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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48) 민족사학(선도사학)에 대한 ʻ국수 · 영토주의ʼ라는 마타도어/ ‘홍익사관’, 드디어 발아하다/ 선도사학의 원형 회복 과정과 ‘홍익사관’의 등장 본문

우리겨레력사와 문화/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2)

우리겨레 력사학자, 력사서 (48) 민족사학(선도사학)에 대한 ʻ국수 · 영토주의ʼ라는 마타도어/ ‘홍익사관’, 드디어 발아하다/ 선도사학의 원형 회복 과정과 ‘홍익사관’의 등장

대야발 2025. 4. 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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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사학자들은 편협한 국수주의자도 팽창적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신채호는 영토와 국권(國權)을 확장하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서의 민족주의, 즉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주장하였을 뿐이다. 신채호는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나 조선인 이주지로 생각했을지언정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만주를 고토회복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신채호의 고대사에 대한 저술에서도 만주수복론이 명시적으로 표명되어 있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20년대 아나키스트로 변신한 신채호를 주목한다면, 그의 민족주의 사상은 국수적인 자강주의의 낡은 옷을 벗고 인류공동의 국제주의적 세계관 속으로 민족의식을 흡수하여 열려진 민족주의로 승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6) 민족사학(선도사학)에 대한 ʻ국수·영토주의ʼ라는 마타도어

K스피릿 입력 2022.08.06 12:31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선도사학은 대종교와 함께 역사 무대에 다시 등장하였는데, 뜻밖에도 대종교와의 관련성이, 독립투쟁을 한 민족사학자(대종교사학자)들을 ‘제국주의적 경향을 지닌 국수주의자’라고 폄훼하는 평가로 이어지고 있어 주목된다.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라고 매도하는 인식은 손진태로부터 비롯되었다.

 

 

한영우에 의하면, 손진태는 ‘바로 이러한 (청일전쟁 이후 1920년대까지의) 구(舊)민족주의는 애국적・군국주의적・제국주의적’인 것인데 그 바탕에는 센티멘탈리즘적인 것이 깔려 있다고 보았고, 그의 신민족주의는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민족주의를 반대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근거하면 식민지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의 침략적 민족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고 ‘국수주의’라고 비판하는 논리의 ‘뿌리’는 손진태에서 비롯한 것이다.

 

 

손진태는 광복 후 신민족주의사학을 주창하면서 안재홍과 함께 신민족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신민족주의라면 민족주의의 한계가 극복되면서 변화 혹은 발전한 양태일 것이다. 그러나 손진태는 일제강점기에 단 한 번도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주의를 국수주의라고 비난하는 입장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민족보다 우선시하는 사상은 ‘민족 반역적 사상’이라는 반(反)민주주의 견해를 표명하였고, 문교부 차관으로 좌익 교원 퇴출과 학도호국단 창설 같은 반민주주의 교육 정책의 중심에 있었다.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좌우합작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신민족주의자로 평가되는 손진태는 실상은 민주주의, 민족주의, 좌우합작 등 모든 면에서 ‘신민족주의’를 설파한 안재홍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한편, 손진태의 영향을 받은 한영우는 《韓國民族主義歷史學》(1994)에서 다음과 같이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

 

① 신채호가 부여족을 민족의 주류로 부각시킨 것은...유교사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이며, 보다 더 실천적으로는 만주 수복의 당위성을 강조함으로써 팽창적 민족주의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② 이상룡이 만주족을 우리 민족으로 간주하면서 만주 중심의 역사를 국사의 주류로 부각시킨 것은, 김교헌・박은식과 마찬가지로, 만주족을 포섭하면서 그곳에 대조선국을 건설하려는 실천목표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③ 신채호는 이러한 국제정세를 한민족이 만주 쟁탈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였다.

 

④ 그(박은식)가 지향하고자 하는 것은 철저한 팽창주의요 무력주의이며 반귀족적 평등주의이다.

 

⑤ 만주 혹은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를 본국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기지로 설정하고, 나아가 만주 자체를 점차적으로 영토화하려는 원대한 계획까지도 설계하고 있었다.

 

⑥ 1910~1920년대의 민족주의가 만주 수복을 실천목표로 하여 다분히 팽창주의적・제국주의적 경향까지 띠었던 데 이유가 있었다.

