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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46) '임나일본부'설을 받아들인 계몽 사학/ 식민사학, 남인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 위에 서다/ 식민사학, 물적 증거까지 위조하여 낙랑군 재평양설 완성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46) '임나일본부'설을 받아들인 계몽 사학/ 식민사학, 남인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 위에 서다/ 식민사학, 물적 증거까지 위조하여 낙랑군 재평양설 완성

대야발 2025. 4. 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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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학에서는 중국에 대해서는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일본인이 쓴 역사책(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朝鮮史》(1892))의 영향을 받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계몽사학자들은 반청독립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쓴 교과서들은 조선시기 전 기간에 걸쳐 유지되던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청독립 정신은 청의 정치적 간섭에서 독립한다는 정당성은 있었으나 많은 부분은 일본의 부추김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일본으로의 예속’으로 연결되었다. 유교사학에서는 탈피도 못한 채 오히려 친일화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논리를 자발적으로 조선인에게 교육하는 역할을 하는 형편이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0) '임나일본부'설을 받아들인 계몽 사학

K스피릿 입력 2022.06.25 20:28 업데이트 2022.06.25 20:29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1876년 병자수호조약에 의한 개항 이후 외세의 침투로 민족적 자존에 대한 위협이 심화되었다. 외세의 충격에 대한 대응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의병투쟁과 민중계몽・실력배양의 자강(自强)운동으로 나타났다. 자강운동은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한 일이었고, 이는 반청 자주독립의 민족사 연구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구한말 역사학은 주로 교육・계몽 운동에 종사하던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편찬된 교과서 형식 사서들은 학부(學部) 관리로 봉직한 중인층이 주도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국사 과목이 공교육과정에 들어갔고, 학부 편집국에서 관・공립학교 국사 교재로 《조선역사(朝鮮歷史)》(1895)를 편찬한 이래 1910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20여 종의 국사 교과서가 간행되어 교재로 이용되었다.

 

 

당시 사서편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 중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이는 김택영, 현채, 장지연으로 이들은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계몽사상가이자 대표적인 역사학자들로서 학부 교과서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역사인식은 당시 학부(정부)의 역사인식을 반영할 뿐 아니라 독립협회와 구국계몽운동가들의 역사인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유교사학에서는 우리 역사를 중화사(中華史)의 일부 혹은 그 부용(附庸)으로 취급하였다. 16세기 대표적인 아동용 교재이자 18세기에도 향촌 서당의 필수서로 천자문에 이어서 반드시 학습하던 《동몽선습(童蒙先習)》(1543)은 삼황오제~명나라에 이르는 역사를 서술한 뒤에 단군~조선의 역사를 붙여 놓았다. 철저한 존화·사대(尊華·事大)의식을 아동들에게 주입시켰던 《동몽선습》은 단군에게는 평어를 쓰고 주나라 무왕(武王)과 기자에게는 존칭어를 썼다. 심지어 한무제 침략군이, 역사 정통을 잇고 있었다고 본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사건 서술에도 ʻ漢武帝伊討滅之爲時古(하시고)ʼ라 하여 존칭어를 쓰고 있었다.

 

 

계몽사학자들은 우리 역사를 개별 민족사로 다루어 반청독립을 주장하고 중화주의 유교사학에서 탈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의명분에 입각한 정통론을 따르는 등 유교사학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계몽사학의 상고・고대사 인식은 유교사학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대체로 역사의 시작은 당요 무진년에 조선을 건국한 단군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남인 실학자들의 주장을 이어 ‘단군의 사적은 허황되고 사실과 어긋나 믿기 어렵다’며 단군을 부정한 인식도 있었다. 김택영은 "고기에 많은 괴이하고 헛된 말을 《삼국사기》, 《동국통감》, 《여지승람》 이하에 왕왕 실었으니, 어찌 다 없애버리지 않았는가’ 하고 탄식도 하고 있다.(“東史古記 後世君子不甚信之 以其中多怪誕語...豈非以其事不爲盡無耶”, 《역사집략(歷史輯略)》)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린 것은 단군이 아닌 기자시대라는 인식도 유교사학과 다르지 않았다. 독립협회의 대표적인 사서인 《대동역사(大東歷史)》(1905)는 단군을 성군으로 보고 단군의 치적을 다루고 있으며, 제천 기록과 함께 도산회의에 태자 부루를 보냈다는 기록에는 조(朝:알현)가 아닌 여(如:가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사대주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기자가 중국인 5천 명을 이끌고 와서 문화를 크게 일으켰다고 하여 기자를 문화의 중심으로 보는 《동국통감》이래 중화주의 유교사학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음도 보여주었다.

