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를 찾아서
3. 조선 고고학 (8) 고선박 마도 4호선 본문
마도 4호선은 나주(영산포)에 거둬둔 전라도 세곡 및 특산물을 서울의 광흥창으로 옮기는 ‘조운선’이었습니다.
이 조운선은 1403~1413년 이후 15세기 초 사이에 마도 해역에서 침몰했을 것입니다.
■ 조선시대 세금 운반선의 비밀
마도 1·2·3호선에 비해 조명받지 못한 마도 4호선에는 매우 중요한 코드가 숨겨져 있다.
‘마도 4호선’은 마도 해역의 확장 조사 중에 확인된 ‘조선시대 조운선’이다. 선체 내부에서 분청사기 150여 점 확인됐다. 제작기법이나 문양 등으로 보아 15세기 초의 작품으로 판단됐다.
그 중에는 구체적인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 유물이 보였다. 우선 ‘내섬(內贍)’명 사기가 3점 눈에 띄었다.
1403년(태종 3) 6월 29일 설치된 ‘내섬(시)’은 궁궐의 물품을 관리하는 호조 산하의 관청이다. 그런데 10년 후인 <태종실록> 1413년 7월16일자는 “전라도 관찰사에게 해마다 사기그릇을 진상하도록 명했다”고 기록했다.
또 출토된 63점의 목간 중에는 ‘나주(羅州) 광흥창(廣興倉)’명 목간이 도드라졌다. 나주에는 전라도 27개 고을에서 거둔 조세를 보관하던 ‘영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흥창은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던 서울의 중앙관청이었다.
마도 4호선에서는 상당량의 벼와 보리, 새끼줄에 묶인 숫돌 15개가 다발상태로 확인됐다. 숫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전라도 나주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마도 4호선은 나주(영산포)에 거둬둔 전라도 세곡 및 특산물을 서울의 광흥창으로 옮기는 ‘조운선’이었던 것이다.
이 조운선은 1403~1413년 이후 15세기 초 사이에 마도 해역에서 침몰했을 것이다.
태안 앞바다에서 확인된 마도 4호선. 처음에는 고려시대 선박인줄 알았지만 조사결과 15세기초 세금으로 거둔 곡식과 특산물을 서울로 실어나르는 조운선으로 확인됐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태안 앞바다에서 빈발했던 침몰사고
어떤 해난사고였을까. <태종실록>에는 “전라도 조운선이 여러척 침몰했다”(1404년 7월3일)는 기사와 “전라도 조운선이 바람을 만나 침몰해서 6명이 사망했다”(1412년 10월11일)는 기록이 잇달아 등장한다.
또 1414년(태종 14) 8월4일에는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전라도 조운선 66척이 태풍으로 파선, 200여명이 익사하고 미두 5800여석이 침몰됐다”(<태종실록>)는 것이다. 당초 태종은 “태풍이 빈발하는 7~8월에는 조운선을 띄우지 말라”는 교지를 내린 바 있다.
그런데 이 영을 따르지 않아 이와같은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인재(人災)였다. <태종실록>은 “반드시 안흥량(태안 앞바다)를 통과해야 하는 전라도 조운선은 늘 위험에 노출된다”고 지적했다.
마도 4호선에서 출수된 ‘내섬’명 분청사기와 ‘나주 광흥창’명 목간. 마도 4호선은 15세기초 궁중의 물품을 관장하는 내섬시의 주도 아래 나주(영산창)에서 서울의 광흥창으로 세금으로 거둔 곡식과 공물을 싣고가는 조운선이었음을 증거해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세종실록> 1448년 4월6일자는 “전라도 조운선 1척이 안흥량(태안 앞바다)에서 전복됐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문종실록> 1451년 5월26일자는 “영산성(나주)에서 출발한 조운선이 안흥량에서 풍랑에 휩쓸려 7척이 표몰(漂沒)하고, 4척은 실종됐고, 선원들은 겨우 생존했다”고 전했다.
<세조실록> 1455년 9월10일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안흥량에서 파손되어 침몰했거나 실종됐다”(<세조실록>)고 했다.
1395~1455년 사이 안흥량에서 발생한 해난사고의 통계를 보면
파선 및 침몰된 선박이 200여척,
인명피해 1200명,
미곡손실 1만5800석 이상이었다.
이 중 전라도 조운선인 마도 4호선의 침몰사고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려와 조선선원들이 선상에서 쓴 식기들. 출수된 숟가락과 젓가락 수를 세어보면 배에 탔던 선원들의 수를 추정할 수 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숟가락·젓가락으로 추정한 선원수
마도 4호선 출토 유물 가운데 선상생활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127점 확인됐다.