 

⑦ 한말~일제초기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에 의해 믿받침되어 있어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표리관계에 있었다.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고 자기 나라에서 독립투쟁을 못하여 다른 나라로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팽창적 민족주의’로 ‘만주를 수복’하고 ‘영토화’하여 ‘대조선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1910년대의 민족사학자이자 독립투사들은 순식간에, 현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낭만적이면서도 무모한 ‘영토주의자’, ‘팽창주의자’로 전락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생존 차원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자의적으로 ‘제국주의적 경향’이라 하여 조선을 침략하여 강제 합병한 일본 제국주의와 같은 취급을 하고, 이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표리관계에 있다고까지 언급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민족주의자 비판이 어떻게 대종교와 관련이 되는지 《韓國民族主義歷史學》를 다시 살펴보자.

 

 

대종교는 본래 독립협회(獨立協會) 혹은 구국계몽운동(救國啓蒙運動)에 참여했던 호남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나아가 만주를 수복하여 대조선국(大朝鮮國)을 건설할 목적으로 창설된 종교로서,......대종교는 그 교리 자체 속에 독특한 역사인식체계를 담고 있는데, 이 역시 예부터 전해내려 온 신교적(神敎的) 역사인식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대종교는 이렇듯 극단적이고 팽창적인 민족주의운동을 위한 목적에서 중광(重光)된 민족종교이기 때문에 만주를 무대로 하여 무장투쟁과 식민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지사들은 거의 대부분 대종교의 신도가 되었다.

 

 

대종교가 ‘팽창적인 민족주의운동’을 위한 종교단체이므로 그 신도들도 ‘팽창적 민족주의자’라고 재단하고 위와 같이 민족사학자이자 독립투사인 김교헌, 박은식, 신채호, 이상룡 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종교를 팽창적 민족주의운동이라고 비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대종교가 만주수복(滿洲收復)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것은 ① 발해(渤海)를 가장 숭상하여, 《삼일신고(三一 誥)》와 같은 경전(經典)을 발해 고왕(高王)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이 지었다고 믿으며, ② 현생인류는 백두산에 출현한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의 자손으로서 이들이 구족(九族=九夷)이 되었는데, 이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중심무대라고 보며, ③ 한일합방 후에는 만주를 포교(布敎)의 중심지로 삼아 총본사(總本司)를 만주의 청파호에 두었으며(1914), ④ 고구려와 발해의 구강인(舊疆人)에게는 입교(入敎)에 있어서 여러 가지 특전(特典)을 부여하고, ⑤ 1923년(?)에 대종교가 일제의 탄압을 받아 피소(被訴)되었을 때, 그 소문(訴文)에 대종교는 만주를 탈환하여 대조선국의 건설을 계획하였다고 한 점 등을 들 수가 있다.(《韓國民族主義歷史學》)

 

 

① 발해를 숭상하여 《삼일신고》를 대야발이 지었다고 믿거나 ② 백두산을 우리 민족의 중심 무대로 보는 것이 ‘만주수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아무런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다.

 

③ 총본사를 만주로 옮긴 것은 ‘만주수복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감시・학대・불법 체포・고문・사형’ 등 일제의 탄압을 피해 교세를 확장하고, 항일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④ 만주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하는 것을 ‘만주수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근거 없는 논리적 비약이다. 포교를 하여 교세를 확장하는 것은, 지구상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라면 가지고 있는 기본 특징이다.

 

⑤ 대일항쟁기 독립투쟁의 중심이 되었던 대종교를 탄압하기 위한 일본 제국주의 검찰 기소문 내용을, 그것도 가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대종교가 만주수복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근거로 드는 것도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사학자들은 편협한 국수주의자도 팽창적 민족주의자도 아니다. 신채호는 영토와 국권(國權)을 확장하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으로서의 민족주의, 즉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저항적 민족주의’를 주장하였을 뿐이다. 신채호는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나 조선인 이주지로 생각했을지언정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만주를 고토회복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신채호의 고대사에 대한 저술에서도 만주수복론이 명시적으로 표명되어 있는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20년대 아나키스트로 변신한 신채호를 주목한다면, 그의 민족주의 사상은 국수적인 자강주의의 낡은 옷을 벗고 인류공동의 국제주의적 세계관 속으로 민족의식을 흡수하여 열려진 민족주의로 승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지금도 역사학계에서 계속되는, 민족사학을 국수주의로 매도하는 비난은, 민족사학의 원형인 선도사학이 생명을 존중하고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사관’에 기반하고 있음이 밝혀지면서 자연스럽게 힘을 잃게 될 것이다.(1)