 

 

역사 정통의 계승은 조선전기 관점인 ‘단군기자사군삼한삼국’이라는 인식과 조선후기 삼한정통론으로 ‘단군기자삼한(마한)신라’로 이어진다는 인식, 남인 실학자들 주장을 이어받아 단군을 부정하고 ‘기자마한신라’로 정통이 계승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에 낙랑군 ‘재요동설’ 흐름도 있었으나, 계몽사학자들은 모두 조선 유학자들의 통설이었던 ‘재평양설’을 선택하였다.

 

 

계몽사학에서는 중국에 대해서는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나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는 일본인이 쓴 역사책(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朝鮮史》(1892))의 영향을 받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계몽사학자들은 반청독립을 주장하였으나, 그들이 쓴 교과서들은 조선시기 전 기간에 걸쳐 유지되던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청독립 정신은 청의 정치적 간섭에서 독립한다는 정당성은 있었으나 많은 부분은 일본의 부추김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일본으로의 예속’으로 연결되었다. 유교사학에서는 탈피도 못한 채 오히려 친일화되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논리를 자발적으로 조선인에게 교육하는 역할을 하는 형편이었다.

 

 

김택영은 단군은 황당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신공황후 삼한정벌설・임나일본부설은 수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고대 역사는 주(周)의 제후국에서 시작되어 삼국시대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은 식민지 역사가 되고 말았다. 김택영은 우리 역사학에서 최초로 식민사학을 수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채는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을 주장하였으나 신라인들은 본래 진(秦)・한(漢)의 유민(遺民)이라고 설명하고, 임나일본부설을 수용하며,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것이 아니라 속말말갈이라 하여 식민사관을 인정하였다. 이는 일본의 역사학에 굴종하고 있었던 당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을사조약을 비판하면서 계몽・자강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장지연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증보한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1903)에서 고령에서 포상팔국까지의 대가야를 임나라고 인정하여 정약용이 거론하지 않았던 임나일본부를 추가하면서 수용하였다. 1915년에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업적을 과시하여 선전 도구로 삼으려는 조선총독부의 조선물산공진회를 찬동하는 글을 쓰기도 하는 등 일제 침략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계몽사학은 서양 근대사학을 받아들인 일본 황국사관 영향을 받아 반청독립을 주장하며 중화주의 유교사학에서 탈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세 유교사학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신공황후의 신라정벌과 임나일본부 인정, 단군과 일본 삼신(三神)의 하나인 스사노오 노미코토(素盞嗚尊)를 형제로 보는 등 일본 황국사관에 오염되어 매국의 성향까지 띤 식민사학으로의 길을 열었다.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계몽사학자들은 사대주의 유교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친일화되어 유교사학과 식민사학을 이어주는 접합 고리로서 ʻ친일사학ʼ의 역할을 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끝난 것이다.(1)

 

 

 

 

조선 역사를 타율성・정체성・당파성으로 설명하면서 근대화의 내적 동기는 부정되었고 당연히 외부 조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이런 논리는 식민사학자들이 식민사관으로 연구한 조선 역사에 근거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남인 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 중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과 기자로부터 시작한 역사, 낙랑군 재평양설은 타율성론의 한 축으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남인실학자들이 단군을 폄훼하고 부정하자 이를 고스란히 계승한 식민사학은 거기에 더해 식민지로부터 시작한 한국사를 ‘조작’했다. 남인실학자들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겠으나 우리 상고・고대사를 유교사학 중에서도 가장 퇴행적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상고・고대사가 식민사학 이데올로기에 의해 식민지에서 시작한 역사로 변개된 것이다.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1) 식민사학, 남인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 위에 서다

