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라 력사를 찾아서
조선(5) - 조선 문화유산(4) 창경궁 본문
창덕궁 바로 옆에 있는 창경궁에 다녀왔습니다.
창경궁(昌慶宮)은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옛 수강궁에 창건한 궁이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이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이었으며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중건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궁의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궁궐이 아닌 공원화가 되어 훼손이 심하였다. 광복 후 1983년에 다시 창경궁으로 명칭을 회복한 후, 궁궐 경내에 있던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 궁궐의 모습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경궁은 남향으로 있는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과 정전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홍화문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는 ‘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홍화문은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다. 같은 동궐인 창덕궁의 정문(돈화문)은 앞면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로 지었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기 전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세금제도의 개편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또 정조는 1795년(정조 19)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황후)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홍화문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옥천교
옥천교(玉川橋)는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하여 옥천교라 부르는데,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다. 옥천교는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옥천교는 궁궐에 남아 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옥천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명정문
명정문(明政門)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정문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명정문은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명정문은 명정전과 함께 처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대에 다시 지었다. 행각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하였다. 명정문 및 행각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명정전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으로, ‘명정’은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이다. 명정전은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되었는데, 현재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은 중층 규모이지만 명정전은 단층으로 지어졌다. 이는 창경궁이 정치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명정전
명정전 앞마당, 즉 조정(朝廷)에는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궁궐의 격식을 갖추었다. 조정에는 품계석이 있는데, 조회나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새겨진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선다.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다. 명정전은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명정전
명정전
문정전
문정전(文政殿)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문정’은 ‘문교(文敎)로서 정치를 편다‘라는 뜻이다. 문정전은 왕이 신하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다. 그러나 편전 외에 왕실의 장례 때 혼전(魂殿, 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대에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었다가 1986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특히 이곳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추존 장조(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세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관천대
관천대(觀天臺)는 천문을 관측하던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했던 시설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만든 2개의 관천대 중 하나이다. 높이 3m, 가로 2.9m, 세로 2.3m 정도의 화강암 석대(石臺)로, 『서운관지(書雲觀志)』에 의하면 ’관천대는 천문 기상을 관측할 때 소간의를 그 위에 설치하므로 ‘소간의대’ 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최근에는 시간을 측정하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를 설치했던 시설이라는 학설도 있다. 이 관천대는 일제강점기 때 다른 곳에 옮겨졌던 것을 1983년 창경궁 복원 사업 때 제자리로 옮겼다.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숭문당
숭문당(崇文堂)의 ‘숭문’은 ‘문을 숭상한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왕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특히 영조는 성균관 유생이나 종친들을 접견하고, 유생들을 시험했다. 숭문당은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대에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1830년(순조 30)에 소실된 후 그해 가을에 다시 지었다. 숭문당 내부에는 일감재자(日監在玆)라는 현판이 있다. 일감재자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함인정
함인정(涵仁亭)의 ‘함인’은 ‘인에 흠뻑 젖는다’라는 뜻으로, 이곳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곳이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33년(인조 11)에 정자의 형태로 지었다. 함인정은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 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그대로 나와 있어, 이곳에서 공연 등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함인정의 전신인 인양전도 이러한 용도로 쓰였던 기록이 보인다. 함인정 내부의 사면에는 사계절을 노래한 중국 진나라 화가 고개지의 사시(四時)라는 시가 걸려있어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정자에 운치를 더해준다.
환경전
환경전(歡慶殿)의 ‘환경’은 ‘기쁘고 경사스럽다’라는 뜻으로, 왕이나 왕세자가 생활하던 내전 건물로 보인다. 환경전은 창경궁이 창건될 때 지어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이곳에서 중종과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환경전 내부
경춘전
경춘전(景春殿)의 ‘경춘’은 '햇볕 따뜻한 봄'이라는 뜻이다. 처음 1483년(성종 15) 성종이 어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었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인현왕후 민씨(숙종 두 번째 왕비), 헌경황후 홍씨(혜경궁, 정조의 어머니)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왕세자빈의 생활 공간으로도 많이 사용한 듯하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탄생전(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경춘전
경춘전 내부
통명전
통명전(通明殿)의 ‘통명’은 ‘통달하여 밝다’라는 뜻으로, 왕비의 침전이며 내전 중 가장 으뜸이 되는 건물이다. 통명전은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다. 통명전 서쪽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다.