 

 

 

 

 

1930・40년대는 일본의 대륙침략으로 한반도가 병참기지화 되고 강제수탈이 더욱 강화되어 민족모순에 더하여 계급모순까지 해결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공생을 위한 계급간의 연대, 국제적으로는 평화적인 공생을 위한 피압박민족간의 연대가 시대적 요청으로 등장하였다. 단군조선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평화・공생의 홍익인간,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도 포용하는 홍익인간사상에까지 인식의 폭이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저항적 민족주의 수준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를 인식하게 되었고, 홍익주의에 기반한 역사인식인 홍익사관이 발아되었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7) ‘홍익사관’, 드디어 발아하다

K스피릿 입력 2022.08.13 07:14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1920년대 만주에서의 무장 항일투쟁을 주도하던 대종교는 1930년대 초까지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김교헌(金敎憲)・현천묵(玄天默)・김좌진(金佐鎭)・정신(鄭信)・김혁(金赫) 등 주요 지도부들을 잃었다. 또한 다수의 지도부가 일경에 체포되어 지도부의 부재, 교세의 약화로 1930년대의 대종교 항일운동은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대륙침략을 감행하였다. 조선을 병참기지화하고 미곡을 강제 공출 하는 등 경제적 수탈은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경제적・인적 수탈과 더불어 민족말살을 획책하는 황국신민화 정책도 추진되었다.

 

 

1930년대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결합하여 노동조합운동, 농업조합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갈수록 심화되는 계급모순을 민족모순과 함께 해결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함께 풀고자 했던 안재홍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입장에서 민족적 정치투쟁을 사명으로 하는 단일정당의 매개형태로서의 신간회’ 활동 시기에도 친일파와 타협적 민족주의를 배제한 위에서 민족적 좌익 전선을 형성하여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대중과 함께 풀어가고자 하였다.

 

 

안재홍은 문제 해결의 답을 조선 고대 역사 연구에서 찾았다. 안재홍은 조선 고유의 ‘ᄇᆞᆰ’, ‘ᄇᆞㅣ어’ 사상을 고대 아시리아 문화양상과 비교하면서 조명하였고, 화백(和白:여러 사람이 다 그 의견을 ‘사리’게 한다)으로 알려진 고래(古來)의 민주적인 입법행정회의를 찾아냈는데, 이는 인류 공통의 고대사회의 역사적 단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 고유의 것이지만 세계적 보편성에 귀일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좌우합작(사회주의운동+비타협적민족주의운동)과 ‘단일’ 정당을 만들어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으로 안재홍은 고대 한민족 역사 속에서 건국이념으로 실천되었던 ‘홍익인간’을 조선 역사에서 찾아내어 「다사리」 개념으로 구체화하였다. 대중공생(大衆共生)・만민공화(萬民共和)라는 고래(古來)의 민주주의에 대한 안재홍의 「다사리」 사상은, 향유(享有) 대상을 전민족・전민중으로 확장하고 삼균주의로 그 내용을 채우면서 1945년에 신(新)민족주의, 신(新)민주주의로 개념화되어 나타났다.

 

 

안재홍은 1910년대에는 환웅과 단군을 동일시하고 역년을 축약하였다는 한계를 안고 등장했던 신시시대에 대해서도 자세히 서술하였다. 단군왕검이 아사달을 서울로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칭하기 이전부터 아사달은 ‘단군 이전의 여계(女係)시대의 혈족ㆍ씨족 등(의) 생활공동체였던 곳’이라 하였다. 《조선통사(朝鮮通史)》(1941)에서는 이를 좀더 구체화하여 6000여 년 전 환웅천왕이 삼천단부(三千團部)를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神市) 사회를 연 것이라 하였다.

 

 

단군조선 이전인 신시시대에 백두산 천평지역 신시 사회에서 한민족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안재홍의 역사인식은 선도사서인 《삼성기》나 《태백일사》에 나타나는 선도적 역사인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였다.

 

 

안재홍은 유교적 역사인식의 핵심 키워드였던 기자에 대해서는 언어학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대공(大公)을 뜻하는 ‘크치’를 한자로 표기할 때 기자(箕子)라고 적으면서 은나라 기자와 혼동이 생겼다고 보았다. 대공인 크치가 다양하게 문화를 발전시킨 업적이 중국계 이주민에게 알려진 후, 크치가 기자로 속단되면서 은나라 기자가 동이를 교화하였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중국문화에 현혹됨이 고조에 달한 고려 시기에 엉뚱하게도 기자동래설이 받아들여졌지만, 역사상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기자조선은 없었다고 하였다.