K스피릿 입력 2022.07.02 08:12

기자명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존왕(尊王)을 명분으로 감행한 군사정변을 통해 성립된 메이지정권 최상위 권력집단은 군권을 장악한 메이지군벌이었다. 군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명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조선과 관련된 역사적 논의는 반드시 목적의식적이고 일관된 서술이 필요했다.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주도하고 관변학자들이 부역한 군국주의적 역사관(식민사관)에 입각한 ‘식민사학’이 형성되었다.

 

 

식민사학 논리의 핵심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일제 침략이 아닌 한국사의 역사적 귀결이라고 바라보는 데 있었다. 바로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등이 그것이다.

 

 

타율성론은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가 주도한 만선사관(滿鮮史觀)으로 구체화되었다. 만선사관은 만주와 조선을 하나의 역사단위로 묶어 바라보는 것이다. 조선을 구성한 민족의 대부분은 만주 지방에서 연원하는데, 정체되어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는 조선 역사는 늘 외부 자극에 의해 변화하였으며 그 자극은 대부분 대륙인 만주에서 연원한다는 것이다.

 

 

식민사학에서 주장하는 타율성론의 다른 한 축은 임나일본부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369년에 아마토 왜가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562년까지 통치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반도 남부의 가야가 임나라는 ‘임나=가야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정한론(征韓論)의 바탕이 되는 주장인데,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1882년 《임나고고(任那稿考)》 및 《임나명고(任那名考)》를 간행한 이후 퍼지기 시작하였다.

 

 

식민사학은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 기자로부터 시작하는 역사, 낙랑군 재평양설이라는 남인 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을 계승한 위에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하여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을 완성하였다.

 

 

정체성론은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가 한국을 여행하고 쓴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1904)에서 주장하였다. 한국사는 일본과는 달리 서양과 같은 봉건제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10세기 정도 역사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이 식민지화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선 역사를 통해서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당파성론은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가 「한국정쟁지」(1907)에서 주장하였다. 조선 정치인들이 개인적인 이득과 권력 독점을 위해 당(黨)을 이루어 정쟁(政爭)을 일삼았으며, 지속적인 정쟁으로 조선 역사는 혼란스러워지고 백성들의 삶도 곤궁해졌다는 주장이다.

 

 

조선 역사를 타율성・정체성・당파성으로 설명하면서 근대화의 내적 동기는 부정되었고 당연히 외부 조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연결되었다. 이런 논리는 식민사학자들이 식민사관으로 연구한 조선 역사에 근거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남인 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 중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과 기자로부터 시작한 역사, 낙랑군 재평양설은 타율성론의 한 축으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본고에서는 식민사학의 여러 사안을 다 살펴보기 보다는 남인 실학자와 식민사학이 타율성론으로 연결되는 부분만 다루고자 한다.

 

 

*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론 계승과 ‘기자조선=중국 식민지’ 인식

 

 

대일항쟁기 식민사학의 한국 고대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관점은 단군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중국의 북부 지배, 일본의 남부 지배를 주장하였다. 중국이 한반도 북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단군조선 부정과 더불어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인 기자로부터 서술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단군신화는 만들어진 신화이며 따라서 단군왕검은 허구’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단군왕검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사실을 학술적으로 부정한 일본인 학자는 나카 미치요(那珂通世)가 효시였다. (나카 미치요는 일본 동양사학 개척자이자 일본 고대사 연구가. ‘脫亞論’과 제국주의를 일본 근대화의 전형으로 제시한 메이지 시대의 계몽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문하생이다.)