통명전 내부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영조 33)에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여 열천(冽泉)이라 하였다. 통명전 서쪽의 연지는 샘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1485년(성종 16)만들었다. 통명전은 창경궁에 남아 있는 전각 중에서 용마루가 없는 유일한 건물이며,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양화당
양화당(養和堂)의 ‘양화’는 ‘조화로움을 기른다’라는 뜻으로, 통명전과 함께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머무르기도 하였으나,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황후 김씨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화재로 소실된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양화당 내부
영춘헌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은 창경궁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한 건물로 보인다.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고,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영춘헌의 ‘영춘’은 ‘봄을 맞는다’라는 뜻이고, 집복헌의 ‘집복’은 ‘복을 모은다’라는 뜻이다. 두 건물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30년(순조 30)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다.
집복헌
영춘헌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자주 머물렀던 곳으로 독서실 겸 집무실로 사용하였고, 1800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집복헌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풍기대
풍기대(風旗臺)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재는 깃발을 세운 받침대이다. 이 풍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전체 높이는 228cm로 아래에 상을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8각형 모양의 돌기둥을 세운 모습이다. 8각 기둥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그 아래 기둥 옆으로는 물이 고이지 않게 구멍을 뚫었다. 깃대의 길이는 확실하지 않으나, 깃대 끝에 좁고 긴 깃발을 달아 그것이 날리는 방향으로 바람의 방향을 재고 흔들리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잴 수 있었다.
이 풍기대는 1770년(영조 46)에 측우기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 창덕궁 통제문 안에 설치되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풍기대는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성종 태실비
성종 태실비(成宗 胎室碑)는 조선 9대 성종의 태를 묻은 태실의 비석을 말한다. 태실은 아기의 태(탯줄과 태반)를 묻은 석실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 명산에 묻고 비석과 석물을 갖추었다. 이는 아기의 건강뿐 아니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8년 이후 전국에 있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겼고, 이 과정에서 경기도 광주에 있던 성종의 태실 석물과 비석을 이곳에 옮겨놓았다.
춘당지
춘당지(春塘池)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원래는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본래의 춘당지 앞쪽 큰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내농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왕이 직접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유원지로 만들었다. 이후 1986년 창경궁 복원 때 춘당지 가운데에 섬을 조성하여 우리나라 전통양식에 가깝게 다시 조성하였다.
춘당지 팔각칠층석탑
팔각칠층석탑(八角七層石塔)은 춘당지 옆에 세운 탑으로 8각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이다. 1층 몸돌에는 탑을 세운 때가 새겨져 있어, 1470년(성종 1)에 이 탑을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팔각칠층석탑은 199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온실
대온실(大溫室)은 1909년(융희 3)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온실 내부
관덕정
관덕정(觀德亭)은 1642년(인조 20)에 활을 쏘기 위한 사정(射亭)으로 지어 그 이름을 취미정(翠微亭)이라 불렀다. 이후 1664년(현종 5)에 이름을 관덕정으로 바꾸었다. 관덕정 아래에는 군사들이 활쏘기나 말타기 연습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많이 변형되어 지금의 모습은 1980년대 창경궁 복원 사업 때 복원한 것이다.
월근문
월근문(月覲門)의 ‘월근’은 ‘매달 뵙는다’라는 뜻으로, 이 문은 정조가 아버지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을 가기 위해 1779년(정조 3)에 지은 문이다. 정조가 매달 초하루 경모궁에 제사를 지내러 갈 때 반드시 이 문을 지나갔기 때문에 이름을 월근문(月覲門)이라 지었다고 한다.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 https://royal.khs.go.kr/ROYAL/contents/R707000000.do?schGroupCode=cgg&schGroupCodeNm=%EC%B0%BD%EA%B2%BD%EA%B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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