 

 

정인보는 1934년 다산(茶山) 정약용 서거 99년을 기념하는 강연에서 안재홍과 더불어 ‘조선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의 조선학은 민족적・민중적・실용적 학문인 실학(實學)으로서 맹목적으로 수용된 주자학(朱子學)을 가리키는 허학(虛學)의 대칭 개념이었다. 자심(自心:주체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외래사상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조선 역사를 조선 민족의 자심인 ‘얼(정신)’이 발현・전개되는 역사로 보았고 조선 얼의 기원과 내용을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에서 찾았다.

 

 

홍익인간 정신은 조선이 조선으로 되게 하는 근본 연원으로 5000년 역사 속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던 조선의 얼이었다. 홍익인간의 가르침은 나라를 일으켜 다스리는 법도로 오랫동안 계승되었다.(顧命世子儒留王 以道輿治(광개토왕 비문); 有玄妙之道(난랑비서))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조리가 치밀해져 홍익인간 이념을 근본으로 살을 덧붙이는데, 고유 문화가 축적되면서 생겨난 세속오계(世俗五戒)가 대표적이다. 오로지 인간을 근본으로 삼되 개인이나 집안보다는 겨레를 소중하게 여겼던 당시의 사회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이는 개인의 수행에 침잠(沈潛)하지 않고 사회적 실천을 중시여기는 선도에 대한 정인보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얼’, ‘현묘지도’로 표현된 홍익인간 정신은 우리 고유 사상이지만 외래사상과 조화를 이루는 포용성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가 본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는 것이지만 환웅에서 비롯한 홍익의 뿌리 때문에 중생구제에 더 뛰어나게 된 것이 조선불교의 핵심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정인보는 단군과 태자 부루에서 비롯된 역사의 정통은 부여로 계승된다고 보았고, 기자조선은 유학자들에 의해 단군조선의 중간에 끼워 넣어진 존재로, 날조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신채호의 학설들을 더 구체적으로 논증하였는데,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일제 식민사자들이나 그 추종자들이 제기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주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1930・40년대 선도사학은 그전 시기와는 달리 단군사화(환웅사화)에도 나타나는 ‘홍익인간’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저항적 민족주의 단계에서는 단군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정립하고 민족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여 자주독립 의지를 제고하는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 시기에는 단군조선의 역사에서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해결을 포함하여) 미래를 전망하는 지침을 찾아낼 수 있는지까지 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재홍은 만민공생의 민주주의인 홍익인간을 찾아내었고, 정인보 역시 외국의 사상・문화와도 어울리는 포용성을 지닌 홍익인간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안재홍은 다사리(화백)라는 고래의 민주주의를, 향유대상을 전민족・전민중으로 확장하고 정치・경제・문화를 균등하게 누리는 삼균주의로 내용성을 채운 후 신민주주의라 하였는데, 삼균주의는 홍익인간의 핵심 내용으로 조소앙이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이미 밝힌 것이다.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 제도의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先民이 明命한 바 首尾均平位하면 興邦保太平하리라 하였다. 이는 사회 각층 각계급의 智力과 權力과 富力의 향유를 균등하게 하며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유하라 함이니,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이 지킬 바 최고 공리임.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는 한 민족, 한 나라에 국한된 사상이 아니었다. 조소앙과 안재홍을 예로 들어본다면 그 당시에 그들은 이미 국제주의자・세계주의자였다. 조소앙은 1940년 발표한 「한국독립당 당의해석」에서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내지 세계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정치・경제・교육 세 차원에서 균등이 실천되어야 한다는 광의의 삼균론까지 거론하였다. 안재홍도 1945년에 발표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에서 신민족주의를 “나라 안에서는 민족자존의 생활협동체이고 나라 밖으로는 국제협동의 선의의 분담자로서 배타・독선의 그것과는 엄별(嚴別)된다”고 하였다.

 

 

1910・20년대에는 수행문화로서의 선도를 보지 못하고 종교로 보는 등 선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이 있었고, 일제와의 무장투쟁에 전념하여 평화・공생의 홍익주의까지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당연히 홍익주의에 기반한 홍익사관으로 역사를 바라보지는 못하였다.