 

 

나카 미치요는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1894)에서 “단군의 이름을 왕검(王儉)이라고 한 것은 평양의 옛 명칭인 왕험(王險)의 험(險)자를 사람 인(人) 변(邊)으로 바꾼 것이다. 이 전설은 불교가 동쪽으로 흘러들어 온 이후에 승려가 날조하여 나온 망탄(妄誕)”이라고 하였다. ‘지명인 왕험에서 왕검이란 이름을 꾸며내었다’고 기록한 정약용・한진서의 주장과 ‘단군에 대한 일은 모두 터무니 없고 근거가 없는데 승려들의 기록이 정사에 기록되었다’는 안정복・한치윤의 주장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시라토리 구라키치는 만주가 한반도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 역사가 만주사의 일부라고 하여 만주사에 대한 종속을 강조하는 ‘만선사관’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로, 나카 미치요의 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이다)는 「단군고(檀君考)」(1894)에서 단군은 조선의 조상이 아니라 고구려 한 나라의 조상으로 고구려에 불법이 흥륭(興隆)한 장수왕대 이후 단군 전설이 생겼다고 하였다.

 

 

단군이 강림했다는 태백산을 평안도에 있는 묘향산으로 비정한 《동국여지승람》을 근거로 들어, “단군전설은 승려의 허구로 태백산에 향목이 많이 나므로 이를 인도 마라야산에 비기고 그 향목을 우두전단(牛頭栴檀:단향목)의 종류로 보고 그 나무 아래 내려온 인연으로 단군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라며 “단군의 일은 모두 불설(佛說)의 우두전단에 근거한 가공의 이야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남인 실학자들의 주장을 계승한 나카 미치요의 단상을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그 창작연대 시기까지 구체화한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선도사서와 불교사서에 함께 기록되어 전하는 환웅사화를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단군왕검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였다. 가장 이른 시기의 불교 전래 기록이 소수림왕 2년(372년) 전진(前秦)의 순도(順道)가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했다는 것이니 4세기 이후에야 단군왕검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웅사화의 내용이 서기전 2세기 무렵에 이미 전승되고 있었음은 실물 자료로도 확인된다. 부여문화권이던 요령성 평강(平崗) 지구(현 요령성 철령시 서풍현 평강진 일대)에서 ʻ금도금 청동 패식(牌飾)ʼ이 출토되었는데, 매로 상징되는 천손족 환웅이 순종하는 곰족과 버티는 범족을 두 날개로 포용하는 형상이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단군설화에 대하여」(1910)에서 “이미 정약용씨도 설명한 것처럼 ‘험(險)을 검(儉)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는 너무 심한 천착(穿鑿: 억지로 이치에 닿지 아니한 말을 함)’일 것이요...요컨대 지명의 왕험이 선인 이름의 왕검이 되었다.”고 하며, 고려 중기에 “단군이란 존칭을 붙여 단군왕검이라 하여 조선 창시의 신인(神人)이라고 한 것”이라고 단군왕검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였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4년 용강현 점제현비를 발견하고 한사군 낙랑군의 古碑라고 주장하였다. 정인보, 손보기, 북한학계 등은 점제현비가 조작된 것이라는 문제제기를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아동용 국사교과서인 《심상소학국사 보충교재 아동용》(1920)에 대한 교사용지도서에 해당하는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1》(1922)에서 “단군 개국 전설은 고려 중기까지 아직 조선인들 사이에 행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며 그 다소라도 행하게 됨은 삼국유사 시대 이후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단군에 대한 공식적인 단안(斷案)을 내렸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을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뼈아픈 지적도 빠뜨리지 않았다.

 

 

정사(正史)에 기재되었음으로써 단군은 기자에 앞서 조선 개국의 국조인 것처럼 간주됨이 많게 되었다. 그런데 이조 시대의 유명한 학자로 당시 전설이 망탄불계(妄誕不稽)하여 족히 믿지 못할 것임과 또 해당 전설이 승려의 손으로 날조된 것임을 논한 자가 적지 않으며, 최근 일본에 있는 학자의 연구 또한 다 동일한 결과를 보였다. 그래서 본서는 해당 전설을 취하지 않고 참고로 이곳에 덧붙여 적는다.

