절고개(拜岾)에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했다는 상징적인 공간에 사리기를 봉안하고, 1년 뒤 그가 소망한 대로 새 나라를 건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