 

 

1930・40년대는 일본의 대륙침략으로 한반도가 병참기지화 되고 강제수탈이 더욱 강화되어 민족모순에 더하여 계급모순까지 해결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공생을 위한 계급간의 연대, 국제적으로는 평화적인 공생을 위한 피압박민족간의 연대가 시대적 요청으로 등장하였다. 단군조선 당시 시대정신이었던 평화・공생의 홍익인간,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도 포용하는 홍익인간사상에까지 인식의 폭이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저항적 민족주의 수준에서는 보지 못하였던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를 인식하게 되었고, 홍익주의에 기반한 역사인식인 홍익사관이 발아되었다.(2)

 

 

 

 

 

연구의 진전으로 환웅천왕의 배달국이 역사 영역 안으로 들어오자 배달국을 운영하였던 사상체계인 선도사상(선도제천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대립과 갈등의 중화주의 유교사관에서 벗어나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가 발현된 역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배달국 역사 연구를 통해 홍익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자 이제 중화사관이 아닌 홍익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870여 년 이상 중화사관에 오염되었던 역사학 무대에 홍익사관이 다시금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 [기고] 선도 홍익사관의 전승 과정 연구(18) 선도사학의 원형 회복 과정과 ‘홍익사관’의 등장

K스피릿 입력 2022.08.20 10:45

기자명 소대봉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1980년대 중반 이후, 3저호황(저달러・저금리・저유가) 시기에 ‘생존’과 관련된 경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한국인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짐과 동시에 자신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찾게 되었고, 동양 사상과 명상법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급속한 서구화에 대한 반성적 시대분위기 하에서 고유의 선도수련 전통도 주목되었다. 여러 선도수련단체가 등장하면서 선도수련문화가 대중화되었다.

 

 

1980년대 이후의 선도수련문화는 선도수련을 통한 자성(自性) 개발을 중심으로 하였던 점에서 선도의 ‘성통’ 요건에 충실한 방식이었다. 선도가 변질된 민속・무속 형태, 또 근대 이후의 민족종교 형태에서 벗어나 수련법을 중심으로 하였으니 선도의 성통적 본령이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선도수련문화가 확산되면서 선도의 사회적 실천도 발현되었는데, 개천절・광복절 행사, 단군상 보급 등을 통해 홍익인간・재세이화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1990년대 단학의 홍익문화운동이 그것이다.

 

 

선도수련의 대중화와 궤를 같이하여 선도사학 연구도 진전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대중들에게 소개된 선도사서와 중국 동북지역 상고문화의 등장, 중국의 역사강역 밖에서 발견된 상고문화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동북공정은 한국 역사학계 일각에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1986년 임승국의 주해본 《환단고기》 발간은 선도사학 연구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 권으로 묶여서 소개된 선도사서에는 한민족의 철학과 사상을 담은 〈천부경〉과 〈삼일신고〉 전문이 실려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연구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저술연대, 용어사용, 교리체계, 서술 논리상의 모순 등으로 위서 시비에 걸려 있었으나, 상고・고대의 역사 뿐만 아니라, 신앙, 풍습, 정치, 경제, 예술, 철학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어 한국선도 연구에 주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1986년 김은수가 변역・해설하여 소개한 선도사서 《부도지》 역시 선도사상을 연구하는 데 주요한 자료가 되었다. 《부도지》는 한국선도의 존재론적 인식(기・화・수・토・천부(氣・火・水・土・天符))과 고유의 역사 인식(복본(復本))을 연동하여 보여주는데, 구체적인 역사 사실들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방식 대신 복본을 기준으로 전기가 될만한 사건만 선별, 사평을 붙이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1980년대 초 중국 역사 강역과는 전연 무관한 만리장성 밖 우하량유적에서 편년이 서기전 3500년까지 올라가는 ‘제단(壇), 여신묘(廟), 적석총(塚)유적 및 총에서 출토된 옥기(玉器)’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요서지역 우하량유적을 대표로 하는 홍산문화가 알려진 이후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한국학자들은 홍산문화의 성격을 단군조선 선행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단・묘・총 및 옥기’로 대표되는 홍산문화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이후 선도사학 원형회복을 위한 연구에 기폭제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중국의 동북공정은 선도사학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중국의 역사 강역과 무관한 한민족 선조들의 역사적 활동 공간에서 발견된 홍산문화를 배타적 중국문화로 독점하고 동북 3성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민족과 역사를 중국 민족과 역사에 편입시키는 역사공정은 한국학계 일각에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홍산문화는 시기나 내용 면에서 환웅사화에 등장하는 환웅 배달국의 선도제천문화 기록과 부합하였기에 한국학계 일각에서는 홍산문화를 단군조선 선행문화로 바라보는 시각이 등장하였다. 선도사학으로 나아가는 방향이었다. 중국 고고학자 소병기는 홍산문화 시기에 고국(古國)단계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중국 문헌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당연히 그 국가에 해당하는 이름도 없다. 홍산문화 시기의 고국은 선도사서에 기록된 배달국(倍達國)으로 《삼국유사》에는 신시(神市)라고 기록되었다.