금속유물은 철제솥과 솥뚜껑, 청동숟가락 1점이 나왔다.
나무젓가락 38점과 함께 참빗과 목제빗, 뜰채, 그리고 수선용 바늘형 목제품 등 목제유물도 다수 확인됐다.
초립, 짚신 등도 나왔다. 선원들의 땀내가 물씬 풍기는 생활용품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난파선에서 출토되는 숟가락과 젓가락은 배에 탑승한 인원들의 숫자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고려시대 선박인 마도 1·2·3호선에서 확인된 청동숟가락은 13점(1호선)과 12점(2호선), 9점(3호선)이었다.
마도 1호선에서 출토된 철제솥과 시루. 9ℓ들이 철세솥은 요즘 사람 기준으로 45인분의 밥을 해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시루도 확인됐다. 솥과 시루가 한 세트가 되어 밥을 쪄서 먹었음을 시사해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침몰과정에서의 유실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15점은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선박의 승선인원은 10~15명 사이였을 것이다. 반면 조선전기의 선박인 마도 4호선에서 청동숟가락 1점, 나무젓가락 38점이 확인되었다.
탑승인원은 19~20명 정도로 계산할 수 있다. 19세기 전라도 조세책임자였던 조희백(1825~1900)의 항해일기인 <을해조행록>은 “12척에 승선원 인원이 228명”이라 전했다. 1척당 평균 19명이 탔다는 얘기다.
화물선에 탑승하는 인원은 고려시대엔 10~15명, 조선시대엔 19~2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국힙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밥심으로 버틴 대식가
그렇다면 뱃사람들은 숙식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조운선이든 식량 및 청자운반선이든 기본적으로 화물적재가 우선이었다. 따라서 선창 안은 태반이 화물을 적재하거나 선상용 생활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승선자들은 주로 선박의 상부 갑판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을 것이다. 뱃사람들은 좁고 흔들리는 선체에서 힘들게 불을 피우며, 선체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조심조심 음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십이동파도선이나 안좌선, 마도1·2·3·4호선에서는 뱃사람들의 취사공간에서 화덕으로 사용한 돌들이 그을린 채 발견됐다. 또 마도 1·4호선에서는 땔감으로 사용된 솔방울과 불에 탄 나뭇가지가 나왔다.
난파선에서는 주로 화덕 주변에서 철제솥과 시루 등이 발견된다. 밥을 쪄먹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리가 달린 솥으로는 국이나 찌개, 반찬을 조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선도본>(조선 후기 조운선과 군선을 그린 도본)에 나타난 조운선. 선수(뱃머리)가 선미보다 넓고 깊이가 깊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의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배의 구조를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선박사고의 위험성도 커졌으리라.|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또하나 선원들은 대식가였다. 오늘날의 밥솥은 대체로 1ℓ에 5인분(0.2ℓ=1인분)정도이다. 반면 마도1호선에서 인양된 시루의 용량은 대략 9ℓ 가량이나 되었다. 지금 용량이라면 약 45인분에 해당하는 밥을 한 번에 지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어른이 하루에 두번, 한 끼에 7홉(1홉=0.18ℓ)을 먹는다”(<오주연문장전산고>)는 기록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하루에 현대인들의 4배 가량 많이 먹은 대식가였다. 달리 말하면 ‘밥심’으로 버텼다는 이야기다.
선체에서 확인된 각종 육식류로 선원들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마도 2·3호선의 경우 돼지·사슴·개·고라니·오리·닭뼈들이 다수 확인됐다. 이들 뼈에서는 절단의 흔적이 관찰되고 있다. 식료품으로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1795년(정조 19)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의 ‘권수 도설’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거북선 찾기는 수중고고학의 숙원사업
또하나 한국 수중고고학의 ‘꿈의 숙원사업’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선 수군의 돌격선인 거북선을 발견하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50여 년 간 끈질기에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한 거북선이 3~5척 정도로 알려져 있으니 그것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만약 남해 바다 어디엔가 묻혀있을 수 있는 거북선을 찾는다면 이것은 희대의 ‘발굴유물’이 될 것이다.
요즘 지형변화에 따라 갯벌에서 심심찮게 고선박이 발견된다니 한번 기대해보면 어떨까. 독자여러분도 여름 휴가철에 남해 앞바다의 갯벌을 찾아가 보시길….(이 기사를 위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양순석 유물과학팀장, 이규훈 수중발굴과장, 신종국 전시교육과장, 박상준 수중발굴과 학예연구사가 도움말 및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자료출처>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62005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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