 

 

‘일본인 학자뿐만 아니라 조선의 유명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동일하여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입장이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천손의식에 바탕 한 ‘고대의 역사경험’을 기록하고 전달한 고기류(古記類)를 불신하고 그 내용을 대부분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았던 결과물인 것이다. 남인 실학자들의 단군왕검에 대한 인식을 조선총독부가 고스란히 계승한 결과는 한국 상고・고대사의 철저한 왜곡이었다.

 

 

남인 실학자들의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론을 계승한 식민사학자들은 ‘중국인’ 기자와 위만에 주목하여 한국사를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하는 역사로 변개하였다.

 

 

단군의 일을 승려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일로 본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삼국 이전의 한반도는 “기자의 조선과 위씨의 조선이 있었고 마침내 중국 한나라 영토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이라고 칭하기보다는 중국 한나라 땅의 일부분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역시 단군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고 전국시대 이래 중국 이주민이 세운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은 거의 독립된 국가였으나 ‘중국의 식민지’였다고 보았다. 조선반도 거주민들은 스스로 국가를 만들 능력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했고, 한족 이주민이 이주한 뒤 국가 건설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케우치 히로시는 만주철도조사부 역사조사부에서 시라토리 구라키치 지도하에 조선 및 만주 지역 연구에 종사하였다.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모두 조작・전설이며 그 속에 역사적 진실은 없다고 단정하지만, 《일본서기》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수없이 조작되어 있지만 그 속에 역사적 진실도 담겨있다는 교묘한 주장을 하였다. 이른바 신공황후의 신라정벌[親征]은 사실이 아니지만 일본 장군의 신라정벌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특이한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인식과 동일하게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도 한국고대사가 기자에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기자조선은 한족(漢族)이 세운 식민지였고, 위만조선은 기자조선을 이은 신(新)식민지였으며, 위만조선과 한나라 사이의 교섭과 전쟁은 식민지와 식민 모국(母國) 사이의 교섭・전쟁으로 인식하였다.

 

 

(이바나 이와키치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수사관으로 《조선사》 편찬의 실무책임자였다. 「진장성동단과 왕험성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를 써서 낙랑군 遂城縣을 황해도 遂安이라면서 만리장성이 수안까지 왔다고 주장했다. 이덕일은 《고려사》를 인용하여 황해도의 遂安이란 지명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1천여 년이 지난 고려 때 생긴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이나바 이와키치가 《한서》 「지리지」에 의해서 의심할 바 없다”라고 쓴 내용은 《한서》 「지리지」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배하기 위한 논리로서 ‘조선은 고대로부터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지배를, 남부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는데, 단군을 지움으로써 보다 중요한 그 하나가 완성되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완성된 식민사학 총결산이라고 할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제1편 제3권(지나사료(支那史料))에서도 고조선 항목에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등 기자 관련 부분을 게재하여, 조선사편수회 기준에서 고조선을 기자조선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을 부정하자 한국고대사는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변개되었고 결국, 중국의 식민지로부터 한민족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한 한사군은 당연히 중국 식민지였다. 식민사학자들 관점에 의해 한국고대사는 출발부터 중국인의 식민지로 시작하게 되었고, 고구려 건국 전까지 무려 1000년 이상을 중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역사로 창작되었다.

 

 

남인실학자들과 식민사학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단군왕검을 부정하고 단군조선의 문화수준을 저열하게 보았으나 남인실학자들은 중화 문명 전수자로서의 기자를 보았다. 그러나 일제 식민사학은 오로지 식민지를 개척한 중국인 기자를 보았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을 바라볼 때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 즉, 사관(史觀)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남인실학자들이 단군을 폄훼하고 부정하자 이를 고스란히 계승한 식민사학은 거기에 더해 식민지로부터 시작한 한국사를 ‘조작’했다. 남인실학자들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결과였겠으나 우리 상고・고대사를 유교사학 중에서도 가장 퇴행적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상고・고대사가 식민사학 이데올로기에 의해 식민지에서 시작한 역사로 변개된 것이다.(2)  