 

 

한창균은 많은 성(城)과 호구(濠溝:해자)가 활발하게 축조되고, 청동주조기술이 나타나기 시작한 하가점 하층문화기(BCE 2500년~BCE 1500년) 초기에 단군왕검의 조선(朝鮮)이 건국되었는데, 서로 계승관계에 놓여 있는 홍산문화(BCE 4000년~BCE 2500년) 시기를 환웅의 신시(神市)라고 보았다. 또한, 하가점하층문화인, 비파형동검을 내놓는 하가점상층문화인, 현대 한국인 사이에 보이는 체질인류학상 특징이 서로 닮은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여 홍산문화 주체 세력이 현대 한국인의 조상임을 명확히 했다.

 

 

윤내현은 후기 신석기~동석병용기(銅石竝用期)인 홍산문화에 인류학 사회발전 단계론을 적용한 후 환웅사화와 연결시키고자 하였다. 고고학 단계와 인류학 단계를 일치시킨 위에 다시 환웅사화 내용(환인시대・환웅시대・환웅+곰녀시대・단군시대)을 결합시킨 것이다. 윤내현은 후기 신석기시대인 홍산문화 중기는 ‘고을나라(마을연맹체 사회) 단계’로 환웅사화의 ‘환웅+곰녀시대(서기전 4000년 이후)’에 해당한다고 보았고, 서기전 2500년 이후 단군왕검이 건국한 조선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환웅사화의 내용과 연관지어 설명하면서도 그 고을나라가 ‘신시’였음을 명시하지는 못하였다.

 

 

윤내현은 《고조선연구》를 통해 단군조선의 건국과 한민족형성, 단군조선의 강역과 국경, 연대와 중심지, 국가구조와 정치・경제・사회・풍속・문화・과학・대외관계 등 단군조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규명하였다. 그런데 한민족이 고조선 때 형성되었다는 윤내현의 견해는 환웅의 배달국에서 한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선도사학의 인식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중국 문헌고증과 사료비판을 통해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 낙랑군이 모두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한사군 ‘재요서설’을 주장하였다.

 

 

이후 윤내현의 연구에 반박이나 비판이 전혀 없다는 것은 한사군 위치에 대한 논쟁이 이론적으로는 마무리되었음을 뜻한다. 이제는 좀 더 정교한 지리비정과 고고학 방면으로 확인하는 절차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덕일은 윤내현, 최재석의 연구 성과에 더해 북한학계의 연구 결과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면서 주류 강단사학으로 이어진 식민사학의 타율성론을 조목조목 비판하여, 대종교사학자(선도사학자)인 신채호, 정인보의 뒤를 이었다. 또한 중화사관을 만든 공자를 이어 중화사관으로 화하족 역사를 창조한 사마천의 《사기》가 다룬 중국 역사의 시원(始原)이 실상은 배달국과 단군조선에서 개척한 역사였음을 삼가주석(三家注釋) 연구를 통해 밝혀내기도 하였다.

 

 

복기대홍산문화가 단군조선의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홍산문화 특징 가운데 하나인 돌담 축조 방식이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많이 나타나는 산성, 석성 축조 방식으로 계승되었다고 하였다. 짧은 다리가 바깥으로 뻗친 세발 질그릇과 옥기의 형태・표현 소재・제작 기술의 공통점 또한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의 계승성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박선희는 복식사를 연구하여 홍산문화가 단군조선 선행문화임을 주장하였다. 고조선시기 이후 한민족의 고유한 복식으로 자리잡은 변(弁)이나 절풍(折風)과 같은 모자는 홍산문화 시기 제의를 거행할 때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옥고(玉箍)와 절풍모양 옥장식에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홍산문화 관모의 전통과 함께 하가점하층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로 이어지는 청동장식단추는 한반도와 만주지역 대부분의 단군조선 묘장에서 나타나는 단군조선의 표지 유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신용하환웅사화에 나타나는 환웅족・웅족・호족을 한족・맥족・예족으로 바라보았다. 고(古)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한(밝)족은 태양에서 연유하는 밝음・하늘을 숭상하고, 새를 토템으로 애호하고 스스로를 천손으로 인식하였다고 한다. 신용하는 한반도에서 이주하여 홍산문화를 주도한 맥족이 서기전 3000년경 기후변동으로 남방으로 이동하여 고조선 건국에 왕비를 배출하는 부족으로 참가하여 고조선문화와 고조선문명 일부로 통합 발전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심백강은 중국 문헌과 중국 학자들의 연구에 근거하여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혔다. 홍산문화를 일군 주역이 새를 토템으로 하는 조이(鳥夷)로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백민(白民)・발인(發人)・박인(亳人)인데, 후대 중국 사가들이 맥(貊・貃・貉)으로 칭했다고 한다. 맥족은 밝달족이고 단군은 밝달임금이며, 발해만 일대 요서지역에 있던 발조선(發朝鮮)이 밝달조선으로 홍산문화를 이은 국가라고 보았다. 맥이 분파되어 예맥족이 되었는데 이는 혈통적 동질성을 표현하는 말이고, 동이(東夷)는 문화적 동질성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의 민족은 종족적으로 모두(한족(漢族)을 포함하여) 맥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았다.

 

 

이찬구는 우하량은 환웅과 웅녀가 만난 단군사화(환웅사화)의 고향으로, 홍산문화 후기에 속하는 우하량유적은 환웅의 조이족과 웅녀의 곰족이 결합해 이루어낸 신시배달국의 일부라고 보았다. 조이족과 곰족이 만나 형성한 신시의 환족(桓族)이 원(原)한국인이라고 하였다. 선도사서의 인식과 동일하다. 우하량 16지점에서 하가점하층문화가 나타나는 것은 단군조선과의 연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우하량유적이 단군조선 건국의 인적・물적 토대라고 보았다.

 

 

역사민속학 분야를 연구하는 임재해는 단군의 조선 건국 이전에 이미 상당히 발전된 문화를 누렸던 환웅의 신시가 있었다고 하였다. 5천년 전의 제단과 사당, 무덤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대규모의 우하량 제의(祭儀)문화 유적은 신정국가(神政國家)인 신시의 문화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홍산문화 시기와 일치하는 이 지역의 고대 국가체제는 신정국가인 신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홍산문화 시기를 ʻ고국ʼ으로 평가하는 중국 고고학계 주장을 인정하여, 환웅시대를 신시고국(神市古國)으로 자리매김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하문식은 돌돌림유적 연구를 통해 홍산문화와 단군조선 하가점하층문화와의 연속성을 밝혔고, 이형구는 홍산문화권을 ‘발해만문명’으로 부르면서 단군조선의 선행문화임을 밝혔다.

 

 

우실하는 요서지역의 빗살무늬토기, 옥결(玉玦), 돌무덤, 계단식 적석총, 편두(偏頭) 등은 중원 황하문명에서는 보이지 않고 한반도로 이어졌지만, 홍산문화를 동북아 공동의 시원(始原) 문명권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하였다. 홍산인들 가운데 일부 세력들은 중원지역으로 남하하여 황하문명을 주도한 세력과 만나면서 황제족으로 세력화되었다고 보았다. 홍산인의 일부 세력들은 토착세력이었던 곰토템족으로 환웅족이 이주해 오면서 단군조선의 일부인 웅녀집단으로 합류하였다고 하였다. 홍산문화 시기에 최초로 체계화된 천지인 관념, 원방각 관념, 성수 3의 관념 등도 중원 지역에서는 신선사상, 도가사상으로, 한반도 지역에서는 선도, 풍류도 등의 민족종교로 전승되었다고 보았다.