 

 

 

 

 

단군과 단군조선을 부정하자 한국고대사는 당연히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변개되었다. 조선 유학자들이 바라보던 교화군주 기자는, 식민사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식민지를 개척한 중국인이 되었다. 남인 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을 계승한 후 식민사관으로 바라보자 한민족의 역사는 1000년 이상을 중국 식민지에서 시작한 역사로 변개되었고, 식민사학 타율성론의 한 축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예외없이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보았다. 이는 남인 실학자들의 지리고증 연구 방법과 연구 성과를 그대로 계승한 위에 물적 증거를 위조하여 완성한 것이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2) 식민사학, 물적 증거까지 위조하여 낙랑군 재평양설 완성

K스피릿 입력 2022.07.09 10:09

기자명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식민사관을 총체적으로 완성한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하고자 했던 《조선반도사》는 ʻ제1장 漢의 군현과 설치, 1절 四郡의 건치와 그 강역ʼ으로 시작하는데, 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단군조선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한편 한국사가 1000년 이상 식민지였다는 역사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역사지리를 연구했다.

 

 

1894년에 「조선낙랑현도대방고(朝鮮樂浪玄菟帶方考)」를 발표한 나카 미치요를 시작으로 시라토리 구라키치(「한의 조선사군강역고(漢の朝鮮四郡疆域考)」(1912)), 이나바 이와키치(「진번군의 위치(眞番郡の位置)」(1914)), 이마니시 류(「진번군고(眞番郡考)」(1916)) 등이 차례로 한사군 위치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이들은 대동강 북쪽으로 보느냐 남쪽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낙랑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일대에 있었다고 보았는데, 여기에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한사군 연구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총독부에서 완성한 식민사관에서도 위만조선 도읍 왕검성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았다.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1》(1922)에서는,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진번, 현도, 낙랑, 임둔의 4군을 설치하였는데, 조선 북부에 있던 낙랑군은 후한・위・진에 이르기까지 유지되다가 미천왕 때 고구려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남인 실학자들은 광범위하게 수집한 중국 기록에 근거하여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였다. 앞서 본 것처럼 이들의 지리고증 방법은 ①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장만 하고 ②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는 부분은 원(原) 사료를 인용할 때 일부러 배제하고 ③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학자의 의견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배척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식민사학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므로 남인 실학자들의 지리고증 방법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병도의 일본인 스승들(시라토리 구라키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의 역사지리 연구는 한백겸과 안정복, 특히 정약용 같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많이 고민하였던 내용을 바탕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1910년부터 1915년까지 조선총독부 촉탁 신분으로 조선 전역의 고적(古跡)을 조사한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교수 세키노 다다시(関野貞)는 대동강 일대의 토성리 토성 등을 비롯하여 그 지역이 과거 낙랑군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유물・유적들을 발굴, 문헌 정보를 보완하는 물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문헌 연구로는 한국사의 시작이 중국세력의 지배 하에서 시작되었다는 그들의 계획을 달성할 수 없었으므로 유물을 근거로 하였다. 실증을 할 수 있는 고고학을 통한 한사군 위치 규명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후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과 유물들은 낙랑군 중심지가 평양이었음을 확인해주는 핵심적인 증거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신채호는 이러한 유물들은 최리의 낙랑국이 한과 교통할 때 수입한 기물이거나 고구려가 한과의 전쟁에서 이겨서 노획한 것들이라고 보았다. 낙랑군 유물에 관한 당 시대의 본격적인 비판은 정인보에 의해 주도되었다.

 

정인보는 이른바 ‘낙랑출토품’들에 관해 봉니(封泥) 위조품을 근거로 봉니조작설과 점제비(秥蟬碑) 발견 과정 및 내용상 문제점, 낙랑토성 출토 문자명 와당(文字銘瓦當)의 문제점 등을 제기하였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면, ʻ漢나라를 대체한 왕망은 낙랑(樂浪)을 낙선(樂鮮)으로 태수(太守)를 대윤(大尹)으로 고쳤다.

 

따라서 ʻ낙랑대윤(樂浪大尹)ʼ이란 존재하지 않는 관명(官名)인데 평양에서 4개의 ʻ낙랑대윤ʼ 봉니가 당시 발견되었던 것이다.ʼ 평양 출토 유물을 근거로 “평양이 한대(漢代) 낙랑군 치소 터였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에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에서 ʻ조작을 바로잡는 글(正誣論)ʼ을 써서 하나하나 논박하였다.

 

 

윤내현은 한사군은 서한의 유철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서한 시대에 조성된 유적은 하나도 없고 훨씬 늦은 동한 시대의 유적만 존재한다고 하여 대동강 유역의 유적은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이 아닌 동한의 광무제에 의한 낙랑유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낙랑군 유물에 대한 해방 이후의 비판은 북한학계에서 주도하였다. 대릉하를 경계로 진나라와 접경한 서쪽 경계선은 서기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변동이 없었으므로 평양은 고조선 유민의 독자적 중심지이며, 해방 이후 새로이 발굴된 2600여 개의 묘는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으로 이들은 중국의 것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무덤 양식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의 논거가 되었던 봉니와 점제현 비석에 대한 기왕의 위조설을 비석과 봉니의 성분분석을 통해 재천명하였다.

 

 

2017년 11월 〈한국고고학전국대회〉에서 ʻ위만의 왕검성은 평양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조선 종말까지 요동반도에 있었다ʼ는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다. 위만의 왕검성 자리에 낙랑군 치소인 조선현이 있었다는 그간의 역사학계 주장에 따르면, 낙랑군 조선현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결정적으로, 북한학계의 구체적인 고고학 반론에 뒤이어 세키노 다다시의 일기도 공개되었다.(문성재,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낙랑군 재평양설의 물적 증거를 제공하여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이라고 구체화시킨 세키노 다다시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모두 갖추어진 낙랑출토품류를 구입했다’는 일기가 공개되자 그 물적 증거는 위조된 것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대정 7년(1918)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씨의 소개로 중산용차 씨(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 씨를 방문,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 씨의 동료로부터 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漢代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

 

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漢代의 발굴품이 많아서, 낙랑 출토품류는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

 

 

 

이상에서 식민사학자들이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 기자로부터 시작하는 한국사, 낙랑군 재평양설이라는 남인 실학자들의 상고・고대사에 대한 역사 인식을 계승한 후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창작한 타율성론의 한 축을 살펴보았다.

 

 

나카 미치요, 이마니시 류는 ‘지명인 왕험에서 왕검이란 이름을 꾸며내었다’고 기록한 정약용・한진서의 주장을, 나카미치요, 시라토리 구라키치, 조선총독부의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1》는 ‘단군에 대한 일은 모두 터무니없고 근거가 없는데 승려들의 기록이 정사에 기록되었다’는 안정복・한치윤의 주장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단군과 단군조선을 부정하자 한국고대사는 당연히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변개되었다. 조선 유학자들이 바라보던 교화군주 기자는, 식민사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식민지를 개척한 중국인이 되었다. 남인 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을 계승한 후 식민사관으로 바라보자 한민족의 역사는 1000년 이상을 중국 식민지에서 시작한 역사로 변개되었고, 식민사학 타율성론의 한 축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예외없이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보았다. 이는 남인 실학자들의 지리고증 연구 방법과 연구 성과를 그대로 계승한 위에 물적 증거를 위조하여 완성한 것이었다.(3)

 

 

 

 

 

<자료출처>

 

 

(1)  '임나일본부'설을 받아들인 계몽 사학  - K스피릿

 

 

(2) 식민사학, 남인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 위에 서다  - K스피릿

 

 

(3) 식민사학, 물적 증거까지 위조하여 낙랑군 재평양설 완성  - K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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