 

 

고고학 발굴 성과를 선도사서의 기록과 결합하여 선도문화로 해석・연구하는 정경희는 ‘단・묘・총(壇・廟・塚) 및 옥기(玉器)’를 표지로 하는 홍산문화를 단군조선에 선행하는 맥족(환웅족+웅족)에 의한 배달국의 ‘선도문화’로 보았다. 홍산문화의 사상・종교적 배경이 샤머니즘(巫)이 아니라 삼원오행론이라는 선도적 세계관에 기반한 선도문화였음을 밝힌 것이다. 편년이 서기전 4000년~서기전 3500년으로 보고된 통화 만발발자 적석단총(1기조단(早段))은 우하량유적과 특징을 같이 하였는데, 대략 수백 년 시차를 두고서 요서 대릉하 우하량 일대로 전파되었음도 밝혔다.

 

 

동아시아 상고문화 원류로서 배달국과 그 뒤를 이은 단군조선의 선도문화는 천손문화였는데, 이를 이끌었던 실질적 종주(宗主)는 환웅과 단군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본질인 ‘천・지・인 삼원(천부)’의 진실을 온전히 지켜나갔던 ‘천부의 전승자ㆍ스승이자 군왕’이라고 보았다.

 

 

고고학 발굴 성과는 서기전 4000년부터 요동과 요서에 걸친 맥족 배달국의 선도제천 문화권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선도사서에 기록된 배달국의 역사적 존재가 고고학으로 확인된 것이다.

 

 

연구의 진전으로 환웅천왕의 배달국이 역사 영역 안으로 들어오자 배달국을 운영하였던 사상체계인 선도사상(선도제천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대립과 갈등의 중화주의 유교사관에서 벗어나 조화・평화・공생을 속성으로 하는 홍익주의가 발현된 역사를 바라보게 되었다. 배달국 역사 연구를 통해 홍익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자 이제 중화사관이 아닌 홍익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870여 년 이상 중화사관에 오염되었던 역사학 무대에 홍익사관이 다시금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이래 한국 학자들의 홍산문화 성격에 대한 연구는 관심 분야가 각기 다르고 신시나 배달국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단군조선의 선행문화로 보는 관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개개인의 인식 여부와는 무관하게 선도사학의 원형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선도적 세계관이 바로 홍익주의였기에 선도사학이 원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홍익사관은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유사 이래 인류 역사는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었다고 인식되어 왔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인류 역사를 인식하는 전부인양 여겨졌다. 그러나 선도사서에 드러난 홍익주의에 관심을 두고 홍익사관으로 서술된 우리의 상고・고대사를 바라보면 전혀 다른 인류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침략・정복・지배의 역사가 아닌 조화・평화・공생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야만 상고・고대 유라시아 문명교류사도 올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중화사관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 역사 원형을 회복하는 것과 함께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된 21세기에 선도사학의 홍익사관이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이 큰 의미를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9년~2020년에 최종 발굴된 소남산문화 2기층 옥기묘서기전 7200년~서기전 6600년으로 편년되었다. 소남산문화 옥기문화(옥벽류(벽璧・환環・결玦))를 연구한 정경희는 선도제천문화의 옥기문화가 후기 구석기 바이칼 일대의 말타부렛문화→서기전 7000년경 이래의 오소리강 소남산문화→서기전 4000년경 이래의 배달국 백두산 천평문화와 대릉하 청구문화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또한 소남산문화의 주역은 선도제천문화를 기준으로 서술된 선도사서의 환국(桓國) 황궁족(환인족)이라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환웅천왕으로 하여금 배달국을 개창하여 홍익인간・이화세계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도록 가르쳐 지도한 환국의 환인에까지 홍익주의 지평을 넓혀야 할 시점이 도래하였다. 이제 고고학 성과를 기반으로 중국 문헌과 선도사서를 종합 연구하는 방향 전환을 통해 선도사서에 기록된 홍익주의를 연구하여 민족사상・민족문화와 더불어 상고문화를 복원하는 과제를 풀어내야 한다. 사대·모화의 중화사관, 조선총독부의 식민사관,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되고 일그러진 우리 상고·고대사를 바로잡는 오직 ʻ한 길ʼ이기 때문이다. <끝>

 

 

 

https://youtu.be/ALdDzZM7OxA

 

 

 

 

 

 

 

<자료출처>

 

 

(1) 민족사학(선도사학)에 대한 ʻ국수·영토주의ʼ라는 마타도어  - K스피릿

 

 

(2) ‘홍익사관’, 드디어 발아하다  - K스피릿

 

 

(3) 선도사학의 원형 회복 과정과 ‘홍익사관’의 등장  - K스피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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